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스크랩] 여호수아 강해 2

공 상희 2009. 5. 6. 13:27

 

 

 

 

 

 

 

여호수아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수 11:16-20 은혜 받을 자


요 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라면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다른 구절은 외우지 못한다고 해도 이 구절만큼은 외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말씀인 반면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3:16절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셋째,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 3:16절의 말씀을 이 세 가지 안에서 이해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이 세상을 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그 사람을 멸망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말하면서 될수록 많은 사람을 교회로 오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구원 얻을 자가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무시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실만한 능력이 없으시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분명 그 뜻을 스스로 이루시고도 남으실만한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굳이 인간의 전도 기술을 빌리지 않는다고 해도 능히 이루실만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구원 얻을 자가 구원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우리가 전도하지 않음으로서 구원받지 못할 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자는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해버리면 결국 인간이 전도해야 할 이유와 목적과 명분이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로서 전도를 강조할 명분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곧 부흥에 크나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인해서 모순을 안고 있음을 알면서도 전도하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의도보다는 교회에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심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 부흥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성경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인간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을 자는 따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택한 자라고 말합니다. 엡 1:4절을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란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즉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자는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3:16절에서 말하는 '세상'이나 '누구든지'라는 것은 세상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 5:21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자기의 원하는 자가 따로 있음을 말씀합니다. 원하는 자를 예수님이 살리시는 것이지 우리가 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믿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요 3: 35-36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역시 누구나 믿으면 영생을 줄테니까 영생을 얻고 싶으면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택했다는 말씀과 어긋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문제를 우리 소관이 아니라 주님의 소관으로 생각하면 택한 자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믿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에게 만물을 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는다, 순종한다, 영생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함 받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자라면 그는 곧 성공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을 인생의 최고의 성공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찾는 것이지 누구든지 교회로 끌어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택한 자만 듣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들었다고 해서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주어져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조차도 인간의 의지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을 받은 자만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이 제대로 증거 되어지는 현장에서는 깨닫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복음이 있는 자리에서는 누가 택한 자인가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자기를 보지 않고 교회도 보지 않고 복음만 전하는 사람으로 세워진 것이고 목사가 교인을 사랑하는 사랑은 오직 복음만 진실 되게 드러내는 것으로 증명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도 아무나 믿으면 구원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믿게 된 자만 영생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성경을 이렇게 복잡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까? 누가 보고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일부러 오해하고 착각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록한 성경같이 보여집니다. 진짜 복음은 인간의 오해 뒤에 감추어져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성경을 보고 깨달아서 구원을 얻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만약 성경이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말씀으로 남겨졌다면 '택한 자' 라는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아무나'가 중심이 되버릴 것입니다. 택한 자만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택한 자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말씀이라면 택한 자가 아닌 자들에게는 말씀은 언제나 걸림돌이요 장애물로 존재해야 당연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이 이해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해하고 말하는 신의 사랑은 차별이 없고 구별이 없는 사랑입니다. 모든 자를 사랑하시고 천국 보내시는 것이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에 대해서 세상은 귀를 막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사실이고 영생에 대한 불변의 원칙이며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선택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18-20절에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 바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나안 거민들이 진멸을 당한 것을 그들의 죄의 결과로 생각을 합니다. 기브온 거민들처럼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하지 않고 자기 힘만 믿고 버텼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진멸을 당했다고 생각해 버리기 쉽습니다. 기브온 거민처럼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하면 되는데 왜 안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진멸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가나안이 항복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결과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 상식에 이해가 되어질 것입니다. 가나안을 진멸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라기보다는 그들의 행동의 결과라고 해야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손상이 가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변호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은 가나안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는데 그들이 항복을 하지 않고 대적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진멸했다고 해버리면 모든 문제가 막힘이 없이 풀려갈 수 있을 것인데,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인간을 곤혹스럽게 하고 난처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또 20절 하반절에 보면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진멸 당함은 가나안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온 것이 괘씸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이 강퍅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러 온 것이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면 결국 가나안이 이스라엘과 싸우게 된 그 책임은 여호와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싸우게 해놓고 진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횡포라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하나님의 횡포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사랑과 자비하심은 하나님의 자존심이고 또 교회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과 같은 부분은 인간의 상식에 이해가 되도록 합리화시킬 수 있는 말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 있는 교회로 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다 인간 중심의 생각입니다. 이러한 인간 중심의 생각에서 '하나님은 나쁜 인간은 벌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착한 인간은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착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도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반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인간이 착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반발하지 않는 인간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당장 오늘 본문을 대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가나안 사람을 이스라엘과 싸우게 해서 진멸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을 보면 비참함에 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굶주림 속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누구나 혀를 찹니다. 그러면서 결국 하는 말은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게 하시느냐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반발입니다. 인간의 얄팍한 윤리와 도덕과 양심과 감정과 동정심까지 다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에 반발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세상의 누가 이해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은 착한 사람이 없고 모두가 진멸을 당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멸하실 자를 진멸하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가나안을 진멸을 하기 위해서 그들이 은혜를 입을 수 없도록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저주받은 자 되게 하셨다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결국 진멸에서 벗어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는 가나안이 은혜를 입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은혜를 입을 자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곧 택한 자입니다. 오직 택한 자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택함 받지 않은 자들은 은혜를 얻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롬 9:15-16절에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합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은혜를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쓰고 열심을 낸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엡 2:8절에서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인데, 은혜를 주는 자도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나 양심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사람이 믿고 싶고 은혜를 받고 싶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반발을 합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원한다고 해도 받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그리스도를 믿고 싶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싶어하는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가신 길을 나도 따라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신 길이 인생의 성공이 있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적으로 볼 때 실패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것만 소망하고 산다는 것을 반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 역시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는 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자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인데 누가 이 은혜를 사모하고 받고자 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직 택한 자만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받지 아니한 자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싶고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성령 받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믿고 싶어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세상의 상식과 맞는 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을 복되게 해주고 착하게만 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주고 열심을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내려주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러한 신을 찾고 있고 그러한 신을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지 않은 모든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모두가 진멸을 당해야 할 존재입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한 인간은 하나님의 세상을 망치고 더럽게 하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가나안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이스라엘과 싸우게 함으로서 그들을 진멸 시키는 모든 일은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겠다는 것은 이미 모세 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앞에 가나안이 등장을 하고 그들을 진멸하게 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진멸하면서 우리 역시 진멸 당할 자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가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도 역시 우리들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멸을 당해야 할 우리가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그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니까 받은 티를 내야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물론 은혜를 받았으면 그 표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에 대한 봉사나 열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나는 주님의 은혜로 주를 믿게 되었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만 자랑하고 주님만 높이게 되는 것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써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린 다만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높이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만 높인다는 것은 성령 받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자기 행위를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랑할만한 일을 내 해놓고도 그것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열심을 내고 봉사하는 것은 성령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과 교회에 대한 일을 통해서 택한 자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되어진 것, 그것은 주님만 높이는 것입니다. 그가 택한 자이고 이런 이유로 인생의 성공자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자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인생의 성공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에 부자도 있게 하시고 열심히 봉사하는 자도 세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역시 교회에는 돈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해' '역시 교회는 열심 있는 사람이 많아야 부흥돼'라는 생각을 가짐으로서 성령을 받지 못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입을 조건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입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령을 받은 자는 주님의 은혜만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의지하고 인간의 힘을 더 의지하는 강퍅한 마음을 성령이 다스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한 듯 했는데 돈 많은 사람을 다른 교회로 가게 하심으로서 결국 인간을 의지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속에서도 하나님의 택한 자는 보석같이 빛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님의 은혜만 자랑할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진멸을 당해야 마땅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믿음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가장 귀하고 값진 선물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데 무엇이 또 부족합니까? 긍휼히 여김 받고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성공입니다

 

 

 

 

 

수 11:20 선택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 즉 로마서 9장의 말씀대로 긍휼히 여길 자와 불쌍히 여길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택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를 찾아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바쁜 와중에서도 철저하게 주일을 지키고, 없는 가운데서도 십일조를 열심히 하고, 시간에 쫓기면서도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 앞에서는 수포로 돌아가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귀를 막아 버리고 선택의 부당성을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선택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에 대한 하나님의 확정이라면, 그리고 그 확정이 인간이 태어나기 전, 다시 말해서 착한 행동 악한 행동이 있기 전에 이미 완료된 확정이라면 도대체 선택 앞에서 인간의 행함을 언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을만해서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은혜를 받을만한 행동이 있기 전에 이미 은혜 받을 자를 하나님이 확정하셨다면 결국 내 행위와는 상관이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긍휼이고 은혜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판단합니다. 즉 긍휼을 입을 자, 사랑을 받을 자, 은혜가 주어질 자, 이 모든 것의 근거를 자기 행위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만해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만한 착한 행위와 신앙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고 복을 주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 스스로 자기를 선택하는 인간 방식입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에 대한 선택을 스스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행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선택의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착한 행동, 신앙적인 행동들을 안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하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인간적 사고방식을 폭로시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선택의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어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의지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 행위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근거와 조건을 인간의 행동에 둘 때, 자연히 인간 행동은 둘로 구분됩니다. 즉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종교적인 모든 행동을 선한 것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또한 종교에서 말하는 선의 의미가 포함된 모든 행동 역시 선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즉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등등의 종교적 행위, 그리고 종교에서 말하는 선의 의미가 들어 있는 남을 돕는 행위 등이 선한 행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이 선한 행동이 있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기독교이지 않습니다. 다만 종교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사랑의 원칙은 신의 일방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인 선택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동을 보고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벌줄 자는 벌준다는 것이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상식은 선한 자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때로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며 살았던 사람이 뜻하지 않은 변고로 고통을 겪거나 죽게 되었을 때 '왜 나쁜 사람은 가만히 두고 착한 사람을 죽게 하느냐?'고 하면서 하늘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착하다고 생각하고 복을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고통으로 밀어붙이고 또 죽게도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에 반발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 죄악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를 무로 돌려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의 선택은 행위를 근거로 해서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규정하게 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인간의 선택이 교회 안에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행위를 근거로 하면 필히 행위가 있는 자는 자연히 강자의 위치에 있게 되고 행위가 없는 자는 약자의 위치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위가 있는 강자에 의해서 행위가 없는 약자는 신앙도 없고 교회에 도움도 되지 못한 자라는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헌금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 유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더 우대 받게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행위가 없는 사람은 단지 교회 자리만 채우는 자로 전락될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종교 활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부정해 버립니다. 그 어떤 긍정적인 평가도 내리지 않습니다.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나 바램도 철저히 무시해 버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생을 교회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돈을 쏟아 부으면서 교회를 향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자기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열성입니다. 이 열성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가나안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을 진멸하시기 위함입니다.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고 이스라엘과 싸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은 은혜를 입지 못할 자로 이스라엘은 은혜를 입을 자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은 진멸을 당할 자로 이스라엘은 진멸에서 구원받을 자로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고 못받고의 근거는 가나안에도 이스라엘에도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일 뿐입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선택된 것부터가 이스라엘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밀쳐 내려고 했고 애굽에서 안주하면서 자신들의 평안을 꾀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애굽의 힘을 더 믿고 의지했던 그들인데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구원의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나안은 밀쳐내고 이스라엘은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지 못한 가나안이 진멸을 당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선이 전혀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얼마든지 자기들끼리 연합해서 서로 도우며 잘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제도 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착한 일을 얼마든지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진멸의 대상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지 못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은 잘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 되어서 가나안을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잘나서도 아니고 선한 행동을 해서도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강퍅한 마음을 하나님이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셨기 때문이지 이스라엘 스스로의 열성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진심으로 이스라엘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잘난 것이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주어진 은혜 덕분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이러한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옴으로 인해서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분명히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빼앗아서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좋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을 진멸한 것으로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답은 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셨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셔서 잘 살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애굽을 나오게 하신 목적이었다면 굳이 사람이 사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다른 땅도 얼마든지 줄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나안 땅을 주셔야 한다면 가나안을 진멸하지 않고 같이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함께 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애당초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실 때부터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이 안쓰러워서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또 고생하는 민족이 이스라엘 하나뿐이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을 차지하고 풍족하게 잘살아가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세상이 왜 진멸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드러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나안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이스라엘과 싸우게 하시고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해서 그들을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두는 가나안과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전체의 문제이고,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의 싸움이 곧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현실을 알아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현실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전쟁입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이 만났을 때 나타난 현상은 전쟁입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린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가나안 쪽에서 자기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힘을 연합하고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신앙의 전쟁이란 내가 일부러 적을 찾아 싸우러 가지 않아도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싸움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타협을 했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될만한 조건을 내쪽에서 감춰버렸기 때문에 싸워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앙은 전쟁입니다. 이것은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않은 자가 함께 했을 때 필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에는 전쟁을 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단지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다됐다고 여겨버립니다. 싸운다고 해도 기독교와 반대되는 타종교나 미신들과 싸우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내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 이웃 교회와 경쟁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또는 주일에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가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과의 싸움으로 연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은 전쟁이 아닙니다. 신자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타종교와 대립하거나 타교회와 경쟁하거나 주일에 교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유혹을 물리치는 식의 싸움은 모두가 자신의 종교적 자존심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을 위한 싸움이지 여호와의 전쟁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심으로 전쟁이 있게 하신 것은 말씀드린 대로 은혜를 입은 자는 살지만 은혜를 입지 못한 자는 진멸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은혜를 입은 자이고 누가 은혜를 입지 못한 자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는 은혜를 입은 자이고 선택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 자는 은혜를 입지 못한 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행위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선택의 근거를 자기에게 두지 않습니다. 다만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고백만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행위만 의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에 대해서 반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포기를 못했다는 것이고, 행위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자랑하게 되고 그 행동을 자기의 의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사랑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밀쳐지고 짓밟히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전쟁을 하시고 진멸하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진멸을 당한 자의 특징은 신자보다 더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의 행위와 스스로의 의지와 힘을 믿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은혜를 입은 자로 모이는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만 높이고 주님의 은혜만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 높여지기 위해서는 필히 인간의 행위는 무시되어야 합니다. 행위를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과 자랑은 모두가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의 전쟁이란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은혜가 짓밟히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것이 곧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죄인된 인간의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행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전쟁에 참여된 군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은 여러분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지키는 군사로 쓰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불교와 싸우고 무당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무조건 내 편이 되버립니다. 신자의 전쟁은 종교와 종교의 싸움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와 자기 힘으로 사는 자와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불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를 깨우쳐서 부처가 되고자 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와의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애당초 은혜를 입지 못하고 저주 속에서 진멸을 당할 자로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했다면 저주 속에서 진멸을 당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을 자로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저주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긴바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은혜 입을 자로 택하신 것은 은혜가 아니라 자기 힘과 기술과 능력을 의지하고 자기 행위를 앞세우며 자기를 자랑하고 마치 자신이 잘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세상을 향해서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살리고 있었노라고 마음껏 자랑하고 떠들어라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택받은 자라는 증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과 은혜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 힘으로 사는 자와는 전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과 자비하심이 하찮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밀쳐냄을 당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치고 박고 싸우라거나 말다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힘으로 살고 힘을 제일로 여기고 힘을 자랑하는 이웃 앞에서 끝까지 은혜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드러낸다는 것은, 나도 역시 악한 자이고 저주 안에 있어야 할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복안에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웃에게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을 내가 이겨야 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실수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가지고 대화를 하다가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기어코 내가 저 사람을 이겨서 굴복시키고 말겠다는 의도가 있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를 보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상대방을 내 아래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보여주는 도구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이웃을 경쟁의 대상이나 내가 지배하고 굴복시킬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전쟁입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은 이웃을 굴복시키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셔서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긴바된 은혜를 아는 신자는 이웃을 섬김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전쟁이라는 이 현실에 충실하기 바랍니다.

