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삿 1:1-7 붙였노라
여호수아가 죽고 사사기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대신할 지도자를 남겨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은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지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호수아가 죽을 때는 지도자를 남겨 두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운 이유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운 것은 모세 대신에 다른 지도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이끌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보다 여호수아가 더 낫기 때문에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여호수아를 대신 내세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여호수아를 모세와 상관없이 단지 또 다른 인물로서 세워진 지도자로 이해를 한다면 분명 모세는 여호수아보다 못한 자로 인식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부족했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신 것도 아니고, 대신 여호수아를 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 34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눈으로 보게 합니다. 눈으로 보게는 하셨지만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모세 개인에 대한 신앙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 34:10절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하는 말씀을 봐도 하나님은 모세를 누군가보다 부족한 자로 보시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일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후계자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했던 일은 모두가 모세에게 부여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일을 이어가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과,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30:16절을 보면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만이 아니라 신명기에서 모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역시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강조했던 말이 여호와만 사랑하고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은 모세의 실패 속에서 깨닫게 된 사랑이었습니다. 즉 모세가 자신의 실패 속에서 깨닫게 된 사랑을 여호수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광야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실패하고 모세 자신 역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고생을 하게 된 것도 이스라엘에 대한 버림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교훈 하시기 위해서이고 그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실패 속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만 섬기고 규례와 법도를 순종하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역시 모세의 이런 의도를 알았기에 모세의 말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전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지금껏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 여호와셨기 때문에 앞으로 너희가 섬길 분은 오직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포기되지 않았고 그 사랑으로 약속의 땅에 오게 된 것이니 만큼 앞으로 어떤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명기와 여호수아서가 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새로운 지도자가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 것은 모세가 능력이 많았거나, 지도자로서 역량이 좋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애당초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고자 하실 때 모세는 발뺌을 했습니다. 말도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십니다. 모세를 지도자라고 한 것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능력이 있고 통솔력이 있어서 국가를 번영시킬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도자란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지도자 역할은 자신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실패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차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의 결과임을 알게 하는 것이 여호수아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도자들이 세워지고 그들의 역량과 능력으로 보존되고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으로 살아온 것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면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지도자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어떤 지도자도 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지도자를 따로 구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 역시 여호수아가 싸움을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셨기 때문에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수아가 죽고 없다고 해도 가나안의 싸움은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상 가나안에서의 삶은 결코 이방신을 불러서는 안되고 오직 여호와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주제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제 이스라엘은 직접 하나님께 묻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굳이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올라가 싸울까라는 문제까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에게 있어서 사람다운 사람은 스스로 자족하고 자율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일을 자신이 책임지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고 사람다운 것이고 능력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 자율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신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데, 하나님을 불러서 나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모두가 성인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성인이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자율할 수 있는 사람이란 의미로 성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성인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필요치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고 말씀하신 것도 천국은 성인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성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고 자율적으로 살려고 하는 정신적으로 자립해 있는 성인이라면 하나님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란,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어린아이이며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에게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라고 묻는 것은, 적어도 그 순간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린아이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로 가나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책임지려고 하지말고 하나님의 책임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말했던 대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때부터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차지하게된 모든 세월이 하나님이 책임진 것이었음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모세는 이스라엘과 자신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책임지심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안에서 인간은 항상 낮아진 모습으로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만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책임지신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로 남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사랑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책임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붙였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붙였다'는 이 한마디의 의미를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붙였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저 땅을 저에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때 '그래 그 땅을 네게 붙였노라'는 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붙이신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붙였다는 것이 '너희들에게 줬다'는 의미로 하신 말이라면 굳이 이스라엘이 싸우기 위해서 올라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시고 '붙였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싸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고 또 이스라엘 스스로도 깨달아라는 의미에서 올라가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붙였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세상 나라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줍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 나라, 즉 현대인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율적인 삶을 삽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자로 대우받는 것이 현대 사회입니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경쟁해야 하고, 스스로 목표를 정해야 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일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이런 세상에 신자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 세계가 이스라엘이고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율적인 삶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삶을 보여야 하는 곳입니다.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신 삶을 보여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나약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는 나약해져야 합니다.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는 물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실패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통로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출세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은 하나님을 알고 인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모세가 실패했습니다. 반석을 두 번 침으로서 요단강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이 뭐 그리 큰 일이라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까? 이스라엘 앞에서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이 일에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실패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패를 극복하고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기에 모세는 기꺼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모세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너희의 실패를 극복하고 너희를 인도하는 나의 긍휼과 은혜 때문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실패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인간을 알게 되는 성공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5-7절을 보면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이 말씀에 보면 유다가 베섹이라는 종족과 싸우면서 아도니 베섹의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어버립니다. 즉 손과 발의 엄지가락을 모두 끊어 버린 것입니다. 당시 전쟁에서 포로된 자의 엄지가락을 끊어버리는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수치를 느끼게 하고 또 도망을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도니 베섹은 자신의 수족의 엄지가락이 끊기자 자신이 옛날에 칠십 왕의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고 자기 상아래서 먹을 것을 줍도록 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을 합니다. 즉 아도니 베섹의 엄지가락을 끊은 것은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단지 아도니 베섹의 행위를 갚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도니 베섹의 엄지가락을 끊게 하심으로서 뭔가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도니 베섹이 비록 인간에 대해서는 강한 자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는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보여주심으로서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발견할 때 그 수치를 극복하고 이스라엘에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 물으면서 살아가십니까? 스스로 책임지기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느냐는 것을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세토록 하나하나 물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학교에 갈 때 '하나님 학교에 갈까요 말까요'라고 묻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물음은 아무리 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과 싸우는 것은 이스라엘이 책임질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붙이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인생 역시 하나님이 책임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되는 일이 있을 때 '왜 안됩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책임지니까 잘 해결하시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은, 여러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천국으로 집어넣으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실패하게 하시고 넘어지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 인생이 우리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주어진 이유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이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되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신자는 단지 세상 속에서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신 인생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능히 책임질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이며 천국가지 못할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자는 하나님께 물으면서 하나님이 붙이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을 붙여 주시든 우리는 그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붙여달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결국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이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을 꺾기 위해서 넘어지게 하시고, 실패하게도 하시고, 수치를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는 실패도 수치도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실패를 수치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즉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신이 아닙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책임아래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스스로 성공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 물으시면서 하나님이 붙이시는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삿 1:16-21 쫒아내지 못함
믿음에 대해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은 믿음을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들의 태도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뭘 얼마나 잘하는가? 이런 것들을 따져서 믿음이 있다 없다로 판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믿음이라면 믿음은 전적으로 우리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 됩니다. 분명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구원도 우리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라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의 때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믿음은 주님의 의 자체이지 우리들의 태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주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과 하나되는 마음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은,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의를 보이셨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더 보태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구원의 능력에 우리의 믿음을 보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죽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그 마음과 하나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고자 하는 그 마음과 하나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의 마음을 남겨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이 안다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었다고 해도 불평과 원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된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을 향한 마음으로만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없으면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쫓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하다면 쫓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1장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을 다 쫓아내라고 하신 것은 '오직 여호와만 사랑하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여호와만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또 가나안 사람을 다 쫓아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그들은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만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스라엘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스라엘더러 싸워서 쫓아내라고 하시는 것은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시므온과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러 갑니다. 유다는 산지에 거하는 거민들은 모두 정복하였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기 때문에 쫓아내 못하였다고 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볼 때 '아하 유다 지파가 철병거 때문에 겁이 나서 그들을 정복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충분히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 거민들이 두려워서 쫓아내지 못한 것이라면 다른 지파들은 왜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까? 1장에 보면 유다만 아니라 다른 지파들도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들 역시 가나안 거민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누구는 두렵고 누구는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까?
28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가나안 사람을 쫓아 내지 않은 이유가 사역을 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30절, 33절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을 볼 때 유다지파가 철병거를 가졌기 때문에 쫓아내지 않은 것도 철병거가 두려워서 싸움을 못한 것이라기 보다는 문명과 문화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철병거를 아까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즉 앞으로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살아갈 때 도움이 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쫓아내지 않았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쫓아내지 못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은 쫓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고,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힘에 굴복 당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철병거라는 힘에 굴복 당했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다'는 이 힘에 굴복 당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쫓아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철병거'라고 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둔 사고방식이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쫓아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되지 못한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라고 하신 것은 '여호와만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뜻을 안다면 그리고 그 뜻에 그들의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가나안 거민을 주저 없이 쫓아내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있으면 되기에 그 무엇도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쫓아낼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앞으로 가나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철병거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철병거를 쫓아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살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여호수아에게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여기까지 자신을 인도해 오신 분이 여호와시니까 여호와만 섬기고 우상은 결코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가 죽자 다른 길로 가게 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태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가나안에 들어왔음을 안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보며 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보며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저것은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순간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을 사랑하게 되고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철병거가 있어서 쫓아내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철병거가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가나안을 모두 쫓아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들의 도움인 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도움이시다.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철병거가 아니라 그 어떤 좋은 것이라고 해도 쫓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철병거도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곧 여호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유다는 철병거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반대로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고 여겨지는 것은 쫓김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철병거를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철병거는 그냥 두고 하나님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입니다. 우리들에게서 쫓겨나야 할 것은 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 쫓겨남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뒤에 아간이란 사람이 여호와께 바친 물건을 훔친 사건이 발생합니다. 수 7:21절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라는 말씀을 보면 아간은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을 감추어 두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간의 이 행동은 여리고를 무너뜨리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 있던 것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리고를 무너뜨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일에 이스라엘을 참여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바친 물건을 훔친 것은 결국 여리고의 것에서 마음이 떠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간을 죽인 것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입니다. 이것은 그냥 그렇게 알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안다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뜻을 두고 살아가라는 것이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에 마음을 두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뜻을 두고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들의 마음은 유다가 철병거에 마음이 사로잡히듯이 세상의 것들에 우리들 마음이 붙잡힌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쫓아갑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을 부르면서도 마음은 항상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날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돈이 있었기 때문에 살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안된다는 이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에게만 뜻을 두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은 가나안이 더 살기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가나안의 좋은 것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더 즐겨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기보다는 가나안의 것들을 높일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에 붙들린 마음이고 무엇에 끌려가는 마음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끌려가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시간 우린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잠겨야 할 줄로 압니다. 내 수중에 있는 돈 몇 푼보다도, 내가 가진 직장이나 집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귀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살아간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 외에 다른 것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느냐?'를 묻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고자 하느냐?'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를 묻는다는 것은 결국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 되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서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쫓아내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돈이 큰소리칩니다. 힘있는 자가 행세를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큰소리칠 자가 없습니다. 행세할 자가 없습니다. 만약 큰소리치며 살고 싶고 행세하고 자랑하며 살고 싶다면 교회로 오시면 안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큰소리치고자 하는 그 마음을 고스란히 교회로 가지고 오기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 마음에 담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돈많은 자 권력이 있는 자라는 말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돈으로 살지 않고 권력으로 살지 않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은석교회가 쫓아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는 돈이 더 힘이 세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은석교회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무엇이 크게 보입니까? 세상입니까?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무엇에 끌려갑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입니까?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은총은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천국에서 사는 자로 남는 것에 간절함이 있다면 그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삿 2:1-5 우는 자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누구나 '어렵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가?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대답하면 아마도 '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반발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한가지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한 뒤에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무능에 대한 깨달음으로 '말씀대로 살 수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단지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여러분의 생각이라면 과연 무엇을 근거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을 해본 후에 자신에 대한 포기에서 나오는 말입니까? 즉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배운 자의 고백이냐는 것입니다. 혹시 그것이 아니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귀찮고 우리 자신에게 힘든 일이기 때문에 아예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싫어서 성경을 이용해서 '말씀대로 살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새계명에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소위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자'는 실천을 강조하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것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고, 사랑의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니까 우리는 사랑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할 필요가 아예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크나큰 부담으로 남을 수 있고, 또 사랑이 없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말로써 모든 부담을 줄이고 오히려 사랑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자들의 노력을 성경을 모른 자들의 헛된 행동으로 여겨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을 마음 깊이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결론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아예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으로 이끌어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도 없고 통회하는 자복도 없으면서 '인간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면 결국 그것은 성경을 내 편리함에 맞추어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것도 잘못이지만 성경을 자기 편함으로 이용하는 것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부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많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인간은 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배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말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안해도 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의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나오는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안해버리는 것은 성경을 자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머리로만 계산하고 머리로만 결론을 내리고 머리로만 성경을 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말씀이 이야기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귀찮거나 부담되는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진심으로 기쁘고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이 마음 든든함으로 다가오십니까? 사실 우리가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결코 귀찮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천국 보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신 은혜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에, 그것 만으로라면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사랑을 하려고 안해 버린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사랑하며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은 부담으로 다가오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고자 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사자는 길갈에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이 말은 마치 길갈에 있던 사람이 보김으로 와서 말을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사자를 길갈에 있던 어떤 사람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란 '천사'를 의미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모두가 천사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리한 천사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왔다고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을 길갈에 있던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으로 와서 이스라엘에게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과거에 길갈에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5:13-1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치러 갈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군대 장관이 여리고를 향해 서서 여호수아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고 칼을 빼어들고 여호수아를 향해 선 것은,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싸우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스라엘과 싸우시는 분입니까? 그것은 길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 두 돌을 가지고 나와 기념비를 세운 곳입니다. 그리고 그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 의식을 행했습니다. 할례란 육신은 죽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할례 의식을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 열 두 돌을 세운 길갈에서 행하게 한 것은 요단강을 건넌 것과 할례가 서로 연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건넜습니다. 즉 언약궤의 피의 은혜가 그들을 가나안땅에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열 두 돌을 세운 것은 바로 그 증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이니까 육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살아가겠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의 피의 의미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5:15절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가 할 일은 오직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을 의미합니다. 종이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와의 대리자로 왔습니다. 즉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말은 여호와의 말이고, 그의 뜻은 곧 여호와의 뜻입니다. 여호와가 나타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난 그곳은 거룩한 곳이고, 그 거룩한 곳에서 여호수아가 할 일은 오직 신을 벗는 것입니다. 즉 순종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의 군대장관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길갈입니다.
이 길갈에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보김에 나타났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할례를 행할 수 없던 이스라엘이 길갈에 이르러서 할례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 누구의 은혜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수 없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누구의 은혜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김에서 이스라엘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길갈에서의 이스라엘과 보김에서의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길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열 두 돌을 세우고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킴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는 보김에 나타나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해 오신 것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길갈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어김없이 그대로 시행된 증거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김에서의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입니까? 길갈에서의 은혜는 다 잊어버린 상태입니다. 가나안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그들의 단을 헐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보김에서의 이스라엘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거민들이 자신들에게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보다 문화나 문명이 더 발달한 민족이 가나안이기 때문에 그들을 이용하면 이스라엘에게 많은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골짜기의 철병거를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철병거가 아까웠던 것입니다. 다른 지파들 역시 가나안 거민을 사역을 시키면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득이 많기 때문에 쫓아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이 어떤 땅인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된 하나님의 은혜, 가나안에서 살아갈 삶의 목표, 이런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자신의 앞으로의 삶을 생각했기 때문에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면 그들이 자신들에게 득이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의 말은 다릅니다.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이 올무가 될 것이라는 말씀은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민수기 33:55절에서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을 하셨고, 또 여호수아 23:13절에서도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고 경고를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경고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말씀은 잊어버리고 보이는 이득을 쫓아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겠습니까? 말씀을 생각하면서 갈등하면서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즉 이미 경고하신 대로 되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럴 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 얼마나 부담이 되고 귀찮겠습니까?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말씀에 대한 부담이 없습니다. 앞으로 가나안 거민으로 인해서 주어질 이득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이 말씀대로 살아갈 마음이 없는 이스라엘에게는 참으로 귀찮고 부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스라엘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면 말씀에 대해 부담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만 나와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간섭자로 파고들 때 그때는 말씀이 부담되고 싫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지기 때문에 말씀과 멀어지고 싶은 마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4-5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의 반응이었습니다. 보김이란 '우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대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울음이 어떤 의미의 울음이겠습니까? 얼른 생각하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왜 울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회개의 울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스라엘의 울음이 다른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스라엘의 울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남겨둔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고, 그들이 결국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대한 반응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잘살고 싶은 마음에서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었는데, 결국 그러한 그들의 소망을 누가 방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달갑지가 않고 오히려 귀찮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울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속상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린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고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물론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을 실제 삶에서 만나시는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만나실 때 말씀이 있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부담이 되고 귀찮으며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것이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싫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편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같이 흘러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항상 세상과 부딪힙니다. 자연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여러분에게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말씀을 따라가려고 한다면 말씀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말씀을 따라가려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고 하나님이 간섭한다는 말에 대해서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8-19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베드로가 성령에게 붙들리게 되면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끌려간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붙들림으로 인해서 주님의 소원이 곧 베드로의 소원이 되어서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섭을 받는 자의 결과입니다.
말씀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소원대로 살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속상하지 않습니까? 울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원은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소원은 생명에 있습니다. 우리의 원함과 전혀 반대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세상이 내 삶에 이용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살아간다면 세상을 버리기가 아까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버리지 못한 세상이 오히려 우리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도 몰라주는 하나님이라고 불평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간섭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을 버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아까워하지 않는 신자되는 쪽으로 여러분을 가르치고 인도해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까워하는 세상 것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올무와 가시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왜 인도하시는가를 잊어버린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해서 가나안에 들여보내시듯,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에서 나오게 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여보내시기 위해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미련을 둔다면 하나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속상함만 있게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왜 있는가를 생각하시고 오직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전부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삿 2:6-10 다른 세대
세상은 사람을 세대로 구분을 합니다. 세대란 단순히 나이를 기준으로 해서 청년과 장년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통할 수 없는 단절된 관계를 말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의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세대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각기 다른 세대 차이가 등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다른 세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대가 둘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모두 본 세대입니다. 이들은 여호수아와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입니다. 7절에 보면 이들을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라고 말합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하는 세대의 구분은 나이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아는 자들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대간에 단절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무엇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고 필요가 되는가?'를 따질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세대의 시각입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아는 세대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아는 세대와 모르는 세대는 서로 교통할 수 없는 단절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고 바알들을 섬겼다는 것은 여호와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버렸다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조상들이 알던 그 여호와를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제 너희는 내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희는 내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아는 세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나는 여호와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의 인생은 여호와의 손에 달렸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아는 세대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세대는 자신들이 가나안 땅을 밟고 살아가고 있는 그 근거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가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구출하심으로서 오늘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어둠의 세상에서 구출하셨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하심으로서 세상에 대해 죽고 새롭게 태어난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아는 신자라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모른다면 십자가가 귀하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끝나버리고 실제 삶에서는 십자가보다는 세상에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더 가치 있고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에게 믿을만한 조건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믿을만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죽으셨습니까? 인간들에게 붙들려서 가장 힘없는 모습으로 대항한번 하지 못하고 죽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베푸셨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남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랑이 많고 겸손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예수님의 삶을 두고 본다면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섬김을 받을만한 일을 하신 적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나신 한경직 목사님이 온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예수님에게 세상이 존경하고 섬길만한 조건이 있었다면 그러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존경을 받고 섬김을 받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아는 자들에게서 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 주어진 사람들, 그들에게서 섬김을 받으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경외하지도 섬기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모르는 사람들이 섬기고 경외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철저히 거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희생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십자가를 말하면서 믿는다고 하겠지만,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고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것이라면 오직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진 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해서 박수만 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부활절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찬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기독교이기 때문에, 교회이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차원에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에 앞서서 '나는 과연 예수님을 아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가를 자신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을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대는 여호와의 일이 성취됨으로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가 모르는가로 구분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안다면 그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교회가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비해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자신들도 철저하게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여깁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신앙생활한 사람에게 하늘에서 큰상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그리스도에 비하면 가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하늘에서 상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이해가 되겠습니까?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절입니다. 생각과 사고방식의 단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아느냐 모르느냐, 이것이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단절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뭔가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들에게 뭔가 해주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게 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고 세상일이 잘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고 대학에 합격하고 취직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자체가 우리의 성공으로 교회 부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성공하지 못하고 취직도 못하고 대학도 떨어진 사람들은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날마다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너를 죄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와야 했고 너희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했다. 이것에 내가 너희에게 준 은혜이고 사랑인데 너희는 이 은혜와 사랑을 아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까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부활은 죽어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부활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는 바로 여호수아와 같은 세대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알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같은 사고방식 아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못박혀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좋다고 생각되십니까? 차라리 불교의 부처처럼 연꽃 위에서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는 그 모습이 더 보기에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피흘리며 못박혀 있는 주님의 그 십자가에는 우리의 죽음과 생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신 자리이고,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는 부처가 앉은 화려한 연꽃에 나의 죽음과 생명이 담겨 있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람에게는 주님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전부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이 전부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나에게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주님이 인생의 전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주님이 전부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아는 신자가 살아가는 부활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다른 세대의 삶은 자신의 삶에 유익 되고 필요한 것을 향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단절되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대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까? 여호와를 섬겼던 여호수아 세대입니까 아니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고 다른 신을 섬겼던 다른 세대입니까?
삿 2:11-23 사사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볼 때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증거물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자신과 결부시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이루어가고 하나님에 대한 시각을 정립시켜 가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잘못된 오류는 항상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계획, 언약 이러한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들로 이해를 해버립니다. 이로 인해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은 다 무너져 버리고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으로 둔갑을 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성경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이해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입장이나 주어질 결과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솔직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만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가 드러나는 것으로만 만족하자는 것인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 여러 인물들을 대하면서 나의 소망도 이들의 소망과 같은가? 자신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들이 하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갔을 때 나그네로 살았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서 '예'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성경을 자기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바라볼 때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맡겼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면 '나는 과연 아브라함처럼 보이는 세상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바라보고 사는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기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아브라함처럼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이렇게 자신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오는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중심이란 교회 중심이라는 말과 다릅니다. 흔히 교회를 가면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표어가 붙어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표어를 붙여 놓음으로 인해서 '우리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살려고 힘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심으로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필히 한가지가 버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버려지지 않은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중심이라는 것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성경적인 의미는 오직 교회가 새로운 가정이고 교회에서 만나는 형제들이 새로운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기존의 혈통으로 맺어진 가족이나 형제관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교회 중심으로 살겠습니까? 누가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뭔가에 미친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미치지 않고서는 하나님 중심된 삶을 살아갈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까울지 모릅니다. 아니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본문의 이스라엘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전의 우리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현재 우리들에게서 조금이나마 보여진다면 결국 우리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흔적이 될 것입니다.
