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의 복음, 예수의 교회
정병선 목사님의 마가복음 강해를 소개합니다. 정 목사님은 수원 한길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사로 사역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목사직을 사임하고 지금은 건강을 돌보면서 저술활동에 힘쓰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어느 목회자의 고백>과 출판을 준비중인 <욥기 묵상>이 있습니다. -편집자 주-
마가는 마가복음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당시에 복음이란 구전으로, 즉 말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때는 오늘날처럼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 율법도 그렇고 예수의 복음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들을 마가가 자기가 처한 시대적 상황이나 교회적 상황을 감안해 마가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 마가복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가복음은 마가복음으로 읽고 해석해야지 다른 복음서와 뒤섞어서 읽어버리면 마가 고유의 해석을 놓치게 된다. 마가복음은 마가복음으로 읽어야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요한복음과는 다른 마가복음 고유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마가는 이 글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지금부터 마가가 전하는 것은 그냥 복된 소식이 아니라 예수가 주인인 복음, 예수를 빼면 성립할 수 없는 복음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관련이 있는 복음, 예수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복음, 예수가 전하는 복음,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가가 이야기하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예수가 어떤 일을 했는지, 예수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를 알아야 예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예수의 정체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지 않는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함으로써 예수가 비범한 권위를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해주고 있지만 예수의 완전한 정체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마가복음 전체를 읽어야 비로소 예수가 어떤 분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전체를 다 읽기 전까지는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를 미리 상상하거나 규정해서는 안 된다. 마가복음을 읽어가면서 마가가 전하는 예수가 어떤 분이지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이 마가복음을 읽는 정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마가는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14절에서는 예수가 선포한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15절에서는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한다. 이걸 연결하면 예수의 복음은 곧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와 하나님나라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의 모든 것, 즉 그의 삶과 죽음, 가르침과 사역이 전부 하나님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있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다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고 가르치는데 집중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의 삶을 깊이 읽어보면 분명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나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나라가 예수의 전부였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나라만을 위해 존재했다. 탁월한 종교적 지혜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깨달음을 얻으려 한 적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일이나 모세의 종교를 견고하게 세우는데도 관심이 없었다. 가족을 지키고 성공하는 것은 더더욱 예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위대한 정치가가 되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독립시키는 것도 예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훌륭한 교육자가 되어 백성들을 깨우치는 것도 예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나라의 복음만을 위해 살았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해 죽었다. 하나님나라에만 충실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나라의 실체였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고유함이 있다. 다른 어떤 성자, 어떤 지혜자, 어떤 인간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나라와 관련된 삶을 산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추구했다. 공자는 인(仁)의 세계를 추구했고, 노자나 장자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사는 도(道)의 세계를 추구했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넘어서는 해탈의 세계를 추구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 하나님나라를 추구했다.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하나님나라를 완성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죽었다. 그래서 예수와 하나님나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예수가 없이는 하나님나라가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나라를 빼놓고는 예수를 말할 수 없다.
교회의 전부인 하나님나라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무리들이 모인 교회, 이 교회를 성경은 예수의 몸이라고 하는데, 예수의 몸인 교회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두 말할 것 없이 교회도 예수님처럼 하나님나라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나라 외에 다른 무엇도 교회의 마음과 정신을 빼앗으면 안 된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성을 높이 쌓고 교회 왕국을 세워서는 안 된다. 교회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나라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고 증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았듯이 교회도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교회의 모든 것을 쏟아야 한다. 하나님나라가 예수의 전부였듯이, 하나님나라가 교회의 전부가 돼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진정한 예수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곳이 될 수 있다.
예수의 길과 교회의 길
그런데 역사 속의 교회가 정말 그렇게 해왔는가? 예수님처럼 하나님나라에 집중했는가? 안타깝지만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추구하지 않았던 것들을 열심히 추구해왔다. 예수님은 유대교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세우려 하지 않았는데, 교회는 교회라는 왕국, 기독교라는 종교 왕국을 추구해왔다. 예수님은 힘을 추구하지도 않았는데, 교회는 힘을 추구해왔다. 예수님은 출세를 위한 성공술이나 처세술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교회는 출세를 위한 성공술과 처세술을 가르쳐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았는데,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성공을 보장해주었다. 예수님은 종교의 껍데기를 벗겨내느라 진력했는데, 교회는 종교라는 껍데기로 자기 보호막을 쳤다. 예수님은 모든 차별과 경계의 벽을 허물었는데, 교회는 예수님이 허물어뜨린 벽을 다시 쌓았다.
그래서 교회를 바라보면 예수의 흔적이 별로 없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나라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을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하는데 정진해야 하는데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 요즘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붙들고 씨름해봐야 사람들이 모이냐? 안 모인다. 흥미 없어 한다. 그러니까 별 수 없다.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는 종교 서비스를 해야 사람들이 모이니까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다 보니까 세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교회를 보라. 실제로 세상에 유행하는 것들이 교회 안에서도 똑같이 유행하고 있다. 세상의 가치관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예수의 이름으로 활개를 치고 있다. 예수 이름만 부를 뿐이지 하는 짓이나 가치관은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교회는 조직이나 운영이나 헌금을 사용하는 것이나 성도들의 관계나 모든 것들이 하나님나라를 닮아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열방을 향해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 주어야 했듯이,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모델하우스가 돼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지상 모형이요, 하나님나라를 보는 창이어야 한다. 바로 거기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다. 그런데 현실 교회를 보면 하나님나라는 안중에 없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예수 이름으로 보장해주느라 정신이 없다. 바로 이게 현실 교회의 문제다.
예수는 유비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삶과 생각이 독특했는데 교회는 예수의 그 독특함을 잃어버렸다. 예수의 독특한 인격과 삶 속에 임했던 하나님나라가 교회에는 증발해버리고 없다.
2.회개를 말하나 회개가 없다 / 예수와 하나님나라(2)…마가복음 통해 본 예수
회개의 복음
마가는 예수의 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암시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이야기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다. 그런데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요한이 무슨 일을 했는가?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를 맞이할 길을 닦는 요한이 한 일은 다른 게 아니라 회개를 선포하는 일이었다. 이건 뭘 말해주는가?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이 곧 예수를 맞이할 길을 닦는 일이라는 걸 말해준다. 달리 말하면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만 예수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세례 요한만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냥 복음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여기서 회개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아파하는 것이 아니다.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도 아니다. 회개는 후회와 다르다. 회개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이 방식을 청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기를 벗는 것이요, 비우는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돌아서는 것이다. 가치관의 대 전환이요 삶의 대 전환이다. 나 자신과 삶 전제를 송두리째 재배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그런데 이런 회개가 있어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복음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는 비움의 복음이다. 먼저 비워야 한다. 비우지 않고는 담을 수 없다. 비우지 않고는 하나님나라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없다. 하나님나라가 아닌 것을 비워야만 하나님나라로 채울 수 있다. 비우지 않고 채우려 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고 두 번이나 말했다. 그렇다.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의 나라는 하늘에 있고, 세상 나라는 땅에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예수의 나라를 살 수 없다. 익숙해진 세상살이 방식에서 발을 빼야 예수의 나라를 살 수 있고 그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예수의 나라, 하나님나라는 회개하는 자에게만 열리는 세계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가능성의 세계
그 하나님나라는 이미 때가 찼다. 이미 가까이 있다. 누구나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무르익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가능성의 세계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예정론을 많이 말해왔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누구는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이 누군가는 영원히 멸망시키기로 작정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이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구원받을 수 없도록 그렇게 운명을 정해 놓으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이시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분이시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을 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여기서 “저를 믿는 자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는 말이다. 베드로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그렇다. 하나님이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한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그 가능성의 세계는 열리게 되어 있으니 회개하라고 말한다.
회개를 말하나 회개가 없다
그런데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어떠한가? 교회가 전하는 복음에는 회개가 없다. 아니, 회개를 말하기는 한다. 그런데 교회가 요구하는 회개는 종교적인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해서만 목청을 높인다.
예배 빠진 죄, 열심히 교회 봉사하지 않은 죄, 목회자에게 불순종한 죄, 헌신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이 잡듯이 대들지만 거짓말한 죄, 정직하게 세금 신고하지 않은 죄, 불의한 상사의 요구에 순응한 죄, 지나치게 사치하고 낭비하는 죄, 사람을 멸시하고 차별한 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그러니까 회개를 말하기를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없고 교회가 가는 길에 걸림돌 되는 것들을 치우기 위해서 회개를 들먹일 뿐이다.
오늘 교회가 외치는 회개는 예수님이 선포한 회개하고는 내용이 다르다. 말이 같다고 해서 같은 내용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예수님의 말과 오늘 교회의 말도 그렇다. 겉으로 들으면 같은 말 같지만 내용을 따져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특히, 회개, 구원, 교회, 하나님나라 등 이런 개념들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들인데 이처럼 중요한 개념들이 오늘 교회에 와서는 상당히 변질되어버렸다. 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대에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론, 교회론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론과 교회론으로 다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안타깝지만 우리 교회가 당면한 현실이다.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회개와 관련해서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 자신이 요단강에 나가셔서 세례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다. 사실 개인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구태여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무슨 이야기? 모든 인간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듣기 위해 반드시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내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주겠다. 내가 비록 회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의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들을 대표해서 내가 먼저 이 길을 가노니 너희도 이 길을 따라 오너라.’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자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좋아한다.” 여러분, 이건 뭘 말해주는가? 하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소통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하나님나라가 예수님에게 임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회개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이 열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 진실로 회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문이다.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복된 회개
그러므로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말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잘못 사용되어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면 성도들이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말은 정말 부정적인 말이 아니다. 매우 긍정적인 말이다. 정말 좋은 것을 줄 테니 못된 것 내놔라 그 말이다. 죽은 삶을 내놓아라, 그래야 진짜 삶을 살 수 있다는 그 말이다. 껍데기 삶을 버리고 알짜배기 삶을 살라는 말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니 여러분, 회개하라는 말을 기쁘게 받으라. 회개는 정말 좋은 것이다. 최고로 좋은 것이다. 참된 복을 받는 유일한 비결이 바로 회개다.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회개하라는 말이다.