 

 

 

 

 

수 12:1-24 일치된 감사


감사는 고마움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런데 고마움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감사 역시 구구 각색일 수밖에 없고 감사의 질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감사하고 있는데 똑같은 일을 두고 저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의 질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감사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고 감사의 이유 역시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교회가 추수 감사절로 드리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옛날 청교도 사람들이 미국 땅을 발견하고 첫 곡물을 수확한 것에 대해 감사했던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것인데 그것을 모든 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정해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절을 특별히 정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 많이 갑니다. 즉 일년 중 특별한 날을 정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겠다는 그 의중에 과연 뭐가 숨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평소에는 전혀 감사를 안하다가 특별한 날을 정해서 그날에 일년치 감사를 모두 하겠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감사절에 드리는 감사헌금이 평소에 드리는 감사헌금보다 액수가 많은 이유가 바로 그런 의중에서 나온 것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주일이기 때문에 더 많은 감사를 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추수감사주일은 일년동안 받은 것에 대한 총결산이기 때문에 감사주일의 감사 한번으로 일년 동안의 모든 감사가 청산된다고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길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감사절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교회들의 감사가 앞서 말한 대로 구구 각색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말하고 똑같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사의 질은 교회마다 교인마다 다릅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 역시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감사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수능시험이 끝났습니다. 그 결과를 두고 희비가 엇갈릴 것입니다. 점수가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의 집안은 기쁨과 즐거움에서 저절로 많은 감사를 하게 될 것이고, 점수가 많이 나오지 못한 자녀의 집안은 암울한 기운이 가정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정이 감사절에 똑같이 감사헌금을 했다고 했을 때 과연 그 감사의 질이 같겠습니까? 같을 리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점수가 많이 나오지 못한 자녀의 집안은 감사할 기분이 아닌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감사헌금을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할 형편이 아닌데도 나는 감사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내 자녀가 점수를 못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로 신앙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속마음에는 '하나님 제 자녀가 시험을 못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사를 합니다. 저의 이러한 신앙을 높이 보신다면 복을 주십시오'라는 반감이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감사의 질이 다르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다르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이란 말은 같지만 서로가 각기 다른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께 하고 있는 감사의 실태입니다. 감사에서조차 서로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적게 받았고 너는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같은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자의 감사와 가난한 자의 감사가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수능 점수가 많이 나온 자와 적게 나온 자의 감사의 질이 다르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은석교회도 여러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기 전에 우리가 서로 같은 질의 감사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내 형제가 드리는 감사가 일치된다면 은석교회는 진심으로 한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질의 감사로서 여호와를 높이고 찬양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어놓은 감사와 다른 사람이 내어놓은 감사가 다르다면 은석교회는 교회라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 제 자식이 공부를 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면 자식이 공부를 못한 부모는 그 감사에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다른 질의 감사를 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내가 감사하는데 문제될 것이 있느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에베소서 4: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또 이어서 몸도 성령도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님도 하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결국 한 하나님 아래서 감사도 하나로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같은 질의 감사란 어떤 감사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했던 전투를 다시 상기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11:23절에 보면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온 땅을 취함으로 전쟁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시 12장에서 지나간 전쟁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단강을 건넌 후에 있었던 여호수아의 전쟁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전쟁도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겠다는 것입니다.

 

 

 

 

1-6절까지는 여호수아가 전투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전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7-24절까지는 여호수아가 전투한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후의 전투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전투부터 언급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투만 언급하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싸워서 승리한 전투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감사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들고 감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했든 말든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고 나는 내 전투를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된다는 생각이 바로 각기 다른 감사의 질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감사가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를 하는 것이 대부분 교회들의 실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감사를 서슴치 않기 때문에 감사절만 되면 소위 복을 받은 사람들은 기가 살고 의기 양양한 모습으로 두둑한 봉투를 내어놓을 수 있지만, 소위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힘든 일만 가득 터진 사람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고 축 늘어진 어깨로서 마지막 신앙의 자존심을 세워보고자 마음에도 전혀 없는 봉투를 내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감사란 억지 춘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모세가 요단 동편을 정복한 일과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된 일을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지 너희 인간들이 나서서 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읍의 정복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땅을 차지하게 하신 것이지 인간의 능력과 군사력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 모세의 전투와 여호수아의 전투를 다시금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일을 생각한다면 가나안 땅을 정복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가나안 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으로 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없을 때는 감사 역시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평생을 가나안 땅을 주신 것으로 감사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식상하게 되고 당연하게 여겨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회성 감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려면 또 뭔가를 이스라엘에게 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취하고 있는 감사가 아닙니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리 감사한다고 해도 일회성이며 계속된 감사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다시 감사하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는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이 있는 자에게나 없는 자에게나 하나님은 동일하게 살아 계신 분입니다. 수능시험을 만점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적게 맞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찾아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은 각각이고 감사도 각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 3:21-22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가 목도하였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즉 요단 동편에서 하나님이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정복하게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 역시 정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투에서 승리하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두려워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수 1:9절에서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단 동편에서 두 나라를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믿고 의지했던 모세 없이도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간이 없이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결코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 계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의미에서 12장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단을 가운데 두고 모세가 여호수아로 교체되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고 광야를 지나면서 수많은 이적으로 자신들을 이끌었던 모세이기에 모세가 자신들과 함께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되어진 것은 모세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고 요단을 건넌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은 모세가 없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있든 없든 여호수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시행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참된 이스라엘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확실한 믿음의 대상이 없습니다. 비록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믿는 것은 사람이고 돈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보다는 부자가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을 더 마음 든든해하지 않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 교회에 부자를 보내심으로 발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히 확인하십니다. 누가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종인지를 하나님은 확인해 가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감사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치된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시험을 잘봤든 못봤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주님 역시 살아 계십니다. 천국 역시 변함 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같은 해 아래서 살아갑니다. 같은 달을 보고 살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힘을 쓰며 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소유를 가지고 감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요단 동편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으로 마음 든든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받은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 13:1-7 늙으매


인간이 낙심을 하고 교만해지고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소망을 가지고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을 생각할 때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 계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많다 적다'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신앙이 우리들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을 100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50을 줬겠습니까? 만약 그리스도께서 신앙을 적게 줘서 신앙이 나쁘다면 신앙이 나쁘다고 해서 그 사람을 탓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신앙을 주실 때 누구는 많이 누구는 적게 차별되게 주신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이 나쁜 책임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앙은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신앙을 어떻게 관리하고 계발했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성경은 흔히 말하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를 보면 각각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많이 남긴 사람은 많이 받은 자였고 적게 남긴 사람은 적게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받은 것을 땅에 파묻어 버린 종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받은 것을 땅에 파묻고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현재의 신앙을 그냥 파묻어 버리는, 즉 신앙이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교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것을 묻어 버리지 않고 열심히 그것으로 장사했다면 과연 얼마를 남겼을까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남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많이 남겼느냐를 따진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누가 충성했느냐는 것은 누가 많이 남겼느냐를 비교해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단지 주인이 오실 것을 생각하고 주어진 것으로 열심히 장사했다는 것만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나쁘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하지만 그 질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에 질 나쁜 신앙 질 좋은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까? 신앙은 있다 없다로 판단되는 것이지 좋다 나쁘다로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 남겼기 때문에 좋은 신앙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따질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소위 좋은 신앙을 보여줄 여건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상에 차이도 없습니다. 만약 남긴 다섯 달란트를 상으로 받은 것과 달란트를 받은 것을 상의 차이라고 말한다면 이것 역시 공평하지 못한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만약 상에 차이가 없다면 신앙에도 역시 차이가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좋은 신앙 나쁜 신앙이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별될 뿐입니다.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발 신앙이 좋은 사람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되려고 할 때 나오는 것은 종교행위입니다. 종교행위가 많을수록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단지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신앙이 있는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지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일 뿐입니다.

 

 

 

 

제 말이 쉽게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신앙을 다만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사는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고 하지말고,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신앙의 흔적을 찾자는 것입니다. 행위에서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고 할 때 꼭 나타나는 것은 신앙생활 하려고 행동하게 됩니다. 즉 주님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의식한 행동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게 되고 자기와 같은 행위가 없는 자나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 자는 신앙이 좋지 못한 신자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물을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느냐 아니면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느냐이지 내 신앙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우리식대로 신앙을 판단한다면 결국 신앙이 좋아서 받게 되는 상은 건강 있고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거나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되고 싶어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공평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이 좋으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즉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했느냐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사느냐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에 돈이 있어야 합니까? 건강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있어야 합니까? 숨만 쉬고 있고 의식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러한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는 얘기가 본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 12장에서 모세의 전투와 여호수아를 전투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전투에서 승리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여호수아로 하여금 내가 전쟁을 잘해서 승리했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같이 함으로서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가나안 정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2절부터 보면 남은 땅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는 시점에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 받은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아 늙었다는 것은 기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에 앞장서서 가나안과 싸우며 정복할 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시 여호수아의 후계자를 내정한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를 대신 할 사람을 내정하지도 않은 상태인데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고 또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근심거리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데 이제 누가 앞장서서 그 명령대로 가나안을 정복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근심일 수 있고 이스라엘의 근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근심으로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의 여건과 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다면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아마 막막한 심정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 라는 근심이 그 마음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이란 인간이 자기를 바라볼 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자신에게 전혀 없을 때 근심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있는 여호수아에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6절에 보면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이 많아 늙은 여호수아에게 아직까지 정복해야 할 많은 땅이 남아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이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어서 싸울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가나안과 전투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명령대로 전투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자가 잘못 오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인간은 그 명령을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면,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인간이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여건이 되었을 때 명령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나이 많은 여호수아 대신 다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시겠다고 말씀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명령이 계속 이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교를 명령하셨고 그 명령대로 선교하기 위해서 떠났다면 언젠가는 나이 많아 늙어서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사람을 세우셔서 계속 이어가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 한마디는 '너 자신을 보지말고 나를 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늙고 병든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자신이 늙었다는 것이 근심거리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늙은 것과 상관없이 내가 힘이 없다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여호수아가 그 명령에 순종해서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서 나눌 뿐입니다. 6절 말씀대로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고 하시지만 분배할 땅은 여호수아가 싸워서 얻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신의 여건을 바라보며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들어 늙은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여호수아에 상관없이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여건과 힘을 생각하고 근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신앙이 있는 신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앞으로의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앞으로 일에 대해서 염려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승리를 자신의 힘으로 얻은 승리로 생각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모세도 아니고 여호수아도 아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지도자로 이스라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그는 절대로 인간을 의지하거나 인간을 지도자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의지할 만한 여건과 힘과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재주가 있다든지 아니면 돈이 있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권력이 있다든지 어느 것 하나라도 내게 없는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의지하는 자가 힘을 잃어버렸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의지할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힘이 없어질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결코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가 소위 능력이 있다는 목사를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없으면 안돼'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합니다. 목사가 잘해서 교회가 이만큼 되었는데 저 목사가 없다면 교회 꼴이 뭐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우리 목사님을 더 능력 있게 하고 우리 교회를 더 부흥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해버립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지도하라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지도하십니다'라는 말을 하라고 세워진 자입니다. 세상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인정하는 목사를 세워서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이 지도자입니다'라는 말을 하게 함으로서 목사라는 사람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신자, 순수하게 하나님이 주신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땅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여호수아의 늙음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여호수아가 늙어서 전투를 더 이상 못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 모두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집니다. 결국 가나안 땅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그 땅을 축복의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힘에 의해서 얻어지는 땅이라면 축복의 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얻어지는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살기가 좋은 땅이고 곡식이 잘 열리는 비옥한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땅에서 사는 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축복의 땅은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실 땅입니다. 우린 단지 받아 누리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기둥 같은 일꾼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잘되기 위해서는 분명 일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특별히 일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필요치 않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병든 자라면 나를 병들게 해서 하나님이 병든 나를 이용하고자 하시는 것이고, 돈이 없다면 돈 없는 가난한 자 되게 해서 가난한 나를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진심으로 주님을 지도자로 여기고 모인다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모이는 교회라면 일꾼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일꾼이고 주님의 일을 하는 봉사자로 모여질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돈있고 힘있는 자가 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이 있는 자가 오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늙고 기력이 떨어진 것과 상관없이 가나안 정복은 약속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도 없으면서 '예배당을 짓자'고 하면서 '우리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게 되면 젊고 건강할 때 교만하게 되고 늙고 기력이 떨어지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젊을 때는 내가 힘이 있고 건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고, 늙어지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으며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고전 3:6-7절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심는 이 물 주는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고 물 주는 인간의 행위에 상관없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사십시오. 그럴 때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여건을 바라보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 이 신앙으로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수 14:6-15 갈렙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편만 되어주신다면 인생의 형통은 보장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축구 경기를 관전할 때 실력 좋은 외국 선수가 골을 넣을 때마다 '저 선수가 우리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인데'라는 상상을 많이 할 것입니다. 실력이 좋은 선수가 우리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시고 세상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신다면 내 인생은 탄탄대로가 될 것이 아니냐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이란 신은 인간과 호흡을 맞춰서 함께 해주는 신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뭐든지 원하는 대로 다 들어 줄 것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의 마음에 들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서 행동하는 인간은 거부하십니다. 그가 어떤 일을 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했느냐를 따지시는 것입니다. 빌 2: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들의 소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자기의 소원을 두고 행합니다. 자기의 소원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활동의 목적이 자기 소원을 위한 것인데, 그리고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인데 난데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행하게 하신다고 할 때 반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들의 유익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서 행한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을텐데 하나님의 소원은 철저하게 이 세상과 단절된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소원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항상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하는 일이 잘되고 소위 축복이라는 것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의 배후에서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좋은 것을 받고 누리는 그 사람만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것이 뭔데 나는 이렇게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해주느냐?'고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아브라함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좋은 신앙을 가지자'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삶에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개입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바울을 바라볼 때도 함께 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바울만 보입니다. 선교를 많이 하고 능력을 행한 바울만 보이기 때문에 바울이 위대한 사람이고 능력의 사도이지 바울을 바울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해서 몇 천명이 회개했다고 하니까 베드로의 그러한 능력을 탐을 냅니다. 베드로와 함께 하나님은 도무지 생각하지를 못하고 설교 하나에 몇 천명을 회개하게 한 베드로의 설교 솜씨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에게 베드로와 같은 설교 능력만 주어진다면 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는 탐욕과 함께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만 되어준다면 내 교회 편만 되어준다면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 것이니 말입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보이는 것을 서로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마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빠진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오직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과일이 보였을 뿐입니다. 이러한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 바로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그러한 속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역시 아담의 실수를 반복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마음에 확 들어오기 때문에 세상은 보여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돈은 보여도 생명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생명을 볼 수 있느냐?'는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 생명이 있는 자는 생명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실제 우리의 눈으로 본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신의 눈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것이 육신의 눈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봐도 바울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같이 봅니다. 베드로를 봐도 베드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함께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도 베드로처럼 몇 천명을 회개하게 할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 역시 회개한 몇 천명의 사람만 보는 것이지 하나님은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보이는 것에 매료되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의 것, 즉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것들이 자신의 곁에 있을 때는 마음 든든해하며 살아가지만 보이는 것이 없으면 허전해하면서 주님을 원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행복하고 평안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주님이 함께 있는 증거를 엉뚱한데서 찾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있고 보이는 것이 채워지는 것을 통해서 '주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려고 하고 예수 믿는 재미를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인 인간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면 그것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아가는 인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부분에서 '담대하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대신에 여호수아를 앞장세우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실 때 말씀하신 첫 마디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여호수아를 기다리는 것은 전쟁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모두 진멸해야 하는 전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관건은 군사력에 있습니다. 잘 훈련된 군사, 무기, 힘 이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승리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전쟁에서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조건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40년을 광야에서 떠돌았기 때문에 군사훈련을 제대로 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힘은커녕 지칠 대로 지친 그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쟁을 한다 해도 승리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책임져야 할 여호수아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힘을 보지말고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패배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하지 말고 상대방이 강하고 힘이 있어 보인다고 해서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보이는 세상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물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는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보다는 하늘의 것이 더 좋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천국에 의해서 내 마음이 사로잡힌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그 마음이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갈렙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고 이제 취한 가나안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유다 지파 중에서 갈렙이 나와서 기업을 분배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나에게 기업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기업을 분배할 때 방법은 제비뽑기입니다. 14: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비를 뽑아서 기업을 분배하라고 하신 것은 분배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분배의 주관자가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비를 뽑아라는 것은, 내 것을 내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대로 받아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땅이 있으면 좋지 않은 땅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제비를 뽑는다면 좋은 땅이 걸린 지파는 좋아하겠지만 좋지 않은 땅이 걸린 지파는 투덜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굳이 제비를 뽑아라고 하신 것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지파들간의 분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비를 뽑아서 각자의 소유를 결정한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것이라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서로 나누어야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제비뽑기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라고 하신 것은, 가나안 땅은 너희들 소유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힘으로 취한 땅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제비뽑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갈렙은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기업을 얻을 땅을 지목을 하는 것입니다. 제비를 뽑아서 분배해야 할 땅을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스스로 지목하여 취한다는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반발을 살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전혀 반발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갈렙이 지목한 땅이 이스라엘이 보기에 전혀 욕심을 일으킬만한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말씀합니다.

갈렙이 요구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이 아닙니다. 헤브론에는 아직 아낙 자손들이 있습니다. 아낙 자손은 체구가 거대한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누가 과연 이 땅을 차지하고자 하겠습니까? 제비뽑기를 해도 그 땅이 자기들에게 걸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갈렙은 그 땅을 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렙이 왜 굳이 헤브론 땅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낙 자손과 싸우기를 좋아해서입니까? 이것은 과거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의 사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갈렙은 바로 그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가데스바데아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합니다. 9절에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과거 열 두 영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열 명의 사람들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든 상관없이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들어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가나안 땅의 족속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가나안 족속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갈렙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4)고 합니다. 즉 갈렙은 이미 자신이 기업으로 얻을 땅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제비 뽑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갈렙이 정탐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브론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이 곧 내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헤브론 땅에는 건장한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결국 헤브론 땅을 취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전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자신에게 약속한 땅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차라리 제비를 뽑아서 저 땅을 기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연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아주 당당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신 땅을 내게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건장한 아낙 자손과 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45년 전에 모든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모세를 원망하던 것과는 달리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14:9)고 외쳤던 갈렙의 믿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가나안의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갈렙의 믿음이 45년이 지나서 85세의 나이가 된 지금에서도 여전히 갈렙에 의해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면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라고 말합니다. 갈렙이 가나안을 정탐한 때가 40세입니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85세가 되어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85세면 이미 늙은 나이입니다. 기력이 다 떨어진 나이에 건장한 아낙자손들이 있는 헤브론을 달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에게는 아낙자손들이 건장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 위대하게 보일 뿐입니다. 아낙자손들의 체구가 얼마나 크든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면 저 땅은 우리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갈렙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렙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13절에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라고 말합니다. 갈렙을 위해 축복했다는 것은 갈렙이 힘을 얻어서 아낙 자손을 이기기를 기원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갈렙과 같은 그런 믿음이 곧 축복 안에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것을 바라고 하늘의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복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의 복의 상태는 세상이 보기에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복이란 손쉽게 세상의 것이 자기의 손에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갈렙을 기다린 것은 건장한 아낙자손입니다. 더군다나 아낙 사람가운데서도 가장큰 아르바 사람들이 갈렙을 기다립니다. 갈렙은 그들과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갈렙이 가고자 한 길은 자신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편한 길로 가기를 애를 쓰는 것이 사람인데, 오히려 고생이 되는 길로 가겠다고 나서는 갈렙이 정상으로 보여지겠습니까?

