어떻게 피할 길을 주실까요? (행 5:33-42)
이 시간 “어떻게 피할 길을 주실까요?”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살이는 겨울날씨와도 같아서 세상을 살아갈 때 평탄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풍파도 있습니다. 이것을 위기라고 하지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위기의 순간들이 많습니다. 고난은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특별하게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소년들이 많았지만 특별하게 하나님을 섬긴 다니엘과 세 친구만이 특별하고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롬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섬기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우실 때 특별한 피할 길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고전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그를 위하여 탄식하시면서 간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롬8:27). 마음에 성령의 탄식과 간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항상 가까이 하여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 때 피할 길의 특별한 은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사도들도 절세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을 봅니다.
그럼, 피할 길의 은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1.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위기의 사도들에게도 이 섭리가 나타났습니다. 33절에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 새” 그랬습니다. ‘저희’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인 대다수 사두개인들을 가리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신신학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 부활을 외치자 사두개인들은 그들을 노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법에는 사형이란 불가능하고 산헤드린이 내리는 최고의 징계는 출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범법하면서까지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크게 노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크게 노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큰 시험과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시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은 섭리를 통하여 사도들을 구원하십니다. 34절에 바리새인 한 사람 일어납니다. 그 이름은 가말리엘로서 바울의 스승이기도 하고, 전통 있는 랍비인 힐렐의 직계 손자요, 유대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품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율법의 영광이 떠났고 깨끗함과 거룩이 죽었다’고 할 만큼 그의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이 가말리엘이 일어나 발언하게 된 것입니다.
왜 발언했을까요? 사도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발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즉 자기들 바리새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서로 간 교리적인 차이가 있어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고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판결이 잘못 나가면 부활을 부정하는 판례를 남길 수 있는 중차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말리엘 앞에 붙일 찬란한 수식어가 많은데도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입니다.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오묘합니다.
하나님께서 돕고자 하시면 어떤 상황을 사용하셔서라도 도우십니다.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의 길을 예비하심도 피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백 년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바다에 파도로 모래를 운반하시고 자갈을 운반하셔서 길을 탄탄하게 닦아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큰 동품을 마련하셔서 밤새토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고 물러갈 정도가 아니라 바싹 말리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위기를 당하여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의 아기스 왕의 수하에 있을 때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위해 군대를 아벡에 집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그가 이제 이스라엘과 전쟁할 수밖에 없는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그 때 기록 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 도우소서! 제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 때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의 출전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섭니다. 실재 전쟁이 시작되면 다윗이 사울의 편을 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피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서는 안 될 것이라면 무슨 일을 발생시켜서라도 피하게 하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항상 “폐하, 잘된 일입니다”라고만 말하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과 그 신하가 함께 사냥을 하러 갔는데 이 신하가 왕의 총에 실탄을 거꾸로 장전해주는 바람에 왕의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갔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말합니다. “폐하, 참 잘된 일입니다.” 왕이 화가 나서 그 신하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듬해, 왕이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식인종들이 가만히 살펴보니 왕의 손가락 하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음식은 흠이 있어 못 먹겠다.”하며 왕을 풀어줬습니다. 식인종에게 풀려난 왕이 감옥에 가서 신하에게 말합니다. “자네 덕분에 살았어. 미안하네.” 그러자 신하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폐하,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장관입니다. “폐하, 제가 감옥에 안 들어왔으면 폐하와 같이 사냥을 나갔을 것이고 저는 흠 없는 음식이 되어 저들의 밥이 됐을 것입니다.” 이 유머스런 이야기 속에도 섭리적 도우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북한 동포들과 탈북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올 2008년도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데 들리는 소문이 중국 정부가 선교사들을 색출해 추방하고 탈북자들을 색출해 추방한다고 합니다. 탈북자들이 30만 명이 되는데 그들이 북한으로 추방되면 그들은 죽든지 아니면 평생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섭리를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일으켜서라도 유엔에서라도 들고 일어나게 해서라도 피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2. 하나님께서 지혜를 통해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34-35에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얼마나 지혜로운 말입니까? 할 말을 위하여 사도들을 잠시 밖에 나가게 함이라든지, 이단자 드다와 유다의 사건을 소개하면서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면 무너뜨릴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까 두렵다는 말이든지 지혜로운 말을 봅니다. 이렇게까지 사도들을 옹호해 준 이유는 자기들의 부활의 교리가 훼손될까봐서 그런 것입니다. 이 지혜로운 발언으로 문제가 다 해결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약1:5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세요. 경험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특이한 이적보다 지혜를 통해서 응답하시는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우리에게 직접 주시든지 아니면 지혜로운 사람의 도움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각 분야의 전문가를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피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내신 길이니 사양하지 마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셔서 불의에서 구출 받게도 하시고, 어떤 때는 지혜로운 사람을 주셔서 위기 속에서 구원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한 가지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피할 길을 내십니다.
