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나는 길 (행 10:1-8)
이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는 제목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시73:28)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처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처럼 고통스러울 때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지만 더 가까이 만나야합니다. 렘29:13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본문의 백부장 고넬료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당시 로마의 총독부가 있던 유대의 가이사랴에 파견된 로마의 군인이었습니다. 총독 관저를 경비하는 황제 직할부대 소속으로서 백부장이면 1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린 장교입니다. 그런 이방인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경외했는지 하나님께서 지시하셔서 사도 베드로를 청해 만나게 하시고 구원과 함께 성령의 충만까지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을 높이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죄에 대해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았습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께 잘못함이 없기를 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죄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겸손하였습니다. 이 경외하는 자세가 잘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히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요일1:7에도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다고 했는데 1:3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했습니다. 빛은 선입니다. 선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들으면서 회개하고 꿈속에서라도 보여주시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과를 용서하심에는 그 어떤 것도 다 덮으시지만 우리를 성결케 하시기 위해서는 한 점의 숨긴 죄라도 드러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진실로 우리가 죄를 버릴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2. 인간관계에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2절에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인간관계가 좋습니까? 이것을 볼 때 그는 가정의 모범이 되어 가정을 잘 다스렸고 또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과 동일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눅 7장의 백부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눅7:5에 유대인들의 칭송이 나옵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그에게는 원수 된 사람도 없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를 식민지로 삼아 강압했기 때문에 로마와 유대는 원수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누구와도 원한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행10:7에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가 나오는데 하인은 ‘오이케톤’이라 하여 종을 지칭하는 둘로스가 아닙니다. 하인은 집안의 일을 맡아 하는 자유로운 신분의 일꾼입니다. 당시 로마는 지배자로서 노예가 많았습니다. 로마에는 로마인보다 노예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집에서는 종은 없고 하인만이 보입니다. 인권을 존중하는 모습입니다. 사람 차별하고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졸은 헬라어로 ‘스트라티오테스’로서 군사나 병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들까지도 경건하여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은 직장복음화 군대복음화에 얼마나 힘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회적 활동의 자유를 볼 때도 그가 상관들에게도 얼마나 인정받는 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윗사람에게 사랑 받고 아랫사람에게 존경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관계가 막히면 하나님과 사귐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원수도 없도록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용서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철야를 해서라도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엡4: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를 받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했을 때 받는 불이익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마6:14-15). 또 원수 갚는 하나님의 고유권한을 침범하는 죄가 됩니다(롬12:19). 또 원수가 잘못 되기를 바라면 그 진노가 내게 임합니다(잠 24:17-18). 또 마음에 서운한 감이 사라지지 않으면 기도가 막힙니다(잠28:9). 그리고 화목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예물을 받아주시지 않습니다(마5:23-25). 그리고 이것은 마귀에 궤계에 놀아나는 것이며(고후2:10-11; 엡4:26-27)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당합니다(롬2:9-10). 인간관계가 잘못 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아요. 성경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48:22)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라도 철저히 화목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만나려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2절). 3절에 제 9시가 나오는데 이 짧은 문구 속에 그가 하루 세 번의 기도시간을 지키고 있었음이 암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이렇게 하루 세 번의 기도시간을 가졌습니다. 고넬료는 유대인의 전통을 본받아 이 기도시간을 철저히 지켰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하루 세 번씩 기도했지요? 우리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면 다니엘이 받은 은혜 우리도 받고 고넬료가 받은 은혜 우리도 받습니다.
마틴 루터도 "만일 내가 매일 아침 두 시간씩 기도하지 않았다면 마귀가 그 때 승리하였을 것이다. 내게는 너무 할 일이 많아서 매일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서는 지낼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이렇게 루터는 하루 세 시간의 기도를 지켜나갔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려면 규칙도 중요합니다. 요한 웨슬레의 그 위대한 부흥운동도 이 신앙의 규칙을 철저히 지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인을 메도디스트(Methodist)라 하는데 규칙쟁이라는 뜻입니다. 철저히 규칙을 지켜 나갔더니 부흥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던져진다 해도, 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풀무불에 던져진다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철저한 규칙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열 가지 유익이란 글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출33:12). 2. 삶이 윤택해진다(대상4;10). 3. 진리를 깨닫게 된다(대하7:14). 4.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시107:17-20). 5. 영혼이 소성하게 된다(시119:23). 6. 죄의 유혹을 물리친다(마26:41). 7. 자기를 통제하게 된다(눅18:1). 8.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요14:13). 9. 능력을 받는다(약5:14-16). 10. 순종을 배운다(요일3:22). 이처럼 고넬료가 항상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가 하루는 제 구 시쯤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면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하게 되었고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섬겨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고넬료는 유대에 부임해 와서 유대인들의 관습은 철저히 지켰지만 예수는 몰랐습니다. 우리와는 반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는 알지만 하나님을 경외해가는 것은 지금 진행 중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최소한 고넬료 수준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예수는 몰랐어도 하나님을 경외함 만은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그랬기에 예수 이름만 전해 들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었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함만 가득하면 됩니다. 예수 믿었으니 다 된 것이다가 아닙니다. 예수 믿었으므로 이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함과 사랑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엡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경외하고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 부분 부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고넬료처럼 더 가까이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예수 잘 믿고 백부장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함과 기도와 사랑과 화목으로 어느 한 부분 막힘이 없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온전히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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