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스크랩] 누가복음 강해 4

공 상희 2009. 5. 6. 12:50

 

 

 

 

 

 

누가복음 강해 4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누가복음 18:9-17 자기 의 와 하나님 나라 2008. 1. 27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사욕을 위한 기다림이 아니라 인자의 날이 속히 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때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심고 집을 짓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런 것이 전부인양 마음 빼앗기지 말고 비록 더딜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도 증거 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전하지 못한 내용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입니다. “봉독” 말세에 예수님의 강림하신다는 것을 기롱하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노아 홍수의 사실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치 못한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이 땅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합니다. 주께서 하루는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것은 자기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시기를 종말이라고 합니다. 이 사이를 우리는 시간적으로 계산하여 벌써 이천년이 지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입니다. 시간에 종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의 성취에 시간도 종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다리십니까? 그렇다면 무슨 기도를 하면서 어떤 준비를 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주님의 재림하시면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자랐습니다. 우리가 일평생동안 행한 일들을 선악 간에 판단하여 선이 많으면 상을 받고 악이 많으면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교회에서 들었습니다. 전하시는 분이 바르게 전하였는데 제가 잘못 받아 들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너무나 놀라운 내용입니다. 9-14절을 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의 내용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왜 따로 서서 기도하는 것입니까? 바리새인이라는 것 자체가 분리를 뜻합니다. 자기들은 죄인들과 분리되어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로서서 구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먼저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감사인가 하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이 토색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입니다. 기도나 금식이나 구제나 선교와 같은 일들을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자기 의를 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성전에 들어왔지만 멀리 이방인의 뜰에서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떤 평가를 내리십니까? 자타가 인정하는 의롭다는 사람 바리새인은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죄인인 세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의로운 사람이어야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인간이 자기의 의를 가지고서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의,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의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0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와서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셔도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의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지키고 있기에 누가 뭐라고 하여도 자신들만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로운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조차 율법을 어기는 자로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된다고 하면서 배척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근본적으로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바울사도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여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인 줄 알았습니다. 그 와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율법을 지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인간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벽한 의를 이루어 낼 수가 없기에 율법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면 오히려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31절을 봅니다. “봉독”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육체도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를 쌓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의 피를 화목제물로 세우심으로 그 피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의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셔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만이 드러나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온 우주에 펼쳐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나라에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의 의를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리새인은 자기 죄를 모릅니다. 내가 이만큼 잘하니 나는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곳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모릅니다. 헌금을 하거나 봉사를 하거나 간에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하기 보다는 남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물론 주님 앞에서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남과 비교를 하게 됩니다. 나는 저 사람에 비하여 이만큼 하니 괜찮은 것이지! 저 사람이 저 정도인데 나의 형편에 이만큼 했으면 많이 한 거지! 이런 모습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의롭다고 여깁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세상에서 싸움과 다툼과 요란함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가정에서 부부가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를 제 3자가 지켜보면 무슨 싸움으로 보이겠습니까? 서로 자기 의롭다는 싸움입니다. 온갖 논리를 다 같다 붙이면서 자기주장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안 되면 여자는 눈물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하고 남자는 윽박지르거나 폭력을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확대가 직장이나 사회나 국가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런 싸움은 뿌리는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곳을 저는 지옥으로 봅니다. 모두가 자기가 옳고 자기가 잘났다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자신이 못난 사람인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못난 정도가 아니라 죄인인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 죄도 가벼운 죄가 아니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죄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거저 얻었습니다.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물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자신이 의롭다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자신의 공적이 많은 사람은 당연히 싫어합니다. 어떻게 내가 저런 죄인과 같이 취급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의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은혜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간에 내가 지금 은혜로 살고 있는지 자기 의로 살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본 말씀입니다만 유다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버린 자들이 은혜의 공동체 속에 가만히 숨어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유다서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는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이런 사람이 바로 자기 의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가 나옵니다. 바울사도가 은혜를 받고 나서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수고한 것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약한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보니 어떻습니까? 우리는 범사에 감사가 나옵니까? 아니면 범사에 원망과 불만이 쏟아집니까? 혹시 무언가 잘한 것이 있다면 자기 자랑하기에 바쁩니까? 그렇다면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의를 가지고서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이 지옥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입술로는 시인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것을 가증한 것이라고 디도서 1:16절에서 말씀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못됨을 압니다. 얼마나 원망과 불만이 나오는지 무언가 조금 잘한 것이 있다면 자기 자랑하기에 바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죄인 줄 알고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기소서! 그 세리를 주님은 의롭다고 하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죄인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결론적으로 15-17절을 봅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어린아이들처럼 받아들이는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 힘이 없기에 주는 것을 받아야 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주신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의가 아닌 오직 은혜로만 가게 되는지 더욱 맛보아 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자기 의가 무너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아 가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8-30 부자와 하나님나라 2008. 1. 24

 

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자기 의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롭고 거룩한 곳이기에 죄인은 갈 수가 없고 의롭고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라고 일반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자타가 인정하는 의롭고 거룩하다는 사람은 예수님께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평소에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라는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인간도 자기 의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기에 인간의 의라는 것은 누더기와 같은 것입니다. 걸칠수록 냄새만 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9장과 64장을 보면, 그 사상이 죄악의 사상이라서 독사의 알을 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으로 만들어내는 옷이란 거미줄로 짜는 것과 같아서 그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으며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3장에 보면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마저 그 입은 옷이 더럽다고 사단에게 송사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치하시는지 봅니다.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려면 죄를 제거 하셔야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오늘은 부자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보고자 합니다. 18절입니다. 어떤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합니다. 다른 병행구절에서는 부자청년이라고 합니다(마19:22). 청년인데 부자이고 관원이라면 그 사람의 능력을 알아볼 만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답변은 영생에 대한 답변보다 선한 것에 대하여 먼저 말씀을 하십니다. 19절입니다. 선한 분은 하나님 한분 뿐이신데 어떻게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부자 관원이 왜 선한 선생이라고 불렀는지 그 의도를 예수님은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선한 분이 하나님뿐이시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는 겁니다. 선하신 분이 그 부자 관원 앞에 계시는데도 그 부자 관원의 선의 개념으로는 결코 선하신 하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선한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말씀합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 관원은 그런 정도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부자 관원이면서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간음도 살인도 거짓 증거도 하지 않았고 부모도 공경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계명들도 다 지켰다고 보아야 합니다.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도 다 지킨 사람입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도 안식을 기억하여 지키라는 말씀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려면 집안의 종도 쉬어야 하고 짐승도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더 존경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영생을 묻는 이 사람에게 율법을 지켰느냐고 물으신 것이겠습니까? 율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롬7:12). 그러면 이런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 율법이 증거 하는 바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의 문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중심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바리새인이 어느 율법이 큰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이 부자관원은 과연 율법을 지킨 것입니까? 22-23절을 봅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병행구절은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자 관원이 영생이 문턱에서 심히 근심하며 돌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큰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부자관원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켜왔다는 것은 지킨 것입니까? 못 지킨 것입니까? 전혀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이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다는 이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았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 것입니다. 게다가 영생까지 챙겨보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분이시며 율법의 완성 자가 되시며 영생이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다 들통 난 것입니다.

 

 

 

 

24-25절을 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낙타를 완전히 죽여서 실처럼 가늘게 만들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란 그 어떤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부자라고 하니 사람들마다 자신은 부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부자의 기준을 상향조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파트가 한 채뿐이니 두 채 있는 사람보다는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재산이 십억이 되는 사람은 백억에 비하면 거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기준을 예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일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러하셨다면 우리는 다들 예수님보다는 부자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도대체 누가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려부터 율법을 지키면서 깨끗하게 부자가 되었는데, 그리고 부는 바르게 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서 부자가 되었다고 그때나 종교개혁시대나 오늘이나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하시니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서울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청부론을 이야기 했습니다. 깨끗한 부자라는 말입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세금 낼 것 제대로 내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도 세상에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직한 자가 망한 예를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게 선하게 바르게 사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망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때 설교시간에 많이 인용된 이랜드를 아실 것입니다. 세금을 너무 정직하게 내었기에 세무서에 뒷돈을 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무서에서 아주 샅샅이 조사해도 탈세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 사람이 다니는 교회 앞에 까지 와서 데모하고 그 교회 장로는 사임했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한글만 읽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게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이 말씀 앞에서 자유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그 부자 관원처럼 예수님의 말씀 앞에 맞닥뜨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언제 한번 이웃을 위하여 전 재산을 나누어주어 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 한번 주님을 자기 목숨보다 귀하게 따라나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려본 자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26-27절을 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을 하실 수 있다고 답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간 것입니다. 부자 관원이 큰 부자라서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심히 근심할 뿐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28-30절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는 말씀을 가지고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린 자는 여러 배의 축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내 버리면 여러 아내를 얻습니까? 집을 한 채 팔아 바쳤더니 여러 채 생겼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부자가 되는데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 어떻게 영생에 이른다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버린 것이 아직 자기 실력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 십자가 앞에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주님의 은혜가 임하여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자들은 내가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하여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새로운 집에 세워지는 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도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또는 은혜로 버리고 온 자들끼리 함께 교제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가족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복을 현세에도 맛보는 것이 성도의 교통이며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단코 사람이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오늘도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31-43 감춰진 말씀 2008. 2. 10

 

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31절을 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은 벌써 두 번이나 말씀하셨고(9:22,44-45) 이제는 세 번째요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는 세상의 영웅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로마를 둘러엎고 유대인의 해방을 위한 길도 아닙니다. 유대 민중들의 요구를 이루기 위함도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기록한 모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인자에게 응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2-33절입니다. 그 내용은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 하고 죽일 것이나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가셔야만 성경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길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길이며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의 화해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여 놓았습니다. 34절을 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이런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말씀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감추어져 있기에 제자들이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45:15).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인간 편에서 찾아 나서서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자기를 계시하셔야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뵙게 되었을 때의 고백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숯불을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죄가 사하여졌으니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는 말씀에 이사야 선지자가 응답합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감겨버리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6:9-13절입니다.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하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둔하게 되어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마음으로 깨닫고 눈을 뜨고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돌아올 자가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가 언제까지 그렇게 되는지 물었을 때에 예루살렘 성읍이 망하고 폐허가 되기까지라고 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았더라도 그 십분의 일조차 베임을 당하고 난 후에 아무 희망도 없을 그 때에 거룩한 씨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다가 겨우 돌아와서 메시아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메시아에 대한 약속마저 그들의 눈과 귀가 가려져 있기에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참된 메사아인 예수님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더 이상 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여 버린 이스라엘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자 관원도 눈과 귀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하였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서도 부자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졸부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깨끗한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그 부자 관원의 속내가 다 드러났습니다. 그가 율법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였습니다. 속으로는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을 사랑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려니 돈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근심하며 돌아선 것입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도망 가버렸습니다. 부모도 직장도 처자식도 버리고 왔지만 십자가 앞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의 결심과 결단과 의지적인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어떤 모습입니까? 35-4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여행하시는 중에 이제 여리고에 가까이 온 것은 거의 다 온 것입니다. 이 여리고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이 소경은 디매오의 아들 바 디매오인데 소경이요 거지입니다. 참으로 처량한 신세입니다. 소경이요 거지이니 이보다 더한 신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의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경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분명히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는데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입니다. 그러니 지명을 따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는데, 물론 이 칭호도 메시야 칭호에 포함이 됩니다. 마태복음 2:23절에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하여 나사렛에 가서 사십니다만 나사렛 출신이란 그 당시에 천한 출신으로 여김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나다나엘 같은 사람은 빌립의 초청을 받았을 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요1:46).

 

 

 

 

그런데 이 소경 거지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메시아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크게 외칩니다. 그러자 앞서 가는 사람들이 꾸짖습니다. 어디서 소경 거지가 큰 소리를 지르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꼴불견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저리 가라고 발로 밀쳤을 것입니다. 그러자 더욱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보기를 원한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자 곧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경이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아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소경이며 거지입니다. 소경이라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가난해서 회당교육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사렛 예수의 소문은 들었던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서 그분은 틀림없이 약속된 메시아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목청껏 부르짖었습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에 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네 믿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소경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소경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부르짖어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이런 믿음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니 분명히 소경의 믿음이라고 하시는데 왜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두 가지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모든 만사와 만물이 다 주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6-17절입니다.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로마서 11: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므로 부자 관원도 예수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돈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 못하는 사람의 역할을 함으로 예수님 앞에서 돌아서는 자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지만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다가 다시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끝까지 사랑하여 주심으로 제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 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소경이며 거지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도 제자도 알지 못하는 것을 이 소경이요 거지가 알았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잘 드러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눈을 뜨고 나서 무엇을 했는가를 봅시다. 소경이요 거지인 이 사람의 눈을 뜨면 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평소에 소경 자식을 둔 부모의 한숨소리를 듣고 자랐을 것인데 부모님에게 달려가서 이제는 눈을 뜨게 되었다고 알려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조롱을 한 자들을 찾아가서 나도 눈 뜨게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니면 이제 눈을 떴으니 나도 열심히 일해서 거지의 신세를 벗어나야겠다고 일하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눈을 뜨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43절을 봅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좇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면서도 부자 관원이 된 사람을 통하여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부모와 처자식과 배와 그물조차 버려두고 따라 나선 제자들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이요 거지인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또 그 소경은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감추어진 말씀을 소경을 통하여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눈 뜨게 해 주신 분이 누구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을 잡고 조사를 합니다. 어떻게 눈 뜨게 되었는지를? 그대로 말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됩니다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본다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사십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뜨게 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19:1-10 잃어버린 자를 찾으심 2008. 2. 17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 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늘 읽은 이 말씀은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이라면 다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주일 학교 때에 이 내용을 노래로 배웠습니다. “뽕나무 뛰어내린 키 작은 사람 예수님 손목잡고....”이런 가사로 기억이 됩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며 키가 작은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시자 삭개오는 즐거워하여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뭇사람이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수군거린 것입니다. 이 당시의 세리란 로마의 앞잡이로서 자기 백성들의 세금을 과하게 거두어 자기 주머니까지 채우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창기와 같은 취급을 받은 사람입니다. 창기는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어긴 자라면 세리란 도적질 하지 말라는 법을 어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의 집에 예수님께서 가시니 수군거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너무나 즐겁게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고서는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도적질 한 것은 5분의 일만 더하여 갚으면 됩니다. 그런데 자신은 네 배나 갚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재산 절반도 다 날아갈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도 이르렀다고 하시면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십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던 자들이 더 의아해 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죄인인 세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가 있는가 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삭개오가 어떻게 반응을 보였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행한 일을 드러내게 됩니다. 물론 이 삭개오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하여 길에 나섰지만 키가 작아서 볼 수가 없었기에 어른이 그것도 세리장이나 되는 사람이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간 것과 예수님을 영접하고 재산을 나누어주겠다는 것을 평가 절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5절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그저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세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기의 집에도 들어가신다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고 싶어서 뽕나무에 올라갔지만 설마 자기에게 다가 오셔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자기 집에 오시겠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떳떳한 사람이라면 부자 관원처럼 나서서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미 18장에서 보았습니다만 부자 관원은 이 세리와 달리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런 부자 관원처럼 나서지도 못하고 거저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보고자 나섰는데 그것도 키가 작아서 뽕나무에 올라가서 보고자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앞에 오셔서 삭개오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신 놀라운 장면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것과 자기 재산 처분에 마음을 두기에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놓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대단한 일입니까? 삭개오가 뽕나무 올라가고 재산을 나누어주겠다는 것과 천지의 주인이 죄인을 찾아오신 일 중에 무엇이 큰일입니까? 아예 비교자체가 되지를 않습니다.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잘 합니다. 히친스라는 사람이 지은 ‘자비를 팔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에서 마더 테레사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에 근거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테레사의 자선단체에 기부한 사람들이 독재자와 사기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부하고 사진을 찍어서 사기에 써먹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정직하게 일해서 평생 모은 돈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누가 과연 정직하게 일해서 부자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서 부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삭개오가 행한 그런 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를 수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예수님이 행하신 일보다는 삭개오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삭개오의 행함을 강조하면 돈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없을 것입니다.

