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삶에 실패했을 때

공 상희 2009. 6. 9. 16:58

 삶에 실패했을 때

성구 : 눅 5 : 1 - 10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삶에 실패했을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생 모든 면에 계속 성공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실패만 하고 낭패만 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성공도 알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 실패하고 절망했을 때 우리의 삶을 도로 회복시키고 정상궤도에 올려 성공을 가져오게 하는 길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낯선 길을 갈 때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길을 잃어버리고 있으면 그것은 낭패가 나죠. 길을 잃어버렸으면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대한 교훈을 우린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의 아들로 태어나서 잔뼈가 굵도록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고기잡이에는 일가견이 있고 도가 트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고기잡이가 시원찮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모는 병들어 누워있고, 약값도 많이 들고, 또 처자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힘들었었습니다. 하루는 밤새도록 나가서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해가 떠오를 때 노를 저어서 해변가에 나왔습니다만 그는 마음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빚을 갚아야지요, 약값을 지불해야지요, 또 생활비를 벌어야지요... 이런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았어요. 자기 무능에 절망했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 그 빈배에 들어와서 빈배를 빌리셔서 말씀을 증거 하시고 난 다음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잡힌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배도 가득 채우고 자기의 친구들도 불러서 거기에도 가득 채우고 난 다음 그 체험을 통해서 베드로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져 버리고 말았었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서 우리들은 우리의 삶이 실패했을 때 어떻게 다시 성공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가 살은 생활은 상식이 통하는 전통적인 삶이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전통 대대로 살아온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대?? 또 그 길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지 않고, 전통적인 삶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을 때는 우리는 그와 같은 인간적인 상식이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이며 누구나 행하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으러 늘 갔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는 물이 너무 맑기 때문에 낮에는 그물을 던져도 고기를 못 잡습니다. 왜냐하면 그물이 내려오는 것이 다 보이기 때문에 그물이 내려오면 고기들이 도망을 쳐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또 낮에는 고기가 모두 다 깊은 곳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서 고기가 있는 곳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이러므로 언제나 야간에 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밤에는 고기들이 해변가로 나오고, 또 해변가는 얕을 뿐 아니라 어둡기 때문에 그물이 내려오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이러므로 언제나 갈릴리의 어부들은 밤에 가야 고기를 잡고, 깊은 곳에서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을 수 없고 얕은 곳에 그물을 내려야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상식이요,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상식과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법을 갖고 나가서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단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아니하고 전통적인 삶의 방법이 통하질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의 한계점에 도달하고 말은 것입니다. 그 결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배를 저어 아침해가 떠오르는 새벽에 해변가로 나올 때 그의 가슴속에 사무치는 절망감과 짓누르는 염려와 근심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변가에 배를 대 놓고 그물을 씻??? 찢어진 그물을 깁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상식적이고 전통적인 삶을 사는 것을 수평적인 사고를 가지고 산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수평적으로, 경험적으로, 역사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은 신문을 펼 때마다 우루과이라운드에 관해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루과이라운드라는 것은 국제적인 통상협약을 말한 것입니다. 우루과이란 나라에서 통상협약을 맺었는데, 모든 나라가 통상을 위해서 문을 활짝 열고 관세에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온 세계가 물자교환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자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루과이라운드대로 우리가 통상의 문을 활짝 열면 제일 절단날것이 한국의 농업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농업은 국가에서 상당히 많이 보조를 하고, 또 국가에서 농산물을 비싼 값으로 사주어서 운영이 되는데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와 같은 저런 나라, 막대한 잉여농산물을 가진 나라가 우리 나라에 농산물을 수출하면 우리 농산물은 시장에 판로가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 한국의 쌀이 한 톤에 삼백불하는데 미국의 한 톤의 쌀은 삼십불 합니다. 삼백불짜리 한 톤의 쌀이 미국의 삼십불짜리 하고 경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외국에 싼 농산물이 한국 시장에 범람해 들어오면, 한국의 농산물은 완전히 판로를 잃어버리고 한국농촌은 황폐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제적인 협약으로 온 세계가 관세의 장벽을 허물어뜨린 이 마당에 우리 한국만 ??? 