회개할 때 복음이 열리고, 회개할 때 복을 받는다. 회개할 때 사단의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유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회개할 때 쓸데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거리던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나라로 비상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복된 회개를 잃어버렸다. 회개를 매우 기분 나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시시콜콜한 목회자의 잔소리로 만들어버렸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진정한 예수의 사람은 회개하는 자다. 그것도 한 번 회개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회개하는 자가 진정으로 복된 자요 은총을 받은 자다.
또 회개하는 만큼 구원의 영역은 확대된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인가?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헌신이요, 하나님나라를 향해 살아가는 것이 사명이고,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은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는 것(헌신)은 엄청 강조하면서도,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구원)은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사실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는 것보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헌신보다 더 앞선 것이고, 신앙의 본질이고,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 먼저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먼저는 아니다. 사랑을 받아봐야 사랑할 것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라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라기보다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도 그렇다. 하나님나라를 살아봐야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 아닌가. 하나님나라를 살아보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교회 안에서는 끊임없이 설교되고 있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은 별로 안중에 없고,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라고만 강조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처럼 교회가 하는 걸 보면 거의 앞뒤가 바뀌어 있다. 성경을 이야기 하기는 하는데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말은 같으나 내용이 다르다. 참으로 안타깝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만이
여러분, 구원은 죽고 나서 천당 가자는 이야기가 핵심이 아니다. 구원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만이 구원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구원, 하나님나라를 살라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면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았으나 죽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소통 없이 살아가는 것은 빈껍데기기 때문에, 진짜 삶을 살라고, 하나님나라를 살라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안에서 하나님나라를 살기 위해 힘쓰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자가 진정으로 복된 자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보다 더 알짜배기 삶은 없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보다 더 완전한 삶은 없다. 다른 건 다 부차적인 것이다. 부차적인 것에 목숨 걸지 말라. 진짜를 붙잡고 씨름하는 인생이 되라. 하나님나라를 붙잡고 씨름하는 인생이 되라. 물론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요, 삶이요, 생명이요, 행복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을 외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전심으로 하나님나라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그런 사람이 진짜 예수의 사람이다.
3.누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 예수와 하나님나라(3)…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막1:6-11)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 세례 요한은 예수를 소개하면서 스스로를 비교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다. 자기는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이라고 소개했다. 이 소개에 의하면 마가는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을 예수님만의 특이점이요, 존재의 탁월함의 증표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를 이해하는 키워드를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
세례가 무엇인가? 세례는 어떤 세례든지 세례 받는 것으로 완전히 채워진 것을 의미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담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누가 마르크스의 세례를 받았다면 그 사람은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똘똘 뭉친 사람을 뜻한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마르크스적이다. 그래서 어디를 찔러도 마르크스의 사상이 튀어 나온다. 유교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 판단하는 것이 철저하게 유교적이다. 뭐든지 공자와 연결시키고 공자에게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린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는 것은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이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저 적당히 반쯤 담그고 마는 것은 세례가 아니다. 머리 꼭대기까지 완전히 담궈야 세례다. 그러기 때문에 함부로“세례”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예수를 만나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혜다. 예외가 없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추구하는 것이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성령에 속한 것들이 나와야 한다. 성령 이외의 것들이 그 속에 있으면 안 된다. 적어도 언어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령에 속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나온다. 나 자신의 삶을 보아도 성령에 속하지 않은 것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 세례를 받고 난 후에는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사상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기 전이나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하며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은 전혀 마르크스 사상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받기 전이나 똑같은 생각, 똑같은 가치관, 똑같은 것을 추구한다면 그건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세례라는 게 그처럼 시시한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를 주시는 목적
세례는 어마어마한 내용과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도 어마어마한 변화를 위해 하는 작업이다. 하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작업이요, 또 하나는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나라를 살게 하려고 성령 세례를 주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사람이 변화한다고 해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있을 만큼, 하나님나라를 살 수 있을 만큼 변화될 수 없다.
제자들을 보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여 있었다. 제자들이 예수의 이적과 능력을 직접 목격하고, 둘씩 짝지어 전도 사역을 나가기도 하고, 많은 가르침을 받기도 했지만 제자들의 세계관이 바뀌었던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했던가? 아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서로 누가 크냐고 경쟁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안 될 일이라고 가로막고 나설 정도로 바뀐 게 없었다. 예수의 말씀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가 가는 길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제자들이 언제 바뀌었는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변화됐다. 성령을 받고 나서야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예수를 알되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식대로 알았을 뿐이다. 예수가 한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예수가 하신 말씀이 뭘 의미했던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문자로만 들었지 문자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듣지는 못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도 물론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예수가 부활한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저들은 믿지 않았다(막 16:11, 13). 하여 예수님께 믿음 없음과 마음이 무딘 것을 인하여 꾸중을 들어야 했다(막 16:14).
한편 예수님은 꾸중을 하면서도 제자들을 향해서 상상하기 힘든 말씀을 한다.“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여러분, 놀랍지 않은가? 예수님이 죽기 전에 죽음과 부활을 몇 번씩이나 예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하고 방황하는 저 한심한 제자들을 향해서 어떻게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놀라운 사명을 맡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했다. 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면 그들이 변화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야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성령을 받고 나서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나라 라는걸 알게 되었다. 성령을 받고 나서야 하나님나라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성령을 받은 변화의 증거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아는 눈이 열린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기 때문에(고전2:10-11) 성령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아는 눈이 열린다. 또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과 그분의 뜻,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도 열린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 더욱이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나무 한 그루, 모래알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와 사랑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새로운 진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에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된다. 명예나 성공보다 사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다. 구제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된다. 종이 한 장이라도 아끼게 되고, 물건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된다.
특히 성령은 사랑과 포용의 영이요 평화의 영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이 성령의 성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은 폭력을 죽음보다 싫어한다. 거칠고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걸 견디지 못한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대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군림하지 않는다. 성령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에 죽임의 문화를 거부한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진정한 증거들이다.
결국 성령을 받으면 성령만 내 안에 들어오는 게 아니다.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세계 전체가 내 안에 들어온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관심사가 확장된다. 하나님의 세계 전체, 우주 만물로까지 삶의 영역이 확장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깊이의 세계, 즉 성경의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세계관이 근본부터 재구성된다. 이런 변화, 새로운 눈뜸은 예수를 만난 순간 열린다. 나중에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세계를 아는 지식이 정확해지고 확장되기는 하지만 눈이 열리는 것은 순간이다. 그러니 이것이 성령이 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이나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 영향을 받아도 사람이 변하고 삶이 변한다. 20세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의 사상에 미쳐 생명을 걸고 공산혁명에 참여한 것을 보라. 지구촌의 절반을 공산주의 사상이 지배했지 않은가. 한 사람의 사상도 이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영이 자기 안에 들어오면 어찌 변화되지 않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몸에 익은 생각이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영, 본질과 차원이 다른 영이 내 안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변화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을 받으면 삶의 전 영역과 존재의 근본 바탕이 변화하게 되어 있다. 일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게 되어 있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인간됨을 위하여
성령은 인간을 인간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 예수님이 사람을 불러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사람을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영적으로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 만들려고 그런 것이 아니다. 신비한 능력을 주려는 것도 아니다. 소위 ‘영빨’ 있는 사람 만들려는 게 아니다. 주님은 나를 나 되게 한다. 세상이 알아주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나 아닌 나로 살아가는 나를, 하나님이 만드신 내 모습 그대로 내 고유함을 잃지 않고 나로서 살게 하려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보게 된 것은 나였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만 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보니 그 속에 내가 보였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내가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내 안에 숨 쉬고 있다는 게 보였다.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 되려면 사람만으로 안 된다.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다시금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야만 사람다운 사람, 참 사람이 될 수 있겠기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임마누엘을 위하여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데는 매우 근본적인 목표가 또 하나 있다. 그건 임마누엘을 위함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사상적인 영향이나 종교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다. 그 정도는 예수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석가·공자·노자·플라톤·마호메트·간디·마르크스,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런 정도를 훨씬 뛰어 넘어 아예 우리 안에서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기를 원했다.“너는 내 안에 살고, 나는 너 안에 살자.”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요, 염원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하나님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이것이 하나님나라요 창세 전부터 꿈꾸었던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자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나님이 우리 속으로 들오는 길밖에 없다.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 주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4.은사 환원주의를 경계하라 / 예수와 하나님나라(4)…하나님나라와 은사(막1:6-11)
성령은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는 것이지 은사를 위해 성령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은사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지, 은사를 주는 것 자체가 성령을 주는 근본 목적은 아니다. 방언, 예언, 병 고침, 축사(逐邪=귀신이나 요사스러운 기운을 물리쳐 내쫓음) 등 소위 강력한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들을 위해 성령을 주는 것은 아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런 은사가 임할 수도 있고, 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더욱이 방언, 예언, 병 고침, 그런 것만이 은사는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매우 다양하다.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고도 할 수 있다. 또 특정한 사람만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누구나 은사를 받는다. 은사는 주시는 분의 뜻대로 주실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방언을 하면 성령 세례 받은 것이고 방언을 못하면 성령 세례를 못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이 터진 것은 성령이 임했다는 외적인 증표(Sign)로 주신 것이지, 성령이 임했다는 유일한 증거로 준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나라로 연결되는 것이다. 모든 크고 작은 강들이 바다로 흘러가듯,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하나님나라 라고 하는 바다로 흘러가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바다로 흘러가지 않는 은사는 결국 고여서 썩고 만다. 모든 은사는 쉬지 않고 하나님나라로 흘러가야 그 은사가 부패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나라를 살라고,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살라고 주는 것이지, 은사를 위해서 주는 건 아니다. 은사는 부가적인 선물로 따라오는 것일 뿐 성령 세례의 본질은 아니다. 이걸 분명하게 정리해야 한다. 이게 분명하지 않으면, 은사 문제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가능성이 많다. 은사에 집착하고 은사에 집중하다가는 영적 신비주의에 함몰될 위험성이 매우 많다. 은사 자체에 집중하는 건 성령 세례를 신앙적·신학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은사 지상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은사를 거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지체들을 섬길 수 있는 아름다운 도구다. 하나님나라를 사는 데 꼭 필요한 필수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하나님나라를 살라고,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살라고 주는 것이지 은사를 주는 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나라를 통치하는 분의 영이요, 하나님나라를 지배하는 영이요,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게 하는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나라의 바다로 쉬지 않고 흘러가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성령세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고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자로 살기 시작했다. 이 대목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고 나서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시작했다는 사실 속에는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의 비밀을 말해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 메시지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다른 어떤 인간과 다르게 특별한 그리스도가 되시는 까닭은 특별하게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거나,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거나,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었거나,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어떤 가르침보다 훌륭했기 때문이거나, 예수님의 삶이 성자 같은 삶이었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탄생에, 예수님의 행하심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하나님이 영으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으로 예수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사역자로 일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성도인 것은 그의 삶이 세상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영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말씀대로 살았기에 의로운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그의 삶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의로운 것이다.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제자들을 보라. 그들의 사역이 주님의 사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사역 위에 주님께서 함께 일하셨기 때문이다(막 16:20). 마태복음서에서도 말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바로 여기에 제자들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인간적인 종교적 차원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진실이 이러하니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살기를 힘써야 한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 삶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율법적으로 완전하다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예수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사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사는 자만이 참 사람이다.
