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28강) 삼상 11:1-5 이스라엘의 모욕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는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이토록 세상에 대한 포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믿음은 세상과 전혀 반대인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양쪽을 모두 추구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서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사라지게 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자는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추구한다면 그것은 살아있을 때는 보이는 것을, 죽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영원토록 행복을 누리겠다는 탐욕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비록 천국을 말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이나 천국은 더 이상 관심을 끄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할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 사람이 나 자신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나 예수님이 나에게 관심 가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큽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간절함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지만 정작 아들이 우리에게 오셔서 죽으심으로써 사망에서 건짐 받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된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부족하다며 끊임없이 다른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천국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영생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하늘의 것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가슴에 품은 채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만으로’라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혹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께 예수님만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며 기도하십니까?
신자가 예수님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복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 살기 때문에 예수님만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이 원하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 행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생이 주어졌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은 말뿐이지 진심으로 내 가슴에 머무는 기쁨과 감사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행복은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누리는 것, 그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원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의 행복의 조건은 세상의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소유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부르는 자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일 뿐, 참된 기독교는 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진심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 우리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 진심으로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말하면서 믿음으로 살지 못할 때 신자라 이름하는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전락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암몬 사람이 길르앗 야베스에 거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고 말합니다. 암몬이 쳐들어오자 야베스에 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섬길테니까 우리와 언약해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당신들의 종이 될테니까 죽이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지금껏 지키시고 인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이라는 힘 앞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못쓰는 이름만의 신으로 취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보다도 지금 당장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암몬 사람들과 화친하는 것이 자신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암몬에 의해 죽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는 이방나라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면 야베스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종이 될지언정 살아남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이고 행복이라는 야베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우리를 통해서 그대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행복의 조건으로 보는 사람은 돈이 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택하고 믿는 것도 행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돈이 되는 결과로 다가올 수 있을까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천국이나 영생이 관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열심히 십자가를 믿어주는 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돈이라는 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이러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 아닌 신앙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 세상에 대한 탐욕에서 해방된 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본질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항상 경계하며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 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고 말합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모두 오른 눈을 빼내면 약속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오른 눈을 빼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죽을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2절 마지막을 보면 나하스가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하스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어떤 모욕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다만 암몬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조롱을 받는다는 것으로 모욕을 받는 것입니까? 그러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자존심과 연관된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시도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암몬이라는 존재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하신 분으로 여겨지지를 않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받는 모욕은 믿음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하스는 오른 눈을 빼면 화친의 언약을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마치 야베스의 이스라엘이 살고 죽는 것이 자기 손에 달려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하스에 대한 야베스의 태도 역시 같았습니다. 나하스가 자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때문에 어떻게든 나하스와 화친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사는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나하스라는 세상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그들이 받는 모욕이었던 것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여겼습니다. 설사 나하스의 종이 된다 할지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행복을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에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설사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나하스가 더 두려울 뿐입니다.
3절을 보면 “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눈을 빼면 화친하겠다는 말에 야베스의 장로들은 7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합니다. 이유는 7일 동안 온 이스라엘 안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자가 있는지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없으면 눈을 빼어서라도 당신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눈을 빼라는 조건에 대해 망설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눈이라는 것도 소중한 신체의 한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혹 자신들을 구원할 자가 있으면 눈을 빼지 않아도 되니까 구원할 자를 찾아볼 여유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구원할 자가 없으면 죽는 것보다는 눈을 빼는 것이 나으니까 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암몬이라는 문제 앞에서 해결책을 찾아가는 야베스 사람들을 보면 모든 문제를 극히 인간적으로 풀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과 행복을 중심으로 해서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손해보다는 유익이 되는 길로 나아가자는 것이지 눈앞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은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야베스 사람이 아닌 제 삼자의 입장에서 이들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스라엘이 암몬이라는 문제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분명 암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굴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방인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는 길이 아닙니까?
분명 우리는 이것을 옳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옳다고 인정하는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며 살아갑니까? 혹 야베스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보다는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덜 되는 쪽으로 가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고 고개 숙이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세상으로부터 모욕당하는 길로 스스로 걸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기쁨보다는 내 행복을 우선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나에게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지 않습니까? 때문에 항상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내 행복의 문제에 치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깨닫고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저 그런가 보다’라는 수준이 아니라 ‘분명히 그렇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믿음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증이고 확실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그저 그런가 보다’라는 막연함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실제로 체험한 것처럼 믿게 하고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에 머물지 못함으로서 세상을 두려워하고 고개를 숙이고 타협을 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모욕 받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신자다움이지 우리의 행복이 아닙니다. 신자의 행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에 거한다면 세상 것과 상관없이, 죽고 사는 것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행복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거한다면 자기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을 잃지 않고 지키려고 하는 것에서 이미 불행은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라고 말합니다. 구원자를 찾기 위해 야베스의 사람들이 사자를 기브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자로부터 소식을 들은 기브아의 이스라엘이 소리를 높여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운 이유는 뻔합니다. 야베스를 구원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브아의 사람들까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야베스의 이스라엘 앞에 암몬이라는 문제를 있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가며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어가고 해결하려고 하는 불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운다는 것은 해결한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질 길이 전혀 없기에 울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행복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 앞에서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내 행복 문제 때문에 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고의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고통이 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나의 이익과 행복을 중심으로 한 인간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통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시키기 위해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행복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문제에서 드러나는 것은 불신앙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나약한 모습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조롱 받고 모욕을 받을 뿐입니다.
어떤 문제든 여러분의 행복과 연결하여 계산하지 마십시오. 돌아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굴복이며 타협일 뿐입니다. 그것조차 내 마음대로 안될 때 결국 남는 것은 낙심과 울음뿐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믿음에 굳게 세우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우리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삶으로 뛰어드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행복은 세상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29강) 삼상 11:6-11 하나님의 신
요한계시록 21:3,4절을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되면 있을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눈물의 의미에 대해서는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눈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그 성분은 같지만 눈물의 의미는 결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서 흘리는 눈물이 있는가 하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고, 슬퍼서 흘리는 눈물, 기뻐서 흘리는 눈물, 분노로 인해서 흘리는 눈물 등등 사람에게는 수많은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 모든 눈물에 대해 위로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신자가 육체의 고생으로 인해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그 눈물에 대해 위로해 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고생으로 인한 눈물이 없는 사람들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고생이 없는 삶을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눈물에 대해 위로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흘린 눈물을 씻겨주시며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애통에 대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흘리는 눈물은 보이지 않고 우리의 육신의 삶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과 억울함에 의한 눈물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가지고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자기 육신과 연관된 눈물입니다. 억울함과 한스러움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없게 해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눈물을 씻기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이스라엘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에 대해 생각했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의 공격으로 인해서 살길이 암담해진 야베스를 구원할 방법이 없다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들은 눈물은 자기들에게 힘이 없다는 것에 대한 낙심의 눈물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는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6-7절을 보면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같이 나온지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백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어 야베스 사람들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이 되었고,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이 된 사울이 이스라엘에 대해 노하여 소를 잡아 각을 떠 이스라엘의 모든 곳으로 보내며 누구든지 나와 사무엘을 좆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같이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야베스 사람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울고 있는 것에 대해 사울이 노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 삼십삼만을 모아 암몬을 쳐 그들을 물리치고 야베스를 구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혹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사울을 하나님이 도우심으로써 그 힘과 능력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습니까? 아마 그러한 생각이 많이 들 것입니다. 그것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힘과 능력을 주셔서 그를 들어 쓰시는 것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본문 역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울이 군사를 모아 암몬을 쳐서 승리한, 즉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울이 그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을 개인에게 힘과 능력이 주어져서 위대한 일을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 역시 그러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임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이든 성령이든 자신에게 임하여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이유도 자신이 개인적으로 힘있는 위대한 자로서 만인 위에 우뚝 서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있는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자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도 성령도 그러한 의도에 부응해주는 분으로써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울이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말합니다. 먼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신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이 누구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성령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신은 성령과 일치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에는 그 이름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합니다. 가령 우리는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든 여호와든 이름만 다를 뿐이지 같은 하나님이니까 아무렇게나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여호와란 이름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이름으로만 불려질 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같은 분이지만 하나님이란 이름과 여호와란 이름으로 각기 다른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분 하나님이 각기 다른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란 이름이 신약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관된 이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으로 여호와란 이름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이름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에 대한 것도 구약과 신약이 서로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성신과 하나님의 신, 또는 여호와의 신으로 등장하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성령으로만 등장할 뿐입니다. 이것을 구약이기 때문에, 혹은 신약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모두가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16절에 보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신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에게 힘을 주시거나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의 성령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오셔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함으로써 ‘이가 곧 나의 백성이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의 성령은 택한 자에게 오셨다가 그가 잘못을 할 때 떠나버리는 식으로 일하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신이 오셨다가 그에게서 떠나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울입니다. 본문에서도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되어 이스라엘을 몰고 암몬을 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것만 본다면 분명 사울은 하나님이 택한 자입니다. 그런데 16장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신자에게 성령이 오셨다가 잘못하면 떠나버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성령이 떠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신과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에서의 성령은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오십니다. 사람의 자질을 보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성령이 오셔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잘못된 것은 성령이 일하심으로써 고쳐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해서 떠나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신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신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증거 하시기 위해 누군가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그가 곧 택한 자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에 의해 붙들린 자로서의 택함일 뿐이지 택함 받았으니까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은 얼마든지 사울에게서 떠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되었다는 것은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부여받은 용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울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붙들어 쓰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사울을 붙들어 세워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노했다는 것은, 사울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에 의한 노함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사울을 세워서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베스의 사람들을 암몬으로부터 구원할 구원자가 없다는 것으로 울었습니다.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과 야베스는 끝장났다는 것에 대한 절망 등등 모든 것이 포함된 울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울음에 대해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하나님의 노하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으로 존재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왕을 구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강한 자를 원하는 이스라엘이기에 야베스를 구원할 용사가 없다는 것으로 울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모으게 하시고 암몬과 싸우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계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사사시대에도 보면 이스라엘이 위급함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바라보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스라엘에게 달리 왕이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소를 각을 뜨고 이스라엘이 지경으로 보내며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같이 할 것이라고 하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여 그들이 사울에게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때는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세운 사울을 따라 행동하자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보이는 세상의 힘에 대해서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세상의 힘 앞에서 자신은 힘이 없다고 여겨질 때 울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울을 세워서 이스라엘에게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시킨 대로 움직였을 때 암몬을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좇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좇으면 승리한다는 것을 사울을 세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사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 할만한 체험적인 일을 겪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머리로는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세상의 것이 없고 힘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본다면 죄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도 그냥 넘어가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로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랐을 뿐인데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30강) 삼상 11:12-15 새롭게 하자
교회는 오직 진리만을 말하는 곳입니다. 진리 외에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외적인 형태나 의식적인 면을 보고 ‘교회다 교회가 아니다’라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즉 예배당을 마련하고 강대상이 있고 교회용 의자가 있고 예배라는 의식이 있고 목사가 설교를 한다고 해서 교회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하나님과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세워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 아닌 교회를 그냥 두심으로써 참된 진리를 증거 하는 교회를 구별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진리만을 말할 때 교회라고 일컬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만 하면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멸망을 받아야 할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말은 그 어떤 것도 구원의 도리가 되지 못합니다. 설사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외쳐지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우리를 능히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만 세상의 말과 같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말이 아니라 진리를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새롭게 하고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사건을 일으키셔서 그 사건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읽었고 무슨 내용인지 알았다고 해서 진리를 안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에 담겨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여러분에게 진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분명 진리이지만 성경을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발견하고 깨달은 그에게만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고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암몬 사람으로 인해서 울었던 이스라엘에 사울이 등장하여 삼십 삼만이라는 백성들을 모아 암몬을 공격하여 승리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시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하여 일했는데,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했다는 것은 신약에서 성령이 임한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누군가를 감동한다는 것은 그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붙들어서 구원시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에서의 성령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붙들어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에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울게 만들었던 암몬 사람을 사울로 인해서 물리치게 되자 이스라엘의 모든 마음이 사울에게 쏠리게 된 것이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두 사울을 바라보게 됩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통해서 사울이 곧 자신들의 희망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12절의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입니다.
10:17절부터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에 모아 놓고 왕을 뽑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사울이 왕으로 뽑혔는데 27절에 보면 어떤 비류, 즉 불량자들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면서 사울을 멸시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그들을 끌어내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이토록 훌륭한 용사인데 감히 그런 사울을 멸시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의 말에 대해 사울은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13절)고 말합니다. 사울의 말은 여호와께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말하는 그 사람들을 죽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은 암몬과의 전쟁의 승리를 사울의 힘으로 여겼습니다. 사울이 용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울을 세워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분이라고 해서 아예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안계시고 사울만 있는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사울만 있으면 이스라엘의 앞날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해서 아예 안계신 분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 이것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립니다. 물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 살아계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 살아계시는 분이지만 내 삶에는 전혀 살아계시지 않는 하나님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쟁의 승리를 사울의 힘으로 보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의 힘을 볼 뿐 정작 힘은 하나님이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존재는 믿어주되 하나님의 일하심은 믿지 않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까지 믿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된 사울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신의 힘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힘으로 봤습니다. 때문에 자신들을 멸시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날이지 사울 자신이 구원한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울의 믿음으로 보고 넘어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된 자의 모습으로 본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신, 즉 성령에 감동된 신자는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일도 자신의 공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성령에 감동된 신자의 참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면 사람의 공로를 높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목사에 대해서 그러하고,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거나 일을 많이 한 사람에 대해 그러합니다. 사람이 보일 뿐 하나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에 감동된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가 바로 성령으로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왜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말을 합니까?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것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자는 말인데 이스라엘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길갈로 가는 이유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길갈은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먼저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하여 나오게 하셨는데 그 돌을 길갈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돌을 세운 뜻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마르게 하시고 건너게 하셨으니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을 건너게 되었음을 잊지 말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길갈에 열두 돌을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5: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그것을 애굽의 수치를 이스라엘에게서 굴러가게 하신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그곳을 길갈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길갈은 애굽에서의 모든 수치를 벗게 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의미가 있는 명칭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길갈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모든 수치를 벗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구원의 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하는 사무엘의 말뜻이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 새롭게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아는 나라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길갈로 가자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는 나라로 존재하는 것이 곧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만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나라이며 참된 이스라엘이며 구원의 무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무엇을 의지하며 무엇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십니까?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닌데 혹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참된 진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을 보고 살아가는 것처럼 확신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증거된 현장이고, 구원의 은혜가 확실하게 증거된 현장이며,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피흘리고 죽으신 십자가가 멸망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임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힘이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공로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공로를 돌리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그것이야 말로 새롭게 된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입장이었다면 우리 역시 암몬을 물리친 사울을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이는 것을 의지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분이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믿으려고 하는 우리의 잘못된 시각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참된 것이 아니며 진리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도 예배당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심령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여러분 속에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십자가만을 의지하고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참된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확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고생도 고통도 지나가는 것들이지만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를 놓치는 자, 그는 가장 어리석으며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그가 곧 새롭게 된 신자입니다.
(31강) 삼상 12:1-7 가만히 섰으라
세상은 불행을 환경의 조건에서 찾고 있지만 정작 불행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과 기쁨을 모르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왕을 요구한 것이 한 예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왕을 요구하면서 용사와 같은 왕이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큰 불행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이스라엘에게는 용사가 되시는 하나님이 왕으로써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던 것이 이스라엘이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 기쁨도 행복감도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용사와 같은 왕이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나라는 불행하다’는 생각을 가진 상태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굶어죽게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면서 노예로 부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의 열조를 구출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그곳 거민들과 싸워서 승리하게 하시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말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오늘 우리들의 생각과 태도를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이점을 기억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으시며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절을 보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사무엘이 길갈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청렴성을 증거하기 위해서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대로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시고 이스라엘 건너게 하신 기념비 열두 돌을 세운 곳이고, 이스라엘의 애굽의 수치를 벗게 하신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길갈에 이스라엘을 모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힘을 의지하는 백성으로 새롭게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자신의 문제부터 묻습니다. 3절의 물음의 의도는 그동안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치리하였던 사무엘 자신이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왕을 구하였는가를 되묻기 위한 의도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세우신 사사이며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을 치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제쳐두고 따로 왕을 구한다면 분명 사무엘의 치리를 거부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3절의 물음을 하는 것입니다. 달리 해석하자면 하나님이 세우신 사무엘이 있는데도 왕을 구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사무엘에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있다면 늙어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는 문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나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힘있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국력이 어느 정도가 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만 죽으나 사나 하나님만 섬기는 민족으로 굳게 서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사무엘이 늙고 힘이 없어졌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람을 원한다면 그것은 사무엘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을 치리할 자로 세워진 사무엘이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에 위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사무엘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래서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뇌물을 취하였느냐’라는 물음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한 부정부패라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있지 않을 때 나타나는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물은 것은 모두가 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입니다. 이것은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을 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무엘이 물은 것은 ‘나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가?’가 아니라 ‘나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가?’로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물음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따로 왕을 구하는 것입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들이 원하는 사람은 그들의 믿음에 도움을 줄자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는 힘있는 용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이는 여호와시니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8-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과연 부족하신 분이었는가를 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통에서 부르짖을 때 그들에게 응답하신 분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시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이방인의 손에 붙여졌을 때에도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그들을 건지시고 안전하게 거하게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확실하게 다스리고 인도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왕을 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과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으로서 부족하신 분이었습니까? 보는 시각 여하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필요로 했느냐? 이것이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을 필요로 했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달리 왕을 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필요로 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국가적 안전과 행복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부족한 신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보다는 힘있는 용사가 더욱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에게 부족하신 분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갈등을 남겨주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는‘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한 분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것이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신자로서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분이 아니라면 만족이 남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에게는 불만만 남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다’라고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갈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육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지 않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필요를 위해 힘쓰는 자신의 삶의 잘못됨을 감추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요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자기 필요를 따라 행동합니다. 필요가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필요가 하나님의 말씀을 능가하는 명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필요를 따라 행동하며 살아갑니까? 곰곰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늘날 인간에게는 ‘필요’가 우상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통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와 아론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고 맛있는 음식이 없다고 해서 애굽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구해달라고 소리쳤던 그곳을 다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보면 마치 세상에서 빠져 나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멸망의 곳으로, 죄악의 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몸은 여전히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단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감사함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과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삶의 진정한 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것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식별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식별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다만 종교적 수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가 살아계시니 너희는 가만히 섰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가만히 있으면 일이 되나?’라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내가 원하고 뜻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의 필요라는 욕망이 하나님조차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46: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따를 수 없는 말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지 못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열심히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것은 믿음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왕을 세울 것을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에게 유익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껏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을 책임지실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으로 요구하면서 그들의 필요를 따라 그들의 일을 스스로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왕을 중심으로 어떤 결과를 이루었을 때 그 공로를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인간은 어리석고 얕은 생각으로만 살아갑니다. 자기 필요를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항상 불평과 불안과 염려 근심만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부족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만큼 사랑과 자비에 있어서 완벽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부족을 느낍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원하는 필요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충족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언제나 필요한 것이 없다며 달라고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은커녕 불만과 불평만 있는 삶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섰으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또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섰으라고 말합니까? 이것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니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이 책임지고 필요를 따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나의 욕망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을 살리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필요로 하였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필요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때가 바로 가만히 있어야 할 때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이래야 할지 저래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고, 정말 죽어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 고민이 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시니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는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게서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으신 분이시고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다만 필요라는 욕심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는 안된다’라는 악으로 끌고 갈 뿐입니다. 그럴 때 가만히 서서 뒤를 돌아보십시오, 지금껏 나의 필요를 따라 살아왔다는 것보다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필요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살아온 인생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32강) 삼상 12:13-18 여호와를 좇으라
우리 마음에 예수님만을 두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인가 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으면 뭔가 달라지고 예수님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법도 한데 여전히 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믿음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도대체 믿음이 왜 이토록 힘든 문제일까요? 믿음 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기 때문일까요? 시편 37:3-5절에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진다고 믿고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뢰하고, 여호와를 기뻐하고 여호와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쉬운 믿음입니까?