11-1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다른 세대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의 악은 바알을 섬기고 가나안의 신을 쫓아 그들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린 이것을 간단히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과연 우상을 섬겨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보다 바알을 섬기는 것이, 가나안의 신을 섬기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득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연히 자신에게 득이 되는 신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큰상을 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하늘에는 상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단과도 같은 말로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 더 많은 상을 준다는 신이 더 신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신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을 좇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상의 차이가 없다'는 말은 열심히 일해도 상의 차이가 없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려고 하겠는가? 라는 반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불교에서 부처를 찾아가 공양을 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부처에게 돈을 바치고 승려에게 자신들의 가족과 사업을 위해서 불공을 드려달라고 돈을 바치는 것도 모두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자신에게 득이 되고 도움이 되어주는 신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사방의 대적의 손에 붙여서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내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번거롭게 일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다시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건져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사의 역할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사란 재판한다 구원한다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즉 사사는 이스라엘의 재판자로 구원자로 세움을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단지 사사의 기능이 이스라엘이 괴로움을 당할 구원하는 기능이라면 애초부터 사사를 세우지 말고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을 안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굳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사사 세워 그들을 건져내는 것은 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뭔가 가르치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사사를 세우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과연 사사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다 같은 사고방식이라면 이스라엘은 누구를 통해서도 자신의 죄를 책망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스라엘 안에 여호와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이스라엘은 그 사람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죄가 발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사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사는 이스라엘을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즉 사사는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주체로서 이스라엘 안에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사사를 뽑아서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을 책망하신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우리를 책망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반대로 세상을 책망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음 외침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책망의 주체자라는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이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속에서 책망의 주체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항상 말씀으로 인해서 책망을 받으며 자신의 삶의 길을 확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자 힘쓰는 삶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그가 바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사도 청종치 않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책망의 주체자가 없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책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끝까지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 길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열조와는 다른 세대입니다.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열조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말씀이 주어지면 말씀으로 인해서 책망을 받습니다. 자신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돌이키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열조의 행한 길을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말씀이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의 능력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린 기도할 때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우리를 붙들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의 의도는 말씀에 붙들려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붙들릴 의도도 아예 없습니다. 처음부터 내 삶은 내가 책임진다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말씀의 능력이 나를 붙들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런 자를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자신을 포기한 자에게만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오늘 이 시간도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고 있지만, 누가 말씀에 붙들린 자가 되느냐는 것은 누가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교회를 나왔느냐로 결정되어 질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을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어야 하고 말씀이 우리를 책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분명 예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는 삶에 대해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말씀을 믿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로움을 받아 부르짖을 때에 다시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 열조보다 더 패괴하여 다른 신을 좇아 그들에게 절했다고 합니다. 과연 이러한 행동이 무엇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고 무엇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가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괴로움 속에서 부르짖는 것도 결국 괴로움에서 빨리 구원받고자 하는 의도에서입니다. 사사가 죽자 다시 패역한 길로 가는 것도 역시 자신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을 찾아갑니다. 이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최고로 여기게 됩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세계가 약속으로 주어져 있음에 대해서는 무시를 해버립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가 약속으로 주어져 있음을 믿고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여기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자신에게 책망의 주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책망의 주체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서도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에게 해가 되고 득이 되는 것이 뭐냐만 따집니다.
과연 여러분을 책망하는 주체자가 여러분 안에 자리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대할 때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의 죄가 책망을 받고 여러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이끌어 가는 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의 하나하나를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신 생명의 나라를 심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세상을 벗어나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삿 3:1-6 시험
1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주변에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히위 사람을 남겨 두셨는데, 남겨두신 이유는 남겨둔 가나안 백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겠다는 의도이십니다. 4절에 보면 "남겨 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것으로 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과 전쟁을 할 때 그들을 다 쫓아내지 않으시고 남겨 놓으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을 청종하며 살아가는지 아니하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시험이란 하나님의 확인 작업입니다. 하나님이 맨처음 시험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창 22:1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이삭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험에서 무엇이 확인되는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확인작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바침으로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신 8: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진실된 것이라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말씀이 귀하다는 것을 아는 믿음의 행위라면 어떤 조건과 상황과 환경에서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 13:3절의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라는 말씀에서도 여호와가 시험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다른 신을 섬기자 하고 그들의 말대로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고자 하여 시험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홍해였고 물 없고 양식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사랑하는지 시험하시는 확인작업이었는데 말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였다면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여호와를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보았다면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고, 물이 없고 양식이 없다고 해서 근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가나안 백성을 남겨둔 것 역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을 청종하는지 알기 위한 시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확인하고 입증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인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인식하는 시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 자체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 자체를 하나의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인도한다면 왜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세상의 인식입니다. 세상을 도와주고 잘되는 쪽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신다운 신의 모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럽고 악해져가는 세상을 보면서 '신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만 좋은 환경을 바라고 살아갑니다. 좋은 환경으로 인해서 편안하고 좋은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외 신에 대한 다른 관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신이란 단지 섬겨주면 되는 존재로 인식해 버립니다. 인간이 신을 섬기면 신은 인간을 도와주는 관계로 여깁니다. 서로 좋은게 좋은거라고 인간이 신에 대해서 할 도리를 다하면 신은 인간을 위해서 할 도리를 다해달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신에게 갖다 바치는 것을 부지런히 하면서 바쳤으니까 좋은 것으로 갚아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의 상황과 환경들에 대해서 불만스러울 때가 많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쪽으로 되어지지 않고 항상 엉뚱한 쪽으로 되어질 때,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과 어려움으로 다가오게 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기기가 매우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여기는 상황 속에서도 중지되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확인작업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듯,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듯 우리를 시험하시면서 진짜 가짜를 가려내는 확인작업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어려운 상황만이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 뜻대로 되어지는 상황, 한마디로 말해서 만사 형통이라는 상황 역시 하나님의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네 뜻대로 되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살아가는가?' 를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란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 산다고 해도 삶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증거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여러분의 삶속에서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은 여러분이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과연 진실된 것이고 참된 것인가를 증거하고 확인하는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진실된 것인가를 확인하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진실된 믿음이라면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풍족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진실된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풍족함으로 인도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열국을 남겨 두셨습니다. 즉 가나안 열국이 남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나안 열국이 주변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내로 주며 그들의 신을 섬기고 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는 남아 있는 가나안 열국과 친하게 지내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더 유익 되고 앞으로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이란 쫓아내야 할 족속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과 어울리지 말고 혼인하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가나안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쫓아냄으로서 무엇이 참된 복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풍족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덕분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복을 내려서 이렇게 풍족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나안 속에 이스라엘을 집어넣으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게 하셔서 참된 복은 세상에서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됨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이 안다면 가나안 거민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무리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 득이 된다고 해도 쫓아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심으로서 이스라엘은 두 방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는 말씀보다는 자신의 삶에 득이 되는 것을 쫓아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삶에 비록 손해가 있다 할지라도 말씀이 명하신 대로 쫓아가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가의 여부가 하나님이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심으로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고, 제사를 드리고, 할례를 행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의 진실된 여부는 남아 있는 가나안 열국에 대해서 어떻게 행하느냐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열국과 혼인을 하고 그들의 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들 역시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우선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본문에서는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전쟁이란 단순히 국가와 국가 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땅 빼앗기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싸움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아는 자와 어린양의 피를 모르는 자의 싸움인 것입니다. 힘으로 사는 사람들 안에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투입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전쟁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가나안에 있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열국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즉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살게 하신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어진 모든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고 자기 발전을 꾀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의 문제는 삶에 대한 시각의 무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으로 인식을 했을 뿐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는 인식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곧 가나안에 존재하는 그 이유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나안 거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시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쟁이란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 거민들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삶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 가나안 거민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모두 복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결국 복이 아니고 오히려 저주라는 것을 드러내고 증거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거민들과 혼인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깁니다. 이것은 삶의 방식이 가나안처럼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이유, 즉 가나안 전쟁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가나안처럼 저주의 자리에 함께 혼합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이 남겨두신 가나안 열국을 통해서 확인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삶에 대해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십니까? 삶에는 어려움과 풍족함이 함께 어울려 있습니다. 어떨 때는 어려움으로 우리를 곤란하게 하기도 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또 어떨 때는 풍족함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게 하게도 하고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러한 삶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어려움이 있을 때 단지 빨리 어려움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만 있습니까? 풍족해지면 '역시 돈이 최고다'라는 기쁨만 있습니까? 어렵든 풍족하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신 것처럼, 여러분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풍족함을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남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싸움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듯,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여호와의 전쟁을 알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싸우고 계시고 우리는 그 군사로 부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무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좋은 것이 주어지면 '은혜다' '복받았다'라고 여겨버리고, 자기에게 나쁜 것이 주어지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만 존재하고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삶일 뿐,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을 통해서 무엇이 증거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점입니다. 신자는 삶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삶을 단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일터로 여길 뿐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삶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에 다양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여러분의 믿음이 확인되어지는 도구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삶이 왜 염려와 걱정으로 흘러갑니까? 그 이유는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삶을 통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확보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삶을 통해서 증거하고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게 되면 그것을 삶의 실패로 여기게 되고 낙심하게 되고 자포자기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을 하나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인식을 한다면 잘되든 못되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어떤 삶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사입니다. 군사로서 전쟁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그것은 군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 주변에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과연 전쟁을 의식하고 사느냐 아니면 전쟁을 잊어버리고 사느냐는 것이 가나안이 남아 있는 상황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삶 역시 전쟁입니다. 믿는 자로서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거하며 산다는 것은 곧 전쟁을 의미합니다. 돈으로 살아가고 힘을 의지하고 사는 세상 속에서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용서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무엇이 진짜 복이며 생명인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전쟁의 군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입니다. 풍족하면 풍족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예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용서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풍족하면 교만해지고 자기 힘을 과시하며 살아가지만, 신자라면 풍족함 속에서도 여전히 겸손하게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살린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맡겨진 것임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풍족함이 있기도 하고 어려움이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확인하고 시험하시기 위함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아하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나에게 남겨 주셨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군사로 살아가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직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삶의 성공을 위한 싸움에만 열심이라면 그것은 결국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삶을 통해서 증명될 뿐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신앙의 전쟁터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싸움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삶을 대한다면 결국 세상 사람들과 연합하게 되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을 잊어버린 삶이라면 하나님의 시험도 잊어버렸을 것이고 결국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망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 축복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데, 왜 내 주변에 이런 상황과 환경을 만들어 놓으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것입니다. 날마다 싸우는 자로 살아가는지 여호와의 전쟁을 과연 아는 자인지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확인될 것입니다. 그 확인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시험하고자 여러분 주변에 많은 것을 남겨 놓으시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전쟁을 아는 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삿 3:7-11 사사의 등장
구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배경으로 한 신약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죄악의 땅에 오신 구세주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구약을 무시한 신약의 해석은 이미 바른 해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신약의 해석 역시 잘못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신약을 해석함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는 여러 가지 신학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상급차등', 즉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일을 많이 한 자는 나중에 천국에서 상을 많이 받고 적게 한 자는 적게 받는다는 이론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급차등론이라는 이론 자체가 인간의 각각의 자질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이상 이미 구약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상급차등론'은 인간에게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것으로 출발해야 성립이 가능한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일할 자질이 없다라고 한다면 상급차등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일할 자질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 자질로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많이 주고 적게 한 사람은 적게 준다고 할 때 '상급차등'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이 과연 이러한 이론의 바탕이 되는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자질이 있다'는 것을 옹호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구약이 인간에게도 선을 행할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쓸데없이 끼여든 하나님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끼여드느냐는 타박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구약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선을 행할 자질이 없지만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음으로서 선을 행할 자질이 주어졌다라고 한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성령이 주어진 이상 그 즉시 십자가는 철수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고 성령이 주어짐으로서 선을 행할 자질을 받았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자질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 앞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차피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성경이 우리 앞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죄를 알고 십자가를 믿을 자질이 있는 것이라면 성경이 있을 이유가 분명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즉 인간 스스로 죄를 알고 십자가를 믿을 자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성경이 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생각이 타당하게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생각 자체가 인간은 죄인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자기 구원의 입장에서만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믿고 안믿고가 내 의지에 달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한 자가 누구인가?'를 분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나의 죄로 인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곧 나의 생명임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하지 않은 자가 성경을 보는 시각은 자기 중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신의 죄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을 과시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보려는 시도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곧 인간임을 낱낱이 폭로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야 했고 죄인된 인간이 담당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시고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심으로서 죄로부터 해방될 유일한 길을 열어놓으셨고 그 길로 자기 백성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이 신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인간은 죄인임을 말한다면, 신약은 모든 것은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성경을 대할 때 발견되어지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모든 것은 주님이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할 일이 뭐겠습니다. 모든 일을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곧 성도가 할 일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가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라면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도 자기 구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도라면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임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구원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 자체를 송구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서의 선택이지 자기 구원의 확신으로서의 선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생각하는 선택이란 자기 구원을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선택, 즉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을 쓸 때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울 자신이 선택받은 것을 자신을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택함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이라는 것은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 1:23절에서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한은 자신의 실체가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요한은 자신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배후의 주님을 보이기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죄라는 것은 자기 배후에 계신 분을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의 모든 내용이 자기에게 영광을 부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 뭐가 좋아서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고의로 '이제부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자'라고 작정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는지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열국을 남겨 놓았을 때 그들과 혼인을 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가나안 열국을 바라보면서 신앙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어떤 언약을 하셨는지, 하나님이 가나안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셨는지의 차원에서 가나안 열국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유익이라는 차원에서 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주변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 즉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신앙의 차원에서 모든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내 삶의 편안함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고 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이라면 진리의 차원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급한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앙도 잠깐 뒤로 미룰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보이는 일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통해서 내 배후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증거 되고 그리스도가 보여질 수 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선택받은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까 아니면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까? 만약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신자라면 어떤 문제에서든 신앙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편안해지는 것보다도 내 배후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증거 되어지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하나님이 백성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나만큼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철저하게 예수님만 믿고 살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여겨지고,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이 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잊고 살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바라보는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증거는 여러분의 삶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주변에 가나안 열국을 남겨 두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데 얼마나 열심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가령 장사를 하는데 하루종일 한푼도 벌지 못했다고 합시다. 이것 하나로도 우리가 진리를 중심으로 사는지 아니면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지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산다면 한푼도 못번 것 때문에 화를 내고 원망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중심이라면 돈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알았다는 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천국은 돈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진리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니 말씀이니 이런 것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인생이었습니다. 좀 더 좋은 삶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에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세라와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조치를 취합니다. 그것은 8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을 섬겼더니"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 붙여서 8년 간을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8년 간의 고생을 하면서 여호와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9-10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옷니엘을 가리켜서 구원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옷니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만한 힘있는 용사이기 때문에 구원자로 세움 받은 것이 아닙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이스라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옷니엘이란 사사의 등장은 누구 때문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이스라엘 안에 사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옷니엘이란 사사가 등장을 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신앙의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직접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이방인과 싸우라고 하지 않고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세워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신앙의 바른 길을 찾아 갈 수 있는 자들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옷니엘이라고 해서 스스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옷니엘도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기에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옷니엘이 메소보다미아 왕과 싸울 때도 여호와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른 신앙의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증거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고 사사를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게 된 것은 이방인의 손에 그들을 붙이신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도록 만드시고, 사사를 세우시고, 사사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시고, 이방인을 사사의 손에 붙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자질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날마다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간의 본성 그대로 살아가도록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이기에 구원자를 세워서 그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되돌려 세우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사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겼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가나안 땅은 돈이 필요 없는 땅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던 땅이고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심으로서 들어오게 된 땅이기 때문에 가나안에서의 삶의 방식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있음으로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땅이며, 이스라엘은 그러한 가나안 땅에서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잊어버렸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고, 그 결과는 자신들의 삶에 눈을 돌리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보다는 살아가는데 유익이 되고 필요한 것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가야 할 길로 되돌리기 위해서 징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하시고 신이 임한 자를 구원자로 세워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신이 임한 자는 사사입니다. 신이 임했다는 것은 진리를 중심으로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라도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그를 책망하고 나무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앞에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던 구원자가 서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진리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 앞에서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마다 진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자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며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신자는 이미 돈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세계 속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로서 구원을 보여주며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신이 임한 신자는 진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은 삶에 대해서 책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를 징계해서라도 신자로서의 길을 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은혜가 생각나는 사건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몸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자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이제 여러분이 신이 임한 자로서 구원자의 자리에 서서 구원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에 대해서 나무랄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삿 3:12-25 왼손잡이 구원자
고전 1:27-29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세상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란 상대적입니다. 약자는 강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미련한 자는 지혜 있는 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강자가 약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지혜 있는 자가 미련한 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이치로 생각하면 전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세상은 강자가 당당하고 지혜 있는 자가 고개를 들고 살아갑니다. 약자는 항상 기가 죽어 살고 미련한 자가 고개를 숙이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어떤 강자가 어떤 지혜 있는 자가 약자 앞에서 미련한 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지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약자 앞에서 강자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미련한 자 앞에서 지혜 있는 자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들의 자연스런 현상과 반응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약자 앞에서 강자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결코 세상적인 비교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을 비교한다면 오히려 약자가 강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정상입니다. 따라서 강자가 약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약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고전 1:30-31절에서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체로 자랑할만한 것이 없는 자로 불렀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약한 자에게 무엇이 있기 때문에 강한 자가 부끄럽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약자에게 있는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강한 자가 부끄러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으로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로 비교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평가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이 되고 지혜가 되는 것은 돈이고 지식이기 때문에 돈 없는 자 지혜 없는 자가 부끄러움을 가지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가 힘이고 지혜이며 의로움이고 거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가 힘있는 자이고 지혜 있는 자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소위 세상적인 강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과연 세상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가지겠습니까? 약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가지는 세상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은 오히려 약자의 그리스도를 무시할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안에 사는 약자로 인해서 강자가 부끄러움을 가진다는 것도 역시 세상적인 모습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강자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 강자 역시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약자의 위치에서 강자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약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강자로 생각하며 살다가 자신보다 더 나은 강자의 등장으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고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겼을 때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이스라엘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옷니엘이란 사사를 세워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가 죽자 그들은 다시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모압을 강성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다시 사사 에훗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에훗을 그냥 에훗이라고 말하지 않고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소개합니다. 굳이 에훗을 왼손잡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현대 사회의 시각에서는 왼손잡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사회적 환경의 구조가 보편적으로 오른손잡이를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은 많지만 왼손잡이가 특이한 자로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구별이 심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이 왼손을 쓰려고 하면 오른손을 쓰도록 가르치지만 예전에는 왼손잡이는 상놈이나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도 역시 오른손잡이가 정상이고 왼손잡이는 비정상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오른손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출 15:1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라고 하면서 주께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셨음을 말합니다. 또 시 17:7절에서도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라고 말하고, 시 18: 35절에서도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오른손에 구원의 의미를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의 힘을 오른손에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은 보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시는데 그가 왼손잡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볼 때 비정상적인 사람이 구원자로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왼손잡이를 구원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왼손잡이임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왼손잡이를 등장시켜서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오른손잡이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오른손잡이는 강자의 위치에 있고 왼손잡이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는 무시 받고 멸시받는 약자의 위치에 있는 자로 볼 때 하나님은 약자를 구원자로 세워서 강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시 받는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왼손잡이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은, 결국 스스로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가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항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돈있는 자들 앞에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돈 없는 자를 세우심으로서 돈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너희는 있는 돈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책망하기 위해서 돈이 없으면서도 없는 자들을 도와주고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압왕 에글론을 섬기게 된 것은 힘에 의해서 굴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년 간을 힘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안에 왼손잡이 에훗이 등장을 해서 계략으로 모압왕 에글론을 살해하게 합니다.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도 굴복하고 어찌할 수 없었던 에글론을 비정상인 에훗을 세워서 죽이게 하신 것이 바로 정상적인 이스라엘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상적이면서도 비정상적인 사람보다 무능력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왕을 섬기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왼손잡이인 에훗에 비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그 정상적인 오른손으로 그들은 기껏 악을 행했던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 왼손잡이인 에훗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다윗의 위대함과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무능함과 부끄러움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두려워서 떨고 있는 골리앗 앞에 힘없는 어린 다윗을 세우시고 칼도 창도 아닌 돌멩이를 가지고 골리앗을 죽이게 하신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이 신앙에 대해서 무능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삼상 17:45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말합니다. 즉 다윗은 힘으로 골리앗과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다윗이 믿음이 있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믿음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골리앗의 힘만 봤지 하나님이 계심을 보지 못하던 이스라엘의 실체가 어린 다윗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정상적인 오른손잡이고 다윗은 비정상인 왼손잡이로 비교될 수 있습니다.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선 어린 다윗은 분명 상식적으로 볼 때는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 앞에서 이스라엘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었으며 무엇을 의지했는가가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세워서 이스라엘에게 묻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묻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음대로 교회를 나오실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죽인다고 위협하는 세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아직도 마음놓고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소식을 간혹 듣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믿음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놓고 교회로 모일 수 있는 환경을 주셨는데 교회로 모여서 무엇을 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몸이 성한 우리들 앞에 몸이 성하지 못하면서도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세우심으로서 성한 몸으로 무엇을 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았습니까?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까?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 하루의 삶을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갑니까?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이스라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며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곧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무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들 앞에 약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아무것도 없고 무능력하고 무시와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왼손잡이를 세우심으로 믿음에 무능력한 우리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을 세우심으로서 풍성함 속에서 오히려 주님에 대한 소망에 희미해진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세상적으로 능력이 있는 자, 그것이 능력이 아닙니다. 만약 세상적인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주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부끄러움을 가질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른손잡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왼손잡이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할 수 있는 왼손잡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세우신 왼손잡이로 인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의 무능력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소유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린 너무 교만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누구로부터 왔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주어진 것을 소유하고 지키는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교회를 나왔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발합니다. 약자이면서도 구원자로 오신 주님은 언제나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그것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들 주변에 주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세우심으로 다시금 우리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섬기는 자가 높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거지 나사로였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생전에는 거지 나사로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지옥의 고통 속에서야 나사로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왼손잡이가 있을 때 그를 통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보다 더 큰 교회에 시무하는 목사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교회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게 살면서도 주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가 과연 주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목사라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목사가 과연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가겠습니까?
교회는 참으로 진실된 성도가 필요합니다. 주님으로만 살아가면서 우리를 부끄럽게 해줄 왼손잡이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안타까움은 바로 그러한 왼손잡이의 위치에 있는 자가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왼손잡이의 위치에 있는 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부끄러움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작은 자를 통해서 자신의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작은 자로 약자로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도 두렵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바로 주님이 세우신 구원자 왼손잡이입니다.
삿 3:26-31 강함과 약함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니 그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님에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나는 예수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사람이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 일에 자신의 것을 소비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임을 감안해 볼 때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은 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본질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존재한다면 과연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은 채 교회를 다니고 헌금을 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 그들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대신에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고 존경받는 재미로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사실 신자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고 교회가 단지 자신의 취미 생활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일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예수님에게 무엇을 받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기뻐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신자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물론 희박하긴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가 끊이지 않고 예수님을 찬송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아는 형제들을 찾아 모여서 같이 기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희생으로 발생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로 인해서 충만된 상태입니다. 충만 되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고, 때문에 달리 예수님에게서 원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받은 것으로도 충만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무리들입니다.
엡 1: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고,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활동을 증거 하는 몸으로서의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란 이미 그리스도로 충만된 자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 되었기 때문에 부족이 없는 존재이지요.
이러한 말이 아마 여러분들에게는 세상의 현실과 동떨어진 말로 들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들려지고 있는 말씀은 하나하나가 세상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다른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현재 우리들의 현실을 보장하는 말씀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로 충만된 자라는 것도,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도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모든 것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의 부족을 채우고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부족을 느끼고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도 한 발 뒤로 밀쳐 놓으려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을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들의 나약함입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부족을 느끼는 것은 모든 비교를 세상 것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하다가도 몇 푼의 돈 앞에서 자기보다 조금 잘나 보이는 사람 앞에서 부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굳게 서 있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에서 구원받게 된 것으로 감사합니다. 멸망의 세상에서 구출된 자로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만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고 불만이 없는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또 달리 원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말하되 그리스도로 살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구원받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현실에서 구원받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삽니다. 돈이 없는 현실에서의 구원, 직장이 없는 현실에서의 구원, 일이 잘 안되는 현실에서의 구원, 이처럼 현실에서의 구원을 원하고 그리스도를 찾기 때문에 항상 부족을 느끼면서 그리스도에게 뭔가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구원에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구원에 마음을 둔다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족한 마음으로 주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자신에게 부족된 것을 채워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말하되 그리스도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생을 통해서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현실에서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더 깊은 실망과 낙심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셔서 세상의 헛됨과 허무함을 알게 하시고 대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헛되지 않음을 발견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국가가 번성하는 것이나 망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무작정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모압을 강성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쳐서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분명 모압이 강성하게 된 것은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도구로 모압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모압의 강성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세상이 생각하는 복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작정 성장하고 발전하면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한 나라를 강성케 해서 하나님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강성케 하셨던 모압을 하나님이 치십니다. 28절에 보면 "무리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서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강성케 하신 모압을 다시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지 세상의 힘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소유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은 자기 백성의 소유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압을 강성케 하셨다가 다시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것입니다.