오늘날 뇌과학이 발달해서 뇌의 신비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참 반가운 일이다. 인간 최후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뇌의 신비가 밝혀지면서 뇌가 인간을 지배하는 영역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기질이나 능력, 성품과 인격까지도 뇌에 의해 좌우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가 인간의 정신과 인격의 세계 전부를 지배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뇌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성령은 더 폭넓고 더 깊은 곳까지 인간의 존재와 정신과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뇌의 지배를 받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게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겔11:9,37:14, 롬 8:1~11).
예수를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
마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초창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예수의 삶의 핵심 포인트 두 가지가 보인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향해 살았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았고, 친히 하나님나라가 되셨다. 하나님나라가 예수님의 전부였다. 둘째로 예수님은 성령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시작했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과 함께 사셨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이 두 가지가 예수의 삶의 핵심 포인트다. 그리스도인 역시 이 두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성령과 함께 살지 않는 자, 하나님나라를 향해 살지 않는 자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만 살아 있는 사람이지 실제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직 성령과 함께 살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사는 자라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요, 알짜배기 삶을 사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두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목숨과 뜻과 마음을 다해 이 두 가지에 쏟아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생존방식은 거칠고,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죽임의 문화가 기승하고 있다. 너무 복잡하고 분주하다.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삶의 의욕이 넘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활력이 살아 꿈틀댄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냉정하게 진실을 말한다면 거칠고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거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낙오하지 않고 생존해야 하니 어쩌겠는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거칠고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생존방식에 길들여져가는 걸 피하기는 어렵다. 너 나 없이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분위기에 휩싸여 살다보면 나도 뭔가에 미쳐 정신없이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야 사는 것 같은 착각이 왜 안 들겠는가.
하여 실제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신앙과 생활이 상당히 거칠고 공격적이다. 산만하고 분주하다. 그러나 이것저것 많은 일에 분주하지 마라. 할 수만 있으면 단순하게 살라. 성령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사는 데 집중하라. 여기에 최우선 순위를 두라.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모두는 가장 복된 삶, 가장 완전한 삶,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주인공들이 될 것이다. 성령은 예수에게 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삶의 본질에 집중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실 것이다.
5.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나라 / 예수님 발자취 따라가면 구체적인 하나님나라 보인다
마가복음 1:21~34 21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24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2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26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27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28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2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30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31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33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말이 아니라 실재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경험적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하나님나라는 기다려야 할 미래의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라면 오늘 여기서도 얼마든지 살아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니, 오늘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면, 진실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산다면 하나님나라는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임했다. 그분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나라가 사건으로 임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행적에는 언제나 하나님나라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하여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면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나라를 알기 위해 먼저 예수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말씀이 지배하는 나라
첫째,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잊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천재였다. 진리의 핵심을 꿰뚫어 아는 지혜가 있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가지고 설명하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막 1:21). 여러 고을을 다니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치다가 다시금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도 집에 가득한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했다(막 2:2). 심지어 바닷가에서도 사람들이 나아오자 그들에게도 말씀을 가르쳤다(막 2:13). 이처럼 예수님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말씀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 없이 능력만 행하거나 사역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항상 최우선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쳤다.
그렇다. 하나님나라는 말씀을 따라 사는 나라지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니다. 만일 진리의 말씀이 없다면, 아무리 능력이 대단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건 하나님나라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나라는 단지 행복하고, 단지 고통이 없고, 단지 질병이나 죽음이 없고, 단지 눈물이 없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본질적으로 말씀의 나라다. 말씀이 지배하는 나라요, 말씀이 살아있는 나라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산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깨닫고, 말씀과 생활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다. 말씀 따로, 사는 것 따로 인 것은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말씀과 생활이 하나로 통합될 때만 하나님나라다.
그러므로 교회가 제일 힘써야 할 것이 뭐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일에 매진해야 한다.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가다가 엉뚱하게 삼천포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말씀을 듣고 가르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고민이 있다. 예수님 당시를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달랐다(막1:22).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는 하는데 내용이 달랐다. 해석이 달랐다. 사람들이 듣고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도 한참 달랐다.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도 예수의 가르침과 많이 다르다. 교회는 그동안 교회의 유익을 위해 말씀을 많이 왜곡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정직하게 가르치기 보다는 많은 것을 덧칠해왔다. 그 결과 오늘 교회가 가르치는 말씀은 예수의 복음하고는 많이 다른 복음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런 교회를 통해서 과연 예수의 가르침을 정직하게 듣고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하여, 지금 이 시대는 제2의 종교개혁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교회의 가르침을 뒤로 하고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 새롭게 예수의 가르침에 귀 기울였던 것처럼, 21세기의 교회도 다시금 새로이 성경 속으로 들어가 예수의 순전한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우선 목회자들이 목회적인 많은 일들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서, 정말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게 뭐였는지 정직하게 묻고, 깊이 듣는 결단을 해야 한다. 목회자뿐 아니다. 그리스도인도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개인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냥 교회가 하는 말만 들어서는 한계가 있다. 개개인이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21세기 교회가 진정한 예수의 교회로 회복될 수 있다.
사단의 권세가 발붙일 수 없는 나라
둘째, 예수님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광야로 가서 40일을 금식하다가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는 일을 했다(막 1:13). 그 후로도 가는 곳곳마다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악한 귀신을 쫓아냈다. 예수님의 이 행적은 뭘 말해주는가? 하나님나라는 사단의 권세가 발붙일 수 없는 나라라는 것, 예수의 체제와 사단의 체제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체제라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 두 체제는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곳에 사단의 나라는 떠나야 했다. 사단의 권세는 철저하게 깨뜨려지고 짓밟혀야 했다. 사단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신이 예수를 만나면 두려워 떨었다. 예수의 나라엔 자기들이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 떨었다.
사단의 체제와 자본주의
그럼 이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단의 체제는 무엇인가? 그건 두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유일한 사단의 도구는 아니지만 틀림없이 이 시대를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그동안 공산주의는 사악하고 반기독교적인 정신이라고 배웠다. 대신에 자본주의는 기독교 정신(칼빈과 막스 베버)이 낳은 사상이라며 예수의 이름으로 자본주의를 축복하고 환영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이지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는 사회는 아니다. 자본주의 정신이 시작은 비록 기독교 정신에서 출발했다 할지라도, 현재의 자본주의가 하나님나라의 경제정신과는 전혀 다른 정신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시장만능주의, 무한경쟁주의, 자본의 잉여가치가 무한대로 늘어가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속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인간은 소외당하고 생명은 약탈되고 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이 이런 사회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겠는가? 공산주의는 그래도 비현실적이나마 이상주의를 추구하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 이상마저도 없다. 인간의 병적인 욕망을 그대로 인정하고 부추기는 탐욕과 욕망의 시스템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을 변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고착화시키는 시스템일 뿐이다. 요즘에는 사랑, 존경, 예술까지도 돈으로 매매하는 지경이 되었다.
예수는 공산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키는 분이다. 자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렇다고 돈을 벌지 말라거나, 집 없이 살라거나, 장사하지 말라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당연히 성실하게 일하고 합리적인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요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돈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가치에 속지 말자는 것이다. 부에도 처할 줄 알고 가난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밀을 갖고서 돈을 하나님 아래로 내려놓자는 것이다.
소위 2급 좌파라고 불리는 김규항 씨가 2005년 평신도 아카데미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에 대해 강의하면서 의미있는 말을 했다. “자본주의를 들여다볼 수 없다면 예수의 삶을 실천할 방법도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성경 공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이 말은 오늘의 교회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매우 충격적인 말이다. 잘 알다시피 오늘의 교회는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고 있다. 가장 충실한 자본주의의 종이 되어 충성을 다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자본주의를 공부하는 것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실체를 알아야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김규항 씨가 말하는 자본주의 공부는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공부를 말하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지를 제대로 공부하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김규항 씨 말대로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만일 자본주의의 실체를 제대로 공부한다면 그 교회는 이내 곧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성도들이 다들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축복을 염원하고 있는데 교회가 자본주의를 하나님나라에 적대적인 체제라고 가르친다면 어떤 성도가 남아 있겠는가? 어떤 목회자가 바보처럼 성도들이 떠나가는 길을 선택하겠는가? 그래서 교회는 결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이기적 탐욕을 넘어서지 않는 한 교회는 탐욕의 체제인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도 이기적인 탐욕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싸우면 싸울수록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자요, 실패한 자요, 낙오한 자라는 상처만 남는 현실이다 보니 그걸 넘어서지 못하고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나의 형편이다. 한 사람도 그러한데 많은 사람이 모인 교회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겠는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주님의 영을 받은 자가 어찌하겠는가? 이 싸움을 포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인 줄 알지만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아예 싸움을 포기하거나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패배할 줄 알지만, 패배할 줄 알면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그 길을 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다.
