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스크랩] 사무엘하 강해 1

공 상희 2009. 5. 6. 13:50

 

 

 

 

 

 

 

사무엘하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1강) 사무엘하 1:1-16 사울의 죽음과 두 사람


<본문>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제 삼 일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저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저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다윗이 자기에게 고하는 소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에게 고하는 소년이 가로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보니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병거와 기병은 저를 촉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이 그 고한 소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사무엘하 1:1-16 )

 

 

 


<설교>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행동합니다.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상대방의 입장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너는 죽어도 나만 살면 된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인간성에서 오늘 우리 자신들도 무관하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도 전혀 거리낌을 가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까지 이러한 인간성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이러한 인간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스스럼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고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입장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손에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에서 양 팔에 못이 박히우고 피를 흘리며 매달려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세상 살기 힘드니까 도와달라는 말을 합니다. 내 일이 잘 안되니까 잘되도록 해달라는 사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매달려 계시는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봅니다.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가 봅니다.

 

 

 

 

현대인의 신앙은 사실 십자가에서 너무 멀어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입술은 십자가 밑에 있는지 모르나 그 생각이나 마음이나 몸은 십자가에서 동떨어진 채 세상과 벗하며 살아간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자신의 죽음은 전혀 보지 못하고 단지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에만 치중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잘 보여서 이익을 얻을 궁리에만 치중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실지, 또한 그 결말이 어떠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장은 “사울의 죽은 후라”는 말로써 시작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신 다윗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소식을 듣게 된 과정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어쨌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한 원수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울이 죽었다는 것은 다윗에게는 기쁨이 될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잘 죽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더니 벌 받았구나’라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울의 죽음을 애통해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다윗의 이같은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다윗과 다르게 사울의 죽음을 이용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다윗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문에서 사울의 죽음을 놓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두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친 후에 시글락으로 돌아와서 이틀을 유했을 때 사울의 진에서 나온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옷은 찢어 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다윗은 이 사람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5절)라고 묻습니다.

 

 

 

 

그 사람, 즉 아말렉 사람은 자신이 사울을 만나고 죽이게 된 과정을 말하면서 그 증거물로 사울의 면류관과 팔찌를 다윗에게 보여줍니다(10절). 그러나 사무엘상 31장의 사울이 죽은 내용을 보면 아말렉 사람의 말은 분명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사울의 면류관과 팔찌를 어떻게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어쩌면 사울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 면류관과 팔찌를 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지 아말렉 사람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면서 자신의 사환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을 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말렉 사람은 무엇 때문에 다윗에게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다윗에게 뭔가 보상을 얻기 위해서 사울을 죽였노라 거짓말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말렉 사람은 자신이 한 거짓말로 인해서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윗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한 거짓말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잃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같은 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에서 무엇을 배우십니까? ‘거짓말을 하지 말자’라는 가르침을 배우십니까? 그러한 교훈은 교회가 아니라도 세상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복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직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즉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보다 더 차원 높은 의가 있고 그 의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생각할 것은 아말렉 사람의 거짓말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 속사람을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속사람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를 살펴보고 다시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죽음을 자신이 한 일로 말하는 그 속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말렉 사람의 속셈은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의 이익이 중심입니다. 즉 사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신이 득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이 사울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같은 것은 아말렉 사람에게는 관심 밖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로부터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을 알지도 못 했을 뿐 더러 알 필요도 없었던 것이고 설사 알았다고 해도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렸을 것입니다. 사실 개인적 유익을 놓고 본다면 사울이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말렉 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윗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6절에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아말렉 사람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수 있는 문제로 인해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의 죽음을 두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꾀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울이 죽었다면 기뻐할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름부음 받은 사울을 죽였다는 이유로 아말렉 사람을 죽입니다.

 

 

 

 

물론 다윗은 예전부터 사울이 기름부음 받았다는 이유로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는 죽일 수 없다 하더라도 사울이 죽은 것으로 기뻐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아말렉 사람처럼 자신의 이득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사울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를 엿볼 수 있고 행여 우리에게 아말렉 사람과 같은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아말렉 사람과 같은 신앙의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꾀하려고 한 사람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울의 죽음의 배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사울의 죽음을 자신의 공로로 이용해서 다윗에게 어떤 보상을 받으려는 목적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 하되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과 같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에 중점을 둘 때 여호와께서 세운 사람이라는 것은 도외시 하고 단지 자신의 득을 보려고 하는 것이나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되 예수를 이용해서 자신의 득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아말렉 사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죽인 이유의 중심에는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다윗은 사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볼 때 우리는 다윗이 참으로 선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발버둥을 친 사울인데, 그런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춤을 춰도 시원찮을 판에 자기 옷을 잡아 찢으면서 저녁때까지 슬퍼하며 울면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이 단지 선한 사람이고 마음이 좋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끝날 문제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다윗의 이런 마음을 본받자고 하고 지나쳐도 될 문제입니까? 여러분이 아셔야 하는 것은 아말렉 사람으로 하여금 사울의 죽음의 소식을 가지고 다윗에게 가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다윗의 선하고 착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하신 일이겠습니까?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것은 단지 사울에 대한 인간적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사울이 기름부음 받지 않았다면 예전에 벌써 다윗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막은 것은 살인하면 안된다는 양심 문제가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죽인 이유도 단순히 사울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아말렉 사람의 죽음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19절의 다윗의 노래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라고 애통해합니다. 사울의 죽음을 이스라엘의 영광의 죽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불릴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사울을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부르는 것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기름 부어 세우신 것은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서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기름부음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지를 않고 아말렉 사람처럼 자신의 영광과 이득을 봤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여호와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울의 죽음에 애통해 하는 것도 역시 여호와의 영광과 그의 거룩하신 이름이 다윗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나오는 애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을 다윗 앞에 세우셔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자기 이득을 위해 사는 사람과 오직 여호와의 이름과 영광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의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영광이 중심인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득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속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시고자 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속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20절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는 말을 합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님의 영광이 바울의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나 죽으나 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목적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 신자의 존재됨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존재 의미를 무엇에서, 어디에서 찾으시겠습니까? 세상의 영광과 세상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얻는 것이 존재의미입니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삶의 의미입니까? 그것은 신자가 아닙니다. 아말렉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윗에게는 여호와의 영광만이 관심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여호와의 영광과 그 이름만이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렇게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나의 이득을 생각하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이득을 위한 그 어떤 수단과 방법과 도구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다만 못난 우리를 예수님께 붙들어 놓는 능력이며, 세상만 보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신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위해 운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 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우리의 울음은 온통 나의 영광과 이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손해와 자존심 때문에 우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총선을 마치고 세상은 웃는 자와 우는 자로 구별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울든 웃든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영광, 자기 이름과 연관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영광 때문에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애통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아말렉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과 영광 때문에 나를 두고 애통해 하는 그가 바로 신자입니다. 이러한 애통이 여러분을 생명의 길에 있게 할 것입니다.

 

 

 

 

 

(2강) 사무엘하 1:17-27 다윗의 슬픈 노래


<본문>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같이 됨이로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너의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사무엘하 1:17-27 )

 

 

 


<설교>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는 자식이기에 자연히 자식의 성품과 그 행동을 통해서 부모가 어떤 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식이 못되다고 해서 부모 역시 못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자식이 잘못 행동함으로써 부모에게 그 욕이 돌아간다는 것을 자식의 입장에서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일 것입니다.

 

 

 

 

이처럼 자식이 부모를 나타내고 보여주는 입장에 있다면 신자 역시 하나님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입장에 있는 존재로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세상에 선포하고 드러내는 ‘증거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 의미이기 때문에 신자인 여러분은 이 존재성을 잊어버리지 않고 여러분의 삶의 하나하나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소홀히 한다면 신자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문제만 내어 놓고, 자신의 문제 해결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나의 문제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갈 뿐 그리스도의 증거자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보여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외시 한 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있어야 할 싸움을 포기한 채, 나아가서 아예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것 자체를 버린 채 살고 있는 무능력한 신자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본문의 다윗의 노래입니다. 본문은 아말렉 사람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죽음에 애통해 하면서 부르는 ‘다윗의 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대해 이토록 애통해 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요나단이야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고 다윗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일들이 많았기에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연 애통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죽음에까지 노래를 지어 부를 정도로 애통해 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단순히 다윗의 마음이 좋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사울을 죽였다고 자처한 아말렉 사람을 죽인 것은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귀한 사울을 죽여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구별하여 세운 여호와의 사람을 죽인 것 자체가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었기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에 애통해 하는 것은 사울을 향한 마음이라기보다는 여호와를 향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울을 세우신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활 노래’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라는 것이 무기를 말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면 용맹한 군사가 쓰러진 것에 대해 애통하는 노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절 뒤에 보면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두 용사가 쓰러진 것으로 노래하며 애통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문제는 사울이 과연 용사라는 말을 들을만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사울의 전적으로 보면 전쟁터에 용맹을 드러내고 싸움에서 승리한 내용은커녕 오히려 다윗을 쫓느라고 시간과 힘을 소비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울을 다윗은 용사로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단순히 듣기에 좋은 말로 사울을 용사로 불러주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윗을 사울을 실제 용사로 봤던 것입니다. 그리고 용사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애통함의 이유는 다른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0절에 보면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찌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을 가드나 아스글론, 즉 이방인들이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용사의 죽음의 소식으로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이방인들이 승리의 노래 부르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까? 그것은 이방인들의 승리의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3:4절에 보면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이 본문에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이러한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믿음과 사랑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수밖에 없기에 믿게 되는 것이고, 사랑할 수밖에 없기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붙들렸기 때문에 믿음이 있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데 믿음이 들어와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데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깨달았기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긍휼의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중심에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중심에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즉 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로 산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로부터 조롱받는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애통해 했던 것입니다.

 

 

 

 

지금 저는 종교적 자존심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를 욕하기에 화를 내는 그런 수준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욕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기에 마음이 아픈 것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나의 행동과 나의 선택이 조롱을 받는 것으로 분노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이방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자신의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을 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조차 돌보지 않는다는 조롱을 내 스스로 내 뱉고 있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자로 살아갈 때 내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하나님의 원수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서 이방인에게서 하나님이 모독 받는 것으로 애통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의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문제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 곧 내 스스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가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문제에서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믿으면서 담대히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 세움 받는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용사인 것입니다. 용사로서 용사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용사답게 살아가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인의 조롱거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찌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사울로 인해서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입게 되었고 금 노리개를 옷에 장식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면서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왕을 구한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사울을 슬퍼하며 울라는 것은 결국 왕을 구한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입히고 금 노리개로 장식하게 해준 사울이야 말로 왕다운 왕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왕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심판하심으로써 사울 개인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사울을 선택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울은 자신들을 잘살게 해주는 왕이었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용사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슬픔과 다윗의 슬픔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슬픔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슬퍼하게 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우는 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자로 전락한 나로 인해서 애통해 하고 슬퍼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세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세상의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슬퍼하는 것입니까?

 

 

 

 

27절에 보면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싸우는 병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병기는 스스로 싸우지 않습니다. 용사의 손에 붙들려서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도구가 망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애통해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군사요 하나님의 의의 병기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병기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6:13절에 보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여러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전부인 자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존재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한 병기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하나님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애통해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 때문에 슬퍼하며 애통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여러분의 슬픔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3:28절에 보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며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신앙이란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고난으로 슬퍼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이 가신 길을 그들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장차 자신의 것을 버리지 못해서 주님이 가신 길을 가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슬퍼하고 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신 길을 갈 수 있기를 위해서 울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날 위해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울음, 애통함은 주님 가신 길을 가지 못하는 나를 보고 울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해서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길로 가는 나에 대해 아파하고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의의 병기로 드려져야 할 내가 오히려 죄의 병기로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애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는 자도 사랑하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냥 숨을 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숨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 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강) 사무엘하 2:1-4 여호와께 묻는 다윗


<본문>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한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사무엘하 2:1-4)

 

 

 


<설교>

 

여러분에게 현실적인 문제는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은 이 물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문제는 자신의 육신과 연관된 세상의 모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먹고 사는 문제, 자식 문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박한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부도나기 일보 직전인 회사의 노동자들에게는 국회의원 선거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북한 용천의 폭파사고도 관심거리 밖일 것입니다. 일단 내가 살아야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에 도움이 될까 해서 신을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의 현실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현실에서 벗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그 내면에는 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현실에 하나님이 도움을 주실 것을 기대하는 욕망이 자리하기도 합니다.

 

 

 

 

목사에게 현실적인 문제는 교회일 것입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제를 내 걸고 많은 일을 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목사에게 교회는 목사의 이름과, 자존심과, 힘과, 명예를 갖게 해주는 하나의 통로이며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목사가 교회로부터 자유로와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 = 하나님의 일이라는 공식에 의해서 목사 개인의 욕망이 가려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형편, 또는 하는 일에 따라서 현실적인 문제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매우 급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이 곧 현실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현실이 편안하기를 원하고, 뭔가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제가 먼저 이처럼 ‘무엇이 현실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시작하는 것은 본문의 1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었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찌니라성경을 보면 다윗처럼 여호와께 묻고 행동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지시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여호와께 묻는 자로 살아가십니까?

 

 

 

 

이 질문이 여러분을 많이 난처하게 할 것임을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 묻는다고 해서 본문에서처럼 답변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때로는 구약의 성도들을 부러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지금은 볼 수 없는 많은 기적을 직접 체험했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백성들이 잘못한게 있을 때는 수만 명씩 죽기도 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쨌든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은 하나하나 답변하시면서 가야할 길을 지시하십니다. 반면에 지금은 아무리 물어도 하나님은 대꾸 조차 하지 않습니다. 일상 생활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혼자 묻고 끝나버리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에 대해 별 신빙성을 두지 않게 되고 관심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의 경우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물을 때 답하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이것을 할까요 말까요’라고 물을 때 ‘하라’든가 ‘하지 말라’라는 답을 직접 하신다면 얼마든지 물으며 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물어도 하나님은 답을 하지 않으시고 현실에 변화도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물어야 할 필요성을 상실되게 한 것입니다. 비록 묻는다 할지라도 묻는 것이 신앙이라는 생각에서 다만 형식적으로 묻는 것으로 그치는 것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처럼 묻고 답하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행하는 것은 구약 때의 신앙의 모습이지 지금은 아니니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넘어가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께 하나님은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얘기를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잘 아십니다. 또 그렇게 믿고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음성으로 말씀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물었을 때 답은 이미 성경 말씀 안에 있다는 얘기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 묻고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듣는 것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도 멀어져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말씀에서 답을 얻고자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여러분이 묻는 것에 대한 답이 성경에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원하는 답, 얻고자 하는 답에 대해 성경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서 원하는 답을 듣지를 못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묻는 물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여러분께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현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은 우리의 현실에 대해 말씀하고 있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현실에 대해 말씀하겠습니까? 답은 분명 후자입니다. 애당초 우리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그 무엇 하나도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요일에 욥기서를 공부하면서 바닷물이 땅을 덮지 못하고 일정한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도 하나님이 막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추궁하는 38-41장의 내용을 보면 온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간섭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즉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현실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현실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가 원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여러분의 자녀가 어느 대학을 가야 할지, 어느 직장에 들어가야 할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무슨 장사를 해야 할지, 무슨 일을 해야 돈을 잘 벌 수 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병들었을 때 어떻게 하면 병이 낫고, 어떻게 해야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이유는 그러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현실일 뿐 하나님의 현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나에게 현실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이것을 다윗의 물음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먼저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라는 물음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묻는 것이 더 신앙적인 것 같은데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라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올라갈 곳을 자신이 미리 정하여 놓고 ‘갈까요 말까요’라고 묻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 물음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아는 자의 물음입니다. 삼상 22:5절에 보면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유다로 가라고 지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7장을 보면 다윗은 결국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던 시글락을 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의 땅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다윗이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라고 기도한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지시를 두고 ‘지금 갈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묻게 된 동기입니다. 다윗이 유다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결국 유다로 가지 않고 블레셋 땅으로 피한 것은 장차 사울에게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현실에 자신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블레셋 땅으로 간 것입니다. 이때 다윗에게는 사울에게 쫓기는 것만이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유다로 보내시고자 하는 것은 이미 관심 밖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이 지금은 유다로 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결국 그 동기는 하나님이 다윗이 거한 시글락을 친 일과,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그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취할 행동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실인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단지 자신의 입장에서 눈앞의 상황들을 바라본다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지는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게 하십니까?’라는 불만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 불만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아무런 불만도 원망도 없습니까? 오직 되어진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살아가십니까? 다윗이 여호와께 물었다면 그것은 다윗의 신앙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묻고 행하는 자로 만들어 가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린 세상의 모든 일을 나에게 해가 되고 득이 되는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생각보다는 이 일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며 살아갑니다. 나의 일만을 생각할 뿐,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물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수많은 일들을 동원하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드시기 위해 일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묻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수고하시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낮추시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여러분의 문제를 현실로만 보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되신다면 일이 잘 안되는 것을 현실로 보지 마시고 일을 안되게 하는 분이 계심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그러한 사태가 있게 하시는 것은 나의 마음을 낮추시고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사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현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이 보이십니까? 보여야 합니다. 만약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여러분의 육신의 유익과 연관 지어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적유익을 위해 일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돕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길을 막으시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벗어날 때 강퍅한 그 마음을 돌이키시기 위해 하나님은 수많은 사건들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느낄 수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다윗에게 유다로 가라고 하신 것처럼 여러분께 하나님은 천국을 향하여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국을 향하여 가는 존재라는 신자의 주체성을 수시로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세상 속에 자신의 길을 곧게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태반입니다. 이러한 우리 마음을 돌이키시기 위해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있고 천국을 조금이나마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드신 일이 있습니까? 사는 것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에서 하나님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마음으로 낮추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 천국을 향해 살아갈까요?’라고 물으십시오. 그 물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실 다윗은 이미 유다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유다로 갈까요’라는 물음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신자는 천국을 향해 가는 존재임을 알기에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있느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데 다윗은 이미 받은 지시를 두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다기 보다는 확실한 하나님의 뜻에 거하기 위해,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 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천국을 향하여 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세상을 보지 않고 천국을 향해 가는 신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낮아진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가 마음을 다른 곳에 두게 될 때 하나님은 여러 일을 통하여 그 마음을 돌이키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날마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하나님 오늘도 천국을 향해 나아갈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답을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4강) 사무엘하 2:4-7 다윗의 첫 번째 통치


<본문>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가로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음이니라 (사무엘하 2:4-7)

 

 

 


<설교>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께 묻는 다윗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사무엘과 요나단이 죽은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두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즉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서 행동해야 할 바를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다윗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린 대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까? 아니면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두고 궁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다윗이 여호와께 묻는 것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까?’를 두고 묻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께 묻는 것은 어색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주변을 둘려 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음 깊이 깨달으십시오. 그럴 때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 살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 묻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증거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묻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야 말로 ‘유다 한 성으로 갈까요’ ‘가라’ ‘유다 어디로 갈까요’ ‘헤브론으로 가라’는 다윗과 하나님의 대화에 일치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을 위해 주워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라는 반발을 하기 보다는 ‘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라는 인정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결국 내가 행할 수 있는 것만을 스스로 고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어떤 것이든 우리의 힘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대치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내 손에 있는 것은 내 소유로 여기고 내 소유된 것은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조금 떼어서 없는 사람에게 주라’는 식이 아니라 ‘네게 있는 것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내 것을 네게 잠시 맡겼을 뿐이니 없는 자와 나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본성으로 이해하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부담을 갖기 보다는 그것이 정당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갈 수 없는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곧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날마다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묻는 다윗이 그의 첫 번째 통치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4절에 보면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사울을 장사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첫 번째 그의 통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한 것은 예전 사울이 자신들을 암몬 사람의 손에서 구원해준 일과(삼상 11:6-11)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베스 사람들의 이 일이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에 대한 반역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모르면 모를까 안다면 섣불리 사울의 시신을 장사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의 시신을 장사한다는 것은 다윗의 미움을 살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가 여러분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 잘 대해준다면 그 사람에게까지 적대감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본성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다면 그들에 대해 분노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가로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5-6절)라는 말로 그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첫 번째 통치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가 어떤 모습을 담고 나아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울이라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반발을 가졌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딸인 미갈이 사울을 속이고 다윗을 도망하게 한 일에 대해 분노한 적이 있습니다(삼상 19:17). 그리고 사울이 월삭이 되었을 때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다윗을 죽일 계획을 세웠으나 요나단으로 인해 무산되었을 때 요나단에게 노하며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 이라고 합니다. 그때 요나단이 다윗을 변호하자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삼상 20:30-34). 이러한 사울에 비해 다윗은 사울을 장사한 야베스를 오히려 축복을 했다는 것은 사울이 통치한 나라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아갈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1장의 애가에서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21절)는 말을 합니다.

