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스크랩] 사사기 강해 2

공 상희 2009. 5. 6. 13:29

 

 

 

 

 

 

사사기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삿 10:3-16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 도중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기를 즐겨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서 자기 만족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삶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질 수가 있고 결국 다른 신을 믿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과연 만족을 얻고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삶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불교를 찾지 않고 다른 종교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며 사는 삶에 만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자체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이 또 다시 우상을 섬겼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라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 말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던 것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다시 말해서 제사하던 것이나 할례 행하던 것 등 모든 의식을 다 철폐하고 이방 신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겼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그러한 의미로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수없이 반복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실패의 역사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하다가 우상을 섬기고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사 등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적인 행위는 지속이 되면서도 이방 신을 마음에 두고 그를 의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삶에 매료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다른 종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처럼 한 국가 안에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여러 종교가 존재하는 것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내용을 우리처럼 기독교를 믿다가 불교를 믿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지금 정착한 땅은 원래 이스라엘의 땅이 아니라 이방인이 거주하던 땅을 하나님에 의해서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멸절하라는 명령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들을 위해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놓았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는 것이 앞으로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도움이 되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입니다.

 

 

 

 

국가의 경제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분명 이스라엘보다는 가나안 족속이 한 수 위에 있습니다. 수십 년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 이스라엘에 비해서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살아온 족속이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발전했지 않겠습니까? 결국 가나안 족속이 살아가는 삶을 목격한 이스라엘은 그들의 삶 자체에 욕심이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부강하고 윤택하게 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둬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신을 섬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어느 쪽에 더 삶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돈 버는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고 가치를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빠지지 않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과연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결국 그 사람에게는 돈이 의지할 힘으로 존재합니다. 즉 돈이 우상인 셈입니다. 돈을 의지하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본문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어느 누가 완벽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그러한 말을 하기가 너무 부끄러운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역시 이스라엘처럼 겉의 행동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에는 다른 것이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떤 조치를 내리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방 신을 섬긴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에 팔아 버립니다. 7-9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팔 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우린 성경에서 이러한 내용의 말씀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징벌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볼 때마다 우리의 머리에서는 '하나님께 범죄하면 하나님이 징벌하신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자식이 잘못했을 때 매를 때리거나 야단을 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징벌을 하시겠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가 잘못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신자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징계하시는 것입니까? 뭔가 하나님 편에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징벌하시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면 멸망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징벌을 했다고 결론짓기는 사실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상을 섬긴 자들을 멸망하지 않고 돌이키게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이스라엘은 끝까지 멸망해서는 안될 민족들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참으셔야 하고 끝까지 돌이키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이 결국 멸망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이 단순히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사랑도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했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은 이스라엘을 위한 사랑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 또한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수요일에 설교를 하면서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탄이 땅으로 쫓겨난 상태에서 하나님은 사탄에 대한 완벽한 심판을 계획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은 결국 그들을 여호와의 군대로 삼아서 사탄의 세력과 싸우시기 위한 계획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로서 군사다운 모습은 여호와 앞에서 마음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을 고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고생한 것은 결코 애매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생 자체도 하나님에게 쓰여지고 있는 과정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군사다운 모습은 세상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부러워하지 않고 그들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서 떠난 것으로 증거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할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고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음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멸절하라는 것도, 이스라엘이 오직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가나안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내려진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마음에 이미 가나안 족속이 살아가는 삶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자리했다는 증거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가나안 족속의 삶에 대해서 부러움을 가진 결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어떤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개인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면 징계는 사탄과 전쟁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군사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사탄과 싸우는 것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이방 족속의 삶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삶은 오직 자신들의 번영과 성공을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신을 섬기는 것도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싸우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군사로서의 삶을 버리고 사탄의 세력에 합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징계란 단지 벌준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징계를 통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고 이방신을 불렀던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여호와를 부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고 외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자신들의 범죄를 알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동안 이방나라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을 섬긴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시는 구원치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11-13절). 이 말씀을 보면 앞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들리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두말하는 분이십니까? 그러므로 다시는 구원치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말썽만 피우는 자식에게 부모가 '너같은 놈은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다 나가라'고 했을 때 그것이 실제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실망과 진노의 표현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는 말씀 역시 실제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 택한 이방 신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부르짖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방 신은 이스라엘을 환난에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신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도 없는 신을 찾아서 부르짖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단지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게 된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금껏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으면서도 이방 신이 자신들을 책임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이방 신을 부른 그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셨고 인도하셨음을 잊어버리고 마치 다른 힘이 자신들을 인도한 것으로 여겨버린 그 자체가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어리석음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며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잊어버린 것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돈과 권력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돈만 있으면 인생을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돈이 내 손에 주어지고, 세상의 것을 누리게 된 것이 하나님 때문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에서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다른 힘되는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주위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받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아비멜렉 후에 돌라라는 사사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리고 돌라가 사사로 지내는 동안 이스라엘은 별 문제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돌라 후에 야일이 사사가 되는데,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고 그들이 어린 나귀 삼십을 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읍 삼십을 두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어린 나귀를 탔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 것과 같습니다. 즉 부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야일이 사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것은 부귀 영화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이스라엘이 야일이 죽은 후에 이방 신을 섬겼다고 한 것을 보면, 부를 누린 야일을 본 이스라엘의 마음에 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의 상징인 이방 신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들을 때는 뭔가 마음에 각오를 가진 것 같았는데 밖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이겠습니까? '지금껏 날 인도하시고 지켜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없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면서 변함 없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제대로 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 신이 자신들을 지켜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을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 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15절) 이것이 이스라엘의 외침입니다. 이스라엘이 보기에 좋은 대로가 아니라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시라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시는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지혜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러한 지혜로 바라볼 때, 그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렇게 쓰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즉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살아났고 그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왔기에 누구든 피 앞에서는 차별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 정신이 약자보호로 나타나고 서로 나누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내것을 고집할 때 결국 약자가 고통을 당하고 나누는 것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사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가나안 족속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신을 섬긴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여호와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하신 것은 단지 우리를 천당 보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여호와의 군대로 쓰시겠다는 의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이 땅에 내 것을 모으기 위한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세상에 신자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삿 11:1-11 입다


세상에는 여러 계층과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라는 것만 생각한다면 어떤 계층이나 종류라는 것이 성립이 안되지만, 세상은 사람을 단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통용되는 말 중에는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사람도 사람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상식과 이치에 의해서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도 그러한 분류와 평가에 대해서 한몫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구분할 때는 나름대로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가지는 기준이 다르지만 어쨌든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타인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즉 사람치고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지 않고 구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구분하는 것은 다양합니다. 윤리적인 사람은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사람을 평가할 것입니다. 그에게는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는 것보다는 예의가 바르고 도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돈 있으되 윤리가 없고 권력이 있으되 양심이 없는 사람보다는 괜찮은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반면에 돈 있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에 대해서 무능한 시각을 가질 것입니다. 결국 돈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돈이 있고 없고에 의해서 평가되고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이 있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을 때, 자연히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의 정신으로 굳어지게 되고 그 정신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부류와 어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떤 집단에 어울리고자 할 때는 자신과 상대방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뭔가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불편한 관계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 그 집단을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편안한 집단, 즉 자신에게 어울리는 집단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집단에서 그 집단의 특성과 전혀 맞지 않는 누군가가 끼어 든다면 집단은 그를 배척을 하게 됩니다. 배척을 함으로서 자신들의 고유성을 지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전혀 반대된 입장에 있는 타 집단에 대해서는 공격성과 배타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살아가시면서 그것을 많이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게 어울리는 모임이 있는가 하면 어울리지 않는 모임이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가령 돈 없는 사람이 돈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 참여했을 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이 배운 사람들만 모이는 모임에 갔을 때 그 모임이 편안하겠습니까? 역시 자신에게 어울리는 계층이 따로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람을 계층과 계층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계층은 자연스럽게 돈과 권력, 신분 등등의 기준으로 인해서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리고 이들 계층은 서로 공존하기가 힘들며 상위 계층은 하위 계층을 무시하게 되고, 하위 계층은 상위 계층에 대해서 공격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을 무시하는 것은 하위 계층의 사람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시하게 되어집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무시한다면 그는 분명 여러분 자신에게 도움을 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러한 계산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고, 무시했던 사람이 힘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입다라고 하는 사람과 길르앗 장로들과의 이야기입니다. 1절에 보면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며 '큰 용사'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즉 힘이 있고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출신은 비천하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기생이었던 것입니다. 즉 입다의 아버지된 사람이 정식 부인이 아닌 기생과의 인연에서 입다를 낳게 된 것입니다.

 

 

 

 

물론 기생이 낳았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고 취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생이 낳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편견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입다는 자신의 이복 형제 되는 사람들로 인해서 결국 다른 곳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2-3절에 보면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입다의 이복 형제들은 입다를 기생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기업을 이을 자식으로 인정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위협을 느낀 입다는 형제들을 피해서 돕이라는 땅에 거하게 되고, 평소 용사처럼 힘이 세었던 입다가 돕에 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잡류들, 즉 지금으로 말하면 불량배들이 모여들어서 입다를 추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입다는 형제들의 편견으로 인해서 쫓겨남을 당하게 되고 자기만의 집단을 형성을 하게 되는데 그 집단은 사회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잡류들의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그 잡류의 집단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4-6절에 보면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말합니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힘입니다. 많이 배운 것이 전쟁에서 필요하지 않습니다. 돈 많은 것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합니다. 물론 현대의 전쟁에서는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무기를 사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무기가 많아도 지도자 없이는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입다 외에는 전쟁을 책임질 지도자가 될만한 용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큰 용사 입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평소 입다가 길르앗에서 힘있는 모습을 많이 보였던 것으로 알 수 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길르앗 사람들로서는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입다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오게 되고 자기들의 장관이 되어서 암몬 자손과 싸워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이들은 전쟁이 없었다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장로라면 그 사회에서는 어른이며 존경받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분명 그 장로들도 그들의 사회에서는 지도자 위치에 있었을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 인격 등 여러 가지가 많은 사람들 보다 뛰어났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행실이 좋지 않은 잡류들과 어울리는 입다에 대해서는 당연히 배척을 했을 것입니다. 분명 평소 같으면 함께 할 수 없고, 입다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는 그런 관계의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힘이 있어야 하는 전쟁의 위기가 닥치자 결국 입다의 힘을 원한 것입니다. 장로들이 평소에는 무시했던 입다를 찾아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위기에서 구출해 줄 수만 있다면 입다 같은 사람이라도 우리들의 지도자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이러한 부탁에 대해서 입다는 조롱을 합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7절)는 말을 보면, 입다가 자신을 쫓아낸 길르앗에 대해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를 쫓아낸 것은 길르앗의 장로가 아니라 그의 이복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길르앗 장로들에게 너희가 나를 쫓아내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은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가 쫓겨가는 것을 묵인했거나 동조했기 때문일 수 있고, 또는 입다가 자신이 쫓겨난 것에 대해서 길르앗 전체에 대해서 감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에게 대해서 선의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지를 않습니다. 서로가 조화될 수 없는 계층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서로 공존하게 되고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한쪽은 힘을 필요로 하고 한쪽은 필요로 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힘을 필요로 한 쪽은 힘의 도움을 구하는 댓가로 자기들의 장관으로 삼겠다는 것이고, 힘을 가진 자는 도와준 댓가로 그들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과 똑같은 상황, 즉 전쟁 때문에 일어나는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평소에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사람의 도움이 급하게 필요할 때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평소 나를 무시하던 사람이 찾아와서 자존심을 다 버리고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옳은 것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평소 여러분을 무시하던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할 때, 기쁜 마음으로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어쩌면 입다처럼 '나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조롱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평소 무시를 받았기 때문에 도와준 대신 그들의 위에서 그들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린 오늘 본문을 보면서, 길르앗 장로들이나 입다가 전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장로들은 전쟁의 위기가 닥치자 힘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힘으로 삼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전쟁의 위기가 없는 평소에는 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했을지 몰라도 그 섬김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섬김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삼자의 도움을 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었기 때문에, 힘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큰 용사인 입다의 도움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삶의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에 급한 상황이 되자 하나님이 아닌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입다의 힘을 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그들의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위기 상황에서 무엇을 먼저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살아간다고 믿고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입니다. 아무일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다고 여겨질 만큼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살아간다고 여겨지는 삶에서 '이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살았는지 아니면 입에서는 하나님을 말했지만 정작 삶은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생각했는지가 위기 상황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이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삶이었다면,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평소의 삶에서 잘되든 못되든 모든 삶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마음 깊이 인식하는 믿음으로 살았다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도우시든 순종하려는 모습이 증거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하기 때문에, 내 힘으로도 살 수 있다고 여겨지고, 내가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삶이었다면, 위기 상황에서 보여지는 것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줄 가장 확실한 힘을 찾아서 그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길르앗 장로들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현재 살아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진심으로 인정하시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위기 상항에서도 가장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이 도우시겠지'가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에서 자신의 모든 상황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이런 믿음이었다면 그들은 과거에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이방인들을 자기들의 손에 붙이신 것처럼, 지금 역시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고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다를 찾아가서 우리들의 장관으로 삼을 것이니까 도와달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입다는 어떻습니까? 입다가 그들로부터 쫓겨남을 당하고 그로 인해서 감정이 좋지 않음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입다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9절에 보면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볼 때 입다가 장로들과 다른 것은, 입다는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자기 손에 붙이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입다는 과거에 하나님이 이방인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심으로 승리한 여러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믿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라는 말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붙이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었다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붙이심으로서 기드온이 미디안에게 승리를 했을 때, 이스라엘은 기드온에게 자기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머리되기를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머리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붙이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붙이신 결과로 승리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나말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승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입다가 '하나님이 암몬을 내게 붙이신다면 내가 과연 너희들의 머리가 되겠느냐?'라는 말을 한 것은, 결국 하나님이 붙이셔서 승리케 하신 것을 자기 공로로 돌려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길르앗 장로나 입다나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하나님이 아닌 입다의 힘을 구하는 것으로 다른 한쪽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힘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믿음 없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위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도움이 되는 확실한 힘을 찾아서 세상을 헤매는 우리의 현실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도우심의 결과를 내것으로 삼으려는 우리들의 현실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특히 교회가 목사를 초빙할 때 교회의 믿음 없음이 보여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교회가 목사를 초빙할 때, 목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가를 보는 경우가 참으로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목사니까 당연히 믿음의 부분은 인정해 버리고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교회가 목사의 입을 통해서 복음을 듣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목사에게 원하는 것은 대개가 교회 부흥입니다.

 

 

 

 

가령 목사가 돈만 밝힌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을 때, 평소 자신의 교회와 상관이 없을 때는 '목사가 돈만 밝힌다'고 하면서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목사가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소문이 있고, 또 자신의 교회에서 목사를 초빙할 일이 생겼을 때 돈 밝힌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만 시킨다면 돈을 밝힌다는 것쯤은 문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만난 관계는 거래 관계일 수밖에 없고 교회는 목사의 재주로 교회의 사람이 늘어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목사는 자신이 교회를 부흥시킴으로서 교회에 대해서 머리 노릇을 할 자격이 주어진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사가 아무리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말한들 그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도우신 결과를 자신의 공로로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가상으로 얘기한 것이지만 이러한 현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믿음이 있다면 서로 공존할 수 없고 조화될 수 없는 관계가 믿음을 빼버리고 힘이라는 관계에서 만났을 때 얼마든지 공존이 가능하고 조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참된 공존과 조화는 믿음에서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애초부터 서로가 긍휼과 자비라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살았다면 쫓아낼 필요도 없고 쫓겨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시할 이유도 없고, 나중에 찾아와서 고개 숙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믿음이 빠진 인간관계가 어떤 식으로 되어질 수있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이 없는 채 서로 만난다면 평소에는 서로 무시하고 배척하다가도 자신에게 필요하다 싶으면 찾아가서 무시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을 하게 되고, 무시를 받았던 사람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조롱을 하는 모습들이 보여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란 자기 이득을 챙기는 계산에서 만나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믿음이 빠진다면 신자의 관계, 즉 교회는 세상처럼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는 관계로 되어지고 맙니다. 필요할 때는 다가가고, 필요가 없을 때는 무시하고 배척하는 관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마음속에 복수라는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번 우리 자신들이 어떤 관계에서 만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은석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관계에서 만나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깊이 살펴봅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서 싫은 것을 좋은 척 다가가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그리고 상대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상대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내게 있는 것으로 도움을 주려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증거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이 만나는 자리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될 뿐입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입니다.

 

 

 

 

 

삿 11:12-28 나 자신을 보자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실수는 잘 보이지만 자신의 실수는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물론 자신의 행동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해도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실수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타인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했을 때는 가차없이 비판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타인에게서 실수가 보이게 되면 그것을 지적하면서 고쳐주겠다고 설칩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빼내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본다고 하고 그것을 빼내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항상 필요한 것은 형제의 티를 발견하고 그것을 비판하기 이전에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발견하고 그 들보를 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 스스로 들보를 눈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의 티를 말한다면 오히려 잘못된 자는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그냥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에게는 티가 있지만 나에게는 들보가 있음을 알고 형제의 티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에게서는 형제에 대한 책망이 아닌 사랑이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들보를 발견하게 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들보가 있는지 우리의 들보를 발견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들보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들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의 들보가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지난주에 이어서 입다의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의 내용은 입다가 기생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형제들에 의해서 내쫓김을 받았는데, 암몬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전쟁의 위기를 맞게 되자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 우리들의 머리가 돼서 암몬 자손을 물리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는 인간관계를 볼 수가 있었고,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자들이 맺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을 때의 인간 관계는 절대로 형제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필요에 의해서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입니다. 필요할 때는 그가 누구라 해도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필요하기는커녕 함께 함으로서 귀찮고 피해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되어질 때는 가차없이 멀리하고 내 곁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입다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맺어지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장로들은 입다로 인해서 암몬에게 패하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입다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워줌으로서 그들의 머리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입다는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 암몬에게 사자를 보내서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잘못된 것임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돌려달라고 하는 암몬에 대해서 돌려 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입다의 말이 옳게만 보여집니다. 즉 암몬 자손의 주장이 옳지 않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자기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입다가 다른 사람의 티에 대해서만 책망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13절의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취한 연고니 이제 그것을 화평히 다시 돌리라"는 말씀을 보면 암몬 자손은 자기의 땅을 이스라엘이 빼앗았으니까 이제 그 땅을 돌려달라는 주장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다는 그러한 암몬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에 대해서 책망을 합니다. 15절에 보면 입다는 이스라엘이 모압과 암몬 자손의 땅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민수기 21:24절에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쳐서 파하고 그 땅을 아르논부터 얍복까지 점령하여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암몬 자손의 경계는 견고하더라"는 말씀을 보면 입다의 이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암몬 자손의 땅을 취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19절부터 22절에 보면 입다는 이스라엘이 아르논에서 얍복과 요단까지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용납하여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매 이스라엘이 쳐서 그 땅 거민 아모리 사람의 온 땅을 취하되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사람의 온 지경을 취하였었느니라" 즉 아모리 왕이 이스라엘을 선대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이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이신 하나님이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는데 그 땅을 달라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 입다의 주장입니다.

 

 

 

 

입다의 말대로 분명 그 땅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으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암몬 자손은 그 땅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모리 사람들에게 그 땅을 빼앗겼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모리 사람들이 암몬 자손에게 빼앗은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것입니다. 결국 암몬 자손은 예전에 우리 땅이었으니까 이제 돌려달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암몬 자손 역시 억지 주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암몬 자손은 원래 우리 땅이었으니까 달라고 하고 입다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니까 달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 본문을 보면서 과연 누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암몬입니까 아니면 입다입니까? 저는 둘 다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암몬 자손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땅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돌려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로서 땅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입다에게 도움을 구한 것은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땅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생존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국가란 땅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땅이 없이는 국가도 없습니다. 땅이 클수록 국가의 힘도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조그만 땅덩이인 독도를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서로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것도 독도가 누구의 땅이냐에 따라서 국가의 영역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입니다. 즉 영역을 위한 싸움이지 독도라는 땅덩이가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입다를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땅에 대한 시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그 의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단지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한 터전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심으로 주시고자 하는 땅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했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입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2절에 보면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라고 합니다. 입다는 지금 내 땅이라고 말합니다. 내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자신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머리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머리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땅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다의 마음이나 암몬의 마음이나 이스라엘의 마음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땅에 대해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자기 삶의 기반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동일하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나 입다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암몬 자손이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은 단지 땅을 기반으로 해서 먹고사는 일에 풍성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땅은 인간에게 소득을 줍니다. 곡식과 목축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는 생존에 위협이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민족이 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때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것은 단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땅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땅에서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민족을 다 쫓아내신 것도 그들이 땅에서 살아가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하나님을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신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남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소유권 주장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입다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들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에게는 그러한 들보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책망하고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누군가를 무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군가를 무시하기 이전에 내 자신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지를 점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때로 심판을 거론하면서 불신자에 대해서 '심판 받을 자'라고 하면서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신 것은 불신앙에 대해서 공격하고 심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신자는 다만 자신이 알게 된 그리스도를 전하며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의 악이 어떤 것인가가 드러날 것이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심판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믿음을 가진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지 자신을 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암몬 자손이 우리 조상이 살았던 땅이니까 돌려달라고 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니까 돌려줄 수 없다고 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땅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생존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입다는 하나님에게 심판을 부탁합니다.

