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스크랩] (성경공부) 마태복음 2

공 상희 2009. 5. 6. 13:16

 

 

 

 

 

마태복음 (2)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태복음 17장

 

 

 

 

마태복음 17:1-8


마태복음 17장은 1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제로 해서 내용이 전개된다. 그것은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16:28) 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해서 17장은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행하신 일과 변화산 아래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주고 있다. 변화산 사건 자체가 바로 주님의 왕권적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사건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 제자(베드로,야고보,요한)만 특별히 경험하였다. 베드로는 이를 보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하늘의 구름이 와서 저희들을 덮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5절)고 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누가복음 9:31에 보면 이 때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가 나온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즉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베드로는 그 영광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곳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있을 때에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고서는 영광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은 십자가를 지는 아들이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은 인간이 집을 지어서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나 엘리야로 보여주셨듯이 구약의 말씀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천국의 영광은 주님이 가신 길을 주님의 말만 듣고 그대로 따라가는 자에게만 주어질 영광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모세도 엘리야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때문에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았을 때에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8절)고 말씀하고 있다.

 

 

 


9절에 보면 예수님은 변화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변화산의 사건을 목격한 세 제자는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금하신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고난이 훼방을 받기 때문이다. 변화산의 영광을 말해 버리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고난이 없는, 십자가의 죽음이 없는 영광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이 훼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영광이나 어떤 경험 체험을 가지고 신앙을 미화시키면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7:9-27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한 부활이 있기 전까지이다. 제자들은 메시아가 반드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9:10에 보면 제자들이 서로 의문이 되어 수군거렸다고 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메시아적 사명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0절)였다.

 

 

 


말라기 4:5에 의하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의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제자들로서는 자연스럽게 엘리야에 대해서 질문하게 된 것이다. 즉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엘리야를 본 것이 바로 오리라 한 그 엘리야로 말라기 4:5말씀의 성취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변화산의 영광 그 자체가 주의 날로 성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달랐다.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12절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곧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야와 같이 고난받는 선지자의 노선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예수님 자신이 엘리야로 오셨다는 의미이다.

 

 

 


변화산의 사건을 보지 못한 산 밑의 제자들은 어떤 모습인가를 14-20절까지 기록하고 있다. 변화산 아래의 상태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혀 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귀신들린 아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변화산 위의 영광의 모습은 변화산 아래에 있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혀 있는 죄인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며 그 변화산 위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승리로 귀신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머리를 밟을 때에 가능한 영광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7절)라고 하셨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믿음이 부족하니까 믿음을 더욱 길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무슨 믿음인가?

 

 

 


12:39-40과 16:4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보여줄 것이라고는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다. 즉 십자가의 사건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도 변화산 영광을 통해 보여주시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십자가 표적을 믿지 않고 자꾸 병고치는 것을 추구한다든지 자신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신앙이라면 그 상태가 곧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 사건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신자들이 다른데 관심을 두고 사는 것도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의 사건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이 우리는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절)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가 믿음을 가져서 산을 옮기는 능력을 나타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산을 옮기는 그런 능력보다도 더 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설사 산을 옮기는 능력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 믿음은 겨자씨만큼 밖에 안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단지 귀신을 쫓아내는 그런 능력은 하찮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적들이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천국의 힘이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술적인 힘과 같은 식으로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란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주님이 귀히 여기시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이다. 따라서 신자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나도 함께 죽었기에 나의 소원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지 땅에서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아는 자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확실히 예고하시는 것이다(22절).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세상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기에 근심하게 된다(23절).

 

 

 


그러나 신자가 세상을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세상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살기는 하되 나그네로 살뿐이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게 산다는 것이지 세상의 모든 일에 전혀 관계없이 살아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24-27절까지의 말씀이다.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받는 자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요구한다. 당시 성전세는 반세겔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의 실체)이시므로 아니 성전보다 더 큰 분이시기에 세를 낼 필요가 없다. 또한 세는 타인에게 받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세를 낼 필요가 없으시다고 하신다.

 

 

 


그러나 오해를 막기 위해서 밖에 나가 일해서 얻은 것으로 세를 바치라고 하신다. 그들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과 상관없이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세상과 무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서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할 의무를 해야하되 보여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아는 것이 곧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마태복음 18:1-14


18장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5대강화 중에서 네 번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가?”하는 문제로 질문을 했다(1절). 아마 변화산에서 본 영광 때문에 서로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막9:33-34). 이 질문은 ‘누가 가장 큰가’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과는 달리 천국이 어떤 나라이며 누가 들어가는 나라인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셨다. 그리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면 여기서 어린 아이란 어떤 모습인가? 4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고 했다. 즉 어린 아이란 자기를 낮추는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3절에서 예수님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셨다. 돌이켜, 즉 그들의 삶의 방향이 어디로 잡혀 있는가 하는 말씀이다. 천국은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치와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천국은 누가 가장 큰가 하는 것으로 힘으로 따지고 경쟁하여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어느 것이 큰가 하는 식으로 비교해서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천국은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소자를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나라이다.
천국은 높고 낮음이 없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4절)라는 말은 천국은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천국은 가장 큰 자만 있지 낮은 자는 없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자신을 같은 모습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아주 연약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오셨다.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은 보잘 것없는 모습으로 와 있다. 그러므로 소자의 마음 즉 주님의 이름, 주님의 마음이 아니면 천국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주님을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 말씀은 실족케 하느니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족케 할 바에는 오히려 그 사람의 목에 연자 맷돌이라도 달아서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화가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우리 몸이 아니라 천국이다. 비록 자신의 몸이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방해 요소가 된다면 잘라버리는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마만큼 죄를 미워하고 천국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8-9절). 어린 아이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소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천사라도 보내서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10절). 하나님께서는 소자가 무시당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14절).

 

 

 


하나님은 크고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소자에게 있기 때문에 양 백마리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반드시 찾으시는 것이다(12-13절). 하나님의 관심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것을 반드시 찾으시고자 하시는 데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과연 주님의 마음이 담긴 소자에게 관심을 두는 주님의 마음인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유익이 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인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십자가의 주님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이것이 천국이다.

 

 

 

 

마태복음 18:15-35


천국이란 소자와 같은 모습이다. 곧 예수님이 소자의 모습이요 그를 따르는 자가 소자이다. 하나님의 관심이 바로 소자에게 있기에 큰 자로 살아가고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세상의 경쟁 심리로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관이 이 땅에서는 유일하게 교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절에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과연 교회란 무엇일까? 무엇을 가지고 교회라고 해야할까? 오늘날 흔히 말하듯이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하나님이 부흥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는 조직과 숫자가 아니라 형제가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은 12:50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혈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로 말미암아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16:16-18).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형제란 기존의 인간의 혈육에 의한 형제가 아니라 인간의 핏줄이 거부된 자들로 부름을 받은 형제들이다. 그렇다면 그 형제들이란 어떤 형제들인가? 곧 용서를 아는 형제를 말한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함으로 이루실 죄에 대한 용서를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형제)들을 모으실 것이다. 따라서 17절의 교회는 조직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림을 당한 경험이 있는 형제들, 즉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아는 자들의 모임을 말한다. 이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17절의 말씀이다.

 

 

 


18절은 16:19말씀과 동일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용서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주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는 교회의 역할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용서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하는 기도이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드러내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20절에서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무조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바로 용서를 이루는 이름이 되었기에 주님의 이름 그 자체가 이제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것이다. 거기에 주님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였다고 해서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이름에 의해 모여진 자요 또한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로 용서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순히 인간의 실수를 묻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용서인 것으로 이해했다(21절).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22절)고 하셨다. 용서란 숫자에 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2절). 즉 천국이란 용서의 끝이 없다는 말씀이다.

 

 

 


이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은 자신이 용서받은 자임을 알지 못할 때 남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신이 이미 용서받은 자로 남을 대할 수 있다. 즉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의로운 자로서 잘못한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는데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고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의 입장에서 형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결국 우리 자신은 남을 용서하고 안하고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형제를 긍휼히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은 긍휼을 모르는 자는 형제를 용서할 수 없다. 교회는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 소자들만 보여진다.