 

 

 

 

시편 49:6-12절입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7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9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10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11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여 어느 누구라도 영영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4:2-3절을 봅니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7절입니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야만 됩니다. 그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이나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세리나 창기나 간에 사실은 다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기분 나쁜 이야기가 됩니다. 이미 구약에서 인간의 의로는 결코 영생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그렇게 많이 말씀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과 귀가 막혀서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은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과 같이 죄인들이며 자기들처럼 의로운 자들은 영생에 이른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역사가 증거 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들이 신약에 있다고 신약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 그 현장이 바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고 하시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시는 모습이며 그들을 죄악의 포로에서 돌이켜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4편에서 포로에서 돌이켜 주실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이 기뻐한다는 말씀이 지금 세리장 삭개오에게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을 봅시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여 영접하거늘 이것이 말씀의 성취현장입니다. 시편 126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이켜 주실 때에 이렇게 찬양합니다.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이 기쁨 앞에서 자기의 재산도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구원의 기쁨에서 나온 모습이 재산의 절반도 내어놓고 토색한 것은 네 배나 갚겠다는 것이지 이것이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9-10절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 사건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삭개오의 일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세리장이인 삭개오에게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특히나 우리들은 처음부터 이방인들입니다. 그런 잃어버린 자들을 오늘도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을 얻은 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자리에서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임을 아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27-32절을 봅니다.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아니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도 한 죄 많은 여인, 얼마나 죄가 큰지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입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기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러자 다들 수군거렸습니다. 이 죄 많은 여인이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기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함을 받았기에 그것도 많이 사함을 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도 이미 보았습니다. 양 백 마리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을 때 까지 찾고서는 잔치하는 목자의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를 찾으시고 잔치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서 역시 잔치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의 살과 피를 제공하셔서 잃어버린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영생을 얻은 사람은 그 안에서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찾아오시다니! 뽕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삭개오의 그 기쁨을 오늘 우리도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9:11-27 왕을 기다림 2008. 2. 24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11절에서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세리장이며 부자인 삭개오,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창기와 동류로 취급되는 죄인인 삭개오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 집에 구원을 선포하시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1차적인 청중은 죄인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다고 수군거린 바리새인들과 또 이런 예수님의 언행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길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의 여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점점 올라가면서 어떤 기대를 가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 대망하던 메시아를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분에 대한 예언들을 떠 올리면서 다윗 왕국의 회복을 통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회복된 영광의 나라를 기대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조차 정복하는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셔서 당장에 왕으로 등극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과 동상이몽을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시면 무슨 일을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으시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서 죽으실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올라가시는데 제자들과 그 주변의 무리들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귓전으로 흘러버리고 자신들의 욕망과 기대를 예수님께 투사하여 이루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똑 같이 말씀을 보고 듣는데도 나중에 들어보면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말씀은 챙겨서 기억하고 부담스러운 말씀은 기억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마치 이마트에 가서 내가 필요한 물건만 챙겨서 카트에 담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이나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 그 당시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2-14절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서 한 므나씩 주면서 자신이 왕위를 받아서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그들의 왕 됨을 싫어하여 사자를 뒤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헤롯왕이 죽을 때에 자기 아들 아켈라오에게 왕위를 승계합니다. 그러나 정식 왕으로 등극하려면 로마의 황제에게 인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켈라오가 유대인을 학살한 자이기에 유대인들이 그를 미워하여 왕이 되지 못하도록 유대인들의 사자들을 로마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까지 갔다 오려면 수개월은 족히 걸리는 것입니다. 특히 정치적인 변수에 따라 몇 해가 걸릴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받아서 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아서 오리라고 믿은 사람은 아켈라오가 맡겨놓은 임무를 충실하게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신들이 왕위를 받아오지 못하도록 갔기 때문에 왕위를 받아 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기 임무를 충실하게 감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 됨을 원하지 않았던 그 사신들을 당연히 죽였겠지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의 이야기를 예수님은 자기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당장에 눈에 보이는 왕국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재림하실 때에 그의 왕국이 온 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제자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모르고 있기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지 사람들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이루어 질 것을 기대하는가 하면 권력층들은 현재의 질서체제를 어지럽히는 사회 불안요소로 여겨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미움 받는 아켈라오의 비유를 통하여 자신도 미움 받는 사람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켈라오는 그의 악행으로 미움을 받지만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시기에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빛이 왔지만 사람들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잘 났다는 사람들 배후에 누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까?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비유의 내용을 봅시다. 므나는 백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기에 성인이 백일을 일해야 벌수 있는 금액입니다. 열 명의 종들에게 각자 한 므나씩을 맡기고서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위를 받아서 돌아와서 결산을 해 보니 어떤 사람은 10므나를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잘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섯 므나 남긴 사람에게도 이와 같이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한 므나 그대로 가져와서는 보소서 내가 수건에 싸 두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당신이 엄한 사람이라서 내가 무서워하여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둔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종이라면 당연히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까? 주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들에게 맡겨서 이익만 보려고 했다는 원망인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은행에라도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의 한 므나를 빼앗아 10므나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곁에선 자들이 그 사람은 이미 10므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일을 충성되게 하였는가에 따라 상급이 달라지고 또 게으르게 아무것도 아니한 자는 상급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오늘날 자본주의나 세상의 정치 원리처럼 승자 독식주의로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익을 많이 남긴 자들이 됩니까?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지 세리, 창기, 소경, 거지 나사로, 십자가의 강도는 아닌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이 남긴 것이라고는 죄 밖에 없는 자들인데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핵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에 대한 기대를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대를 포기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수록 자꾸만 떠난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근심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께서 그들을 진리가운데로 이끄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내용은 지금 곧 예수님이 그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서 왕으로 오실 그분을 기다리라는 내용입니다. 그 믿음으로 사는 자와 그 믿음이 없이 사는 자의 모습으로 양분 될 뿐입니다. 누가 많이 남겼느냐 아니냐는 것으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도 하루에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의 품삯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조차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것을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봅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사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지금 왕위를 받아서 하늘에 등극하신 분이 곧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을 정말 믿고 사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성경의 어떤 말씀을 보아도 그는 믿음이 더하여 질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 발 딛고 살지만 이 땅의 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과 은혜를 더 풍성하게 맛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것만 바라볼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에는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재림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2천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오지 않으신 분을 어찌 기다리겠느냐?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했으니 보험증서 챙겨두듯이 만약을 대비하여 챙겨두었다가 내어 보여야지 그런 생각이라면 이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마치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둔 사람처럼 나중에 주인이 왕위를 받아오면 이것을 돌려주려고 생각하였지만 그의 삶은 주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삶밖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이 임금이 되어 오지 않을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왕위를 받으셨고 곧 오실 분으로 믿고 사십니까? 사도행전1:6-11절을 봅니다. “봉독” 제자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와 기한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될 뿐입니다. 사도행전 2:33-35절을 봅니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보좌 우편에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시 오실 그때까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새 예배당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주님의 보혈의 공로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놓으시고 영원한 참된 생명으로 함께 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으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살기 원합니다. 
 

 

 

누가복음 19:28-40 나귀 새끼를 타신 왕 2008. 3. 2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지난 25일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사절단이 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취임식에 참여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바쁜 일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라디오로 잠시 중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이나 텔레비전을 본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의 대통령 취임식이 얼마나 웅장하고 대단한지를 실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가 이 땅에 오셔서 왕으로 취임식을 하는데 어떤 모습입니까? 오늘 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8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앞서 행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지난주에 본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루실 나라와 다른 나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기대하는 바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올 동안 제자들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와 기한은 제자들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난주에 이 말씀을 보면서 왕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믿음으로 한 주간을 사셨습니까?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사셨는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든지 아니 기다리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어내고 계십니다.

 

 

 

 

28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가셨습니다. 왜 앞장서서 가셨을까요? 제자들이 좀 머뭇거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예루살렘에 가시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셨으며 또 예루살렘 바로 앞에서 왕위를 받기 위하여 멀리 가셔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 머뭇거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앞서서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베다니 마을로 가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십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약 오리쯤의 거리이기에 가깝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우리를 돌로 치려고 하는 곳에 다시 가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 낮 동안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유대로 가자고 하실 때에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나섭니다. 즉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어느 정도 짐작도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머뭇거리든지 아니면 앞장서든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그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기 위하여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까지 2킬로미터 미만의 거리입니다. 갈릴리에서 이곳까지 걸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제자 둘을 보내셔서 맞은 편 마을에 가서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아니한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라면 어렸으니 아무도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도 타보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민수기 19장에 보면 부정함에서 깨끗하게 하기 위한 속죄의 물을 만드는 재료를 만들기 위하여 붉은 암송아지를 사용하는데 그 조건이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매지 아니한 송아지입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는 이방인들이지만 그들의 재앙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하여 한 번도 멍에 메어보지 아니한 소이며 또 젖 먹는 새끼를 둔 암송아지 두 마리를 수레에 매어 보내는 것을 봅니다. 그 소들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집니다.

 

 

 

 

이처럼 한번도 사람이 타지 아니한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나귀 주인이 왜 나귀를 푸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답할 말을 미리 주셨습니다. 나귀를 풀 때 그 주인이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풀자 주인이 왜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께서 쓰신다고 하시자 그 주인이 순순히 내어줍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다 주의 모습입니다. 주께서 쓰신다면 다른 이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나귀 주인은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믿음이요 기적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어떤 예수님을 믿는가를 이런 장면에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주 예수님”인가를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되어 있고 예수님을 마치 하인 부리듯이 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내가 주인 된 자리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기에 항복시키십니다. 무엇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세상의 영광을 주는 왕이 아니라 십자가를 주는 왕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시기 위하여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아무도 스스로 원해서 갈 수가 없는 길입니다. 다들 도망가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짐한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을 갔는데 누가 감히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남편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나를 택할래? 예수를 택할래? 양단간에 결정하라는 요구 앞에서 예수님을 택한다고 이혼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신이 그렇게 희생을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앞장서셔서 주님의 길을 가신 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 앞서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지금까지 걸어오셨는데 예루살렘 바로 앞에서 왜 나귀를 그것도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셔서 타고 가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뜻대로 사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뜻이란 아버지의 영을 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오신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성취하시기 위하여 가시는 길입니다. 베드로전서 1:9-11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한 것입니다. 스가랴서 9:9-10절을 봅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탄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 어른이 나귀 새끼를 타면 발이 땅에 닿는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탄 차가 중고 티코였습니다. 그때 담임목사님이 키가 커다란 사람이 티코를 타고 다니니 딸깍발이를 신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딸깍발이는 가난한 선비가 신이 없어서 비오는 날이 아닌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중고 티코를 몰고 대통령 취임식장에 가면 들여보내 주지도 않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는 길이신데 나귀 그것도 큰 나귀도 아닌 아무도 타보지도 않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나귀등에 타시기는 하셨지만 두발로 걸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왕의 등극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공의로운 분이 구원을 베푸시는 것인데 겸손하여 나귀 그것도 나귀의 작은 것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때에 나귀를 타시지 않으시고 전쟁용의 말을 타시고 입성하셨다면 그때가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백마 타고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이름이 충신과 진실입니다.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데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 있는데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그를 따르는데 그 입에서 이 한 검이 나와서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철장 권세로 다스리신다고 합니다. 그 옷과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는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왕이 백마를 타지 않으시고 나귀새끼를 타셨는가 하면 선자지의 예언의 성취이지만 그 내용은 사람들이 원하는 말과 병거를 끊어버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스가랴 9:10절에서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과 전쟁하는 활을 끊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한 것은 말과 병거와 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그들이 무장할 수 있는 무기들을 원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들이 가질 수 있는 힘을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하늘나라의 보좌에 등극하기 위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9:51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승천하시는 길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를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35-38절입니다. 그 나귀새끼의 등에 겉옷을 깔고 또 길에도 자기들의 겉옷을 깔고서는 큰 소리로 찬송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시에 천사들의 찬송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제 하늘의 왕으로 다시 등극하실 그 만왕의 왕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무리들이 나중에 배신할지라도 이 순간은 왕으로 등극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39-40절입니다. 이러한 찬양은 왕을 맞이하는 찬양이기에 바리새인들이 이런 소리를 금하도록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어떻게 감히 메시아 왕에게 찬양할 내용을 예수 당신을 향하여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만약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길가의 돌들도 찬양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세상의 영광을 약속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9:41-48 우시는 하나님 2008. 3. 9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 ○성전에 들어 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ㄱ)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ㄴ)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큰 소리로 찬양을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평화로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실 때에 천사들이 부른 노래를 부릅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한 그 영광과 평화가 선포됩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모습을 책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도 선지자들이 약속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을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지금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군중들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을 맞이할 사람은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을 향하여 그런 무리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성 앞에 오셨습니다. 41절을 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군중들은 환호하고 반대자들은 호시탐탐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예수님은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우시는 하나님”으로 하였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우시는데 왜 하나님이 우신다고 하였는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저도 오래전에 어떤 책 제목을 보고서 의아해 한 적이 있습니다. 몰트만이라는 사람이 지은 책인데 제목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책의 서문을 잠시 인용합니다. “예수의 수난 속에서 저는 격정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얼굴에서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열려진 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사변적으로 꿈꾸지 않고 신성의 깊이를 추구하여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성의 깊이는 골고다 산 위의 십자가에서만 완전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고 계시는 분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그러면 저 멀리 높고 높은 곳에 초월적으로 계시는 원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친히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때로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때로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때로는 왕과 신하의 관계로 말씀하시면서 사랑하시고 책망하시고 기뻐하시고 분노하시고 질투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6-10절입니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러므로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세리 삭개오를 찾아오신 분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나사렛 예수를 배척한 자들은 단지 이단인 한 인간을 척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살해한 자가 되기에 사도들을 그렇게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울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고 계시는 이 분이 바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9:6-7절을 봅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9:1절부터 보아야 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 어떤 일을 하시며 어디에서 오시는지 다 예언하고 있습니다. 고통과 흑암과 멸시를 당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시고 그들에게 빛을 보이시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이렇게 하시려면 큰 군대를 몰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호령하여 불 말과 불 병거를 몰고 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한 아기가 오신 것입니다. 한 아들을 주셨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합니다. 그 이름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아기로 오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이 평강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도 그 이름이 평강의 성입니다. 평강의 성에 평강의 왕이 오셨건만 평강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41-42절을 봅니다.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금 네 눈에 숨겨졌다고 합니다. 즉 참된 평화를 볼 눈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에 관하여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생각이 납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스스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올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그런 고백이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주셨기에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로 이렇게 모였지만 우리가 알고 생각하고 믿는다는 예수님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가를 알아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즉 성령께서 알게 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 평생에 주여! 주여! 하면서 큰일을 행하였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내가 원하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만 보시고서 우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 우리교회를 보시고 우실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들을 보고 우실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나귀새끼를 그것도 빌려서 타시고, 강남의 아파트는 커녕 자기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노숙자를 우리의 왕으로 뽑고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누가복음 13:34-35절을 봅니다. “봉독”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탄하십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품듯이 품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냈건만 그러나 그들을 죽인 성읍이기에 멸망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43-44절을 봅니다. 평화에 관하여 알지 못한 성읍,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에 이 예루살렘은 멸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성의 멸망을 벌써 내다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날이 이르면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약 40년 만에 로마에 의하여 멸망당합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한 독립전쟁을 하였다가 부분적으로 승리를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성이 포위를 당하고 결국 성벽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의 성전마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립니다. 이때에 수 십 만 명의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죽었습니다. 어린애들은 땅에 메어침을 당하였지요! 이 모습을 예수님이 아시기에 탄식하며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45-47절입니다. 성전이 도적의 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왜 성전에서 만나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성전에서 그것도 지성소의 언약궤의 뚜껑에 피가, 희생의 피가 뿌려짐을 통하여 그곳에서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언약에 불순종하여도 그 언약위에 희생의 피가 뿌려짐으로 다시 화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 속죄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을 사람들은 도적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1절부터 10절까지를 봅니다. “봉독” 성전 앞에 서서 여호와께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외칩니까?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고 바알에게 분향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책망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라고 하십니다.

 

 

 

 

사사시대에도 열 왕의 시대에도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도적의 소굴이 되어버린 것처럼 지금 예수님의 눈앞에도 성전은 도적의 소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전을 예수님은 청결히 하십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좇아버립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3일 만에 일으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3일 만에 일으키신 성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성전이란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지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제공하셔서 만들어진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겨우 이사를 했지만 이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이것도 다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무너질 것들입니다. 이사를 하면서 낡고 부수어진 것들을 쓰레기처리 하였습니다. 그런 것이 어찌 거룩한 물건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새로운 성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히9:11~12)

 

 

 

 

47-48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합니다. 이들은 다 성전 때문에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성전 때문에 권력을 누리고 사는 자들입니다. 참된 성전의 기능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채우는 도적의 소굴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율법의 올무에 걸든지 로마의 법에 걸던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방도를 찾아낼 것입니다. 여론을 형성하고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렇게 제거하여 버린 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평화의 성에 산다는 사람들이 그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은 어떻습니까? 울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영광을 더 얻지 못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누가복음 20:1-8 권세 2008. 3. 16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5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ㄱ)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24 1)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만왕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좇았습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다 성전의 고위 관리들에게 허락을 받고서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 장사가 어떤 장사인가 하면 성전에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 제물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거리가 멀면 짐승을 끌고 오기가 힘이 들기에 돈으로 가져와서 성전 가까이에서 제물을 사서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의 합격 여부는 제사장들이 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끌고 왔더라도 흠을 잡으면 자기가 끌고 온 짐승은 싼 가격에 팔고 제물로 인정하는 짐승을 비싼 가격으로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세가 있습니다. 성전 세는 성전에서 통용되는 돈을 바꾸어야 하는데 흩어진 유대인들이 각 지역에서 그들의 돈을 가지고 오면 여러 왕들의 형상이 새겨진 돈을 가지고 오기에 그런 것을 성전세로 사용할 수 없기에 환전하면서 수수료를 챙기는 것입니다.