믿음은 우리에게 불교처럼 삼천 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전 재산을 다 바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착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여호와께 맡기고 여호와만 의뢰하면 여호와가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쉬운 믿음이 우리에게는 왜 그토록 어려운 것으로 다가오는 것입니까?
결국 이것은 믿음이 어렵다거나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만히 있는 것에 대단한 불안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도무지 내 소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들을 소유할 가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스스로 힘쓰지 않고 일하지 않을 때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여호와께 맡기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가만히 있기를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믿음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선한 것이고 은혜임을 믿는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신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고 불만만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스스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 이룰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어리석음은 꼭 가져봐야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더 낫고 유익되기에 하나님이 그리하시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주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하면서 스스로 얻고자 힘쓰는 것 때문에 삶이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수동보다 큰 능동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삶의 편안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편안함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이라는 신을 선택한 것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복종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기쁨을 위해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과 신자의 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 힘써 살아가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하나님의 일에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임을 잊지 마시고 믿음의 바른 길을 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13절에 보면 “이제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리라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14-15절)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원해서 왕을 세워주긴 하셨지만 그 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좇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또 왕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끝까지 왕을 세워주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은 왕을 있게 하심으로써 왕이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배우게 하시겠다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은 좋아 보이는 것은 가져보기 전에는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는 목사가 없다고 해도 구원 받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목사를 세우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목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를 의지하지 않는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에 환경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세워주시면서 이스라엘과 왕이 다함께 여호와를 좇으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목사를 세우셨으면 모든 신자와 목사가 다함께 여호와를 좇으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목사를 의지하려고 하고 목사는 신자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는 결과입니다.
목사인 제가 은석교회에 있으나 없으나 여러분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사람이 무슨 소용이며 돈이 무엇입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고 행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며 돈이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에 드는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을 믿지 말고 왕과 함께 여호와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악과는 동산 중앙에 세워졌습니다. 그것도 보기만 해도 먹고 싶을 정도로 만들어 가지고 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먹어서는 안될 것을 왜 눈에 보이는 곳에 놔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은 어떤 환경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이 있다면 선악과가 내 코앞에서 군침을 흘릴 정도의 향기를 뿜으며 있다 할지라도 안먹는 것입니다.
간혹 T.V를 보면 훈련이 잘된 개가 주인이 앞에 고기를 놔두고 먹지 말라고 지시하면 절대 먹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기가 아무리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 할지라도 주인의 명령이 그 모든 유혹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인에 대한 신뢰며 복종이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고기를 먹는 것보다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어떤 좋은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하며 말씀에 복종하는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께 돈을 주시기도 하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복이라고 하며 좋아하지만 그러나 본문을 두고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의도는 돈을 주시면서 돈을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은 좋고 믿음은 시시하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교회 역시 믿음을 말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무시하는 분위기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흘러간 옛말을 대하는 것처럼 해버립니다. 믿음보다도 돈이 있어야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돈 위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 놓고 자기 인생에 대해 안심하고 있는 부자 얘기입니다. 부자는 인생을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돈 있으면 행복한 인생을 살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자에게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16-18절에 보면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뢰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밀 베는 때는 4월 중순에서 6월 중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건조기여서 비 내리는 일은 물론 우뢰가 치는 일도 없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추수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해서 비가 내리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추수 때에 비가 내림으로써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있다 할지라도 비를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든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죽어야 할 우리의 목숨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그 소유가 무용지물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세계 제일의 부자라 하더라도 몸이 병들어 누워있다면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물은 쓰는 재미를 누리기 위해 원하는 것인데 쓰는 재미를 누리지 못하고 쌓아만 두고 있는 재물이라면 아무런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재물을 다 잃어도 몸이 건강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일 수가 없으며, 여러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쁜 것일 수가 없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택한 자기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뢰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환경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맺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습니다. 그리고 홍해에서는 바다를 갈라지게 하는 기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하셨습니다. 요단강 앞에서는 요단강의 물을 마르게 하심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놀라운 기적은 체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다는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뢰할 것은 바로 사랑이며 자비며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자비와 긍휼입니다. 돈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귀하게 볼 수 있어야 하고 출세와 성공보다도 예수님의 은혜가 더욱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보다 은혜보다 세상이 더 커보인다면 우리는 분명 잘못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33강) 삼상 12:19-25 여호와를 섬기라
신앙생활은 아이들의 소꿉장난이 아닙니다. 온통 가짜들을 가져다 놓고 남편 아내 하면서 부부 놀이하고, 의사 병자 하면서 병원놀이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흉내만 내는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힘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운전 도중 법규를 위반했을 때 경찰이 스티커를 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봐달라거나, ‘좀 싼 것’으로 끊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이왕 범칙금을 낼 바에는 조금이라도 적게 내고자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6만원 끊길 것 3만원 끊기면 그나마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의 세상의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판단하실 때에는 봐달라는 것이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좀 덜한 심판으로 부탁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멸망인가 생명인가로만 구분될 뿐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들의 의지와 판단에 의해서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모든 무리가 하나님에 의해 악한 자로 판단되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 하나 거짓된 것으로 신앙의 흉내만 내고 있었던 무리들도 동일하게 악한 자로 판단되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허황된 말로 들려 버리고, 한낱 목사라고 하는 종교인의 주절거림으로 여겨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히려 제 말에 대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긍을 하고 이해를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서 그러한 반응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저에게는 커다란 아픔이며 고통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저의 가르침 안에서 함께 그리스도를 배워가며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를 소원하는 열심을 보게 된다면 저에게 그것처럼 큰 기쁨과 감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인 제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소원하는 것은 말씀 안에서 다함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성공과 실패로 나누어집니다. 천국에 있게 된 그는 성공한 자이고 천국에 있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 그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을 위해서 세상 것은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고, 때로는 매를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학생이 매 맞는 것은 아프지만 매를 맞더라도 제대로 된 학생으로 자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유익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계심을 모르고 달리 왕을 구한 이스라엘을 책망하면서 비가 오지 않는 밀을 베는 추수기에 우뢰와 비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사무엘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무엘에게는 이스라엘이 밀을 거두어서 풍족해지는 것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설사 곡식에 피해가 주어진다고 해도 우뢰와 비를 보내심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기도대로 우뢰와 비를 보내었고, 이스라엘은 그로 인해 하나님과 사무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무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제 마음도 사무엘과 동일하다고 말씀드린다면 그 역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하나님께 수시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도록 매를 때려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 중 일부를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이런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내 육신 중 일부를 잃어버리고, 내 소유를 잃어버린다 해도 그것으로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되고 그리스도로 굳게 세워지게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의 기도대로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 우뢰와 비가 오는 것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왕을 구한 것이 곧 자신들의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이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오지 않는 밀 추수기에 사무엘의 기도대로 우뢰와 비가 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게 된 것은 자기들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암몬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두려운 분임을 알게 되었을 때 암몬을 두려워하고 스스로 강한 국가가 되기 위해 왕을 구하는 것이 죄에 죄를 더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부릅니까? 맹목적으로 하나님이란 신에게 기도하면 혹시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부르는 것은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부릅니까?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서 부르시는 것입니까? 그거라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잊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신앙은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이러한 것들이 감상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은혜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감상적인 것으로 머물다 보니 하나님을 찾으며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고백은 많은데 정작 삶은 신앙에서 벗어난 때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은혜와 사랑을 말한다면 그것은 가짜를 가지고 종교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것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도외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은혜와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비로소 하나님이 그들을 죽일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죽어야 할 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한 것이 죽임을 당해 마땅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을 더한 우리를 죽이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을 때 죽어야 할 내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음을 발견한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은혜와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알게 되어지는 것이 은혜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깨달은 이스라엘에게 사무엘이 한 말은 무엇입니까? 20절에 보면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말을 합니다. 사무엘의 말은 악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면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비록 악을 행하긴 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악을 깨달았으면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여호와로부터 돌이키지 말고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회개라고 말합니다.
회개란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것이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회개인 것입니다. 흔히 회개를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회개의 일부로 포함되어질 수 있지만, 아무리 눈물로 기도하고 자기 죄를 고백했다고 해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허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로부터 돌이키지 않고 여호와만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21절의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는 말씀대로 세상의 것은 나를 유익하게도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인 줄로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리 봉사하고 헌금을 한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은 악한 것이라고 선언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신뢰가 상실된 모든 행위는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러한 섬김은 모두 가짜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어떠한 분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분명히 주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족속입니까? 툭하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지금 당장만 해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왕을 구하는 악을 범한 자들입니다. 얼마든지 미움을 받아 마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크신 이름을 가진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크신 이름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에 또 다시 날마다 악을 더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크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구나’라고 단순히 상상하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셨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버리기까지 죄는 용납하지 않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른 자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용납하지 않으시지만 죄인은 용납하십니다. 하지만 죄인이 용납되어지기 위해서는 필히 죄가 청산되어야 하는데 그 일을 예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랑이며 은혜며 자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23절을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한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가르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한다는 것은 시간적이나 규칙적인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즉 날마다 기도하던 사람이 하루 쉰다거나, 기도하는 시간이 적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다면 과연 무엇을 두고 기도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기도를 쉬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고 의로운 도라는 것 역시 하나님만 의지하고 세상이나 힘있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사무엘의 역할은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며 이스라엘에 대해 딴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그들이 항상 하나님만 섬기기를 기도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도 같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목사의 역할은 딴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성도들에게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합니까? 24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일이란 8-11절에서 언급하는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신 큰일을 기억하며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임을 기억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고, 선지자로부터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침 받았으면 그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스라엘의 마땅한 본분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았다면 마땅히 십자가가 말해주는 하나님의 큰일을 기억하며 진실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신자된 여러분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 본분을 버리고 여전히 악을 행한다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유익하게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마시고 영원한 생명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4강) 삼상 13:5-15 망령되이 행함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를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제사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요 바치는 제물이 서로 달랐기 때문도 아닙니다. 만약 제물이 아벨과 다른 것이 이유라면 제물만 받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곡식은 제물로 받을 수 없으니 양을 가져오라든가 지시하시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즐겨하시는 제물이 따로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물을 하늘로 가져가시는 것도 아닌데 어떤 제물이든 상관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를 보면 제물에 대해서 구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자기들 마음대로 제물을 가져올 수 없도록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제물이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멋대로 제사하는 것을 금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제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에 담기 위해서 제물을 구분하시고 여러 규례를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렸느냐 드리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제사를 드렸으되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로 드렸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제사를 이스라엘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도 제물이 달랐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인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문제가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을 드렸다고 되어 있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다른 점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새끼와 기름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많은 양의 새끼들 중에서 아무 것이나 가져오지 않고 첫 새끼를 가져오고 제물의 여러 부위 중에서 기름만을 가져온다는 것은 구별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별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자신을 구별된 자로 보는 마음이 담겨 있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이 땅의 소산 아무것이나 가져왔다는 것은 다만 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는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겉을 가지고는 구분 할 수 없습니다. 겉이란 얼마든지 꾸밀 수 있고 위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겉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만 속은 같아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을 담고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총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구별의 마음이 담긴 제물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담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다만 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서 어떤 이득을 노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는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면서도 오히려 책망을 받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본다면, 사울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2년에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아마 사울은 암몬 족속을 이긴 것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였으며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블레셋 수비대와 싸우도록 합니다(13:2). 처음에는 승리하는 듯 하였으나 블레셋 군대가 많은 병력을 이끌고 믹마스에 있는 사울의 진을 공격해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은 모두 도망을 쳐버립니다. 그리고 사울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길갈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8절의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매우 난해합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렸다고 하는데, 사무엘이 언제 사울에게 이레라는 기한을 정했느냐가 문제입니다. 물론 10:8절의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일을 기다리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분명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레라는 약속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울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전의 일이고, 또 11장의 마지막을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길갈로 모아서 사울을 왕으로 삼는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일은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이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즉 사무엘이 이레라는 약속을 한지 이년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0:8절의 약속을 나중에 되어질 본문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예언적인 약속으로 봐야 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본문의 이레를 비록 본문에서는 설명이 안되어 있지만 사울이 전쟁의 위기에서 사무엘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고, 사무엘은 이레만 기다리면 가겠다고 약속을 한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즉 10:8절의 내용은 본문의 사건과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 10:8절의 내용이 본문의 사건을 염두에 둔 예언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사울에게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까지 칠일을 기다리라고 말한 대로 성취되어진 일이 없음을 본다면 본문의 일을 두고 한 예언적인 내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10:8절의 내용과 연관해서든 아니면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람을 사무엘에게 보내서 이레를 기다리라는 답을 받았든 사울은 사무엘이 이레를 기다리면 온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길갈로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레가 되도록 사무엘은 오지 않고 백성들은 사울에게서 흩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사울은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오라 하여 스스로 번제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사울은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11-12절)고 답합니다.
여러분, 사울의 답변에 문제가 있습니까?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입니다. 약속대로 오지도 않는 사무엘을 무작정 기다리다가 블레셋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라도 나서서 제사를 드려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 위기를 해결해야겠다는 사울의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까? 오히려 따지고 보면 이레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무엘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분명 이레라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할 수 없이 스스로 번제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에 대해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13-14절)고 책망합니다.
여러분은 사무엘의 처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물론 제사는 제사장만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입니다. 따라서 왕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 있지 않습니까?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만 아니었다면 사울도 제멋대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오겠다고 약속한 사무엘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기다리다 못해 직접 제사를 드린 것인데 그것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망령되이 행한 것으로 책망합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도 아니면서 제사를 주관한 것이 망령되이 행한 것이 되는 것입니까? 단순히 그 이유뿐이겠습니까?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러한 내용이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예배의 주관자는 오직 목사뿐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행동은 왜 망령된 것입니까? 12절의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는 내용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를 드리고자 한 것은 여호와의 은혜를 받기 위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즉 사울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여호와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여호와의 은혜를 받으려면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동안 사무엘을 기다리느라고 미처 제사를 드리지 못해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히 은혜를 받아서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하겠기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이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은혜는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주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에게 담겨 있는 은총과 자비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인간의 죄마저 이긴다는 것을 제사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제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해주는 능력으로서의 은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이기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존재함을 깨닫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 곧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은혜를 받아서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은혜만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여기고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망령되이 행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삼계명에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까? 바로 사울처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은혜를 구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곧 망령되이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은 블레셋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의식, 제사를 드리는 자기 행위를 믿는 것입니다. 제사 자체를 의로 보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렸으니까 은혜는 분명히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과 동일한 현대 교회의 사고방식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배라는 의식 자체를 의로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배드린 자신은 의를 행한 것이 되고, 의를 행했기에 은혜를 받는다는 공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헌금을 바치는 것을 의로 여기기 때문에 헌금을 한 자신은 의를 행한 것이고 때문에 은혜를 받게 되어 있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는 죄속에 있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으시기 위한 모든 일이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으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자비와 은총이 담겨 있고, 우리를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생명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수고하시고 일하시는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구원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육신의 위기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멸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망령되이 행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것은 세상의 분주한 사정과 형편을 그대로 안고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만 악한 우리의 생명을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담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를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은혜를 입은 것이고 놀라운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올 때는 분주한 사정을 내려놓고 오고 나가서는 다시 짊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여려가지 분주한 일들과 형편들을 하늘의 생명이라는 은혜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블레셋을 이겨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임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설사 지금 고통과 어려움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분을 더 깊은 은혜로 끌고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의가 되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 것은 망령되이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35강) 삼상 13:15-23 이스라엘의 무기
창세기 10장을 보면 노아 홍수 후에 새롭게 시작된 인류 역사에 ‘니므롯’이라는 영웅이 등장합니다. 이는 앞으로 인류가 어떠한 인간을 중심으로 흘러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세상은 오직 영웅만을 중심으로 흘러왔습니다. 고대 문학의 거의 대부분이 영웅들의 이야기이며 역사 역시 영웅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웅이 없이는 문학도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많이 읽히는 위인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히면서 영웅이 되기 위한 꿈을 가져라는 것이 위인전을 읽히는 부모의 소망일 것입니다. 영웅이란 세상의 중심이며,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유혹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웅을 높이며 영웅을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영웅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영웅주의에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 영웅주의는 어떤 집단내에서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고 관심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집단적 영웅주의는 집단의 세계 속에서 자기 집단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단이 중심이 되어 다른 집단을 이끌어 감으로서 그 집단에 속한 자신의 존재가 향상되어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우월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마련입니다. 힘은 자신만이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공유하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영웅주의를 볼 수 있으며, 영웅주의 앞에서 너무 미약한 존재로 서 있는 한 민족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과연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영웅을 높이는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되는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 상황에서 사울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블레셋이 치려고 하는 급한 상황에서 사울은 기다리던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신이 제사를 주도하게 된 것입니다.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은혜를 받으면 블레셋 사람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울은 사무엘은 망령되이 행했다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사울의 망령된 행위는 제사를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소유화하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이고, 은혜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제사는 은혜를 부르고 은혜는 나를 구원한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구원,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고 사무엘은 망령되이 행했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을 책망한 사무엘이 사울을 돕지 아니하고 떠납니다. 이제는 어쨌든 사울 스스로 블레셋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을 계수하니 육백명 가량이라고 합니다. 블레셋 군사에 비해서 터무니없는 숫자입니다. 거기다가 사울과 함께한 백성들에게는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없었습니다.
