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스크랩] 룻기 강해

공 상희 2009. 5. 6. 13:30

 

 

 

 

 

 

 

룻기 강해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룻 1:1-18 나오미와 룻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모두 이해하기란 참으로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힘들다는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해야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피조물의 입장을 헤아려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입장만 고집 피웁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입장과 형편과 처지를 헤아려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어긋나는 일이 발생할 때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쉽게 인정하지 못할뿐더러 그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못하게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게 하십니까?'라는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는가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을 함으로 인해서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어제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은 패배하게 하시는 변덕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원망을 했으니까 벌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라는 넓은 이해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일이 여러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현재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 사건말고, 지금 내 주변에서 내 형제, 내 자식이 죽어나갈 때, 과연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끄집어내면서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분들에 대해서 '대단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볼 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했는데도 불구하고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왜 옥에 갇히게 하시는지, 왜 매를 맞게 하시는지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이 평강이고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얘기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을 존경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얘기를 함으로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자신이 참된 신앙인의 길에 있는가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도 자주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생각만큼은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이 생각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항상 나에게 유익이 되고 득이 되는 일만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다른 가게는 장사가 안되는데 주일은 꼬박꼬박 쉬는 내 가게는 장사가 잘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바로 내 편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편이라는 것은 자기 기준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해주시기를 원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과연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에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룻의 이야기는 사사들이 활동하던 사사시대를 배경으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룻기서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있었던 일임을 언급하고 시작하는 것은 사사기에서 밝히고 있는 엉망이었던 이스라엘의 신앙과 대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신앙에 있어서 전혀 가망성이 없는 이스라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룻기서가 등장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엉망이었던 신앙과 룻을 비교하게 함으로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사사시대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 때문에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흉년을 피해서 먹을 것이 있는 땅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엘리멜렉이 죽고 그 아내와 두 아들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하나가 오르바이고 다른 하나가 룻입니다. 이처럼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가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데리고 모압 땅에서 살고 있는데 10년쯤 지나서 두 아들 마저 죽어버립니다. 남자는 다 죽고 여인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고향 땅에 흉년을 그치게 하시고 먹을 것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그들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떠날 것을 권유합니다. 8-9절에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라는 말씀을 보면 당시 나오미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자신을 따라오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편 없이 여인의 몸으로 산다는 것은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약자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할 대상이 없는 나오미로서는 자신에게서 전혀 소망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따라온다면 그것 자체가 고생이기 때문에 남편을 잃은 며느리들이 각기 새로운 남편을 만나서 살아갈 것을 권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권유를 듣고 며느리들은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10절)는 말로서 나오미를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1절)는 말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형이 후사를 두지 않고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해서 형의 후사를 이어가는 이스라엘의 풍습이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 풍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 자신에게는 태중에도 아이가 없고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설사 지금 남편을 두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언제 그 아이가 커서 결혼을 할 때까지 기다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는 자신을 따라오는 것보다는 각기 남편을 구해서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오르바란 며느리가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시어머니를 떠날 수가 없다는 생각을 굽히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목사들의 설교를 보면 이 본문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버이 날이나 가정의 날이 되면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따르는 룻의 이야기를 하면서 룻이 효부임을 강조합니다. 즉 룻의 이야기가 효부 이야기로 바뀌어서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본문이 효부 룻을 말하기 위해서 있을까요?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16절의 룻의 말입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룻의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나오미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나오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객지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게 하신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객지에서 행복하게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보다 더 못한 형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과연 나오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을 하고 나오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잘 봐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나오미가 겪게된 불행에 대해서도 다 목격한 사람입니다. 결국 이방인인 룻의 입장에서 나오미를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은 그렇게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한 사람은 잘사는데 다른 한 사람은 계속 실패만 한다고 할 때 과연 누구의 하나님을 원하겠습니까? 분명 잘사는 사람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오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이방인이 나오미를 바라볼 때 나오미의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을 그런 하나님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을 믿는 사람을 도와주고 잘살게 해준다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그러한 시각에서 나오미의 하나님을 볼 때 도저히 하나님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흉년 때문에 객지로 가게 된 나오미에게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나오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니까'라는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 있었던 일이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 재현된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해가 되어지겠습니까?

 

 

 

 

13절에 보면 나오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이 자신을 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머니를 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서 나를 치시기를 원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과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는 룻입니다.

 

 

 

 

우린 성경을 보면서 대개 영웅적인 것에 호감을 두게 됩니다. 가령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더라는 말씀을 볼 때 '나도 저렇게 죽었으면'하는 바램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은 극구 피하려고 합니다. 천사와 같은 얼굴이라는 영웅적인 것은 좋아하지만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으면서도 찬송을 불렀다는 말씀을 대할 때 자신도 옥에 갇혀서 찬송하는 것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옥에 갇히는 상황은 멀리 하려고 합니다. 스데반 사도바울 등 우리가 볼 때 영웅적인 인물들은 흠모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그들처럼 인도하시겠다고 한다면 거부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단 것만 골라 먹고 쓴 것은 뱉아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자체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쓴 것은 골라서 버리시고 단 것만 골라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절대로 우리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고통과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생각하는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러분 주위에 실패만 하고 고통만 겪는 신자가 있다고 할 때 과연 그 사람을 보면서 '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된다고 해도 변함 없이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일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면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금방 원망의 대상으로 변해버린다면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괴로울 때나 편안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여전히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어질 때 그것을 참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룻은 자신의 희망을 따로 간직하고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다른 자기만의 희망이 있었다면 희망이 없는 나오미를 떠나서 자기에게 희망이 되는 것을 찾아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에게 희망인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희망이기를 원했습니다. 나오미에게 함께 하는 하나님을 자기 희망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외에 자기 희망으로 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희망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세상 것을 잃는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희망은 돈입니다. 힘이 되는 남편이고 자식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멸망에서 구출하시고 영원한 나라에 인도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만을 희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불의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오직 유일한 소망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보고 사는 신자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나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서 '나의 하나님'을 말할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나오미를 바라보면서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을 하는 룻의 고백에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항상 나를 도우시고 나에게 좋은 일만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일을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봅시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고난을 잊어버린 채 잠시 살다 갈 세상에서의 고통과 어려움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고난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그 고난 안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변함 없이 '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룻 1:15-22 나오미의 하나님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아닌, 즉 가짜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참된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부르고 있고 섬기는 하나님이라고해서 참된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교회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하나님을 부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알아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연구해서 발견해 낼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들 앞서서 하나님을 만난 분들의 얘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울 뿐입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 하나님을 만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고백한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그분들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분들과 같은 고백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고백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내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늘에 모셔 놓고 하늘을 향해서 믿는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많은 교회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벌리고 행여 하나님이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염려가 되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들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도 응답을 얻을 수 있다는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면 잘못이라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현재의 삶에서 우리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만 하늘에 계시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서 다만 막연한 이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에서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설명으로 듣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분이 자신의 삶에서 만난 하나님을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서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과연 그 하나님이 계셨는지 찾아보고 이제부터라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부르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흉년을 피해서 이방 나라인 모압으로 떠난 한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일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은 상황은 아니라도 할지라도 같은 형편과 처지에 처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보이는 반응과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이 보이는 반응과 비교할 때 과연 같다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서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얻은 것은 남편과 두 아들이 죽는 참담함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상황에 대해서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3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나오미는 자신이 비참한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치신 결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 나오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약속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약속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떠났다는 것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의 신앙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흉년이 든 상황에서 누구든 살길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앙 위에 세워진 판단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살길을 찾아서 이방 나라로 떠났다는 것은 결국 신앙 위에 세워진 판단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소견으로 내려진 판단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약속의 백성이 약속의 땅을 떠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징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의 상황, 남편과 아들이 죽는 상황에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자신을 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잘못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오미가 약속의 백성으로 약속의 땅을 떠난 잘못됨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했다면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실패와 절망이라는 상황에서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불의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의한 인간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인식하고 있을 때 실패와 절망 속에서 자신을 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짜 하나님은 인간을 괴롭게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인간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역할만을 합니다. 그러므로 가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실패와 절망의 상황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 용납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신에 대한 원망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은 신자를, 자기 백성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다운 모습에서 벗어날 때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입니다. 실패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나오미의 고백은 20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 베들레헴 온 성읍이 '이가 나오미냐'라고 하면서 떠들썩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을 떠난 나오미가 남편 아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홀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에 놀란 말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고향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게 된 나오미는 초라함과 절망을 함께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나오미'란 이름의 의미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은혜로운 자' '사랑스런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라'는 '괴로움' '쓰라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나오미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을 전능자가 하신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오미가 만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하나님이 괴롭게 하셨다라고 하기보다는 전능자가 괴롭게 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생각도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대개가 우리의 일을 해결해주는 능력이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병을 고쳐주시는 능력, 우리를 복주시는 그 능력, 이러한 것을 대개 전능하심으로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병 고치시는 것이 전능일 수 있지만, 못하실 일이 전혀 없는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전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외국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대단하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외국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외국말로 말하고 있는 것뿐이지 무슨 대단한 능력을 행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 역시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입장에서 전능을 이해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겨우 병이나 고쳐주고 기적이나 일으키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다릅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전능하심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오미를 괴롭게 하시는 것은 자신이 실패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이방 나라로 갔지만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오미는 자신의 실패의 의미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실패와 절망 속에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21절에 보면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고 말합니다. 풍족하게 나갔더니 비어 돌아왔다는 것은 나갈 때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모두를 잃어버리고 가장 약한 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징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나오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나오미를 보면서 우리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나오미처럼 괴로움과 절망과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먼저 보입니까? 나는 괴로움과 절망과 실패에 처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반응부터 먼저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절망과 실패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임을 생각합시다. 분명 절망과 실패의 상황은 피하고 싶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과 실패의 상황을 기다리고 요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에게 절망과 실패의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 자리에서 분노하고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묵상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오미가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여러분의 괴로움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할 때 그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징계하시고 괴롭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 참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괴로움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깨달았다면 그가 바로 참된 하나님, 전능자를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린 지금 룻의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를 바라보면서 나오미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선택해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시간 본문을 통해서 살펴본 나오미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일을 도와주시고 성공하도록 밀어주는 하나님입니까? 적어도 나오미에게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은 나오미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풍족하게 나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분이 아닙니까? 빈손으로 나갔으나 풍요로움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렇듯 나오미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나오미의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알고 그 분을 섬기기로 원하십니까?