29-30절에 보면 "그 때에 모압 사람 일만 명 가량을 죽였으니 다 역사요 용사라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더라 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죽인 모압 군대는 일만명 가량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같이 역사요 용사입니다. 역사란 힘이 장사인 사람을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힘이 장사인 용사들을 일만명 가량이나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압을 이스라엘에게 붙여 줬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스스로의 힘이 아닌 것입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하고 그 땅이 80년 동안이나 태평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모압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결과입니다. 승리도 태평도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편에서 이기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행복을 만들어 내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 나의 실패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참새 하나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옳다라고 하면서 그 말씀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인정하기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속마음에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살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받고 살아가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은 결코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주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세상 것이 적다 많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아들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아들을 내어 놓으셨다면 그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이 됩니다. 사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지금 있는 소유로 감사하자는 말조차도 죄송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내어놓으신 아들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감사는 자연히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소유를 가지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흔들리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아들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 가져오신 것, 아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것, 그것의 귀함을 알고 살아간다면 과연 그가 세상의 것으로 인해서 마음 졸이며 살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보이기보다는 가나안 백성들이 누리고 있던 문화와 문명들이 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가나안의 문명과 문화가 더 비중 있게 그들의 마음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 멸하라는 말씀을 어기고 철병거를 남겨놨고, 여호와의 목전에서 그들의 신을 섬기고 경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징계하십니다.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강성케 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합니다. 그리고 구원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왼손잡이를 구원자로 세우신 것이고, 31절에서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는 말씀대로 삼갈이란 사사에게는 소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이게 하신 것입니다.
왼손잡이는 무시 받는 대상이었고, 소 모는 막대기는 결코 무기라고 할 수 없는 약한 것입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무기도 강력했습니다. 그러한 블레셋 군사 육백 명을 소 모는 막대기로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은 왼손잡이를 구원자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신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소 모는 막대기를 든 자를 세워서 강한 것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소 모는 막대기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것으로 블레셋을 이기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치 판단을 하는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블레셋이 강한 나라였다면 이스라엘도 블레셋처럼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블레셋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스라엘에게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 모는 막대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무기로 쓰인 것입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강한 무기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 모는 막대기를 무기로 사용한 삼갈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삼갈이나 소 모는 막대기는 모두가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 약한 것이 하나님이 쓰실 때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함을 드러냅니다. 결국 강하신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눈에는 강하신 하나님이 보인 것이 아니라 철병거가 보였고 모압의 용사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강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강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그 앞에 기죽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신앙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강하심을 마음속 깊이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의 깊은 진수일 것입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내가 강해질 필요가 없음을 깊이 깨닫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신앙의 참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여전히 세상의 강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까? 왜 나도 저들처럼 강해지기를 바라면서 항상 약한 것 같은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고 불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를 치시는 강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시는 강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다'라고 말하면서 강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강한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자기 백성일 때 그냥 두지 않습니다. 평소 선망했던 강한 것에 의해서 실패하게 하시고, 평소 믿었던 강한 것을 무너뜨리셔서 오직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들은 오직 말씀에 굴복할 뿐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강한 것이 강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이 보기에는 나약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소 모는 막대기 같은 하찮은 존재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을 때는 하나님의 강하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쓰여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강한 자 약한 자를 구분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선망하는 존재는 모압이나 블레셋처럼 힘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강한 자를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약함과 무능에 대해서 한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들 주변에 소 모는 막대기 같은 존재를 세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힘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하찮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부족함이 없는 충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강함을 바라보는 우리를 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약한 것을 들어서 강한 것을 치시는 하나님의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선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해지고 싶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조건을 갖추고 살아가고 싶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보고 싶습니까?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서 한탄이 나옵니까? 세상에 내세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불쌍한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강하셨습니까 약하셨습니까? 그분은 약한 자였습니다.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찮은 모습과 조건으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강한 힘에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승리를 보이셨습니다. 소 모는 막대기와 같은 모습인 예수님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힘에 굴복하기보다는 말씀에 순종하는 그 삶이 바로 강함입니다. 믿음은 이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충만케 하시는 예수님으로 이미 충만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미 충만한데 무엇에 부족을 느끼겠습니까? 이들이 진정으로 강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강한 자입니까?
삿 4:1-10 나약한 바락
믿음이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주기 위해서 세상에 던져 주신 징검다리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세상이 예수님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 심판하는 기능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 간다'는 용도로 존재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또 교회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점에는 잘못됨이 없지만, 나를 구원하시고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 그 도구로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라고 이해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자기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믿음을 택한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자기 백성을 도구로 삼아서 세상의 죄악을 드러내고 정죄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을 주심으로서 누가 택한 자이고 누가 택하지 않은 자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면 그 선물을 받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믿음이 주어진 자와 믿음이 없는 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주어졌다면 그는 하나님의 택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이기 때문에 믿음을 주신 것이지 인간의 의를 보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믿음이 주어진 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인정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택한 자의 모습이고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믿음에는 심판의 기능이 있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믿음이 주어졌다고 할 때 믿음은 세상의 무엇에 대해서 심판을 하겠습니까? 이것을 알려면 새언약이 주어지기 전의 옛언약 즉 구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구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실패한 존재가 곧 인간임을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것이 구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으로는 안된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 자체가 믿음으로 세상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택함 받지 않은 자는 오직 자신의 힘과 재능을 의지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심판 받을 세상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을 예배당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안됩니다. 믿음을 예배당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 때문에 교회의 타락을 가져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서의 부지런한 종교적 행동을 믿음의 표준으로 강조한 것으로 인해서 많은 교인들이 참된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 자체가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은 하나님의 기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가 곧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고 해서 앞으로 신자는 믿음으로 잘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문에 '나는 항상 세상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니까 믿음이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에 자포자기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린 애당초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힘을 더 미더워 하며 살아가던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서 믿음 없던 본질이 사라지고 오직 믿음이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어리석음이며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생명이며 가장 지혜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의 삶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고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자답게 살아가셔야 합니다. 믿는다하면서 믿음이 있는 자다운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자다운 삶은 어떤 것인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절에 보면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운 사사가 죽은 후에 또 다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는 내용입니다. 실수도 한두번이지 계속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우리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악은 본문으로 그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악입니다. 아무리 사사가 등장을 해서 이스라엘을 고난에서 구원하였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만큼은 해결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악은 이스라엘의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듯 하다가도 기회가 되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악입니다. 다 잘라내었다고 했는데 다시금 싹을 보이는 것이 악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하면서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죄는 죽어야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여러분은 마음 깊이 자각을 하셔야 합니다. 죄는 내가 죽어야 그칩니다. 내가 숨을 쉬고 살아있는 동안은 설사 수족을 못쓰고 자리에 누워있는 상태라고 해도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가 무엇인가를 보이시고자 함이지 죄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가 어떤 것임을 보이시고 그 죄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을 하도록 하시고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죄란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강한가를 모르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를 이겨보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악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 중 누가 반복되어지는 악으로 살아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죄를 해결한 채 그리스도를 찾는 신자가 누구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죄를 해결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처럼 죄로 인해서 자신의 곤고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는 한층 더 깊은 감사와 기쁨으로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시스라'라고 하는 사람이고 야빈왕에게는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강대한 힘으로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지배하면서 심히 학대를 함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더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서 여선지 드보라를 세우십니다. 왼손잡이 에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군대를 죽이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이스라엘 앞에 여자를 사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요즘처럼 여권신장을 떠들면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여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큰 뉴스 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도 남자들만 차지하던 분야에 여자가 처음으로 뛰어들었다면 뉴스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일입니다. 하물며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 여자란 남자의 지배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남자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역할이 여자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칙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에 여자가 사사로 세움을 입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남자가 변변치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남자가 변변치 못하고 신앙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여자를 세우심으로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6,7절에 보면 드보라가 바락에게 명령을 합니다.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드보라가 바락에게 명령한 것은 군대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즉 야빈의 군대 장관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비록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 구백승이라고 하는 철병거가 있고 강한 군대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까 두려워 말고 가라는 것이 드보라의 말이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이 시스라를 네게 붙였다는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락에게 가라는 말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락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8절에 보면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얼마나 나약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락은 혼자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사인 드보라와 함께 가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바락이 홀로 가기를 거부한 것은 시스라에게는 철병거 구백승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병거 구백승을 볼 때 도저히 싸우러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락은 여자인 드보라에게 같이 가 줄 것을 요청을 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란 그 역할이 분명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남자를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남자의 다스림을 받고 살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와 아이들에게 있어서 왕처럼 군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자는 또 다시 의지해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고전 11:3절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함으로써 남자의 위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 11:7-9절까지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을 하는 것을 봐도 이스라엘에 있어서 신앙의 중심적 역할은 남자에게 부여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출 34:23에서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매년 세 번씩 하나님 앞에 보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즉 맥추절 추수절 유월절에 하나님께 나와서 신앙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은 바 말씀을 따라서 가정에서 아이들과 아내를 여호와의 중심으로 신앙으로 가르쳐야 할 역할이 주어진 것입니다.
남자가 하나님께 나와서 가르침을 받고 남자는 집에서 아이들과 여자를 가르침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함으로서 다함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자가 이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의 구원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본문에 등장하는 바락인 것입니다. 바락은 남자로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을 보여주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가 오히려 여자를 의지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락의 나약한 신앙은 무엇입니까? 바락이 약한 여자라 할지라도 함께 해주기를 원했던 나약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락이 철병거 구백승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철병거 구백승과 자신의 힘을 비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생각을 한 바락은 여자인 드보라라도 의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컴컴한 밤길을 걸어갈 때 아무도 없이 홀로 간다면 아주 두렵습니다. 그러나 비록 연약한 아이라 할지라도 내 옆에 누군가가 있어 준다면 한결 두려움이 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락이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홀로 군대 일만명을 이끌고 시스라와 싸운다는 것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라도 나와 함께 해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락은 무엇을 몰랐습니까? 바락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고 능력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병거를 바라보았고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나약한 남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책망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드보라를 세우시고 바락이 두려워 한 시스라를 드보라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신앙의 나약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망각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결과이고 또 앞으로 자신의 모든 미래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못미더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고 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을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평탄할 때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을 하고, 힘들 때는 '하나님은 뭐하시는가?'라고 불평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택한 자를 신자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 무엇임을 아는 신자는 자신이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산다는 것에서 이미 기적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무엇인가를 알고 기적을 맛본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철병거 구백승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남자의 모습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기적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기적을 외면할 때 바락의 눈에는 철병거만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철병거로 인해서 근심하게 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사람처럼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남자의 변변치 못한 실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도와주십니다. 삶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으로 인해서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철병거로 가득차 있습니다. 세상은 철병거를 가진 자로 인해서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철병거가 없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집니다. 이 불만을 해소하는 것은 철병거를 가지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적인 위치에서 살아가십니까? 신자의 구실을 제대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줄 모습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위대한 일이며 기적임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답게 살아가십시오. 다른 눈치 보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열심히 살피십시오. 쓸데없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으로 기뻐하며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것이 신자 구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삿 4:11-24 야엘
인간은 말씀에 의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즉 말씀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종속된 자이고 말씀에 의해서 존재하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말씀을 지킨다거나 인간으로 인해서 말씀이 유지된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의해서 말씀이 유지된다면 최초의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순간 말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인간에 의해서 손상을 입지 않고 하나님이 지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이 말씀이 유지되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인간에게 '너희는 말씀에 종속된 자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에 종속된 자로 사는 것만이 생명 안에 있게 되는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서 생명나무는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생명을 잃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말씀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떡이 생명이 아니라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말씀을 떠나서는 도저히 생명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말씀에 의해서 사는 것이 인간이지 인간이 말씀을 지킨다거나 말씀을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 내가 말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말씀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지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말씀을 실현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운동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어서 스스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실현자는 우리가 아니라 말씀 자체입니다. 우린 다만 말씀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나는 말씀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삶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자기의 꿈과 소망과 환상을 집어넣습니다. 많은 꿈과 소망과 헛된 환상을 가지며 살아가다가 실망하고 낙심하고 무너지고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보려고 애를 쓰지만 다시금 절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말씀에 의해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존재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존재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도를 말할 때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것은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인간의 힘으로 실현하는 차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나를 사용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도하자'가 아니라 말씀이 나를 전도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압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자는 전도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말씀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말씀에 사로잡힌 상태로 살아간다면 말씀에 사용되고 있다는 그 증거가 삶을 통해서 분명 증거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신자라면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사용하고 있는 삶인지 아니면 말씀과 상관없이 나를 위한 삶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인지의 여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여인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사사인 드보라는 바락을 불러서 시스라를 공격을 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락은 시스라의 철병거를 두려워함으로 드보라에게 같이 가줄 것을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전투에 동행을 하게 되고 바락은 14절에서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라는 말씀대로 시스라를 치기 위해서 다볼 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스라를 바락의 손에 붙였다는 말씀대로 시스라는 바락에게 패하여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시스라가 먼저 도망을 친 곳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었습니다. 헤벨이 남자로서 가장인데도 불구하고 헤벨의 장막이 아니라 여자인 야엘의 장막이라고 일컫는 것은 스스로 강한 자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무능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1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고 말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와 전투를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인 겐 사람 헤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헤벨의 아내인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헤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하고 넘어갈 것은 출 3:1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이드로로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호밥'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자들은 '이드로'와 '호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호밥은 모세의 처남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장인과 처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똑같이 호텐이란 단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본문의 이해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만큼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이든 처남이든 모세의 처가는 겐족 출신입니다. 겐족은 원래 가나안 족속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온 미디안 족속에 속한 자손입니다. 그렇다면 겐족속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겐 사람 헤벨은 자기 족속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헤벨은 이스라엘을 압제한 야빈과 화평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17절에서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스라가 헤벨의 집으로 도망을 친 것은 평소 헤벨이 자기 왕인 야빈과 친분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헤벨의 장막이 아니라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즉 남자라고 해서 가정의 중심이 아니라 누구든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가 바로 그 가정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라고 해서 무조건 가장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가 가장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삶을 증거 하는 그가 하나님이 그 가정에 세우신 가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이란 돈을 벌어서 그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굳게 서서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증거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가정에 세우신 구원자이며 가장인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란 누구입니까? 교회에서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은 사람을 '목사'로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고 목사로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사의 위치에서 살아가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사의 위치란 하나님이 목사를 세우신 진정한 뜻 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목사 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에게 사용되어지는 목사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가 바로 목사의 위치에 있는 목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진정한 목사는 노회에서 안수 받은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형제들을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로만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사를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보여주는 일에 사용된다면 그가 바로 목사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목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회장이라고 이름하는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신자가 교회의 중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본문을 읽어보면 시스라는 야엘에 의해서 참으로 잔인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처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야엘에게 있어서 시스라가 도피하기 위해 자기 집을 찾아온 것은 야엘이 계획을 했거나 원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엘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고 야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갑작스런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야엘은 시스라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것은 야엘의 개인적인 원한이 아닙니다. 야엘 개인으로서는 시스라에게 전혀 원한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남편인 헤벨은 시스라의 왕인 야빈과 친하게 지내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엘이 자기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시스라를 보호하고 도와주어서 야빈에게로 돌아가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것은 남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야엘이 생각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대적하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적이라는 시각으로 시스라를 대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이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차원에서만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라를 죽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야엘이 시스라를 환대한 것처럼 속여서 죽인 것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단의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야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시스라를 죽인 것이라고 해서 모든 행동이 용납되어 버린다면 결국 좋은 일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야엘의 거짓된 행동은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엘이 거짓으로 시스라를 환대한 척 한 것은 단지 시스라를 죽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약한 여자로서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죽이기 위해서 안심을 시키고 잠을 재워서 몰래 죽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야엘이 무엇을 생각하였느냐는 것이지 어떻게 죽였느냐가 아닙니다. 야엘에게는 다만 하나님의 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입니다.
물론 이것은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목적이란 착한 일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마음에 두는 것이 좋은 목적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때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피해를 입히는 방법이 동원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자로 하여금 양보하고 손해보는 쪽으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했느냐에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야엘의 행동에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야엘이 무엇을 위해서 시스라를 죽였느냐에 관심을 두면 됩니다. 야엘의 행동은 하나님의 대적을 용납하지 않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과는 화친할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야빈과 친한 남편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은 채 시스라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야엘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우리의 삶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의 삶은 내 입장이나 내 처지를 고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고려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물론 내 인생은 내것이라는 생각이라면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입장을 고려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적인 내 입장보다는 하나님의 입장이 우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얼마나 내 입장에서 살아가고,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야엘의 장막에 시스라가 도망을 친 것은 야엘의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야엘이 시스라가 도망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린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라를 안심시킨 후에 주저하지 않고 죽인 것은 평소 야엘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야엘의 평소의 삶이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말씀을 믿고 말씀에 의지한 자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삶에는 항상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그 삶에서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이 말씀에 종속된 자로서 말씀에 의지하고 산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자로서의 모습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갈등을 가진다면 그것은 자기 입장이 포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만 생각하면 되는데 항상 자기 입장이 포기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을 가지게 되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자기 입장을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들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갈등과 고민 속에서 결국 자기 입장보다는 하나님이 말씀이 실현되는 쪽으로 자신을 맡기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말씀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입장을 포기하고 말씀이 증거 되는 쪽으로 밀어붙인 것입니다.
바락은 시스라의 군대를 두려워했습니다. 철병거 900승이라는 힘이 바락에게 두려움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바락이 평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헤벨은 자기 족속을 떠나 살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야빈과 화친을 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입장만 생각한 삶입니다. 이러한 남자들 가운데 야엘은 남편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도 고려하지 않은 채 다만 하나님의 적이라는 차원에서만 시스라를 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사고방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고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조차 말씀의 능력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서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일에 사용하시기를 원하고, 내 입장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에 나를 밀어붙이고 또 끌어가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간다면 분명 여러분은 주어진 모든 상황과 사건에서 내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행동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가 비록 나에게 능욕으로 고난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야엘이 만약 자기 입장을 고려했다면 시스라가 하필이면 자기의 집으로 도망을 친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많은 불만이 바로 그런 것이지 않습니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불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신다고 할 때 '왜 하필이면 나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시는가?'라는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 입장을 포기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자기 입장은 언제나 편하고 좋은 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신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즉 자기 입장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야엘은 시스라가 자신의 집에 온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스라가 도망온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의 모습만 보였을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원망도 불평도 하지 마십시오. 일어난 일에 대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한들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취소되지 않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일어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것인가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삿 5:1-9 헌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한 채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의 모든 내용에 대해서 전혀 엉뚱한 상상과 추리를 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르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으며 세상의 피조물된 인간에게 무엇을 찾으시는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면 그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 자체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이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역시 무지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란 자신에게 관심을 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가운데 있는 인간은 자신에게서도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인간의 본질이 어떤가에 대해서도 무지할 상태인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인간의 모습은 선한 행위의 껍데기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본질이 악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선을 추구합니다. 하나님 역시 인간에게서 선한 행위를 기대하고, 실천을 원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없는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본문을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흔히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라고 말합니다. 1절에서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래'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입니다. 노래는 곧 찬송을 말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찬송이라면 곡조를 붙여서 하나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찬송이 그러한 것이라면 다른 종교가 자기들의 신을 노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찬송가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이방종교에도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는 있습니다. 찬송이란 이방종교가 자기들의 신을 노래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러한 노래는 누구든 부를 수 있습니다. 교회만 나온다면 자연히 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 없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른다고 해도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찬송은 자신의 입으로 곡조 붙여 부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입으로 부르지 않는 찬송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찬송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든지, 회개를 한다거나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행위와 연결 지어서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행위가 없는 것은 신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믿음의 행위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주님 내 죄를 용서 해주십시오'라고 고백하면서 기도하는 것만을 회개로 인정을 하고, 성도가 모여서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것만을 예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기준과 근거는 자신의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행위는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 개인의 행위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노래 역시 자신의 입으로 직접 부르는 것으로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양이란 필히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한 구원의 사건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이 노래는 홍해를 건너기 전에는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해에서의 구원 사건을 직접 체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노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오늘날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과는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은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지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홍해에서의 이스라엘의 노래나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체험함으로서 부르게 된 노래였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 부르게 하신 노래인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찬양이란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서 나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연히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노래한다면 그들에게도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대적인 가나안 왕 야빈을 물리치시고 승리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찬양도 그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용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고 애굽을 멸망하신 사건을 노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사 되셔서 승리케 하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과 찬송은 하나님이 받으심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찬양이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역시 같습니다. 이들도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승리케 하신 것을 찬양을 합니다. 3절에 보면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을 하는데, 이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열방에 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이방인에 대한 심판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서 '너희 왕들아'라고 말씀을 하지만 드보라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의 체계가 아니었음을 생각할 때 이방인을 향한 선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부터 노래하는 구절 하나하나가 여호와가 누구시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로 인해서 부르게 된 진정한 찬송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로 인해서 부르게 된 찬송은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가 말린다고 해서 중지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찬송이 우리의 의지나 입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사용하심으로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누구의 요구에 의해서 움직이신다거나 또는 멈추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이 부르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노래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으로 부르는 노래를 어떤 분위기나 자기 도취에 의해서 열광적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에 의해서 불려지는 노래란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면 도저히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찬양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른다는 내 행위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도 성령에 의해서 찬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서 감사하게 되어지고 모든 것이 여호와로 말미암았음을 깨달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헌신에 대한 이해는 앞서 말한 대로 성령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도구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해하는 헌신은 거의 모두가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포함된 봉사와 충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즉 인간으로부터 발생한 수고와 열심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며 자신에게 있는 돈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에게 내어놓으며 교회의 일을 위해서 열심이 특이한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헌신에는 그러한 측면의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들은 사사가 죽고 없으면 이방신을 섬기고 여호와께 악을 행했던 사람들입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시스라와 싸우라고 하자 드보라에게 함께 가지 않으면 싸우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나약함만 보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일만명이 뽑혀서 시스라의 군대와 싸우긴 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한 백성들의 헌신이란 바로 하나님의 군대로 뽑혀서 시스라와 싸운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가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일만명 군사입니까? 아니면 드보라와 바락의 힘입니까? 그 누구도 아니라 여호와가 친히 이스라엘의 두령이 되셔서 싸우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어디에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헌신했다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헌신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헌신을 한 이스라엘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헌신하였으면 백성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이 당연한데 왜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백성들의 헌신이 아니라 여호와의 헌신인 것처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싸우신 분은 여호와입니다. 헌신한 분은 여호와이시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위해서 헌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헌신을 하신 것입니다. 헌신은 여호와께 있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헌신에 대한 큰 오해입니다. 많은 교회는 헌신을 마치 인간이 여호와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여호와를 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여호와께서 인간에게서 받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까? 예배당입니까? 많은 수의 교회당을 짓는 것이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도록 하는 것입니까? 기독교의 세력 확장입니까? 불교를 믿는 자가 1000만이고 기독교를 믿는 자가 500만이면 기독교가 불교에게 진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무능한 기독교가 되는 것입니까?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는 여호와가 승리하게 하셨으니까 여호와를 위해서 헌신하자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즉 헌신한 것에 대해서 찬송할 뿐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은 헌신을 한 것이 없습니다. 군사로 나가서 싸웠다고 해도 승리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것이지 이스라엘의 헌신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바로 이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애굽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을 회상하는 노래로 볼 수 있습니다. 신 33:2절에 보면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과거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여호와가 야빈과의 전투에서도 함께 하셨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또 6절을 보면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죄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과 하솔 왕 야빈의 압제를 받아 고통 하게 하시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삼갈을 세워 블레셋 사람 600명을 소모는 막대기로 죽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야빈의 압제를 받던 때는 그의 군대장관이던 시스라를 야엘이라는 여자를 들어서 죽이셨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압제로 인해서 대로가 아닌 소로로 다녀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친히 구원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7절에서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다는 표현도 드보라가 잘났다거나 드보라 자신을 높이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연약하며 무능한 상태에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구원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노래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승리하게 하셨고 여호와로 인해서 살고 여호와로 인해서 존재한 것이 이스라엘이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서 다시금 이스라엘의 방백들의 즐거운 헌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방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도구로 세워진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헌신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진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이스라엘 방백들의 수고와 노력을 헌신으로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헌신이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드린 것은 또 무엇입니까? 십일조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돈에 여러분의 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면 십일조는 내것을 여호와의 것으로 내어놓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께 반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은 내것이니까 나에게 내놔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아무리 교회에 갖다 바친들 돈이 하늘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죄악된 본래적인 마음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마음을 받으십니다. 새롭게 창조된 마음이란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성령으로 인해서 되어진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 마음을 받으시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에도 우리의 수고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헌신이란 없는 것입니다.