19절에 보면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국가들은 철기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철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을 하고 다스렸을 때 이스라엘 내에서 철공을 없애는 정책을 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철기 문화의 발달은 곧 힘의 상승을 뜻합니다. 철기 문화의 발달은 곧 전투 무기의 발달로 이어지고, 그것은 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뜻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힘을 가지지 못하도록 해야 했을 것이고, 그 방법으로 힘이 되는 철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을 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에게 내려가야 할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농기구조차도 스스로 벼릴 수 없을 정도로 철 문화가 쇠퇴된 이스라엘에게 전투에 필요한 무기인 칼이나 창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22절의 구절대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백성들에게는 칼이나 창이 없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할 정도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숫적으로도 한없이 불리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블레셋 군사는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겨우 육백명이 사울과 함께할 뿐입니다. 거기다가 무기조차도 없습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싸움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한 이스라엘의 상황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보면서 먼저 이스라엘에게서 철공을 없이한 블레셋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철공이 있으면 무기가 발달하고 그러면 힘을 소유함으로서 블레셋을 대적할 수 있음으로 아예 철공을 없이한 것이 곧 국가적 영웅주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철을 벼리려면 우리에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즉 기술을 독점함으로서 자기의 기술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현대에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기술이 곧 힘입니다. 그러므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독점하는 것만이 힘을 소유하는 것이고, 다른 자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경쟁력 역시 기술에 있는 것입니다. 냉면 식당들 세계에서는 육수를 만드는 기술이 곧 힘입니다. 따라서 그 기술을 독점하는 것만이 그 세계 안에서 중심이 되는 길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을 함부로 나눠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적 관계를 봐도 이것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요즘 미국이 이집트를 공격한 것으로 인해서 미국을 다시 봐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인 선교사로 인해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것 때문에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우리나라 기독교 안에서도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유엔의 결의도 무시한 채 이집트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 평화를 명목으로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다량 살상무기를 보유한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량살상무기는 이집트보다 미국이 더 많지 않습니까? 결국 미국은 자신들의 힘은 인정하되 다른 나라의 힘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미국 중심입니다. 유엔조차 무시하는 미국은 가히 전 세계의 중심에 있겠다는 영웅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왜 그토록 신경을 쓰겠습니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핵무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가 미사일을 제조할 때도 미국에 의하여 사정거리를 제한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본문의 블레셋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영웅주의가 미국에만 있겠습니까? 모든 국가에게 다 있지만 기술이 없고 힘이 없어서 강한 국가의 눈치를 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미국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국가적 영웅주의에 대해 교회는 과연 어떻습니까? 과연 현대 교회는 이러한 영웅주의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시골의 약한 교회나 도시의 개척교회를 많이 보조합니다. 그런데 거의가 보조하는 숫자에 관심이 있습니다. 가령 백만원을 보조한다고 할 때, 20만원씩 다섯 교회를 보조하는 것보다는 10만원씩 10교회를 보조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많은 수의 교회를 보조하는 것이 자기 교회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보조를 많이 한다는 것은 곧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이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은 곧 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그로 인해서 교회라는 집단 안에서 중심적인 교회로 자리를 굳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웅주의입니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우리 개인에게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에 대해 트집을 잡아서 어떻게든 폄하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안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하지 않아야 하고,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개입이나 시비를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영웅주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국가든 개인이든 영웅주의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곧 사단의 사고방식에 매여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본문의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아주 나약해져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연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나라인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그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0:20절에 보면 “오직 과목이 아닌 줄로 아는 수목은 작벌하여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찌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투를 할 때 취할 행동에 대해 선포하는 말씀 중에 한 부분입니다. 20절의 말씀은 간단히 말해서 나무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철로 만든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나무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분명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군사들로 무장되어 있는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 이스라엘이 무기를 들고 싸운 것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을 이스라엘이 상대했습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승리하신 결과였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무기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칼과 창이 아님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전투들을 보면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아주 큰 성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손 한번 쓰지 않고 다만 성 주위를 돈 것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이러한 전쟁사를 세상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은 참으로 특이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특이하듯 오늘날 교회가 특이하고 신자가 특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해야 할 교회, 신자가 특이한 모습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분명 뭔가 잘못된 게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서 철공을 없앴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신앙한다면 그것은 결코 문제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신앙하며 살아간다면 철공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무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는 민족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천국을 향하는 민족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일 뿐,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이 향하는 곳은 과연 어디입니까? 세상과 천국 두 곳을 향하고 있습니까? 신자는 오직 천국을 향해 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의가 아닙니까? 때문에 신자에게는 예수님의 의만 있으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이 볼 때는 칼과 총 앞에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싸우려고 하는 웃지 못 할 모습에 지나지 않겠지만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보고 사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의를 바라보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의 운명은 예수님의 의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는 무기 같지도 않고 힘도 되지 않는 것을 붙들고 있는 이상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가 관심을 세상에 두게 되면 예수님의 의보다는 세상처럼 힘을 가지는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기보다 힘있는 자를 질투하고 시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을 자랑할 때 나는 자랑할 힘이 없다는 것으로 낙심한다면 스스로 신자의 당당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을 과시하고 자랑할 때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나타낼 당당함이고,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싸워야하는 무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영웅이 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는 것 역시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들고 나온 것 중에는 세상으로부터 경배를 받는 영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경배 받고 섬김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마귀는 끊임없이 영웅이 되라 하고 경배를 받고 섬김을 받는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처럼 힘을 가지고 당당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힘없고 약하다는 것으로 낙심하지도 말고 자신을 초라하게 보지도 마십시오. 그러한 것들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지막을 생각하십시오. 천국을 생각하십시오. 천국이 과연 어떤 자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의로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세상을 당당하게 사는 길입니다.
(36강) 삼상 14:6-15 요나단의 신앙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난감하고 곤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상식으로 되어 있는 일에 대해 잘못된 것으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전혀 관심두지 않고 있는 것을 강조해야 하고 소중한 것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난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와 반대된 것을 말하면 누구나 거부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속성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진리는 분명 세상의 이치와 상식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반대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옳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 편에 서서 생각해 보면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서의 상식에 의해 진리의 상식적인 이야기가 묻혀지고 밀쳐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왜 세상의 상식과 이치를 따르지 않고 반대된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죄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이치는 모두가 죄의 산물입니다. 죄악의 세상에 진리가 등장을 하는데 세상의 상식과 이치에 맞을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진리라고 하면서 세상의 속성이나 상식에 맞는 말로 등장을 한다면 그것은 진리로 위장한 거짓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악한 세상에서 건지시기 위한 구원의 길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진리의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그것으로도 이미 그는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속성과 상식으로는 철저히 외면해 버릴 정도로 비상식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길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진리를 진리로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볼 때 비상식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난감함이 있기는 하지만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은 비상식의 말이 아니라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남게 됨을 생각해 본다면 진리를 전하는 일에 주저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도 세상의 상식과 이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고 천국의 삶에 대해 알게 해주는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온다면 저는 여러분이야 말로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처음 시작부터 뭔가 싱거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철공을 없애는 정책을 편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무기라고는 사울과 요나단이 가지고 있는 칼과 창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군사들도 블레셋에 비하면 전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작은 수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이치를 가지고 계산해 본다면 누구라 할지라도 승률 제로라고 말할 것입니다. 일찌감치 항복하고 목숨이라도 건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쟁은 힘과 힘의 대결입니다. 그리고 수와 수의 대결입니다. 현대전처럼 과학화된 무기로 싸우는 것이라면 수보다는 무기의 질로 승패가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무기의 질에서나 군사의 수에 있어 그 어느 것에서도 형편없는 수준에 있었습니다.
이 싸움에 요나단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나단의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매우 특이 했습니다. 6절에 보면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전쟁에 임하는 요나단의 자세였습니다.
요나단은 전쟁의 승패를 여호와께 두고 있었습니다. 무기의 질이나 군사의 수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결정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와의 관계 문제에 있는 것이지 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요나단은 블레셋의 무기나 사람의 수를 승리의 요건으로 보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단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되어져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본다면 요나단의 행동은 무모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신의 병기 든 소년과 함께 단 둘이 적진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객기와도 같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요나단에게는 블레셋의 무기나 군사의 수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블레셋에 비해 하나님은 그들과는 비할 바도 없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비록 자신들은 단 둘이지만 능히 블레셋을 이기게 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믿음을 무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는 말처럼 앞뒤 상황을 재어 보고 판단을 해서 일찌감치 블레셋에게 항복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까?
요나단의 믿음은 오늘 우리들의 믿음을 재점검하게 하고 나아가서 우리 자신들이 비록 믿음을 말하긴 하였으나 결국 믿음이 없는 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왔음을 스스로 자인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소유한 무기나 사람의 수에 의해 결코 기가 죽지 않는 요나단에 비해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총 칼을 들고 싸우는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서로 싸우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 목숨을 빼앗은 싸움은 아니지만, 서로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상대방을 기죽이기 위한 싸움에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에 말려든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믿음을 의심해 봐야 할 조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기죽이는 싸움 자체가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은 믿음의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신자인 저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적은 수가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수의 많고 적음에 매달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를 늘리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 스스로의 속마음을 점검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수에 있어서 민감한 것은 세상이나 교회가 모두 동일할 것입니다. 양적 팽창을 성공과 힘으로 여기는 사고로 존재한다면 세상이든 교회든 구분 없이 수의 팽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수에 민감하다는 것은 누구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 수에 대해 초월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때때로 교인들의 수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 머물고 그 생각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제 자신이 잘 알고 있고, 또 거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가 적다는 것이 자랑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문제도 아님은 저는 굳게 믿습니다. 제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은석교회의 적은 수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 아님을 굳게 믿기에 저는 수의 적음을 두고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은 수로 인해 기가 죽거나 상대방의 많음을 두고 부러워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의 수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사람의 수만을 두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며,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모든 문제를 두고 생각해 봐야 할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의 수를 돈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되고, 아니면 지위로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을 두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신앙의 자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은석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저로부터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믿음으로 살아가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겠습니까?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요나단 신앙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수를 가지고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고 힘을 내세운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에 말리지 맙시다. 부러워하지도 말고 기죽지도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선포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수가 있다 한들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 받을 존재라면 수의 많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에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구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문제인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수에 민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수의 팽창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까? 저는 성경에서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수의 팽창을 기뻐하신다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은 실패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삶을 목회로 견주어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목회는 실패한 것입니까? 모든 것을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하나 점검하고 짚어 본다면 과연 무엇이 진리이며 참된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작업을 귀찮아합니다. 아니 어쩌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달리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까? 본문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만이라도 우리의 기본 생각과 상식을 점검하면서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진리의 길을 가는 신앙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보면 현대 교인은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고 진리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오직 세상에서의 자기 존재 가치입니다. 세상의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은 다만 그 일에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되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키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성경을 펴 놓고 조금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을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을 위한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키우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되는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기 때문에 '성장=하나님이 돕는 교회, 하나님이 돕는 교회=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구원받는 교회'라는 공식에 의해 스스로의 신앙을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장 자체가 불의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장을 의로 보고, 하나님을 성장을 위한 분으로 여기며 성장하지 못한 것으로 패배감을 느끼고 있고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분명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을 할례 없는 자들로 일컫습니다. 요나단은 블레셋이라는 민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할례 없는 족속과 싸우는 것입니다. 즉 할례 있는 자와 할례 없는 자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할례 있다는 것은 의를 말합니다. 할례 한 것 자체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할례가 곧 육신을 끊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례란 육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할례가 없다는 것은 끊어버린 것이 없음을 뜻합니다. 즉 육신에 매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만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모습만 드러내는 것이 할례 없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블레셋을 치는 것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것만 바라보면서 한숨쉬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할례 없는 모습을 치기 위해 말씀을 동원하시고 믿음을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며 살게 합니다. 사람의 수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중에 세상의 것이 얼마가 있든 그것은 내 육신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것일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거지인 나사로가 천국에 있고 부자가 지옥에 있게 된 것을 생각해 보십니다. 재물이 우리 육신을 보장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재물도 육신의 노쇠는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혼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부르시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재물을 믿고 의지하며 재물로 자신을 과시하고 힘으로 삼는 것 자체가 할례 없는 족속임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를 책임지는 것은 ‘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저와 여러분을 책임집니다. 세상을 보지 말고 천국을 보기 바랍니다. 과연 무엇이 여러분을 천국에 있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시고 진정한 힘을 찾으시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37강) 삼상 14:16-23 사울의 종교성
현대 교회는 종교적인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우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착각은 극히 종교적일수록 더욱 수준 높은 신앙인 것으로 오해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신앙과 종교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점을 소홀히 여긴다면 신앙이 아닌 것을 신앙으로 여기며 스스로 속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하고 천국을 말하는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분명히 언급을 해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신앙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분명한 차이라고 할 것 같으면 종교는 종교적 행위를 하는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반면, 신앙은 자신의 행위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는 자신이 신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렸거나 기도를 했을 때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신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거나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자신이 무슨 행위를 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도우시고 일하실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행위를 부정한다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과연 불교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 다가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분명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신에게 다가갑니다. 신 앞에서 이러한 행위를 했으니까 신이 나에게 복 준다는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은 종교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왜 이런 종교성이 있는 것인지 죄를 짓고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타난 현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유는 벗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벗은 몸으로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옳지 못한 존재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음을 스스로 판단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항상 신에게 떳떳해지려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되려고 힘쓰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무엇을 옳은 것으로 보시는지에 대해 무지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옳은 행위를 해야 하나님이 자신을 옳게 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이 뭐겠습니까? 옳다고 믿는 행위를 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모습이 모든 종교인들에게서 보여지는 것과 공통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종교성과 신앙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해봐야 결국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잘못된 신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똑같으니 이리 믿어도 되고 저리 믿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곧 사단이 여러분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리 믿어도 되고 저리 믿어도 된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그토록 책망을 하시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상을 섬긴 것은 그렇다 해도 열심히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친 것에 대해서까지 책망을 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으로 가르침 받고 배우고 깨달아서 우리의 신앙을 고쳐가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신앙인가를 분명히 가르치고 드러내기 위해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러합니다. 사울이라는 한 사람을 세워서 무엇이 신앙이 아닌 종교성이며 무엇이 신앙인가를 구분하여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요나단이 병기든 사람 한 사람만 데리고 블레셋 군대의 진으로 가는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나단에게 그런 용기가 있었던 것은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많고 적음을 보시고 구원하는 분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블레셋 군대의 숫자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전쟁에 사울이 개입을 하게 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해서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섣불리 블레셋을 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울이 블레셋의 진영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저리 흩어지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16절). 그리고 사울은 자기들 쪽에서 누가 나갔는지 점고해 보도록 지시하게 됩니다(17절). 사울이 이러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아마 블레셋 사람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기들 쪽에서 누군가가 가서 일으킨 일이 아닌가 생각해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울은 요나단과 그의 병기든 자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합니다(18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서 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고 다윗이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까지 계속 있었다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7:1-2). 그리고 70인역에는 하나님의 궤가 아니라 에봇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언급하면서 사울은 아히야에게 궤가 아니라 에봇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궤에 대해 ‘가져오라’는 어투를 사용하지 않다는다는 점을 들어서 궤가 아니라 에봇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상황이야 어쨌든, 그리고 그것이 에봇이었든 하나님의 궤였든 상관없이 사울이 그것을 가져오라고 한 의도에 중점을 둬야 할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인 요나단이 가있기 때문에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또 블레셋이 혼란해진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을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울은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구할 생각으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사울의 마음이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20절의 보면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의 진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사울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는 구절을 보면 사울이 갑자기 제사장에게 손을 거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일어난 혼란이 더욱 커졌기 때문입니다. 혼란이 더욱 커져서 가서 그들을 치면 승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종교성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수를 보고 구원하는 분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블레셋 사람의 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두려워서 감히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할 마음도 가지지를 못하더니 블레셋 사람들에게 혼란이 일어나자 그것을 보고 이길 수도 있다는 희망이 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에 늦게 왔을 때 자신이 나서서 제사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13:9-10). 그때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부득이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하나님 앞에 행하는 어떤 의식을 의존하고 이용하는 종교적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바로 그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상황이 블레셋이 완전히 무너질 것으로 판단되었을 때는 더 이상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사울을 보면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상황이 어렵다고 여겨질 때만 필요한 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도 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전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평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도 잊고 살다가 어떤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을 필요로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뭔가 종교적인 행위를 만들어 내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를 구하다가도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될 때 다시 하나님을 필요치 않는 태도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신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종교에 지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신앙과 종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요나단과 사울의 통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요나단과 같은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상황에 따라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굳게 믿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보이는 상황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다른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이끌어 내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행위를 보시고 자신에게 다가오시고 도우시는 분이 아님을 알기에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의의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나 기도와 같은 행위를 무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들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 자는 예배를 드려도 ‘예배를 드렸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복주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려도 여전히 나는 부족한 자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된 자신은 무엇을 해도 죄인일 뿐이지 결코 자신의 행위로 의인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자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있는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겸손인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것이 곧 신앙이 아닌 종교를 가진 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문제가 없기 때문에 신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한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부족한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이고, 상황과 형편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문제임을 깨닫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14:14절에 보면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멋대로 제사를 지낸 사울에게 한 사무엘의 말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것보다는 어떤 의식과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려야 은혜를 받는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는 분이지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을 보시면서 도와주기를 결정하는 분이 아님을 몰랐던 그것을 곧 하나님을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신앙인가 종교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여겼던 것들이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종교에 머무른 것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신앙에 대해 깊은 자각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잘못된 신앙에서 바른 신앙으로 고쳐가며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 7:22-23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 마음이지 우리가 행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렇다면 예배 안드려도 되고 기도 안해도 되겠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도 결국 자기 행위를 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봐주면 하고 안봐주면 안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만 하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겸손한 신자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를 소홀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이 곧 여전히 자기중심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서 있는 신자라면, 예배를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종교 행위와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천국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 역시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한편 강도가 무엇을 한 것이 전혀 없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것입니다. 아무것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또 사실 천국은 믿음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믿음을 말할 뿐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한시라도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찾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마음 말고 날마다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그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종교에 거하지 말고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종교는 우리를 망하게 하지만 신앙은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38강) 삼상 14:24-30 사울의 맹세
지난 주일에 사울의 종교성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종교와 믿음에 대해 혼동하지 말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인간에겐 누구나 종교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평소에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여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급한 문제가 있게 되면 자연히 초월적인 존재를 찾아 의존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무신론자는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타락은 이러한 종교성과 믿음이 구분되지 못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종교성이 믿음의 행세를 하면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해 버린 현대 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유대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종교성과 믿음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종교성은 오직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뿐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초월적인 존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만을 추구합니다. 내가 높여지기보다는 하나님이 높여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하나님만을 경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믿음의 차이는 또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허전해 하며 눈에 보이는 것, 몸으로 경험하는 것에 더욱 더 확실성을 가지며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인간의 행위를 의존하지 않지만 종교는 인간의 행위를 의존하여 신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착한 행위, 종교적 행위에 대한 열심, 이러한 것들이 자신과 신을 연결해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면서 행위 여부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다른 것처럼 가르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와 공로를 더럽히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사울과 요나단의 이야기에는 종교심과 믿음이 서로 대립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가 사울과 요나단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과연 바른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또 다른 면에서 믿음과 믿음이 아닌 것을 구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24절을 보면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블레셋과 전투를 하는 상황에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누구든 식물을 먹으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함으로써 백성들은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싸움에 임했던 것입니다.
사울의 이러한 맹세는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배가 불러야 힘이 날 것이고, 힘이 나야 잘 싸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오히려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울이 무엇 때문에 금식을 선포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했고,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 해서 도움을 구하려고 했던 사울을 생각해 보면, 금식 역시 자신의 신앙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혼란을 보면서 저 정도면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굳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하고 제사장에게 손을 거두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과 싸우기 전에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함으로써 승리가 자신의 신앙 때문임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의 신앙과 힘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금식 선포는 또 다시 그의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도와 의식은 자신들의 의와 신앙을 과시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라는 말씀으로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2:23절에서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라고 말한 것을 기준하여 보면 사울이 한 금식선포와 같은 행위는 자의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금식 자체를 전혀 유익이 없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금식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의적 숭배’ 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금식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날이나 절기 등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령 신자가 주일을 잘 지켜서 자기 신앙의 의를 세워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자의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금식 선포를 이처럼 자의적 숭배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은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면서 맹세를 시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백성들에게 법을 선포한 것입니다. 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것이지 사람이 제정해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사울의 위에는 왕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서울도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입장에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인도해야 할 역할을 하는 것이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마치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인데 마치 자신을 위한 자기 군대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서 선포하고 자기의 법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저주란 사울의 법에 순종치 않을 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길 때 임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상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블레셋을 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복안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멋대로 저주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저주를 받을 자 복을 받을 자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려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받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이스라엘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소유처럼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현대 교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마치 사울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분 홀로 교회의 머리되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위해 피흘린 것이 있습니까? 목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역할로 세워진 것뿐입니다. 목사 역시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그리스도를 배우며 자라가야 할 위치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목사의 위치는 대다수가 그렇지를 못합니다. 거의 일반 성도는 넘볼 수도 없고 함부로 반박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목사를 반대하면 저주 받는다’ ‘목사를 잘 섬기면 복 받는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고 음식을 먹으면 저주받는다고 엄포를 놓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목사에게 어떻게 행하느냐에 의해서 저주를 받거나 아니면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울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있었습니다. 25-26절을 보면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으나”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명령대로 금식에 대해 맹세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가 고픈 상태에서 전쟁을 합니다. 그러다가 수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꿀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꿀을 봤는데 그 꿀이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꿀을 입에 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금식 하겠다는 맹세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맹세를 깨면 저주가 임할까 두려워서 꿀을 먹지를 못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 역시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푸시는 승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한 맹세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한 맹세인데 하나님은 자신들의 맹세를 기억하고 계시고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감시하고 계시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의적 숭배인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지은 후에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징계하실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이 찾으실 때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에게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실수와 허물에 대해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한번 빠져도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여기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고 가려주신 것인데, 여전히 실수와 허물에 대해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벌 받을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것에 대한 애통함이 더욱 클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자다운 모습은 사울의 금식선포에 매이지 않은 요나단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요나단은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고 맹세하게 한 일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에서 꿀을 먹게 됩니다. 그때에 백성 중 하나가 사울이 누구든 음식을 먹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임을 선포한 사실에 대해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요나단은 “내 부친이 이 땅을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늘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29-30절)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저주에 대해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울의 맹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곤란케 하였다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 블레셋에 대해 승리하게 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저주에 대한 맹세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음을 알았기에 이 땅을 곤란케 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지 못함으로써 사람의 말에 매이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마음에 생명처럼 살아있는 신자라면, 사람들의 잘못된 말 때문에 엉뚱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신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갑니다. 이 생명에 대한 믿음과 감사함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에 매이게 되고, 자신의 행위를 보며 쓸데없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자는 저주 받을 자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징계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붙들어 놓기 위해 취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입니다.