 

 

 

 


마태복음 19장

 

 

 

 

마태복음 19:1-15


천국과 교회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떠나 유대지방으로 가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논쟁(1-15절)과 재물과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신다(16-30절). 먼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해 왔기 때문에 이혼에 대한 교훈을 주시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이혼의 문제를 거론한 것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자기들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창세기 1:27과 2:24을 근거로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대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법적인 이혼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애당초 남자와 여자가 있게 하심으로 보여주신 한 몸된 관계로 마음까지 나뉘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의도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모세의 법을 앞세운다. “그러하면 어지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7절). 이런 율법에 근거해서 바리새인들은 이혼할 때 이혼 증서를 주었다. 즉 이혼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들은 철저하게 모세의 법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으로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라고 했던 것은 당시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재혼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으로 이혼했다는 증서가 필요했다. 결국 이혼 증서는 최후까지 아내를 보호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법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내어버리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 연고없이 이혼해 놓고도 이혼 증서만 주면 다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절)고 말씀하심으로 이제까지 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행해온 이혼뿐만 아니라 오히려 간음한 죄까지 범했다고 지적하셨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천국은 모세의 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서는 결혼이라는 것이 너무나 쉽게 생각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그래서 사랑하기에 무조건 결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이혼이라는 문제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결혼이라는 것을 불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예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마음껏 성(sex)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은 비단 오늘에 와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노골화 되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결혼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결정적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한 몸이 깨어져 이미 두 몸이 되었기에 십자가를 통해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저히 이혼이 금해지는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은 당시 제자들의 마음에도 이미 찾아들고 있었다. 제자들이 그러면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절)라고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세 가지 형태를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는 말씀을 하시므로 결혼을 하든 하지않든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천국을 위해서 사는가 세상을 위해서 사는 자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옴으로 다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신다(13-14절). 즉 천국이란 모세의 법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나아오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며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의미로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14절).

 

 

 

 

마태복음 19:16-30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묻는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 마태는 의도적으로 인간의 심성이 본래 어떠한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같다. 앞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시면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천국(영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한다. 어떤 선한 일을 행하는 결과로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여기서 청년은 선한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청년은 선한 일을 도덕과 윤리에 비추어서 좋은 일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 그 질문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정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 묻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보고 선한 일을 배우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답변은 ‘선한 일’을 행해야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한 분’이 누구이신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청년에게 십계명의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절)라고 묻는다. 그때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다. 결국 천국이란 인간이 이 땅에서 무슨 행위가 있고 없고에 의해서 주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선하신 한 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천국이다. 모세의 법(율법)을 잘 지켜야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의가 된다.

 

 

 


그런데 이 하늘의 의는 땅의 것, 즉 인간의 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21절)고 하셨다. 땅의 것을 귀하게 여긴다면 주님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3-24절)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부자란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자기 가진 재물을 바라보면서 살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살며 곧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가 부자이다. 즉 자기에게 있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부자이다.

 

 

 


이런 자들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듯이 천국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한다(25절).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절)고 하셨다. 천국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이 넣어주실 때에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공로란 조금도 개입될 수 없는 나라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베드로는 부자 청년이 자기 재물로 인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자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기에 거기에 대한 보상이 주님으로부터 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신다(28절). 베드로는 아직도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주님의 영광을 보아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즉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버릴 때에 영광에 보좌에 이르게 되시는 주님을 볼 때에 우리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기존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하여”(29절), 즉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그 새 이스라엘이 자기의 것을 고수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이 땅에서 받는 보상이 아니라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렸기에 그보다 더 소중한 영생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절)는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20장에서) 비유로 연결된 내용으로 가르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20장

 

 

 

 

마태복음 20:1-16


20장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포도원 품꾼에 대한 비유이다. 포도원 품꾼에 대한 비유는 먼저 신앙생활 한 자와 늦게 신앙생활 한 자에 대한 비교를 하거나 천국에서 받을 상급에 대하여 말씀하는 비유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포도원 품꾼 비유는 신앙생활을 언제 했는가 하는 문제로 구원을 말하고자 하는 비유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 상급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본 비유를 어떤 동기에 의해서 말씀하시게 되었는가?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어왔을 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시니까 청년은 근심하면서 갔다. 그때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으니 무슨 보상이 있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고 하셨다. 그리고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1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분명 포도원 주인에게 비유의 초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품꾼을 구하러 나가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을 시켰다. 또 주인이 제 삼시(오전9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 제 육시(낮12시), 제 구시(오후3시), 제 십일시(오후5시)에도 그렇게 하였다.

 

 

 


아마 그 당시에 이렇게까지 하여 일을 시키는 포도원 주인은 없었다. 그러기에 이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면서 당연히 가지게 되는 호기심은 ‘과연 포도원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것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온 사람에 대하여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이쯤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포도원에 처음 들어온 품꾼은 분명히 몇 배의 품삯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아침 일찍 들어온 품꾼이 주인에게 따졌다. 그러나 주인은 약속한대로 주었기 때문에 자신은 결코 잘못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이었다.

 

 

 


중요한 것은 3절의 “장터에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할 일없이 놀고 섰는 사람들이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그날 하루는 일을 하지 못하고 굶어야 하는 신세이다. 주인은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품꾼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은혜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아니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된 성향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지면 애초부터 놀던 자이기에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조차 주인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천국의 질서나 법칙은 세상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굳이 세상의 법칙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것과 같이 완전히 반대로 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아직도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 법칙을 잘 모르는 자들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유대적 관념과 종교관, 특히 유대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보상주의, 공로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즉 당대의 유대적 사상의 기준이나 관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판단하거나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천국의 모습은 비유에 나타난 포도원 주인이 은혜를 베푸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도록 내어 주면서도 죄인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시는 모습이 긍휼과 은혜의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방법이며, 천국의 모습이다.

 

 

 


세상 질서 속에서 먼저 되고 이기려고 하는 기존의 관념, 기존의 잘못된 천국에 대한 이해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역사를 바르게 알 수가 없게 된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관념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자기의 한 일을 가지고 앞뒤를 따지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를 가지고 앞뒤를 따지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0:17-28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절). 이는 유대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구원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시면서 그것은 곧 유대인만 선택된 자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나중 된 자, 즉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이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나타내준 것처럼 주인의 은혜를 아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게 된다(17-19절).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게 된 것은 세 번째이다(16:21; 17:22-23). 그때 세배대의 아들(야고보와 요한)의 어미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들이 주의 나라에서 우편과 좌편에 앉게해 달라고 부탁한다. 아마 19:28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던 것같고 또 “저희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눅 19:11). 그러자 예수님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마가복음 10:38에 보면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라고 하셨는데 “잔과 세례”는 곧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받을 고난과 죽음을 제자들이 결코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할 수 있다”고 만용을 부리고 있다. 이것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23절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들이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했다. 반드시 고난을 통해야만 보좌의 영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고난이지 보좌의 영광이 아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에 영광의 보좌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되는 것이다. 두 제자로 인하여 열 제자들에게 분란이 일어났다. 두 제자가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높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을 참지못하고 분을 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세상과 천국을 대조하여 다시 말씀하신다(25-26절). 천국은 세상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세상에서는 권세를 잡은 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향해 권세를 부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 안에서는 오직 섬기는 모습만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곧 천국의 모습이다. 바로 이 천국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28절). 그 모습은 적당히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목숨까지 대속물로 주시는 모습이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가 어떤 자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사는 자인가 아닌가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된 자이고 하나님 앞에서 큰 자이다. 섬김을 받으려 하고 권세를 부리려고 하는 모습은 하나님과 절대 상관없는 세상의 모습에 불과하다.

 

 

 

 

마태복음 20:29-34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소경 둘을 만나신다(29-34절). 소경들은 크게 소리를 쳤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0절).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까닭은 무엇인가?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공의와 은혜를 보여주는 왕이었다. 곧 그 다윗 언약 속에 메시아가 오셔서 불쌍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는 구원의 모습이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경이 주님을 향해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은 것은 남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살 수 있는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주님은 왕으로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줌으로 긍휼을 베풀러 오셨다.