건강으로 봉사한들 그 건강 역시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건강은 우리의 힘으로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건강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것을 헌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수고하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사건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헌신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헌신하신 것입니다. 그 헌신의 결과가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헌신을 선포하고 나타내는 역할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헌신입니다. 드보라가 노래한 백성의 헌신이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어지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부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 증거 하는 역할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이 일에 충성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뭔가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도구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헌신은 십자가에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삶을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만 사셨습니다. 자신의 포부와 꿈은 전혀 존재하지 않은 완벽한 헌신이었습니다. 이러한 헌신을 감히 누가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신자는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의 헌신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찬송할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자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헌신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남은 것은 그리스도의 헌신을 세상에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신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일에 참여되어 살아가는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헌신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상에 세우신 도구답게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헌신은 특정 인물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 모든 자가 헌신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헌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계속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할 단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고 높임 받을 자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의 임무를 수행할 자로 부름을 받은 자가 바로 신자입니다. 이 일에 참여된 것을 기쁘게 여기며 어디에서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헌신으로 인해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노래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이 즐거이 헌신하는 삶입니다.
삿 5:10-13 용사를 치심
인간은 어떤 형태든 전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총 칼을 들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상대방이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웃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자신이 소유한 가구과 그 집의 가구를 비교합니다. 그리고 내가 소유한 것보다 더 못하다는 판단이 내려질 때 자신이 더 위라는 것을 확인하고 승리감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반면에 상대방이 자신의 것보다도 더 많은 것, 더 나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패배감과 불행을 느끼면서 상대방이 소유한 것을 자신도 소유하고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인의 전쟁에서 무기는 모든 것입니다. 자신의 미모, 돈, 지식, 재능, 자식, 남편, 아내, 모든 것을 상대방을 누르고 자신보다 한 수 아래임을 증명하는 도구로 이용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경쟁 상대를 염두에 두고 행동을 하게 되고 자신이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용사의 몫입니다. 힘있는 자들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고 힘이 없는 자는 항상 억압받고 눌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 스스로 용사이기를 바라고 또 용사 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승리하기 위해서 살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으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의 삶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그리스도로부터 출발시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에게 과연 전쟁이 있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전쟁은 자신을 위한 전쟁이 아니고 타인과 삶의 질을 비교하는 전쟁도 아니며 힘을 소유하는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쟁은 오직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것에 있었습니다.
용사란 자신의 힘을 믿는 자를 말합니다. 힘이 있기에 자신의 힘을 믿고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로서 군림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힘 앞에 예수님은 힘없는 자로 등장해서 전쟁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는 죽으심이었습니다. 힘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힘을 이기기 위해서 스스로 힘있는 자되는 것도 추구하지 않고 다만 오신 그 모습 그대로 살다가 죽으신 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힘을 추구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힘이 곧 힘이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힘이 힘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를 살리는 힘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힘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억누르고 굴복하게 하는 힘이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인정하신다면 마음껏 소유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생을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소비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힘을 거부하신다면 신자는 힘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힘을 소유하기 위한 삶이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삶이라면 아무리 힘을 소유한 용사가 되었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끝나는 인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서 보이셨습니다. 용사가 아니고 영웅이 아니라 연약한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보내심으로서 하나님은 힘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분이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말한다는 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기에 급급하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아서 돈을 원하고 출세를 원하는 모든 것이 자신을 용사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용사를 거부하시고 오히려 용사와 더불어 싸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용사 되기를 소원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용사를 거부하신다는 그 증거를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의 말씀에 이어서 본문도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하나님의 승리로 인한 구원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노래한다는 것은 그냥 입을 벌린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진심으로 체험한 자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물론 누구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언급할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노라고 장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을 체험한 신자라면 분명히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10절에 보면 "흰 나귀를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할지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흰 나귀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상위 계층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길에 행하는 자들이란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 하위 계층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하면서 그들에게 선파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선파하라는 것입니까? 11절에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라는 말씀을 보면 무엇을 선파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다스리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파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활쏘는 자의 지꺼림이란 말에서 활쏘는 자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야빈 왕의 군대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말을 지꺼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말 앞에서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한다는 것은 이방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 군대를 물리 쳤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마음놓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칭송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멀리 떨어진 물긷는 곳이란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물을 긷는 것은 여인들의 일입니다. 그런데 약한 여인이 멀리 물을 길으러 간다는 것은 이방인의 압제 아래 있는 상황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야빈 왕의 압제에 있을 때는 물을 긷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우물에까지 간다는 것은 결국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되어서 평화로운 삶을 산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칭송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군대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준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이란 이방인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신 구원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차원에서만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야빈 왕을 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야빈 왕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키시는 대적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에 무지하다면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신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2절에 보면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드보라는 스스로 '깰지어다 깰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깰지어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밝히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있을 때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선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알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단지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깨어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깨어있는 신자는 분명히 한가지 보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용사를 치신다는 사실입니다.
13절에 보면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용사를 치시는 것입니다. 야빈 왕을 치는 것이 아니라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대적은 야빈 왕이 아니라 용사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자가 곧 깨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이라면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데 누가 과연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를 치시는가에 대해서 귀를 기울어야 할 것입니다.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다는 말씀에서 '용사'란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고 벗어나야 할 것으로 인식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신자입니다.
용사는 자신의 힘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용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족한 것이 많고 나보다 잘나고 힘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용사가 아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용사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고, 자식만 잘되면 나의 미래도 탄탄하다고 굳게 믿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어도 살아갈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강한 성도들로만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대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용사가 아닌 힘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드보라는 깰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고 그 의로운 일을 깨닫고 선파하며 살아가는 자 되기를 노래합니다. 드보라는 연약한 여자입니다. 연약한 여자로서 이스라엘의 사사의 일을 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남자들을 다스리고 이스라엘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강한 리더십과 용사와 같은 면모가 필요한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래야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복종하고 자신을 의지하도록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드보라는 하나님에게 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여자이기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드보라는 단지 연약한 여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했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힘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셨다면 드보라가 아닌 드보라보다 더 힘이 있는 사람을 사사로 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일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깨어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즉 신자는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는 힘있는 용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자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곧 능력이고 힘이기 때문에 우리가 용사로 살아가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용사시기 때문에 신자가 용사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는 다만 하나님이 강하시고 능력이 있으심을 의지하고 살면 됩니다. 그런데도 내가 용사가 되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없이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대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사를 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사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힘있는 자되기를 소원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깨어있지 못한 무지의 상태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하나님이 왜 강림하셨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옛날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명백하게 증거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스도로 증거된 것입니다. 그리고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스도가 힘에 의해서 죽으심으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용사를 치심으로서 용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이셨지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힘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곧 죄악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임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힘을 추구하고 용사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곧 죄악이며 그러한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악의 세력에서 건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힘을 원하는 자 힘으로 망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힘을 원하며 그리스도를 찾습니까? 왜 힘을 사모합니까? 왜 남보다 뛰어난 용사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까? 다른 교회는 다 망해도 내 교회는 잘되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입니까? 과연 그것이 예수님에게서 출발한 사고방식이겠습니까? 힘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눈앞에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추구하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이것이 깨어있지 못하는 무지이고 소경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힘을 버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힘을 포기한 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회만 있으면 힘되는 것을 붙들려고 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다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힘을 추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여러분의 모습에서 멸망의 비참함을 발견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자신을 멸망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용사를 선호하고 힘을 추구하는 여러분의 본질 속에서 멸망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여러분의 실체를 발견하실 때 비로소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힘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추구하고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자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라는 곳에 기도하러 가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잠을 자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 마음에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잠을 잔 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모르기에 그들의 죄를 지고 죽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잠자는 상태입니다.
깨어있지 않는 신자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예수님을 모르기에 하나님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나에게 힘을 실어주고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우상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예수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는데, 그 앞에서 나를 위대한 사람으로 힘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예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분인 것으로 인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중요하고 내 뜻이 소중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은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본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자는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힘에 의해서 죽으신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대체 약자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겠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안다면 힘을 원하는 자신의 죄의 모습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힘을 거부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워진 나라임을 알기에 여러분에게 힘을 추구하는 것이 죄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체험한 신자라면 힘을 추구하고 용사 되고자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신자의 증거물입니다. 이러한 증거물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서 의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가 무엇인가를 보이셨습니다. 승리란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유입니다.
용사를 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깨어 있는 신자입니다. 용사를 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그도 역시 하나님과 함께 용사를 치는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치는 것입니까? 성령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내가 힘을 추구하고 용사 되기를 소원하는 옛사람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선한 싸움입니다. 여러분의 뜻보다는 여러분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깨어있는 신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삿 5:23-31 복과 저주
인간의 욕심이란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단지 우리들이 욕심이 욕심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욕심에 이끌려서 자연스럽게 살아왔을 뿐이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삶 자체가 이미 욕심이었으며, 욕심 안에서 허덕이고 욕심 안에서 힘들게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욕심이 발동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으니 믿음조차도 우리의 욕심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표현이 너무 지나쳤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제가 16줄의 이 글을 쓰기까지는 무려 3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한 페이지를 쓰고 지워버리고, 또 한 페이지를 쓰고 다시 지워버리고, 다시 또 한 페이지 반을 쓰고 또 다시 지워버리기를 반복을 하면서 3시간 20분이 흘렀습니다. 왜 지워버렸느냐고요? 물론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면서 이번주 주보는 포기할까를 거듭 생각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힘들다고 느끼면서 왜 하는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설교를 쓰고 있는 것인지, 말은 성도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혹시 나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많은 생각을 거듭하면서 결국 글에 매어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설교를 포기하지 못한 채 설교를 쓰고 있으니 마음에 안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설교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마음에 두고 설교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에 드는지 안드는지가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에 대한 욕심인 것 같습니다.
멋있는 글, 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글, 복음을 전하는 목사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 글을 의식했던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멋있는 단어를 사용을 하고, 문장을 멋있게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여러분에게 생명을 줄 수 없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익한 인간의 무익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남기고 그리스도를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멋있는 설교문을 남기고 빛나는 문장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이 담긴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글 역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저를 살피게 됩니다.
이러한 제 자신을 살피면서 인간은 욕심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임이 실감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아무리 그 시작은 선한 동기였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만족으로 결론짓게 되는 것이 인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자기 만족을 느끼고, 글을 통해서도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는 설교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자각하며 설교를 쓰게 됩니다. 감사한 것은 설교로 생명과 은혜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설교를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설교로 생명과 은혜를 줄 수 없음을 설교하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무익한 자이기에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고급스러운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단지 무익한 자로서 알게 된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할 일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익한 자들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분이 과연 하나님에 대해서 유익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사사건건 자기 욕심을 발동하고 무엇을 해도 자신을 위해서 하게 되는 우리가 입으로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과연 그리스도를 위한 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도움이 되는 자로 살아가겠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이미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돕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메로스라는 거민이 어떤 거민인가는 알 수 없습니다. 메로스 거민은 이 본문에서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메로스 거민이 어떤 거민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로부터 왜 저주를 받았느냐 입니다. 여호와는 메로스를 저주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아니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것은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을 도와서 야빈의 군대를 치지 아니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여호와를 돕는다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아주 중대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과는 반대가 됩니다. 저는 앞에서 말씀드리기를 인간은 무익한 존재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도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여호와를 도울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면 과거 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지금의 우리나 메로스 거민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메로스 거민도 무익한 인간이기에 하나님께 도움이 안되는 존재임이 분명한데, 여호와는 그들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참으로 무익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이 과연 여호와를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여호와를 도울 수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분명히 우리는 무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욕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 도움이 되는 것을 구제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차원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14절부터 보면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언급하면서 야빈과의 전투에 참여한 지파와 그렇지 않은 지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가령 14절에서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요 그 다음에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암호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말 같지만 사실은 전투에 참여한 지파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요'라는 구절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이번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멜렉이 거주하던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라는 말도 역시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전투에 참여한 자들이 있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리고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고'라는 말도 역시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마길은 므낫세의 독자였습니다. 따라서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다는 것은 므낫세 지파에서도 군대의 지도자들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라고 말하지 않고 마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므낫세 지파는 반으로 나뉘어져서 요단의 동편과 서편에 거하게 되었기 때문에 므낫세라고 말하지 않고 요단 서편에 거하게 된 마길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라고 말하면 요단 동편과 서편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성경 이해를 위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전투에 참여한 지파가 있는가 하면 17절에서와 같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안함을 추구한 지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저주하라고 하시는 것은 다만 메로스 거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메로스 거민을 행한 저주가 아니라 누구든 여호와를 돕지 않은 자에 대한 저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신자로서 여호와를 도우며 산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으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까? 본문의 내용대로 한다면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 왕을 칠 때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24절부터 나오는 야엘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메로스 거민은 저주를 받지만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5절부터 야엘이 시스라에게 우유를 대접하고 안심을 시킨 뒤에 말뚝을 박아서 죽인 것에 대해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야엘이 공식적으로 군사로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죽였다는 것은 이미 그 전쟁에 참여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렇게 본문에서 나타난 복과 저주는 전투에 참여한 것과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이 됩니다. 전투에 참여한 것은 여호와를 도운 것으로 여겨져서 다른 사람보다 더 복을 누리게 되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여호와를 돕지 않은 것으로 인정돼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익한 종으로서 여호와를 돕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본문에서 말하는 전투에 참여함이 복이고 참여하지 않음이 저주라는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여호와는 단지 야빈 왕을 치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음을 말씀드렸습니다(삿 5:13절). 용사를 치신다는 것은 여호와의 대적이 야빈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대적은 용사이지 야빈 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대적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욕망에는 용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용사가 되고 싶고 용사로 살고 싶은 우리들의 욕망, 그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곧 여호와의 공격을 받아야 할 대적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지말고 바로 나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욕심을 찾아볼 수 없다면, 힘있는 존재가 되어서 타인을 굴복시키기를 원하는 욕망이 없는 존재라면, 진심으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한분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분명 여호와의 대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라면 아무리 우리가 거부하고 부인한다고 해도 우린 틀림없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원수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내세워서 끝까지 여호와의 대적이 아님을 주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에 대해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 모습에서 결국 욕심만이 보여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면 우린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긴 제가 믿지 말라고 부추겨도 우린 이미 믿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그런 말도 의미가 없지만 말입니다. 제가 믿음을 포기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을 자기 소유로 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믿으려고 할 때는 자신의 행함과 정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행함과 정성을 의식한 이상 그것은 이미 믿음을 자기 소유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린 그저 받게 된 것이지 우리가 믿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다만 여호와를 대적하는 원수였을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치시는 용사가 곧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야빈을 치면서 하나님은 용사를 치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결국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공격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음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야빈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자신을 공격하는 마음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전쟁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용사를 치시는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내가 나를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게 된 자로서 세상을 힘으로 살지않고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곧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용사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십니까? 이것은 지난주에 물었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용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그들은 용사였습니다. 자신들의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얼마든지 믿음을 지킬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도 말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사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은 그 무엇도 믿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기도도 헌금도 그 무엇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이 다 무익한 것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기도나 헌금이나 예배를 무익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에 대해서 반발이 된다면 그 이유는 기도 헌금 등의 행위를 여러분의 소유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을 치는 것이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돕는다고 해서 우리들의 행위로 하나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무익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돕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야빈을 치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일이 되는 것은 전쟁은 승리는 여호와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 참여해서 열심히 싸워서 여호와를 도와주라는 것이 아니라 승리는 여호와로 되어진 것임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무익한 자임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승리는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다른 지파에게 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득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득을 생각합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일을 생각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드러나지는 것보다는 내 이름이 드러나고 자랑되어지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에서 멀어지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야엘이 복을 받은 것은 여호와의 일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남편이 야빈과 친분이 있다는 것도 무시한 채 단지 하나님만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있는 자의 행동인 것입니다.
용사를 치신 하나님이 실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보다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돕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난해져라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힘을 가진 것, 위대한 용사된 것이 헛된 것임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전쟁이 일어나야 합니다. 힘을 선호하고 나의 이름이 세상에 기록되기를 꿈꾸는 욕심이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악임을 깨닫고 내가 바로 주님을 대적하는 무익한 자임을 가슴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 모두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외면한다고 해도 자신의 무익함을 발견한 성도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참된 가치와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힘으로 사는 자를 치는 것입니다. 그 전쟁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전쟁을 돕는 신자라면 여호와 편에 서서 힘을 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욕심이 어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욕심 안에서 참으로 무익한 우리들의 실체가 보여질 것입니다. 스스로의 무익함을 알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낮아지신 그리스의 자리에서 세상의 헛됨과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돕는 자의 삶입니다.
삿 6:1-10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십니다. 이로 인해서 미디안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인해서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즉 미디안을 피해서 산에 피난처를 만들어서 생활을 했다는 뜻입니다. 또 3절,4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그들이 몰려와서 식물을 노략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생계에 큰 위협과 고통을 당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우린 금방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징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징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에서 구해주시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순서이고 짜여진 각본이기도 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혹시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징계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재빠르게 후속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은 빨리 하나님의 징계를 종결시킬 수 있는 행위를 내쪽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빨리 찾아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효력을 봤으니까 이제 그만 중지해도 괜찮다는 인상을 하나님에게 심어주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된 자로서의 회개가 아니라 회개를 위한 회개, 즉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조치와 수단으로서 하는 회개라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차원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히 12:8절의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는 말씀도 단지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가르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도 단순히 죄에 대한 징계로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단지 죄를 지으면 벌주시는 선생님 같은 분으로 인식하고 지나친다면 그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고 벌주시는 분이니까 죄짓지 말자는 교훈으로 끝낼 문제들입니까? 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하라는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하나님을 찾아서 부르짖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아서 부르짖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교인의 상식으로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찾아서 열심히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해결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상식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미디안을 물리쳐서 이스라엘을 다시 평안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이 8-10절의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과거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가를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시고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접을 했다면 과연 어떤 태도의 삶을 보이게 되었을까요? 과거 자신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자기들의 것으로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들과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단지 자신들의 고통만을 생각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징계는 이스라엘에게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은 징계 속에서 자신들의 고통만을 생각합니다.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속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수준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이스라엘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조차 하나님을 찾을 줄 모르는 이스라엘보다 더 못한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죄지으면 징계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현재 처한 어려운 상황이나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되어진 결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징계이든 징계가 아니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징계면 어떻고 징계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징계가 아니면 마음이 좀 편합니까? 하나님에게 벌받은 것이 아니어서 고통에 대해 떳떳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이 모두가 자신의 체면과 신앙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의 징계다'라고 할 때 발끈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자존심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살아가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뭐 하나 잘한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큰소리칠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해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면됩니다. 징계 받아 마땅한 자로 서시고, 온갖 창피는 다 당해도 마땅한 자로 서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신자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징계 속에서 자신의 고통에만 염두를 둡니다. 미디안의 압제를 받아 마땅한 악한 자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만을 기대하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조금만 힘들어도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이야기를 하시면서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고 책망을 하십니다.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로 공경을 하는 것은 부모의 말에 대해 청종을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부모에게 용돈을 주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한다고 해서 부모 공경이 아닙니다. 부모의 말씀에 대해서 청종을 한다는 것은 아직 자신을 부모의 간섭 아래 있는 존재로 인식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간섭을 벗어난 자식은 부모의 말을 청종하지 않습니다. 이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선언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것이 과연 단지 벌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에 붙여서 7년 간 고생을 하게 하신 것은, '너희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삶이 누구의 간섭 아래 있는가를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디안의 압제를 받게도 하시고, 그 압제에서 벗어나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를 통해서 세상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생이란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도 바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인생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만약 인생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안다면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이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마음을 바꾸시거나 뜻을 달리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임을 잊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신자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으신다면 과연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삶입니까? 사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인하고 그 하나님을 증거하며 살아가려고 하기보다는 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신자라면 어떤 힘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힘도 하나님의 능력을 초월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디안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지 못한 결과이듯이 오늘 우리들의 두려움 역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지 못한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하다고 말합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보면서 스스로 미약하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아마 자신들의 미약함에 대한 한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미디안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부르짖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압제하는 미디안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호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르짖음이든 그 시작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중요하고 자신이 중심인 이상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나약함은 결코 미디안에 비해 소유한 것이 적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소유로 인한 힘을 준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자기보다 더 힘이 센 다른 민족을 대할 때 다시금 나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나약함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징계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이 자신들을 간섭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의 강함은 힘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임을 잊지 않는다면 신자는 어떤 힘 앞에서도 자신이 미약하다는 좌절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진실로 강한 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가 징계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징계로 인해서 주어지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징계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간섭받고 있는 증거입니다. 다만 주어지는 고통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넘어지는 것 하나에서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간섭하고 계심을 배우십시오. 억지로 그렇게 인정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분명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간섭하는 이상 여러분은 그 무엇에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생명이 아닌 이상 돈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발견될 때 하나님 앞에서 할말이 없는 자로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깨달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삿 6:11-18 큰 용사
세상의 상식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맡기는 사람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 사람의 능력과 힘을 보고 맡기는 것이고 일을 맡은 자 역시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의 능력과 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는 초등학생이 대학 교수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자기 한몸 가누기조차 힘든 나약한 자를 군인으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대학 교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교수로서의 합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게 되고, 군인으로 부르기 위해서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분명 능력과 힘이 필요합니다.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만한 능력과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기면 '나는 너무 부족해서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듣게 됩니다.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분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직을 맡겼을 때 대다수의 사람은 '나같이 못배운 사람이 무슨 교사를 하는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몸으로 때우는 일에는 겁을 내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뒤로 피하고 물러서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남들 앞에 서서 뭔가 가르친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남들 앞에 서서 가르칠 때 자신의 무식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모세처럼 말주변이 없어서 인도자로서의 일을 피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따져가면서 일을 맡기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점을 생각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시각들이 수정될 수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사사로 부름 받은 기드온의 이야기입니다. 사사란 이스라엘의 재판장의 위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에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택함을 입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지도자란 남과 다른 재능과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등장하는 기드온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 예외의 인물입니다. 예외의 인물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것이 기드온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인간의 상식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를 기드온에게서도 유감 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보면 이미 기드온이 힘과 능력에 있어서 큰 용사이기 때문에 그를 불러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도 하지만, 당시 기드온이 하고 있었던 일을 본다면 그러한 가능성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날 당시 밀을 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드온은 용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미디안 사람들은 곡식을 수확할 때가 되면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수확한 것을 모두 탈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밀을 몰래 타작을 하기 위해서 포도주 틀을 이용해 타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기드온에게는 용사로 불리고 사사로 세움을 받을만한 자질이 없었음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향해서 큰 용사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사란 우리들의 자질이나 능력 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의식은 항상 우리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질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자질을 생각함으로서 내가 저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용사란 힘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조건들이 가져다 준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용사의 힘은 세상이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힘은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용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을 하지 않지만 실제 삶에서는 부정을 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용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는 인정을 하면서도 용사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정을 합니다. 그 이유는 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이 말씀대로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셨다면 이러한 일, 즉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압제를 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몰래 밀을 타작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옛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적을 행하신 것처럼 자신들도 그러한 이적으로 미디안의 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당연한데 그러한 이적이 없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부터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이런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기드온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환경의 개선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분이라면 그것과 같은 이적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의 사건이나 이적이 자신에게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면 오늘 미디안에게 압제를 당하는 우리를 이끌어 내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기드온과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있을지언정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신자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는 하는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기도는 듣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결국 기드온처럼 환경의 개선이 아닌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분명 나를 좋은 환경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환경이 더 나아지고 나쁜 것이 사라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싶고 그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고 싶다는 의도이기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아닌지요?