 

 

 

 

나오미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나오미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 우리를 징계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전능하심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하시겠습니까?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도 아니고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참된 분으로 섬기기로 작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된 신앙의 길에 계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우리는 룻의 입장에 있다고 했습니다. 16-17절을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룻의 이 말이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이겠습니까? 단지 시어머니에 대한 효심에서 나온 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냥 '나는 죽어도 어머니를 버릴 수 없다'는 말을 하면 되는 것이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만일 자신이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을 볼 때 룻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를 치시고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벗어날 때 징계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은 있습니다. 즉 룻에게도 나름대로의 하나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버리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를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이 참된 분이심을 알았기에 그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르바는 처음에는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하다가 자신을 따라오면 희망이 없다는 나오미의 말에 결국 자신에게 희망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룻과 오르바의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르바가 처음에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한 것은 나오미에 대한 정 때문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룻과는 다른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서 발견한 하나님을 보고 있었지만 오르바는 단지 나오미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게 희망이 되는 길을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룻의 선택으로 삽니까 아니면 오르바의 선택으로 삽니까? 룻의 선택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좁은 길입니다. 오르바의 선택은 넓은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을 택하는 자의 차이는 무엇을 보느냐에 있습니다. 참된 생명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좁은 길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에게는 괴로움과 때로는 실패와 절망으로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주님이 가신 생명의 길임을 안다면 그 길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보지 않고, 참된 생명을 보지 않고 자기의 편함과 자기 인생의 성공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넓은 길을 가게 됩니다. 당장 바라볼 때 넓은 길에 희망이 있고 성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보는 자와 보지 않는 자의 차이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생명을 보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되는 것을 찾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좁은 길보다는 당장 보기에 좋은 넓은 길을 원할 것입니다. 생명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의 마지막 결과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지는 유익함에 마음을 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오미에게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참된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거하기를 원한다면 룻처럼 나오미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약속대로, 말씀대로 실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확정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서 나오미의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괴로움과 실패와 절망 속에서 전능자의 일하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절망에서 새로운 소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따라서 비록 여러분이 가는 길이 좁은 길이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고 여러분이 가야 할 길로 마음에 확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기에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뜻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룻 2:1-13 하나님이 하시는 일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나오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비어 돌아오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1:21절에 보면 나오미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는 이 말씀은 사실 우리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에게 일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상식처럼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대개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상식은 빈손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이것이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대하고 믿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가요? 하지만 나오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러한 상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우리는 가장 먼저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부터 해야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믿음을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이용을 합니다. 실패 없는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말한다 해도 거의 모두가 자기 개인을 위한 계획과 뜻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오로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뿐 하나님 스스로를 위한 계획과 뜻은 없는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이사야 55:8-9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나름대로 정하신 길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대로 이루어주시고, 우리가 원하는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흉년을 피해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떠나는 나오미의 가정에 주어진 것은 '실패'였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버리는 실패를 안고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나오미의 인생이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흉년을 피해서 갈 때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의 소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오미가 여인으로서 의지하고 힘이 될 수밖에 없는 남편과 아들을 잃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는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믿어봐야 별 수 없다'는 생각에 머물러서 몸은 교회를 찾아도 그 생각과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머물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에게 머물지 못한 채 끝까지 우리 자신의 길과 우리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생활로 머물러 버리고 말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길과 우리의 생각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그 길과 생각은 우리의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길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길과 생각을 살피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신앙인이며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는 불행, 즉 실패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나오미처럼 남편과 아들이 죽는 엄청난 실패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시각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실패가 나오미에게 주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오미를 고향으로 다시 되돌리기 위해서 그가 의지하던 남편과 아들을 잃게 하셨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나오미가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면 결국 하나님의 일은 성공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시각에서는 실패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에서 보면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오늘도 쉬지 않고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그 길을 알았다고 해도 과연 하나님의 생각과 그 뜻에 순순히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우리가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실패가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두게 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할 때 우리를 실패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기쁘게 그리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두고자 할 때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한번 깨달음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함을 한번 체험했다고 해서 신앙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으며 스스로 사단을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계속되는 사단의 유혹에 의해서 깨달았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실패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만 소망을 두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다 압니다. 다 아는데 굳이 나에게 실패를 주실 필요가 있습니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 생각에 타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실패하게 하신 것이라면 이미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임을 알고 있는데 굳이 실패를 주실 필요가 있는가?'라는 이 생각이 타당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푸념은 결국 실패를 피하고 싶은 우리의 본심에서 나오는 변명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생각까지 버리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실패하게 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신자로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길, 우리의 생각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생각을 높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들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획과 나의 생각으로 가득찬 채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에게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십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를 실패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나오미를 실패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나오미가 의지하던 사람은 남편 엘리멜렉입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편만큼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요즘이야 남편이 없다는 것이 전혀 흉이 될 것이 없는 시대이고, 여자라도 얼마든지 일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이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여자에게 남편이 없다는 것은 무시와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보호해주고 도와줄 존재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여자에게는 기업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여자의 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남편 엘리멜렉을 대신할 존재가 등장합니다. 1절에 보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고 말합니다.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보아스가 재물이 많은 사람이며 그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의 이야기에 보아스가 먼저 등장을 하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룻기 4:17절을 보면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두고 사람들이 외치는 말입니다. 분명 룻이 낳은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2:1절에 등장하는 보아스란 사람은 단지 나오미를 도와주는 이웃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가 잃어버린 엘리멜렉을 대신하는 자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말은 나중에 4:17절을 설교할 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오미는 이제 남편이 없는 자입니다. 룻 역시 남편이 없는 자입니다. 남편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따라서 핏줄을 이어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가고, 가문을 이어가는 존재로 보아스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1:22절에 보면 나오미와 룻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는 보리 추수할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이 없는 가난한 자들은 추수할 때가 되면 밭에 나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율법에서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추수하는 사람들은 밭 모퉁이의 농작물과 떨어진 이삭은 남겨 놓도록 말씀하셨습니다(레 19:9,10, 23:22).