 

 

 

 

하나님이 갈렙에게 남겨 놓으신 길은 편한 길이 아니라 힘든 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겨 놓으신 신앙의 길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길은 절대로 편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기도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이 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 받는 자는 언제나 보이는 것과 싸우는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고난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 것에 기죽지 않고 약속된 하늘의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생명을 보여주는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수 15:13-19 필요한 것


지난 주일에 세상이 보인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인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보이는 세상을 사는 것은 사실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면 자연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내 소유로 만들어야 비로소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보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좋은 차를 굴리는 사람들이고 좋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연 마음속에는 나도 저처럼 살아봤으면 하는 욕심이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족한 줄 알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돈이 있어야 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족한 줄 알아라는 말은 세상을 전혀 모르는 말이고, 아직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모르고 돈이 힘이 되는 현실을 몰라서 그렇다고 치부해 버립니다.

 

 

 

 

세상은 온통 보이는 것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싸움터입니다.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온갖 발버둥을 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돈에 대해서 초월할 자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돈의 힘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예수께 대한 관심까지 포기하게 해 버릴 정도로 돈의 힘은 강합니다. 돈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인간이 누구이겠습니까?

 

 

 

 

교회가 예배당을 짓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예배당을 짓습니까? 믿음이 땅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예수님이 예배당 짓는데 무엇을 보태주겠습니까? 예배당 건축에 필요한 것은 돈이기 때문에 돈 많이 바칠 교인이 필요하지 예수님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결국 돈많은 교인이 하나님이 되버립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부자가 교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돈이 보입니다. 돈만 있으면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이것저것 좋은 것은 다 할 수 있을텐데 하면서 돈 없는 내 교회의 현실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회, 그러면서도 교회라는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경을 펼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 오직 자기 필요에 의해서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는 교회, 이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했을 때 필요한 것은 선악과였습니다. 선악과는 먹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냥 먹으라고 주신 것을 먹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가고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냥 먹는 것입니다. 따라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는 인간에게 주지 않은 것이기에 안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자기 스스로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스스로 목표를 가졌다는 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뭔가를 필요로 하는 인간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스스로 목표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선악과가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선악과를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이 바로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운 채 살아갑니다. 자기 목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히 있어야 할 것이 있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남을 짓밟아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심지어는 남의 입에 들어있는 것까지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고 그것을 능력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로 살고자 할 때 곤란하게 여기는 것도 내가 추구하는 예수님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못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는데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난감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런데 성경은 십자가와 세상을 반반씩 적당히 나누어서 쫓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갈등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실력이 있어야 하고 돈이 필요한 이 세상에서 예수님 한분만 주장하고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세상에서 실패하고 나약한 자로 전락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만 먹고산다는 것이 뭔가 못마땅하게 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못된 성품이고 아담이 보였던 실수를 오늘 우리가 똑같이 자행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매달려 허우적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울고 웃으면서 모든 인생의 가치를 보이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내시는 아들도 목수의 아들로 보내신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볼뿐이지 하나님으로 보지 않을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는 타락된 성품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았던 세상이기에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들의 죄는 자신들의 힘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지내고 금식하고 십일조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 충분히 죄가 해결되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라는 사람의 피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의 피가 아니라 제사고, 우리들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십니까?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 묻는 것은 천당 가기 위해서 필요한 분으로만 인정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수님만을 필요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볼 때 가능한 일입니다. 즉 세상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판단했을 때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 그 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갈렙이 자신의 딸을 옷니엘에게 시집보내는 내용이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는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옷니엘이 기럇 세벨을 쳐서 취하게 되고 약속대로 악사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18,19절에 보면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악사가 갈렙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시집간 악사가 갈렙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나귀에서 내릴 때 갈렙이 악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마 악사가 나귀에서 내린 것은 뭔가 자신에게 요구할 것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악사는 갈렙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물음에 대해서 '아버지가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니 샘물을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왜 악사는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하였겠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샘물은 하찮은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요구한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악사는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남방 땅이란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입니다.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이라면 물은 필수적입니다. 많은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사는 자신이 살 지역에서는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악사의 요구에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악사에게 줍니다. 윗샘과 아랫샘은 높은 지역에 있는 샘과 낮은 지역에 있는 샘을 말합니다. 즉 높은 지역의 땅이든 낮은 지역의 땅이든 물로 인해서 어려움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악사가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악사는 자신이 살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았습니다. 메마르고 건조한 땅이기 때문에 그 땅에 필요한 것은 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악사는 갈렙에게 '내게 복을 주소서' 라고 하고서 요구한 것은 샘물이었습니다. 악사에게 있어서 복은 메마른 땅에서 자신들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생명 되는 것은 물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세상은 생명 되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목표와 소원을 이뤄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살면서도 세상이 어떤 땅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남보다 성공하고 자랑할 것이 있는 모습으로 존재하기만 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갈 2: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모든 근거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보는 세상은 심판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받기로 이미 작정되어진 땅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심판에서 생명 되는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가 세상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눈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들면 그것을 단지 축하할 일로만 보지만 예수님은 심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이미 심판 속에 있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결국 심판을 의식하지 않는 모든 삶은 심판 때까지 잠시 유보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돈 벌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돈 번 재미도 심판 때까지 잠시 허락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만 보입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돈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체인데, 이 세상 속에서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산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예배당이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자식이 심판을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우리로 하여금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에서 생명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만 보고 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피가 나에게는 생명이고 주님이 곧 나에게 생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세상을 보이는 대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지혜이고 사는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무시하고 세상만 보고 사는 사람은 결국 마귀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멍이 나서 침몰하는 배에서 한가롭게 춤추며 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고 집이 아닙니다. 구명보트 하나입니다. 배가 침몰하지 않을 때는 눈길도 돌리지 않던 보트인데 침몰하는 상황에서는 생명선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할 것을 미리 안 사람이라면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야 춤을 추고 놀든 말든 상관없이 구명보트를 확보하고 그것을 붙들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다시 올 때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먹고 마시고 밭에서 일을 하고 살아가지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하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안다면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시각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에 옆사람이 수확한 것을 바라보게 되고 나보다 많이 소유하게 된 것을 시기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목표한 대로 열심히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음을 인정하신다면 심판 속에서 생명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리스도의 피에 모든 소망을 두고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심판의 세상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오늘 이시간 심판의 세상에 보냄을 받고 멸망의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기도 제목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돈 없이 살고 남보다 부족하게 사는 것으로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여기고 생명이 나에게 계신 것으로만 감사하지 못하는 자신의 못남 때문에 애통해 하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장차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을 전하라고 뽑힌 자입니다. 돈도 아무것도 아니고 성공도 헛된 것이고 인생도 다 허무한 것이로되, 오직 주님이 흘리신 피만이 가치 있는 것이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라고 여러분을 신자로 뽑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 15:20 땅


요즈음 세상이 2000년 때문에 떠들썩합니다. 2000년의 시대에는 뭔가 한번 해보자고 하면서 새로운 각오도 세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교회의 비전이라든지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의 할 일이라든지,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하기도 하고 부흥회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2000년이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기나 하는 것처럼 2000년에 21세기에 매달려서 동분서주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이니 21세기니 하는 것들은 모두가 허구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00년에 뭔가 새로운 것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00년이 되는 첫날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서 동해 쪽에는 이미 모든 숙박시설의 예매가 매진되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1999년 12월 31일에 떠오른 해나 2000년 1월 1일에 떠오른 해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년전의 해나 천년 후의 해나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 해가 그 해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날짜를 계산하고 년수를 계산하다보니 년수가 천단위로 바뀌는 해에 스스로 큰 의미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교회가 창립 몇 주년 하면서 행사를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창립 행사를 하면서 내건 년수가 꼭 10단위 아니면 100단위라는 것입니다. 즉 창립 10주년, 20주년 이렇게 10단위로 하다가 50주년이 되면 더욱 크게 행사를 합니다. 그러다가 100주년이 되면 떠들썩하게 행사를 합니다. 왜 11주년은 없는 것입니까? 12주년 13주년은 없습니까? 결국 사람들은 숫자 단위가 바뀌는 것에 이상하게 관심을 두고 산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세상은 2000년 시대를 떠들고 2000년이 되면 뭔가 될 것 같은 착각에서 새로운 희망들을 가진다고 해도 교회는 그러한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됩니다. 교회의 희망은 새로운 21세기, 밀레니엄 시대, 2000년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변함 없이 그리스도입니다. 아무리 2000년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모르고 산다면 망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2000년이라는 허구에 눈을 돌리지 마시고 여기저기서 해가 바뀌고 세기가 바뀌는 것에 의미를 두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다짐을 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2000년이 되건 21세기가 되건 상관없이 심판 받을 장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심판하시고야 만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이 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1999년이나 2000년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가 바뀌든 세기가 바뀌든 관계없이 신자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집중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2000년이라는 년수에 흥분되어서 마음이 분주하다면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2000년이란 단지 숫자의 바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반복하셨을 뿐인데, 그것을 인간이 구분해서 날과 달과 년으로 계산한 것이고, 그 계산법에 따라서 숫자가 바뀐 것이 2000이라는 수까지 도달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숫자가 바뀐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떠들고 야단법석을 떤다면 과연 그들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해가 되어서 새로운 각오를 다져봐야 며칠 가지 못하는 것은 한두번 경험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인간이 2000년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뭔가 다짐을 하고 결심을 한들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꼭 2000년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다짐을 해야 실천을 할 힘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단지 인간의 느낌이고 감정일 뿐입니다.

 

 

 

 

2000년이든 21세기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세상이 창조된 이래 수없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반복되어지는 가운데서도 변함 없이 확정되어 있는 원칙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2000년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임을 마음에 굳게 세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세상이 헛된 것이고 2000년이 헛된 것임을 모릅니다. 시 144:3,4절에 보면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데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사람이 헛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것이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나만 헛것이 아니라 2000년을 기다리고 2000년에 떠오르는 해를 보겠다고 동해로 몰리는 사람들도 헛것이고 세상 모든 자들이 다 헛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자신이 헛것임을 모르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신이 헛것임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헛것임을 알기에 헛것이 아닌 것을 찾게 되었을 때, 오직 그것만 소망하고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말씀을 대하는 것은 우리가 헛것임을 발견하고 헛되지 않은 분을 알아가며 그 분을 우리 마음속에 굳게 세우기 위해서 모여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교회에서 자신의 경험으로 배운 하나님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우리들의 삶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배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성탄절이니 2000년이니 하면서 들떠 있는 분위기라고 해도, 신자는 거기에 상관하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오늘도 여전히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알고자 할 뿐입니다. 그럴 때 은석교회는 한 하나님에 대해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21세기에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게만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아가기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각 지파가 제비뽑아 얻은 땅을 분배하기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땅분배는 15장의 본문으로 시작해서 19장까지 계속되어집니다. 땅 분배의 내용을 읽어보면 사실 별 의미가 없는 말씀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유다 자손이 어느 땅을 얻었고 요셉 자손이 어느 땅을 얻었고 베냐민 자손이 어느 땅을 얻었다는 등등의 내용들이 사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껏 생각한다고 해봐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땅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축복을 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만, 도대체 이런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는 사실에 대해서는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살아갑시다'라는 말을 해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땅 분배의 내용을 단지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지나치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배워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20절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땅 분배는 오늘 본문을 시작으로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이 분배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지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고생한 것에 대한 대가이겠습니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땅을 주심으로서 축복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땅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인간에게 소출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땅이 있어야 소출이 있고, 땅이 많으면 소출도 많아집니다. 반면에 땅이 없다는 것은 소출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하고 소출이 전혀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땅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애굽 땅에서 자기들의 소출이 아니라 애굽의 소출을 얻어먹고 살았던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제 땅이 주어집니다. 소출이 없던 자가 소출이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것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땅 없는 자, 소출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땅이 있고 소출이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결론지을 얘기가 아니라 땅 없는 자에게 땅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 없는 자에서 땅 있는 자로 바뀐 것은 그들의 의지나 노력이나 재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땅 없음에서 땅 있음이 된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근거되어 있습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오기를 싫어했던 자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올 때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근거 삼아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땅은 어린양의 피로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분배하신 가나안 땅은 누구나 받는 땅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을 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에게 주어지는 땅인 것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을 모르는 이방 민족은 가나안 땅에 축복의 약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진멸 당할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분배받으면서 이것을 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왜 자신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되는지, 어떻게 해서 땅이 없는 존재에서 땅이 있는 존재로 되는지, 그리고 가나안 족속은 왜 진멸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을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얻게 된 것도 모두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덕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비록 땅이 없는 자에서 땅 있는 자로 되었지만, 결코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즉 땅이 주어졌지만 이스라엘이 땅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배받은 땅에서 살아가면서 항상 이 땅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땅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것은 이방인과 같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땅 분배는 단지 이스라엘이 곡식을 재배하고 소출을 얻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운 모습을 담아 낼 도구로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땅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축복의 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축복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주어진 것인가를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진정한 축복의 민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땅 분배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날 신자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축복을 단지 받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받아 누리는 것이 축복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았다는 것으로만 기뻐하고 즐거워 할 뿐이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누구로부터 온 것이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누구로부터 왔든 무엇을 근거로 해서 주어졌든 상관없이 그저 내가 받았다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2000년에는 좀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떠들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2000년으로 들떠 있을 때 교회까지 덩달아 들떠 버린다면 도대체 세상과 교회의 구별점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땅에서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린양의 희생 덕분에서 애굽에서 탈출하게 되었고 땅없는 자에서 땅있는 자로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한시라도 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복은 자신들의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으로 오는 것임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지파가 땅을 분배받지만 유독 레위 지파만은 여전히 땅 없는 자로 존재하게 하고 오직 제사에만 전념하는 지파가 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의 복은 누군가의 희생 덕분에 주어진 것임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얘기들이 오늘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땅 분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지 오늘 우리들에게 가나안 땅의 분배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혹 우리에게도 땅을 주겠다는 얘기는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땅 분배 얘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땅분배로 다가옵니다. 다만 다른 것은 이스라엘은 실제 눈에 보이는 땅을 분배하심으로서 가르치시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땅을 주심으로서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땅 없는 자였듯이 오늘 우리들도 땅 없는 자였습니다. 아마 땅을 가진 분들이 이 말을 들으면 '나는 땅이 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배하시는 땅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가 땅 없는 자였다는 것은 바로 하늘 나라가 없는 자였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악한 자였습니다.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악한 자였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철저히 무시한 채 오직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땅 있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와 상관없는 존재가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할 일은 축복의 근원 되시는 어린양의 희생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신약의 새 이스라엘 역시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제대로 아는 신자는 항상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어진 것에 대해서 찬송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땅을 주셨으니까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소출을 내가지고 많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해버립니다. 즉 하나님이 신자되게 하고 천국가게 하셨으니까 이제 그 보답으로 열심히 교회에 충성해서 많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요 6:29절에서는 분명히 밝히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반대의사를 표현합니다. '믿는 것이 뭐냐 교회 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믿음과 교회를 연관시키고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일을 연관시켜서 어떻게든 교회를 위한 일군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은 교회와 연관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일이 복을 끌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배받은 땅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복을 받은 자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드리는 제사는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은 희생의 피로 인해서 주여 졌음을 인정하는 행위로서의 제사가 되어야 했던 것이고, 가나안 땅에서의 소출로 드리는 십일조 역시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복안에 살아가는 자로서 이 모든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로서 드려지는 십일조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땅은 그냥 땅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땅 없는 자에게 약속으로 주어지는 땅입니다. 그럴 때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거하게 된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희생 덕분이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의 땅에서의 모든 삶은 희생으로 주어진 은혜가 표현되는 삶이고 행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아는 자로서 예수님의 은혜가 담겨서 표현되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복을 탐하는 땅이 아니라 주어진 복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깨닫고 복의 출처가 되는 분을 향해 감사하며 살아가는 땅입니다.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라 하면서 복을 탐하고 산다면 그는 신자가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신자는 주어진 복의 출처를 바라보며 감사하며 사는 자이지 복을 받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가 모이는 교회는 복을 내세워서 신자를 현혹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는 것은 어린양 희생이지 이스라엘의 노력이 아닙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살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노력이나 종교 행위가 전혀 아닙니다. 1999년이든 2000년이든 신자는 변함 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저주를 받지 않은 자 되었다는 것보다 더 큰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복은 예수님께서 피흘리셔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열매가 곧 영생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세상에서 벌어들인 것 가운데 얼마를 열매로 내어놓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맺어진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된 자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만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세상의 열매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열매를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땅에서 어린양의 희생을 자랑하며 살면 되는 것처럼, 오늘 여러분 역시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껏 자랑하며 살면 그것이 최고의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포기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최고의 자랑거리로 나타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수 16:1-10 요셉 자손


