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선택 (신30:15-20)
(설교 요약)
우리는 생명과 사망 복과 화 두 종류 앞에서
선택해야 하는 가운데 있다.
그 중에서 오직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 시간은 지금이다.
진리일지라도 선포되기 전과 후는 상황이 다르다.
선포된 후에는 그 선택을 피할 수 없고
선포되는 즉시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원리는 예수의 복음 앞에서 순종을 요구하며
믿음 여부에 따라 현재 영생과 영벌로 구분된다.
또한 율법이 순종 여부에 따라 복과 저주라는 결과로 구분되었듯
모든 말씀과 사명 앞에서도 우리는 순종과 충성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맡기신 것마저 옮기시게 된다.
(강해)
오늘 함께 은혜 나눌 말씀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제목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가 죽기 전에 자기 앞에 선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으로 권면하며 생명이든 사망이든 복이든 저주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선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는 오직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함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이냐? 사단이냐? 신앙이냐? 불신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축복이냐? 저주냐? 생명이냐? 죽음이냐?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슬프게 할 것인가? 이렇게 항상 두 가지입니다. 다른 중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선택은 시간에 있어서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역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가령 냉면 먹으러 가서 물냉면인가? 비빔냉면인가?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일이기 때문에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기서는 내일 결정하겠다는 말은 안 통합니다. 미루는 것은 안 먹는다는 것과 같이 간주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은혜 받아야 하고 지금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고 히3:13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지금 반드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 가운데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슨 선택을 피할 수 없을까요? 그것은 말로 할 수 없이 중요한 몇 가지의 사실입니다.
1.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선택입니다.
수24:15에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데 본문과 같이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말씀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미 붙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한 말씀과도 같이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은 우리들이지만 이제는 오직 다른데 마음 두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믿고 그 분만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발견이 주어졌을 때 즉시 선택해야 할 사항입니다. 참고적으로 신지식에 대해서 전혀 없을 때와 신지식이 주어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면서 행17:30에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할 때는 허물치 않았지만 지금은 복음이 여러분 앞에 다가왔으니 지금 즉시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흔히 복음을 모르던 우리 조상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 토론하는데 예수 말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몰랐을 때는 이미 죄 아래 있고 소망이 없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혹시 특별한 기회를 주신다면 모르지만 현재로 봐서는 장차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겠지만 살아생전 그 때 넌 지옥 갈 사람 이렇게 선고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복음이 선포된 이상은 내용이 달라집니다. 그 때는 그 복음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왕의 명령입니다. 왕의 명령 앞에서는 사람은 선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복음 앞에서 거부는 물론 무관심과 유보조차도 자신이 멸망자의 편에 선 자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이 우리에게 다가온 이상 더 이상 믿음에 지체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택은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영생이냐 영벌이냐 구분하고 선고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3:18에 예수님께서는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복음이 하나님의 심판대가 되어 사람을 당장 둘로 갈라놓습니다. 저 미래에까지 갈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복음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영생이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사망선고를 내립니다. 그래서 고후2:15-16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믿어야 할 강력한 의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고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마음속에서는 영생이 있고 거부하는 자 속에는 사망이 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복음을 몰랐기에 영생도 몰랐고 영적 사망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알았지만 거부하다가 율법 아래서 사망이 왕노릇하는 현실적인 지옥생활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회개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돌아올 기회는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의 장래 지옥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30:16) 분명한 결정을 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시간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신앙 뿐 아니라 우상과 죄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겠다는 생명의 선택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지금 피할 수 없는 것은 복이냐 저주냐 하는 선택입니다.
신11:26-28에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했습니다.
여기 오늘날이라 했듯이 생명과 사망은 물론 복과 저주도 나중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율법이 그들 앞에 주어졌을 때 그 율법은 이스라엘을 빠른 시간 안에 축복과 저주의 사람으로 나누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지 전에는 정죄도 없었고 심판도 없었고 지킬 의무도 없었지만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복을 받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말씀에 무관심하거나 거역하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피할 다른 중간은 없었습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 앞에서 복을 받든지 저주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 이것은 장난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우리는 우리 앞에 다가온 이 복과 저주 앞에 분명한 자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일로서 복 받을래 아니면 무관심하다 저주 받을래 중간은 없다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복된 일에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거부하면 주신 것도 빼앗으십니다.
주의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많이 맡기셨든 적게 다 맡기셨든 그 때까지는 가부간 잠잠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어떤 사명이 앞에 당도하면 그 일에 내게 주신 은혜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반드시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명에 충성하면 복이 오지만 이래저래 불평하고 거부하면 만물의 주인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 이상 맡기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거두어 가십니다.
저는 그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성도들도 모두 하나 되어 충성하는데 많은 것을 가진 그 분은 그 사역 앞에서 이 불만 저 불만 하는 일이 훼방만하고 협조하지 않다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꼬여서 그것을 다 가져가 버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물질만 가져가셨지만 그 사람은 그 물질로 인해 마음 고생하다가 건강까지도 무너져 젊은 나이에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엊그제도 어떤 간증을 들으니 동일한 일이 거기서도 있었더군요.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 최고로 드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가장 많이 드리고 가장 큰 복을 받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 축복의 물결에 동참하지 않다가 다 가져가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엄숙한 사실 이것을 가르쳐 주어야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일이 어떤 이에게는 축복의 냄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일이 저주의 냄새가 됩니다.
파사 나라의 수문지기 모르드게가 왕비 에스더에게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 했습니다. 그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아뢰어 민족을 구하고 민족도 살리고 에스더와 모르드게는 전보다 더 큰 영광과 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귀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영생이냐? 영벌이냐? 복이냐? 저주냐? 이제 우리는 이 중대한 갈래 길에서 지금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신앙과 충성을 택하여 생명과 복과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히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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