 

 

 

 

이런 장사하는 사람의 수입이 굉장한 것입니다. 평소에 성전에 나아와 제사하는 사람들 외에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켜야하는데 이런 절기 때는 무려 이백만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좇아버리고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인데 도대체 누가 그런 권세를 누가 주었느냐는 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1-2절을 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들입니다. 이들은 정치나 종교적인 권력을 로마의 허락 하에 권세를 행세합니다. 사소한 정치적인 문제는 자치권을 주지만 사형에 처하는 일과 같은 중요한 것은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관할권도 받아서 이들이 성전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쫓아내고 백성들을 가르치니 누구 권세로 이러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 전에 먼저 묻습니다. 여기에 답을 하면 예수님도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시는지 답변하시겠다면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사람으로 온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였던 그들이 오히려 난제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과 의도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질문하였다가 오히려 그들이 당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5-8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합니다.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왜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그들이 돌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누구 권세로 이렇게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요한이 증거 한 권세입니다. 요한이 무엇을 증거 하였습니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기며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치며 회개하라고 합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이 회개의 소식을 백성들은 받아드립니다. 군인들도 회개합니다. 세리들도 회개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의 물로 베푸는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그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을 모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의 질문에 그들은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을 하늘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자기의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신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푸는것도 감당할 자격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이 자기에게 와서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 없으신 분이 죄 아래 들어가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을 인정하면 예수님을 인정하여야 하기에 모른다고 발뺌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내가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셔도 그들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9-19절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되어 포도원의 소출 얼마를 받게 하려고 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또 그렇게 합니다. 세 번째 보내도 그렇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내 아들을 보내리라고 그리하면 그들이 공경하리라 하고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이는 상속자니 이를 죽이고 우리가 차지하자고 하면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를 사람들이 어떻게 취급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의 아들을 죽여 버리면 그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여겨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당시의 법은 주인이 죽고 상속자가 없으면 소작인이 그 포도원을 경작할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들이 왔다는 것은 주인은 이미 죽은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만 죽이면 그 땅이 자기 것이 되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엄연히 살아있다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비유를 듣고서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비유가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비유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는데 이 비유의 말씀은 모두가 알아듣는 비유입니다. 왜 이렇게 알아듣는 비유를 말씀하시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하실 일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이미 선지자들로 하여금 예언된 말씀이기에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8:22절과 이사야 8:14-15절의 인용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서 다른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된 신기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 돌 위에 걸려 넘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이 돌이 심판을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벧전 2:6). 19-26절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듣고 특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을 향한 말씀인 줄 알아듣습니다. 그러므로 즉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만 백성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작전회의를 합니다. 총독의 치리와 권세아래 붙이려고 정탐을 보내어 유도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참으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불가합니까?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이방의 왕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였으니 참 선지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 총독의 권세로 제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 동전에 가이사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의 화상과 글이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시자 가이사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시니 더 이상 책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권세를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세상의 권세란 남들 위에서 군림하는 권세입니다. 지난주에 공천에서 탈락한 국회의원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회의원을 몇 번씩이나 하면서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그 권세에서 밀려나자 눈물을 흘리는 사람, 분노하는 사람, 억울하다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잠시 잠간후면 없어질 그런 권세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의 권세를 얻고자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을 오늘 우리 주변에서 늘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권세란 어떤 것입니까? 마태복음 20:25-28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혀달라는 청탁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는 정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참된 권세자이시지만 섬김을 받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하여 오셔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절입니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것이 참된 권세입니다. 지난 주 오후에 본 마태복음 9:6절에서 죄 사하는 권세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참된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또 다시 얻을 권세를 가지신 이 권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백성들의 목숨조차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권세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를 그의 죽으심으로 이겨내신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권세가 아니라 나귀새끼를 타시고 십자가를 지신 아직까지 세상에는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권세 앞에 무릎을 꿇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20:27-44 산 자의 하나님 2008. 3. 23

 

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40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4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오늘 전 세계의 교회에서 부활절로 지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절을 지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친히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기억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 때에 떡과 잔을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자신의 살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영이 임한 사람은 부활의 영광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마침 오늘 본문이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활에 대한 논쟁을 하는 장면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 천사, 내세와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기에 모세 오경에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고 하면서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고 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삽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동일한 유대인들인데 그들의 사고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경건하게 율법을 지킨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이런 바리새인들과 성전까지 다 타락하였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사막의 동굴로 간 에세네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질문한 이 사두개인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 믿고 살기에 당연히 세상의 부와 권력을 탐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난주에 잠간 말씀드린 산헤드린 공의회를 거의 장악한 세력들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그들이 원하는 지상의 것들을 주지 않으시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소요사태라도 일어나면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날아가기에 더욱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과 천사와 내세도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도 견제하기 위한 질문이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27-28절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모세의 율법으로 질문을 합니다. 신25:5절을 인용하면서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후사를 이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말이나 룻에게서 볼 수 있는 내용이며 예수님의 족보도 이런 계대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대결혼도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어주심으로 하늘나라의 상속을 이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사두개인들은 어디에 적용을 하고 있습니까? 문자대로도 보지 않고 거저 자신들의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그 주장에 부합시키기 위하여 끌어들인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모습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끌어들인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무엇을 질문하는 것입니까? 칠 형제가 있는데 장남이 후사가 없이 죽고 형수가 남았는데 그 둘째가 결혼하였다고 또 후사가 없이 죽고 해서 마지막 일곱까지 다 죽었을 때에 부활하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혹이 이런 질문을 여러분은 해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부활하고 나면 현재의 인간 관계대로 계속 살게 될 것인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저도 청소년 때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있을 때에 이런 질문을 하니 교회에 그래도 오래 다닌 어느 여 집사님은 부활하여도 현재의 남편과 다시 살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과 아내와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평소에 아이고 이 웬수야! 하면서 사는 사람은 부활해서 또 같이 산다면 불만이 대단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의 생각이나 사두개인들의 생각이나 무엇을 모르는 것입니까?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오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나오는 것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는 이 말씀이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모두가 자기 유리한 대로 성경을 보고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기에 우리는 다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성경의 말씀대로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까지 땅에 붙어살려고 하겠습니까! 34-36절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런 생각자체가 이 세상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지만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는 일이 없으며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그 부활의 영이 임한 자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됩니다. 이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37-38절을 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증거를 어디에서 말씀하고 계십니까?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에서 부활의 증거가 없다고 여기기에 부활이 없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기 좋을 대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오경에서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부활도 그들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부활 그러면 신약에서 무수히 많은 말씀을 보게 되고 특히 고린도전서 15장 같은 경우는 부활의 장이라고 하면서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1-6절을 봅니다. “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기서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40세에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하려다가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제 광야에서 양치기로 40년 세월을 보낸 80세의 늙은이입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곧 사라지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광야에 자라는 나무들은 입이 무성하지 않기에 불이 붙어도 곧 사그라집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떨기나무에 불꽃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그곳으로 가보았더니 하나님께서 그 곳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시고서는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부활의 이야기를 누가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생각하거나 그 조상들에게 언약을 하신 하나님 정도로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건을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부활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 또는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아니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고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분이신데 어떻게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수 있는가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8:56-59절입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모세보다 약 400년 전에 태어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볼 것을 보고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이 시간과 공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다른 영역의 말씀입니다.

 

 

 

 

오늘말씀 41-44절을 봅시다. 이제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110:1절을 말씀하시면서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주라고 고백한 분은 벌써 다윗시대에 주의 우편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방금 이 말씀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았다고 하시는 말씀이나 다윗이 주의 우편에 계신 내 주께 말씀하셨다는 이런 내용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셨기에 죽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산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에 누가 나타납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죽은 자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세계, 산 자의 세계는 우리가 제한받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는 따라 잡을 수 없는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세계를 우리는 지금 희미하게 거울처럼 믿음으로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세계, 산 자의 세계가 어떻게 예수님에게서 구체적으로 펼쳐지는지를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주심을 통하여, 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들어가 있는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음을, 쉬고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은 자도 다 죽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었다는 것과 성경에서 죽었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생명과 의가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전부인양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안과 밖으로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표준 새 번역 갈 6:14) 이런 사람이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0:45-21:4 과부의 헌금 2008. 3. 30

 

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 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산자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그 말씀을 예수님은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부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알 수가 없고 산자만이 알고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노래 가사가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산 자란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자를 산자로 봅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기득권에 빌붙어 살려는 자를 죽은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고 해서 산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말하는 살신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산자로 보지 않습니다. 영웅적인 행동을 하고 입신양명을 한다고 해서 산자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산자란 믿음의 사람을 산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니 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주체로서 내가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도 역시 성경은 죽은 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두 본문을 통하여 산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20:45-47절에서 서기관들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는 서기관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서기관들이란 옛 중동에서는 글을 배우는 데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으므로 서기관은 학자이거나 관리였다. 구약 성경에서는 나라의 매우 높은 관리를 서기관이라고 했다(삼하8:17 등). 종교적인 율법이 유대인들의 생활에 점점 더 중요하게 된 포로기 이후 시대에는 전문 교육을 받고 임직한 유대교 학자들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들의 임무는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옛날 한글이 나오기 전에 한문을 아는 것은 아무나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사대부집안의 남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그러니 글을 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 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필사하고 해석하는 것은 특히나 율법자체가 종교와 생활의 법으로 시행되는 유대사회에서 대단한 권세의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판검사쯤 되는 역할입니다.

 

 

 

 

45절을 봅니다. 모든 백성들이 들을 때에 무엇에 대하여 듣고 있습니까? 바로 앞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하여 듣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것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이 해석을 서기관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서기관이 옳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유대사회에서 권위가 인정되는 사람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알고 있는 그들에게 오히려 시편 110:1절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해석, 이런 세계가 바로 산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다른 백성들도 듣고 있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하십니다. 긴 옷을 입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여 메달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된 신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목사의 가운과 비슷하겠지요! 그러니 가는 곳마다 상석을 차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책망을 받습니다. 서기관들이 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입니까? 경건한 사람들로 인정되었기에 사람들이 유산을 맡기기도 하고 재산을 관리하게도 하였습니다. 마치 변호사처럼 일을 맡고서 관리를 제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만만한 과부들의 재산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들이 조금 있는 재산을 경건하다고 여겨서 서기관들에게 맡겼다가 재산을 잃어버리면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할 때는 아주 거창하게 청산유수로 길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고 회당에 나가면 상좌에 앉고 잔치 집에 가면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이런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합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모습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그렇게 되지 않아서 이렇게 앉아있을 뿐이지 다들 한 자락 하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어서 이렇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 믿는 믿음이란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지만 이미 그들이 죽어있기에 산자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입니다. 죽은 자의 세계에 살고 있기에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삼키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거룩한 체 온갖 종교적인 외식을 다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실상을 본인도 모르고 백성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이들의 실상을 드러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무슨 말씀을 들어야하는가 하면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씀은 이 기록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쪼개어지며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되어 벌거벗은 듯이 다 드러나는 시간이 말씀을 보고 듣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죄를 알게 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게 됩니다. 주여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산자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산자의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옳습니다(요한계시록 16장).

 

 

 

 

그러나 산자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외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은 재미를 많이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제가 압니다. 전도사 시절이나 부목사 시절에 어떤 목사님이 헌신예배 때에 설교하러 오면 제가 그 목사님을 알 경우에 설교시간에 나를 드러내주면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가기 전에 자신의 죄인 됨이 어떠한지를 알았지만 그런 모습이 또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위임목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사회에 글을 하나 쓰는 것도, 설교원고를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다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제 안에 서기관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심방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 보다는 사람들 들으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는 그 받을 판결이 더 중한 것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 실감이 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 산자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자신도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서기관들이 아니라 가난한 한 과부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21:1-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연보 궤에 헌금 넣은 것을 보십니다. 마가복음에 보시면 마주 대하여 보신다고 합니다. 아예 작정하고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는 것입니다. 연보 궤는 마태복음 27:6절에서 성전고라고도 합니다. 성전에 있는 헌금을 넣는 상자로 여인의 뜰에 놓여있었습니다. 성전에도 구역이 있어서 이방인의 뜰이 있고 여인의 뜰이 있고 유대인 남자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접근하여 연보를 할 수 있도록 연보 궤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보 궤는 돈을 넣으면 소리가 들리는 그런 상자입니다. 많이 넣는 사람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 연보 궤에 헌금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부자들은 와서 많은 돈을 넣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렙돈은 헬라 화폐단위로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하루 일당의 백분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한 헌금이 많은 돈을 헌금한 부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헌금보다 더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계산 방법이 하늘의 계산방법인 것입니다. 땅의 계산방법과 전혀 다른 계산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과부의 헌금을 가장 많다고 하신 것입니까? 부자들은 그들의 소유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재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드리면 내일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내일은 내일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처럼, 들에 피는 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믿음인 것입니다. 경건하다고 여기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다니는 서기관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데 가난한 이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두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무엇을 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 이름도 없는 가난한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였기에 그 후로는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짐작컨대 이 가난한 과부는 그 이후로도 날마다 일용을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산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산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산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이런 과부의 모습이 나올 텐데 우리는 이런 믿음이 없기에 매일 염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면서 사는 모습은 이방인이나 하는 염려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서 어떤 증거를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특별한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인사를 받으며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상좌에 앉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한 가난한 과부 그래서 연보할 것도 없어서 생활비 전부를 넣은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다 전자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확증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가난한 과부도 과분한 은혜에 감사하며 내일을 주님께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5-19 날이 이르면 2008. 4. 6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7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성전을 가리켜 미석과 헌물로 꾸며진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성전을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놓았습니다. 헌물이란 헤롯 대왕이 성전 문 입구에 황금으로 포도나무를 장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유대인들에는 아주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보는 이것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말씀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예배당 건물입니까? 옛날의 지하와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그러나 건물자체가 중고건물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미석도 대단한 헌물로 장식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창원의 어떤 교회당은 5백억을 예상하고 건축하는데 벌써 8백억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아름다운 미석과 헌물로 장식할 것입니다. 그런 곳에 예수님이 오시면 막 자랑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건물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고 하신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성전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 예배당을 짓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이란 그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나라가 망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성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지시를 따라 모세가 성막을 만들고 그 안에 언약궤를 모시게 됩니다. 그 언약궤의 뚜껑위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성막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고정된 건물이 됩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하고 솔로몬이 대리석과 백향목을 수입하여 7년 동안 지었습니다. 성전을 봉헌하면서 솔로몬이 기도하는 내용을 봅니다. 열왕기상 8:27-30절입니다.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며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피 흘림의 제사가 있는 언약궤 위에서만 이스라엘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 하여 어떤 재앙이 오든지 혹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지라도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소통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나설 때에 가장 중요하게 챙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히 청년들은 무엇을 일순위로 챙깁니까? 휴대폰이지요! 얼마나 기능이 다양한지 아예 휴대폰 없으면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일주일에 단 한번 하나님과 소통하여야 하는 예배시간 조차 휴대폰 꺼두지 못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휴대폰을 들고 박살을 내어버리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아끼는 휴대폰의 천배 만 배로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도 우상으로 가득 채워지면서 우상의 소굴 도둑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성전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여 버립니다. 성전의 금과 은과 동으로 된 것은 약탈을 당합니다. 성전이 파괴된 것은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세월을 보낸 뒤에 다시 포로에서 돌아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70년 후에 돌아오는데 그 돌아오는 시대는 바벨론이 망하고 바사제국시대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합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성전을 본 늙은이들은 울었습니다. 이때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이 주어집니다. 학개서 2:6-9절입니다. “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비록 초라해 보여도 이 성전에 나타날 나중의 영광을 말씀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와 만국을 진동시키며 만국의 보배가 이 성전에 이를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고 합니다.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이 약속을 말씀을 믿고서 유대인들은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이 망하고, 알렉산더가 지배하다가 죽고,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여도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영광은 성전에 나타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초라해져 가기만 하였습니다.