 

 

 

 

룻 역시 생계를 위해서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전혀 계획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라는 뜻입니다. 즉 룻이나 나오미는 보아스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보아스란 사람과의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 편에서 볼 때는 우연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 편에서도 우연이라면 하나님도 계획하지 않고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사람들에게는 항상 우연히 되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시라는 필연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나오미의 남편이 죽음으로 나오미의 족보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장을 보면 보아스로 인해서 끊어질 족보가 새롭게 이어져 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족보는 다윗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이 누구인줄은 다 알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예수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다윗과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족보는 생명의 족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멜렉으로 계속되었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었을 나오미가 엘리멜렉이 죽고 그 자리에 보아스가 들어옴으로서 예수님과 연관된 족보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 룻기 이야기입니다.

 

 

 

 

4장의 이야기를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오미를 인도해 가시는 그 길을 먼저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나오미를 인도해 가시는 길은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엘리멜렉으로 이어지는 가문은 생명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흉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땅을 버리고 이방인의 땅에 몸을 의탁하는 엘리멜렉을 통해서는 결국 생명과 상관이 없는 자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나오미에게 엘리멜렉이 죽고 대신 그 자리에 보아스를 세우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악으로부터 끊어버리시고 항상 생명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부터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오직 생명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도 이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만을 남겨 놓기 위해서 악이 되는 것은 끊어버리고 우리가 의지하는 세상 것을 끊어버리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해졌을 때 풍랑을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선원들이 행하는 것 중에는 배에 있는 무거운 것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최대한 배를 가볍게 함으로서 풍랑 속에서도 버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랑이 없는 상황에서는 버릴 필요가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들이지만 풍랑이라는 상황에서는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위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린 지금 풍랑을 만난 처지와 같습니다. 만약 세상에서 풍랑을 보지 못한다면 그분은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생명에 마음을 두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생명을 마음에 두고 세상을 본다면 세상의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우리를 침몰시키는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발견하기에 그 짐을 버리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하신 일은 나오미로부터 엘리멜렉을 끊어버리시고 대신 보아스를 세우신 것입니다. 엘리멜렉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삶에서 보아스의 은혜를 입는 삶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엘리멜렉이 나쁘다 보아스가 좋다는 식으로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에게 되어진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멜렉에게서는 흉년 때문에 하나님의 땅을 버리는, 즉 자기 목숨을 위해서 약속을 버리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애당초 그러한 남편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이런 나오미에게 엘리멜렉 대신 보아스를 세우신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이 세상을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고, 보아스가 그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룻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말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남자들에게 명해서 룻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고,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이방여인인 룻에게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룻이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방여인으로서 보아스가 베푼 은혜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보아스의 말은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1-12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부모와 고국을 떠나 알지 못하는 백성에게 온 일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으로 말합니다. 이런 너에게 상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상이 무엇입니가? 보아스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편이 보호 아래 살아가던 사람이 여호와의 날개아래 거하기 위해서 여호와께로 옴으로서 여호와께서 그 은혜 아래 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높으신 길입니다.

 

 

 

 

우리는 나오미나 룻에게 되어진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일하시는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어떤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들의 생각을 버리고, 우리들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동조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우신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 역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나오미가 자신을 환영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하라'는 말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나오미의 괴로움은 결국 새로운 은혜 아래 거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은 우리가 의지하고 사랑하던 것들이 내 손을 떠난 것이 아닙니까? 내가 믿고 내게 힘이 되던 것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고통이고 괴로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날개 아래 거하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여호와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편입니까? 자식입니까? 돈입니까? 여러분의 직장입니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새로운 은혜의 중심되는 분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은 결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하늘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개 아래 거하고자 하는 자는 오직 하늘의 생명을 마음에 두고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거하는 것에서 마음이 멀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괴롭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돌리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 것을 힘으로 삼는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바꾸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과 열심을 아는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오직 은혜로 되어짐만 자랑할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을 때, 고통이 있을 때,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을 때, 그래서 낙심과 절망이 있고 원망과 불평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도 우리가 원하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캄캄한 절망 속에서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희미하고 의심이 가는 빛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빛은 더욱 선명하고 강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주어진 실패는 절대로 실패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성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룻 2:17-23 기업 무름


믿음은 믿음이 있는 자의 마음을 든든하게 합니다. 흔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을 할 때, 그 의미는 어떤 일에 있어서 걱정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든든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보다는 자신이 믿는 믿음의 대상에 더 신뢰가 갈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굳건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절대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서 흔들리는 나약한 미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의 대상은 나약한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분의 뜻과 섭리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사단의 활동까지도 하나님의 허락하에 되어지고 있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살아간다면 그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보여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된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과연 어떻습니까? 참으로 조그만 일에서도 믿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낙심하고 흔들리는 모습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신앙의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대해서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하면 행복도 동시에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 역시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어디서도 행복의 조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들이라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난해도 남편, 아들과 함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시각이지만 나오미와 룻에게는 그러한 조건까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그 무엇도 의지할 것이 없는 약자로 전락합니다.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나오미와 룻이 어떻게 살아가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 힘든 일이지만 분명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이것을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참된 맛을 아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룻이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서 밭으로 갔을 때 거기서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해서 '이방인이 자신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푸는가?'라고 하면서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자된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린 너무 자주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신과 비교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섭섭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것은 은혜의 양으로 보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 자체로 본다면 룻의 입장에서는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자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즉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은혜의 양에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었다는 것에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에 대한 신자의 마음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가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은혜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타인과 비교하면서 은혜의 양을 생각하고 많다 적다는 판단을 하면서 섭섭함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양을 생각한다는 것은 은혜를 세상의 것을 받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에게서 은혜는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 자체였습니다. 무시받고 천대받아 마땅한 자신에게 다가오고 호의를 베푸는 것, 이것이 룻에게 은혜로 여겨졌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마땅한 자신들을 위해서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에게는 은혜의 양이란 없습니다. 다만 받을 수 없는 자가 받았다는 감격과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나오미와 룻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역시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7,18절에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주은 이삭을 떨자 한 에바쯤 되었다고 말합니다. 한 에바란 지금의 단위로 계산하면 약 12되쯤 됩니다. 밭에서 주은 이삭이 12되 되었다면 보아스가 룻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주워온 이삭으로 떤 보리의 양을 보자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룻이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라고 답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호의를 베푼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나오미 역시 룻이 주워온 이삭에서 호의를 베푼 자의 은혜를 발견했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는 인생으로 전락한 사람입니다. 우린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거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 가서 남의 일해서 얻은 것의 부스러기를 주워서 먹고산다는 것은 가장 낮은 위치가 되어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주운 것을 바라본다면 아마 눈물이 흐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고 살아가는 신세가 된 것에 대해서 한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운 이삭을 보면서 그 밭의 주인에게 복을 빈다면 그것은 주워먹는 자신의 신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제 자신과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 어떤 신세에 처했든 어떤 입장이 되었든 자신의 신세나 입장을 바라본다면 베풀어진 것에 대해 절대로 감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신세 한탄만 있을 것입니다.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는 원망만 여러분의 가슴을 칠 뿐입니다. 신자로서 참으로 낮아진 마음은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마음이 곧 평안이며 천국이며 참된 만족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푸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베풀어진 것을 보지 않고 베풀어지기만 바라고 살았기 때문에 감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셨던 것을 거두심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요즘 우리나라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은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은총을 은총으로 알고 살았습니까? 몇 달 비가 오지 않음으로서 전국이 난리입니다. 겨우 몇 달 비 오지 않음으로서 이 정도인데 1년, 아니 아합 왕의 시대처럼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으로 말할 수 없는 비참한 현상들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번 가뭄으로 해서 신자된 우리는 한 방울의 물도 곧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 심정도 농사꾼이 아니라면 절실하게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서 보여지는 물을 기뻐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총이 얼마나 큰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과 같은 낮아진 마음으로 살아가십니까? 낮아진 마음은 높은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곧 베풀어진 은혜를 은혜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낮아진 마음인 것입니다.