 

 

 

 


마태복음 21장

 

 

 

 

마태복음 21:1-11


예수님은 이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게 된다. 무리들이 환호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9절). 구원자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다고 하셨던 그곳이 바로 성전이요(출 20:24; 신 12:5-6; 대하 6:5-6) 그 성전의 기능을 담당하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5절을 보면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셨다는 것 자체를 가지고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나귀새끼라고 하는 보잘것없는 짐승을 탄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나귀란 전쟁하는 일에 쓰이는 동물이 아니라 남의 짐을 대신 져주는 일을 하는 동물이다. 그 나귀가 하는 일을 앞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하실 일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은 나귀같이 남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므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하실 일이다.

 

 

 


본문의 근거가 되는 스가랴 9:9에 의하면 멍에를 메는 나귀가 아니라 그냥 나귀라고 되어 있다. 스가랴서에서는 단지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데 그분이 곧 나귀를 타고 온다는 의미로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귀를 타고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아는 강한 힘을 소유한 분으로서 자기들을 해방시키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리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곧 자기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생각하고 “호산나”(이제 구원하소서)라고 외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천국은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스가랴 9:10에 보면 “내가 에브라임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라고 한다. 병거, 말, 활은 힘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 끊어 버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는 세상 힘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겸손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모습이다. 우리의 죄 짐을 대신 져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 21:12-22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신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하신다(13절). 성전은 기능이란 바로 죄사함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곧 성전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여주고자 이제까지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옴으로 그들을 고쳐주시는 것이다(14절). 죄에서 사함받은 상태란 바로 이런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주님을 모독하고 있고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사만 잘 지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제사의식 자체를 유지하는 일에 열중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즉 제사는 자기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과 같이 기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이다. 제사의 의미를 기도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심판과 긍휼은 외면해 버리고 유익을 얻기만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아니다. 마치 자신들의 유익을 기대하고 호산나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주님을 진심으로 구세주로 영접한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이다. 하나님은 이런 점에서 어린아이의 찬미를 예비하신(온전케 하신) 것이다(15-16절).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18-22절). 마가복음 11:13에 의하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 무화과나무는 잎보다 열매가 먼저 맺히는 나무이다.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분명히 열매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즉 열매가 있도록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율법의 형식만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이다. 이런 자들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 열매없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받으시기 위해서이다.

 

 

 

 

마태복음 21:23-32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권세에 대하여 질문을 하게 된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은 일에 대하여 묻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에 대한 근원을 물으시면서 그 것에 대한 답변이 있으면 자신의 권세에 대하여 말씀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인간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저주를 짊어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찬양하도록 예비하셨으며(15절) 그 어린 아이들이란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할 줄 아는 자들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21-22절 말씀은 인간이 믿음으로 구하면 모든 것을 다 응답받을 수 있다는 기도만능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는 이제 십자가의 저주를 아는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과 구원이라는 양면을 행할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을 알고 행하는 자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저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임을 믿고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그리스도로 인해 저주가 제거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란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요구되어지는 자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열매를 맺는 것이지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 주님의 찾으시는 것은 주님 자신의 것만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28-31절). 이 비유의 접속사는 “그러나”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는 권세에 대한 비유라기 보다 진정한 열매는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한 비유이다.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대로 대답은 하였으나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을 했지만 뉘우친 후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는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치고 살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기들 나름대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큰 아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잘 행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세리와 창기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절).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에 의해 버림받고 멸시받는 자들이라고 예수님은 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던 자였지만 요한의 의의 도를 듣고 믿은 자가 곧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였다.

 

 

 


오늘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누구인가? 종교적 행위를 펼쳐 보이면서 거창한 교회 사업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수님 안에 있는 자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듣고 믿는 자이다. 그리고 자기의 죄된 모습에 대해서 깨닫고 자기의 죄인 됨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지는 삶으로 고백하는 자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

 

 

 

 

마태복음 21:33-46


예수님은 “다시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33절).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는 말씀으로 이 비유는 시작되고 있다. 당시에 이런 일은 많이 있었던 것같다. 열매의 때가 되어서 주인은 종들을 농부에게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기도 하였고 죽이기도 하였다. 주인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냈으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주인은 이제 아들을 보냈다. 농부들은 상속자를 죽이면 아들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아들을 포도원밖에 내어 쫓아 죽였다.

 

 

 


비유의 끝맺음은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이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물으신다(40절). 제자들이 이렇게 답변한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절). 여기서 농부는 대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이다. 그렇다면 종은 선지자들이고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농부가 종과 아들을 죽인 이유가 무엇일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내어놓을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왜 유대인들에게 열매가 없는가?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의식과 형식들이 무성했다. 절기도 철저히 지키고 금식도 하며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으며(마 6:2) 십일조도 철저히 드렸다(마 23:23). 성경도 부지런히 연구했다(요 5:39). 그럼에도 주인에게 내어놓을 열매가 없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주인과 관계없는 열매였다.

 

 

 


종과 아들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농부들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원하는 열매가 자기들에게 없기 때문에 종과 아들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하면서 열매를,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 118:22이하를 인용하면서 그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즉 사람들은 자기들의 뜻과 맞지 않다고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버리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주워서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시는 것이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것은 아주 요긴하게 쓴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초를 놓는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을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천국 백성이 정해지는 것이다. 율법을 지켰느냐 안지켰느냐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했느냐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 거기서 흘린 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나의 죄를 씻는 것으로 받아들이냐 하는 의미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사는 자가 열매를 맺는 자이다. 이제 하나님은 버림받은 돌 위에 돌을 쌓아가실 것이다. 따라서 버림받은 돌 위에 쌓여지는 돌 또한 버림받은 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은 버림받은 돌 위에 세워진 돌로서 함께 버림받기를 기뻐하는 모습을 말한다. 주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기를 기뻐하는 자에게 열매가 맺혀진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버림받은 돌 위에 설 수가 없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없다. 그것을 44절이 말해준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는 말은 모퉁이 돌에 의해서 내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어신다고 하는 것은 모퉁이 돌이신 주님이 세상 사람들 위에 심판주로서 오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부딪히든지 예수님이 치든지 모두 예수님에 의해 되어지는 일이다.

 

 

 

 


마태복음 22장

 

 

 

 

마태복음 22:1-14


본문에서 21장에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와 연결하여(“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1절)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대한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1-14절). 2절에 보니까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했다. 즉 이 비유는 천국비유이다.

 

 

 


구약성경에서는 구원에 대하여 종종 잔치로 표현하고 있다(참고 사25:6-9). 그런데 그 잔치는 왕의 아들을 위한 잔치이다. 즉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들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관한 것이다. 만약 아들을 잘못 대우했다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이런 점에서 두 번째 비유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21장에서부터 계속 유대인들을 공격하시는 것이다.

 

 

 


왕은 잔치를 벌여놓고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 자들이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서 오기를 싫어하였다. 재차 종들을 보내어 청하였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할 일에 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들을 잡아서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왕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진멸하였다. 그리고는 종들을 시켜 거리에 나가서 닥치는대로 사람을 청하여 오라고 했다. 그리하니 손님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어 그를 쫓아 내었다. 비유의 결론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고 맺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과 비슷한 누가복음 14:23을 들어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였기 때문에 무조건 힘써서 전도하여 예배당을 채우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앞의 두 비유에서도 이미 밝혀지고 있듯이 내 집을 채우라는 것은 천국이 비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씀이다. 현재 유대인들은 천국백성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는 뜻이다.

 

 

 


아들을 위한 잔치에 누구를 초청하는가 하는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왕이 초청하였기에 올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기고 그러한 은혜에 대한 고백이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올 수 있었다고 자부하는 자이다.

 

 

 


이 잔치는 왕의 아들을 위한 잔치이기에 결국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 되었다는 것은 아들에 의해 아들의 은혜로 지금 잔치에 참여된 자이다. 반면 아들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아들을 잘못 대한 자들에 대해서는 결코 천국에 있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아들의 은혜를 아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변함없이 믿어 왔는데, 과거에 주를 위한 열심이 있었는데, 모태신앙인데 하는 등의 문제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앞으로 잘하겠다는 각오도 중요하지 않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과거에 얼마만큼 했는가? 미래에 얼마나 잘할 것인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베푸신 은혜를 아는가 하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이다.

