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스크랩] 여호수아 강해 1

공 상희 2009. 5. 6. 13:26

 

 

 

 

 

 

 

여호수아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수 1:1-9 종


지난주에 신명기를 모두 마치고 오늘부터 여호수아서를 설교합니다. 신명기서와 여호수아서 사이에는 대전환점이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해 오던 모세라는 인물이 죽고, 대신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니 이스라엘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모세 대신 여호수아를 내세우신 것을 '여호수아가 모세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잘못했기 때문에 모세를 죽이고 대신 비록 모세의 시종이지만 모세보다 더 나은 여호수아를 세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처사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했어야 할 남은 일을 대신 하기 위해서 세워진 자입니다. 모세에게 남은 일을 대신 하기 위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특별히 다른 사명이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를 모세와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의 힘을 빌어서 성취해 가신다면 분명 하나님은 좀더 능력 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힘을 빌어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스스로 하십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담아서 세상에 부어 놓는 그릇의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릇이 능력이 있는 그릇, 능력이 없는 그릇으로 구분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릇은 단지 그릇일 뿐입니다. 뭔가를 담아서 부어 놓는 그 일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 그릇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전달하는 자이지 자신의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닙니다. 종과 주인의 차이점은 종에게는 자기 뜻이 없다는 것이고, 주인에게는 자신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은 철저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종다운 종은 주인의 뜻과 의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보면 종의 역할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모세를 가리켜 말하기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 대신 세우는 여호수아를 가리켜 '모세의 시종' 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힘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시종을 세웠습니다. 시종이란 늘 주인을 따라다니며 수종을 드는 종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종은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수아를 모세 대신에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갈 자로 세웁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일을 이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재능과 능력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서 여호와의 종이었던 모세 대신에 여호와의 종의 자리에 세움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모세를 다루시고 모세를 사용하셨던 것처럼 너를 다루고 사용하시겠다는 의도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것에 대해서. 성경을 밀쳐 버리고 자기 멋대로 꾸며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들은 곧 신약에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고, 구약과 신약 성경전체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들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신 방법들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다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표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도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신 방법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합니다. 마치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진 모습들은 '너희들을 이렇게 다루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인도하셨습니다. 모세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셨던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모세 개인의 삶은 포기되어야 했고 희생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기까지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에게 함께 하셔서 그 평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으로 세움 받은 모세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결국 모세의 인생이 이젠 너의 인생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모세를 다루었던 것처럼 너를 다루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제 여호수아에게 ''라는 것은 없습니다. ''라는 개인이 존재하고 ''를 위해서 살고 ''의 목표를 위해서 일하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종으로서 '여호와'를 위해서 살고 힘쓰고 일할 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으로 세움 받은 여호수아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주인의 사랑을 받고, 주인의 권세와 힘을 받아 누리는 것에만 있습니다. 마치 정승댁 종이 '우리 주인은 정승이다 아무나 정승댁 종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정승의 권세가 마치 자신에게 부여된 것처럼 위세를 떨치고 거들먹거리는 것만 즐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사가 목사라는 위치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아무나 여호와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과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평신도와의 차별성을 두면서 특별한 권세와 힘을 누리고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정승 댁 종' 과 같은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진짜 주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종이라면, 행여 자신의 행동이 주인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매사에 조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인은 정승이다'라고 하면서 제멋대로 행동함으로서 주인된 정승에게 누가 된다면 그는 종의 자격이 없는 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종이라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과 힘을 부여받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역시 특별한 권한과 힘과 축복을 부여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모세가 해야 할 일을 계속 이어가는 자로 세움 받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은 많이 하면서 실제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뒤바꿔 버렸습니다. 즉 주인을 위한 종이 아니라 종을 위하는 주인이라는 거꾸로의 관계로 뒤바꿔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도 주인이신 하나님의 심기가 어떠한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고 관심조차 없고, 오로지 종의 입장만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은 내어버림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신자에겐 ''가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란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남겨진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고 교회를 많이 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많이 세워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더욱 많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늘어날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 세상에 그대로 붓기 위해서 남겨진 자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 ''가 존재하면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개인의 사정과 입장을 고려하면서 수립되고 실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신자된 우리들의 환경이 뒤바뀔 수 있고, 뜻하지 않았던 고통과 어려움에 빠져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속에 ''가 존재하면 그럴 때마다 결국 나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순간 방해받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더러 자기를 써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써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은 모두가 자신의 위대함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일하게 해달라느니, 학교의 복음화를 이루게 해달라느니, 모두가 인간 편에서 볼 때 위대함을 드러낼 수 있는 일들만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교회에서 성도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에 힘을 쏟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모두가 다 작은 일과 큰일, 가치 있는 일과 가치 없는 일, 귀한 일과 천한 일 등으로 구분하면서 자신은 귀하고 가치 있고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목사가 하는 것은 가치 있고 귀한 일이고, 가난하고 병든 약한 자가 신발장 정리하는 것은 가치 없고 작은 일로 여기는 시각이 곧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위해서 싸우겠습니까? 모두가 자신을 크게 하기 위해서 싸울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싸움에 열중할 것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키거나 무시하는 자는 적으로 간주하고 용납하지 않는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이라고 할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교회를 크게 해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일에 매진하면서도 입으로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종에게는 자기 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과 뜻을 전달받고 그것을 전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종입니다. 때문에 종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내 인생을 유지하기 위한 것보다는 주인 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쏟아 놓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증거물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이 드러난다는 것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해서 사람들로부터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달라'라는 칭찬을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오신 분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흔적은 죄와 연관되어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것도 인간의 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통해서 인간의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서 실패의 결과는 죽음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실패를 극복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실패한 존재다. 약속의 땅을 차지할 자격이 없는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만 순종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여호수아가 대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시종으로서 모세가 이해한 여호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여호수아를 모세 대신에 세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는 자기 계획이란 것이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남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남은 일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여호수아였습니다. 이것을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기 계획이란 것이 있고, 그것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적이고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그것과 싸우겠다는 것이고, 가나안 땅에서 그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천국을 얻은 자, 약속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는 필연코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싸움을 통해서 십자가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은 이기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승리한 자의 전쟁입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자이신 그리스도안에 머물러 사는가를 확인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천국을 얻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얻은 자로 싸우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생명을 얻은 자로 싸우는 것입니다.

 

 

 

 

흔히 교인들이 신자의 신앙생활을 승리를 향해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신자는 승리를 향해서 올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승리한 자로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싸움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싸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린 이 말씀을 '이스라엘이 아무 땅이라도 밟기만 하면 다 주신다'는 약속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6절에서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땅의 영역이 정해져 있습니다. 조상에게 약속한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발바닥으로 밟는 것을 다 주시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오직 약속의 땅만 사모하면서 그 땅만 밟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 욕심껏 땅을 밟아서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마음대로 밟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 안에 사는 신자이며 이미 승리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다 주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주신다고 약속한 것만 주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지,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7-8절에 보면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율법대로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형통하게 하신다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통이란 우리의 일이 형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신자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형통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형통을 자기 일의 형통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형통해져야 하는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렸다가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고 다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서 전옥의 신임을 얻어서 옥의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된 것을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옥에서 잘되봐야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잘되려면 애굽에 팔렸다가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형통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요셉의 형통은 요셉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요셉은 애굽에 팔리고 옥에 갇히는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의 형통이란 내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일을 생각해 버린다면, 결국 보여지는 것은 자기를 위한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내 일이 잘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것이 과연 종의 자세입니까?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은 감투도 아니고 권세를 받은 신분도 아닙니다. 단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나타내 보일 존재라는 의미만 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종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적으로 삼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싸우며 살아갑니까? 세상의 것으로 내 육신을 채우기 위해서 싸우며 삽니까? 이것은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골 1:24절에 보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며 살아갈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셔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습니다.

 

 

 

 

신자가 자기를 위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흔적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자기 손해와 희생을 싫어할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우리 육체에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그 사랑만 앞세우며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시간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봅시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취소되지 않는 사랑과 자비에 눈을 돌리십시다. 그럴 때 그 사랑이 여러분을 여호와의 종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신을 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자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흔적을 담아내는 생애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수 1:10-18 싸움


세상에서의 종교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자기 집착에 빠져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고, ''라는 존재성을 보다 더 굳건히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신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확립하고, 세상 속에서의 자기 영역 확보와 자리 굳히기, 또는 욕망의 성취를 위해서 신을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의 차원을 뛰어 넘은 존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분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누구에게도 지시를 받지 않고 오직 신 홀로 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활동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 앞에서 자기의 생각과 뜻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신이 판단하시고 신이 행동하시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만 있을 뿐이지 신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다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지시에 움직이려는 의도보다는 신이 내 부탁대로 내 소원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고만 있습니다. 믿겠다는 것도, 신의 지시에 순종하겠다는 것도 사실은 신의 활동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을 향한 모든 행동을 자기의 의지와 노력으로 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신을 믿은 것도 내 의지로 믿은 것이고, 신을 찾아 경배하는 것도 내 의지와 노력으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 행동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한 행동이 되어야 행동에 대한 대가를 자기에게로 끌어 당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으로부터 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필연코 그에 합당한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자기에게서 자신의 의지와 선함으로 통해서 생산된 것으로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가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에 의해서 인간을 위한 종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신에 의해서 신을 위한 종교가 있다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한 종교는 철저하게 신 중심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스스로 신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공격하고 거부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을 신에 의해서 발생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종교의 문제에 오늘날의 기독교를 대비시켜 보십시다. 과연 무엇이 드러납니까? 인간을 위하고 인간 중심으로 뭉쳐져 있는 인간의 종교가 보일 것입니다. 신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조작되어지고 탈바꿈된 종교 하나가 거대한 바벨탑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에서 빠진 채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에 의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나타내셨는데, 인간들이 그 이름에 복종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란 이름을 이용하고 자기를 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인간의 모습이라면, 이런 인간 세상에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세상에서 자기가 중심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사람 몇이 모이는 조그만 모임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중심 되어서 그 모임이 움직여야 비로소 만족합니다. 조그만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중심에서 벗어난 채 되어진 일이 있으면 트집을 잡고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그 일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합니다. 내 아이가 학교에서 반장을 했을 때 부모 마음을 흐뭇해지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내 아이가 중심이라는 것이 부모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스스로 내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약 그런 자가 보인다면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능력에 의해서 새롭게 탄생되어진 새로운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믿으라' '사랑하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라'는 말들이 얼마나 말이고 허공을 울리는 공허한 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되어지지도 않는 일을 하라고 시키니 교인들로서는 무거운 짐만 떠안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눈치 챈 목사들은 '하라'는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되지도 않는 것을 하라고 하자니 목사 자신도 껄끄럽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도 할 수 있는 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렇게 말을 하자니 지금 당장 교인들이 할 일이 없어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에 '믿으라'고 해놓고는 믿는 것을 주일에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 등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만하면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인간이 신 되어서 인간 중심으로 남아 보겠다는 악한 의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참된 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악한 의지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기를 향한 욕망을 옹호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공격을 하고 죽이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린 그분을 참된 신이라고 일컫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인간의 자존심과 의지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소원을 위해서 달려오는 하나님을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상일 뿐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뛰어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뛰어드는 척 하는 인간들도 많이 있지만 사실 그들도 자기의 것을 안은 채 뛰어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알고 인간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앞에 성경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순순히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봐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인간다운 인간, 즉 적당히 좋은 일을 하면서 윤리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말씀하시면서 '행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의 완성체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해서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하나하나 실천해서 지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법을 하나하나 실천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법을 실천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니고, 또 법을 실천하기 위한 삶을 사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율법의 완성자라고 하는 것은, 실천의 차원이 아니라 율법을 만족시키는 인간의 모습,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실천'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과 오늘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사랑과 인간이 인간애로서 만들어 내는 사랑이 비교될 것이고, 예수님의 순종과 인간의 순종이 비교될 것이고, 예수님의 희생과 인간의 희생이 비교 될 것이고, 예수님의 섬김과 인간의 섬김이 비교되면서 선한 것으로 알았던 인간의 모든 것이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발각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인 예수님과 자신을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인간의 것과 내 것을 비교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 사람보다 나은 뭔가가 나에게 있음이 발견되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과 싸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것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적이고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싸움에 참여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가기 앞서서 여호수아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당부의 내용은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서 싸우자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것은 민32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요단 동편 땅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난 뒤에, 르우벤과 갓 자손이 모세를 찾아와서 '우린 요단을 건너지 않고 가축 기르기에 좋은 이곳에 머무르겠다'는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민32:6)라는 말로써 그들을 책망을 하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는 여호와의 군대로서 싸움을 할 군사를 뽑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것은 잘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로서 싸움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르우벤과 갓지파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진노를 일으킨 것은, 여호와의 군대로서 할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위해서 안주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존 문제를 먼저 챙긴 것입니다. 군사가 싸움을 하려고 하기 보다 자기 생존을 먼저 챙긴다면 분명 그 싸움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군대이면서 오히려 싸움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해서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 여호수아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너희 형제보다 앞서 가서 그들을 도와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여호와의 적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전투에 빠진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승리한 전쟁이라고 선언하셨으니 이스라엘의 숫자와 군사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이긴 전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가나안에 가기 싫다는 그들을 들여보내는 것은 가나안의 전투가 무엇과 싸우는 전투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라고 했습니다. 군대는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파악을 해야 하고, 오직 싸움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생존에 관심을 두게 되면 싸움에 대해서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우선 먹고사는 것이 우선이 되버리기 때문에 싸운다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고 귀찮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생존을 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고 그것만 확보하면 생존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싸움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굳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살수 있는데 굳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피곤을 자처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당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심정이었고, 오늘날 우리들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지금 여호수아서를 읽고 싸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지만, 이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의 군대로 부름 받았다고 할 때, '내가 여호와의 군사라면 내가 싸워야 할 적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싸우는 인생이 되고자 힘쓰겠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어쩌면 저는 지금 여러분이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생각지도 않고 있는 것을 저 혼자 떠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싸움이라는 것보다는 생존이라는 문제에 더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내가 생존하기에 적당한 조건들만 갖추어지면 그것으로 대만족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 앞에서 싸움을 말한들 그것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이처럼 인생에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려는 사고방식이 싸움을 회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생존에 집착하고 살고자 애쓰는 사람에게 선한 것은 자기의 생존에 유리한 것을 제공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는 가나안을 건너가는 것보다는 여기에 남는 것이 자기들에게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 39:4,5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 서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겠다'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하나님의 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에서 싸워야 할 이스라엘이 적은 누구입니까? 단순히 가나안 민족이 아니라 자기 생존을 위해서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사고방식 자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즉 가나안 민족을 치면서, 하나님은 지금 가나안 민족을 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민족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바로 나 자신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의 싸움은 무엇과 싸우는 것입니까? 신자의 적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불의입니까 아니면 지배계급입니까?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며 나의 적입니다. 인간은 절대 생존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행동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단지 숨만 쉬면 되는 생존이 아니라 세상에서 내 존재성을 굳건히 하는 생존을 원합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기에 바쁘고 생존을 위해서 경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임과 동시 바로 우리들 모습 그대로입니다. 내가 곧 세상이며 세상이 곧 나입니다. 내가 세상 사고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해도 우리 머리 속에서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발버둥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는 여호와의 군대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적을 나의 적으로 삼고 하나님과 더불어 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나를 치는 것, 이것이 신자의 싸움이며 가나안 싸움의 의미입니다. 우리 자신을 이미 생명에 있는 자로 보십시다.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는 자로 보십시다. 그럴 때 드러나는 죄가 무엇입니까? 이미 생명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이미 성공한 자이고 완성한 자이며 모든 것을 얻은 자입니다.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성공한 자라는 것을 아는 신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에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얻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애타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 안에 사는 신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생명을 얻은 자의 모습이 아니고 천국에 앉아있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하고 얻지 못해서 섭섭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를 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붙들지 못하고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하나님이 치시고 무너뜨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의 군사로서 싸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말씀을 청종 하지 아니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는 군사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말씀을 청종하고 명령에 순종하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청종하고 명령에 순종한다면 자기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는 떠난 자가 분명합니다. 자기 생존에 집착한 자가 말씀을 청종할 수 없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생존을 위한 강한 집착과 의지가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기도하는 순간에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생존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죽어야 할 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생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모이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 집단이며 인간의 단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이 난무하는 저주와 멸망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 32:15을 보면 요단 동편에 안주하려는 이들의 행동을 여호와를 떠난 행동으로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이들은 여호와를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또 여호와를 떠날 생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가나안에 들어가기보다는 가축을 키우기에 알맞은 땅에 거하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을 여호와를 떠난 행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약속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기를 치는 삶이 없다는 것은, 여호와를 떠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붙들고자 하는 욕망이 자기를 치고 공격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는 쪽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싸워야 할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이웃이 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내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보다 생존을 위해 살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와 같은 사고방식이 바로 우리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치시고 공격하십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적이 바로 나 자신임을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 내가 붙들고 있는 이것을 치십시오. 내 행위를 자랑하는 이 악함을 그냥 두지 마십시오. 나를 죽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입니다. 이미 하늘의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모독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적이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하나님 편에서 제대로 된 싸움에 참여하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수 2:8-14 라합의 믿음


예수님 시대에 있어서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만약 믿음이라는 문제를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옆에서 수종을 드는 것만으로 얘기한다면 제자들은 모두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직업까지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는데 그만한 믿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잘 알았다면 몰라도 알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따르라'고 하는 한마디에 자기의 일을 다 버리고 좇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도, 적어도 우리는 대단한 믿음이라고 여기는 그 믿음도 결국 자기 죽음이라는 엄청난 권세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나디고 설교를 들었던 그 모든 세월들이 '자기 죽음'을 극복할 힘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당시 제자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구원과도 상관없는 믿음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는 우리들의 행위들이 과연 죽음을 이길만한 힘이 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당당하게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직접 말씀을 들으며 살았는데 십자가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도망을 치고 만 것입니까?