 

 

 

 

신명기 8:2-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사십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그들을 실패의 길로 인도하셨고, 이제 오늘 우리들 역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험한 광야의 길로 실패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나오미는 어떤 말을 합니까? 20절에 보면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베푼 은혜를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베푼 것으로 말합니다. 물론 생존한 자에게 베풀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 즉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지 않습니까?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은혜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지 사실 죽은 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사망한 자에게 베푼 은혜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에 나오는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업 무를 자'란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말합니다. 고엘이라는 것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고엘 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을 계속해서 보존하고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 때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 마련된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엘에 해당된 사람은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는데 그것은 가난한 혈족의 땅을 되찾아 주는 일이고(레 25:25.26), 부당한 피해를 입은 친족을 위해서 복수를 책임져야 하고(민35:12, 19, 21), 친족의 홀로된 여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어야(민 5:8)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엘로서의 자격은 가까운 혈족으로서 자원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업을 무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무르는 고엘된 자는 타인의 기업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오미는 보아스를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음으로서 끊어져 버린 가문의 기업을 되찾아 주고 갚아줄 자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한 자에게 베푼 은혜인 것입니다. 이미 사망한 자가 어떻게 기업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업이 보아스로 인해서 되찾아지고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오미가 보아스에게서 본 것은 이삭을 줍도록 한 은혜만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에게까지 미치는 은혜를 보았던 것입니다. 산 자이면서도 죽은 자에게까지 베풀어지는 은혜를 보는 그 마음이 낮아진 나오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와 같은 룻과 같은 낮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신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이 마음을 가꿀 수가 없습니다. 우린 항상 높은 것을 기대하고 높은 것을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고, 산자에게만 베푼 것이 아니라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란 다만 지금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을 보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있어서 남편의 죽음은 기업의 끊어짐을 뜻합니다. 기업을 이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와 룻은 기업 없는 자로 전락해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끊어질 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한 위기에 보아스가 개입됩니다. 그리고 사망으로 끊어진 기업을 되찾고 갚아줍니다. 과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창세기를 보면 처음의 인간에게는 생명나무가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생명에서 끊어진 자가 되었습니다. 즉 사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자의 후손'의 등장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서 끊어진 생명이 되찾아지고 생명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은 산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모두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고엘이십니다.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하게 된 우리들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시고 생명에 참여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고엘의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우리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산자에게나 사망한 자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된 신자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기업이 끊어진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보아스를 자신의 기업을 무를 자로 보면서 은혜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처한 처지가 무엇입니까? 비록 세상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고 신자인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빈곤하고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보면서 때로 한탄하고 섭섭해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정작 세상의 처지는 생명에서 끊어져 있습니다. 그 처지를 보는 자가 참된 신자의 눈을 가진 자이며 보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베풀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세상에 있는 것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이 아닌 든든함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믿음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외침으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에서 진심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리스도에게 구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은혜의 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히 은혜 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로 감사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하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룻 3:1-13 룻의 희생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관심은 과연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줄로 압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주고 인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알아야 하는 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과연 어떤 일로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답을 모르고 있거나 엉뚱한 답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와 착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라면 과연 자기 백성에게 어떤 일을 행하실까?'라고 물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야 물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괴로움을 없애주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복 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 대한 자기의 관심을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자기의 관심대로 이루어질 때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행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이 과연 그런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망에 처한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을 사망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오직 자기 백성을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구출되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상관이 없는 완벽한 인간으로 변모되었다면 아마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된 후의 신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지키심이나 인도하심이 필요없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구원된 신자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죄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함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독생자 아들의 피를 값주고 사신 자기 백성을 영원히 구원에 머물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열심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어지는 것이며 그 열심은 신자를 날마다 진리요 길이요 생명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붙들어 놓으시기 위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속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자에게는 무한한 위로가 되며 힘이 되고 소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룻기서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의 관심을 발견한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기의 풍족함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진 것을 뜻합니다. 흉년속에서 자기 풍족함을 얻기 위해서라면 언약의 백성에서 끊어지는 것 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을 다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풍족함을 위해서 언약의 백성됨을 포기한 이들을 어떻게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까? 말로 설득한다고 되어지겠습니까? 풍족함을 위한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목사의 말 몇마디가 들어 먹히겠습니까? 이미 그 마음과 생각이 풍족함에 머물러 있는데, 그 마음과 생각이 영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니라 풍족함으로 가득차 있는데 말 몇마디 한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서 풍족함을 몰아내고 그리스도로 채워진 마음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비우게 하기 위해서 때때로 세상에서 실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실패하게 해서라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자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며 관심인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자신의 실패에서 바로 이것을 배운 것입니다. 자신을 실패하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관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오미에게는 언약의 땅으로 돌아온 자가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인도하시고 결국 돌아오게 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끊어진 기업입니다. 약속의 땅은 기업을 이어가는 땅입니다. 그런데 기업에서 끊어졌다는 것은 약속의 땅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기업에서 끊어진다는 것 자체가 실패임을 알았기에 나오미의 모든 행동은 잃어버린 기업에 참여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열심이 자기 백성을 지키고 인도하신다고 해서 그의 백성된 자들은 가만히 놀고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자연히 신자의 열심 또한 하나님의 열심이 지향하는 바를 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신자의 열심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하는 부지런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이 관심두고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을 동일하게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열심이 나를 지키고 있고 인도하니까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에는 걱정이 없다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열심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그를 실패하게 하시고 밑바닥까지 떨어뜨려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굴복한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며 사랑이며 관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룻기서 3장 전체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장은 어떤 내용입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룻이 보아스와 동침을 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동침이란 곧 결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룻이 보아스와 동침을 하게 되는 것이 남자 쪽에서, 즉 보아스쪽에서 룻에게 결혼을 해달라고 프로포즈를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룻이 프로포즈를 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일은 나오미가 꾸몄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며느리 재혼시키기 작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오미에게는 단순히 홀로된 며느리를 재혼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나름대로 민족적인 정서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방법이 과연 이해가 되십니까?