 

 

 


마찬가지로 내일이 되어서도 지금 주님의 은혜를 알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이 주님이 가지시는 관심이다. 그러므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을지 모르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천국은 오직 왕의 기쁘신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로 인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할 수만 있으면 올무에 걸리게하여 죽일 빌미를 찾고 있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헛된 열심에 사로잡혀 바리새인들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헤롯당원들과 연합하여 예수님을 찾아가게 된다(15-2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로마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냐고 묻는다. 만약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선지자로서 어떻게 이방 왕에게 굴복하고 로마를 위하여 살라고 하느냐 하는 바리새인들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고, 만약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로마 정부를 대적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헤롯당원들에게 고소당할 것이었다.

 

 

 

 

마태복음 22:15-22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는 돈에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느냐고 물으신다. 당시 로마돈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기에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다.

 

 

 


여기 본문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가이사에게 일부 바칠 것은 바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바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37절에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6:24에 의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도 로마 정부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돈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을 말씀하시면서 ‘과연 너희들은 누구의 형상인가?’하는 것을 물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누구의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나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바치느냐 하나님께 바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 때문에 나온 질문이기에(18절) 그런 일에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희 자신이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쓰는가? 예수님이 물으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자신의 피값으로 사셨기에 나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가?

 

 

 

 

마태복음 22:23-33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이제 예수님을 공격한다(23-33절). 인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만든 조직(단체)을 가지고 계속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모여 교회라고 이름을 붙인다. 교회라고 이름을 붙이고 세워지면 하나님의 교회로 둔갑한다. 그래서 오늘날도 인간이 만든 교회라고 하는 조직을 가지고 예수님을 수없이 공격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시형제 결혼법’으로 예수님께 질문한다. 한 여자가 칠형제 가정의 맏이와 결혼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었으므로 동생과 결혼하여 결국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였다가 다 죽고 부활하였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소생이나 환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먼저 책망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29절). 천국은 세상에서의 모든 혈육적인 관계가 깨어지는 나라임을 말씀하신다.

 

 

 


32절 서두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언급은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 때에 약속하시고 행하신 하나님은 이삭 때에도, 야곱 때에도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성취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일하게 오늘날도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는 그리스도시므로 그 약속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약속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곧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며 천국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언급하고 있다(32절).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와 관계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라도 다시 살려서 상대하신다는 것이다. 신자란 바로 이 생명 안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두려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이다. 오늘도 죄인으로서의 나는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난 자로서 하나님과 상대하며 살아가는가?

 

 

 

 

마태복음 22:34-46


34절 이하에서 다시 율법사가 율법으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다(34-40절). 율법사는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어느 계명이 큰가를 묻는다. 율법사는 사두개인들이 대답할 수 없게 되었음을 보고 아마 큰 계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가장 큰 계명을 지키면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이라는 식으로 자신들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랑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동일한 차원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이 구약성경(율법과 선지자)의 골격이요 핵심이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를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으로 최고의 율법은 십자가이다.

 

 

 


이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물으신다(41-46절).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예상하셨다. 자신이 다윗의 자손으로 왔지만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는 혈통적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공격하는 이유는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 110:1 말씀을 인용하시는 것이다. 주(여호와)께서 내(다윗) 주(그리스도)께 말씀하셨다:“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원수를 멸하고 얻으실 영광이 다윗보다 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혈통적인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임을 이 말씀을 근거로 나타내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한 말도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이 폭로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해 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하는 것이 구원의 관건이다.

 

 

 

 


마태복음 23장

 

 

 

 

마태복음 23:1-12


계속적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자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공격하신다. 이것은 소위 “일곱가지 화(禍)”라고 부른다. 지도자로 자처하기를 좋아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악을 7가지로 요약해서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지도자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도자란 인간의 조직에서 필요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지도자요 선생은 예수님뿐이시다(10절). 인간이 어떤 조직을 결성하고 나면 그 조직을 키우는 것이 소망이 된다. 그리고 조직을 키우는 방법으로 등장하는 것이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고 그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함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을 키워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모든 면에서 조직화가 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교회는 결코 조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조직은 있을 수 있으나 조직으로 교회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에는 지도자도 상전도 있으면 안된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교회의 직분조차도 계급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계급으로 나누어서 서열을 정한다. 그러나 교회는 각기 맡겨진 일의 성격에 따라 나누어진 직분일 따름이다(고전 12:1-31).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관계로 형제일 뿐이다(8-10절). 예수님에 의해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이 교회이다. 누가 누구의 위에 존재할 수 없고 다스릴 수 없다.

 

 

 


교회에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믿음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인데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지도자나 상전이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신다(2절).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당시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자였으나 자기의 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과 명령대로만 할 뿐이었다. 모세의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3절의 말씀도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행하고 지켜야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이미 말씀에 의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명령했으나 자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같이 움직이는 것은 그들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으로 여기고 명령하는 자로, 지도자로, 상전으로 존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말씀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큰 자가 되시는 것도 섬기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분이시며 우리의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분이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로서 멀어져 있다. 이것이 그들의 외식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행위는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를 하나님은 높이시고 자기를 높이는 자를 낮추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23:13-39


첫 번째 화(13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비록 천국의 문을 여는 자인척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천국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을 책망하신다.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서 천국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를 의로 삼아서 천국에 가고자 한다. 결국 이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막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까지 방해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13절). 오늘날 교회가 천국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와 욕심에서 나온 말이 될 때에는 화를 당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두 번째 화(15절)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방 나라에서부터 교인된 사람들을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백성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책망하신다. 즉 새롭게 교인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이고 의식적인 바리새인들을 배워갔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또 하나의 바리새인으로 자라갈 뿐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교회에 들어오면 성경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앙생활한 사람들의 모습을 배우고 있다. 기도하는 문구, 봉사하는 생활, 교회를 경영하는 방법 등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종교인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종교인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화(16-22절)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맹세에 관한 진리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를 말씀한다. 산상수훈에서는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맹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성전이나 제단은 그 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종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일했기 때문에 성전보다는 성전의 금, 제단보다는 제단의 예물을 더 강조했던 것이다. 이들은 소경된 자이다. 성전과 제단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는 소경들이다.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금과 예물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번듯하게 지은 예배당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목사인가?

 

 

 


네 번째 화(23-24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조그마한 회향의 십일조가 더 중한 율법의 요구를 실행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가치를 전도시킨 것을 책망하신다. 율법의 요구는 의와 인과 신을 행하는 것인데 그들은 그 요구는 묵살해 버리고 십일조를 율법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한 것이다.

 

 

 


의와 인과 신이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말한다(미 6:8). 그것은 곧 예수님 자신이다. 바리새인들은 의와 인과 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십일조 자체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십일조를 했다는 것으로 율법의 전부를 지킨 것으로 여기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인정하셨다는 말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24절에서 십일조를 하루살이로 비유하고 계신다. 이 말씀의 의미는 십일조라는 하나님의 율법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와 인과 신을 버리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십일조란 누구인가? 예수님이다.

 

 

 


다섯 번째 화(25-26절)는 음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음식을 담는 그릇, 잔과 대접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책망한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손 씻는 유전에 대해서 나온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우리를 깨끗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지만 속에는 더러움으로 가득찬 자, 그들이 바로 오늘날 종교지도자라 자처하는 자들이다.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 모든 죄인들이다.

 

 

 


여섯 번째 화(27-28절)는 다섯 번째 화와 연관성이 있다. 이 둘은 모두 겉모습을 통해서 안을 증명하려는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이다. 즉 자신들의 외적인 모습이 모든 수치와 죄를 덮어주는 것처럼 여기고 종교를 의식화하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의식을 주님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모습이 있지 않는가?