오늘날 교회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삶의 기쁨과 보람을 교인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해주려고 애를 쓰는데 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보이지도 않는 것을 막연하게 바라본다거나 의지한다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회의를 가지기도 하고 의심을 나타내기도 하고 자신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이 믿음에 대해서 회의와 의심을 가지고 교회로 나올 때 결국 교회라는 단체에 그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해주고 믿음의 삶에 대해서 보람과 기쁨을 갖도록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강조하는 것이 '자기 교회'라는 의식을 갖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라는 의식을 갖게 될 때 교회에 대한 투자에 보람을 갖게 되고, 교회의 외형적인 변화를 통해서 믿음의 현실성을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교회'라는 의식이 인간들에게 쌓여감으로서 보여진 것은 교회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인식을 해버리고, 내 교회가 쇠퇴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가 쇠퇴하는 것이고, 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잘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잘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영광 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영광 받는 것으로 인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교회와 연관되는 것일 수밖에 없고, 헌신 역시 교회와 연관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 보이지 않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세운 교회라는 단체를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마치 자기 교회에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뒤바뀌고 믿음이 뒤바뀌고 하나님의 영광이 뒤바껴 버린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결코 이 세상에서 가시화되고 현실화되어서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믿음, 은혜, 성령, 은사, 축복, 이러한 것을 자신의 삶과 몸을 통해서 체험하려고 하고 실체화하려는 시도를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교회에서의 행위들이 거의 모두 여기에 목적을 두고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교회 행사에 더 매료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수련회니 기도회니 하는 교회 행사를 하면서 손을 들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종이 쪽지에 자기 죄를 적어서 불에 태우는 행사에 참여함으로서 자신의 믿음에 변화가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을 자극해서 기독교라는 종교에 매력을 가지게 함으로서 내 교회에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공했던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일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교회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역시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역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저 막연하게 믿고 있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더욱 확실하고 사람들을 붙들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믿음을 교회 생활로, 축복은 세상에서의 소유의 증가가 성공으로, 은혜 받음은 병고침이나 인격의 변화로, 성령 충만은 열심과 봉사로 뒤바꿔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 그대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고 느낌도 없고 감정의 변화도 없고 그저 밋밋하기 짝이 없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회의감이나 의심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뭔가 은혜를 받았고 성령이 충만하다면 행동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단의 속삭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영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려는 사단의 시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애초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존재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실제 체험한 것을 진리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믿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 힘이나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어졌다면 그것이 기적이고 은혜이며 성령의 충만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살렸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이미 그것으로 믿음이 주어진 것이고 은혜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무엇을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국 믿음이 주어지지 않고 은혜 안에 있지 못한 자들이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의 믿음을 도와준답시고 교회에서의 종교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같이 지옥을 향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매료된 인간은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부정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종교 생활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눈에 보이는 종교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으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의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선민이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하나 해도 그결과가 내가 살아있는 이 세상에서 현실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고 한다면 과연 그 말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새로운 생명보다는 만원 짜리 한 장이 더 쓸모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돈입니다. 결국 오늘날도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계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포기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자입니다.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올해 달력 밑부분을 보면 이런 성구가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는 말씀을 적어 놨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해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정신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해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세상에 살아있는 그 날까지 이 정신은 여러분에게서 사라지면 안됩니다. 신자란 보이는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의 삶을 점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의미에는 또 다른 물음을 적어 놨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살고 있는가?' 달력이 눈에 보일 때마다 이 물음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인간은 보이는 것을 위해 사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자가 있습니다. 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과연 누가 진리에 속한 자인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우린 항상 보이는 것에 이끌리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여러분 자신을 점검하라고 그러한 문구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며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응에서 그러한 글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면 부자는 모두가 다 행복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자란 남보다 나은 여건에서 편리하게 산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참된 신자는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자이며,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시는 분이라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은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분명 보이는 것을 축복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들은 보이지 하는 하늘의 복도 있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보이는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과연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았을 때 그것으로 천국 가는 자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망하는 자로 마쳐지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내가 지금 당장 세상의 복을 받으면 지금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겠다'는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하겠지만, 어느 인간도 세상의 복을 근거로 해서 믿음이 향상된다거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가령 만원을 십일조 했을 때 십만 원이 복으로 돌아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애초의 생각대로라면 십만 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하나님만 믿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만원해서 십만원 받았으니까 십만원 하면 백만원 받겠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시간 기도해서 복 받았다면 2시간 기도해서 더 많은 것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복을 받았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 지파에 대한 땅 분배입니다. 땅 분배에서 특이한 것은 요셉 지파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지파는 모두가 한 지파당 하나의 몫이지만 요셉 지파는 두 몫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받은 땅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아무런 여과 없이 요셉의 믿음과 연결시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 가는 고통을 받았는데도 믿음을 변치 않고 여자의 유혹을 이기면서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자식에게 남보다 많은 두배의 축복이 주어졌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우리 역시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믿음이 변치 않고 죄를 이기고 살아가면 남보다 많은 두배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내려지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IMF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교회에도 그 여파가 미쳤습니다. 사람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교인들도 헌금을 하는데 부담을 가지게 되고 자연히 헌금이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때 목사들로서는 불안하고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강조한 것이 어려울 때일수록 헌금을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믿음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께 헌금함으로서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 상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남들보다 더 많은 복으로 갚으신다는 거짓말을 눈하나 깜짝안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내 교회에 정신 팔린 목사가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있기나 하겠습니까? 오직 내 교회 부흥되고 크게 되는 것만 마음에 가득 찼기 때문에 나오는 말은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모두가 교회와 연관된 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셉의 자손이 남보다 많은 두 몫을 받게 된 것은 두배의 축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무엇을 통로로 해서 주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 자손에게만 두 몫의 땅을 주는 것은 요셉 자손을 다른 자손들과 달리 특별 대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셉 자손에게 특별히 두 몫의 땅을 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요셉 자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선을 요셉 자손에게로 집중시켜서 뭔가 보이실 것이 있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이지 요셉 자손만 특별 대우해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요셉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 자손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 48:22절에 보면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한 축복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야곱이 축복한 대로 요셉 자손에게는 다른 자손보다 더 많은 두 몫이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야곱이 축복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이 축복한 대로 움직이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야곱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요셉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형제가 살아난 것입니다. 요셉의 희생은 자기를 희생하심으로서 고난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을 축복하는 것은 복은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야곱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만나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할 때 우수로는 장자인 므낫세에게 좌수로는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얹어서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요셉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손을 반대로 해버립니다. 우수는 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우수를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축복을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손이 바뀌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 48:19)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야곱의 행동입니다.

 

 

 

 

야곱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새로운 하나님의 법칙을 알았습니다.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의 자리에 있는 자가 큰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 자손에게 두 몫의 땅을 주심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셉 자손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세상에서 높은 자, 지배하는 자, 힘있는 자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섬기는 것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힘없는 약자보다는 힘있는 강자로 사는 것이 더 멋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배를 받는 것보다는 지배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힘이 있어야 하고, 그 힘은 세상의 것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세상 것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아무리 마음에 담아두고 바라본다고 해도 세상의 형편이나 지위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을 믿고 하늘을 소망하고 살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서 거지에서 부자로 변신한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거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꾸 거지에서 부자로 변신되는 것을 꿈꾸며 삽니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은 오직 희생과 섬김을 말할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인해서 죽은 자에서 산자로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죽을 때가지 이것이 포기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세상 원리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세상 원리가 심판의 근거가 될 날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 날을 미리 보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유익의 달콤함에 빠져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달콤함이 언젠가는 우리의 고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간 부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얼마나 달콤함에 빠져 살았겠습니까? 돈의 위력을 실감을 하면서 떵떵거리고 희생이나 섬김이란 단어는 전혀 모른 채 섬김 받고 지배하는 재미에 세월 흐르는 줄 몰랐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죽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세상을 지낸다고 해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잠시 동안의 세상은 사라지지만 남는 것은 영원입니다. 그 영원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곧 그런 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의해서 고통에서 건짐 받은 자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섬김 때문에 산 자 된 것을 안다면 그가 어찌 섬김 받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다른 교회의 하나님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교회를 부흥시켜주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그런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자리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온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이시지 다른 하나님은 모두 우리에게는 우상일 뿐입니다.

 

 

 

 

요셉 자손이 받은 두 몫에 관심을 두지 마시고, 유독 요셉 자손에게만 두 몫을 주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요셉 자손에게 두게 하셔서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울릴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살고 있는가?' 물으실 때 여러분의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남겨 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사는 자가 참으로 복안에 있는 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그는 세상 사람입니다. 세상 원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세상 원리에 충실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늘의 원리에 충실하며 하늘의 원리를 따라가는 자입니다.

 

 

 

 

올 한해도 여전히 보이는 것들이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근심과 염려에 빠지기도 하고 곤란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떨 땐 보이지 않는 것만 들이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 수도 있고 의심이 나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실 것을 믿습니다.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이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는 것이 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이 참된 복이며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해가 되기 바랍니다.

 

 

 

 

 

수 17:14-18 요셉 자손의 요구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아무런 불평 없이 모든 자식에게 만족을 주는 분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겉으로만 만족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까지 온전히 만족시키면서 전혀 불평 불만이 없는 재산 분배가 가능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신문 지상에 보면 부모의 유산 문제를 가지고 형제들이 다투고 법정까지 가게 되고, 심지어는 폭력 사태까지 일어나는 일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꼭 부모의 재산을 분배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분배한다고 해도 불평이라는 것은 항상 내재되어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배할 때, 또는 분배를 받을 때 사람은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공로를 말하면서 기득권을 주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헌신이나 봉사를 말하면서 당연히 분배에 차별화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가령 다른 형제들보다 부모를 더 많이 모신 것을 주장하며 차별화된 분배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평소 부모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지 못했던 것을 주장하면서 그에 따른 보상으로 차별화된 분배를 요구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부양 가족이 있음을 말하면서 분배의 차별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에 강하고 남보다는 자신이 더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평 없는 분배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다른 지파보다 두 몫을 받는 요셉 자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지파와는 달리 요셉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각각에게 땅이 분배됩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불평을 합니다. 땅 분배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요셉자손들이 불평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이 말을 보면 요셉 자손들은 '우리가 큰 민족'이라는 입장을 내세워서 분배받은 땅이 자신들이 살기에는 좁다는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큰 민족이 된 것이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가 복을 주셔서 이렇게 큰 민족이 되었는데, 왜 당신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과거에 받은 축복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많은 분배를 받아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되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았음을 안다면 복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데 요셉 자손은 복을 받은 것을 빙자해서 그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목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과 은혜를 받아서 되어진다. 따라서 교인들은 특별한 사명과 은혜를 받은 목사에게 순종하고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은혜를 받음으로 목사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목사인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라고 목사 되게 하셨는가를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사명과 은혜를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할 자격쯤으로 생각해 버린다면 이것이 바로 복을 받은 것을 빙자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요셉 자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들이 기업을 더 달라고 요구한 것은 비록 겉으로는 '우리는 큰 민족인데 비해서 기업으로 주어진 것은 적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들이 받은 땅이 실제로 좁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16절에 보면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이들의 불평은 기업으로 받은 땅이 좋은 땅이 아니었다는데서 나온 불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산지와 골짜기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요셉 자손들이 받은 땅은 곡식을 가꾸기가 좋은 평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개척을 해야 하는 삼림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 자손은 이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땅에는 철병거를 가진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과도 싸워서 물리쳐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요셉 자손들로 하여금 받은 땅이 적다는 불평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불평은 오늘 우리들의 불평에서도 보여집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대개 무엇에 대해서 불평을 하시며 살아갑니까? 소유가 적은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으십니까? 또는 내가 받은 것이 다른 사람이 받은 것에 대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불평은 없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주면서 나에게는 왜 별로 좋지 못한 것을 주느냐는 불평이 없습니까? 똑같이 자식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내 자식은 저 사람의 자식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잘나지 못했느냐는 불평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항상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선호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수고와 애씀과 노력이 없이 얻어진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복을 좋아하는 것은 내 노력 없이 얻어진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수고한 결과이지 어떻게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 자손이 받은 땅은 삼림에다가 골짜기에는 철병거를 가진 사람들이 거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그 땅을 복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수고하지 않아도 손쉽게 곡식을 가꾸고 양을 키우면서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땅을 갖고 싶은 속마음이 '땅이 적다'는 불평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한 분깃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힘들고 어려운 것은 버리고 편하고 좋은 것만 취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복의 가치를 편하고 좋은 것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분깃으로 받은 땅이 복으로 보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바라보는 복의 시각은 과연 어떻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목사들이 말하는 소위 좋은 교회란 과연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셉 자손이 받은 철병거를 가진 거민이 거하고 있는 땅을 과연 복으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의 수고와 싸움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땅을 복으로 인정하기란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들이 상상하는 좋은 교회란 한마디로 말해서 말썽 없는 교회입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목사에게 말썽 부리는 교인 없고 목사 잘 섬겨주고 목사에게 순종 잘하는 그런 교회라면 목회하기 아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에 항상 목사에게 따지기 좋아하고, 말썽 많은 교인들도 많고, 항상 시끄럽고, 대하기 까다로운 장로가 있는 교회라면 피하고 싶고 가기 싫어하는 교회로 여겨질 것입니다. 즉 목사를 편하게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힘들게 하는 교회는 좋지 않은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교회 나쁜 교회라는 기준이 목사 개인의 편함에 의해서 결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요셉 자손과 같은 성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편함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희생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된 것은 그들의 수고와 애씀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가나안 거민과 싸우심으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된 것인데, 요셉 자손은 자신들이 누구 덕분에 가나안 땅에 거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기 눈앞에 펼쳐진 현실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평이 나온 것이고 좀 더 나은 땅을 얻기 위해서 분깃을 하나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땅이 좁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우린 이러한 요셉 자손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입장을 더 우선으로 하고 자기 이득을 더 챙기려고 하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 자손의 요구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거절을 합니다. 1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에게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요셉 자손은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은 다 철병거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에게는 철병거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그들의 철병거를 이길만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다시 말하기를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8절)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에게 그들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하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그들을 능히 이기고 쫓아낼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남의 일이라고 해서 손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바라보는 것과 요셉 자손이 바라보는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순순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능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순수함입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과 상황을 따져 가면서 계산을 하고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성공이고 약속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믿음의 순수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손쉽고 편안하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편하고 손쉽게 주어지는 것이 약속이라면 요셉 자손에게 주어지는 땅도 편안하게 얻을 수 있는 땅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셉 자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철병거를 가진 사람들이 거하는 땅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과연 약속의 땅을 주시는 것으로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요셉 자손에게 이러한 땅을 주시는 것입니까? 철병거가 없고 편안하게 얻을 수 있는 땅을 주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인간이 고생할 필요 없는 그런 땅을 주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주신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만 있다'는 고백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이 철병거가 있는 상황은 피해버리고 편안하고 쉬운 것을 찾아가는 것은, 전혀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믿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편안함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이 주어질 때 그런 상황 속에서 배울 수 있는 믿음의 유익을 생각하기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렵다는 것만 생각해 버립니다. 믿음의 유익을 얻기보다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싶어하기보다는 어려움이 없는 편안함이 더욱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현실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은 싫고 이런 환경도 싫고 이런 것이 좋다고 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입맛에 맞는 환경을 주실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믿음을 이런 식으로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입맛에 맞는 환경을 주심으로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환경에서 감사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병거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감사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순수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자들에게만 해당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좋은 것을 받고, 힘되는 것을 소유하고, 편안 환경 속에서 감사하고 영광 돌리려고 하지 마시고, 어떤 환경이든 주어진 것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해가 되고 득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것은 버려 버리고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만 골라 소유하려고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우리들 희망대로 순순히 되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덧붙여서 어떤 형편이 주어지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면 인간이 거부할 수 없고, 골라서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요셉 자손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은 버리고 대신 손쉽고 편한 것을 골라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셉 자손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대신 철병거를 가진 강한 사람들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말한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은 자신들에게 너무 무리한 말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요셉 자손은 자신들이 나서고 싸울 필요가 없는 편안함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철병거가 있는 상황 속에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만약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 바라보고 산다면 힘들고 어려운 삶보다는 편안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힘든 삶이든 편안한 삶이든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평을 하거나 낙심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수 18:8-10 제비 뽑기


신자들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왜 내게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그리고 이런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를 묻기 위해서 성경을 펼치기도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뭔가 속시원한 해답을 얻고 성경을 덮는 것이 아니라 답답한 마음 그대로 성경을 덮게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펼쳐보면 보이는 것은 모두가 이스라엘의 이야기이지 내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변환시켜서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펼쳐도 답답함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타인의 도움이나 조언을 구하게 되고 가장 쉬운 것은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인 목사에게 자신의 문제를 내어놓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게 되겠지만 신자가 아무리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그 답을 찾는다고 해도 성경은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서 속시원한 해결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모를 때 신자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얻지 못한 채 답답함만 계속될 뿐입니다.