 

 

 

 

사실 우리들의 정서로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재혼시키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방법까지 동원해서 보아스에게 보낸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몸을 단장하고 보아스 몰래 숨어 있다가 보아스가 자리에 누울 때 들어가서 발치 이불을 들고 누우라는 것은 여자로서는 참으로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창녀와 같은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나오미의 이런 행위나 또 그런 행위에 순순히 응하는 룻이나 이들 모두가 우리들의 정서는 물론이고 윤리나 도적적인 면에서도 인정할 만한 행동은 분명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나 윤리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윤리나 도덕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윤리 도덕 역시 그 민족의 정서를 기준으로 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서가 변하면 윤리 도덕도 변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가령 옛날 조선시대에는 남편을 잃은 과부는 수절을 하는 것이 윤리요 도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절을 한다고 해서 위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것으로 평가되기 쉬운 시대입니다. 또 아프리카의 어느 종족은 귀한 손님이 오면 자신의 아내와 그 손님을 동침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귀한 손님에 대한 대접이라는 것입니다. 그 종족은 그러한 것이 그들의 윤리며 도덕입니다.

 

 

 

 

이처럼 민족과 정서에 따라 다르고 변하는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본문을 본다면 본문에 대한 해석은 시대가 변하고 정서가 변하고 윤리와 도덕이 다른 나라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옳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시형제 결혼법은 우리나라의 정서와 우리의 도덕과 윤리로 본다면 정당한 것입니까? 절대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형제 결혼법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정서나 윤리를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의 정서를 가지고 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윤리를 가지고 해석해서도 안됩니다. 만약 우리 윤리를 가지고 해석한다면 윤리와 도덕에 합당한 행위에 대해서는 '본받자'라고 할 것이고, 합당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이렇게 하지 말자'라는 교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에서 보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다말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말이 누구입니까? 약속의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와 동침한 여자가 아닙니까? 만약 이것이 시아버지를 사모한 인간의 사랑에서 나온 행위라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의 행위는 약속의 가문을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다말은 유다가 아들을 다말에게 주지 않으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창녀로 변장해서 유다와 동침하여 가문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약속의 가문이 이어져야 한다는 다말의 관심이 다말로 하여금 창녀로 전락하게 하는 열심을 갖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의 가문은 다말의 희생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끊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다말의 이야기를 꺼냈지만, 사실 다말이 추구했던 것이나 본문에서 나오미와 룻이 추구한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말의 희생이 유다 가문을 살린 것처럼, 본문에서 룻이 창녀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희생이 있음으로 해서 엘리멜렉의 기업이 이어짐으로서 사망한자에게까지 은혜가 베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말과 룻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의 윤리 도덕에 맞추어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극히 자명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정서나 윤리 도덕을 초월해서 과연 무엇을 말해주고 있겠습니까? 먼저 본문을 보면 룻이 보아스와 동침을 하게 된 것은 룻의 스스로 자원한 것이 아니라 나오미의 의도에 룻이 순종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면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을 나오미가 계획한 것이고 룻은 나오미의 계획을 따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룻기서를 볼 때 믿음의 주체자로 등장하는 사람이 룻입니까 아니면 나오미입니까? 룻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나오미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룻의 믿음은 1:16절에서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다만 볼 수 있는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순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왔을 때도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말로서 보아스를 기업 무를 자로 보면서 생존한 자만이 아니라 사망한 자에게도 베풀어지는 은혜까지 바라보는 믿음을 보여준 사람은 룻이 아니라 나오미입니다. 또 분문에서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는 것도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였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음을 본다면 이 역시 기업을 바라보고 있는 나오미의 믿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룻기서에서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주체는 나오미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오미서라고 말하지 않고 룻기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전에 말씀드린 대로 4장에서 보아스가 룻에게서 아들을 낳았을 때 여인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하고,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는 룻에게서 낳은 것으로 말합니까? 나오미가 낳았다는 말의 의미와 룻에게서 낳았다는 말의 의미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룻기서는 이런 여러 가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1절에 보면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안식할 것을 구하여 룻을 복되게 한다는 것은 남편 없는 룻에게 남편을 구해줘서 남편을 의지하고 평안히 살게 해주겠다는 인간적 복지차원에서 말하는 안식이 아닙니다.

 

 

 

 

나오미가 보고 있는 것은 기업이 끊어진 자신의 형편입니다. 기업이 끊어진 형편에서는 자신은 물론이고 룻 역시 안식을 얻을 수 없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을 기업 무를 자에게 보냄으로서 룻은 물론이고 자신의 안식을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말대로 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주체가 나오미로 등장하는 내용인 룻기서가 룻기서로 불려지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남편을 잃어버린 룻이 나오미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편안한 삶을 택하기보다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릅니다. 여기에서부터 룻은 희생하는 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룻이 나오미를 따르지 않았다면 나오미에게 있어서 기업을 이어갈 소망 역시 끊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룻이라는 이방여인을 희생하는 자로 개입시킵니다. 그리고 룻의 희생으로 나오미가 살고 사망한 자에게까지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마치 창녀와 같은 수준으로 행동하라고 하는 수치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의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룻기서에서 룻이 중심적인 주체가 되는 것은 룻의 희생으로 인해서 나오미가 살고 그 가문이 살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져 있는 엘리멜렉의 가문이 룻이라는 이방여인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시 하나님의 언약에 흡수되는 놀라운 은혜가 베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의 희생으로 인해서 한 가문이 하나님의 은혜에 흡수되는 이 놀라운 기적을 룻기서가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오늘날 모든 수치와 멸시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져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흡수되어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그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우리야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4명의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남자로서 이어가야 할 족보에 여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 여인들이 빠지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질 위기가 닥칠 정도로 신앙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여인들을 개입시킴으로서 생명을 이어가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여인들이 보여주는 것은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수치를 감당한 희생, 이 희생의 정신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이어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끊어져 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포함된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기서에서는 룻이란 여인의 희생을 볼 수 있고, 그 희생으로 한 가문의 기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된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가 생명에서 다시 산자로 살아가게 된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보아스가 룻에게서 나은 아들은 여인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룻의 희생으로 인한 그 열매의 영광을 나오미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10-11절에 보면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자리에 눕자 룻은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눕습니다. 보아스가 놀라 일어나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룻은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룻에게 보아스는 현숙한 여인이라는 말로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들의 기준으로 보면 룻은 절대로 현숙한 여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현숙한 여인이란 얌전하고 정절을 지키며 살림을 잘하는 그런 여자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외간 남자가 자고 있는 이불을 들추고 몰래 눕는다는 것은 현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보아스는 룻의 무엇을 보고 현숙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룻이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라면 젊은 남자를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늙은 보아스를 좇았다는 것은 룻이 오직 하나님의 기업을 되찾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 마음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에 포함된 자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현숙한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자신이 수치스러워진다고 할지라도 시어머니의 가문을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로 보아스에게 다가가는 룻의 희생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룻의 희생으로 인해서 엘리멜렉의 가문이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어지지 않고 다시 살게 된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수치스러움을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생명에 거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라면 그리스도의 그 희생의 흔적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자의 열심은 이것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소중히 여기며 희생하는 삶을 소원하며 모이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숙한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관심을 두며 나의 생명이 어떻게 주어졌는가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희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숙한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열심은 분명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궁리하는 자기백성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현숙한 신자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 있다는 것, 참으로 감사할 일이며 우리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룻 4:1-8 손익계산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부지런하고 희생적인데 반하여 하나님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극히 반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바라볼 필요 없이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또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는 부지런하고 희생적이라고 하지만 신앙적인 유익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고 오직 육신에 유익이 되는 일에만 부지런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편함을 위해서라면 신앙적인 유익이 있는 자리나 일도 과감하게 마다하고 포기해 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기 사랑과 편함에 대해서는 참으로 고집스러운데 반하여 우리들의 영적인 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심각할 정도로 덤덤하고 감각이 무디어져 버린 상태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지만 관심은 수준 있는 삶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생각과 관심이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있습니다. 돈이 벌릴 때는 흥이 나고 기분이 좋고 마음이 든든하고 세상이 새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이면서도 신자에게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아예 마음이 닫혀진 채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불려와서 듣기 싫은 훈계를 듣고 있는 심정으로 앉아있기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 흥이 없고 새로움도 없고 일주일에 한번씩 반복되는 행사 정도로 여겨버리고 6일 동안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만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다'는 것을 지탱하기 위해서 앉아 있는 참으로 메마르고 빈약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자신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은 과연 어떻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신앙적 유익에 부지런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개인적 편함을 앞세우며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고집을 부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서, 그래서 좀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는가를 물으면서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포기하는 삶이 되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 31:27절에 보면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모세에게 비춰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역하고 목이 곧은 자들이었습니다. 패역하고 목이 곧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마음이 참으로 고집스런 상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노골적으로 '우린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나섰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 패역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신들의 마음에서 돌이킬 의도가 전혀 없는 고집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로써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죽음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것은 항상 자기 육신이 편함과 유익을 기준으로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목이 곧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패역과 목이 곧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말하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서 사는 것에는 관심이 멀어진 것은 아닙니까?