 

 

 


일곱 번째 화(29-36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옛날 조상들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일을 말하면서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지만 결국 그들도 선지자들을 죽인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옛날 선지자들의 무덤을 가꾸면서 자신들은 선지자를 경외한다는 의로움을 보이고자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외식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가꾸고 기념하는 일을 하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두 선지자들 가운데서 가장 큰 선지자를 죽이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우리가 조상의 때에 있었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지만, 이 말은 자신들 스스로 선지자를 죽인 자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이고, 그 후손 또한 지금 선지자를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30,31). 아벨과 사가랴를 언급한 것은 성경의 창세기 처음부터 역대기 끝까지라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의 성경(구약)의 마지막 책은 역대기이다.

 

 

 


32절의 말씀은 조상의 죄의 양을 채우라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경고하시고 책망을 하셨지만 그들의 강퍅함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무시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획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이므로 속히 죄를 시행하고 지옥의 판결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35-36절의 말씀은 과거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죽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도를 박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함으로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마태복음 24:1-14


드디어 예수님은 이제 성전에 대하여 공격하신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셨을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제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같다. 아마 예수님께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23:38)과 하셨기 때문인 것같다.

 

 

 


다시 예수님은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끝에 남는 것은 이 땅에 있는 것 중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영원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가?

 

 

 


여기서부터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있을 일들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성경을 보고 이런 일이 있으니까 종말이 된줄 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종말이란 어떤 기간을 두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를 종말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24장과 2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런 현상이 있으니까 세상 끝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런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고 있음을 확인하라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거짓 그리스도로 와서 신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런 일들이 재난의 시작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부추기며 다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얼마나 융성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들은 숫자가 많이 모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진짜 축복하시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결국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9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2-13절). 주님에 대한 가짜 사랑은 언젠가 식어질 것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끝까지 견디어 구원이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13절 말씀은 시간적인 의미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날마다 자기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신자가 복음과 함께 살기에 받는 고난이다.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어야 한다.

 

 

 

14절 말씀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빠짐없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다.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된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삶을 무시했던 모든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말씀에 의해 고난받으면서 살아갈 때에 드러나게 되는데 그 때가 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의 끝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세상의 끝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끝내실 때에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 살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22,24,31절).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 계시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나타나는가? 언제 오는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으로 생각해서 6,000년으로 보면서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해서 6,000년이 끝나는 안식의 때에 재림이 있고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에 의해 계산을 해서 재림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시다.

 

 

 

 

마태복음 24:15-2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징조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징조들과 대응되는 각각의 사건들을 일일이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연대순으로 나열된 것이 아닐뿐더러 종말에 있을 모든 징조들을 빠짐없이 제시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종말이라는 기간 동안에 일어날 일반적인 현상들을 말씀하고 있고 또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 및 세상의 종말’을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이라는 평면 위에 올려놓고 동시대 사건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종말의 일들 그 자체를 알아서 피하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되신 그리스도 그분께 우선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할 것이다. 종말의 징조들은 그것들 스스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전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15절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표현은 다니엘 9:27, 11:31, 12:11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에서 “가증한 것”이라는 말은 우상이나 우상숭배의 대상물을 가리킨다(왕상 11:5,7; 왕하 23:13,24; 사 66:3). 또 여기서 “거룩한 곳”이란 성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선다”는 말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과 멸망당할 동안에 발생하는 성전에 대한 모독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참고 살후 2:4).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신 말씀이다(눅 21:20/ 참고 암 1:2).

 

 

 


이것은 종말의 징조로 다니엘 선지자가 예언한 예언의 성취이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16절). 이는 창세기 19:17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이 또 하나의 애굽이요 소돔이다. 재앙은 신속하게 임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물건을 가져갈 수도 없을 것이고, 밭에 있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갈만큼의 여유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거나 또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는 도망하기에 더욱 나쁜 상황이 될 것이다.

 

 

 


어느새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전체적인 종말에 있을 일들로 말씀하시게 된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겠고 후에도 없으리라”는 21절 말씀으로 전체적인 환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택한 자는 살아남게 된다. 이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남은 자”이다.

 

 

 


남은 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 남을 수 있다고 해서 남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남은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출 33:1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이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약 2:13).

 

 

 


마지막 때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환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조차도 추종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마태복음 7:22에 보면 이러한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항상 주의 이름을 가지고 행하는 모습이기에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영을 알게 된다(요일 4:1-3).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성령께서 거하셔서 그분이 직접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요일 2:27). 이런 점에서 광야에 혹은 골방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할지라도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26절).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인가?

 

 

 

 

마태복음 24:29-51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처음 오실 때와는 다르다.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임한다고 했다(27,30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기 혹은 저기에 계신다는 말들은 미혹하는 소리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주의 변동에 대한 묘사는 ‘신의 현현’ 곧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구약적 표현들이다(사 13:9-10; 34:4 등). 이제 더 이상 해, 달, 별 등이 존재하는 세상은 끝나고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로 현 상태의 세상(우주)의 종말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제까지 땅이 유지되어 온 것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창 8:22)이라고 말씀하신 노아 언약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세상이 유지되어 온 것이지 인간의 선함 때문이 아니었다. 때문에 종말이란 죄에 대한 결과이다.

 

 

 


따라서 신자는 종말을 말할 때 세상이 왜 무너져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구원을 받는 자는 세상에서 선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다(31절). 택함을 입은 자는 자신이 세상의 악한 모습에 속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나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자”라는 말로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심판하러 오시는 분은 다름 아닌 이 땅에서 인간의 종교에 의해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그분이어야 한다(참고 계1:7).

 

 

 


32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무화과나무로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를 통해 계절을 구분하듯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징조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한 확인으로 주님이 오실 줄을 알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과 동일한 세대에 서 있다. 즉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세대라는 것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23:36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에 “이 세대”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하는 것이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중점일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효력이 없다면 땅은 악한 세대로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종말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5절)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36절).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끝내실 권한은 하나님 아버지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권한에 순종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가 세상을 끝내시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은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에 아예 관심이 없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38절). 이 말씀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거나 금하는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임박한 심판과 그 심판을 하시는 분에 대한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죄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37,39절).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역시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 삶에 쏠려 있지 주님께 관심이 없는 모습이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전혀 깨닫지 못해서 노아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깨닫지 못했듯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그와 같을 것이다.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호응하고 성취될 것을 기대하는 자는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노아만 그 말씀에 응했듯이 약속 안에 있는 자가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자에게는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이란 온전한 영광의 능력으로 드러날 때까지는 수난 속에 감취어져 전해지기 때문이다(9절). 그래서 사실 성도는 외로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서 예비하고 있으라”고 권고하신다. 깨어서 예비한다는 것은 아무 일도 안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종말을 아는 자는 자기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냥 맡은 일에 충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종말을 예비하는 삶이다.

 

 

 


깨어있다는 것도 어떤 특별한 대비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삶 속에서 주님께 충성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 때의 충성이라는 말도 일상적 삶을 팽개치고 특별히 교회에 헌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근거한 신실한 삶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신자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살전 5:4).

 

 

 


겉으로는 다른 세상 사람들과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확연히 구분되어 나타날 것이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나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의 깨어서 예비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쉽게 가르쳐 주시려고 45-51절에서 두 개의 짧은 비유를 사용하신다. 지혜있는 종과 주인, 악한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둘의 차이는 한 쪽은 주인이 오지 않는 가운데서도 주인이 원하는대로 살았고, 다른 한 쪽은 주인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결국 구원받는 신자는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오신 것처럼 살아가는 자임을 말한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종의 삶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나와 함께 늘 계신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마태복음 25장

 

 

 

 

마태복음 25:1-13


종말론 강화에서 이제 비유로 이어진다. 25장에 나오는 비유들은 예수믿는 자들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쉽게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24장에서 이미 말씀하신 비유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열처녀의 비유”가 나온다(1-13절). 여기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들러리 들이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다른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세세한 사항에 관심을 빼앗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둘 필요가 없다.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고 해서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본문을 말씀하신 의도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단지 기름을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기름이란 신랑이 올 때 필요하다. 신랑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삶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현재를 살아갈 때 현재로만 제한해서 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을 준비하는 삶으로 살라는 것이다. 즉 미래에 어떻게 될까봐 대비하는 삶이 아니라 미래에 누릴 영생을 지금 누리며 보여주는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하지만 이것은 장래 일을 자기의 노력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를 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미래를 담고 살아라는 것을 말씀한다. 결국 기름을 준비한 처녀는 신랑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온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25:14-30


14-30절은 흔히들 “달란트 비유”라고 부르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대부분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은사를 활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위한 헌신의 삶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지키면서 미래까지도 대비하겠다는 의도였다.