41-42절을 보세요. 사도들이 얼마나 성령 충만했는지,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했어요. 사도들은 그토록 위협을 받고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했지만 성령의 능력이 더욱 충만하여 이기고 또 이겼습니다. 이것이 능력을 주셔서 피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이 때 고난이 와도 고난인 줄 모르는 은혜가 임합니다.
오늘 같이 추운 날, 어제는 눈도 왔지만 어른들은 춥다고 방안에만 있지만 아이들은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산과 들로 다니며 즐깁니다. 추운 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것은 아이들은 추위를 이기는 낭만과 젊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힘들고 어려워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을 때 조금도 어렵지 않고 도리어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저의 조카 중에 웃음치료사가 있습니다. 웃음치료사가 무언지 아시죠? 웃음을 통해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2004년 3대 TV방송사 웃음치료 다큐멘터리 주인공이기도 할 만큼 유명한 박석종 치료사입니다. 뉴스에 조카의 인터뷰 기사가 떠서 보니까 환자가 배꼽잡고 웃었더니 한 달 만에 11개의 암 중에서 2개로 줄어들어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늘 웃으면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의 200배 이상의 효과가 있는 엔도르핀이 생성되고 암을 죽이는 자연살해(NK)세포도 증가한다고 합니다.
어린이는 하루 평균 300~6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까꿍”하기만 해도 까르르 웃고 또 웃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 성인들은 7~8회 정도 웃는다는 통계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만큼 각박하고 부정적인 현실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웃어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사는 자녀들이니 어린이처럼 하루에 최소한 600번씩은 웃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제 노년기를 위한 기도제목이 있어요. 그것은 날마다 웃고 사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몇 달 전부터 그런 기도를 시키십니다. 웃음이 흔하면 가볍다는 우리네 전통 때문에 억제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웃고 살려고 합니다. 누가 뭐래도 웃으렵니다. 황수관 박사처럼 웃길 원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세상을 이긴 능력 받은 성도들이니 얼굴 펴고 삽시다. 노년에는 침울하기 쉬운데 더욱 웃으면서 살렵니다. “웃자. 나도 웃고 산다. 무엇을 염려하느냐? 다 아버지께서 도우실 것이다. 웃고 살자." 이렇게 사람들을 다독거리며 살고 싶어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쁨으로 웃고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앞날 험악할지라도 이기고 이기며 피하고 피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기적적으로 피할 길을 내십니다.
행5:18-20에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이런 일이 또 있지요? 헤롯이 베드로를 죽이려고 옥에 가둘 때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탈옥시켰습니다. 이것이 기적적인 피할 길입니다.
안산제일교회 고훈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 부부가 목사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고목사님은 아이들이 몇이냐, 이름이 뭐냐고 질문한 후 축복기도를 해 주겠다고 했더니 부인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유는 결혼 15년차인데 지금껏 모든 의학적 노력을 동원했으나 하나님이 아이를 안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 이름을 대라니 슬퍼서 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부부에게 아이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1년 뒤 아이를 주셨습니다. 이런 기적 말고도 무수한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기적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시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이 명한 일을 감당하고 있으면 어느 무엇도 우리를 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피하게 하시는 섭리와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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