우리 한국은 국제적으로 고립화되고 또 해외에 우리 한국의 물건을 팔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나라에 물건을 팔아먹으면서 남의 나라 물건을 안 사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 전통적이고 통상적인 방법으로서는 우리 한국의 농어촌은 이대로 가면은 황폐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수평적인 사고방식만 가지고서 아우성을 쳐 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러할 때 필요한 것은 이제 수직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고방식의 혁명적인 사고방식으로 한국의 농어촌을 완전히 이 기회에 혁명을 일으켜서 새로운 농업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은 한동안은 진통이 있겠지마는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일본사람들은 한국 사과에 완전히 반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과 때문에 일본의 모든 과수사업은 무너지게 된다고 일본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한국사과를 맛 본 일본사람은 일본사과는 절대로 안 먹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인구가 무려 1억 2천만입니다. 그러니 일본의 1억 2천만이 한국사과를 한 번 맛본 이상은 모두 한국사과를 먹으려 할 것인데 이 질 좋은 사과나 배를 우리 한국 전 농촌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배를 한다면은 일본과 전 미국과 구라파에 한국산 사과, 배만 팔아도 일반 농사짓는 것 보다 수입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언제나 전통적으로 그저 벼농사나 지어야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이는 수평적인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언제나 밤중에 가서, 얕은데 그물을 던져야 고기를 잡지, 그러지 않고는 살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통적이고도 상식이 통하는 그런 삶입니다만, 위기에 처할 때는 전통적이고도 상식이 통하는 삶이 성공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핀란드에 갔을 때, 언제나 감격을 느낀게 있습니다. 핀란드에 헬싱키에 가면은 락크처어지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그런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큰 바위가 시내 한가운데 있는데 그 바위 안을 싹 파내 가지고서 거기에 들어가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음향장치도 잘 된 좋은 루트란 교회가 있습니다. 이 락크처어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통적인 사고방식, 상식이 통한 사고방식으로는 이런 교회를 지을 수 없습니다. 영 루트란 교회에서, 핀란드에 루트란 교회에서, 헬싱키에 루트란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는데 시당국에서는 절대로 교회를 이상 세울 수 없다고 터를 줄 수도 없고, 시내에 교회를 세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트란교 총회에서는 누구든지 헬싱키에 핀란드에 중심부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개발해 주는 사람에게는 큰 상금을 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보통사람은 다 "자기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소리하지 마라, 이제는 도시계획상 시내에 교회를 세울 곳은 전혀 없다, 교회는 못 세운다..." 그러나 공과대학 건축과를 나온 세 젊은이가 "뭔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시내를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는 한가운데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어요. 시내 한가운데 있어요. 그 바위에 올라앉아 가지고서 셋이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시내 어느 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러고 기도하며 앉아 있다가 그들에게 확 새로운 생각이 들어온 것이 "바로 여기가 교회가 아닌가.. 우리가 올라앉은 바위가...." 그러나 한 사람이 "이 바위를 어떻게 옮긴단 말인가, 이 큰 바위를 옮기려면 말할 수 없이 많은 돈이 들고, 또 시에서 허락도 안 할 것인데..." 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그렇게 하지 말고 이 바위를 속을 싹 파내 가지고서 그냥 계란 속에 노른자 파내듯이 파내어 버리면 이 껍데기 안이 교회가 안되겠는가? 우리 그렇게 한 번 해보자." 그래서 그 아이디어를 살려서 시에 허락을 받고 그 바위 속을 파내 가지고서 아주 좋은 교회를 삼았고, 이것은 관광명소가 되어서 핀란드의 헬싱키를 방문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 다 그 락크처어치를 참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한국말로 '꿩 먹고 알 먹는다'란 말처럼 상금도 타고, 교회도 세우고, 관광지도 되고... 좋은 결과를 맺은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 통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평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수직적인 사고방식으로 이와 같은 기적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가오는 고난을 오히려 삶의 기회로 우리가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변화시켜야 되는데 이 변화된 사고가 어디에서 옵니까?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오늘 베드로의 인생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종교적인 체험과 현실적인 삶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종교와 현실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현실은 현실이고, 종교는 종교고... 두 개는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베드로는 빈배를 저어서 왔을 때 그 마음도 텅 비었었습니다. 그물은 이끼가 끼고 찢어졌었습니다. 그래서 빈배에 찢어진 그물이란 것은 하나의 인생의 실패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도 그러한 체험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삶의 모든 것이 다 실패해서 빈배가 되고, 인간의 수단, 방법은 찢어져 버리고, 빈배에 찢어진 배를 가지고서 인생항로에 대했을 때, 여러분의 마음에 허탈과 절망이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배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면 베드로는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빈배에 찢어진 그물을 가지고 절망에 처해 있는데,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왔다는 이것이, 하나의 절대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찾아왔으면 그 배는 평생 빈배고, 그물은 찢어졌고, 베드로는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빈배에 찢어진 그물을 가진 그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잠시 그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이 다 버린 빈배, 찢어진 그물이라도 주님은 찾아와서 빌려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아무리 버림받은 인생이라도, 세상사람은 다 버렸을지라도 예수님은 찾아와서 그 빈배를 빌리기를 원하시고 그 찢어진 인생을 빌려서 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낭패와 실망을 당한 인생이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더라도 예수님은 여러분 생애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를 빌렸었습니다. 대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성공하고 있을 때는 예수님을 모실 여유가 있습니다. 