 

 

 

 

우리는 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생각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우리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내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이 어떤 답을 하나 정해 놓고 과연 그 답이 참인지를 찾고 질문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내 쪽에 내 문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답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과연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답을 '예수 그리스도' 한분으로만 내릴 수가 있습니까? 남들은 다 취직을 하는 직장에 나 혼자 취직을 못하고 있다고 할 때 '하나님, 제가 취직이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취직이 안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펼쳐봐도 내가 취직이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취직을 하고 못하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취직이 안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로 족한 줄 알아라'는 것입니다.

 

 

 

 

원래 문제가 있은 후에 답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 역시 문제가 있고 나서 답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답은 이미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오직 하나의 답만 정해 놓으시고 과연 이 답이 참인지 진심으로 이 답이 우리 인생에서 유일한 해답인지를 찾는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생겼다면 '내가 과연 그동안 진심으로 그리스도만 소망했는가?' '과연 인생에서 그리스도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를 문제를 통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답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학생이 시험을 칠 때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한다면 문제가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문제가 어렵다는 것은 답을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면 문제는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문제의 답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이,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문제라 할지라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답답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닥치는 문제가 어렵고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이미 내리신 답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삶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답을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답에 대해서 신뢰를 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문제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그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충성하고 열심 있는 자입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교회마다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교회마다 얼마든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고자 하는 사람이 발견되었을 때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날 정도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인가는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통해서 증거 되고 확인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쉬게 하리라는 말씀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우게 하기 위해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쉰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이 말씀을 들여다보면서 고난이나 쉼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멍에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감동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 답을 찾아가는 신자인가하는 것은 스스로 무겁다고 느껴지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요단강 건너편의 땅에 정착한 지파가 있고,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가 땅을 분배받았고, 이제 남은 것은 일곱 지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남은 일곱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시면서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하시는 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종종 제비뽑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것을 똑같은 분량으로 나눌 때는 제비뽑기라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똑같은 분량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불평이나 불만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기 다른 것을 다른 분량으로 나눌 때 분쟁이 발생할 염려가 많습니다. 좋은 것을 많이 차지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분쟁을 미리 없애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나쁜 것을 받았다고 해도 할말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 제비뽑기하는 것입니다. 즉 운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것이 걸리면 '운이 나빴다'라고 속편하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 제비뽑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곱 지파에게 제비뽑기라는 방식으로 땅을 분배하시는 것은, 일곱 지파의 분쟁을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너는 이것 너는 저것'이렇게 결정하셨다면 일곱 지파는 분쟁했을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똑같이 광야에서 고생해서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기 때문에 누구는 좋은 것 받고 누구는 나쁜 것 받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해서 제비를 뽑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앞으로의 삶에서 자신들이 딛고 살아가는 땅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진 땅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동원하시면서 까지 인간의 선택권을 부정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 자체가 자기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내가 선택한 것을 최상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사는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곧 제비뽑기인 것입니다. 제비뽑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답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이 답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를 통해서 확인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곱 지파에게는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땅을 스스로 선택을 하고 그 땅을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제비뽑기, 즉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이라는 것만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입니다. 분명 가나안 땅은 좋은 땅이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나쁜 땅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맡겨 논다면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고 싸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인간의 어떠한 불만과 불평도 허용을 하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소유에 대해서 불만과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미치지 못하는 은혜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항상 우리들 속에는 나의 선택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내 선택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제비뽑기'에 불응할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좋은 땅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제비를 뽑았다고 해도 결과가 나쁜 땅이었을 때는 불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이런 인간을 불허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만든 세계가 바로 이런 세계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세상이고,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사단은 인간의 선택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선택으로 사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순종하는 삶의 방식을 보이심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이미 세상에 주어진 답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미 내려진 답을 아는 자로서 답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문제에 서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답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답에 서서 문제를 바라볼 때 문제가 보이는 것이지 문제에 서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문제는 보이지 않고 답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계속되는 답답함 속에서 자신 스스로도 하나님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혼란스러워 질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답은 제비뽑기입니다. 제비뽑기가 앞으로 그들의 인생에서의 답인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제비뽑기라는 답에 서서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일어나 떠나니 여호수아가 땅을 그리러 가는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여기 실로에서 여호와 앞에서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에게 3명씩 뽑아서 하나님이 주실 가나안 땅을 두루 다니면서 그 땅을 그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실로에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자신들이 취할 땅을 다니면서 그려온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될 뿐입니다. 이것이 제비뽑기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셉 자손의 불평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이 적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제비뽑기라는 분배원칙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철병거를 가진 사람들이 기거하는 땅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은혜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을 좇아갔던 것입니다. 은혜라는 답에 서서 철병거라는 문제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철병거라는 문제에 서서 답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은혜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란 '너희들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준 것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답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모두 자기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방황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선택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사실 우리가 문제거리로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일인데, 우린 그것을 스스로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옹호되는 답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답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미 내려진 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답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들보다 적은 돈을 소유한 것이 여러분의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무엇을 묻겠습니까? '하나님, 언제쯤이면 돈을 벌 수 있겠습니까?'를 묻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저에게 적은 소유를 주신 것이 무슨 뜻입니까?'를 묻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어느 물음에도 답을 안하십니다. 이미 주어진 답이기 때문입니다. 제비뽑기가 여러분에게 주어진 답입니다. 인생은 제비뽑기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 답으로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답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답이 있는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인생인데 왜 내가 적은 소유로 인해서 마음이 괴롭고 낙심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자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18: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지체하겠습니까? 그 땅은 아직 점령한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우리에게 주신 땅에 아직 가나안 거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문제를 바라본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서서 여러분의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만약 자기 문제에 서서 답을 구한다면,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부정할 것입니다. 은혜가 자신에게 문제로 다가올리가 없다는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요셉 자손이 약속의 땅에 철병거를 가진 거민이 거한다는 현실이 이해가 안된 것처럼, 은혜가 문제거리로 다가온다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에 서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면,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이 보여질 뿐이지 작은 것이어서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살아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삶의 답이 제비뽑기라면, 오늘 현실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답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은혜입니다. 은혜의 자리에 서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인생의 답으로 여기고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답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문제를 통해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자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수 20:1-9 도피성


오늘날 세상은 과학 기술에 의해서 조성되어지고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 1999년에서 2000년으로 해가 바뀔 때 세계의 모든 과학이 가슴을 졸이며 노심초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Y2K, 즉 밀레니엄 버그라는 컴퓨터의 연도 인식 오류라는 문제 때문에 전 세계가 며칠동안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컴퓨터를 처음 만들 때 년도를 네자리가 아닌 두자리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 이유입니다. 년도를 두자리로 인식을 하면 1999를 99로 인식하기 때문에 2000년이 되면 00으로 인식을 합니다. 따라서 컴퓨터는 00년을 1900년으로 인식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1900년에 이미 죽은 사람에게 군 입대 영장이 나온다든지 하는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컴퓨터로 유지되는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가 오동작을 하거나 멈춰버린다면 세상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컴퓨터의 오류를 방지하고 감시하기 위한 컴퓨터를 또 다시 만들어 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Y2K문제만 해도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과학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연도 인식'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문제 하나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컴퓨터의 힘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수, 즉 666을 컴퓨터라고 주장하기도 할 정도입니다.

 

 

 

 

컴퓨터에 유지되는 세계, 이것을 사이버 세계라고도 부릅니다. 컴퓨터 안에서 만들어지고 컴퓨터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도 화상회의라는 것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절약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컴퓨터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학교 교육도 직접 선생님을 만나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컴퓨터 안에서 만나서 공부하는 세상이 코앞에 있다고 합니다.

 

 

 

 

요즘 게임방을 가보면 어린 학생들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 컴퓨터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얼굴도 모르는 그와 함께 게임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통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합니다.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볼 필요 없이 모니터를 통해서 대화를 합니다. 이것을 '채팅'이라고 하던가요?

컴퓨터 세계, 이것이 인간들의 생활에 편리함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없다면 인간의 생활은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편리함을 경험했을 때의 현상이 아닐까요? '차가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는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차를 소유함으로서 편리함을 경험한 자들의 말입니다.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제 입장에서는 차보다는 오토바이가 편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비가 오고 눈이 오면 이용을 할 수 없는 불편함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도로가 막히고 복잡할 때 기동성이 좋은 오토바이의 편리함이란 오토바이를 이용한 분들만의 경험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편이라는 것은 자기 경험을 기초로 해서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에 차가 없었을 때는 차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걸어 다니는 것이 최고였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학의 편리함만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비록 컴퓨터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있고, 컴퓨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컴퓨터로 인해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단절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서 공부를 하는 세상이 된다면, 성도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컴퓨터를 통해서 하게 되어질지도 모릅니다. 결국 성도와 성도의 만남이 없는 세상이 조성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배만 드리면 되기 때문에 컴퓨터를 통해서 예배드리고 헌금은 사이버 은행을 통해서 자동으로 지출되는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점점 컴퓨터에 친숙해져가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에 대해서는 불편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동네를 보면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각기 학원에 가고 남은 시간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즐기기 때문에 서로 모여서 뛰어 노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잊어버렸고, 어색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즘 교회 홈페이지가 유행입니다. 그리고 그 홈페이지를 통해서 같은 성도끼리의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홈페이지에 글을 써놓고 그 글을 통해서 성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서 계속 형제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느낌으로 인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할 필요성을 잊어버릴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 때문에 '교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대화를 했다는 것 때문에 만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단지 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만남 안에는 경쟁과 시기와 미움과 다툼과 사랑과 절제와 화평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은혜를 안다면 그 은혜는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도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만남이란 소중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이 과학과 개인적인 생활로 인해서 점차 줄어들고, 만남을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다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볼 문제임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도피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피성 이야기 역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전에 말씀하신 규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그 땅을 분배하고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어떤 원칙이 세워진 삶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대로 원칙을 정해서 자기들 편리한대로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이라는 원칙 아래서 불평 불만이 아니라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도피성 역시 이스라엘 안에 어떤 원칙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성은 어떤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까?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고 말합니다. 도피성이란 살인을 한 사람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피하는 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살인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살인을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도피성입니다. 민 35장에 보면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가 이 성으로 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죽은 자의 친족의 보복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내려진 조치입니다. 피의 보수자란 죽은 자의 억울함을 복수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죽은 자의 가까운 친족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복수로부터 살인자를 보호하는 것이 도피성이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합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재판을 통해서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음이 판명되면 그 도피성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사느냐면 도피성에 거하고 있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유의 몸이 된 그에게 옛 죄에 대해서 복수하거나 책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피성 제도를 이스라엘 안에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유의 몸이 되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누구 덕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실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 형제가 너 때문에 죽었다는 것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만약 도피성이 없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 의해서 살인에 대한 대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한 살인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성에 거하고 있던 대제사장이 죽으면 살인자는 더 이상 도피성에 매일 필요 없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자유의 몸이 된 이상 피해자의 친족들도 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죄의 몸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도피성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도피성을 두시고, 그 도피성에는 대제사장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곧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서 자유를 얻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그도 도피성이라는 제도에 매어 있어야 합니다. 성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라고 하는 은혜 안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자유였음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장자 재앙에서 죽어야 할 자들이었지만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고 그들 안에 도피성을 세우신 것입니다. 도피성을 볼 때마다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를 항상 상기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피성의 의미를 상기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의 의미와 정신이 이스라엘 안에 확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 도피성의 원칙에 세워진 정신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만남 속에서 발생되어지는 여러 가지 실수와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원칙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고 제사장이 죽은 후 자유를 얻음으로서 '내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주어진 생명이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피의 보수자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할 자신이 도피성 때문에 보호를 받고, 또 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는지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는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아무리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또 누군가가 내 친족을 죽였다고 해서 내 손으로 복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피성의 제도는 제도 자체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피성의 의미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해야 할 자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피해자는 가해자가 도피성으로 피함으로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유의 몸으로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인 자가 보호를 받고 나중에는 자유를 얻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피해자의 입장입니다. 결국 가해자나 피해자나 동일하게 도피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내 의지도 아니고 내 생각도 아니고 내 계획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저 우연히 죽게 된 것입니다. 죽일 마음 없이 사람을 밀쳤는데 넘어져 죽어버렸다던가 함께 나무를 하고 있는데 도끼가 빠져나가서 옆 사람을 죽이게 했다던가 이 모든 일들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진짜 우연입니까?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서 증거하기 위하여 그런 일들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의 죄에 대해서 물을 수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모든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해자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음을 옛날 도피성에 피한 살인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안에서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내 친족을 죽인 자가 자유의 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참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의 자유의 배경에는 제사장의 죽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피해자는 내 친족의 죽음이 아니라 가해자를 자유케 한 제사장의 죽음을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도피성이라는 원칙 아래서 살아갈 때 원한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만남 안에서는 본의 아니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것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형제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의 관계라면 바로 이 도피성의 정신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야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해자고 예수님은 피해자이십니다. 내가 피해를 입은 것보다는 내가 예수님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로 인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이고 내가 죽어야 할 자인데 예수님의 피가 나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를 자유케 한 주님의 은혜가 성도와의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보호받는 존재이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에서 자유케 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형제를 만나는 모든 관계에서 주님의 은혜가 놀랍고 크다는 것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로는 형제라고 하면서도 조그만 문제를 가지고 자존심 싸움을 하고,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 가지고 싸우고 다투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만 예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은혜를 아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안다면 그 앎은 필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통해서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서 증거 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은혜와 믿음은 감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고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여러분들 관계에서 가해자가 있게 하고 피해자가 있게도 하십니다. 다른 형제의 조그만 실수 때문에 상처 입을 수도 있고 또 내가 상처를 입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나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힌 형제를 바라보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은석교회 안에는 도피성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도피성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친히 도피성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가해자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도피성 되신 주님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생각하십시오. 용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마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나옵니다. 주인은 처음에는 그 몸과 처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종이 엎드려서 간구하자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놓아 보내주고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지고 갚지 않은 동관을 만납니다. 그리고 빚진 자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동관은 빚을 갚을 테니 참아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종은 빚을 갚도록 그 동관을 옥에 가둬버립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얘기를 들으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로서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분을 낼 것입니다. 아마 그 종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했다면 그도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은 자신이 탕감 받은 엄청난 돈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자신이 받을 돈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들이 바로 그 종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은 바로 회계하려 하던 임금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8:33절에 보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임금의 마음이며 이 마음이 곧 천국입니다. 천국은 불쌍히 여김 받은 것과 같이 불쌍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불쌍히 여기는 성입니다. 불쌍히 여김으로서 죽임을 당해야 할 가해자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용서 할 수 있는 자로 뒤바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용서할 수 있는 자로 새롭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은석교회의 도피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용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셨습니다. 도피성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사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주님의 용서와 긍휼하심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 증거는 형제들과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긍휼과 용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만남은 귀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가를 성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 21:1-3, 43-45 레위인의 성읍


