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전-계시록

삶에서 크게 승리하는 길 (행 4:1-22)

공 상희 2009. 6. 9. 15:26

    삶에서 크게 승리하는 길 (행 4:1-22)

    이 시간에는 “삶에서 크게 승리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도한 죄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장면입니다. 앉은뱅이 거지가 낫는 기적을 통해 베드로의 설교는 무려 오천 명이 예수 앞으로 돌아오는 결과가 있었습니다. 전도의 대 승리였습니다. 수효가 많아서 승리가 아니라 종교적인 신자들이 구원 받은 신자로 바꾸어졌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믿는 자가 늘어나니 즉각 엄청난 박해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끝나자 말자 성전에 있던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수없이 달려들어 사도들을 붙잡아 가두고 이스라엘 최고의 재판기관인 산헤드린에 넘겼습니다.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과 그들의 문중들까지 모였습니다. 또 다시 핍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지 불과 엊그제 같은데 또 다시 예수 이름으로 대성황을 아루게 되었으니 얼마나 민감한 사항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부활하셔서 믿는 자들 속에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일은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불과 같은 박해 속에서도 승리하고 승리하는 사도들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승리의 진리를 보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8절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랬습니다. 이 말씀에서 얼마나 성령의 은혜가 넘쳤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승리했던 베드로의 영적 상태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른 방향에서 말하면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전 날에 붙잡혀 감옥에 하룻밤을 보낼 때 온 밤을 기도로 지새웠을 것입니다. 행 12장을 보면 얼마나 철야기도 잘하는 예루살렘 교인들입니까? 온 교인들이 밤새 기도했을 것입니다. 전도하던 현장에서 잡혀가는 것을 본 오천 여명의 성도들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24절에 모여 일심으로 부르짖었던 것도 이 기도의 연장선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기서 기도의 분위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삶에서 승리하려면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신앙 가지고는 안 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면서도 많은 분들이 종교적 수준에 만족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삶의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사지가 절단 되어 오체 불만족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생각납니다. 손과 발이 없이 몸만 있으니 얼마나 힘들면 오체불만족이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입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오체불만족이 아니라 영혼과 모든 삶의 영역, 그러니까 6체 7체 8체 그 이상의 불만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도 그렇지만 평탄할 때가 더 위기입니다. 평탄할 때 주님을 더 멀리하기 쉽습니다. 고난의 때에 기도 많이 하는데 평탄의 때 더 위기감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보통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편안한 틈을 타서 근신하지 않는 사이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슬금슬금 포복 앞으로 해서 나를 잡아먹으려고 오는 것입니다. 별로 큰 일이 없는 것 같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원수들의 무서운 공작이 진행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을 일으켜서 하나님 떠날 일을 만들고 교회 떠날 일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바람 타고 살아야 승리요 형통입니다. 파도 타는 젊은이들처럼 성령에 떠밀려 사는 삶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 방법은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아직 2007년인데 지난 1월 달을 하나님께 기도로 봉헌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저는 압니다. 제게 주신 말씀도 있고 여러분과 교회에 보너스도 주시지 않았습니까? 새해에도 1월 한 달 저녁기도회를 매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수효에 집착하지 않고 1년 내내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병도 고쳐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문제도 해결 되게 하실 것입니다. 물질의 역사도 있게 하실 것입니다. 자손에게 형통도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면 우리 육신의 보너스도 잊지 않고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처럼 하루 세 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를 원합니다.