 

 

 


종은 아무리 일해도 자기 것이 없다. 자기 것도 되지도 않는 일을 주인이 없는데도 주인의 것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주인을 위한 완전한 자기 희생이고, 그러한 삶이 게으른 종에게는 어리석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종은 주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인을 위한 일에는 게을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인이 왔을 때를 대비해서 받았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던 것이다.

 

 

 


천국에 자기를 위한 삶은 없다. 오직 주님만을 위한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미래의 일을 지금 현재에 앞당겨서 하는 것이다. 즉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주인이 있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사는 것처럼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재에 누리는 천국이다. 그러나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게으른 종에 불과하고, 그러한 종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하는 종교행위는 단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마태복음 25:31-46


31-34절은 심판 때에 구별이 있을 것을 말씀한다. 본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단지 남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행위가 심판하는 구별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는 이것이 교회의 사명인줄 알고 구제하는 일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살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셨다. 따라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그 주님을 어떻게 대우하느냐 하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따르는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지극히 작은 자란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이다. 그런 자들을 멸시하지 않고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에 행한 것이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알지 못하게 행해진 습관 속에서 주님을 어떻게 대우했느냐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마태복음 26:1-16


이미 앞에서도 예수님은 누차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여기서 다시 구체적으로 유월절에 팔려서 십자가에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을 마태 사도는 기록하고 있다(2절). 3절에 보면 “그 때에”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즉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으로서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먼저 명백히 밝히고 있다.

 

 

 


6-1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4:5에서는 이것이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이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분노하면서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책망하였다(요한복음 12장에는 가룟 유다가 한 말로 되어 있다). 아마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에서 소자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던 것같다. 단순히 구제하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12절). 물론 우리는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알고 했는지는 본문에서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만큼 많은 돈을 들여 살 수 있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모습이었고 그것은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된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여인의 행위 자체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그 여인의 행위를 통해서 주님을 향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여인의 행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믿음이 참으로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확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주기 위하여 흥정하였다. 은 30을 받았다.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 여자와는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아마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에 자기가 가졌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일순간에 무너졌던 것같다. 이처럼 십자가는 사람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십자가는 사랑을 표현하게 하고, 동시에 증오를 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마태복음 26:17-35


17절부터 유월절 만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이 준비하였던 것은 유월절 음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심으로 약속의 성취임을 강조하신다(24절). 예수님의 몸과 피는 희생제물 그 자체였다. 이것은 기적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같다.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이 내 피다. 내 기적 가져가지 말고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그것 기대하지 말고 내 몸과 내 피 곧 내 자신을 가져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에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건짐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릴 피가 언약의 피라는 것이다. 그 유월절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고 약속대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이 떡과 잔을 받음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는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죄사함을 얻게 되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약속 안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예수님 자신)들을 알고(고전 2:12)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동참된 자이기에 자기를 포기하는 삶으로 사는 것이어야 한다.

 

 

 


30절에 보면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갔다고 했다. 찬미했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스가랴 13:7말씀을 인용하여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고 하셨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 이르게 될 때에는 여기에 인간은 아무도 참여할 수 없고 오히려 주님을 버려두고 도망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제자들도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을 따라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성령님에 의해 주님께 합류되는 자가 제자요,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주님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르시기 위하여서 이방 땅으로 여겨지는 갈릴리로 부활 후에 다시 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32절).

 

 

 


결국 예수님이 12제자를 택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도움이 되도록 동역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자신과 죄인을 비교해서 죄인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인 십자가에 동참할 수 없음을 보이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십자가!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홀로 전적으로 감당하신 일이었다.

 

 

 


여기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 곧 베드로를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는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지만, 베드로가 분명히 예수님을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증표가 닭이 세 번 우는 것이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죄인들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죄인을 향해 늘 말씀하시나 우리는 죄인으로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기록된 말씀으로 주시는 성경 말씀을 우리는 무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26:36-56


예수님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동산에 이르러서 기도하시게 된다(36-46절). 그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가까운 데에 두시고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도를 요구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할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도록 하신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에 그 뜻에 자신을 맞추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고난-죽음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받으실 “”이란 곧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는 것이었고(사 51:17,21-23; 렘 25:15이하; 겔 23:32-34),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고난과 죽음이었다. 결국 우리의 기도도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 자신을 던져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이 기도할 때 자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은 앞으로 있어야 하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곧 제자들이 잠자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47절에서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고 언급함으로 예수님을 파는 자가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있었던 12제자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 12제자도 결국 참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참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자신이 세운 계획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가? 제자 중 하나(베드로/요 18:10)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리자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하신다. 검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은 이 위기를 힘으로 극복해 보고자 하는 세상 방식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힘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은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희생당하시는 모습으로 이루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 희생을 하는 자들로 모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검과 몽치라는 힘을 동원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하늘과 땅의 권세(28:18)를 잡으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의 힘을 동원하는 교회가 교회인가? 우리 교회는 희생을 자초하는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마태복음 26:57-75


마태복음의 본문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와서 심문을 받으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심문 받으신 경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문(요 18:13,19-24)
 ②대제사장 가야바의 심문(마 26:57-75)
 ③총독 빌라도의 첫 번째 심문(마 27:1,11-14)
 ④헤롯 안디바의 심문(눅 23:6-12)
 ⑤총독 빌라도의 두 번째 심문(마 27:15-26)

 

 

 


이제 가야바는 산헤드린이라는 유대인 공회를 통해 예수님을 심문하게 된다. 본래 대제사장이란 단 한 사람으로 오실 메시아가 진정한 대제사장이심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자였다. 그런데 여기 두명의 대제사장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성전에서의 제사제도가 그 본질을 잃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가짜 대제사장이 진짜 대제사장을 심문함으로 정죄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이미 자기들이 확정해 놓은 선고에 절차를 합법적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죄란 언제나 자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까지도 고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 사람의 거짓 증거는 성전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시켰다(참고 요2:19-22).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새로 짓겠다고 했다”는 거짓 증언에 대하여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거짓 증언이기에 일일이 해명하여야 할 필요성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하심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속죄의 죽음을 자초하고 계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사 53:7). 이것은 곧 말씀의 성취였다.

 

 

 


침묵으로 일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당황한 가야바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다그친다(63절).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당당히 밝히셨다. 그리고는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다(64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신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세상에 오실 때 하나님의 아들 같이 권능의 우편에 앉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세상은 모두다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대제사장은 옷을 찢는 것으로 의분을 표현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사형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조차도 침뱉고 주먹으로 치면서 만약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맞추어 보라고 조롱하였다.

 

 

 


반면 이 때 베드로는 바깥 뜰에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당당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 예수님과는 대조적이면서, 또한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들과는 같은 부류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다. 결국 제자들도 별 수 없는 인간이요 죄인의 모습임을 드러내심으로 십자가의 자리에 오직 예수님만이 서 계셨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십자가의 길이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길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단지 참여할 뿐이다.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께 꽤 쓸모있는 제자인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도 쓸모없는 제자로 전락되고 만다. 쓸모 있는 제자란 자기가 쓸모없음을 알고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그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일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고 나자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증표까지 주셨던 그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베드로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다. 신자란 언제나 선 줄로 생각하는 순간 도리어 넘어질까 조심하는 자이다.

 (고전10:12  ).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는 인간의 만용은 주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께 유익을 되는 일로 생각되면 무조건 믿음을 빙자하여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리하게 일을 벌리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슬픈 영웅심에서 나온 자만감일 뿐이다. 오히려 나의 계획, 내가 추진하고자 하는 모든 것까지도 주를 위해서 포기할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을 둘로 나누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나누어지기 싫은 자는 결국 주님을 부인하는 쪽에 서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 안에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고 사는 자는 세상에서 나누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이다.