 

 

 

 

계 2: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면서도 사랑과 은혜를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않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참담한 모습을 드러내고 책망하십니다. 계 2:5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메마른 가슴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잃어버린 사랑과 은혜를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자신의 패역함과 목이 곧음의 상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를 직시함으로서 예수님의 희생과 피로써 살 수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를 찾는 내용입니다. 룻 3:12-13절에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에게는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기업 무를 자는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그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다만 그가 기업 무르기를 거부한다면 다음으로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름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법도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의를 앞세워 행동하지 아니하고 자신보다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업 무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보다 가까운 친족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지만, 만약 그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 책임을 행할 것임을 맹세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앉아있을 때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보아스가 그를 불러 세우고 장로 십인을 증인으로 부른 다음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3-4절)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인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에게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모압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관할하니까 그 기업을 무르라고 말합니다. 만약 무르지 않겠다면 다음 자격자인 자신이 무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무르리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하자 그 기업 무를 자는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기업 무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 즉 기업 무를 자는 처음에는 무르겠다고 하고서 왜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까? 그것은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라는 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처음 말한 것은 나오미에게서 기업을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승낙을 한 것은 아마 단지 기업을 사주면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기업 무를 자가 단순히 나오미의 기업만 사주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분명 유익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업이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업 무를 자의 처음 승낙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경우에 희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누군가에게 땅을 샀다고 해도 희년이 되면 다시 되돌려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예외는 있습니다. 그것은 상속자가 없는 친족의 땅을 무르게 되면 희년이 된다고 해도 돌려주지 않고 자신에게 영원히 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속자가 모두 죽은 나오미의 가정의 경우 그의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기업이 확장되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그에게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자 그는 그 일이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되는 것임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과는 달리 거절을 하는 것입니다. 룻에게서 사서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한다는 것은 룻에게서 산 기업이 죽은 자, 즉 죽은 룻의 남편의 이름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 무를 자가 룻과 결혼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업 무를 친족이 룻과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룻이 남편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룻이 남편이 죽은 과부의 처지가 아니라 처음 결혼하는 상태라면 당연히 남편에게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을 무르기 위한 결혼입니다. 즉 죽은 자의 기업이 죽은 자의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 하는 결혼이기 때문에 기업 무름을 위한 결혼은 남자가 여인의 죽은 남편의 이름을 대신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아스의 말을 들은 그 친족은 당장 '이것은 나의 기업에 손해가 되는 일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업을 사되 자기 이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이름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기업 무를 일을 보아스에게 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는 이 친족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처음에 말한 대로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열성적으로 부지런합니다. 자기 유익을 얻고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열심인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지켜지고 증거 되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덤덤합니다. 말씀이 지켜지는 것보다는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싶을 때 '무르겠다'고 한 친족이 오히려 손해가 되겠다고 여겨질 때 '네가 무르라'는 말로서 자신의 할 일을 회피해 버리는 이 모습이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게 단정지어 말한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것이 우리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 친족을 보면 행동 원칙의 기준이 무엇이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의 손익 여부' 이것이 곧 이 친족의 행동 원칙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손해가 되는 일은 그 일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떠한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회피해 버립니다. 선택 여부를 자신의 손익을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4절의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는 말과 6절의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는 말을 서로 비교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말에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남에게 양보하지 않으려고 한 반면에 손해가 될 것 같은 일은 남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교회에서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형제를 대했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봅니다. 사사기서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는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소견을 가지고 행동 원칙을 정할 때 결국 기업 무를 친족처럼 자신의 유익을 따라서 행동하는 모습만 보여질 것이 뻔합니다.

 

 

 

 

더 나아가서 8절에 보면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고 말합니다. 그 친족이 신을 벗는 이유는 7절에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에게는 모든 일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해서 신을 벗어 주는 것이 전례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기업 무를 친족이 신을 벗는다는 것은 기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신 25: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편이 죽었을 때 죽은 남편이 형제가 그 아내를 취하여 죽은 형제의 후사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형제가 그 일을 원치 아니하거든 죽은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신 25:9) 그리고 이스라엘 내에게서는 '신벗기운 집'이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신 25:10).

 

 

 

 

이 말은 사실 그를 아주 모욕하는 말입니다. 자기 책임을 회피했다는 말이 곧 신벗기운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업 무를 친족이 보아스에게 신을 벗어 주면서까지 기업 무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수치와 모욕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해서 현재 우리들의 믿음의 삶에 있어서 문제는 없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이지 입술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식과 입술은 그리스도의 길에 있으면서도 삶은 그리스도와 다른 길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말한다면 믿음 앞에서는 자신의 유익에 대해서 마음 두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신 정신이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손익 여부를 계산하면서 순종할 것과 거부할 것을 구분하셨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행동 기준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기에 행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맹목적으로 행동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예수님의 뜻이 일치되었고 아버지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이 일치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된 뜻과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물론 아무리 신자라고 해도 자기 유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내 유익과 손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때로 많은 갈등을 하면서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기 유익을 따라 결정하는 일도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잘못된 결정 뒤에 애통함과 한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유익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전혀 잘못됨이 없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개함이 없고 상한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패역하고 목이 곧은 백성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다시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마음 깊이 묵상해 봅시다. 혹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싫거든 교회에 출입하기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은 사람이 교회를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과 내 유익 사이에서 수시로 말씀을 저버리고 내 유익을 따라가는 자신이 보여지고 그것을 심각함으로 여기신다면,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삶이 고쳐지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열정이 있거든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주님이 지식 십자가가 과연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었는지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남에게 유익을 주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스스로 죽음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스스로 손해 당함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유익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편함과 유익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을 죽이시고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서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동하지 않게 하는 능력은 주님의 희생과 섬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희생과 섬김이 우리의 삶의 정신을 지배함으로서 자연히 우리의 행동 또한 주님의 희생과 섬김의 정신을 따라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버리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행동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반대된 길을 가는 것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행동에 대해서 회개하게 될 것이고 진실로 그리스도의 삶의 정신을 따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 백성을 자기 유익보다는 그리스도의 정신인 희생과 섬김의 길을 가도록 붙드시고 힘 주시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애통하는 것보다는 자기 유익에 웃고 손해에 우는 삶에서 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마음에 두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유익은 잠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얻어지는 유익은 영원한 것입니다. 다만 영원한 유익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면서 눈에 보이는 유익을 쫓아가는 연약한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길을 가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분명 피곤하고 때로 자신에게는 손해가 되고 피곤이 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1:3절의 말씀대로 믿음에는 역사함이있고, 사랑에는 수고함이 있으며, 소망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역사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수고함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인내가 없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여러분이 자기 유익과 편함을 위해서 행동할 때 그것이 다른 형제들에게 과연 어떤 유익이 되며 영향을 줄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내 편함을 위한 행동이 다른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형제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친족이 기업 무르기를 거부하면 자신이 무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과연 보아스는 기업 무름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맹세를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5절의 말까지 하는 보아스라면 그 역시 룻의 기업을 무른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손해밖에 되지 않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그것을 손해로 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봤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 고엘이 되어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고엘이 되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기업은 끊어지고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진 자로서 우리의 마지막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엘 되기를 거부하는 친족을 대신해서 스스로 고엘이 되어주는 보아스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그리스도의 고엘 되심으로 기업이 끊어지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엘 되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로서 내 유익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룻 4:9-12 보아스와 룻의 결혼