신자는 이미 복안에 거하는 존재입니다. 복과 저주 사이에 있다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복과 저주로 갈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복안에 거하면 그것은 영원한 것인데, 복안에 있다가 뭔가 잘못한게 있으면 다시 저주로 옮겨지고, 또 다시 잘하면 복으로 옮겨지는 것이라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을 저주에서 해방시키시고 영원한 복안에 거하게 하였음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을 보호하는 이상 여러분을 저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신자의 믿음입니다.
(39강) 삼상 14:36-46 죄가 뉘게 있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도 결코 잘못된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됨은 선민의식을 가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민으로 여기면서도 선민으로 살아가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즉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선민이 되게 하신 것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성전이나 회당에 모여 예배드리기를 철저히 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실현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 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까?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제사 드리기를 게을리 하고 제물 바치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악행을 그칠 것을 외치는데, 선지자가 외치는 악행은 고아와 과부 즉 약자를 학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안식일이라는 법을 지키고 제사와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라 약자를 도와주고 위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율법 자체가 곧 사랑을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식일이라는 규례를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부지런히 갖다 바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 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현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것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항상 성경을 넘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선에서 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 교회에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십일조 하고 시시때때로 감사헌금 잘하고 열심히 성경 보며 기도하는 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 1:23절을 보면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고 말합니다. 이 책망에 이스라엘이 제물을 안바친 것이 나옵니까? 제사를 안드린 것이 나옵니까? 아무리 열심히 십일조하고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의가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도 못합니다. 오직 약자를 위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살피시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단순한 성경책이 아니라 참으로 두려우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절대원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를 게을리 하고 우리 멋대로 우리가 만든 몇가지 법칙을 실천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몇가지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몇가지 규례만 지키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고 이를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하게 한 것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신앙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제정한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자기 멋대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다’ 자기 멋대로 상상하여 이런 저런 법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령 예배를 경건하고 거룩히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시간에는 정장을 하고 와야 한다거나 깨끗한 옷을 입고 와야 한다는 규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늦는 것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하면서 미리 와서 찬송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된다는 법을 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한다느니, 절기에는 얼마 이상을 헌금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성경에는 전혀 없는 내용들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야 말로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고 사람이 자기 멋대로 법을 만들어서 교인으로 하여금 자기 법에 복종하게 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울의 잘못됨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31절을 보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배가 고픈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탈취한 양과 소와 송아지를 가져다가 피 채 먹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배가 고픈 나머지 미처 피를 빼지 못하고 급하게 요리를 한 것 같습니다. 레위기 19:26절의 규례를 보면 고기는 피 채 먹어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레 17:11).
즉 하나님은 피를 먹는 것을 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누구든 함부로 할 수 없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와 같은 법을 제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임을 나타내시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법의 의미인데 사람들은 법의 의미를 보기보다는 법 자체를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을 알게 된 사울은 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소를 끌어다가 정결 의식을 치르게 됩니다.
35절을 보면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지도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처음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누구를 위해서 단을 쌓은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백성을 위해서입니까? 사울은 자신을 위해 단을 쌓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피를 먹는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사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여 단을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에게 감사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라 단지 죄를 해결받기 위한 단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동안 단을 쌓지 않은 것은, 단을 쌓을 필요를 느끼지를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은 급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다가 급한 상황이 물러가면 도움을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을 쌓을 필요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승리에 대한 감사의 단을 먼저 쌓은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단을 쌓았다는 것은, 결국 죄로 인해서 올 수 있는 징계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죄를 짓고 나면 헌금을 더하고 주일을 더 잘 지키는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은 사울이 다시 블레셋을 공격하고자 합니다. 그때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권유하고, 사울은 하나님께 나와서 블레셋 사람을 칠 것인가를 묻습니다(37절). 그런데 사울의 물음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대답을 안하십니다. 이것을 사울은 이스라엘에 내에 죄가 있기 때문으로 단정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누가 죄를 지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너희 백성들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설사 내 아들 요나단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39-40절을 보면 결국 죄인으로 요나단이 뽑히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사울에게 꿀을 먹은 사실을 고하게 됩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행위에 대해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44절)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사울은 요나단의 행위를 죽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과연 요나단의 행위가 죽어 마땅한 것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선포한 금식에 대해 순종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자신의 물음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분명히 하나님의 규례를 범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사울이 세운 법을 이행치 않았을 뿐입니다. 사울의 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서 자기 멋대로 부과한 규정이며 규칙일 뿐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짐이며 고통일 뿐인 법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사울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고 과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삶의 규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세운 규정이나 규칙은 어떤 것이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의 법보다도 사람이 세운 규정과 규칙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에게는 성경만이 유일한 절대 원칙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 것이며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넘어서 사람이 또 다른 규칙과 규정을 만들어 요구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경건한 예배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예배 참석자의 옷차림이나 시간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옷차림이나 시간 준수 같은 것이 예배의 경건성을 만들어 낸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지 아니한 것을 제멋대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내세워 요구한다면 그것이 곧 성경을 넘는 것입니다. 옷차림이나 시간준수와 같은 것은 강요할 규칙이 아니라 형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와질 수 있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오히려 인간이 세운 법적인 문제들이 자신은 의롭게 여기고 타인에 대해서는 죄인 취급을 해버리는 오류를 가져올 수 있음에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사울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8절을 보면 사울은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게 한 그 죄가 누구에게 있는가 알아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설사 내 아들에게 죄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도 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요나단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을 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단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요나단이 죄인으로 뽑히게 되고, 요나단이 사울의 금식 선포를 어겼음이 드러남으로써 사울은 하나님이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백성들은 이스라엘에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즉 요나단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죄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까? 사울과 요나단이 뽑혔는데 요나단이 죄가 없다면 남는 것은 사울이 아닙니까? 결국 사울이 죄있는 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 대해 화를 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요나단이 죄있는 자가 아니라 자의적인 명령을 내려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한 사울을 죄있는 자로 규정합니다. 백성들이 고기를 피 채 먹은 것을 금식으로 인해 배가 몹시 고픈 상태에서 미처 하나님의 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고기를 먹은 것이라면 사울의 법이 오히려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에게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뉘게 죄가 있는가 알아보자고 하였지만 정작 죄는 자신에게 있음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내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에 실천할 때 그것을 마치 신앙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세운 법을 준수함으로써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에서 예배 시간 몇 십분 전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결국 그 말대로 몇 십분 전에 온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 되고 늦게 온 사람은 신앙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곧 사울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법을 요구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법에 매이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지키지 못했을 때 스스로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이것이야 말로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사울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시간의 법을 제시함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시간을 지키는 자신의 행위를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것에 화를 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짐이 되지도 않고 우리를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넘어서 인간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규정하고 규칙을 정하는 것이 짐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말씀에 자신을 비추며 살아가시면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 규정한 법에는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불의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에 있어서 유일한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당연한 말이면서도 이상하게 신자들이 말씀을 듣기보다는 사람의 말을 더 즐겨 들으려고 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대해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점검하고 판단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맞는 말 같으면 무작정 받아들이는 실수를 멈춰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넘어서 다른 것을 덧붙이는 것은 악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신앙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보다 더 앞서 나아가고, 더 많은 것을 행하려고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을 넘어서는 악한 행위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로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울과 같은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40강) 삼상 15:1-9 사울의 불순종
본문의 말씀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아말렉과 싸워서 그 민족을 모두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은 명령을 하는 자가 아니라 명령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이방 나라의 왕과 분명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나라의 왕은 그 나라에서 최고의 권력과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말 그대로 왕에게 명령할 존재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 나라의 왕은 명령을 내리고 다스리는 사람이지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과의 관계에서 있어서도 같습니다. 이방 나라가 비록 신을 높은 존재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에게 명령하는 존재로서의 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방의 신, 즉 우상은 명령을 내리는 관계에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요구대로 그 나라를 잘 보호해주고 지켜주면 되는 수호신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이신 하나님은 다릅니다. 선지자인 사무엘을 보내서 하나님의 명령을 왕에게 전달하고 그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왕의 역할은 자신의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전달하여 시행하도록 다스리는 역할로서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때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는 결과로 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왕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면서 요구되는 것은 순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순종은 오직 말씀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지 우리의 계산과 판단과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에게서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치가 높아질수록 존재가치가 향상됩니다. 존재가치가 향상 될수록 명령을 받기 보다는 명령을 하게 되어집니다. 세상은 명령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고, 명령을 하는 것은 높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명령 받는 것에 대해 자존심을 상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명령에 대해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 사회의 분위기는 명령을 내리고 받는 상하 계급 사회가 아니라 동일한 위치에서 일을 분담하는 수평관계로 전환되어 가는 분위기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교회는 인간에 대해서는 철저한 수평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수직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명령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리는 명령은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명령을 내린다면 그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왕으로 군림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와 장로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높이 여기는 목사와 장로라는 위치를 명령하는 자리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명령을 내리는 위치가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진 명령을 백성에게 전달해서 그대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목사 역시 이러한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독려하고 때로는 감시하는 역할이 곧 목사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따로 자신이 내려야 할 명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으로 완벽한데 또 다른 명령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목사 개인의 사심이 작용된 결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에는 목사 개인의 욕심을 이뤄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명령외에 자신을 위한 자기 명령을 만들어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지 않겠습니까? 목사의 위치에는 이런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야 하는 것이 목사인 것입니다. 본문의 사울은 이런 점에서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실패가 우리들에게 큰 교훈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의 실패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실패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을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3절)는 것입니다. 아말렉에 대한 완전 전멸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명령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시각에는 분명 너무 가혹한 명령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젖먹는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까지 죽이라고 하시는가?’분명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상식을 가지고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의 상식은 세상에 맞춰져 있는 반면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진멸해야 하는 이유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2절)라고 말씀합니다. 즉 과거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로 인해서 아말렉을 진멸하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8절부터 보면 아말렉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싸움이 끝나고 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14절 하)고 하시고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는 맹세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아말렉은 대대로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은 아말렉을 미워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신명기 25:17-19절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멜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너는 잊지말찌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말렉이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을 친 것은 광야의 노정에서 이스라엘이 피곤하고 약해진 틈을 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미워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약한 틈을 타서 치는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이 싸우시는 대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 아말렉이 보여준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곧 하나님이 싸우시는 대적이며, 하나님이 진멸할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피곤하고 약해진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지 확인하시기 위해 고의로 이스라엘을 약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치는 것 자체가 자신의 힘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아말렉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말렉을 전멸시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명령을 대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철저하게 미워하시고 진멸코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우리가 곧 아말렉의 모습에 빠질 수 있고 결국 하나님이 싸우시는 대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피곤하고 지친 약자가 보인다면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약자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이 앞선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인간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을 보기 때문에 힘이 없는 약자에 대해서 내가 무시해도 될만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그를 약하게 하시고 피곤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드러내고자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를 약자로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약해진 틈을 타서 무시하고 조롱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곧 아말렉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의 상황을 보면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아말렉과 싸우라고 지시하고는 자신은 아론과 홀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든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산밑에서 싸우는 여호수아와는 전혀 상관없이 승패는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홍해를 갈랐던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 지팡이었습니다. 즉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만 손들고 있으면 되는데 왜 굳이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의 승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실제로 자신들이 칼 들고 싸우면서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모세를 바라보면서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자신에게 있는 것이 결코 자기 힘의 결과가 아님을 아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해야 하는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사울이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8-9절을 보면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고 말합니다. 즉 사울은 아말렉의 왕 아각과 짐승 중에서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사울의 이러한 행위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사울의 행위를 단순히 명령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사울의 행위를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하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사울처럼 아말렉과 싸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은 이스라엘을 친 아말렉의 행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자신의 힘을 믿고 상대적으로 약한 자를 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명령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말렉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에 순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각과 좋은 것을 남깁니다. 이것은 일단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의 마음에 함께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이 아각을 사로잡아 온 것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에서 왕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그 나라를 정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힘의 강함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울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아각을 사로잡은 것은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께 있음을 망각한 행동인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음을 잊지 않았다면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명령대로 아각도 죽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 중에 좋은 것을 남긴 이유 역시 동일합니다. 사울은 양과 소의 좋은 기름진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였습니다. 과연 사울은 어떤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을 낮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겠습니까? 분명 크고 건강하고 살찐 것은 좋은 것으로, 작고 약하고 볼품없는 것은 낮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곧 아말렉과 동일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말렉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봤을 때도 이스라엘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단지 피곤하여 지친 모습만 보면서 낮고 약한 존재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싸움을 벌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울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산다면 우리 역시도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가치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교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길 것이고, 반대로 힘없고 돈이 없어서 교회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힘있는 자가 되려고 힘을 쓰게 될 것이고, 좋은 것을 소유했다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아말렉의 방식이며 사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말렉과 같은 사고방식이 나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있는 아말렉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항상 좋은 것은 남기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좋은 것들이 나에게 득이 되고 힘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에서 구출 받은 신자에게 좋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서 사울과 같은 모습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죄인인 나는 나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전멸하라는 명령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지 않으며 힘을 가지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이 명령을 받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까운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서고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나도 모른 사이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나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분명히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좋은 것이 아까워서 없애지 않고 남겨 놓은 사울을 보면서 과연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곰곰이 묵상하시면서 진정으로 좋은 것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1강) 삼상 15:17-23 순종이냐 제사냐
‘순종이냐 제사냐’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이 곧 제사며 제사가 곧 순종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오랫동안 흘러내려오던 관습에 고정된 생각일 뿐입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제사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제가 지구상의 모든 종교를 알지는 못하지만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없는 종교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란 곧 신을 섬기기 위한 의식인데, 제사가 없는 종교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섬기기 위해서는 필히 제사라는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은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모든 종교는 제사라는 의식을 가지고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우리의 정성어린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까지 공통된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라는 의식에 인간의 모든 정성을 담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의식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과거는 물론이고 현대의 기독교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아주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제사, 즉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사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결국 제사에 참석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고, 참석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께 순종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거의 강요되다시피 되어있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현대 교회의 제사, 즉 예배 자체를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제가 만약 현대 교회의 예배를 부정한다면 은석교회에서는 예배 모임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일단 본문의 내용이 그러한 가르침을 하기 때문이고, 더 중요한 것은 행여 우리가 사울처럼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을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신다면 가장 먼저 여러분의 관습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습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습을 포기하라는 것은, 관습 자체를 없애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관습에 담고 있었던 생각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복을 받는 길이라고 여겼다면, 바로 그런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관습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의식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3절의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음으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에서 짤림을 받는다면 결국 이방인으로 취급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은 멸망 받을 존재가 아닙니까? 사무엘은 사울의 행위를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술이란 점을 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행위가 얼마만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는가는 능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행위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러한 사울에게 사무엘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그것은 아말렉을 쳐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왕인 아각을 사로잡고, 짐승 중에서도 가장 좋은 양과 소, 그리고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은 남기게 됩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났을 때 당당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13절). 그러자 사무엘은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때 사울은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긴 것입니다’(15절)라고 답합니다.
본문에 보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거듭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전히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소와 양을 취하였다는 말을 할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남긴 것인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했어야 옳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순종만 있으면 제사는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순종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무엘의 말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제사가 곧 순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울에 대해 살펴본 대로 사울은 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 선견자에게 물으러 갈 때는 수중에 예물이 없음으로 가기를 주저했습니다(9:7).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갈 때는 예물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블레셋과 전투를 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번제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13:9). 제사를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약궤를 가져다가 도움을 청하였지만 자신의 힘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질 때문에 도움청하는 것을 중지하는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14:19).
그리고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군사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맹세를 하게 할 정도로 종교적 의식과 행위에 비중을 크게 두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울을 생각해 본다면, 아말렉을 진멸하면서 소와 양의 좋은 것을 남겨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사울과 같은 종교적 성향이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종교적 의식과 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율법을 뛰어 넘어 더 세부적인 실천 조항을 만듦으로서 하나님을 더욱 더 정성으로 섬기고자 했습니다. 결국 율법이 그들의 의식으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로 책망하셨습니다. 즉 의식을 행하고 뭔가를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의식에 크게 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예배라는 의식에 갇혀 있습니다. 의식을 떠나서는 신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이 곧 예배이며 예배가 곧 신앙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 의식에 부지런한 사람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늘 본문을 두고 다시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제사가 순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제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을 말씀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식은 하나님에 대해 중요한 신앙 행위이기 때문에 의식을 부정하는 것은 곧 말씀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살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고 몸에 배어 있는 관습 자체를 성경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면 ‘교회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지금 교회가 행하고 있는 모든 의식적인 것들이 과연 성경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인지를 역사적 자료를 찾아서 밝혀낸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지금 교회는 성경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행하고 있는 예배라는 것도 사실은 성경에 없는 것이며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예배를 없애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고, 말씀대로 살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저 역시 여러분께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우리의 예배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예배 역시 지금처럼 순서화되고 의식화 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며 친교였을 뿐입니다. 모여서 자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와 같이 한다고 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그 속마음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모두가 다 헛된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사울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예배로 여러분의 신앙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사하고 좋은 예물을 바치는 여러분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청종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여러분을 기뻐하심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좋은 예물을 바치는 제사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위해 좋은 소와 양을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의 이러한 행위를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책망합니다.