 

 

 

 

사울이 죽은 것을 사울의 방패가 버린바 된 것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사울을 곧 방패로 여기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방패로 이해하다는 것은 사울의 왕으로서의 역할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왕이 희생하고 섬겨야 하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의 역할인데 이 방패가 깨어진 것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왕으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보여진 통치 행위가 사울처럼 자신의 원수를 도와준 자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이고 역할인 것입니다.

 

 

 

 

왕으로서의 다윗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의 방패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참된 섬김과 봉사를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의 왕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왕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벽하게 증거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섬김과 봉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통치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에 다스림 받아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에게 다스림 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다스림 받으며 산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거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어떻게 여러분을 통해 증거 되어진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주님의 섬김과 봉사를 보이는 것으로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우리의 악한 본성을 따라 행하는 것이 참으로 많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그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지 않는 것처럼, 신자된 우리 역시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우리를 신자로 세우신 그 뜻과 신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다만 우리의 당리당락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울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그것은 하나님이 신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맡기신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본성으로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비록 우리 모두에게는 옛 본성이 살아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섬김과 봉사 아래 다스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들이 악한 것임을 깨닫고 주님의 성품이 나와질 수 있기를 소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에 대해서든 주님처럼 섬김과 봉사로 대하고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노래하는 다윗의 그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죽음으로 기뻐하고 홀가분해 하면서 이제 자신이 왕이 되는 것만 남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사울이 죽은 것으로 애통해 하는 그 마음이야 말로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십니까? 주님의 봉사와 희생과 섬김 아래 살아가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통치를 받고 산다면 그것은 우리에게서도 주님과 동일한 마음이 보여져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라고 반발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신자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다스림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통치의 모습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우리의 악함과 못남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애통해야 할 문제이지 할 수 없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간과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장소에 있는 나라로서 단지 막연하게 상상만 하는 추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신자의 삶에서 보여지고 증거되어야 할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지 못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 여러분 앞에 낮은 자를 세우신 일도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낮은 자를 보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낮아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야베스의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스스로 사울을 죽였다고 한 아말렉 사람을 죽인 것과 대비됩니다. 당시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죽인 것은 사울을 죽인 살인죄라기보다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다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베스의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한 것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선대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보고 그들을 축복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이 살아계셨던 것, 이것이 하나님께 통치 받는 다윗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음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앙이란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을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상식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다윗의 첫 번째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흔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흔적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흔적이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그 심령이 가난한 심령이고, 그 심령으로 사는 것이 곧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여러분의 심령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가를 배우고 깨달아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로 세움 받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간과한 채 교회로 모이면 결국 인간의 사업적 수완만이 교회에 난무하게 될 뿐입니다. 뭘 해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결과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에 있습니다. 이점을 깊이 명심하면서 교회로 모이십시오. 여러분이 모여서 무슨 일을 한다 할지라도 이것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교회란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증거하는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교회임을 말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에서든 여러분 개인의 감정이나 생각, 또는 입장을 주장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가운데는 섬김받고자 하는 사람은 한분도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로지 섬기지 못해서 안달이고 섬기지 못한 것으로 애통하는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낮아진 심령으로 모인 천국인 것입니다.

 

 

 

 

 

(5강) 사무엘하 2:8-17 두 세력


<본문>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더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비로소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 사십 세며 두 해 동안 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 해 여섯 달이더라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서 기브온에 이르고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이는 못 이편이요 저는 못 저편이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저희가 일어나 그 수효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둘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둘이라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사무엘하 2:8-17 )

 

 

 


<설교>

 

인간에게 있어서 힘은 항상 강한 유혹으로 존재합니다. 힘없는 나약한 존재로 사는 것보다는 강한 자로 존재함으로써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누르는 것에서 쾌감을 가지는 것이 인간의 본래 성품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성품으로 살아가게 된 배경에는 선악과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자연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공짜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자기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가 없기 때문에 힘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힘은 소유에서 나옵니다. 소유한 자는 강한 자로 존재하게 되고 소유하지 못한 자는 무능하고 약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입니다.

 

 

 

 

교회가 큰 교회 작은 교회로 인식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교회는 단지 교회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는 큰 교회 작은 교회로 구분하여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를 세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는 교회가 교회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 작은 교회로 분리되어 보여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의 본성의 바탕에는 소유, 즉 건물과 숫자 등을 기준으로 하여 크고 작음으로 구분하는 의식이 깔려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물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듯, 교회 역시 그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습니다. 목사의 소유도 장로의 소유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모이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어느 곳에서는 많이 모이고 어느 곳에서는 적게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이 모이는 것을 자신들의 공로로 여깁니다. 우리가 전도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적은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들보다 무능한 교회로 여기고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면 되는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게 하시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입니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을 그 나무를 보면서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등장하여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뭔가 되보고자 하는 포부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악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인간의 포부와 야심들이 서로 부딪히는 현장입니다. 인간의 포부와 야심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싸움이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서로가 더 큰 강자가 되려고 합니다. 내가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누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 속에 세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투쟁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하고 실패하는 약자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조용히 십자가에 죽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몸담고 있는 존재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합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으로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여기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셨고 어떤 모습을 보이셨고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우리의 모든 시선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애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라고 이름 하는 우리들에게서도 세상처럼 힘을 추구하고 싸우고 투쟁하는 모습들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악함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유다 족속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8,9절을 보면 아브넬이란 사람이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족속의 왕으로 세웁니다. 결국 같은 민족들 안에 두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존심과 명예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에서든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식은 공부를 못하는데 내가 잘 아는 다른 사람의 자식이 공부를 잘할 때 괜히 자기 자식을 향해 화가 나기도 합니다. ‘너 때문에 내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도, 봉사를 할 때도 자칫 경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경쟁과 싸움이며 시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러한 본성으로 살아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우리의 본성이 십자가 아래 다스려져야 마땅한데 정작 우리 자신은 우리의 악함을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악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나의 잘함이 곧 신앙인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좋은 신앙을 스스로 만들어 냄으로서 남들보다 나아 보이고 우뚝 서기 위해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교회의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내에 두 왕이 발생하고 두 세력이 존재하게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이 어느 왕국을 인정하시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함을 보고 인정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악함과 못남을 보지 않으시고 부르셨음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택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감사함과 은혜와 자비를 보고 모이는 신자라면 세력 다툼과 경쟁은 없을 것입니다.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없기 때문이고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신복들과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이 길르앗을 못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됩니다(12,13절). 그리고 아브넬이 요압에게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라고 제안을 하게 되고 이것을 요압이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서 양쪽에서 열 둘씩 등장하여 각기 적의 머리를 잡고 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이는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싸움이 시작되고 결국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에게 패하게 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브넬은 왜 이러한 제안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아마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쪽은 겨우 유다 한 지파입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이 왕이 된 쪽은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입니다. 세력으로 계산하자면 이스보셋 쪽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넬은 처음부터 다윗 편을 무시했을 수 있고, 결국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한 제안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힘의 과시는 결국 큰 싸움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우리는 본문의 이런 내용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본심이 본문에 그대로 묻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두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서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힘의 대결이고 힘으로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이러한 힘의 구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들이 교회로 모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서도 힘으로 인한 경쟁과 파당과 싸움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쉽게 보여지는 대표적인 파당은 목사와 장로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를 옹호하는 세력과 장로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구축되어 파당으로 형성되게 되고 결국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견제하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석교회라고 해서 절대 예외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한 파당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싸움이 아직 없을 뿐이지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 어울려서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싸움과 파당으로 갈 소질을 갖고 있는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며 약자로 오신 예수님 바라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결코 파당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바리새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을 모을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을 갖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세력도 갖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또한 때릴 때 그냥 맞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는 한마디로 무능하고 쓸모없는 예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분을 영접하고 믿고 있음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가지 않으면서 주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피의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믿음의 본질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 어떤 세력도 존재할 수 없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세력이 존재한다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세력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력도 용납하고, 지고, 양보하는 자로서의 세력일 뿐입니다. 이점을 잊어버린다면 참된 교회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 세력은 누가 더 강한가를 두고 겨루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국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힘이 더 센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관심에서 벗어난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을 비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앙을 경쟁의 도구로 삼거나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되고자 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신다면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것이든 그것이 도구가 되어서 타인을 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됨을 아셔야 합니다.

 

 

 

 

저 사람보다 잘해 보겠다는 것도 상대방을 이기겠다는 투쟁 의식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만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힘이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잊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세상의 세력에 의해 죽으셨음을 생각한다면, 힘있는 자로 교회에 존재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을 해하는 것임을 안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사셨는가를 돌아본다면 힘있는 자로 살기보다는 믿음이 있는 자로 살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모습이고 이러한 신자들이 모이는 곳에 천국의 모습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은석교회에서는 과연 이러한 천국의 모습이 보여 지고 있습니까?

 

 

 

 

 

(6강) 사무엘하 2:18-29 복수심


<본문>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같이 빠르더라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가로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내로라 아브넬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쳐서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치우치기를 원치 않고 그 뒤를 쫓으매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의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가 기아 맞은편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떼를 이루고 작은 산꼭대기에 섰더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아브넬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사무엘하 2:18-29)

 

 

 


<설교>

 

타 종교의 소위 경전이라는 책들을 보면 모두가 듣기에 좋은 내용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가르침으로 망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성경을 보면 때론 ‘이런 내용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성경’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내용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약의 서신서들이나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는 이방인들도 많이 애용하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가령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이나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나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문구 자체만으로도 누구든 하나의 교훈과 덕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들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고 사도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모두 자기들의 상식과 도덕을 기초로 하여 해석해 버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런 교훈적인 내용들이 성경에 걸맞다는 생각을 우리 역시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에서 말하기를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불교의 가르침이 같은 부분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말씀들을 자신들의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조차 ‘성경의 가르침이 타 종교와 같은 부분이 많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도 도덕적 이해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구약의 내용들은 많은 혼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창녀로 변장을 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을 하는 내용이나 소위 사랑의 하나님으로 불려지는 하나님이 이방인들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려지는 이스라엘조차 범죄했을 때 순식간에 몇 만 명씩 죽이는 것을 예사로 해버리는 이 일들을 과연 우리들의 도덕적 기준에 맞는 내용들입니까? 그래서 ‘같은 부분이 많다’고 말하는 불교도 구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문구상으로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내용들 몇 가지를 말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이 같다’는 말을 하면서 기독교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받고 불교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받으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기독교도 서서히 인정을 하는 분위기라는 것에 대해 신자로서 크게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깊고 바른 이해입니다. 우리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시각에 맞추어서 성경을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깊으신 마음을 깨닫기 위해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런 내용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의문을 가질 정도로 아무런 교훈도 가르침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 패로 갈려져서 서로 싸우는 내용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떠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것입니까?

 

 

 

 

보시면 알겠지만 구약은 그냥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사람들이 이방인과 부딪히며 살았던 이야기나 이스라엘이라는 자기들 민족 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남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 그들 얘기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과 우리가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의 잘못됨과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의 이야기도 ‘너희도 이렇게 살지 않느냐?’라는 외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두 세력의 계속되는 싸움의 내용입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아브넬과 다윗 편에 있는 요압이 서로 싸우게 된 내용이었는데 17절을 보면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한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18,19절을 보면 요압에게 아비새와 아사헬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발이 들노루 같이 빠른 아사헬이 싸움에 패하여 도망을 치는 아브넬을 뒤쫓아 가는 것으로 본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패한 사람을 기어코 죽이겠다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싸움에서 패해 도망을 치는 아브넬을 그토록 집요하게 죽이려고 쫓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요압과 그 형제들이 다윗과 함께 사울을 피해 다녔던 것에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사울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고, 그것은 자연히 사울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넬에 대한 개인감정 이라기보다는 아브넬이 사울 쪽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아브넬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화풀이이며 복수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곧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아하 우리가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예외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구 한 사람 복수심이 없이 사는 분이 있습니까?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안에서는 미움과 복수심이 어우러져 불일 듯 일어남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아벨에 대해 분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받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너 때문에’라는 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본성이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우리들 속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급차를 보면 괜히 흠집을 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고급 아파트에서 떵떵거리며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불이라도 나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며 고생을 한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또한 사울 쪽에 대해 원한을 가진다면 요압의 형제들보다는 다윗이 더할 것입니다. 다윗은 직접적인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를 않았습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미움도 복수심도 없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나중에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죽인 것을 보면 다윗 역시 우리와 동일한 악한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울을 죽이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살려준 데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다윗의 미움과 복수심을 다스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다윗과 함께 사울에게 쫓기며 고생을 한 배후에 하나님을 계셨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고생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울에게 있다는 것만 생각하게 될 것이고 결국 원한과 미움만 자리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아브넬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이 일을 있게 하셨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신자로서 옳은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물의 주관자로 일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이 마음이 미움과 복수심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머리털 하나까지 세고 계신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존재를 감히 누가 자신들의 뜻대로 해할 수 있겠습니까? 혹 그들 뜻대로 신자를 해롭게 하였다면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는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가면서 깨달아야 될 우리들의 숙제인 것입니다.

 

 

 

 

나는 돈이 없는데 저 사람은 돈이 많다는 것만 생각하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리게 됩니다. 돈 많은 자가 이웃을 도울 때에도 ‘돈 많은 것 자랑한다’는 식으로 고깝지 않게 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살아간다는 인생의 원칙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돈을 가지지 못한 것이 돈 많은 사람들의 탓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입술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게 됩니다. 20,21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가로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내로라 아브넬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쳐서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치우치기를 원치 않고 그 뒤를 쫓으매”라는 내용을 보면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자신을 쫓는 것을 그만 둘 것을 간청합니다.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는 것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말고 소년을 잡아 그 군복을 뺏는 것으로 대신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넬도 아사헬이 자신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쫓아오는 것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브넬의 요구를 거절하고 계속 쫓던 아사헬은 결국 아브넬에게 죽게 되는 것입니다.

 

 

 

 

아사헬이 죽자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을 산꼭대기까지 추격을 합니다. 아사헬까지 아브넬에게 죽었으니 복수심이 더욱 커졌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요압에게 아브넬이 이렇게 외칩니다.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27절) 요압의 말은 칼로써 보복을 하는 것은 서로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뿐이며 같은 형제를 쫓는 것이니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아브넬의 말을 듣고 쫓기를 그만두고 다시 싸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미워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이 곧 나의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미움이 있고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가 미워하는 그가 바로 나의 형제라는 사실부터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형제 되게 하신 관계에 함께 있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형제란 서로 싸우고 미워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관계입니다. 그런데 형제라고 하면서 미움과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도덕적인 면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는 신앙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에 묻어나옵니다. 교회에서의 어떤 행위를 가지고도 신앙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가식적인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요압과 그의 형제들은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됨으로써 모든 고생이 끝난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생은 지나간 것으로 여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하는 것은 고생했던 세월들이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사울만 아니면 편히 살 수 있었는데 사울 때문에 고생한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사울쪽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요압과 그의 형제들은 다윗의 신복들입니다. 다윗을 따라다니면서 다윗이 사울에게 어떻게 행했는가를 보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행하는 것은 다윗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윗의 신복으로 다윗을 따라 다녔으면서도 다윗을 배우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는 다윗의 마음은 다만 다윗의 마음으로 남겨 버리고 자신들은 자신들의 마음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런 수준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소위 예수님의 제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것을 보고 배우는 위치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고, 예수님의 것이 내 것으로 되어져야 제자답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되 예수님을 배우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예수님의 것으로 여겨버리고 우린 우리의 삶을 따로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라 하면서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는 제자는 참된 제자가 아닙니다. 다윗을 따랐으나 다윗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미움과 복수심을 드러낸 요압의 형제들처럼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나 예수님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예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지 못한 채 날마다 나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놓아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개입된 인생임을 아셔야 합니다. 지나간 세월 고생했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고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고생이 끝나고 편한 삶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에게는 ‘누구 때문에’ 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뜻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내 소망과 원하는 것이 훼방을 받고 무너진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 때문’ 이라는 미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린 다시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애매하게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은 결코 세상에 대한 복수를 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항상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살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악한 우리의 본성입니까? 함께 형제된 관계에 있으면서 싸우고 경쟁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여 누군가에 대해 미움이 있고 복수심이 있다면 인생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어진 것임을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앙이 악한 본성인 미움과 경쟁과 싸움과 보복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교회를 다니는 교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는 예수님의 제자로 남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7강) 사무엘하 3:1-5 강성과 쇠퇴


<본문>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사무엘하 3:1-5)

 

 

 


<설교>

 

본문은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1절)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5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여 동안 다스리면서 여섯 아내를 통하여 여섯 아들을 보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다윗의 아들들을 소개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다윗이 강성하여 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강성하여 가는 동안 사울의 집에 남은 자는 왕으로 세움 받은 이스보셋과 4:4절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라고 말한 것처럼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전부인 쇠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강성하게 된 것은 다윗이 나라를 잘 다스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여 세웠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에 다윗은 강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울의 집은 하나님의 택한 존재가 아니기에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의 강성함으로 인해서 교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신앙인 것이며 겸손인 것입니다.