생명이 약동하는 나라
셋째,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병자들에게 최고의 환영을 받았다. 아마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가장 많이 하신 사역이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이었을 것이다. 앉은뱅이는 걷게 하시고, 장님은 보게 하시고, 열병을 낫게 해주었다. 수십 년이나 고질병으로 고생하던 자들을 순간에 치유하기도 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단순히 질병을 치유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질병 치유에는 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몸이 아파본 사람은 질병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안다. 몸이 아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생활이 무기력해진다. 정말 몸은 생활의 근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 몸을 통해서 성령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한다. 몸이 건강해야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몸의 건강은 하나님나라에 필수적인 요건이다. 건강한 몸 생활은 하나님나라 생활의 일부분임에 틀림없다. 하여 예수님은 건강한 몸 생활을 위해 질병을 치유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질병은 육체적인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싫어했다.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까 질병에 시달리는 자들은 육체적인 고통이라는 육체적인 소외, 하나님께 저주받았다는 영적인 소외, 사회의 일원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적인 소외라는 3중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사람에게 가난한 것이나 몸이 아픈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소외되고, 영적으로 소외되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채 사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라. 인간이 3중 고통에 시달리는 것보다 더 잔인하고 인간 모독적인 고통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사회는 정말 무섭고 잔인한 사회였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심판과 정죄가 판치는 인간 모독적인 사회였다.
이렇게 인간 모독적인 사회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며 치유해주었다. 사람으로 대우해주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신 것은 단지 육체만을 치유하신 게 아니다. 저들을 인간으로 대접해준 것이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다시금 복권시켜준 것이다. 내면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신 것이다. 저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위협받지 않는 세상, 생명을 짓밟는 일이 없는 세상,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일이 없는 세상, 바로 이런 세상이 예수와 함께 임한 하나님나라다.
종교를 넘어서는 나라
넷째,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매우 충격적이고 재미난 장면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알다시피 유대인 시회는 종교 중심적인 사회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다. 누구도 감히 그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독사의 자식이라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수님은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대제사장들을 종교적인 울타리를 쳐놓고 그 울타리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아 꼼짝 못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공격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꼬집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종교적 형식주의를 거부했다. 절기마다 금식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했다. 손 씻는 결례에 대해서도 얽매이지 않았다. 안식일에도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세리를 포함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예수님 일당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저것들은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마 11:1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비난하듯 따졌다.(막 2:18). 한 마디로 세속적이고 속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시라.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종교적인 세계가 아니다. 종교적으로 채색된 경건의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건강하게 먹고, 건강하게 싸고, 건강하게 일하고, 건강하게 노는 세계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식물이나 동물이나 곤충이나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들이 어떤 위협이나 억압도 없이,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 없이 자기 생명을 살아가는 세계가 하나님나라다. 예수님은 이런 생명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지 종교적인 경건의 세계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경건을 따라 살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았을 뿐이다. 바울은 장로들의 유전이나 종교적인 경건은 사람을 옭아매는 데는 유익이 있지만 하나님나라를 사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골 2:20~23)고 했다. 그러니 하나님나라에 충실한 예수님이 시답잖은 종교적 울타리를 걷어차는 게 당연했다. 결국에는 그것 때문에 대제사장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십자가에 죽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추구했던 하나님나라와 대제사장들이 추구했던 종교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 세계였는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해방의 사역, 자유의 나라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해방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①진리를 가르침으로써 거짓으로부터 해방시켰다. ②귀신을 좇아냄으로써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켰다. ③질병을 고쳐줌으로써 비인간적인 모든 소외로부터 해방시켰다. ④종교적인 억압과 굴레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의 삶을 비인간적으로 억압하고 옥죄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사역을 했다.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은 뭐든지 몰아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이 간 길은 인간 해방의 길이요 생명 해방의 길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의 희망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대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와 ‘아직은 아님’ 사이에서
하나님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미 왔다. 하지만 아직은 기다려야 할 미완의 세계다. ‘이미’와 ‘아직은 아님’(Aleady not Yet) 사이의 긴장점에 놓여 있다. ‘이미’와 ‘아직은 아님’(Aleady not Yet)이라는 이 긴장점은 하나님나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균형점이다. 이 균형점을 놓치면 많은 문제들이 꼬인다. 그리스도인의 현실과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석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면, 질병에서 치유 받지 못하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단죄해버린다든지,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증거라고 판단해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이해할 때는 반드시 ‘이미’와 ‘아직은 아님’(Aleady not Yet)이라는 균형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하여, 사단의 권세가 아직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 속에는 여전히 사단적인 요소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의 유행과 가치관과 문화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단의 체제와 싸워야 한다. 저 푸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찬 연어들처럼 이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나라를 향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이 싸움을 싸워야 한다. 비록 이 싸움이 쉽지 않은 싸움이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를 살고,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살기 위해서는 이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는 패배할 줄 알면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싸우면서 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다.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렇다.
6.하나님나라 비밀을 알고 계십니까 / 비밀스럽게 자라는 하나님나라…예수님처럼 복음에 진실한 삶이라야
마가복음 4:21-34 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비밀스럽게 자라는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는 마치 씨가 자라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다. 밤낮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데, 사람은 이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대목은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주인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나라가 자라기는 자라는데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비밀스럽게 자란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보면 자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 자라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마치 콩나물 자라는 것과 같다. 어린 시절에 집에서 콩나물을 많이 키웠다. 나도 때때로 물을 열심히 주었다. 물을 주다보면 곧바로 다 빠져 나가버리기도 하고, 또 어린 마음에 콩나물이 자라는 게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검은 천으로 덮어놓은 통 속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콩나물이 자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보면 콩나물이 자라 있다. 언제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비밀스럽게 자라 있다.
하나님나라가 그렇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나라는 자란다. 그러기 때문에 성급하게 결과를 보려고 하면 실망한다. 하나님나라는 그냥 묵묵히 기다려야 한다. 자라는 것 같지 않지만 자란다는 사실을 믿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리지 못해서 빨리 자라게 하려고 성장 촉진제를 주면 큰일 난다. 성장 촉진제를 주면 겉 자라서 키만 무성하게 크지 줄기에 힘이 없다. 조금만 바람이 불면 쉽게 꺾이고, 물이 마르면 금방 시들어버린다. 가지가 튼튼하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달고 지탱할 힘이 없다. 그래서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성질이 급하다. 목회자도 급하고 성도들도 급하다.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회를 세우면 어떻게든지 빨리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눈에 띄게 성장하지 않으면 능력이 없어서 그런다는 둥,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다는 둥 말이 많아진다. 어쨌든 빨리 성장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보니 빨리 성장시키려고 무리하게 성장촉진제를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보면 전체적으로 겉 자라 있다. 외형적으로 성장을 하기는 했는데 부실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여러분, 하나님나라는 인위가 작용하지 않는 세계다. 하나님나라는 본시 사람의 힘이나 의지로 자라게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만일 사람의 힘이나 의지가 작용하게 되면 세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무너진다. 인위가 작용하면 작용할수록 하나님나라는 하나님나라에서 멀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인위가 작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성질이 급해서 기다리지 못하면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를 앞지르게 된다. 인위가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를 찌그러뜨리고야 만다. 우리가 성질이 급해서 이런 실수를 참 많이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도록 맡겨두어야 한다. 하나님이 때에 맞게 자라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답답하지만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나라로 튼튼하게 자랄 수 있다.
마지막 순간에 정체 드러내는 하나님나라
비밀스럽게 자라는 하나님나라는 언제든지 겨자씨처럼 보잘 것 없이 출발한다.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많은 새들이 깃을 접고 쉴 수 있을 만큼 크게 자란다. 비록 자라는 것이 더딘 것처럼 보이고, 말씀을 뿌리는 것이 헛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는 쉬지 않고 자란다. 피상적으로 보면 세상이 승리하는 것 같고 여전히 악이 횡횡하는 것 같아 보인다. 과연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력하기 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나라가 이 세대 속에서도 자라고 있다고, 큰 나무로 자라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차면 등불에 숨겨진 모든 것들이 밝히 드러나듯이 하나님나라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막 4:21~23). 지금은 숨겨 져 있고 감추어져 있지만 마지막 진리의 등불이 환하게 밝혀질 때가 되면 지금까지 숨겨지고 감추어졌던 하나님나라가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누구나 볼 수 있게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그 나라가 만 천하에 계시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미래의 하나님나라는 현재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만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가진 자는 그 날에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소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구원과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 날에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다. 그가 지금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신뢰하는 태도
하나님나라의 이런 진실을 믿고 사는 자는 비관적인 낙관주의적 태도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눈앞의 현실을 보면 여전히 죄악이 판을 치고, 어둠은 언제 끝날지 암담하기만 하다. 사단의 체제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만 같다. 고통은 여전하고 기댈 곳을 찾아봐도 기댈 곳이 없다. 어디를 보아도 궁극적인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현실에 대해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하나님나라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 쉬지 않고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낙관적인 태도로 세상을 긍정하고 품을 수 있게 된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나라가 자라고 있다고.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나라가 사단의 체제를 힘차게 밀어내지 않는다고, 오늘 당장 하나님나라가 임하지 않는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너무 비관하지 말라. 비관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비관이 없는 낙관주의는 지나치게 현실 지향적이라서 하나님나라 지향적이기가 어렵다. 본래 하나님나라 지향성이라는 게 믿음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비관적인 관점에서 태동하고, 비관적인 관점을 먹고 자란다. 세상에 대해서 비관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기다리겠는가? 하나님나라 지향성을 갖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관적이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현실에 무관심하게 되고, 현실을 등지게 된다. 현실을 보는 게 역겨워서 눈을 감아버리게 된다. 그래서 비관적이기만 해도 문제고, 낙관적이기만 해도 문제다. 비관과 낙관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어야만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품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다. 교회가 많은 문제가 있고 예수의 길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교회의 현실을 정직하게 볼 필요가 있다. 사실을 감추거나 호도하는 것은 정말 비겁한 행동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허물만 들쑤시는 것도 덕스러운 태도는 아니다. 교회에 대해서건 세상에 대해서건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면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긍정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린다면,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살고자 한다면 지나치게 현실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현실을 부정하거나 비관해서도 안 된다.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현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되 현실을 긍정하고 현실을 품는 것이다. 현실을 사랑하면서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절망하지도 말고, 그저 비관적인 낙관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비관적인 낙관주의자로 살면 뿌리 깊은 나무처럼 현실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언제나 싱싱하게, 젊게, 당당하게, 옳게, 아름답게, 창조적으로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해 정직한 예수님
자, 다시 처음 문제로 돌아가보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이적과 권능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 이내 곧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아마 제자들도 매우 들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들뜨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예수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래서 예수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흥분하지 않았다. 흥분하기보다는 오히려 염려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병자들이 고침 받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세상, 예수님의 능력으로 못할 일이 없는 세상이 하나님나라의 전부라고 오해할까봐 그게 걱정스러웠다. 사람들이 자기 뜻을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때부터였을지 모르겠다.