사울은 우상에게 바치려고 소와 양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술이나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모두가 어떤 신을 섬기려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좋은 제물을 바친다면 그 의도는 분명 자신의 복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점을 치는 이유도 신을 만난다거나 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앞일을 알아서 불행을 피하고 좋은 길을 찾아가려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사울 역시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한 속셈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었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는가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예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사울이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는 책망을 들었다면, 오늘 우리가 행하는 예배 역시 오히려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무엇인가를 살피며 말씀을 따라 살기를 힘쓰기 보다는, 어쨌든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어보자는 속셈에서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사술의 죄며 우상에게 절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 규례를 제정하신 것은 제사라는 의식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항상 생각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죽어야 할 존재가 제물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어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 역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아말렉과 같은 정신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이 아말렉을 왜 이토록 미워하시는가를 살피면서 아말렉을 진멸해야 했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면서 자신들에게 있는 아말렉과 같은 삶의 정신이 진멸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먼저 생각했다는 것은, 단지 의식 하나로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겠다는 속셈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배는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지금과 같은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신다’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울처럼 우리들 생각일 뿐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배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어긋나 있고 말씀에 순종치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신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 때문에 정작 봐야할 불신앙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정성을 다해서 십일조를 준비해서 바치고, 교회에서 힘써 봉사하면서 ‘하나님은 이런 나를 기뻐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기 불신앙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 내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약자를 무시하지 않고 돕고자 하는 그 마음을 더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은 것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명목은 신앙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그 내면에는 목사 개인의 욕망이 감춰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원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며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만들어 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자칫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오해하게 할 수 있고, 결국 사울이 받은 책망을 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함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역시 은석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것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주일예배 수요일예배 새벽예배, 구역모임, 성경공부 모임, 금요일 기도회 등등의 모임에 참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는 분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보여지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기에 교만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낮은 자로 자리할 수 있는 그 마음으로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마음에 두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이 아님을 아시고 참된 말씀을 알아가는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
(42강) 삼상 15:24-35 버림받은 사울
우리는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많은 죽음들을 접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접하지만 T.V나 영화는 가상 세계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죽음을 목격한 것과 다르게 냉소적인 태도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총을 쏘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도 우리는 즐거워하고 통쾌할 뿐이지 죽은 자에 대한 애통함 따위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의 상황이라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내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볼 때 덤덤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악한 자의 죽음이든 선한 자의 죽음이든 죽음 그 자체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히 9: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말씀을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은 죄가운데 있게 된 인간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인간의 종말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엄숙한 진리입니다. 절대로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 세계의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인간의 죽음에 대해, 종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마치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식으로 성경을 대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며 나 자신에게 일어날 실제 상황입니다.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한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 보신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던 분들을 세우신 것이고,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고 가르침이 되고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2년쯤 전에 새벽예배를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예배당에 가다가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인 사고인데, 그때 사고를 당한 사람이 머리를 치어서 사망하였으며 만약 헬멧을 썼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때는 헬멧을 잘 쓰지 않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사고가 저에게 생생한 경고가 되고 교훈이 되어서 그 후로는 헬멧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생생한 사건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바로 이시간 우리를 경고하고 교훈하고 가르치는 말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즐기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5장의 사울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이 악이며 하나님은 악에 대해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울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가볍게 여긴다면 여러분은 결국 사울의 죄와 같은 죄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사울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데 무엇이 여러분에게 경고가 되어서 사울의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사울과 같은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묵상하며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15장은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유는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남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림을 받은 순간 사울은 ‘살아있으되 죽은’자가 됩니다.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사울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가를 염두에 두었다면 아말렉의 모든 것은 진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말렉의 것에서 좋은 것이 보였고, 그것을 남겼다는 것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악을 멸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것은 세상은 진멸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을 바라볼 때 진멸을 당할 악의 세력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좋은 것이 가득찬 곳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버림받은 사울과 같은 시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생생한 경고의 말씀으로 들려져야 할 것입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가상 세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현실로 존재할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현실로 나타날 이야기를 사울의 통해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절)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에서 사울에게 가장 충격적인 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여호와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 버림 받았다는 것은 영원한 사망을 의미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충격의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사울처럼 ‘여호와가 너를 버렸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심정이 될 것 같습니까? 혹시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된다는 두려움보다는 ‘여호와가 나를 버렸다면 내 삶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이 더 앞서는 것은 아닙니까? 사울은 여호와가 버렸다는 말을 듣자 자신의 범죄 함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범죄 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버림받음을 피해보고자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스스로 범죄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범죄하게 된 이유를 백성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백성이 모두 원하는 일이었기에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범죄를 말하면서도 범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내세움으로서 자기 정당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죄는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으니 정상참작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 했구나’라는 애통함보다는 ‘하나님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것으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주므로 먹었다고 핑계하고,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핑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는 그 어떤 것이든 바로 내 자신이 범죄한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누구를 있게 하든, 무엇이 있게 하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들이 나를 유익하게 하든 해롭게 하든 상관없이 신자가 할 것은 변함없이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뱀이 꾀인다고 해도 선악과를 먹으면 안되었고 하와가 주었다고 해도 먹으면 안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으로 존재해야 할 책임이 신자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면 ‘누구 때문에’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범죄 하였습니다’ 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범죄에서 버림받음을 생각한다면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버림받음을 면해 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범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죄는 버림받을 정도까지는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서 좋은 소와 양은 백성들이 남긴 것이고 자신은 그 백성들이 두려워서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울의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연 정상참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사울의 재판하는 재판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울은 왕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은 백성들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보다는 백성들에게 높임 받는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25절에 보면 사울은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는 부탁을 사무엘에게 합니다. ‘백성들이 원해서 할 수 없이 한 일이니까 그만 용서하고 함께 가서 나의 승리를 위해 여호와께 경배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체면을 세워달라는 부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은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것으로 인해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체면이 손상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부탁을 거절하고 함께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고 가려고 돌이킬 때 사울이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붙잡아 찢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27절). 그러한 사울에게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28,29절)는 말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정하신 것은 절대로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30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즉 사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에게만 사정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것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체면이고 자신의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들어주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을 버리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러한 사울의 이야기가 어찌 남의 이야기로 그쳐질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오늘 우리 자신들에 대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다면, 사울과 같은 모습 자체를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용납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느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였는가 하면 아말렉과의 전쟁을 마친 후에 사울이 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전쟁 후에 사울이 한 일은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여호와가 승리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의 결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다면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흔적을 남겨서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고 과시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배격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울에게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저는 바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버리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이 곧 사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나를 생각하며 살아갈 때 보여지는 것은 버림받은 사울의 모습뿐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앙은 허세가 아닙니다. 겉치레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곧 신앙입니다. 사울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마음에 이미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높이고 왕의 허세만을 부리려는 모습만 보여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을 버리신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 살아갈 때 어떤 모습의 삶이 보여지는 가를 사울을 통해 배우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범죄 함을 백성들 때문으로 말하는 것처럼 자기 정당화를 꾀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애통함보다는 자기 체면이 손상되고 무너지는 것을 한탄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안에서 자기 이름이 손상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뿐입니다.
신자가 자신을 버리지 못할 때 신앙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자신을 높이기 위한 허세와 겉치레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허세일 수 있고, 기도를 하는 것도 허세일 수 있으며, 봉사를 하고 구제를 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한 겉치레며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한 거짓일 수 있으며, 목사에게는 교회가 허세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곧 자기 이름을 위한 기념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부흥을 하나님의 은혜며 도우심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교회를 자신을 위한 기념비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목사가 예배당을 크게 짓고자 하는 것에도 예배당을 자기 이름을 위한 기념비로 삼고자 하는 허세가 크게 작용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허세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둠으로써 잘못된 허세와 겉치레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인데 말씀을 치워버림으로써 결국 허세와 겉치레가 돌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명목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해서 좋은 소와 양을 남겼다는 사울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죄인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죄를 죄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악이 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31절에 보면 사울을 떠나려고 했던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고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를 합니다. 애당초 사무엘은 사울을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울을 따라가서 사울이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까? 사울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나 사무엘이 사울을 따라간 이유는 32-33절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이것을 보면 사무엘은 사울이 남겨 놓은 아각을 죽이기 위해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아각을 죽인 것은 단지 아각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은 증거물이었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사울의 탐욕의 증거가 바로 아각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각을 죽인 것은 사울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각처럼 사울 네가 하나님께 죽음을 당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각이 사무엘에게 불려 나올 때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이제는 살았다’고 하면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아각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 역시 아각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한 자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보지 못하고, 사망이 없는 것처럼 좋아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결코 변개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조차도 죄에 대한 사망을 보지 못하고 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죄로 인한 심판을 외면하고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단지 겉치레 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종말이 어떠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은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그토록 철저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죄를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의 죽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살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없고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로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기를 바랍니다. 피흘리신 주님이 주신 영생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이시간 하나님의 빛 된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비춰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어두운 마음에 말씀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실 때 우리는 자연히 사울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버림받은 사울입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까? 신자에게 귀한 것은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끝으로 시편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139:23,24)
(43강) 삼상 16:1-5 하나님의 준비
여러분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공의를 시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항변한 선지자가 하박국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핍박하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것 때문에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굽게 행하고 있다는 항변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현시대의 상황들을 볼 때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고 있음을 믿으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시대의 모습도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고 약자를 핍박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것을 누리며 풍요롭게 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시대의 상황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뒤죽박죽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도 수천 명이 죽는가 하면 어떤 나라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비만과 성인병으로 죽어갑니다. 한쪽에서는 배고프다고 아우성인데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먹어 살쪘다며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과연 잠잠히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문제를 두고 하나님에 대해 의문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현 시대의 상황이 걸림돌이 되어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이 다스린다면 왜 이렇게 하시지?’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지?’라는 의문과 답답함은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한 멈추지 않을 의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받아 들일만큼 그 생각이 높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를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일하심에 대한 해석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현 시대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사울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거듭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이미 작정하셨음도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의 왕은 즉각적으로 교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울을 버리시겠다고 하셨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하셨다면 즉각 왕을 교체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왕으로 선택받은 다윗도 어린나이에 사울에 의해서 그토록 모진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사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에서도 의문은 있습니다. 사울은 분명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이미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곧 바로 사울 말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이 나이가 어렸다면 왕을 세우는 일을 미루셨다가 청년이 되었을 때 왕이 되게 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움 받은 사울이 버림을 받고 대신 다윗을 선택하고, 그것 때문에 다윗이 사울로 인해서 많은 곤란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 않겠습니까?
분명 다윗이라는 한 개인의 편함과 이익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위와 같은 생각들이 타당할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왕위를 교체하지 않은 것 때문에 다윗이 고생했다는 결론이 내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범위에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고, 우리 자신들의 일을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의문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고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고난을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현재의 고난을 극히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물론 고난에 대해서 신앙을 단련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답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항상 나 개인과 연관된 고난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고 사무엘을 보내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후에도 즉각적인 왕위 교체가 없는 것은 사울도 하나님의 일을 위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사울이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의 불신앙과 악함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시대의 악인들도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악인의 번성도 하나님의 일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악인이 번성하고 세상의 현실이 결코 신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을 때 신자는 세상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이 번성하는 세상 속에 자기 백성을 팽개치듯 그냥 두지 않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사울로 인해서 슬픔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슬퍼했다는 것은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은 것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사울이 폐위됨으로서 이스라엘에 닥칠 혼란을 염려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슬픔이든 간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슬퍼한다는 것 자체를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슬퍼하고 있다는 것으로 나무라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무엘이 슬퍼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무엘의 슬픔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보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위한 슬픔이든 이스라엘의 앞날로 인한 슬픔이든 사무엘의 슬픔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보지 못한 무지가 담겨 있습니다. 즉 사울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슬픔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이새의 집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른 것을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픔이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이삭과 함께 모리아 땅으로 갈 때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절 下)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물음에 대해 아브라함이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답합니다. 이때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을 이삭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양을 제물로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으로 인해 고민하고 슬퍼했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진짜 제물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전혀 고민도 슬퍼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모를 때 이삭을 바쳐야 한다는 현실은 분명 고민이며 슬픔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의 슬픔은 바로 그러한 의미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울이 왕으로 버림을 받았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 장래도 걱정이 되었을 것이고, 또 설사 사울의 개인에 대해 슬퍼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생각지 않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분명 근심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면 또 누구를 왕으로 세워야 하겠습니까?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울이 버림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는 근심이 안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데는 분명한 원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이 어둠과 혼란으로 빠져들 때 이미 하나님은 빛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나 사사시대 그리고 엘리 제사장이 몰락할 때 이미 사무엘을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사도행전의 사도 바울을 통해서 확인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서 마게도냐로 빌립보로 데살로니가로 가게 되면서 고난과 고초를 겪었지만 그 모든 것은 루디아를 만나고 옥중의 간수를 만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는 일이 준비된 결과였지 않습니까?
시 119:67절에 보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씀하고 고린도후서 4:17절에서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자 개개인에 대해서도 뭔가를 준비해 놓으시고 일을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잠잠하실 수는 있지만 그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성숙한 백성으로 굳게 세우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된 것을 준비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했을 때 현재의 상황에 대해 놀라는 것은 베들레헴 성읍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절에 보면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 성읍의 장로들이 떨며 사무엘을 영접하면서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장로들이 사무엘의 등장에 떨면서 이러한 물음을 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등장은 언제나 잘못을 책망하고 지적하는 심판의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사무엘이 온 것은 혹 자신들에게 책망 받을 일이 있어서가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떨면서 ‘평강을 위해서 오십니까’라고 묻게 된 것입니다.
베들레헴 성읍의 장로들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미리 알았다면 사무엘의 등장에 그토록 긴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시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하시는가를 모르는 상황에서 사무엘의 등장은 분명 긴장을 일으키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체험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준비하셨고 무엇을 위해 일하시는가에 대해 분명한 답을 들으며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오늘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또 어떤 유익이 준비된 사건인가에 대해 아무런 말도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서 놀랄 수 있고, 슬퍼할 수 있으며, 근심과 염려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현재의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일로 인해서 슬퍼하고 근심하고 계신다면 사무엘에게 하신 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듣기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고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상황과 형편으로 인해서 슬퍼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보지 못한 채 계속 슬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지 않고 현실만 보며 살아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 쫓기는 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하고 구원을 체험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사울을 즉각 폐위하지 않으시고 계속 왕위에 두심으로써 다윗이 고난을 받은 것에도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 준비된 결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일 또한 하나님이 준비한 메시아로 오실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준비하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우리 스스로 준비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현실이기에 미리 앞일에 대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험에 들기도 하고 저축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고난을 막기 위해 준비하기 위해 힘씀으로써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음을 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준비한 것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세상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준비한 것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 안심했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의 영혼을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실 수 있음을 잊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의 목적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우리에게 굳게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준비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음이 사울의 즉각적인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으면서도 수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윗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신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해 세상에서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잘 살게 하셔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은 하나님의 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세상의 것을 준비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한 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자로 세우기 위해 인생의 어려움과 밑바닥을 경험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내가 준비한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위해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에서든 슬퍼할 수만도 염려할 수만도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4강) 삼상 16:6-13 하나님의 기준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고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 크다 할지라도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외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외형으로 내적인 면을 판단할 때 분명 잘못된 판단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음을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우리로서는 언제나 누군가를 판단하는 문제에서 수시로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의 내면을 보려고 애를 써야 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해결점은 무엇입니까? 유일한 해결점은 판단자체를 중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판단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저 사람 돈이 많은가 보다’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이 판단을 금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판단을 하지 않는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되어지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판단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에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셔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사무엘로 하여금 시행착오를 하도록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으로 가서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라 내가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라고 미리 말씀을 해주시면 간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준비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준비해 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는 일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이미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보내시면서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에 대해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모두 접해야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왜 미리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사무엘은 모든 아들을 만나야 했고, 또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미리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인간의 판단과 선택을 부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엘리압을 보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택한 왕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엘리압의 용모였습니다. 7절에서 사무엘에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엘리압은 용모가 빼어나고 키가 컸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런 외모를 보고 왕다운 풍모를 느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사무엘이 용모와 신장을 보고 엘리압을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으로 판단한 것은, 이스라엘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과 같은 시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9:2절에 보면 사울에 대해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울보다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풍모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울이 왕으로 뽑혔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의 만세를 외쳤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마음에 흡족한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으로 인해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외형적인 것은 신앙과 연관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무엘도 같은 판단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람을 보는 시각과 기준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외모란 그냥 생김새일 뿐입니다. 뼈에 뒤집어 씌워 놓은 가죽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그 가죽의 모양이 사람의 전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엘리압처럼 용모와 신장이 뛰어난 사람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왕이 될 수 있는 용모와 외형적인 조건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기준 자체가 항상 실수와 잘못됨을 유발하게 됨을 가르치고자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서 왕으로서의 조건과 기준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준과 조건을 제시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과 조건에 의한 판단을 무너뜨리려는 것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새의 다른 아들들이 사무엘 앞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아비나답도 아니고 삼마도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일곱 아들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물어서 양을 지키는(16:11) 또 다른 아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5절을 보면 사무엘이 자신이 온 목적을 말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이새의 모든 아들을 제사에 참여하도록 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사에 나온 아들은 일곱이었습니다. 한 아들이 제외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된 것입니다. ‘너는 양이나 지키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준비한 택한 왕이 바로 그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을 뛰어 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명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잘못된 기준과 판단 때문에 하나님은 아니라 하시는 것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는 아니라고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답을 말씀해주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에게 ‘다윗’을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새의 집에 보내심으로써 사무엘의 잘못된 판단을 드러내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됨과 실수를 드러내심으로써 우리가 무엇에 부족하며 무엇에 대해 잘못된 사람들인가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미리 드러내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본문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판단기준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어린 다윗이니까 어리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다윗을 택하시고 세우신 것은, 외형적인 조건이 왕으로서의 일을 하게 하는 힘과 능력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용모와 신장을 보게 되는 것은, 일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능력이 있을만한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외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연히 외모를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일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은 요구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오히려 하나님께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어린아이 연로한 자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아이는 힘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말합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택함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구별하여 세우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볼 때는 틀림없이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여길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은 버렸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의 선택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선택만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너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음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외형적인 것은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즉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지 우리의 외형적인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키 크고 잘생긴 사람, 돈 있는 부자, 이런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를 잘나오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라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구원은 이런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의한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과 자비 또한 외적인 조건을 따져서 베풀만한 사람에게 베푸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베푸신 것이 아닙니까? 이미 이러한 구원을 받은 우리가 누군가를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망각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외적인 조건을 잘 갖춘 바리새인들은 책망을 하시고 오히려 조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창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신 것입니다. 창녀나 죄인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악한 관습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외적인 조건을 갖춤으로 교회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믿음으로 모이는 것 자체가 참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무엇을 보고 이웃을 판단하십니까? 이웃의 중심을 보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웃을 보시는 것처럼 보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기껏해야 외적인 조건만 볼 뿐입니다. 형제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판단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선택에서 다윗은 제외되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다윗을 선택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서로 판단치 않아야 하는 모임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과 긍휼로 인해서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판단이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판단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속 중심으로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성격이나 성품을 보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조건을 갖추고 보여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속 중심을 보여주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형제를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바라보십니까? 다시 한번 하나님은 내가 보는 것처럼 형제를 보지 않으심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형제에 대한 판단을 금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누가 누구를 판단할 관계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그리스도만을 말할 뿐입니다.
(45강) 삼상 16:14-23 사울과 다윗
윤동주 님의 서시를 보면 그 시작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시 전부를 외지는 못해도 이 대목만큼은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내용을 암송하면서 바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사람이 아무리 바르게 살기 위해서 애쓴다고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그럴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잘 지키며 산다면 가능하지도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하늘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의 기준을 가지고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외모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시각입니다. 보이는 것이 외모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속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이러한 기준 앞에서 과연 속중심이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외모는 얼마든지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행위 완전하여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중심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속중심은 우리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어떤 세력에 의해 붙들려 있는 것이 속중심이기에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속중심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고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향해 부끄러움을 가지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하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로서 온전히 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잊어버릴 때입니다.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인지를 잊을 때 그의 행위는 다만 자신을 위한 것으로 치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울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지 못한 사람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에 대해 부끄러운 모습인가를 알지 못했기에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애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절에는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과 사울이 크게 대조되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과 악신은 뚜렷이 대조되는 관계에 있으며 세상 마지막 때까지 투쟁하고 싸우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사울에게서는 오히려 여호와의 신이 떠나버리시고 악신이 사울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울과 다윗이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대립관계는 창세기 3:15절의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립 관계를 연상케 합니다. 창세기 3: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원수 관계가 되어질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칠 것이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뒤꿈치를 물것이라고 하심으로써 서로 전쟁과 투쟁의 관계 속에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대립 관계가 바로 이것을 연상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립 관계는 오늘 본문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자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합니다. 악신을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신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신의 활동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허용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악신의 활동을 허용하시는 것은, 악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신의 활동이 대조되어 증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악신의 활동을 도구로 이용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신으로 인해 사울은 번뇌하게 됩니다. 번뇌란 심한 정신적 고통을 뜻합니다. 고민과 걱정 염려로 인한 정신적 쇠약을 뜻하는 것이 번뇌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데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번뇌의 이유입니다. 보이는 것만 의지하는 인간으로서 보이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어지지 않을 때, 그리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걱정과 고민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사울의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에게 신하들은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16절)고 건의를 합니다. 이로 인해서 사울은 수금을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도록 지시하고 결국 다윗이 사울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악신으로 인한 번뇌로 인하여 새롭게 왕으로 선택된 다윗이 사울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이 떠났습니다.
