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부흥 (행 9:19-31)
이 시간에 “진정한 부흥”이라는 제목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을 때마다 제 마음을 기쁘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행9:31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런 종류의 구절이 2:47에도 있고, 6:7에도 있고, 본문에도 있고 사도행전에서 단원이 바뀔 때마다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신다는 안도감과 함께, 교회란 평안할수록 좋은 것이며, 든든할수록 잘한 것이고, 주님을 경외하는 모습과 성령의 은혜가 넘칠수록 좋고, 성도들의 수효가 늘어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께 칭찬 받을 수 있는 중간보고를 드릴 수 있는 교회인가를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진정한 부흥의 모습을 봅니다.
그럼 진정한 교회 부흥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죄인도 악인도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21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교회를 핍박한 죄인 사울이 변화 되자 사람들이 믿지 못해 놀라는 모습입니다. 그만큼 사울이 악명 높았고 또 그의 변화가 놀라운 사건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처럼 진정한 부흥은 죄인도 악인도 회개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사람 많은 것도 좋지만 진정 회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 성령과 말씀 안에서 변화 되고 참된 제자 되고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까? 이런 회개가 없는 한 진정한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907년에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을 왜 부흥이라고 합니까? 사람 많이 모아서 부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웃고 울게 만들어서 부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모든 부흥운동이 다 그러합니다.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있었을 때 부흥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교인들 수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성숙입니다. 한국교회의 사회공헌도가 타종교에 비해 가장 높은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싸우도록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변화와 성숙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인 많고 큰 예배당 짓고 일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변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 되고 성숙해지면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들이 자멸한 것처럼 스스로 사라지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사울 같은 악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사울 같은 악인이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부흥은 오게 됩니다.
2. 예수만 나타나고 예수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고 했고, 22절에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이 부분에 대해서 학자들은 사울이 회개한 즉시 그랬느냐 아니면 아라비아로 갔다가 3년 후 다메섹에 돌아와서냐 하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행전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 후자가 더 호소력이 있는 주장으로 봅니다.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동안 우리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3년이란 가간은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 기간입니다. 3년 안에 많은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말씀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백지에서 시작했다기보다 이제껏 알았던 단편적인 진리들이 성령의 계시로 구슬 꿰듯 꿰이는 역사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의 진리입니다. 성경을 진실로 안다면 오직 예수가 나와야 합니다.
바울이 쓴 책은 13권의 서신과 히브리서를 포함한다면 14권입니다. 이 14권의 책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마나 귀한 말씀을 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신학적인 풍조는 이 신령한 성경관에 무관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에 갈라디아서를 보았지만 바울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를 비유로 하여 율법과 복음이라는 멋진 메시지를 끌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만이 아닙니다.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홍해의 사건, 광야의 사건 등 그런 신령한 해석을 쉽게 찾아보게 됩니다.
이런 해석은 히브리서에서 극치를 이룹니다. 그는 히브리서에서 구약의 예표적인 것들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해석합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멜기세댁을 말하면서 그가 다스리던 지역과 이름이라든지 그런 것들의 뜻풀이까지도 시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도 존중해야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무궁무진한 예수에 대한 진리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을 간증하는 글을 보니까 그 분이 천국에 가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세상에서 보고 있는 성경책은 구원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인간은 육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성경을 보는 눈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시며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품속에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려주실 영원한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이 분명하면 이단이 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천국에 들어오면 성경의 의문이 한눈에 다 풀어지게 될 것이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기도하면 깨닫게 해 줄 것이라고 하시면서 성경해석에는 자유가 있으니 함부로 입을 열어서 죄짓지 말고 성경해석을 놓고 싸우지 말라고 하시더랍니다.
즉 사도들이 보여준 것처럼 성경해석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교리적 핵심이 분명하다면 누구도 이단이 될 수 없습니다.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에서 예수만 나타내고 예수만 드러낸다면 그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말씀에서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에서 예수가 나타나고 우리의 삶에서 예수가 나타나고 예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야 그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3. 성도와 성령 안에서 진정한 사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6-27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초대교회는 아직 선입견의 작용이 컸던 것을 봅니다. 사울에 대한 선입견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계속 의심하며 경계하는 눈초리였습니다.
이 뿐 아니라 초대교회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허셨는데도 이방 복음 증거에 눈치를 보고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또 야고보가 지적했듯이 교회 안에서마저 부자들이 존중 받고 비천한 사람들은 무시 받았습니다. 항상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옳지만 떳떳하게 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개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육신적인 선입견과 편견을 빨리 버려야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같다면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성도가 성도 같고 교회가 교회 같아야 부흥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았지만 세상의 정치 경제 명예 결사 치료 이런 목적으로 모여들었지 참 진리를 선포하시거나 십자가를 지실 때는 다 떠났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다 귀한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돕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형태가 보이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 다툼과 분쟁이 있으면 안 됩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덮어주고 사랑하고 돕고 세워주고 격려해 주어야합니다. 사랑만이 진정한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같지 않은 성도 교회 같지 않은 교회가 아무리 많으면 뭐합니까? 저건 나의 교회가 아니고 저건 나의 성도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진벙한 부흥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진정한 부흥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준 진정한 부흥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악인도 변화 되고, 예수만 전하고, 예수만 나타나며, 성령 안에서 사귐과 사랑이 넘칠 수 있는 진정한 부흥의 열매가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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