 

 

 

 

믿음이라는 문제는 인간 쪽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믿는다고 해서 믿고 있는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의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에 대한 확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믿음이 과연 내 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아닌 것으로 발각되는 것은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빈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이 믿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생각하면 뭔가 부족한 것은 있을지라도 '나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내 행동에 있어서는 부족한 것이 있지만, 내 마음은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에 자기가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믿음을 확인하라고 성경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자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믿음에는 이러한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본받아서 이 사람처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 같은 삶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예로 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창 22: 12).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을 우리에게 남겨주심으로서 믿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지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신 10:12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랑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 사랑이 부정되어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자기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공존할 수도 병행 될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가 있으면 필히 다른 한쪽은 물러나야 합니다. 타협도 있을 수가 없고 화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에게 적이고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사랑이 부정되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먼저 자기 사랑에 대한 부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이것을 확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자기 사랑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되어질 수 없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이고,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자질과 의지와 믿음은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것을 버리고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믿음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안될 일도 되어진다는 자기 최면과 몽상으로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여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여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믿습니까'를 연발하는 것이고, 불안하기 때문에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조용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자신을 채우고 있다면, '믿는다'고 소리칠 이유도 없고 악을 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데, 믿음이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인데 굳이 예수님에게 자신이 믿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바로 나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현실이지 세상을 현실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이 주어진 것이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는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단순히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줬기 때문에 여리고성이 멸망당하는 가운데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시대 상황에서 정탐꾼이란 찾아볼 수 없고, 따라서 정탐꾼을 숨겨주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란 점을 생각해 본다면 라합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정탐꾼을 숨겨준 것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사건 이전에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낸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보내서 여리고 성을 살피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정탐꾼을 보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이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땅인데 정탐꾼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탐꾼을 보낸 여호수아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뭔가 불안했기 때문에 미리 점령할 땅을 살펴보고자 했던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불신앙에 대한 책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부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것은 곧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서 기생 라합을 만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을 통해서 믿음을 보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국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라합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라합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의 실체는 버림과 얻음입니다. 버림과 얻음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정탐꾼이란 곧 간첩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탐한다는 것은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여리고에 있어서는 위험천만한 인물들입니다.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탐꾼을 숨겨준다면 그것은 단지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차원을 지나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것보다는 간첩을 숨겨주는 것을 더 중한 죄로 여깁니다. 간첩과 똑같은 자로 여겨버립니다.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줬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건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정탐꾼에게서 자기 목숨을 내걸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을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단순히 인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탐꾼이었다면 라합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래도 숨겨 줬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정탐꾼이었는가하는 것은 9-12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이것이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에게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냥 신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상천하지의 하나님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에게 무너진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가 몇 명인지, 힘이 얼마나 센지 이런 것을 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 줬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 여리고 성은 무너진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탐꾼을 선대하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라합에게 다급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정탐꾼이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곧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시고 아모리 사람을 전멸하게 하신 일을 알고 있는 라합으로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스라엘이 곧 쳐들어 온다는 증거인 정탐꾼을 볼 때 다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급함 속에서 라합이 취한 행동은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게는 반역입니다.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여리고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이기심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나 살자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나라를 배신한 행위는 아주 파렴치한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라합은 설사 여리고가 무너진다고 해도 끝까지 여리고 편에 있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자기 나라를 버리고 이스라엘 편에 선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31절에서도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없었다면 라합은 여리고에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아니면 멸망당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라합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탐군이 들어왔음을 아는 자가 라합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정탐꾼이 들어온 것을 목격을 했고,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여리고 왕에게 고했습니다(2절). 그리고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기별해서 여리고를 탐지하러 온 정탐꾼을 끌어 내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라합은 자신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또 이미 성밖으로 도망을 쳤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똑같이 정탐꾼을 목격한 입장인데 왜 한쪽은 그들을 보호하고 한쪽은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쉽게 생각하면 내 나라를 해치는 정탐꾼을 잡아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국가를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라합이 국가를 배신하고 이스라엘 편에 선 이유입니다. 그것은 라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져 있음을 믿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면 가나안의 멸망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신들의 운명이 약속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들을 가리켜서 순종치 아니한 자라고 말합니다.

 

 

 

 

정탐꾼을 죽이려고 한 것이 왜 순종치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여리고 왕에게 정탐꾼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를 하기라도 했습니까? 그러나 지시는 하지 않았다고 해도 가나안 땅을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정탐꾼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탐군을 죽이고자 한 것은 자기 세계를 보존하고자 한 것이고, 영접한 것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라합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말고 자기 세계를 위해서 살지 말고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믿음으로 살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는 약속을 믿는 자입니다. 약속의 확고함을 믿고 흔들림이 없이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의로운 자입니다. 믿음이 이미 그를 의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생은 분명 세상 도덕적으로 볼 때 나쁜 일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창녀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그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 행위를 본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다말과 유다의 경우와도 같습니다. 다말이 스스로 창녀로 위장을 해서 유다와 동침한 것은 분명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의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말이 유다의 후손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 때문에 다말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행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든 죄인입니다. 다말이 창녀로 위장을 해서 유다와 동침을 했든 안했든 그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여겨지는 것은,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말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 여김 받은 것입니다.

 

 

 

 

라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라합은 여리고 왕의 물음에 대해서 거짓을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정탐꾼을 살리고자 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거짓말한 것은 나쁜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저는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은 인간의 행위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규정됩니다. 약속을 믿는 자는 옳은 자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른 자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약속에 대한 확고함입니다. 세상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확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일을 따라가기에 여리고라는 자기 세계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도 담보로 내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라합의 믿음입니까? 약속에 대한 확고함으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고 살아갑니까? 이 세상은 멸망당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확정되어진 일에 대한 확고함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세상에 대해서 미련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이 사는 분입니다. 얼마든지 라합의 자리에서 정탐꾼을 영접할 수 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정탐꾼을 보내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정탐꾼은 새로운 세계를 몰고 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여러분에게 말할 때 그가 바로 여러분의 믿음을 확인하는 정탐꾼입니다. 그럴때 하나님의 약속의 확고함에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정탐꾼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보다는 자기 세계를 붙들고 자기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필시 정탐꾼을 밀쳐 낼 것입니다.

 

 

 

 

라합이 자신의 나라인 여리고를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를 볼 수 있었고 그 나라에 자기 인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라는 여리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기에 여리고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에 남은 인생을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 3:7-13 요단강


신앙의 특징은 '자기 극복'이 아니라 '자기 헌신'입니다. 한라산을 등반하듯 점차 점차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하나님에게 헌신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신앙을 자기 헌신이 아닌 자기 극복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점차로 신앙적인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을 신앙의 덕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했던 모습이 보여질 때, 그것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의 신앙의 힘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의 특징을 다르게 말하자면,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감정의 방향 수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억압함으로서 신앙인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드러날 때 자신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 그 감정을 스스로 억압할 수는 있습니다. '신자인데 화내면 안되지. 내가 화내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안되지'라고 하면서 감정을 억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화가 날 때 그것을 억압해서 신앙인 임을 과시하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화를 내십시오. 그리고 역시 나라는 인간은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확인하시고, 예수님의 피에 모든 희망을 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특징이며 감정의 방향 수정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의 특징이 자기 극복과 감정의 억압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관심이기에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두게 되고, 자기 존재에 의미를 두다보니까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중들 앞에서 뭔가 다른 인간으로 보이는 것' 이것이 자신을 향한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높은 차원으로 평가하는 신자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내는 신자보다는 화를 안내고 항상 인자하고 인품이 좋은 신자를 기뻐하신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말씀을 계시하시고 우리 가운데 뛰어 들어 오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상식 안에서 머무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으시고 인간의 상식을 뒤엎으면서 하나님의 생각과 상식을 가지고 인간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의 생각을 지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를 따라가는 자이지 스스로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골라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신자됨을 증명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천지 창조 이후로 지금까지, 또 영원토록 하나님에게서 결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스스로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이고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순종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우리의 의지와 뜻은 포기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에게 일하실 때 인간의 의지와 뜻이라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홀로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창조주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참으로 쓰레기 같은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껏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뜻에 의해서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온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간혹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와달라'고 기도해서 일이 해결되어진 것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인정할 정도입니다. 결국 우리가 생각할 때 쉽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했고,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들만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내 생각 속에 가두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일을 해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이고 내가 하고 싶고 되어지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것인데 애당초부터 아무런 노력 없이 살면 되지 않습니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신자는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성령이 함께 하는 만큼 성령 받은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리기를 신앙의 특징은 자기 극복이 아니라 자기 헌신이고 감정 억제가 아니라 감정의 방향 수정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헌신이란 자신이 하나님에게 헌신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신학교 가서 목사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헌신이라고 해서 생활 형태가 불신자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왜 살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생각을 알기 때문에 그 마음과 생각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자기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힘과 노력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기에 자연적으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출 14:13절을 보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군사의 추격을 받고 쫓기다가 홍해 앞에서 가로막히게 됩니다. 뒤로도 물러 갈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합니다.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런 경우에 처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우리 상식에 맞는 말이라면, 홍해에 들어가서 헤엄을 쳐라 그러면 내가 도와주겠다라는 말이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살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움직일 때 그것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은 이해가 될지언정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 46: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는 것 같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면서 "내가 하나님임을 알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 노력이라는 원칙으로 살았던 삶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원칙으로 하는 삶의 세계로 옮겨짐을 의미합니다. 이 두 세계는 각각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자기 노력으로 사는 세계는 노력이 있고 성취가 보여질 때는 자신을 대단한 신앙인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노력이 부진할 때는 자기 신앙생활이 무척 저조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세계는 언제나 평안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언제나 변함없이 흔들림 없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안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요단강이란 홍해처럼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입니다. 요단강은 강의 특성처럼 가물 때는 물이 마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스라엘이 건널 당시에는 강 언덕에까지 물이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보리를 거두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보리를 거두는 시기에는 비가 많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의 언덕까지 물이 넘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건너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땅을 앞에 두고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이 요단강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건너가는지 그것을 살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야 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요단강이 인간의 힘에 의해서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말 같지만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다. 만약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요단강 앞에서 제물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다면 요단강이 갈라졌을까요? 아니면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회를 했다면 요단강이 갈라졌겠습니까?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그 어떤 정성과 노력도 요단강을 갈라지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요단강이 가로놓인 상황에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요단강이 어떻게 갈라졌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믿음으로 발을 내 딛었기 때문에 요단강 물이 말랐다는 말을 하면서 우리도 믿음으로 발을 내 딛자고 가르칩니다. 결국 인간 쪽에서 발을 내 딛었기 때문에 요단강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발을 내 딛는지 안 딛는지를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까? 15,16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발이 물에 잠기자 흐르던 물이 그쳤다고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들의 발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언약궤 때문입니다. 언약궤로 인해서 요단강 물이 흐르기를 그친 것이지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발을 딛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11절에 이르기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앞에 나가는 것은 주의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피가 뿌려지는 곳을 말합니다. 희생의 피가 이스라엘의 앞에 행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의 피 앞에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말하는 것은 희생의 피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는 이스라엘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희생의 피가 뿌려진 언약궤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언약궤를 바라보는 것이 이스라엘의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가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로서의 바른 모습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약궤로 인해서 길이 열렸다는 것은, 언약궤가 곧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희생의 피가 흘려진 십자가에서 천국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른 것을 길로 삼지 않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생각한다는 면에서는 다른 존재보다 월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과 의지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은 의식하고 생각할 줄 아는 이성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의식과 생각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이성과 생각이 길이 되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요단강이 어떻게 해서 그쳤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자기 생각 자기 뜻대로 살아가면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죄를 드러내기에 바빴지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이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기 생각 자기 뜻을 버리지 못하고 기도한답시고 하나님에게 억지를 쓰기도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어설픈 자기 생각을 굴리면서 뭔가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신자가 정말 하나님을 알았다면, 요단강이 어떻게 해서 물이 그쳤는지 그 비밀을 알았다면 하나님 앞에 항복한 포로처럼 두 손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할 것이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요단강을 건너는 체험을 하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 계획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4대 후에 약속의 땅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약속 안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았든 몰랐든 이스라엘은 약속 안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 민족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앞세움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됨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껏 내 힘으로 산 줄 알았는데 요단강을 건너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와 신실하심이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했구나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단강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은 하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말하면서도 주님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앞세우는 결과입니다. 이스라엘과 약속의 땅 사이에 요단강이 놓여 있듯이 인간과 천국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습니다. 언덕까지 물이 넘치는 강이 우리 앞에서 축복과 생명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단강의 물을 그치게 한 언약궤의 의미가 마음속에 새롭게 자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요단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죄의 본성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죄는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력도 수고도 정성도 다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여러분의 죄이며 요단강입니다. 그런데 그 요단강이 언약궤를 매고 나아가자 물이 그칩니다. 즉 천국으로 나아가는데 전혀 방해물이 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피의 의미를 아는 신자라면 자기 중심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방향이 전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요단강의 물을 그쳐진 것을 바라보면서 신자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언약궤를 따라가는 신자의 길과 언약궤 없이 자기 힘을 믿고 살아가는 자의 길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언약궤 없이 사는 자는 세상에서의 싸움이 혈과 육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따라가는 신자는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주관하는 자들과의 싸움입니다. 어둠을 주관하는 자는 자기 수고와 노력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앞에 요단강을 발견할 때마다 낙심할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이긴 언약궤, 희생의 피를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주관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승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라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으니 주님을 의지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따라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우리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희생의 피가 우리를 인도합니다'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신자된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온갖 세상 걱정 근심을 다하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 우리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십니다'는 고백으로 주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답답함과 근심 걱정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아니 지금도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일로 괴로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벗어날 탈출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구멍이 없다는 것이 더 괴롭고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탈출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입니다. 언약궤가 앞장섬으로서 요단강이 열렸습니다. 이젠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열려있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요단강 이편의 삶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한다면 스스로 그 길을 닫아 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여러분 앞에 있는 요단강 사이에 예수님을 모실 마음이 없습니까? 그리스도가 열어 놓으신 요단강을 그리스도를 따라서 건널 마음이 없습니까? 있다면 여러분 자신은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나의 가능성과 힘을 보지 않고 승리하신 주님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디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나아갈 길이 보일 것입니다.

 

 

 

 

 

수 4:1-9 열 두 돌


세상에 예수님이 하신 일과 비교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업적을 내세우면서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주장할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에 경쟁하고 도전하면서 자기의 우월성을 계시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없다고 한다면 없다는 그 말이 단지 말로 그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다가 예수님의 피의 흔적을 남겼습니까? 물론 신자야 그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확보되어진 지식에 의해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지식적인 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다만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단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약속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나를 용서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즉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단어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는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든지 '나는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 받는다'라든지 '예수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이 자신의 입에서 고백되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으로 단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인간의 내면을 위장한 채 뱉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외면보다는 속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신 후에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믿음이 없이도 믿는 행위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속에 예수가 없이도 예수를 말할 수가 있고, 천국이 없이도 천국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얼마든지 속과 겉을 서로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겉의 악함이 아니라 속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피의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겉이 선하게 보이고 믿음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속의 정체가 악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겉의 선을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속은 악하면서 겉의 행동이 선하다고 선한 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속은 악한데 겉은 선한 모습이라면 그것은 결국 위장이고 위선이고 이리가 양의 옷을 입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 정체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발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인간의 악함을 부인하고 감추려고 하고 끝까지 선한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못한 인간에 의해서 발생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는 인간의 악함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그 피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인정한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은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는 것을 선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피의 흔적이 담겨 있는 증거이기 때문에 그 피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입으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죄인일 뿐 행위에 있어서는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업적을 인정해 달라고 하고, 자신의 믿음 행위를 가치 있게 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인간의 악함과 더러움을 드러내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에 신자다'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자신의 더러움을 아는 태도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십자가를 남겨 놓으신 것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높임 받을 인간이 없다는 것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기준이 됩니다.

 

 

 

 

만약 십자가가 이 세상에 없었다면 인간은 자기들 멋대로 믿음을 만들어 내어서 '이것이 진짜 믿음이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주 난감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이것이 믿음입니다'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을 믿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믿음이 무엇이며 인간의 악함이 무엇이며 천국이란 어떤 자에게 합당한 나라인가를 분명히 제시하셨습니다. 때문에 인간 편에서 아무리 '이것이 믿음이다'고 내세우고 우긴다고 할지라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십자가를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며, 천국을 소망한다고 해서 천국을 소망하고 있는 자가 아님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거듭 촉구하지만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믿는 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고 있고, 십일조하고 있고, 기도하고, 성경보기를 오랜 세월 동안 해왔기 때문에 스스로 믿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속으로는 돈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얼마든지 '나는 천국을 소망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속다르고 겉다른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전혀 없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마십시오. 때문에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절대로 기도했느냐 교회 나왔느냐가 아닙니다. 내 속에 예수님이 있어서 예수님을 말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의 앞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나온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행위를 했든 무슨 수고를 하고 봉사를 했든 그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모든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교하면 내세울 수도 없는 가치 없는 것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이것을 했습니다'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행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행위만이 우뚝 서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악함과 더러움으로 가득찬 세상에 십자가는 있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앞세우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높임 받고 영웅으로 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 영광을 기피한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고 높인다는 것은 결국 내 속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자기 영광성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영광을 포기한 십자가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곧 십자가의 원수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40일 금식기도를 했든, 100일 철야기도를 했든, 성경을 수백 번을 봤든 상관없이 십자가의 원수된 자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자기 영광과 배를 채우는 것에 목적을 둔다면 그가 십자가의 원수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로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를 점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4장도 3장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4장을 읽어보면 요단강의 물을 그치게 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단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4장의 내용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요단을 건넌 후의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3장에 보면 백성들 앞에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앞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에 잠기자 물이 그쳤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계속해서 전진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백성들을 먼저 건너게 합니까? 본문 1절에 보면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라고 말을 하고 있고, 11절에서 "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라는 말씀을 보면, 제사장들의 발이 먼저 잠겨서 물이 그치긴 하였으나 요단을 먼저 건너간 것은 백성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단지 요단을 건너게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속히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사는 것이 전부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게 하신 것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왜 우리를 불러서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천국 보내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점에 대해서 여러분은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을 단지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천국 보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는 것이 전부라면, 무엇 때문에 제사장이 앞서 있는 데도 불구하고 먼저 백성들을 건너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목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그친 요단강을 건너서 강 저편에 서서 강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목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요단을 건너게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목격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사장들이 앞서고 이스라엘이 그 뒤를 따라서 요단을 건넜으면 이스라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요단강의 물이 그쳐서 건넜다는 기적의 체험에 대한 감격과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는 감격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했다는 감격은 체험한 세대에만 있을 뿐입니다. 결국 세대가 교체되면 요단강 물이 그쳐서 건넜다는 감격도,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는 감격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먼저 요단을 건너가게 하셔서 언약궤 앞에서 물이 끊어져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매 지파에서 한 명씩 불러내어 끊어져 있는 요단에서 돌 한 개씩을 어깨에 메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표징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요단강을 건넌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는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들이 표징이 되어서 기적을 전할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열 두 돌은 이스라엘 지손에게 요단강이 언약궤 앞에서 끊어져서 요단을 건넜다는 것을 전하는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기념돌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요단을 어떻게 건넜는가를 계속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옛날 조상들에게 있었던 기적의 역사를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셔서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함으로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념돌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돌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언약궤로 인해서 물이 그치고 요단을 건넜다는 체험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 요단에서 가지고 나온 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돌을 대단한 돌로 여기고 돌을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열 두 돌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해도 그 돌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까? 돌은 단지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체험도 역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 체험을 중요시하면서 특이한 것을 체험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 전혀 관심이 없음을 증거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기적을 체험한 것이 신자된 증표이고 기적의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기에 충분하다면 굳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표징을 남겨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표징을 남겨 둠으로서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는가를 계속 상기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결국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기적을 체험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돌을 표징으로 남겨 두시는 것은, 그 돌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된 것은 조상의 힘도 아니고 자신들의 노력도 아니고 오직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이루신 능력은 언약궤를 통해서 확실하게 증거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열 두 돌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계속 가르치시는 것은, '너희가 요단을 건너고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너희들에게 선한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고 너희들이 귀한 존재이기 때문도 아니고 오로지 너희들의 실패와 죄를 대신한 희생의 피가 뿌려진 언약궤가 앞서 행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열 두 돌은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하는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오직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과 신실하심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항상 고백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이 곧 이스라엘다운 모습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16-18절을 보면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을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요단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올라오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올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굳이 '올라오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그 명령에 의해서 올라오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그 명령에 의해서 제사장들이 올라오자마자 물이 다시 흘려서 요단강이 언덕에 넘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요단강의 물이 그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목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넌 것은 너희들의 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하나님이 건너게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언약궤가 빠져 버립니다. 즉 이스라엘의 실패와 죄가 어떻게 극복되었는가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궤가 요단강에 들어옴으로서 요단강의 물이 그치고, 언약궤가 요단 가운데서 나옴으로서 물이 다시 흐르게 된 것을 목격하게 하심으로서 자신들의 생명이 언약궤에 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현장입니다. 물 속에서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 언약궤가 함께 합니다. 그러자 물이 그치고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넙니다. 이것은 죽어야 할 이스라엘 속에 언약궤가 함께 함으로서 죽음을 극복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열 두 돌은 바로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열 두 돌은 모두가 물 속에 잠겼던 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열 두 돌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났는가를 자손 대대로 잊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 영원토록 계속되어져야 할 삶의 태도라는 것을 열 두 돌이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열 두 돌의 의미를 안다면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야 할 자가 희생의 피로 인해서 살아났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고, 자기 영광을 나타낼 수 없으며, 세상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열 두 돌의 의미를 알고 가슴속에 열 두 돌을 세우고 살아가는 진짜 믿음의 신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궤가 있으면 뭐합니까? 언약궤가 있다는 것으로 진짜 이스라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넌 체험을 했다는 것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열 두 돌을 세웠다는 것도 이스라엘 되게 하지 못합니다. 열 두 돌이 말하고 있는 요단강과 언약궤의 의미를 가슴속에 두고 살아갈 때 그것이 믿는 자요 이스라엘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십자가를 남겨 두셨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신자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에 남겨진 그 의미를 열 두 돌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인간을 구분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구분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할 자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희생의 피로 인해서 살아났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에서의 영광은 헛된 것이고 의미 없는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만듭니다. 죽음 안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요단강입니다. 언약궤로 인해서 강을 건너게 된 처지인데 그 속에서 자기 잘남을 자랑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요단강을 건너면서 '나는 똑똑하다 많이 배웠다 재산이 많다 자식이 성공했다'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언약궤 때문에 죽어야 할 인간이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으면서 말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 잘남과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에 바쁩니다. 누구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약속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착하게 살면 하늘도 무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아는 자는 자기 죽음을 압니다. 이 죽음 안에서 능력이 되는 것은 희생의 피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피를 의지하고 살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죽는다는 것을 가슴에 묻어두고 삽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 때문에 요단강을 빠져나왔듯이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요단강을 빠져나왔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 때 그가 바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자식에게도 세상에서 능력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인간은 예수 없이는 저주받을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식에게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열 두 돌이 말하는 요단강과 언약궤의 의미를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 5:1-9 할례