성공을 해서 시간도 없고, 인기도 있고 이럴 때는 정신없이 자기중심으로 산다고 예수님이 와서 아무리 배를 빌려 달라해도 빌려주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성공하고 좋을 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참 좋겠는데 그때는 예수님 같은 것 생각도 안하고, 예수님이 오시더라도 들은 체 만 체 합니다. 자기가 배가 빈배가 되고, 그물이 찢어지고, 이제는 환영하는 사람도 없고, 올데 갈 데도 없고, 외롭게 되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예수님을 맞아 드리는 것이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배에 찾아오셔서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종교적인 행사를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배를 조금 육지에서 띠게 하시고 난 다음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는데 그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베드로도 빈배에 찢어진 그물을 안고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세상사람이 볼 때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입니다. "세상에 고기를 잡아서 처자를 먹여 살려야 될 사람이 이제는 빈배에 찢어진 그물을 가지고 예수쟁이가 되어 가지고 예수님을 그 배에 모시고 예배를 보고 있다." "지금 미쳐도 보통 미치지 않았다." "이젠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되었다." "폐인이 되었다." 베드로의 동료들조차 비웃었습니다. "저 사람 이젠 완전히 돌았다." "저 사람 이제 삶을 포기한 사람 아닌가." "현실의 삶에 어려운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이제는 예수님을 그 배에 모시고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다니 세상에 저럴 수가 있느냐" 그런 소리를 이 세상에서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활에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 부인 따라서 교회에 가서 '턱' 앉아서 하나님 말씀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일가친척이나 친구들이 보고 "저것은 완전히 이젠 버림받은 자식이다. 이젠 세상에 실패하고 나니까 마누라 따라 가지고서 교회에 앉아있고, 손바닥 치고 할렐루야 하고있고... 이젠 완전히 돌았어. 이제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현실생활과 너무 동떨어졌다고 생각이 되고, 친구와 이웃의 조소를 받지만 바로 그 자리가 수평적인 인생을 살다가 실패한 사람이 수직적으로 인생을 재출발하는 자리란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란 수평적인 인생생활에 실패한 사람들이 수직적인 삶을 새롭게 출발하는 훈련장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말씀을 마치시고 난 다음에 베드로를 이젠 끝났으니깐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나간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하신 말씀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말하셨습니다. 완전히 수평적인 사고방식에 어긋납니다. 이것은 상식이 통하고, 전통적인 삶으로서는 대낮에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사는 분이 아니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고방식은 상식적이고 수평적인 것이 아니오,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수직적이요, 천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직적인 말을, 천례적인 말을 베드로에게 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주위 이 말씀을 비웃고, 어리석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인생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갖고 구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새로운 방법으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전통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적이고, 신앙적이며, 기적적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말한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상식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생을 사는 새로운 훈련 세계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적응하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주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제 예수님이 주시는 수직적인 삶의 아이디어를 살펴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적인 삶의 중요성을 절대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직 순서를 주님께서 올바르게 취하란 것입니다. 현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 믿고 종교를 가지면, 현실은 져버리고 가방 메고 저 산에 들어가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의 현실 인생살이를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더하시리라."고 순서를 바꾸라고 한 것입니다. 먼저할 것 먼저하고, 나중 할 것 나중 하는데 먼저할것이 무엇이냐?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인생의 먼저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부터 먼저 드리고, 하나님부터 먼저 섬기고, 그 다음에 우리가 이 세상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일을 다 하라고 그랬습니다. 세상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을 주님 하지 말고, 빈손 들고 가만 앉아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깡통 들고 살라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먼저 영혼이 잘되는 일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그 다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주셔서 수평적인 인생 삶이 아니라 수직적인 인생 삶으로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으라는 주의 음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꿈입니다. 베드로는 완전히 끔을 잃어버렸었습니다. 이제는 고기잡이로써 실패했다고 꿈을 잃어 버렸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 삶에 새로운 꿈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다른 천당 가는 꿈을 준 것이 아닙니다. 고기잡이에 꿈을 준 것입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꿈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고의 도전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입니다. 밤에 고기를 잡는데, 예수님은 대낮에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얕은 곳에 가야 고기를 잡는데, 주님께서는 깊은 곳에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사고가 아닌 믿음의 실천인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도전에 베드로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대답한 것 보십시오. 