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뛰어 넘는 신앙을 갖자 (시18:1-3, 27-29) (요약) 누구에게나 절망의 담이 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담을 뛰어 넘으려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심을 믿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럼 담을 뛰어 넘는 담대한 신앙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온다(시18:1).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는 강한 원동력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온다(시18:29). 예수님이 우리의 도피성이요 반석이시다. 부르짖는 자에게 온다(시18:3). 항상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시인할 때 온다(시18:28). 예수 안에서 불가능이 없음을 믿자. (설교) 이 시간 함께 나눌 말씀은 “담을 뛰어 넘는 신앙”이라는 제목입니다. 별로 크지 않은 한반도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155마일 휴전선의 철조망과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남북을 갈라놓은 휴전선 장벽은 지정학적인 단절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적 단절을 지어왔습니다. 분단 6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북한의 언어를 새로 배워야할 만큼 남과 북의 이질화가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벽은 세상 어느 곳에도 있습니다. 미국같이 잘사는 나라에도 넘지 못할 담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철조망과 콘크리트 장벽은 없어도 저들에게도 엄청난 고민이 있습니다. 그 흑백의 담입니다. 그리고 마약, 범죄 자살, 청소년 문제 등의 담입니다. 부자의 나라 미국도 넘지 못하는 높은 담입니다. 그런데 이 넘어야 할 담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보면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요셉에게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떤 의원에게도 치료 받지 못했습니다. 여리고성 거리에는 소경거지 바디메오도 마찬가지입니다(마20:29).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38년 된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요5:2). 아무도 그를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도 그랬습니다(행3:2). 가다라 지방의 공동묘지에는 귀신들린 광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마8:28). 어떤 쇠사슬도 쇠고랑도 그를 묶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에 죄인 세리장 삭개오도 그런 사람입니다(눅19:2). 자신에게 놓여 있는 한계를 넘지 못해 실망한 그들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모두 담을 뛰어 넘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도 파란 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자와 이리가 위협하는 들판에서 양을 쳤고, 또 무수한 날을 그의 생명을 찾는 사울 왕을 피해 다녔고, 왕이 된 후에도 수많은 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높고 낮은 무수한 담장들을 뛰어 넘어야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와 같은 담대한 믿음이 그에게서 나올 수 있었을까? 함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 함께 승리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담을 뛰어 넘는 담대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원수와 대적을 무찌르고 승리케 하신 날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 그 담대한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시145:19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91:14에도 “저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특별보호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만 또 하나는 사랑할 때 아무런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왜 어머니는 강합니까? 사랑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중동에 자살폭탄 테러를 하는 사람들 왜 두려움을 모릅니까? 그들 나름대로 자기 신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요일4:18에도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전쟁에 아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속죄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담대히 오실 수 있었던 것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은 안팎으로 높은 담을 뛰어 넘는 첫째가는 비결입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담을 뛰어 넘습니다. 29절에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시91:9~11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이렇게 의지하는 사람이 도우심을 받습니다. 오늘날의 전쟁은 미사일이 적진을 파괴하고 비행기가 폭탄을 퍼붓고 탱크를 앞세우고 보병이 올라가서 깃대를 꽂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칼과 활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싸우던 시절의 전투의 양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꼭 필요한 것은 “요새”입니다. 누가 더 뛰어난 요새를 확보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터득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원자탄 수소탄이 터진다면 어디로 숨습니까? 준비해 놓은 방공호로 숨어야 합니다. 준비할 것은 준비해야 해요. 방독면도 준비하고 패트리어트 미사일도 준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 준비해 놓아도 하나님께 숨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가장 현명한 것은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페트라 성으로 숨는다니 무슨 계룡산으로 숨는다니 그런 소리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소리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소리가 못됩니다. 만인의 도피성 되신 우리 주 예수님께 숨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 다 감당하게 하십니다. 어떤 피신처를 준비하게 하시든 도와주십니다.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피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전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3. 부르짖는 자가 담을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3절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6절에도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소상하게 아뢰고 부르짖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뿐 아니라 부르짖을 때 담대함을 주십니다. 담대함도 큰 은사인데 부르짖을 때 옵니다. 삿 15장을 보면 삼손이 목이 말라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히려고 할 때 부르짖자 우묵 패인 곳에서 샘이 터졌습니다. 우리도 부르짖으면 우리 심령에 은혜의 샘이 터집니다. 이 때 영혼이 강해집니다. 그 때 상상할 수 없는 담대함이 옵니다. 엡3:16에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하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강건함이 부르짖을 때 옵니다. 어린이가 태어날 때 크게 울어야 폐가 건강하다고 합니다. 나방도 고치를 트고 나올 때 도와주면 영영 나방노릇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놔두면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강해진다고 합니다. 간혹 부르짖는 기도를 하고 나면 얼마나 심령이 강해지는지 모릅니다. 다윗도 부르짖었습니다. 그랬기에 큰일을 했습니다. 우리도 부르짖으십시다. 그러면 담을 뛰어 넘을 능력이 옵니다. 4. 항상 하나님의 구원을 시인하는 사람이 담대하게 됩니다. 28절에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수많은 대적들에게 첩첩히 둘러싸여 있을 때 얼마나 그 상황이 어둡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함께 이미 하늘에 앉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복음에 서서 예수님과 함께 승리했고 영화롭게 되었다고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예수 안에서 승리자입니다. 성공자입니다. 부요자입니다. 형통자입니다. 권능자입니다” 이렇게 믿고 노래하세요. 그러면 사단도 물러갈 줄 믿습니다. 저주도 물러갈 줄 믿습니다. 환경도 물러갈 줄 믿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긍정적인 시인이지 그냥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우리가 긍정해야 할 아무런 근거를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이루신 복음을 보세요. 그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것을 믿고 시인하세요. 우리가 그 복음을 시인할 때 우리의 어둠을 이기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큰 벽이 있다 해도 예수 안에서 넘지 못할 벽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다. 복음에 서서 시인하십시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능력을 주시며 담대함을 주시고 형통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그 어떤 벽도 다 뛰어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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