지난 시간에는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나오미의 끊어진 기업을 이어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자기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기업 무르기를 포기하고 그 책임을 보아스에게 담당시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린 그 친족의 말을 들으면서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로서 말씀을 위해서 나에게 올 수 있는 손해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손해가 없을 때에는 부지런히 믿음을 말하다가도 손해가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는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우리들의 실체를 잘 알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오미의 기업 무르기를 허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보아스입니다. 우린 이런 보아스의 행위를 단지 미덕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미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한 미덕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무름에 있어서 자신에게 올 손해를 생각하고 고민을 했다거나 그 고민을 극복하고 기업 무르기를 허락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보아스는 기업 무르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우선으로 두고 있는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이 우선되어 있기에 자신의 손해 여부는 따질 필요도 없이 단지 내 일이라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삶과 해야 할 일이 따로 구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삶 속에 따로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이 구분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과 신자로서 할 일을 따로 구분하여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신자의 삶을 이원화시킬 뿐입니다. '이것은 그냥 나의 삶이고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신자의 삶이다'는 식으로 보통 사람의 삶 속에 또 다른 신자로서의 삶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서 삶과 행함이 구분되어 가르쳐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삶이란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남과 다를 바 없이 먹고 자고 일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그 삶의 방향이 말씀이 증거하는 영생일 때 그것을 신앙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삶은 자기 손해 여부를 따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기에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죽은 자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유익되는 것은 없고 오직 죽은 자를 위한 일입니다. 이 일을 보아스가 주저하지 않고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보아스가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성도가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으로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으로 산다면 나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미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앞세울 뿐입니다. 보아스는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잇게 하기 위해서 희생을 하면 나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를 생각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말씀 앞에서 참으로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복음만 전하면 내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에게로 오지 않겠는가?'라는 의도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한순간도 우리 자신의 유익에서 떠나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합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룻기서의 보아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11-12절을 보면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보아스의 일에 증인으로 나선 백성과 장로들의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 즉 룻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라헬과 레아는 야곱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다같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아이를 낳게 된 사람들입니다.

 

 

 

 

창 29:3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레아는 하나님이 그의 태를 열어주심으로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창 30:22절에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라는 말씀을 보면 라헬 역시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심으로 아이를 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룻을 라헬과 레아와 같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이를 낳은 두 사람처럼 룻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번창케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단지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말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없던 라헬과 레아 두 사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세워졌다면 그것은 누가 하신 일입니까? 바로 여인들의 태를 여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애당초 이스라엘 세워질 근거를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 역시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내인 라헬과 레아 역시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심으로 아이를 낳았고 그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은 인간의 자연적 출생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 출생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은 전혀 세워질 가망성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것이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이스라엘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룻이 라헬과 레아와 같기를 원한다는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 룻을 보아스와 결혼하게 해서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분명 스스로 기업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기업을 위한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기업에 대한 소망도 끊어진 사람이 죽은 자입니다. 그런 죽은 자의 기업이 누구에 의해서 이어지는 것입니까? 바로 보아스와 결혼하게 하신 룻을 통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라는 말 역시 보아스란 한 개인이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보아스를 룻과 결혼하게 해서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일이 보아스를 통해서 유명케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날 이름입니다(창 48:7). 베들레헴에서 보아스가 유력하고 유명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보아스의 기업 무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더욱 유력하고 유명케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신자가 영생을 바라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했을 때, 그 신자로 인해서 유명케 되는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말씀에 순종하는 한 사람의 행위만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칭송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할 가능성이 없는 인간을 부르셔서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놀라면서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를 통해서 높여지고 유명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만약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을 기대하고 뭔가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는 신자의 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유명해지고 나에게 유익이 오기를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으로 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된 신자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라헬과 레아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세워진 일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라헬과 레아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칭송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보고 사는 신자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바로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보지말고 그 사람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되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참된 모습을 목격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높이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각이 굳게 세워진 신자라면 결코 사람을 보지 않을 것이고, 사람에 의해서 흔들리는 마음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실망했다던가 하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또 사람의 위대함을 말하면서 사람을 따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얘기가 12절에서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 역시 라헬 레아와 같은 경우입니다. 다말이 어떤 여자인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서 가문이 끊어질 위기를 자신의 희생으로 극복한 여자입니다. 그렇다면 다말로 하여금 스스로 창녀가 되게 해서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수치스러운 일을 하게 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는 가문을 위해서 수치를 마다하지 않는 마음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역시 다말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다말을 있게 하시고 다말에게 자신의 수치보다는 가문의 이어짐을 생각하는 마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레스는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쌍둥이 아들 중 둘째 아들입니다. 그러면 왜 첫째인 세라의 이름은 언급이 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의 조상인 보아스가 베레스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의 등장 역시 인간의 자연적인 출생과 족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아스를 룻과 결혼하게 해서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가게 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다윗이 등장하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절에서 보아스는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한다는 말을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죽은 자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은 자의 기업이 다른 이름이 아닌 죽은 자의 이름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죽은 자의 이름을 잇기 위해서 개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즉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의 기업이 이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보아스와 룻을 결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보아스로 하여금 죽은 자의 기업을 잇게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은 자의 기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분명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얘기는 어찌 보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단지 보아스와 룻의 결혼과 그 결혼을 축복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보이십니까? 여러분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대개의 경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단지 자신에게서 일어난 상황과 형편을 보면서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일에 우연이라는 것이 없음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있든 그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셔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삶을 번창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에게 부족한 세상 것을 더욱 많이 채워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족처럼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해서 기업 무름을 회피하는 행동을 만들어 낼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손해가 있든 유익이 있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손해와 유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비록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서 손해가 있을지언정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자신의 손해까지 보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열심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 다스려지고 있는 신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죽은 자로서 하늘의 기업에서 끊어진 우리가 누구 때문에 하늘의 기업에 계속 참여하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은 옛날에 있었던 라헬과 레아에게 아이를 낳게 하시고 다말에게 아이를 낳게 하시고 보아스와 룻을 결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이미 계시되어 있었습니다. 우린 그 덕분에 지금 하늘의 생명을 누리는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만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만을 높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묵묵히 말씀을 생각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은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임을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살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결국 우리 자신의 유익을 따라가는 말씀에 대해 무능한 우리 스스로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피흘리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되어진 일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갑시다.