 

 

 

 

이때 헤롯이 유대의 로마 분봉왕이 되어서 대대적으로 성전의 개축과 증축을 하면서 위용을 갖추게 되는데 무려 46년에 걸쳐 꾸몄습니다. 헤롯은 그의 신앙심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헤롯은 에서의 후손이기에 야곱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지음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한 것입니다. 헤롯은 국회의원들처럼 공약만 하고 만 것이 아니라 성전의 증개축을 멋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민중들은 이 성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이미 도적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과 로마의 정치권력은 결탁이 되어 있었고 성전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도적의 소굴이 되었든지 말았든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켜주는 성전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는 말씀과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는 이런 말씀이 얼마나 반역적인 말씀인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킬 때에 고소 제목이 성전 파괴자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렇게 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8-9절을 봅니다.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메시아라고 나서는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하면서 때가 가까웠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좇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난리와 난리 소문이 듣겠지만 그러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당시에도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메시아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10-11절을 봅니다.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크게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하늘의 징조들입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날이 이르면 이라는 이 그날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도 계속 보겠습니다만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가 그 날입니다. 이 그날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멸망과 함께 이 세상 전체의 심판과 멸망의 날이 또 그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 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와 온 세상의 멸망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의 징조가 무엇입니까? 난리와 난리의 소문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전쟁을 하고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하늘의 징조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사실 구약에서 있었고 지금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것을 징조로 말씀하신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가끔 텔레비전에서 지구의 환경재앙을 다룬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지진과 해일 자연재해를 다룬 것을 보면 두렵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잠시이지요! 보고 돌아서면 그래도 이 땅에 튼튼히 발 딛고 살겠다고 또다시 굳은 결심을 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징조를 예루살렘의 멸망과 온 세상의 멸망의 징조로 보여주는 것입니까? 이 땅은 영원히 살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동차가 새로 산 차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타면 덜거덕 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아차려야 합니까? 이 차를 폐차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에 온갖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해일과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조차 흔들리는 것은 이곳이 영원히 살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란 오늘 우리의 주변에 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지난 금요일 요한 계시록 17장을 보면서 온 세상이 음녀의 포도주 잔에 취하였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잔이란 금잔이며 그 여자는 온갖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장을 하고 있지만 그 잔에는 온갖 더러운 탐욕들이 가득한 잔입니다. 예레미야 51장에서는 그 잔을 마시고서 미쳤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제대로 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부 미쳤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미쳤고, 경제하는 사람들은 경제에 미쳤고,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녀 교육에 미쳤습니다. 종교 활동하는 사람들도 세상의 정치 권력마저 쥐려고 미쳤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면 더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이런 미친 세상을 향하여 날이 이르면 이 세상이 멸망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전하는 자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믿어도 곱게 믿으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고 부처고 간에 믿는다면 그 신이라는 자들이 우리나라와 나를 영원히 복 받게 하고 잘되게 하는 그런 신이라야지! 멸망을 이야기 하고 지옥을 이야기 하면서 협박하느냐며 오히려 미친 사람취급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징조가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12-17절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는지를 우리는 압니다. 회당과 옥에 넘겨주고 감옥에 가두고 임금들 앞에 잡혀갈 것입니다. 이것이 징조이고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핍박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할지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할지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집안 식구들도 죽음에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8절을 봅시다.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호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순교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순교하고 바울사도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것입니까? 차원이 다른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 하나도 주님 허락하지 않으면 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로 영혼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김없이 무너지리라는 이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 무너짐은 성전만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점점 무거워집니까? 아니면 홀가분해 집니까? 세상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많은 사람은 괴로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별 미련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홀가분해 질 것입니다. 끝으로 한 곳의 말씀만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 날이 이르면 이 세상의 것이 다 무너지리라는 이 말씀이 진실로 믿어진다면 여러분의 짐은 반드시 가벼워질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21:20-28 고개를 들라 2008. 4. 13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찌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은 안전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성전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예루살렘성이 망할 것이며 특히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징조는 무엇이며 그러한 때는 언제인가를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 답변이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21절을 봅니다.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가라고 합니다. 성내에 있는 자들은 성 밖으로 나가고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고대에 사람들이 성을 쌓고 사는 것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성 밖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특히나 전쟁이 일어나면 성안에 들어와야 보호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고대 전쟁의 영화들을 보면 적이 쳐들어올 때 빨리 성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빨리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면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성안에 들어가지 말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기르시고 인도하시는데도 거역하였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종말을 기억하였으면 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아졌기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 5:20-31절을 봅니다. “봉독” 우준하여 지각이 없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들으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다의 파도가 흉용하여도 하나님께서 그 한계를 정하셨기에 넘어서지 못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반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추수할 것을 주셨건만 여호와를 경외하자는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악행으로 창대하고 거부가 되는 이런 나라를 어떻게 심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것입니다. 심판 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 때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그들의 행위는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와서 약 5백년을 지나면서 또다시 예루살렘 성전은 도적의 소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건물 성전의 미석과 헌물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전이 있기에 언젠가 메시아가 와서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온 세상의 영광과 보물이 예루살렘으로 몰려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돌 위에 돌 하나 남겨지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심판의 말씀은 이미 선지자들이 다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런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예언하였고 그 예언들을 지금 예수님은 이루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한 예언은 에스겔 선지자도 다니엘 선지자도 미가 선지자도 예언한 내용들입니다. 성전이 있다고 망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전에 우상이 가득하게 되었는데도 그런 성전을 붙들고 있었기에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멸망하는 것입니다.

 

 

 

 

23-24절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 날을 이미 내다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미 우셨습니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에 안듯이 그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다 거부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마저 거부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습니다. 이제 그 날이 어떻게 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피난할 때 빨리 도망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어있는데 아이가 울어버리면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임신한 여인과 어린아이마저 무참하게 살육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파멸이기에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이방에 사로잡혀 가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미 일어난 일이 되었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때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9만7천명 이상이고 살해당한 사람이 10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작은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유대인들은 피하여 가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모델인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온 세상의 심판과 멸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8-33절입니다. “봉독” 종말의 때가 롯의 때와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정작 중요한 세상의 심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늘로서 불이 유황과 비 오듯이 쏟아질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런 말들을 농담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에도 이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후에 성령이 임하고 나니 이렇게 증거 합니다. 베드로후서 2:6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후세에 본이 되었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처럼 살면 이처럼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온 세상이 다 소돔과 고모라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이 세대가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라면 어디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제 그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만이 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졌다는 것, 그 안의 거룩한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거룩한 것이라고 할 것이 없이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거룩하신 분이 이 세상을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곳을 영적으로 말하면 소돔이요 애굽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됩니다(계11:8). 한 특정 지역이 아니라 온 세상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8장을 보시면 이러한 세상을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모든 세상의 중심인 바벨론이 무너지면 그 바벨론을 믿고 살았던 자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 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세상 자체가 무너지는 가운데서 노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땅만 바라보는 자들과 대비되는 하늘의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무너짐을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멸망하는 이유는 의인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은 온 세상의 멸망의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피를 흘린 곳이 심판을 당함으로 온 세상이 다 심판아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멸망을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만 바라보고 산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 달리 그 어떤 소망도 없는 세상입니다. 25-27절입니다.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이며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지진과 기근과 처처에서 들리는 난리의 소문들이 이 땅이 영원히 살 곳이 되지 못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보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까지 다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지 사람들이 기절할 것이라고 합니다.

 

 

 

 

땅에 속하여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땅의 변동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진과 해일과 기근들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두려운 공포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언제 한번 아마겟돈이나 인디펜던스데이라는 영화를 한번 보았으면 합니다. 물론 그런 영화는 인류의 위대함을 노래합니다. 지구를 향하여 달려오는 유성을 인간의 희생으로 파괴하고 인간만세를 외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가 익어서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지면 공포와 경악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운 때에 전 우주적인 변동의 때에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고 오십니다. 산자는 생명의 부활로 죽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다 산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죽었다고 해서 다 죽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산 자 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한 단어로 말하면 그 피로 인한 것입니다. 그 피 안에서 산자로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구역예배 때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암송 중에 있을 텐데 그 말씀을 보면서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목사님의 설교하는 내용이 여기에 다 들어있구나 하는 분도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무엇이 참된 복이겠습니까? 신령한 복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자입니다. 아무리 살았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주님 보실 때는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28절을 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합니다. 너희 구속이 가까웠다고 합니다. 우리의 구속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난리 소문을 들을 때마다 역시 이 세상은 영원한 곳이 되지 못하구나! 영원한 안전지대는 없구나 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교통사고 소식을 들을 때도, 누가 아파서 입원하였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도, 자연재해의 소식을 들을 때도 우리의 살길을 찾기 위하여 주변을 두리번 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고개를 들 때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의 초림부터 고개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도 난리와 난리의 소문은 들렸습니다. 어디가 안전할 까? 선진국은 안전할까? 우주선을 타고 나가면 안전할까? 결코 지상에서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도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고개를 들 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천년 전부터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 땅의 것을 사모하며 살지 않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아무리 주변을 돌아보아도 이 세상은 죽을 일만 쌓여있습니다. 어디 생명이라고 할 곳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해맨 후에 고개를 드시겠습니까? 이제는 고개를 들 때입니다. 예수님 오심을 바라볼 때입니다. 
 

 

 

누가복음 21:29-38 인자 앞에 서도록 2008. 4. 20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지난 주 말씀에 머리를 들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 된 인생이 어디에 참된 살길이 있는지를 온갖 방법으로 다 찾아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사람답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까를 지금까지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인간 스스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원초적인 생명에서 끊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에 무엇이 새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유다서 12절의 말씀처럼 죽고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만 헤매고 머리를 들자고 하였습니다. 왜 머리를 들어야 하는가 하면 세상에서 징조가 있습니다. 그 징조의 대표적인 예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던 성전이 파괴되어 버림으로 더 이상 그 어떤 희망도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어떤 시간과 공간의 거룩함이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심판아래 놓여있습니다.

 

 

 

 

요한복음 16:8-11절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이 죄입니다. 의에 대하여서라 함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기에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유일한 의가 아버지께로 가버렸으니 이 세상에는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의 개념과 의의 개념과 심판의 개념이 다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무슨 희망과 꿈과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너질 바벨론인 것입니다.

 

 

 

 

지난주 이 나라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무엇이라고 연설하였는지 보셨습니까? 대한민국의 CEO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한국에 와서 마음껏 사업하도록 여러 가지 규제를 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현재의 경제를 유지하고 더 발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마음껏 사업을 하려면 그들이 한국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가 영어를 배워서 편리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 경쟁력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각 학교를 더욱 경쟁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학부모들은 날만 새면 오늘은 또 무엇을 대비하여야 하는가 하면서 새로운 학원을 찾아 나서야 할 지경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단지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소리라도 들으려고 하면 분초를 다투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왜 하느냐고요? 이것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한마디로 말씀하고 있는데 34절에 생활의 염려라고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염려 때문에 머리를 들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 어떻게 공부시키는지? 유치원부터 어떤 학습지가 좋은지 어느 영어학원이 좋은지 쏟아지는 광고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 주부들이 신문을 왜 보느냐고 하니 학원과 공부에 대한 정보를 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염려가 생활의 염려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한가하게 하늘을 쳐다본다고요! 몽상가 취급받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길 능력이 없으니 스스로를 위로하는 차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나와서 구하는 것도 신의 특별한 능력을 받아서 공부를 잘하게 한다든지 살림이 나아진다든지 하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또 새로운 정보를 챙겨서 우리 자녀들에게 도움이 될까를 찾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도움을 주기 위하여 교회에서 각종 공부방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믿지 않는 부모들도 교회로 아이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으로 사십니까? 예루살렘이 망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거룩함도 의도 생명도 없는 곳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생명만 바라볼 뿐입니다. 이 지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의에 이르거나 생명에 이를 길이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길 외에는 달리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라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2천 년 전에 그렇게 말씀하시고서 왜 아직 오지 않으시는가 하실 것입니다.

 

 

 

 

29절을 봅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이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자연히 아는 것처럼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일들이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입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쟁의 소식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면 이 세상이 다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라고 하니 그 당시의 세대로 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를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한 과정에 택한 백성들의 구원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많으신 능력으로 왜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전능한 신이 살아있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종교로 인하여 세상의 얼마나 엄청난 전쟁이 일어나고 문제가 많은가 그러므로 신이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신이 없다고 하는 책을 지은 사람이 세계 최고 지성에 속하는 사람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태복음 5:17-18절입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보다 율법의 한 점과 한 획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율법 한 점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모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율법이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의 선지자들에 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그 율법을 어디에서 다 이루셨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 이루심은 율법의 모든 저주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다 이루심입니까? 그러므로 지금도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진선미를 추구하여 나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믿지 않는 행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이 자신들의 어떤 행함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3:10절의 말씀처럼 다시 율법의 저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피조물은 무엇을 바라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더 이상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장망성임을 알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두 번째 다 이루셔야 하실 일이 무엇인지 봅니다. 오늘본문 33절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방금 본 마태복음의 율법의 일점일획도 천지가 없어지지 전에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몸으로 오시기 전에 주신 말씀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이루어질 내용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먼저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다 이루심은 과거의 율법의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다 이루시는 것도 되지만 장차 이루어질 일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아니 장차 이루어질 일은 미래형으로 말해야 하는데 왜 완료형으로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묵시와 역사의 차이성입니다. 우리는 천년 이천년 이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묵시세계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의 길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금요일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이 땅에 현재 이루어지고 있고 장차 이루어질 일이지만 사도요한은 이미 하늘의 묵시를 보았습니다. 즉 하늘에서는 이미 완료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뜻이 이제 이 땅에도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나라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모습 사 11장 새벽기도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일 가운데 아직 우리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또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말씀대로 다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증인이 되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대로 복음이 지금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땅 끝은 어디입니까? 시작점이 끝 지점이 됩니다. 그러니 이제 다 되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다 불러내시면 그제야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예수님의 재림이 이 세상의 끝 지점입니다.

 

 

 

 

다시 33절을 봅시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예수님의 말씀은 다 이루어진다고 하신 이 말씀대로 하나도 빈틈없이 착착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이 종말의 시대에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복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 말씀대로 이 세상에 무너질 것이며 주님의 영원한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보다 더 귀중한 것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는 예수님의 말씀의 관심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성경 볼 시간이 없지요! 설교시간에 졸음만 오지요!

 

 

 

 

왜 그렇습니까? 34-36절입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기에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상관이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다 방탕함이며 술 취함인 것입니다. 바벨론의 음녀의 손에 포도주 잔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마시고 세상이 취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영광과 사치가 가득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잔에 취하여 있으니 말씀의 관심보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살아남을까를 염려하는 생활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져서 예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죽이 두꺼워져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마음 가죽을 베라고 합니다. 묵은 밭을 기경하라고 합니다. 생활의 염려로 굳어져 있는 마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수술되어 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덫이란 새를 잡기 위한 그물입니다. 갑자기 휙 내려치는 것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모이만 주워 먹다가 잡히는 것입니다. 고개를 들고 있었다면 그물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어 주님 오시는 그날에 그 인자 앞에서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22:1-23 유월절과 새 언약 2008. 4. 27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5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12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13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우리가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내가 사는 것은 오직 이것을 위하여 산다는 그런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까? 밥을 먹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오직 그 목표를 위한다는 그런 목표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표가 그때 그때마다 다릅니다. 아이 때 다르고 청년 때에 다릅니다. 늙어서는 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목표를 설정하였지만 계속하여 수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단 한 번도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잊어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앉으셨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갔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물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여 잡수시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내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4:34).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율법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실패의 현장이 십자가인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또다시 확인하려고 합니다.

 

 

 

 

우선 21:37-38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쉬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주목받은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증거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22:1-2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 자기들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빼앗길 것으로 염려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먹고사는 근거가 되는 성전을 파괴해 버리라는 예수님을 가만히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방책을 세우는데 뾰족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공개적인 장소에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가면 많은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데모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래서 작전을 세운 것이 유월절을 지나서 처치하려고 하였습니다(마26:5).

 

 

 

 

그러나 바로 이때 예수님의 12제자중의 한 사람인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22:3-6절을 봅니다. 사단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갑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합니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누가 기뻐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팔아넘기면서 기뻐하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하여 무리가 없을 때를 기다립니다. 22:7절입니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 것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하여 오늘 처음 듣는 분도 몇 분계시기에 좀 상세하게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대절기가 있습니다. 최고의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을 기준으로 칠칠절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언제부터 지켰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되던 그 해부터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당시로 계산하면 무려 1천 4백년을 지켜온 전통입니다.