항아리 속에 벌레가 한 마리 있다고 할 때, 그 벌레는 항아리 속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항아리 밖에서 보면 자기의 갇혀 있는 실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밖에서 세상 안을 들여다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항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 갇혀 사는 벌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아리 밖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항아리 밖에서 거대한 망치가 항아리를 깨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면 무엇이 지혜이고 무엇이 어리석음이겠습니까? 물론 항아리 속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음이며, 지혜로움은 항아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비록 몸은 항아리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항아리 밖에서 거대한 망치가 항아리를 깨버릴 준비태세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실체를 안다면 그가 추구할 것은 깨어지는 항아리 속에서 살아남는 길일 것입니다. 깨어지는 항아리와 함께 나도 같이 깨어지고 말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 깨어지는 항아리 속에서 무사할 수 있는 길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데 항아리 밖에서 거대한 망치가 항아리를 깨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만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이며 현실입니다. 사도 마태는 마 3:10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라는 말씀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항아리로 본다면 항아리를 깨버릴 망치가 이미 항아리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항아리 속에서 좋은 것만 골라내고 몽땅 항아리와 함께 깨버리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현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외면한 채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깨어진다는 소위 심판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령 아마겟돈이란 영화에서처럼 혜성 하나가 지구를 향해오고 있는데 얼마후면 지구와 부딪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구는 멸망한다는 것과 같이 인간의 눈과 과학으로 확인되고 검증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는 것 때문에 종말이라는 현실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 24:6-8절에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등이 재난의 시작된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과 기근과 지진을 봐왔으면서도 그것을 절대로 재난의 시작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쯤으로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어느 한 나라가 홍수가 나서 완전히 멸망했다고 해도 종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나라가 멸망했다고 해서 지구가 망하지는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지진으로 인해서 완전히 무너졌다고 해도 그것을 재난의 시작으로 보지 않습니다. 내 나라가 괜찮고 내 사는 곳이 무사하다면 종말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쨌든 나는 존재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심판이 있다는 증거로서 지구가 멸망을 당할 만한 엄청난 재앙의 흔적을 찾고자 하지만, 그러나 세상 멸망의 증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입니다(마 24:38). 즉 인간의 일상 생활이 멸망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도 그랬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세상은 그런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 생활 자체가 멸망을 불러일으킨 원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일상 생활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아의 가족 역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있었습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삶이었지만, 한가지 다른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심판 때까지 방주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방주를 만든 노아의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계시를 마음에 담고 살았다는 증표가 아니겠습니까?

 

 

 

 

노아는 홍수로서 세상을 멸하시겠다는 계시를 받았을 때 하늘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즉 세상이 물로서 망할 만한 징조가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이런 행위를 있게 한 것은 노아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창 6: 8). 결국 세상은 은혜를 입은 자와 입지 못한 자로 구별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마음에 두고 방주를 만드는 생활이었고, 은혜를 입지 못한 자는 계시를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마음에 두고 산 것입니다. 이것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신자의 눈에 세상은 멸망의 장소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로 보여져야 하고 노아 홍수의 심판의 장소로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의 세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아는 자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만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한 자만 천국 간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고 은혜를 아는 자의 눈에는 절대로 세상을 정상적이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으면서도, 은혜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은혜를 무시한 채 인간의 힘과 과학과 문명을 내세우며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죄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도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죄를 발견합니다. 결국 나 자신까지도 멸망에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소리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소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멸망한다는 것을 믿고 사십니까?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실제 여러분의 삶에 심판을 믿는 모습이 담겨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노아가 심판을 머리로만 알았습니까? 심판을 믿는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드는 행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에게는 심판 속에서 방주가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심판을 믿고 산다면 당연히 심판 속에서 생명이 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모두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기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신을 원망하는 무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남겨두실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아무런 징조가 없다고 해서 안심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를 모르는 증거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은혜를 아는 자는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그것이 곧 멸망의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결코 세상의 삶의 방식에 타협하지도 않고 합류하지도 않고 오직 생명을 향해서 생명의 길로만 나아갈 뿐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지만 세상의 마지막을 알고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스스로를 신자라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신자다운 모습이 없는 자가 많습니다. 자칭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시당하는 것에 분노는커녕 덤덤하기만 하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잘사는 모습들이 부럽게만 느껴집니다.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사는가 못사는가를 더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멸망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로 사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할례'를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례를 행하는 내용입니다.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르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로서 행해졌던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굽의 수치'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있을 때 할례를 행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이렇게 애굽화된 이스라엘인들의 수치를 제거하는 방식이 곧 할례였습니다.

 

 

 

 

골 2:11절에는 할례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육적 몸을 벗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손으로 행했던 구약에서의 할례도 역시 마찬가지로 육적 몸을 벗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육신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 6: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육체가 되었다'는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가 없었는데 육체가 생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사람이냐 아니면 단순한 육체냐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로 인해서 이미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결국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가 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함께 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육체가 된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게로부터 문제성이 있는 인간으로 평가된 것이고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고 한 말씀을 통해서 육체는 죽음을 통해서 흙으로 사라져야 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할례라는 언약이 주어진 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은 육적인 몸을 벗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할례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할례언약대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자는 이삭입니다. 이삭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자기의 방식으로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기 스스로 약속을 이어가기 위해서 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방식입니다(롬 4:17). 이 방식이 보여진 것이 바로 이삭입니다. 결국 이삭은 아브라함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자식임을 보여주는 것이 할례였던 것입니다.

 

 

 

 

할례란 인간의 것은 차단되고 대신 하나님의 약속이 삽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육신은 잘라내고 대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민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할례란 육신의 죽음이며 부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새로운 인간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약속의 땅은 인간의 육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는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을 의지하고 자기 방식으로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고 스스로 존재코자 하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바로 약속의 나라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은 '우리는 인간의 육신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난 자들이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났기 때문이지 절대로 우리들의 힘이나 재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정신이 곧 약속을 따라난 이스라엘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 후에 인간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서 자기 이름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을 주신 것은,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 육신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 자기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과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거부하시고 무엇을 용납하시는가를 할례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마다 저에게 일어나는 의문은 '과연 사람들에게 천국에 가고자 원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야 천국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소위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천국을 열망하는 마음이 있는지 많은 의문이 듭니다. 이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 일점일획도 어김이 없고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 해당된 모습과 해당되지 못하는 모습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해당되지 못하는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애씀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저로서는 과연 천국을 소망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왔다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듣고 있다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나의 본질과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 인해서 말씀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발견하고 나의 수치를 가림 받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여러분이 말씀을 이해한다고 해도 생명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1절에 보면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을 건넜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있음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적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나안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적절한 것은 즉시 적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금 적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정신을 잃었다고 할 정도로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적을 치기에는 이 때가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적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이스라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격만 하면 손쉽게 적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단지 할례라는 의식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이 두려움에 빠져 있고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뭔가 교훈을 주시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적을 공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크게 실수하고 잘못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해를 낳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인간 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인간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적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 되느냐가 더욱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을 공격하기 이전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지 않고, 즉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육신으로 난 자가 아니라 약속으로 난 자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적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비록 승리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길 것입니다. 가나안 전투는 적을 가나안에서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투를 위한 전투가 아니고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약속했고 약속에 따라서 가나안 땅을 주실 것도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전투는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하게 하신 것은, 전투를 통해서 '너희가 어떤 인간 되었는가'를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이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로 기념비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4:20절에 보면 기념비를 '길갈'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 보면 할례 의식을 행한 곳도 역시 길갈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 두 돌로 기념비를 세운 것은 죽음을 통과한 것은 모두가 희생의 피가 뿌려진 언약궤 때문임을 자자손손 대대로 가르치라는 것 때문입니다. 즉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죽고 다시 살아난 민족임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것 역시 '우리 육신은 죽고 약속을 따라서 다시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인간된 모습입니다. 인간의 힘도 재주도 방식도 경험도 그 무엇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있게 된 것은 희생의 피 때문이고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 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전투를 할 때 '내가 싸워서 이겼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싸우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약속의 땅에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의 신자 역시 동일합니다. 롬 8: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인간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혹 누군가가 그리스도안에 있을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을 제시하거나 가르친다면 그는 거짓 사도이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악한 자입니다. 신자는 그러한 자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자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완성된 자로 이 땅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하기에 인간의 것은 단절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할례의 의미이며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육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하기에 '나는 육신이 아닌 주님만 의지하고 살겠습니다'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할례 받은 자로 사는가를 확인하고 시험하는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구로 삼아 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가 곧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돈있고 지식 있고 권력 있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군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일군입니다. 그리고 일군이 할 일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로 여기는 신자는 육신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 용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신자이며 하나님의 도구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끊임없이 인간의 육신이 부정되어지고 있습니다. 육신을 내세워서 해야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 안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며 할례의 의미입니다.

 

 

 

 

 

수 5:10-15 군대 장관


종교에서의 신의 개념은 인간의 사고의 활동 안에서 존재할 뿐입니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의 사고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되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를 통해서 규정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단지 인간의 사고에서 창출되어진 환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인간의 사고로 신을 규정해 놓고는 신이 무엇인가를 찾아갑니다. 이런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철학자'입니다.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 사고의 외부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사고의 활동 안에 존재합니다. 결국 이러한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신이란 '나 자신의 본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서 나온 생각이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웃으로부터, 친구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자신이 관계된 집단이라면 그 속에서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의 사고에서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는 신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해야 신다운 모습이고 신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결국 인간을 사랑하는 신은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란 개념은 사랑 받기를 원하는 나 자신의 본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활동과 생각은 언제나 인간의 사고를 초월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간의 사고를 동원해서 추적하려고 한다면 필시 거대한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만들어 내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변질은 인간 사고와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해석되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교회의 오류는 인간의 사고에서 창출되고 규정된 것을 신으로 인정함으로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극히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사고 밖에 존재하는 한 분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인간의 사고와는 철저한 대립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고 신앙이며, 신앙 또한 인간의 사고에 의해서 이해되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사고를 가지고 신앙에 접근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포기하고 기독교란 종교로 남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인간의 사고가 중지되고 부정되는 거기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사고와 신앙의 대립적인 관계를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는 약속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본토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우린 이것을 신앙이라는 말로 쉽게 생각하지만, 만약 이런 일이 여러분 자신에게 발생했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 성취의 징조를 미리 보여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닌 말로 밑도 끝도 없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할테니까 네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사고에 대치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 사고에 대치되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보편적인 인간 사고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좀더 구체적인 약속의 내용을 듣게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떠나라는 말 한마디에 지금껏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분명 미련한 짓이고 무모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아브라함의 행동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무모함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인간의 사고는 절대적으로 건널 수 없는 큰 고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사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자기 사고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의 사고로서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기 때문에 따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앙하시겠다면 절대로 여러분의 사고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이나 생각이나 활동은 여러분의 사고로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활동하십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여러분의 할 일이며 그것이 곧 신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리스도는 결코 인간의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입니다. 이것을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사고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결국 이해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혼란이며 낙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혼란스럽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서의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이성과 부딪혀서 내 이성이 굴복을 당할 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여러분께 드리는 것은, 설교란 철저히 내 이성, 나의 사고가 말씀 앞에 굴복 당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말씀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박히고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성령에 의해 힘있게 활동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사고와 이성이 철저하게 말씀 앞에 굴복되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간의 사고로서는 단념할 수 없는 것을 단념하게 되고,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할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인간의 사고와 이성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굴복 당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란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약속을 따라 났다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육신이 아닌 약속을 따라 났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이성이 부정되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고 양식이 없어서 원망하게 되고 근심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이 사고와 이성에 의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와 이성은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분명히 말씀은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마른 목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말씀이 있다고 할지라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이성으로서는 말씀보다는 물과 떡이 앞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이 이해되어집니까? 이해되어진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이성과 사고가 말씀 앞에 굴복되어진 기적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사고는 거대한 철벽과도 같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증거이고, 그것으로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자입니다.

 

 

 

 

사람은 분명 떡으로 삽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육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고와 이성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포기되면 더 이상 떡은 의미가 없습니다. 대신 자신을 영원히 살리는 말씀이 가장 귀한 떡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성과 사고를 초월한 신앙입니다. 할례란 이스라엘이 이런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은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용납하지 않은 축복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넘과 동시에 육신이 죽고 다시 산 자들입니다. 언약궤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육신은 분명 숨을 쉬고 존재하지만 육신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에 뿌려진 피가 더 의미 있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런 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성과 사고로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존재입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이성과 사고로 현실을 파악할 때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옵니다. 이젠 죽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러자 비록 종으로 살면서 고생은 하더라도 죽음의 위협은 없었던 애굽에서의 생활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열어서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요단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 물을 그치게 해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했다는 것 역시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성과 사고라는 한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해하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자비하심을 모두 자신의 이성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묵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할례 후에 유월절을 지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을 지켰고 시내산에서도 유월절을 한번 지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후로는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유는 할례를 하지 않은 자는 유월절을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육신이 아닌 약속을 따라난 자라는 표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로 살아났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할례와 유월절은 이스라엘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존재인데 그 약속은 곧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 즉 육신이 단절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유월절을 지킨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월절 역시 육신을 부인하고 오직 어린양의 피만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과연 무엇입니까?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입니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복을 위한 통로로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예배를 진노의 통로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유는 그러한 예배에는 할례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이 부인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롬 12: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예배인데, 영적 예배는 우리 몸이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 몸이 산 제사로 드려진다는 것은 결국 내 몸이 제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 몸이 제물이 된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육신의 죽음이란 육신이 부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부인은 자기 이성과 사고로 판단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에 자기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의 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배란 내 육신이 부인되는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할례를 해야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는 하나님의 규례입니다.

 

 

 

 

신자가 영적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 안에서 가능한 것이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이라는 것이 구약식으로 말하면 축복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하고 유월절을 지킬 수 있는 땅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 증거가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나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만나는 '너희는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는 존재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내려진 하늘 음식이었기 때문에 축복의 땅에 들어온 이상 만나는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할례를 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행위는 이미 가나안 땅을 얻은 자로서의 행위입니다. 가나안을 얻기 위한 준비 운동도 아니고 싸움을 앞둔 자로서 승리하기 위한 의식도 아닙니다. 이미 가나안을 얻은 자로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자인가?'를 새롭게 인식하는 할례이고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치러야 할 전투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이성과 사고, 즉 육신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따라 사는지를 전투를 통해서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투에서 요구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라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13-15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여리고 성을 정탐을 했습니다. 아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사고가 부지런히 활동을 하면서 현실을 파악하고 승리를 위한 방법을 모색했을 것입니다. 이런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란 분이 나타납니다.

 

 

 

 

1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다는 것은 전투를 앞둔 긴장감으로 가득찬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여호수아의 가는 길을 막아섭니다. 그럴 때 여호수아에게 떠오른 생각은 '이 사람이 누구편이냐?'는 것입니다. 우리편이냐 적의 편이냐는 것이 여호수아의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서있는 분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답이 나옵니다. 나는 누구 편이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오신 분은 여호수아의 편도 아니고 가나안 족속의 편도 아니고 단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라는 신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시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해 버린 답이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적과 아군은 ''를 중심으로 구분됩니다. 나를 위한 자는 아군이고 나를 해롭게 하는 자는 적군이 됩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자를 돕는 자까지도 적군으로 여겨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언제나 나를 돕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합니다. 내 일을 도와주는 하나님, 잘되게 해주는 하나님, 이것이 인간의 이성과 사고에서 만들어진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생각으로 여호수아도 칼을 들고 선 사람을 봤을 때 '누구를 위한 자냐?'는 것이 맨 처음의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 편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란 여호와의 군대를 지휘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군대의 최고권자로 온 것이지 누구를 돕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 한마디를 가지고도 오늘날 교회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을 위해서 신을 찾습니다. 자기를 돕는 역할자로서 신을 찾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모습이며 인간의 이성과 사고에서 나온 신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를 도와 달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마치 하나님을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신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교회에서 같은 사업을 하는 교인이 있다고 할 때 우린 그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형제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관계로 인식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 사람보다는 나를 더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내 신앙이 더 좋기 때문에 나를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의 일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라지만,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은 오직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시고 일하실 뿐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는 말씀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위한 종이 있을 뿐입니다. 이점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호와의 종이다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인이 종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종이 주인을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는 상황과 동일합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면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은 '모세 네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집니다. 여호수아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여호수아는 단지 여호와의 종으로서 살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여리고 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방법을 모색하고 전투를 걱정하는 권리가 없습니다. 싸우라고 할 때 나가서 싸우면 되는 것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오직 여호와의 싸움에 동원된 군사입니다. 우리의 싸움에 군대장관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에 군대장관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싸움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나의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싸움에 몰두한 삶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가 서로 부흥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싸움입니까? 어떻게 그러한 싸움에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내 자식이 남보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싸움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서슴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악하고 더러운 땅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싸움에 동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사시에 여러분을 지키기 위한 '동원 예비군'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칼을 빼어든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와 마주서 있습니다. 칼을 빼어 들었다는 것은 전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에 누가 대적자로 서 있는 것이 됩니까?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싸울 대상은 여호수아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이성과 사고가 부정되지 않는 존재, 육신이 부인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여호와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앞에서 종으로서 굴복했다는 것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가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싸움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도우심을 기다립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여러분을 대적으로 삼으십니다. 포기되어지지 않은 나의 이성과 사고, 육신의 모습,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대적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사는 것은 모두가 주님의 은혜이지 않습니까? 육신의 싸움은 우리를 피곤하게 할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만 따라가는 삶은 평안입니다. 여러분이 이기는 삶을 살려고 하지 말고 이미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인도하신 대로 안심하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

 

 

 

 

 

수 6:1-11 무너진 여리고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기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제시하신 선악기준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 세워진 기준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선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이기 때문에 말씀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기준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기준을 세웁니다.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원대로 이루어주는 하나님을 최고로 여깁니다. 현대 사회 역시 자기가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기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용주의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편리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선이 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농·축협 통합을 반대하던 축협 회장이 국회에서 할복을 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대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농·축협의 통합이나 이 모든 것은 정부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강제적으로라도 실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구조조정을 당하는 입장이나 통합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실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피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大)를 위해서 소(小)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실용주의입니다. 한사람이 죽고 열 사람이 산다면 그것이 바로 실용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열 사람이 힘을 합해서 자신들을 위해 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이것은 다수의 힘이 제일이라는 논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대(大)를 위해서 소(小)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 비록 세상 기준으로 내세워진다고 해도 결국 소(小)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려는 기업이나 통합을 한다고 할복을 하는 사람이나 그들 역시 자기 가치 판단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실용주의라는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 하지만 그것도 역시 기준이라고 할 수 없고, 상황과 환경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현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로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공부할 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결혼을 합니까? 직장을 다닌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직장을 다닙니까?