마태복음 11:28-30절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참이라고 믿으십니까? 단지 '성경 말씀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거짓일 리가 있는가 참이겠지'라는 어림짐작으로 믿는 참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분의 삶에서 참으로 증명되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참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입으로 얼마든지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입술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성경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진리는 입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참이라면 진리라면, 그리고 신자가 그것을 믿는다면 참이고 진리인 성경이 말씀하는 삶을 기쁘게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입으로는 참이고 진리라고 말하면서 삶이 진리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과연 성경을 참된 것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진리로 믿는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삶 역시 그것이 어떤 삶이든 상관없이, 설령 고통의 삶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마땅히 그러한 삶으로 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진리로 믿는다는 참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치에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멍에라는 것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멍에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분명 힘들고 무거운 것임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며 참이라는 것을 멍에를 매고 쉼을 얻는 것을 통해서 증거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성경 말씀을 소설책을 읽듯 읽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 말씀의 내용을 자신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설책의 내용은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상관없이 나의 삶은 아닙니다. 내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우리 삶 자체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인식을 해야 하고, 삶의 문제점이 보여져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에 한해서 말씀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여러분 자신들 앞에서 침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내가 읽고 싶으면 읽고 읽기 싫으면 읽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무런 생동감도 없이 꼼짝하지 못하고 우리들이 읽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성경으로 취급하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심한 채 성경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말씀을 대하고 있는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라고 진단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자에게 있어서 진심으로 말씀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도피성 역시 이러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고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아셨습니까? 아셨다면 그 앎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증거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도피성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이 증거 되어지기 위해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도피성은 보수자의 보복에 의해서 죽어야 할 자가 보호되는 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죽음으로 자유를 얻는 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의로 주어진 은총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도피성은 은혜와 용서를 말합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보호받는 은혜를,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의 용서 안에 있는 자이기에 누가 누구를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 도피성입니다. 그러나 도피성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기대가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는 자가 아니라 증거자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도피성을 아는 자가 아니라 도피성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도피성을 증거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에 도피성의 은혜와 용서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말씀을 증거 하는 도구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라고 주어진 삶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을 때 말씀과 삶이 하나되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삶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보다는 삶의 내면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시각에서 대할 때,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우리들의 삶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1장은 레위지파에게 성이 분배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사 우리의 거할 성읍들과 우리의 가축 먹일 그 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었나이다 하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땅을 분배하고 나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우리가 거할 성읍과 가축 먹일 들을 주라고 하셨었다'는 말을 합니다. 민 35: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가 얻은 기업 중에서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그들이 거할 성읍을 줘서 레위인들이 거하도록 하고 그 성읍 사면의 들을 줘서 그들의 가축이 거할 곳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옵니다. 레위 지파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자기들에게 돌아올 몫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레위 지파가 맨 마지막에 성을 분배받는 것을 이유로 당시 이스라엘이 레위지파에 대해서 소홀하게 대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다른 이스라엘처럼 가나안 땅의 한쪽 일부를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기업 중 일부를 분배받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분배받은 것 중에서 얼마를 레위 몫으로 분배받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 분배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창 49:7절에 보면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레위를 향한 야곱의 저주입니다. 즉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는 예언대로 레위는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짐을 당하는 것이고 흩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기업을 분배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레위 자손의 요구에 의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 지파에게 성을 내주게 되는데 그 성의 수가 모두 48성읍입니다. 아론 자손이 13성읍, 그핫 자손이 10성읍, 게르손 자손이 13성읍, 므라리 자손이 12성읍, 모두 합해서 48성읍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레위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기업 안에서 각기 거할 성읍을 분배받는 이 내용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말씀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레위인들이 받은 성읍과 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기업에서 다시 분배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것에서 레위인의 몫으로 떼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레위인이 거할 곳을 만들고 그들이 목축을 할 수 있도록 들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애당초 이스라엘이 땅을 분배할 때 레위인도 제비뽑기에 참여해서 자기들의 몫을 챙기도록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어차피 레위인들이 거할 성읍을 줘야 하고 또 들도 줘야 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레위인들도 제비뽑기에 참여해서 자기들의 몫을 챙기면 덜 번거로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기업이 분배되도록 하고 그 후에 각기 이스라엘 자손들 안에서 레위인의 몫으로 성읍과 들을 분배하도록 한 것은,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레위 자손들은 한쪽에 집단 거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 자손에 대한 이스라엘의 땅 분배는 모든 자손에 대해서 골고루 행해졌습니다. 즉 레위 자손은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서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레위인을 이스라엘 안에 흩으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전역에 레위인을 흩어서 거주하게 하시는 것은 분명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증거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도피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증거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레위인 역시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레위인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알다시피 레위인은 기업이 없는 자입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기업이 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전에 바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레위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약자'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눠주지 않으면 그들은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남들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 그들이 바로 약자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약자로 만들어서 이스라엘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은 레위인이 그들의 삶에 개입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증거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눠준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은 다 경험하실 것입니다. 교회에 바치는 것은 즐겨하기도 하고 선뜻 하기도 하면서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나눠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선뜻 마음이 가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눠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는 어렵게 살고 넉넉하지 못하니까 나눠주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거나 '교회에 바쳤으니까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습니까?

 

 

 

 

나눈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흩어 버리는 것입니다. 헌금 역시 자신의 소유를 흩어버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눠줘야 할 자를 있게 하신다는 것은, 소유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거할 성읍은 기업을 받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에게서 분배받은 것입니다. 유다 지파 8성읍, 베냐민 지파 4성읍, 시므온 지파 1성읍, 에브라임 지파 4성읍, 단 지파 4성읍, 요단 서편의 므낫세 반 지파 2성읍,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지파 2성읍, 잇사갈 지파 4성읍, 아셀 지파 4성읍, 납달리 지파 3성읍, 스불론 지파 4성읍, 르우벤 지파 4성읍, 갓 지파 4성읍, 이렇게 해서 도합 48성읍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분배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레위인을 위해서 자신들의 소유를 나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레위인을 통해서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와 같이 나눔을 통해서 자기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며 살아가십니까? 사람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서는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나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이기 때문에 헛되이 쓰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남을 도와준다고 해도 보람이 되는 곳에 도움을 주려고 할 것입니다. 아무런 보람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에 자신의 땀의 결실을 허비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 주기도 아까운 것이 바로 내 소유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세상 속에 레위인을 흩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레위인을 도구로 삼아서 과연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며 살아가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은혜와 용서를 담고 있는 성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도피성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참된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도피성 다음에 레위인에게 거할 성읍이 주어지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은혜와 용서의 정신으로 존재한다면 그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약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의 기업을 얻었고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 자유를 얻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증거는 자신들의 소유를 통해서 드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즉 애당초 아무런 소유가 없던 자가 소유가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분명히 자신들의 손에 쥐어지는 소득이 있을 것입니다. 소득이 주어질 때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소득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단지 십일조를 바침으로서 증명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십일조가 진정한 십일조인지를 물으시기 위해서 그들 속에 약자를 흩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레위인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흩어 놓으시고 그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진심으로 자신의 소득에 대해 흩어버리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를 증거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레위인이 거할 성읍을 분배하라고 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는지는 레위인을 통해서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도와줘야 살 수 있는 레위인의 모습은 이스라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도와줘야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고, 또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들 속에 흩어져 있는 레위인을 통해서 항상 참된 이스라엘의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레위인에게 계속해서 나누는 삶을 살아가고 약자들에게 나누는 삶이 그치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용서하심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나누는 것을 그쳐 버리고 그로 인해서 레위인, 약자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용서하심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도움과 은혜와 용서함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느냐?'는 물음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하실 수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산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는 자다' 이 고백은 우리의 입술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힘든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수고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라고 대답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라고 할 수 있지만 삶에서는 '아니오'라고 한다면 결국 입술의 고백은 거짓이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실 레위인은 이스라엘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며 살아간다면 레위인은 전혀 귀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잊을 수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생각나게 하는 레위인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기꺼이 자신들의 소유를 나눌 것입니다. 애당초 자기 것이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 손에 있게 된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흩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의 주변에 약자를 흩어 놓으셨습니다. 은석교회에도 약자를 흩어 놓으셨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귀찮치는 않습니까? 마음에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살기보다는 돈으로 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43-4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안식이란 대적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적은 가나안 족속들입니다. 이스라엘과는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지만 가나안은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결국 안식이란 여호와께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세력을 물리치시고 오직 은혜로만 살고 도우심만 바라고 살아가는 상태가 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받아 낼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면서도 끊임없이 베푸시고 도우시고 주시는 분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시지 않았습니까? 약자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는 자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들 주위에 흩어져 있는 받기만 하는 자들을 통해서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약자임을 알고 나눌 수 있다는 그 마음 자체가 안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는 힘으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대적이 없고 전쟁이 그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모으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나누고 흩어버리는 것이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마음 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나누고 흩어버리는 마음을 위해서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수 22:1-9 형제


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나중에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여자를 창조하셔야 했는가? 여자 없이는 안되는 일이라도 있었는가? 종족 번성이 이유라면 굳이 여자를 만드실 것 없이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이 많은 사람을 만들어 내시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의문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창 2:20절의 돕는다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도움 주고 도움을 받는 관계로 만드신 것입니다. 상호 역할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관계라는 것은 강자와 약자라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똑같이 강자라면 도움을 받는 역할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약자인 여자를 만드심으로서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인간관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증거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는 역할극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기를 기뻐하셨고, 그 역할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관계는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웃과의 관계는 팽개친 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겠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치 않음과 믿음 없음과 은혜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모든 증거가 내 개인의 삶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이웃이 존재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폭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은 내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음을 이웃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드러내면 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면 그들의 신앙은 항상 이스라엘이라는 단체로 이야기됩니다. 죄를 지었으면 이스라엘이 지은 것이지 이스라엘 안에 한 개인이 죄지은 것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개인이 잘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으로 여기고 이스라엘이 징벌을 받습니다. 이처럼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 몸의 관계 안에서 판단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남자 여자를 만드신 의도를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진술하고 증거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입술의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을 위한 죽음으로 드러납니다. 낮아지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나라는 개인 안에서 증거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만나는 이웃을 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개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집중된 사람은 그가 아무리 복음을 외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는 결국 '종교적 사람'이라고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개인을 용납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종교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의 삶이 말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만인의 존경을 받는 성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패와 성공 속에서 기쁨과 슬픔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로 붙들려 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삶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을 하면 뭔가 나하고는 거리가 멀고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이웃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매를 맞는 것으로만 상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매맞음과 핍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난을 이웃의 짐을 지는 것을 생각지 않고 단지 복음을 전함으로서 같은 교회 목사로부터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는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십자가의 능력과 힘은 이웃의 짐을 대신 지게 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신앙이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기업을 분배하고 마지막으로 레위 지파에게 48성읍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땅 분배가 모두 끝이 난 후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지파를 불러서 옛날에 모세가 너희들에게 주었던 요단 동편 땅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에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 요단강 동편의 땅이 가축을 기르기에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에게 자신들은 요단을 건너지 않고 여기 거하겠다고 요청을 합니다(민32:1-5). 이 요청에 대해서 모세는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민 32:6)라는 말로 책망을 합니다. 형제들이 앞으로 가나안 땅을 싸워서 얻어야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안함만 추구한다는 책망입니다.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도와주지 않으면 가나안을 정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다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울 것을 원했습니다. 비록 승리는 여호와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을 편안히 앉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 안에서 이스라엘다운 정신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이 이스라엘 전체 퍼지고 그 정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요단 동편 땅 때문에 요단을 건너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형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편안함과 풍요로움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그것을 책망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르우벤과 갓 자손들의 행동은 형제를 낙심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민32:7).

 

 

 

 

모세의 책망에 대해서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기 가족들이 거할 성읍을 건축한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기업을 얻기까지 같이 싸우겠다고 말합니다(민32:16-19). 이로 인해서 요단 동편에 거하겠다고 요청했던 자손들은 다른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과의 싸움에 참여를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가나안의 싸움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민수기 32:19절에 보면 '우리는 요단 동편에 산업을 얻었으니까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주어질 기업이 전혀 없는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돌아올 대가가 전혀 없는 싸움에 단지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싸움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돌아올 대가가 전혀 없는 싸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일에 내 말을 너희가 청종하여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여호수아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지파가 대가도 없는 싸움에 7년 동안 성실히 참여한 것에 대해서 모세와 내 말에 청종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형제를 위해 싸움에 참여한 것을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킨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호와의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책임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생략한 채 단지 인간 관계로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명령에 대한 책임이 그들로 하여금 대가없는 싸움에 성실히 참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라는 관계 안에는 단지 인간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말씀에 대한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말씀에 대해서 책임을 지키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은 형제를 통해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너희 형제에게 하나님이 안식을 주셨으니 이제 기쁜 마음으로 요단 동편에 있는 소유지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5-6절)고 말합니다. 자기 소유지에 돌아가서도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들이 자기 소유지에서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여호수아는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을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 모든 길을 행하는 것으로, 여호와를 친근히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단지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요단 동편에 거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땅에 제단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단은 오직 지정한 한곳에만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22:10절부터 보면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요단 가에 단을 쌓았다는 이유로 그들과 싸움을 하려고까지 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7년 간 대가없는 싸움을 하고 희생을 했는데 단지 요단 가에 단을 쌓았다는 이유만으로 싸움을 하려고 하는 것은, 제단이라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고, 아무 곳에서나 세울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을 세울 수 없는 그들이 요단 동편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명령과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모세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말한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들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로 집약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결국 요단 동편의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모든 것은 형제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켰던 것처럼 요단 동편에서도 그 책임을 다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보내면서 빈손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얻은 전리품을 나누어주면서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서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을 형제들과 나누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과의 싸움에서 탈취한 전리품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승리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승리를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전리품을 주면서 장막으로 돌아가서 형제들과 나누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승리의 기쁨을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형제들과 같이 나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형제라는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나눈다는 개념을 벗어나서 이스라엘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은혜는 형제들과 나누는 개념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누린다면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이고 은총인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고 은혜이기 때문에 내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은혜 안에는 찾아볼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에서 참으로 희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형제라는 개념입니다. 형제라는 개념을 떠난 채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교회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석교회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 안에서, 형제라는 관계에서 증거 되어야 할 은혜와 사랑이 형제는 단절해 버린 채 단지 내 지식 안에서 십자가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한 것은 아닙니까? 참으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합니다. 그 은혜가 잘못된 은혜인가 바른 은혜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우린 먼저 왜 은혜를 추구하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가 주어진다면 주어진 은혜로 뭘 하려고 은혜를 추구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한다고 합시다. '너는 내가 은혜를 주면 그 은혜로 뭘 하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예, 저는 은혜가 주어지면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겠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묻는다고 합시다. '나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나를 섬기고 사랑하겠는가?' 이 물음에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듣고 보니 의문이 생길만한 질문이 아닙니까? 섬김과 사랑이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로 분리해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 하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증거는 곧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 역시 이웃을 통해서 증거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은 나의 믿음과 사랑이 어떠한지를 가르쳐주고 증거해 주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신다면, 그것은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전달하고 같이 나누라고 여러분을 주님의 피로 사신 것이고 주님의 은총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워서 이긴 전리품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리품인 여러분 자신을 형제와 나누는 것이 곧 진심으로 주의 은총 안에 사는 자의 모습일 것이고, 은총을 받은 자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형제와의 관계를 말하고, 나누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하면 뭔가 마음에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내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애착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기 틀을 주장하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나눈다는 것에 대해서 옳다고 하면서도 선뜻 내키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에 깊숙이 빠져 있지 않은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자기 문제, 자기 필요에 대해서 고민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길로 붙들려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회개해야 할 것인가는 여러분 주위에 있는 형제가 가르쳐 줄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형제와의 관계를 통해서 여러분 스스로 나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얼마나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형제와의 관계를 얼마나 강하게 말하고 있는지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20절을 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면류관은 우리 자신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 나의 행위가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나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은 수십 년을 목회를 하다가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 곧 자랑의 면류관이고 영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은 바로 너희들, 데살로니가 교회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형제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곧 사도 바울에게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지 같은 교회를 출석하는 교인으로만 여겼던 사람이, 형제라는 칭호 속에서 이런 엄청난 존재로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내가 한 행위가 자랑이 되고 영광으로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주위에 있던 형제가 나의 면류관이고 영광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왜 형제가 나의 자랑의 면류관이고 영광이고 기쁨이고 소망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남긴 복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안에서 역사함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형제들을 보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고 따라서 형제들이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기쁨이고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살아 계심을 형제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란 돕고 도움을 받는 관계입니다. 돕고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는 형제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 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배우고 나눠줘야 할 관계입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키는 행동은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대가 없는 싸움에 7년을 헌신한 것으로 증거 됩니다. 오늘 여러분도 형제의 관계가 어떠함을 배우십시오. 그리스도의 한몸된 형제의 관계란 가벼운 인간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배워야 할 관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는 자연히 회개의 삶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로 인해서 말씀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불의함이 여실히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깊이 배우시기 바랍니다.

 

 

 

 


수 22:30-34 형제의 증거물

 

지난 시간에는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미 요단 동편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입장에서 굳이 요단을 건너갈 이유가 없지만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을 건너가서 가나안과의 전투에 참여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요단 서편에서는 얻을 기업이 전혀 없고 또 얻지 않겠다고 이미 공헌한 그들의 입장에서는 돌아오는 이득이 전혀 없는 한마디로 말해서 남는 것이 없는 전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전쟁에 그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분이 그들의 입장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돌아오는 것이 전혀 없는 전쟁에 단지 아직 기업을 얻지 못한 형제들을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세태 속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오늘 우리 자신들의 성품을 정확히 진단하고 생각을 한다면 참으로 주저할 수밖에 없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피하고 싶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미 삶의 터전을 마련한 입장에서는 하루속히 그곳에 정착해서 기반을 마련하고 싶은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세에게 '우리는 요단을 건너가지 않고 여기에 남겠다'는 요청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그들이 생각을 돌이키고 형제의 기업을 위한 전쟁에 손해를 감수하고 참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들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하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행복보다도, 자신들의 이득보다도, 자신들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하게 되는 것을 더 크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아무런 이득이 없는 전쟁에 참여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마음이고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신자에게는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말씀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 4: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죽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운동력은 우리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흔적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뜻을 감찰하면서 우리의 생각이나 행하고자 하는 것들이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 안에서 사는 신자라면 자연히 말씀이 원하는 쪽으로 순종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에 대한 책임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책임은 말씀을 실천하고 행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되어지는 삶을 의미한 말입니다.