 

 

 

 

이 절기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유월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바로왕이 쉽게 내어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자기들의 재산인 노예들, 그것도 400년을 넘게 부려먹은 종들을 쉽게 내어 놓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부할수록 재앙은 점점 더 심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사람의 장자만이 아니라 짐승의 처음 태어난 수컷도 죽임을 당하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일 년 된 수컷 중에서 흠 없는 어린 양을 취하여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 피는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불에 구워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을 때에 신발을 신고 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은 채 급히 먹으라고 합니다. 그날 밤에 애굽에서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천사가 애굽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처음 태어난 사람이나 처음 태어난 짐승의 수컷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은 천사가 그냥 넘어갔기에 유월입니다.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이 유월절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시작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우려면 이 어린 양의 피의 능력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 어린 양의 능력이 아닌 말과 병거의 힘을 의지하면 그것은 오히려 망하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을 기점으로 달력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기존의 달력이 3월 달이라면 이 유월절을 기점으로 첫 해로 삼은 것입니다. 우리가 광복 몇 주년 그렇게 하듯이 새로운 달력까지 만든 것이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도 이 절기를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을 체포하면 민란이 일어날까봐 두려워서 명절이 끝나고 잡아서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그러나 유월절에 예수님이 잡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렇게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책임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하면서 만사가 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의 책임이 없다고 항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항변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어떤 그릇을 빗든지 그것은 주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룟 유다는 진노의 그릇으로 쓰임을 받는데 그 특징은 드러납니다. 그 특징이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배반한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넣으면 예수님께서 무언가 기적적인 일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였다는 말도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도적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2:1-8절입니다. “봉독” 마리아가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 머리털로 발을 씻깁니다. 향유 냄새가 그 집에 가득하게 되었는데 이때 가룟 유다가 말하기를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다가 도적이라서 돈 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가기 위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재무부 장관이라도 해서 더 챙길 텐데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이야기만 하시니 은 30십이라도 받고 팔아넘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사단이 들어간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돈 사이에 어느 편을 사랑합니까?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7-10절입니다. “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도 부하려 하기에 돈을 사랑합니다. 그 결과는 침륜과 멸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자유로운 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다 예수님을 팔아먹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처럼 저주 받아 죽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인생이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인정하신다면, 오늘날 그런 저주를 받지 않고 자기 죄를 알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며 기적인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나온 유월절 밤에 오직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만 죽음의 천사가 넘어간 것입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선한지 악한지를 묻지 않습니다. 어떤 가문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만 보고서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의를 자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나온 의가 아닌 새로운 의가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7-20절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함께 있습니다. 유월절에 급히 나오느라고 발효되지 않은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에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떡을 양 고기와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고 해서 무교절인데 일주일간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을 준비하려면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유월절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에 장소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준비할 까요? 예수님께서 지시하십니다. 성에 들어가면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라고 합니다. 그 집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만찬을 행할 때에 예수님께서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들은 몇 번의 유월절을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을 끝으로 다시는 제자들과 함께 먹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정적입니다. 이 유월절이 하늘나라에서 이루기까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땅에서의 유월절의 완성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잔을 네 번 나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6:6-7절을 봅니다. “봉독” 애굽의 무거운 짐에서 빼내고 고역에서 건지며 큰 재앙으로 구속하고 자기 백성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의 완성인 새 언약인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무거운 집에서 빼내고 그 고역에서 건지며 구속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시는 그 놀라운 은혜가 예수님의 피로 된 새 언약 안에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통째로 받고 사는 것이,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는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그 언약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4-38 섬김을 받는 나라 2008. 5. 4

 

24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다가 이 속담이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 죽는 줄 모르고 팥죽 먹기에 힘쓴다!’ 저의 모친이 자주 쓰던 속담이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이 속담은 먹는 문제를 속담으로 한 여러 유형 중의 하나라고 어느 학자가 분석을 하였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듯이 초상난 집에서도 사람 죽은 것은 쳐주지도 안하고 팥죽 들어오는 것만 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먹는 문제만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서 행동하는 모든 일에도 이 속담은 사용된다고 봅니다.

 

 

 

 

지금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속담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죄인 된 인간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산들 다 자기 생각밖에 못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살을 주시고 자신의 피를 주셔서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을 거저 누가 높은가를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최후의 만찬 전에 예수님께서 종처럼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을 봅니다. 또 저희 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 라고 하는 것은 전에도 그랬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 누가 크냐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또 누가 서로 크냐는 것은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비장한 각오를 하시는 것을 그들이 어느 정도는 감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곧 임금이 되실 텐데 그러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느냐고 다투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이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은인(恩人)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군주와 로마 황제와 신들에 대하여 사용되던 호칭이라고 합니다. 은인에게 후원을 받는 자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찬양해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주고 받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부한다고 은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1-9절을 보시면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고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이방의 총독에게 대제사장이 변호사를 사서 바울을 고소하면서 하는 말이 이런 모양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친일하는 사람들처럼, 미군정에 아부한 사람들처럼, 독재 정권 때에 용안이라고 말한 사람들처럼 아부하는 것입니다. 그 고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바울은 염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류독감 이나 광우병처럼 전염병이라는 것입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이단의 교주는 누구입니까?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전하면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놈이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은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한 사람이기에 잡아서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울을 제대로 보기는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어제 금요일 성경공부를 마치고 희란씨와 교제를 하였습니다. 한나에 대한 설교를 듣고서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였기에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였을 텐데 왜 그렇게 늦게 주셨을까? 그것은 자식을 포기할 때 까지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주신다는 응답을 받고 근심이 없었고 또 낳은 후 그 서원대로 성전에 바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축구의 비유를 하였는데 실력이 좋은 팀일수록 공을 가지는 시간이 짧다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는 선수나 팀은 공을 오래가지고 있다가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얼른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실력 있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나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한나는 선지자입니다. 그가 사무엘을 성전에 바치고 기도한 내용이 예언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유지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자식 있다고 힘 있다고 없는 자들을 괄시하는 그런 세상은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2장에서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띤다고 합니다. 전에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찬양의 내용이 마리아에게 연결됩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서 부르는 노래가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몇 절 만 다시 봅니다.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세상을 뒤집어엎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성전에서 뒤집어 엎으신 것입니다. 성전이 뒤집어 엎을 곳이라면 온 세상이 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전하는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뒤집어엎는 염병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집권자들과 권세를 가진 자들의 배후를 이 세상의 신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이라고 합니다. 근원적으로 뒤집어엎을 이유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고 있습니다.

 

 

 

 

어떻게 속고 있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2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이 말씀이 정상적으로 들립니까? 이상하게 들립니까? 아주 정상적인 말씀 아닙니까? 아니 세상에 임금이 되고 집권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지 언제 섬기려고 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말이야 섬긴다고 합니다. 국민의 머슴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주인보다 잘 사는 머슴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거짓말을 해도 유분수지! 세상의 정치라는 것이 무엇을 위한 정치입니까? 정치의 제일 된 목적 자체가 정권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온갖 거짓말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권을 차지하면 국민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그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나라 질서와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는 정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세상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26-27절입니다. 세상은 오늘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큽니까? 서서 섬기는 자가 큽니까? 앉아서 먹는 자가 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섬기신 것입니까?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신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면서 섬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시고 사람보다 낮은 종의 모습으로 섬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28-30절에 보면 보좌에 앉아 다스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고생한 제자들이 나중에 보좌에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다스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그렇게 다스림이 세상의 다스림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전혀 다른 것입니다. 29절을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라를 예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어떻게 다스리신 것입니까? 섬기신 것입니다. 그 섬기심이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도 맡기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직분도 예수님 같이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 곳이라면 천국을 조금이라도 맛을 보겠지요!

 

 

 

 

그래도 3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고 마시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다스린다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21:13-14절입니다.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새 예루살렘의 성곽의 기초석이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성의 기초가 된 사람들이 사도들입니다. 섬겨서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기초가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기존의 세상이 다 무너지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섬김을 받은 자들이 사는 곳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나라와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세상의 임금들이 다스릴 때에 어떻게 다스립니까? 임금 하나를 위하여 모든 백성이 다 희생되어도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거대한 궁궐들이 누구의 피땀으로 세워지는 것입니까? 거대한 성벽이 누구의 피와 땀입니까? 가난한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그 틈새에서 무기장사하고, 양식 장사하고, 군수품 몰래 빼돌려 사욕을 채워간 것이 이 땅의 권력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피와 땀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도 이렇게 희생하여 간 것입니다. 그 사도들의 복음을 들은 오늘 우리도 그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는 벌써 겁을 냅니다. 나는 그렇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나도 그렇게 가겠다고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31-32절입니다. 베드로의 원래이름이 시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반석이 아니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까불리는 존재가 시몬인 것입니다. 베드로를 마귀가 마음대로 흔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대신 기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로 반석이 되는 것이지 스스로 반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기에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 자존심이 상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같이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부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가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처럼 목숨을 바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지시고 나머지를 맡겨두신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영원히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35-45 아버지의 원대로 2008. 5. 11

 

35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38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가 되어있기에 기록된 말씀을 다 이루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 이루심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전대와 주머니와 검을 준비하라는 말씀과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먼저 35-3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전대나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고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검이 두 개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만하면 족하다고 합니다. 다른 것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검을 준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49-51절을 보시면 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26:52-54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는데 왜 검을 가지게 하셨습니까? 성경을 이루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께 기도하여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지만 그러면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검을 준비하라고 하신 말씀은 37절 말씀에 불법자의 동류라고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무죄한 자가 죽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불법자라는 말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무죄한 분이 죽으셨다고 알고 믿는데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법이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죄를 만들어서라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독재정권 때에 정권을 유지하고자 많은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감옥에 가두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간첩행위에 대한 증거물이 있어야 하기에 일부러 증거물을 그 사람의 집에다가 갖다놓고서 간첩으로 모는 것입니다.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 자들도 죄도 없는 분을 죽일 수는 없으니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예수님의 처형을 로마를 반역하는 무리를 처형하는 정도로 취급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3:1-2절에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죄목을 봅니다.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이러한 고소의 내용은 한마디로 로마를 반역하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검을 가지라고 한 것은 불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 죽었다는 말을 들어야 할 텐데 왜 스스로 불법자의 동류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53:10-12절입니다. “봉독” 12절에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합니다. 범죄자 중의 하나로 헤아림은 입었다는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예수님은 검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이사야 52:13절부터 53:12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봉독”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모양도 풍채도 없기에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싫어버린 바 되었고 간고를 많이 격고 질고를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4절을 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지만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난당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수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범죄자 중의 한 사람이 처형된 것으로 보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신 길이 대속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원하신 것이며 그 원하시는 뜻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39-46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니 제자들도 좇았습니다. 감람산은 감람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이름붙인 것입니다. 이곳을 또 겟세마네라고 하는데 그것은 ‘기름 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짜는 곳이 그곳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곳에서 자주 노숙을 하신 것입니다. 그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도하셨는지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봅니다. 5:16절입니다. 그 바쁘신 중에도 한적한 곳에 물러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6:12절입니다.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9:28절에서 기도하러 산에 가십니다. 여기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십니다. 11:1절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기를 마치시매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18:1절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늘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알고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도 기도를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저 내 소원 말해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나 구하면 준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일어나 버리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하실까봐서 얼른 결재도장 찍듯이 예수님의 이름만 붙여버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대로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무슨 기도입니까!

 

 

 

 

예수님의 기도를 봅니다. 42절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압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 인줄 압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라는 잔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인지 예수님이 잘 아시기에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옮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잔이란 십자가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잔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축복이고 하나는 진노의 잔입니다. 축복의 잔은 시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또는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라고 합니다(시16:4). 그러나 진노와 저주의 잔도 있습니다(시11:6, 75:8). 이런 잔들은 악인이 마시는 잔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의 음녀로 온 세상이 취하게 되었다는 그런 잔이 진노의 잔입니다. 악인이 마셔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예수님께서 대신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내용을 보았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버림 받으심을 통하여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는 그 잔을 예수님이 마셔야 하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예수님만이 가장 바르고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되어 있기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죽어있는 것입니다. 신경이 마비되면 신체를 잘라내어도 아무런 고통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고통이 없는 것입니다. 돈 떨어지는 고통은 알지만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외면하시는 고통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육체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아 버림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축복이 민수기 6:24-26절입니다. “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두 번이나 반복되는 축복의 내용이 여호와께서 그 얼굴로 비취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는 무엇이겠습니까? 외면입니다.

 

 

 

 

오늘 우리의 복과 저주는 무엇이라고 여기며 삽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하여 보시는 것이 복이며 얼굴을 외면하는 것이 저주임을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저주임을 아십니까? 시편 104편 29절에서 바다 속의 물고기들조차 하나님께서 낯을 숨겨버리면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시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낯을 숨겨버리든 말든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이요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는지 44절을 봅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된 것입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듯이 땀을 흘리며 기도하십니다. 그야말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후에 제자들에게 가보니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세 번이나 깨워도 세 번이나 자고 있었습니다. 천사들만 예수님을 돕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슬픔을 인하여 잠들었다고 합니다. 슬픔을 인하여 잠들었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애들이 많이 혼나고 울고 나면 진이 빠져 잠들어 버리는 것처럼 제자들도 슬프기는 하였지만 육체가 연약하여 오는 잠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옥에 가면 자신들도 옥에 가고 죽는 자리에도 함께 가겠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한 시간도 깨어서 기도할 수도 없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그들이 믿음을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부르짖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부르짖음에도 끝내 외면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자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예수님의 기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의 버려짐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의 대신 저주 받음이 우리의 나음이 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날마다 더 풍성하게 알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22:47-62 주께서 돌이켜 보시니 2008. 5. 18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오늘 말씀은 두 사람이 예수님을 배신하는 내용입니다. 두 사람 다 예수님의 12제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가룟 유다이고 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먼저 가룟 유다의 배신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천국 복음을 전하고 기적도 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능력도 있어서 돈 주머니를 관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대로 가룟 유다는 도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도 도적의 심보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불러서 제자를 삼으셨지만 제자 중에 이런 자를 택하시고 사용하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룟 유다의 도적의 속성이 사실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입니다. 도적질이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 도적질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에 다른 것들을 노리고 따라가는 것은 다 도적의 심보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12제자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누가 서로 높으냐고 자리다툼하면서 따라가는 그런 모습이 도적의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을 하고서도 여전히 자기들이 주인이 되어서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이만큼 수고하였으니 이런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다니다가는 함께 죽는 길 뿐임을 유다가 제일먼저 눈치 채고서는 미리 배신하여 팔아버린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런 생각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끝까지 가보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기대한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력하게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돈이 안 되는 사람을 왜 따라나서는 것입니까? 돈이 안 되면 고상한 명예라도 주어져야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어느 바보가 그런 길을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 잡히실 때에 다 도망 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설 때에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25-33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조차 미워하여야만 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계산해 보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그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고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망대를 세우거나 전쟁을 할 때에 미리 헤아려 보고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실력도 모르면서 덤벼들었다가 망신만 당하고 전쟁에서는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자기의 목숨마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무엇을 주시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그것이 창조주에 대한 마땅한 피조물의 자세인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런 믿음이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이런 믿음의 일을 이루어 내셨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시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도 결국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계속 믿고 따라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계산을 해보고서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고 말입니다. 갈수록 예수 믿는 것은 세상에서 손해만 보게 되는 삶이 될 것이니 지금 그만두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현명한 것입니다. 괜히 30년 50년 믿어도 괜한 짓을 했구나! 이런 후회를 하시기 전에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제자들은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기 직전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입맞춤으로 팔아버립니다.

 

 

 

 

유대인들의 입맞춤은 존경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인사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배신의 입맞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가룟 유다의 속을 아시는 주님께서 가룟 유다의 인사를 그렇게 아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처럼 사람의 속생각을 안다면 부부지간이라도 원수 되었을 것입니다. 잠언 22:23-25절입니다. “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24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25 그 말이 좋을찌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흔히 복선을 깐다고 하는데 여기서 일곱 가지라고 합니다. 끝도 없는 것입니다.

 

 

 

 

소고기 수입협정하면서 양 대표가 웃으며 악수하는 뉴스 보셨지요! 그 웃음 뒤에 광우병 위험물질이 들어있는 소의 부위를 수출하려는 속임이 들어있었는데 미국을 너무 믿었습니다. 실무자가 미국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믿음의 교육을 잘못 받았습니다. 성경을 모른다고 하여도 우리 선배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은 믿지 말고, 일본은 일어난다, 조선은 조심하라!’ 명언이지요! 사람의 속에 일곱 가지의 가증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스승을 입맞춤으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49-53절입니다. 가룟 유다의 입맞춤이 사인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다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날려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면서 그 귀를 붙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잡히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에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는 왜 잡지 못하였느냐? 그때에는 백성들을 두려워하였지요!

 

 

 

 

그러나 그보다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고 예수님이 잡히시는 것은 그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어둠의 권세의 마지막 발악인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면 그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오히려 영원한 패배가 될 줄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어둠의 권세가 발악을 하는 그날 밤에 그토록 예수님을 앞장서서 따르기를 원하였던 베드로, 감옥에도 같이 가고 죽음도 함께 하겠다고 장담한 베드로를 봅시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 가버렸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신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따라 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18:15-18절을 보면 예수님의 다른 한 제자가 있었는데 그를 요한으로 봅니다. 이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먼저 들어갔는데 베드로는 그 집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자 이 제자가 문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옵니다. 그러자 그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이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멀찍이 따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였겠지요! 한 밤이니 추워서 불을 피웠는데 베드로가 거기에 끼어들은 것입니다. 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 얼굴이 더 잘 보였겠지요! 한 여종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한 여종의 말에 베드로가 부인합니다.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너도 그 당이라고 하자 역시 부인합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며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갈릴리 사람인줄 알아봅니까? 갈릴리 사투리가 나온 것입니다. 황산벌이라는 영화를 보면 백제의 간첩이 신라의 진중에 변장하고 들어옵니다. 물론 경상도 사투리를 배워서 왔지만 놀라는 순간에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말하니 그 억양이 갈릴리 사투리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렇게 세 번 부인하는 것을 마태복음에 보면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까지 부인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보고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시겠습니까? 저는 전혀 왜 그렇게 부인하느냐고 말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제자라고 시인을 하면 함께 잡혀 죽을 것입니다. 그런 위협 속에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 표현이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다른 모든 생각과 기억들을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죽음의 위협은커녕 아주 사소한 주차문제로 죽을 듯이 다툽니다. 정말 별것 아닌 사소한 이익 앞에서 예수님이 눈에 들어옵니까? 예수님을 모른 척 해야만 이익이 생기는 현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살아갑니까? 이런 모습은 세상에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인 교회에서조차 조금이라도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은 못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왜 다른 사람보다 더 희생을 해야 되느냐고? 저 사람은 나보다 능력이 많고 시간도 많은데도 이정도만 봉사하는데 나는 거기에 비하면 많이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베드로 욕할 것이 전혀 못 된다는 것입니다.