 

 

 

 

27절에 보면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라고 큰소리칩니다. 심판하시는 여호와에게 판결을 부탁하는 것은, 하나님을 내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이스라엘 자손의 편이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땅을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나 입다가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면 심판하시는 여호와를 내세우면서 판결을 부탁하겠습니까?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안다면 암몬 자손과 이스라엘 중 누가 옳으냐라는 판결을 묻기 전에 스스로 자신들 역시 땅에 애착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회개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를 아는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진실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많은 모습들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보기보다는 항상 타인의 잘못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이 보여진다면 나에게도 그러한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조건 자신은 옳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신학이 옳고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옳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편이고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옳을 수가 있고 성경 해석 또한 바르게 할 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옳고 하나님 역시 내편일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옳으니까 내가 옳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보지 못하게 만드는 크나큰 장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의 왕에게 "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25절)라고 말합니다. 모압 왕 발락도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운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압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압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함으로서 싸움을 걸지 못했는데 발락보다도 미약한 암몬이 감히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입다의 또 하나의 착각은 모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지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입다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내세워서 자신의 강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입다의 착각입니다. 결국 입다는 하나님은 이방민족이 두려워 할 분이지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은 두려워 할 분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입다의 말은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입장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 백성으로서 누리는 것만 생각을 합니다. 23-24절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사람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가하냐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 땅을 우리가 얻으리라"고 말하는 것을 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방인을 쫓아내신 분으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나타내지 못할 때 쫓겨날 수밖에 없음을 이방인의 쫓겨남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전혀 쫓겨날 자로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과연 입다와 다릅니까? 입다와 같은 오류 속에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기 바랍니다. 나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전지대에 있다고 여기고 자신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하지 않은 채 단지 타인의 부당함과 잘못에 대해서 외치는 일에 부지런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자신을 결코 의에 자리에 두고 타인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생존을 위해서 땅에 집착을 하듯, 우리 역시 생존을 위한 땅의 일에 집착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지 않습니까? 다만 다른점이라면 세상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신자는 생존을 위한 땅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지 않음을 알고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살기를 소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서 내 힘으로 삼으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소유당한자로서 살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삿 11:29-40 입다의 딸


믿음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자기 이해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구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이 믿음을 말한다면 그 믿음은 틀림없이 인간의 상식에서 표출된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이해와 믿음이 각각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누구인가라는 이해를 했기 때문에 믿음이 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결국 믿음은 인간의 자기 이해로 인해서 만들어진다는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자기 이해' 자체가 곧 믿음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믿음을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이해란 무엇입니까? 과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자리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답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아니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한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평행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직의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고 인간은 감히 하늘을 꿈꿀 수 없는, 땅에서 땅과 함께 거하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을 가진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직에 위치에 있다는 것은 땅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요구할 할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과 거래할 수도 없고 단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을 받아먹고 살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제대로 깨달은 인간이며 이러한 인간이 믿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먹고산다는 것이 곧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을 살피려면,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임을 알고 살아가는가를 살피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가? 충성하는가? 기도하는가? 헌금하는가?'를 살펴서 믿음을 판단하고 계산하려고 한다면 필시 스스로 믿음을 갖추려는 시도를 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믿음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이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이해를 망각하지 않는다면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필시 믿음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역시 자기 이해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고발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우리들의 실체를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좋은 그림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놓고 감상을 하듯이 입으로 감탄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을 바라만 보고 감상할 때 잊어버리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고통입니다. 그저 그림을 즐기는 것만 있을 뿐 화가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가의 그림을 직접 그릴 때 도저히 화가를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럴 때 그림을 감상하고 끝나기보다는 화가의 고통을 생각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 역시 그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린 십자가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면서 다만 감상하는 것만으로,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해버립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은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함과 죄인 됨을 알 것이고, 그 이해로 인해서 십자가의 능력이 어떠하며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자기 이해'에 대한 것입니다. 자기 이해 없이는 믿음을 말할 수 없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십자가가 아님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 이해란 스스로의 무능력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깨달을 때 인간은 겸손해질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해가 없을 때 인간은 교만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과 평행의 위치에서 어떤 거래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서 뭔가 해줄 수 있는 분이라면 나 역시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면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겠다'는 불신앙의 발상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계약을 하고 거래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이러한 거래를 만들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는다면 감히 하나님과 거래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입다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입다의 불신앙에 의해서 누가 애매하게 희생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11장이 내용을 다시 요약을 하면, 입다는 큰 용사였지만 기생에게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가문의 위신을 생각한 본처 자식들에 의해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그 후 암몬 자손들이 자신들의 땅을 내어 놓아라는 이유로 이스라엘을 위협하게 되고, 이스라엘은 결국 힘있는 입다를 찾아서 자기들의 머리로 삼을 테니까 암몬의 위협에서 구출해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입다는 암몬 자손들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부당함에 대해서 따지게 되고 결국 암몬 자손의 왕은 입다의 말을 거절하고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입다나 입다의 형제들이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힘의 논리로 일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힘이 필요 없을 때에는 체면과 위신과 가문을 힘으로 삼던 자들이 힘이 필요하자 체면이니 위신이니 하는 그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자신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입다에게 매달리고 입다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자기 좋은 대로 일을 처리해나가는 신앙이 없는 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그들의 기억에는 하나님이 살아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은 전혀 살아 계시지 않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자신들 역시 그런 수준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여러분을 계몽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설교는 계몽이 아니라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외쳐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열려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장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닌 것이 믿음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여겨지는 오류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에게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다면 결국 생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믿음 없음이 어떤 모습인가를 말씀드리고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30,31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암몬 자신을 자신에게 붙이시면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구든 자신의 집 문에서 가장 먼저 나와서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곧 입다의 불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역력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하나님과 인간은 수직관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직관계에서는 거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위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감사할 뿐이지, 그것이 아래에 거하는 자에게 있어야 할 모습이지 감히 위에 계신 분에게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나도 당신에게 이렇게 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회사에서 말단 직원이 회장에게 '회장님이 나를 부장으로 승진시켜 주시면 나는 회장님에게 내 재산을 다 바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과연 그것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회장에게 없는 것, 진심으로 회장에서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을 바치겠다고 했다면 아마 거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서로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장의 직책에 있는 사람이 말단 직원의 전 재산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회장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입다가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 즉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과연 사람을 필요로 하신 분입니까? 결국 입다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사람을 제물로, 그것도 가장 먼저 영접하는 자를 제물로 바친다고 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정성이 돋보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헛된 서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어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이렇게 해주시면 이렇게 하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심지어 우리들의 머리를 가지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을 희게 하고 검게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소관이지 인간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관이라면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겠습니까? 이렇게 해주시면 신학교를 가겠다느니, 아들을 목사가 되게 하겠다느니, 헌금 얼마를 바치겠다느니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잊어버리고 마치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불신앙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 하나도 자기 마음 먹은 대로 검거나 희게 하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검게 하시든 희게 하시든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다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을 한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마 입다는 자신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오는 자가 자신의 종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종이라면 당연히 누구보다 먼저 상전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입다가 외출해서 돌아올 때면 종이 가장 먼저 영접했었기 때문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서원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입다는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한 자는 자신이 제물로 삼아도 아깝지 않을 그런 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난 상황은 입다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암몬 자손을 입다의 손에 붙이십니다. 결국 입다는 승리를 거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집에서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한 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무남독녀 외딸이었던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고 말합니다. 비록 딸이 둘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아비로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군다나 무남독녀 외딸이라면 입다로서는 무척 사랑하는 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입다의 마음은 3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는 구절을 보면 자신이 딸이 마중을 나오는 것을 본 입다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서원으로 인해서 결국 딸이 죽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어찌 참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입다의 딸은 입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애매하게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암몬 자손을 붙이신 것은, 입다의 불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딸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암몬 자손을 붙이신 것이나 자신이 가장 먼저 아버지를 영접하게 된 것은 아비인 입다의 불신앙을 드러내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가 서원한 대로 자신에게 행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처녀인 상태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즉 깨끗한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입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깨끗한 딸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입다는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한 자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내게 붙이면 승리한다는 말은 했지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우시면 자신을 영접한 자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 곧 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신앙 없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있는 것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시면 그냥 쓰시는 것이지 우리가 바치기를 기다려서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바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 서보지 못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모릅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다에게 하나님은 입다의 딸을 입다에 의해서 죽게 하심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가 어떤 것임을 보게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주시고 입다의 딸을 집에서 가장 먼저 나오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입다의 불신앙에 의해서 깨끗한 입다의 딸이 희생한 것처럼,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깨끗하신 그리스도가 희생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치 입다의 딸이 '이것은 아버지를 위한 하나님의 일이니 말한 대로 행하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세상에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일로 여기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다가 자신의 딸을 보면서 자신이 옷을 찢으며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애통해 한 것처럼, 우리의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애통해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참담해 하는 것이 십자가를 제대로 대한 신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자신의 삶에 십자가가 세워짐을 원하며 하나님께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40절에 보면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본문의 중심은 입다도 아니고 입다의 승리도 아닙니다. 입다로 인해서 애매하게 희생한 입다의 딸이 중심입니다. 사람들은 매년 입다의 딸을 위해서 애곡합니다. 이것은 신자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은 희생하신 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일을 중심으로 하지말고, 우리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희생하신 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희생하신 분이 있음을 알고 그분으로 인해서 애통해 하고 자신에 대해서 참담해한 경험이 있는 자만이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임을 발견한 자만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생명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교회로 모였다면 하나님은 분명 여러분들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는 말씀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알고 어떻게 되어지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되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삿 11:34-40 입다의 괴로움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 성경이 선포하는 말씀이고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현재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들을 볼 때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소말리아 등의 여러 나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수만 명이 굶어 죽는 상황을 말하면서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이런 상황을 왜 일어나게 했으며 또 왜 그냥 방치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환경이나 상황을 내세워서 신의 사랑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습니까? 신자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는 하지만 과연 세상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즉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니까 아예 생각조차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멀리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의 문제에서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과연 여러분 자신의 현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현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의 삶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진심으로 삶에 있어서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을 가장 최선의 복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삶을 두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말만 할 뿐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현재의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꼬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랑을 말하면서 삶에 대해서는 사랑이 나오지 않고 한탄만 나온다면 그것은 사랑을 이용하고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셨다면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신세한탄보다는 감사와 기쁨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생은 괴롭다는 말을 합니다. 인생이 괴롭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푸념일 것입니다. 사실 삶이 우리의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삶이 인간의 의미와 소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다르고, 또 한편이 원하는 것이 다른 편에는 막대한 손해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일 수있기 때문에 인간의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큰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볼지언정 내가 이익을 누리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 인간의 본심이기 때문에 자기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누구나 낙심하게 되고 인생 자체에 대해서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배후에는 분명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우리들의 뜻대로 일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는 괴로움을 우리에게 안겨주십니까? 이것을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의 괴로움을 통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입다는 암몬 자손과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게 서원을 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면 집에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하는 그를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지에 돌아갔을 때 일어나는 상황은 입다로서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입다는 자신을 영접할 그가 자신의 무남독녀 외딸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35절에서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자신의 딸이 나온 것에 대해서 옷을 찢을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상황에 대한 반응입니다.

 

 

 

 

입다에게는 괴로움 이전에는 분명 기쁨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일순간에 괴로움으로 바뀌어 버리는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입다에게 기쁨인 것은 자신이 원하고 계획한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입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는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얼마든지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서 자신이 계획하고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일어난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입다가 제물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은 분명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순전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입다가 원하는 기쁨입니다. 즉 입다는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해주면 자신도 그 보답으로 내 정성을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입다의 의도대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다가 원하는 대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입다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입다의 딸로 하여금 입다를 영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입다가 원하는 대로 기쁨을 주시고는 다시 입다를 괴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서 입다가 무엇으로 즐거워하고 무엇으로 괴로워하는지를 보이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입다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으로 기뻐하고 괴로워하는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사랑으로 인해서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삶의 즐거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다가도 일이 마음대로 안될 때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고 뭐하는가?'라는 불평과 괴로움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일이 잘되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증거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입다가 제물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입다의 딸이 나왔을 때 괴로워 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입다가 하나님에게 바치겠다고 한 것은 자신에게 없어도 될만한 것을 바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있어서 귀한 것이 사라질 때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런 수준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우리 자신의 일이 잘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잘되는 기쁨으로 살아간다면 결국 일이 잘 안될 때는 괴로워하고 신세한탄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계획하고 이루고자 하는 일이 마음대로 안될 때 누구든 괴로운 마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괴로움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괴로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입다의 괴로움과 입다의 딸의 괴로움입니다. 입다의 괴로움이 자신이 예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라면, 입다의 딸의 괴로움은 아버지인 입다의 죄로 인한 괴로움인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고 말합니다. 입다의 딸이 자신이 처녀로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두 달 동안이 산에서 애곡하겠다는 것은 입다의 딸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못한 채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원통함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입다의 딸의 괴로움은 깨끗한 자신이 아버지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하는 괴로움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드러나는 입다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고, 입다의 딸은 곧 우리들의 허물로 인해서 죽어야 하셨던 깨끗하신 예수님의 괴로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괴로움만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허물로 인해서 죽으셔야 했던 예수님의 괴로움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이 괴로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이 잘 안되는 것으로 인해서 괴로워 할 때 하늘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로 인해서 괴로워하시고 탄식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주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고 무덤이 있은지 사흘만에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을 찾아오십니다. 그때 마르다가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했을 때 함께 계시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만이 아니라 마리아도 예수님 앞에서 울면서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는 슬픈 일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푸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주기만 했다면' '예수님이 도와주기만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라는 생각이 우리들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때가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님은 내가 어려울 때 함께 하시고 도와주는 주님만이 진짜 주님다운 주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가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만약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자신의 일이 잘 되는 것과 잘되지 않는 상황에 의해서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셨을 때 마르다는 마지막날에는 다시 살 것을 나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나사로가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고 울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우셨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울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울음이 서로 대비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울음은 다만 자신들에게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슬픔입니다. 그들은 분명 부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사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결국 부활을 알지만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보시기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괴로움은 우리의 믿음 없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입다 때문에 두달을 애곡하고 죽은 입다의 딸처럼 우리의 허물 때문에 고통을 받으시고 죽은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일이 잘 될 것인데'라는 기대는 하나님의 기쁨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쁨이 되어주시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우리들의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설사 내 생각대로 되어졌다고 해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잘 안되었다고 해도 역시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있게도 하시고 괴로움이 있게도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기쁨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셨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일이 잘된 것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기쁨만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에만 감사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할 일에 대해서만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괴롭게 하는 우리의 허물임을 깊이 생각하시고 우리의 허물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달으시고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삿 12:1-6 에브라임의 시비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는 감정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인간에게서도 기쁠 때의 행동과 슬플 때의 행동, 분노했을 때의 행동들이 크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서도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행동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절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지배된 채 전혀 뜻하지 않은 다른 행동을 보일 때가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이 누그러졌을 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잠 16:32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것이 우리들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노함을 참는다는 것은 잠시동안의 극복이지 노함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상대방에 대한 감정 자체를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감정에 의해서 인간의 행동이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면 사실 인간의 감정은 타인에 대해서 무서운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서 살인을 하고 이웃을 해치는 소식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누군가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때 그에 대한 칭찬의 말이 나오기보다는 흠잡는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감정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에 의해서 여러 가지 악이 발생하는 것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누구든 시기와 질투가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우리 자신조차 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은 있다고 해도 그렇게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시기와 질투에 의해서 가장 먼저 발생한 사건은 살인 사건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이면서도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까지 하게 된 것은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동생과 똑같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지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것을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한 시기며 질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은 인정하시고 자신은 거부하시는 것으로 인한 시기며 질투였던 것입니다.

 

 

 

 

가인의 시기와 질투는 자신과 동생을 비교함으로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동생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에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곧 살인입니다. 이처럼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는 형제라는 관계까지 깨뜨려버리고 살인을 일으키는 행동을 낳게 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지 않는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지든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다는 것이고 나보다 잘난 것으로 보이고 나보다 많이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웃에 대해서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단순히 이웃과의 감정적인 문제가 아닌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발생한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결국 그 가문이 사만 이천명이 죽게 된 것입니다. 본문이 내용은 이렇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합니다. 이제 입다는 온 길르앗의 머리로 대접을 받을 것이고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시기하고 나선 자가 에브라임 사람들이었습니다.

 

 

 

 

1절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몰려와서 하는 말은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울 때 왜 우리를 불러서 함께 전쟁을 하도록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입다가 에브라임 사람을 무시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 대해서 가지는 마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입다 한 사람이 영웅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입다는 창녀가 낳은 자식으로서 자신들보다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 감히 입다가 자신들의 영광보다 더 높아지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에브라임이라고 했을 때 과연 어떤 마음일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교인들이 어울려서 관광을 가기로 했습니다. 여기저기 연락을 해서 몇 명이 어울려서 좋은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관광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럴 때 만약 여러분이 관광을 가자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할 때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섭섭함과 내가 무시당했다는 분노와 저희들끼리만 좋은 구경을 하고 왔다는 시기와 질투 등 참으로 여러 가지의 감정이 작용을 해서 자신을 빼놓은 채 관광을 간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가지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빼놓은 것에 대해서 항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브라임이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누리는 영광을 생각해 볼 때 자신들이 그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입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무시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이러한 시비는 입다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도 같은 시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8:1절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고 말합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전쟁에서 기드온은 하나님이 미디안을 붙이심으로 인해서 크게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이 기드온이 승리한 것을 보고는 왜 우리를 전쟁에 부르지 않았느냐고 항변을 한 것입니다. 그때도 역시 에브라임은 기드온이 승리함으로서 누리는 영광이 탐났던 것입니다. 우리도 전쟁에 참여했다면 저런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결국 기드온에 대한 섭섭함으로 이어지고 기드온에게 항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또 다시 입다에 대해서 똑같은 이유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안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욕망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자신들보다 뛰어나게 되고 자신들보다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때 그것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입다에게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고 말합니다. 결국 입다에 대한 시기는 입다와 그 집안을 없애버리겠다는 분노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분노는 에브라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있는 인간 모두에게 있는 분노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 대해서 시기할 때 그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에브라임의 마음인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사실 입다는 에브라임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라고 말합니다. 11장에서는 입다가 에브라임을 전쟁에 불렀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2절의 내용을 보면 입다가 에브라임을 전쟁에 불렀는데도 에브라임이 입다를 돕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에브라임이 억지를 부리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경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에브라임은 기드온에게 전쟁에 부르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분명 그들은 기드온의 부름에 의해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였습니다(삿 7:24-25).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예 전쟁에 부르지 않았던 것처럼 기드온에게 시비를 건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입다가 자신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했고 에브라임은 그 요청에 대해서 거절했으면서도 결국 전쟁이 입다의 승리로 돌아가고 그로 인해서 입다가 뛰어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보고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시비에 대해서 입다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고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내게 붙여서 승리하게 되었는데 이제와서 내게 시비를 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결국 입다는 길르앗 사람을 모아서 에브라임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4절의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는 말씀을 보면 전쟁을 하게 된 이유가 단지 에브라임이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입다와 길르앗을 무시하는 에브라임의 말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길르앗 사람이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이며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헐뜯습니다. 즉 길르앗을 자신들에게서 도망을 친 하찮은 족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으로서 상대적으로 입다의 영광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도 역시 에브라임의 억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길르앗은 므낫세 지파 사람인 마길의 아들 길르앗의 후손이지(민 26:29) 에브라임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의 아들들로서 같은 혈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에브라임에서 도망을 쳤다고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어느 누군가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면 어떻게든 그를 꺾기 위해서 온갖 말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본문의 사건은 오늘 우리들에게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입다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말에 대해서 참지를 못하고 에브라임과 전쟁을 하게 되고 그 전쟁에서 에브라임 사람 사만 이천명이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도망을 치는 에브라임 사람을 색출하기 위해서 에브라임 땅과 연결되는 요단 나루턱을 지키고 나루를 건너는 사람들로 하여금 십볼렛이란 발음을 하게 해서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에브라임 사람으로 간주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본문의 이러한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이 본문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에브라임과 입다 모두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자신보다 큰 영광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보이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입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 역시 누군가에게 무시를 받았을 때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지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의 본문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지 내 영광을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보다 더 누군가가 영광을 받고 높아지면 참지를 못합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를 간직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시비와 모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죄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 것인데 인간이 자기에게 관심을 둠으로 인해서 시기와 질투가 있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살인과 모함, 원망 등등의 악함이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입다의 승리는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가지고 인간들이 서로 자기 잘남을 드러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는 문제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마치 내것인양 여기고 그것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 때문에 자랑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없는 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면 쓸데없이 비교하거나 시기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삶이 너무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다른데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마음을 뺏긴 자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의 마음은 이미 세상에 빼앗겼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보다 귀한 영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주어지는 영광 때문에 비교하고 시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땅의 것 때문에 누군가에 대해서 시기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하늘의 영광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수시로 나오는 것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그리고 남으로부터 무시 받은 것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분노입니다. 우리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발견될 때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죽었음을 생각합시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들임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죽어야 할 죄인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인해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음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세상에서 참으로 귀한 것은 나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시고 오직 주님에게만 감사하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영광도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남으로부터 무시를 받으면 섭섭함과 분노가 나오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무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조물로부터 무시를 받으시고도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맡겨진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시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우리의 성품을 발견하면서 또 다시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는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 대한 섭섭함이 있을 때 그 섭섭한 마음에서 자신의 악함과 허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는 시기와 질투보다는 자기의 허물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사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삿 12:7-15 사사들의 삶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는가를 보면 온통 삶의 질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지 삶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내용은 단지 삶의 질이 충족된 사람들, 즉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큰 부담이 없는 사람들이 누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가끔 생각해 볼 문제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우리는 삶의 질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도 배부를 때 찾는 것이지 배가 고픈데 무슨 하나님이냐'는 푸념을 하기도 합니다. 배가 불러야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볼 마음을 여유를 가지는 것이지 배가 고픈데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 편해야 하나님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이것은 결국 신앙생활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자들이 누리는 취미생활 정도로 여긴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종교에 대한 시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찾는 분이 아닙니다. 배가 고프든 배가 부르든 항상 변함없이 찾고 불러야 할 분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부름을 위해서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배부름이나 배고픔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질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좋게 해줘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주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질을 좋게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는 것에 걱정만 없으면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힘드니까 기도도 안되고 성경 보는 것도 안되고 봉사도 못한다는 푸념들을 많이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환경이 그것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이라는 것이 누구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환경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에게 방해가 되는 것을 자기 백성에게 주셨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환경과 삶의 질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과 삶의 질이라고 해도 믿음은 불변입니다. 즉 세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배고픈 대로 믿음은 드러나게 되어 있고, 배부르면 배부른 대로 믿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신자의 삶의 내용이 삶의 질 때문에 사라져 버리고 희미해진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는 증거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삶의 질만 좋으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몰라도 너무나 모른 것이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한 무지에서 발생한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질을 생각하는 믿음이라면, 그는 배고프든 배부르든 상관없이 이미 자기 삶에 치우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는 문제가 최우선이지 하나님이 최우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배부르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배부르면 배부른 대로 자신의 여유를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배부름에 취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것인데 이미 처음부터 삶의 질을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배고플 때 하나님을 믿지 못한 사람은 배부름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배고픔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사람은 배부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어도 배부름은 같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배부름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서 살아도 잠자는 것은 같습니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그 몸은 같은 몸입니다. 옷이 사람의 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질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삶의 내용은 단지 태어났다가 살고 죽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그릇으로 본다면 그 그릇에 무엇이 담고 살아가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무엇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삶에 닮길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삶의 흔적이 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단지 먹고 살아가는 것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문을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본문은 입다 이후에 일어났던 사사들의 이름이 몇 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7절에서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입다가 죽은 후에 입산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입산이 죽고 11절에 엘론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하고 엘론이 죽은 후 압돈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무엇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입다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사사들이 특별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할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태평성대라고 해서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할 일이 없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목사가 태평성대라고 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할 일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 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증거하기에 힘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목사가 아닙니까? 그 일이 태평성대라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사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로 세움을 입는 것인데 태평성대이기 때문에 사사가 되었다가 죽었다는 것만 남긴다면 사사로서의 삶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은 없이 단지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만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삶에 담길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그의 뒤에는 베들레헴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었더니 딸들은 타국으로 시집보내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여자 삼십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고 말합니다. 입산에게는 아들이 30명이고 딸이 30명이라는 것을 보면 입산의 부인이 여럿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산은 아들을 위해서 타국에서 여자 30명을 데려왔고 딸은 타국으로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타국에서 여자를 데려오고 타국으로 시집보냈다는 것이 이방인과 교류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다른 가문, 즉 다른 지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어쨌든 입산이 자신의 자식을 모두 타국의 사람과 결혼을 시켰다는 것은 오늘날 자식을 무조건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부모의 허영심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내 나라에서는 만족을 못하기 때문에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면 그만큼 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13-14절을 보면 "그의 뒤에는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어서 어린 나귀 칠십 필을 탔었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고 말합니다. 10:4절에 보면 야일이란 사사에게도 아들 삼십이 있어서 나귀 삼십을 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나귀를 탔다는 것은 부요함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압돈에게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어서 나귀 칠십 필을 탔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요함을 누렸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사사로서의 삶이 단지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는 것, 아들을 위해서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오고 딸을 외국으로 시집보냈다는 것, 아들과 손자가 나귀를 탔다는 것, 이러한 기록만 있는 사사라는 것은 결국 그들이 사사로서 살았지만 사사로서의 삶의 내용은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사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사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장로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로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담을 그릇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삶에 담겨지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담겨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담겨지고 있습니까? 신자는 단지 살아가는 문제보다는 삶의 내용이 중요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삶의 내용은 우리들의 위대한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삶의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담긴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담긴 삶을 산다면 자연히 그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은혜와 사랑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희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배고픔은 물론 고생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고생을 추구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은 우리가 추구한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배부름이든 배고픔이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며 어떤 환경이 주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배고픔에는 사랑이 없고 배부름에 사랑이 있다면 배부름은 중요한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어디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다면 삶의 질은 우리에게 결코 중대한 문제로 남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몫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어떤 삶에서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삶에서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중요한 삶의 내용입니다. 많은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삶의 내용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증거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물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영접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에게 진심으로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지 삶의 질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되었다는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마음을 크게 두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가 되었다 장로가 되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천국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는 증거물이 아닙니다. 무엇이 되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안다면 그 희생으로 살아가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흔적이 여러분에 삶에 담겨져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담겨지고 있는 것들은 무엇의 흔적들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희생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흔적들입니까 아니면 단지 멸망 받을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흔적입니까? 본문의 사사들에게서 발견되어지는 삶의 흔적은 사사로 산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산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사들과 동일한 삶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그 이름과 업적이 역사 속에 남게 되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책에도 기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는 다만 그 이름만이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인간에게 업적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인간을 부르셔서 일하신 주님의 일만 있을 뿐입니다. 즉 주님의 업적만 있을 뿐이고 그 업적에 감사하며 살아간 그리스도인만 영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위대한 업적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위대한 일은 이미 주님이 하신 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일 앞에서 또 별개의 위대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희생이라는 주님의 위대한 업적 앞에서 우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면서 주님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주님의 이름 안에서 영광되고 위대해지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위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는 주님의 희생만 담겨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희생으로 살아갈 때 여러분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희생이 아니겠습니까? 이 희생이 여러분의 삶에 담겨지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삶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에 담겨진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냥 먹고 산 얘기입니까? 예수님의 삶에는 하나님에게 순종하신 그것만 담겨 있을 뿐입니다. 남들처럼 그냥 살아가지 마시고, 삶의 질에 관심을 두려고 하지 마시고, 삶의 내용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들어있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의 흔적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삿 13:1-7 삼손을 잉태한 여인


오늘은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있는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성탄에 대한 즐거움은 가득한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모습들은 희박한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해서 나 자신에 대한 책망을 해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분명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자고 만들어 놓은 날입니다. 따라서 12월 25일이 예수님이 오신 날이 맞느냐에 대해서 따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오신 정확한 날을 찾아서 그 날을 지킨다는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에 성탄의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성탄은 하루가 아니라 매일 계속되어져야 할 날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날마다 계속되어져야할 것이지 일년중 하루로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성탄절을 기뻐한다면, 과연 우리의 삶의 매일은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까? 만약 매일의 삶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전혀 없었는데 성탄절이라고 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그 기쁨을 진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매일 그리스도로 기뻐한다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감정적인 기쁨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는 그 복음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들로부터 해방되는 삶을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쁨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큰 기쁨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일이 신자에게는 불안과 염려로 자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것을 말합니다. 즉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것이 싫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여러분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들이 빼앗기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탄절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기뻐하지만, 진정한 성탄의 기쁨은 세상에서의 기쁨과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인 것을 생각하시고 과연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암몬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케 하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날을 지냅니다. 그러다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행한 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동안 이스라엘이 행한 악을 보면 아마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었는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평안할 때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평안 속에서 자신들의 안락에 깊이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성도 느끼지를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없어도 괜찮다는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고 쾌락에 도움을 주는 신에게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여호와 앞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는 열심히 하나님을 부르다가도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급한 문제가 있어야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신앙이라면 평안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을 부를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안할 때, 이 평안이 여호와로 말미암았음을 알고 여호와께 감사하는 신앙이라면 힘들 때도 역시 여호와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여호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치우쳤습니다. 지난주에 사사들의 삶은 자기 자식을 위한 것밖에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식을 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이 삶의 목적이었고 전부였던 것이 당시 사사들이었습니다. 결국 사사의 삶이 그랬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악을 행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 그들을 40년 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심으로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구원하시기 위해서 단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의 아내를 통해서 삼손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생각할 것은, 이왕 구원하실거면 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서 40년을 고생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입을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악을 본다면 40년이 아니라 영원토록 압제를 당해도 마땅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방인의 압제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고통이 무엇 때문인가를 깊이 인식할 때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포기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능히 포기할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대다수의 신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세상을 풍족하게 살아가는데는 보탬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삶에 있어서 번거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나면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되고,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되고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켜야 할 규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나실인이 아닌 마노아의 아내, 즉 삼손을 잉태한 여인에게까지 포도주와 독주 그리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나실인이 아닌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나실인으로 택함을 받은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나실인의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뭐 그리 힘든 일이겠는가라고 여기겠지만,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 포도주는 일상 주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들에게 쌀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안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큰 번거로움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싫어한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아무런 불평 없이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겠지만 늘 대하는 것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번거로움은 참으로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규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들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구별된 자라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몸에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한 적이 없고, 또한 자신이 나실인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한 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바치운 나실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의 몸을 통해서 낳은 아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을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처녀이기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마리아와 요셉 본인은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처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처녀로서는 크나큰 불명예이고 요셉에게도 마리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서 잉태한 아기가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이며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실 자라는 것을 말했을 때 마리아는 자기 뱃속의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46-55절을 보면 마리아의 찬양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는 찬양을 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 예수를 잉태케 하신 것이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합니다.