 

 

 

 

요단 동편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케 될 것을 염려해서 이득이 없는 전쟁에 참여하게 된 그것이 곧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말씀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편안함과 이익 때문에 어린양의 피로서 함께 구출되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땅을 향해서 살아온 형제들을 낙심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형제라는 관계는 혈통이나 인간적인 친근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서 이루어진 특이한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민족과 혈통과 인간적 이해로 형성되어지는 인간관계가 있는 세상에 어린양의 피로서 이루어지는 특이한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의미는 피로 형성된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결국 그들이 어린양의 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간 관계는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가 서로 다투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문제가 있다고 해도 단지 도덕과 윤리적인 기준에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는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희생과 섬김에 대한 감사와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폭로되는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무시하고 살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앙 행위만 착실하다면 자신의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 버리고 형제를 대할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태도로 대한다고 해도 그것을 별 문제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형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일 수밖에 없고 그가 생각하는 교회란 형제를 염두에 두지 않는 단지 자신의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터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란 형제들의 모임입니다. 형제관계가 없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21-22절에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합니다. 나 혼자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함께 처소로 지어져 가는 관계가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형제 관계를 무시한 채 모여지는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형제 관계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수아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요단 동편으로 돌려보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요단 동편에 터전을 잡은 지파들은 가나안 땅을 떠나서 자기들의 기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이 요단 동편으로 다시 돌아가다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렀을 때 아주 큰 단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볼 만한 큰 단이었다는 것은 멀리서도 잘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을 쌓은 것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1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단을 쌓았다는 것 때문에 요단 동편에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과 요단 서편 가나안에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을 쌓았다는 것이 왜 전쟁을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까? 신 12:4-14절의 규례를 보면 여호와의 제단은 오직 한곳에만 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단이란 사람들이 세우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곳 여호와가 지정한 곳에만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규례를 어기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은 이 규례를 내세워서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을 여호와께 범죄한 것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단 동편 이스라엘의 범죄가 그들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이 단을 세운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만 국한되어지다면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이 그들과 전쟁을 해서라도 그 범죄를 막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한 개인의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회중 전체에 진노가 임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의 죄를 그들의 죄로만 여기고 수수방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서 그들의 죄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죄에서 돌이키기를 권면하게 됩니다. '너희가 왜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여호와를 좇는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과거에도 브올의 죄로 인해서 회중에 재앙이 내렸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입지 못했는데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해서 오늘날 너희가 여호와를 떠나려고 하느냐? 만약 너희가 여호와를 배역하면 또 다시 여호와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하실 것이다'(16-18절) 이것이 서편 이스라엘이 파견한 사람들이 동편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책망한 내용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동편 이스라엘이 자기들 마음대로 단을 쌓는 이유를 자기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19절에 보면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이 살 땅이 단을 세워서 여호와를 섬기기에 거룩하다고 생각지가 않거든'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을 세워서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쳐야 복이 임할 것인데 요단 동편 땅은 단을 세우기에 적당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복을 받을 수가 없어서 요단 가에 큰 단을 세웠다면'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요단 동편의 소유지를 버리고 여호와의 단이 있는 이곳으로 와서 우리 중에서 너희들이 살 땅을 취할지언정 아무데나 단을 세워서 여호와께 패역하고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는 것이 동편 이스라엘을 향한 서편 이스라엘의 엄중한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의 이러한 말을 보면 그들이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 범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면 우리 역시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한 개인을 생각할 수 없고 항상 회중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의 인간관계와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우리들의 인간관계란 어떤 죄를 짓고 벌을 받든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여깁니다. 내가 범죄하지 않았으면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신앙의 문제도 나 혼자 잘해서 나 혼자 복받으면 된다는 마음이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 개인의 문제이고 책임이지 다른 형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지는 공동체 관계란 우리의 생각과는 거리가 멉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될 때부터 개인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개인을 판단해서 구출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단 하나였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의가 이스라엘을 있게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 안에서는 하나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가르치십니다. 한 사람의 잘못이 이스라엘 회중의 잘못으로 여겨져서 이스라엘에 진노가 임합니다. 반면에 하나로 인해서 전체가 살아나는 은혜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셨을 때도 왕 한 사람이 잘하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왕이 잘못하면 이스라엘이 진노를 받는 원칙 속에 이스라엘을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로 보신 것이지 각기 개별적으로 보시고 판단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같습니다. 교회란 개별적으로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의 의로 인해서 전체가 산 것입니다. 세상 전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입니다. 이렇게 의로 인해서 산자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나 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범죄란 몸의 범죄이며 고통은 몸의 고통으로 여겨야 합니다. 따라서 은혜 안에서 한 몸된 형제가 여호와를 버리는 범죄를 하게 될 때 마치 나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함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기고 형제를 대하는 것이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편 이스라엘의 엄중한 책망에 대해서 동편 이스라엘이 무엇이라고 답을 합니까? 22절부터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먼저 동편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들의 행동이 여호와께 패역한 것이고, 단을 쌓은 목적이 여호와를 좇지 않으려고 한 것이거나 번제나 소제를 드리기 위해서 쌓은 것이라면 우리를 구원치 말고 벌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단을 쌓게 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합니다.

 

 

 

 

동편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장차 서편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동편 이스라엘의 후손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제단은 아무데나 세울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동편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서 서편 이스라엘로 와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될 때 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기업을 주신 약속의 땅에 거하지 않는 동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사 드리러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는 염려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단 가에 멀리서도 보일 수 있는 큰 단을 세워둠으로서 서편 이스라엘에게 요단 동편에도 그들의 형제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동편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은 자기를 위해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회중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혹 서편 이스라엘의 후손이 '너희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라고 할 경우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는 증거로서 단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손이 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단의 모습을 한 가짜 단을 세운 것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이것을 매우 좋게 여겼습니다. 31절에 보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치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비느하스는 동편 이스라엘의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단을 쌓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단을 쌓는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동편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복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았다면 그 죄가 이스라엘 회중에 미칠 것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범죄하지 않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애당초 동편 이스라엘은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동편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았다가 서편 이스라엘의 책망과 설득에 의해서 마음을 바꿔서 제사드릴 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범죄하지 않음으로서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그들의 마음을 바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제사드릴 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닌데 '너희가 범죄하지 않음으로서 우리를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과연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은 것이 아니다 그저 너희들의 후손이 장차 우리 후손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여길 것이 염려되어서 우리도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 백성이라는 증거로 삼으려고 쌓은 것이다' 이 말 한마디로 오해도 풀어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치 동편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제사 드리려는 목적으로 단을 쌓아서 여호와께 범죄를 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고쳐 먹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아주 큰 불안감으로 동편 이스라엘을 찾아옵니다. 자칫하면 전쟁까지 해야 할 위험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오해였음이 밝혀집니다. 오히려 동편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지 않고자 하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단을 쌓았습니다. 비느하스는 바로 이러한 마음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지지 않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과로 주어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자기를 위해서 단을 쌓을 수밖에 없는 강퍅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러한 마음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편 이스라엘이 범죄치 않고 좋은 마음으로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형제의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서도 사도 바울이 교회들의 믿음을 인해서 감사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로 살전 1:2-3절에서도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이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들의 믿음과 사랑과 수고가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서로 경쟁관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허무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경쟁 관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자신의 것을 자랑하며 내세운다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34절에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동편 이스라엘도 서편 이스라엘도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신다는 증거로 단의 이름을 ''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이란 '증언' 또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동편 이스라엘이 세운 단으로 인해서 서편 이스라엘도 동편 이스라엘도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을 증거로서 우리 모두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임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양쪽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기 속에서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된 백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그 마음이 그들이 서로 하나임을 확인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관계도 아니고 친분 관계도 아닙니다.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 속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서로 하나라는 것이 확인되어질 수 있는 것은 '은석교회'라는 단체 안에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남겨져 있는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확인되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이라고 이름하는 단이 증거가 된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물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물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물을 바라보고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섬기고 주님의 희생과 섬김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믿음이 보여질 때 우리 모두가 한분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각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은 동편과 서편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각자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교회로 모이는 여러분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고 그리스도의 은혜 역시 필요가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도 형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네가 내 신앙에 무슨 도움을 주느냐?'는 생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도 필요가 없는 사람이 형제가 필요하겠습니까? 특히 약자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형제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물로 삼고 모이는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

 

 

 

 

 

수 23:1-13 왜 신자인가?


만약 누군가가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평소 자기 자신에게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물음을 하지 않고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에게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신자됨에 대해서 스스로 부정하고 의심하고 의문을 던지는 것 같은 물음이기 때문에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의문을 가져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질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신자됨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기 믿음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시비를 거는 듯한 질문으로 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시간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되묻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의심하거나 미덥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신앙에 대해 진지함을 가져보자는 의미에서입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증거가 당신에게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라는 질문 자체가 ''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 앞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그것은 '과연 나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증거가 과연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다가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해서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당부 할 때의 상황은 하나님에 의해서 안식이 주어져 있는 때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이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주변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위협을 당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때 여호수아가 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당부는 무엇입니까? 6,7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이것이 여호수아의 당부입니다.

 

 

 

 

그러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고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이방 민족에게 가지도 말고 그 신을 부르지도 말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하고 이방민족에게 가서는 안됩니까? 말씀드린 대로 여호수아의 당부는 이스라엘이 어려움이 빠졌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안식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가나안 민족을 하나님이 다 물리치시고 조금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안식이 주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다른 복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지는 편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아 너희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가 안지키는가 상관없이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하신 일입니다. 때문에 율법을 잘 지키면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고 가나안을 기업을 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고 이방민족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음으로서 어떤 상이나 대가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뭔가 주시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율법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무엇인가 주시기 위한 조건으로 명령이행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신자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받기 위해서 행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도 잘못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함이나 요구를 기준으로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심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주어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지키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3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너희는 지금껏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다 목격을 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목격을 하고 아는 자로서 율법을 행하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가나안 민족과 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착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작정하시고 세우신 여호와 자신의 뜻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시고 애쓰시고 안식을 주셨으니까 그 보답으로 너희들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에 힘쓰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너희들의 뜻과 요구를 내세우지 말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자신의 원함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신을 부르는 목적은 모두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 신을 부르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부처니 알라니 하는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위해서 신을 부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2계명에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우상이란 곧 자기를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은, 앞으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고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도 너희를 위하여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주어진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이루실 것이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그들과 싸우시고 그들의 땅을 기업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 실제로 약속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고스란히 목격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만 신뢰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스스로 개척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조급해하고 낙심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안다면 자신들의 생각과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자연히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생은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부를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든지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말하기를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는 것은 여호와를 가깝게 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우리들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는 자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정리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껏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애굽에서 나오게 되고,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힘센 가나안 민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땅을 기업을 얻게 된 배경에는 모두가 하나님이 살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귀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서 지금껏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신뢰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힘이나 재능이나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며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뜻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서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율법을 지키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며 살아갈 때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랑을 받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할 일은 자신들이 받은 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마음껏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1-13절에 보면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다는 증거로 가나안 중에 남아 있는 민족들과 더불어 친근히 지내고 혼인하고 피차 왕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가나안의 남은 민족을 쫓아 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되도록 하시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겠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심하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으로 보면 교회에 안다니는 불신자들과는 혼인도 말고 교제도 말고 친하게 지내지도 말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만약 불신자와 친하게 지내면 멸절해 버리겠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본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사고방식과 합류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친근히 지내고 혼인하고 피차 왕래한다는 것은 그들과 하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하나되고 마음이 하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생각이나 마음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마음이고 생각입니다.

 

 

 

 

즉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뜻을 세우고 자기 뜻의 성취를 위해서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뜻대로 안되면 낙심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불평하고 한탄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런 이방인의 생각과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이라면 이스라엘로 여기지 않으시고 멸절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누구의 후손이냐를 보시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는가를 확인하심으로서 이스라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 자, 이제 어떤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피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그 피를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주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게 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이며 은총이고 긍휼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긍휼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답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사랑을 집어넣으시고 은총과 긍휼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신자되어진 것이라는 고백을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고백 앞에서는 '내가 이렇게 못났는데' '나는 교회도 잘 나오지 못하는데' '나는 술도 못 끊고 담배도 못 끊었는데'라는 의심들은 물러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악함과 못남을 극복하고 자리하고 있는 사랑이고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질문을 한가지 더 하겠습니다. '당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총과 긍휼이 있다는 증거는 뭔가?' 이 질문에는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는 증거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나는 멸망 받아야 할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곧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고전 13:4-7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씀대로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가장하고 위장함으로서 흉내내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자가 온유함을 보여주고, 겸손을 보여주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사랑이 많아서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공로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에게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증거인 것입니다.

 

 

 

 

교회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을 가지고 교회로 오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 의해서 교회는 어지러워 질 것입니다. 자랑이 나오게 되고, 교만이 나오게 되고, 모든 공로와 영광을 자기 것으로 가로챌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자기 사랑으로 오는 자들을 막아내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 증거될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힘을 쓰며 모인다면 그러한 교회는 서로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제하고 받은 바 은총과 긍휼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있는 사랑과 긍휼을 마음껏 토해 놓는 현장입니다. 같은 사랑과 같은 긍휼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된 형제임을 확인하면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미래는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 지금껏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싸우심으로 안식을 주신 하나님에게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자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함이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물음에서 ''라는 물음의 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라는 물음에 대해서 뭔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자유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퇴보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에서 떠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멸절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면,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하심으로 살아났음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삶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세상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음이 증거될 것입니다.

 

 

 

 

 

수 23:14-16 온 세상이 가는 길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일을 하느냐?'일 것입니다. 소위 직업에 대한 문제가 사람들에게마다 중요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기술을 배우려고 하고 고학력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도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을 대하는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들을 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는 '무슨 일을 하느냐?'를 따져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고 대우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회로부터 대우받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대학교 교수라는 직업과 공사장 막노동꾼이라는 직업을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면 우리 역시 '무슨 일을 하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세상처럼 '무슨 일을 하느냐?'를 통해서 평가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어떤 일을 하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지 받지 않은 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똑같은 일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라는 말씀처럼 모든 일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주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은 남들 보기에 자랑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았을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며 살았을 수 있지만 결국 마지막 가는 길, 세상을 떠날 때는 내가 무슨 일을 했든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통해서 과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는가를 판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 좋은 일 나쁜 일의 구분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의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14절에서 여호수아는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고 이제 온 세상이 가는 길, 즉 죽음이라는 길에 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의 삶이 어떠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마지막 유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나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만 가는 길이 아니라 온 세상, 누구하나 예외 없이 빠짐없이 가야될 길을 여호수아 역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습니다. 아주 보편적이고 평범한 이치이고 자연적 법칙입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죽음을 늦추고 싶고, 될수록 이 세상에서 더 머물다가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온 세상이 가는 길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사도라고 해서 선지자라고 해서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늙는다는 것, 온 세상이 가는 길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아래서 인간은 그 누구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바로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며 살았든, 악한 일을 한 사람이나 착한 일을 한 사람이나 죽음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참으로 나약하고 별것 아닌 존재이고, 기껏 활개치고 살아봐야 70에서 80을 살다가 온 세상이 가는 길목에 서서 나도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그 길에 섰을 때 비로소 실감이 되고 내 마음속 깊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이 이치를 미리 마음에 두고 산다면 사는 것이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얼마 후에 국회의원 선거를 합니다. 신문을 보면 당마다 공천 문제로 인해서 시끄럽습니다. 공천을 안해준다고 폭력을 휘두르고 탈당을 하고 야단들입니다. 국회의원 한번 해 보겠다고 모든 것을 다 걸고 동분서주합니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자기 이권을 위해서라면 이웃이 짓밟히고 죽는다고 해도 나 몰라라 하면서 자기 것을 챙기고 지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을 온 세상에 가는 길에 서서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여호수아가 바라보았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여호수아가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늙어서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 노인네들이 그런 모습을 바라볼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인생의 헛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헛됨에 대해서 솔로몬이 깊은 고백을 했지 않습니까? 왕도 해보고 천하에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린 솔로몬이었지만 노년에, 온 세상이 가는 길목에 서서 인생을 돌아볼 때 그것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얘기들을 보고 들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이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 있는 여호수아가 곧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노년에 인생의 헛됨을 고백하는 솔로몬의 모습이 곧 우리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모습, 솔로몬의 모습이 마치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상관이 있다고 해도 아직 미치지 않은 저 멀리 있는 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헛된 것을 손에 놓으려고 하지 않고 쫓아가고 또 쫓아가면서 온갖 괴로움을 다 짊어지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 토요일 조선일보에 한국의 유명한 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씨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문 기자가 이번 선거에 나선 인물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박경리씨는 "시골 사람 셋만 앉아도 그 얘기요, 모두 권력 지향적이에요.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식인에게도 권력지향이 있고…. 공천에서 탈락한 이들은 스스로 영원히 끝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인지 기득권에 대한 그들의 집념이 너무 서글퍼요. 다 놓아 버리면, 그것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그 되찾아 오는 것을 맞이하면 될테인데, 그걸 몰라요. 다 놓아버리고 다시 찾아오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는게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 보면 슬퍼져요 왜 놓지를 못할까. 권력이나 명예가 너무 초라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74세의 노인이 정치인을 바라본 시각인 것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아옹다옹하는 모습들을 서글프게 바라본 것입니다. 허무함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74세의 노년에 이른 사람이 인생을 보니까 인생은 우리가 스스로 찾아가서 우리들의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을 맞이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다 놓아 버리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노년의 아름다움입니다.

