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스크랩] 누가복음 강해 2

공 상희 2009. 5. 6. 12:48

 

 

 

 

 

 

 

누가복음 강해 2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누가복음 6:12-19 열 두 제자를 택하심 2007. 2. 11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1)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누가복음에서만 보아도 오늘 본문 외에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임하였습니다(3:21,22). 예수님의 병 고침을 소문을 듣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오자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5:16).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서도 따로 기도하려고 가셨습니다(9:18).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9:28,29). 또한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11장).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18장).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22:32).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21:36).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22:32).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22:44). 이처럼 예수님은 일부러 한적한 장소를 골라서 기도하시고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고 땀방울이 핏방울 떨어지는 것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늘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형제가 다른 교회를 몇 번 가보고서는 그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늘 푸른 교회에서 말씀을 잘 듣기는 하였지만 너무 냉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려고 하는 교회에서는 기도에 힘쓰는 곳이기에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한 내용을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12-13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가셔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밝으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셔서 사도라고 칭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열둘을 택하셔서 사도라고 하셨을까요? 물론 이 열두 사도 외에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70명을 따로 세우셔서 전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도라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왜 열둘을 선택하셨는지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은 왜 예수님을 판 유다인지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12라는 숫자를 성경에서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생각날 것입니다. 그러면 열두 지파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는 대표자들입니다. 이 열두 지파가 형성되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노아 홍수이후에 하나님께서 흩어져서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흩어져 살아가는 자들 중에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라면 아브라함도 그 영향 하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기다려도 주시지 않자 여종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약속으로 태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없는데서 있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가 경수까지 완전히 끊어진 때에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둘 다 믿지 못하고 웃었습니다만 약속대로 얻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이삭도 결혼하여 이십년 동안이나 자식이 없다가 기도하고 임신하게 되는데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임신을 하였는데 쌍둥이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중에 있을 때에 이미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 에서가 약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동생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6-13절입니다. “봉독” 즉 이렇게 하신 이유는 1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세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셔서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고 달린다고 해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서 자기의 영광,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택하신 나라가 열두 지파로 형성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열두지파로 이루어진 나라가 그들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면 맞이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방식으로 열두 지파를 만들어 내신 것처럼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같은 방법으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14-16절입니다. 제자들의 명단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시몬, 유다(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출신이 가룟 유다 외에는 다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보면 아주 변방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열심인 자가 많은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제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는 보통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부름을 받은 그들의 자격조건이 아니라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세우시기 위하여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는 방법대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가룟 유다가 들어간 것은 예수님께서 실수 하신 것입니까? 밤이 맟도록 기도하시고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였는데 잘못 선택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택의 의미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심을 입고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택함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항의가 일어나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피조물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란 인간이  만물의 주인인양 여기고 사는 것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들어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에 당연히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 외에는 어떻게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도 가룟유다가 전혀 다를바가 없는 사람인데 단지 예수님의 긍휼과 그들을 위하여 끝까지 사랑하심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만 배신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 다 배신하였습니다. 모두들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을 하였지만 막상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십자가로 가시는 길에서는 모두가 도망갔습니다.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부인하고 맹세로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거기에 비하면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스승을 판 것이 괴로워서 자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사도가 된 것은 그들의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시는 분으로 서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 모두가 철저하게 부인되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비록 배신하였을지라도 이들이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돌이켜서 주의 제자가 되어 양들을 먹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기도하심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32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베드로는 돌이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전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하면 서로 누가 크냐하는 다툼이 일어나고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로 인하여 형성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구약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심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19:28). 그러므로 구약의 열 두 지파보다 열두 사도가 더 우선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누가 높다 낮다의 개념보다 누가 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나 신약의 열두 사도를 통한 새로운 이스라엘이나 그들의 자질은 다 똑 같은 것입니다. 다들 자기들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택하심을 따라 은혜로 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가 사도들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디에 세워진다고 하는가 하면 에베소서 2:20절에 보시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순서로는 선지자들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라고 해야 시간 순서로 맞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만물이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1:16). 그러므로 사도들이 먼저 거론되는 것입니다.

 

 

 

 