과연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없었다고 생각되십니까?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엄청난 이적을 체험함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분명히 확인하였으면서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겨우 먹을 것이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놀라운 체험도 결국 자신의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잊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란 계속해서 자신의 편안함과 행복을 즐기고자 할 뿐 삶에서 하나님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모습에서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믿지를 못하는 기드온은 결국 자신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도우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자신은 무능력하고 자질이 없고 힘이 없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던 기드온은 힘과 능력을 자신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기드온은 15절과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의 이 말을 단지 불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물론 불신앙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불신앙이라고 압축해서 결론지어 버리면 기드온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넘어가 버릴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문제는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 능력이 있으신 분을 의지하지 못함으로서 자신에게 있는 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러한 문제를 가진 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자신의 환경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자신들의 악한 환경이나 상황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었기 때문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들의 환경이나 상황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린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혀 믿지 못한 채 신앙의 껍데기만 둘러쓴 신자아닌 신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십니다. 인간의 자질이나 능력으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환경과 상황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말씀하는 것에서 우린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분명 용사로서의 자질이 없는 기드온을 불러서 용사로 쓰신다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몰래 타작을 하는 기드온의 성품을 보면 기드온은 당시 주위 사람들에게도 용사의 자질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용사 같지도 않은 기드온이 용사로서 행한다면 사람들은 기드온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만약 평소 기드온이 용사처럼 행했다면 칭송되는 것은 기드온의 용사와 같은 자질일 것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드온이 자기 힘으로 한 일로 여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혀 용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용사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용사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이 용사 되게 하신다는 것을 전제한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큰 용사로서 부름 받은 기드온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닙니다. 자질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드온이 약자라면 그냥 약자로 있으면 됩니다. 약자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됩니다. 용사에게 필요한 힘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용사란 우리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용사입니까? 자기를 키우려고 하지 않고 약하면 약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가 큰 용사입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부르신 것은 '너를 이러한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부여된 부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지가 부여된 부름이라면 그것은 이미 되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지는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참으로 강한 믿음입니다.
자신을 보면서 힘이 있다고 생각되고 뭔가 일을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면 힘이 나고 자신감이 생기는데, 자질이 없고 일도 잘 못하고 하는 일도 안된다고 여겨질 때 낙심해 버리고 포기해 버린다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일이 안되고 막히고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가 곧 큰 용사입니다.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되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면, 힘이 있다고 여겨지면 강하고 힘이 없다고 여겨지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믿는 자는 용사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함이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힘만 꺾어 버리면 결국 강함도 꺾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다면 그는 자신의 조건이나 자질과 상관없이 강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용사란 자신의 강함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신 분임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말합니다. 분명 자신의 강함이 증거될 때 그에 따른 쾌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결국 나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자신의 약함을 실감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기쁨을 두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가 바로 큰 용사인 것입니다.
약한 자로 존재하는 것이 싫습니까? 힘으로서 많은 사람을 이기고 그들을 굴복시키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든 지기 싫고 꼭 이기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까? 약자로 산다는 것이 죽기 보다 싫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어리석은 우리들을 깨우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들이 갖기 싫은 모든 것을 가지시고 스스로 약자의 자리에서 사신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그 음성을 듣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삿 6:14-24 표징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10년을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외국 사람을 만나면 말 한마디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것이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학교에서의 영어 교육이 너무 문법에만 치우친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영어 교육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장을 분해하고 해석하는 것에는 능수 능란하지만 실제 대화는 전혀 하지 못하는 벙어리 영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영어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어 교육의 문제가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문제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을 가기 위해서 시험을 치기 위한 문제집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공부하고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만 있으면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단지 우리가 공부해야 할 과목으로 이 세상에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학교에 가면 '성경'이란 과목이 있고 주일에 교회를 가서도 목사에게 확인 도장을 찍어야 점수가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성경이나 교회출석을 점수를 얻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다니게 하겠다는 의도는 이해를 하지만 단지 교회를 나가게 하고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난다면 결국 그들의 생활에서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분명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독교 학교에만 국한된 문제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문제이고 성도의 문제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답답한 것 중 하나는 제가 설교한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가 설교한 대로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실제 삶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의 삶을 모르니 알 수 없는 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살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여러분을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문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맞아' '그렇게 살아야지' 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고 해서 신앙이 다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맞다고 인정한 그 말씀 하나하나를 가지고 삶을 점검하고 두드려보고 생각하는 과정이 분명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삶을 간섭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말씀은 말씀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여러분을 간섭하시고 함께 하고 계시는데 정작 신자가 삶에서 말씀을 벗어버린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외국인과 대화 한마디하지 못하는 벙어리 영어처럼 수십 년을 성경을 보고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삶에서 다가오시고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것이야말로 벙어리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납니까? 예배당이니까? 성경책 속입니까? 아닙니다. 삶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이 곧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삶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의 질과 환경은 다양하지만 동일한 것은 어떤 삶이라고 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질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동일하게 모든 삶에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적으로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실제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의 차원에서 가르치고 배운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데는 무기력한 성경이 되버린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에만 존재하고 실제 삶에서는 사라져 버린 하나님의 말씀, 참으로 안타까운 문제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상하게 들려질 수 있겠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상상하면서 막연하게 '나와 함께 하시겠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의 신앙이 힘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나 함께 하심을 막연하게 상상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이 없으면서 다만 교회를 다니고 복음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는 추측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무한한 능력과 힘으로 작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무기력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말의 뜻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 말씀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시고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삶에서 얼마든지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 안에 있는 것이지 하늘에서 기회를 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신자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릴 것은 예배당의 설교로 그치는 말씀이 되지 않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고 인도하고 가르치는 말씀이 되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삶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삶이 아니라면 그분의 하나님은 머리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머리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삶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부딪힐 때 전혀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는 현장을 깨닫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신자가 어떤 문제가 있게 되면 '하나님 나와 함께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신자라면 함께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를 묻게 될 것입니다.
문제를 가져오시고, 문제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즉 물리적인 힘을 능력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신자는 문제 해결을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와 만나지 못한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이 길어 졌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문제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대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도저히 용사로 불려질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을 용사라 부른 것은 능력이 기드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용사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 곧 용사로 불릴 수 있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네 힘을 의지하라는 것은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곧 기드온에게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살아오면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믿음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반복되는 제사라는 의식 속에서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우린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만난 삶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예배들, 귀찮을 정도로 주어지는 행사나 해야 할 교회 일들(물론 은석교회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안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님을 잊으면 안됩니다)을 성실히 실천하면서 '나는 신자다'는 생각은 있을 수 있지만 정작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 대해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7절에서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이 없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고 함께 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 하는 실제적인 증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사건들로 이어지는 역사이지 않습니까? 물론 표징을 보여달라는 기드온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기한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기드온은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만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서 나타났던 천사도 그냥 사람이었음을 볼 때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자신을 큰 용사로 부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미디안 사람을 치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사자가 보통 사람이 우러러볼 수 없는 신기한 모습으로 다가왔다면 과연 기드온이 표징을 보여달라고 했겠습니까?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보통 모습이었다는 것에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드온의 평소의 삶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에서, 즉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특이한 일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기드온과 같은 모습이 아닙니까? 평소 살아가는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해서 기드온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큰 문제가 터졌습니다. 목사가 찾아와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말을 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지금까지의 평소의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밖에 안됩니다. 그냥 보통의 삶이었기 때문에, 남들도 똑같이 살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삶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란 항상 특이하고 극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들었다가 나았다든지, 죽을 뻔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든지, 망할 뻔한 회사가 다시 일어섰다든지, 이러한 극적인 상황들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드온이고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가올 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보통의 삶이란 결코 우리가 이해하는 보통의 삶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고, 남들과 똑같은 삶인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반복되다 보니까 그저 보통의 것으로 여겨져 버린 것입니다. 중병이 들어서 나은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이라면 왜 날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표징임을 깨닫지 못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표징을 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바로 여러분의 옆에 계시고 여러분의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정작 여러분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함께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계속된다면 특별히 다른 표징을 구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는 삶이라면, 설령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보다는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허둥대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안하시는지 몰라서 낙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드온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며 대화하는 삶이었다면 미디안에 의해서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미쳤느냐는 항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드온의 문제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로서 드리는 제사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기드온처럼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이라면 이 말에 대해서 결코 믿음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처럼 특이한 표징을 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표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징이 너무 단조롭다는 것 때문에, 너무 일반적이라는 것 때문에 표징으로 여기지 않은 실수가 결국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정하지 않도록 해버리는 것입니다.
15절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라는 말씀도 역시 기드온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기드온은 극히 약하고 작은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자신이 크게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약한 모습은 하나님이 함께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18절에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는 말씀에서도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기드온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요청하면 하나님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릴 테니까 이것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것은, 예물을 드리는 행위가 주를 떠나지 않게 붙들어 둘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이것 역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려고 하는 것과 일치하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도 하나님은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행동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선한 행동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같습니까? 우리들의 종교적인 행동과 열심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붙들어 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뭔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바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예물이 여호와를 붙들어 놀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져온 예물을 반석에서 불이 나오게 함으로 태워버립니다. 여호와는 인간의 예물에 붙들린 분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들의 행위와 성의 때문에 할 일을 못하시는 나약한 분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석에서 불이 나와서 제물을 태운 것을 보고 기드온은 비로소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22절에서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것은 기드온이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지식은 기드온을 두렵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죽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왜 죽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입니까? 하나님 스스로 기드온을 택하시고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죽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게 된 것입니다.
우린 기드온에게서 우리들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기드온의 모습은 오늘날 머리에만 하나님을 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한 하나님과, 실제 삶에서 날마다 만나고 대화하는 하나님은 너무나 다릅니다. 머리에 담고 있는 하나님은 여러분과의 만남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낙심하고 허둥대며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소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삶에서 만나고 대화하는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분은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심을 믿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약할 때도, 못날 때도, 죄악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은 변함 없이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함께 하셨음을 안다면 여러분의 삶은 결코 나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표징을 구하거나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며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신자는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말씀을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함께 함으로서 항상 말씀의 간섭을 받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간섭을 받고 산다는 것은 특이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단조롭다고 생각하는 삶에서, 이런 것이 신앙생활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 보통의 삶에서 날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을 여러분 자신에게서, 그리고 평범한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삿 6:25-32 우상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상과 싸우신 하나님입니다.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을 만들고 절하고 섬기는 것에 대해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겠다고 계명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 20:4-6절에 보면 십계명 중 제 2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우상이란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우상이 형상의 문제로 국한된다면 결국 불상이나 단군 신상 등을 섬기지 않는 것으로 우상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되버립니다. 하지만 우상이란 그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징계를 받았던 것은, 그리고 그 일이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며 나타난 것은 우상은 인간의 본질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문제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의 문제는 형상에게 절을 했느냐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형상을 원하느냐의 문제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섬겨야 할 형상이 필요 없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다른 형상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문제가 맨 처음 부각된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올라가서 소식이 없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없다는 불안감에 금송아지, 즉 형상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죄가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왜 그들이 형상을 필요로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자기들을 인도하는 모세를 의지했고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인도자가 사라졌다는 불안감에 싸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을 인도자로 섬기며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형상을 만들게 된 동기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모세를 의지한 것 자체부터 이미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그것에 절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우상이 되버린 것입니다. 모세라는 인간 자체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의지하는 것이 곧 모세를 우상화 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사람 자체를 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대리자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목사가 섬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그 어떤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든 바위든 나무든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배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죄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해서 보이는 것을 의지할 대상으로 삼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린다면 그것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아마 대부분의 교인들은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잘 지은 예배당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극히 기독교적인 것이 우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절대로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섬긴 신자들만이 우상의 정체를 파악할 뿐입니다.
지극히 기독교적인 것이 우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도 기독교적인 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믿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인 자신들의 행위를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수단일 뿐이지 결코 믿음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그리스도도 단지 명목상 불러 대는 것일 뿐, 사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독교적인 행위와 문화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으로 족한 줄 아는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예배당은 없어도 상관없고,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시라면 돈 없어도 괜찮고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 부인되어져도 괜찮다는 이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처럼 섬기고 의지하고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우상을 섬긴다는 것을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에 교회는 우상과 완전히 결별된 단체로 인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즉 불상이나 단군 신상에게 절을 안하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전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른 목사가 구속이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른다고 해서 우상이 단절되는 것은 아님을 그 목사는 몰랐던 모양입니다. 단군 신상이 우상 자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는 단군 신상과 싸우고 단군 신상을 세운 사람들과 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을 통해서 자신은 우상과 싸우는 정의의 용사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착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상에 대해서 이러한 오해를 하기 쉽게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립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비춰질 수 있습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단군 신상을 훼파하고 찍어 버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단지 집안의 우상을 무너뜨리라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구원하기 위해서 기드온을 보내실 때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우상을 무너뜨리게 하고 보내시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라고 하셨을 때 기드온은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했다고 합니다(27절). 기드온이 백주에 하지 못하고 몰래 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아비의 가족과 성읍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아비의 가족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 한 것은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자기 집안과 그 성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농작물 수확에 도움을 두는 신으로 섬기던 우상입니다. 결국 바알을 훼파해 버린다면 성읍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농작물 수확에 나쁜 영향이 오게 된다는 믿음을 주게 됨으로 그들에게 반감을 받게 될 것이 뻔합니다. 기드온은 이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한 것으로 인해서 성읍의 사람들이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을 볼 때 기드온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은 단지 그 집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성읍의 사람들과도 연관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기드온이 무너뜨린 우상은 온 성읍의 반발을 사게 되는 것이었고 기드온은 이것을 알았기에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몰래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라고 하셨겠습니까? 기드온 아비 집이 섬기는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보기 싫어서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드온 아비 집의 단만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있는 단까지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도 전국의 절에 있는 불상은 다 무너져야 하고 그 어떤 신상이라고 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에는 단절과 사귐이 함께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게 하심으로서 기드온에게 이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등장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과 사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귐에 있어서는 필히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어느쪽 편도 아닌 중간 지대에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과 사귀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우상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중간지대에서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존재라면 단절이라는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필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쪽에 매어 있던 존재라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붙들고 있던 세력과의 단절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매인 자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매어있던 것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상에도 매어 있고 하나님에게도 매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눅 16:13절에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은 어느 한쪽에 매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중간지대에 있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사단에 매이고 우상에 매인 자로 살아가다가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에 매인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때문에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은, 기드온으로 하여금 단절과 사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 일에 있어서 아비와 성읍의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린 이것을 '기드온이 믿음이 약했다'라고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기 위한 단절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아비 집의 사고방식과 단절함을 뜻합니다. 즉 아비의 사고방식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비 집만 아니라 온 성읍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도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절입니다.
아비 집 그리고 온 성읍과 단절된다는 것은 삶의 기반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자식에게 있어서 아비란 힘입니다. 그래서 고아가 천대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힘이 되어주는 아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함께 어울리고 살아가는 이웃과 단절한 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단지 옆집과 어울리는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사람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으로부터 반발을 받는다면 그것은 삶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새로운 인생을 가르치십니다. 즉 아비를 의지하고 성읍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힘되는 것으로부터의 단절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 12: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은 친척 아비 집의 힘으로 사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되시는 분임을 가르쳐 줘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드온부터 먼저 힘되는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경험해야 했던 것입니다. 단절이 없는 사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귐이 없는 단절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단절되고자 애를 씁니까? 또 무엇과 사귀고자 소망하고 있습니까? 세상 것이 우리를 복되게 한다는 사고방식과 단절이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우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여주여'한다고 해서 메시아로서의 주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들 속에서부터 우상으로 세워진 것과의 단절이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주님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자 성읍 사람들이 그 소행이 기드온의 짓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아비인 요아스에게 찾아가서 기드온을 내놔라고 합니다.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28-30). 그러자 성읍 사람들에게 기드온의 아비인 요아스가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바알이 진실로 신이라면 성읍 사람들이 바알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아도 바알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쟁론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알이 신이라면 자신의 단을 훼파한 자를 그냥 두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보면 요아스가 바알의 단이 무너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요아스가 하나님을 믿게되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아스를 통해서 외치고 있는 말입니다. '바알이 신이라면 스스로 쟁론한다'는 것입니다. 즉 반대로 생각한다면 우상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쟁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현대 교회가 하나님을 인간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도와줘야 하고, 인간이 나서서 하나님을 위해 쟁론해야 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욕을 할 때 많은 신자들이 화를 벌컥 냅니다. 성읍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믿는 신에 대해서 모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독당한 신을 위해서 내 쪽에서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상이 되어버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자신을 훼방하는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쟁론하실 것임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싸움의 대상은 불상이나 단군 신상이 아닙니다.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르고 전국의 불상의 목을 잘랐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참된 신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싸움의 대상은 교회입니디. 신자의 싸움의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교회가 우상이며 내가 우상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고 새로 단을 쌓고 칠년된 둘째 수소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즉 우상을 무너뜨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로운 단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단은 칠년된 수소를 드리는 단입니다. 칠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의미로 쓰여진 말입니다. 7이란 숫자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루어진 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천지 창조는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6은 하나님의 안식을 빼버린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6은 인간의 수, 또는 짐승의 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볼 때 7년된 수소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인간의 죄용서는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해결될 일이지 인간이 나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단을 쌓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바알의 단은 우리 힘으로 뭔가 해보려는 의도입니다. 즉 인간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종교 행위를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으니까 하나님이 내 정성을 보시고 응답하시겠지'라는 생각이 곧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행위에 가둬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그 우상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제물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새로운 단이 세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우상입니까 아니면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입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단절이라는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세상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자로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가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할 일은 이 땅에 오셔서 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음을 알고 그 앎이 삶에서 묻어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모두 우상임을 알고 살아가시면 됩니다.
삿 6:36-40 기적
성경에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신기한 사건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태양과 달이 멈춘 사건 등등 현대 사회에서는 체험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현대 사회를 놀라게 할 수 있는 신기한 이적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의 기적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보통입니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기에 무관심할 수 있을 것이고, 성경의 기적이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던 그때나 있을 법한 일로 여겨버리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즉 성경이니까 그런 사건들이 있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이적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적은 그렇다해도 신약의 이적은 예수님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고, 또 사도들이 행했던 이적이니 만큼 예수님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시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했던 귀신을 쫓아낸다거나 불치병을 고치는 소위 권능에 대해서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에 나타난 이적은 성경으로 끝났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일하신다면 아직도 그러한 이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적은 성경에나 기록되고 나올 신비한 사건들이지 지금 이 시대에서는 있을 필요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생각은 아닙니까? 소위 보수라고 주장하는 교단들의 기적에 대한 입장은 거의 이런 쪽입니다. 기적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혹 기적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신비사상에 빠졌다는 오해를 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자신이 직접 기적을 체험한다면 기적에 대한 견해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 '기적은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해서 직접 체험을 한 후에도 '기적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체험은 어쩌면 성경보다 더 확실하고 실제적인 증거로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체험했다'는 것은 체험한 그에게 있어서는 확고한 신앙과 진리로 자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에 대한 신자의 입장은 어떤 것이 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을 인간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까?
본문에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과의 전투를 앞둔 기드온이 하나님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37절에 보면 기드온은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슬이란 자연현상입니다. 그러나 이슬이 어느 특정 지역에만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타작 마당에 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기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다시 한번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은 다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대로 그대로 행하십니다.
아마 기드온은 처음에 시험만으로는 믿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에는 내리지 않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두 번 모두 기드온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행하셨을 때 비로소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내용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기드온의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시험을 하는 기드온의 불신앙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의 불신앙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고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표적을 봐야 믿을 수 있다는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입장이 되어야 합니까?
양털에만 이슬이 내린다거나 양털만 마른다는 것은 분명 신기한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어느 날 아침에 우연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 기드온의 요구대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드온의 입장이라고 할 때 여러분이 요구한대로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신기한 기적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셨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간증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지 않겠습니까?
분명 기적과 같은 일을 요구함으로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한 것은 기드온의 교만이며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기드온의 불신앙과 교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요구대로 행하시는 것입니까? 이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당시 기드온이 믿음이 좋았다면 '믿음이 좋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셨다'라고 생각하면 현대인의 사고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기드온의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선한 의도로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한 좋지 못한 의도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 요구대로 행하신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우린 기적 그 자체에 매달립니다. 기적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도외시 해버리고 기적을 받은 사람 자체에 의미를 둬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항상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기드온을 보면서 마치 기드온이 능력이 있어서 마음대로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란 하나님이 주신 기적을 증거 하는 증인의 위치에 있는 것이지 기적을 행하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 어떤 기적이 주어졌다고 해도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적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드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고 기적에 대한 체험이 마치 구원의 증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기적과 기적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은 기적은 믿음의 증거도 아니고 구원의 조건도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로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기적이 일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 하나님의 백성일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는 전혀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적에 관심을 두지 말고 기적을 받은 사람에게도 관심을 두지 말고 기적을 주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신다면 기적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적을 체험한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되고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적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면 체험한 자신에게 영광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볼 것이라는 환상을 가집니다. 그래서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이 설마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기적에 대한 환상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드온의 요구대로 신비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 보고 기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이 바른 것이며, 또 오늘날 참된 기적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드온이 신비한 현상을 요구한 것은 불신앙이고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좋지 못한 의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신 것은 분명 하나님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의 수단으로 신비한 현상을 일으켜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하나님이 행하신 신비한 현상을 봄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신비한 일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심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행하신 기적은 기드온이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쓰여진 것뿐입니다. 기적이란 하나님이 성도를 다루시는 도구일 뿐 어떤 능력도 아니고 계시도 아닙니다. 기적이라고 말하는 현상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적에 대한 입장은 각각입니다. 기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적을 원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은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기적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말씀드릴 것은 구약에 있었던 홍해사건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현대에도 얼마든지 그런 기적은 있을 수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나았다면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그 어떤 병자라 할지라도 낳을 수가 있고 나사로처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 모두는 기적을 도구로 삼아서 계시하고자 하시는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해 사건을 통해서는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인해서 살아나게 됨을 가르치시고 구원의 손길이 간섭되는 사람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살아난 자들이었음을 계시하는 사건입니다. 때문에 홍해사건이 현대에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서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홍해사건을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을 수 없는 병자가 낫게 된 것도 역시 같습니다. 마 8: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우리들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임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병고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병고침을 도구로 삼아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계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병을 짊어지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우리 병을 앓아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은 인간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려주는 증거물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가 되지 못하며 연약한 자로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병을 짊어지신 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과 죄를 짊어지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불치의 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수단이고 도구일 뿐, 병이 나았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로 남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낳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면서 좋아하고 그런 기적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보다는 기적 자체에 매료된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기적을 서너번, 아니 수십 번을 체험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 갈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이 낫고, 양털에 이슬이 내리고 내리지 않는 신비한 현상을 수백번 체험했다고 해도 결국 그리스도의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기적적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기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이 최고의 기적을 계시하기 위해서 성경에 기적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참된 기적이 무엇임을 가르치시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기한 현상에 매료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참된 기적에 매료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여러분이 말할 수 없는 신기한 기적을 직접 체험을 했다고 해도 결국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기적 자체에 빠져들게 되고 기적을 체험한 것이 마치 자신의 믿음의 증표인양 여겨버립니다. 기적을 체험한 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신비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 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을 다스리시는 방법으로 기드온이 요구한 신비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아무나 기드온과 같은 요구를 한다고 해서 그대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기드온에게만 특별히 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선택하시고 기드온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다스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일을 요구한다면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실까?'라는 생각을 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해도 어쩌면 이미 그런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현상을 원했다면 나도 신비한 현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현상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그 속 내면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결국 신비한 일에 마음이 끌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비한 일을 보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으로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신기한 일을 행하신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 기드온처럼 신기한 일을 체험을 했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옳습니까? '내 인생은 하나님에게 붙들린 인생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이시면서 까지 나를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너무 믿음이 없으니까 기적을 보이시면서 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기한 일을 체험해야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비록 신기한 일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죄인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을 놀라운 기적의 사건으로 볼 수 있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인된 인간이 천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기적을 체험한 기적의 사람인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신기한 일을 행하신 것이 기드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어떤 기적도, 신기한 현상도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기적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알았다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알았다면 죄를 해결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까지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시는 것은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간섭하실 것입니다. 병고침으로 간섭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환난과 망함으로 간섭하실 수도 있습니다. 신기한 일을 체험했기 때문에 기적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함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이미 기적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임한 사람입니다.