 

 

 

 

결국 마리아가 자신의 몸에 잉태하신 구주를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비천에 처한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고, 예수가 곧 자신을 비천에서 건져낼 구주로 오신 분임을 알았기에 기뻐하는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처녀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고통을 돌아보지 않게 할 만큼 큰 기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말한 비천에 처했다는 것은 가난하다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상태를 의미한 말입니다. 즉 죄악가운데서 구원받지 못할 자로 살아가는 인간 자체가 참으로 비천에 처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실태를 마리아가 알았기에 비천에서 건져낼 구주의 오심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었으며 구주가 자신과 함께 한 것이 곧 복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 역시 아이를 잉태케 하심으로서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하라는 규례를 지킨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들었을 때 이제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규례에 대한 번거로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태어나는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에 있게 된 것입니다. 즉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태어나는 아이는 한 개인의 번거로움 따위는 돌아보지 않게 할 만큼 의미가 있는 탄생이었던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또 12절에서도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제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있는 오늘 그리스가 오셨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나 삼손을 잉태한 마노아의 아내에게 동일한 것은 아이를 잉태한 것이 자기 개인에게는 희생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처녀로서의 희생, 그리고 평소 살아가던 삶에서의 구별, 이 모두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과 구별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잉태된 아이를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아이가 현재 자신들의 비천한 처지를 구원할 자로 오셨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40년 간 압제를 받고 있는 비천한 처지에서 구원할 자로 잉태된 아이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요구되는 구별된 삶에 기꺼이 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처지가 어떠함을 알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이 처지란 세상의 소유나 지위 환경으로 인한 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을 의미한 처지라면 소유가 많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따라서 성탄 역시 의미 없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주어진 환경에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환경이 좋지 못할 때 자신들이 처한 처지가 비참하다거나 좋지 않다고 불평들을 합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지에서 구원할 자는 환경을 좋게 해주는 메시야일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삶에 풍족함이 주어질 때는 예수로 기뻐한다고 하면서도 풍족하지 못할 때는 기뻐하지 않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잉태된 것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은 비천에 처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신의 처지가 어떠함을 아는 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오심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자신들에게 어떤 희생이 요구되고 번거로움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한 성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하나님에게 바쳐진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살아갈 자로 택함을 입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실인을 잉태한 마노아의 아내에게까지 나실인의 삶이 요구되는 것은 구별된 자를 잉태한 사람답게 구별한 삶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면 나실인으로 태어날 아이가 나실인이 안된다든지 무슨 영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나실인으로 살아감으로 인해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옛사람으로 살아가던 삶을 계속 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세상에 오심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하늘로 가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과 우리들의 삶이 서로 구분된 채 계속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예수님의 삶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의 삶에서 새사람의 삶으로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한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이 있으며 그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별된 자의 구별된 삶입니다.

 

 

 

 

세상과 구분된 삶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관심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있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관심을 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분명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삶이란 생각한 것처럼 편안하고 많은 혜택과 도움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비천함, 즉 죄인된 인간으로서의 자기 처지를 가슴깊이 인식한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오심은 무엇보다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에서 어떤 희생과 손해가 요구된다고 해도 기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오심의 기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 성탄이란 진정으로 기쁜 날이 아니겠습니까?

 

 

 

 

 

삿 13:15-25 기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은총을 받을만한 존재입니까? 비록 우리 스스로는 우리들의 행함을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인간은 소멸되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마땅히 심판 받고 소멸되어야 할 대상이 그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심판이 없는데서 아무리 사랑을 말한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은 마땅히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랑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 4:2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이 말씀 앞에서 해당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것이고, 소멸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오직 악을 행하는 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서 태에서부터 하나님에게 바치운 나실인이 된 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마노아의 아내에게 잉태된 아이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잉태된 아이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것이며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애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악을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속에 구원자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우리는 마땅히 죽을 자들입니다'를 아는 것으로 출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마땅히 죽을 자임을 아는 것과 그것을 간과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마땅히 죽을 자라는 의식이 있을 때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를 살리는 자'입니다. 마땅히 죽을 자가 죽지 않는 자로 남을 때 그는 그것을 은혜로 여기게 되고, 누구 때문에 죽지 않을 자로 남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자임을 간과해 버린 다면 그는 자신을 마땅히 살 자로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살려주기 위해서 오신 분에 대한 감사함과 그분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있겠습니까? 오직 자신에게만 모든 관심을 둘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마노아는 자신 앞에 나타난 자가 여호와의 사자임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17절에서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그 이름을 묻고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여호와의 사자의 신분을 알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마노아는 자기 앞에 있는 자는 앞일을 예언하는 선지자 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한 예언이 이루어질 때 그를 찾아서 그 이름이 존경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이름을 물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노아의 물음에 여호와의 사자는 '내 이름은 기묘니라'고 답합니다.

 

 

 

 

기묘란 분명 이름이 아닙니다. 기묘라는 것은 이해를 초월한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즉 인간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 즉 아이가 없는 그의 가정에 아이를 주시는 것은 기묘하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의 말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립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이적을 일으켜서 불꽃이 단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고 여호와의 사자도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갑니다. 이것을 본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19,20절). 그리고 마노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자기 앞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눈 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마노아는 자기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이상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달랐습니다. 23절에 보면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다면 자기들의 손으로 드린 번제와 소제를 받으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서 그 모든 일을 보이지도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마노아의 아내는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은 것은 자신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이 주신다는 아이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심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 이점을 잊어서는 안되는가 하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 또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감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님을 안다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헛된 것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많은 교인들이 이점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자신 스스로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뭔가 바치고 행함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기 힘으로 자신을 하나님에게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심과, 죄인들 속에 뛰어 들어오신 것에 대해서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죄인들 가운데 오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하나님을 봤으니 죽어야 한다는 마노아의 말에 대해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려 하셨다면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고 자기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이를 주시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은 이유를 하나님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마노아의 아내에게 아이를 나실인으로 키울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하셨지만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볼 때 삼손의 존재 이유는 삼손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삼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삼손을 왜 이스라엘에 보내신 것입니까? 그리고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에게 압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악은 여호와를 바라보고 살아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으로 부름 받은 삼손을 이스라엘 안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번제를 받으시는 것은 마노아 때문이 아니라 마노아의 가정에 보내시는 아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가정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시기에 마노아의 번제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근거를 우리 쪽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이러이러하니까 나는 믿음이 있는 자고 그러니까 나는 구원을 얻을 자다'는 생각을 추호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영광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모르는 무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들이 여호와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제사를 잘 드렸다'든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다'라는 쪽으로 의미를 두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가진 확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번제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고 아이를 주신 이 모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 하신 분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행한 행함에 의해서 확신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우리에게는 확신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게 하시는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님을 아는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는 자신의 행함이나 실천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독생자 그리스도가 세상에 보내졌다는 것이 곧 구원의 확신으로 자리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제 마노아의 가정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가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하나님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노아가 자신이 만난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인 것을 알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가정에 아이를 주겠다는 것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이 없는 가정에 아이를 주겠다는 선지자의 예언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그 일이 이루어지면, 당신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당신의 능력을 높이고 존경하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내 이름은 기묘니라'고 말씀하면서 아이가 태어나는 모든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신비롭고 놀라운 일임을 드러냄으로서 마노아로 하여금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개입된 일임을 알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이 자기들의 삶에 개입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죽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자 하기 위함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이를 대할 때에 다만 자신들의 아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보냄 받은 아이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자기들에게 머물러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염소 새끼를 잡으려고 했을 때만 해도 이들의 관심은 여호와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 두게 하기 위해서 '내 이름은 기묘니라'고 말합니다. 마노아가 하나님을 알았을 때는 자신은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을 알았을 때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는 자는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마노아가 자신이 집안에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여호와의 사자를 환대한 것처럼 자신에게 좋은 일을 일으키는 신을 환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죄인된 자신들이 마땅히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죽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아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산 자가 되었음을 감사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아들을 영화롭게 함으로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마노아가 아이를 대할 때 우리 가정을 살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대하는 것처럼 신자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산다는 생각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산다는 것, 이것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지 않을 때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일에만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다면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살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삿 14:1-4 삼손과 부모의 갈등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즉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신자가 도움이 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과연 하나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구제하고 전도하는 것까지, 소위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생각해 볼 것은 도움이라는 말에 대해서입니다.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유익이 된다든가 보탬이 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 보탬이 된다든가 유익이 된다는 의미가 있게 됩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사람이 하는 일들이 하나님에게 보탬이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것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역사를 보면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순종했다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징계와 가르침에 의해서 일순간 하나님께로 마음이 돌려졌을 때 나타난 현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번 순종했다고 해서 다음부터 스스로 순종하며 살게 된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불순종으로 나아간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죄인된 인간으로서 타고난 습성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말도 생각도 행동도 자신이 중심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유익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을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처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이 본성을 다스리는 외부의 힘이 개입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이점에 대해서 생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평소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결국 자기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삼손의 결혼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장성한 아들의 결혼 문제로 인해서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이 발생한 사건입니다. 1,2절을 보면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삼손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딤나라고 하는 곳으로 간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블레셋 사람인 한 여인을 만나게 되고 삼손은 그 여인이 마음에 들어서 자기 부모에게 그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속국이었지만 블레셋 사람의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었고 블레셋 사람과의 혼인도 가능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삼손이 자기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발견하고 자기 부모에게 그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대개 부모로부터 두 종류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허락하는 것이고 하나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허락을 하는 것은 자식이 원하는 결혼 상대자가 부모의 마음에 들었거나,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허락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원하는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3절을 보면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라고 말합니다. 부모가 삼손이 원하는 여인을 반대한 것은 그 여인이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반대에 대해서 삼손은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니까 날 위해서 그 여자를 데려와 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삼손의 부모는 가문을 의식한 것 같습니다.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의 딸이기에 안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가문과 우리의 가문은 질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삼손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서 거절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이방인과 혼인을 함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것을 염려해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약 삼손의 부모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면, '할례 받지 아니한'이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블레셋 사람과의 혼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남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부모는 삼손에게 가문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할례 받은 것에 대한 우월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과 혼인한다는 것을 가문의 위신과 체면의 문제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부모의 거절에 대해서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단순히 좋아한다는 이유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4절에 보면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고자 한 것은 그 여인을 이용해서 블레셋 사람을 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블레셋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나서 기회를 봐서 그들을 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딸과 결혼하고자 한 것은 선한 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분명 신 7:3,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4절의 말씀을 보면 삼손의 부모는 그 일들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 인줄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고자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부모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기에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만약 이것이 맞다면 삼손은 옳고 그 부모는 틀린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지한 하나님이 삼손을 이방인과 혼인하도록 해서 블레셋을 치도록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은 가지고 계셨지만 그 방법이 굳이 삼손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이방여인과의 혼인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삼손은 결국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으로 인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16:21, 30). 따라서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고자 한 의도가 분명 옳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이유로 옳지 못한 것을 옳은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모순이라 말할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 이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집안의 자식이 불신자와 결혼하려고 할 때 부모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를 합니다. 그럴 경우 자식은 '내가 그 집안에 장가가는 것이, 혹은 시집가는 것이 그 집안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인 줄을 누가 압니까?'라는 항변을 함으로서 결혼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진심으로 자기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자가 없음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서 나온 일이라고 해서 여호와가 삼손에게 블레셋 여인과 혼인할 것을 지시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지시를 하신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핑계 대고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삼손에게 이방인과의 혼인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러한 상황을 만드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로 나온 것이라는 말은 삼손의 결혼이 여호와가 의도하고 지시한 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삼손이 이방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삼손의 부모와 삼손의 잘못됨이 드러난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블레셋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 그 누구도 개입되지 않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삼손에게 블레셋 여인을 만나게 함으로서 이것이 결혼의 문제로 번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삼손과 삼손이 부모의 갈등이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만약 삼손의 부모가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면 삼손의 결혼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문제를 언급하기보다는 삼손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에게 바치운 사람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하며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임을 앞세우는 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부모로서 옳은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앙인의 부모로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식을 대할 때, 그리고 여러 상황과 문제들을 대할 때 내 입장과 내 가문과 내 생각을 중심으로 행동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식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우긴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상황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자식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는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 역시 삼손의 결혼 문제로 인해서 결국 가문을 생각하고, 할례를 받았나 안받았나 하는 외적인 문제만을 중시하고 살아가고 있었음이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삼손을 가르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삼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자로 살았다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방인과 혼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술수와 방법을 이용해서 블레셋을 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삼손이 자신의 힘을 믿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만난 조그만 일이 결국 삼손이나 삼손의 부모 모두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삼손이나 삼손의 부모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께로 나온 것임을 모르고 오직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문제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삼손과 삼손의 부모를 통해서 드러난 것처럼, 사람은 항상 자기 생각과 자기 입장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든 상황과 문제를 바라보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우리의 불신앙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불신앙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돌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지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일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앞에 일어난 상황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앞에 일어난 상황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입장과 생각에 의한 행동과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 하는지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 중심으로는 행동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부모의 입장과 생각만 고집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식과의 갈등뿐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만드셨는가를 생각한다면 결국 그런 상황을 통해서 부모인 내 자신이 평소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식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의 입장과 욕구만 주장할 때 그것이 곧 그 중심이 하나님이 없는 모습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일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풀어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신자로서 극히 타당한 모습입니다. 무슨 일에든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 할지라도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에 만들어 놓으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반응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가가 증명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누군가와 다투게 된다면 분명 다툼의 원인이 있습니다. 우린 대개 그 원인만을 생각하면서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만 따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툼으로 번지게 됩니다. 평소 우리 속에 담고 살아가던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부부싸움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에서 서로 자기 입장만 생각한다면 싸움은 그치지 않고 계속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모든 것은 서로 사랑하는 도구요 수단이 될지언정 싸움의 원인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즉 삶에 믿음이 속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삶이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삶의 일부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삶이 구분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산다면 생각하는 것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고, 행동하는 것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과 행동 모두가 자신의 욕심에서 나오는데도 믿음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말씀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날마다 여호와를 바라고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평소에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믿음을 말하지는 맙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뻔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일에서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안목입니다. 눈이 뜨인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경이면서 자신의 소경 됨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눈이 뜨여야 한다는 필요성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왔음을 아는 자, 그가 바로 여호와를 보고 사는 신자입니다.

 

 

 

 

 

삿 14:5-9 삼손과 사자


현대는 능력 위주의 사회입니다. 인간도 능력으로 그 가치가 평가되는 사회이기에 능력에 따라 사람의 값이 달라집니다. 어차피 세상이 사람의 능력을 사고 파는 현장이니 만큼 이왕이면 능력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자신을 비싸게 파는 것이 곧 출세요 성공입니다.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가 상승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그 열망에 비례해서 자기 능력의 향상에 대한 열망도 역시 같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에 비해 정작 자신의 능력은 너무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 상대적으로 절망감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감으로 인해서 '나는 할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포기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에 유행하는 말 가운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할 수 없다'는 포기보다는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삶이 필요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는 이 말처럼 현대인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가지게 하는 말도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능력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복음과도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능력을 원하고 자신이 뭐든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슈퍼맨 같은 자가 되기를 꿈꾸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성경에 등장하는 힘있고 능력있는 인물들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이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구절들 역시 신앙인에게 있어서 인기 있는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의 풍조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능력은 무엇이며 믿음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이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점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힘있는 남자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흠모의 대상인 삼손이 맨 처음 힘을 발휘하는 내용입니다. 삼손이란 이름을 대할 때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센 영웅을 상상할 것입니다. 삼손의 체격 역시 골리앗처럼 건장한 체격에 근육질의 사나이로 인식되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힘없는 나약한 체격의 남자에게 삼손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손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은 본문의 내용을 크게 오해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삼손은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게 됩니다.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간 이유가 삼손의 결혼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1절에서 삼손은 딤나에서 한 여인을 만났고 그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부모에게 요청을 했었고 삼손의 부모는 반대를 합니다. 그러나 결국 삼손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한 삼손이 부모가 삼손과 함께 딤나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내려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삼손은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6절에서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은 것처럼 찢어 버립니다. 5절에서 삼손이 만난 사자가 어린 사자라고 해서 태어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먹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새끼 사자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즉 고양이처럼 귀여운 새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 사자라는 것은 그만큼 젊다는 것이고, 젊다는 것은 힘이 왕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삼손이 만난 사자는 힘센 젊은 사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자를 마치 염소 새끼를 찢은 것처럼 찢어 버렸다는 것은 백수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가 삼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삼손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이 의미하는 것이 이것이 전부라면, 즉 삼손이 얼마나 힘이 센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무용담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문에서 성경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삼손이 힘이 세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손이 힘이 세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힘센 삼손이 우리를 구원하기라도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삼손이라도 믿으라는 것입니까? 분명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의지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힘과 우리의 구원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삼손의 엄청난 힘이 그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이스라엘로서는 사자조차도 염소새끼를 찢는 것처럼 찢어버린 힘있는 삼손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는 분명 다른 상황에 살아갑니다. 우리를 압제하는 민족도 없습니다. 삼손처럼 강한 힘을 가진 영웅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센 삼손은 오늘 우리들과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문은 삼손의 엄청난 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가 오늘 우리들의 숙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삼손이 사자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감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다른 행동입니다. 우리들의 상식대로라면 사자를 죽인 사실을 부모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부모로 하여금 자식이 사자를 죽일 만큼 힘이 있음을 알게 함으로서 기쁨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달리 사자를 죽인 사실을 감춥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8절에서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삼손이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삼손은 힘이 세다'는 선입견을 버린 채 오늘 본문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삼손은 힘이 세다'는 선입견을 버리라고 말씀을 드린 것은 6절에서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삼손이 사자를 죽인 것은 여호와와 연관이 있습니다. 즉 날 때부터 힘이 센 삼손이 사자를 죽였다는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삼손을 내세워서 사자를 죽인 사건을 일으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것은 곧 여호와가 개입된 사건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사자를 만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사자와 같은 존재는 누구입니까? 당연히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은 힘이 센 강대국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의해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삼손이 사자를 죽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삼손을 내세워서 블레셋을 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자를 죽인 삼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삼손의 배후에서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삼손의 힘은 하나님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삼손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삼손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지 삼손의 육체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삼손의 육체는 믿음의 대상이 전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힘있는 삼손을 믿을 것이 아니라 삼손에게 힘을 주시고 삼손을 쓰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다 안다'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당연한 말을 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당연한 것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태반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면 '당연한 말이다'고 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삼손이 부모에게 사자를 죽인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삼손이 사자를 죽인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입을 다문 것은 삼손의 부모가 삼손이 사자를 죽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삼손 자신을 바라보고 의지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힘있는 삼손을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영웅으로 여기고 그를 높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자신의 문둥병을 고쳐준 엘리사에게 예물을 줄려고 하자 엘리사가 그것을 결코 받지 않은 의도와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나아만으로부터 예물을 받지 않은 것은, 만약 자신이 예물을 받게 되면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은 오직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엘리사 자신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라는 오해를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만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물을 받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을 높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바울이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을 고쳤을 때 무리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서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행 14:15)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사도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를 세우신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인데 사람들은 정작 복음을 드러내고 전하는 사람을 의지하는 어리석음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생각한다면 삼손 역시 부모가 하나님이 아닌 자식의 힘을 의지할 것을 염려해서 사자를 죽인 사건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삼손이 사자를 죽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여자를 취하기 위해서 딤나로 내려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딤나로 가는 길에 자신이 죽인 사자의 주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사자의 몸에서 벌 떼와 꿀을 발견합니다. 죽은 사자의 몸에 벌이 집을 지은 것으로 볼 때 아마 죽은 사자의 몸이 바싹 마른 상태가 아니었는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썩고 있는 시체에 벌이 집을 짓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고 밝히는 것이 성경을 대하는 목적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죽은 사자의 몸에 벌이 집을 지을 수가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삼손이 죽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고 그것을 부모에게 갖다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삼손은 죽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 덕분에 주어진 것입니까? 만약 삼손이 자신의 힘으로 사자를 죽인 것이라면 꿀은 삼손의 힘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한 대로 삼손의 힘이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꿀은 여호와로 인해서 얻은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하나님께서 강한 블레셋을 물리치시고 그 대가로 이스라엘에 꿀이 주어진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삼손을 통해서 미리 드러내신 사건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가 꿀을 먹게 된 것은 하나님이 삼손을 그 가정에 보내셨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즉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꿀을 먹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 자체를 두고 한 말이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힘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블레셋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구원하는 능력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이지 삼손의 힘이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삼손의 능력을 말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곧 능력인 것입니다.