 

 

 

 

물론 현 시대에 있어서 외적인 강성과 쇠퇴를 두고서 선택과 비선택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잘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고 못사는 사람은 선택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시각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여부를 외적인 강성과 쇠퇴를 기준으로 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만큼은 잘사는 사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두고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극히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지체가 힘들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세상적인 것을 풍족히 누리는 것을 복으로 가르친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나라로 등장합니다. 이 택한 나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증거는 결국 가시적인 것으로 선포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택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세상에 드러내고 성취하시기 위한 도구로 이스라엘을 택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기 위해 가시적인 것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가시적인 증거물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벽히 계시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가시적인 것을 동원하셔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강성과 쇠퇴의 의미를 오늘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강성과 쇠퇴를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시대에서도 강성과 쇠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쇠퇴함보다는 강성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강성이 쇠퇴를 이기는 것이고 강성이 쇠퇴를 다스리는 구조와 질서에 세상에 놓여 있기 때문에 다스림 받는 것보다는 다스리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는 인간의 탐욕이 강성을 소원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강성하게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쇠퇴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강성이든 쇠퇴든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인생이 강성한 자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쇠퇴한 자가 되었다고 해서 심판을 받는 것도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강성이든 쇠퇴든 사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사는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인생이 강성해져야 할 당위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기 위해서는 강성해져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쇠퇴했을 때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받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강성해져야 한다는 구실을 붙이기도 합니다. 말은 그럴싸합니다. 쇠퇴한 모습에서 무시를 받는 것보다는 강성한 모습에서 세상의 부러움을 사게 되고 그들에게 ‘내가 이렇게 강성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전하고 증거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성함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하나님을 찾아 나올까요? 신자된 우리는 바로 이점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강성이든 쇠퇴든 그것은 신자에게 맡겨진 역할일 뿐입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탤런트들이 동원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저마다 다른 역할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왕의 역할, 신하의 역할, 일반 백성의 역할, 또는 가장 밑바닥인 종의 역할 등, 이러한 모든 역할자들이 자신의 역할에서 열심히 연기함으로써 한편의 드라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좋은 역할, 즉 왕이나 장군과 같은 신분 높은 것만을 요구한다면 분명 드라마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불신자이면서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이 주신 역할자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세상에 악한 자들, 불신자들을 그냥 놔두시는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드라마에서 악인을 등장시키는 것은 착한 사람의 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처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증거되기 위해서는 분명 악인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불신자의 강성함에 대해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쇠퇴함에 대해서도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지혜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즉 강성이든 쇠퇴든 그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일 뿐이라는 이유 때문에 강성하게 된 자는 절대로 쇠퇴한 자를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강성과 쇠퇴를 함께 존재하게 하는 것은 강성케 된 자가 자신의 강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강성한 자가 자신의 강성함을 자랑하며 쇠퇴한 자를 무시하고 억압한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에게 있어서 강성함은 오히려 그를 심판하는 도구가 되어질 뿐입니다.

 

 

 

 

역할은 역할일 뿐, 역할이 그 사람을 크게 하거나 작게 하지를 못합니다. 마태 복음 11:11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는 크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세례 요한은 큰 자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즉 세상의 사람들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처럼 크다 일컬음 받는 것은 그의 일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맡은 역할입니다. 그 역할로 크다 일컬음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요한도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보다 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천국의 백성들이 작은 자 큰 자로 구분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진정으로 큰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13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구약의 마지막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즉 율법은 요한까지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은 십자가의 은혜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요한에 비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된 그가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과 우리를 두고 누가 큰가를 비교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크다 일컬음 받는 자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것으로 강성하고 큰 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강성하게 되어 있고 이 세상은 점점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택함 받지 못한 사울의 집이 결국 멸망을 하게 된 것처럼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이 아무리 외적으로 강성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강성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인생이든 세상이든 기존의 시각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가 강성한 나라로 이미 이 세상에 임하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5:10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강성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의 강성 역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그 근거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신자의 강성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외적의 강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강성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강성함이 세상을 위협하지도 굴복시키지도 못하는 것이기에 우리 스스로 외면해 버릴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세상의 것으로 강성하게 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강성하게 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잔뜩 안고 말입니다. 신자는 신자가 어떤 존재인가부터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말하고 믿음을 고백해도 세상의 것으로 힘을 삼고 외적인 강성함을 꾀한다면 그것은 신자의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길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었습니다. 절대로 외적인 강함이나 세상의 것으로 강성해지는 길이 아님을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은 원하나 예수님이 사셨던 삶에 대해서는 밀쳐내는 식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분명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는 실패요 쇠퇴의 길입니다. 누구에게든 환영받지 못할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좁은 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두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성과 쇠퇴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조건과 형편을 힘으로 삼고 자랑하거나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형제들을 업신여기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강성과 쇠퇴라는 것이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그것 자체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나라입니다. 그처럼 강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신자는 강한 자로 큰 자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강성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강함으로 여러분을 증거하거나 자랑하려고 하지 마시고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자랑거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세상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기에 세상의 것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강함이라는 것이 왜 별 것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존재로서 결코 쇠퇴할 수 없음을 생각하십시오. 이처럼 하나님만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날마다 강성한 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바라볼 때 여러분은 심령은 갈수록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8강) 사무엘하 3:6-11 아브넬의 교만


<본문>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을 통간하였느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히 여겨 가로되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대답지 못하니라 (사무엘하 3:6-11)

 

 

 


<설교>

 

인간에게 있어서 힘과 권세는 언제나 큰 유혹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힘과 권세만 있다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힘과 권세가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힘과 권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으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영생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세상에서 힘과 권세가 되지 못함을 알기에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힘과 권세가 되어주는 것을 향해 날마다 달려가는 삶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은 모두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유혹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때로는 하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보다는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누리지를 못한 자신이 못나 보이고 그것이 마치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은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아비의 첩을 통간한 일로 인해 책망을 합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비난한 것은 단순히 사울의 첩을 통간하였다는 윤리적인 면이 아니라 왕의 첩을 차지함으로써 왕의 권세보다 자신이 더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왕의 첩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왕의 첩을 차지한다는 것은 아브넬의 권세가 왕도 무시할 만큼 커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보셋도 아브넬의 커진 권세를 염두에 두고 비난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에 대해 분히 여기면서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8절)는 말을 합니다. 아브넬의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네가 지금 다윗에게 죽지 않고 왕이 되어 있는 것은 모두 내 덕분인데 그것을 모르고 까부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2:8-9절을 보면 이스보셋은 아브넬에 의해서 왕위에 올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보셋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넬은 공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왕위에 세운 공신이라 할지라도 왕의 권세에 도전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넬을 경계하기 위해 그의 행위를 문제 삼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넬 편에서 보면 다윗에게 붙들리면 죽어야 할 사람을 왕으로 삼아 주었는데 그 공을 모르고 자신의 행위를 문제 삼는 이스보셋이 괘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한 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9절)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한 내용은 10절에 기록된 대로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러한 맹세를 하신 내용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약속이 아브넬이 지어낸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아브넬의 교만입니다. 아브넬의 교만이 무엇인가는 9절의 내용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아브넬은 ‘여호와께서 맹세한 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라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여호와께서 맹세하신 것을 이루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죽지 않고 왕이 된 것도 모두 자신의 공로라고 말합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같은 것은 당장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과 권세를 가진 자의 사고방식이며 하나님을 멸시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주관 아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까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아무리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물을 흘러가게 할 수도 없고 들에 꽃 한 송이 피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세상의 힘과 권세라는 것은 하찮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힘과 권세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이 있다면 내 위에 힘있는 분이 존재하심을 알아야 하고, 권세가 있다면 내 위에 권세 있는 분이 존재하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한다 해도 그것은 내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워서 하신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 공로로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겸손이며 이 겸손이 있는 자가 참된 신자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잊지를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예배당에 어떤 물품을 기증했다고 합시다. 자연히 다른 사람보다는 그 물품에 대해 아끼려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자신의 행함이 담겨 있는 물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물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기증한 물품에 대한 애착으로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아브넬과 같은 사고방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심을 잊어버린 채 마치 내 힘으로 사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구제 했다면 ‘하나님이 나의 손을 통해서 가난한 자의 쓸 것을 나누게 하셨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내가 구제했다’는 생각에 빠진다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가난한 자의 쓸 것을 공급하기 위해 내 손에 맡긴 것이라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때문에 구제를 했을 때 그 행위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내가 너에게 구제를 했으니까 너는 나를 잘 대접해야 한다’는 악한 생각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사단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내 수중에 있는 것으로 누군가를 도왔다 할지라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세워서 하신 일이라는 이 생각에서 한치도 벗어나면 안됩니다. 이 생각이 여러분을 겸손에 머물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자의 겸손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에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여러분께 이러한 열매가 보이는지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여러분이 누군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라는 생각에 대한 반응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에게 잘해 줬는데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섭섭한 마음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사실 이것까지 초월해야 할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께 섭섭한 행동을 한다면 가장 먼저 그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세워서 이렇게 하신 뜻이 무엇일까? 이것을 생각한다면 자연히 섭섭함은 덮어질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손으로 한 것은 있다 할지라도 그 손은 하나님께 주장된 것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주관하시고 생각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넬에게는 이러한 겸손이 없었습니다. 모든 일이 자신의 힘과 권세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사울의 집을 다윗에게 주는 것까지도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있습니까? 물론 돈이면 원하는 것은 다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돈 역시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돈은 하나님에 의해 여러분께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노동을 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다니게 하셔서 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이만큼 벌었다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건강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결코 ‘내가 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날마다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믿는 겸손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9강) 사무엘하 3:12-16 다윗의 아내


<본문>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다윗이 가로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 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저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사무엘하 3:12-16)

 

 

 


<설교>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사실에 대해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세상을 잠시 머물렀다 떠날 곳으로 보게 되면 사실 세상의 짐이라는 것은 없게 될 것입니다. 고생을 한다 해도 잠시 동안의 것으로 여겨진다면 인내할 수 있을 것이고, 풍족히 산다고 해도 그 역시 잠시 동안의 것으로 보게 된다면 풍족함을 의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단지 하나의 희망사항으로만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그네로 사는 것은 희망사항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이루어야 할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인생은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또 그런 삶이되기를 원하면서도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지를 못할까요? 그것은 끊어버릴 수 없는 우리의 육신 때문입니다. 육신이 있기에 욕망이 발생하고 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지 못한 우리의 욕망은 육신을 벗을 때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한 욕망을 끊어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끊으라 해도 끊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욕망을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욕망을 끊어버릴 수 없는 육신을 벗는 날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부터 구출하여 육신을 벗어 버리고 영광된 몸으로 덧입고 살아갈 그 날과 그 때를 기다리고 사모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여러분의 욕망을 다스릴 것이고, 세상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벗는 날을 사모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것으로 마음껏 육신을 치장하고 싶은 욕망에만 머물러 있으니 신앙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가신 후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은 우리의 육신을 벗어 버리고 영광된 몸을 입고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날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마치 소풍갈 날을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마음이 설레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그 날을 기다린다면 이런 마음이 되어지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세상을 살면서도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부르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를 신부로 삼으신 예수님이 이제 불러주시고 혼인잔치에 이끄실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첩인 리스바를 통간한 아브넬을 이스보셋이 책망을 하자 아브넬이 분노하여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로 옮겨 버리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스보셋은 이러한 아브넬의 협박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아브넬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권력이 없다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있는 자가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는 모든 자가 약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강자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이기에 모든 사람이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자, 권세 잡은 자를 보면서 거기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 역시 힘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억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도 힘을 소유해서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신자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12절에 보면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아브넬이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어 사울의 땅을 넘겨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아마 사울의 땅을 다윗에게 넘겨주고 대신 자신의 위치를 보장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13절)고 말합니다. 아브넬과 언약을 하는 대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올 것을 조건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에게 사자를 보내어 자신의 처 미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스보셋이 미갈의 남편인 발디엘에게서 빼앗아서 다윗에게로 돌려보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을 어떻게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비록 미갈이 예전에 다윗의 아내였다 할지라도 지금은 엄연히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깨버리고 다시 예전의 부부의 관계로 돌이키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의 행위를 두고 우리는 ‘다윗이 옳으냐 그르냐’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우리의 상식과 도덕으로 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본문을 절대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우리의 상식과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두가 하늘의 일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일을 세상의 상식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역시 도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도덕으로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하늘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미갈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절에서는 그 이유를 ‘전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는 말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미 나와 정혼한 여자라는 것입니다. 정혼한 여자이기에 신부로 삼겠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죽은 후에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울의 첩인 리스바이고, 또 하나는 사울의 딸인 미갈입니다. 두 여인 모두 사울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죽자 한 여인은 아브넬이라는 힘에 의해 짓밟힙니다. 그러나 다른 한 여인 미갈은 다윗의 아내라는 신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운명으로 들어가게 된 두 여인을 통해 오늘 우리들의 운명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기 위해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고 하면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요구합니다. 그러 다윗은 양피 일백을 사울에게 주고 미갈을 아내로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5:44절을 보면 사울이 미갈을 발디엘에게 주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미갈을 발디엘에게 준 것은 다윗에 대한 미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원래는 다윗의 아내였으나 사울에 의해 발디엘의 아내가 된 미갈이 다시 다윗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장차 우리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혼자였던 미갈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아내로 되찾습니다. 비록 자신의 아내라고 해도 지금은 이미 남의 남자의 아내가 된 미갈입니다. 그럼 미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정혼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을 예수님으로 비유한다면 미갈은 바로 예수님의 신부로 부름 받은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무엇을 말해주는 내용인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미갈이 비록 다윗과 정혼한 신분이지만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정혼한 몸으로서 다윗과 함께 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신자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고 있는 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윗이 미갈을 찾지 않았다면 평생을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갈처럼 신자 역시 예수님이 찾아주지 않으신다면 그 운명은 세상과 함께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언약대로 자기 신부를 찾으실 것임을 본문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미갈이 다윗의 아내로 다시 회복되는 것은 정혼이라는 언약 때문입니다. 한번 다윗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미갈이 어떤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다윗의 아내라는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한번 부름 받은 예수님의 신부라는 위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불변성 때문에 신자의 구원은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신실성, 불변성이 우리의 미래를 굳게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으면 됩니다.

 

 

 

 

믿음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부답게 신랑을 위해 뭔가 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미갈이 다윗에게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갔을 뿐입니다. 미갈이 다윗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내라는 신분을 사모하면서 그 신분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쓴 것이 아니라 다윗이 미갈을 기억하여 불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이 미갈에게는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불러주고 아내로 삼는 다윗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바로 이 고마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갈의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자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 스스로를 예수님의 신부답게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정결을 지키며 신부로서의 깨끗함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그런 자부심을 드러내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나의 신랑이 누구인가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리고, 내가 누구와 정혼한 신부인가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사랑스러운 것들을 마치 남편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 버림받아도 사실 할말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와 정혼하신 것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신부로 정혼한 자들을 부르시고 혼인잔치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대로 우리의 행함이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언약이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28절에 보면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언약은 피로써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 언약으로 인해 여러분이 예수님의 신부로 부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처지나 행실로서는 도저히 구원을 바라볼 수도 없는데 피로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다면 분명 세상에서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예 잊고 사는 것과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면서 장차 주어질 복된 신분을 사모하며 사는 삶이 같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치우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처지가 미갈이었으며 그런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피의 언약의 고마움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의 처지가 어떠함을 깨닫고 장차 신랑으로 다시 오시며 신부된 우리를 불러주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졸지에 아내를 잃어버린 미갈의 남편 발디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6절에 보면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고 말합니다. 울면서 미갈을 따라온 것을 보면 미갈을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다윗에 의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오실 그때는 세상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깨어질 것입니다. 오직 다윗의 신부와 세상의 사람으로만 남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십시오. 세상은 의지할 것이 없으며 또한 잠시 머무는 나그네로 사는 곳임을 잊지 마시고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신자가 영원히 거할 곳은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예수님이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실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10강) 사무엘하 3:27-30 다윗의 저주

 
<본문>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사무엘하 3:27-30)

 

 

 

 

<설교>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에는 그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드러내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마음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나마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인물의 행위에는 세상의 통속적인 생각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보여집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행동 역시 한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찌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찌로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윗이 요압을 저주하는 말로써 그 저주는 요압의 가문 전체의 몰락을 의미하는 아주 심한 저주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저주를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요압의 인간적인 깊은 관계 때문입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보자면 요압은 다윗의 자매인 스루야의 아들입니다(대상 2:15-16). 즉 다윗의 조카로서 혈육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하여 떠돌아 다닐 때 오랜 세월을 다윗과 함께 하면서 다윗을 도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관계에서 보자면 요압은 멀리 할 수 없고 저주 또한 할 수 없는 친분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압을 다윗이 크게 저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우리에게 증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요압을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저주하신다’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매우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압 같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압이 무엇 때문에 저주받았는가를 안다면 하나님께 저주 받을 자가 누군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그것으로 매일 우리 자신을 살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압이 다윗에게 저주를 받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의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바칠테니까 자신과 언약해 달라고 한 내용에 대해 기억할 것입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과 사울이 속해있던 배냐민 지파의 장로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설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윗을 찾아왔을 때 다윗은 아브넬과 함께 온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면서 호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돌아오게 되고, 다윗이 아브넬이 왔을 때 그를 후히 대접하고 돌려보낸 일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러자 요압은 다윗을 찾아가서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24,25절)는 말을 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브넬을 그냥 보내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대접하고 그냥 보낸 것에 대해 요압이 불만을 보인 것은 아브넬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감정 때문입니다. 결국 요압은 아브넬에 대한 복수심을 참지를 못하고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데리고 오게 하여 헤브론 성문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다윗이 듣고 요압을 저주하게 된 것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아사헬에 대한 복수심이 담겨 있습니다. 30절에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내용은 단순히 복수를 금지하는 내용일까요? 그리고 다윗이 요압을 저주하는 것은 ‘누구든 복수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까? 물론 성경은 복수를 금지 합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복수를 금지하는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것은 단지 도덕으로 흘러가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요압에 대해 저주하는 것은 요압의 행위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요압처럼 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처럼’이라는 말이 요압의 복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 ‘복수하면 저주 받는다’는 주장이 되버리면 항상 복수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버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헤브론’이라는 성에 있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헤브론으로 데리고 와서 그 성문에서 죽였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저주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1:13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 자손에게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헤브론과 그 들이요” 라고 말합니다. 즉 아브넬을 죽인 헤브론 성은 여호수아가 아론 자손에게 준 ‘도피성’이었던 것입니다. 도피성이 어떤 성인지 기억하십니까? 민수기 35장에는 도피성에 대한 규례가 나와 있습니다. 도피성은 살인자를 위한 성입니다. 하나님은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했을 때 그 누구도 복수할 수 없는 규례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민 35:25-28절에 보면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즉 살인자는 도피성에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죽은 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헤브론 성은 그 누구도 복수를 행할 수 없는 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헤브론 성에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저주를 받는 이유이며, 따라서 누구든 도피성에서 복수를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선포하기 위해 세워진 성입니다. 비록 살인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아래서는 그의 모든 죄가 가려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피성을 이스라엘의 곳곳에 세워 놓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복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도피성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요압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모른다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모른다면 그는 결국 저주 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것입니다. 긍휼을 말하고 자비를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아래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여러분께 도피성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여러분의 관계에서 없어야 하는 것은 복수입니다. 나에게 해를 입힌 자에 대한 복수, 미움, 시기 이러한 것은 예수 안에서는 용납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해를 입힌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과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복수심으로 산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과 긍휼을 모른다는 것이 되고 사랑과 긍휼을 모른다면 그는 저주 아래 있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복수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멸시하는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저주를 받는가?’라는 물음을 이 말씀을 토대로 답을 내려 본다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물어야 할 것은 ‘주를 사랑하십니까?’입니다. 이 물음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을 교회에 대한 봉사나, 종교적인 열심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전혀 잘못된 믿음에서 헤매게 되고 쓸데없는 짐을 지고 허덕이는 경우가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과 섬김, 사랑과 긍휼로 인해서 멸망에 처해야 할 내가 생명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하는 그것이야 말로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감사가 이론과 관념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있음이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 사랑 역시 형제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형제 사랑은 긍휼과 자비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긍휼과 자비로 만나기에 미움이 없고, 시기가 없고, 복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형제 사랑입니다. 그런데 복수가 있고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주를 사랑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저주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은 수직적인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이웃은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형제에 대해 복수심을 가지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인간을 미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아래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의 삶에 중요한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의 저주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은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우리가 받을 수 없는 큰 사랑과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가슴에 생명으로 살아있다면 여러분에게서는 사랑과 긍휼이 나와야 합니다. 사랑과 긍휼이 이웃을 향해 전해져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누가 저주를 받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면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아래 있는 자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11강) 사무엘하 3:31-39 다윗의 지도력