 

 

 

 

신문기자가 다시 '선생님은 다 놓으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경리씨는 "소설 '토지'의 독자가 많다는 것이 내가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걸림돌입니다. 존대받으면 좋고 괄시받으면 싫지만, 존대받으려면 지불해야 할 것이 있으니 부담입니다. 산중에 혼자 사는 어떤 할머니가 갖은 김치를 다 담가놓고 젊은 학생들에게 노나주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 할머니가 진정한 자유를 갖고 있는 게지요."라고 답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작가라면 내 글에 대한 독자가 많기를 꿈꿀 것입니다. 독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 글이 인기가 있다는 것이고, 인기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가 높다는 것이고 가치가 높다는 것은 존경받고 대우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존대받는 것을 괄시받는 것보다 더 낫게 여기는 우리로서는 독자 많음을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주보를 펴내고 이곳저곳에 주보를 보낼 때, 제 주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주보를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만큼 제 설교가 알려졌다는 것에 대한 저의 만족이 아니겠습니까? 제 설교가 알려짐으로서 저의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는 이러한 의식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독자가 많다는 것이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라는 박경리씨의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물론 제 설교가 적혀 있는 주보가 인기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 몇 사람이라도 제 주보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제 설교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저의 자유에 걸림돌이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어떨 때는 주보에 글을 쓰기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쓸 수밖에 없는 저의 모습이 한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도 주보를 만들기 싫어서 이리저리 뒹굴며 '내일(5일) 주보 만들지 말까'라는 갈등을 수없이 하다가 겨우 억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합니다. 하기 싫으면 안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매주일 주보를 만들어 내는 나를 원하시는 것이 아닌데 왜 하기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그것을 붙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보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보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주보를 만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원하는 삶을 생각하기보다는 내 주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주보로 인한 내 삶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내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한 삶이기에 나 자신에게 구속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김치를 많이 담가 놓고 젊은 학생들에게 노나주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말에 공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이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놓지 못하고 있는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데 걸림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모든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존대받고 자신의 것을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욕심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니 아직 부족한 것 같고 더 많이 소유해야 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경리씨의 말처럼 인생에서 모든 것은 찾아오는 것이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주어진 것이지 우리 힘으로 쟁취하고 얻어낸 것들이 아닙니다. 우린 다만 조용히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맞이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자유를 누리는 자의 삶이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온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온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서서 이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가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이고 우리 역시 늙어지고 병들어서 이 길에 서야할 때가 있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면 오늘 미리 그 자리에 서서 여호수아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4절에서 여호수아는 '나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지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모두 너희에게 응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을 합니다. 즉 나는 사라지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죽어 가는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말씀을 바라본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말씀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16절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강조하는 것은 '다른 신을 섬겨 그에게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도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한 여호수아가 또 다시 거듭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서 멸절 당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치 아니하면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분명히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이루실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말씀대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겨 그에게 절하지 말라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지난 주일에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왜 유독 이스라엘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했습니다. 애굽과 함께 죽어야 할 자인데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들의 죽음을 넘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왜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신이기 때문에 강제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진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주어진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입은 자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의 도구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멸절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을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려면 지금껏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됩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팽개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시 가나안 민족과 똑같이 취급하여 멸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선한 일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서 끌어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세상에서 끌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야 하는지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우리도 들어서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데 무엇이 필요합니까? 온 세상이 가는 그 길에서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좋은 직업이 인도하는 것도 아니고, 출세한 자식이 인도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본다면 우리에게 가치있는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는 하나님의 약속일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을 것입니다. 좋은 직업이나 권세라는 것은 내가 세상에 존재할 때는 나와 함께 할지 모르지만 온 세상이 가는 길에 들어선다면 그순간 나로부터 다 분리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는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것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직업이 여러분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여러분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온 세상이 가는 길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직업으로 돈으로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젊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날 날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이미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인생을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이고 자유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하나가 버려질 뿐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다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약속만이 영원하며 말씀만이 그대로 이루어지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만이 귀한 것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수 24:1-13 내가


사람에게는 과거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나가 버린 세월들이 사라지지 아니하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과거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누구든 세상에 존재한 시간이 있는 이상 과거는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살아갑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후회하기도 하고 또는 과거에 비해서 낮아진 현실에 대해 비관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잘한 것, 잘된 것을 추억하면서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는 과거에 고생했던 것을 회상하면서 '옛날에 그렇게 고생을 해서 지금 이만한 것을 얻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과거에 집착을 하는 것은 모두 현실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나이가 든 사람은 과거에 젊었을 때를 생각하면서 나이든 현재에 대해서 낙심을 하기도 하고, 실패한 사람은 과거에 잘나갔을 적을 생각하면서 실패한 현재에 대해서 낙심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옛날 일을 기억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입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일부러 지울 수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과거를 기억하지 말아주세요'라는 말도 있지만 과거를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해서 마음대로 기억하지 않을 수가 있다면 세상사가 참으로 편할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자료를 삭제하고 입력하듯 과거의 일을 나쁜 것은 삭제하고 좋은 것만 입력해 넣을 수 있는 것이 사람 뇌의 구조라면 과거 나쁜 기억 때문에 고통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 머리에 있는 뇌라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머리 스스로 운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 없는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거 속에 살아가고 과거를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과거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삶이란 모두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든 현재든 또 앞으로 미래든 상관없이 모든 것은, 흘러가는 세월 속에 존재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여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드린 것은 먼저 여러분에게 분명히 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에 있어서 '나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 우리 인생이라면 과연 인생에 있어서 '나쁜 일'과 '좋은 일'의 구분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쁜 일'과 '좋은 일'은 모두가 육신과 연결된 세상일이 기준이 되어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도움이 되지 않고 손해를 보는 일이라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롬 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란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나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포함한 것입니다. 결국 나쁜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결과는 선을 이루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들이 지금껏 지나온 세월 속에 나쁜 일이란 없었으며, 또 현재에도 나쁜 일은 없고, 앞으로도 나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면 모두 나쁜 일이라고 여겨버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지향하는 목표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셨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 인생이 있는데 하나님이 불청객으로 들어오셔서 훼방을 하시고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 인생이란 하나님의 일 자체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일이 우리들의 인생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지, 우리 인생이 따로 있었는데 하나님이 불쑥 들어오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이 하나님의 일 자체라면 인생을 나쁜 일 좋은 일로 구분할 수 없으며, 과거 역시 좋았다 나빴다는 것으로 회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모아 놓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조목조목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과연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습니까? 23장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는 자들을 불러서 '나는 나이 많아 늙어서 이제 죽는다. 나는 죽지만 너희들은 앞으로 우상을 섬기지 말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고 살아야 한다'는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24장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불러서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앞으로 살면서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로 할말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과거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섬기겠다'는 자신의 결심과 작정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결심하고 하고자 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심 삼일'이란 말이 있습니다. 흔히 담배를 끊는다든지 술을 끊는다든지 할 때 '작심 삼일'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아무리 하고자해도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도박을 끊는 것, 마약을 끊는 것, 이 모두가 마음먹고 생각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중독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담배에 매이고 술에 매이고 도박에 매이고 마약에 매일 때 이미 그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지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믿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믿을 대상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믿고 살아가던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돈을 믿든지 아니면 권력을 믿든지, 그것도 아니면 자식을 믿든 자기 직장을 믿든 사람은 누구나 믿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믿고 의지했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을 붙들고 있던 것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붙들린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과연 이러한 믿음이 우리가 결심하고 생각했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는 것입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를 섬기겠는가? 여호와를 섬기겠는가 이방신을 섬기겠는가?'라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구동성으로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16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대답을 했을 때 여호수아는 뭔가 안심을 한다든가 아니면 그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스스로 여호와만 섬기고 이방신은 결단코 섬기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다짐하는 이스라엘에게 '아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믿는다는 것은 생각하고 다짐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다짐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수아의 이 말이 이스라엘을 무시하는 말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이스라엘의 믿음에 대해서 너무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되십니까? 하지만 여호수아의 그 말은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음이 생각처럼 되어지던가요? 여러분은 설교를 들으면서 수없이 많은 결심을 할 것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할 때 '그래, 주님만 있으면 되는데 왜 고민을 하는가? 돈 때문에 근심하지 말고 주님만 믿고 살아가자'라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은 '현실'입니다. 당장 돈이 필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결국 현실은 여러분이 교회에서 했던 생각과 결심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현실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이 생각처럼 쉽게 되어지는 것이라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을 하면서 자신에 대해 책망을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조차도 믿음의 문제에서만큼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고자 해도 안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에도 '불가능'이란 말은 붙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남자가 아이를 낳는 것까지도 어쩌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현대 과학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불가능'이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자 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붙들린 자로 태어납니다. 그러한 사람이 세상에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이 생각처럼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다짐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생각으로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삶을 통해서 항상 증명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마시고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시라는 것입니다. 삶에서 만나지 못한 하나님은 여러분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해도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결국 삶과 생각은 각각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과거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삶속에 존재하셨던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말합니다. 출발부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가족이었음을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비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면 아브라함 역시 아버지를 따라서 우상을 섬겼을 사람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고, 그 씨를 번성케 하기 위해서 이삭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발이 우상을 섬기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결코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모인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으로 섬기는 자로부터 이끌어 냄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믿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이처럼 간단하고 명료한 사실을 사람들이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으로만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의 출발이 과연 믿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믿음은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고 세상 것을 의지하던 자가 이끌어냄을 받아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내가'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내가'라는 말이 12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과거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일이고, 이삭이 주어진 것도, 야곱과 그 가족들이 애굽으로 가게 된 것도, 모세와 아론을 이스라엘에 보낸 것도, 애굽에 재앙을 내린 것도, 홍해를 건너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도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이스라엘의 손이 들어간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과거를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에 잠겨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가나안에 오게 된 것은 아주 먼 옛날 우리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나온 과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오늘 현재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과거의 하나님과 현재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항상 변화합니다. 과거의 하나님과 현재의 하나님을 각기 다르게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와 나쁜 일이 있을 때의 하나님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거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다'라고 하면서 좋아하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렇게 하는가?' 라고 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과거에 좋으신 하나님이라면 현재에도 좋으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좋다가 현재는 나쁘다면 그것은 한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을 각기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너희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자들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날 너희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된 이유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애굽에서 고생을 하던 것이나 홍해의 위기를 겪게 된 것이나 광야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지말고 실제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이방신을 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으로만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생각으로만 신앙의 삶을 살아가지 마십시오. 생각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시고 또 생각하신다면 그 생각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보여져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당부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안다면 그들의 삶은 이방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여호와만 섬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현재에 대한 불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현재에 대한 불만이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항상 현재적인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과거는 어디까지나 지나간 것입니다. 지난 과거가 현재의 신앙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과거를 말하는 것은 '옛날에는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렇게 잘나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너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나를 있게 했다면 오늘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현재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불평이나 원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만나고 삶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적은 것이 아니라 현재 처해 있는 곳에서 이미 받은 은혜를 따라 넉넉하게 살아가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현재에 대한 불만족과 원망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생각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분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십시오. 인생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것이라면 우린 삶 속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에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고생과 어려움 속에서 당시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는데도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은혜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오늘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섬기십시오.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선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지금의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섬기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수 24:14-28 여호와만 섬기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평소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에 대해서 마음을 두면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쓴 분이라면 어렵다고 할 것이고, 믿음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교회 출석과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이라고 생각되는 기초적인 행동만으로 신자로 자처하고 살았던 분이라면 믿음에 대해서 전혀 어렵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뭔가 여러분의 현재 신앙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 같은 말투로 들려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의 현재 신앙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대해 확인 작업을 하자는 의도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현재 신앙이 어떤 것인가가 확인 되어져야 내가 무엇에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이 교회 안에서만 국한된 문제라면 믿음에 대해서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일단 교회는 교인들에게 크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실한 교회 출석과 신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생활의 철저함과 그 외 교회에서 행하는 여러 행사에 가급적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좀더 첨가한다면 이웃에게 친절히 대하고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만 열심을 내준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있는 자로 얼마든지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생활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문제가 대다수의 교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의 활동의 여부로 결정되어지는 것이라면 믿음은 결코 어렵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회 안에서의 요구는 우리들의 결심과 노력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지냈다면 그런 분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등의 어려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열심의 정도이기 때문에 좀더 열심을 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교회 안에 국한 된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여러분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믿음을 생각하고, 교회를 나가면 믿음은 잠시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일년 365일 믿음의 문제에서 떠나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가 어렵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합시다. 여러분은 분명 주저 없이 ''라는 답을 내릴 것입니다. 여호와만 섬겨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려운 문제인지 쉬운 문제인지 점검할 필요조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마치 지금껏 여호와만 섬겨왔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껏 여호와만 섬겨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전혀 의심도 없이 '나는 다른 신을 섬긴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다른 신은 절대로 섬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만 섬길 것이다'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물론 교회 안에서의 신앙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하는 것은 예배고 기도고 헌금이고 봉사이지 않습니까? 그 속에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이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여호와만 섬긴다'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은 교회 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말합니다. 삶 자체가 믿음의 삶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삶은 과연 여호와만 섬기는가?'라는 물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의 신들을 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만 섬겨오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애굽에서 애굽인과 똑같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그 모습이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을 때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섬기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애굽에서 봤던 것을 그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모세가 사라진 불안한 상황에서 힘이 되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고 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 것이 아니라 모세를 의지하고 살았던 이스라엘이기에 모세가 사라진 상황에서 다시 힘이 될 것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게 된 것이나, 애굽에서 나오게 된 모든 것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모아 놓고 하나님에 의해서 오늘날 너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을 도운 것이 아니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가나안을 차지하기까지 그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고생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으며 애굽의 종으로서 430년의 세월을 지내야 했던 모든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약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게 되었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나타났으며 결국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는 오직 '내가'라고 말씀하는 하나님의 개입만이 있을 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인간의 노력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더러 '이제부터 우상을 섬기지 말고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자체가 오직 여호와만 힘이요 도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여호와를 힘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만 나의 도움이시오 힘이시라는 고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되는 것을 좇아가고 의지하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선포하고 나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섬기든 우상을 섬기든 섬길 자를 택하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을 도우시고 힘이 되시고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다. 따라서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싫다면 우상을 섬기든 말든 너희들이 알아서 섬길 자를 선택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보면 지금껏 우리들이 들어왔던 설교 내용과는 뭔가 느낌이 다른 말이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들어왔던 믿음이란 우리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들 스스로 선택을 해서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믿게 하시고 그런 인해서 천국가게 되어지는 것으로 들어왔던 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여호수아의 말은 마치 하나님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지옥가게 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지금껏 우리가 들어왔던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믿게 되었다는 말'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여러분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경위를 말하고 나서 '섬길 자를 택하라'고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무턱대고 '너는 하나님을 섬길래 우상을 섬길래'라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건축치 아니한 성읍에 거하고 심지 아니한 것을 먹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것을 설명하고 '누구를 섬기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여호와만 섬기겠다'라고 나설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모두가 우리들의 힘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것이 믿어지고 인정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자로 정하고 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그 믿음이 하나님을 섬길 자로 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의지와 생각과 판단으로 여호와를 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지식과 생각으로 인해서 여호와만이 섬길 자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험이 없습니까?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맞다.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가 왜 세상 것으로 염려하는가? 돈 보지말고 하나님만 보고 살아야지'라는 결심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마 말씀을 들으실 때마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결심은 누가 하게 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러한 결심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자라면 자기만 생각할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 이번 일만 잘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실패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심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아는 앎이 하나님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결단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섬길 자를 택하라'는 여호수아의 말은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앎은 우리들로 하여금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선택하게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마치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집니다. '내가 안해도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니까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발생하거나 문제가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잘되고 안한다고 해서 잘못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 대해서 마음놓고 네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네가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는 날마다 여호와만 섬길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된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삶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날마다의 삶에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있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고, 직장이 있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돈도 직장도 모두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길 자로 택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된 여러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결단을 16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7-18절에서 말하기를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자신들이 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단을 합니다. 여호와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이것만 보면 이스라엘은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다짐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19절)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결단코 우상을 섬기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는 이스라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능히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상황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누구를 섬기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우상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러분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라고 다짐을 합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웃기지 마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다짐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다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의 결심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하였는지를 모두 목격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 살면서 환경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고 나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 들어와서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 부딪히자 '왜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었는가?'라고 하나님을 원망을 합니다. 이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원망을 하면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부족한 것이 있으면 원망을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반복되었던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알고 있는 여호수아로서는 이스라엘의 다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다짐과 결심을 가지고 믿음을 유지할 수 없는 자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희의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할 것이다'는 이것이 곧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수아가 장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을 미리 예견한 말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에게 보다 더 강한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여호수아가 보다 더 강한 말을 함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철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이란 스스로 다짐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연약함이지, 강한 말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그런 연약함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여호수아가 단지 앞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것임을 미리 예언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지금 앞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견해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질투하시는 분이고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않으실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는 인간들이 섬기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해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을 요구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오직 여호와만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로 보시고, 그러한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 분이 여호와이십니다. 이런 여호와를 과연 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과연 섬길 수 있으십니까?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말에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라고 다짐을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자신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자신감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감도 세상 현실이라는 문제에 부딪히면 무력해지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해 놓고 섬길 수 없다고 하고 자신감이 있다고 해도 안된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증인'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했으니까 이제 너희가 너희에게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20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는 말씀에 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길 때에는 복을 받은 후라도 돌이켜서 화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큰돌을 세워서 증거로 삼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돌이 증거가 되어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때는 그들을 멸하심으로서 죄와 허물을 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어버린다면 그들은 우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은혜를 아신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귀한 은혜가 나로 인해서 짓밟히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허물과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에게 임하여도 좋습니다'라는 다짐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마치면서 말씀드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이 귀한 줄 안다면 자연히 은혜가 귀한 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귀함을 아신다면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삶을 살게 된다면 차라리 하나님이 나를 징계해서라도 은혜를 가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이기를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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