 

 

 

 

TV에 보면 연예인들이 나와서 얘기를 할 때 사회자가 어떤 남자,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남자를 고르고 여자를 고르느냐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기준을 말합니다.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 '이해심이 많은 사람' 등등 여러 가지를 얘기하지만 결국 기준은 '나의 행복'입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 실용적인 사람을 고르겠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고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골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으면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역시 빠지지 않는 것은 이 직장이 내 인생에 힘을 실어줄 것인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시 기준은 '내 인생'입니다. 내 인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용적인 직장인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근심을 하고 고민을 하고 초조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열심히 키웠습니다. 모든 정성을 다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법고시에 합격을 해서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는 그 자식을 인해서 주어질 혜택을 생각하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떵떵거리는 집안과 사돈을 맺을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가난한 집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부모의 초조함과 근심이 시작됩니다. 결국 부모의 초조는 자식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데서 온 것입니다. 부모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 때문에 초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제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사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확실한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근심하고 고민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계획대로 이루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는 인생이기 때문에 고민하고 근심할 권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신다가 아니라 모든 것은 나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6: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28장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를 받는 최고의 높은 기준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실용주의와 자기 행복을 위한 가치 판단, 근심과 불안과 초조함을 다 부숴 버리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서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의 기준은 40일 금식기도하고 성경을 백번 천번을 보고 주일 성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여러분의 삶의 하나하나를 점검해 보십시오. 참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알 수 없고 감히 판단할 수 없는 높은 차원에서 일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초조해 하고 근심하고 고민하며 살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실용적인 방향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쪽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시는데 왜 우리가 걱정을 합니까? 실용주의가 기준으로 되어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일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을 기준으로 여긴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지 않는 세상은 어둠입니다. 이 어두움의 세상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로 인간이 되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계획입니다. 세상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되어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내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지는 쪽으로 움직여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다시금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에 철저한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서도 철저한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돕는 계획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계획으로 일하신다는 것도 분명한 기준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여리고 성이 함락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여리고 성이 함락된 내용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서서 강한 적도 이기게 해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원하는 것은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빙글빙글 돌았을 때 무너진 것처럼 가지고 싶은 땅이 있으면 그 땅을 이스라엘처럼 돌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기를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함락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을 주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점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하는 일은 싸움입니다. 가나안 땅은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천국이 싸우는 곳인가?'라는 생각입니다. 우린 보통 '천국'이라고 하면 편안하고 즐겁게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사는 것으로 연상합니다. 물론 그러한 천국에 싸움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싸움에 있다고 할 때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제 그들은 놀고먹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싸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싸우며 살아가는 이것이 곧 천국입니다.

 

 

 

 

어떤 싸움입니까? 언약궤, 즉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었다는 이 정신에 위배된 사고방식과 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안에서 사는 신자에게는 필연코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위배된 사고방식에 합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는 싸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어린양의 피의 정신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세우기 위한 싸움입니다. 학생들은 오직 성적을 올리기 위한 싸움에 몰두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성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의 피보다는 성적에 매어서 살아갑니다. 가정주부는 이웃과 또는 친구와 경쟁하고 싸웁니다. 암암리에 불꽃튀기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누구 남편이 더 능력이 있는가를 경쟁하고, 누구 남편이 더 자상하고 잘해주는가를 비교하면서 우쭐해하며 살아갑니다. 직장인 역시 피곤한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교회 안에서도 계속되어집니다. 말은 형제, 자매라고 하고 한 지체라고 하면서도 결국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적으로 만나고 헤어집니다. 희생과 섬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싸움에 하나님이 내편 되어주기를 원합니다. 내 앞에 있는 강한 자를 여리고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편 되어서 저 여리고 같은 존재를 이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옆 사람과, 옆 교회와, 다른 교단과, 다른 종교와 경쟁하는 이 사고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를 못합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니까 하나님은 교회를 안 다니는 저 사람보다는 내 편을 더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 엄청난 착각입니다. 지금 현대교회가 이 착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흔히 성직자라고 하는 목사를 중심으로 하지도 않고, 장로님을 중심으로 일하시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고 헌금을 더 많이 했다고 해서 그를 중심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어둠의 나라는 버리시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나라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목적과 계획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부름 받은 신자는 오직 예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예수님의 주되심과 예수님의 피만을 증거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기준이 예수님만을 중심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은 실패로 보는 상황 속에서도 실패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더욱 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우리 속의 여리고를 하나님이 무너뜨림으로서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나에게 이러한 싸움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껏 무엇과 싸우며 살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천국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나안이 이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천국인데 무슨 싸움이 있는가?'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천국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살아갈 때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심판을 당하고 완성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싸움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천국이 미완성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미완성의 나라이지만 그리스도안이라는 천국은 완성된 나라입니다. 완성된 나라에서 살지만 아직 죄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싸우면서 장차 주어질 죄 없는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적은 여리고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여리고가 구분되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입니까? 유월절이란 의식이 기준입니까? 아니면 할례라는 표가 기준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제사를 드리는 것이 기준입니까? 만약 이러한 것들이 기준이라면 여리고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여리고의 구분은 언약궤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넌 자들입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다시 산자가 되었다는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증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습니다. 즉 죽어야 할 인간이 어린양의 피로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 여리고는 무너져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는 자를 공격하시는 것이지, 혈통을 보고 이스라엘로 구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아닌 자를 공격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로 인해서 자신들이 요단강을 건넌 것을 목격을 했고, 다시 언약궤에 의해서 여리고가 무너짐을 목격을 합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는 광경은 참으로 희한하기 짝이 없습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더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6일 동안 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7일 째는 성을 일곱 번을 돌라고 합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여리고가 무너집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를 계산하기도 합니다. 보통 성경퀴즈라는 것을 할 때도 보면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를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에는 전혀 관심 둘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6일 동안 한 바퀴씩 돈 것과 칠 일째 일곱 바퀴 돈 것에 대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 째는 복을 주사 안식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안식할 수 있는 완전한 나라라는 증표가 7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나라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완전한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시겠다는 것이고, 그 나라를 주시겠다는 것을 7일째 일곱 바퀴를 돌 때 여리고가 무너지게 함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일 동안 한바퀴씩 돈 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그러나 7일째 일곱 바퀴를 돈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7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일곱 바퀴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증표입니다. 6일 동안 여섯 바퀴를 돈 것은 인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인간의 노력을 묵살하고 오직 하나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을 칠일 째 일곱 바퀴를 돌게 함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7이란 숫자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일곱 제사장, 일곱 양각 나팔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더러 안식일을 지켜라고 하셨던 이유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사는 나라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는 새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라는 의미가 안식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주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산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피를 의지하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돌라고 하실 때 그 앞에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언약궤 뒤를 따릅니다. 언약궤가 그들의 중심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궤가 이스라엘의 중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나라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어린양의 피를 기초로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고자하는 계획입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서 여리고를 도는 이스라엘은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나라를 세우지 않고 오직 어린양의 피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나라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는 마음으로 돌아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속에 내 힘과 내 중심으로 내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나라, 여리고성은 다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한 하나님의 집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정신이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기 위해 신자가 힘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결말이 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 뜻이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일이 잘 될 때 내 뜻대로 되어진다고 좋아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질 여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싸움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싸워야 할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무너져야 할 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만 보여주십시오.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피로 사는 새로운 나라로 우리를 집어 넣으셨다는 것만 보여주십시오. 세상을 향해서 '너희들은 돈 번 것을 좋아하고 좋은 집에 살게 된 것을 복으로 여기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감사하고 그것이 귀할 뿐이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인간의 싸움이 아닌 하나님의 싸움을 하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라보고 살면서 마지막 때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 6:15-27 구원받은 라합


성경을 펼칠 때 때때로 전혀 하나님답지 않은 말씀에 대해서 당혹감과 난처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돌보신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오히려 악랄한 폭군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 난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오늘 본문과 같은 경우입니다. 21절에 보면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여리고에 대한 행동은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우양과 나귀까지 남김이 없이 멸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규례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 규례가 바로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입니다(신7:2 ; 20:16,17). 이러한 하나님에게서 과연 세상이 생각하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까? 오히려 반대로 폭군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무리 가나안이 우상을 섬기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어린애까지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명령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잔악무도한 정복자의 횡포로 비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대할 때마다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참으로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기준과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씀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기준은 주를 사랑하느냐이지 절대로 인간의 행위나 도덕과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권운동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저주의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신자 역시 이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언제나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가 심각한 자기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기도와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가?' '나는 성경을 몇 번이나 봤는가?'가 자기 삶의 문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가 자식에 대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가?' 이것만이 자기 문제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은 무시한 채 세상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언제나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되는 것을 자기 문제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은 남보다 잘하는 것이고 뛰어나는 것이고 많이 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되는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제일 뛰어난 자가 자동적으로 기준 되는 자리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보다 더 뛰어난 자가 개입되면 자동적으로 기준은 더 뛰어난 자에게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세상은 기준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무너뜨리는 것입니까? 기도를 안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율법을 모르기 때문입니까? 여리고를 무너뜨리시는 기준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우양까지 다 멸하시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라는 기준에 의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일에 개입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어린애까지 멸하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여리고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기준은 전혀 융통성이 없이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누구를 막론하고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자신들의 손으로 어린애까지 죽이면서 철저하게 인식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무너진 여리고를 옛날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리고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결말지을 것인가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신 예고편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여리고를 차지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떤 자가 세상의 멸망 속에서 굳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사람들의 모든 꿈과 소망이 담겨있는 세상은 결국 모래 위에 세워진 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리고 성의 남녀노유를 멸하라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당혹감과 난처함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벗어난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을 때는 멸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세워보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지 아니면 기준에 벗어난 채 살아가는지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신자의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으로만 인간과 관계하고자 하십니다. 신 10:12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 증거는 이스라엘의 소유가 증가할 때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신 8:12-14절을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소유가 증가할 때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 힘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신 8:17).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소유가 증가되는 것을 더 중요하고 급한 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소유가 증가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겠노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인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여리고를 멸하심으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 8:20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소유가 증가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국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목사도 역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교인의 수가 증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소유가 증가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있는 자의 모습은 어떻습니다. 우린 이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있는 신자는 소유의 증가가 관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것이 자신의 존재이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주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관심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에게 집중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의 분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세상에 대한 관심을 조금 나누어서 하나님에게도 관심을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 한분으로 확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벗어나야 할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멸망하는 여리고 속에서 라합과 그 가족은 살아납니다. 라합과 그 가족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과 안면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불쌍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듣고 오직 하나님만이 내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가 나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리고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을 통해서 증거 하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이 멸망 속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믿음과 사랑으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인간의 믿음과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여러분의 인생을 간섭하며 인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여러분을 세상을 포기하는 쪽으로 끌어갈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만 사랑의 대상으로 확정하고 하나님께만 관심 두며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러한 흔적이 여러분에게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이 흔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자기 소유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미워하며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흔적이 없는 분이라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았을 뿐입니다. 생명도 관심거리가 아니고, 천국도 마음에 있지 않고, 오직 있다면 좀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것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의 지옥이나 천국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풍요에 눈을 돌리고 살아갈 뿐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무엇을 선호하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보다는 믿음보다는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소유가 증가하는 복을 더욱 외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무너진 여리고를 다시 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로 끝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입니다. 여리고를 세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땅은 여리고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입니다.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는 언약궤를 앞세워서 요단강을 건너게 한 것에 있습니다. 즉 믿음은 죽었어야 할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는 것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사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약속의 땅은 이러한 세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러한 세력을 다시 세우는 자는 저주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해 버립니다. 즉 교회와 연관된 종교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믿느냐 못 믿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신자로서 가장 최소한의 행위, 즉 주일 예배라는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예수를 믿는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치고 '나는 예수를 안믿는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 쪽이지 여리고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즉 어린양의 피를 믿는 믿음은 필히 자기에 대한 포기로 나타납니다.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은 나를 살리신 예수님의 피이지 내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고백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예수님만 사랑하자, 세상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피에만 가치를 두고 살자는 이 말에 대해서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제 설교를 보고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의 설교를 보니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장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글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 한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저는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와 세상, 이 둘의 관계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리스도냐 아니면 세상이냐 이것을 성경이 묻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오직 세상을 벗어나고 그리스도만을 향한 글을 썼다고 생각하는데, 목사님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니 그 한쪽과 또 다른 한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 목사님은 이러한 저의 물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 목사님이 말씀한 한쪽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그리스도만 섬기고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리스도에게만 가치를 두자는 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라면, 그리스도말고 지향해야 할 또 다른 한쪽이 있다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합니다.

 

 

 

 

사실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말은 그분에게서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 말할 때 많은 분들은 '너무 한쪽에만 치우쳤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불편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높이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예수님을 높이고 사랑하는 삶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구제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헌금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일 성수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선교하라는 말도 하고, 구제하라, 봉사하라, 전도하라, 헌금하라, 주일을 지켜라는 말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로는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이 믿음만 말하고 행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행위로 증거 되지 않습니다. 여리고가 기독교적인 행위가 없어서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교, 헌금, 구제, 이러한 행위들이 사랑을 증거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행위가 사랑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로마서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롬 3:12)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사랑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행위의 여부를 가지고 사랑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 행동하게 하는 것이지 행동이 사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걱정 없이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위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살아가십시오. 내일 죽어도 오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세상의 실체를 알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눅 2장에 보면 시므온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이 성령에 의해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 하리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했겠습니까 아니면 보기를 두려워했겠습니까? 만약 시므온이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리스도를 보지 않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 동안은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예수를 안고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9-32)라고 찬송을 합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주여 이제야 평안히 나를 놓아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이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소용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나에게 가장 소용되는 분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게 되자 '이제야 평안히 나를 놓아주신다'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 자는 걱정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함이 선교나 봉사나 구제나 헌금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사랑이 여러분을 스스로 움직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은 약속의 땅은 언약궤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사람은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여리고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서로 투쟁하게 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동참을 하면 되는데,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제 갈 길로 갔다'고 합니다.

 

 

 

 

여리고를 세우지 말라는 것은 내 중심의 세계를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신자는 내 중심의 어둠의 생활을 벗어나야 합니다. 행위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둠이고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빛이며, 이것이 원래 창조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창조한 인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뭘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나라에 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벗어난 자의 삶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가 곧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자신이 몸담고 왔던 삶의 터전까지 포기했던 것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을 알게 된 시각으로 바라본 여리고는 죽음이고 멸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라합과 그 가족은 멸망 속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리고를 통해서 세상의 운명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세상은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우양 하나에 이르기까지 저주와 멸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소망 둘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이 되는 것인지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 7:1-5 실패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는 십자가만 고집하는 교회가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이 끊이지 않는 축제의 교회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좋은 교회란 예수님만 사랑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으로 삼고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웃음과 즐거움과 정이 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절대 생명이 아닙니다. 교회 역시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셨다는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여서 친목단체 하나 만든 정도만 여겨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복음을 사수하기 위한 교회로 여기기보다는 친교와 여가활동을 위한 인간모임 정도로만 여겨버립니다.

 

 

 

 

이러한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성경을 볼 것이고,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기에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는 말씀에 대해서도 무시해 버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초대교회의 참된 성도들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서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빠진 것은 신앙이 아니요 교회도 아니며 단지 인간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빌 1:2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모든 것이 명백하게 증거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성경을 무시한 채 인간의 목소리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신비한 힘이 생기고, 불같은 열정이 생긴다는 식으로 강조해 버립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은혜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당연히 있어야 할 말이 사라지는 것은, 교회를 단지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여가활동 정도로 제공하기 위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에 심신이 피곤하고 여러 가지 고민과 염려거리를 안고서 오는 교인들에게 될수록 부담이 되는 말보다는 소망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말을 제공함으로서 교회가 편안한 안식처가 되게 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소위 부정적인 말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불문율처럼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결코 자신의 마음의 안식처를 얻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살후 1:4절에 보면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초대 교회가 인내했던 핍박과 환난이란 교회에 나올 수 없는 힘든 상황이나 형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교회란 무엇입니까? 단지 여가활동을 위한 장소입니까? 아니면 피곤한 심신을 달래주기 위한 곳으로 여깁니까? 그것도 아니면 인간끼리 모여서 서로 사귀고 정을 나누고 사랑을 받고 싶어서 나오는 곳입니까? 이것은 단지 교회를 친목단체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절대'로 여기는 자들의 모임임을 다시 한번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직장과 가정을 자기 목숨처럼 '절대'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만을 '절대'로 여기라는 것은 생존 문제를 뒤흔드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절대'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그리스도는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존이 '절대문제'로 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란 생존에 활력을 불어넣고 도움을 주는 곳 정도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교회는 인간 친목단체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경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도 관심이 없으며, 재미가 없으면 쉬엄쉬엄 다니고 아예 다니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 되버립니다. 교회가 나에게 재미있으면 되지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결코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죽였는지 무엇에 의해서 죽으셨는지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남의 일로 여길 뿐입니다. 마치 TV에서 지나가던 행인이 강도를 만나서 살해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무덤덤하게 '뽸뽸'하는 정도입니다. '누가 죽였노?'하고 대신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남이기 때문입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모른 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나는 무사하기 때문에 상관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죽은 자가 나의 아버지라면, 내 형제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죽인 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분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교회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로, 나의 신랑으로, 나는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예수님이 죽으신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을 죽인 범인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죽였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마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유산을 나눠 가지기 위해서 바쁜 모습만 보이고 있는 것이 현재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과연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기 유익을 위해서 교회를 찾는 자들에게 십자가니 고난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성경 또한 자신에게 유익이 될만한 것만 골라서 머리에 담아 두는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아간의 사건이나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는 얘기들은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만 들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몰래 빼돌린 사건이나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실패한 사건들이 내가 직장에서 승진하고 출세하고 돈버는 일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의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유익을 얻는 쪽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모든 연결점이 단절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 개인의 입장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앞으로 어떻게 일하실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반발을 한다든지 복종하지 않았을 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이 말씀되어질 때는 절대로 인간 개인의 입장에서 말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빠진 채 인간들만 모여서 종교놀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나는 이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다. 나는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교인들이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욕망에 붙들린 채 본문을 본다면 아간의 사건을 통해서 무슨 말을 끄집어내겠습니까?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여리고성의 물건을 몰래 훔쳤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서 큰 여리고 성을 이긴 이스라엘이 조그마한 아이성에서는 패배하는 벌을 받았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작은 일에도 실패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또 개인의 입장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교인들은 자신에게 실패라고 하는 손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는 아간과 같은 죄가 없는가? 혹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못한 것은 없는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별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는 아간하고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구나. 아간처럼 망할 자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시되고 짓밟혀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이렇게 일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아간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의도가 완전히 묵살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와 같이 개인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인간에 의해서, 또 그런 인간이 모인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은 철저하게 무시되어지고 왜곡되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옵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 이후에 나오는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의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승리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기신 것이었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여리고를 이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이 이기신 것을 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에서 하나님을 빼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인간의 승리입니다. 인간의 힘이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종교적 자부심만 있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였으며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한 후에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수 6:18).