암튼 예수님은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모인 때를 포착해서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말씀했다. 하나님나라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 피상적이지 않다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나라는 매우 깊고 오묘하며 또한 알 수 없다는 것, 여기저기에 위협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는 것, 아직은 기다려야한다는 것, 그러나 쉬지 않고 자라고 있다는 진실을 말씀했다. 제발 오해하지 말라고, 엉뚱한 기대를 하지 말라고 진실을 밝혀야 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순진함이 있고 정직함이 있다.
무릇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는 예수님처럼 복음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순진할 정도로 정직해야 한다. 오늘 교회 설교자들도 예수님처럼 정직하고 순진하면 좋겠다. 설교자가 가져야 할 덕목 중에 최고의 덕목은 복음에 대한 정직함과 순진함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의 설교자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회복되어야 할 것도 역시 복음에 대한 정직함과 순진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직함과 순진함이 회복돼야 교회에 대한 신뢰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뿐 아니라 성도들 역시 복음에 대해 정직하고 순진해야 한다. 성도들이 자기 필요를 채워주는 소리에 솔깃하거나 복음이 약속하지 않는 것을 약속하는 거짓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런 소리가 아무리 힘이 되고 듣기에 은혜롭다 할지라도 복음에 대해 정직하지 않은 소리를 구별하고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설교자들이 복음에 대해 좀더 정직할 수 있다. 만일 성도들이 복음에 대해 정직하지 않은 소리를 환영하고 따라간다면 설교자는 더더욱 복음에 대해 정직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설교자가 어떤 설교를 하느냐 하는 것은 설교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설교자의 설교는 성도들의 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해 정직한 설교자를 만드는 것은 성도의 책임이다. 설교자가 성도를 만들듯, 성도도 설교자를 만든다.
7.죄인을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 / 용서와 사랑으로 회복하게 도우시는 예수
마가복음 2:1-17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내용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는데 있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이 하나님나라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증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보인다. 둘째는 예수님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얼마나 큰 이해의 간극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점은 마가복음만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다.
돌발적인 중풍병자의 등장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의 간극 중에서도 죄인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다른 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사역이 가버나움에서 시작해서 한 바퀴를 돌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와 어느 집에 계실 때 벌어진 일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는 모르나 문 앞에까지 빼곡히 차서 도무지 틈을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쳤다. 집중력을 잃지 않고 한참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갑자기 생각지 못한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마치 007작전이나 하듯이 사람들이 지붕에 구멍을 뚫고는 중풍병 환자를 달아 내리는 것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옛말에도 궁즉통(窮則通)이라,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저들도 궁하다보니 생각지 못한 길을 찾았으리라. 암튼 갑작스러운 돌발 사태로 인해 예수님과 모든 사람들의 눈은 중풍병자에게 쏠렸다. 예수님이 가만히 보니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했다. “소자야! 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를 용서하는 자로 오신 예수님
여러분, 어떤가? 너무 엉뚱한 말 아닌가? 지금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해야 할 말은 ‘소자야! 네 병이 나았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라.’ 이 말을 해야 앞뒤가 맞다. 중풍병 환자는 물론이고, 환자를 메고 온 사람들도 모두 병 낫기를 원하여 지붕에 구멍을 뚫으면서까지 기를 쓰고 예수님 앞에 온 것이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온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예수님은 뜬금없이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하도 파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나자 예수님이 잠깐 정신이 나간 것일까? 파격적인 행동에 대해 파격적인 말로 응답하는 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뭔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시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것일까? 그렇다. 때를 기막히게 잘 알고 때에 맞게 행동하시는 예수님께서 뭔가 중요한 진리를 계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엉뚱한 말을 하신 것이라고 보인다. 그럼 예수님이 계시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뭘까?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진리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가는 곳곳마다 수많은 환자들을 치유해주었다. 건강한 몸 생활을 위해서 각색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치유해주었다. 그러나 수많은 환자들을 치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몸을 치료하는 의사로 온 건 아니었다. 예수님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었다.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쫒아내는 사역보다 더 본질적인 사명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사람들에게 계시되지 않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베일을 벗겨내고 보여주어야 할 진실이 있었다. 예수님은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풍병자가 왔을 때 일부러 ‘네 병이 나았다’고 하지 않고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병자를 치유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전문가로 온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자로 왔다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죄인을 바라보는 율법학자의 시선
사실 이 말은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면에서도 파격이었지만, 말의 내용면에서도 파격이었다. 왜냐?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감히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일 누군가가 죄를 용서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신성모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말을 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해버렸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발끈하는 게 당연했다.
세관원 레위를 부를 때도 같은 문제가 불거졌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원에 앉아 있는 세관원 레위를 보고 나를 좇으라고 했다. 그러자 레위는 즉각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다. 레위가 비록 직업이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세관원으로서 안정적이었을지 모르나 사회적으로나 인간관계 면에서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외로움이 컸을 것이다. 그런 레위가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초대를 받고, 따뜻한 대접을 받자 기분이 좋았던지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에 초청해 음식을 대접했다. 그것도 예수님만 부른 게 아니라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도 함께 불러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 사람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는가?’ 생각 없이 뱉어 낸 이 한마디, 이 한마디 속에 기가 막힌 세계관이 깔려 있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때로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는데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많은 말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오히려 가볍게 던진 한마디, 그 한마디 속에 중요한 해석의 단초가 들어 있는 경우가 참 많다. 율법학자들의 경우도 그렇다. 그들이 던진 한마디를 곱씹어보면 그들이 죄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다.
‘저 사람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는가?’ 자, 이 말 속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 있는가? 세리와 죄인은 함께 어울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죄인은 죄인의 자리에 버려두어야 한다, 저들과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교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죄인은 버림의 대상이요, 정죄의 대상이지 죄에서 놓임 받도록 용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게 율법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용서만이 죄를 해결하는 길
예수님은 달랐다. 예수님에게 죄인은 버려진 대상이 아니었다. 정죄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따뜻하게 돌보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요, 섬김의 대상이었다. 예수님은 말씀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는 것처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그렇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요, 죄와 죄인을 심판하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죄인을 용서하는 분이시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신 분이시다.
사실 죄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흔한 개념이 아니다. 이건 예수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개념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를 보라. 의인이 복을 받고, 죄인이 응징을 받는다는 게 모든 종교의 공통되는 내용이다.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는 모든 나라의 동화, 영화, 소설, 음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골 주제요, 영원한 주제다. 인류가 공유하는 공동의 정신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예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정신이다. 기독교 외에는 어떤 종교도 용서에 근거를 둔 종교가 없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죄 문제를 용서로 풀었을까? 먼저 한 가지만 묻자. 여러분,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으로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망나니 같은 자식 때문에 맘이 상한 어머니가 ‘너는 왜 그렇게 못된 짓만 하고 다니느냐’고 큰 소리치고 욕을 퍼붓는다고 그 자식이 변하는가? 어림도 없다.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으로는 절대 죄를 없앨 수 없다. 죄를 이길 수 없다. 온 세상을 감옥으로 만들어 죄인들을 다 처 넣는다 해도 세상에 죄인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교도소가 늘어날수록 악한 자가 늘어날 뿐이지 줄지 않는다.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이것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이 길밖에는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사람이 본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고, 죄를 이길 힘을 얻도록 만들어졌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결코 죄를 이기지 못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죄를 때려가지고서는 죄를 고칠 수 없다. 오직 용서하는 것만이 죄를 이기는 길이다. 참 묘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이 진실을 알고 있다. 죄인이 되어버린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죄를 용서하는 길 외에는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용서의 길을 가라 하셨다. 오직 이 길밖에 길이 없기 때문에 아프고 힘들지만 십자가의 길을 가라 하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십자가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십자가는 용서를 위한 대가다.
용서는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범한 죄 때문에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이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으니 어떤 불안이나 공포도 없이 내적 평안을 누릴 수 있고, 그 나라의 희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보장이다. 그러나 용서는 단지 과거를 청산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용서의 시선은 언제나 미래로 향해 있다. 용서는 과거를 딛고 미래로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밀어주는 힘이다. 그래서 용서받은 자는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않는다. 용서받은 자는 과거를 믿고 일어나 미래로 나아간다. 용서는 진실로 죄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완전한 해결책이다.
죄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
그러기 때문에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언제나 따뜻했다. 간음하다 재수 없이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있었다(요 8:3~11). 바리새인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결한 여자는 살려 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들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다.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함으로써 율법으로 덮어버린다. 간음한 여자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용서를 선언하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며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시금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과거의 죄를 용서해주었다. 아마 이 여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옥합을 깨뜨린 여자가 있다(눅 7:36~38). 그 여자는 죄인이다. 아마 과거가 있는 여자인 것 같다. 이 여자가 비싼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갖고 예수님에게 와서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입을 맞추고 값진 향유를 붓는 지극한 애정과 감사를 표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은 깜짝 놀랐다.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 줄 알 텐데, 안다면 당연히 여자를 정죄하며 물리쳐야 하는데 왜 물리치지 않는 것일까 매우 의아스러웠다. 바리새인이 생각하기에는 저런 여자는 물리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리치지 않았다. 따뜻한 마음으로 그 여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했다(막 7: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며 보냈다(막 7:50). 바로 이것이 죄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시긴 오셨는데 무조건 용서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아게라야 쓸 데 있다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막 2:17).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인가? 의인과 예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의인을 용서할 수 없고, 의인도 예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정말 의인이 있어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인가? 아니다. 진정 의인이 있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환영하겠는가. 함께 춤을 추며 기뻐할 것이다. 의인이 있는데 너는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너를 위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딴청부릴 예수님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의인이라고 지칭한 것은 정말 죄가 없어서 의인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한 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자칭 의인이 있을 뿐이다.