이 부분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 치료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말을 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음악 치료의 효과는 입증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수금을 타는 것을 음악 치료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치료란 단순히 사람의 감정을 조금 다스리는 것일 뿐이지 본문처럼 악신을 이기는 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과 사울은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와 악신이 함께 한 자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서로 대조되고 대립되는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수금을 탐으로써 악신이 떠났다고 말하는 것은 악신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인용해서 오늘날 찬송이 마치 악신, 즉 귀신을 쫓아내는 효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봐야 합니다. 열심히 찬송 부르면 귀신도 도망간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찬송 자체를 능력으로 여기도록 만들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이 수금을 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악신이 사울에게서 떠났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악신이 떠나는 일은 오직 다윗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였고 그런 다윗만이 악신에 대해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금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신이 떠난 것과 오늘날 찬송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중점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임한 다윗을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으로 번뇌하고 있는 사울 앞에 세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실까요? 너무 복잡하게 일하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을 왕으로 택하셨으면 하루속히 왕을 교체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다윗을 사울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의 악신을 떠나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21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든 자를 삼았다고 말합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사울이 왕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다윗이 왕입니다. 이미 기름 부음까지 마친 다윗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실제 왕인 다윗을 이미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선언을 받고 악신으로 번뇌하는 사울을 섬기도록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을 섬기는 다윗으로 인해서 악신이 떠나는 도움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일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다윗과 사울에게서 예수님과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을 생각할 때 바로 우리 자신들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없습니까? 악신이 들어 번뇌하며 고통당하는 사울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관계로 세상의 일로 인해서,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로 인해서 얼마나 번뇌하면서 살아갑니까? 온갖 고통과 걱정과 염려들에 휩싸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형편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믿음으로 인한 평안함과 복으로부터는 멀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 앞에 예수님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섬기는 분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악신으로부터 구출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악신이 들린 상태는 고통이었습니다. 왕이면 뭐합니까? 악신으로 인해 번뇌하고 고통 받는 삶이라면 왕이라는 것도 결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 앞에 선 다윗은 비록 목동이었고 어린 소년이었지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로서 사울에게서 악신을 떠나게 하였습니다. 과연 누가 더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악신이 들린 상태는 그가 어떤 신분 어떤 존재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결코 행복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한 다윗, 그가 참된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참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섬김으로써 우리를 악신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지위와 소유 등등을 가지고 존재 가치를 판단하지만 신자는 예수님을 믿으며 사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러한 삶에 번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악신을 떠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이시라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사울의 삶은 비참과 고통이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은 항상 여호와의 신이 떠나지 않는 신자로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 안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번뇌를 보면서, 우리 역시 여호와의 신이 떠났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살지 못할 때 사울과 같아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51장을 보면 머리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나 나단이 저에게 온 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도 역시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는 악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죄를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사울의 상태를 목격했기에 그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를 알고 비참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절실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돈 없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고 나를 버리셨다는 것이 비참함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버리지 않을만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사울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섬김으로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버림을 발견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새로운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비참한 우리들에게 새로운 빛이 비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기에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이면 뭐하고, 목사면 뭐합니까? 세상 지위가 아무리 높은들 뭐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는 비참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직까지 세상 것으로 고민하고 번뇌하고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인생의 비참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세상 것으로 자기 인생을 꾸며보고 싶은 욕망만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인생에서 벗어나기를 끊임없이 소망해야 합니다.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계명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수단으로 살기를 힘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의 원하는 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을 버리셨고 여호와의 신은 사울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사울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는 모습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교만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참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섬김으로 인해 구출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여전히 우리의 뜻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 스스로 신자라고 자처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선택했는데 버리실까?’라는 생각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 자는 선택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즉 ‘선택했으니까 어떻게 살든 버리지 않으시겠지’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떠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는 선택 자체를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택하여 그리스도안에 있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머물기 위해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46강) 삼상 17:1-11 골리앗
<본문>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삼상 17:1-11)
<설교>
만약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믿음을 제하여 버리면 그에게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믿음을 제하여 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분명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제하여 버리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될까요? 아니면 주일을 지키지 않게 될까요? 그것도 아니면 헌금을 하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게 될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욕할까요? 만약 이러한 것 중에 어느 하나라도 믿음을 제하여 버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러한 모습들은 믿음으로 인해 보여 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즉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 믿음을 제하여 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반대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만 보여 지는 특징이라는 답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논리로 모든 것을 생각해 본다면 헌금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보여 지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도 할 수 있고, 그 외 다른 반문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많은 한국교회는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를 외형적인 것에서 찾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기도를 하는 것, 헌금을 하는 것 등등의 외형적이고 행동적인 면을 두고 믿음의 여부를 판가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과 믿음이 없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고유 특징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외형적인 것으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을 오해하게 하는 잘못된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형적인 것은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외형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도 교회는 다닐 수 있는 것이며 믿음이 없이도 기도하고 헌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믿음에서만 보여 질 수 있는 고유 특징을 외형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결국 믿음이 아닌 것도 믿음으로 오해되어질 위험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믿음이 아닌 것과 믿음인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구분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현대 교회는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한 출발부터가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는 ‘무엇이 믿음인가?’의 답을 인간의 죄인 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열심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시각이 믿음의 변질을 낳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에 의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사회사업을 많이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참된 교회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내면에 악한 사단의 속성이 감추어져 있다면 제아무리 선한 일에 열심이라 할지라도 참된 교회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볼 때는 바르고 참된 교회로 비춰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교회상이 보여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고 판단하실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이러한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보여 지는 특징이 어떤 것이며, 과연 믿음으로 세워지는 참된 교회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를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인 ‘골리앗’이 등장을 합니다. 사람들은 골리앗을 생각할 때 대부분 다윗을 함께 생각합니다. 소년 다윗이 물매돌로 넘어뜨린 블레셋의 장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골리앗은 이스라엘의 믿음 없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역시 골리앗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처럼 두려워서 떨고 있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골리앗 이야기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사울과 다윗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임한 사람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울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하나님이 신이 떠나고 악신이 임한 사람에게서 보여 지는 것이고, 다윗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반대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에게서 보여 지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 즉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면 사울을 보면 되고, 믿음이 있는 자에 대해 알려면 다윗을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본문은 골리앗을 등장시켜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골리앗을 대하는 모습 자체가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확연하게 구분시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골리앗과 더불어 싸우는 다윗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골리앗에 대한 이스라엘과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과연 신자가 믿음이 없이 살 때 어떤 모습이 보여 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 우리 자신들이 믿음에 거하는지 믿음에 거하지 못하는지를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4-7절까지 보면 골리앗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골리앗의 키, 그의 무기 등등 모든 면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방인의 장수를 이토록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골리앗을 엄청난 힘의 존재로 부각시키면서 힘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를 드러내고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골리앗은 그 신장이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말하는데 고대 측량법에 한 규빗은 약 45㎝, 한 뼘은 약 13㎝로 계산합니다. 그렇다면 골리앗의 키는 283㎝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을 입었는데 그 무게가 놋 오천 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11.5g인 것을 계산하면 갑옷의 무게만도 57.5㎏이 됩니다. 그리고 놋단창을 메었는데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 즉 7㎏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방패든 자가 앞서 행하고 있는 한마디로 말해서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 골리앗은 그 신장이나 무기 등이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강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골리앗 앞에서 사울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도 기가 죽고 두려워서 떨고 있는 모습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그 속에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더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과 힘의 대결입니다. 군대의 숫자, 무기, 용맹성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군사력으로 드러나게 되고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쟁은 항상 이 상식을 뒤집어 버립니다. 상대의 군사력이 어떠하든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믿음이 그들의 모든 것을 결정하였던 것이지 이방인과 같은 물리적인 힘이나 조건들이 승리의 요건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에게서만 보여 지는 특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기 보다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울은 골리앗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에게 1:1의 대결을 요구합니다. 블레셋은 골리앗이 나설 테니까 이스라엘도 한 사람을 택하여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싸워서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종이 되자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자신의 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자신보다 힘있는 자가 없다고 믿었기에 1:1의 대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사울과 이스라엘은 두려워 떨고만 있을 뿐입니다. 골리앗을 이길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나단입니다. 14:6절에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나단은 적어도 사람의 수를 보고 겁을 먹는 나약한 존재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1장에 보면 암몬 사람이 야베스 사람들을 치러 올라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기브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리 높여 울 때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되어 이스라엘 사람을 모아 암몬을 쳐서 승리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떠난 지금 사울에게는 그러한 용기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의 특징은 세상의 힘있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나단 역시 블레셋에 대하여 싸울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상태가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전쟁의 승리는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에게는 자신의 힘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이 곧 용기이며 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이 임함으로써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서만 보여 지는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떠났다면 그러한 믿음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신의 힘밖에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하고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힘이 나약하다는 것을 보면서 상대의 강한 힘 앞에 기가 죽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에게서 믿음을 빼버리면 결국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그 결과 힘이 있다고 여겨질 때는 골리앗처럼 큰 소리를 치게 되고 힘이 없다고 여겨지면 사울처럼 힘 앞에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자신은 과연 믿음이 있는 자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믿음을 말하면서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에 머물러 살아가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분명 힘이고 능력입니다. 내가 힘이 있어지고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고 성취하실 것임을 믿는 그 믿음이 힘이며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세상에 대해 절대로 기죽기 않게 되고 항상 당당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골리앗은 무엇입니까? 골리앗은 항상 외형적인 힘을 앞세워서 싸움을 걸어옵니다. 과연 그러한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외형적인 힘 때문에 기죽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골리앗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가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부모 앞에서 기가 죽는다면 결국 공부 잘하는 자식이 골리앗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교회는 수가 적은데 저 교회는 수가 많다는 것 때문에 기가 죽고 실망하게 된다면 결국 그 사람에게는 수가 많은 교회가 골리앗이 아닙니까?
골리앗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모습으로 이스라엘 앞에 서 있습니다. 키 큰 용사로서, 그리고 단단한 갑옷으로 온 몸을 무장하여 누가 봐도 기가 죽을 만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골리앗을 이스라엘 앞에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골리앗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울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이 떠난 믿음 없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일까요? 과연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 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부흥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믿음일까요? 하지만 그것은 나도 골리앗 되게 해달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서로서로 골리앗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이용해서 골리앗이 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다스립니다. 이것이 악신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속성이 교회에 존재할 때 나타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교인수가 많은 교회의 목사는 적은 교회의 목사를 은연중 무시하게 됩니다. 가진 자들은 없는 자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악신이 임한 자의 속성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악신은 모든 것을 힘으로 대항하게 하고 힘을 내세워 싸우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에는 인간의 힘과 노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서든 은혜를 말한다면 그 일로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은혜를 말한다면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심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감사하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믿음에서 골리앗에 대해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골리앗을 세워서 사울이나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존재를 내세워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에게는 믿음이 제일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는 오직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하나면 구원의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다면 돈이든 권력이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쉬워 할 것이 없어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이 싸움을 걸어오는 것에 대해 똑같은 방법과 똑같은 속성으로 대항하려고 하기 때문에 믿음 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외형적인 것으로 싸움을 걸어올 때 자신도 외형적인 것으로 대항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처럼 돈과 권력과 숫자로 자신을 무장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걸어오는 싸움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 세상이 크게 보는 것을 내세워서 신자에게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에 대해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대항하셨습니다. 결국 돈을 과시하고 세상에 대해 날마다 믿음으로 살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우리에게 이러한 승리의 삶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골리앗 앞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볼 때 크게 보이는 것, 부럽게 여겨지는 것, 기죽는 것, 모든 것이 골리앗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골리앗을 우리 앞에 세워서 우리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만약 사울과 이스라엘처럼 기죽고 두려움이 떤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 떠난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골리앗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골리앗 앞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이 믿음을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 세상처럼 돈을 구한다면 그것은 분명 믿음이 아닌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외형적인 것에 대해 결코 기죽지 마십시오. 세상이 가진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한 심령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는 쓸모없는 무가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을 오히려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당당함이 신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47강) 삼상 17:17-30 엘리압의 분노
<본문>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 중이더라 다윗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의 명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하며 이스라엘과 블레섹 사람이 항오를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하였더라 다윗이 그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가로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여차여차히 하시리라 하니라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삼상 17:17-30)
<설교>
골리앗이 이스라엘 앞에 등장하여 1:1로 맞붙어 싸울 사람을 내보라며 큰소리를 치고 위협을 할 때 이스라엘이 가장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분명 골리앗처럼 힘센 장수였을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장수가 없는 것을 한탄하며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과연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힘센 장수를 보내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달라거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현대인들이 신을 찾는 이유이며 기도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곧 믿음입니다.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해서 전혀 엉뚱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잘못된 생각인가 하면, 사람은 모든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도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문제에 대해서만 기도하게 되는데, 이때 기도의 목적은 오로지 내 문제 해결에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두 골리앗이 되기 위해 살아갑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키 크고 힘세고 모든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곧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자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자기 존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유는 다른 사람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자신의 힘을 비교하기 때문에 그러한 불만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왜 골리앗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인가?’라는 강한 불만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다면 기도 내용은 역시 자신을 골리앗처럼 만들어 달라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신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믿으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일 뿐입니다.
세상은 골리앗과 같은 존재를 높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높임 받기 위해서 골리앗 되기를 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속에서 신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겠습니까? 똑같이 골리앗 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골리앗을 원하는 세상에서, 골리앗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신자는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본문은 블레셋과 싸우고 있는 전쟁터로 다윗이 오게 되고 형들을 만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새는 다윗에게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안부를 살피고 올 것을 지시합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왔을 때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 서로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형들을 찾아 문안하고 함께 얘기하고 있을 때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이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절)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말은 전혀 잘못됨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잘못되어 있었음을 지적해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을 들은 다윗의 맏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내게 된 것입니다. 엘리압은 화를 내며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절)라고 말합니다. 엘리압은 다윗의 말을 듣고 다윗이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다윗의 말에 대한 엘리압의 반응입니다. 왜 엘리압이 다윗에 대해 화를 내며 다윗을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소리치는지 그 속마음을 살펴보면서 엘리압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지, 혹 다윗처럼 행동하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이 오게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다윗에 대한 엘리압의 반응은 우리가 많이 겪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엘리압처럼 많이 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었던 엘리압과 같은 행동을 찾아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고 고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선 다윗은 소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새가 전쟁터로 심부름을 보낼 정도라면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들을 따라 전쟁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전쟁에 참여할 만한 나이도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다윗의 나이가 십 사오세 정도가 아니었는가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전쟁터에는 나갈 수 없는 어린 나이였음을 생각해 볼 때 엘리압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른들의 일에 어린애가 건방지게 나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한 말은 군대의 힘을 돋아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군대가 왜 이 꼴이냐는 책망을 어린애로부터 들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한마디로 체면 상하는 일이고 자존심을 구기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다윗의 형들도 이스라엘의 군사로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임을 생각한다면 26절의 다윗의 말은 다윗의 형들까지 포함한 말로 들려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다윗이 나이가 어리다 해도 힘이 특출한 존재였다면 엘리압도 쉽게 화를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골리앗을 대적할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 ‘왜 할례 없는 골리앗을 두려워하느냐’는 말을 하는 것과 힘도 전혀 없는 다윗과 같은 어린애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엘리압의 입장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다윗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왕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고, 또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많은 일을 할 사람이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님이 나신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다윗이 한 말에 대해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리지만 믿음이 있는 다윗으로서는 당연한 말이고 따라서 엘리압은 다윗의 말을 듣고 믿음 없는 자신을 뉘우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엘리압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엘리압에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몇 마리의 양이나 맡아서 치고 있는 약한 어린애였고 별 볼일 없는 동생이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동생에게서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할례도 하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족속들이고 당신들은 하나님의 군대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그냥 듣고만 있는가?’라고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형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나 사건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성경이 지적하고 드러내는 우리 자신들의 잘못됨을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결과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읽지 마시고 장차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그 상황에 자신을 집어넣어서 읽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골리앗 이야기만 해도 우리는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해 알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골리앗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고 있는 사울이나 이스라엘 군사들이 믿음이 없는 한심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이 하나님을 믿고 나가 싸우면 하나님이 도와서 승리하게 할 것인데 왜 두려워하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라면 골리앗과 같은 엄청난 존재가 내 앞에서 큰 소리를 칠 때 과연 믿음으로 나가 맞서 싸우고자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결과를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본문을 대한다면 내 자신이 곧 믿음이 없는 사울이고 이스라엘 군사며 다윗에게 화를 내는 엘리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내는 것은 힘도 없으면서 큰소리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압의 사고방식이며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을 믿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라볼 때 블레셋 군사를 두려워하는 것이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압의 상식은 믿음이 아니라 힘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믿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기준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힘이 있어야 큰소리 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다윗의 말에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힘도 없으면서 너무 건방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보낸 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을 염두에 두기 때문임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리다는 것을 생각함으로 인해서 오히려 다윗을 나무랄 뿐, 자신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령 교회에서 돈을 사랑하고 돈으로 자기 힘을 과시하는 부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부자 앞에 돈 없는 가나한 사람이 등장하여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할 때 과연 그 부자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부자의 입장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 그렇구나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닌데 내가 너무 돈을 사랑했구나’라며 자신을 뉘우치겠습니까? 만약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참으로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도 여러분도 자각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은 ‘건방지다’ ‘교만하다’ ‘돈도 없는 것이 큰소리만 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보다 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했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과연 건방지다 교만하다는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결국 사람은 똑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자신보다 강한 자가 한 말과 약한 자가 한 말을 달리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압이며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세상 것으로 힘을 계산합니다. 힘이 있는 그가 곧 강한 자이며 강한 자의 말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며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강한 자는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당시 누구보다 강한 자는 믿음으로 블레셋을 바라보는 다윗이었으며 믿음이 없이 다만 힘을 기준으로 해서 골리앗을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있는 사울이나 이스라엘 군사들, 엘리압은 다윗보다 더 연약한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는 자의 믿음의 말이 건방진 것으로 교만하고 완악한 것으로 들려졌던 것입니다.