 

 

 

 

여리고 성의 정복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의 전리품은 당연히 승리자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자는 여호와입니다'라는 믿음으로 존재하는 증거는 모든 전리품을 말씀대로 여호와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전리품에 손댈 자격이 없다' 는 것은 전리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 바쳐진 것에 손을 댄다면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여기지 않는 것이 됩니다. '나도 뭔가 한 것이 있으니까 나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는 생각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18절에서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이 취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화를 당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합니다. 이것은 여리고의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나도 한 것이 있다'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결과가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간의 실패이자 이스라엘의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처사가 나옵니다. 분명히 물건을 취한 자는 아간입니다. 즉 아간 한 사람이 물건을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를 아간 한 사람의 죄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간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를 모든 인류의 죄로 보셨습니다. 당시 생존했던 인간만이 아니라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아담의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본성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것은 아담의 죄와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간의 죄는 아간 한사람에게만 있는 죄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있는 죄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몰래 취하게 한 그 본성은 아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있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행위를 가지고 죄의 여부를 판별한다면 분명히 아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이스라엘 자손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간의 죄를 이유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진노하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간의 모습이 곧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기 때문에 아간의 죄는 이스라엘의 죄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에게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간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 미심쩍어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잘한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지 않느냐 내가 잘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잘못해 버리면 그 죄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아간의 죄와 같은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나도 잘못한 것으로 취급받아야 하느냐? 그렇다면 내가 잘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 생각은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는 것을 무시하고 '내가 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서 잘한 모습이 보여지는 것은 실패한 나를 하나님이 이기시고 극복하신 결과이지 내 힘이 아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내가 바로 아간이다'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나는 잘했다 너는 못했다'는 구분 자체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과연 '나도 아간이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겠습니까?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잘한 행위 못한 행위를 따지면서 믿음의 여부를 측정하는 교회가 다른 사람의 죄를 나의 죄로 인정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의 죄를 나의 죄로 인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는 너의 죄로 지옥 가고 나는 나의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것이 현대 교회의 사고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피로 세우신 교회의 관계가 완전히 박살나 버린 인간 종교단체의 모습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를 필요로 하는 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는 자입니다. 예수 앞에서는 죄에 등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작은 죄가 있고 큰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오직 멸망입니다. 멸망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의 죄는 작고 너의 죄는 크다'는 시각으로 옆사람을 바라본다면 과연 그것이 동일한 그리스도의 피 아래 모인 교회이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개인의 유익을 생각하며 모여든 교회에서는 죄에 차별이 있고 상에 차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의 피가 한방울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바가지가 필요한 웃지 못할 현상이 마치 진리처럼 여겨지면서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할 모습이라는 것을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2절부터 나오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 역시 그들도 아간과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리고를 함락한 이스라엘이 이제는 아이 성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아이로 보내서 그 땅을 정탐하라고 합니다. 아이를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7:3)라고 말합니다. 정탐꾼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백성 중에서 삼천 명을 보내서 아이를 치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여리고라는 큰 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여리고에 비해서 작은 아이 쯤이야 삼천 명만 가도 능히 이긴다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사람에 의해서 36명이 죽고 쫓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이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린 그 원인을 단순히 아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에의 실패의 원인이 단지 아간의 죄로 국한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여리고에서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긴 결과였습니다. 여리고는 강한 나라입니다. 강한 나라를 쳐서 이겼다는 것은 우리가 더 강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리고를 이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결국 강하신 분은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리가 여리고를 이겼으니까 우린 강하다'고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여리고와 비교해 볼 때 3천명만 가도 이긴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를 치신 것은 약속의 땅에 비언약 백성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땅에 더러운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여리고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겨버린 이스라엘은 바로 아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간이 '나도 여리고의 전리품을 가질 수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바친 물건에 손을 대서 하나님께만 가야 할 영광을 자기에게 돌려버린 것이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겨서 그 힘을 과시하려고 한 것이나 같은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된 행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세상은 강자와 약자라는 구조 속에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누르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자와 약자의 기준은 힘입니다. 돈, 권력, 명예, 남보다 뛰어난 모든 것은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강자와 약자의 기준은 거룩함과 더러움입니다. 거룩한 존재가 강자이며 더러운 존재는 약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러운 존재는 진노의 대상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자는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의 전투를 거룩하신 분, 강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존재를 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상 힘의 구조에 의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리고를 이긴 우리가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의 더러움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에서 실패하게 하심으로써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교회는 무너져야 할 여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수고와 노력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교회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가 교회를 이만큼 만들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능력을 대견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단지 말뿐이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로 돌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간이며 자기 힘으로 아이를 친 이스라엘입니다. 결국 그들이나 우리나 같은 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교회를 원하시지 큰 교회를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은석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냐는 것이지 은석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간은 이스라엘 안에 숨겨진 죄입니다. 마치 우리들 속에 숨겨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속에 있는 죄를 모르고 '하면 된다'고 설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죄를 모르고 스스로 강한 자로 여기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자기도 바친 것이 되었다는 말은 이스라엘도 하나님 앞에 바쳐진 여리고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도 더러운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마치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한 것처럼 여긴 것이 바로 더러운 존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으면 되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어도 힘이 없어도 괜찮은 존재가 바로 약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입니다.

 

 

 

 

교회란 힘없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힘을 자랑한다면, 세상 힘을 기준으로 '나는 강자 너는 약자'라고 구분한다면 그가 바로 망해야 할 여리고입니다. 이것을 아는 교회가, 부흥을 외치고 '하면 된다'는 말로서 교인들을 진노의 길로 밀어붙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약자,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를 소원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떠나십시오. 그렇게 해서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이 오히려 교회로 남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간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아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을 살리시는 분은 오직 의로 오신 그분 밖에 없습니다.

 

 

 

 

 

수 7:16-26 존재 이유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세상에 오신 메시야는 이미 그 이름이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진 채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마 1:21절의 말씀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 안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확정되어져 있는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와서 인간의 소망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독자적인 자기 계획과 목적을 세우시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신 분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신자가 예수님을 찾는 목적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뜻에 맞는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고 성취해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소원과 내 뜻을 들고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예수를 찾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지 메시야에 대한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모든 일이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믿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행 2: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마 7:21절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부른다'는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수님을 부르고 있느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을 세상의 악한 죄에서 나를 빼내 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세상 죄가 아니라 저희 죄라고 말씀합니다. 즉 내 죄입니다. 나의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의 말씀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예수를 부른다고 해도 그 예수는 다른 예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와 분리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흔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죄와 분리된 삶을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그러한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포장을 해서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죄와 멀어져 있고, 죄와 상관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죄와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죄와 분리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은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인간은 죄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죄와 인간이라는 분리된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즉 인간 속에 죄라는 세력이 따로 존재하는 구조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와 인간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곧 죄인이고 죄인이 곧 인간인 셈입니다. 때문에 죄라는 것은 내 속에서 몰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을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예수님의 힘으로 몰아내 준다거나 몰아낼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만약 죄가 인간의 힘으로 몰아낼 수 있는 것이고, 또 죄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점차 자기에게서 죄가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이기고 있다거나, 죄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착각을 가질 때가 많은데 이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를 행위로만 보기 때문에 죄라고 생각되는 행위가 자기 의지에 의해서 억눌릴 때 그것을 죄를 이기는 것으로 여기고 행위의 빈도가 줄어듦으로서 죄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지 죄를 이기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그리고 예수님의 삶 모두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의 실체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실체를 앎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죄에 대해서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분명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에게 바친 물건을 몰래 훔쳤습니다. 그에 대한 진노로 아이 성을 공격한 이스라엘은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스라엘은 죄가 없었는데 아간의 죄 때문에 애매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기 되면 모든 원인은 아간 한 사람에게만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을 칠 때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보다 작은 아이 성을 무시하는 정탐꾼의 말대로 삼천 명만 보내서 아이 성을 공격하게 합니다. 이것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을 하나님의 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으로 보는 결과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아간이나 이스라엘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것은 하나님의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즉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기 보다는 나에게도 뭔가 남겨 두고 싶은 탐욕입니다. 이 탐욕이 결국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정해야 할 것을 자기들의 힘의 결과로 끌어당깁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곧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아간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바친 것을 훔친 아간이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실패의 원인을 알아야 했습니다. 즉 실패하게 하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재주와 힘을 의지하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6-18절을 보면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을 제하기 전에는 대적을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몰래 가진 자를 뽑아내기 위해서 먼저 지파를 뽑고 다음에 족속을 뽑고 다음에 가족을 뽑고 다음에 바친 물건을 가진 자를 뽑아 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지파대로 나오게 하였더니 유다가 뽑힙니다. 이 유다 족속을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족속 중에서 세라 족속이 뽑힙니다. 세라 족속의 남자를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 가족이 뽑힙니다. 이 삽디 가족의 남자를 나오게 하였더니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 유다 지파를 뽑고 유다 지파 안에서 세라 족속을 뽑고 세라 족속 안에서 삽디 가족을 뽑고 삽디 가족 중에서 아간을 뽑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뽑아 내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속에서 아간을 바로 뽑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지파에서부터 족속과 가족으로 그리고 한 개인으로 점차 점차 내려갔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중에서 아간을 바로 뽑아서 징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 지파부터 시작해서 점차 개인으로 내려가는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아간을 뽑아서 아간 한 사람을 징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간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지파의 죄를 보시는 것도 아니고 한 가문의 죄를 보시는 것도 아니고 가족의 죄를 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개인의 죄를 보실 뿐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말할 때 사회의 죄를 말하기도 하고 가문의 죄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죄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회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문이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라는 것은 인간이 모인 단체를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 국가 안에 가문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이 모인 구성 단위일 뿐이지 인격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모인 구성 단위가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사회가 어둡다든지 나쁘다든지 타락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가 어둡고 타락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어둠이고 악한 자고 타락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흔히 교인들이 많이 하는 말 가운데 '우리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말도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란 신자의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사랑이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린 보통 죄를 생각할 때 자신은 죄에서 멀어져 있는 자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회가 어둡다고 할 때 내가 바로 어둠의 존재인 것은 망각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 사회가 어두워진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란 사회의 문제도 아니고 가족의 문제도 아니며 오직 나 개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죄를 묻습니다. 때문에 신자에게는 '너 때문에' 라는 말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고 나 때문에 발생된 문제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죄는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죄가 저 사람에게는 없고 저 사람에게 있는 죄가 나에게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누군가가 도둑질을 했다고 할 때, 저 사람은 도둑질을 한 죄가 있지만 나는 도둑질을 안했으니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 상식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도 죄를 이런 식으로 보신다면 분명 죄의 경중이 발생할 것이고,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만 조심하면 얼마든지 죄없는 자, 또는 죄가 극히 가벼운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마음을 보신다는 것은 죄는 그 마음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탐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는 탐욕이 없습니까? 모든 인간은 탐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도둑질을 안했으니까 죄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가 바로 이것을 말해줍니다. 아간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훔쳤으면 그것은 아간 한 사람에게서만 보여지는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 그리고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간은 하나님께만 바쳐져야 할 물건 중에서 좋은 것을 자기 것으로 챙겼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항상 좋은 것은 자기 소유로 하고 싶은 탐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승리를 자기들이 승리한 것으로 여김으로서 자기 힘을 의지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죄가 어떤 것인가는 아간 한 사람을 통해서 확실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간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왜 아이 성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인 것입니다. 인간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느냐가 아간에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실패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패를 알아야 인간에게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고 살기 때문에 자신이 성공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성공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한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승리자가 되고 내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오면 자신을 성공자로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자기 실패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실패를 아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은, 내가 곧 실패자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성공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아간 한 사람을 찾아내서 죽이심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간을 즉시로 나오게 하지 않고 유다지파로부터 차근차근 밑으로 내려가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보고 지파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지파를 보고 가문을 평가하지 않고, 가문을 보고 개인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선택받았다고 해서 그 속에 속한 지파가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개인을 보고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교단이라는 단체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단을 보시고 교회를 평가하시고, 교회를 보시고 교인을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교단이 아니고 교회가 아니라 한 개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개인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존재하게 하시는 목적에 맞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잘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참된 이스라엘만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인간은 잘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세상에 구원을 보여줄 수 있는 일에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구원의 내용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이스라엘이 담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이스라엘 되는 것이고 존재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내용물이 뭐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담고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산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보기에 좋은 것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21절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아간은 보기에 좋은 옷과 금덩이에 마음을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훔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에 전혀 반대된 모습입니다.

 

 

 

 

아간은 '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관심은 여리고의 좋은 물건들을 보면서 '저것만 내가 가지면 행복하겠는데'. 온통 여리고의 좋은 것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자기 존재 이유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간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전체가 보면서 자기 존재 이유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스라엘 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그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라는 것을 아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잊어버린 것에 있습니다. 왜 내가 이스라엘 되었는지, 왜 살게 하시는지 그 이유에는 관심이 없고 보기에 좋은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러한 아간의 죄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왜 세상에 왔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교회로 부르신 이유는 세상에 구원을 보이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존재 이유만큼은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내용물을 담고서 살아가는 신자가 주님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그분 앞으로 이끌어 내셨습니까? 단지 여러분을 천국 보내주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내신 것은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실패를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졌기 때문에 천국 가는 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라고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이유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이 구원의 내용물로 가득한 삶인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내용물이 여러분에게 차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아간의 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구원자이시고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차있기를 바랍니다. 실패자인 내가 다시 산자가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는 감사와 감격이 여러분의 마음에 생명 되어서 여러분을 통해서 증거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세상에 구원을 보여주는 도구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 8:1-9 교만


성도란 그리스도안에서만 규정되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신자를 난감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세계를 의미합니다. 흔히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말을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적인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로 인식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살아가는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세계는 신자에게 연약한 존재되기를 요구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안'이란 신자를 난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선은 강한 자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그리스도안이라는 세계에 대해서 전혀 난감해 하지 않습니다. 주저함이 없이 그리스도안에서 살겠다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리스도 안이 어떤 세계인지도 모르고, 그리스도안이란 세계가 신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안에 살면 그리스도 덕분에 자신이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축복을 받아서 잘살아가게 될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려볼 수 있는 복의 공간으로 인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세계를 자기와 함께 쓴잔을 마셔야 하는 세계로 말씀을 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우리들을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관심을 그리스도세계에서 주님의 좌 우편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힘있는 위치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남들보다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는 것이 관심거리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막 10:38,3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세계에서 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시는 자들이 얻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란 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마신 쓴잔을 함께 마셔야 하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을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는 울타리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나머지 단추는 자연히 잘못 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을 포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 접근하는 것이 이미 첫단추를 잘못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힘과는 상관이 없는 분임을 현대교회가 전혀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힘되고 도움이 되는 예수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교회에 약한 자로 오시고 세상이 볼 때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쓸모 없는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과연 환영을 받겠습니까? 설령 과거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만큼은 세상에서 힘있는 자가 되도록 도우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셨던 자신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이란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고치셨던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분배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끌어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셨던 잔을 함께 마시도록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에 대해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 능력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붙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있으니 그 능력을 믿을 뿐이지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우리 힘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죽음 안에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세계란 그리스도의 힘 안에서 살아가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힘없어도 괜찮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세계란 어떤 세계를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세계라는 것을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치는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아간을 찾아내서 죽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간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이 세상에 구원을 보이라고 세워놓으신 구원자의 위치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자로서의 모습을 상실해 버린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힘을 믿고 아이 성을 스스로 공격하고자 했던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하시고,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아간을 찾아내서 죽이심으로서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는가를 보이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스스로 자립하고자 했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한 것입니다. 즉 천국에 대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는 스스로 자립하여 살고자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자립심이란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립심은 선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경받고 박수를 받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남의 도움을 구하고 남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강한가를 봄으로서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미리 판단하기도 합니다.