<본문>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가로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착고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사무엘하 3:31-39)

 

 

 

 

<설교>

 

지난 시간에는 동생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헤브론성에서 죽인 요압이 다윗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요압의 행위에 대해 저주를 한 것은 단순히 살인죄에 대한 저주라기보다는 헤브론 성, 즉 도피성에서의 악한 행동에 대한 저주였습니다. 도피성은 살인자가 피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규례를 세워 놓으신 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살인자까지도 살리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인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도피성 규례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에서의 복수 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부인한다는 것은 말로써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입술로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나 그 행위가 입술의 고백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 신자다’고 여기고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입술의 고백은 있지만 그 행위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함께 모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정신에 부합된 길을 가야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내 스스로 나의 고백을 뒤집는 삶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끊임없이 나 자신이 요압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고 살피며 점검하는 삶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증인으로 부름 받은 신자로서 증인다운 삶을 위해서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에 부합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자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고집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왕 다윗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요압의 형제가 강한 세력을 가진 자로 군림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신하입니다. 그런데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환송해준 다윗을 찾아와서 다윗의 어리석음을 말하면서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요압은 자신의 힘과 세력을 믿고 다윗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대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왕인 이스보셋을 대하는 태도와는 같지 않았을지라도 왕에 대해 경시하는 마음은 있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왕에게 그러한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나도 힘이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랜 세월 다윗과 함께 하면서 그를 도와줬다는 자신의 공로가 앞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요압은 다윗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었다면 요압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환송하여 보내준 아브넬을 다시 붙잡아서 죽인다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과도 같은 것인데 다윗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어찌 그런 악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두고 다윗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까요? 왕이 왕다운 강력한 지도력을 보이지를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니까 신하인 요압이 다윗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였다고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을 이방 국가와 같은 존재로 본다면 다윗의 지도력을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해 많은 문제를 삼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힘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존재 방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고 은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 나라는 힘의 나라입니다. 힘으로 존재하고 힘있는 자가 군림하도록 되어 있는 힘이 질서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방 나라는 힘있는 자를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은 오직 힘에 대해서만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방나라의 왕은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으로 힘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역시 힘이 질서인 힘의 나라입니다. 힘이 국가를 통치하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력이 없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요압과 같은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이스라엘은 힘의 나라가 아니라 은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할 나라로 세워진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있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화하여 지배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을 때 다윗은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28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혹 요압의 죄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염려하여 발뺌을 하는 의도의 말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 앞에서 무죄한 자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다윗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다윗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인 것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살려준 것 역시 항상 여호와 앞에서 무죄한 자로 살기를 힘쓰는 다윗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즉 지도자는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힘있는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왕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국가이며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의 왕의 역할은 백성들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 사회에서 말하고 요구하는 지도자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떤 단체든 그 단체를 이끌기 위해서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카리스마’라는 말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란 용어는 본래 기독교적 용어로서 ‘은혜’ ‘무상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거두어 가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저 베푸신 은총의 선물을 뜻하기도 하는 말입니다. 즉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활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를 독일의 사회과학자인 M.베버라는 사람이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확립시켜 버린 것입니다. 즉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뛰어난 재능이나 힘을 이렇게 부름으로써 카리스마를 뛰어나고 힘있는 자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서 은연중 타인을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 주어질 때 그를 ‘카리스마’있는 사람으로 말하면서 스스로 그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도자에게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서도 ‘카리스마’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강한 지도력으로 교회를 이끌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질서가 있고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목회자란 교인들의 중심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목회자가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목회자에 대한 복종보다는 무시가 나오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요압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외적으로 보면 교회가 질서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현대 사회가 이해하는 그러한 카리스마적인 힘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을 권력으로 복종케 하고 강포로 다스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오직 ‘나와 내 나라’즉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무죄하기를 힘썼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배 법칙인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나타내기에 힘썼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에 요압 같은 자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요압은 도피성에서 복수를 행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지 않은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힘으로 사는 사람은 약자에 대해서는 자신의 힘을 내세우려고 하고, 강자에 대해서는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악행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힘없는 약한 자인 다윗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힘없는 약한 왕이라고 해서 무시하면서 마음껏 불평하고 복수의 감정을 드러내며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요압이 문제입니까?

 

 

 

 

왕이기 때문에 강력한 통치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강력한 통치력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강한 통치력이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에게 제어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사울을 살려준 다윗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중심이 있지 않다면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사울을 죽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단지 사람 좋은 다윗으로만 보여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환대하고 보내준 것은 둘로 나누어진 나라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워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아브넬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우선되어졌기에 아브넬을 환대하고 돌려보낸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압은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먼저 앞세운 것입니다. 아브넬과의 감정적 관계에서 다윗의 행위를 보니 불평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다윗에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따라 행동하는 요압은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과 같은 존재가 오늘날 교회 내에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그들이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요압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관심사가 아니기에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대해서도 복종할 의도를 전혀 갖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이 복음을 기초로 한 것이라면 그 말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주인 되신 예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의 말이 복음에 일치되는 것인가에는 상관없이 다만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불평을 하고 반대를 한다면 그것이 곧 요압 같은 모습이고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만나는 관계가 유지될 때 교회다움이 증거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윗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죽은 사건으로 인해 백성들이 혹 자신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요압과 백성들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고 지시한 후에 아브넬을 장사하고 그를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음식을 권했을 때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35절)고 하자 다윗의 진심을 알게 된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36-37절)고 하게 된 것입니다. 온 백성이 다윗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를 신뢰하고 그의 말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목사는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무죄하다’는 다윗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순전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이 중심이 되어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굳게 설 때 말씀 안에서 만나는 관계가 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때로 어려운 것은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운 요압과 같은 존재가 있을 때입니다. 말씀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참으로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지도력은 힘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그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목사의 카리스마이고 여러분의 카리스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해보인다고 해서 무시한 것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는 약한 모습의 예수님이셨지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잘난 것이 전혀 없는 악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강력한 통치력으로 여러분을 제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이런 신자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로 살아가는가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제어하는 강력한 힘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복음에 의해 제어 받고 살아가는 그가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신자인 것입니다.

 

 

 

 

 

(12강) 사무엘하 4:5-12 레갑과 바아나


<본문>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저희가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상 위에 누웠는지라 저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사울이 죽었다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소년들을 명하매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사무엘하 4:5-12)

 

 

 

 

<설교>

 

사람이 누군가에게 아부를 하려고 할 때에도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그가 기뻐하는 것을 선물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거면 좋아할 것이다’라고 제멋대로 생각하여 행동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지도 못한 채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는 레갑과 바아나라는 두 형제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틈을 이용하여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서 다윗에게로 가져갑니다. 삼하 1장에 보면 다윗에게 자신이 사울을 죽였노라고 말한 아말렉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다윗에게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이유나 오늘 본문의 두 사람이 실제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사실을 다윗에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유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환심을 사서 자신들의 안락을 꾀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들의 결말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도 우리가 주지해야 할 부분입니다.

 

 

 

 

8절에 보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때문에 그는 단지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면 다윗이 좋아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레갑과 바아나는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을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를 갚으시기 위하여 자신들로 하여금 이스보셋을 죽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자기들의 왕인 이스보셋을 죽인 것은 이스라엘에 희망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아브넬이 요압에게 죽은 상태입니다. 1절을 보면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스보셋은 손맥이 풀렸다고 말합니다. 팔에 힘이 빠진 것입니다. 또 온 이스라엘도 놀랐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넬은 이스라엘에게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있는 중심인물이 살해를 당하니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과 바아나는 이스보셋을 죽이고 다윗에게로 가면 환대를 받고 그곳에서 편히 살 수 지낼 수 있을 것으로 계획하고 이스보셋을 죽인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행위가 다윗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원수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죽였으니 다윗도 기뻐하면서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다윗의 분노와 죽음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가에 대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레갑과 바아나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누구인가를 몰랐고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몰랐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윗이 비록 사울에 의해 쫓겨 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사울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준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 사람을 죽인 것이고, 이스보셋을 죽인 레갑과 바아나를 죽인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나라가 무엇을 용납하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자기들 방식으로 다윗을 기쁘게 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많은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레갑과 바아나처럼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우리들 방식을 고집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내에서도 ‘이것이 주의 일이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들 있지만 그것이 레갑과 바아나처럼 우리들 방식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설치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주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모르고 교회의 영광스러움이 무엇인가를 모를 때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많은 교회가 말하는 대로 예배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니 예배당을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한다면 먼저 생각할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예배당을 지어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고 기뻐하시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예배당을 지어 바치는 것인데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우리들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당 짓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필요하면 지을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는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예배당 짓는 일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하나님을 파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와 연관된 일이라고 해서 아무것이나 하나님의 뜻 인양 빙자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의 목을 들고 다윗에게로 간 것은 세상의 인간들이 어떤 마음과 어떤 목적으로 예수를 찾아 나오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빈손으로 다윗에게 올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앞날을 위해 다윗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었기 때문에 다윗이 좋아할 만한 것을 들고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보셋의 목이었습니다. 사울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이니 이스보셋을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주는 것이고 사울에 대한 원수 갚음도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무엇을 들고 옵니까? 예수님의 마음에 들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기뻐할만한 것을 들고 가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생각하는 다윗과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이 전혀 달랐던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나의 생각과 다른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기존의 나의 생각이 깨어져야 참된 복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면밀히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유대인식이라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섬김의 방식은 예수님에 의해 철저히 부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행함에 열심이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둘도 없는 이단자로 낙인찍히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신앙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행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부정해 버리니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노가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신앙이 좋다고 여기십니까? 모든 것을 교회와 연관하여 판단하지 않습니까? 교회 일에 열심이면 신앙이 좋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유대인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만큼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애쓴 민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열심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심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고 내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열심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열심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 좋습니다. 열심히 봉사하시고 충성하십시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열심의 대가를 마음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시되 그 열심조차 아무것도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열심이 오히려 여러분을 삼켜 버리게 될 것입니다. 신자의 열심은 오직 주님을 향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이 되시는 주님에 대한 열망이 곧 열심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내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만을 드러내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자기 열심을 가지고 다윗에게 나아간 사람입니다. 빈손으로 가면 다윗에게 환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것을 가지고 가야겠다는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공로를 버리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발상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공로는 인간의 종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정성을 가지고 신에게 나아가면 신이 나의 정성에 감동해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사고방식이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단지 종교의 힘을 빌어서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단체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열심도 정성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빈손으로 나아가도 환영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는 행한 자 행하지 못한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것을 교회 아닌 교회가 행함을 공로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실 때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자랑할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같이 병든자,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분명 레갑과 바아나와 같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들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처럼 예수님 역시 그러한 사고방식의 사람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은혜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는 우리의 공로로 나아갈 수 없음을 생각하십시오. 잘아십니까? 그러면 아시는 바대로 행하십시오.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것을 여러분의 공로로 삼지 마십시오. 다 잊어버리시고 다만 예수님이 여러분께 행하신 것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되어지는 것임을 한순간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은 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내 속에는 나를 부인하지 못하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행위에서 의로움을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무너져야 합니다. 그럴 때 신자다운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모인 교회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교회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일은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높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다만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으로 감사하며 살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못한다고 해서 구원에 지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은혜는 크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야 말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러한 축복 앞에서 뭘 자랑하시겠습니까?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 됨을 알고 주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만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입니다. 그 공로를 의지하며 내게 주님이 계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13강) 사무엘하 5:1-5 하나님의 때


<본문>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 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사무엘하 5;1-5)

 

 

 

 

<설교>

 

아브넬이 요압의 복수심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이스보셋은 기울어져 가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안위를 꾀하던 레갑과 바아나의 형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왕으로 세울만한 사람이 없게 됩니다. 비록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4:4절에서 밝힌 대로 그는 절뚝발이였기에 왕으로 추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섬기기로 작정을 하고 헤브론에 거하던 다윗을 찾아와 자신들의 왕으로 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비록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영웅이었던 아브넬만 생존해 있었어도 다윗은 왕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볼 때 만약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통치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면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일에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손으로 아브넬과 이스보셋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을 수 있고, 아브넬을 죽인 요압의 행동이나 이스보셋을 죽인 레갑과 바아나의 형제의 행동에 대해서도 크게 마음 들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요압을 저주하고, 레갑과 바아나 형제를 죽인 것을 보면 다윗에게는 스스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지 다윗의 야망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께 ‘너를 이 나라의 왕으로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셨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됩니까? 아마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셨으니까 나는 왕이 될 몸이다’ 라는 생각이 여러분을 지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왕이 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힘을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왕 하나님의 약속까지 있는 마당에 뭘 주저하겠습니까? 아브넬과 이스보셋을 제거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자신은 왕이 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 맡긴 자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약속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통해 볼 수 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사라의 여종인 하갈의 몸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이 분명 성취하신다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왕으로 세우신다는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 대한 열망도 관심도 없이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다윗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이 때를 위해서 일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을 자신의 수중에 넣기 위한 욕망으로 어떤 계책을 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가만히 있었는데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죽게 되고 결국 온 이스라엘의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4-5절을 보면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년 육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되어 칠년 육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약속받은 다윗이 칠년 육개월 동안 유다만을 다스리면서 나머지 다른 지파를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다윗이 보여주는 것은 자신이 무엇인가 된다는 것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된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을 뿐입니다. 때문에 사울을 죽인 아말렉 사람에 대해서도, 이스보셋을 죽인 레갑과 바아나 형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사적인 유익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비록 다윗이 왕이 되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다윗은 전혀 그런 의미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면서도 아주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된다’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자로서는 당연한 것이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 된다’는 문제입니다. 관심을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지는 것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나를 높이고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26절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는 말씀을 합니다. 사람은 구원을 위해 뭔가 해야 하는 존재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열심히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가운데서 흔들림이 없는 것이야 말로 믿음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믿음의 삶에서 고민하고 낙심하고 견디지를 못해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래도 내가 신자일까?’이런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일이 조건이 되어서 신자된 것이 아님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설령 교리적인 차원에서는 안다고 하더라도 ‘신자가 되었으니까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신자다운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음으로서 결국 자신의 신자 됨을 자신의 열심에서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는 것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를 힘쓰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심을 믿고 살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열심히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왕위에 대한 다윗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에는 ‘때가 찬 경륜’(엡 1;9)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를 따라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때를 따라 일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성급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만 기다릴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내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된 것이 30세의 일이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38세쯤 되던 해의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지 근 20년 만에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오랜 세월 속에서 다윗이 보여준 것은 조급함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는 것입니다.

 

 

 

 

2절 뒷부분을 보면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3장을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의지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병들고 건강해지는 것 이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의해 때를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도 때를 따라 되어진 것입니다. 다윗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다윗이 왕이 되는 쪽으로 이루어져 간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성취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한 부분일 뿐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성취하기 위한 한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말씀의 성취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셨다는 것은 한치의 오차도 잘못됨도 실수도 없는 완벽한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는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이 역시 때가 차면 하나님의 경륜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씀에는 절대로 포기도 중지도 변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분명코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이 여러분도 말씀대로 이끌어 가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신자는 말씀의 성취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로 살아갈 뿐 자신의 포부나 목적을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플 때가 있으면 기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하게 ‘지금 고생해도 언젠가는 편해지겠지’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헛된 희망일 뿐입니다. 때가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형편과 환경을 내가 원한대로 이룰 수도 바꿀 수도 없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해나가시는 일임을 알고 지금의 자리에서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믿음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면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눈물을 씻기시고 위로하시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왕노릇 하게 하실 것입니다(계 22:5).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듯 여러분을 하늘나라에서 왕노릇 하게 하실 그 때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이루어지면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가가 판명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으로 인해 낙심하지도 교만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때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벗어나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에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있어서 조급해 하지 마시고 다만 하나님 바라보기를 힘쓰십시오. 세상에서 뭔가 되어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기보다는 다윗처럼 오로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힘쓰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때를 살아가는 신자의 본분입니다.

 

 

 

 

 

(14강) 사무엘하 5:6-10 다윗성


<본문>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사무엘하 5:6-10)

 

 

 

 

<설교>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거나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때 상대방이 못나고 볼품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설사 못나고 볼품없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사랑해서 선택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이 계속 지속된다는 것도 사실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선택의 방식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7: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그들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수효가 적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숫자적으로 이스라엘이 가장 적은 수의 민족이었음을 의미하기보다는 그만큼 다른 민족에 비해 이스라엘은 약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무엇 때문에 가장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가장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강한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할 때 세상은 머리를 조아리고 굴복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굴복한 것이며 그것으로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강한 자에게 굴복한다면 그것은 힘에 대한 굴복일 뿐이지 사람에 대한 굴복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장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은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의도입니다. 즉 약자가 강자에 대해 승리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존재를 증거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라면 어떤 승리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힘을 드러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약자일 뿐입니다. 그러한 약자가 하나님 덕분에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가장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여호와께 대적하는 속성은 스스로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8:16-17절을 보면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호와께서 참으로 싫어하는 것은 ‘내 능력과 내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악함의 드러내기 위해 세움 받은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힘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이며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가장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언제나 자신들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도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높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며 오늘날 교회이고 신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서 힘 되는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역할을 망각하고 교회됨을 벗어 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나라임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그들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자신들의 연약함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아 누군가를 무시하고 조롱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가장 먼저 행한 것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은 온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다윗이 있는 헤브론은 남쪽에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중심지로는 적합지가 않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중심지로 삼기 위해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로부터 사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실패했던 일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여부스 거민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시온 혹은 여부스는 예루살렘 북쪽의 낮은 지대에 위치한 현대의 시온산이 아니라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북쪽 부분은 점령하였으나 남쪽의 여부스 거민의 지역은 점령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인 가나안 땅 정복에 있어서 아직까지 온전히 순종치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부스 사람들을 치려고 할 때 그들은 다윗을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6절)는 말로 조롱을 합니다. 다윗을 소경과 절뚝발이도 이길 수 없는 약한 자로 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은 소경과 절뚝발이를 내세워서 전투를 해도 다윗쯤은 이길 수 있다는 교만의 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물리쳐 왔던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들을 쳐서 물리치고 그 성을 다윗성이라고 이름하게 됩니다. 반면에 10절을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로써 다윗이 의해 쫓겨나게 된 여부스 사람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강함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함께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3:1절을 보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다윗의 편을 들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의 편을 드시며 다윗을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어떤 선한 조건이 있었는가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에게 선택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고자 하신 것이고 그것을 위해 다윗을 강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강성케 하시는 것은 다윗 개인을 강한 자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12절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위대한 일을 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알기에 위대하다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실체를 바로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앎이 다윗을 교만으로 나아가지를 않도록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강성을 자기 개인의 강함으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고 강하게 하시는 것은 모두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원하는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강성하게 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나를 도우시고 잘되게 하시는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원하는 이것이 바로 현대 교회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나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그 인생이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편하고 잘사는 쪽으로 되어진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그에게는 언약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길로 가야만 했습니다. 야곱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그 인생을 험악한 나그네 인생의 길로 끌고 가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뜻대로 인생을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신 야곱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험악한 나그네 길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여부스 사람이 거하던 예루살렘은 이제 다윗에 의해 점령당하고 다윗 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던 가나안 사람들이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던 요새였습니다. 소경과 절뚝발이를 내세워서 싸워도 다윗은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그곳이 힘없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선택한 다윗 왕의 처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전이 세워지는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고 내세웁니다.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큰소리칩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단단한 요새와 같은 완악함을 보이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 상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르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그 완악한 마음을 점령하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완악한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점령을 당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리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참된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부스 사람들이 자랑하는 단단한 요새와도 같습니다.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을 강퍅과 완고함과 고집으로 뭉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비록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은혜의 부름을 받은 신자로는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인한 감사함과 기쁨 역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세상에서 강해지고 힘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욕심에 거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상태의 신자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심령이 예수님의 값없으신 은혜에 의해 점령당하고 예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로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낼 수 있는 은혜의 증거자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한 소경과 절뚝발이는 여부스 사람들이 말한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집을 다윗 집으로 이해해 본다면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집에 용납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이런 교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 ‘내가 했다’는 이 완악함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나의 완고한 심령이 점령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 심령이 점령당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내 심령을 다스리고 완악함을 무너뜨려 주시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을 공격하여 그곳을 다윗성으로 삼은 것처럼 하나님이 단단한 내 심령을 깨뜨리시고 점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처소로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점령당한 그 심령이야 말로 참으로 복된 심령이 아니겠습니까?