자칭 의인은 이런 사람들이다. 죄인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선을 긋고 자기들은 저 죄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죄인을 벌레 보듯하고 경원시하면서 정죄하는 자들이다. 정말 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 죄인을 멀리하는 자들이다. 또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자신을 모르는 자들이다. 정말 자기를 알았으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텐데, 자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인 줄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죄인이라는 걸 몰랐다. 나라는 존재가 그래도 반듯한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자 말자 내 속에 죄가 들끓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니 나라는 존재가 온갖 죄가 들끓고 있는 죄 도가니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도덕적인 죄악보다 더 본질적인 죄를 안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였다. 계시의 은혜를 받고서야 죄를 보았다. 죄뿐 아니다. 진리와 진실을 보려면 계시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계시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계시의 정신을 밝혀달라고 기도한 것도(엡 1:16~19) 하나님께서 계시의 정신을 밝혀주셔야 죄를 볼 수 있고,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시의 은혜는 정말 소중한 은혜다.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이다. 이 은혜가 아니면 이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살 텐데 계시의 은혜로 보고 깨달으며 사니 얼마나 감사한가.
누가 죄인인가
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요 9:35~41).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보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저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게 누구 죄 때문이냐? 본인의 죄냐? 부모의 죄냐?(요 9:2) 또 바리새인들은 소경을 가리켜 죄 가운데서 난 자라고 했다(요 9:34).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이나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게 어쨌든 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처럼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은 나쁜 것, 병든 것, 망한 것, 이런 것은 다 죄와 연결 지었다. 죄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눈으로 해석하게 되면 결국 가난하고 병들고 사회적으로 밑바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자들은 다 저들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가난하고 병들고 밑바닥 신세를 전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긍휼의 마음을 갖기보다는 죄가 큰 인생이요, 축복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냉혹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랐다.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허락된 아픔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소경이 된 것과 죄와의 연결점을 끊어버렸다. 소경된 자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매우 심오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
여기서 예수님은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심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바리새인 들으라고 한마디 덧붙인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좀 아리송하다.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안 온다. 그렇다고 그렇게 난해한 말도 아니다. 이런 뜻이다. 너희가 소경인 줄 알았으면 계시의 은혜를 구할 것이고, 계시의 은혜를 받으면 죄를 보게 될 것이고, 죄를 보면 용서를 받을 터인데 본다고 하니 계시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결국은 죄 가운데서 계속 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예수와 상관없이 본다고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 지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소경이 죄인이 아니라 실상은 본다고 자부하는 너희들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너희야말로 진짜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인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를 완전히 뒤집었다.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죄인이 죄인이 아니라 저들을 죄인이라고 낙인찍는 너희야말로 정말 구제받을 수 없는 진짜 죄인이라고 뒤집어버렸다.
죄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중요성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골머리를 앓고 씨름하는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살 거냐, 어떻게 돈을 벌고 쓸 거냐, 어떤 사람과 함께 살 거냐, 이런 게 참 중요한 문제다. 유치원 때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정신없이 야단을 하는 것도 다 직업과 돈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살 거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무시하고 있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죄와 죄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게 별것 아닌 문제 같지만 사실은 우리 인격과 세계관, 인생을 꼴 짓는 의미심장한 문제다. 한 걸음 더 나가면 한 사회의 모양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할 만큼 큰 문제다.
생각해보라.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처럼 죄인을 정죄하고 선을 긋고 냉혹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는 사회와, 예수님처럼 용서와 돌봄, 이해와 격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는 사회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대조적인 시선을 가진 두 사회의 모습은 마치 지옥과 천국의 모습만큼이나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여러분, 아름다운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죄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 사회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고, 죄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갈만한 세상이요, 아름답고 성숙한 사회가 아닐까? 이런 사회가 죄가 발붙일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는 중간 단계의 사회 모습이 아닐까?
예수님은 바로 이 길을 보여주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용서가 하나님나라로 향해 가는 길이라는 진실을 계시하기 위해 용서하는 자로 사셨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정말 배워야 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죄인을 바라보는 시선. 이 시선 하나 속에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당신이 사는 사회가 어떤 사회일지가 결정된다.
더욱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죄와 죄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이해 받지 못한 예수 / 현재까지도 예수 모르는 그리스도인 너무 많다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36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37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모든 인간의 삶은 만남이다. 만남이 삶을 만들고 만남이 삶을 결정한다. 만남의 폭이 넓고 깊으면 삶의 폭도 그만큼 넓고 깊지만, 만남의 넓이나 깊이가 시원찮으면 삶의 폭과 깊이도 시원찮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도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는 삶을 살 수는 없다. 물론 만남도 차원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만남을 한마디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도시적 삶을 사는 우리네 만남이라는 게 대부분 인격적인 만남이라기 보다는 일로 만나고 일 때문에 만난다. 각자의 필요에 의해서 만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살기는 하지만 실제로 만남은 없다. 일과 일이 만나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는 않는다. 만남이 없는 만남이 도시를 이루고 있고, 피상적인 만남이 군중의 빠른 이동만을 낳고 있다. 사실 이런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만남에 대한 진정한 욕구를 채워줄 수도 없다. 계약이 성사되고, 일은 진척될지 모르나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격적인 소통이 있는 만남, 마주보는 만남은 삶에 큰 자국을 남긴다. 만남보다 더 값진 삶의 자원은 없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값진 만남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우리의 인격과 마주하기 위해,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놓고 함께 대화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온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단절된 우리네 삶을 다시금 하나님과 연결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
예수님의 삶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 하나님나라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지구의 한 모퉁이를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을 보면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제자들, 종교지도자들, 군중들이다.
첫째로 제자들이다. 제자들 중에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 단순하지만 인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자마자 앞뒤 계산도 하지 않고 대뜸 따라나섰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어부로서 평생을 고기나 잡으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갈 인생들이었다. 이 이상의 꿈이나 인생 계획이 저들에게는 없었다. 고작해야 갈릴리 해변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저들의 포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인생이 변화되었다. 고기 잡는 인생에서 사람을 섬기는 인생으로, 종교적인 테두리에 갇혀 살던 인생에서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인생으로, 사회적인 성공을 꿈꾸는 인생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인생으로 삶이 근본적인 전환을 했다. 또 한 사람의 제자 세리 마태는 세관원으로서 소외된 채 살던 사람이다. 눈앞의 이익을 쫓아 살던 사람이다. 동족을 배신해가면서라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는 것이 그의 생활 철학이었다. 그런 마태가 예수를 만난 후로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한 번도 꿈꾼 적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생계 위주의 삶을 살던 그들이 이제는 땅을 넘어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향해 살게 되었다. 자기 안에 갇힌 삶에서 자기를 넘어 세상을 품는 인생이 되었다.
물론 예수님 때문에 나중에는 핍박을 받기도 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 때문에 유대교도들에게 핍박을 받았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핍박 받을 일이 없었을 터인데 예수님 때문에 배척을 받고 고난을 겪어야 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세상과 더불어 호흡하며 큰 갈등 없이 살 수 있었을 텐데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세상과 불화하며,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도전은 힘들지만 아름다운 도전이다. 이익에 눈이 멀고 무딘 세상에서 함께 이익을 쫓지 않고 깨어 살아야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아름다운 아픔이다.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값진 고난이다. 하나님나라를 향해 살고자 하는 자에게만 허락된 영광스러운 상처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할 만큼 눈을 뜨지는 못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 때마침 광풍이 불어 배가 뒤집힐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은 잠에서 일어나 말씀 한마디로 풍랑을 잔잔케 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가?”(막 4:35~41)하며 의아해했다. 예수님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실 때는 베드로가 나서서 안 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해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꾸짖었다(막 8:31~33). 이걸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들 방식대로 듣고 이해한 것이지 예수님 방식으로 듣고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충돌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과 충돌한 자들이다. 예수님이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자 저들은 대뜸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다(막 2:7).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자 이번에는 ‘왜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시비를 걸었다(막 2: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자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며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했다(막 3:6). 예수님이 많은 이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느니,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느니 하면서 비난했다(막 3:22).
이처럼 사사건건 예수님과 충돌하는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렇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까, 세상에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뭐 하나 통하는 게 없다. 저들도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족속이요, 모세 율법을 상속받은 자들이 아닌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엔 어느 것 하나도 궁짝이 맞는 게 없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은가?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율법을 말하는 자들이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도대체 뭐가 저들의 눈을 가렸기에 예수님에 대해 저토록 깜깜한 것일까?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가고, 지극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는데 있어서도 남다른 열심히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정작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하고 사사건건 대립하고 적대적인 것일까? 왜 그런 것일까? 종교지도자들이 특별히 마음이 악해서 그런 것일까? 뭐든 자기들 외에는 비판적으로만 보는 습성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딱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런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게 중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그럼 뭣 때문일까? 뭔가 중요한 이유가 숨어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뭘까? 정말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 이라고 생각한다. 저들은 자기들이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전부요 불변의 진리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저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들은 모든 걸 자기들의 잣대로 판단하고 규정하고 심판할 뿐 자기들의 잣대가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는 검토할 줄을 몰랐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독점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절대 표준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라는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자기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자연히 ‘어, 저 놈 봐라! 하고 하는 짓이나 말하는 게 괘씸하네’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존의 종교 체제를 부정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질문하고 조심스럽게 검토할 줄을 몰랐다는 점에 있다. 예수라는 젊은이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한 번쯤 진중하게 들어보고 뭐가 다른지, 왜 저렇게 말하는지, 누구의 해석이 정말 옳은지 검토해보았어야 옳다. 그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마땅한 태도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런 겸손함이 없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관습이 절대 잣대가 되어 상대방을 판단할 뿐 상대방을 통해 자기를 볼 줄은 몰랐다.