 

 

 

 

60-62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자 말자 닭이 세 번 웁니다. 이날에 새벽닭들은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닭들이 새벽에 우는 것은 거의 일정하지만 그러나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일정하지가 않았습니다. 조금 먼저 우는 닭이 있고 나중에 우는 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그 예루살렘 동네의 모든 닭들이 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때 까지 울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닭이 울어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닭의 울음소리만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닭과 오리들이 수백만 마리가 도살되면서 울어 댄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한 자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알게 됩니까? 61절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그제야 베드로가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그렇다면 내가 제자라고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밖에 나가서 통곡할 뿐입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둘 다 예수님을 배신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은 30을 받고 입맞춤으로 배신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함께 죽겠다는 각오를 하였지만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자살하고 한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눈길에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의 축복은 얼굴을 향하여 보시는 것입니다. 외면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돌이켜 보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고 닭이 울었을 때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눈으로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김남주의 시에 안치환이 곡을 붙이 ‘돌멩이 하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조금만 인용합니다. ‘숨이 막히고 가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난 둑길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네, 돌멩이 하나 강물 위에 파문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금새 사라지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그 때 난 묻지 않았네 친구여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가 그 얼마일거냐고 그 얼마일거냐고 친구여 나 묻지 않았네’ 2절은 불씨로 비유해서 말합니다. 그 끝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죽음 하나 같이 할 벗 하나 있음에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네 벗 하나 있음에 벗 하나 있음에 워워~워워~’ 이런 시와 노래입니다. 작은 돌멩이 하나 작은 불씨하나 그것이 미미하겠지만 그러나 자랑스러운 것은 그런 미미한 일에 죽음을 같이 할 벗 하나 얻었다는 것이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3년을 합숙훈련하면서 제자를 삼으셨건만 죽음을 같이 할 벗 하나 얻지 못하셨습니다. 감람산 깊은 밤중에, 감람유 기름 짜는 곳에서 감람열매가 으깨어져 기름이 흘러나오듯이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처절하게 기도하셨건만 그 사랑받던 제자들은 한 시간도 함께 기도조차 하지 못하고 슬픔에 겨워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런 제자를 예수님께서 돌이켜 보셨습니다. 저는 이 눈동자가 어떠하였을까를 생각하다가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팔려가는 소의 눈동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골에서 소는 가족과 같으며 아주 중요한 재산입니다. 쟁기를 끌며 농사를 다 짓고 먹는 것이라고는 설거지 하고 남은 밥풀이나 콩나물 몇 가닥도 아까워서 모았다가 소죽을 끓이는 국물로 쓰고 풀과 짚을 썰어 넣고 등겨를 넣어 끓인 소죽을 먹고 자란 순 하디 순한 누렁소가 팔려 가면 소가 팔려가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고삐를 새것으로 바꾸어서 새벽 일찍 우시장으로 끌려가는 그 소가 눈에 눈물이 글썽하며 자꾸만 자기 우리를 뒤돌아보는 그 장면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어떻게 감히 비교가 되겠습니까만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로 가시면서 그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향하여 보신 그 예수님의 눈길이 날마다 주님을 배반하고 사는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누가복음 22:63-71 내가 그니라 2008. 5. 24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우고 물어 가로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71 저희가 가로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심문을 받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하여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시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8:5-11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을 잡으려고 온 사람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내로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잡으러 온 사람에게 내가 그라고 하시자 물러가 땅에 엎드려질 정도의 말씀의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잡히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인데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게 하시는 것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잡히신 예수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집에 끌려갑니다. 현직 대제사장은 자신의 사위인 가야바입니다. 그런데도 먼저 안나스에게 간 것은 로마의 정책에 따라 제사장직을 물려주었지만 여전히 막후실력자인 것입니다. 이곳에서 밤새 잡아 두었다가 날이 새는 대로 가야바에게 가서 정식 심문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공의회는 낮에 열려야 하기에 날이 새는 대로 심문을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밤새 붙잡혀 계시는 것과 정식 심문을 받는 것을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63-65절입니다. 예수님을 감람산에서 잡아와서 밤새 지키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을 때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돌이켜 보시자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이 나서 그 집을 빠져나와 통곡하였습니다. 그 깊은 밤부터 날이 새도록 성전의 군관들이 예수님을 지키고 있는데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온갖 희롱을 다합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때리고서는 네가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맞추어 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도 때립니다. 이외에도 많은 말로 욕합니다.

 

 

 

 

이런 희롱을 받는 분이 누구십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왜 그를 그렇게 대접하였습니까? 한때는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세상의 임금이 되시고자 가신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라는 쓴 잔을 마시기 위하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받던 제자들조차 다 배신하며 돌아서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이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신앙하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무엇을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신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사도는 곧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된 성경의 말씀은 곧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고 바란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과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면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교회로 오고 싶겠습니까?

 

 

 

 

그러므로 2천 년 전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희롱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이나 오늘이나 간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고자 하시는지를 제대로 알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날 것이라고 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 버린 것처럼, 수많은 대중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른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 십자가의 자리에 우리도 함께 못이 박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들이 결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63절입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를 그 공회에 끌어들였습니다. 이 공회란 “예수님 당시 유다 공동체의 최고 관청인데 그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공회(산헤드린, 마5:22 등)는 가장 유력한 제사장들('대제사장들')과 지도적인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명망 있는 평신도들의 무리들을 대표하는 71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졌다. 로마 사람들은 공회의 세속적인 전권은 제한했으나 종교적인 결정에 있어서는 그 권위를 인정했다(독일성서공회 주석 용어해설).” 이 공의회에서 죄목을 정하여 빌라도에게 사형을 청구하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재판은 하지만 사형권한은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죄목으로 삼기 위한 질문이 네가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그리스도란 정치적인 구원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로마를 반역하는 세력이 되기에 로마법정에 고소하여 사형시키고자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지금까지 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알리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기에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 때처럼 세상의 임금을 삼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기 제자들에게는 알리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냐고 물으실 때에 여러 대답들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심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이 네가 그리스도냐고 묻는 것은 정치범으로 몰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봅니다. 67-68절입니다. 내가 말할 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속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여도 그들이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환전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장사하는 사람들 쫒아내어 버립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함께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고 하시면서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들이 답변을 못합니다. 하늘로서 라고 하면 왜 그가 증거 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라고 하면 백성들이 다 요한을 선지자로 알기에 그들이 돌에 맞을 것이기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도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최종 심문에서 다시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말합니다. 인자란 말 그대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풀어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그대로 인자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인자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스겔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인자인데 이 인자란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고난 받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는 그 인자가 심판 주와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신 것은 이러한 구약의 인자를 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고난당하는 인자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시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자되심을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한 것입니까? 이 지상에서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서 적을 물리치고 자기들만이 최고의 나라가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 도저히 그럴 것 같은 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신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여러 가지 표적과 기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몰고 다니면서 하는 짓이라고는 그들이 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유지시켜 주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제일로 잘 섬기며 유대사회를 위한다고 여겼는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거침없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아비를 마귀라고 몰아 부친 것입니다. 가만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기로 결정하고 심문을 하여 자백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69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에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왜 자신을 인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래야 십자가에 처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고 하시자 당장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님께서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라는 말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이 이름을 물었을 때에 ‘나는 나다(I am who I am)’고 답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내가 그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You are right in saying I am). (NIV Lk Chapter 22). 예수님께서 내가 그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인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의 주로 등극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내가 그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권세가 있습니까? 인자가 된 그 능력, 이 세상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으로 여기며 그래서 사형 받아 마땅하고 또한 그런 자를 세상의 임금이 되려고 하는 자라고 정치적인 죄목으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와 계십니까? 어떤 예수님을 신앙하십니까? 여러분 곁에 계시는 분이 십자가를 지신 모습으로 오셔서 내가 그라고 하십니다. 피하고 싶으십니까? 환영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주변에 누가 서 있기를 바랍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시지 않으시고 영광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그때 이미

심판을 받아 죽었을 것입니다.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모습으로 증거 됩니다. 빌립보서 2:5-11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오늘도 우리에게 내가 그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23:1-12 공동의 적 2008. 6. 1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금요일 성경공부 하면서 지난 주 설교제목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명이 겨우 대답을 하였습니다. 제목이 무엇이었지요? ‘내가 그니라’ 더 줄이면 ‘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그라고 하시는 말씀에 유대인의 공의회에서는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이것이 죽어 마땅한 죄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 된다는 것이기에 신성모독죄에 해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내가 그로라고 하신 답변에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지나가시는 중에 사마리아를 지나가십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개같이 취급하기에 다른 길로 돌아서 가는데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마을의 한 우물가에 피곤하여 앉으셨습니다. 시간은 낮 12시쯤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마을로 들어갔을 때에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물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구하였을 것이며 내가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우물을 깊고 당신은 두레박도 없는데 어떻게 물을 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 우물을 우리 조상 야곱이 판 것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 예수님께서 이 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그런 물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서 물 길러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합니다.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다고 합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고 하였습니다. 여자가 깜짝 놀랍니다. 낯선 사람이 자기의 과거를 다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사마리아 산이라고 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는데 어디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인데 바로 이때라고 합니다.

 

 

 

 

비록 이 여인이 비참한 가운데 다른 남자들을 전전하면서 살아야하는 그런 신세이지만, 동네사람들이 부끄러워서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는 한낮에 물 길러 와야 하는 여인이지만 어느 누구보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요한복음 4:25절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물동이도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아는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동네사람들에게 와보라고 합니다. 이런 기분을 아시겠습니까? 정말 그리스도를 만나면 자기의 과거의 모든 부끄러움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사실에 물동이조차 버려두고 와보라고 달려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본대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주축이 되어 있는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공의회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죽어 마땅한 죄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에 이렇게 두 가지 극명한 대비가 됩니다. 그런데 이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는 공의회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죽이려면 로마의 재판을 받아야 하기에 죄목을 바꾸어서 고발을 합니다. 그 죄목이 23:1-2절입니다. 세 가지로 고소하는데 첫째가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를 전복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선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정부를 흔들기 위하여 괴담을 조직적으로 흘려보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로마에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하여 올무에 걸려 했을 때에 예수님의 답변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제 3의 답변을 하심으로 그들이 할 말이 없었던 내용인데 이것을 모함하여 거짓으로 고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심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마치 내가 그로라고 하신 답변과 같은 답변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들은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런 답변을 했을까요?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속성을 잘 압니다. 그들이 로마를 반역하는 자를 넘겨줄 리가 없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 하여도 단 한 시간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해방을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임을 잘 압니다. 그런데 예수를 넘기면서 로마를 반역하는 자라는 죄목이 그들의 시기심으로 인한 것임을 압니다. 또한 예수님을 보니 전혀 정치적인 반역을 일삼은 자가 아님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죄가 없다고 해 버립니다.

지금 공의회에서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하여 또 다른 히든카드가 있는데 그것은 민심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유월절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몰려와 있습니다. 적어도 백만에서 많게는 이백만까지 모인다는 그 절기에 민란이 일어나면 총독이 문책을 받기에 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을 유지하고자 예루살렘에 와 있는 것입니다. 평소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는데 유월절이라서 예루살렘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기 위하여 예수를 풀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고소하는 사람들이 더욱 굳세게 말합니다.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한다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소동을 일으켰다면 빌라도의 첩보망에 의하여 이미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도는 정치적인 소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고소하는 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처형하려고 빌라도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마침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분봉왕인 헤롯도 유월절이라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는 것을 알고 헤롯에게로 보냅니다. 골치 아픈 사건을 다른 관할지로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합니다. 왜 기뻐하였을까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기에 한번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헤롯은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죽고 나서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에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는가 하면서 두려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예수를 만나게 되자 무슨 이적을 행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헤롯에 여러 말로 물으나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답변을 하지 않으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여기서도 힘써 고소합니다. 헤롯이 아무리 물어도 예수님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였습니다. 소문에 무언가 있는 사람인줄 알고서 직접 만나보니 너무나 초라한 몰골입니다. 이미 대제사장에게 잡혀서 밤새 심문을 받고 얻어맞았습니다. 빌라도의 심문까지 받고 헤롯에게 끌려온 예수님은 로마의 반역자라고 처형할만한 가치도 없는 인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냅니다. 왜 빛난 옷을 입히는 것입니까? 왕들이나 입는 옷을 입혀서 예수도 조롱하고 예수를 왕이 되어 반역하고자 한다고 고소한 유대인들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왜 서로 원수처럼 지냈느냐 하면 헤롯은 유대 땅에서 분봉 왕이 된 사람입니다. 아버지 헤롯이 죽으면서 아들들에게 맡겼는데 그 중에 지금까지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빌라도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으로 왔으니 둘 사이가 껄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심문하는 일로 서로 친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갑자기 친하게 되었다면 그들에게 공동의 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우리 인간들이 그러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갑자기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공동의 적이 생겼을 수가 있습니다. 집안의 형제들이 싸우다가도 다른 집안의 사람과 싸움이 일어나면 형제들의 싸움은 그칠 뿐 아니라 형제들이 똘똘 뭉쳐 다른 집안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경영에도 통하는 것입니다. 국내문제로 시끄러우면 간첩사건 하나 터뜨리면 잠잠해 지는 것입니다. 소고기 문제로 촛불시위하며 시끄러울 때에 이보다 더 심각한 국제간의 문제가 한국에 직면하면 잠잠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까지 원수였던 빌라도와 헤롯이 당일에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공동의 적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세력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것도 똑똑하고 잘났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상위 1프로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공의회에의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참된 하나님을 처형하는 일에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로마를 반역한다고 거짓 고소를 하면서 민심을 선동하여 고소를 하지만 사실 그들이 원한 그리스도가 로마를 둘러엎고 자기들의 나라를 강하게 세우는 그리스도를 기대하였는데 전혀 그렇지 않는 예수를 죽이려고 로마의 힘을 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기다려온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이렇게 죽이려고 하였고 결국 죽인 것입니까? 그들이 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하는 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지자들의 예언을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 껍데기만 보았지 그리스도의 사역이 무엇인지 눈이 가려졌고 귀가 감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나라가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교회로 나오지만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주신다는 약속을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임을, 육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임을,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은 십자가를 제시하면 누가 교회로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을 제대로 전하면 공동의 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전선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신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행전 4:25-28절입니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5)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미 다윗에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합동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거역하고 대적한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 예수님은 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함께 지자고 하시면 적으로 보입니까? 동지로 보입니까?

 

 

 

 

누가복음 23:13-25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2008. 6. 8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 2)(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21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죄목을 만들어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가 사실하여 보아도 그런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고소 중에 그 출신이 갈릴리라고 하니 마침 유월절이라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헤롯도 죽일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조롱만 하고 빌라도에게 다시 보냅니다. 이제 빌라도가 재판할 수밖에 없어서 다시 심문을 하여 보아도 죽일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소한 사람들을 불러서 죄가 없다고 하면서 때려서 놓겠다고 합니다.