 

 

 

 


마태복음 27장

 

 

 

 

마태복음 27:1-26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든 일을 아주 급하게 처리하느라 새벽에 이 일을 의논하였다. 보다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주게 된다. 3-10절에 보면 유다에 대한 기사로 잠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조차도 말씀의 성취라는 강조점에 있다(9절). 죄가 없는 예수님이 정죄 되는 것을 본 가룟 유다는 스스로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된다. 뉘우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뉘우침의 방향이 주님을 향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회개란, 단순히 자신의 죄악된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러한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의 의미를 알고 거기에 계속적으로 자신을 못박는 작업을 말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자신이 예수님을 팔았던 죄까지 포함하는 속죄의 죽음인줄을 몰랐던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그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 율법은 죄악으로 부정하게 규정된 돈을 여호와께 가져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23:18).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유다의 돈을 부정한 돈으로 규정함으로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무죄함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다.

 

 

 


이들은 아마 이러한 선행으로 자기들의 마음과 손을 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밭은 피밭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결국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시고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알리시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주님의 피 값을 자기들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김으로서 예수님과 유대인의 관계가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11-26절에서 빌라도의 심문을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다. 아마 이렇게 물은 것은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하여 그가 스스로를 왕이라고 자칭하였으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거짓으로 고소하였기 때문인 것같다(눅 23:1-2).

 

 

 


그러나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었다(막 15:10).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가지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바라바를 내세우는 수를 썼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총독의 명예와 권력, 그것으로 인해 누리고 있는 영화를 앞서지는 못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빌라도를 정죄하나 기실 우리 자신들이 빌라도와 같은 모습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순간의 세상적 권력과 명예, 혹은 자기 자존심을 위해 예수님을 버리는 일이 우리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기 떄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놓아 달라는 요청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바보다 더 가치없고 인기없는 분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만다. 최후의 순간까지 철저하게 인간들에 의해서 버림을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수님이었지만 인간들의 선택은 바라바였던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유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죄악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예수님(하나님)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종교에 의해서만 아니라 정치에 의해서, 유대인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한 총체적인 세상의 것과 세상에 의해서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었다.

 

 

 


이제 인간들 스스로 예수를 선택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인간은 예수를 버리는 존재로 살게 된다.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그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믿지 못하고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이다. 그러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26절)고 함으로 약속의 성취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마태복음 27:27-56


예수님은 빌라도의 책임 하에서 죄인으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졌다.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관정 안(브라이도리온)으로 데리고 들어가 희롱하기 시작한다. 빌라도의 권력 안에서 사형받도록 넘겨졌기에 이제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을 희롱해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세상의 권력 안에서 하나님의 권력이 희롱당하게 된다. 그 희롱은 예수께서 왕이시라는 점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들은 침을 뱉고 희롱하는 절을 하였으며, 주먹으로 때리고 채찍질 하였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왕관이었고, 홍포(자색 옷)는 왕복이었고, 갈대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왕이라면 왕다운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고난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 것으로 여겼다(사53:4).
32절에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한 일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가지고 교회 일을 억지로라도 하면 은혜가 있다고 가르치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십자가란 우리 스스로가 질 수 있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기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오히려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것은, 십자가란 주님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것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사형장은 “골고다”(해골의 곳)라고 하는 곳이었다. 당시 마취의 방법으로 쓰이던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었으나 예수님은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고난을 뚜렷한 의식 속에서 받으시고자 하셨다. 로마의 사형법에 의해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그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신 21:23)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한 죄값이라고 생각했다. 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계셨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킨 일”이었다(사 53:6).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일(35절/ 시 22:18), 좌우편의 강도 중에 있어서 범죄자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입게 되는 일(38절/ 사 53:12), 심지어는 십자가 곁에서 조롱하는 일까지(39-40절/ 시 22:7-8)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상황들을 상세히 묘사함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들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음이 밝혀진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죄패를 붙였다. 요한복음 19:20에 의하면 히브리와 로마, 헬라의 말로 기록되었다. 당시로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주님은 인간의 모든 왕을 거부하는 만왕의 왕이셨다. 세상의 왕은 자기의 명예를 드러내고 자기의 살아 있음을 통해 다스리나 예수님은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법칙을 여기서 분명히 세우셨다. 이제는 오직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자만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40절)는 말은 애초에 예수님께 시험했던 마귀의 유혹이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은 십자가를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마귀는 끝까지 십자가 없는 예수님이기를 원했다(42절).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십자가를 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였다(고전1:18).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의 구원관을 버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관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인가?

 

 

 


44절에서 함께 못박힌 두 강도들도 예수를 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 23:39-43에서는 한편 강도는 주님을 믿었다고 했다. 아마 한편 강도는 다른 강도와 같이 처음에는 저주했다가 나중에 돌이켜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는 두 강도가 같이 욕했다고 처음 상태를 말함으로 제자들도 다 버린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어떤 인간도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 15:25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때가 (로마시간으로) 구시라고 했다. 그런데 제 육시로부터 구시(우리의 시간으로 낮12시에서 오후3시)까지 어두움이 임했다(44-45절).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3시간 후부터 3시간동안 어두움이 임했다.

 

 

 


구약의 선지서들에서 어둠은 하나님의 진노와 임박한 멸망에 대한 징조를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암 8:9; 욜 2:31; 참고 마24:29), 대낮에 어둠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을 거부하신다는 의미이다. 실로 시편 22:1에서 다윗이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아 절규했던 그 절규를 예수님이 토해냄으로 이스라엘로 버림받은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심판을 대신해서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심판 때에 일어날 일들을 앞당겨 보여주시는 것이다.

 

 

 


50절에 보면 예수께서 소리지르신 후 영혼이 떠나가셨다고 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생겨난 당시의 정황들을 여기서 세 가지로 증거하고 있다. ①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51절). 흔히 말하듯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막혔던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휘장이 찢어지기 전이나 후나 동일하게 하나님께 함부러 죄인이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정한 장소로서의 성전은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히 10:20)이 열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는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4:6). 그러므로 하나님은 애초부터 어떤 장소에 국한 된 성전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 것이다.

 

 

 


②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51-53절). 이때 깨어난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일이 있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부활하여 거룩한 성으로 들어갈 것을 앞당겨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③백부장과 그 함께 한 자들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했다(54절). 누가복음 23:47-49에 의하면 이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이 정녕 의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도 유대인들은 조롱하고 비난하였으나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모습으로 양분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란 참 이스라엘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참고 8:11).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 곁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증언함으로 십자가 사건에 대한 분명한 목격자들을 내세우고 있다.

 

 

 

 

마태복음 27:57-66


57-61절에서는 예수님의 장사(葬事)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의 가족이나 12제자들에 의해 되어지지 아니하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해 되어진다. 그는 공회원이었으나(막 15:43)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부자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57절). 이렇게 함으로 일찍이 이사야가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라고 한 예언대로 성취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사에 니고데모도 동참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요 19:39).

 

 

 


62-66절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예수님께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 혹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친 후에 부활이라고 조작할 것을 대비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지키는 파숫군을 세워 굳게 하였다. 저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처단함으로써 이단(異端)에 대한 모든 경계를 분명히 하였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확실히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요, 율법의 승리인줄 알았다.