 

 

 

 

 

(15강) 사무엘하 5:17-25 다윗의 전투


<본문>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사무엘하 5:17-25)

 

 

 

 

<설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블레셋이 이를 경계하게 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일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한 예로 다윗이 사울을 피하기 위해 블레셋으로 거짓 망명을 했을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면서 블레셋 왕이었던 아기스가 다윗에게도 함께 전투에 참여할 것을 종용한 바가 있습니다(삼상 28:1). 그때 다윗은 할 수 없이 아기스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아기스와 함께 나아갔을 때 블레셋의 방백들은 다윗이 자신들의 대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다윗과 함께 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삼상 29:3-4). 그들은 다윗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하자 이스라엘이 다윗으로 인해 강대국이 되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아직 힘이 없을 때 침공하려는 계략으로 다윗을 찾아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떤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블레셋과 맞서 싸우기 위해 모든 군사를 모으고 전투를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물은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전투입니다. 군사를 모으거나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갈까요? 말까요?’를 묻는 것입니다.

 

 

 

 

사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올라온 상황에서 블레셋과 맞붙어 싸우는 것은 기정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판단을 먼저 내렸다면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에게 올라갈까요? 말까요?’를 묻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지금껏 그런 식으로 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신앙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 갈것인가를 묻는 것은 블레셋과 싸울 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까지도 자신의 소관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블레셋이 공격을 하는 사태를 해결하는 것은 다윗 자신의 소관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공격을 해 왔으니 나가 싸워서 이스라엘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판단과 생각이 항상 살아있습니다. 그 판단과 생각은 언제나 나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행동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을 두고 하나님께 묻기보다는 당연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을 치는 일은 다윗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블레셋을 치고 승리한 것은 다윗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입니다. 인간의 힘은 전혀 개입된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거하게 됩니다. 이때도 다윗은 여호와께 묻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3-24절)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신앙이 어떠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서 전투함으로 블레셋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하나의 경험으로 남을 수 있는 사건입니다. 승리의 경험입니다. 경험은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승리의 경험이 있다면 또 다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감은 하나님께 묻는 것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해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블레셋이 침략 했을 때는 한번 이겼으니 또 다시 이길 자신이 있다는 생각으로 나가 싸울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블레셋이 두 번째 침략을 했을 때도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철저히 하나님이 행하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생각과 계획에 의해 이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하고 행할 문제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답하시듯 우리에게도 답하실 때를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그전까지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사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어도 다윗에게 답하신 것처럼 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답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러분은 뭔가 풀리지 않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서 여러분이 기대하고 원하는 답은 전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무슨 일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할 때 ‘하나님 이 일을 시작할까요 말까요’라고 물었다고 합시다. 여기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그러한 식의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신자에게는 개인의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척 어려운 문제이지만 신자는 이 문제를 두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으면서 전투를 한 것은 다윗 자신의 삶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어서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행동하겠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생각과 판단대로 행동하는 자신의 삶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만의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고, 또 남들보다 더 잘되고 윤택한 삶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기만의 삶이 있기에 하나님께 와서도 자신의 삶을 위해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이것을 해주세요’라는 요청식의 기도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가는 이 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것입니까?’라는 물음을 보이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전투는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기고 하나님이 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이스라엘이 그 승리를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에 다윗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없었으면 블레셋에게 승리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든 누구든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흔히 하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면 인간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을 때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도하셨음을 높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의 나라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증거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겠는가라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려는 사단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이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인간이 거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셨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는 것이 곧 이러한 사고방식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묻는 것은 내 힘과 내 의지와 내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의지대로 모든 일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여호와께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아온 모든 인생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호와께 묻는 자세보다는 나의 경험과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하여 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다윗이 여호와께 묻는 것을 통해서 삶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님을 인지하시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삶에는 염려와 걱정이 없습니다.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순종하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바라보기에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참으로 가볍습니다. 짐이 없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결국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짐으로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이루기 위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안되어지기에 실망이 되고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의 삶에 손해가 올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 묻는 믿음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묻는 것은 단순히 답을 얻겠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해결책을 얻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소관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물음도 블레셋과 싸우든 싸우지 않던 모든 소관은 여호와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뜻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 힘으로 했다는 착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무엇 하나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신 것이 없음을 깨달으시고 되어진 일에서, 또는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은 일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아무런 계획도 뜻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된 뜻이며 계획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며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된 삶인 것입니다.

 

 

 

 

 

(16강) 사무엘하 6:1-5 하나님의 궤


<본문>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사무엘하 6:1-5)

 

 

 


<설교>

 

영생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에 살아있어야 할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들의 속마음을 그 부자 청년을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서 엿볼 수 있는 우리의 실체는 우리는 자신의 것을 버리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실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행위란 믿음에 의해 나오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행위는 자신의 손해가 없는 행위입니다. 나의 손해, 내 희생, 나의 포기가 들어 있지 않은 거짓된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를 포기하게 합니다. 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에는 자신의 포기와 버림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버림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은 오히려 자신의 세력을 더욱 탄탄히 구축하는 수단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믿음에 이러한 믿음이 많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을 보기 힘든 세대에서 과연 나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고, 참된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대로 이스라엘은 남쪽 북쪽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통일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국력은 더욱 왕성해졌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윗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예루살렘을 쳐서 여부스 족속을 몰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에 두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오는 강대국인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됩니다. 블레셋을 이겼다는 것은 그야 말로 주변의 나라들에게 이스라엘의 위상을 크게 알리는 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블레셋은 강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왕이 된 후 이스라엘은 날이면 날마다 왕성해져 갑니다. 이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다윗의 성공’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은 발전과 번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인은 이런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부흥 역시 발전과 성장입니다. 이 발전과 성장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교회의 모든 것이 발전과 성장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흔히 말하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이러한 슬로건은 내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뿐, 정작 모든 관심은 하나님과 말씀으로부터 벗어나 발전과 성장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은 발전과 성장을 복으로 인정합니다. 복을 양적인 팽창의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세상의 정신이고 사고방식인 것이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양적인 팽창 의미로 말씀되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배당을 짓고, 교인 수가 늘어가는 것을 ‘’으로 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인간의 종교일 뿐임을 말씀드립니다

 

 

 

 

어떻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 다윗은 발전과 성장의 탄탄대로에 서 있습니다. 소위 잘나가는 왕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다윗이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약 이스라엘의 발전이 다윗의 복이라면 다윗이 더 이상 추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받은 복으로 감사하면서 마음껏 누리며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찾아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는 것은 단순히 거룩한 물품을 집에 모셔 놓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5절의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것은 다윗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기를 열망했겠습니까? 법궤를 모셔 와야 복을 받아서 더욱 큰 나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울의 수준일 뿐입니다. 사울은 법궤를 모셔옴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법궤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지금도 복을 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태도를 하나님께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하나님도 정성에 감복하셔서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에게 이런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복을 위해 법궤를 모셔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궤가 무엇이고 다윗은 왜 그것을 모셔 와야 했는가? 입니다. 출애굽기 25:22절에 보면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을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가 하나님의 궤인 것입니다. 그러면 만남의 장소를 다른 것으로 변경할 수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에 요구되는 것은 거룩인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거룩과는 상관없는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궤입니다. 하나님의 궤의 뚜껑에 피가 뿌려짐으로써 죄를 용서 받고 비로소 깨끗한 자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속죄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궤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궤를 다윗 성에 모셔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궤를 모셔오는 이유입니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면서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궤를 모셔올 때 지은 시로 볼 수 있는 시 24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 24:7-10절을 보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모시면서 이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만방에 선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 왕국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다스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존재로 세워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오직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뭔가를 보여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 문제에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여겼던 사람인 것입니다.

 

 

 

 

이 내용을 교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단 교회를 다스리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주님이 교회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궤를 교회에 모셔 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교회에 목사와 장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심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목사와 장로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인간의 욕심을 집어넣으면 안됩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교회를 보게 되면 성장과 발전만이 교회가 살 길이라고 여겨지게 됩니다.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교회가 복을 받은 증거라고 여기게 될 것이고 성령의 역사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결국 말씀과 상관없는 교회로 전락될 뿐입니다.

 

 

 

 

발전과 성장은 세상이 추구하는 목표일뿐입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두고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관심을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내 관심거리에 눈을 돌려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우상의 수준으로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것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다름을 보여줄 수 있는 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다윗의 기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굳게 세워짐을 바라봄으로써 누리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원하고 살아갑니까?

 

 

 

 

다시 말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발전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궤를 모셔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삶의 영역을 더욱 든든히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나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신앙을 남발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에 엿이 먹고 싶어서 멀쩡한 고무신을 엿장수에게 갖다 주고 엿을 바꾸는 것처럼 세상 것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는 것이 너무 많은 이 세대 안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사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 앞에 나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궤에 뿌려진 피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그리스도를 피를 믿고 피를 증거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다윗의 마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다윗의 믿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고 추구하는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굳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17강) 사무엘하 6:6-7 웃사의 죽음


<본문>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사무엘하 6:6-7)

 

 

 


<설교>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경외하신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보이지 않으신 분을 어떻게 경외하고 계십니까? 일단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보이지 않는 분을 지금껏 어떻게 경외하고 살아왔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물음에서 주저하신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를 모르면서 다만 스스로 경외한다고 여기는 것이 전부였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소경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으로 하나님을 경외 또는 섬겼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그것은 선지자를 어떻게 대접하는 가로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그들을 심판하고 책망하는 것이라 해도 그 말씀에서 자신들의 죄를 발견하고 또한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온 선지자를 높이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해 분노하면서 선지자를 핍박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하는 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증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책망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형식과 의식을 동원해서 경외하는 척 했을 뿐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 분명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라거나 성경책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경험에 맞지 않다 하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상식에 맞도록 성경의 의미를 고쳐가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기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기분좋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살필 것은 과연 말씀이 바른가 바르지 않는가이지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가 기분 나쁘게 하는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만을 말씀으로 인정하고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하나님보다 자신이 중심되어 있는 것이고, 이러한 잘못됨이 결국 자기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서는 결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식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목적이 선하기 때문에 과정이 조금 잘못되었다고 해서 봐주고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께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철저히 말씀을 기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가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는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윗과 온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악기로 여호와 앞에 주악하면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처럼 즐거운 일에 심각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를 몰던 소가 갑자기 뛰므로 인해서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들게 되고 웃사는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된 것입니다.

 

 

 

 

웃사는 나쁜 의도로 하나님의 궤를 붙들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소가 뛰므로 인해서 하나님의 궤가 땅으로 굴러 떨어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붙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웃사의 행위는 분명 선한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궤는 아무나 붙들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황이 웃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궤를 붙들 수밖에 없도록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 생각에는 웃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너무 심했다는 반발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 자신의 일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기록된 인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웃사의 일이 여러분 자신의 일로 다가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하나님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고 말합니다. 웃사의 잘못은 하나님의 궤를 붙든 것에 있습니다. 그의 의도가 어떻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됩니다. 법궤는 아무나 만질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하십니까? 비록 웃사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만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법궤를 만졌다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은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웃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의 방식은 거부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일은 그 시작부터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는 레위인이 그 궤를 메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레위인이라고 해서 모두 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핫 자손만이 메는 일을 하였습니다(민 7:9). 그래서 고핫 자손에게는 성전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자손과는 달리 소와 수레를 배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실어서 모셔오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상 13:1절에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역대상 13장의 내용이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본문의 내용과 같은 것임을 생각해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셔올 때 장수들과 의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궤를 모시는 방법을 두고 의논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의논을 한 결과가 수레에 싣고 옮기는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레위 자손이 메도록 되어 있는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옮기는 새로운 방법을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왜 메지 않고 수레에 싣는 방법을 동원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메는 것보다 수레에 싣는 것이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자기들의 방식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궤를 옮기겠다는 그 의도는 선하고 좋았지만 결국 궤를 옮기는 방법에 인간의 방식을 개입시킨 것이 문제였고 하나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심을 웃사에 대한 진노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웃사가 법궤를 만진 것은 어떤 잘못이 숨어 있을까요? 이것은 이 질문으로 그 내막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수레에서 떨어질 뻔한 법궤를 웃사가 붙들어서 무사했다면 그것을 본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웃사가 아니었다면 법궤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웃사가 아니었다면’ 이 말이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한 도전적인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웃사에 대한 진노는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해 인간은 끼어 들 수 없음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인간이 협력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럼 인간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냐? 인간이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일이 제대로 되겠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는 자신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고 있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웃사가 법궤를 붙든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진노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든 것은 ‘내가 붙들지 않으면 궤가 굴러 떨어지겠다’는 다급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 행동이야 말로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인정치 않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뭔가 반발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궤가 굴러 떨어지는 것을 그냥 두고 봐야 한단 말인가?’라는 반발 말입니다. 이 생각에는 ‘하나님의 궤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만 있을 뿐 ‘굴러 떨어지든 무사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나는 다만 말씀에 순종할 뿐이다’는 생각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되면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즉 우리들의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뜻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버립니다. 자신이 원한대로 되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좀 더 나은 것,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궁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 라는 궁리를 하면서 끊임없이 인간의 방법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효과적인 인간의 방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방식이 미련하게 보인다 해도 그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삭제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은 것을 교회가 제멋대로 요구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해서 말씀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서 교인들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이 만든 방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위장해서 가르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을 쌓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앙의 원리입니다. 성경을 벗어나 살면서 바른 신앙의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성경이 말씀하지 않은 인간의 방식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더 높이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 하나로 성경으로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맞기에 신뢰해 버리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방법이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해서 성경에 추가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제아무리 불편부당한 말씀이고 방법이라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고 도리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실제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길을 갔습니다. 일부러 미움을 받기 위해 행동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길을 가다보니 미움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움을 받는 길은 전도를 위해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전도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게 칭찬을 받아야 전도에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다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지시 받은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시는가를 살피면서 지시된 그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할 일은 오직 말씀을 살피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하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수레 만드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신자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새로운 방법, 독창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고정되어진 형식, 의식,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방법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효과적이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보다 인간이 고안해낸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웃사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이 좌정하신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보겠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대한 도전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미리 가지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결론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내리신 결론에 순종하는 것만이 신자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말고 여러분자신의 수레를 만드는 것을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든 수레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오히려 진노일 뿐입니다.

 

 

 

 

 

(18강) 사무엘하 6:8-11 다윗의 분노


<본문>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사무엘하 6:8-11)

 

 

 

 

<설교>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고 갈 때 소가 뛰므로 궤가 수레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궤를 붙잡은 웃사의 행위를 잘했다고 봐야 할까요 잘못했다고 봐야 할까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우리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궤가 손상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을 방지한 웃사의 행위는 상을 받을만한 잘한 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웃사를 죽이십니다. 이것은 웃사의 행위를 악한 것으로 보셨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웃사와 같은 경우에 처했다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웃사의 행위를 잘한 것으로 본다면 웃사를 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다윗이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신 일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가진 것은 하나님이 웃사를 치신 것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보기에 웃사의 행위는 참으로 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의 눈에 여호와의 궤를 붙잡는 웃사의 행위가 악한 것으로 보여졌다면 다윗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찬양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보기에 웃사는 잘해보려고 궤를 붙잡았을 뿐 하나님께 악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웃사를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해 반발의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드러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웃사를 심판하심으로써 다윗과 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신이다. 그런데도 나를 섬기겠느냐?’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자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직까지 자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궤는 레위 사람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레에 싣고 운반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여호와의 궤를 운반하는 일을 더 소중이 여긴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운반하는 일이 곧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께 충성하는 것이니 만큼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일을 받아주실 줄로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관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나는 이러한 신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웃사를 심판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대하는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의 관점을 생각하고 계산하기보다는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내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일을 하신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감만을 속에 품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 다윗의 마음이라면 지금 다윗은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웃사가 함께 하고 있으며 궤를 옮기는 일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웃사가 궤를 붙잡았다는 것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궤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여호와의 궤가 어디에 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에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거나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궤가 없어도 이스라엘은 번성했고 다윗 역시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은 다만 상징적인 것일 뿐, 그 일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것을 좀 더 잘하기 위해서, 즉 여호와의 궤를 좀 더 잘 모시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수레를 동원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윗의 관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니 웃사를 심판한 하나님의 처사가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잘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막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러한 반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있어서 고쳐져야 할 것은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 자체를 중요하게 보는 시각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배당을 짓는 일이 중요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까?’ 혹 ‘둘 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곧 여러분의 관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배당 짓는 일을 중요하게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즉 진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웃사나 다윗처럼 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을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심에도 불구하고 다윗이나 웃사는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이 중요하고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신다는 생각을 함으로 말미암아 법궤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보실까요? 예배드리는 일입니까? 기도하는 일입니까? 예배당을 짓는 일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 일에 부지런했던 이스라엘을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사야 선지자에 대해 분노합니다. 자기들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힘써 제사하고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선지자의 책망은 단지 이스라엘을 분노하게 한 것으로 그쳤던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오류는 자기 관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보지를 못합니다. 중요하지 않는 것을 붙드는 대신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버립니다. 이것은 다만 인간의 열심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웃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다윗이 그렇지 않습니까? 웃사는 여호와의 궤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 채 궤를 운반해야 한다는 열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열심에 대해 경고하시기 위해 웃사를 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십니까? 무엇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는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그것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아닙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증거가 아닙니다. 말씀이 그 심령의 중심에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나 말씀으로 책망을 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신의 실체를 계속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할 연약한 자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마음은 형제를 향해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비판하지 않을 것이고, 비교하지 않을 것이고,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무시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말씀이 그 중심에 존재하는 증거이며 하나님은 이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제 말에 다른 오해를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당을 짓고자 하는 바램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중심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웃사처럼, 다윗처럼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고 중요하지 않는 것에 열심을 냄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길을 가게 될 수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인간의 열심으로 인해 성도가 서로 다투고 불화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습니다. 성경은 교회에 대한 인간의 열심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체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깨뜨리면서까지 교회에 대한 인간의 열심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이 곧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 관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9,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일에 분한 마음을 가진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 놓게 됩니다.