아니 죄가 없으면 무죄방면을 해야지 왜 때려서 놓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성난 군중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17절에 보시면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사본에 없기에 그냥 없음이라고 표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본에 보면 명절이 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유대인 최대의 명절에 특별사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와 바라바 중에 누구를 놓을까 물어봅니다. 군중들은 예수를 없이 하고 바라바를 달라고 합니다. 바라바는 어떤 사람인가하면 성중에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자로서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로마에 위협이 되는 인물은 바라바인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는 예수를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바라바보다 더 죽일 정도로 미운 인물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때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까지 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하였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잠시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를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서 현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과 목사들도 한몫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현상유지도 못하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날마다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어 놓는 정책이라고는 계속 가난한 서민들만 고생하게 만드는 정책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소고기 수입문제가 나오면서 지금도 72시간 연속 릴레이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초기에 75%이상의 지지율이 지금은 16%로 떨어지면서 이명박 물러가라는 구호가 난무합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위장전입을 몇 번이나 하여도 상관이 없다. 여러 전과가 있어도 상관없다면서 경제만 살리라고 투표를 하였는데 불과 3개월 만에 이렇게 민심이 돌아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돌아섰겠습니까? 자기 자녀들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 공기업의 민영화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공공요금의 불가피한 인상들을 생각하면서 걱정이 되기에 이런 반대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런 현실적인 예를 드는 것은 우리가 이런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지침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들 각자의 판단대로 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예수님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26-27절입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표적을 보고서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먹고 배부르기 위하여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표적이란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십자가의 표적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양식을 위하여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떡은 썩는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영생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하느냐고 또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6:29절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외울 때에 6.29선언으로 외웁니다. 내일 모래가 6월 10일 민주화 항쟁기념일입니다. 군사독재 정권시절에 호헌을 외쳤습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호헌철폐를 외치고 고문으로 대학생이 죽고 시위 중 최루탄에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항쟁이 일어나자 군사독재정부가 직선제를 하겠다고 항복 선언한 것이 6.29선언입니다. 오늘 정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처형도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정치범으로 몰아 로마의 반역자들이 받는 십자가의 처형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왜 6.29로 외우는 가하면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즉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만 영생을 얻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혁명적인 말씀입니까? 이 당시에 복음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되면서 이런 말씀이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그 믿는 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영생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다고 하면서 다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 나선 수많은 군중들의 필요는 영생의 양식이 아니라 결국 썩는 양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까? 썩는 양식을 위한 것입니까?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한 것입니까? 썩는 양식을 먹고 힘을 얻어 행하는 일들이 결국은 다 썩는 일인 것입니다. 썩는 정치, 썩는 교육, 썩는 종교, 모두가 썩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든 수많은 사람들이 왜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압박을 하였겠습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이 4복음서에 다 나오는데 요한복음 18:33-38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예수를 불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한 말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내가 유대인인줄 아느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이 36-37절입니다.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빌라도도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처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누구만 알아듣는가 하면 진리에 속한 사람들만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현실과 정치를 모른 척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 예수님의 기도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와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권세를 가진 자가 권세 없는 자를 부리는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전혀 다른 질서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노는 나라라고 합니다. 다시는 해함과 상함이 없는 나라라고 합니다. 하루에 12시간 일한 사람이나 1시간 일한 사람이나 같은 품삯을 주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니 아예 일한 것도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살 수 있는 곳,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많은 사람의 화목제물로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런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는 내용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나라의 원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결코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님은 전혀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못 알아보는 것을 말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복음 칼럼난에 진리란 무엇이냐는 그림 평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다른 많은 성화라는 그림을 보면 예수님의 머리 뒤에 후광을 그리고 있습니다만 이 그림은 빌라도가 빛나는 모습이고 예수님은 초라하게 어두움에 갇힌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힘없이 서 있는 예수, 잡히고 고난을 받고 희롱을 당하여도 그대로 다 당하는 예수, 그동안의 기적과 능력들은 다 어디에 두고 형편없는 몰골로 서 있는 그 예수를 누가 진리라고 여기며 따르겠느냐는 것입니다. 로마를 둘러엎고 다윗과 같은 왕국을 세우고 온 세상의 보화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그날,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날을 기다려 왔는데 이제는 능력 있는 그런 메시아가 온줄 알고 따라 다녔더니 세상의 영광은커녕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만 하는 그런 예수는 싫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다 한 목소리로 예수를 이단으로 몰아 죽이려고 하니 그것에 편승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세 번이나 죄가 없으니 때려서 놓겠다고 하여도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면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빌라도를 향하여 군중의 힘으로 압박합니다. 가만히 두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로마의 황제로부터 문책을 받고 지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은 손을 씻지만 그러나 재판관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23절에 보면 저희의 소리가 이겼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소리가 이긴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방인 총독이 살펴보아도 죄가 없다는 분을 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결국 그 소리가 이겨서 십자가에 처형해버리는 것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한 죄 없는 인간을 살해한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분, 유일하게 진리이신 그 분을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한 것은 인간들 속에 신에 대한 살의가 가득하여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그 유혹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정말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인줄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는데 죄인인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 모든 세상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든 모든 사물이든 오직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선으로 보고 자기에게 해가 되면 악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고 하니 하나님이 주신 하와 때문에 그렇다고 한 것입니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해 놓고서는 갑자기 하나님과 아내를 다 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런 속성이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여 가는데도 계속하여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돌로 들어 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원하는 뜻대로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불평과 원망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다툼과 요란함과 분요함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전부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 남의 탓을 끝까지 밀고 나가보면 그런 자를 있게 한 신에 대한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속에 신에 대한 적대감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를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그 외침 속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때 그 나쁜 무리들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다음의 말씀이 현실로 와 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사도행전 2:36-42절입니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3)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고집하는 분이 계시다면 에베소의 말씀을 한 곳만 더 봅시다. 에베소서 2:5-6절입니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누구를 말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그 무리들과 함께 있었던 자들과 똑 같은 우리들, 사도행전 2:39절처럼 먼데 있는 우리들까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은 같은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누가복음23:26-31 너희를 위하여 울라 2008. 6. 15

 

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시다가 한 밤중에 잡히셨습니다. 밤중부터 새벽까지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온갖 조롱을 당하신 후에 빌라도와 헤롯에게까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 동안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손에 갈대 지팡이를 들리고서는 그 앞에서 절하는 시늉을 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채찍질을 하였는데 가죽 끈 끝에 뼈 조각이나 쇠붙이를 붙여서 휘두르면 살점이 찢겨나갑니다. 채찍질만으로도 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중입니다. 이미 탈진상태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란 커다란 나무기둥입니다. 형장에는 수직으로 높이 세우는 나무기둥에 준비되어 있고 죄수는 그곳까지 가로지르는 나무기둥을 짊어지고 가서 그곳에서 옷을 벗기고 눕혀서 손발에 못을 박아 나무기둥을 수직으로 세워서 처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자꾸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너무 심하면 죄수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곁에 한 사람을 잡아 그 십자가를 대신 메고가게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인데 이곳에도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기록한 중에 구레네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몬도 유월절에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제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로마 군인에게 잡힌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이 되었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재수 옴 붙었다고 할 것입니다. 다른 짐을 지는 것도 아니고 처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의 그 피 묻은 나무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로마 군인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 군인은 식민지 사람을 누구나 부역에 동원하여 오리를 짐 지고 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도 동행하라고 하신 것은 이런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거부하면 그보다 더 혹독한 벌을 받을 것이기에 하는 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것입니다.

 

 

 

 

26절을 봅시다.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앞장서시고 뒤에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엉뚱한 시몬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그곳은 지나가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난데없이 십자가를 지고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냥 재수 없는 하루였다고 끝나 버렸겠습니까?

 

 

 

 

성경에서 시몬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시몬의 아들의 이름과 같은 루포라는 이름은 나옵니다. 이 사람이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시몬의 아들인지 모르지만 추측은 해 볼 수 있는데 로마서16:3절에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이 사람이 시몬의 아들이라면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의 사역을 도왔기에 내 어머니라고 할 정도인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재수 없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걸려가지고 교회로 따라 다니다가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거저 가정의 화평을 위하여 억지로 따라 나오다가 십자가가 지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원해서가 아니라 수동적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여러 가지 목적으로 교회를 들락거릴 수 있지만 마치 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님 주변을 지나가다가 그만 잡혀버린 사람처럼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십자가에 붙잡히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볼 때 저주의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그 길만이 영생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복 받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27-28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고서 많은 백성들이 구경삼아 따릅니다. 그 중에 많은 여인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갑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지른 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무리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 우는 그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을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29-31절입니다. 날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날은 예루살렘 심판의 날입니다. 왜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3:34-35절입니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약 40년 후에 이렇게 될 일을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쳐들어와서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며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자식이라도 없으면 오히려 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40년 후에 예루살렘성이 파괴되고 성전이 파괴되면서 처참한 심판을 받습니다.

 

 

 

 

30절을 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지 빨리 죽기를 원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심판에서 숨을 곳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눈에는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이렇게 될 것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 같은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푸른 나무란 살아있는 나무입니다. 마른 나무란 죽은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푸른 나무란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이렇게 취급하고 있는 세상인데 마른 나무야 오죽 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위하여 울 때가 아니라 바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의 온 세상에 임할 심판의 전조에 불과한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심판은 온 세상에 임하는 것입니다.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에 대한 말씀을 오늘 이 시대에 적용하자면 베드로전서 4:17-18절을 보면 됩니다.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하나님께서 어디서부터 심판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사람들의 모임,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교회부터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믿는다는 자들에게 먼저 하신다면 복음을 순종하지 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울어야 하며 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에스겔서 9:3-6절을 봅니다. “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예루살렘성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표가 없는 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긍휼을 베풀지 말고 치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가증한 일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있는 그들입니다. 성전 안에 조차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교회라는 곳이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우상의 단체가 되어버린 것에 대하여 탄식하며 울고 계십니까?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보다 불살라 없어질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하면서 울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 가지지 못하여 울고 있습니까? 지난 금요일 새벽에 사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그렇게 열심을 내던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아나니아가 기도할 때에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성경이 전혀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게 됩니다. 손에서 놓아야 할 것과 영원히 붙잡아 할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는 일에 웃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웃는 일에 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실 까요? 똑 같이 우리를 보시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미얀마의 사이클론과 중국의 대지진과 어제 아침에 일본에서 7.2의 강진이 일어난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흔들리는 이 땅위에 무엇이 영원한 것이 있다고 여기에 목숨을 걸고 삽니까? 세상은 온통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삽니다. 촛불을 드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모두 다 무슨 가치를 전하고자 합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을 향하여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요한계시록 6:12-17절을 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어린 양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서 산과 바위에게 우리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합니다. 땅의 임금, 왕족, 장군, 부자, 강한 자, 종, 자주 자 그 어떤 누구라도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진노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의 멸망이 아니라 온 세상이 심판받을 것인데, 이 날이 곧 가까이 이르렀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웃고 울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23:32-43 나를 생각하소서! 2008. 6. 22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해골처럼 생겼다고 이름 붙여진 골고다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기 위하여 끌려가십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성의 북동쪽에 위치한 가까운 곳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다 보이는 위치입니다. 이곳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이미 많은 채찍질로 인하여 자꾸만 쓰러지니 지나가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갑니다. 이 두 사람은 무슨 악을 행하였는지는 구체적인 죄목은 모르지만 로마시대 때에 십자가의 처형을 받는 사람은 노예와 도둑과 반역자에게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악자란 이런 범죄자 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로마를 반역한 유대독립군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 그대로 도둑이나 강도짓을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의 행렬을 보는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오늘도 어떤 강도나 반역자가 처형당하구나! 그러므로 그 가운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불의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사야 53:12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약 700년 전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를 원하셨고 그는 기꺼이 자기 영혼을 버리신 것입니다.

 

 

 

 

분명히 겉으로 볼 때는 범죄자중의 한 사람으로 헤아림을 입은 것입니다. 범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헤아림을 입기위하여 다른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강도는 좌우편에서 못 박히고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입니다. 범죄자 중 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다는 선지자의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신앙이란 허상이 아니라 실상을 봅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이 말씀도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집니다. 34절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고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눈과 마음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자기들의 행위가 옳은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얼마나 알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모든 일에 자기는 옳다고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하면 틀렸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기독교 사상」이라는 월간지를 보다가 저들이 모르고 있다는 이 말씀과 어울리는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브레넌 매닝이 쓴 「어리석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에 저자가 1969년 새해 첫날을 ‘예수의 작은 형제들’과 함께 보낸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명의 작은 형제들이 몽마르 마을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형제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들의 임금이 기준이하라는 말과 자기들의 고용주들은 교회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생각 없이 돈을 쓰고 삶과 믿음과 가정과 수확에 대해 마음과 생각을 받들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모두가 고용주를 성토하고 있을 때에 도미니크 봐이욤 형제는 식탁 끝에 앉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습니다. 순간 매닝은 그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나, 도미니크?” 다들 놀라서 물었을 때 그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한 마디 짧은 말을 남깁니다. “저들은 모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매닝은 ‘저들은 모릅니다’는 그 한 문장 때문에 자신의 분노가 긍휼로 바뀐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며 내가 옳은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분노가 일어날 때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저들이 알지 못하고 이렇게 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 속에 새겨지기를 소원해 봅니다. 사실 우리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 거의 전부인데도 조그마한 손해만 당해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저들이 모르고 그렇게 한다는 이 말씀 때문에 우리의 분노가 얼마나 긍휼로 바뀌어졌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기도와는 아랑 곳 없이 역시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집니다. 겉옷은 네 명의 군병이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지고 가졌습니다. 아마 네 조각으로 붙여진 옷 인가봅니다. 그런데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기에 나눌 수가 없어서 제비뽑아서 한 사람이 가져갑니다. 속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으니 십자가에는 벌거벗겨서 매어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진다는 것도 역시 다윗이 예언한 것입니다. 시편 22:18절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편 전체가 십자가의 고난을 마치 눈앞에서 보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애매히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증거 한 것입니다.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는다는 이 말씀만이 아니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하고 수족을 찌르는 모든 것들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신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것도 시편 69:2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35-38절을 봅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합니다. 관원들은 비웃습니다.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자신도 구원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조롱이 예수님의 최후의 유혹이라고 봅니다. 공생애 시작 할 때에 세 가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영광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다 물리치시자 사단이 얼마동안 떠났습니다(눅4:13) 얼마동안 떠났기에 계속하여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 유혹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통하여서도 나타납니다. 최측근이라는 자가 십자가를 지지 않기를 간청할 때에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것은 사람의 일 곧 사단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의 최종 유혹이 지금 십자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그리스도라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네 자신을 구원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군병들도 희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행하실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귀의 유혹은 이렇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는 내가 멋있어야 한다는 유혹입니다. 우식이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데 머리에 손을 얻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눈도 뜨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 예찬이가 면회 가니 눈을 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나서 눈이라도 떴다면 내 기도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할 텐데 그런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이 없으니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자기를 증거 하기 위한 유혹은 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무런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불치병을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내신 그 능력을 하나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범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취급받아 아무런 힘없이, 처절한 고통 속에서, 목마르다고 고함을 질러가면서 죽어가는 현장입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현장입니다. 더더구나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양 편의 강도들이 보아도 자신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의 죽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39절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손과 발에만 못을 박기에 어떤 사람은 일주일도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위에서 서로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그 사람을 꾸짖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참으로 놀라운 기적의 현장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조롱하는 자들보다 더 믿기 힘든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일 것입니다. 십자가위에서 아무런 표적과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4복음에서 보면 십자가 위에서 일곱 가지 말씀을 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두 말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강도가 고백하기 전에 들은 말씀은 방금 본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행한다는 이 말씀뿐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보면 두 강도가 다 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막15:32). 그런데 왜 갑자기 한 강도는 예수님을 죄 없으신 분이시며 그 행하신 일이 옳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고백을 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한 것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들은 말씀은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행한다는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이 옳은 분이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 강도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 그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여 죽는 이 일이 모르고 행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 덮어 쓰인 것입니다. 자기가 행한 일이 다 잘못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강도도 아마 마르다처럼 세상 끝 날에 모든 자가 부활하는 그날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그 시간에 이 강도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 강도가 부럽지 않습니까? 아니 평생 강도짓하고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 믿고 겨우 구원받은 사람이 무엇이 부럽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의 행하는 일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흉악한 강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사형당하는 것과 자연사의 차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죽음이란 죄의 삯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죽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하여진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강도를 모든 인류로 봅니다.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강도들입니다. 주인을 몰라보고 자기가 주인으로 살고 있으니 다 강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있다는 것은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한 강도는 자기의 행위가 모두 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옳으신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합니다. 이 한마디 고백에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끝으로 이 강도가 부럽다는 시를 한편 소개하겠습니다. 저와 신학교 동기인데 신대원 2학년 때에 경기도 지역에 전도사로 나갔다가 세상보다 더 무서운 교계의 현실을 보고서 신대원 졸업을 하고서도 택시운전을 하는 동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개인면허를 받아서 운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가 부럽다.

십자가 위의 한 강도
독립투사였는지
정치인 이었는지
정말 강도짓을 했는지
그건 중요치 않다.
그의 마지막 죽음이 비참했지만
그래도 그가 부럽다.
이 땅에서 들은 마지막 약속이.... 
 