 

 

 

 

 

룻 4:13-22 나오미의 아들


예수님의 피흘리신 은혜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바라볼 때 그 가치와 귀함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출해주신, 그래서 심판에서 건짐 받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하신 능력이기 때문에 오직 심판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고 그 무엇으로도 구출될 가능성이 없는 참으로 비참한 이 세상의 처지를 알았을 때 예수님의 은혜는 그 무엇보다 크고 귀한 것으로 우리의 심령에 자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만으로 참으로 마음 벅찰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은혜는 과연 그러합니까?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신 그 은혜가 은혜로서 높임 받고 있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렇지 못하다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높임 받기는커녕 멸시받는 것은 아닌지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영원한 멸망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지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스도만을 높이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여기십니까? 진심으로 천국만을 소망하며 사십니까? 세상의 것보다는 하늘의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십니까? 이러한 물음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늘의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에 관심 두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에 대해서 엉망인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러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구출될 수 없는 멸망의 자식이었음을 깨달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라면서도 예수님의 베푸신 은혜보다 세상을 더 소망하고 좋아한다면 그것은 결코 신자로서 온전한 모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로서 온전한 모습은 좋은 일,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신자가 세상에서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신자를 세상에서 구분하려고 하신다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지한 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구분되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하지만 이 은혜 역시 우리의 일과 상관이 없는 은혜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의 우리 일을 도와주고 이루어주는 은혜가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하고 인정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심판에서 구출하신 은혜를 말합니다. 따라서 은혜를 아는 자는 필히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계획안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팽개치고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을 잘 아는 우리들의 마음이 항상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는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세상 것에 희망을 두는 본질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린 흔적이 수시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그동안 룻기서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말로만 '돌아 오라'고 외치는 분이 아니라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붙입니다.

 

 

 

 

롬 8:38-39절에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한번 예수 안에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이 예수 안보다는 세상 안을 더 선호하고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항상 예수 안에서 뛰쳐 나갈려는 우리를 붙들어 놓는 능력의 손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예수 안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 영생, 천국,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할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인 것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 속에서 교만이 사라진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실 신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과 구별되는 기준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것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전혀 수고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도 그 열매를 거두어 먹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명 되시는 예수 안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룻기서의 마지막 본문에서 다시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에 보면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함으로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신기한 일도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성경은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얘기를 언급하는 것입니까?

 

 

 

 

만약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보통 남녀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은 차원에서 이해하게 되면 결국 룻기서는 룻이란 이방여인이 남편을 잃어버린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서 다시 새로운 행복한 삶을 찾는다는 한편의 드라마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서는 룻의 고통이 아니라 나오미의 고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흉년 때문에 약속을 땅을 벗어나서 살 길을 찾아서 이방인의 땅으로 떠난 나오미가 남편 엘리멜렉을 잃어버린 고통으로 시작하는 것이 룻기입니다. 나오미는 남편도 아들도 모두 잃어버린 고통의 사람으로 고향에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오직 며느리인 이방여인 룻 하나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룻기서의 흐름을 볼 때 전에 말씀드린 대로 룻기서의 중심은 룻이 아니라 나오미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합니다. 그런데도 룻기서라고 부르는 것은 룻으로 인해서 되어진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4-17절을 다시 보면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 보아스와 결혼한 여인은 룻이며 아들을 낳은 사람도 룻입니다. 룻의 행복한 삶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축하를 받을 사람은 룻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나오미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베푸신 것으로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룻에게서 나은 아들도 '나오미의 아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룻이 낳은 아이가 나오미에게는 생명의 회복자며 노년의 봉양자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아들이라고 노래합니다. 이처럼 여인들이 찬양하는 노래를 본다 해도 중심은 나오미지 룻이 아닙니다.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룻의 입장에서 보면 룻이 받아야 할 것이 나오미에게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나오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인들이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아들을 얻기 위해서 나오미가 희생한 것이 무엇입니까? 나오미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룻을 보아스에게 보낸 것 밖에 없습니다.

 

 

 

 

나오미의 아들은 오직 룻의 희생 때문에 맺어진 열매인 것입니다. 이방여인으로서 자기 고향을 버리고 이방인이기에 천대와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기업을 잇기 위해서 보아스가 누운 발치 이불을 들고 몰래 들어가는 수치스러운 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열매가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나오미의 아들로 부른다는 것은 나오미의 아들에 담겨있는 속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아들을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나오미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과연 무엇을 말해줍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나오미는 룻의 희생 덕분에 아들을 얻고 기업을 이어가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나오미는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업이 끊어질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없던 아들이 룻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또 해보십시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나오미에게 기쁨이 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룻을 통해서 낳은 아들을 줄 바에야 처음부터 아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처음의 아들은 죽이시고 다시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룻을 통해서 아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상식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처음의 나오미의 아들은 인간의 자연적 혈통을 통해서 나은 아들들입니다. 죄의 본질 그대로입니다. 자신의 살 길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도 얼마든지 포기하고 버려버리는 멸망의 자식의 본질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이러한 아들로 이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존의 아들을 죽이시고 룻의 희생으로 낳은 새로운 아들을 나오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희생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 기업을 이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없던 아들을 얻었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고 한 일도 없습니다. 다만 룻의 희생의 열매를 자신이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인들의 찬송의 말을 들으면서, 그리고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옳습니까? 자신은 수고한 것도 노력한 것도 전혀 없이 얻은 아들을 보면서 룻의 희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가 아닌 룻의 희생으로 얻어진 아들이기에 아들을 보면서 룻의 희생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바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참된 신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복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룻이 낳은 아들이 나오미의 아들로 불리는 것을 보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게 합니다. 룻이 희생으로 뿌린 것을 나오미가 거둔 것처럼 예수님이 뿌리신 것을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거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룻이 낳은 아들을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회복자란 죽은 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죽은 자의 생명을 회복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나오미에게 생명의 회복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나오미의 상태가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이스라엘로서는 기업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서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상태와 같습니다.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은 상태가 살아있는 생명의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업이 끊어진 상태에 있는 나오미는 살았다 하나 죽은 자의 상태이며 이런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줄 아들의 탄생은 나오미에게는 생명의 회복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룻의 희생으로 탄생한 아들입니다. 즉 희생의 속성으로 이어지는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으로 인해서 다윗 가문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문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룻의 이야기가 단순히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에 대해서 계시하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본문에 언급되는 족보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18-22절에 보면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상하게 룻기서의 족보는 '베레스'란 사람으로부터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다윗까지 말합니다. 베레스는 다말이란 여인이 낳은 쌍둥이 아들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씀 드렸지만 다말은 유다의 가문을 잇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여인입니다. 유다의 가문은 다말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면하고 구사일생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레스는 룻이 낳은 아들과 마차가지로 여인의 희생으로 인해서 낳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룻기서의 족보가 베레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베레스와 오벳은 여인의 희생으로 가문이 이어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다윗의 가문이 세워졌다는 것은 다윗 가문은 여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이지 다윗이나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다윗 가문에 오시는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수고가 아닌 예수님의 수고로 되어진 생명이기에 이 생명을 우리의 노력으로 지키려고 한다거나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힘으로 믿음을 얻으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볼 때 교회에 의해서 은혜가 멸시되는 어처구니없는 실태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바로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자일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세워졌습니다. 희생을 알고 희생에 감사하는 자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된 교회에서는 오로지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인간의 힘과 열심과 노력을 찬송하고 높이는 것은 보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들에게 열심히 봉사할 것을 강조하면서 열심히 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여인들의 희생으로 유지되었고, 지금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았음을 감사하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음을 아는 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속한 산 자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룻이 낳은 아들을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그 아들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보아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보아스가 아버지라면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때문에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혈통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혈통으로 나지 않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인간적 사랑이니 정이니 하는 것들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졌습니다. 기업 무름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보아스와 룻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의 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낳은 아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즉 나오미의 아들은 아버지 없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낳은 새로운 아들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아들을 죽이고 새로운 아들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새로운 아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이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난 자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한대로 거듭난 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그 희생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내가 산 자가 되었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로 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으며 우리를 예수님의 희생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신자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시고 날마다 예수님의 희생을 찬송하고 높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회복되어진 생명에 감사하면서 여러분이 한 것을 내세우지도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예수님이 수고하시고 뿌리신 것을 다만 거두어 누리는 복에 참여된 큰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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