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하자 (창 5:21-24)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 시간에 “하나님과 동행하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성경학자들이 성경에서 한 가지 중대한 의문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출애굽 때부터 성전건축 때까지 연수가 열왕기의 기록과 사도행전의 기록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출애굽 때부터 성전 건축 때까지 있었던 일들이 연수와 함께 나타나는데 이것을 합하면 모두 573년입니다.
그런데 왕상6:1에서는 성전건축 시작시점이 출애굽으로부터 480년이라고 말씀합니다. 93년의 차이가 납니다. 성경이 틀린 것일까요? 틀리지 않다면 왜 두 기록 사이에 93년의 차이가 있을까요? 그러나 그 차이는 사사시대에 하나님이 계수하지 않은 93년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하고 이방의 종이 된 해는 성경에 계수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 3장에 이스라엘은 메소보다미아 왕을 8년 섬겼고, 모압 왕을 18년이나 섬겼습니다. 또 사사기 4장에서 가나안 왕 야빈을 20년 섬겼고, 사사기 6장에 미디안을 7년 섬겼고, 사사기 13장에 보면 블레셋을 40년 섬겼습니다. 합해보면 모두 93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날이 아닌 날은 사는 날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에녹이 지상에서 365세를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 계수된 것은 65세 이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1. 우리 인생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요8:29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동행했더니 함께 하셔서 외롭지 않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까지도 아버지께서 온전히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16:32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외롭지만 않으면 인생은 살만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 틈에서 사는 것이 가장 큰 복인데 그러나 사람 틈에서 산다고 고독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함께 하실 때만 외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의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A.D.354-430)은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말고 어디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품 안에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다고 믿고 염려하고 붙잡는 모든 것을 놓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된 일이고 자동화된 세계에 내가 들어 왔는데 내가 염려 하고 있구나 하면서 일단 어떻게 되든 염려하지 마시고 은혜 주셨다고 믿고 안심해 보세요. 그럼 진짜 함께 하심을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시는 찬송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 찬송은 예수의 복음을 가장 잘 표현한 찬양 중 하나입니다. 이미 은혜 주신 것을 믿고 염려와 근심 내려놓고 든든한 마음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전1:30-31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면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요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먼저는 정서적인 밝음입니다. 강력한 평안이 강물처럼 임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밝게 됩니다.
가장 싫은 것을 묻는다면 저는 어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싫습니다. 해도 짧고 날씨도 춥고 날이 흐리거나 낮에 밖에 나오지 않으면 또 다시 긴 밤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푸념으로 열대지방에서 살든지 유리온실에서 살든지,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밝아집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요. 예수님 때문에 웃어요. 우리 주님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또 빛은 선이고 어둠은 악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동행하면 항상 선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을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이기는 생명이시고 강물 같이 흐르는 생명의 강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과 동행이 본격적이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떠밀려 다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집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죄악이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죄수들의 어머니로 불리던 미국의 캐서린 로즈여사가 있었습니다. 로즈여사는 평생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농아들에게는 수화를 가르쳤고 맹인들에게는 점자를 가르쳤습니다. 1937년 어느 날, 그녀는 그만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에 교도소에 알려지게 되자 죄수들이 교도소장에게 “소장님! 저희들이 교도소 밖으로 나가 캐서린 로즈 여사에게 문상을 하고 경의를 표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 분은 우리의 은인입니다.” 그 부탁을 들은 교도소장은 그런 엄청난 부탁을 듣고 한참 망설였지만 평소에 그 캐서린 여사의 감동적인 헌신을 알고 있었고 또 그 흉악한 죄수들이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캐서린 로즈 여사를 존경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승낙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도소장은 죄수 600명에게 잠시 동안 외출을 허용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600명의 죄수들은 한 줄로 서서 그 캐서린 로즈 여사의 운구행렬을 뒤따랐는데 그 길이가 무려 800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들꽃을 하나씩 따서 한 송이씩 들고 캐서린 로즈 여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날 저녁 600명의 죄수는 단 한 사람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교도소로 돌아왔습니다. 존경하는 캐서린 로즈에게 누를 끼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위해서는 양심도 버린 죄수들이건만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주님과 동행하면 이처럼 변화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럼 어떻게 동행하는 것일까요?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암3:3)느냐고 했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하늘보좌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나를 내려놓고 주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3:7-9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한 멍에 매시려면 예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훈련이 그 훈련입니다. 첫째는 믿음의 훈련,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믿으세요. 그리고 거기에 준해서 사세요. 다음은 순종의 훈련, 나를 내려놓고 내 염려도 내려놓고 하나님 뜻에 맞추는 훈련입니다. 이 믿음과 순종만 있으면 안식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두 가지가 부족해서 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고 광야에서 끝난 것입니다.
우리도 광야 수준에서 연단만 받다가 두려움 속에서 생애 끝내지 말고 가나안 단계에서 살다가 기쁨 가운데서 천국 문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믿음과 순종만 있으면 우리는 안식의 단계 안에 들어가 평안함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히 동행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으니 그것을 믿고 주와 함께 동행하십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에녹과 같이 우리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더 이상 외롭거나 어둠에 다니지 않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밝게 살아가는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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