 

 

 

 

삼손이 사자를 만나고 그 사자를 죽이게 되고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게 된 본문의 얘기는 삼손의 능력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니라 장차 이스라엘에 나타날 하나님의 능력을 삼손을 통해서 미리 암시하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등의 말씀들은 결국 우리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말하기보다는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증거물로서 주어진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을 의미하는 차원에서의 능력은 믿지 않는 자들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런 능력에 있어서는 믿는 자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교회가 능력을 가르칠 때 자기의 일을 이룰 수 있는 차원에서의 물리적인 힘을 능력으로 말하면서,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의 능력은 자기의 뜻과 자기의 일을 이루기 위한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의 능력은 자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이고, 따라서 능력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마음만 먹으면 삼손처럼 사자도 죽일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가 꿀을 먹게 된 것은 자기의 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삼손의 덕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힘으로 일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일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애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신 제삼자가 모든 일을 이루고 우리는 그 덕분으로 은총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인해서 주어진 은총에 감사하고 그분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분을 믿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제삼자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우리의 공로로 여긴다거나 능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의지한다면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뜻이 있기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삼손이 마노아의 집에 보내어진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되어진 일이고, 삼손이 사자를 만나고 사자를 죽이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되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자라면, 그것도 역시 여러분 한 개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세워서 뭔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에 붙들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성령에 붙들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신자는 삼손이 부모에게 사자를 죽 인 일을 얘기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바라보게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삼갈 것은 삼가고 감출 것은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삼손의 부모의 입장에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들의 힘으로 꿀을 얻어 살려고 하지만, 그리고 꿀을 얻을 수 있는 힘을 스스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스스로 꿀을 얻어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제삼자에 의해서 얻어진 꿀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사자를 죽여서 꿀을 얻을 수 있는 힘을 원하지 마시고, 제삼자가 사자를 죽임으로 인해서 주어진 꿀을 먹고 살아가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만 보여지는 믿음이며, 그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뜻에 복종하고 살아가는 능력일 것입니다.

 

 

 

 

 

삿 14:10-14 삼손의 수수께끼


세상의 인간 관계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간관계만 강자와 약자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관계도 강자와 약자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굳이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먹이사슬이라는 관계가 아니라 해도 같은 집단에서도 강자와 약자는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강자는 먹는 자, 약자는 먹히는 자입니다. 강자는 지배하는 자, 약자는 지배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힘없는 약자는 항상 강자에 의해서 빼앗기는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약자가 강자에게서 뭔가를 얻어낸다면 그것은 이미 강자가 강자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자 스스로 강자를 이길 수는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약자를 대신해서 강자를 패배시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삼손의 이야기 중의 하나인 수수께끼 사건입니다. 수수께끼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이렇습니다. 10절에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는 말씀을 보면 삼손의 아비와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결혼을 위한 잔치를 배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풍속이었음을 언급한 것을 보면 아마 블레셋 사람들은 신랑이 신부집에 와서 결혼 잔치를 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 잔치에 블레셋 사람들이 30명의 젊은 사람들을 청해서 삼손의 친구가 되게 합니다. 이런 가운데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게 된 것입니다.

 

 

 

 

12,13절에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 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고 말합니다. 즉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내기를 합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은 주저 없이 삼손의 내기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삼손의 수수께끼를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보면서 삼손의 수수께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삼손의 수수께끼를 말씀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수수께끼를 가지고 내기를 거는 것이 다만 잔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수수께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베옷 삼십과 겉옷 삼십을 벌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삼손이 누구인가를 잘압니다. 삼손은 자연스런 부부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식이 없는 집안에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삼손입니다.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삼손이라면 삼손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던 삼손과 사자의 사건도 역시 같습니다. 삼손이 사자를 만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사자를 이긴 것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라는 말씀이었음을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수께끼 사건도 역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계시의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시대와 환경과 문화와 문명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과 문화와 문명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것이 계시인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어떤 문화와 문명에서도 동일하게 계시로서 적용됩니다. 비록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상황과 문명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에서 그때와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비밀이요 신비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본문의 수수께끼를 단순히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내기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그때 그 상황에 있는 블레셋 사람으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삼손에 의해서 그때의 수수께끼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왜 삼손을 통해서 그러한 수수께끼를 내는 것입니까? 과연 삼손의 수수께끼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겠습니까? 삼손의 수수께끼는 세상의 그 어떤 지혜를 동원해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14절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는 이것이 삼손이 낸 수수께끼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이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의 배경을 알고 보면 황당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삼손이 딤나의 포도원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서 꿀을 얻은 사건을 배경으로 한 문제입니다. 즉 삼손 자신의 체험을 문제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로서는 삼손의 수수께끼를 푼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세상 그 어떤 지혜를 다 동원해도 풀 수가 없습니다. 세상 법칙에 따른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지식과 상식에서 나온 문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한 대로 사자를 죽인 삼손의 체험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손만이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수수께끼는 삼손과 같은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삼손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어렵다는 생각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수수께끼는 문제의 답을 맞추라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문제의 답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면, 본문은 계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성경을 보면 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답을 계시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블레셋 사람들도 결국 삼손의 아내를 이용해서 답을 알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답은 알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수수께끼에 담겨 있는 의미는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수수께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는 것이 오늘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삼손의 수수께끼에서 '답은 사자와 꿀이다'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 역시 답을 알았으나 하나님은 알지 못한 블레셋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수께끼의 답이 사자와 꿀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문제의 답은 사자와 꿀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현실이 어떤가가 수수께끼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이스라엘이 그 어떤 강한 존재에 붙들려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연 수수께끼는 우리들의 어떤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제가 여러분에게 "당시 이스라엘에게 사자와 같은 강한 존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붙들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강한 사자와 같은 존재는 블레셋입니다. 그 강한 존재를 여호와의 신에 감동한 삼손이 죽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심으로 강한 존재는 블레셋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블레셋이 강한 존재가 아니라 그 블레셋을 이기시는 하나님이 진심으로 강한 존재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인해서 꿀을 얻어먹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삼손과 사자 사건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바로 이러한 사건의 의미를 아는 자로서 수수께끼를 내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다고 해서 너희가 강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강한 분이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너희가 망하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산다는 것을 암시하는 수수께끼인 것입니다.

 

 

 

 

이것을 삼손의 수수께끼 문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문제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보면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는 것과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즉 동일한 의미의 구절이 반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먹는 자와 강한 자가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고, 먹는 것과 단 것도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삼손의 체험에서 강한 자는 사자로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의 상황에서는 블레셋입니다.

 

 

 

 

그런데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습니다. 즉 삼손이 사자에게서 꿀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이 가능하려면 사자가 죽어야 합니다. 죽은 몸에서 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는 것은 강한 자가 패배한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도 역시 강한 자가 패배했을 때의 결과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수께끼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그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고, 승리자는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담고 있는 수수께끼였습니다. 블레셋에게 붙들려 있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현실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심으로 강한 자는 그들을 붙들고 있는 블레셋이 아니라 곧 하나님이심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자신들이 강한자인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자기 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삼손의 배후에 강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보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들을 붙들고 있는 블레셋을 강한 존재로 보고 살아갑니다. 즉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었는데 이스라엘은 다만 블레셋만을 보고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 역시 어떤 강한 존재에게 붙들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삼손의 수수께끼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던 강한 자가 누구인가를 물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강한 존재가 누구인가?'를 묻겠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강한 자입니까?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여러분보다 더 강한 자가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회사의 상사입니까? 아니면 권력이 있는 자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누구에게 매어 있는가를 알려면 여러분의 행동이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고 움직여지는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람의 행동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행동의 모든 기준이 자기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체면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도 역시 자신에게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상사에게 굴복하는 것도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기 때문에 싫으면서도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매어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한 자가 바로 자기 자신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강한 자란 바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사고방식의 주인입니다. 그가 바로 사단입니다. 수차에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자 한 마음이 든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는 사단의 유혹 때문입니다.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곧 사단에게 붙들려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사단에게 붙들려 있고 사단이 강한 자인 것입니다.

 

 

 

 

수요일에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면서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서 살도록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조물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결국 사단의 지배를 받은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우리를 붙드신 강한 분은 바로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한 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진심으로 강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 삼손의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강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를 붙들고 있는 강한 자가 패배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지 그 어떤 것도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진심으로 강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저 나보다 돈있고 권력있으면 강한자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에게 잘보여서 득을 보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가려다 보니까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과 같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곧 마귀에게 승리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고방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사고방식으로 바뀐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성령이 임한 자들이며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 대해서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익과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곧 마귀의 사고방식임을 순간순간 깨닫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나를 건지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삼손의 수수께끼입니다.

 

 

 

 

우리의 구출은 그리스도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약하게 보이신 분이 가장 강하신 분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죄악 가운데 있고 실패한 우리를 위해서 피흘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강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강하신 분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수수께끼가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이 나를 강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은 삼손의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보이지 않는 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새로운 나라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삿 14:15-20 삼손과 그의 아내


지난 시간에 삼손의 수수께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배후에는 강한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은 배후에 존재하는 강한 자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한 존재에 대해서 믿지를 않으며 모든 문제를 단순히 인간들만의 문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잘하면 세상은 살기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성경의 처음부터 사단이라는 강한 자가 등장을 합니다. 이 강한 자에 의해서 인간은 무너지며 결국 강한 자에 붙들린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배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강한 실체에 대해서 잊어버린 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붙들고 있는 강한 존재와의 싸움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에 순종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즉 눈앞의 자신의 생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모습에서 과연 보여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에서 강한 존재로서 세상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사고방식이 보여지는지 아니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함이 보여지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단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단을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필시 사단적인 것을 신앙으로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오인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단이란 존재가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무엇으로 시험하는지를 알아야 사단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오인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사단이란 존재에 대해서 눈이 밝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이란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단이 세상을 무엇으로 유혹하고 지배하는가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무관심하지 않는 사단이라는 강한 실체에 대해서 정작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관심해 버린다면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잘못된 신앙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배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붙들고 있는 사단의 실체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이점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지난주의 말씀과 계속 이어집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수수께끼로 내기를 합니다. 결혼 잔치를 하는 칠일 내에 문제를 맞춰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수수께끼는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도 맞출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 수 없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삼손의 체험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이 무엇이며 세상의 현실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삼손에 의해서 수수께끼라는 형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수께끼를 알 수 있는 자는 삼손과 같은 이해를 가진 자에 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만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블레셋은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 결국 강한 자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인 줄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진실로 강한 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답을 알 수 없는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에 질 것을 염려해서 답을 알아내기 위해 삼손의 아내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5절에 보면 "제 칠 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로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삼손의 아내더러 삼손을 꾀어서 답을 알아내도록 지시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합니다. 협박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극히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불레셋은 삼손에게 자신들의 것(베옷 삼십 벌, 겉옷 삼십 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삼손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삼손의 아내를 이용하게 되고, 그를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기 위해서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협박을 동원을 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에 삼손의 아내는 결국 삼손에게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힘을 쓰게 됩니다. 16,17절에 보면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 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고 합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면서 울며 삼손을 조릅니다. 결국 삼손은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서 알려주고 삼손의 아내는 그 답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자기 아내에게 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답을 아내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떤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삼손이 자기 아내가 울고 조른다고 해서 답을 알려주는 실패를 범했으니까 신자된 자는 여자에게 약해지면 안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창세기에서 여자가 뱀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고 남자에게도 먹게 한 것처럼 여자가 블레셋 사람의 협박에 의해서 삼손에게 답을 알아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에게 알려줬으니까 역시 언제나 여자가 큰 문제라는 문제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러나 제가 볼 때 그러한 문제들은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삼손의 아내의 배후에 누가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이란 강한 존재가 힘으로 여자를 협박을 합니다. '너와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것이 여자로 하여금 삼손을 배신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즉 삼손의 아내는 남편인 삼손보다는 자기 혈족을 지키고자 한 열망이 더 강했던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이 여자를 이용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 혈족이었고, 삼손의 아내는 혈족을 지키기 위해서 남편을 배신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현실입니까? 삼손의 아내를 신랑을 섬기는 신부라는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신자를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섬기는 신부의 위치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삼손의 아내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은 그리스도를 섬기기보다는 세상의 혈족을 지키기 위해서 오히려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멀리하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삼손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삼손이 자기 아내를 대하는 모습입니다.

 

 

 

 

삼손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울며 매달리는 아내에게 견디지를 못하고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려주게 됩니다. 결국 삼손 역시 자기 부모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답을 아내에게 알려준 것을 통해서 보여준 우리의 모습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아내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얘기는 우리에게 '우리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살아가는가?'를 묻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의 혈족조차 뛰어넘어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아내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신랑보다, 하나님보다 자기 혈족과 아내를 사랑함으로 인해서 실패를 가져온 인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임을 볼 때 사단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이용하는 도구는 바로 우리 자신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핏줄이며 아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끊어버리기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혈족이며 처자식이라는 관계입니다. 나와 연관이 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끊어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그러한 인간관계를 끊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부모 사랑, 형제 사랑, 아내 사랑이 무엇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7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씀은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처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러한 사랑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발산되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되 그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치우쳐 있어야 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되 역시 그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치우쳐 있어야 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엔가 사랑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이미 다른 존재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세상이며 세상 안에서 부모나 처자식이라는 혈족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혈족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혈족이 요구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요구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혈족은 혈족을 위해서 살아줄 것을 원합니다. 즉 부모는 자식에게 부모를 위해서 살아줄 것을 원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자기를 위해 줄 것을 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을 원합니다. 어느쪽 하나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갈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때문이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해서 소홀해진다면 투덜대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원망을 해댑니다. 이러한 혈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필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외면해야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혈족에 대한 사랑이 외면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블레셋은 삼손의 아내에게 아비 집을 불사른다는 말로서 협박을 합니다. 즉 세상에 있는 자신과 연관된 핏줄에 대한 애착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한 자가 인간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단이 무엇으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한 애착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혈족이든 처자식이든 아니면 돈이든 상관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것에 대한 애착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누구든 자기 것에 대해 애착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상실이기 때문에 자기 것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애착심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애착심이 더 강하기 때문에 결국 신랑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외면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고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결국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삼손의 아내처럼 말입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에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런 모습이 마치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과 원망을 쏟아내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해줘야 사랑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 곧 그 배경에 강한 자, 사단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단이란 존재를 의식을 하고 살아간다면 사단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지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단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겠습니까? 사단이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존재를 우리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것을 세움으로서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그 무엇이 자신에게 득이 되고 편함을 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기의 유익과 편함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 것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말씀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되어진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너무 강한 애착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세워진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애착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강한 애착심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내 혈족 처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자식이 대학을 들어가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내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대학에 떨어진 자식에 대한 애착이 우선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 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이라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현실에서 떠나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면 "제 칠 일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블레셋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게 된 것은 자기 아내를 통해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수수께끼의 답은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자신이 그 답을 말한 사람은 자기 아내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아내를 이용해서 답을 알아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의 배후에 블레셋이 있었음을 간파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답이 발설된 뒤입니다. 결국 삼손은 자신의 아내가 울면서 답을 알려달라고 조를 때 그 배후에 누가 있었는가를 발견하지 못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신자로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사단의 일입니다. 사단은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만 두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십자가에 마음을 두려고 하게 될 때 사단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 애착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 앞에 혈족이나 처자식 그리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세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는 가족들에게 함께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이고 멸망에서 벗어나 영생으로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단과 싸우는 삶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려거든 여러분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지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십시요. 여러분의 사랑, 즉 인간의 사랑은 애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것에 대한 사랑이며 애착입니다. 애착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에서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여러분을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배후에 있는 존재를 잊지 마시고 살아가십시오. 무엇이 사단에 붙들린 모습인가를 생각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붙들린 자로서의 증거를 보여주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삿 15:1-8 삼손의 복수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집안이 매우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어릴 적부터 남의 집일을 도와주면서 받은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A라는 사람은 평소 B라는 같은 또래의 이웃집 아이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A는 장차 돈을 많이 벌어서 B에게 복수를 하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결국 A는 성공을 하게 되고 힘있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A는 그 힘으로서 B를 몰락을 시킵니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드라마와 같은 내용을 간단하게 적어 본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복수극'이라는 것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고의로 피해를 입히고 또는 자신이 힘이 없을 때 무시하고 천대를 했다거나 한 자에 대한 복수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상황설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그런 내용의 드라마를 봤다고 할 때 분명 A아니면 B의 편을 들게 될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서로 모였을 때도 인기 있는 드라마의 내용으로 얘기꽃을 피우면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다는 자기 판단을 서로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위의 내용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를 봤다고 할 때 과연 어떤 판단을 하겠습니까? 성공을 해서 B에게 복수를 하는 A가 잘못했다고 여겨집니까 아니면 애초 B가 A를 무시하고 멸시했으니 A의 행동 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까? 하긴 드라마에서 A에 대한 무시와 멸시가 극에 달한 내용을 봤을 때 자연히 A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그 동정심은 A의 행동에 대한 정당함을 이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된 판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동정심이라는 것이 인간의 판단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지 'A라는 사람이 무시를 당했고 결국 복수를 했다'는 글을 통해서 과연 A가 잘못했는가를 물을 때 여러분은 어떤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판단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물론 복수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A에게 복수의 마음을 심어준 것은 B입니다. 결국 B는 인과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A로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어떤 일에 있어서 잘잘못을 판단해야 할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판단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 말을 들어보면 그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어 보면 또 그것이 옳은 것 같을 때 과연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 누가 잘했다는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둘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을 함으로서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화해를 하도록 종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연루된 일이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미 마음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의 편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이 있는 사람이 연루된 경우에도 자연히 힘있는 자의 편을 들어서 그가 옳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처럼 제삼자의 입장에서 잘잘못을 판단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가 있고, 아니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와 감정의 대립이 생기고 마음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아는 것이 참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A의 경우에도 우리가 만약 그 일에 대한 판단자라면 우리의 생각이나 도덕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를 묻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보신다"는 것이 문제의 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에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판할 만큼 정당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문제에서든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일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묻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판단을 하실까요? 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삼손이 블레셋을 친 사건의 내용입니다. 수수께끼의 사건이 있은 후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다시 여인의 집을 찾아가서 아내를 보고자 합니다.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간 것은 삼손이 아내와 화해하고 다시 동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삼손은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해서 찾아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인이 삼손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리고 "가로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2절)고 말합니다.

 

 

 

 

즉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아내를 미워하는 줄을 알고 그 아내를 삼손의 동무, 다시 말해서 결혼 잔치에 동무로 소개받았던 30명의 블레셋인 중 한명에게 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동생이 더욱 아름다우니 그를 아내 대신 삼손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자 그들은 삼손의 아내를 이용합니다. 삼손의 아내는 울면서 애원을 하게 되고 결국 삼손은 답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답을 알게 되고 삼손은 내기에 져서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옷을 노략해서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해서 아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노해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다시는 아내를 찾으러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과의 친분을 위해서 삼손의 아내, 즉 자기 딸을 30명 중 하나에게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삼손이 다시 아내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그 아내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장인은 대신 아내의 동생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장인에 대해서 화가 난 삼손은 블레셋 사람을 치게 된 것입니다.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와 홰를 이용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모두 불살라 버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삼손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보십니까? '삼손이 블레셋을 치게 된 것은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줘버렸기 때문이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삼손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여겨집니까? 만약 삼손의 행동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의 복수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손해를 입힌 자에 대해서 복수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으로 답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곡식과 감람원을 태워버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그의 아비, 즉 삼손의 장인을 불살라 버립니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혹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동무 되었던 자에게 준 연고니라 블레셋 사람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6절) 이것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한 복수극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에게 복수한 블레셋 사람들의 행동은 정당한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까?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이 정당하다면 결국 블레셋이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인 복수 역시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애당초 블레셋이 삼손의 아내를 이용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일은 수수께끼를 낸 삼손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수수께끼는 하나님이 강하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삼손의 자존심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수수께끼를 결국 자기 자존심의 문제로 연결짓습니다. 내기에 졌다는 것, 더구나 그들이 자기 아내를 이용해서 답을 알아냈다는 것에 진노한 것입니다. 그 진노를 아스글론의 사람을 쳐서 그 옷을 블레셋인에게 줌으로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문제는 삼손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블레셋의 복수가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삼손인가 블레셋인가? 를 물을 때 누구의 잘못으로 답을 내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답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가 신자로서 제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삼손이나 블레셋사람들처럼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나에게 해를 끼친 자에 대해서는 복수를 마음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나 블레셋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대립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서로 대립하고 살아가는 인간관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수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우린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하고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와 장인을 죽인 블레셋 사람에게 또 다시 복수를 합니다. 그리고 9절부터의 말씀에서도 또 다시 삼손에 대해서 복수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복수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단순히 '복수하지 말라'는 도덕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이 과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받아 태어난 삼손이 무엇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었기에 본문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치기에 앞서서 '내가 블레셋을 쳐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삼손이 블레셋을 치게 된 이유는 모두 블레셋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삼손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니까 모든 책임은 블레셋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서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린 흔히 '나를 더 이상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너로 인해서 나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킴으로서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의 심리는 어떻게든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 모든 원인을 제 삼자에게 전가시킴으로서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는 결국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로밖에 볼 수 없고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함은 창세기에 잘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명한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실과를 먹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과를 먹은 것은 잘못이지만 먹게 된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한 여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만 아니었으면 먹지 않았을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와 역시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고 물으시자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하와 역시 실과를 먹은 것은 잘못이지만 전적으로 내탓이 아니라 뱀 때문에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 삼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삼손에게 '왜 블레셋을 쳤느냐?'고 물으신다면 삼손은 블레셋을 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내세울지도 모릅니다. 블레셋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나님에게 이러한 변명을 일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못을 범했을 때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함으로서 스스로의 변명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입장을 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삼손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과 자존심을 생각하는 가운데 블레셋을 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블레셋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삼손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볼 때 어쨌든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은 옳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블레셋을 쳤다는 것보다는 블레셋을 치고 있는 삼손의 마음인 것입니다. 삼손의 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힘입니다. 삼손이 포도원에서 만난 사자를 죽일 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삼손의 힘이 삼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 힘으로 블레셋을 치기는 했지만 그 본래의 목적은 블레셋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이며 화풀이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삼손의 힘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삼손을 선택하신 것이고 부르신 것이고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자신의 힘을 개인적인 분풀이에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내기 위해서 힘을 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내려본다면 삼손이 잘못인가 블레셋이 잘못인가라는 물음에서 잘못의 기준을 누구의 행동이 더 심했느냐로 따질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 삼손과 블레셋을 비교하면서 누가 잘못인가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으로서 그 자체가 이미 저주받을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멸망이라는 운명에 있는 블레셋을 두고 그들이 잘못했는가 잘했는가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두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신자는 이미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옳은 일을 했다고 해도 그들을 두고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블레셋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삼손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삼손은 분명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오직 자기 분풀이를 위해서,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다. 결국 삼손 역시 블레셋과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손도 불신자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연 삼손에게 블레셋을 칠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삼손 역시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삼손의 잘못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 자신이 어떻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블레셋을 칠 자격이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삼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 소유로 여기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내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힘으로 과시합니다. 우리의 사사로운 분풀이나 자존심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힘을 허비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것으로 여기기에 복수가 나오고 화풀이가 나옵니다. 만약 우리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일과 뜻을 위해서 주신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타인을 괴롭히고 복수하는 도구로 사용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린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삼손처럼 말입니다. 이런 우리가 누구를 칠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불신자를 칠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떤 자인가는 주님이 잘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누구를 칠 자격이 없이 오히려 저주 아래 죽어 마땅한 자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뭔가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 재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잘한 것을 내세워서 남을 무시하고 자기를 과시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A와 B의 경우에 A를 신자라고 한다면 그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가 복수를 했다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 스스로 얻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신자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이점을 항상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 어떤 것도 우리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린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도구로 쓰여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산다면 분명 그는 자기의 힘을 가지고 개인적인 복수나 화풀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허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분명 힘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힘을 내세워서 자신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희생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셨습니다. 우린 우리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삽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정당하고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정당하시고 옳으신 분임을 증거 하라고 세워진 것이 우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삿 15:9-13 유다의 두려움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도할 때 말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신 분이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당연한 모습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자유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자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자로 산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자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유자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유자란 하늘을 날아가는 풍선을 잡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유자라고 말하면서도 자유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믿는 자라 말하면서도 믿는 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곧 오늘 우리 자신들의 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주일이면 만사 제쳐두고 꼬박꼬박 예배당을 찾아와서 예배드리는 자신을 보면서 자기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을 둘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어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을 원한다는 것으로 신자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으로 믿음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연 자유자로 살아가는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답게 세상의 힘에 매이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는 자유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힘과 힘은 상대적입니다. 강한 힘을 소유한 자는 상대적으로 약자에 대해서는 자유합니다. 반면에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다면 그는 그 어떤 힘에도 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분명 정상적인 믿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 과연 자유자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산다면 삶 역시 하나님 중심이며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삶이 되어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신자된 자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마음과 삶의 일치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삶은 항상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한두번이 아님을 다같이 경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에게 매였다면 삶 역시 하나님에게 매여있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음의 정직함입니다. 하지만 마음과 삶이 항상 일치되지 않고 그것이 결국 갈등으로 내면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볼 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마음에 따라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뭔가 다른 힘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는 다른 행동과 삶이 수시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삶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 있어서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육신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로마서 7:25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마음과 육신이 섬기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원하는 바를 육신이 따라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이 있으나 육신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과 육신이 서로 단절된 채 살아갑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과 육신이 따라가는 것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 따로 몸 따로, 이것이 바로 사람의 실체이며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육신이 약하다'는 이 말을 앞세워서 육신의 약함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앞세워서 비록 육신은 약하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고 있으니까 괜찮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단지 하나님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고 은혜라면 그리고 그 마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마음이라면 결코 마음이 육신에 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이 마음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이미 그 마음은 육신에 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믿음은 싸움입니다. 육신에 지지 않기 위한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신은 우리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뭔가의 힘에 붙들려서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진다는 것은 내 자신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권세에 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복수의 열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복수를 할 자격도 없고, 오히려 예수님에게로부터 복수를 받아야 할 우리가 누군가를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해를 보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기회를 보다가 복수를 해줘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으로 삼손 역시 블레셋에 대해서 마음껏 복수를 합니다. 장인이 자신의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줬다고 해서 블레셋 사람의 곡식과 감람원을 모조리 불살라 버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을 블레셋 사람에게 돌립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에서 우리가 곧 삼손처럼 살았던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삼손의 복수로 인해서 삼손에게 위기가 닥친 내용입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자 이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기 위해서 유다에 진을 칩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치고자 하는 이유를 묻게 되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을 치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10절).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11절)고 삼손을 책망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에 위기가 닥친 이유를 삼손에게 돌립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만 건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 사람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삼손도 아니고 블레셋도 아니라 바로 유다 사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동족이며 나실인으로 태어났고 사사인 삼손을 자신들의 손으로 결박해서 원수인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주는 모습에서 우리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은 분명 삼손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즉 삼손과 블레셋처럼 복수를 하기 위해서 삼손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 목숨을 위협하는 화근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삼손을 넘겨 준 것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삼손으로 인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육신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책망하기를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데 왜 그들에게 복수한다고 설쳐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에게는 삼손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가 관심이 아닙니다. 다만 삼손의 행동 때문에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것으로만 분노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유다 사람들과 같은 처세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의 처세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옳으냐 그르냐가 관심이 아니라 결과가 우리들에게 득이 되었느냐 해가 되었느냐로 선과 악을 판단해 버립니다. 분명 마음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판단되어진 대로 옳음에 육신이 순종하는 것이 두려움이 없이 사는 자유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믿는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마음에 판단되어진 옳음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득이 되는 쪽으로 순종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이유로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해가 된다는 것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볼 때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했을 때 그들은 수시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의해서 지배를 받다가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가던 그들이었습니다. 즉 희망이 없는 해방이 아니라 희망이 있는 해방이었습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그 희망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를 앞에 두고 뒤에 애굽 군대가 추격하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를 애굽에 그냥 두지 않고 왜 이끌어 내서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를 원망했던 것입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에도 원망하고, 애굽에서 먹던 것을 생각하며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육신에 해가 전혀 없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모든 것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을 압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신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때로 자기 백성을 고난으로 인도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막상 고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원망입니다. 이것이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삼손을 결박합니다. 아마 삼손이 블레셋에 복수한 것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삼손을 결박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길은 블레셋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실감하십니까? 세상은 우리가 자유자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힘의 고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만한 대가를 받게 됩니다. 힘이 약자에게 원하는 것은 굴복입니다. 굴복했을 때 그를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그러나 대항하면 결국 힘으로서 위협을 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힘의 눈치를 보면서 힘에 대항하지 않고 굴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처세인 것입니다. 이것을 꼭 부정 부패를 용납하지 말라는 의미로만 해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현장에서도 힘의 눈치를 보는 모습은 얼마든지 보여집니다.