진짜 기적은 신기하고 놀라운 현상을 체험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 이것보다 감사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인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안심되고 든든한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신비한 체험이 우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우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간섭이 때로는 괴로움과 환난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받는 환난과 괴로움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거한다는 것이 더 중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삿 7:1-8 너무 많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는 여러 가지 사상과 이념들이 있습니다. 그중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념이라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일 것입니다. 우린 이 두 이념들을 자유와 독재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즉 민주주의를 자유로, 공산주의를 독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하는 자유와 독재란 참으로 단순합니다. 자유를 몸이 남에게 억압당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여행하고 싶으면 여행하고, 놀고 싶으면 놀면서 하고 싶은 대로하며 살아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 바로 자유가 허용된 나라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독재는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한 채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박탈당한 것을 독재로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독재가 아닌 자유를 원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지배를 받기보다는 자신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살기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혁명지도자인 P.헨리라는 사람은 '나에게 자유를 다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다오'라는 말을 할 만큼 자유에 대한 의지가 강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무엇에도 구속당하지 않은 채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때는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이 되겠지만 사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만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자유로운 자는 없습니다. 비록 민주주의라는 체재 아래서 활동에 자유를 느끼고는 있지만 사실 자유자란 없습니다. 즉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공산주의란 이념이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든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든 인간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내 마음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자유가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하고 의아해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유가 없다고 말씀드린 것은 이사도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체재 아래 행동의 제약을 받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공산주의가 개인의 여행까지 간섭하는 체재라면, 그래서 타국이 아닌 국내를 여행하고 싶어도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체재라면, 그래서 자유가 없는 독재 사회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민주사회이기 때문에 여행을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국가로부터 여행을 허락 받지는 않습니다.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엔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뭔가에 의해서 제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회사인의 경우 여행을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회사에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회사라는 조직이 허락할 때 가능할 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삶은 회사란 거대한 괴물에 붙들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돈을 받습니다. 직장인이 여행을 하고 싶다면 회사를 그만두면 됩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 때문입니다. 결국 회사는 돈이라는 힘으로 사람을 구속합니다.
하지만 힘을 가진 자는 자유롭습니다. 회사에 구속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을 구속하는 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돈이라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지만 돈은 인간의 정신자체를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사회는 자유가 없습니다. 모두가 힘에 의해서 굴복 당하고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유란 곧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힘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말은 무엇엔가 붙들려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상대적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신 말씀은 인간이 무엇엔가 매어 살고 있음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답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유를 몸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죄에 붙들려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진정한 자유자의 행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헌금을 할 때 진정한 자유자로 하십니까? 진정한 자유자로 헌금을 하는 것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믿음이 없는 자로 보여질 것이 염려되어서 헌금을 한다든지, 헌금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실 것이 염려되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죄에 매어 있는 상태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의 체재 아래서는 힘에 의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힘있는 자가 자유자이며 힘이 곧 진리로 통용되는 사회입니다. 힘이 곧 나를 자유케 한다고 외치는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성도인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십니까?
오늘날 교회가 과연 이 말씀 아래 살아간다고 여기십니까? 많은 교회가 마치 힘이 곧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처럼 힘을 구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신자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진리가 곧 신자에게는 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고 사는 자가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을 보고 사는 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힘이 진리가 아니라 말씀이 진리이며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힘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참된 힘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시험한 기드온이 군사를 이끌고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 하롯샘 곁에 진을 칩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힘은 군사력에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길러야 하고, 군사력은 곧 군사의 숫자와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될수록 많은 군사를 모집해야 하는 것이 전쟁을 위한 준비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세상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군사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군사가 너무 많아서 미디안을 너희들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군사가 많다면 승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분입니다. 힘을 주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군사가 많아서 승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교인 수가 많은 것이 힘이고 하나님은 교회를 부흥케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 교회가 군사가 많아서 승리를 주지 않겠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의 군사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3절을 보면 모집된 이스라엘 군사는 32,000명이었습니다. 반면에 미디안 군사는 메뚜기처럼 많은 수이고, 약대 또한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수였습니다(12절). 그에 비하면 32,000명이란 수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군사가 많다고 하십니다.
군사가 많아서 승리를 주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군사로 전쟁에 참여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한 것으로 여기고 교만할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 숫자가 많아서 이겼다는 착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불행의 원인은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면서도 행복의 원인은 자기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일이 안되면 하나님에게 원망을 돌리면서 잘되면 자기에게 영광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군사가 많은 가운데 승리를 하면서 틀림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여기고 승리의 영광을 자기에게 돌려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군사가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승리가 여호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애당초 군사의 숫자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군사의 숫자라는 힘의 조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조건은 하나님의 은총일 뿐입니다. 즉 인간에게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세우시고 미디안의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은 단지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삿 6:11-16절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기드온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표로 삼았습니다. 때문에 미디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평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겨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흉내 낼 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무리 둘러봐도 평범한 삶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뭔가 미심쩍어 하지는 않습니까?
기드온이 바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삿 6:14)고 하셨을 때 '내가 힘이 어디 있습니까?'(삿 6:15)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기드온, 즉 이스라엘과의 관계였습니다.
기드온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때문에 승리도 자신에게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미디안과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생각은 '나를 미디안과 싸우게 하시려면 힘을 주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저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안하시는지 판단하려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드온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힘입니다. 힘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힘이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고 힘이 없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마치 교회가 부흥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으로, 부흥되지 않으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힘을 소유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해 군사가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군사를 줄입니다. 3절에 보면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군사를 줄이는 방법으로 두려워서 떠는 자는 다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도 많다 하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군사를 물가를 데리고 내려가서 물을 혀로 핥는 자는 남기고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300명이 남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도 '기드온의 300용사'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은 300명에 대해서 교회는 용사라고 말합니다. 남들과 뭔가 다르기 때문에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려보낸 사람들은 전쟁에서 도움이 안되고 쓸모 없는 자들이기에 돌려보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이해하는 300명과 나머지 사람의 다른 점은 두려워 떨었다는 것과, 물을 무릎을 꿇고 마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군사는 용감해야 하는데 두려워서 떨었다면 군사의 자격이 없는 것이고, 전쟁 중에는 항상 주위를 경계하면서 방심을 하면 안되는데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것은 경계에 소홀한 태도이기 때문에 군사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00용사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용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첫째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둘째 항상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두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생존에 위협이 올 때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이 처합니다. 그리고 경계한다고 해서 사단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을 막고자 경계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단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사단을 이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또 당시 남은 10,000명이 모두 두려움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두렵지만 돌아가지 않고 남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을 손으로 떠서 핥아먹는 것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것이 용사와 용사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지 자기 편한 대로 먹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결국 300명이 남게 된 조건을 인간에게서 찾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300명이 뭔가 다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남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32,000명의 수가 300으로 줄어버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에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수를 더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합니다. 교인의 수를 더해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하나님은 오히려 있는 수까지 줄여 버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숫자에 연연하시거나 숫자로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300명으로 너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300명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300이란 수를 가지고도 메뚜기 같은 군사와 모래알처럼 많은 수의 약대를 소유한 힘있는 미디안을 이길 수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결국 300명이란 수는 300명의 용사 됨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처럼 많은 수의 군사를 이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32,000명의 수를 300명으로 줄이게 하심으로서 승리는 인간이 힘을 소유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에게 힘은 여호와 자신이지 많은 군사력도 아니고 약대의 수도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힘있는 자라는 뜻이고, 그런 이유로 기드온을 '큰 용사'(삿6:12)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하나님에게 구합니다. 하나님이 곧 힘이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힘이시라면 그 힘을 나에게 달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힘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힘만 있으면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만약 힘을 부여한다면 어떤 속성을 드러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주셔서 승리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런 인간이라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인간이 드러낼 속성은 '역시 내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나보다 힘있는 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힘을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300명만 남게 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는 인간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바르게 정립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힘을 달라는 요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신뢰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로 살아가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힘이 되심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들만 모일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인간의 영광이 자랑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힘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많은 수를 원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가 타락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300명만 남기십니다. 의지할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잘라 버리신 것입니다. 사람은 많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구원하였다'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시고 기드온을 간섭하신 일은 기드온이 의지할 만한 것을 잘라 버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극히 작은 수인 300명만 남기신 것입니다. 더 많은 수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게 만드셨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묵상하셔야 합니다.
기드온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신다면 하나님은 때로 여러분이 기댈만한 것을 잘라 버리시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간다면 그가 곧 기적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곧 저와 여러분의 힘입니다. 많은 수의 교인도 아니고 많은 돈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신자인 저와 여러분이 그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들의 힘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도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지로 본다면 직장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된 자의 관심은 신앙의 삶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기대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구원에 있어서도 주님의 피의 공로임을 서슴없이 증거할 것입니다.
삿 7:9-23 여호와의 칼
지난 시간에 우리는 기드온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법칙이 어떤 것인가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으로 하여금 메뚜기 떼처럼 많은 수의 미디안 군사를 상대하게 하시면서도 상대적으로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던 32,000명의 기드온의 군사를 300명까지 줄여 버리셨습니다.
많은 수와 경쟁하고 싸울 때는 역시 많은 수가 나서야 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상식입니다. 설령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긴다고 해도 그것은 적은 수의 힘이 뛰어날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만약 서로 비슷한 힘이라면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긴다는 것은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힘이 뒤쳐지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처럼 많은 미디안 군사를 상대한다는 것이 곧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을 이러한 상황으로 밀어 넣으심으로서 하나님의 법칙은 수와 수의 대결이 아님을 기드온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힘과 힘의 대결이라는 체제 안에서 힘있는 자가 승리자이고 힘없는 약자는 항상 패자일 수밖에 없는 세상의 속성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항상 숫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얘기가 허공을 울리는 공허한 말로만 들려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시면서 숫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숫자의 경쟁이 없고 숫자가 많고 적음이 아무런 힘도 되지 않은 그런 나라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은 숫자의 질서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수가 힘이 되고, 많은 수 앞에서는 적은 수는 상대적으로 약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래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많은 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숫자의 경쟁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곳이 교회이지 않습니까?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은 수의 교인을 확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이며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는 명목 아래 교인들로 하여금 사람을 데려오도록 다그치는 일들이 그쳐지지 않는 것이 바로 교회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500명 모인다'고 할 때 100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고 마치 자신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교인들 앞에서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본당이 200평이다'고 자랑하는 목사 앞에서 50평짜리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목사는 '졌다'라는 패배감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아니 이러한 교회 안에서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환영을 받을 나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수와 수의 싸움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가슴 깊이 받아들이며 수에 민감하고 수의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회개가 되어지겠습니까?
세상 속에서 세상과 똑같이 숫자의 경쟁이라는 법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는 단지 교인 수를 많게 해주고 교회의 재정을 넉넉하게 늘려주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메뚜기처럼 많은 수에 비해 300명이라는 적은 수를 주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은혜가 보일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숫자의 법칙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나라의 사람이 되게 할 뿐 세상에서의 숫자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것마저 잘라내실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숫자의 법칙 아래 매인 자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의 법칙에 매어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군사를 300명까지 줄여 버리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9절)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전쟁의 승리의 법칙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였느냐 붙이지 않았느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힘이 없고 수가 적다고 해도 하나님이 이방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붙였다면 이스라엘은 승리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힘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붙이지 않으시면 그들은 약한 이방인에게 패배를 하였던 것입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이 큰 여리고 성은 무너뜨렸지만 그보다 작은 아이 성에 대해서는 실패를 경험한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승리와 실패는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지 군사의 수나 힘에 달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쟁을 함에 있어서 승리의 법칙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법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도 미디안을 네 손에 붙였으니 나가서 그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승리와 패배는 300명이라는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 말씀 하나만 믿고 선뜻 300명을 데리고 메뚜기처럼 많은 미디안을 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만 바라본다면 미디안을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군사들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말씀만 믿고 미디안을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에 마음이 간다면 섣불리 미디안을 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눈에 많은 수의 군사가 보인 이상 말씀에 대해서 의심이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에게도 그러한 의심이 있었나봅니다. 10-11절에 보면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기드온이 이에 그 부하 부라를 데리고 군대가 있는 진 가에 내려간즉"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직까지 두려움이 남아 있음을 보셨습니다. 기드온의 두려움은 숫자에 대한 비교로 인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숫자에 대한 비교가 하나님이 붙였다는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미디안의 진으로 내려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진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게 함으로서 그 손을 강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드온이 미디안의 진에서 들은 말은 무엇입니까? 12-14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진에 이르렀을 때 어떤 사람이 자기 동료에게 꿈얘기 하는 것을 듣습니다. 꿈의 내용은 보리떡 한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 얘기를 들은 동료가 해몽을 하기를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14절)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들은 기드온은 하나님이 미디안 군대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300명으로 미디안을 치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뭔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이 기드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기드온이 진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게 되고 또 꿈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꿈에 대한 해몽도 어떻게 기드온과 연관지어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세상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인간의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하나 맞추어져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미디안의 진으로 가라고 했을 때 마치 기드온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미디안 군사가 꿈을 꾸고 또 꿈 얘기를 하고 더군다나 꿈에 대한 해몽을 기드온으로 연관지어 하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해서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연극이 각본대로 연출자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세상의 실체입니다. 세상은 비록 보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신자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세상 중심으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미디안 진으로 보내고 때맞춰 꿈을 꾸게 하고 해몽하는 말을 듣게 하신 모든 것이 단지 기드온을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숫자와 힘에 의해서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고 있음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기드온은 꿈 얘기를 듣고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300명을 세대로 나누어서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게 하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 이것이 기드온이 300명을 데리고 미디안을 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횃불과 항아리 그리고 나팔은 전투를 위한 무기가 전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드온이 횃불과 항아리와 나팔을 준비한 것은 싸우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을 보기 위한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횃불은 밤중에 무엇인가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항아리를 횃불을 감춰두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20-23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승리하는가가 나옵니다.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전투를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나팔을 불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을 뿐이고 항아리를 깨고 속의 횃불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미디안은 도망을 치고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할 것은 미디안 군사가 꿈을 해몽할 때 '기드온의 칼날'이란 말을 합니다. 그리고 미디안을 칠 때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과연 기드온은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칼을 가졌습니까? 그들이 가진 것은 단지 나팔과 횃불과 항아리이지 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기드온의 칼이란 기드온이 가지고 있는 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가지고 있는 칼이 아니라 여호와의 칼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칼이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판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미디안입니까? 그러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습니까?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도 하나님의 칼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자들은 오직 한가지 기준으로 결정되어 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출 12:13절에 보면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의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피를 보고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약속이었습니다. 따라서 피가 없는 이방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미디안이 심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미디안에게도 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칼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서로를 죽이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미디안이 가지고 있는 칼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장면을 횃불을 밝히고 환하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을 심판하는 광경을 낱낱이 보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군사와 칼이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하고 서로의 칼에 의해서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칼은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지 않은 자를 치는 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칼이 미디안을 심판하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들은 왜 여호와의 칼에 의해서 심판을 받지 않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메뚜기처럼 많은 수의 군사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많은 칼도 여호와의 칼을 이길 수 없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이스라엘 역시 결국 여호와의 칼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세상을 향해 있는 여호와의 칼을 보십니까? 아니면 미디안이 들고 있는 칼을 보십니까?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주로 보는 것은 세상이 들고 있는 칼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칼보다는 세상이 들고 있는 칼에 더 매력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디안이 들고 있는 칼이지 여호와의 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칼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단지 교회이기 때문에 내뱉는 그리스도일 뿐 나에게 소중하고 귀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수가 힘이고 칼을 두려워하는 세상이기에 나 역시 칼을 손에 쥐고 싶어한다면 그에게 그리스도는 내 손에 칼을 쥐어주는 분으로서만 가치 있을 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그리스도가 쥐어주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디안이 받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있어서 칼은 무엇입니까? 꿈을 해몽한 군사는 보리떡 한 덩어리가 진을 무너뜨리는 꿈을 기드온의 칼날이라고 말합니다. 즉 기드온의 칼날은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기드온의 손에 붙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일하십니다. 약속대로 어린양의 피를 표적으로 삼아서 심판할 자를 심판하시고 건질 자를 건지십니다. 미디안을 기드온의 손에 붙이신 것도 기드온이 잘나서가 아니라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기드온의 칼과 미디안의 칼이 전혀 다릅니다. 기드온의 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디안의 칼은 실제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고 두려움이 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칼입니다. 세상은 과연 누구의 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분명 미디안의 칼입니다. 미디안의 칼을 두려워하고 굴복하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미디안의 칼을 손에 쥐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미디안의 칼을 손에 쥐고 싶어하는 간절한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에 의해서 무시되는 것은 기드온의 칼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도 없는 칼이기에 무시를 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기드온의 칼이 아닌 미디안의 칼을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심판 받을 자의 모습임을 하나님은 미디안을 침으로서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 믿음이 전혀 힘이 되지 못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많은 수가 힘이 되고 돈이 칼이 되는 세상에서 믿음을 말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힘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손에 미디안의 칼이 없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힘을 가진 자로 살고 싶어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미디안의 칼이 없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는 참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기드온의 싸움을 보이십니다. 칼을 가진 미디안의 군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패배를 하고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가진 이스라엘에 의해서 쫓김을 당하는 사건을 보이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참된 힘인가를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수와 많은 돈을 가진 자가 힘있게 보입니까? 그 힘앞에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도 그러한 힘을 가진 자로 살고자 하십니까? 그러나 그러한 힘이 여호와의 칼 아래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이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칼이지만 분명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여호와의 칼을 세상을 향해 휘두르실 것입니다. 그때 그 칼을 피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던 신자들입니다.
삿 8:1-3 에브라임의 항변
본문의 내용은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울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행동하는 것들, 그리고 이웃을 대하는 태도들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에브라임과 기드온의 대화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무엇과 싸우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시다시피 기드온은 하나님이 미디안을 붙여주심으로 인해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와서 말하기를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1절)라고 말하면서 크게 다툽니다.