      2.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다시 8절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사도들이 더욱 은혜로 충만했다는 뜻도 되겠고, 담대하고 강했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놓쳐서는 안 될 또 한 가지는 오직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말했기 때문에 성령의 말하게 하신 따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극한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육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는 실패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 따라 행동하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 따라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교훈하셨습니까?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8-20)

      우리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 있어요. 이 말이 자신도 모르게 나오게 됩니다. 뇌성마비지만 항상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송명희 시인 아시죠? 어떤 유력한 분이 치료라도 해주고 싶어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한 줄 아세요? 그 때 송 시인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습니다. 성령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 말에 거기 있는 분들이 크게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조금이라도 낫는 것이 좋지요. 뇌성마비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런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런 가운데서 함께 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설교자들도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입니다. 성령께서 전할 말씀을 주십니다. 더 기도하고 더 많이 묵상하면 더 많이 주시고 더 풍성하게 주십니다. 준비할 때도 주시고 전할 때도 주십니다. 마치 천국의 서기관이 곳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내어오듯 준비할 때 주시고 설 때도 주십니다. 그래서 요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설교의 자유란 설교학을 통달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학문을 통달한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웅변을 잘하거나 지능이 높다고 오는 것도 아니에요. 모두 필요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만 전해야 합니다.

      사도들 보세요. 10-12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들은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 예수님만 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이야기 하는 곳에 임합니다. 모여서 성경을 말씀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신앙을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거기다 찬송하고 기도하면 더 말할 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이야기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이야기를 하면 성령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말을 하면 천사들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그러나 모여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면 은혜가 침체되기 시작합니다. 더 심해지면 세상 풍조가 지배하고 더 나가면 다투고 싸우고 상처 받는 일이 생겨납니다. 구역이나 집에서 모여 예배할 때가 가장 문제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배드릴 때까지는 좋아요. 그러나 그 후 덕담을 넘어서 세상 이야기와 비판과 불만의 장소가 될 때 사단이 춤을 추는 장소가 되고 맙니다. 특히 정치 이야기는 서로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조심해야 하지만 교회에서나 예배의 장소에서 절대로 사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꼭 해야 한다면 사랑의 덕담만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우리 집 남자들은 명절에 모이면 무슨 이야기로 시작해서 무슨 이야기로 끝납니다.” 여러분은 모이면 무슨 이야기로 끝납니까? 돈 버는 이야기입니까? 정치 이야기입니까? 혹시 남의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우리 교인들은 그것 하나는 얌전해요. 다른 교회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사나운지 몰라요. 상식 이하의 일들이 벌어집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목회자임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신앙 이야기만 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항상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배여 있는 말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이 배여 있는 말이어야 합니다. 은혜로운 덕담이어야 합니다. 결론은 전도하기 위한 말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전할까? 어떻게 해야 불신자에게 교회로 나오게 할 것인가? 신자에게는 어떻게 해서 더 깊은 신앙을 심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 충만하게 할 것인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을 심어주기 위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상처 받은 사람이나 개성이 강한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듣기 싫고 고통스러운 틀린 말을 해도 그럴 수 있겠다고 그 입장에 서서 들어주세요. 세상 말 이겨 봐야 뭐합니까? 그러면 나중에는 그 분들이 나를 인정해 주고 내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 이야기만은 항상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예수 이야기에다는 우리 생명을 걸어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 보세요. 행4:19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예수 이야기만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어도 예수, 잠을 자도 예수, 살아도 예수, 고소당해도 예수, 감옥에 가도 예수, 매를 맞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 예수님만 전했습니다. 예수만 전하다 죽거나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전도 왕 치고 다들 고난 속에서 출발했지만 해피 엔드로 나가지 않는 분은 한 분도 못 보았어요.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고구마 전도 왕 김기동 집사도 차가 뒤에서 받았는데 점심 한 끼만 사라고 하면서 전도하니까 그 사람이 감동을 받고 예수 믿을 뿐 아니라 사업을 크게 밀어주어서 사장을 넘어 회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순천에 진돗개 전도 왕 박병선 집사도 의원에 출마하고서 선거보다 전도에 더 힘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난 번 간증 때 자세한 것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슨 큰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무슨 복인지는 모르나 무슨 큰 복을 주셨답니다. 이건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예수로 충만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런데 천국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늘의 별과 같이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승리하시고 또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승리하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여 성령으로 충만하십시다. 성령님을 전적 의지하십시다.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이름을 전도하기 위해서 힘쓰십시다. 그래서 항상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충만 충만하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