 

 

 

 

학교 교육이라는 것도 결국 모든 목표를 여기에 두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되게 하는 것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의 목표인 것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야말로 힘을 기르고 자립심을 기르는 것이 최상의 교육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남의 도움을 구한다는 것이 못난 자로 낙인찍히는 길이고 쓸모 없는 자로 보여져서 결국 도태 대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곳이기에 힘이 곧 선이며 힘있는 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있고 힘없는 자는 뒷전으로 밀쳐지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누구라도 힘을 축척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사는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힘으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 앞에서 과연 난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갈등이 없을 수 있습니까? 갈등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곧 아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소유하고 싶다는 것은 그것이 곧 나에게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훔쳤던 아름다운 옷, 그리고 금덩이들, 이 모두가 소유함으로서 자동적으로 힘이 실어지는 물품들이 아니었습니까? 부자들이 왜 몇 백만원씩하는 옷을 사서 몸에 걸치려고 안달입니까? 왜 비싼 외제차를 사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차별성입니다. 승리욕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과시함으로서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을 광고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에게 지기 싫어서 남이 하면 나도 해야 되고, 남이 사면 나도 사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세상에서 힘없는 자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난이며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세계를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모습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전혀 부담이 안되고 갈등도 없이 들려진다면 아마도 그분은 천사이거나 아니면 세상을 완전히 초월을 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것을 훔친 아간을 죽인 후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다시 아이 성을 공격하라는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공격하라고 하시면서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기 전에 당부하셨던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실패한 경험에 의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승리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자기들의 힘으로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의 실패를 생각한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했는데 다시 공격한다고 해서 승리할 수 있는가라는 염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아이 성의 공격은 오직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해 보려는 전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실패하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 보려고 하는 자립심에는 승리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승리하고자 할 때 승리한 자는 교만해질 것이고 실패한 자는 두려움과 낙심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여리고의 전투,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이의 전투, 그리고 두 번째 이스라엘과 아이의 전투에서 승리자의 교만과 실패자의 낙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맨 처음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공격할 때는 여리고가 약한 자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5: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소문을 들은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6:1절에서 여리고가 성문을 굳게 닫고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을 봐도 여리고는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두려움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는 싸움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단지 문을 굳게 잠그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시 전혀 전투를 하지 않고 다만 성 주위를 도는 것으로서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승리에는 인간의 힘이나 수단이나 방법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직 하나님의 승리이지 인간과 하나님이 연합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리고는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자신들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즉 이스라엘을 이길 힘이 자신들에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려움도 자신의 힘을 기준으로 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만이 있습니다.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였을 때, 약자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없는 자는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교만은 승리자인 이스라엘이 여리고보다 작은 아이 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아이 성을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자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라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아야 인간이 자기 것을 주장하고 세상에서 주어진 것을 자신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곧 교만이며 하나님께 적이 되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싸움은 너희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시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아이 성에서의 실패를 생각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 보면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이 성을 정복했을 때 여리고와 마찬가지로 모두를 멸하되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여리고의 경우와 다른 점입니다. 여리고에서는 여리고의 물건과 가축은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 성에서는 탈취한 물건과 가축을 스스로 취할 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분명 아이 성의 것을 이스라엘에게 허락을 하신 것이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것을 주십니다. 아이 성의 것을 이스라엘이 스스로 취할 수 있도록 하신 것과 같이 세상의 것을 스스로 취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취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의 것을 다 멸해야 했던 것은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가 이스라엘이니까 여리고의 것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 성의 물건을 취하라고 하신 그 배경에는 여리고의 것을 취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 성의 것을 취한다고 해도 너희는 아이 성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 것을 허락하시지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자는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모두 멸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의 것을 얼마든지 스스로 취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돈을 버십시오. 여러분이 수고한 만큼 땀 흘린 만큼 얼마든지 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돈을 적게 번다는 것이 잘한 것도 아닙니다. 돈을 얼마를 벌었든 중요한 것은 돈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모든 것이 멸망을 당한 것처럼 돈도 역시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신만 여러분 속에 살아있으면 됩니다. 돈을 힘으로 삼지 않고, 돈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살고 그리스도와 즐거워 하고자 한다면 그는 아무리 돈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신자입니다. 이것을 아이 성의 것을 스스로 취하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돈이 많아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돈이 많아서 교만해진다면 돈이 적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나 돈이 적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힘에 굴복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힘에 굴복한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힘으로 사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서 굴복하는 자의 마음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면서 '나도 돈을 벌어야지. 돈을 벌어서 언젠가는 너를 이겨야지'라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역시 자신보다 약한 자는 자기 앞에 굴복시키고 무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을 힘으로 삼는 것이며 교만입니다.

 

 

 

 

아이 성 역시 이러한 교만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 아이 성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은 아이 편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 편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이를 좋게 보셨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힘으로만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아이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아이 성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성은 이러한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자기들 편에 하나님이 있어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으로 여깁니다. 여리고라는 큰 성을 함락시킨 이스라엘을 자신들이 물리쳤으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습니까? 그래서 두 번째 아이 성의 전투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서심으로서 하나님의 적은 교만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교만했을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침으로서 교만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반대로 두 번째 전투에서는 아간을 죽임으로서 자신들의 실패 이유를 알게 된 이스라엘 편에 서서 아이 성을 멸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적은 교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치는 것이 아니고 아이 성이라는 국가를 치는 것이 아니라 교만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교만입니다.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잘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이 교만을 적으로 보시는 것은, 교만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하고, 십일조를 잘하고, 주일을 잘지키고, 구제도 많이 해서 이만한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인간을 죽어야 할 죄인으로 규정하고 의가 없는 자로 판단해 버리고 모든 행위까지 쓰레기 취급을 해버리는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받아들이는 자는 절대로 자신이 잘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두 번째 아이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여리고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은 단지 여리고를 돌았을 뿐입니다. 전투를 위해서 작전을 짜거나 직접 여리고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을 두 번째 공격할 때는 작전을 짜게 됩니다. 용사 삼만 명을 뽑아서 성 뒤로 가서 매복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나머지 사람들은 아이 성으로 갑니다. 처음 전투에서 승리한 아이 성은 분명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마음놓고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호수아와 나머지 백성들은 도망하는 척하고, 그 뒤를 쫓아오는 아이 군사를 매복해 있던 삼만 명의 용사가 전멸시킨다는 작전입니다. 그리고 그 작전대로 이스라엘은 승리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의 작전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흔히 선교단체에서 선교를 할 때 '전략'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어떤 전략을 써야 효과가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략을 잘 세워야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머리와 방법으로 이긴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에서는 손 한번 쓰지 않고 작전도 세우지 않고 승리한 것을 통해서 승리는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만 분명히 한다면 아이 성에서 인간들이 작전을 세웠다고 해도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니까 아무런 방법도 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어떤 방법을 다 동원해도 결국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마음대로 벌되 돈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아이 성의 전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적은 교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교만이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기도를 많이 해서 그 힘으로 자기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나, 성경을 많이 보고 십일조를 잘해서 그 공로로 하나님의 덕을 보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자는 절대로 자신의 방법이나 행위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과 공로만 의지할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주님만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갈 힘이 나에게 전혀 없기 때문에 주님의 피의 은혜에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이 있는 자의 편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고 여러분이 힘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오직 주님의 공로만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수 8:30-35 축복과 저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순서를 보면 맨 마지막에 사람이 지음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우월성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이 맨 마지막에 지음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못마땅함도 '하나님이 인간을 맨 마지막에 지으신 것은 인간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는 말로서 메워 보려고 하기도 합니다. 마치 무슨 행사를 할 때 주인공은 항상 나중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맨 처음 만들었다면 또 뭐라고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역시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맨 처음 지으셨다'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해석'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자기 멋대로 난도질해서 자기 편한 대로 갖다 붙여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인간편이다'는 것을 아예 전제로 해놓고 모든 성경을 인간 쪽으로 끌어와서 인간을 높이고 가치 있는 존재로 격상시키는 도구로 이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모임으로 전락해 버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절대로 인간을 귀한 존재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인간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것 같은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십시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답고 깨끗하고 하나님에게 안식이 되었던 에덴을 더럽히고 망쳐버린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망쳐버린 인간을 원수로 보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결은 고사하고 아예 처음부터 에덴에서의 인간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무조건 하나님은 인간을 도우신다거나 인간을 위해서 일하신다고 해버리면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정성을 다해서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정원에 강아지가 뛰어 들어와서 여기저기 뛰어 다니면서 꽃을 뭉개 버리고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할 때 여러분은 그 개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여전히 귀엽고 예쁜 강아지로 바라보겠습니까 아니면 붙잡아서 매를 때리고 혼을 내줄 대상으로 바라보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짓이 주인의 마음을 분노하게 했다는 것도 모르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서 재롱을 떨고 주인에게 달려온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같잖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마치 주인의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주인을 분노하게 했으면서도 주인에게 재롱을 떨며 달려드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개인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개인을 위해서 존재하시고 나 개인을 위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게 된 모든 이유가 하나님을 나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의 개인적인 사정을 외면하지 않는 분이시고 내 개인적인 문제와 어려움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도우시고 해결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와서 요청을 할 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공통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주인이 아끼는 정원을 망가뜨린 강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고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재롱을 떨면서 '나를 사랑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면서 꼬리를 내리고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아끼시는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안되시는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시고 인간을 맨 나중에 지으신 것은 '만물 중에서 누가 더 귀하고 우월한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담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맨 나중에 지음 받았고, 하나님이 그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천지창조에 개입한 적도 없고, 또 인간의 의도와 인간이 바라는 대로 창조되어진 세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주어진 것을 다스릴 뿐입니다. 결국 받는 존재이고 받은 것을 누리는 것이 인간의 원래 모습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계속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유지되는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받고 받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상태의 인간을 가리켜서 '본래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받은 것을 누리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존재로 되버립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타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리고 본래의 인간 상태를 잃어버린 '비본래적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만드신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원에 세워진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상태로 존재함으로서 정원의 아름다움이 유지되는 것이었는데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인간이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옴으로 해서 정원의 아름다움이 뭉개지고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의 인간 역시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비본래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란 하나님의 것을 더럽히는 존재이지 결코 하나님을 도운다거나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저주는 하나님이 그냥 한번 해본 소리가 아닙니다. 그 순간 화가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의 저주는 세상 마지막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저주입니다. 그 저주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들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자세히 밝혀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몇천년전의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으로 대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복을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것을 묻고 싶어서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들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현대 교회에서는 교회생활, 즉 종교생활에 착실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착한 행실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에서 내어쫓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교회 생활을 안했기 때문입니까? 기도를 안했기 때문입니까? 착한 일을 안해서 하나님이 마음에 안들었던 것입니까? 그 어느 것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쫓겨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받은 대로 누리고 감사하고 살아가면 될 인간이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게 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분노하신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보고 착한 일하고 교회 생활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인간된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로부터 쫓겨나야 할 이유였다면, 오늘날 수많은 교회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은 결국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죄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기도가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거리로 등장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의 인간은 받은 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면서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려고 합니다.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수정하겠다는 의지가 바로 기도와 종교생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인간을 거부하십니다. 받은 대로 살아가는 인간을 기뻐하시는데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이미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된 우리가 '자기 요청'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자기 요청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순간순간 자기 요청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 틈에서 누군가를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택한 인간을 이용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일에 쓰여지기 위해서 불러냄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용해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나를 불러냈으니까 나는 천국가겠지라든가, 나를 복주시겠지라는 등의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불러냄을 받은 성도가 어떤 일에 쓰여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을 말씀드리기 앞서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만이 본문에 깊숙이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아이 성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에발산에서 단을 쌓는 내용입니다. 아이 성의 전투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적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치십니다. 교만은 배후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생각지 않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자립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립심이 있습니다. 자립심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받은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전투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 결과 아이 성은 자기들의 힘으로 정복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자립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립심은 이스라엘에게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간을 죽이고 난 뒤에 다시 아이 성을 공격합니다. 그때는 아이 성이 자기들의 힘을 믿고 이스라엘을 무시합니다. 즉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배후에 계셨던 것을 모른 것입니다. 이처럼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산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의 전투에서 승리 한 뒤 에발산에서 단을 쌓습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에발 산은 저주를 선포하는 저주산입니다. 그리고 그리심 산은 축복을 선포하는 축복 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을 쌓는 장소가 에발 산 즉 저주 산이라는 점입니다. 단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단을 쌓는다면 당연히 축복 산에서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에발 산에서 단을 쌓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됨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원을 망가뜨린 인간의 죄를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축복 산과 저주 산을 두시고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주 산에서 단을 쌓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시고 과연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축복 산과 저주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절반은 그리심 산에 서서 절반은 에발 산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34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의 말과 저주의 말을 낭독을 합니다. 신명기 27장과 28장을 보면 축복과 저주의 율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법을 말씀하시는 의도는 법을 잘 지켜서 저주를 받지 말고 복을 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인간은 없다는 것에 대한 선포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절반은 그리심 산에 절반을 에발 산에 서게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역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야?'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도로 접근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통해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역시 복과는 상관이 없고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아야 하고 멸망을 당해야 할 악한 자임을 율법을 통해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낭독되어질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희들이 바로 저주받아야 할 악한 자입니다. 우리 역시 멸망당한 여리고나 아이와 다를 바가 없는 더러운 인간입니다.'라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저주 산에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 바로 율법 앞에서의 이스라엘 모습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엇 때문에 에발 산에서 단을 쌓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단을 쌓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에발 산에서 단을 쌓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단을 쌓는다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한 용서는 희생의 제물이 흘린 피를 통해서 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제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단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죄를 아는 자이고, 죄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저주받아야 할 인간임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자를 그리심 산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에발 산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당연히 에발 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심 산에서는 죄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심 산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나는 복을 받아 마땅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정성과 노력으로 복을 받겠다고 하면서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스스로 어디에 세우시겠습니까? 그리심 산입니까 에발 산입니까? 말로만 '나는 저주받아야 할 자입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인들은 종교 행위 안에 죄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리심 산에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자신의 존재성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1절에 보면 에발 산에 단을 세울 때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단'을 세우라고 합니다. 신 27:5,6절을 보면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세우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철연장으로 다듬은 것은 안되고 돌이나 나무 연장으로 다듬은 것은 된다는 얘기입니까? 돌은 철연장으로 다듬지 돌이나 나무로 된 연장으로 다듬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연장 종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다듬지 말라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다듬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도와 노력과 공적이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세운다는 것은, 인간의 죄가 해결되는 현장에는 인간의 노력과 공적이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 쪽에서 그 어떤 착함과 종교적 헌신과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이 죄를 해결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은, 죄란 희생 제물의 피만 가릴 수가 있는 것이고, 그 피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번제물이 되시고 화목제물 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화목하신다는 것을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내세우고, 주일성수를 자랑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한 우리의 행위를 의로 여긴다면 그것은 곧 우리 손으로 다듬은 돌로 단을 쌓는 것이 되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그리심 산에 서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복이 어디에 임하느냐는 것입니다. 흔히 복은 그리심 산에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심 산은 복을 받는 장소가 아니라 축복을 선포하는 장소입니다. 축복을 선포하면 그 복은 맞은편을 향해 갑니다. 즉 저주 산인 에발 산에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에발 산에서 선포한 저주는 반대편인 그리심 산으로 향합니다. 결국 복과 저주가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이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저주받을 자임을 아는 그 자리에 임합니다. '내가 바로 죽을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자기를 치는 그 자리가 복의 자리입니다. 복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복이지 않습니까? 그리심 산에서 선포한 복이 에발 산에 떨어진다는 것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저주받아야 할 자임을 알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는 것이 곧 복입니다.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은 이점을 잊으면 안되었습니다. 아이 성을 자기들의 힘으로 공격했던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떻다는 것은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들 뜻대로 행동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간을 죽이심으로서 죄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린 저주받아야 할 인간입니다'는 것을 알고 저주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희생 제물의 피를 바라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저주받을 인간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겸손이 곧 여러분이 생명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인간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임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고생하며 산다고 해서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다는 것이 인간의 불쌍함입니다. 그 죽음을 해결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불쌍한 자로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고백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신자됨이며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저주를 아는 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게 되고 주님만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된 여러분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죽어 가는 몸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 가는 몸이라고 할 때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복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 9:1-15 기브온의 화친


사람은 태어나면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을 부여받게 됩니다. 곧 국가라는 조직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싫든 좋든 조직의 일원으로 소속이 되고 자라면서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을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 조직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법 등에 대해서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 일을 담당한 곳이 소위 학교라는 곳이며, 학교에서는 '도덕'이라는 과목으로 조직원이 조직을 위해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혹 조직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조직폭력배'를 연상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말씀드린 조직은 '국가'를 의미한 것입니다. 국가 역시 하나의 집단이고 조직이며 그 조직을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부강한 조직으로 키우자는 것이 모든 조직원의 소원이고 그 일을 담당하는 전문가로 모여진 것이 정부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금 국가 체제를 부정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체제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국가 체제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국가라는 조직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대한민국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로 떠난들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조직을 떠난다고 해도 또 다른 조직에 소속되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이민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은 대한민국이란 조직을 떠나서 미국이란 조직으로 가입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란 조직 안에서는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좀 더 힘이 되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조직으로 가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인간은 조직, 곧 국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국가에 소속된 것을 죄로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국가에 소속된 것이 죄라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국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되버립니다. 국가라는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싸운 혁명가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국가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조직을 위해 사는 것을 부정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자기 나라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고 현재 몸을 담고 있는 조직, 곧 국가를 지향하고 살아가는 삶을 죄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이란 종교 단체가 국가 정부 자체를 사탄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이 있는 이상 이미 국가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국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국가를 사탄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들 자신은 스스로 사탄에 소속된 일원이라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오직 조직을 보호하고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는 때로는 개인의 자유도 구속을 받습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피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장소에서 피워야 합니다. 담배꽁초 역시 귀찮다고 해서 아무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허락이 되되 술을 마신 후에 고성방가를 하면 안됩니다. 차를 탔을 때는 과속을 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차가 다니지 않은 도로라고 할지라도 국가에서 지정한 속도를 넘어서면 과속이라는 이름으로 과태료를 내야 합니다. 차를 사는 것은 자유이고,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자유지만,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발부하는 면허를 받아야 하고, 또 정해 놓은 규칙에 복종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조직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키고 발전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일정부분 박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인간도 자유롭게 산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조직에 매인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어떤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국가의 법에 매어 사는 입장에서 벗어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국가라는 체제를 부정하거나 국가의 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활동하신 혁명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뭔가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고 자신들에게서부터 잘라내야 한다는 긴장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집단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일하신 것도 아니고 국가의 법을 부정하는 말씀도 하지 않은 예수님을 왜 죽인 것입니까? 그것은 국가라는 집단이 지향하고 살아가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조직을 지향하고 사는 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삶이었습니다. 조직에 복종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만 복종하셨고, 조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조직이 구성된 사고방식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의 사고방식에 연합하지 않았다는 것이 죽어야 할 이유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생활이 무엇이냐가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떤 사고방식에 연합되어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늘나라 사고방식에 연합되어 살아가는 자는 신자이지만, 하늘나라가 아닌 세상 사고방식에 연합되어 살아간다면 그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늘나라 사고방식은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영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하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개인의 인생은 생각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지향하신 것은 하늘이었지 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늘을 지향하는 삶은 자기를 지키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과 연합한 삶이 아니라 하늘과 연합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삶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브온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멀리서 온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가면서까지, 그리고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자처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하고자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9:24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땅을 모두 이스라엘에게 주신 일에 대해서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여리고와 아이 성의 멸망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은 기브온 거민만이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보면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고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은 가나안의 주변 지역의 거민들도 같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거민들은 그 연합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종으로 자처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고자 했던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의 이러한 행동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본명 배신입니다. 가나안 거민이 이스라엘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연합한 것은 하나의 조직을 결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하기 위해서 힘을 하나로 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분명 조직에서 볼 때는 배신입니다. 힘을 하나로 모아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자는 계획에서 벗어나 오히려 하나님에게 굴복하기로 한 것은 가나안 거민들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처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의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화친을 하도록 조장한 기브온 거민들이 과연 옳으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들이 꾸민 거짓에 속아넘어가서 화친을 하고 맹세를 해준 여호수아는 잘못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점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윤리적인 면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의 잘못을 말하기 위해서 있는 내용도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단지 화친을 통해서 살아난 기브온 거민을 통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지 기브온 거민의 행동이 우리에게 어떤 신앙을 말해주느냐만 생각하면 된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을 제멋대로 결정한 잘못으로 규정한다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어야 마땅한데 본문에서는 여호수아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를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과의 화친을 결정하고 '그들을 살리리라'(15절)는 언약을 맺고 족장들까지 맹세한 것으로 인해서 결국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에게 연합되고 살아나게 된 것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본문의 내용이 기브온 족속이 가나안의 연합에서 탈퇴하여 이스라엘로 연합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관심을 여호수아의 잘못이나 기브온의 거짓말에 둘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하려고 했던 기브온 거민들의 태도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의 모습은 라합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 거짓말을 했고, 라합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동족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여호수아를 찾아온 것처럼 라합 역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기브온 거민들이 하나님 편에 연합되기 위해서 같은 가나안 거민들과의 연합을 탈퇴했고, 라합은 자기 동족들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브온이나 라합이나 똑같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하신 것들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고 가나안 땅 모든 거민을 멸하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분명히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브온 거민들은 이스라엘이 온 것은 곧 자기들에게는 멸망이며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살길은 이스라엘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편에 연합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앎이 곧 삶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거민들과의 연합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에게 연합되고자 한 것입니다. 비록 종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연합되는 것이 곧 살길임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다고 해서 모든 자가 그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문은 이스라엘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나안 족속들도 다 같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거민들은 힘을 합해서 대항하면 이길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조직이라는 것도 힘을 뭉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힘을 모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떤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기브온이 보여준 사고방식입니까 아니면 다른 가나안 족속이 보여준 사고방식입니까? 즉 힘을 모아서 이기자는 방식으로 모이는지, 아니면 우리 힘 모으기를 포기하고 종으로라도 하나님 편에 연합되는 것만이 사는 것이라는 방식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볼 때 교회는 기브온 족속이 아니라 다른 가나안 족속의 사고방식으로 모이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은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이 아니라 단지 힘모으기에 불과한 연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회, 총회가 바로 힘모으기입니다. 각 교단이 연합된 교단의 힘을 과시하는 것들이 바로 그 증거이지 않습니까? 노회 총회는 조직이라는 힘을 교회에 또는 목사에게 과시합니다. 그래서 목사도 노회를 돕고 노회를 위하는 목사로 존재해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노회가 추구하는 사고방식에 위배되는 목사라면 가차없이 조직의 힘을 가합니다. 목사는 목사라는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회나 총회가 바라는 요구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위치를 자기의 살길로 여기기 때문에 살길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회나 총회에 연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직을 통해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이 죄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세상 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을 연합해서 자기 이름을 내고 발전하고 높아지고자 하는 것은 바벨탑입니다. 십자가와 원수된 삶의 태도입니다. 인간의 존재 근거는 힘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통해서 그것을 알았고, 다른 거민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대적하기 위해서 연합한 족속이 모두 여섯입니다. 여섯 나라의 왕이 힘을 연합한다면 그것은 사실 무시할 수 없는 힘입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눈에 보이는 뭉쳐진 힘을 더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소문일 뿐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줬다는 것도 그들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소문으로 들린 것뿐입니다. 여리고와 아이 성을 이겼다고 하지만 여섯 족속이 힘을 모은다면 여리고나 아이 성의 힘보다는 더 강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줬다는 소문만 믿고 연합된 힘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에게 종으로라도 연합되기 위해서 화친을 맺고자 한 것은 분명 세상적인 시각에서는 어리석은 것이고 비굴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그것이 바로 멸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여리고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자기들의 힘을 계산한 후 스스로 아이 성을 치고자 했던 것에 비하여 기브온 거민들은 자기들의 힘이 아닌 여섯 족속이 연합된 힘에 대해서도 승리의 가능성을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께 연합되고자 한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자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서 보여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친척 아비 집이라는 것은 연합된 힘이 있는 곳입니다. 가문이라는 힘이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지켜줬던 것입니다. 그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인간의 연합된 힘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이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다 낡아서 기운 신발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곰팡이 핀 떡을 가지고 여호수아에게 와서 거짓으로 멀리서 온 것처럼 가장을 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을 하고자 했던 것은 기브온 거민들이 소문으로만 들은 하나님은 이미 그들 가슴속에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실 기브온 거민들의 거짓 화친은 이스라엘에게 많은 부끄러움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은 단지 소문으로 들은 하나님이지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직접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홍해를 통해서 요단을 통해서 그리고 광야에서의 여러 가지 기적과 삶을 통해서 능히 나타나신 바 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장 아이 성의 전투만 해도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면 결코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제멋대로 아이 성을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에 연합되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교훈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긷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거짓말한 기브온 거민에 대한 징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브온 거민의 입장에서는 영영히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나무를 패고 물긷는 자가 된다는 것은 분명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은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25절)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당신들 손에 있으니 당신들 마음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브온 거민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에 연합되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지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아가느냐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속했으니 이스라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태도입니다. 비록 기브온 거민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레위인처럼 여호와의 단을 섬기고 그 백성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제사하러 나온 이스라엘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만이 좋았을 뿐입니다. 가나안을 멸망하시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멸망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산다면 비록 종으로 산다고 해도 괜찮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브온 거민들과 우리 자신을 비쳐 볼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과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이 망한다는 소리를 말씀을 통해서 들었는데 과연 망함 속에서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연합되는 것임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까? 그리고 하나님께로의 연합이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십니까? 하나님께 연합된 자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셔도 좋다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은 인간의 연합된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이 곧 의지의 대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대자로 자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힘이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태양 앞에서 반딧불 같은 것이 인간의 힘입니다. 그 힘을 의지하고 살아보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비록 종으로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마음 든든히 여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신자가 굴복할 것은 세상 힘이 아니고 조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신앙이라면 비록 몸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매인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매인 자로 살아갈 것이고, 그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만 마음껏 보이며 살 것입니다.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수 10:6-14 태양이 멈추다