 

 

 

 

다윗은 왜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것을 포기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고 지켜주고 보호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했지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웃사를 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여호와의 궤를 모시는 것이 곧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부담을 가진 다윗은 궤 옮기는 것을 즐겨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 해도 모시기를 기뻐했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은 것만을 보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를 도와주고 지켜주고 보호해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가 친한 친구를 만나는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죽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이 희희덕 거리는 웃음만 있겠습니까? 우리의 악함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셨는데 여전히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감사와 기쁨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자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난 그가 바로 진정한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자기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보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한 것에 대해 탄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열심을 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우리 관점에 머물러 있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러한 자기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른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모셔오는 일 자체를 가지고 기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웃사를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도, 행함도 모두 깨어지고 죽음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신자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19강) 사무엘하 6:12-15 다윗의 기쁨


<본문>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사무엘하 6:12-15)

 

 

 


<설교>

 

소위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열심 자체를 나쁜 것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잘못된 열심에 치우쳐 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여러분께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열심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일을 이루고 나의 이름을 높이고 나를 자랑하기 위한 열심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기 위한 열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이러한 열심으로 사셨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한 주간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굴릴 수도 있습니다. 즉 열심 = 행함이라는 공식을 쉽게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고질병입니다. 눈에 보인 것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고질병 말입니다. 이러한 고질병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복과 저주도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이 인간의 행함을 따라 주어진다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행함은 기껏해야 착함과 교회에 대한 열심의 범위에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행함을 따라 복이 주어지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만약 지켜 행하지 못하면 저주가 임할 것임도 말씀합니다. 사실 신자가 28장의 내용에서 주지할 것은 저주에 대한 선포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선포하기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신앙의 모양을 조금 가지고 있는 듯한 행위 몇 가지를 가지고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의 모양 조금, 몇 가지를 가지고,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좋은 일 몇 가지 행하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그 의미가 확실시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사랑에서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이웃을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위를 두고 본다면 저주가 가장 확실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열심이 복을 받는 통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웃사의 죽음을 통해서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법궤를 붙잡은 것은 웃사의 열심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열심보다는 자기 생각, 자기 방법, 자기 능력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겠다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웃사의 열심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웃사의 죽음이 분명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을 감동케 하고 그 결과로 복이 주어진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착각을 비웃으시는 것이 오벧에돔의 온 집에 복을 주신 일입니다. 웃사의 죽음을 본 다윗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메어가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가드가 골리앗의 출신지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어떤 연유로 해서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벧에돔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무시와 멸시를 받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기게 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웃사의 죽음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자기 집으로 옮기는 것을 꺼려했을 것입니다. 다윗조차 다윗성으로 옮기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누가 여호와의 궤를 환영하겠습니까? 때문에 결국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방인인 오벧에돔의 집을 선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오벧에돔이 여호와의 궤를 자신의 집으로 옮겨 놓는 것을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는 이방인으로서 그것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지 않았겠습니까?

 

 

 

 

여호와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옮겨 놓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집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떨어질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저주 받아 마땅한 이방인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결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상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이방인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여호와의 궤를 위해 무엇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궤가 그 집에 석달을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오벧에돔 여호와의 궤를 모신 결과일까요? 하지만 궤를 모시게 된 것은 오벧에돔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시기를 거부할 때 오벧에돔이 나서서 ‘내가 모시겠다’고 자청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윗이 일방적으로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더군다나 저주의 대상이라 여겼던 이방인의 집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웃사와 대조되는 것입니다. 웃사는 인간의 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심판입니다. 오벧에돔은 열심은 커녕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복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결과로서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결과가 복으로 주어질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하는 일이 잘돼야 하고 세상적인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보다는 잘돼야 믿음의 자존심이 세워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고 열심히 일했으니까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결국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을 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행한 것이라면 언제나 하나님이 증명되는 것을 우선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신앙의 바른 길을 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웃사의 열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이방인인 오벧에돔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복, 이 모두는 복과 저주에 대한 인간의 계산과 상식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웃사의 죽음을 본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에 열심인 웃사의 죽음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우리들의 반발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생각이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주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라고 말합니다. 웃사의 죽음을 보고 여호와의 궤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짐으로 궤 옮기기를 중지한 다윗의 생각이 왜 바뀌게 되었을까요? 다윗의 생각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3-14절을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다윗의 행동은 베 에봇을 입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으며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복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이 제사장을 시켜서 제사를 드렸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제사장복인 베 에봇을 입었다는 것을 보면 다윗이 직접 제사를 드린 것이 유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규례를 또 다시 어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해 진노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다윗은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주어졌다는 것에서 복은 인간의 열심이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인간이 보태야할 행위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궤와 연관되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분명 복을 받을 조건이 전혀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궤가 함께 한다는 것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인간의 열심, 봉사, 노력을 더해야 주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을 통해서 이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서 메어서 운반하게 되어 있는 궤를 새수레에 운반하는 잘못됨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방법과 열심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잘 모셔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악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시 다윗성으로 옮겨 갈 때는 어깨에 메어서 가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는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제물의 피가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은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복의 상태이며 그러므로 복의 통로는 곧 제물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 것 같습니다. 저주 받을 이방인으로 알고 있었던 오벧에돔이 여호와의 궤로 인해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여호와의 궤의 능력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신 기쁨이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에봇을 입은 것은 여호와의 궤의 피의 의미와 그 능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린 것 역시 제물의 피로써 주어지는 복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아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완성된 복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그가 진정한 제사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는 에봇을 입고 제사를 드린 것이 하나님의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15절에 보면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고 말합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의 기쁨은 여호와의 궤의 비밀을 알게 된 결과입니다. 즉 피의 의미를 알았을 때 기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저주 받을 자가 복에 거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언약궤입니다. 본문이 그 사실을 실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복과 저주는 우리의 생각과 계산을 따라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열심과 정성과 노력이 하늘의 복을 끌어 오는 능력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은 제물의 피로써 완벽히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제물의 피를 바라보고 믿는 것이야 말로 복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는데 어떻게 여호와의 궤를 멀리 하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 복이기 때문에 복을 받은 자의 특징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하나 자신의 열심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은혜에 대한 고백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게 됩니다. 애당초 자신의 것이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것도 경쟁의 도구로 삼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신자입니다.

 

 

 

 

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고 완전케 되었습니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고 믿으면 됩니다. 이것이 복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을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로 인하여 복이 주어졌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안다면 저주받을 우리에게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복이 주어짐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앙이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열심과 노력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행하고 노력을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만 나타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자신이 뭔가 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뭘 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무엇이 신자로 사는 것인가에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넘치는 복을 받은 자로서의 감사함의 표현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함이 아니고 힘도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는 큰 기쁨으로 남을 것입니다.

 

 

 

 

 

(20강) 사무엘하 6:16-23 미갈의 조롱


<본문>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눠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사무엘하 6:16-23)

 

 

 

 

<설교>

 

신자가 ‘복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거나, ‘내가 이런 일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실꺼야’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복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이고 착한 일을 부지런히 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얄팍한 생각이고 계산일뿐이지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일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주어진 것도 바로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입니다. 오벧에돔에게는 복의 조건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즉 가드사람 오벧에돔이 복을 받을 어떤 조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집에 복을 내린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벧에돔의 복은 다만 여호와의 궤가 그 집에 함께했다는 것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오벧에돔이 법궤를 잘 닦고 정성스럽게 관리를 잘해서 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즉 오벧에돔의 행위로 인해 주어진 복이 아니라 다만 언약궤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주어진 복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에 뿌려진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해 주어진 복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함께 하는 것만으로 복은 한치의 모자람도 없이 완성품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과 저주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곧 복된 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이와 같은 복의 비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항상 복에 대해 목말라하는 모습만 보일 뿐 이미 복이 주어진 자로서 복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전혀 부족함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족한 삶에 머물러 있는 신자의 기쁨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14절에서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인해서 복과 저주가 주어지는 것으로 알았던 다윗이 행함과 상관없이 언약궤가 함께 함으로 저주에서 벗어나고 복에 거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뻐하며 춤을 추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다시 언약궤를 모셔오기를 망설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과 저주의 기준을 자신의 행위에 두고 있습니다. 착한 행동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행동을 하면 벌 받는다는 공식과 계산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이러한 기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고, 하지 않으면 복은커녕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못한 모습일 뿐입니다.

 

 

 

 

18-19절의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은 복의 기쁨을 온 이스라엘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다윗의 기쁨이 컸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기쁨을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춤을 출 정도로 기뻐하는 다윗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다윗의 기쁨을 맛보고 싶다면 언약궤가 함께 함으로 주어지는 복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함께 함으로 주어지는 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윗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쁨을 조롱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의 아내이며 사울의 딸인 미갈입니다.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고 말합니다.

 

 

 

 

미갈은 왜 다윗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까? 20절의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왕의 체통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것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갈은 그것 때문에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23절).

 

 

 

 

왕비에게는 자식이 곧 힘입니다. 왕비이면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힘이 전혀 없는 명목상의 왕비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그 이름이 계속되지 못함을 뜻합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자식을 여호와의 기업(시 127:3)으로 이해한다면 미갈에게는 돌아갈 여호와의 기업이 없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미갈에게 돌아갈 하나님의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갈이 다윗을 조롱한 것이 어떤 면에서 잘못된 것일까요?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춤을 추며 뛰노는 것은 분명 왕의 체통을 잃어버린 행동입니다. 여러분은 대통령이 만약 군중들 앞에서 춤을 추며 뛰논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무척 서민적이라는 반응도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는 무엇 때문에 저렇게 기뻐하며 춤을 추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대통령이 체통이 없다, 무게가 없다는 등의 조롱을 하지 않겠습니까? 미갈이 볼 때도 왕으로서의 다윗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갈이 다윗을 맞으며 했던 20절의 내용은 왕으로서의 체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책망의 말인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미갈의 잘못됨은 다윗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지위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다윗은 미갈의 조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지금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도 왕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피조물이며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복으로 인해 춤을 추고 뛸 정도로 기쁨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왕이라는 지위는 여호와 앞에서는 내세울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다윗을 택하여 세운 것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여호와 앞에서 다윗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의 다윗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왕이라는 체통을 지킴으로서 왕으로서 백성들 위에 제대로 군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미갈의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살아갈 것이고 자신을 지키며 자신을 내세우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미갈의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게 하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미갈이 다윗이 왕의 체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왕비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백성들 위에 강력한 힘을 가진 자로 군림할 때 왕비 역시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무시를 당하면 왕비 역시 무시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미갈은 왕비라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다윗을 조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갈과 다윗의 전혀 다른 생각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자신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음을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이 왕이 되게 하셨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갈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왕비라는 지위에 있게 되었는가를 잊고 있습니다.

 

 

 

 

3:13-14절을 보면 다윗은 미갈과 정혼하였다는 이유로 미갈을 데려오라는 조건으로 아브넬과 언약을 합니다. 즉 다윗이 미갈과의 정혼을 기억하여 불러주지 않았으면 미갈은 왕비의 자리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불러준 다윗 앞에서 미갈은 감사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금 미갈은 다윗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어떻게 해서 왕비가 되었는가를 잊고 있는 이것이 다윗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인가는 다윗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도 미갈과 같은 잘못된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 모두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지위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목사라는 직무 역시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이유는 복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목사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일 뿐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모두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 만난다면 높고 낮은 자가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자신의 직무를 이용해 신자들 위에 있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미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많은 목사들은 목사로서의 체면과 체통을 지키려고 합니다. 목사로서의 체통을 잃으면 교인들이 무시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될수록 근엄하게 보이려고 하고,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이 미갈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린 쓸모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 신자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있어서만큼 우리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목사도 장로도 그 무엇도 아니라 오직 은혜 받은 자로 나올 뿐이고 은혜 받은 자로 서로 만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교회 안에서의 높고 낮음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갈은 다윗이 체통 없이 춤을 춘 것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드러내었다며 조롱합니다. 행동에 의해서 높아지고 낮아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생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은 체통을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체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도 자신의 높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서는 이러한 생각이 사라지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쓸모없는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인해서 복을 누리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 무엇도 아니고 다만 은혜 받은 자일뿐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신자답게 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말은 비록 자신의 모습이 미갈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천하게 보이고, 지금보다 더 낮아져서 더욱 더 천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높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낮아진 자가 높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낮아짐을 받을 뿐입니다.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을 마음 깊이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일 뿐입니다.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 역시 택하심과 부르심의 결과일 뿐입니다. 무엇하나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복을 거저 받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베푸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거추장스런 모든 것을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세상의 위치와 조건을 가지고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아니었다면 비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처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다윗이 춤을 추며 뛸 정도로 기뻐했던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여러분 역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기쁨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 기쁨의 자리에서 서로 만나는데 그 자리에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겠습니까? 목사는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직무일 뿐입니다. 기쁨의 자리에서 우린 하나님의 자녀로 만날 뿐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는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이지 않겠습니까? 이 교회를 그리워하시기 바랍니다.

 

 

 

 

 

(21강) 사무엘하 7:1-9 다윗과 하나님의 집


<본문>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사무엘하 7:1-9)

 

 

 

 

<설교>

 

하나님을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습성인가 봅니다. 하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생각에 맞춰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에 일치된 모습으로 존재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 깊이 읽으신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자기중심과 자기 편의주의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편의주의에서 벗어나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무너지고 전혀 새로운 시각과 지혜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각을 고치시고, 이삭의 생각을 고치시고, 야곱의 생각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하신 그 일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문제임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생각과 그 생각을 고치시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많은 목사들에 의해 교인들에게 소위 성전 건축을 독려하기 위한 것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편의주의적인 생각에 의한 해석일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본문은 성전 건축을 독려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에 대한 다윗의 생각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정반대의 생각으로 본문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다윗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고 평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1절의 이 내용은 읽기에 따라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지만 2절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뭔가 생각해 볼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은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찌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이 자신이 거하는 궁에 비해 하나님의 궤가 볼품없는 천막에 거하고 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1절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다윗은 하나님이 베푸신 것에 비해 자신은 하나님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궁도 주시고, 대적도 물리치시고, 평안도 주셨는데 자신은 하나님의 궤를 겨우 천막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쩌면 하나님을 잘 모셔야 지금의 평안이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런 마음이 갸륵해 보입니까? 자신의 평안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궤가 천막에 거하고 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정성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정성으로 말하면서 교인들에게 다윗과 같은 마음을 강요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좋은 집을 주셨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을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게 놔둘 것인가?’라는 책망 아닌 책망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심지어는 자신의 집을 팔아 예배당 건축비로 헌금하는 일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아주 좋은 믿음으로 치부되어 칭송되고 있는 것이 많은 현대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다윗의 이러한 마음을 좋게 보셨을까요? 7절을 보면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내용은 분명 하나님의 집에 대한 다윗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것을 명하신 바가 없다고 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이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지어 바치려고 한 것이 정성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바를 따라 살아갈 뿐, 인간이 알아서 스스로 하나님을 모시고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집이 필요하십니까? 물론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지었지만 그때도 하나님께 집이 필요해서 짓게 하신 것이 아니라 참된 성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짓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공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집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우주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무슨 집이 필요합니까? 집은 다만 인간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집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욕심이 하나님도 집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궤를 모실 집을 걱정하는 다윗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중점적인 생각과 편의주의에서 나온 생각인 것입니다. 좋은 궁에 머무는 것이 너무 좋게 여겨졌기에 하나님의 궤를 천막에 모신 것에 대해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자신이 거하는 집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궤가 어떤 곳에 모셔져 있는가에 대해서도 별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당을 짓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은 자신의 집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더욱 좋고 큰 집을 갈망하는 마음과 무관하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소유의 집이 있어야 한다는 열망이나, 내 소유의 예배당이 있어야 한다는 열망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실 집을 좋은 것으로 지어 바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님을 웃사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같은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고집은 참으로 질기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성을 보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주관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분명 하나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을 앞세우면서 내 생각이 옳으니까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 지을 뿐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일 뿐입니다. 세상의 종교, 즉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면 인간의 생각을 신의 생각으로 합일화 시켜 놓은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집과 장막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집은 고정된 것이지만 장막, 회막은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장막, 회막은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 함께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6절의 내용은 하나님은 어느 한곳에 고정된 분이 아니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 함께 행하신 하나님이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 함께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정된 집에 머무시면서 단지 지시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함께 하시고 직접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나아온 것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잘 실천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함께 하시고 일하신 덕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집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지는 오늘 현대 교회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예배당을 잘 짓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인줄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어리석음이요 무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고정된 건물에 모시려고 하는 잘못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 지은 건물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지으신 자기 백성의 새 마음에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은 예배당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의 새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그 마음이 곧 천국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예배당이 하나님이 계신다면 예배당이 곧 천국이라는 논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곧 성전이고 신자 개개인의 몸이 곧 성전입니다(고전 3:16).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있게 된 것으로 감사하고 그것을 존귀히 여겨야지 예배당을 존귀히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당 짓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집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조건 더 크고 좋은 건물을 원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라 봅니다. 예배당은 예배드리기 위한 공간일 뿐입니다.

 

 

 

 

은석교회 여러분은 예배당에 대한 세상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전부임을 잊지 않고 날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나에게 오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에는 게을리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예배당을 짓는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웃으실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배당은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일 뿐 하나님께 필요한 공간이 아닙니다. 예배당의 크기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것은 예수님의 피와 섬김을 의지하는 여러분의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거하십니다.

 

 

 

 

 

(22강) 사무엘하 7:8-12 하나님의 섬김


<본문>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사무엘하 7:8-12)

 

 

 

 

<설교>

 

마태복음 20:28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이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속자이십니다. 때문에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으신 분이지만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세상 질서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과 신자의 바른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에 대한 보답으로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로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섬김’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이라는 단어에서 열심과 봉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즉 섬김을 행함의 문제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제는 나의 정성과 열심을 다해서 예수님을 섬겨보자’라고 말하면서 결국 교회라는 집단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다윗이 하나님의 궤가 휘장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것에서도 이같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에 대한 일반적 사고방식에서 접근한다면 다윗의 생각은 분명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신에 대한 깊은 정성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덕분에 좋은 집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하나님의 궤는 휘장에 방치한 채 두는 것에 비하면 분명 깊은 신앙이며 정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신앙과 정성과 섬김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지금껏 날 위해 집을 건축하라고 명하신 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다윗의 섬김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이런 내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린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쪽에서 내 식으로, 즉 내 상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섬김이 무엇일까?’를 가르침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다윗과 같은 섬김을 많이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으면 아예 섬김으로 간주하지도 않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하고, 기도도 하면서 소위 교회 생활에 충실한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말하지만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섬김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5절에 보면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의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셔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 있으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재벌 집을 방문한다고 합시다. 과연 무엇을 선물로 가져가시겠습니까? 어떤 선물이 재벌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부족함이 없이 누리고 있는 재벌이라면 무엇을 가져간들 그 마음을 기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까?