중국에 묵자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겸애사상-하늘이 만물을 공평하게 한없이 사랑하듯이 모든 사람들이 온 인류를 공평하게 사랑해야 한다-을 주장한 분이다. 이분이 이런 말을 했다.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君子不鏡於水而鏡於人, 묵자 비공편). 이 말은, 물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 얼굴밖에 보지 못하나,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율법학자, 바리새인, 대제사장들은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기를 비추어볼 줄을 몰랐다. 자기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판단할 뿐, 예수님을 거울로 삼아 자기들을 보지는 못했다. 저들이 만일 예수님을 거울로 삼아 자기들을 보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진리,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사로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저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일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처음에는 작은 시각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의아해하며 지나치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틈이 벌어지고, 갈등이 확대되면서 자기들의 지배 체제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자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처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적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결국 ‘시각의 차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 관점이라고 하는 게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시각이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는 것 같다. 사람이란 참 신기하면서도 한없이 어리석은 존재라서 한 번 시각이 고정되면 그걸 벗어버리기가 어렵다. 하나의 관점이 강화되기는 쉽지만 왜곡된 관점을 바로 잡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람이 ‘고정된 시각’이라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마음깊이 겸손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 모든 지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 만일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대한 착각이다. 우스꽝스러운 오만이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분이다. 그분의 세계는 신묘하고 무궁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듣고 배울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제든지 새롭게 듣고 배울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출렁이는 진리의 바다에서 고작 한 바가지의 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진실을 알고 사는 자라야 정말 진리의 바다를 항해하는 자요, 하나님의 세계에 몸담고 사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다른 어떤 모임보다 확신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확신을 강요하며, 믿음은 곧 확신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믿음과 확신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믿음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에 뿌리를 박고 있는 반면, 확신은 자기 신념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믿음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지만, 확신은 자기 신념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이처럼 믿음과 확신은 정반대의 뿌리를 갖고 있다.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칼과 같다. 잘 사용하면 약간의 유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사실 경솔한 확신보다 더 진리에 반하는 것은 없다. 자기 확신에 빠져 사는 것보다 더 우매하고 더 비인간적인 일은 없다. 사람이 자기 확신에 빠져 사는 것이 길을 찾느라 고민하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확신의 길을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사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보라. 저들은 한결같이 경솔한 확신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저들의 경솔한 확신이 하나님의 화육이신 분, 말씀이신 분을 죽인 근본 원인이었다. 이처럼 경솔한 확신은 하나님의 세계와 대립하는 길을 걷게 만든다. 하나님의 세계는 경솔한 확신보다는 진지한 물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누가 진정한 주류인가
율법학자, 바리새인, 제사장, 이들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주류에 속한 자들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형편없는 비주류에 불과했다. 주류의 권력 앞에서 무참하게 짓밟혀야 할 만큼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주류였다.
그러나 상황을 뒤집는 물음을 한번 던져 보자. 하나님이 보실 때는 과연 누가 주류일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주류였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모르긴 몰라도 감히 확신하건데 예수님이 주류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은 비주류가 아니었겠는가? 좀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비주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역류 세력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핵인 예수님을 처형한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주류로 대접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2000년 전의 이 엄청난 사건을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섬뜩하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물음 앞에 서게 된다. ‘오늘 우리 모두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주류라고 인정하는 대형 교회와 성공한 목회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은 과연 어떨까? 하나님이 보실 때도 이들이 주류일까? 2000년 전 주류로 행세했던 종교지도자들처럼 이들도 혹 비주류는 아닐까? 혹 역류하는 세력이 아닐까?’ 하는 섬뜩한 물음이 우리 가슴을 파고 들어온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물음 앞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하게 판단할 일은 아니나 우리 모두가 한번쯤 깊이, 진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묻고, 생각하고, 대답해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께서 오늘날 기독교 주류로 행세하는 자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2000년 전에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길은 어쩌면 영원한 비주류의 길일지도 모른다.
예수님과 군중들
예수님을 만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군중들이다. 중풍병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걷자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런 일은 전혀 본 적이 없다’며 신기해했다(막 2:12). 군대 귀신이 나갔을 때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자초지종을 듣고는 자기 마을을 떠나달라고 간청했다(막 5:18). 군대 귀신이 나가고 정신이 돌아온 사람이 데가볼리에 가서 사람들에게 귀신 나간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이 다 놀랐다(막 5:20).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심한 병으로 죽을 지경이 되자 회당장은 허겁지겁 예수님을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고 회당장과 동행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그만 딸이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시고 갈 이유가 없어진 회당장은 낙심한 채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뒤늦게 회당장의 집에 도착한 예수님은 어린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하시며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었다(막 5:39). 그러나 잠시 후 죽은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니자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막 5:43). 지금까지 몇 가지 사건에서 본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고, 예수님의 이적과 권능을 보고 놀랐다.
가장 고독한 예수
지금까지 예수님을 만났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제자들, 종교지도자들, 군중들, 이들 중에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이 과연 있었는가? 예수님이 누구에게 이해를 받은 적이 있는가?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뜨겁게 환영받긴 했지만 이해받지는 못했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했다. 예수님은 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생활하셨지만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은 마치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 홀로 솟아 있는 작은 섬 같았다.
나는 마가복음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정말 고독하였겠구나.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고독하신 분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러분,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고독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일 것 같은가? 누가 생각나는가? 나는 예수님보다 더 고독하셨던 분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진실로 한 사람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그때뿐 아니다. 예수님은 지난 2000년 동안 줄곧 고독하셨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예배를 드리며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예수님은 여전히 고독에 몸부림치고 계신다.
오늘날 교회는 지나치게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상의 친구가 되어야 세상을 얻을 수 있으니까 세상을 얻기 위해서 세상의 친구가 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구하려 했지 세상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세상을 참 세상 되게 하려 했지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예수님과 2000년 전 종교 지도자들의 다른 점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오늘의 교회가 다른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하려 했는데 2000년 전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얻으려 한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하기는 하는데 세상을 얻으려는 욕심이 너무 강해서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욕구보다는 세상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항상 이기는 것 같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내 마음속에도 세상을 구하려 하는 마음보다는 세상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 세상을 얻고자 하는 원초적인 본능이 나를 충동질한다. 우리가 이 원초적 욕망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와 다른 길을 걷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세상의 친구셨다. 그러나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여 예수님은 세상의 참 친구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류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비주류로 사셨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류가 되기 위해 세상의 비주류가 되신 것이다.
허나 통제(統制)로다. 생각과 말은 이렇게 번지르르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기 원하며, 세상의 주류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비주류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구해낼 것인가? 예수 외에는 구원의 소망이 없도다.
9.사탄의 질서와 구원의 질서 / 탄적인 질서를 하나님의 질서로 바꾸는 것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유혹해 넘어뜨린 것처럼 예수님도 넘어뜨리려고 했다. 마가는 사탄의 유혹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사탄이 유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막 1:13).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내용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두 복음사가에게 유혹의 내용은 다른 게 아니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답게 대단한 능력을 사용해서 세상을 멋지게 구해보라는 거다. 돌로 빵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굶주림을 멋지게 해결해주고, 높은 성에 올라가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네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지켜주지 않겠느냐, 그리고 나에게 절하면 온 세상을 다스릴 최고의 권세를 주겠으니 온 세상을 지배하라는 거다.
사탄의 이 제안 속에는 두 가지 유혹이 들어있다. 첫째로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보이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능력으로 세상을 바꾸어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탄은 처음부터 아예 대놓고 세상을 구하지 말라고 가로막고 나선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구하되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지 말고 사탄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해보라는 거였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의 본질이었다.
사탄의 이 제안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리 나쁜 제안이 아니다. 매우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제안이다. 기왕 세상을 구원하러 나설 바에야 슈퍼맨처럼, 기가 막힌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치우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가장 빠른 해결책 같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런 구원을 원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 제안이 ‘유혹’이라고 말한다. 맞다. 성경이 정확하게 말했다. 그건 가장 빠른 길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유혹이다.
아르헨티나 출신 철학자요, 역사학자요, 신학자인 엔리케 뒷셀(Enrique Dussel)은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하는 것은 곧 형제인 타인, 이웃을 지배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사탄의 체제란 한 마디로 지배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다른 생명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탄적 체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다른 생명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이 죄성의 본질이요, 사탄적인 방식의 본질이다. 그런데 사탄은 예수님에게 바로 그 방식, 즉 능력을 통해서 세상을 지배해 보라고 제안하는 기민함을 발휘했다.
하나님이 뜻하는 구원
우리는 구원을 너무 쉽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또 지나치게 결과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접근 방식으로 구원을 이해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 믿고 천국만 가면 된다는 식의 구원 이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그건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뜻하신 구원은 뭐니 뭐니 해도 삶의 방식의 문제다. 삶 자체가 구원을 받고, 삶의 방식에서 구원받는 것이 진짜 구원이지, 단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결과에만 집착하는 것은 또 하나의 종교적 욕망이요 이기적인 보신주의에 불과할 뿐이요, 참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적 괴물일 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배고픔이나 질병이나 정치적인 억압이나 전쟁을 없애는 것들이 다 구원의 일부분이긴 하나, 하나님이 뜻하시는 구원의 참 실체는 아니다. 또 죄를 용서받아 영혼이 구원을 얻는 것도, 죽고 나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안내하는 것도 구원의 본질이 아니다. 구원의 본질은 사탄적인 방식으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돌아서는 데 있다. 즉, 사탄적 질서를 하나님의 질서로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죄가 지배하고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그래서 상처가 깊고, 삶이 본래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상실한 채 삶 아닌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더불어 사는 세상으로, 삶이 억압되지 않고 활짝 피어나는 세상으로, 삶 본래의 향기를 회복하는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뜻하시는 구원이다. 이 일은 결코 작고 시시한 일이 아니다. 크게 뚫린 구멍을 몇 개 때려 막는 정도의 땜질이 아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시스템을 근본부터 바꾸는 일이다. 온 세상을 재창조하는 일이다. 우주 전체의 운명을 바꾸는 거대한 일이다.
죄 용서에 나타난 예수님과 사탄의 차이
그런데 사탄은 예수님에게 구원의 본질은 빼버리고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혹하게 할 수 있는 구원의 파편들만 몇 가지 행하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구원을 파편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사탄이 제안하는 대로 쉽고 빠른 구원의 길, 능력으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갈 수 없었다. 결국 제안을 거절당한 사탄은 머리를 긁적이며 실패의 쓴 잔을 마시고 돌아서야 했다. 그러나 결코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사탄은 기회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졌다. 사탄이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용한 전략은 가장 종교적인 문제를 통해서였다.
첫 번째로 그 모습이 드러난 것은 죄 용서의 문제를 통해서였다.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중환자였다. 네 사람이 이 사람을 메고 예수님을 찾아갔는데 이미 사람들이 문 앞에까지 들어차서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붕에 구멍을 뚫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는데,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용서를 선포했다. “소자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그러자 서기관 몇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며 들고 일어섰다.