 

 

누가복음 23:44-56 죽음으로 연 새길 2008. 6. 29

 

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49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52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셨던 시간은 6시간입니다. 오전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 세시에 운명합니다. 44절에 보시면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간에 6을 더하면 우리나라시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해가 빛을 읽은 시간은 정오부터 오후세시까지입니다. 가장 밝아야 하는 정오에 갑자가 해가 빛을 잃어 어두워졌습니다. 대낮에 해가 빛을 잃었다고 하니 어떤 사람은 일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때는 일식이 나타나는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아모스에서 대낮에 해가 져서 캄캄해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모스 8:9-10절입니다. “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이 말씀은 북 이스라엘이 범죄 함으로 나라가 망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여름실과 한 광주리를 이상 중에 보여주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묻습니다. 여름실과라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끝이 이르렀다고 하십니다. 여름실과라는 단어와 끝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끝이 다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죄악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자본주의가 발달한 이시대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책망이 북 이스라엘의 경제적인 불평등에 대하여 신랄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8:4-7절입니다. “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궁핍한 자를 삼키며 가난한 자를 망하게 하는 자들이 종교적입니다. 그래서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언제 이 날이 지나서 사기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길 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악으로 인하여 8절에 보시면 땅이 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해가 지고 캄캄해지는 것은 북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북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웁니까? 독자를 잃은 자가 애통하듯이 울게 됩니다. 이렇게 통곡하는 때가 다른 때가 아니라 10절에 보시면 절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란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이 삼대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과 찬양의 절기가 탄식과 통곡의 날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북 이스라엘의 멸망처럼 나중에 남 유다도 망하게 됩니다. 이런 멸망의 모습이 땅이 떨리고 해가 지고 백주에 캄캄함이 이르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이때가 유월절입니다. 기쁨과 환호의 절기가 아니라 슬픔과 통곡의 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본문 48절에 보시면 사람들이 가슴을 두드리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가슴을 두드리는 것은 어떤 주석에 보니 이것은 악한 생각의 본거지이며 혐오할 행동의 원천으로서의 '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치는 것은 죄책감과 후회의 표현인 것입니다(18:13 참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시간에 땅이 흔들리고 해가 어두워졌다는 것은 온 세상이 망한 것입니다.

 

 

 

 

47절을 봅니다. 백부장이란 로마군인 백 명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처형을 집행하면서 그 되는 일들을 다 보고서 하는 말이 이는 실로 의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가 다 본 것은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상칠언도 들었을 것이며 지진과 흑암을 다 보았기에 그렇게 고백하였을 것입니다. 이 고백은 유일한 의인이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고백도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더 이상 그 어떤 희망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성공이나 영광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캄캄한 어두움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요16:10).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에 세상이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의가 없는 세상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얼마나 수많은 애를 써 왔습니까?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사람도 수 많이 있었고, 또 공산혁명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살신성인의 길을 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 세상이 점점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을 모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일만 일어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생겼습니다. 4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진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입니다. 이런 휘장은 사람이 손으로 찢어서 찢어지는 그런 얇은 커튼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실을 꼬아서 직조한 아주 튼튼한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일 년에 단 한번 대 제사장이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렇게 들어가는 대 제사장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죽임을 당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10:19-25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짐을 통하여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어두움에 갇힌 세상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다만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보탬이 되는 신이라면 믿어주겠다는 것이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고 죄 아래 있기에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여도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어 있기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어도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전도지를 보면 이 세상과 천국을 그려놓고 그 가운데 큰 절벽을 그려놓습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윤리와 도덕이나 종교로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 십자가를 다리처럼 그려놓고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이 다리를 건너간다고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결단하고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휘장이 찢어지고 이것은 하늘로 가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열린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부활 속에, 생명 속에 집어넣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익혀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의 해석을 내가 여기 있고 대상이 저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행동 여하에 따라 대상은 당길 수도 있고 밀쳐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란 예수님의 죽으심만으로 되는 길이기에 그 길에는 사람의 공로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에 가슴에 흉패를 붙이고 갑니다. 이 흉패에는 12개의 보석이 달려있습니다. 12개의 보석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가슴에 안고서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성소에는 이런 짐승의 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기 피로서만 만들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50-56절에 보시면 공의회 의원으로 예수님을 죽이자고 결의할 때에 옳다고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정말 극소수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사람인데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대단한 용기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용기가 생긴 것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사야 53:9절에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되었다고 합니다. 죽을 때에 강도와 함께 죽었지만 그의 무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힌 것입니다.

 

 

 

 

예수님을 갈릴리에서부터 따라 온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자세히 봐두고서는 돌아가서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기에 그들도 쉬면서 안식일이 지나면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반대하여 죽인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이거나 간에 이 현실로 맞이한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이제는 끝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한편은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고 한 편은 가슴을 쳤지만 무덤에 묻혔다는 엄연한 사실만이 뚜렷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죽으심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여신 것을!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기에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죽어있는 자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여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제 내가 길을 열어놓았으니 나를 따라오라는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자기 백성들에게 덮쳐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소리치는 이 세상이 죽음의 세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고 산 길이 열린 사람입니다.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세상이 볼 때에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사람이 영원히 산자입니다.

 

 

 

 

누가복음 24:1-12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2008. 7. 6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막15:34)” “내가 목마르다(요19:28)” “다 이루었다(요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완전히 운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하늘이 세 시간이나 어두워지고 지진도 일어나고 무덤에서 몇 사람들이 살아나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했지만 그러나 그런 사건들은 이내 사라지고 눈앞에 분명하게 닥친 현실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시체를 무덤에 장사지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사랑받던 제자들조차 다 도망 가버렸습니다. 단지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이 무덤을 유심히 보아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못하였기에 안식일이 지난 후에 바르기 위해서 안식일 전에 준비 해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입니다. 그러므로 금요일 오후 세시에 예수님이 운명하셨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 예비일이기에 해가 지면 안식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지기 전에 시체를 처리하려고 빌라도에게 요셉이 요청하여 자신의 준비해둔 새 무덤에 세마포로 시신을 사서 장사지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들었기에 혹시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가서 다시 살아났다고 할까봐서 빌라도에게 청하여 무덤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군인들이 무덤에 인봉하고 지켰습니다.

1-3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여인들이 가면서 돌을 어떻게 굴려낼 것인지를 염려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보니 돌이 옮겨져 있는 것입니다. 무덤에 들어 가보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라 다녔던 제자들이나 또 이 여자들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2절입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누가복음 18:31-34절입니다. “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런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함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4-7절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서 근심하고 있을 때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말합니다. 그러다 여인들이 두려워 엎드립니다. 이 두 사람은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하면서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합니다. 어떤 모습이 그런 모습입니까?

 

 

 

 

무언가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직접 보여주지 못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라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요구를 오늘날 교회들이 어떻게 충족시켜 주려고 합니까? 보암직한 것들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대단한 업적이나 웅장한 건물이나 죽을병에서 살아나거나 큰 성공을 했다거나 하는 것을 가지고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떠벌리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런 욕망과 욕망을 채워주려는 모습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 선악과가 어떻게 보였습니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이런 유혹은 모든 인간에게 계속하여 유혹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의 모든 유혹의 근원도 다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세상이 보암직한 것으로 달려갑니다. 세상이 보암직한 것을 제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니 교회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온갖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채워주어 성공하였다는 미국의 교회들을 본받는 세미나가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란 아무런 볼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고개를 도리질 하면서 떠나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지극히 현명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니 예수님의 십자가만 이야기 하지 말고 부활도 이야기 해야지 부활의 영광을 왜 소홀히 취급하느냐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통과의례로 치부하여 버리고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영광이란 것이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이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여전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몇 번 보이셨고 또 바울이나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에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척 나타나시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다 믿지 않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사람들이 많이 합니다. 여전히 보암직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듣는 분도 계시기에 조금 상세하게 말씀드립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 거지 나사로가 살았습니다. 부자 집의 음식 찌꺼기나 먹고살았는데 몸에는 종기가 나서 개들이 핥아대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낙원에 부자는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음부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 고통 중에 눈을 들어보니 자기 집 앞에 얻어먹던 거지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손에 물 한 방울 찍어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곳과 그곳은 건널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부자가 그러면 나사로를 다시 세상에 보내어 자기 형제들이 다섯이나 있으니 그들에게 증거 하여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저희에게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자가 아닙니다. 죽은 자가 저희에게 가면 회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이 부자도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였겠지요! 성경의 말씀만으로 믿지 못하니 죽은 자가 가면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부자와 같은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살아난 자가 증거 하여도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습니다. 그래야 지옥에 갈 자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신학에 대한 질문과 응답을 보시고서는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것은 반드시 지옥 갈 자를 지옥에 가게 하신다는 말씀이 영 마음에 걸린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옥이 위협용이 아닙니다.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해도 믿지 않는 다는 사실 앞에서 믿고 아니 믿고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8-11절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말씀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무덤에서 돌아가서 11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저희와 함께 한 여자들입니다. 부활의 최초 목격자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이것은 유대사회에서 여자의 증거는 법정에서 채택하지 아니하는 때에 정말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법정에서 증인도 되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게 하신 것도 역시 믿을 사람만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보여서 믿지를 않습니다. 이때 성질 급한 베드로가 무덤에 달려 가보니 세마포만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빈 무덤을 보고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 된 일을 인하여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몇 번 나타나셔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보여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믿는 자 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는 것입니까?

 

 

 

 

5-7절을 다시 봅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하면서 그가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제야 여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모습을 척 보여주면 다 믿을 텐데 왜 보여주시지 않으시고 자꾸만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물론 이 말은 천사를 통하여 하셨지만 예수님의 심부름꾼이기에 천사의 전한 말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은 보암직한 것을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보암직한 것을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만 오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서는 그는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은즉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면 도망갈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6-20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5-26절도 봅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또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대로 살아나셨고 또한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만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24:13-35 성경을 풀어주실 때 2008. 7. 13

 

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1)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번 척 보여주시면 믿기 쉬울 것인데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자들에게 천사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전하는 천사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실망하여 시골로 내려가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성경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야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열 두 명의 제자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입니다. 12명의 제자들 외에 전도하려 둘씩 보내실 때에는 70명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 중에 두 사람에게 예수님은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지 성경을 통하여 보기 전에 먼저 세상에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믿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깁니다. 가수가 노래만 잘한다고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보여주어야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법정에서도 심정만으로는 사람을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물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대를 따라 교회에서도 어느 교회가 더 볼거리를 제공하느냐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멀티비전 세미나를 한다고 안내장이 옵니다. 그러 것 안하면 뒤처진 교회랍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8:24-25절입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고린도후서 4: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소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운동을 해도 늙어가고 죽어가는 몸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겉 사람만 신경 쓰는 사람은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믿는 사람은 성경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환난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소망이 더 분명해지게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을 알게 하시는 것이 환난이며 이런 환난은 크고 중한 영광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것인데 이 가벼운 환난들이 오히려 크고 중한 영광을 이루게 하는 것이기에 환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은 환난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똑 같은 환난을 당하는데도 죽을 것처럼 야단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이지 않는 약속의 세계를 무엇으로 믿게 됩니까? 로마서 10:17절입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란 들음에서 나는데 그 들음이란 그리스도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많이 듣기는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성공사례들을 하도 많이 듣다보니 성경의 약속과는 전혀 엉뚱한 믿음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16절에서 복음을 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구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지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오늘본문을 다시 봅시다. 13-2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문을 들은 그날에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는 촌으로 두 사람이 내려가면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 합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나그네로 여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길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우거하면서 근일에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냐고 하자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고 하시니 그간의 일을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일을 말합니다. 그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는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다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 난지 3일째이고 우리 중의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천사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과 또 우리와 함께 한 두어 사람도 빈 무덤을 보고 왔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다는 말을 합니다.

 

 

 

 

25-31절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그러는 중에 저희의 가는 촌에 이르게 되자 예수님은 더 가려는 것같이 하십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이 강권하여 우리가 함께 있자고 합니다. 때가 저물어 날이 이미 기울었다고 하면서 권하자 함께 거하시려고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니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자 말자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떡을 떼어주는 것은 손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청한 사람이 떡을 떼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저녁식사에서 예수님이 오히려 주인이 되어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떡을 떼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하시고 떡을 떼어주시는데 그때 예수님인줄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갑자기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32절입니다. 예수님이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서로 하는 말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길에서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서 곧 그 시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과연 주님께서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보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두 제자에게 계속하여 보여주시지 아니하시고 사라져버린 것입니까? 부할 하셨다고 해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며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마18:20)과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마28:20)도 예수님이 몸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보내실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성경이 증거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결코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 성경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증거 한 내용이 무엇일까요? 27절입니다.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40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에서 영생 얻는 줄 알고서 부지런히 성경을 보지만 이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오지 않는 이유를 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사람들이 서로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영광이란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들이 전적인 죄인임을 인정하여야 하기에 자기 영광이 설 자리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서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풀어주신 말씀이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한 것이라는 사실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던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 미루어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내시며 모세와 아론 다윗과 솔로몬을 통하여 일하신 것을 드러내십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언약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건물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한 것입니다. 너희조상들이 선지자를 핍박하였고 그 선지자들이 증거 한 그 의인을 너희가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이를 갑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스데반에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우러러 주목하여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를 막고 일심으로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을 들어 쳐 죽입니다. 그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면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베드로도 같은 설교를 합니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합니다. 그러자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마음이 뜨거워져서 당장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로 치는 자들도 나오는 것입니다. 둘 다 뜨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쪽은 사랑해서이고 한 쪽은 미워해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누가복음 24:36-53 그의 이름으로 2008. 7. 20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2)[하늘로 올리우]시니 52 저희가 2)[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누가복음을 통하여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과 그 여정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릴리는 시골이고 예루살렘은 수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울로 가는 것은 성공하기 위하여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가시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는 길이기에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알고서 가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죽음만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어내셨기에 부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고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실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야 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셨습니다.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식사시간에 예수님을 알아보자 말자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실망하여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시고 또한 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이켜 가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갑니다. 그러자 그들도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는 말을 하고 시몬에게도 보이셨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도 자기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두려워하여 문을 닫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이 평강이란 죄와 사망을 십자가로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강입니다. 어느 정도의 평강이 되는가 하면 바울은 감옥에 갇혀도 기뻐하라고 하는 평강입니다. 베드로는 내일 처형될 줄 알면서도 감옥에서 쿨쿨 잘 수 있는 평강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평강을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유령처럼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셔서 보여준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며 자신의 손과 발을 보고 예수님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손과 발에 상흔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여 주셨으나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여주고 만져보아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먹을 것이 없느냐고 하시자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그것을 잡수신 것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도 부활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도마가 없을 때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도마가 있을 때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상흔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보지 않고 어떻게 믿게 됩니까? 성령을 보내시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2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평강이 있으라고 하신 후에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도 오순절 날에 임하게 됩니다.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성령이 임할 그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성취가 되는 것을 알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구약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말하고 이루신 분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숨을 내쉬며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있어야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할 수가 없어서 떠나버립니다. 그러면 사람이 육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이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듭났다고 하며 위로부터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44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후에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말씀하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대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외우면서 자랍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하나도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성경을 알았다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영광의 주를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보면 잠만 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시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의 마음을 주님께서 여시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인데 그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완성하신 죽으심이기에 그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가 해결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악한 것들이 다 죄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뿌리는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았습니다. 이 욕심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은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유혹, 그 욕심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것이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두 아들 중에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독립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산을 몽땅 먹고 마시며 탕진하고서는 먹고 살 수도 없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죄를 압니다.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아들이라고 부름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러나 아버지 집의 품꾼이라도 배부르게 먹고 살기에 그저 종이라도 삼아달라고 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않고 입을 맞추며 목욕시키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아들을 인정하는 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큰 아들이 삐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하는 말이 잃었다가 찾은 자요 죽었다가 살아온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자신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린 자요 죽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어떻게 한번 자기의 꿈을 이루어보려고 발버둥 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꿈은 사라지고 그저 내 처자식 굶기지 않고 먹고 살기만 해도 좋겠다는 식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고 살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을 경험하면서 나를 살리는 것은 나뿐이라고 다짐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나마 살아남으려면 남을 밟지 않고는 살수 없는 세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하여도 별 뾰족한 수가 없기에 그저 담배만 늘고 술만 늘고 한숨만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어떻게 교회가자는 말을 듣고 교회를 따라 나와 봤더니 이곳도 세상과 별다를 바 없이 거저 하나님께 잘 보이면 많은 복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이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해서 병원에 진단을 받았는데 다행히 악성이 아니라서 치료가 잘 되고서는 열심히 교회를 나갔답니다. 옛날에 서원한 적도 있고 해서 자녀의 문제로 교회를 이제 열심히 나가는데 바치면 몇 배로 받는 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도 그렇게 말하고 어떤 책을 보아도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종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증거 해야 하는 곳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엇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을 받는 다는 이야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구약의 증거 이며 신약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47-48절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일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증거 해야 할 내용은 그의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은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는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고 세상을 믿고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요 죄인 것입니다.

 

 

 

 

49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예수님이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유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를 데리시고 베다니 앞까지 가셔서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십니다. 그때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령을 기다립니다. 누가복음의 후편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드디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고 그때부터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금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이제 복음이 다 증거 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천년 전부터 성령이 오심이 종말사건입니다. 그러면 이 종말의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이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 맛을 보시면 증거 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로 통일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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