 

 

 

 

가령 교회에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등록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반깁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타나는 현상은 그가 말씀에 잘못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냥 덮어주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그의 잘못됨을 지적을 하려고 하면 목사를 말립니다. 그러다가 괜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말을 듣지 않고 잘못된 것을 지적을 하고 부자가 그것 때문에 교회를 나가버렸다고 할 때 과연 교인들은 누가 잘못했다고 하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모든 원망과 잘못됨을 목사에게로 집중 될 것입니다. 부자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교회를 나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 자신을 생각해 봐도 그럴만한 용기가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이러한 모습은 교회에서 수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에 매어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유다가 자신들의 손으로 삼손을 붙들어 블레셋에 넘기는 것을 보면서 과연 우리 자신들이 우리들의 손으로 무엇을 붙들어서 사단에게 넘겨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들어서 사단에게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도 보다는 육신의 편안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참으로 자유자로 사신 분은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권력에도 정치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예수님을 위협하거나 붙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육신은 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둡시다. 힘에 굴복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처세한다면 육신에 편안함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을 스스로 사망에 밀어 넣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로마서 8:6-8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한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육신에 굴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한 자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들의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육신의 편안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지는 것이 곧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한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을 위한 생각으로 산다면 우리가 무엇에 굴복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한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이 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육신에 약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안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영의 생각으로 살지 못하고 육의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닌 육신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것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무엇이 생명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생명을 원한다면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항상 마음에 두십시오. 그리고 육신이 생명의 길에 복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고자 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의 길에 북종하지 못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삿 15:14-20 엔학고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비록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살려주시는 은혜가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지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에서 피가 돌고,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원하면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고 온 몸을 도는 피를 멈출 수가 있는 것입니까? 심장은 스스로 뛰고 있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로 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자기 몸 안에 있는 작은 심장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합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스스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라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살려주시는 은혜'에 깊이 묵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소홀히 하면서도 감히 신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살려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거부합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힘과 능력을 너무 무시하는 것은 아니냐라고 반발합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란 하나님이 죽이시면 할 수 없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생과 사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산다는 것 자체를 인간으로서 너무 무능력한 삶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얻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수시로 인간의 힘으로 살아 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악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거부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한다면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에게 감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 역시 살려주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마음에는 내키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이 만드신 형편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고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살려주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살려주시는 은혜에 거부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악한 속성은 항상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반발하게 만듭니다. 주어진 형편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더 나은 형편을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에게 세상을 소망하지 말라는 것은 참으로 힘든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리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면서도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고 살라는 말이 들려지면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소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반발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라는 말에 왜 반발이 되는 것입니까? 신자라면, 살려주시는 은혜로 살고 그리스도만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소망하는 자신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반발로서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라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기 싫다는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니 자기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삶의 부분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영광돌리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된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데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대로 된 삶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기쁨과 상관없이 우리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가 발각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처럼 악한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변함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의나 행함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기를 힘쓰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에 진을 치자 그 이유가 삼손 때문인 것을 안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원망하고 결국 삼손을 붙들어서 블레셋 사람에게 넘기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는 블레셋이라는 힘에 굴복한 유다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살려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의지에 의해서 결국 자신들을 붙들고 있는 블레셋이라는 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힘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까지 자기들의 손으로 붙들어서 블레셋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신 그리스도를 붙들어서 세상에 넘기는 것은 아닌가를 확인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만을 고집한다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라는 인간을 미워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새로운 삶의 사고방식, 그것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이셨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누구나 성공을 원하는데 예수님의 사고방식은 성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오직 하늘 나라만 추구하셨던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볼 때는 전혀 비현실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삼손을 붙들어 블레셋에게 넘겨줍니다. 그들은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는 자기들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안위에 위험을 주는 삼손을 자기들의 손으로 붙들어서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삼손으로 인한 블레셋 사람들의 심판입니다. 14절에 보면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고 말합니다. 삼손이 결박을 당한 채 끌려오는 모습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 기뻐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함으로 삼손을 묶었던 줄이 불에 탄 삼처럼 끊어지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입니다(15-16절).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하여 삼손을 묶었던 단단한 줄이 불에 탄 삼처럼 끊어져 버립니다. 삼손이 힘이 세다는 것을 안 유다 사람들이 오죽 단단하게 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줄도 삼손을 묶어 두지를 못한 것입니다. 삼손은 단지 줄에 묶인 것이 아닙니다. 줄은 다만 삼손을 묶고 있는 눈에 보이는 실체일 뿐, 정작 삼손을 묶은 줄은 세상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힘을 두려워하는 유다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힘으로 삼손을 묶은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나 힘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오래 세월 동안 블레셋의 압제를 받아 오면서 하나님의 살려주신 은혜나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믿음을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상황이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극도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면 과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살려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나 힘에 대해서 기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블레셋이란 강대국을 이기고 그들을 다스리는 삶을 살았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증거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압제를 받는 상황에서 유다에게는 하나님의 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힘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에 대한 굴복이 삼손을 묶어서 블레셋에게 넘기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줄이 여호와의 신의 권능으로 인해서 끊어집니다. 이것은 어떤 힘도 삼손을 구속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삼손이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이게 함으로서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유다 사람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유다 사람을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부터 지키지 못하신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틈만 나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고 심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 붙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일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단지 힘센 블레셋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도 블레셋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 역시 현실에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삶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어려울 때 어려움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평안할 때 평안함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어려운 상황만 바라봄으로서 원망이 나오고 평안함만 바라봄으로서 평안함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고 평안에 취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권능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의 힘으로부터 해방되게 합니다. 삼손의 묶은 줄이 끊어지듯 우리를 묶고 있는 세상의 힘을 끊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힘에 굴복한 자로 살아가지 않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권능이 임한 신자입니다.

 

 

 

 

줄이 끊어지고 자유의 몸이 된 삼손은 블레셋을 심판합니다.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일천 명을 죽이게 됩니다. 블레셋의 힘을 두려워하던 유다 사람들은 이제 여호와의 권능을 목격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자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힘도 여호와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결코 힘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힘으로서 약한 자를 괴롭힐 때 나쁘다고 말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연 힘이 나쁜 것입니까? 힘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과연 하나님이 세상에 힘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에게 힘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에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힘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힘으로 삼는 것은 돈이며 지식이며 지위입니다. 그 외에도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이는 것을 소유했을 때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서 상대적으로 못한 자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도구로서 돈은 주셨을지언정 힘으로서 돈은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할 도구로서 직장과 지위를 주셨을지언정 힘으로서 지위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힘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악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모습임을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것을 통해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블레셋 역시 살려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다만 그들은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힘으로 삼고 힘으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 있어야 일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있어야 돈을 벌기 때문에 직장을 원하게 되고 지위가 힘이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를 살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이유를 누가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까? 불신자들입니까? 바로 신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살아간다면 과연 어디에서 신자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자라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에 기대가 되고 세상 것이 없을 때 낙심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있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의해서 하늘의 생명이 가려지고 희미해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면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 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고 말합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도중에 목이 마르게 되고 그것 때문에 블레셋 사람에게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습니다. 물론 죽을 정도로 목이 말랐다는 것보다는 몸이 지치고 피곤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삼손도 사람이기 때문에 일천 명을 죽이는 가운데 자신의 육체 역시 지치고 목이 마른 상태가 된 것입니다. 물을 마시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데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삼손에게 물을 주지 않으시면 삼손도 블레셋 사람에게 죽어야 할 형편입니다. 블레셋을 심판하는 삼손도 하나님이 살려주셔야 살 수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심판했다고 해서 삼손을 옳은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손의 생명도 하나님에게 있음을 보이시기 위해서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쳐서 물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로 인해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샘을 '엔학고레'라고 이름 붙여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엔학고레란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부르짖음으로서 생명을 얻게 된 샘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의 부르짖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블레셋에게 심판을 행하셨지만 자신 역시 하나님이 물을 주지 않으시면 죽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엔학고레입니다.

 

 

 

 

삼손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힘을 자랑하고 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을 것처럼 여기지만 물 없는 들판에서 물이 나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힘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것은 죽음에 처한 자신의 형편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라고 해서 사망의 위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 역시 하나님이 아니면 죽을 자입니다. 이것을 삼손이 알았기에 하나님에게 부르짖은 것입니다. 목말라 죽게 된 상황에서만큼은 자신의 힘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자라면 필히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라본다면 돈이 힘이고 직장이 희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아래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힘들이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힘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엔학고레를 경험한 신자입니다.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 생명 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이 삼손에게 생수가 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생수는 바로 하나님이 친히 내어주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와 살이 우리의 생수가 되어서 저와 여러분을 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힘을 가진 자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 따위는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려주지 않으면 죽는다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심판과 멸망에 처할 자신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친히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곧 생수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에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처한 나의 형편보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처지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무엇을 부르짖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여러분의 삶 깊숙이 개입됨을 경험할 것입니다.

 

 

 

 

 

삿 16:13-17 삼손의 둔한 마음


본문은 '삼손과 들릴라'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내용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삼손이라는 힘센 장사가 여자의 유혹에 빠져서 자신의 종말을 맞게 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영화를 제작한 사람과 같은 시각으로 본문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삼손이라는 사사가 들릴라라는 여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을 발설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힘을 잃어버리고 블레셋에 붙들려 비참함에 빠졌다가 결국 복수를 하고 최후를 맞는다는, 어찌 보면 진짜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내용으로 이해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단지 남자와 여자의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어떤 특정 대상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구라 할지라도 성경을 대할 때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남자의 이야기 정도로 이해해 버린다면 결국 본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범위는 매우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눅 21:34-36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둔하여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여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삼손을 생각하기보다는 누가복음의 말씀대로 마음이 둔하여진 삼손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삼손은 사사입니다. 그리고 나실인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사사와 나실인으로 세워진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들릴라라는 여인을 더욱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로 인해서 사사와 나실인으로서의 삶에 둔하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삼손의 마음이 둔하게 된 원인이 사랑하는 여인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6:1절에 보면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이 일로 인해서 가사에서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힘있는 삼손은 그 위기를 유유히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4절에서 삼손이 다시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삼손이 여자를 무척이나 밝히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여자 때문에 삼손이 망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삼손이 여자 때문에 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잘못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큼으로 인해서 자신이 사사며 나실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다만 들릴라라는 여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고자 하는 삼손의 모습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둔하여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이것을 알게 된 블레셋은 다시 삼손이 사랑하는 여인을 이용하여 삼손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이란 5절에서 말한 대로 삼손을 꾀어서 삼손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인지를 알아내면 은 일천 일백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돈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들인 들릴라는 삼손에게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물음에 처음에는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힘이 없어진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인 것을 알게 된 들릴라는 삼손에게 나를 희롱하고 거짓을 말한다고 하면서 다시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삼손은 두 번째 답에서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묶으면 된다고 답하고 또 다시 그것이 거짓인 줄 알게 된 들릴라는 다시 삼손에게 세 번째 어떻게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는지 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삼손은 세 번째 답에서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거짓인 것을 알게 된 들릴라는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15절)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삼손은 들릴라의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7절)고 진실을 털어놓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삼손을 보면서 여러분은 뭔가 삼손이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삼손이 들릴라가 자신을 묶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때 들릴라가 그것을 물어보는 의도를 몰랐을까요? 더군다나 삼손이 거짓으로 방법을 가르쳐줄 때마다 들릴라는 그것을 실제로 시행을 했습니다. 그러한 들릴라의 배후에 블레셋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삼손이 과연 몰랐을까요? 들릴라의 의도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긴 들릴라의 의도를 알았든 몰랐든 상황은 같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어쨌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삼손의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17절의 삼손의 답을 보면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실인이라는 그 사실이 삼손으로 하여금 들릴라의 요구를 이기는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신자라고 하는 그 사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엄청난 그 신분이 과연 여러분의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믿음은 생각과 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능력으로 증거 되어집니다. 우리가 스스로 신자라고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신자로 인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신자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도 여러분을 신자로 여기실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여러분이 자신을 신자라고 말하고, 또 주위 사람이 '당신은 신자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신자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시는 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삼손에게서 여호와가 떠났습니다. 이것이 삼손이 비참함으로 연결되어진 것입니다. 지금껏 삼손은 힘이 있었기에 여러 위기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떠난 삼손은 힘을 잃어버렸고 결국 블레셋에 의해서 비참한 일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비참함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호와가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떠남은 곧 우리의 비참함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가 우리를 떠날까 염려하고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삼손처럼 하나님말고 다른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김으로 인해서 마음이 둔해진 상태로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분명 들릴라에 대한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둔해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로서의 삶보다도, 나실인으로서의 삶보다도 다만 들릴라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기 위해서 나실인이라는 것조차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아니라 들릴라에게 붙들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삼손의 비참함의 시작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둔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긴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둔해졌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삼손에게 있어서는 들릴라에게 붙들려서 들릴라를 즐기고 살아가는 것이 곧 마음의 둔함의 결과이며 원인인 것입니다.

 

 

 

 

삼손의 마음은 여자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무엇에 있습니까? 굳이 여자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마음을 뺏은 뭔가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의 즐거움이 생활의 풍요로움에 있다면 생활의 풍요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나뉘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것으로 즐거워하고 세상 것으로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마음이 둔해지고 눈이 어두워진 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나는 신자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다'는 것에 대해서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임을 잊지 말라는 것은, 그냥 신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신자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세상의 일로 인해서 마음이 둔해지면 결국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즐거움을 지키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행동하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한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들릴라가 기생이었다고 해도 기생을 사랑한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자의 유혹을 이기자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생활 지침서나 윤리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삼손의 문제는 들릴라에 대한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둔해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둔해진 삼손은 앞서 말한 대로 나실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실인으로서 머리카락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각하기보다는 들릴라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에 더 급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보다는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삼손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둔한 마음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예민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비참함으로 몰고가는 덫이었는데도 들릴라를 자신의 덫으로 보지 않은 것처럼 세상이 우리를 비참함으로 몰고가는 덫인데도 우리는 세상을 덫으로 보지 않고 삽니다.

 

 

 

 

우리의 불행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둔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둔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도 갈등도 없는 것이 우리의 불행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둔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둔하게 살아가면서도 고민도 갈등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끊임없이 스스로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마음이 둔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의 신앙 행위가 어떤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삼손처럼 자신을 나실인으로 세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 보내셨다면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신자로 살게 하심으로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떤 일에서든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다움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삼손은 들릴라란 덫에 붙들렸습니다. 그로 인해서 마음이 둔해지고 나실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존재성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붙든 덫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덫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둔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단순히 미래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천국을 기대하는 것이 오늘의 삶에서 보여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오늘의 삶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없다면 내일도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내일도 그리스도인일수 없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내일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막연한 기대는 가지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택한 자라면 내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은 아닙니다. 우린 신자로서 다만 오늘 어떻게 살았느냐를 생각해야 할 뿐입니다. 혹 하나님에 대해 둔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삿 16:23-31 승리와 패배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게 하시는 이유도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서 믿음으로 사는 나라가 어떠함을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신자로서 받은 바 사명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신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야 하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해버린다면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불신자와 같은 모습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해야 한다는 사명을 따라 산다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사명을 잘 아는 신자의 바른 생각이며 참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이 내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건강 역시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힘이 주어지든 그 힘 역시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재주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실려 있는 것들입니다.

 

 

 

 

신자로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 극히 당연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는 여러분 스스로 잘 아실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나를 위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본다는 것은 결국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삶 자체를 포기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자로서 원하는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에 있다면 내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한 삶에 자연히 힘쓰게 되겠지만,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내 삶, 내 인생이라는 것이 살아있고 숨을 쉬고 있는 이상, 내 수중에 있는 것들에게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많고 적음을 따지게 되고, 경쟁하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때로는 주어진 것을 힘으로 삼아 누군가를 무시하는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의 사명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보여지는 현상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신자이면서도 신자로 살아가는 것에 부담을 가집니다. 그리고 오히려 신자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삶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극히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이것이 당연하다 할지 모르지만 삶의 의미가 하나님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우리라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삼손의 삶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살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줘야 할 사명이 삼손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으로 살면서 나실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내용을 볼 때 삼손의 삶의 중심은 여자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의 모든 문제는 여자로 인해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여자를 선택하고 여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나실인까지 포기해 버린 삼손입니다. 결국 삼손의 인생의 행복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예쁜 여자를 만나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었던 것입니다.

 

 

 

 

결국 삼손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 역시 여자 때문에 복수하고, 여자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무리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사용을 한 것입니다. 삼손에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힘 역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삼손이 결국 비참함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이 사랑하던 들릴라로 인해서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비참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삼손은 들릴라만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여겼지만 결국 삼손에게 행복의 조건이던 것이 오히려 삼손을 실패로 밀어 넣는 덫이 되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바로 삼손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행복의 조건을 세상에서 찾습니다. 저것만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행복의 조건이던 것이 나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덫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 인생의 헛됨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서 떠났다는 것은 삼손이 자기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명을 잃어버린 삼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삼손에게 함께 하시고 삼손을 힘주시고 도와주신다면 그것은 삼손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이 신자에게 함께 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우리 개인의 삶을 도우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로서 살아가야 할 사명을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신자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라는 우리가 신자로서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산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고 말합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체의 현상입니다. 머리털을 깎였다고 해서 다시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을 언급을 하는 것입니까? 삼손은 자신의 머리털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가를 점차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머리털이 자라면 자랄수록 나실인으로 살지 못한 자기 인생의 실패를 가슴 깊이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힘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깎이면서 힘이 사라진 것은 머리털에 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나실인의 언약을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떠난 결과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이제 힘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있던 집을 버티고 있던 두 기둥을 무너뜨림으로서 블레셋을 심판을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때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치 삼손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힘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삼손의 복수를 도우신 것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이 삼손의 복수를 도우시기 위해서 다시 힘을 주신 것일까요?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 역시 인간의 복수를 인정하시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해달라는 삼손의 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머리털이 자라면서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삼손이 끝까지 자신의 복수를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손에게 있어서 원통함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조롱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을 자축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족들을 많이 죽이고 곡식을 불태우고 토지를 헌 원수 삼손을 붙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이 도우셨기 때문에 원수인 삼손을 붙들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을 불러내서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삼손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함으로 인해서 나실인의 사명을 잊은 결과인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의 신을 찬양한다는 것은 결국 삼손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아무것도 아닌 신으로 조롱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눈이 뽑히고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 블레셋의 신이 강하고 삼손의 신은 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고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삼손의 원수를 갚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갚으시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삼손을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손이 붙들린 것은 블레셋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힘은 삼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잊은 채 승리를 자신의 힘의 결과로 여기고 자신의 힘을 찬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입니다.

 

 

 

 

블레셋이 자기들의 힘으로 삼손을 이긴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을 찬양하고 높이는 모습은 오늘 우리들이 경쟁 속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하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이기면 기뻐할 것입니다. 내 재주로, 내 능력으로, 내 노력으로 승리한 것을 기뻐하면서 스스로의 힘에 대해 뿌듯함을 가질 것입니다. 이긴자의 기쁨은 이긴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겼을 때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은 패배한 자의 고통과 비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내 승리에 도취되어서 내것을 기뻐하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힘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승리를 맛보게 하셨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어서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뒤로 밀려나고 패배한 자의 고통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와 패배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더 주시고 덜 주시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세상은 승리와 패배로 구분을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와 패배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증거돼야 하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고 말합니다. 이제 삼손은 자신이 살아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블레셋과 함께 죽더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이 증거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죽더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세워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삼손이 죽을 때 가졌던 그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삼손의 죽을 때의 그 마음이 곧 나실인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보다는 나로 인해서 무너진 하나님의 영광이 세워지는 것을 더욱 원하는 그 마음이 나실인의 마음입니다.

 

 

 

 

삼손은 죽으면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삼손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삼손이 승리는 기둥을 무너뜨려서 블레셋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 것에 있습니다. 삼손이 죽으면서 보여준 하나님의 승리가 곧 삼손이 승리입니다. 여러분, 블레셋과 같은 삶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세상에서 남을 이긴 것을 승리로 보지 마십시오. 세상의 승리로 인해서 자기에게 힘이 있음을 과시하고 찬양을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일 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승리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자가 있음을 외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셨다고 한다면 결국 패배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이기든 지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라고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임을 잊지 않는다면 나의 승리의 기쁨보다는 패배한 누군가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승리도 패배도 없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기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지만 예수님이 흘린 피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함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기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겨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신자로서의 사명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보여야 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지 결코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승리에 도취되고 자신의 힘에 대해 기뻐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승리로 고통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 갚음이 있을 것입니다. 삼손의 부르짖음은 힘에 의해 고통받는 자의 부르짖음이기 때문입니다.