이들이 들고 일어선 데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이 깔려 있다. 첫째 배경은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데 사람인 네가 어떻게 죄 용서를 선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사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했다. 속죄 제물을 갖고 성전에 나가서 제사장이 그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 바쳐야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 4:31)고 했다. 또 “여호와 앞에 속죄할지니라”(레 15:15)고 했다. 이처럼 제사장이 여호와 앞에서 죄를 용서해야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이길 외에는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제도에 익숙한 저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볼 건 아니다. 저들이 신약 시대의 눈으로 제사제도를 보지 못한 것을 저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시대적 한계 안에서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두 번째 배경을 살펴보자. 두 번째 배경을 이해하려면 더 심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위한 예표였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드리면 사라져야 할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그런데 저들은 일시적인 방편을 영원한 종교적 체제로 지키려 했다. 왜? 저들이 일시적인 방편을 영원한 종교적 체제로 지키려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지키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서 라기보다는 그만한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사제도가 시행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죄가 끼어 있으면 죄가 관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관계가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죄 용서의 길을 열어 놓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사제도다. 제사제도는 죄를 깨우치고, 죄는 용서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가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제사제도는 점차 하나의 종교제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다시 말하면 제사제도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탈바꿈을 했다는 말이다. 명분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치레 명분인 것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지배의 틀로 제사제도가 이용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는 이미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성전에서 짐승을 파는 장사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상생적 관계, 일종의 카르텔이 공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가 죄를 용서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중풍병자가 속죄제물을 갖고 온 것도 아니고, 제사장에게 간 것도 아닌데 죄를 용서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들이 더 이상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성전이나 제사장에게 나올 필요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도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성전의 장사꾼들도 먹고 살 길이 막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군림해왔던 지배체제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릴 수 있고, 생존까지도 위협을 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형국이었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무엇인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너지면 종교적인 지배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죄 용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한 두 번째 배경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예수님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마음이 굳은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배 질서 공고히 하는 종교의 습성
여러분, 내가 너무 비판적으로 삐딱하게 해석한 것인가? 아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이 순전히 종교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종교는 결코 종교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종교는 거의 언제나 정치와 깊은 함수 관계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종교는 대개 종교의 옷을 입고 그 사회의 지배체제를 강화해주고 지탱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사회의 기존 신념을 강화하고 유지시키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서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을 정당화해준 게 뭐였는가? 교회와 목사들이었다. 교회와 목사들은 열심히 강변했다. 흑인을 노예로 부리고 차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흑인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라고. 그것도 신성한 하나님 말씀으로 그 정당성을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백인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흑인들을 무차별 학대하며 노예로 사고팔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TV 연속극‘주몽’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부여의 지배체제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안전판이 뭐였는가? 주몽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가장 큰 힘을 주었던 사람이 누구였는가? 바로 신녀였다. 신녀의 입과 행동이 왕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비한 힘을 발휘했다. 한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5공화국 시절에도 목사님들이 국가조찬기도회에 나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두환 씨를 축복해줌으로써 불의하게 잡은 권력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권력이요, 정당한 권력이라는 재가를 받는데 큰 공헌을 하지 않았던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도 3선 개헌을 할 때 김장환, 조용기, 김준곤 목사 등 242명이 지지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3선 개헌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다. 이게 종교가 걸어온 길이다. 이처럼 종교는 거의 언제나 지배자,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그 사회의 지배체제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이처럼 거의 언제나 타락하고 변질된다. 처음의 의도나 뜻과는 다르게 자기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쪽으로 본말이 전도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백성을 섬기라고 세운 종교 제도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을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백성을 지배하는 도구로 오용하는 사례가 정말 많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를 살펴야 한다.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걸어가고 있는지를 쉼 없이 물어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도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 이익을 따라 본질을 왜곡하고 흐리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 문제에 나타난 예수님과 사탄의 차이
두 번째로 사탄의 교묘한 술책이 드러난 것은 안식일 문제를 통해서였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밀 이삭을 자르는 걸 보고 바리새인이‘왜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바리새인은 종교적 경건이 대단한 사람들이고, 또 율법에 엄격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는 걸 보고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다른 안식일이었다. 예수님이 다시 회당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걸 보고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던 판인데 이번에는 과연 어떻게 할까, 과연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칠 것인가 안 고칠 것인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을 알고 손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로 불러 세우더니 엉뚱하게도 사람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전혀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질문 공세를 받은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막 3:4). 왜 저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잠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 때문에 탄식하신 걸 보면(막 3:5), 사람들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보다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해 보인다. 그들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이나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안식일이라는 율법의 전통과 제도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제사 제도는 천년 동안 유대인 사회를 지켜 온 전통과 제도였기 때문에 유대인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이 제도가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들이 이렇게 금과옥조처럼 율법의 전통과 제도를 지키려고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사랑의 마음 때문일까?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이지 눈에 드러나지 않는 진짜 이유가 있다. 진짜 중요한 이유는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뭘까? 그건 자기들이 군림하고 있는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데이빗 바칸(David Bakan)은 “사탄적이라는 것은 자기주장, 자기 보호, 자기 확장, 분리와 격리와 소외의 형성, 생각과 느낌과 충동의 억압 등으로 특징 지워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소박하게도 사탄적인 것이 극악무도한 악의 모습으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탄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사탄은 언제나 나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것으로, 나의 사회적 위치를 높이는 것으로, 나의 상품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매우 창조적이고 경쟁력 있는 멋진 발상으로 표출된다.
사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가치를 경쟁력 있게 창출하는 게 필요하다. 내 존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체제 속에 사탄적인 것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눈만 뜨면 호흡하듯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 속에 사탄적인 것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서로를 갈라서게 하고, 분열시키고,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보이지 않는 질서가 사실은 사탄적인 것이다. 내가 나 이외의 다른 것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사탄적인 질서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지배질서에 순응하지 않은 예수님
어쨌든 사람들은“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보란 듯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일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지배체제의 규범대로 행하지 않았다. 지배체제의 틀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사탄적인 지배체제를 깨부수기 위해서 힘으로 투쟁하거나 싸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단지 사탄적인 지배질서 안에서 행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진리,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진리에 따라 담담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어떤 것인지, 기존의 전통이 무엇인지, 기존의 지배질서를 따르는 것이 신변에 안전하다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론이나 규범에 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말씀에만 매였다. 오직 아버지의 뜻,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따라 행동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았다. 영광도, 성공도, 능력도, 여론도, 인기도, 돈도, 지배하는 권력도 예수님의 마음을 빼앗지 못했다. 예수님은 정말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종이었지만,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는 자유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자유롭게 사회적 규범이나 종교적 제도에 매이지 않고 죄인을 용서하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자 바리새인이 나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했다. 드디어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장면이다. 그들이 평상시에는 얼마나 경건해보였는가. 얼마나 말씀에도 엄격했는가. 그러나 그들의 경건과 율법에의 엄격함은 자기들의 지배권을 지키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나라와는 상관이 없었다. 자기들의 이익과 지배권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오자 그동안 숨겨두었던 폭력의 발톱을 드러내는 걸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나? 그들이 교묘하게 위장했던 실체는 바로 폭력성이요,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탄적인 것이다. 힘을 사용하고, 능력을 사용하고,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 사탄적인 세계의 특징이다.
폭력에 짓밟힘으로 사탄적 질서 폭로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힘이나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다. 지배자의 자리에 서서 군림한 적이 없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붙잡히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다. 그때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시며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고 했다(마 26:52). 모세 율법은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걸 거부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예수님의 길이 아니었다. 그건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길을 갔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탄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대항하기 위해서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기보다는 그냥 묵묵히 예수님 자신의 길을 갔다. 지배하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을 갔다. 힘을 사용하는 길이 아니라 힘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의 길을 갔다.
예수님은 사탄적인 지배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탄적인 방식으로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사탄적인 지배질서에 희생당함으로써 그들의 폭력성과 정체를 폭로하여 사람들에게 그들의 실체를 똑바로 보게 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지배질서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힘이 예수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예수님은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사탄적인 체제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이 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있다.
예수님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세계는 내 능력을 키워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이 일반화된 세계다. 인간에게 있는 뿌리 깊은 지배 욕구를 정당화해주고 부추기는 사회, 거의 모든 사람이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과 더 큰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을 따라 사는 사회에 익숙해 있다. 하여, 그리스도인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삶의 방식을 따라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승리자가 되는 길을 추구하며, 그걸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고 축복해주는 교회 속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의 체제와 사탄의 방식을 추구하며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갈등과 싸움의 근원을 파헤치고 파헤쳐 보라. 그 속에서 뭐가 나올 것 같은가? 한마디로 말하면 ‘지배할 거냐? 지배당할 거냐?’ 이거 아닌가? 부부 간의 싸움에서부터 기업이나 학교 간의 경쟁, 국가 간의 전쟁까지, 심지어는 형제간의 신경전까지 모든 싸움의 근저에는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 하는 문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 하는 시소게임을 하며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셨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며 혁명적인 삶의 전환을 시도하셨다. 지배에서 섬김으로, 독점에서 나눔으로, 죽임에서 살림으로 뒤집어엎기 위해 오셨다. 진실로 예수님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배우고 보고 경험한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다. 차원이 다른 세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로 예수의 세계를 살려 하면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뿌리쳐야 한다.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의지를 버려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단코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한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것만이 예수의 길을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보라.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살벌하지 않은가. 왜 이렇게 툭하면 싸움질이고 공격적이고 살벌한 것일까? 그건 사탄적인 지배 욕구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지배 욕망을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축복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교와 교회까지도 그 대열에 서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학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으니 논외로 치자.
교회만 보면, 비록 소수이긴 하나 낯선 예수의 체제를 배우고 익히기 위해 힘들고 고단하지만 열심을 다하는 교회가 있다. 그런 교회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구원의 옷을 입지 않은 성공과 축복을 하나님의 구원이기나 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다. 가진 자와 힘 있는 자의 기득권을 지키고 그들의 주장을 대변하며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하고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와 정반대되는 사탄의 체제를 옹호하는 기이한 일들을 행하고 있다.
교회가 하는 말마디에 하나님의 말씀의 파편들, 구원의 파편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말들 속에 담겨있는 세계관과 체제를 파헤쳐보면 그 속에는 사탄의 체제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알 수 있다. 분명히 귀에 들리는 소리는 구원을 받으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피를 토하듯 외쳐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외침 속에서 신앙으로 사탄적인 지배체제의 사다리를 오르라는 진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교회가 사탄과 동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순한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이제 다시 교회는 구원받아야 한다. 사탄의 체제에서 예수의 체제로 교회의 모든 시스템이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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