여러분은 에브라임의 이러한 항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에브라임은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싸움에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항변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기드온이 전쟁터로 부르지 않은 것이 어마나 다행스런 일이겠습니까? 전쟁터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험스런 곳입니다. 그런 곳으로 부름을 입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기드온이 승리를 했다는데 있습니다. 만약 싸우기 전에 에브라임을 불렀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식으로 대답했을까요? 물론 에브라임 사람들이 아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7:24절에 보면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서 에브라임더러 미디안 사람을 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이 전쟁에 참여를 해서 미디안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이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도 분명 싸움에 참여를 했는데 어째서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항변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들이 한 일이 기드온이 한 일에 비해서 너무 작은 일로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 미디안을 쳐부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 참여해서 오렙과 스엡을 죽였을 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구의 공로가 더 크다고 생각되겠습니까? 당연히 기드온이 아니겠습니까? 300명의 적은 숫자로 메뚜기 같은 미디안을 쳐서 승리했는데, 겨우 전쟁의 말미에 끼어 들어서 오렙과 스엡을 죽인 공적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저 같아도 겨우 두사람 죽인 것을 가지고 기드온이 한 일과 같이 여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드온의 공적에 비해서 자신들이 한 일은 아주 적은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러자 싸움의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은 기드온에 대해서 항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에브라임의 항변은 자존심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공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자신들의 공적이 비교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에 비해서 너무 보잘 것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항변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공적을 비교하면서 자존심 싸움을 하는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한 일이 초라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나도 당신과 같은 조건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령 부자가 헌금을 천만원 했습니다. 그리고 돈 없는 자는 만원 밖에 못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나도 돈만 있으면 당신처럼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이 곧 자존심 싸움인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양로원을 도와주기 위해서 헌금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해서 그 사람을 제외시켰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난한 교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이 만약 가난한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혹시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무시하는 것 아니냐?'라는 항변을 하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할 수 있는 항변입니다. '나도 얼마든지 헌금할 수 있는데 왜 나를 빼놨느냐?'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항변은 결국 자존심과 연결되어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처음부터 양로원을 돕는 일에 가난한 사람을 포함시켰다면 부담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나는 돈도 없는데 왜 나를 그런 일에 포함을 시키느냐. 내가 당신들처럼 생활이 넉넉한 줄 아느냐?'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함시킨 것에 불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돈을 내자니 아깝고, 빠지자니 자존심이 상하는,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에브라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의 초기에 불렀다면 300명밖에 안되는 군사를 보고 미리 겁을 먹고 거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부르지 않았느냐고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항변에 대해서 기드온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3절에 보면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들의 노가 풀리니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의 대답은 내가 한 일이 너희들이 한 일과 비교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이란 미디안을 쳐부순 일입니다. 그리고 너희, 즉 에브라임 사람들이 한 일은 싸움의 말미에 개입해서 오렙과 스엡을 죽인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을 쳐부순 것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오렙과 스엡을 죽인 것을 더 크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물론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항변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기분 좋게 해주려고 듣기 좋은 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라는 말씀을 보면 단지 에브라임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한 일을 자신의 일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전투를 하기 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미디안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다는 증거를 여러번 확인하였습니다. 때문에 미디안에 승리를 한다고 해도 자신의 힘으로 얻은 승리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들고 전투에 참여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칼을 버리고 대신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을 잡았다는 것은 우리는 칼로 이기는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는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지 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 칼이 아니라 전혀 무기라 할 수 없는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잡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승리였기에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투를 자신의 공적으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가 단 1%도 포함되지 않은 승리, 이것이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얻은 승리에 대한 기드온의 시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드온은 에브라임에 대해서 '너희가 한 일은 내가 한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항변을 한 것은 서로의 공적을 비교한 결과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부순 것이나 자신들이 오렙과 스엡을 죽인 것을 자신들의 힘으로 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에 처음부터 참여를 했더라면 자신들의 공적도 기드온처럼 클 수가 있었는데 늦게 참여를 했기 때문에 기드온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공적을 올렸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항변에 대해서 기드온은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해서 비교가 되겠느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단지 자신들을 싸움에 부르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공적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이 너희들이 한 일에 비해서 비교가 되겠느냐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기드온과 에브라임 사람들의 차이는, 기드온은 하나님이 붙이신 결과라고 믿는 것이고 에브라임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드온에게 있어서는 공적을 가지고 비교하거나 싸움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절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합니다. 끝물 포도란 맏물 포도를 수확하고 난 뒤에 남은 포도 찌꺼기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포도의 질이나 맛을 따진다면 끝물 포도가 맏물 포도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 즉 자신의 아비 집에서 생산된 맏물 포도보다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투에 처음부터 참여한 기드온의 사람들보다 끝에 참여해서 전투를 한 에브라임이 더 낫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풍자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처럼 기드온이 자신이 한 일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한 일을 더 크게 보고 있는 것은, 일의 경중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보기에는 아주 큰 일을 했지만 하나님이 에브라임을 통해서 하신 그 일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의 경중을 따져 가면서 어떤 일은 귀한 일이고 어떤 일은 보잘 것 없는 일로 여깁니다. 어떤 것은 하나님의 상을 많이 받을 일이고, 어떤 것은 부끄러움을 당할 만큼 별 것 아닌 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을 맡겼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기 때문에 큰 일을 해야 상을 많이 받는다고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브라임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시각에서 나올 것은 비교와 경쟁 밖에 없습니다. 누가 한 일이 더 크나를 따지면서 우월을 판가름하는 모습만 보여질 뿐입니다. 나보다 더 큰 일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 앞에서 자존심을 상해하거나 괜히 그에게 시비를 걸기도 합니다. 이것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흔히 나타나는 허물이기도 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기드온이 승리한 것이나 에브라임 사람들이 전투의 끝에 참여해서 오렙과 스엡을 죽인 것이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두 일이 결코 경쟁이나 비교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서 하나님을 제외 시켜 버립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자 하는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들고서 서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나 여러분 자신이나 똑같이 하나님이 일하신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만원 헌금하는데, 어떤 사람은 천만원 헌금했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천만원 헌금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만원 헌금할 형편이라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그만큼 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 남이 한 일을 비교하면서 자존심 상하고 '나도 저런 환경이라면 얼마든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할 수 있다'라는 싸움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남이 하고 있는 큰 일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남이 큰 일을 할 때 부러움이 생기거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십시오. 큰 일도 작은 일도 사람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결과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헛된 싸움에 힘을 낭비하고 살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중요한 일이고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내 명예와 관계된 일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싸움도 있을 것이고, 내 자존심과 연관된 싸움이기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의 명예나 이름이나 자존심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이용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 일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동원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일진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이름이나 명예나 자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이름이 무시를 받는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만 높여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적은 영광을 받거나 아예 영광을 받는 자리에 끼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싸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영광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자존심이 무너진들 그것 역시 하나님 편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 되는 것에 우리가 걸림돌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이 한 큰 일을 보지말고 나에게 일어난 조그만 일을 보고 사십시오. 누군가가 병이 들었다가 나았다고 해도 그것을 마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확실한 표적으로 여기고 부러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병이 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병이 들었다가 낫게 하셔서 하나님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삼으시고 누군가는 건강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십시오. 내가 하는 일로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기십시오. 돈을 벌었다면 하나님이 붙여준 것으로 여기십시오. 직장도 하나님이 붙여준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러한 믿음으로 사신다면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남이 가진 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남의 일보다 더 크게 여기거나 자랑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하셨음을 생각한다면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하셨는데 나의 한 일이 어떻게 당신이 한 일에 비교되겠습니까?'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존심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지 않는 결과입니다. 자존심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항상 내것보다는 남의 것을 보게 할 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기보다는 남에게 주어진 것을 보며 비교하고 시기할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천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육의 편함이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 즉 마음의 안식을 누리고 싶거든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상관없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흔적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에브라임 사람들처럼 기드온의 공적을 보면서 시비를 거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내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삶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을 포기했다는 것은 곧 나를 포기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자 베드로는 그리하지 말라고 말립니다. 베드로는 평소 예수님과 시비하며 살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제사장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자 그것을 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던 자신의 자존심과도 연결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말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부름을 입었지 우리의 자존심을 위해서 성도로 부름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세우려고 하지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은 성도입니다. 나 개인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삶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조그만 것 하나하나에까지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조그만 것에까지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살아갈 때 그 삶은 재물의 여부와 상관없이 풍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업신여긴다고 해도 나에게는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며 은혜로 여겨질 때 산다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작은 것이 남에게 있는 큰 것보다 귀한 것입니다. 남의 것으로 부러워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작은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삿 8:4-17 잘못된 판단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자기를 버리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흠하나 없이 완벽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왜 배척을 하고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가 싫어서 였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때문에 그것이 기분 나빠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죽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만약 그들 앞에 구약 때처럼 번개와 뇌성이 울리면서 주의 사자가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들의 죄를 지적한다면 그들은 그래도 그 말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주의 사자를 잡아죽이려고 했을까요? 아마 두려워서 떨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배척을 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해도 좋을만한 뭔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외형적인 조건입니다. 외형적인 조건으로 따진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도저히 사람들에게 신빙성을 줄 수가 없습니다. 천한 마을에서 겨우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기에 그 말에 공경하고 따를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의 권위는 말의 내용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복음을 말할 때 그 복음의 권위는 그 사람의 외형이나 신분이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순전히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십자가만을 전할 때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지 말을 전달하는 전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달자이기 때문에 전달자가 부자여야 한다거나, 명문의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거나, 권세가 있거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전하는 복음이든 평신도가 전하는 복음이든 그 내용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십자가만을 증거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이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외형적인 조건을 보지 않고 그 말씀에만 귀를 기울였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저런 자에게서 귀한 진리가 나올 수 없다'는 그들의 선입관이 그들을 소경 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실수이며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사람의 외형적인 조건을 보지 않고 순수하게 그 사람의 내면을 보려고 애를 쓰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똑같은 목사가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고 신학박사가 된 목사가 전하는 말과 그냥 보통 목사가 전하는 말을 아무런 구분 없이 단지 그 내용만을 보면서 진리의 여부를 판단하는 냉철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유학을 다녀오고 박사인 목사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 배웠으니까 뭔가 다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사실 사람을 외형적인 조건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이미 우리들은 외형적인 조건들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틀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령 힘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이긴다는 것은 이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틀입니다. 이 틀을 가지고 상황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이기기 때문에 누가 힘이 있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힘의 여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나 권세를 가지고 결정하게 됩니다. 결국 돈이 있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을 이긴다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고, 권세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이긴다는 것이 세상의 법칙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을 볼 때 외형적인 조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있게 보이는 자에게는 굽히고 힘이 없이 보이는 자에게는 무시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러한 세상의 판단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한 족속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라고 말합니다. 기드온과의 전투에서 미디안 사람들은 하나님이 서로 칼로 치게 하심으로서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도망을 칩니다. 이 미디안을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이 쉬지 않고 추격을 하는 와중에 매우 지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군사들을 위해서 숙곳 사람들에게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고 부탁을 합니다. 즉 자신들은 지금 미디안의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쫓고 있는데 나와 군사들이 심히 피곤하니 떡을 좀 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미디안의 두 왕이라고 한 것을 봐서 이 두 사람이 모두 미디안 왕이 아니라 미디안과 연합하여 기드온을 치는 이방 나라의 왕인 것 같습니다. 한나라에 왕이 둘 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기드온의 요구에 대해서 숙곳 방백들이 거절을 합니다. 6절에 보면 "숙곳 방백들이 가로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는 말씀에서 숙곳 방백들이 거절하는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미디안의 군사가 도망을 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군사는 많은 숫자입니다. 10절에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일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좇아 거기 있더라"는 말씀을 보면 기드온이 쫓았던 군사들의 수는 일만 오천 명 가량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이 만 명이 죽고 일만 오천 명 가량이 남았다면 이것은 대단한 전과입니다. 진실로 불가능한 것이 가능이라는 현실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일만 오천 명이라는 수도 300에 비하면 역시 엄청난 숫자임이 분명합니다.
숙곳 방백들은 바로 수의 비교를 한 것입니다. 미디안 군사가 비록 도망을 치기는 하지만 그들의 수는 일만 오천 명입니다. 그런데 미디안의 왕을 잡겠다고 추격을 하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르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숙곳 방백들이 기드온에게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군사들이 미디안 왕을 도저히 잡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한 말입니다.
일만 오천 명 대 삼백 명을 비교하면 도저히 수학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드온 군사를 도왔다가 나중에 미디안 군사가 알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계산하에 숙곳 방백들은 기드온의 도움 청함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러한 숙곳 방백들에게 기드온은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7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숙곳 방백들이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보복의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기드온과 숙곳 사람들의 생각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수를 보고 승리의 여부를 판단하는 숙곳 사람들은 군사의 수가 적은 기드온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세상이 신자의 믿음에 대해서 이해하고 인정을 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시각은 숙곳 방백들과 같습니다. 수를 보고 승리의 여부를 판단하고 수가 적은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숙곳 사람들의 태도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세상 역시 믿음에 대해서는 이러한 시각으로 판단하고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하는 말씀이 복음인가 아닌가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시골에서 목회 하는 목사라는 이유로 무시를 받게 되고, 도시에서 성공한 목사라는 이유로 우대 받고 높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였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이란 작은 수에 매이지 않고 수가 작다고 해서 낙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미디안을 붙이셨기 때문에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는 자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보실 때 누구를 높이겠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신자입니까 아니면 수적 성공한 자입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으로만 살겠다고 결심을 하셨다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나 판단에 대해서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구분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높임 받는 믿음이란 하나밖에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성공했을 때 그 믿음이 인정을 받는 것이지 외형적으로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 복음을 말하고 믿음을 말해봐야 들어줄 자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기드온을 무시한 것은 숙곳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거기서 브누엘에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도움을 거절당하자 브누엘로 가서 그들에게도 같은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숙곳 사람과 같았습니다. '적은 수로 뭘 하겠다는 것이냐?' 라는 무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믿음이 없는 자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가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사는 자가 등장했을 때 믿음이 없는 자의 불의함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을 무시함으로서 믿음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기드온을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보내심으로서 그들이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믿음이 있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서 세상 전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믿음으로 사셨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싫어합니다. 힘이 없는 분이었기에 그 말씀에 대해서까지 무시를 해버린 것입니다.
행여 오늘 우리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 앞에 하나님이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무시해도 좋을만한 사람을 세우셔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이 별 것 아닌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그 말에 대해서 무시해 버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숙곳 사람들이나,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의 수를 보고 기드온을 판단했지만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성도라면 여러분 앞에 선 자가 누구라 할지라도 그 외형을 보지 마시고 그가 하는 말이 과연 주님만 높이고 주님만 사랑하고자 하는 말인지에 귀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주님만 높이고자 하는 말이라면 그 말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겸손이고 믿음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작은 자 큰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일뿐이고, 또한 동시에 하늘에서 큰 자로 여김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작은 자요 모두가 큰 자이기에 목사 장로라는 직책으로 큰 자 작은 자가 구분될 수 없는 것이고,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소유의 양으로 인해서 큰 자와 작은 자로 구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세상의 판단 기준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십니까? 기드온의 기준입니까 아니면 속곳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의 기준입니까? 만약 숙곳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의 기준이라면 장차 당할 일이 있습니다. 7절에 보면 "기드온이 가로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평안이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살을 찢길 것이고 망대가 허물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힘이 없다고 무시했던 무시로 인해서 그들이 찔림을 당하고 허물어뜨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시를 당했던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은 승리한 자로서 평안히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와 믿음이 없는 자의 결말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들의 시각으로 현재를 바라볼 때는 적은 것은 실패고 많은 것이 성공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많은 것을 높이고 적은 것은 무시하는 세상의 모습들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추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와 성공은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물론 참된 승리가 무엇인가가 드러날 때까지는 계속 무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두려움은 세상에서 무시를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두려움은 그리스도로부터 '나는 널 모른다'는 부인함을 받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인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어둠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많은 수로 성공하고 높임 받으려는 세상의 판단을 따라가겠습니까? 결국 그것은 스스로 나를 찌르고 허물어뜨리는 길인데도 말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신자의 믿음을 이해하고 인정을 한다면 인내라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이기에, 세상이 알아주고 높여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기에 인내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분명 성경적으로 볼 때 의로운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믿는 자의 생각으로서는 이러한 믿음이라면 분명 같은 믿는자들로 부터 환영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자고 할 때 부인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외형적인 조건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바로 이것을 거부합니다. 많은 것이 곧 축복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하기에 십자가만이라는 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 아예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직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믿음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이 왜 무시를 받아야 합니까? 그것도 같은 형제로부터 말입니다. 숙곳 사람들이란 숙곳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숙곳은 요단 동편의 갓지파가 기업으로 차지한 땅입니다. 그리고 브누엘 역시 숙곳과 마찬가지로 갓 지파의 성읍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은 같은 이스라엘, 즉 자기 형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오히려 무시를 당합니다. 믿음이 믿는다는 사람들로 인해서 무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누군가를 쉽사리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판단은 항상 세상이 기준일 때가 많습니다. 남을 판단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서 과연 외형적인 조건을 전혀 보지 않고 있는지를 판단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는지 판단하십시오.
만약 하나님의 선물만으로도 감사하고 사신다면 여러분은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각이라면 형제를 대할 때도 외형적인 기준이 아니라 그가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말하고 높이고 있는가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어떤 조건으로 산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만으로 그를 공경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 만나는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믿음으로 산다면 믿음을 알지 못한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한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자랑거리로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 나쁘고 악한 것이지 믿음으로 사는 신자가 잘못된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힘을 보고 사는 세상의 판단 기준은 결국 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이런 세상으로부터 믿음이 어떤 판단을 받을 것인지 여러분 스스로 답을 내리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삿 8:22-28 무엇을 믿는가?
신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자'는 말을 수없이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말을 할 때 다스림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다스림이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관계가 있을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다스림을 받는 자가 없는데 다스림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스린다'라고 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는가? 또는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할 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과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쉽게 '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십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은 궁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생각을 해보지도 않은 채, 다만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줄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평소 목사가 가르쳤던 대로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왜 교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목사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으로 대체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스림을 받는다면 다스리는 자가 분명해야 합니다. 직접 지시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명령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스리고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될 것이고, 그 다스림에 순종함으로서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고 믿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이처럼 목사의 가르침에 비중을 두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신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의 시대에서는 직접 말씀하시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성경이라는 책이 눈앞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책에 있는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목사를 세웠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대리자로 세움을 입었기 때문에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인식이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대리자를 내세워서 말씀을 전달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지만 항상 중간에는 대리자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상대한 것이 아니라 대리자를 중간에 내세워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도록 한 것입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보내신 것이며, 모세의 후에 여호수아를 세우시고, 또 사사 시대에서는 사사들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의 신앙이 엉망이 되었을 때는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상대하심에 있어서 항상 대리자가 등장을 했고, 그 대리자를 통해서 말씀을 전달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직접 상대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대리자 없이 말씀하시고 책망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기드온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여서 고생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짖을 때 기드온을 세워서 미디안을 이기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번거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분명히 하나님은 기드온이 없이도 얼마든지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드온의 군사를 300명으로 줄여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기드온의 힘이나 군사의 수가 하나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예 기드온을 세울 필요 없이 하나님이 미디안을 이기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힘도 없고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 기드온을 세워서 미디안을 이기게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대리자를 세웠을 때 확인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지, 진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과연 무엇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으로 증거 되어지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대리자로 인해서 증거 되는 것입니다. 대리자가 누구라 할지라도 대리자를 보지 않고 대리자를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그것이 곧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보이는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곧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믿음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든 돈이든 나를 복되게 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을 의존하려는 습성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롬 8:24-25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18절에서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보이는 것'의 역할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는 말씀은 보이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소망하고 바라보게 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을 세워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 역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 보이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 자체만 바라볼 때 사람은 자기들 상식대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보이는 모습이 초라하고 약한 자일 때 무시를 해버립니다. 반대로 본문에 등장하는 기드온처럼 미디안을 쳐부순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 보이는 사람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이 곧 이러한 인간의 악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란 사람을 세워서 미디안을 물리치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기드온이 아예 없다 해도 미디안을 물리치는 일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과 300명이라는 군사를 세워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32,000명이라는 군사를 300명으로 줄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을 때 혹 우리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스스로 자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00명이란 적은 수의 군사는 결국 기드온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버렸습니다. 만약 기드온이 32,000명의 수로 전쟁을 했다면 기드온의 전공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것입니다. 군사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이긴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00명의 수로 십수만명 되는 미디안을 이겼다면 그것은 기드온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자긍할까 해서 군사의 수를 줄인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기드온을 영웅으로 여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군사의 수를 줄이게 하신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선에 속해있습니다. 롬 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선하지 못하고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악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편한대로 해석을 하고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이해를 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이 선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군사의 수를 줄이신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스스로 자긍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수로 승리한 기드온을 볼 때 기드온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의 영웅과도 같은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22절에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라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기드온뿐만이 아니라 아예 기드온의 가문이 자자손손 대대로 자신들을 다스려줄 것을 요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 요구는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삼고자 하는 속셈입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기드온이 좋아서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겠다고 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단지 기드온과 같은 사람이 자기들을 다스리면 미디안과 같은 이방나라의 압제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것입니다. 자기 생존에 필요하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드온을 자기들에게 붙들어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것은 기드온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존 문제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있으며 또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미디안의 많은 군사, 기드온과 기드온의 300명 군사, 이런 모든 것이 합력해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믿고 사는가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요구에 대해서 기드온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승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린 결과임을 알기에 자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자와 받지 않는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자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까지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알기에 눈에 보인 것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사는 자는 자연히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내 앞에 있게 하신 것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신다면, 그 증거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앞에 그 무엇이 있다고 해도, 설사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여러분이 세상에서 높임 받고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해도 보이는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지 보이는 것을 신뢰하고 그것을 소망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목사의 다스림을 받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기드온의 위치에 있다면 교회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교회가 목사를 의지하고 목사의 다스림을 받으려고 할 때 단호하게 '내가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스린다'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악함은 그러한 말까지 이용을 해버립니다. 즉 목사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스린다'고 할 때 더욱 더 목사를 신뢰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다'고 하면서 목사를 의지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함은 끝까지 인간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사건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24절부터 보면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탈취한 귀고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즐거이 탈취한 귀고리를 내놓습니다. 이미 기드온이 자기들의 영웅으로 등장한 이상, 또 스스로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겠다고 나선 이상 아까울게 없는 것입니다. 아마 진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는 신자라면 역시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무엇에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 말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귀고리를 즐겁게 내어놓고 기드온은 그것으로 에봇을 만듭니다. 27절에 보면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고 말합니다. 즉 기드온이 탈취한 귀고리를 내놓게 해서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자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이란 남녀 사이에 있는 부정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때 그것을 음란이 행했다는 말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봇을 음란하게 위했다는 것은 에봇을 우상을 섬기듯 섬겼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에봇이란 본래 출 28:6-30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할 때 이 옷을 입고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에봇은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에봇을 볼 때 에봇 자체를 신비한 물건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을 되새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봇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에봇만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날에 대한 규례나 의식이나 절기 등등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를 기다리게 하는 의미로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세우심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의미를 둬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붙듬으로서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을 소유한 것같은 착각을 가진 것입니다.
가령 날을 지킴으로 인해서 복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들이 그런 것입니다. 복을 거룩한 날이라고 하는 것 속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날을 내것으로 만들면 자연히 복도 내것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 역시 그러한 의도에서 였습니다. 즉 에봇 때문에 이스라엘이 실로에 있는 성막의 제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에봇이 있는 오브라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의 악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봇을 만든 기드온이 잘못한 것입니까? 27절에서 에봇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볼 때 에봇을 만든 기드온의 행위는 스스로 올무에 걸리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린 왜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기드온은 에봇의 역할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에봇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에봇을 만들었을 수가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잊지 않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에봇을 만든 것입니다. 뭔가 눈에 보인 것을 만들어 놓으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지 않겠느냐는 생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조차 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에봇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도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기드온과 그 집안에 올무가 된 것입니다.
에봇을 만든 기드온의 의도는 선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염려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인 것을 세워서 신앙을 도우려고 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떠난 생각인 것입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이 일에 대해서 순종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눈에 보인 예수님을 그 모습 그대로 판단을 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인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서는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도저히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천한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한 모습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곧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알고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며 방법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보이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계심을 알아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것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시고 피난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삿 8:29-35 기드온이 죽으매
인간의 삶은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건 없는 삶이란 없으며 삶 역시 사건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서의 사건이라는 것은 우리가 의도한다고 해서 그대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과 방법으로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발생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사건이며 삶인 것입니다.