물론 믿음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려는 발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믿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당신 돈 있다고 까불지 말라’는 속셈을 가지고 돈 없는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돈 없어도 천국 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오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은 힘에 대해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 자신을 믿음에 세우고 예수님께 두기 위해서 말씀을 상고하며 우리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기 위해서 나보다 힘이 없고 못나 보이는 사람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각으로는 못나보인다 해도 그가 믿음에 거한다면 그는 누구보다 강한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그를 통해서 나의 믿음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것 때문에 혹 건방지다 교만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말에 개의치 말기 바랍니다. 다만 혹 믿음을 이용해서 내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골리앗이 눈앞에 보이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만 간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날마다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신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48강) 삼상 17:41-50 다윗의 승리
<본문>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삼상 17:41-50)
<설교>
본문을 보면 어린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이기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자들이 이러한 내용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나도 다윗과 같이 승리할 수 있었으면’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즉 다윗의 승리를 통해서 믿음이 없이 너무 연약한 모습으로 살았던 자신의 신앙에 대해 책망을 받고 부끄러워하는 것보다는 승리 자체를 부러워하고만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다윗이 기골이 장대하고 힘있는 장수 골리앗을 이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희열이 느껴지는 장면이 아닙니까? 세상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도 이스라엘을 구한 사람으로 높임 받고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승리에는 영광이 따라오기 때문에 이 영광이 내 것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다윗과 같은 승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리라는 결과만을 바라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승리’라고 하는 결과만을 좋아할 뿐 다윗이 승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설사 다윗이 승리하게 된 이유에 관심을 둔다 한들 그것 역시 다윗과 같은 승리를 얻고자 하는 욕심에 의한 것일 뿐 다윗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다윗처럼 하면 나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다윗이 어떻게 했는가를 살피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윗의 승리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승리를 세상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골리앗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승리에 대한 이해자체가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골리앗을 세상의 힘있는 존재, 나를 억누르고 나보다 힘센 세상의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가 이해하는 승리는 내가 그보다 더 힘센 존재가 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업종에 있으면서 자신보다 더 큰 사업체를 가진 사람을 골리앗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이 사람은 자신을 다윗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상대방보다 작다는 것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과연 무엇을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의 승리로 이해하겠습니까? 분명 경쟁에서 자신보다 큰 업체를 이기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승리는 그러한 승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그러한 승리를 약속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의 승리는 그 내용 자체는 신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교훈으로 받아들일 뿐 다윗의 승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내용은 현실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 내용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지만 지금도 성경에서와 같은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현실과는 거리가 먼 교훈으로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도 이러한 시각으로 보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성경의 옛날이야기 정도로 대접받고 마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윗의 위인전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승리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신앙인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고, 오늘 우리가 어떤 모습의 신자로 세상에 머물고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하게 합니다. 즉 ‘다윗은 믿음으로 승리했다. 우리도 믿음으로 다윗처럼 승리하자’가 아니라 ‘다윗은 믿음으로 승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이처럼 우리의 현재적인 모습을 점검하게 하는 것이 다윗의 승리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골리앗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골리앗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윗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에게 있는 것이 우리에게 없고 다윗이 바라보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고 다윗이 믿고 의지하는 것을 우리가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골리앗을 외형으로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라는 시각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36절에 보면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수 없다고 말리는 사울에게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고 있었고 할례 없는 골리앗과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만약 자신과 골리앗을 외형으로 비교하고 판단했다면 사울과 이스라엘처럼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힘에 있어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절대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골리앗은 단지 할례 없는 존재로 보였을 뿐입니다. 할례 없는 존재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골리앗을 바라보는 다윗의 시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오직 둘로 구분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믿으면서 자신의 심령에 피의 은혜를 두고 사는 사람과 예수의 피가 아닌 세상의 힘을 마음에 두면서 힘이 제일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구원할 자와 심판할 자를 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저 사람은 돈이 많다’ ‘저 사람은 권력이 많다’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가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가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힘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기준으로 대한다면 세상의 힘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현대 신앙인의 약점은 천국을 말하되 천국을 소망하는 시각에서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천국과 세상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세상을 바라보고, 천국은 죽음 후에 들어갈 세계로만 인식합니다. 때문에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 현실에서는 전혀 힘을 드러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말하되 여전히 돈과 권력을 힘으로 여기며 그러한 힘을 가진 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들게 산 것 천국에서 보상받자는 심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 없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에게는 할례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할례 없다는 것은 전혀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골리앗이 할례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할례 있는 사람보다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세상이 원하는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조건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갈등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믿음에 대해 회의를 가지는 사람이 부지기수이고 결국 ‘예수 믿어도 별 것 없다’는 낙심과 함께 예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달랐던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다윗에게 골리앗은 키가 크고 힘이 센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고 심판해 버리시는 할례 없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즉 골리앗 위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말합니다.
골리앗은 오직 자신의 힘을 믿고 나올 뿐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자신을 이길 자가 없다고 여기고 이스라엘을 모욕하며 큰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자기 위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않을 때는 세상의 힘을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힘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힘으로 자신을 과시합니다. 힘으로 약자를 괴롭히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힘없는 자는 세상의 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다’고 큰소리칩니다. 여러분,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 과연 무기입니까?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골리앗이 다윗의 말을 듣고 다윗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까? 눈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골리앗은 자신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장수가 등장해야 두려움을 가질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모든 군사가 자기 앞에서 쩔쩔매지 못하고 있는데 어린 소년이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세상에서 아무리 예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말해도 세상은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말하는 믿음도 예수님의 이름도 하나님의 이름도 세상을 두렵게 하지를 못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낙심하기 쉽고 믿음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 쉽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말에 대해 골리앗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이 골리앗을 상대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승리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승리를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윗의 이야기를 골리앗보다 더 센 사람이 되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으면 골리앗보다 더 힘센 사람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비록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지만, 다윗이 칼을 들고 골리앗과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서는 분명 다윗은 골리앗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 다윗 그대로일 뿐이지 다윗이 힘센 장수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47절에 보면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리고 블레셋 군사들에게 알게 하고자 하신 것은 여호와의 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칼과 창이 전쟁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승리하게도 패배하게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전쟁의 군사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군대는 내 손에 쥐어진 칼과 창을 의지하고 싸움에 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골리앗을 앞에 두고 두려워 쩔쩔매는 나약한 모습으로 남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다윗입니다. 어린애도 이긴 골리앗을 우리가 못이겨서 부끄럽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믿음 없는 모습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물매와 돌은 다윗이 양을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골리앗을 단지 하나님의 군대를 해롭게 하는 짐승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리 힘이 있고 강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으면 그는 멸망의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대적자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위에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골리앗과 같은 존재 앞에서 다만 두려움을 가질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나약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마지막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까? 세상의 것이 하늘나라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힘을 의지하고 힘을 원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수없이 많은 골리앗이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세우셔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믿는다면 골리앗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보인다면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자식들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선물이었음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골리앗 같은 자가 큰소리치며 삽니다. 그러나 그 앞에 기죽지 마십시오. 힘없는 다윗과 같은 존재라고 해도 기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십시오. 분명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49강) 삼상 18:1-9 사랑의 관계
<본문>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 18:1-9)
<설교>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많이 들었고 사용하는 말이기에 잘 아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막상 사랑에 대해 말하려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즉 좋아하는 감정 자체를 두고 사랑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웃이 어렵고 힘들 때 도와주는 것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사랑을 이러한 시각으로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분명 불변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 않습니까? 또한 이웃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 역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행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고전 12장을 보면 마지막 구절인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대한 경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은사가 더 나은가를 따지면서 경쟁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고 이어서 사랑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고전 13:1-3절을 보면 어떤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특히 3절의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구절을 보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즉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며 도와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결국 사랑과 어려운 이웃을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도와주는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즉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이웃을 도와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고 해서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에서 사랑을 이해함으로써 하늘에서 주어진 참된 사랑에서 멀어진 채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즉 사랑이 없으면서도 이웃을 조금 도와준 것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사랑은 도덕과 윤리적인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관계에 머물기 보다는 법적인 관계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랑이 없을 때 등장하는 것은 법이라는 것입니다. 법적인 관계는 쉽게 말해서 ‘내가 무엇을 안했는데 혹시 내게 벌을 내리지 않을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일조를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주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 이런 것이 곧 법적인 관계에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를 따지지를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때 우리는 항상 법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님과 법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은 형제를 대할 때도 법적인 관계에서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보여지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일 분입니다. 항상 ‘나는 하는데 너는 안한다’는 시각으로 형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우리 자신들이 사랑의 관계에서 형제를 만나기보다는 법적인 관계에서 만나는 것이 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형제가 어려울 때 조금 도왔다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우리들을 도와줄 것입니다.
먼저 1절의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는 구절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 구절에 대한 의문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당시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만났습니다. 혹 다윗이 사울에게 와서 수금을 탈 때 다윗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 있다는 가정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경을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만난 것은 18:1절이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처음 만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만난 사람이 마음이 들 때 호감은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감이 가진다고 해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남녀 관계에서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있지만, 아무리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역시 처음부터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은 인간의 감정과 상식을 뛰어 넘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늘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단의 사랑은 오늘날 사랑 없는 우리들을 책망하고 나아가서는 한국교회를 책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언약의 관계로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저는 사랑을 언약의 관계에서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언약의 주체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까지도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이 다만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얻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믿음까지도 내 공로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임을 믿는 것이 곧 언약의 관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절대로 자기 백성에게 ‘주일을 지켰느냐?’ ‘십일조를 하느냐?’ ‘성경을 많이 읽느냐?’라는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물음을 한다면 그것은 법적인 관계에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법적인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에게 사랑의 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를 가리켜서 자유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법에도 매이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를 아는 신자가 진정한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한 것처럼 신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같이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주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옳은 사랑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심으로 주를 사랑하는 신자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에 등장하는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고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사울을 환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윗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7절의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을 물리친 일을 두고 다윗을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 다윗을 높이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요나단처럼 다윗을 생명 같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분명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다윗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한 일이 자신들에게 큰 득이 되었기 때문에 다윗을 좋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신에게 좋으면 좋아하고 싫으면 싫어해버리는 것이 인간의 감정이 아닙니까? 이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백가지를 잘해주다가도 한가지를 잘못하면 잘해준 백가지는 잊어버리고 잘못한 한가지를 기억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다가 한가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가지고 원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불변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생명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깨어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에 의한 언약이기에 사랑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조건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약관계이기에 내게 좋으면 사랑하고 나쁘면 싫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절의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라는 구절과 5절의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는 구절을 보면 사울은 다윗을 귀히 여겼으며 다윗을 매우 좋아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사울이 다윗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 대한 사울의 마음이 여인들의 노래 소리 하나에 변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노래에 대해 사울은 아주 불쾌해 했습니다(8절). 그리고 9절을 보면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즉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에게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게 여겨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사울과 같은 모습이 없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들의 사랑은 너무 부끄러운 수준에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떠들고 있는 수준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변인데, 우리의 사랑은 수시로 변하고 바뀝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 중 그 누구도 구원받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에게서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성도를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도와준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결국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좋아하는 수준이 아닌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대방에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이런 것을 따진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할 마음이 없음을 뜻할 뿐입니다.
20;14-17절을 보면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다 끊어버리실 때라도 인자를 자기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아달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대적은 사울을 말합니다. 결국 요나단은 하나님이 사울의 집을 치실 때 인자를 베풀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나중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왜 다윗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까? 당시 다윗은 도망을 다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인자를 내 집에서 끊어버리지 말아 달라고 맹세하게 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택한 자임을 요나단이 알았기 때문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다윗과 언약을 맺는 것이 곧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게 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과 언약의 관계에 있음으로써 자신의 집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면할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그러한 맹세를 하게 하는 것이고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 다윗은 주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내 생명같이 주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뭘 의미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자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되고 못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인자하심이 나에게서 끊어지면 내 생명도 끊어짐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세상을 다 멸하실찌라도 나를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을 끊어버리지 않겠다고 언약하신 그 언약에서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로 머물러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형제 역시 사랑의 관계에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 감정과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만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도 주님의 언약 아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친분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받아야 할 내가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살았음을 아는 믿음으로 만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님과의 언약관계를 아는 신자에게서만 보여 질 수 있는 것입니다.
(50강) 삼상 18:10-21 미움과 시기
<본문>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삼상 18:10-21)
<설교>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자기 영광을 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만을 높여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높아질 때 결국 그것을 참지 못하고 시기와 미움으로 상대방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기와 미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것을 스스로 다스리며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시기와 미움은 내 스스로 작정하고 내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식간에 나타나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시기하겠다’고 마음먹고 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의 대상이 내 앞에 등장할 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기와 미움이 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것을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악한 모습을 발견한다면 스스로 착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가는 나 혼자 있을 때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차를 타고 갈 때 신자들과 함께 동행 할 때와 나 혼자 운전하며 갈 때의 행동이 다를 것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내 속에 있는 포악함을 그대로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착함과 신자 됨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로 인해서 억눌려 있던 악함들이, 누군가 나를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보여줘야 할 대상이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 놓고 자신의 속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결국 착함으로 자신을 위장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온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기와 미움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필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악의 모습인 것입니다. 즉 시기와 미움은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악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기와 미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옳을까요? 분명 시기와 미움을 없애겠다는 것은 허황된 생각일 것입니다. 시기와 미움은 죽어야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을 때 시기와 미움 또한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없앨 수 없는 시기와 미움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없앨 수 없으니까 그냥 그대로 마음 놓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시기와 미움으로 행동하는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신자로서 시기와 미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계략을 사용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인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이 사울에게서 시기와 미움을 발동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누군가가 자신보다 인기가 높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그를 죽이려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가 죽었으면 하는 속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우리입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하는 마음이 이미 그를 죽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지금 우리들 속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인기 있음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 애를 썼던 사울의 그 모습이 그대로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 얘기는 곧 우리 자신의 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10-11절을 보면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악신에 들린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무슨 해를 입힌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히려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만 봤던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을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또 그런 행동을 전혀 한 것이 없는데도 사울 스스로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단의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미움과 시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미움과 시기를 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미움과 시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내 마음대로 결과를 만들어 냄으로 인해서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이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가지고 내 멋대로 온갖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런 생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내고 제 멋대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오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오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내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대우는 받지 않겠다는 생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참지 않겠다는 생각, 나만을 위해 주기를 원하는 생각, 이런 것으로 인해서 항상 쓸데없는 오해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참으로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 역시 마찬가집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해 참지를 못한 것은 다윗 때문에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소외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더 좋아한다는 생각이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만 없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미움과 시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17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딸을 미끼로 해서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는 계략을 세운 것입니다.
어쩌면 사울은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죽이면 백성들의 반발을 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딸을 준다는 것을 미끼로 전쟁터로 보내어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면 자신이 죽였다는 말을 듣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도 성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악은 최후 순간까지 자신만큼은 지키고 보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울의 모든 계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유는 다윗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14절의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게시니라”는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울은 여호와가 함께 하고 있는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였으며 죽이려고 애를 쓴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울의 악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은 다윗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다윗이라는 소년을 바라봤을 뿐입니다. 여인들이 다윗을 높이며 노래하는 것 역시,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승리하게 하셨고 다윗을 세우셔서 일하시고 계심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다윗이 나보다 인기가 높다는 것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미움과 시기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역시 부지런히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나보다 낫고 나보다 인기가 있고 나보다 잘한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른 사이에 미움과 시기가 발생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분명 다윗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높이고 다윗을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다윗에게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승리에서 그것을 봤습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사울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승리를 다윗의 것으로 여겼던 여인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를 부른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사울에게서 시기와 미움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승리에서 하나님을 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셨음을 봤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다윗에 대해 시기하고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골리앗을 두려워했던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신자에게서 보여 질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성령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함께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사울의 모습만 보인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성령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십시오. 모든 일에서 하나님 보기를 부지런히 하십시오. 여러분께 되어진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보다 더 높아지고 인기가 있고 잘난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잘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배후에서 그렇게 만드셨음을 생각하는 것이 성령이 함께한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다윗보다 자신이 더 인기가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왜 내가 높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나고 높아져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시기와 미움 속에 사는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내가 높아져야 하는가?’
사실 내가 높아지고 내가 잘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나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벌레보다 더 못난 존재로 살아가도 할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내 속에 있는 악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 머무른다면 누구에 대해서도 시기와 미움보다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시기와 미움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신 것은, 다윗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저 사람은 잘되게 하시고 나는 못되게 하시는가?’라는 불평을 가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자기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잘되게 하셨다면 그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되게 하신 것입니다. 못되게 하셨다면 못된 것에서 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잘되든 못되든 우리가 구할 것은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나보다 잘 난 사람에 대해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기와 미움의 대표적인 사건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역시 아벨이 가인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가인이 생각할 때 하나님이 자기보다 아벨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벨에 대해 무조건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그 속성이 사울에게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고, 사울의 속성이 우리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습니까? 죽어 버리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그런 마음이 드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혹 내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 영광만을 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세워서 일하고 계심을 보기 보다는 ‘저 사람이 나보다 잘났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잘났다 못났다가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일 뿐입니다. 잘났다 못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구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갔을 때도 그 노래가 통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다만 믿음을 볼 뿐입니다. ‘사울은 믿음이 있고 다윗은 믿음이 없다’ 이렇게만 평가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남이 나보다 더 낫다고 해서 분통이 터질 이유도 없는 것이고 속상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시기와 미움은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인간의 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인기 있는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이 높일 때 기분은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입니다. 목사가 여러분을 칭찬하고 높이고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의식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모습임을 염두에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보며 산다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을 때마다 이런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악한 내가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날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 마땅함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나보다 잘난 사람도 나보다 못난 사람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업신여김이 나오지 않습니다. 시기와 미움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꿈꾸며 항상 하나님 보기를 힘쓰십시오.
(51강) 삼상 19:1-7 사울의 맹세
<본문>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삼상 19:1-7)
<설교>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와 그 목적은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새 생활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나의 모든 소망과 의지를 맡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신으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새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떤 열심과 의지로서 일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린 채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일을 언급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일을 도우시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주장하는 세태입니다. 하나님을 말하긴 하되 하나님의 다스림과 영향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인간의 욕망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있는 신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며 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어렵고 힘든 일에서 단지 심리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믿음은 가시밭길 속에서도 피난처가 되시고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항상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거하는 신자는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모든 상황과 형편이 나를 고초와 고난으로 이끌어 간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보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의미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뿐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의지하고 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 자체는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한다면 먼저 ‘나는 나에 대한 신념을 버렸는가?’라는 물음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사울은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합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은 다윗을 죽이고 싶은 악한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자기 사랑에서 발생하는 열매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신과 연관된 누군가가 자신보다 뛰어나게 되면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미움과 시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람이 나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이 달라져야 하고 말하는 것 성격까지 달라져야 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동에 변화가 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행동의 변화를 가지고 사람이 나아진 것으로 판단하면 곤란합니다. 행동의 변화를 믿음의 결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술을 먹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고서 술을 안먹게 되었습니다. 분명 행동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더니 사람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과연 이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술을 먹다가 끊은 사람들은 모두 성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신자의 달라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리 행동이 달라졌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라면 그는 결코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리 행동이 세상이 알아주는 착한 사람의 것으로 달라졌다고 해도 그것을 두고 ‘사람이 달라졌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행동은 달라졌지만 자기 사랑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시기와 미움은 변함없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울의 달라진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다윗을 심히 기뻐하는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나서게 됩니다.