 

 

 

 

 

삿 17:1-6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복종 외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에게는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고 세상에 보냄 받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반발을 하기 마련입니다. 신을 섬기는 문제는 인간편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분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물론 현실의 상황과 환경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의 의지를 꺾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경우 남는 것은 불만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게 하는 환경과 상황을 안겨준 신을 원망하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신을 찾는 사람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우린 그분 앞에서 우리의 요구를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한다면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기뻐하고 바라는 것에 일치된다면 모르겠지만 원하지도 않는 곳으로 우리를 밀어 넣고 인도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면서 인정하기란 참으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라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 입장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이 마음대로 만들어 내거나 인간들 방식으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늙은 부모를 자식들이 천대하면서 해주는 대로 받고 가만히 있으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기쁨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엇이 기쁨이 되는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고 자신의 꿈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팽개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나서봐야 결국 모두가 자기 위신 세우기이고 자기 신앙 지키기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에게 기쁨인가는 하나님이 알려주실 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알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기본적 본성과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느냐는 것은 그가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가 행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인가?'를 물으면서 행동한다면 그는 분명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신자입니다. 항상 삶의 기준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그의 삶은 하나님에게 다스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생각할 때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을 묻고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것이고 곧 그에게 있어서 왕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단지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절대적인 창조주로 섬기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삶이 없다면 분명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1,2절을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은 일천일백이라는 많은 돈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돈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저주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우리에게 큰 손해를 입히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한 사람이 있을 때 그에게 저주를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가령 여러분이 미가의 어머니처럼 많은 돈을 도둑맞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돈을 훔쳐간 사람을 두고 '마른 하늘에 벼락이나 맞아라'든가 '내 돈 훔쳐가고 네가 잘되나 보자'라는 등등의 저주의 말을 퍼붓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그 울분을 달리 쏟아낼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식으로 분을 푸는 것입니다. 속의 울분이 욕으로 저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도 아마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돈을 훔쳐간 범인을 두고 저주를 한 것입니다. 그 저주의 말을 미가가 듣고 어머니가 잃어버린 돈을 자신이 가져갔음을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저주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돈을 잃고 괴로워하는 어머니가 보기 딱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을 가져간 미가가 그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미가의 말을 듣고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말입니다. 아들이 돈을 가져갔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머니의 돈을 말없이 가져간 미가를 책망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미가의 어머니는 오히려 '내 아들이 복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순순히 돈을 내놓는 아들이 고마워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나 추측하건대 처음에는 범인이 누군지를 모르고 저주를 했는데 그 범인이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면 결국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로 돌아갈 것을 염려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저주건 아들에게로 저주가 미친다면 결국 아들에게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저주 대신이 복이 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내 놓은 잃어버린 은 일천 일백 중에 이백을 가지고 신상을 만들어 집에 둡니다. 그리고 신당이 있고 신앙이 있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당을 책임지고 신에게 기원하는 역할을 하는 제사장이 필요함으로 제사장 복장인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즉 신을 섬기는 기능을 자기 집 안에 두고자 한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했습니다. 결국 미가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자신이 섬겨야 할 절대적인 분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신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두고 6절에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한 가정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이스라엘 전체로 표현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미가의 가정과 다를 바가 없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미가나 미가의 어머니나 이스라엘의 마음이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미가의 어머니의 문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물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기쁨은 자식의 성공일 것입니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기쁨의 전부이고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 마치 세상 전부를 잃어버린 것처럼 낙심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미가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식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집안에 신당을 세운 것도 신상을 만든 것도 제사장을 세운 것도 모두가 자기 아들의 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기쁨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기쁨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도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쁨을 자기 멋대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신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계시하신 성경을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판단은 성경을 의존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왕이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버린 것입니다. 내 생각에 옳으면 옳은 것이고 내 생각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것은 각기 옳은 소견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다툼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내 생각이 맞기 때문에 내가 양보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왕이 없는 그 마음은 자기에게 좋은 것은 옳은 것으로 좋지 않은 것은 틀린 것으로 분별합니다. 이것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입니다. 신상을 만들고 사적인 이유로 제사장을 세우는 미가 어머니의 그 마음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비록 신상은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이 내 아들을 지켜주고 우리 가정에 액운이 떨어지지 않고 복이 주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목사가 내 가정과 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원하고 그것을 기뻐한다면 결국 집안에 신당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우는 그 마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세상에 태어난 자가 아닙니다. 우연히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부모님의 의지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게된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냄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이 따로 존재하십니다. 보내셨을 때는 보내신 분의 의도가 존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어딘가에 보낼 때, 즉 심부름을 시킬 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딘가에 보냈다면 가야할 이유가 있을 것이고 가서 해야할 책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심부름을 보냈다면 자식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의도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보냄 받은 자신이 해야할 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보냄 받은 사람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심부름을 간 자식이 자신을 보낸 아버지가 무엇을 지시하셨는지를 잊어버리고 보냄 받은 곳에서 놀아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살아있고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에 취한 채 우리 자신의 기쁨과 편함을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행하는지 아니면 여러분의 개인적인 소견이나 생각 감정에 의해서 행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거의 대부분이 나의 감정과 소견과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행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소견과 생각들이 서로 충돌되고 다툼으로 번지는 것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면서 가장 많이 발견하는 것도 교회를 내 소견에 옳은 대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기준이 되어서 기분이 나쁘면 교회를 안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결국 내 기분과 감정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내 기분이 상한 것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형제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형제의 마음이 상처 입게 된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내 감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허물 많은 자이고 내가 문제임을 자각하고 형제와 화평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기분이 중요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견이란 참으로 좁습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소견이고 나에게 기쁨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소견입니다. 그러한 소견을 의지해서 행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은석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석교회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석교회라는 이름이 유명해지고 은석교회가 커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은석교회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로 모이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이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증거되는 교회입니다.

 

 

 

 

물론 우리 소견에는 은석교회가 커지고 은석교회의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다른 교회의 교인들도 같은 생각일까요? 다른 교회의 교인도 은석교회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질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커지기를 원하고 있고 그것을 옳다고 여깁니다. 심지어는 옆의 교회에서 분란이 나서 그것의 교인들이 내 교회로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기뻐합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소견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견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하나님에게 물으면서 성경을 통해서 점검하면서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로는 가지 않으려고 힘써야 하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에서 행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셔야 합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사적인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의 복을 위해서 제사장을 세운 것처럼 목사를 여러분 가정과 자식의 복을 위한 도구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있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여러분이 과연 말씀 앞에서 제대로 살아가는지를 드러내고 증거하라고 세움 받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목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이 제대로 되어 가는지를 점검하는데 도움을 얻는 자로 여기면 됩니다.

 

 

 

 

신앙에 대해서 염려도 하시고 고민도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일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염려하면서 신앙에 대해서는 무덤덤하게 산다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점검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내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자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무너뜨리는 것은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삿 17:7-13 나를 위하여


사람이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모를 때 나타나는 현상은 참으로 여러 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실수를 했을 때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려고 하는 모습이 있을 수 있고, 복을 얻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불의함과 허물을 가리신 죄사함의 은혜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자신의 노력과 정성으로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지난주에 말씀 한 대로 당시 이스라엘은 왕이 없음으로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들 안에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이 없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은 각기 자기들의 생각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묻는다는 것도 없습니다. 내 생각에 옳으면 옳은 것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서 보여진 것이 제사장을 사사로이 세운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아들인 미가의 복을 위해서 집에 신당을 세우고 신상을 둡니다. 그리고 신당을 책임지고 하나님에게 복을 빌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 복을 빌어주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제사장이 있어야 우리 가정을 위해서 복을 빌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미가의 가정에 나타난 사람이 유다 가족에 속한 레위인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될 자격은 레위인에게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의 가정에 레위인이 나타난 것은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레위인은 자신이 거할 것을 찾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고 있던 차였습니다. 즉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살 곳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안 미가는 그 레위인과 계약을 합니다. 이것이 10절에 나옵니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라는 말을 보면 미가는 그 레위인에게 일년에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약속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연봉 얼마에 해마다 양복을 제공하고 양식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거할 곳을 찾아다니던 레위인에게는 참으로 구미가 당기는 제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미가의 가정에 제사장이 되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미가의 가정을 위해서 복을 비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오직 자신의 생계와 복이 최우선이었습니다. 떠돌아다니는 레위인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거할 곳이 없는 형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든 거할 곳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레위인에게는 옳은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미가의 가정은 복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아들이 범인인줄 모르고 돈 훔쳐간 자를 마음껏 저주한 상황에서 아들에게 저주가 떨어지지 않고 복받고 살아가는 것이 미가의 어머니에게는 옳은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소견에서 나오는 것이 자기 복을 위해서 개인을 위한 제사장을 채용하고, 레위인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미가의 집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레위인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할 자로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성에서 기거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레위인에게는 여섯 도피성과 40여 개의 성읍을 각 지파에서 떼어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레위인을 위해서 도피성을 내어 주고 40여 개의 성읍을 떼어 준다는 것은 자기 소유가 감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또한 레위인을 위해서 식물을 공급해야 하는 규례도 지켜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레위인은 생계에 위협을 느끼게 되고 자연히 스스로 기거할 곳을 찾아 헤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가의 집에서 해마다 은과 옷과 양식을 약속을 하자 미가의 집을 위한 제사장으로 눌러 앉게 된 것입니다. 결국 왕이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몇몇 사람의 타락의 모습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레위인까지 퍼져 있던 신앙의 타락이었던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제사장 노릇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에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오직 성전에서만 봉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이 레위인인데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은 자기 생계를 위해서 결국 한 가정의 복을 위해 하나님에게 빌어주는 일을 하는 제사장 아닌 제사장직을 수락한 것입니다. 물론 그 레위인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해마다 제공하겠다는 미가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생계가 레위인으로 선택받은 자로서 해야 할 하나님의 일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레위인에게는 옳은 소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가의 가정 역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가정의 복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은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옳다고 생각되는 원칙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칙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쉽게 자기 원칙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칙은 우리의 생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인 반면에 우리들의 원칙은 생계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틀에서 세우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레위인이나 미가의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면 과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실책을 깨닫고 돌이키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고집하려고 한다면 결국 그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령 레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면 내 생계가 곤란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라는 반발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미가의 가정은 나름대로 생계가 곤란해진 제사장을 우리가 책임진다는 것이고 다만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것뿐인데 '그것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인가?'라는 반발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원칙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내 입장이라는 것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내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니까 자신의 행동이 항상 옳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고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이라고 스스로 자문자답하면서 자기 소견대로 행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왕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절대적입니다. 왕의 말 앞에서 신하된 자는 자기 입장을 내세워서 거부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입장보다는 왕의 지시와 명령이 더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왕과 신하의 관계입니다. 신하된 자의 행동은 왕의 명령이 기준입니다. 명령을 따라가는 것이 곧 신하된 자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과 신자된 저와 여러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섬겨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는 이미 신자의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아 나오는 불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고집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이제 여러분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원칙을 세워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입장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원칙을 세상에 증거하고 나타내야 할 사람입니다. 비록 내 입장에서는 나에게 손해가 되고 참아야 하고 내 감정 기분과 반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여러분의 자기 소견이 하나님의 원칙과 말씀을 세우는데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면 여러분 자신의 소견을 포기하고자 하는 것이 신자로서 마땅한 것입니다.

 

 

 

 

미가의 가정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을 우리 가정의 제사장으로 세웠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복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자신을 대리하는 대리자로 레위인을 세운 것입니다. 레위인은 자신들과 다른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레위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복은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 주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으로 말하면 복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가의 가정이 하나님의 원칙을 알았다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제물의 피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의 가정은 그러한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과 전혀 연관이 없는 원칙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죄사함에 흥미를 두지 않는 이유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죄사함이 천국을 약속할 뿐 세상에서의 삶의 윤택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죄사함보다는 자기 복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항상 복을 얻기 위해서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가의 가정이 자기 가정을 위해서 제사장을 세우는 것처럼 목사에게 잘하면 자신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세워서 복받겠다는 것은 제물의 희생의 피를 모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모른 사람은 항상 자신의 노력과 정성을 통해서 복을 얻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13절의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주님의 은혜만 말하니까 하나님이 복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칙이나 말씀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생각에 맞다고 여겨지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면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을 떠나서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참된 도리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성경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나에게 손해가 되고 불편을 가져오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거부하겠다는 그런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말씀을 보면서 '나는 이 말씀의 지시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성경을 소설책을 대하듯 대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읽는 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 속마음에 능력으로 권위로 자리해서 우리를 간섭하고 틀린 것은 책망하면서 저와 여러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마치 책을 대하듯 한다면 이미 그 마음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려는 의도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아무리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보여지는 것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뿐일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청지기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로서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인생의 풍요로움만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통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닙니다. 천국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죄사함과 상관없이, 기독교란 종교를 포기하기 싫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 다시 생각해 봅시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자 하는 깊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기 바랍니다

 

 

 

 

 

삿 18:1-10 동일한 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행동을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준해서 옳으냐 그르냐를 물으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입장으로는 이렇게 해야 옳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기 위해서 내 유익이 포기되어져야 한다면 능히 자기 유익을 포기할 수 있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입장을 포기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예수님에게는 고통이었으나 '아버지의 뜻이라면'이라는 말씀으로 오직 아버지의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분이 그리스도시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 분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이분이 가신 순종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고 한다면,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입장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는 것을 무너뜨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난주에도 우리는 자기 입장을 따라 살아가는 한 사람을 봤습니다. 그는 바로 미가입니다. 성전에서 일해야 할 사람이 성전을 떠났습니다. 거할 곳을 찾기 위해서 떠돌아다닙니다. 결국 자기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미가 개인의 제사장이 되어서 그 집에 속하게 된 것을 정당하게 여겨버린 것입니다. 미가는 미가대로 제사장을 세워 놓으면 하나님이 자기 집에 복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이미 하나님이 제시하셨습니다. 신 5:32-33절에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는 말씀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호와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집에 제사장을 둠으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치신 명령과 규례에 순종하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으면 여호와가 복주실 것이라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미가나 레위인과 같은 속성을 보인 단 지파가 등장합니다. 1절은 또 다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지 않는 자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단지파는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단 지파가 그때까지 자신들이 기업으로 얻은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수 19:40-46). 그러나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얻지를 못하고 오히려 그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나서 새로운 땅을 찾아서 떠돌아 다녔던 것입니다. 1:34절에 보면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단 지파가 자신들이 받은 기업을 얻지 못한 것은 요셉이나 유다 지파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단 지파가 다섯 사람을 뽑아서 자기들이 정착하기에 좋은 땅을 찾아 정탐을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단 지파는 자기들이 분배받은 땅을 얻지 못하자 다른 땅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거할 곳을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거할 곳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레위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들의 물음에 레위인은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여차여차히 나를 대접하여 나를 고빙하여 나로 자기 제사장을 삼았느니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단 지파는 레위인에게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에게 물어 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정탐꾼들의 이러한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이 행하는 길이 형통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즉 자기들이 행하는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할 것인가 잘 안될 것인가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일만 형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 지파였습니다.

 

 

 

 

우리는 단 지파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염두에 두면서 행합니까? 사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떻냐는 것보다는 과연 형통할 것인가 안될 것인가에만 마음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음으로서 보여지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세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내가 행하는 일이 형통할 것인가에만 쏠려 있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자신들이 행하는 것, 즉 자기들이 분배받은 땅을 얻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자기들이 거할 땅을 찾고 있다는 것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임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땅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 없음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일이 잘되기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단 지파의 정탐꾼들에게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6절)고 말합니다. 단 지파를 위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단 지파의 잘못됨을 알았으면서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잘못을 전혀 모르고 다만 듣기에 좋은 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결론은 레위인은 사람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사람이 기뻐할 말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편에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 지파나 레위인 모두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음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자기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자기들의 일이 형통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고 레위인은 단 지파에게 기분 좋은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라이스란 곳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살핍니다.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괴롭게 하는 것이 없고 한가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보고 욕심을 가집니다. 당시 라이스는 시돈의 통치를 받았는데 그 시돈 마저 거리가 멀기 때문에 라이스를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여건들로 인해서 정탐꾼들은 라이스야말로 자기들이 거할 땅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동족들에게 라이스를 치러 가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들에게 붙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마 그들은 레위인으로부터 하나님이 형통하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라이스라는 자기들에게 조건이 딱 맞는 땅을 대하게 되자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서 이렇게 자신들에게 맞는 땅을 준비해 놓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단 지파가 라이스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거할 땅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신자라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일이고,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잘되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행하는 일을 도와주시고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목사를 위시해서 온 교회가 합심해서 기도를 한다고 야단들이지 않습니까? 성경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 영광 모든 것이 사라진 채 오직 인간의 뜻과 욕심만 난무하는 현장을 수시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단 지파는 자기들 앞에 자신들의 마음에 꼭 드는 땅이 보이자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얻어야 할 기업을 얻지 못하고 아모리 사람에게 쫓겨난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이 하나님을 신앙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죄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그래서 자기들이 행하는 것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나중에 미가의 제사장에게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낫느냐라는 말로 제사장을 유혹을 합니다. 결국 레위인은 한 가정의 제사장 되기보다는 한 지파의 제사장 되기를 원하고 단 지파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처럼 단지파도 미가처럼 제사장만 세워 놓으면 자기들에게 복이 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단 지파나 레위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에는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하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지금 내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 한 채 오직 내 일이 잘되기만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 바라보고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내세우면서 교회 일을 하나님을 위하는 일로 밀어붙이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요 11:40).

 

 

 

 

어떤 사람은 단 지파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잘되어갈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이 하는 일을 인정하셨다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는 일이 있고 인정하지 않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는 일이 어떤 일이냐를 따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일이 잘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일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으로 여긴다면 일이 잘 안된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결론이 되버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험이라든가 고난이라는 것은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힘드는 쪽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힘들게 하시고 하는 일이 안되게 하심으로서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신앙하게 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안되는 쪽으로 인도하시는 인도하심은 설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일이 잘되느냐 잘 안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끝까지 그리스도만 믿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왜냐하면 멸망 받은 죄인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원하는 일을 형통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자르면서 까지라도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내 일이 잘되느냐 잘안되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말씀을 세우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인가에만 마음을 둘 것입니다. 어떤 형편이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게 될 것입니다. 미가나 레위인 단 지파 이들 모두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들 멋대로 생각을 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복받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집안에 제사장을 세웠으니까 복받을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단 지파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길이 형통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복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하는 일이 형통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자리에서 살아가십니까? 성경대로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에 복종하는 자리에 있을 때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다면 여러분의 하는 일은 형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바로 여러분이 저주를 받을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복받을 자입니까 저주받을 자입니까? 우리 모두는 저주받을 자입니다. 복은 죄인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내 생각과 욕심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하는 것을 돌아본다면 감히 하나님 앞에서 복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저주에서 생명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든 생명이든 말씀이든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오직 자기 복만 추구할 뿐입니다. 자기 형통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생명은 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미가와 레위인 단 지파를 보면서 왕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어떻게 행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삿 18:11-31 믿음이 없을 때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죄를 추적해 보면 그 근원지는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에서 밝히 바와 같이 죄는 욕심에 의해서 잉태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여러 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근본은 자기 발전입니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꿈꾸며 살아온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하는 자기 발전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모아들임으로서 나은 인간이 되보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돈보다는 지식을 쌓음으로서 나은 인간이 되려고 합니다. 심지어 종교에서 추구하는 '' 역시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인간의 염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각자가 꿈꾸는 이상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룸으로서 자기 발전을 성취하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을 자기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에 염두를 두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도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구원이 따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바 된 구원보다는 세상에서의 구원,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룸으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이름을 굳건히 하는 자기 구원에 더 큰 염원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원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만들게 된 이유도 자기 구원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구원, 사람이 스스로 목적하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를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종교가 말하는 구원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일치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종교에 담아서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기독교가 한낱 인간의 종교 차원으로 전락을 했다면 그 원인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자기 욕망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우리의 욕망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과 믿음을 연결 지어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욕망을 이루어 주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욕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 욕망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의 욕망은 동일합니다. 자기 발전이며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며 자기 구원입니다. 이 욕망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가지고 만나는 관계에서는 항상 동일한 죄의 모습만 보여질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미가와 레위인과 단 지파에게서 보여진 것도 역시 모두가 자기 욕망을 가지고 만나는 관계에서 보여지는 죄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의 복을 위해서 신에게 복을 빌어줄 제사장이 필요한 미가나, 생계를 위해서 거할 곳이 필요했던 레위나, 약속의 땅을 얻지 못하고 다른 곳에 거할 곳을 찾아 헤매던 단 지파나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만난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서로 만나는 것은 어떤 사고방식과 욕망으로 만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욕망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활동하는 단 지파의 구체적인 모습이 보여집니다. 12절에 보면 단 지파는 유다 기럇여아림에 진을 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나서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렀다는 구절을 보면 아마 잠시 휴식을 하기 위해서 기럇여아림에 진을 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미가의 집에 온 단 지파는 문 입구에 600명의 군사를 진치게 하고는 미가의 집에서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만든 신상을 취합니다. 즉 그것들을 강제로 강탈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제사장이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왜 그것들을 가져가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말에 대해서 단 지파는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19절)고 합니다.

 

 

 

 

단 지파가 레위인에게 제의한 것은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 지파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복을 빌어주는 제사장으로 일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한 것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 되는 것과 한 지파의 제사장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라면 당연히 의리를 운운하면서 미가의 집의 제사장으로 있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당사자라면 과연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목사를 해도 50명 교인이 있는 교회의 목사를 하는 것과, 500명 교인이 있는 교회의 목사를 하는 것을 다르게 보는 것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사실 목사들이 염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인 수를 늘려서 현재보다 많은 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들이 꿈꾸는 자기 구원입니다. 이 숫자는 상한선이 없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마음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100명만 되도 좋겠다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명이 되면 100명으로 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구원을 바라보게 됩니다. 즉 100명이 200명, 300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할 곳이 없어서 떠돌아다닐 때 미가가 해마다 돈을 주고 옷을 줄테니까 우리 집의 제사장이 되달라고 했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정된 생계를 찾자 더 이상 생계가 급한 상황에 머물지 않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단 지파가 좀 더 큰 곳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라고 했을 때 레위인은 그것을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제사장이냐 아니면 한 지파의 제사장이냐의 문제는 자기 발전을 꾀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계가 보장이 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생계가 보장된 것으로 족하지 않고 자기 이름이 커지는 것을 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람이 자신의 커짐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생계가 위협을 받을 때는 자기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지만, 생계가 보장된 현실에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하나가 충족되면 또 다른 길을 찾아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단 지파대로 자신들의 형통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제사장까지 뺏습니다. 다른 사람이 복을 받든 못받는 관계없이 우리 일이 형통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속셈입니다. 즉 남의 복을 가로채서라도 형통한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 지파는 제사장과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가지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24절에 보면 "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고 말합니다. 미가는 단 지파에서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간 연유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우린 미가가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이라고 말한 것을 통해서 신에 대한 미가의 사고방식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가는 단 지파에게 신과 제사장은 나의 소유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만든 신이고 내가 데려온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미가의 사고방식입니다.

 

 

 

 

'나의 지은 신'이라는 말은 결국 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날 위해서 내가 만든 신이라는 것은 날 위하지 않는 신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스스로 얼마든지 신을 선택하고 또한 버릴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신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자기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미가 역시 자신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신을 선택했고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제사장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신의 필요에 의해서 신의 계획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신이 선택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사는 것이 신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나 레위인이나 미가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필요에 의해서 신을 선택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신은 우상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흔들림이 없이 굳건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이다'는 이 사고방식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 있을 때 적어도 하나님은 내 필요에 의해서 내가 선택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시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단 지파나 레위인, 미가는 모두가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공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 이 욕망은 사람의 관계에 단절을 가져옵니다. 단 지파, 레위인, 미가, 이들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보여진 것은 형제가 아닙니다. 서로 자신을 위해서 투쟁하고 싸우고 이득을 챙기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미가는 단 지파가 자신의 제사장과 신상을 가져간 것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을 모아서 그들을 쫓아갑니다. 그러나 단 지파는 힘으로 미가를 누릅니다. 25-26절에 보면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단 자손이 자기 길을 행한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은 힘있는 자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단 지파는 제사장을 돌려 달라는 미가를 위협을 합니다. 그리고 미가는 단 지파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제사장을 포기하고 돌아가고 맙니다. 미가가 처음에 이웃 사람을 모아서 단 지파를 추격을 한 것은 역시 힘으로서 제사장을 찾아오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단 지파의 힘에 눌리고 만 것입니다.