가나안 땅은 분명 약속의 땅이며 축복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투가 끊이지 않습니다. 축복의 땅이라면 편안하게 두다리 뻗고 아무 걱정 없이 놀고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인데,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복의 땅은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서 이제 그동안의 모든 고생이 다 끝나고 편하게 사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것이 전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축복의 땅은 편안하게 놀고 먹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땅은 그런 차원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축복의 땅은 승리의 땅입니다. 승리가 주어져 있는 땅이 곧 가나안 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전투를 하게 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승리 안에 들어왔음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힘으로 승리해야 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승리하게 하신 땅에 들어왔음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전투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리고 전투가 바로 그런 의미이며 아이 성 전투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를 이스라엘에게 붙이셨고 아이를 붙이셨다면 그것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싸우나 마나 이미 승리했는데 왜 굳이 이스라엘에게 여리고를 돌게 하시고, 아이 성을 쳐부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여리고를 도는 것조차도 없이 승리를 안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아이를 이스라엘에게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승리의 땅에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의 싸움을 통해서 '이 땅은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 승리하고 살아가는 땅이 아니라 이미 승리가 주어져 있는 땅이다. 너희는 단지 승리를 누리며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싸움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승리를 누리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지를 확인하지 못합니다. 전투가 있어야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땅 안에 있기 때문에 승리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땅에 전투가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으로 아이 성을 치고자 했을 때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는 것은 곧 실패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의 나약함은 이미 승리한 자로 살아가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축복의 땅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 안에서 실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이긴자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나는 이긴자다'라고 한다고 해서 이긴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과연 이긴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전투를 통해서 확인하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우리 앞에 두심으로서 적의 힘에 흔들리지 않고 이미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나안 땅에서의 전투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축복의 땅이란 세상 것을 받아 누리는 땅이 아닙니다. 축복의 땅은 하나님의 승리가 주어져 있는 땅입니다. 그 땅에서 산다는 것은 이미 승리한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신자가 바로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미 승리한 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믿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니며 뭘 하고 안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따라서 만약 신자가 진심으로 축복의 땅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약한 자로 산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실패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전투가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가나안 땅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스라엘과 화친을 하고자 했던 기브온 거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군사를 몰살시키고 여리고와 아이를 멸하신 그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줬다면 그 약속대로 틀림없이 되어질 것을 전혀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비교하고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화친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의 연합도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들은 자신들의 힘과 이스라엘의 힘을 비교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라면 가나안은 틀림없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 길은 이스라엘과 연합하는 것 밖에 없음을 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브온을 통해서 보여준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계산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연합한 기브온을 치기 위해서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이 아모리 다섯 왕과 연합하여 기브온을 대적하는 내용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의 행위는 세상이 볼 때는 배신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다른 거민들을 외면해 버린 비열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신의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의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아도니세덱은 배신자를 척결하기 위해서 아모리 다섯 왕과 힘을 모아서 기브온을 치게 됩니다. 그 내용이 10:4절입니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라고 합니다. 원래 이들의 적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마저 이스라엘과 같은 존재로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기브온마저 공격해야 할 적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과 연합해서 살고자 했던 기브온은 그 댓가로 전에는 자신들과 같은 가나안 거민이었던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들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이 하나님을 알고 나서 하나님께 굴복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 역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작정한 자들입니다.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만 믿고 살기로 작정한 자가 곧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 낳습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상도 의지하고 그리스도도 의지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고 살고자 하는 신자에게는 필히 세상의 미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자 역시 미움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기브온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더라도 화친을 하고자 했던 그 마음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만약 기브온 거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세상의 힘에 마음을 두는 부분이 있었다면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보다는 가나안 거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들은 여호수아를 찾아와서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에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언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6절)라고 말합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기브온 거민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한 자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으로 들통이 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외부적인 압력이 가해졌을 때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흔들릴 때가 많이 있으며 세상 쪽으로 우리 마음을 조금 양보하고자 하는 흔들림도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투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약함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신자라면 그 어떤 일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향해 달려올 것입니다.

 

 

 

 

기브온의 요청에 의해서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서 길갈에서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도니세덱의 연합군들이 여호수아에 의해서 패배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도망을 치게 되고 하나님은 도망치는 그들 머리 위에 큰 우박덩어리가 떨어지게 해서 이스라엘이 칼로 죽인 수보다 더 많은 수가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태양과 달이 멈추게 된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이 멈추기를 기도하자 그 기도대로 태양과 달이 멈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과연 세상 누가 믿겠습니까? 태양과 달이란 인간에 의해서 통제될 수 없는 물질입니다. 인간은 오히려 태양과 달이 일으키는 자연의 변화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세상은 태양과 달을 만드신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태양을 보고 달을 바라봤습니다. 그럴 때 인간의 눈에 태양과 달은 섬김의 대상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태양과 달이 멈췄다는 것은 세상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상식이 아닌 과학으로도 전혀 답을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놀라운 기적을 신화라는 말로서 약화를 시키려고 하고 또는 일식이나 월식 같은 현상을 멈춘 것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과학적인 절충을 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태양과 달이 실제로 멈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컴퓨터로 계산을 해보니까 하루가 비더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 모두는 쓸데없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들이 세상에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기적을 베풀어서 기적에 감동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단지 태양과 달이 머물렀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이고, 왜 하나님이 태양과 달을 머무르게 하는 기적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셨는지를 알아 가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사실인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것은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적 자존심을 세워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들이 기적을 사실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태양과 달이 정지할 수 있느냐? 에 대한 의문은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정지한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은 왜 태양과 달이 정지하는 기적이 없느냐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기적에 대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기적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은 단지 계시를 담고 있는 그릇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때 있었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이지, 꼭 오늘 우리도 기적을 목격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실제로 세상 사람들 눈앞에서 태양과 달이 멈춘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놀라운 기적에 감탄할 것입니다. 기적에 매이고 되고 기적을 바라보게 될 뿐이지 기적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지 기적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태양과 달이 정지한 것보다도 더 큰 기적과 힘은 곧 성령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양과 달이 정지한 것보다도 성령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자 된 것이 더 큰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태양과 달이 정지한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까? 하나님은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해서라도 기브온 거민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진멸을 하십니다. 그만큼 기브온 거민들을 높이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브온 거민들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곧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문을 들은 기브온은 자신이 살길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 되는 것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세상 힘이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하나님 편 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으로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편이 아니라 자기편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으로 살기를 작정한 기브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태양과 달까지 정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태양과 달이 정지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의지로서 일을 하시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기적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로만 살 수 있음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 땅의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제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사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땅에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다만 약속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살며 되었습니다.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바꾸시지도 않으시고 취소하지도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강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약속에는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태양과 달을 정지하게 해서라도 약속 안에 있는 자는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라면 신자가 약속 안에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엄청난 능력과 힘과 축복 안에 들어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브온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하나님 편에 서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곧 사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한번 약속한 이상 그것을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만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브온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화친조약이 취소된다면, 결국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약속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4,25절에 보면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군장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군장들로 하여금 아모리 왕들의 목을 밟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그들을 죽여서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이것이 어찌 보면 잔인하고 인간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모리 왕들의 목을 밟게 하고 그들을 죽여 나무에 매달아 놓음으로서 이스라엘의 대적에게는 하나님이 이같이 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과연 목을 밟히고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이고, 목을 밟은 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의 목을 밟고 죽였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어떤 마음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목을 밟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목을 밟힌 자들은 끝까지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해서 들었으면서도 자기들의 힘을 모아서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세력에 대해서 하나님은 목을 밟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세력을 목이 곧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곧은 목을 밟아 버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목을 밟아버리는 인간과, 태양과 달을 정지하게 해서라도 보호하시는 인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목을 밟아 버리는 인간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사는 자입니다. 인간들끼리 힘을 모으고 열심히 하면 자기들 계획대로 되어질 것 같은 착각으로 사는 자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그 목이 밟힐 자라는 것을 잊으며 안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피안에 구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피를 믿는 자는 절대로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되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겸손으로 사는 자를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신자가 바로 그러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지된 태양과 달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태양과 달이 정지된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고자 했던 기브온이 태양과 달이 정지되면서까지 보호받는 세계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위해 태양과 달이 멈출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호수아 때 한번으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그 한번으로 신자가 살아가는 축복의 땅이 어떤 땅인가가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즉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은 성령입니다. 태양과 달이 정지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 것으로 증명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놀라운 기적 안에 산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성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기적과 축복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기적과 축복만 마음껏 드러내십시오. 세상의 축복을 기대하고 그 축복을 자기 힘으로 삼고자하며 사는 자들에게 성령이 나를 움직이고 주님에게로 밀어붙이는 이 놀라운 기적의 세계를 증거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수 10:22-27 목을 밟으라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교회에 다님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다고 간주해 버립니다. 자신의 삶이 과연 사랑과 은혜 안에 있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랑과 은혜는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이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어려울 때, 어떤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소유 증가와 편안한 삶을 통해서 확인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미 증거 되어지고 확인되어 졌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이 윤택해진다거나, 하는 일이 순조롭게 잘되어 간다거나, 자식들이 모두 속 안썩이고 공부 잘하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결국 어려움이 있고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하게 되면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 삶에 대해서 욕심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 삶에 대해서 욕심을 두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에 대해서 욕심을 두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현재 자신의 삶이 욕심으로 나아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삶의 윤택함을 통해서 확인하려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욕심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의 사랑을 내세워서 채워 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고 예수님의 피를 말하지만 그 속마음은 온통 자기 삶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삶의 중심이 자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만약 사랑을 세상에서 윤택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이라면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입니까? 지옥간 부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까? 사랑이란 우리의 소유와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로 증거 되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주어졌고,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서 그는 이미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사는 자는 세상에서의 자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공해야 한다거나, 남들보다 더 높아져야 한다거나, 자식들을 출세시켜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알았고, 또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이미 인생의 성공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이 예수님의 피보다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피를 믿게 된 것을 감사한다고 하면서 교회가 부흥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염려를 하고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비록 예수님의 피를 말은 하지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 안에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목이 곧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기브온 거민을 공격하던 아모리 다섯 왕이 여호수아에 의해서 죽는 내용입니다. 아모리 다섯 왕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패배를 합니다. 그리고 도망을 치던 중에 굴에 숨게 되었는데 여호수아가 그것을 알게 되고 결국 그 다섯 왕을 끌어내어서 군장들에게 목을 발로 밟으라고 명하고 죽여서 나무에 달아 놓는다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태양이 멈추었던 기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다섯 왕의 목을 밟아라고 명한 것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목을 밟아라는 것은 목을 꺽어버리는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다섯 왕을 이렇게 처리를 하는 것은 다섯 왕과 같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이렇게 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단지 기브온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기브온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모리 다섯 왕을 그토록 잔인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살려둘 수는 없다고 해도 그냥 곱게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의 행동은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다섯 왕에게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다섯 왕과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아모리 다섯 왕이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을 공격한다는 것이 여호수아를 분노하게 했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여호수아의 행동을 그런 쪽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우리로서는 여호수아의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 속에 인간의 도덕과 윤리와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도덕과 윤리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것도 결국 인간을 도와주고 어려움에서 건져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어떻게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자기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자기 개인의 감정과 생각으로 행동을 했다면 아마 다섯 왕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다섯 왕의 목을 밟고 죽여서 나무에 달아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섯 왕의 목을 밟아라는 여호수아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목을 밟는다는 것은 목을 꺾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을 꺾는다는 것은 목이 곧은 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목이 곧다'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2장에서 처음 나옵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 동기는 모세가 산에서 늦게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늦게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한 모세를 대신해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을 모아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말하기를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눈에 보일 때는 마음이 든든하고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할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즉 모세를 대신할 다른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고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은 자기들 스스로 자신들이 의지할 것을 만들어 내는 행동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들 앞에 둠으로서 힘을 얻으려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이적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세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가 눈에 보일 때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눈에서 보이지 않자 마치 하나님도 자기들에게서 떠나신 것으로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서 그 속에 하나님을 모셔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이고 목이 곧은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자신의 삶의 윤택과 풍족함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담아 두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랑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의 사랑도 우리의 삶에 실제로 드러나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현재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이 곧은 모습입니다.

 

 

 

 

세상은 오직 보이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신이라는 존재 역시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고 증명하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증명되어지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을 교회의 부흥이나 자기 성공으로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증거하면 부흥되게 되어있다든지, 복음으로 살아가면 복을 받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목사가 '구속사 설교를 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더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목사는 소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입니다. 구속사 설교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설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두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속사 설교를 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더라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도 돈이 안되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십자가를 전해도 그것이 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되기는커녕 우리를 손해되는 길로 밀어붙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 전하면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런데 구속사 설교를 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가 부흥되게 하는 설교가 진짜 설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의 증거를 교회 부흥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실과 관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하나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설교,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오로지 눈에 보이는 현실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이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목이 곧은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자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아모리 다섯 왕의 목을 밟음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모리 다섯 왕은 기브온이 자기들과의 연합을 배신하고 이스라엘과 화친을 했다는 이유로 서로 힘을 합하여 공격을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힘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신보다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군병과 힘을 최고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목이 곧은 모습인 것입니다.

 

 

 

 

신명기 9: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목이 곧은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이 곧은 자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으로 감사하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가나안 땅에서 부강해지는 것으로 확인되어지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은혜 안에 있음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한다는 사실로 이미 확인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눈에 보인 것을 바라보게 되어질 때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이고 결국 가나안땅에 들어온 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시해 버릴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에도 보기에 힘이 되고 소망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것만 나에게 있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것만 있으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들 주위에 산더미처럼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내게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사는 이웃을 보면서 '하나님 도대체 뭐합니까? 열심히 교회 다녀주고 헌금했으면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무시하고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목이 곧은 모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다섯 왕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목이 밟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목이 밟히는 것이 아니라 목을 밟은 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목이 밟혀야 할 자인데도 불구하고 목을 밟는 자로 서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살아난 자들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있는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의로 삼는 자들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고 피만 의로 내세워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섯 왕의 목을 밟으면서 확인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즉 우리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목이 밟혀야 할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을 자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목을 밟는 그 심정으로 밟아야 했던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아마 군장들이 다섯 왕의 목을 밟기를 꺼려했던 모양입니다.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다섯 왕의 목을 밟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해서 목을 밟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이같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목을 밟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얼마든지 다섯 왕의 목을 밟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어떠함을 알 때 세상의 악함과 나 자신의 악함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흔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는 것을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마음가짐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의 신념이나 의지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오히려 세상이 의지하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소원하고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을 부인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세상에서 힘되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단절된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들을 부인하고 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가능한 것이고, 그 마음이 곧 강하고 담대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 마음이 누구의 목을 밟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목을 밟습니다. 우린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바로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온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염려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지혜를 주셨다면 그것으로 이미 기적의 세계를 살아가고 축복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은혜와 사랑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려고만 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목이 곧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목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밟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밟아야 할 자는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세상의 보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은 기적의 세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만 자랑하게 되고 누구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모독하고 인간의 의를 드러내고 보이는 것으로 은혜를 확인하려는 것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강하고 담대한 신자입니다.