얼떨떨해서 말하기를 "주여, 밤이 맞도록 내가 수고했으나 잡은 것이 없는데요. 고기잡이는 내가 아는데요.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시오, 고기잡이는 내가 아는데요. 갈릴리에서 태어나서, 갈릴리에서 잔뼈가 다 자랐으므로 이곳에 고기 잡는 일은 내가 상식적으로 알고, 전통적으로 다 아는데요.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져라 잡은 것이 없는데요." 그렇게 항의성이 짙은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뚫어지게 보셨습니다. "네가 대화하는 그 분은 하나님이시고 내가 네게 말한 것이 이제는 상식과 전통적인 인생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수평적인 인생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수직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말씀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이다." 이건 이제 상식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통하진 않아요. 이는 계시적이고, 묵시적이며, 믿음으로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길을 따를래, 안 따를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눈을 뜷어지게 들여다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권위에 압도되어 가지고서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으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그만 기가 죽어버리고 말았었어요. 예수님이 하도 엄하게 말씀하니까 그만 자기의 상식도, 전통도 포기해 버리고 하나님의 묵시와 믿음을 가지고 아이디어를 가지고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과 함께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들어갔었습니다. 이제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난 다음에는 그때부터는 여러분, 이 세상에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도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사람들은 교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만 예수님이 계시고, 일터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대단한 오해입니다. 설교할 때만 베드로의 배를 빌린 예수님이 아니라 고기 잡으러 갈 때도, 예수님이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신 것입니다. 예배당에 왔을 때만 여러분 몸 속에 예수님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사할 때, 사업할 때 그때도 예수님이 여러분 몸 속에 같이 계셔서 주님이 함께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생활과 현실적인 사회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배당에 같이 계신 예수님은 여러분 집에도, 사업장에도, 장사 터에도, 직장에도 함께 하셔서 우리 주님이 상식과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기적적인 방법으로, 계시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아니하고, 남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겠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주님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가서 그물을 던지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많이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이 찢어지게 된지라 그 고기를 주워담는데 아 예수님이, 말씀증거 하셨던 그 어른이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땡기고 그 비린내나는 고기를 같이 주워 담아요. 같이 자꾸 주워담아요. 나중에 그 배가 가득 차매 이웃사람의 배를 불러다가 그 배에도 가득히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말씀을 증거 하던 그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농사를 지면 쟁기를 같이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면 같이 사업장에서 기계를 돌리시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면 같이 물건을 팔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구만리장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베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위대한 인생을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낭패와 실망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종교적 체험을 한 후에 새로운 사고, 즉 주님의 말씀의 아이디어를 받아 믿음으로 실천한 베드로는 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기 잡힌 것이 많아 자기 배를 채우고, 또 동료의 배에도 가득히 채우고 난 다음에 그는 거대한 인생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인생은 혼자서 사는 것만 아니구나. 예수님과 더불어 인생을 살 수 있고, 그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새로운 인생에 부딪혀 그는 그 새로운 삶을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충성히 얻게 하려 왔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새로운 인생 삶을 시작하는 것이 너무나 벅차고, 감격하고, 이 예수님은 보통 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그 자체라는 것을 알자마자 그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추한 죄인을 주님이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고기까지 잡아 주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는 고기잡이뿐 아니라 거기에서 출발해서 더 위해한 인생 삶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께 말씀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갈 동안에 수평적이고, 상식적이며, 전통적인 인생을 살다가 실패했으므로 그것이 인생의 절망이요,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빈배에 찢어진 그물을 가지고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여러분의 배에 반드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배를 빌려다오. 너의 빈배, 찢어진 그물.. 그 배를 내게 빌려다오. 그 곳에서 나와 함께 천국사업을 먼저하자. 먼저 부흥회부터 한번 해보자. 먼저 회개하고 예수부터 믿어보고 그리고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신앙생활 속에 먼저 한번 들어가 보자. 그 고기잡이배가 바로 예배당이 되게 한번 만들어 보자.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이젠 내가 너와 함께 하여서 수직적인 사고방식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적인 인생을 살게 해 주마. 상식적이고 전통이 실패한 곳에 나와함께 들어가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으로 위대한 성공을 가져오게 해 주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 실패한 거 자리에서 위대한 성공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