 

 

 

 

레위인은 힘이 없는 한 개인의 제사장이 되기보다는 힘이 많은 한 지파의 제사장을 원했습니다. 단 지파는 힘으로서 미가의 제사장을 뺏습니다. 미가 역시 힘을 모아서 자기 것을 찾으려 했지만 상대적으로 힘이 적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의 것을 포기합니다. 결국 동일한 욕망에서 동일하게 보여지는 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왕이 없는 이스라엘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중심 되는 분이 없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중심 되어서 자기 생각대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신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 포기에서 출발합니다. 자기 포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일 수 없습니다. 다만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집착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결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다만 외부에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포기의 길을 가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과연 이들이 상실한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상실했기에 본문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 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도 본문과 같은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역시 뭔가를 상실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단 지파, 레위인, 미가 이들이 상실한 것은 사람의 존재 가치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나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존재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애굽에서 구출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애굽과 같은 운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자기 포기이며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앙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상실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래 마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에서 존재 가치를 찾고, 자신이 소유한 힘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고 약한 자들을 누르고 핍박하면서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서도 역시 본문과 같은 모습이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때 단 지파와 레위인 미가와 같은 사고방식을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에게서 본문과 같은 모습이 보인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채 하나님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석교회 일수도 있고 바로 나와 여러분 자신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인해서 산 자들입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들이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성공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이 포기되어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기보다는 세상의 복 아래 머물기를 원함으로 인해서 생명을 소유한 신자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의 복을 원하고 세상 것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삶을 책망하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위한 역할로서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과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리 원칙을 포기하고 대신 자신의 원리원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원리원칙이란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세상의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 자신에게 참으로 복된 것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헛된 것을 쫓아 살아가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보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합시다. 우린 과연 참된 복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지,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닌 하늘나라에서의 성공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과연 우리들이 생각하는 삶의 기준은 무엇인지 분명한 답을 내려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잘됨이 아닌 하늘나라에서의 잘됨을 염두에 둔다면 참된 삶의 기준이 세워질 것입니다. 그 기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삿 19:1-9 말씀이 없는 삶


신자의 삶은 세상의 삶과는 달리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삶은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굳게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굳게 세우는 것은 말씀을 세움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말씀이 허물어지고 무시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특별한 자로 구별되어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은 참으로 특별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살아가는 것은 같아 보일지 몰라도 그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이유나 목적 등 모든 것은 어둠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을 담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와 신자의 삶은 특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된 우리의 삶이 말처럼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가를 묻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 특별함을 잃어버리고 어둠의 사람과 똑같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뭔가 말씀을 굳게 세우고자 힘썼다는 느낌이 없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뭔가 양보하지 않고 어둠에 철저하게 맞섰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특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를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자가 왜 특별한 존재인지, 그리고 특별한 존재에게서 보여져야 할 특별한 삶은 무엇인지, 그리고 특별한 삶을 잃어버렸을 때 보여지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봄으로서 특별히 구별된 자로서 특별한 삶을 회복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다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절)라는 말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살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17,18장과 마찬가지로 레위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레위인이 등장해서 그들의 잘못된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어떻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서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레위인이 부패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극도로 부패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의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1절에 보면 이 레위인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레위인이 첩을 취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사실 당시는 남자가 첩을 얻는 것은 하나의 풍습으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이 첩을 취한 것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타락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첩에 대한 레위인의 행동입니다. 2절에 보면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의 날을 보내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첩이 행음을 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행음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20: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레위인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다면,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삶이었다면 분명 말씀에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힘썼을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인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다면 레위인의 첩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말씀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3절에 보면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고 말합니다. 레위인은 첩을 데려오기 위해서 첩의 아비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행동이 곧 그 속에 왕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레위인이 첩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안에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는 첩을 죽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이스라엘이었고, 특히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존재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부가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레위인은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책망을 하고 그들을 옳은 진리의 길로 인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인의 구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레위인조차도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쪽으로 행동합니다.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진리 문제는 팽개치고 어떻게든 여인을 데려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말씀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이미 관심 밖입니다. 그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힘씁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레위인의 잘못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레위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갑니까?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까? 사실 어쩌면 우리는 레위인처럼 말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언제나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좇아 행하면서, 그것 때문에 말씀이 무너지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말씀에 관심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말씀에 어긋난 잘못된 것을 본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비록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고 기쁨이 되는 것이면 묵인하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왕이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써 구출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가르치기 위한 존재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서 따로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들 손으로 벌어들이는 소득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먹고 살아감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인은 자신을 위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보여주고, 증거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게을리 하고 자신의 삶에 치우친다면 결국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을 간다고 해도 그들 안에서 그것을 경고하고 책망할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보다 더 큰 심각함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그것을 경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잘못됨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죄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고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죄를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복된 모습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레위인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어찌 보면 어두운 바다에서 빛을 비추는 등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길을 모르는 어둠에서 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등대가 무너지면 어둠에 있는 배는 길을 전혀 찾지 못하고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레위인마저 등대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이스라엘과 함께 어둠에 몸을 두고 살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4절부터 보면 첩의 장인이 레위인을 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인이 레위인을 붙들자 처음에는 삼일을 유숙합니다. 나흘만에 길을 떠나려고 하자 장인이 '떡을 조금 먹어 기력을 도운 후에 길을 떠나라'(5절)고 합니다. 그 말에 레위인이 다시 함께 먹고 마시면서 밤을 지내게 됩니다.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나고자 하나 장인이 간청함으로 다시 유숙하게 됩니다(7절). 그리고 다음날도 역시 떠나고자 한 마음대로 떠나지를 못하고 유숙하게 됩니다(8,9절). 레위인의 장인은 아마 행음을 한 자기 딸을 위해서 레위인을 극도로 대접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붙드는 장인보다는 붙들리는 레위인에게 있었습니다. 말씀보다는 첩을 사랑했기 때문에 첩의 장인이 붙드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레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세우고자 했다면 장인이 붙든다고 해도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적으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매몰차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말씀은 결코 타협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세우는 삶을 산다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기쁨이 되는 모든 것이 포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을 더욱 중요한 삶으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마음에 세워두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 듣기는 했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지 못하기 때문에 들은 것으로 그쳐버릴 뿐이지 말씀이 삶에서 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삶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이 나무라면 삶은 가지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이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말씀대로 가지인 우리는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말라죽고 말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말씀과 상관이 없이 존재한다면 그 삶은 이미 죽은 삶입니다. 말씀과 상관이 없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삶은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평가입니다. 비록 우리는 착한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일을 하면 그 인생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아닙니다. 세상이 칭찬하는 것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칭찬은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칭찬을 듣는 자인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연 주님에게 붙어 있는가 아닌가를 보실 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의 이러한 주님의 평가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주님이 어떤 평가를 내린다고 해도 덤덤할 뿐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11:7절의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는 말씀과 같은 상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이 없고 사람들의 귀에서 맴돌 뿐 그 마음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심령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이러한 상태가 아닙니까? 주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있다는 착각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은 죽은 삶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세상의 재미와 기쁨이 있기 때문에 잘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신자로서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존재답게 구별된 삶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양보되고 타협한 삶이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희생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레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레위인의 모습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말씀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변의 상황과 여건 때문에 말씀을 뒤로하고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적인 관계 때문에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진정한 레위인은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경고를 받고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으로 인해서 우리의 잘못됨을 발견하게 되고 애통함과 회개함으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레위인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답게 그에게서 레위인의 삶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을 굳게 세우고 말씀에 대해서만큼은 그 무엇도 양보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흔적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가차없이 책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된 여러분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레위인의 바른 직무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직무를 잃어버릴 때 가정 전체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는 부모의 기쁨을 위해서 자식에게 세상적인 출세나 성공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재미가 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뒤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과 같은 가정의 무너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에 대한 경고가 없고 책망이 없는 가정이 바로 말씀이 세워지지 않은 무너진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녀가 부모의 원함대로 안된다고 할지라도 신자된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에 자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뜻 또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집단인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말씀은 자연히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교회의 부흥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저는 '말은 맞지만 교회의 현실에는 맞지 않다는 말을 듣습니다' 즉 그렇게 하면 교회가 부흥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교인들이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말은 맞다는 것은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말씀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교회를 굳게 세워야 한다는 자기 기쁨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 때문에 말씀이 무시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둠의 세상에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존재로 부름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존재는 그 삶 또한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고 말씀을 굳게 세움으로서 세상의 어둠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만약 신자가 이 삶에 게을리 하거나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갈 때 그는 세상의 붙듦에 붙들리고 세상과 함께 어둠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부터 죄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삶인데도 그런 자신에 대해서 전혀 책망함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의 삶의 기준과 가치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책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에 머물도록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뿌리치고 날마다 말씀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된 레위인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능력으로 존재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다스려지고 순종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원하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말씀을 굳게 세우는 삶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신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때로 여러분을 책망하시고, 경고도 하시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참된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에 등불로서 존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등불이 되시고 그 등불을 따라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하늘에서 실패하지 않는 인생으로 끝난다면 그가 바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사는 것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삿 19:22-30 기브아의 악행


수많은 세대가 흘러오면서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받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과연 그 예수의 뜻과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예수를 받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받든다고 하고 예수님을 높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그것을 우리 마음에 두고서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고 기쁨이지만 만약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않고 뜻도 모르면서 예수를 남발하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과연 예수님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단순히 머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2000년이란 기나긴 시간의 간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한들 과연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본 것이 있어야 생각을 하지요.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봤다면 그 모습을 생각할 수 있겠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기억해 볼 수 있겠지만 예수님과 함께 산적이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생각이라 해봐야 상상에 지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상상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예수님을 높이고 믿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님을 상상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든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의 기능에 맡겨진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예수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자기 취미대로 예수님 상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에 의해서 그려진 예수는 예수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말씀드리기를 예수님은 오늘날 신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다시 사신다고 했습니다. 신자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사신다면 그것은 신자가 곧 교회가 세상에 살아 계셔서 말씀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이며, 말씀에 드러나 있는 예수님의 뜻과 그 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예수님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상상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일에 우리가 얼마나 힘쓰며 살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할 예수님의 마음과 그 뜻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행음했던 첩을 데리러 간 레위인이 장인의 권유에 의해서 몇 번씩 떠날 길을 멈추고 장인의 집에 유하다가 겨우 길을 떠난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나서 타지에서 겪은 일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집으로 가던 도중에 타지에서 겪은 일이라는 것이 오늘날 생각해도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레위인 일행은 집으로 가던 도중에 길에서 유숙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레위인 일행을 한 노인이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대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말합니다.

 

 

 

 

성읍의 비류들이란 힘으로서 남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노인의 집으로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와 상관하겠다는 것입니다. 성읍의 비류들이란 남자들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란 곧 레위인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비류들의 외침을 듣고 노인이 레위인 대신 자신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겠다고 했을 때 그것을 마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읍의 비류들은 남색, 즉 동성연애를 원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인이 거한 기브아 땅은 비록 이방인이 거하던 땅이지만 그때는 이미 베냐민 사람들이 그 땅을 기업으로 얻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비류들이란 곧 베냐민 사람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동족인 레위인에게 남색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전체가 신앙적으로 타락해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남색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 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딸을 대신해 주겠다는 노인의 말을 거절하자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대신 내줍니다. 그리고 비류들은 그 첩을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놓아주고 첩은 레위인이 거하고 있는 집 문에 이르러 죽게 됩니다. 아침에 그것을 발견한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집으로 가져와서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사방에, 즉 열 두 지파에게로 두루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끔찍한 사건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까? 어찌 보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에서 삭제해도 좋을 것 같은 내용이 적나라하게 하나도 감추인 것이 없이 기록되어 있다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거룩하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 그리고 문장들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사실 거룩한 내용, 거룩한 문장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룩한 문체, 이런 것이 있는 것입니까? 거룩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뜻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때 아무리 추하고 악한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건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추하고 악한 행위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악한 이 사건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이 본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악한 이 사건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성령님의 지혜로서 보여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늘의 사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악함입니다. 왕이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이스라엘 내에서 어떤 악함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입니다.

 

 

 

 

11,12절에 보면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에서 유숙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인 같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서 거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18절의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신 10:19절에 보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레위인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서 유숙을 하면 나그네로서 환대를 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브아에 거하고 있던 베냐민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기준도 아니고 원칙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말씀은 무너진지 이미 오래이며 그들은 다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그 증거가 15절에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는 구절입니다. 레위인이 나그네로서 성읍 거리에 앉아있었지만 그들을 집으로 영접해서 유숙케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비류들만이 아니라 그 성에 거하는 베냐민 사람들 전체가 말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던 베냐민 사람들에 의해서 레위인이 유숙할 곳을 얻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비류들에 의해서 처참한 일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이스라엘의 악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함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디를 봐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합니다. 남자와 상관하겠다는 추한 모습은 적어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남자와 상관하겠다는 그들의 행동을 보지말고 힘으로서 레위인을 괴롭히고 그의 첩을 죽게 한 그들의 속성을 봐야 합니다. 그들은 힘을 가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지를 못합니다. 마치 우리가 비록 동성연애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잘못된 것들이 말씀에 의해서 멈추어지지 않은 채 거침없이 행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말씀의 지시를 받아 행동하는 삶이라면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잘못됨을 경고 받을 것이고 그리고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대해서 귀를 막아 버리고 오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멸망 받을 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행하고 있었고 우리 역시 그러한 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악함은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함 속에서 예외의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레위인을 영접했던 노인입니다. 기브아에 살고 있었던 노인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기브아에 거하던 베냐민 사람이 모두 외면하던 나그네 레위인을 영접한 것입니다.

 

 

 

 

19,20절을 보면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보리가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 우리들과 함께한 소년의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레위인이 자기들의 쓸 것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한 것은 혹 노인이 자신에게 피해가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레위인의 말에 대해서 노인은 레위인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담책'이라고 합니다. 담책이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노인은 레위인이 가지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나그네를 영접하고 그의 쓸 것을 공급하고 대접하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노인은 레위인을 내어달라고 하는 비류들에게 레위인 대신 자신의 딸과 첩을 내어주겠다고 합니다.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인 자기 딸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이것이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노인의 이 마음에서 우리를 심판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치를 놓고 볼 때 레위인이 아무리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설사 귀하고 높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딸보다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기 자식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노인은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버리고 대신 자신과 상관없이 다만 나그네로서 자기 집에 영접해 들인 레위인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을 포기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의 이 마음은 이스라엘의 악함과 완전히 대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힘으로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이스라엘의 모습과는 반대로 말씀에 의해서 나그네를 대접하되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지키는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노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악함이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앎은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증거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면 아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의 삶과 모르는 자의 삶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는 약자에 대해서 어떠한 모습을 보이느냐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본문에서는 나그네를 힘으로 괴롭히는 무리들과 나그네를 영접하고 자신의 딸을 희생하기까지 지키고자 하는 노인 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마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습은 무엇입니까? 약자로 오신 예수님은 약자를 가까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세상이 무시하고 천대했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힘으로서 약자를 무시했던 세상을 정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과 그 뜻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신자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강자로 오신 분입니까 약자로 오신 분입니까? 그리고 그분이 약자들에게 어떤 마음을 보이셨습니까? 신자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을 산다면 그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약자와 함께 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한다는 사람이 약자에 대해서 세상처럼 무시하고 천대한다면 그를 과연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하신다면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사셨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곧 여러분의 마음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에 살아 계시며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인이 시체를 열 두 토막을 낸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단순히 자신의 첩이 죽은 것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만 봐야 할까요?

 

 

 

 

레위인은 시체를 열 두 토막을 내서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냅니다. 레위인의 이러한 행동은 베냐민 지파의 악한 행동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체를 토막내는 악한 행동을 함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서 기브아에서 당한 일이 이처럼 악한 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토막난 시체를 봄으로서 비로소 이스라엘이 어떤 악에 빠져 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껏 자신들의 악에 대해서는 잊고 살았습니다. 자신들 안에서 어떤 악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서도 그것을 악으로 여기지 않았고 악에 대해서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레위인이 보낸 악에 의해서 되어진 일을 보면서 분노합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그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로 인해서 나타난 어떤 악한 일이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악을 악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악이 악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악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자를 무시하고 나보다 못한 자로 업신여기면서도 그것이 악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마음에서 이미 예수님의 마음이 사라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내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이 인간의 악의 실체인 십자가를 봄으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을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곧 신자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브아에서 자행된 악함에서 한 노인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마음, 나그네를 베냐민 사람들처럼 무시하지 않고 영접해 들이고 그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딸까지 희생시키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그 자비로우심으로 인해서 산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 배후에 계시는 주님의 피흘리심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이 생명을 얻은 신자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약자로서 약자를 가까이하는 것이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신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바로 그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보이고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약자로 살아가야 할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너무나 고맙고 귀하기에 약자의 자리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즐거운 자가 바로 신자입니다. 이러한 삶을 소원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삶의 책임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내신 약자는 약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으로 인해서 마음에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

 

 

 

 

 

삿 20:1-11 이스라엘의 분노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 개입하여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 신자된 사람들이 말하는 바지만 과연 말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지 못하다'는 답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뜯어보면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고 삶이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로서의 삶의 자세가 참으로 희미하다 못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 분명 우리들의 머리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삶의 자세에서는 하나님이 개입하심을 믿는 믿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 생활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일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는 어떤 흔적이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머리로는 믿으면서도 그 삶은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심을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결국 사사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삶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왕이 되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감각하고 느낄 수 있는 기준으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확연하게 깨닫고 알 수 있는 어떤 표징과 기적을 도구로 하여 움직이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가 느낄 때 마치 하나님이 없이 나의 힘으로 내가 일함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뿐이지 사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왕성하게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일상 생활에 개입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은 결코 은밀한 것도 아니고 조그마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일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왕성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거창한 구원이나 깜짝 놀랄만한 회심을 기대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증거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술고래에다가 골초에다가 개망나니 같은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더니 하루아침에 술 담배를 끊고 사람도 아주 순하게 변화되었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을 아주 거창하고 깜짝 놀랄 만한 일에서 찾으려고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평범한 일, 미미하다고 생각되는 일에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창하고 깜짝 놀랄만한 일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큰 실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일과와 날마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범하는 잘못에 대해서도 전혀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혹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거창한 구원이나 깜짝 놀랄만한 회심 등 변화를 통해서 체험하고 발견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으시다면 속히 버리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하는 원인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러분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게 만들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날마다 반복되는 삶에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잊고 살아갈 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에게 물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지 조차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나 자신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 결국 타인의 문제점만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고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 그리고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어떤 모습이 드러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서 전쟁이 시작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지난 주일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던 것은 레위인의 첩이 기브아 성읍의 비류들에 의해서 죽게 되자 그 시체를 집으로 가져가서 토막을 내고 이스라엘 사방에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나그네였던 레위인의 일행을 영접하고 성읍이 비류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레위인을 위해서 자신의 깨끗한 딸까지 비류들에게 내어주는 노인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생각했었습니다. 오늘은 레위인의 행동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고하는 레위인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왜 모였는지, 그리고 사십만이라는 대군이 왜 칼을 빼어들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보내어진 토막난 시체에 대해서 그 연유를 알아보고 지금까지 없었던 악에 대해서 심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에게 토막난 시체를 보낸 레위인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고하라고 합니다(3절). 이에 레위인이 자신이 기브아 성읍에서 당한 일을 고하게 되는데 그가 말한 것을 보면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4-5절)는 것이었습니다. 레위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기브아 성읍의 베냐민 사람이 행한 악에 대해서 분노하고 망령된 일을 행한 그들을 징계하자고 마음을 합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게 된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전쟁이 시작되게 된 배경에서 과연 전쟁이 옳은 것이냐 틀린 것이냐를 생각하기보다는 기브아 성읍의 비류들에게 악한 일을 당한 레위인이 그 일에 대해서 복수하기 위해 벌인 일과, 그 일에 대해서 처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보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자신이 당한 일을 고하는 레위인의 말과 레위인의 일을 처리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동입니다.

먼저 레위인이 자신의 당한 일을 고하는 그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4-5절에 나오는 레위인의 말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베냐민 지파에 대해서 분노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레위인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악한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 전체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성읍의 비류들 몇 명에 의해서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성읍의 비류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라고 말함으로서 마치 자신이 당한 일이 베냐민 사람들 전체에 의해서 되어진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라는 말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기브아 사람들이 레위인을 치려고 했던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위인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성읍의 비류들에서 성읍 사람의 전체로 확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인은 나를 죽이려고 내가 우거하는 집을 에워쌌다고 말하지만 성읍의 비류들은 죽이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상관하겠다고 했었으며, 레위인의 첩 역시 따져 보면 레위인이 자신이 살겠다고 첩을 대신 내어 보냄으로 인해서 죽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기브아에 거하는 베냐민 사람들이 자신의 첩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고 했다고 말함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베냐민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당한 일을 극도로 부풀려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말을 생각해 볼 때 레위인의 마음에는 오직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서 복수하고자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기사 레위인이 행음한 첩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처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이미 그가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레위인의 말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서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해 볼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의 말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레위인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기브아에서 당한 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첩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당연히 죽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첩이 죽게 된 것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본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악한 감정과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악한 감정은 성읍의 비류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브아 성읍의 베냐민 사람 전체로 확산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당한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한 일에도 하나님의 일이 개입되어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복수하겠다는 마음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갑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먼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합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들의 감정을 가지고 행동합니까? 아마 대개의 경우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정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에 의해서 일을 부풀려 말하기도 하고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미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항상 말씀이 앞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행동되어져야 하고 말씀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문제와 허물이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다스려지고 자기 허물이 발견되어질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입장이나 체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며 말씀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타인에 대해서 말할 때, 더군다나 누군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그에 대해 좋은 말을 하게 됩니까? 아마 대개의 경우 레위인처럼 부풀려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만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고 싫어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리고 다만 우리 자신의 기분과 감정만 소중히 여기면서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레위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8절에 보면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가로되 우리가 하나라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며 하나라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악한 행위를 한 베냐민 사람들을 심판하기 전까지는 결단코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마치 죄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이 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망령된 일을 행한대로 베냐민 사람을 징계하겠다고 나섭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이스라엘 내에서 죄악을 제하고 신앙을 보존하고자 하는 열심으로 높이 평가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행동을 신앙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면 우리는 죄를 범하는 자들을 찾아서 징계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5절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보고 그것을 빼낸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를 볼 수 있고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며 자신의 죄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회개하는 자들이 형제에게 있는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형제를 티를 가지고 말하고 그것을 문제삼고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있는 큰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는 전혀 보지 못합니다. 다만 레위인의 말을 듣고 베냐민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할 뿐입니다. 즉 남의 말만 듣고 속단하면서 그들을 징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죄에 대한 심판자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심판자가 누구십니까? 오직 하나님 밖에 안계십니다. 하나님만이 죄에 대해 심판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없는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지 자신들은 정당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마치 죄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의로운 자처럼 행동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오직 의를 수호하는 듯한 모습이지 자신들의 문제와 죄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모습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악에 대해서 자신들은 정당하고 깨끗하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이상 심판자로 존재할 뿐이지 악행을 범한 자와 같은 악한 자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악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의를 구하고 악에 대해서 미워하는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들부터 심판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악을 먼저 깨닫고 형제의 문제를 대할 때 본문과 같은 죄에 대한 심판자와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문제나 죄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합니다. 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분을 가지고 행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죄를 보일 때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우리 자신의 들보를 보고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는데 우리 자신에게 있는 들보는 전혀 보지 못한 채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허물을 허물로 여기지 않고, 설사 허물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행동에 비하면 허물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문제로 예수님을 찾고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전혀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죄에 대해서 심판하는 일을 위임을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심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심판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성도들, 우리의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 아래 거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아는 성도라면 형제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려고 하기보다는 형제가 잊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이 어떤 것인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개입하여 일하시고 활동하시는 증거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미미한 것으로 생각되어지지만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고,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해 보는 변화가 일어나고, 형제의 허물과 죄를 보기보다는 나 자신의 허물과 죄를 먼저 보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고, 그래서 형제에 대해서 말을 할 때는 나의 감정과 미움의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모든 것은 성령을 보내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여러분 가까이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개입하여 일하고 계심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거창한 것을 기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게 되고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악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들고 그리스도를 찾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혜라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지혜라는 선물은 우리의 나약함과 죄많음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마땅히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당한 일만 생각하고 감정을 먼저 앞세웁니다. 미움을 간직 한 채 서로에게 목의 가시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애매하게 죽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삿 20:17-28 이스라엘의 기도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기도일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로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도에 걸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는 것은 오직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라든가 '기도로 승부를 걸자'라는 말들이 심심찮게 교인들에게 외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은석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도와는 거리가 먼 교회처럼 보여집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남몰래 많은 기도를 하고 계시리라 믿고 싶지만 만에 하나라도 기도 없이 살아가는 삶이 곧 여러분의 삶의 실제라면 그거야말로 은석교회의 크나큰 위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비신앙적인 기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로 인해서 아예 기도하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기도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볼 때, 또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기도한 것을 볼 때 기도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들이 하고 있는 비신앙적인 기도에 대한 비판보다는 우리 자신들이 기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사람이나 비신앙적인 기도에 열심인 사람이나 다를 바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을 결코 정당화하지도 인정하지도 마시고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설사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말고 '내 기도는 정당한가'를 먼저 물으시기 바랍니다. 정당하지 않는 기도는 단지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과 노력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입니다. '무엇을 기도하는가?'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가?'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고 '기도를 하는가 안하는가'에만 치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떤 기도를 해도 기도하면 그것으로 신앙인으로 취급받는 분위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도 우리와 같은 마음일까요? 어떤 기도를 한다고 해도 단지 기도했다고 해서 들어주시는 하나님일까요?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자가 아니라고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신을 부르면서 자신의 일을 잘 봐달라고 애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앎으로 하게되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시간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태도로 구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되어질 뿐입니다.