4-5절을 보면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는 말로서 다윗을 변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극히 잘못된 것임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라는 구절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의 승리에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을 내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지금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한 소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한 소년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신보다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보다 한 인간의 업적을 보면서 자신과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에는 필히 사울과 같은 모습이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 역시 같습니다. 배후에서 일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기 때문에 미움과 시기, 업신여김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함께 포함된 말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뛰어난 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배후에서 그렇게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내가 저 사람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능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6절을 보면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지극히 옳다는 것을 깨닫고 다윗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이것을 믿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 7절의 말씀처럼 다윗을 사울에게로 인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요나단이 사울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면 어떻게 다윗을 사울에게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7절은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 얘기의 마지막 장면으로 끝난다면 참으로 우리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즐거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다윗과 화해하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며 즐거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울의 달라짐을 생각하며 우리도 사울처럼 달라지자는 말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이 다시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자 사울이 악신이 들려 또 다시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창으로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8-10절). 과연 이러한 사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맹세할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우선 요나단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기 위해 거짓으로 맹세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맹세까지 한 사울이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사울은 자기 맹세대로 행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아무리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하나 다윗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자 또 다시 시기와 미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의지와 신념으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수시로 마음을 가다듬고 믿음에 대해 굳은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내가 생각한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수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러한 내 자신을 생각할 때 ‘달라져야’한다는 말은 참으로 공허한 말에 불과할 뿐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8-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의 상태입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미움을 원하고 시기를 원하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고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미움과 시기이며 불만과 불평과 불신앙일 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미움과 시기를 몰아내자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결심을 해야 합니까? 그래봐야 별 수 없다는 것은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 속에는 사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악을 떠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이 선을 안다고 해서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는 바대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말 그대로 천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앎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 의해 지배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끊임없이 인간의 악한 본성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단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미움이 없고 시기가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달라지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인간의 약함과 자기 실체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달라짐’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신자를 도덕군자로 만들려고 헙니다. 믿음이 있다면 달라져야 한다고 하면서 ‘성화’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보여져야 할 성화는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이것을 찾으신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행함이 신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행함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행함에는 위선과 거짓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임을 항상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결심하고 마음먹은 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실망하기보다는 그것이 인간의 악한 본질임을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자는 여호와로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잃지 않기 바랍니다.
(52강) 삼상 19:18-24 사울의 예언
<본문>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고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사무엘상 19:18-24)
<설교>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으로 교회 되는 것이며 교회의 힘은 무엇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로서 교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국 종교집단으로서의 교회 모습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필히 교회의 타락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15절에 보면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모습은 진리의 기둥과 터로 존재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진리가 증거되고 진리가 세워지는 쪽으로 나아가기를 힘쓰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구제를 한다면 구제를 많이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진리가 바탕이 된 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구제에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진리가 담겨 있지 않은 구제라면 그것은 선행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이방인과 교회의 구제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해 보자면 선행으로서의 구제는 나에게 남은 것으로 불쌍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바탕이 된 구제는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구제받은 자로 바라보며 형제에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쓰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같이 나누는 것이며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선심 쓰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의 구제로 살아가는 존재로서 나누는 것이 곧 진리가 바탕이 된 구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으로서의 구제는 ‘구제를 많이 하자’라는 말을 하게 되고, 구제를 많이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이 많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 구제를 많이 하기 위해서 교회가 커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바탕이 된 교회는 ‘구제를 많이 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어떻게 해야 진리가 증거 되는가?’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쪽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앞에서 신자가 행할 것은 복종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종은 진리에 사로잡힌 자들에게서만 보여 지는 모습일 뿐입니다. 진리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들에게서는 복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복종 받을만한 어떤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오직 힘에게만 복종합니다. 그런데 진리는 세상이 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진리에 누가 복종 하겠습니까? 오직 진리에 사로잡힌 자들만이 진리를 알아보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로 인해서 새롭게 세워진 나라인 것입니다. 진리에 복종하는 무리들이 있는 나라,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로 교회되는 것이며 진리가 힘이며 진리를 증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진리에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진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주인이 되어서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또 다시 악신이 들려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의 아내이며 사울의 딸인 미갈의 도움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라마로 도피하여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사울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모두 고하고 사무엘과 함께 나욧으로 가서 거하게 됩니다(18절). 여기서 나욧이란 지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숙소 시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20절에 선지자 무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사무엘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위한 숙소를 가리켜서 나욧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울이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말을 듣자 다윗을 잡기 위해 사자를 보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여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는 말씀을 보면 다윗을 잡기 위해 온 사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들도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시 사자를 보내자 그들도 예언을 하게 되고 다시 세 번째 사자를 보내자 그들 역시 예언을 하게 됩니다(21절). 그러자 네 번째는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을 찾아가는데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도 임하여 그도 역시 예언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23절).
결국 본문의 내용은 다윗을 잡기 위해 온 모든 사람들이 사무엘이 수령으로 있는 선지자 무리들에게 왔을 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자신들이 할 일은 잊어버리고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한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들이 라마 나욧에 온 목적과 자기들의 일과 연관된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 연관된 신령한 말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다윗을 잡으러 온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심지어는 다윗을 그토록 죽이려고 애를 쓰던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일단 우리에게 있을 궁금증은 ‘왜 사울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게 하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한다는 것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면 그 사람은 평소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거나, 좋은 일을 많이 하거나 선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초점을 두는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시겠다고 뜻을 두시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집니다. 인간의 자질이 바탕이 되어서 하나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을 좇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신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울을 얘기하면서 내 안에 사울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곧 사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된 것은 우리의 자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붙드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악신이 들렸던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악함도 다스리며 우리를 붙드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은 사울 한 개인의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그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기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보여줘야 할 나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통치를 받기 원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지금 이스라엘은 ‘사울의 나라’가 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울이라는 사람의 뜻이 중심이 되어 있는 나라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수령이 되어 있는 무리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수령이라고 해도 사무엘의 뜻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는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무리에 다윗을 잡기 위해 온 사울의 사자와 사울까지 합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변화에 초점을 두지 마시고 하나님의 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초점을 두기 바랍니다. 즉 사울과 사울의 사자가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지배하는 나라는 자신의 뜻과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하는 나라라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내 말을 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말을 하게 되어 있으며 이들의 무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곧 이러한 모습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구제하고 봉사하면서 좋은 일을 하기 위한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다스림 받는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 선포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만 제대로 선포되어지면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진리의 기둥과 터로 존재하면 교회로서 부족함도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것 하나로 완벽한 교회이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진리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진리는 교회의 액세서리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진리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다가 돈과 예배당과 사람의 수를 더합니다. 구제를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고, 선교를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파하는 것은 곧 선교하는 것이고 선교를 많이 해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선교를 위해 돈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선교를 안하면 교회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교회가 교회 구실을 하는 것은 선교를 많이 하고 구제를 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고 돈이 많은 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만 선포되고 모이는 신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과 사람의 말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것이 있을 때 교회 구실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진리에서 멀어집니까? 그것은 진리가 돈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내게 해주지 못합니다. 진리가 어려운 사람에게 구제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때문에 진리보다는 돈을 힘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힘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교회는 오직 말씀으로 모든 것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진리인 말씀을 힘으로 삼지 않음으로서 교회는 무너지고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을 발해야 합니다. 말씀이 힘이 되어서 존재해야 하고 말씀만이 나를 지키는 길이요 방법이라는 것을 고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석 교회의 교회됨을 무엇이 지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은석 교회의 교회됨을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진리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은석 교회의 교회됨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예언을 하는 사울의 사자들과 사울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기는 다윗에 대한 시기와 미움으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자신의 일은 잊어버립니다. 시기와 미움도 잊어버리고 예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다스림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욕망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면 그는 자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을 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은석 교회가 과연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은석교회를 통해 보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위태로움은 적은 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돈이 적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태로움은 말씀으로부터 관심이 떠나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교회가 눈에 보일 때, 내 교회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할 때, 외적인 것으로 교회의 조건을 갖추고 싶어 할 때, 그것이 곧 교회의 위태로움이고 부패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싸움은 끝까지 말씀에 거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만약 은석 교회가 세상적인 외적 조건으로 교회를 지키려고 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교회가 아니며 신자도 아닙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 편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소출이 없고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가축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힘있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0-33절)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든 신자든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하늘의 새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들의 꽃도 하나님이 입히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구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있는 것이지 세상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한데 없다고 해서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주실 것이고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보호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든 환경을 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족한 자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다스려지는 것이고 이러한 무리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며, 교회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앞에 서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세상 것을 무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백전백패할 것입니다. 교회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입니다.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의 삶의 목적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십자가로 되어지는 것이지 세상에 보여 지는 선행이나 열심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즉 구제나 봉사 선교 등등의 활동으로 말씀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은석교회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에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감으로써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과 사람의 말을 외치면서 진리보다는 돈과 교회 부흥을 기둥과 터로 삼고 있는 교회 속에 은석 교회가 서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석 교회가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다스려지고 그로 인해서 우리들의 생각을 드러내고 우리들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에 맡기신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만 말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은석 교회가 보여줄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보이지 못한다면 은석 교회는 존재 이유를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단지 기독교에 속한 종교 단체로 전락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교회가 되어지기 위해서 여러분 모두의 마음을 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53강) 삼상 20:1-16 요나단의 생명
<본문>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 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네 부친이 만일 나를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지니 그런즉 원컨대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부친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뇨 요나단이 가로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부친이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부친을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보내어 네게 알게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사무엘상 20:1-16)
<설교>
세상의 인간관계는 가문이나 혈통 출신학교 등등의 여러 가지가 조건이 되어서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같은 성씨, 같은 고향 사람, 심지어는 다른 지방에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지역의 차번호를 봐도 반가워합니다. 이처럼 자신과의 어떤 동질성을 매개로 하여 인간관계가 이루어짐을 생각해 본다면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은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다윗을 잡으러 오자 다윗이 그곳을 피하여 요나단이 있는 곳으로 간 것입니다. 비록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와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했다고는 하나 그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왔는지를 다윗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에게 와서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이려고 하는지 호소를 한 것입니다. 다윗의 호소에 대해 요나단은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2절)는 말로써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것에 대해 부인을 합니다.
요나단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호소했고(4-5절)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걸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기 때문에(6절) 요나단은 그러한 사울의 맹세를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더군다나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라마 나욧으로 간 사울의 일을 모른 요나단으로서는 다윗의 말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아들인 요나단이 슬퍼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일을 숨긴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위기에 대해 호소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을 미리 알아서 다윗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두고 흔히 생각하는 것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다윗이 어려울 때 요나단이 돕는 내용을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 참된 친구라는 교훈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야기를 단순히 친구의 우정에 대한 교훈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정에 대한 교훈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요나단이 다윗을 돕는 것을 보면 사실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요나단이 다윗을 만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해가면서까지 다윗을 돕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의 눈을 속여 가면서 다윗을 돕는 것은 아버지를 배신하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물론 요나단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사울의 행위를 막으려고 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을 보면 요나단은 자신의 집을 다윗의 대적이라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들 즉 자신의 집을 지면에서 끊어버리실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단은 단순히 우정의 차원에서 다윗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정이 좋다한들 친구 앞에서 자신의 가문을 멸망당할 가문으로 얘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나단은 자신의 가문을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멸망의 가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요나단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가문을 그렇게 보는 것입니까? 그리고 다윗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깊은 호의를 보이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요나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사울의 후계자입니다. 즉 사울의 왕위를 물려받을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 받은 자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다윗으로 인해서 왕위를 포기해야 하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요나단도 사울을 도와서 다윗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을 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던 것입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왕이라고 하는 지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요나단에게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은 오직 다윗으로 인해서 주어짐을 알았기에 아버지인 사울을 배신하면서까지 다윗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은 다윗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까? 14-16절을 보면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단은 자신의 집이 하나님에게 멸망을 받을 때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다윗의 집과 언약을 맺는 것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다윗 편에 서서 다윗을 돕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요나단은 왜 굳이 다윗과 언약을 맺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집을 멸망시킬 것을 알고 있었다면 요나단이 직접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나단이 자신의 집을 멸망의 가문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 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왜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받을 모습으로 보게 된 것입니까? 사실 어린 다윗을 죽이는 것은 다만 윤리적으로 악한 행위로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9:5절에 보면 요나단이 사울에게 다윗에 대해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건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건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다윗을 세우셨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요나단에게 있어서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세운 하나님의 택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훼방하는 대적의 모습이며, 따라서 멸망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과 언약을 맺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단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가? 무엇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가?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집을 멸망의 집으로 봤습니다. 때문에 요나단에게 중요한 것은 멸망에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다윗에게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세운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멸망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다윗 때문에 자신의 왕위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만을 생각할 뿐이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세운 택한 사람이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사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고 살아가느냐 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니까 구원받는다는 것만 보십니까? 그러나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구원은 물거품이 되버리고 말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멸망을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멸망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그리스도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멸망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은 멸망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꿈을 헛된 것으로 돌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 말로 참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 멸망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기 때문에 예수는 단지 내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으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교회만 잘 다니면 된다는 잘못된 믿음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요나단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집안은 여호와께 끊어짐을 받는다. 죽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자는 다윗을 통해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다윗 편에 서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는 요나단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에 있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입니까? 아니면 자식입니까? 아니면 교회가 잘되는 것이 관심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멸망 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내가 멸망당하는 순간에 자식이 잘되고 못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식이 성공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을 믿는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멸망을 보지 못함으로써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에 대해서는 별 필요성을 느끼지를 않고 사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어려움에서 자신을 건져주는 인자일 뿐입니다. 이것이 멸망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나단은 멸망을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단에게 ‘너의 집안을 멸망시키겠다’고 특별히 계시를 내려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서 다윗이 누구인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을 대적하는 것이 곧 멸망 받을 모습임을 보는 것입니다. 다윗을 세워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멸망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멸망을 무시한 채 살아갑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살아가지 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이 곧 멸망의 모습임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구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담겨 있는 여호와의 인자가 아니라 세상 것으로 국한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멸망의 존재로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멸망하신다는 것이 우습게 여겨집니까? 그러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것은 그저 종교 하나 갖고 있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고 싶지만 돈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여러분을 흔들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곧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사단의 모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단이 여러분에게 주는 것은 세상에 대한 희망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잘 될 수 있다는 엉뚱한 희망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결국 여러분 자신의 멸망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멸망에서 구하고 살리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인자하심 뿐임을 알고, 그 인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짐을 알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자신의 멸망을 바라볼 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가문의 멸망을 보게 되었을 때 다윗이 곧 자신의 생명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생명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우리를 구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베풀어지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것을 외면하고 어떻게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마음을 예수님께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곧 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말 한마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요나단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직 택한 자 다윗을 세워서 일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나단은 다윗 중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당장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부르신다면 여러분에게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과연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면 무슨 부탁을 하겠습니까? 신자로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마지막 말을 지금 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탁을 지금 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멸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에 대해 깨어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54강) 삼상 20;17-29 요나단의 거짓말
<본문>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너는 사흘을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내가 과녁을 쏘려 함같이 살 셋을 그 곁에 쏘고 아이를 보내어 가서 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편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영토록 계시느니라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섰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으나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 보다 정녕히 부정한가 보다 하였음이더니 이튿날 곧 달의 제 이 일에도 다윗의 자리가 오히려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삼상 20:17-29)
<설교>
성경을 보면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이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창세기에 보면 다말이란 여인이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여 동침하여서 자식을 잉태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말의 이러한 행동을 두고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의 상식은 다말을 어떻게 평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의로운 것입니까? 세상이 볼 때 다말은 인간의 윤리가 무너진 타락한 여인일 뿐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성경이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의와 세상이 말하는 의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다말의 얘기만이 아니라 성경의 얘기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다말이 유다를 속인 것은 분명합니다.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에게 접근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말의 잉태는 유다의 책임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이 자신의 며느리라는 것을 모른 상태에서 동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말과 동침한 자가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창 38:26)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잘못임을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이 창녀로 행세한 책임이 다말을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말은 유다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창녀로 행세하여 유다와 동침을 한 것임을 유다가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그 어디에도 다말의 행위를 두고 그가 시아버지를 속이는 거짓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악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성경은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관이나 상식적인 차원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사고방식과 윤리관, 그리고 기존의 상식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내용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거짓말에 대한 것입니다. 사전에는 거짓말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에게 이것을 믿게 하려고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하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설명대로 하자면 본문의 요나단은 사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지금 요나단은 만약 사울이 진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사울로부터 다윗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가지 계략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것은 월삭에 다윗이 참석을 하지 않았을 때 사울의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월삭에 참석하지 말고 에셀 바위 곁에 숨어 있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반응을 활을 쏘는 것으로 알려주기로 약정합니다.
요나단의 말대로 다윗은 들에 숨어 있고 월삭이 되어 사울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 다윗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기를 다윗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하여 월삭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월삭은 매월 첫날을 가리킵니다. 이때가 되면 상번제와 함께 속죄제를 드려서 한 달 동안 지은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고 새마음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월삭에 사울이 다윗의 참석 여부를 살핀 것을 보면 아마 월삭의 잔치 자리에는 친척 가족들이 모인 것이 아니었는가라는 추측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사위인 다윗도 참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첫날 다윗이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던 사울이 다음날에도 여전히 다윗이 보이지 않자 그 이유를 요나단에게 묻게 된 것입니다.
28-29절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답을 합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형들이 다윗에게 제사를 드리러 집으로 오라고 하여서 자신에게 가도록 해달라는 간청을 하므로 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요나단의 이 말은 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다윗은 지금 베들레헴에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다윗이 요나단에게 그런 부탁을 한 일도 없거니와 베들레헴에서 형들이 그러한 소식을 전한 적도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요나단이 거짓으로 꾸며서 한 말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요나단은 아버지인 사울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1:19절에는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고, 시편 5편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속이는 자를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셨고, 거짓말 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한다는 말씀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는 자는 멸망하는 자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단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분명 성경은 요나단의 거짓말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여러분은 요나단이 선의의 거짓말을 했으니까 괜찮다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다윗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거짓말이니까 하나님도 봐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요나단의 거짓말은 그러한 얘기로도 얼마든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일, 또는 남을 위한 거짓말은 괜찮다는 정당성을 하나 만들어 내게 될 뿐입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어떤 이유, 어떤 목적에 상관없이 요나단의 말이 거짓말이냐 아니냐라는 답을 내리는 것입니다. 분명 세상의 기준으로 하면 목적은 선하다 할지라도 거짓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말도 어쨌든 거짓말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저는 오늘 요나단의 말이 거짓말이냐 아니냐라는 것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거짓말이 뭔가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짓말이 뭔가를 바르게 이해를 하면 요나단의 말이 거짓말이냐 아니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답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드리는 말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윤리관과 상식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상식으로 존재하는 나라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다른 나라,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새로운 나라의 상식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생각이 아닌 성경의 말씀을 토대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여러분의 생각으로 제 말을 듣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요한일서 1:6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요한일서 2:4절에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역시 2:22절에서는 거짓말 하는 자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일서 4:20절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성경이 무엇을 거짓말로 보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구절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거짓말은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지만 그 모두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거짓말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거짓말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거짓말입니까 참말입니까? 적어도 그 말을 하는 당사자로서는 진심어린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느냐 사랑하느냐를 묻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것을 원하고 세상 것을 위해 살고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한다면 그 역시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이 말하는 거짓말은 말을 가지고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보다는 삶과 말이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은 형제를 미워하는데 미움에서 사랑이 나올 수 없으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사랑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역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30:6절에 보면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거짓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데, 이 구절이 말하는 거짓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말을 더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지 아니한 바를 말하고, 하나님이 말씀 한 것에 다른 것을 더한다면 그 모두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여러분의 말이 거짓말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여러분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여러분이 의지하고 힘으로 삼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무엇 하나 잘한다고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우리 속에는 형제에 대한 미움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 저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망해야 할 부끄러운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이 참된 말이 될 것입니다.
결국 거짓은 자신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데서 발생합니다. 반면에 참된 말은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 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면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거짓된 말은 하지 않게 됩니다. 인간에게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만한 행위가 나올 수가 없는데 어떻게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요나단의 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요나단의 말은 다윗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으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서 자신의 생명을 봤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죽는다면 그것은 곧 요나단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는 것은 곧 자신이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나단은 사랑하는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것입니다. 아비를 배신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닥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33절에 보면 사울이 요나단에게도 창을 던지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서 증거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거짓말한 것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다는 말이 요나단의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요나단은 거짓말한 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남을 속이는 것 자체를 용납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속일 때는 목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지요. 십계명의 아홉째 계명에서도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는 것이므로 결국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에게서 과연 참된 것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거짓이 가득합니다. 악이 가득합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참된 것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참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이 참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요나단처럼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실 되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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