 

 

 

 

다윗의 정성과 섬김을 거절하신 하나님은 도리어 다윗에게 무엇인가를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고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집을 짓고자 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평안히 살게 했으니까 이제 그 보답을 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8절의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라는 말씀을 보면 다윗의 정성과 섬김을 거절하시면서 오히려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9절에서도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윗의 행위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다윗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11절의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라는 말씀을 보면 집을 짓겠다는 다윗의 의도를 거절하고 도리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에서 어떤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과연 하나님이 인간의 정성과 섬김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예배당을 짓고자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다만 우리의 생각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일 뿐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섬김을 받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시는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다윗이 짓고자 하는 집은 거절하시고 도리어 다윗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시는 것에서 이러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윗을 위해 짓겠다고 하신 집은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가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가문은 혈통적 가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하고 복된 가문은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은 세상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된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 약속 때문은 다윗이 범죄 했을 때에도 징계는 하셨지만 버리시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십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섬기시는 분이지 섬김을 받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면 과연 무엇으로 섬길 수 있습니까? 죄인된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희생의 자리에 내어 놓으신 하나님 앞에 과연 무엇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돈 몇 푼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아무리 크고 좋은 예배당을 지어 바친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섬김이 되겠습니까?

현대 교회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정성을 보이는 것인가를 생각하여 교인들에게 그것을 신앙이라고 교육하며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교인을 크게 병들게 하고 신앙이 아닌 종교에 빠뜨리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고 도리어 다윗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집을 짓는 것입니까 아니면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입니까? 다윗이 할 것은 자신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과연 다윗이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즉 섬기시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다윗이 할 일이며 이것을 두고 ‘섬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섬김은 내 쪽에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총과 은혜에 대해 받아들이며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뭔가 여러분의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들려질 것입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섬김으로 알고 있고 그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는 세상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을 섬김이라고 말하니 어떻게 쉽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극히 높으신 분, 하나님이 죄인된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말은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를 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린 항상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있는 그 무엇도 나의 힘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신 은혜의 열매임을 생각한다면 내 손에 아무리 많은 것이 쥐어져 있다 한들 그것을 내것으로 내어놓을 수 없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고 처지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섬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좋은 집에 모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예배당을 지어 예배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예배당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도 영광스럽게 하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천막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곳에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있고 감사함이 있다면 그곳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필히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길 수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것을 깊이 자각할 때 비로소 섬김이 나올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섬김은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림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잘못은 자신이 집을 지어 바침으로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겠다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여호와의 것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없어서 마치 하나님이 떠돌아다니고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송구스러워 하는 그 마음이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악함이고 악마적 사고방식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 다윗의 잘못이었습니다. 우린 이러한 다윗의 잘못에서 우리의 잘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대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서 무한히 베푸시는 분이시지 베풀었으니까 보답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으셨으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요구하실 정도로 우리가 능력이 있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는 다윗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끌어 들이십니다. 약속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을 어떻게 성취해 가시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힘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에 의해 성취되어지는 약속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만이 할 수 있는 섬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열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섬김을 보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섬김과 열심과 의지와 능력이 우리를 붙들어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쓸데없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보다는 하나님의 섬김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마음 깊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섬김이 그 심령에 살아있는 신자라면 그에게서 비로소 섬김의 흔적이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에게서 섬김을 배우고, 형제를 섬김으로 예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세상 종교는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섬기는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크신 분이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를 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질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작은 자가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에 의해 움직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그 어떤 정성도 하찮은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성을 신앙으로 높이게 되면 결국 여러분의 행함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날마다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의 깊이는 갈수록 얕아지고 나중에는 여러분의 정성과 행위만 남게 될 것입니다.

 

 

 

 

집을 짓겠다고 하는 다윗의 정성을 거절하고 오히려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에게 이미 독생자를 내어 놓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그 약속의 성취로 말미암아 어둠의 자식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빛에 거하는 존재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주님의 섬김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마시고 베푸시고 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섬김으로 누리고 있는 평안이야 말로 신자에게 주어진 복이며 보배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23강) 사무엘하 7:13-17 하나님의 약속


<본문>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사무엘하 7:13-17)

 

 

 

 

<설교>

 

행동에 있어서는 자신감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속 중심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감을 가지거나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면서부터 부패한 속 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보지 않으시고 속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죄인입니다. 죄에 있어서만큼은 모두가 동일한 보응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다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차별을 두고 대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 공평의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랑할만한 사람이기에 사랑하시는 것이라면 이해가 되고 할 말이 없겠는데 속 중심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똑같이 부패한 중심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달리 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13절 끝부분에 보면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고, 16절 끝부분에 역시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다윗을 위해 이루신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은 중간에 그 나라가 무너지거나 실패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상황이나 조건도 하나님이 이루신 나라만큼은 흔들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때 ‘신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임을 알게 될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면 분명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 이후 자손들의 신앙 상태입니다. 다윗 이후의 자손들이 신앙으로 산다면 몰라도 만약 그들이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간다면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이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앞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4-15절을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을 어떻게 대하시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이 죄를 범하면 징계하는 것은 있겠지만 사울처럼 은총을 빼앗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에게서 은총을 빼앗았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든 똑같이 사울에게처럼 대하셔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이 죄를 범해 버림을 받았다면 모든 사람 역시 죄를 범한 자는 버리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자손은 만일 죄를 범한다고 해도 징계는 하겠지만 버리시지는 않는다니 그렇다면 사울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사울보다는 다윗을 더 마음에 들어 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다윗 자손에 대해 그러한 약속을 하신 것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따로 존재한다면 죄인은 죄인이되 다같은 죄인이 아니라는 논리까지 가능해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만 들게 되면 많은 복들이 쏟아질 것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가 있습니까? 속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깨끗한 속 중심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행함이 속 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속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으로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되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왜 그렇게 대하신 것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시듯 죄를 범할 때마다 은총을 빼앗아 버린다면 폐하여지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집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은 성취되지 못하고 중단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죄를 범해도 징계는 할지언정 은총을 빼앗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단지 다윗 자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신 것은 다윗을 세워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이지 다윗이란 한 개인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에서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나 한 개인을 위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만인이 원하는 하나님 상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개인을 위해 존재하시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을 위해 집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가문의 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부강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 다윗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다윗의 나라는 다윗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뜻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있는 것이고, 이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다윗을 택하시고 영원한 견고한 약속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다윗 시대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어진 관심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은석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석교회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나 자신이 예수님보다 교회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여러분 개인의 생활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관심거리를 하나님께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일하시는가를 면밀히 살피고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의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 한 개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14절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몸에서 난 자식의 아비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죄를 범한다고 해도 아비는 자식을 징계는 할지언정 버리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아비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아비로서 자식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식이 어떤 짓을 해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히브리서 12: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아들이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징계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행하시듯 은총을 빼앗은 것은 없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영원한 약속에 견고히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다른점이요 신자와 불신자의 다른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아들이면서도 아들다운 모습에 머물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를 견고히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울처럼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도 죄를 범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죄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고의적으로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책망할지언정 은총을 거두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세우신 약속 때문입니다. 이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도,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폐하여지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루십니다. 인간에게는 그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약속을 훼방하는 쪽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그럴때 마다 징계하시고 돌이키시고 고치시면서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은혜 앞에서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도 행위도 높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의 행위를 높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시 89:30-35절을 보면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약속에 대해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규례대로 행치 않고 율례를 파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고 성실함을 폐하지 않고 언약을 파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범할 생각을 하지는 않으시겠죠? 죄를 범한 자를 그냥 봐주고 넘어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시고 징책하실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자라면 구원에 대해 불안한 마음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도 벌만 받을 뿐이지 지옥에는 안간다’고 하면서 안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은혜로 시작하였으면 은혜로 마치십시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 받은 자로서 뭔가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곧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에 보답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혜로 구원 얻음을 고백하면서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고 버리는 것이 은혜를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지금의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말씀에 머물지 못하고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해도 은총이 거두어지고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복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나올 수 있게 된 근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삶에 고달픔과 피곤함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까지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4강) 사무엘하 7:18-24 하나님을 알게 됨


<본문>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사무엘하 7:18-24)

 

 

 

 

<설교>

 

믿음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끌어가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입니까? 만약 후자라면 인간이 믿음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믿는 결정권이 인간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구원도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서 신을 섬기는 인간의 정성과 노력에 점수를 매겨서 정성이 갸륵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정성이 부족한 사람은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분명 이런 하나님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인간을 찾아오셔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덕분에 하나님께 불려나와 신자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을 세우시고 그 약속에 따라 다윗의 자식이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징계를 하실지 언정 사울처럼 은총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의 자식은 참으로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존재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연 다윗이 무엇이관대 이러한 놀라운 약속을 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정성을 칭찬하시면서 약속을 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정성스런 마음이 얼마든지 부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정성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겨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이 낮아지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섬김 덕분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약속, 섬김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윗에 부어졌던 은혜와 동일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고 있고, 하나님의 섬김으로 인해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부여받은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반응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뭔가 보답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은혜 자체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세상에 대한 일과 생각으로 그 정신이 지배받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신자라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은지를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반응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목을 하늘로 쳐들고 좋은 것을 구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절을 보면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궁에 편안히 거할 때(1절)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하였지만 도리어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집을 세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견고한 약속위에 세워주심에 대해 ‘내가 누군데 이렇게 대해주십니까?’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깊으신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으며 하나님의 섬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과연 다윗과 같은 반응을 나타내며 살아가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심을 몰랐겠습니까?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은 다윗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다 다 인정하고 믿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새삼스럽게 주 외에는 참 신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말은 전에는 하나님이 찬 신이라는 것을 단지 들어서 알고 있었던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참 신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이 고백 이전에도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이 알고 있던 참 신은 인간의 섬김을 받으시는 신이었고, 인간은 하나님을 정성껏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정성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알게 된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을 섬기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떤 종교가 이런 신에 대해 언급을 합니까?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의 모습, 여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섬겨주면 복주는 신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 역시 이런 신의 속성에 통합하여 생각할 뿐입니다. 결국 우상과 구별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하고 참된 신이시고 너희가 믿는 것은 다 우상이다’는 말을 합니다. 전혀 다르지 않고 구별되지 않는 신을 들고 ‘나의 신이 참되다’고 고집부리는 꼴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종교성에 맞아 떨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다가오시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약속 위에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식까지 세우심을 통해서 세상에서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이분이야 말로 참 신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3,24절을 보겠습니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들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는 이 말에서 생각해 볼 때 다윗이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의 놀라움, 감사와 감격은 세상 어떤 나라가 이스라엘과 같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 영원히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 일이 세상 어느 나라에 주어졌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무런 한 것이 없이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다윗에 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항상 ‘주십시오’라는 부르짖음만 되풀이 하고 있는 인생들이 얼마나 가난합니까? 과연 여러분은 어떤 믿음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인간은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우리 역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속하시고 우리를 섬김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누가 이런 복을 받았습니까? 돈많은 사람들이 부러워 보입니까? 성공한 사람들에 비해 여러분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집니까? 돈을 자랑하고 지위를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섬김을 외면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유일신, 참된 신이라고 떠들면 뭐합니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 신을 섬기는 자로서의 당당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돈도 지위도 우습게 보여져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부요한 믿음일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늘의 복을 자랑하지를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영원한 생명의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돈으로 살아가는 세상 앞에서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인생이 초라하게 보여져야 합니다. 참된 신이신 하나님을 만났고 알게 되었다면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윗은 새롭게 계시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버림받고 죽어 마땅한 자에게 오셔서 섬기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섬김을 받고 복을 주는 하나님은 참 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앎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섬김과 복을 받고 우리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내게 이런 복을 주시는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또 복을 받을만한 그런 사람도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까지 우리의 생명을 위해 희생하셨는데, 우린 엉뚱한 것에 관심을 돌리면서 받은 것이 없다고 아우성일 뿐입니다. 불평과 불만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어떻게 비춰질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같으면 당장 버려 버리겠는데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은총을 거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신을 세상 어디에서 들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의 것이 아무리 많이 주어진들 심판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왜들 모르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세상이야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지만, 소위 하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십자가의 구원에 대해 감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섬겨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모든 것이 한낱 종교놀이로 비춰질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새롭게 받아야 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부를 이미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내어 놓으신 것을 받고 누리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에 그러한 대목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1:17-19절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생활의 환경과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에베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고, 성도 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소망을 알고 영광의 풍성함을 알고 은혜를 아는 이것이 사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고 받은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이 기도가 오늘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중요하고 복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것은 팽개치고 하잘것없고 사도가 배설물로 여기는 것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야 말로 빈약한 신앙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신자와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풍성한 은혜보다 더 큰 것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닫고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은 감격과 감사가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앎이 여러분의 신앙에 큰 힘과 담대함으로 자리하면서 여러분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신자는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 신자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 이 받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받고 싶어 하는 가난한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받아 누리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5강) 사무엘하 7:25-29 다윗의 기도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사무엘하 7:25-29)

 

 

 


<설교>

 

오늘은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기도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분명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옳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성경 또한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해로 인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신자로서의 참된 기도와는 동떨어진 기도로 전락해 버린 모습도 많이 보여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잠언서 28:9절에 보면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기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말씀과 상관없는 기도는 오히려 가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기도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기도가 옳은 것이 아니며 신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악만 더욱 쌓아가는 행위로 남을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도 한다’라는 것보다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분위기는 기도를 하는 것에 치중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보다 기도를 할 것을 강조하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기도하라는 강조의 말이 없다 할지라도 자연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인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가 기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교회가 버려야 할 것은 기도를 오래 하고 많이 하는 것을 무조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를 많이 하라거나 오래할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에 보면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쉬지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오랜 시간 기도하라는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자는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해서 받는 것’ 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모든 사람이 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욕망과 소원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망과 소원은 자기 배부름에 있습니다. 자기 배부름을 위해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배부름과는 거리가 먼 기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6:31-32).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즉 이방인은 오직 자기 생존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자기 생존의 풍성함을 두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내용을 담은 기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음으로써 이방인들이 행하는 종교적 기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앞서 잠언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기도는 오히려 가증할 뿐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을 떠난 기도는 자기의 욕구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듣는 자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알지 못한 이방인들은 신자의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식들이 죄를 범하다 해도 징계는 있을지 언정 은총을 거두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에 대해 다윗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18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감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자신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지금껏 알지 못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27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해 집을 세우리라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을 때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앎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풍성하신 은혜, 긍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은 약속을 가지고 죄인된 인간을 찾아오시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섬기시는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하나님을 알았을 때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정성도 아니고 내 신앙의 덕목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알게 된 앎에 의해서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소원 외에 다른 소원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실컷 말해 놓고 끝에 가서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라는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 바른 기도를 했다고 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는 말 한마디로 자신의 기도를 옳은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컷 구하고 나서 아버지의 뜻에 맡긴다는 말 한마디로 자기 욕심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는 정당성을 스스로 갖기를 원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말 한마디에 속아 넘어가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육신과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지 우리의 육신의 문제, 육신의 일을 하나님의 뜻과 연관하여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다윗의 자식이 죄를 범해도 은총을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자식에게 은총을 거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은총을 거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문제를 두고 기도한 후에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육신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 포부와는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의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라고 말하는 것이나 28절에서 ‘말씀이 참되시니이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무엇을 의지하고 기도를 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9절의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는 기도를 보면 다윗은 주 앞에 영원히 있는 것을 참된 복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집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깨달으며 감사하면서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야 말로 말씀의 성취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약속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씀에서 자신의 집이 누릴 복을 바라봤다면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이미 누리고 있는 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주셨고 누리고 있는 은혜와 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는 자처럼 ‘달라’는 말만 외치는 이방인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라는 다윗의 기도를 곰곰이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다윗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주 앞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주의 은혜로만 이루어짐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근거하고 은혜를 의지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야겠다는 욕구로 가득찬 현대인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람이 스스로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 존재입니다. 다들 기도를 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신 그들만이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그들이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면 굳이 기도를 가르쳐주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단순히 암송할 내용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도가 어떻게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드러내시는 것이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범위가 없습니다. 이 말은 교회를 향한 욕심도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즉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무조건 옳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교회가 쇠약해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까? 내 교회만은 항상 잘되기를 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우린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길로 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에 영원히 거하기를 소원할 뿐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뿐입니다. 신자가 어떤 힘든 길을 가게 된다고 할지라도 신자에게는 영원한 복이 있으며 풍성한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로 인해 보호받는 든든한 울타리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26강) 사무엘하 8:1-14 승승장구


<본문>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저를 쳐서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을 죽이고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의 가진 금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또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파하였다 함을 듣고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로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파함이라 요람이 은그릇과 금그릇과 놋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사무엘하 8:1-14)

 

 

 


<설교>

 

사람은 타인의 입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아픔을 겪고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슬퍼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승리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 자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대학입시에서 자신의 자식이 합격을 했을 때, ‘내 자식이 합격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불합격하여 실망하고 있을 것이다’는 생각으로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혹 있다면 승리로 인해 주어진 여유에서 나타나는 관대함일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자신의 자식이 입시에 실패했을 때 ‘내 자식이 실패함으로 다른 사람이 합격했잖아’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안위를 얻는 사람이 있을까요? 혹 있다면 이것은 자식의 실패로 인해 낙심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고의로 마음의 여유를 보임으로 실패 속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는 자기 지탱이 아닐까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러한 생각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포기는 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포기를 할 수 없는데 나 말고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는 말에 대해 반발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는 말로서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한 정당성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냐는 주장으로 펼침으로써 여전히 자기입장을 고수하겠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두고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분명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난 타인의 입장을 바라보며 하신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니까 그러한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 당연하지’라고 말씀하고 싶습니까? 하지만 이 생각이야 말로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다’는 비신앙적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를 단지 추앙하는 대상으로 여길 뿐,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신앙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외치고 죽은 것을 보면 ‘예수님이니까 그렇지’라는 말은 끝까지 자기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의 고집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역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도와주는 도구로 인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을 주는 성경구절이 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도와주고 성공하는 쪽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머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본문 역시 그러한 오해를 일으킬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설교 주제 그대로 다윗의 승승장구입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며 빼앗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블레셋(1절)을 정복하고, 모압(2절), 소바(3-8절), 아람, 암몬, 아말렉, 에돔(9-14절) 등을 정복한 것입니다. 다윗이 정복한 이 나라들은 이스라엘보다 약한 국가들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만 해도 이스라엘로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강대국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강대국을 하나하나 격파하면서 승승장구하는 다윗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매맞고 고통을 겪는 내용을 볼 때, 사실 그들의 사명감에 대해 감동을 갖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나 자신을 그러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본문의 다윗과 같이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하나님께 열망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고 어떤 인생길로 인도하셨는지, 또 하나님께서 어떤 뜻과 생각으로 다윗에게 이렇게 일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의 대상도 아닙니다. 오직 다윗에게 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본문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때로는 자기 백성을 고난으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다윗에게 하신 것처럼 승승장구하는 인생으로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고 싶으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무조건 고난으로만 인도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게 하시는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라면 과연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신자가 성경에서 보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깨달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도 동일합니다. 다윗을 승승장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입장에서 벗어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좋은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기 입장을 고수한 채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의 내용을 자신의 소원과 일치시키려는 노력만 하게 될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비록 다윗이 승승장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본문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6절, 1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구절입니다. 즉 다윗의 승승장구의 배경에는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가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 문구 하나를 두고서도 생각은 갈라지게 됩니다.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자의 생각과,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둔 자의 생각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둔 신자가 이 말씀을 대한다면, 어디를 가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는 방향의 생각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자는, 다윗의 승승장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나에게 그만한 조건이 있어야 함을 생각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이 자신을 승승장구의 길로 인도하실만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결국 조건을 갖추기 위해 뭘 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식의 신앙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향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는 것은 다윗에게서 그만한 조건과 자격을 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의 승승장구와 다윗의 인간됨됨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엉망으로 살았는데도 승승장구의 길을 주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엉망으로 살았다면 그를 징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벌이 아니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일 뿐입니다.