 

 

 

 

물론 누구나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행위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행위에 대해서 확신을 가진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확신으로 인해서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모든 것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확신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설사 성경이라 할지라도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상식으로 알고 있는 기도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도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베냐민을 치기 위해서 모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세 번의 기도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8절과 23절, 28절의 말씀인데 이 세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도의 내용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일지니라"고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을 치기 전에 기도를 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우리가 지금 못된 베냐민 사람을 심판하려고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생각에는 '이스라엘이 비록 신앙이 엉망이었다고 해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흔적은 남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게 묻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즉 기도한다는 것 자체를 신앙으로 여기기 때문에 기도한 것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기도하는 것에 관심을 둘 뿐 무엇을 기도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는 이스라엘의 기도가 정당한 것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를 징계하기 위해서 군사를 모집한 것은 자신들은 베냐민 자손과는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베냐민 자손과 같은 악한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베냐민에 비해서 의롭고 그렇기 때문에 베냐민을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는 베냐민이든 이스라엘이든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악을 행했다면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심판할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베냐민을 이스라엘에게 붙일 때에만 심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의의 존재로 보고 악을 행한 베냐민을 심판하려고 하는 그 모습이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는 기도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보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먼저 칠 것인가를 하나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악한 일을 행한 베냐민을 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하나의 형식으로 '누가 먼저 올라가느냐?'는 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칠 것을 결정하고 하나님에게는 누가 먼저 칠 것인가만 결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우리가 과연 베냐민을 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인간이 미리 결정하고 하나님에게는 자신들이 미리 결정한 행동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기도였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누가 먼저 칠까요'는 치는 것을 이미 정해 놓은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역시 자신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은 옳게 여기신다고 미리 결론을 내린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미리 자기 일을 결정하고 결정한 일을 들고 나와서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이스라엘의 기도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이처럼 기도에서 크게 잘못된 것은 할 일을 인간이 미리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도우시면 되는 것으로 인식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와 피조물이 뒤바뀐 것이 아니겠습니까?

 

 

 

 

피조물은 창조주가 계획하시고 결정하신 일에 순종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 계획하고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또한 인간이 계획하고 결정한 일을 도와주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일하실 뿐 인간의 뜻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도가 잘못됐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유다가 올라가라'고 말씀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처럼 보여집니다. '누가 올라갈까요'라는 물음에 '유다가 올라가라'고 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21절에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는 말씀을 보면 결과는 이스라엘의 패배로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군사는 40만 명이었고(17절) 모두가 용맹한 전사들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베냐민 군사는 이만 육천 칠백에 불과했습니다(15절). 분명 숫적으로 볼 때 베냐민은 이스라엘의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 군사 이만 이천이 죽은 것입니다. 40만의 이스라엘 군사가 나약한 어린이나 노인이었다면 이해가 되지만 분명 그들은 전사라고 말합니다. 즉 싸움에 있어서는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 40만이 이만 육천 칠백을 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스라엘의 기도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기도에 대해서 '유다가 올라가라'는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패배했다는 것은 응답 자체가 이스라엘의 승리를 보장한다거나 이스라엘의 기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올라갈까요' '유다가 올라가라' 누가 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라면 '너희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식의 말씀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응답에는 우리를 치기 위한 응답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잘못됨을 가르치기 위해서 '올라가라'는 응답을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에 의해서 패배한 후 다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23절)는 기도를 보면 기도가 조금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이까'에서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도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베냐민 자손에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으로, 누가 먼저 싸우리이까에서 다시 나아가서 싸우리이까로 바뀐 것입니다. 즉 싸움을 당연하게 여겼던 이스라엘이 싸워야 하는가를 묻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패배로 인해서 자신들이 싸우는 것이 정당한가를 하나님에게 묻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기도에 하나님은 다시 '올라가 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베냐민을 치게 되고 또 다시 베냐민에 의해서 일만 팔천 명이 죽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이스라엘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했는데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울면서 하나님에게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세 번째 기도는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28절)고 말합니다. 이렇게 세 번째 기도까지 보면 이스라엘의 기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에서는 '누가 먼저 싸우리이까'라던 이스라엘이 두 번째 기도에서는 '다시 나가 싸우리이까'라고 묻게 되고 세 번째 기도에서는 '다시 나가 싸우리이까 말리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기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발견하셨습니까? 처음에는 자신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칠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에게 나왔던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베냐민을 치겠다고 한 것 자체를 포기한 것입니다. 자기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묻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참된 기도의 모습입니다. 싸워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우리에게는 베냐민을 칠 정당성이 없음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싸우라하면 싸우고 말아라 하면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징계할 자격이 없기에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라진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달라짐은 무엇으로 되어진 것입니까? 계속되어진 패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올라가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인정하신다거나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해서 고의로 패배로 인도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패배케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인식한 자들만이 참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싸우리이까 말리이까'라는 기도를 하게 된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이 스스로 깨달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패배로 이끄신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의 일이 정당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했는데도 결과는 실패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이 부족했다던가 믿음이 적어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이 기도에 대한 믿음이 없고 정성이 부족하다는 문제 때문에 싸움에서 두 번이나 패배했습니까? '올라가라' '싸우라' 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허락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한 허락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스스로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들의 계획을 들고 나왔고 베냐민에 비교해서 자신들은 의롭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패배로 인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계획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묻습니다.

 

 

 

 

기도는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일으키시는 상황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기도가 아니라, 즉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즉 싸우고 말고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속된 패배에서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들 생각으로는 베냐민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올라간 이스라엘은 패배를 하고 맙니다.

 

 

 

 

이같은 상황은 보면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치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삿 1: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의 첫 번째 기도와 같은 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 붙였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마치 자신들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베냐민을 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단지 누가 먼저 올라가느냐가 남았을 뿐 베냐민이 패배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패배함으로서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세상을 우리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계획과 노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직장을 다니고 내 실력으로 성공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대기하셨다가 내가 부르면 달려와주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자신감에 가득찬 기도이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는 형식적인 기도일 뿐입니다. 기도하셨습니까? 그러면 그 기도는 과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여러분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자로서의 기도였습니까?

 

 

 

 

잠언 30:7-9절에 보면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 기도를 보면 우리와 똑같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달라고 합니까? 먼저는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허탄함을 좇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배부르다면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 자라는 것을 능히 알기에 부하게 하지 말아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고, 가난할 때 능히 도적질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는 자이기에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도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이지 자신의 부함이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실패하게 하셔서 우리의 무능을 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등하게 하심으로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자신을 실감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나약한 자신의 거짓과 불의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잠언서의 기도처럼 '나로 하여금 거짓과 불의에서 멀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신자라면 우리의 성공이 급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허탄함과 불의함에서 거짓에서 우리의 탐욕에서 멀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간절함으로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짓과 불의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증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고, 거짓과 불의 등 악에 대해서도 미워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그러한 상황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 계획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기도를 하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기도에 관심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신자는 항상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기도하게 될 것이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능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삿 20:29-35 패배의 의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분명히 인간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다 아는 말이지만 이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 믿음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단순히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이 마치 자신의 열심과 노력에 달린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해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다'는 것 때문에 믿음의 여부가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 스스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스스럼없이 말하기를 '믿음을 가져라'고 하기도 하고 '열심을 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선물이라면 믿음은 외부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즉 사람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한다면 구원의 능력은 믿음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열심이나 의로움, 또는 세상이 말하는 바른 양심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믿음이 우리를 붙들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짐으로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믿음이 주어진 것으로 인해서 그가 완벽한 인간이 되고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옛 본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의 중요한 것은 옛 본성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주어진 새로운 본성, 즉 새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자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 옛 본성을 따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새사람으로서 성령을 따라가는 것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이제 자기 구원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미 구원의 축복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라면 자기 구원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이 기뻐하기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명이요 책임이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다시 앞서 얘기했던 '믿음은 선물이다'는 얘기로 돌아가십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시는 '믿음은 선물'이라는 말을 거듭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선물이라는 말 자체로 그치지 말고 믿음이 선물이라는 말을 깊이 이해하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일단 주어진 믿음이 다시 회수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한번 주신 선물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회수해 버리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 되는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믿음을 주셨을까요? 믿음도 없었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옛것을 찾아서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믿음에 붙들기 위해서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면서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과연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사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공격을 해서 베냐민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같은 동족끼리도 서로 원수처럼 죽고 죽이는 일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우린 그러한 내용을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치는 과정에서 패배를 하고 결국 그들의 기도가 바뀌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치기로 결정을 하고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누가 먼저 올라가서 칠까요?'라는 기도를 맨처음 하게 됩니다. 이 기도에는 이스라엘의 정의감이 실려있다고 말했습니다. 악은 결코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전쟁이고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들의 행동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셨고 이스라엘은 결국 적은 수인 베냐민에게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비록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여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거룩한 일이라고 여겼던 일이지만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수준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주어졌다가 다시 회수되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주어지면 믿음이 우리를 붙들어서 하나님에게 인도해갑니다. 교회에 오면 믿음이 생겼다가, 교회 밖에 나가면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이 되도록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자와 믿음이 없는 자의 삶이 같을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삶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것, 이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나쁜 짓을 한 베냐민을 치는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한 사람에 대해서 분노를 하고 그들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즉 정의감, 악에 대한 분노, 이런 마음이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자를 보고 동정하고 도와주는 것은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일을 말하려면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되어지지 않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정의감이나 악에 대한 분노 남을 도와주는 것 등등의 일들을 믿음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단지 악에 대해서 분노하고 악을 행한자를 심판하려는 이스라엘의 행동을 믿음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행동이 분명 세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옳은 것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잘못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패배한 이스라엘이 두 번째 기도할 때 '우리가 베냐민을 쳐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패배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기도에서는 '우리가 쳐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변화는 처음에는 자신들의 계획과 일이 옳다는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을 찾았던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베냐민에 대한 일을 하나님에게 묻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자신들은 베냐민을 심판할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베냐민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은 자신의 부족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임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이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서 의를 찾고 자기 의를 기준으로 해서 타인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들 때 타인을 스스럼없이 책망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냐민이 옳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베냐민 사람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셨다고 해서 베냐민을 인정하신 것이고 베냐민 편을 든 것입니까? 베냐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악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베냐민을 승리하게 하신 것은, 악을 행한 베냐민을 치는 것 자체가 의가 아님을 먼저 가르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베냐민이 처참한 패배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베냐민 모두를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양쪽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할 자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은 악은 베냐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베냐민을 이스라엘이 징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양쪽 모두를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악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악이 곧 교만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베냐민을 징벌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것이 교만입니다. 베냐민을 징벌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베냐민에 비해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잊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베냐민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승리하자 그들은 기고만장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 편을 들고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에 대해서 승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과연 자신들 편을 들만큼 자신들이 의로운가를 생각해본다면 결코 승리에 도취되어 전쟁에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스스로 이르기를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 하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르기를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하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베냐민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시겠다고 말씀하신 다음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칠 때 작전을 세웁니다. 거짓으로 패배하는 척하고 베냐민 사람을 성읍에서 나오게 하고 그 틈을 노려서 성읍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유인되는 줄을 모르고 기브아 성읍을 떠나서 이스라엘 군사들을 추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치던 이스라엘은 미리 매복해 있던 군사와 함께 베냐민 사람을 쳤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일백이 죽게 됩니다. 이러한 전쟁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십만이 되는 군사를 겨우 몇만의 수를 가지고도 승리했던 베냐민 사람들이 한순간에 참담한 패배를 하게 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고 그 힘으로서 승리의 여부를 따지는 우리의 상식 가지고는 이해가 안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전쟁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이고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승리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 편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금물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편을 들어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패배하게 하셔서 그들의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승리를 주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했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사람을 칠 정도로 의롭지 못합니다. 베냐민 사람은 악하고 이스라엘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며 이스라엘이나 베냐민이나 똑같은 자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베냐민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승리했다고 해서 자신들의 힘을 믿거나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는 착각에 빠지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스라엘에 승리하고 하나님이 우리편이 될 만큼 의로운가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이고 믿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베냐민 사람들도 이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 잘난 맛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자기 착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쪽을 치심으로서 인간의 악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답을 미리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못살고 벌받는 것이 당연하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고 잘살아야 한다는 답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답을 주셨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상식과 생각으로 미리 답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우리가 가진 답과는 반대의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착한 사람이 망하고 무너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반면에 악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오히려 성공하고 잘사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 대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하나님, 왜 착한 사람이 못살고 나쁜 사람이 잘사는 것입니까?'라는 불평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답과는 다르게 나타난 현실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해도 자신이 미리 답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이스라엘이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라고 묻는 기도는 이미 베냐민 사람을 치는 것이 정당하고 하나님 역시 그것을 인정하신다는 답을 가지고 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나쁜 사람을 치는 것인데 하나님이 반대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스라엘도 베냐민과 같은 인간입니다. 똑같이 악합니다. 베냐민을 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악이었던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나쁜 사람보다 잘살아야 한다는 것이나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잘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바램이고 당연한 이치라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자신 역시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우리가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점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교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잘난 것에 도취되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베냐민 사람이 승리에 도취되어서 한번 승리했는데 저까짓 이스라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교만이 바로 오늘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승리에 도취되면 자기 힘을 과시하고 믿게 됩니다. 즉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감을 심판하셨던 하나님의 일이 여호수아 7장에서도 등장합니다.

수7:3절을 보면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라고 말합니다. 아이 성보다 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은 아이 성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여리고를 그들 손에 붙이셨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승리를 자기 힘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힘이라면 아이 성은 삼천 명만 가도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결국 그들은 패배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아이 성이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두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복병을 감추어 두고 거짓으로 패한 척 도망하자 아이 사람들이 쫓아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베냐민 사람들이 패한 모습과 비슷합니다. 자신들의 승리와 힘을 과신한 나머지 상대방을 무시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이 성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교만을 치시고, 나중에는 이스라엘을 들어서 아이 성의 교만을 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전쟁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승리와 패배는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나온 사람은 패배했고,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고 나올 때 하나님은 그들을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악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과 손으로 모든 것을 이뤄보려는 것은 인간의 야심일 뿐 결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이것은 정당한 일이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이 되는 것이라는 답을 내려놓고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정당한 일이니까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교만으로 보신다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두셔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공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성공을 위해서 기도하기보다는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의 성공을 도와줘야 할 만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사람인가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이며 믿음입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단 몇 분 몇 초라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사랑이 필요 없는 의에 거하는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신자의 의는 이처럼 자신이 악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 나오는 것이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의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없이 안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감입니까? 아닙니다. 악에 대한 분노입니까? 역시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보여지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마치 믿음의 모습인양 떠들어봐야 세상 사람들에게는 '내가 비록 교회는 안다니지만 예수 믿는 마음으로 산다'는 말만하게 할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존재임을 마음 깊이 자각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가 잘되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신자들만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순종할 것입니다. 패배하게 하시면 패배한 속에서 자신을 볼 것이고, 승리하게 하시면 승리한 속에서 자기 잘남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할 자격이 없는 자에게 승리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고 결코 교만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잘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나의 성공과 잘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만큼 정당한 인간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우리들 속에 그러한 마음을 유지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즉 신자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는 마음으로 산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없고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항상 행위를 보면서 남과 자신을 구분하고 나는 의롭고 착하고 너는 나쁘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람의 전쟁을 생각하시면서 진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도우심이 없이는 신자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의 겸손이고 믿음이며 믿음이 없이는 결코 보여질 수 없는 신자들의 독특한 행위임을 마음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삿 21:1-12 가나안 땅이더라


사사기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는 말로서 끝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곧 사사기의 결론으로서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는가를 잘 말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와 법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세우신 규례와 법칙이 있었다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하는가는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스라엘로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와 법도에 의해서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이 수정되어지고 결정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음이 증거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의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마지막이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로 끝나는 것을 보면 결국 당시 이스라엘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성품으로부터 보여지는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가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규례와 법도를 단지 구약의 의미를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바치고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말하는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의식적인 것은 지켜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26절에 보면 베냐민 사람과의 전투에서 거듭 패한 이스라엘이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에게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또 오늘 본문 4절에도 "이튿날에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거기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는 구절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의 타락이 다만 하나님 앞에 행해져야 할 의식에 대한 소홀함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한다면 사사기의 말씀이 의식의 회복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 이스라엘의 문제는 의식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란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규례와 법도가 의식을 말하고 있고 그 의식에 소홀히 하지 말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단지 의식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제정하신 의식이나 절기들의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이나 절기는 모두가 무엇을 가르치고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서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표적의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표적은 이적과 표적 그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적과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의도하는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를 단지 우리가 행하고 지켜야 할 의식이나 절기 등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규례와 법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맥추절 추수절을 지키라고 명하셨다면, 정한 날이 되어서 맥추절과 추수절이란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맥추절과 추수절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날을 대하는 것이 바른 절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어떤 절기나 의식 등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 5: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폐지 운동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율법이 완전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율법의 완전은 율법이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의미가 명확히 드러남으로서 율법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율법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그 정신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곧 율법을 이룬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고방식에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가 곧 이스라엘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또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자로서 마당한 삶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문제에 대한 인간적 해결방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지 않는 인간이 문제를 해결할 때 어떤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0장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패배하게 하셔서 베냐민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즉 자신들 역시 베냐민을 심판할 자격이 있을 정도로 의로운 자가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세 번째 기도에서 베냐민을 치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였음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제 베냐민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이만 오천 일백명이 죽게 됩니다(20:35). 그리고 겨우 육백명만 살아남습니다(20:47). 그런데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안에 근심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0:48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들이 거하던 성읍을 공격을 해서 그곳의 베냐민 사람들과 가축까지 모두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서 베냐민 자손이 이스라엘 안에서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전쟁에서 죽지 않고 도망친 육백 명의 군사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아내가 될 여자까지 모두 이스라엘 사람의 손에 죽어버린 상황에서 이들의 아내가 되어줄 여자가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고민거리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여자를 골라서 베냐민 남은 사람들의 아내가 되게 할 수도 있었지만 본문 1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는 말씀대로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기로 맹세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 맹세는 이미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서 베냐민을 치기로 작정할 때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그들은 베냐민 사람들의 악한 행동에 대한 분노로 인해서 그런 악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딸을 줄 수 없다는 의도에서 한 맹세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맹세를 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딸을 베냐민 사람의 아내로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다른 종족의 사람들에게서 여자를 구하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여자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궁리한 것은 자신들이 누군가를 칠 정당한 구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했던 것을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자기들과 뜻을 같이 해서 이 미스바에 모이지 아니한 사람은 반드시 죽인다고 맹세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맹세한 대로 누가 미스바에 오지 않았는가를 찾아내서 그들을 치고 그들 가운데서 여자를 구해 베냐민 사람에게 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미스바에 올라오지 아니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쳐서 남자와 자지 아니한 여자만 남기고 모두 진멸해 버립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이 얻은 여자는 사백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자가 부족하자 이스라엘은 베냐민 남은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절기에 춤추러 나온 실로의 여자들을 붙들어서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21장의 전체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21장을 마치면서 '사람이 각기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우린 오늘 이같은 본문을 대하면서 단지 사람을 쉽게 죽이는 것에 대한 악을 생각하기보다는 왜 그들에게서 이런 행동이 나오게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칠 정당한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스바에 모이지 아니한 사람은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맹세를 했다고 하지만, 그 맹세는 사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 스스로의 분노에 의한 맹세였습니다.

 

 

 

 

즉 자신들이 베냐민 사람을 치는 것은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이스라엘의 의를 지키는 거룩한 싸움으로 여기고 이 싸움에 함께 하지 아니한 자는 베냐민 사람의 악을 동조하거나 그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긴다는 의도에서 한 맹세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행위는 의로운 것인데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함께 하지 않고 동조하지 않는다면 너 역시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맹세의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맹세가 바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맹세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들의 맹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는 맹세와도 같습니다. 사실 베냐민 자손이 끊어질 위기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스라엘 자신들 가운데서 딸을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미스바에서 딸을 주지 않는다는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맹세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미스바에 모이지 않은 사람은 죽인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딸을 주지 않겠다는 것도 베냐민처럼 나쁜 사람들과는 혈연의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착한 우리가 악한 베냐민과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그들의 맹세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들의 분노에 의해서 스스로 만든 맹세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됨을 알았다면 자신들이 한 맹세를 지킨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의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스라엘의 맹세에 의해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이 죽게 되고 실로에 춤추런 온 여자들이 애매하게 베냐민 땅으로 붙들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동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저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한 구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2절에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인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오니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참으로 중요한 대목은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을 치고 남자와 자지 아니한 여자만 살려서 실로로 끌고 옵니다. 실로는 요단 서편, 즉 가나안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이 단지 실로가 가나안 땅이라는 지역적인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언급된 구절일까요? 당시 실로에는 하나님의 집이 있었습니다(18:31).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실로로 자신들이 강제로 얻은 여자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악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 위한 구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가나안 땅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어떤 의미의 땅입니까?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는 그냥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며 그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수많은 원망과 불신앙을 보였습니다. 즉 가나안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으나 가나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서 살아가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음으로 안다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서 살아가는 것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한 맹세를 어기지 않기 위해서, 또 자신들의 힘으로 베냐민 자손을 유지하기 위해서 길르앗 거민을 죽이고 여자를 빼앗아 온다는 것이 과연 가나안 땅의 의미에 맞는 것입니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8:28절에 보면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거민들이 자기들이 거하던 땅을 잃어버리고 쫓겨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을 더렵혔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가던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이웃도 해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더럽히면, 즉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이방인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들 역시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행동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움에서 멀어진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자손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문제를 자기들의 소견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결국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맹세한 내용을 구실로 삼아서 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수 없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힘으로 얻은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우심 덕분에 얻은 땅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가 그들을 가나안 땅에 있게 한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약자를 핍박하는 것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능력인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문제가 발생한다면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직 자신들의 소견과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 사사기를 마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리스도안이라는 것이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도 없고 만져지는 것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인지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실제적이며 구체적이며 우리들에게 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구약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나안 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이 땅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으로 인해서 생명의 영역인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 안이라는 특별한 나라가 요구하는 그 정신과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맞는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하나하나가 과연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들의 생각과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스스로 해결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꼭 문제가 해결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 몰두하다보니 결국 드러나는 것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 해결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문제 해결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손해를 보게 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는 그 어떤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고 조용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게 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원을 잃어버릴 문제가 발생하면 100원을 잃지 않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는 생각만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100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인간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다보니 결국 대신 다른 이웃에게 피해를 주고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묵상하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신자라면 멸망 받을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주어진 새로운 나라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법칙인 사랑과 자비, 긍휼과 용서, 섬김, 희생, 온유처럼 그리스도의 성품과 마음에 맞춰 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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