사건이라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특이한 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은 사건과 사건이 아닌 것으로 구분되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라면, 그리고 삶의 모두라는 것이 숨쉬고 밥먹고 걸어다니는 우리가 일상생활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포함된 것이라면 삶의 모두가 곧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이 우리들의 의도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숨쉬고 밥먹는 것 하나에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특이한 사건에서만 하나님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특이한 사건에서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역시 사건이 기억에서 희미해지면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으로 본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내 주위에 일어난 사소한 일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음으로서 항상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지는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계시가 완성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들이고, 오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제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묻고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으키신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과 같은 맥락의 사건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는 신자는 비록 특이하고 희한한 사건을 체험한다고 해도 그 사건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셔서 험난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 나름대로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과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시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의도대로 인간은 광야에서 실패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신자는 내가 바로 이스라엘과 같은 존재임을 현재 자신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건이 없을 때는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지만 어려운 사건이 발생함으로서 결국 자신의 삶에 주어진 환경을 스스로 이길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불뱀으로 징계를 합니다. 불뱀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때 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서 부르짖습니까? 7절에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라는 말씀을 보면 불뱀으로 인해서 이들의 관심은 먹을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에 있게 됩니다. 더 큰 고통이 주어질 때 상대적으로 적은 고통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되는 인간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심정은 불뱀의 고통에서만 해방된다면 좋겠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못 먹어도 괜찮고, 못살아도 괜찮다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놋뱀을 장대에 달고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불뱀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은 위에 계신 분으로 인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계시를 제대로 이해한 자는 위에 계신 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불뱀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몸이 편해졌을 때 다시금 죄를 행하게 됩니다.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성경의 한 부분에서 나타난 사건일 뿐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이러한 구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시고 뭔가를 계시하시고 보여주시지만,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눈에 본 것이 있을 때만 잠시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뿐 보이는 것이 사라지면 다시 자기들 좋을 대로 행하고 악함이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
이러한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 역시 그들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준이 곧 우리의 수준임을 마음속 깊이 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 사건을 일으키심으로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사건에 붙들려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함만 보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어떤 열매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한대로 기드온이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귀고리 등 금을 모아서 에봇을 만들었는데,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과 기드온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안했더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에봇을 만들어 둠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에봇을 볼 때마다 상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나올 때 입는 옷이고, 그 옷을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에봇을 볼 때마다 그 에봇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탈취물로 만든 에봇을 볼 때마다 미디안을 이긴 것은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주신 결과임을 잊지 말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에봇에는 기드온의 선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아는 사람입니다. 미디안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결과임을 마음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드온이었기에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 앞에 둠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잊지 않도록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수준은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에봇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보이는 에봇을 하나님 대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입니다. 즉 에봇을 앞에 두고 소원을 빈다든지 에봇을 소중히 여김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인 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도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무로 남게 됩니다. 눈에 보인 것을 의지하고 섬기는 모습은 또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의 사는 날 동안 사십 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미디안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태평한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힘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기드온에 의한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으로 인한 문제는 기드온이 죽음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32절에 보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비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것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명이 영원하다면 믿을만한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감으로 인한 문제는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기드온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게서 나타난 문제는 무엇입니까? 33-35절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더라"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이 행한 것은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치 않습니다. 또 기드온의 집을 후대치도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인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고 기드온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는 기드온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 흉내라도 낼 수 있었겠지만 기드온이 죽고 사라지자 자신을 다스리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그나마 그들을 통제했던 힘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삿 17:6절의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이나 삿 21:25절의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국가의 제도적인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나를 다스리는 분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분이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진리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되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눈에 보인 것을 의지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이나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는 우상을 섬기지 않다가 기드온이 죽고 사라지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않고 기드온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은 모든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이 아니라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다는 증거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린 분명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삽니다. 보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또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올무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 하나하나는 성경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건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개입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죄악을 범한 것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은 우리의 허물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불신앙으로 갈 때 하나님의 개입은 그냥 두고 보시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냥 두고 보셨다가 성령을 통해서 그 죄를 책망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앞에 있는 사건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기 위한 도구이며 수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은 우리들 곁에 사건과 사건이 이어지게 하심으로서 끝없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수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그 중에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얼마든지 평생토록 하나님만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신비한 것도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요단강 물이 마른 것,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해와 달이 멈춘 것 등등 수많은 사건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신비스러운 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놀라운 사건들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붙들어 놓지를 못했습니다. 이적이 있는 잠시동안 하나님을 기억했을 때 그 사건이 사라지고 다시 현실이 그들의 눈에 보일 때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현실을 따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실제로 홍해 사건을 체험했다고 합시다.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기도해서 해와 달이 멈추는 사건까지 체험했다고 합시다. 과연 여러분은 그 사건들을 보면서 사건에 매이지 않고 그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건은 하나님을 계시해주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사건을 보면서 사건 자체는 걸러내 버리고 순수하게 하나님만 여러분의 마음에 남게 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수준이 아닙니다. 보이는 사건 자체에 매료되어서 보이지 않는 분은 순식간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놀라운 사건을 체험했으면서도 뒤에 괴로운 일이 발생하면 앞에 있었던 놀라운 사건을 잊어버리고 괴로움에 빠져서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 기드온을 세우신 것은 기드온을 믿거나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을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먼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다는 것을 가르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난 채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눈치보는 대상이 사라진 것이고 자기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왕이 없는 상태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안되기 때문에, 인간의 수준이나 능력으로는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안되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수준이기에 성령을 보내셔서 보이지 않으신 분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어떤 사건이 있다고 해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어떤 위대한 인간이 있다고 해도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지 결코 인간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교인이 목사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증이라는 것을 하면서 자기가 체험한 사건을 증거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건을 증거 하거나 인간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보이는 것을 세우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뿐입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올무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우리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간다면 필연코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경우에서도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사건도 인간도 여러분의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하나님만 담아두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들의 삶에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는지 확인하라고, 과연 주님의 은혜로 사는지 확인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심을 잊지 말라고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시고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도록 하십시오. 이 일에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어떤 것이 여러분을 유혹한다고 해도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보이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믿음만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삿 9:1-6 인간의 연합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대한 판가름은 의지했던 대상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대상으로 섬겼던 사람이라면 그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설사 삶 도중에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서 흔들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믿음의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하는 믿음이라면, 그 사람이 존재할 때는 얼마든지 믿음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기에 그 사람이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결국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들통이 나기 마련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던 것이 바로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사람이 하나님만 신뢰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비록 자기를 다스려 달라고 부탁하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고 나의 손자도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은 결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아님을 말했지만, 그 말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기드온의 의도를 깨닫거나 기드온을 다스리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미디안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한 기드온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린다'는 그 말로 인해서 기드온에게 더 신뢰가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런 기드온이라면 우리가 믿을 수 있다'는 신뢰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기드온의 말에서 겸손을 발견할 수 있고, 저렇게 겸손하고 믿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기드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라고 말했지만 이스라엘은 그 말에서까지 기드온을 더욱 신뢰해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드온이 죽고 나자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던 것이고, 본문에서 기드온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형제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둔 여러 첩 가운데 세겜의 여인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이 아비멜렉이 기드온이 죽고 나자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경쟁자가 없어야 했습니다. 당시 아비멜렉의 이복 형제들이 70명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기드온의 아들인 이상 모두가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사라지는 것이 곧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먼저 자신의 동조자를 만들기 위해서 세겜에 사는 자신의 외조부와 그 가족을 찾아가서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 지친임을 생각하라" (2절)고 말합니다.
즉 아비멜렉은 세겜사람인 자기 외가를 찾아가서 외가로 하여금 세겜 사람을 설득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아들이 70명인데 70명이 다스리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과 골육지친임을 내세워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아비멜렉의 말대로 그들은 세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고 세겜 사람들의 마음은 아비멜렉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리고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서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바알브릿 묘란 이스라엘이 섬기게 된 바알브릿이란 우상의 신당을 말합니다. 그 신당에 바친 제물 가운데 은 칠십 개를 꺼내서 아비멜렉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유(돈 받고 일해주는 건달을 의미함)를 사서 오브라에 있는 자기 형제 70명을 죽여 버립니다. 이 일 후에 세겜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보면서 우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를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세우기 위한 사건들이 끝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칠십 명이 다스리는 것보다, 한 명이 다스리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말하는 아비멜렉이나, 그 말에 동조해서 아비멜렉에게 은을 준 세겜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지 않고 있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느 한편이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고 살았다면, 즉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봤다면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세겜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봤다면 아비멜렉의 의도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알았던 기드온은 그 말에 동조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책망을 했지 않습니까? 결국 아비멜렉에 의해서 70명이 죽은 것은 아비멜렉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속사람의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어느 한 사람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만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비멜렉은 어미의 집이라는 혈통을 이용해서 사람을 자기편으로 삼으려고 했고, 세겜 사람 역시 혈통과 친족이라는 이유로 아비멜렉을 도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만 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라는 말을 한 것은 다른 형제들도 모두가 왕이 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입니다. 즉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는 욕심이 있을 때 자연히 자신과 똑같이 기드온의 아들이라는 위치에 있는 다른 형제들을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다른 형제들도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을 경쟁자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볼 때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 마음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다른 형제들이 왕이 되려고 한다는 오해를 가졌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오해라는 것도 자기 욕심과 자기 판단에서 나온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두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알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속 사람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다스림을 받고 있는 사람이 곧 신자인 것입니다. 세상을 볼 때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기준이 되어서 보게 되고, 형제를 볼 때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시각으로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인간에 대한 쓸데없는 오해도, 또는 누군가를 자신의 경쟁자로 삼는 행위도, 그리고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도,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에 동조하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자로 인해서 증거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자기 백성을 남기신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증인다운 행동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증인의 모습은 주님께서 만들어내십니다. 행동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사람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다스림을 받고 있느냐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다스림 받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증거 되어지는 쪽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동조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에게만 동조하고 그 어떤 인간에게도 동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한다면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그 말에 동조하십시오. 그 말에 함께 하십시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의롭게 보고 사람에게 동조를 해버린다면 결국 본문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옳게 본다면 내가 옳게 보는 사람을 누군가가 방해하고 나설 때 결국 내가 동조하는 사람 편에 서서 같이 공격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사라지고 오직 인간에 의해서 인간을 중심으로 일어난 본문의 사건을 깊이 생각해 보시고 혹시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난 채 모든 일을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굳게 세울 것은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신 그 은혜와 사랑이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만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그에게 경쟁자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경쟁자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쓰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안에 함께 모이는 관계라면 그 안에서 경쟁자란 말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린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자고 모이고 있는 것이지 내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모인다면 여러분이 곧 신자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삿 9:7-21 존재의 이유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고 계획일 수 있지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계획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무엇이 되어지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자신의 마음과 계획대로 되어지지 않는 결과에 대해서 실망하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은, 되어지고자 하는 것 자체가 오직 자신의 즐거움과 유익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왜 의사가 되려고 하는지 자신의 마음가짐부터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배워서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의사가 되려고 했다면 그 사람은 의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 봉사, 즉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사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의사가 되지 못했다고 해도 현재 되어진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서 이웃에게 봉사하고 유익이 되는 일을 찾아갈 것입니다. 의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가 못된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가 되려는 것이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염두를 둔 계획이고 목적이라면 그는 의사가 되지 못했을 때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사가 되려는 자기 계획이 성사되지 못함으로서 자신의 인생은 출세와 성공에서 실패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지게 하고 삶의 힘을 잃어버리게 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되고자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되고자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다면 무엇이 되든 그에게는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되어진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되어진 모습에서 되고자 했던 이유와 목적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이 되어지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대로 되어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되고자 하는 방향과는 전혀 달리 되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주관자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달리 하나님의 계획이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 의지를 결코 굽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안기실 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이유가 하나님이 안기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것에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뜻에 순종하고 있다면 내가 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낙심과 원망으로 남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현재의 모습으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되고 싶은 내 욕망에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과 되어지는 결과는 서로 전혀 다른 세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세계를 사는 사람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 잡혀 살아가기 때문에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만, 되어지는 결과가 자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재 되어진 자신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신자라면 그 삶은 참으로 행복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의 경우 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오늘 본문이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세겜 사람을 충동하여 함께 힘을 합해서 아비멜렉의 이복 형제 70명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있습니다. 9:5절에 보면 생존자는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요담이 세겜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취한 행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심산으로 가서 세겜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구하기 위해서 감람나무에게 나아가 '우리들의 왕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자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9절)고 대답합니다. 즉 자신의 할 일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됨을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다시 무화과나무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역시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11절)는 말로써 그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무화과나무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족하기 때문에 왕됨을 거절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나무들은 포도나무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13절)는 말로써 그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포도나무 역시 자신이 하고 있는 역할에 순종할 뿐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나무들로부터 왕됨을 거절당하자 나무들은 가시나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같은 요구를 하자 가시나무는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15절)고 대답합니다. 왕됨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담이 세겜 사람을 향해서 외친 우화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요담의 이야기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종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 종류는 가시나무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확실하게 구분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중 과연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감람 무화과 포도나무는 왕됨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이유는 왕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삶에 더 감사하고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입장에서 볼 때 분명 성공과 출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왕되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것이 성공이며 출세이지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고 감람나무가 기름을 내고 무화과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는 것은 사실 하찮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나무는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왕이라는 권력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있는 것이었습니다. 세 나무가 맺고 있는 열매가 가치 있고 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 나무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름과 열매를 귀한 것으로 본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즉 세 나무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고 섬기라는 이유로 주어진 것임을 알았고 그들은 그러한 삶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됨을 거절한 것입니다.
세 나무의 특징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왜 주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라는 이유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나를 가치있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라고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것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요동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 나무는 자신들에게서 맺어지는 것들, 즉 감람 기름, 무화과나무 열매, 포도나무 열매는 자신들 스스로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되기를 원하는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던 가시나무는 어떤 사고방식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가시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가시나무는 열매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가시로서 오히려 이웃을 해롭게 하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가시나무는 스스로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는 말을 합니다. 가시나무의 그늘이 과연 뜨거운 햇빛을 넉넉히 가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합니다. 결국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결코 나무들이 피하는 그늘이 될 수 없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자,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여긴 사람은 자신의 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다스리려고 하게 됩니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게 의지하고 내게 피하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시나무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출처를 하나님이 아닌 자기로 본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전혀 없는 가시나무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면서도 내 그늘로 피하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보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기에 힘있는 자를 의지함으로서 그 그늘에서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피난처일 수 없습니다. 힘있는 사람의 그늘로 피한다는 것은 곧 힘있는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힘있는 사람의 보호를 받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요구와 지시에 대해서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사람의 그늘로 피한다는 것은 사람의 다스림 아래 들어가는 것이고 또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도 결국 '너는 내 밑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 역시 그러한 속셈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15절 중반에 보면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내 그늘에서 벗어나면, 즉 내 권세 아래서 벗어나면 그에 합당한 보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요담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세 나무는 기드온과 그 아들들에 비유하고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에 비유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왕됨을 거절했을 때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이 미디안을 이긴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하고 의지할 그늘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힘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은 미디안을 이긴 승리의 출처가 하나님인 것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승리의 출처를 기드온으로 본 세겜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봤기 때문에 의지하는 사람이 사라진 이상 또 다른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서 옛날에 그들이 섬겼던 기드온의 집을 쳐서 그 아들들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입니다. 사람을 바라봤기 때문에 결국 또 다른 사람을 의지하기 위해서 예전에 자신들이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던 기드온의 집을 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져 있든 그 출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고 섬기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되고자 하는 자기 세계가 아닌 되어진 것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되고자 하는 마음까지 버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되고자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되고자하는 것은 우리들의 계획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적은 되어진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것의 출처를 하나님에게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맺어진 것이 없는 가시나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는 내 그늘에 거하라고 큰소리치며 살아갈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라고 스스로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신자로 인정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고방식을 찾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본문의 세 나무가 보여주는 정신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의 출처를 하나님에게 두고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봉사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는 그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는 신자,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신자에게는 주어진 것에 대한 불평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에 대한 불평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세 나무는 자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에게 기름이 주어지고 포도 무화과 열매가 주어진 그 이유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만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자신들이 해야할 바를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 역시 세상에서 살아가실 때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보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되고자하는 분이 아니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였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스스로 그 자리를 피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를 살리시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믿는 신자라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고 지금 내게 있는 것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에 삶의 목적을 두어야 하는지 그 방향이 확실해 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날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존재 이유입니다. 이웃이 없었다면 우리 역시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웃 때문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않을 때 그 삶은 이웃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이기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삶으로 되어질 것입니다.
세 나무는 나에게 기름이 있으니까, 무화과 열매가 있으니까, 포도 열매가 있으니까 나에게로 와서 내 그늘에 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출처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족하고 감사했던 그 마음을 깊이 이해하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왕되고 다스리는 자 되는 것이 존재 이유가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내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고 이웃을 해롭게 하고 상처 입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삿 9:22-33 깨어진 인간관계
사람을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고정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따라 움직이는 마음이라면 결국 또 다른 사람에게로 얼마든지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 사람의 편에 서서 그를 지지하는 행동을 했을 때 사람을 향한 마음이 절대 불변이라는 보장이 없는 이상 언제든지 또 다른 사람에게로 마음이 떠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 상태는 여러분이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많이 경험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남녀간의 좋아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로 모였을 때 여러분 주위에는 수십 명의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모든 분을 다 마음에 들어하십니까? 아마 그런 마음으로 모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모인 분 중에는 어쩌면 여러분이 마주치기 싫어하는 분이 있을 수 있고, 또 어쩌면 교회에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전혀 없기를 바라지만, 인간의 마음이 우리들의 눈에 확인되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러한 의심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가?'라는 의심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과연 누군가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로 모이지는 않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교회란 인간의 마음, 내 마음을 가지고 모이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면서 이것만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 마음을 가지고 교회로 모인다면, 내 마음에 의해서 누군가가 상처를 입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 훼방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결국 내 편이고 나를 항상 옳은 편에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누군가를 의심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정답게 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은 부지런히 그 사람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지' '저 사람이 나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우리의 생각과 의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진행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정답게 대하지 않았을 때, 혹시 그 사람에게 무슨 나쁜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왜 나를 정답게 대하지 않는가?'에만 골몰할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오직 내 입장과 내 느낌과 내 생각만 가지고 모든 판단과 결론을 내리려고 해버립니다. 이것이 결국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마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람을 따라가는 마음이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 언제든지 실망할 수 있고 또 사람이란 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인간관계는 오직 사람을 따라서 형성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 내 생각을 편들어 주는 사람, 나와 인맥이 있는 사람, 이렇게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연합을 하다가도 나중에 사소한 일로 인해서 굳건하게 보이던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따라서 움직이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평생토록 내 마음에 들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 들었다가도 내일이면 또 다시 어떤 일로 인해서 마음 밖으로 멀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우리들의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모르고 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우리는 그러한 내 마음 자체가 문제가 있고 죄악된 것임을 생각하기보다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속에 품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인데 용서가 있겠습니까? 양보가 있고 사랑이 있겠습니까? 결국 다툼과 시기로 끝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인간 관계를 벗어버리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교회란 수요일 또는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흩어져 버리면 끝나는 그러한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참으로 특이한 관계로 모여지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 자신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과연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대신 피흘리고 죽으신 그분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에서는 십자가에 피흘리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고 해도 삶에서는 십자가에 피흘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채 나를 드러내고 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관계에서부터 보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것은 인간관계의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 사람 편을 들고, 나와 선후배 관계, 인척 관계, 이런 것을 이유로 들어서 함께 할 때 그러한 관계는 결국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엮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누가 나를 좋아하는가?'를 살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살핌은 결국 내 속에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자를 구별하고 갈라놓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고, 그것으로 이미 그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다툼과 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인간관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인가를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마치 우리들이 형성하는 인간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버려야 할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해방한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기드온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기드온은 큰 영웅이었던 것이고, 또 기드온을 따라갈 만한 영웅이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마음은 한결같이 기드온을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이 죽고 나서 발생합니다. 기드온이 죽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인물이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다면 기드온이 살았던 죽건 그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이 죽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마음에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기드온이었기에 기드온이 죽었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의 마음을 다스리고 이끌어갈 존재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제 무엇을 중심으로 행동하겠습니까? 내 속에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존재가 사라졌다면 결국 인간은 자기 마음에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즉 내 마음에 드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당연히 내 마음에 드는 사람 편을 들게 됩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 마음에 든다'는 것이 무엇으로 결론 내려지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인척관계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하다 보니 걸림돌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복형제들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보니 다른 형제들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자기 생각과 입장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니 다른 형제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하는데 아들이 셋이 있습니다. 그중 두 아들은 회사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회사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아들의 눈에는 두 형제가 어떻게 비쳐지겠습니까? 회사에 욕심이 없는 두 아들이 길을 가다가 회사 직원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을 해도 '혹시 회사를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아마 회사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두 형제가 회사의 누구를 만나든 그런 의심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욕심에서 의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아비멜렉은 이복 형제 70명을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죽이는 과정에서 자기 혼자 힘으로 일이 안될 것을 안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인 외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외가를 선동해서 세겜 사람이 내 편을 들어줄 수 있도록 말을 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세겜사람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아비멜렉을 도와서 이복 형제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대로 요행히 살아난 말째 아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세겜을 향해 저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의 이복 형제들은 인간관계에 의해서 죽었다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전에 말씀을 드린 대로 세겜 사람들의 속마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기드온의 그 마음과 하나 되어 있었다면 기드온이 죽은 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었을 것이고, 왕이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인척을 끌어들이는 아비멜렉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아비멜렉에 동조하는 외가의 사람에 대해서 오히려 책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 전체가 이미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기드온을 대신할 인물이 필요했고 그 인물을 단지 외가가 자기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선택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보응을 하시는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22-57절까지의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관계의 분열입니다. 서로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싸우는 관계가 되버린 것입니다.
22-23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삼 년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악한 신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 나타난 현상이고,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관계 안에서도 오늘 본문과 같은 그러한 현상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악한 신이 함께 함으로 나타난 현상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신은 교회와 상관없이 단지 세상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신은 얼마든지 우리가 모이는 모임 안에서도 활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것은, 악한 신의 활동을 허용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관계 안에서 악한 신의 활동으로 드러난 것이 과연 어떤 현상인가를 안다면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무엇이 악한 신이 활동함으로 나타난 결과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악한 신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우기지 않을 것이고, 악한 신과 그리스도를 분별함으로서 그리스도 쪽으로 나아가는 교회로 모여지지 않겠습니까?
본문의 내용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악한 신의 활동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배반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을 했다는 것은, 뭔가 아비멜렉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등을 돌린다는 것은 결국 처음부터 이들의 연합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19-20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오늘날 여룹바알과 그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에서 살아남은 요담이 세겜을 향해 외치는 말입니다. 그 내용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도운 것이 진실이며 의로움이라면 세겜과 아비멜렉은 진실과 의로움의 관계에서 서로 즐길 수 있지만, 만약 진실과 의로움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서로에게서 불이 나와서 서로를 사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실과 의로움의 관계에서 서로 즐긴다는 것은 용서하고 양보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그러한 관계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깨어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깨어질 수 없는 것은 진실과 의로움이 지키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의로움으로 연합되지 않은 관계는 결국 자기 이해를 기준으로 해서 행동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들 때는 함께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등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입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양보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요담의 말은 인간이 진실함과 의로움이 없이 단지 세상적인 조건과 이유로서 만나고 연합한 것이라면 그 관계는 결국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 세겜 사람들의 반역입니다. 25절에 보면 "세겜 사람들이 산들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하여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무릇 그 길로 지나는 자를 다 겁탈하게 하니 혹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고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세겜 사람들이 고의로 아비멜렉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들 꼭대기란 세겜을 둘러싼 산들을 의미합니다. 세겜을 둘러싼 산들을 차지하고 그 길을 지나는 자들을 겁탈을 했다는 것은, 어쩌면 아비멜렉의 포악한 정치로 인해서 견디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친 세력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들의 행동은 노골적으로 아비멜렉을 방해하고 도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에벳의 아들 가알이라는 사람이 세겜에 오게 되고, 세겜 사람들은 그를 의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신당에 들어가서 연회를 베풀고 먹고 마시면서 아비멜렉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가일이라는 사람은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 장관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28절)라는 말로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섬기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선동을 합니다.
그러자 성읍의 장관인 스불이 그 말을 듣고 노해서 아비멜렉에게 사람을 보내어 가알과 그를 쫓은 사람들을 칠 것을 선동을 합니다. 결국 가알과 아비멜렉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가알은 싸움에서 실패하고 쫓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겜 망대에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들은 아비멜렉은 그곳에 불을 질러서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데베스에 있는 망대를 공격하다가 망대 위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서 죽게 됩니다. 이것이 22절부터 마지막까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아비멜렉과 세겜에 내려진 하나님의 보응입니다. 그리고 악한 신이 활동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보면서 결국 악한 신이 활동한 결과가 인간관계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내편으로 만들어서 함께 공격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 역시 내 마음에 들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중에 또 다시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서 또 다른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린 세상에서 이러한 인간의 싸움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싸움이 보여질 때마다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심판이며 악한 신의 활동의 모습임을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린 교회로 모입니다. 교회 역시 인간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세상과는 다른 관계로 형성된 모임입니다. 세상의 인간 관계는 인맥을 따지고 출신을 따지지만, 교회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만 모입니다. 이것이 진실과 의로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나와 연고가 있는 사람,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 등등으로 따지며 끼리끼리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계로 형성된다면 결국 그 속에서 배척받고 상처 입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악한 신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항상 악한 신의 활동 아래 살아갑니다. 그러나 악한 신의 활동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모이는 교회는 한 성령 안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신의 활동에서도 깨어지지 않는 교회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겜과 아비멜렉이 어떤 관계로 맺어졌는지,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악한 신의 활동 아래 어떤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였다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에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내 허물을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모일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한 섭섭함이나 미움을 드러내기보다는 그것도 역시 내 허물이며 악함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악한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것을 드러내게 합니다. 자기를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바라보게 하고 맺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싸움과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 마음을 따라서 생각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다툼과 구별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신의 활동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신의 활동을 허용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확인하십니다. 교회에서 수시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지만, 우리 마음은 악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생각합시다. 누군가에게 섭섭함이 있을 때,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래서 그를 욕하고 싶을 때,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인지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모습인지 생각해봅시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성령께서 행할 바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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