 

 

 

 

 

수 10:28-43 진멸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끝과 종말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죽음, 이 문제보다 더 현실적이고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이 문제는 현재의 인간이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무리 인간이 발버둥치고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결국 죽음이라는 굴레 안에서 활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죽음으로 향해 가는 운명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그러나 죽음이란 신이 정해준 원칙이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죽음을 이기는 의학 역시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간의 수명 앞에서는 의학도 두 손을 들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죽음 안에 놓여서 살아가는 운명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자기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늙었다거나 병들었다거나 해서 죽음의 위기를 느끼는 상황이라면 간혹 '죽는다'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도 하겠지만, 건강하다거나 젊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죽음과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죽음은 늙은 사람들이나 생각할 문제이지 나같이 젊고 건강한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현재의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은 마지막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끝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오직 희망이 있고 꿈이 있는 세상을 가르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나중에 죽게되었을 때나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팔팔할 때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비생산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교회가 마치 천국을 싫어하고 있는 뜻한 느낌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고통과 수고의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는 세상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찬송가 289장에서도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290장에서도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라고 말합니다. 이 찬송가를 보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간다는 것은 아주 큰 기쁨과 영광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찬송을 부르면서 과연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부르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진심으로 세상을 고통과 수고의 현장으로 여기고, 죽는다는 것을 고통과 수고로부터 해방되고 영원한 영광과 평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긴다면 교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고,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은 천국보다는 세상에 더 미련을 두고 소망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 4:13-14절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끝에 대해서 외면하고 오직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서, 자신을 위하고 자기 가족을 위해서 한평생을 희생하고 봉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할 대상이며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러한 이치를 모른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거의 날마다 성경이 해석되고 전파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끌고 가시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원수로 삼고 추방하고자 하는 대상이 어떤 자인가에 대해서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이 성경인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는 교회가 도리어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할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은 날 때부터 죽어있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끝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 32:29절에 보면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지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지혜로 여기는 것은 남들보다 더 위대해지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며 수단입니다. 그것만이 지혜로 통용되는 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흥되어지고 사람들을 많이 끌어 올 수 있는 방법이나 수단들이 지혜로 통용됩니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인간의 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회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존재로 내몰리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패배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한쪽 면만 강조하고 긍정적 면을 보지 않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로 여김 받을 것입니다. 사회에 불안감을 조장하는 말이라고 할 것이고, 나중의 문제를 지금 미리 끌어 당겨서 생각함으로 희망과 꿈이 있는 소망의 삶에 대해서 찬물을 끼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인간은 물론 죽지만 현재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도 결국 삶에 대해서 가치를 주신 것이니까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데 죽음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인간에게 죽음이 왜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무지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끝이 있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삶은 끝을 알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을 모르게 되면 자기 삶에 희망을 두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보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할 때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여겨지면 스스로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부각시킵니다. 이만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삶에 만족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만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추어버린 결과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께 만족이 되고 기쁨이 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성자라고 일컫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도 다 죽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아버지 슈바이처도,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로 일컬음 받은 테레사 수녀도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슈바이처의 선행도, 테레사 수녀의 선행도 모두 하나님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곧 하나님이 인간을 받지 않으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곧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현실은 끝, 곧 죽음이라는 것을 두고 볼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알고 죽음을 생각하고 사는 자에게 죽음에서 해방이라는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시간에 우리는 그 귀하고 가치 있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가 전쟁을 치르고 점령을 한 도성은 막게다, 립나, 라기스, 게셀, 에글론, 헤브론, 드빌과 가데스 바데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렀습니다. 한마디로 가나안 땅을 초토화 해버린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가나안 백성을 쳐서 이겼다라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약 본문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나라를 점령했다'라고 생각해 버리면, 결국 '하나님 나에게도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해 주십시오'라는 바램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이기게 해달라는 것도 자신의 경쟁자를 물리치게 해달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것을 세상의 많은 것을 점령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탐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탐욕으로 살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내용을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쪽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 한국교회가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모든 성경의 내용이 결국 인간을 도와주고 인간 편을 들어주는 긍정적인 하나님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편을 들고 인간을 도와주는 긍정적인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진멸해 버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야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자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을 결국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믿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은 인간 편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 편에서 일하신다면 비록 이스라엘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우상을 섬긴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얼마든지 권면할 수 있습니다. 혹 권면을 듣지 않는다면 가벼운 징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의 고생 끝에 들어가게 된 가나안에서 나가게 하신다는 것은 너무 몰인정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몰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 편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사는 거민들을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그것은 가나안 거민들이 미워서 보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서의 기능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은 아무나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약속 안에 있는 자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 안에 있지 않는 자는 모두 진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위해서 일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맞지 않는 자는 모두 진멸해 버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공통적인 문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8절 하반절에 보면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립나를 진멸하고 나서도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고 말합니다. 라기스를 진멸하였을 때는 "립나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고 말하고 에글론을 진멸하고 나서는 "라기스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는 말을 합니다. 즉 앞서 행한 것과 똑같았더라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전투는 처음과 나중이 모두 같았습니다. 이것은 어떤 지시에 의한 전투였음을 말해줍니다. 즉 여호수아 자율에 맡겨진 전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40절의 말씀입니다. 40절에 보면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의 전투에서 처음과 나중이 동일한 것은 '진멸'이었습니다.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는 것이 곧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여호수아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진멸에 있습니다. 그 뜻을 도와주기 위해서 5장에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행한 것이나 모든 전투가 일반이었다는 것은 자기 개인의 뜻을 가지고 전투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 전투를 했음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천사가 여호수아를 도와주는 것은 여호수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편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세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기도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뜻이 포기되어 있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신자야말로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런 물음 앞에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삶은 여호수아의 전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멸'입니다. 진멸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었고 여호수아는 그 명하신 대로 모든 전투에서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진멸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삶이란 '진멸'하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수아처럼 총칼 들고 나가서 세상 사람을 다 죽여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전투에서의 진멸이란 단순히 모든 사람을 죽였다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은 우리의 현실과는 전혀 거리가 먼 내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가나안 거민들을 모두 진멸하는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주 못된 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고 제물을 바치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오직 약속 안에 있는 자들만이 가나안 땅에 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 안에 있지 않는 자는 진멸 하는 것입니다. 즉 약속 밖에 있는 자는 모두가 진멸을 당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약속 안에 있다, 약속 밖에 있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약속 안에 있는 자는 약속을 아는 자들입니다. 약속을 알고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약속 밖에 있는 자는 약속을 모릅니다.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주와 능력과 자질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나안 거민들은 약속의 땅에 있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준은 도덕과 윤리가 아닙니다. 세상이 생각하듯 도덕적인 착함과 악함을 기준으로 해서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악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은 지옥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약속의 자손을 세상에 보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인정하는 자를 약속 안에 있는 자로 여기십니다.

 

 

 

 

시 2:2-12절을 보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자로 오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는 모두 진멸해 버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철장으로 깨뜨리시고 질그릇처럼 부숴 버리십니다. 구원의 기준은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거민들이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들, 즉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모르기 때문에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땅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을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 밖에 있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일반이었더라'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기준이 '하나님은 약속 밖에 있는 것은 모두 진멸하신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전투는 호흡이 있는 자는 모두 진멸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 전체를 심판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창 7:22절에 보면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육지에서 코로 호흡하는 생물은 모두 진멸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판에서 오직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살리신 것은 이들이 구원을 받을 만큼 착하다거나 의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창 6:8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와 그 가족을 살리신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림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즉 죽어야 할 인간이 정결한 존재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것을 아는 자만 인정합니다. 그 외의 모든 인간은 진멸해 버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세상을 이런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가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해 버리신 것은 새로 시작하자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재주로 만들어 놓은 문화나 문명으로 사는 세상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세상으로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이 홍수로 진멸하는 것이었습니다. 홍수는 인간의 모든 것을 싹쓸이 해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문화라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만 물위에 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심판의 현장에서 생명이 되는 것은 '은혜'일 뿐입니다. 더 이상의 것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모릅니다. '오직 은혜'를 모릅니다. 은혜를 인간의 일을 잘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자기 탐욕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교회가 소위 기독교 문화라는 것을 말하고 청소년들을 기독교의 문화 안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문화 안에서 자라면 악에 물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한 착각입니다. 은혜 외에 또 다른 무엇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문화라는 것도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선한 문화라고 일컫는 것 역시 심판 안에서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나안 거민을 모두 진멸하신 것은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것은 모두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만 세워서 새롭게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신다면, 우리의 것을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과거에 우리가 무엇을 했든지 간에 그것은 진멸을 당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진멸을 당한 자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것을 진멸 당하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 덩그라니 남아있는 자로 나오셔야 합니다. '은혜가 나를 살렸습니다' 이것 외에 내세울 것은 없습니다. 내세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진멸을 모릅니다. ''이란 인간의 종말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오직 자기 인생을 위해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삽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깨끗이 청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 약속 안에 있는 자만 세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진멸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만이 여러분을 살립니다. 자신을 진멸 당할 자로 알고 나오십시오. 그럴 때 은혜가 보일 것입니다. 죽어야 할 내가 살게 된 은총이 무엇인가가 보여질 것입니다. 그 은총을 증거 하는 자로 남은 인생을 보내는 것이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세상은 진멸 당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나를 살렸다는 것을 귀한 축복으로 여긴다면 그는 세상의 시시한 것으로 경쟁하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당합니다. 죽어야 할 운명인데 주의 은혜가 나를 살렸다는 것을 부지런히 증거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내 속에서 세상의 것은 진멸 당하고 주님의 은혜만이 우뚝 세워질 것입니다.

 

 

 

 

 

수 11:1-9 힘


세상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있는 자는 우대 받고 높임 받으며 힘없는 약자는 무시와 업신여김을 당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어디를 가도 힘이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의 차별성은 무엇으로 드러나겠습니까?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비와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가 강조하는 자비나 사랑이란 힘을 가지고 남을 억압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힘있는 자의 너그러움이고 여유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비나 사랑 역시 힘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소위 교회라고 하는 단체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힘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힘의 구조에 매인 채 힘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봉사 많이 한자와 적게 한 자의 관계 속에 힘이 형성됩니다. 즉 봉사를 많이 하는 자는 우대를 받고 봉사를 적게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하는 자는 무시를 받습니다. 결국 우대 받는 자가 힘있는 자로 행세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힘있는 자로 군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히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으로 사는 세상에서 돈이 없는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을 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단지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 하나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식당을 하기 위해서는 필히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백화점도 주차시설이 잘되어 있는 곳을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물건값이 싸고 음식값이 싸다고 해도, 주차 시설이 안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외면하고 맙니다. 교회 역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차 공간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교육관도 지어야 하고 이런저런 시설도 필요합니다. 또 '우리 교회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오직 돈으로 모든 일을 하는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무엇보다 헌금을 많이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즉 돈 되는 사람을 교회가 선호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교회에서 힘있는 자는 돈 있는 자이고 헌금을 많이 하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 되지 않는 자가 교회를 떠나면 관심을 두지 않는데 돈 되는 사람이 교회를 떠나버리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탈을 쓴 이리의 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은석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가 아닌지를 말씀을 통해서 면밀히 검토를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은석교회가 혹시 세상의 힘의 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오늘 우리가 말씀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설교란 좋은 말을 듣고 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말씀이 입에서는 달지만 속에 들어가면 쓰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입에서 단 말씀이 아니라 속에서 쓴 말씀을 체험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말씀 앞에 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말씀은 절대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지를 않습니다. 때리면 아파하는 것이 정상이지 맞으면서 웃고 즐거워하는 사람을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맞으면서도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맞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경우일 것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인간을 칩니다. 속의 죄를 드러내며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말씀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제대로 만난 자는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벌거벗음이 발각될 수밖에 없고 벌거벗음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수치가 드러난 현장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설교를 듣는 자에게서는 두가지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수치를 드러낸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해 자기 수치를 철저히 인식함을 통해서 수치를 가려준 자로 오신 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즐거움은 바로 수치를 가려준 분을 바라보게 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수치가 발각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힘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속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약점을 철저히 감추려고 하는 것 모두가 힘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봐야 결국은 힘을 주시는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영웅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약자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약자로 오신 그리스도가 이해되어지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부여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믿음과 힘을 연결시켜 이해를 합니다. 믿는 것이 곧 힘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인데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 힘을 못 받는 것이니까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속임수에 넘어간 교인들은 힘없는 자의 설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를 써서라도 하나님을 믿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성가대를 하고 교사를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면서 믿음이 있는 자의 티를 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을 힘으로 삼지 않도록 합니다. 믿음은 신자더러 예수님처럼 약자로 살아가도록 합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신자더러 약자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자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하심이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사는 나라는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선호하고 원하는 힘이 하나님에게는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이 왕들이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쳤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남부 지방을 점령을 하자 이 소식을 들은 하솔왕 야빈이 북부와 동서 편에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이스라엘과 대항을 하기 위한 연합군을 결성을 합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많은 수의 군사와 병거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모여든 군사가 얼마나 많은지 해변의 수다한 모래처럼 많다고 표현을 합니다.

 

 

 

 

가나안 족속은 많은 수의 군사와 병거를 믿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이스라엘쯤은 문제없이 전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들보다 적은 수이고 무기도 하찮은 이스라엘이 보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소유한 것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가나안 족속이 승리할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에 자신만만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가나안 족속의 패배로 끝납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승리란 인간의 힘과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숫자와 보이는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끌어 모은 것은 하나님의 힘 앞에서는 지푸라기보다 못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을 힘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힘을 삼는 자는 절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일임하지 하지 않습니다. 힘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냥 따라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깁니다. 선교를 한다고 할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은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선교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구제 역시 마찬가지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교회에 돈을 바치는 것이 해결책이지 그냥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신대로 한다는 것은 게으른 것이고 믿음이 없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인 숫자와 병거를 의지하고 이스라엘과 대적하려고 나온 가나안 족속과 같은 모습입니다.

 

 

 

 

'돈만 있으면 해결되니까 하나님 돈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이것은 단지 돈 받아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힘이 아니라 돈을 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필히 교인 수와 재정의 액수를 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보내는 선교사의 숫자와 구제를 하고 있는 숫자를 과시하면서 자신들의 능력과 힘을 즐거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약자인 예수님은 절대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환영을 받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가 아닌 자로 밀쳐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 있었던 상황이 오늘날 교회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음을 당했듯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 의해서 참된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가나안 족속을 쳐서 진멸하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고 말 뒷발의 힘줄을 끊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말의 뒷발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은 말이 제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투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의 병거를 불사르고 말의 힘줄을 끊어버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당초 이스라엘의 승리는 많은 수의 군사와 병거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이 남긴 병거와 말을 모은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가나안 족속과 똑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 33:16,17절에 보면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소망하고 모으기를 힘쓰는 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또 시 20:7절에서도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병거 말을 의지하는 것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자는 병거 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자랑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무슨 힘이 됩니까? 세상을 사는데는 돈이 더 힘이 되고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의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왜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망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힘에 대한 관심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는 것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이름에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병거나 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망령되이 일컫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힘을 말하지만 인간이 믿음의 힘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신자는 힘있고 강하신 분을 믿는 것이지 신자 스스로 힘을 얻어서 그 힘으로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아서 스스로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믿음의 힘이 없다고 느껴지면 낙심을 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지 은석교회의 전쟁도 아니고 여러분의 전쟁도 아닙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자리하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인간에게 힘을 줘서 싸우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싸움은 숫자와 숫자의 싸움입니다. 누가 더 많은가?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높은가? 이것이 세상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는 이기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보다 많고 커지고 높아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이 이기는 것이고 더 높아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싸움이고 사고방식이며, 가나안 역시 이러한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변의 수다한 모래처럼 많은 군사와 병거를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많고 더 큰가를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고 더 크니까 우리가 이겼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나안을 철저히 전멸시키고 병거를 불사르고 말의 힘줄을 끊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싸움은 숫자의 싸움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힘의 싸움이 아니라 죄와의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의와 죄의 싸움이 하나님의 전쟁이지 결코 숫자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숫자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아무리 많은 수의 교인이 있고 재정이 많고 거대한 예배당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의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온 의가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내어서 죄와 싸워보겠다고 나서는 것 역시도 자기를 믿는 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자들은 자신의 윤리와 도덕을 힘으로 삼습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것을 의로 내세워서 죄와 싸우며 살아가는 믿음이 있는 신자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죄가 되는 것은 내가 만들어 낸 의를 자신의 힘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 있는 자인 것으로 행세를 함으로서 자기보다 못한 의를 소유한 자에 대해서는 무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는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자기의 힘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가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발견한 이상 자신의 도덕과 윤리를 붙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에 군사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은 인간의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자랑하는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아는 자로서 가나안 땅에 살아 갈 수 있는 이스라엘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병거와 말의 힘줄을 끊으라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는 분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세상의 힘을 모으고 커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이 의있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의와 죄의 싸움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에 도구로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전투에 도구로 제공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세상의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즉 숫자의 싸움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 교회가 더 교인수가 많느냐는 쓸데없는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일년 재정이 얼마고 선교를 얼마나 하고, 이런 싸움은 인간의 싸움이고 경쟁일 뿐입니다. 누구 집이 더 큰가? 누가 차가 더 좋은가? 누구 아들이 더 공부를 잘하는가?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싸움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싸움이 아닌데 무엇 하러 그런데 관심을 둡니까?

 

 

 

 

가나안 족속이 왜 진멸을 당해야 합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이유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라 의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의인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생명은 의에 있는 것이지 절대로 세상의 힘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명으로 삼아야 할 분이 누구입니까? 의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죄와 싸우신 것입니다. 총 칼을 빼들고 싸우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에 의해서 죽으신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세상이 무엇을 의지하는 가를 보이신 것입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힘을 포기한 자로 오심으로서 죄가 무엇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 있는 자를 심판 당할 자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이것 하나는 명심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 신자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신자는 예수님과 일치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힘을 포기한 자로 등장하게 되고 약자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약자란 돈 없고 신체가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믿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어느 것 하나도 자기를 구원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오로지 생명 되신 의만 의지하는 자가 바로 약자입니다. 가진 힘까지 포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 있는 증거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가지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가지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힘이 되고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구들, 비싼 가전제품들, 수많은 것들이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고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세상에서 통용될 뿐입니다. 비록 세상은 돈 많은 자를 우대하고 교인 수를 늘린 목사를 능력 있는 자로 여기지만 하나님이 시각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죄와 의의 기준에서 보실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의있는 자가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세상에서 가치 있고 높임 받는 자라고 할지라도 의가 없으면 그는 악인이며 망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 1:4-6절에 보면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악인입니다. 내가 곧 망하는 길에 서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이 악인임을 압니다. 악인임을 알기에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이 착한 일을 한들 그것이 선이 될 수 없음을 압니다. 악인이 돈이 많아서 많은 돈을 교회에 바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의인이 될 수 없음을 압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의인될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의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를 신자로 의인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자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모인 교회는 힘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오로지 낮은 자, 약자만 보일 뿐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