 

 

 


그러나 인간의 승리는 실상 패배였다. 오히려 예수님을 살해한 인간들이 죄인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이 의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획한대로 이루어졌고 내가 기도한대로 일이 성사되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마태복음 28장

 

 

 

 

마태복음 28:1-15


27장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해 기존의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28장은 부활의 차원에서 새로운 이스라엘과 새언약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결별하고 이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든 상관없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인정하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제거함으로 자기들의 종교로 하나님께 충성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종교에 의해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의(義)로 인정하셨다. 이것이 부활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케 하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가져오신 사건이다(엡1:10;골1:13-20). 따라서 이제부터 모든 권세는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8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이 권세를 가진 자이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계 20:4). 그러기에 신자들은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왔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천사가 전하여준 부활에 대한 소식과 빈 무덤을 보고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될 수밖에 없었다(8절).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갈 것을 전하도록 하셨다(10절).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많은 사람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신다. 그것은 이미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만나시기로 하신 약속 때문이었다(26:32). 예수님은 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려고 하시는가? 갈릴리는 대부분의 제자들 고향이었다. 다시 그들을 거기서 부르심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의 처음 상태로 되돌리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부름을 받는 자가 참 제자임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의 세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가 이방의 중심이 되어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는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무덤을 지키던 파수군은 모든 일들을 대제사장에게 보고하였다. 대제사장들은 군병들을 많은 돈으로 매수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을 유포하도록 하였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28:16-20


16절 이하에 보면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새로운 권세자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의 세계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 말씀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라는 말씀이다. 이제까지 누가 이 구속사역을 이루셨는가? 오직 예수님 홀로 이루셨다. 어떤 인간도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예수님 홀로 다 감당하신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부활의 세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맡겨진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의 일에 동참된 것이다. 이렇게 동참된 자와 예수님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이 말씀이 단순히 자기 백성들을 무조건 보호하신다는 차원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항상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시겠다는 의미이다. 그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란 곧 고난과 죽음이 동반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정리

 

 

 

 

창세기 3:15에서 약속이 주어진 이후 인간은 그 약속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족보로 시작하고 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마태복음의 첫 선언은 약속된 메시아임을 말하면서 동시에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이었다(1:1). 그러나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에게서 나셨기에 실제적으로는 요셉과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것은 인간 왕을 부정하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언약의 백성과 비언약 백성이 구분된다(1:21). “임마누엘”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1:23).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누가 경배하느냐에 따라서 이스라엘과 애굽(이방)이 판가름 난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옴으로 기존의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2:15).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참 이스라엘이다.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로써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겨내셨다(4:1-11). 오히려 이스라엘은 헤롯의 시녀노릇을 함으로 여인의 후손을 제거하려는 마귀의 일에 동참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으며, 스스로 주님을 영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으로 칭함받게 될 것이다(2:23). 그곳은 이방지역의 언저리로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다(4:15-16;26:32;28:7,10;사9:1-2).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었다(3:15). 그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이다. 즉 십자가를 지는 자리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세례였다(참고 막10:38). 그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지는 아들이다(3:17;17:5). 예수님의 잉태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이후의 모든 사역은 철저히 성령에 의해서 주도되어진다(12:28). 이후에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사역은 이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반면 마귀는 십자가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주고자 애쓴다. 예수님의 시험은 사역을 앞두고 40일의 금식기도로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통해 마귀를 정죄할 근거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천국이 가까웠다”(4:17)는 것은 기존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국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천국이어야 한다. 천국을 이루는 일이란 십자가밖에 없다. 그 본질적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산상수훈(5-7장)을 말씀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산상수훈 전체가 어떤 뜻으로 주어졌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인간은 산상수훈을 지킬려고 한다면 또 다른 율법에 완벽하게 매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 산상수훈대로 사실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그 의(義)만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은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다(롬 3:21).

 

 

 


그 의를 보이시기 위하여 산상수훈의 말씀 뒤에 곧장 등장하는 것이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이다(8:1-4).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리게 함으로 누가 희생되는가를 보여주신다. 그 희생 제물의 역할을 하실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짊어지시는 분이시다(8:17). 질병이란,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귀신을 부리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이미 꺾어놓으셨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곧 주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었고 새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9:15-17). 그 새 시대는 죽은 자를 살려서 산 자와 상대하시는 언약의 하나님(22:32)이 다스리시는 나라임을 밝히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다(9:23-25).

 

 

 


12제자를 파송하심으로 세상의 악함을 보게 하시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알게 하시는 것이다(10장). 이렇게 주님의 일에 동참된 자가 예수님의 모친이요, 형제며, 자매들이다(12:49-50). 그러나 주님에 의해 부름받지 않은 자는 결코 주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령께서 하신 일을 귀신의 왕(바알세불)에 의해 되어지는 일이라고 비난하게 된다(12:22-27). 예수님은 이렇게 양분된 세상을 분명히 갈라놓기 위해서 비유를 말씀하신다(13:11-16). 그렇지만 주님을 알게 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천국의 성격에 대한 말씀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고 그 끝은 반드시 주님이 의도하신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죽은 다음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밝히신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다(14:13-21). 유대인들은 말씀도 아닌 “장로들의 유전”에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15:1-9)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편에 스스로를 가담시키고 있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이 병 고침을 받는 것을 통해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되었다. 그들의 악함이 증명되었다. 예수님에게 신기한 기적을 내 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예수님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이란 “요나의 표적” 뿐이다(16:4;12:39). 그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을 고발하는 기능이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도 몰라보고 죽일만큼 악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로 교회를 이루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란 세상의 악함을 폭로하고 천국을 보여주는 기능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어떤 세력도 심지어 음부의 권세라도 이기지 못하게 된다(16:16-19).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18:20). 그러나 교회란 주님의 용서를 아는 것에 근거하고 있는 모임이다(18장).

 

 

 


인간은 늘 자신의 선한행위를 통해 천국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19:16).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나타내셨다(19:26). 부자 청년은 자기의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19:22).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들에게는 무슨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또한 제자들의 항변이었다(19:27). 예수님의 대답은 동일했다. 영생을 상속받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어떤 상급도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품 삯으로 주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즉 품군들이 얼마나 일했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베풀어지는 주인의 은혜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동일한 다스림을 받는 나라이기 때문이다(20:1-16). 그러나 굳이 세상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19:30;20:16)는 것이다. 천국에는 먼저와 나중이 없다. 그러나 세상의 방식으로 꼭 설명하자면 세상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나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또 한 번 예고하셔야만 했다(20:17-19). 제자들은 무지몽매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있음이 자리 다툼을 하는 것으로 폭로되었다(20:20-21).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는 것으로 자기 백성들을 섬기러 오신 분이시다(20:28). 이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셨다(21:5). 말은 전쟁에서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힘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십자가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언젠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실 왕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21:9)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이렇게 입성하셨다는 것은 성전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고발의 기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의 실체가 되신, 아니 성전보다 더 큰 분이 되시는 예수님(12:6)을 알아 보지 못하고 성전에서의 장사에 정신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종교놀이에 예수님이 방해가 되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획한다(21:33-39).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해 도전함으로(21:23) 사탄의 권세에 매여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예수님을 이것을 철저히 폭로하시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이다.

 

 

 


이 땅에 어느 인간이 자의로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을 할 수 있는가? 더구나 목숨까지 바칠 인간은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세상과 역사를 부정하실 수밖에 없었다(24장).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대인들을 통해 적나나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일곱 가지 화(禍)를 말씀하셨다(23장). 결국 율법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에 근거하는 구원이라야 된다(22:37-40). 그러므로 의가 이 땅에 오게 되어 불의가 폭로되고 완전히 노출됨으로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즉 복음의 영광은 당분간 고난 속에 감추어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주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의 역사 형편에 맞추어서 사는 자가 아니라 늘 주인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간다(25장).

 

 

 


역사의 흐름은 예수님을 향해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존재했다. 드디어 예수님은 유월절에 맞추어 죽음을 준비하신다(26:2). 모세언약에서 주어졌던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이란 바로 이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는 “언약의 피”이다(26:28). 그 피는 어떤 죄라도 사함을 이룰 수 있는 피가 된다.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피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의 호언장담도(26:33-35), 제자들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도(26:36-38,40-41,43) 결코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에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김으로 포기하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이 십자가에 넘겨지는 일로 만드신 것이었다. 이것이 옛 언약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언약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부활 역시 언약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옛 이스라엘과 결별하고 하늘과 땅을 통일케 하신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신 것이다(28:18). 새로운 이스라엘된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할 뿐이다.

 

 

 


예수님을 재판하여 처형하는 일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유대종교 뿐만 아니라 로마의 정치권이 합세하여 이루어내는 작품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시의 모든 인간적 세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살해당하셨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결코 긍정적인 역사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아직도 예수님을 죽음으로 넘긴 이 세상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 세상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대우하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분은 십자가의 길을 가신 분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분이 함께 있겠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서 주님이 함께해 주실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끌어가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십자가의 길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내는 길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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