 

 

 

 

다윗의 승승장구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차원에서 생각해야합니다. 7: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단선지자를 통하여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심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바른 신앙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즉 다윗이 날마다 승승장구하는 현실에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판별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승리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언제나 잊지 않는 것으로 판별됩니다. 즉 승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관심을 다윗의 승리에 두고 있습니다. 다윗의 승리가 부럽고, 다윗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좋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승리가 주어진다면 승리로 기뻐할 뿐,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는 멀어질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마음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래서 승승장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별 것 아닌 존재인 나를 승승장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경우에든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것이고 감사함을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입장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승승장구하는 것이 좋아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단지 입에 붙여 놓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받아서 좋다는 것이겠죠. 이러한 사람은 싫어하는 것, 즉 승승장구 대신에 실패와 고통이 주어진다면 당장 감사도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운 모습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셨음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야 말로 이스라엘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의 도구로서 약자, 즉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그들의 이웃으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다윗이 만약 자신의 승승장구만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기뻐하였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승리를 기뻐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이 강한 국가가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공로이며 은혜임을 잊지 않는 것이야 말로 다윗다운 모습이며, 이스라엘의 참된 왕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9장에서 사울의 아들인 므비보셋 얘기가 언급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이 약자에 대한 반응에서 나타나고 분별되는 것처럼 다윗의 다윗다움이야말로 므비보셋을 대하는 것에서 분명히 분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승리를 바라보고 좋아하기보다는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기 바랍니다. 다윗에게도 관심을 두지 말기 바랍니다. 인간을 두고 따진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섬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고 이기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약속 안에서 다윗을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좋아해야 할 분은 누구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라고 하시겠죠? 하지만 어떤 하나님이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승리를 주셨다는 것으로 감사한다면 나중에 좋아하지 않은 것이 주어졌을 때 감사가 아니라 원망이 나오게 될 뿐입니다. 신자가 의지해야 할 분은 나같은 자에게 이같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승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섬김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설사 고난에 위치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은혜와 사랑에 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와 사랑이 삶의 모든 영역에 자리하고 우리를 다스릴 때 신자다움이 마음껏 증거될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높이는 신자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27강) 사무엘하 8:15-9:8 공과 의


<본문>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 장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이 되니라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종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다윗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 보시나이까(사무엘하 8:15-9:8)

 

 

 

 

<설교>

 

세상은 윤리와 도덕을 기준하여 의를 판단합니다. 윤리와 도덕에 부합된 행동을 하면 의로운 것이고, 부합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위 자체가 의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어떤 행동을 하느냐로 의와 악을 판단하기에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으로 남기 위해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의와 악에 대한 이러한 의식구조가 믿음에 대해서도 큰 오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즉 신앙의 의로움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 행위로 규정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을 기독교적 행위의 열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다니는 것을 자연히 의로운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8:15절에 보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과 의로 다스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부정부패가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뜻이겠습니까? 왕이 축재를 하지 않고 재물에 욕심이 없이 오직 이스라엘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겠습니까?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분명 그러한 것을 공과 의로 여길 것입니다. 현 사회에서도 백성이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공과 의가 바로 그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공과 의가 그러한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세상의 국가가 다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 국가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공과 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백성을 다스리며 행한 공과 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9장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알 수 있습니다. 9장의 내용은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어떻게 대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다윗이 백성을 공과 의로 다스렸다고 말한 뒤에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다윗의 공과 의가 무엇이었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 공과 의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고 우리 역시 공과 의로 다스림을 받은 자들이며 또한 공과 의를 행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 역시 8:16-18절의 내용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6-18절에는 요압이 군대 장관이 되고,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사독 아히멜렉이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레셋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자리 차지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다윗의 신하로서 이스라엘에서 어떤 자세로서 일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이 공과 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처럼 이들은 다윗의 다스림 아래서 공과 의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 여러분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1-12절에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자로 불렀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신하들이 다윗의 다스림 아래서 다윗의 공과 의로 행하여야 하는 것처럼, 신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린 그 다스림을 행하며 살아가야 할 자로 부름 받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린 그 다스림이 무엇인가를 9장의 내용을 통해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9장의 내용은 무척 의미 있고 중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1절에 보면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종 시바를 통하여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남았는데 그가 절뚝발이라는 것과 마길의 집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데려오게 되고, 사울의 밭을 다 돌려주며 항상 다윗의 상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7절). 즉 므비보셋을 왕과 함께 하는 자로 지극히 높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공과 의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봐도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분명 공과 의로움일 것입니다. 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이야 말로 왕의 훌륭한 인격이며 공과 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본문은 과연 다윗의 훌륭한 인격을 소개하고 높이기 위해 기록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다윗의 인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윗이 공과 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공과 의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성경의 관심입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찾는 것은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요나단을 인하여라는 말은 요나단과 한 언약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20:15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42절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는 것은 요나단과의 약속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후손이 누구든 상관없이 은총을 베풀기로 작정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또는 설령 그가 악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공과 의입니다. 이 공과 의로 인해서 므비보셋이 은총을 입고 높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중점은 ‘은총을 베풀리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다윗도 므비보셋도 은총을 베풀리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보여주는 도구로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므비보셋과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로 높임을 받은 존재가 아닙니까? 절뚝발이인 므비보셋을 다윗의 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높여주신 은총을 베푸셨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우린 다만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공과 의로움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약속을 인해서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전혀 보지 않으시고 다만 약속을 인하여 찾으시고 부르시고 높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십니다.

 

 

 

 

로마서 6:14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실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것은 법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만약 법으로 다스림을 받았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을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주어질 몫은 심판이겠지요. 이것이 다윗의 왕국이었습니다. 7장에서 살펴본 대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한 것은 하나님을 법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에 대해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곧 법적인 시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식이 죄를 범하면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은총을 빼앗지는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며 다윗은 이 의로써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을 통하여 공과 의의 실제를 보여준 것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은혜 아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죄에 의해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요나단으로 인하여 은총을 베풀리라고 한 것은 다윗의 왕국이 어떤 속성의 왕국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공과 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면 다윗 왕국에 속해 있는 모든 백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다윗을 배신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을 거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의 은총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8절에 보면 다윗의 은총을 입은 므비보셋이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말을 합니다. 므비보셋의 이 고백이야 말로 자신을 알고 은총을 안 사람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은 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실제 자신을 그토록 하찮은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다윗의 그러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므비보셋에게는 다윗으로부터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다윗을 위해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쓸모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13절에 보면 므비보셋은 두 발이 다 절뚝이었습니다. 두 발이 모두 절뚝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13절 마지막에 이것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므비보벳은 다윗과의 어떤 법적인 관계에서 그러한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요나단을 인해서라는 것입니다. 약속, 그것 하나로 인해서 왕의 자리에서 함께 먹는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9-30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은총 앞에서 므비보셋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고백이 없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깊은 감사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은 개 같은 존재임을 아십니까? 은총이 아니면 구원의 가망은 전혀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왕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 된 존재로 높임 받게 된 것입니다. 죽은 개 같은 우리를 용서 하시고 은총을 베푸신 이것이 사랑이며,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약속으로 인해서 용서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고 건지실 자를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이 의를 그대로 적용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이 의로 말미암아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의 앞에서 우리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야 말로 공과 의로 다스리는 다스림을 벗어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자손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 의해 보복을 받아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무서워 말라’(7절)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법적인 관계로 므비보셋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할 우리가, 멸망에 처해야 할 우리가 생명에 거하게 된 이유를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은총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용서로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과 의로 다스림 받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은총으로 다가오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법적인 관계로 다가서려는 오류를 인간이 범하고 있습니다. 은총을 말하면서도 법적인 위치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의로운 행위를 만들어서 그것을 조건 삼아 복을 챙기려는 악한 의도를 버리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말하되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것이고, 은총을 말하되 은총 아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공과 의, 사랑을 말하되 공과 의로 다스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웃을 만나고 대할 때도 항상 법적인 관계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용서로 다스림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랑과 용서의 다스림 아래 있기 때문에 멸망의 자식이 아니라 생명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예수님의 것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은 공과 의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 왕국의 신하로 세움 받은 사람들은 다윗이 다스리는 공과 의 아래서 이스라엘을 세우고 돕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군대 장관으로 사관으로 제사장으로 서기관으로 신하로 부름 받았습니다. 높고 낮음의 의미가 아니라 여러분을 다스린 하나님의 공과 의로써 이웃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공과 의를 증거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고 은총을 베푸신 사랑과 용서하심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항상 감사하면서 내가 받은 사랑과 용서로 이웃을 만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세상에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발이 다 절뚝발이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대단하게 보고 계십니까? 착각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분수를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베풀어진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이 감사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대단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죽은 개 같은 존재가 모이는 곳입니다. 사회적인 신분과 위치, 부요함으로 인해 구분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만 죽은 개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경험만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러한 고백과 경험이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공과 의가 우리를 살리고 있는데 여러분의 행위에 관심을 두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면 결국 특정한 행위를 신앙적인 행위로, 의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신앙이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삶은 그 자체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28강) 사무엘하 10:1-5 거부당한 은총


<본문>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 보내매 혹이 이 일을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사무엘하 10:1-5)

 

 

 


<설교>

 

본문의 내용은 앞의 9장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9장에서 살펴본 내용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푸는 다윗과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말로서 크게 감사하는 므비보셋의 반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얘기가 등장합니다. 2절에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라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요나단을 인하여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처럼 역시 하눈의 아비 나하스로 인해 하눈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하스란 사람이 다윗에게 어떤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성경이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윗이 이방인으로부터 어떤 은총을 받아야 했다면 그것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시기가 가장 가능성이 큼으로 그때 도움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은 므비보셋이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반응을 보인데 반해 하눈은 다윗의 은총에 대해 의심하고 다윗의 신복들을 조롱한 것에서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다윗의 은총이 므비보셋에게는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진 반면 하눈에게는 거부당한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것은 죽은 나하스를 신하를 보내어 조상하는 다윗의 호의에 대한 의심 때문입니다. 3절의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조객을 보낸 호의를 자기들의 성을 엿보고 탐지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의 중동볼기까기 자르고 돌려 보냄으로서 다윗의 은총에 대해 조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므비보셋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눈처럼 거부하고 오히려 은총을 모욕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자’라는 다짐 아닌 다짐으로 끝내 버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므비보셋처럼 감사와 기쁨의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즉 ‘나는 절대로 하눈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은총을 오매불망 원할 것인데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감히 누가 거부한단 말입니까? 또 누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역시 하눈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어느 한순간의 감상적 생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순간의 감상적 생각으로 인해 스스로 속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말씀을 들을 때 ‘감사하다. 기쁘다’라는 생각과 느낌이 있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단정 짓는 것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낌과 생각만으로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신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들 말씀으로 인해 감동을 받고, 예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은혜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며,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산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고 느끼게 된 것에 내 마음과 삶이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에 개입되지 못하는 것은 그 생각과 느낌이 아무리 신앙적이라고 하더라도 죽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생각과 느낌으로는 은총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은 보지를 못하고 단지 생각이 있고 느낌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 한다면 결국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은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사는데도 자신은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 본문이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게 된 원인은 다윗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조문객을 보낸 다윗의 호의를 자기들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하는 계략으로 의심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의심을 갖게 된 것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다윗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으며, 다윗과 친한 관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문객을 보낸 것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호의를 보인다면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나하스의 죽음에 대해 조객을 보낸 것은 하눈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나하스가 다윗에게 베푼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윗과 자기들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그러한 호의를 보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객을 보낸 호의를 베푼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은 그 아비 요나단을 인해서였습니다. 하눈에게 은총을 베푼 것도 하눈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아비 나하스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우리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계산하면서 은총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지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은총으로 대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에 있지 않는데 그런 나에게 은총을 베푼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태복음 5:45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분이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분입니다.

 

 

 

 

단적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도 복은 내려집니다. 심지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복은 내려집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분위기 상 이런 말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 등의 행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탱을 하고 있고, 그런 관계를 내세우며 복은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분통이 터질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사상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야 할 이유이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복이 내려지는가?’라는 생각에 머물게 된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로 인해서 베풀어지는 은총을 거부한 것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의심을 갖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무조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무조건이라는 것이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항상 조건을 앞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을 한다면 사랑할 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고, 친절을 베푼다면 친절을 베풀만한 이유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조건적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총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게 되는 것으로 복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주어져 있는 은총에 대해서도 조차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처럼 악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신을 속이려고 하고 거짓말을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악의를 갖고 있을 때 그들이 나에게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호의도, 사랑도 조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도 조건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은총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은총을 베푸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 앞에서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돌아볼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잘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말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다 된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리기를 신앙은 느낌과 생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의 말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여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느낌과 생각이 삶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가 무엇인가는 므비보셋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십니까?’ 이것이야 말로 은총에 대한 최고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반응이 드러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죽은 개 같은 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신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겠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도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비교하고 무시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은총을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은총을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무시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이 곧 은총을 거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심으로써 은총에 거하게 하셨고, 이 은총을 아는 자로 산다면 누군가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눈은 다윗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지시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배려는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웃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욕하지 않게 됩니다. 부끄러운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베풀어진 은총이 무엇이며 무엇을 근거로 하여 베풀어졌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으로 삶이 다스림 받는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은총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느낌과 생각이 있으니 신자로 살고 있다는 생각은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에 속는 것입니다. 은총을 거부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은총으로 사는지는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삶에서 여러분의 실체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9강) 사무엘하 10:6-19 이방인과 이스라엘


<본문>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요압이 앞 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뺀 자 중에서 또 빼서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치고 그 남은 무리는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붙여 암몬 자손을 대하여 진치게 하고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요압과 그 종자가 아람 사람을 향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저희가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의 도망함을 보고 저희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어 강 건너편에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저희가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대 장관 소박이 저희를 거느린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승의 사람과 마병 사만을 죽이고 또 그 군대 장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사무엘하 10:6-19)

 

 

 


<설교>

 

다윗이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었으나 하눈은 다윗이 자신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고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여 돌려보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6절을 보면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흡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눈이 다윗의 신복을 모욕하고 보낸 뒤에 다윗이 분노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이 할 일은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눈은 여러 곳에서 군사들을 고용하게 된 것입니다. 고용했다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군사를 사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방식입니다.

 

 

 

 

하눈은 다윗에게서 다만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많은 군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많은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 생각이며 이방인의 전형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다윗의 많은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군사만 많이 모으면 다윗을 대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 사람만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이방인들을 나무랄 입장이 되지를 못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고 우리는 그들처럼 살지 말자가 아니라 이미 그들, 즉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방인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사람을 보며 살아온 존재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빙자하여 사람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수가 교회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게 되고, 교회의 크고 작음은 인간의 자존심과 연결되어 이기에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 돈을 주고 군사를 사 모으는 암몬이라는 이방인 방식인 것입니다.

 

 

 

 

총회가 열릴 때마다 끊이지 않는 것이 총회장 투표 부정입니다. 총회장에 당선되기 위해 자기 편 사람을 만들려고 돈을 얼마를 풀었다는 말이 항상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고 있는 이방인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정당한 것입니까? 은석교회는 사람을 모으기 위한 의도로 총동원 전도주일과 같은 행사를 하지 않으니 사람을 보지 않는 정당한 교회입니까? 만약 그렇게 본다면 눈이 어두워져 있는 소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정당한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사람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암몬과 암몬을 돕는 아람을 치고 이스라엘로 승리하게 하는 내용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분명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암몬 자손이 잘못해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나는 정당하고 저들은 나쁘다는 구별만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구별이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잘못된 생각을 이끌어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가는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여보낸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결국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고 애굽을 나오게 되지만 애굽은 악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은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서 그들을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애굽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광야에서의 원망으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애굽의 것을 사모함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을 후회하는 것이야 말로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정당하고 의로운 자들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자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악해도 봐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악함을 어린양의 희생으로 대속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다른 점은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수없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행위를 가지고 타인과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 그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자신은 아주 정당하게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곧 행위를 가지고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별을 하는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눈이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듯 나 역시 예수님의 크신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자에게 무슨 은총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니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방인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으로 여기는 정당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 믿을 것을 권한다면 ‘나는 예수 믿고 있고 너는 안믿는다’는 구별의 자세를 버려야 한답니다. 그리고 ‘나 역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심정에서 믿음을 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모든 것들이 믿음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떨 때입니까? 그런 행위가 있는 자신을 정당하게 여길 때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은총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행하는 것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로 서게 하는 도구로 작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타인에 비해 정당한 자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사 사람을 100명 살해한 살인자 앞에서도 우리는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죄의 본성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장에 보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10장에 이어 11장에서 그러한 얘기가 등장할까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 주일에 드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신뢰했던 다윗이지만 그가 남의 아내를 범합니다. 결국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사람이 못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눈이 군사를 모았다는 말을 들은 다윗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요압과 용사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아람과 암몬은 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을 들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단지 사람만을 보면서 대적하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치기 위한 것이지 이스라엘이 정당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할 수 없는 자신을 보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이 살길임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가 되기 위해 정당하지 못함을 고백한다면 그것은 위장일 뿐입니다. 여전히 정당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당한 신자로 여기심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여겨주심일 뿐입니다. 결국 정당한 신자로 여겨주시는 것조차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요압이 아우 아비새를 독려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이 말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신들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정당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압의 이러한 착각이 곧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교회 일은 곧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식을 갖고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분명 도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뭐든 교회와 연관된 일은 하나님의 뜻을 동원합니다. 이것은 모두 엉터리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다가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봅니다’라고 변명을 합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암몬 자손을 돕기 위해 나왔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자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섬기며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기준에 의해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리한 대로 자신에게 좋은 대로 변하고 행동하는 이방인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믿음 역시 그와 같지 않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기준으로 하여 변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갑니까? 믿음을 말하면서 항상 내 편한 대로 살고, 나에게 좋은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예수 예수’ 하다가도 나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는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치 못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 이방인을 끌어 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우리의 정당치 못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자신의 정당치 못함을 보는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뭔가 엉터리로 여겨지는 교회나 교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우리 교회, 나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질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정당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은 옳고 네가 하는 것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때입니다. 이방인이든 신자든 세상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는 자신의 악함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언제나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즉 자기 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고 하면서도 신앙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뭔가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된 이방인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임을 아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아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께 무척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제발 건성으로 흘려듣는 것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방인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시고 무엇이 이방인이며 무엇이 참된 이스라엘인가를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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