17-19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얻고자 나오는데 그들이 고침을 받는 것은 누구로부터 나온 능력입니까? 능력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능력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자들이 바로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즉 사도들을 택하여 복음이 증거 되게 하는데 이들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입은 바울까지 포함하여 주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아니라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이 증거 되어 주의 제자들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8:18-2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쥐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복음이 이곳 까지 증거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제자들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으로 부르시는가 하면 복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름을 입은 자들은 공통적인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제자들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적을 일으켰을 때에 자기가 아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셔서 그 분이 이 일을 일으켰다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그 어느 사도보다 많이 수고하였지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안에 주님의 택하심으로 그의 백성 삼아주신 은혜가 충만하여 우리도 제자처럼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6:20-26 복(福)과 화(禍) 2007. 2. 18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설날이라고 어른들을 찾아뵙고 이런 인사를 드리면 어른들은 덕담을 합니다. 올해도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 되고, 행복하게 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라고 인사를 하러 갔는데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한다면 두 번 다시 찾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늘 우리가 보는 말씀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저는 젊어서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성경은 세상과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성공이나 복은 포기하여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와 기대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 성경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침묵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주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이 열두제자와 함께 평지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평지에서 전하셨다고 이 본문을 ‘평지설교’라고 하고 마태복음에서는 산위에서 설교 하셨다고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이 설교를 예수님이 두 번 하셨는가? 한번 하셨는가? 왜 다르게 하셨는가 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누가를 감동시키셔서 이렇게 기록한 것을 믿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대상은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허다한 제자의 무리가 있습니다. 이 제자그룹은 열두제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무리 외에 또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침을 받고자 몰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인기가 있을 때에 예수님 가까이 나아가기를 다 원하였습니다. 가까이 가서 예수님을 만지기만 하여도 병이 나으니 얼마나 예수님 가까이 서로 나서려고 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열두 제자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시면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이 만져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천국이 이런 어린아이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주변이 어떤 자들이 모이기를 원하였을까요? 힘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이 와서 메시아 왕국을 이루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오니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끼리 누가 서로 높으냐며 늘 서로 시기하고 다투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높고 권세 있는 자리 차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3김씨가 정치할 때에 그들을 가까이 하기만 하면 국회의원 되는 것은 따놓은 것이기에 돈 보따리 싸들고서라도 그들에게 줄을 선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까?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받은 메시아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온갖 기적을 행하시니 이 분을 메시아로 모시면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부유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굶주리기 않을 것이며 웃게 될 것이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에게, 제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려고 오는 수많은 무리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20-23절입니다. “봉독”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제자란 그 당시의 제자만이 아니라 오늘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다 제쳐두고서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어느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구약을 들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지만 구약이 무엇인지 신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세상의 복 받는 이야기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유대인들이 인구 대비하여 가장 많은 노벨상을 받았고 미국의 경제를 쥐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증거 하고자 하는지도 모르고 거저 사람들이 복을 좋아하니 그런 복이나 팔아먹자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오늘 말씀은 저주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구 우리교회 게시판에 ‘명절 풍경과 십자가’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있는 곳이 팔공산 자락입니다. 그래서인지 절에서 나온 행동대원들이 골목마다 누비면서 가가호호 방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초인종을 눌러서 놀라게 하고서는 ‘우리 절에 시주하시면 한 해 내내 복이 온다.’면서 복을 빌어 줄 테니 먼저 돈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머리로 교회에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신인지 피조물인지 분간도 안 될 지경입니다. 신이 피조물에게 사정사정하는 것을 봤습니까? 신이 피조물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보았습니까? 심판하실 분이 심판받을 자들에게 타협하자고 나서는 것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인간들의 정신머리를 교정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얻고자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서져야 하는 신세가 인간임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말씀 앞에서 우리의 생각들이 부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인 사람은 세상에서 가난하여도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몰고 오셨고 십자가 이후에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하여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으로 복으로 여기고 사시겠습니까?

 

 

 

 

아마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목사님! 하나님 나라도 받고 세상에서 부유하게도 살면 안 됩니까? 누가복음 16:1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뿐만 아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말씀보다는 다른 말씀이 달콤하게 들린다면 화있는 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웃을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있는 자가 도대체 무슨 복이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까? 지금 가난해서 고향도 찾아가지 못하는 노숙자들에게 이런 말씀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저주스럽게 들리겠습니까?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그런 말하는 사람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이런 말하다가 정말 맞아보기도 하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 주님이 보내신 참된 선지자 치고 핍박당하지 아니한 선지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핍박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참된 선지자들은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돈을 사랑하고 다른 강대국들의 도움을 바라는 것에 대하여 저주와 재앙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입만 열면 축복을 남발하였습니다. 그 축복도 선지자들에게 무엇을 채워주면 평강을 외치고 무엇을 채워주지 않으면 저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치면 복 받고 바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구약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누가 칭찬을 받고 있습니까? 부자로 주리지 않고 웃고 있는 자들의 편을 드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목사들이 가장 앞장서서 그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목사들도 많겠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가 소수자의 목소리입니다. 목사들이 앞장서서 부자들 편들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서울시청 앞에서 데모하는 목사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소위 대형교회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골의 가난한 교회 목사들조차 그들과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주린 자가 복이 있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자신이 가난하다고 한이 맺혀 울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자들이 복이 있는 자들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22절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며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고 버릴 때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고 합니다. 선지자들이 이런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대로 증거 하면 사람들이 좋아 할까요? 싫어할까요? 당연히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합니다. 상이 크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는 차원에서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평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 영원한 진리인지를 모르고 마귀에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은 화가 있는 것입니다. 24절에서 26절입니다. 세상에서 복 있다는 것이 오히려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받을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배부른 자는 주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웃는 자들은 애통하여 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복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참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혀 그런 조짐이 없어 보이지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지금 세상을 향하여 빌고 있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서 지금 울고 애통하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늘의 복을 받을 자들이며 이런 말씀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영원히 울며 애통할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때부터 이미 종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전부가 다 종말론적인 내용들입니다. 세상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종말의 시각으로 이 말씀을 보시면 다 아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능력이 아니라 종말의 영인 성령이 임하여야 이렇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복과 화를 거꾸로 보면서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6:27-38 영적 진단 2007. 2. 25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2)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40세가 넘으신 분으로 홀수년도에 태어나신 분은 국민건강보험 공단에서 건강 검진하라는 안내서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검진을 받기위해서 가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십니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검진을 받으러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 가기 싫어하는가 하면 그냥 모르고 있다가 죽으면 되지 미리 알아서 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싫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속마음이 들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영적인 진단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단을 잘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이 드러나기에 싫은 것입니다. 그저 대충 덮어두고 내 편한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관절과 골수와 혼을 찔러 쪼개어 낸다고 합니다. CT 나 MRI 촬영보다 더 정밀하게 진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말씀은 무엇을 비추어주는 말씀입니까? 우선 이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청중은 유대인들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온 제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특징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핵심요약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보시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질문하십니다. 율법에서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인데 그것은 전공분야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답변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대표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사가 자기가 옳게 보이려고 또다시 질문을 합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물은 것은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전제를 하고서 물은 것이겠지요! 그러니 이웃은 누구인가 하고서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다 빼앗기고 맞아서 거반 죽은 것을 버려두었습니다. 제사장이 피하여 가고 레위 인이 피하여 가고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구하여 주었다면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인들은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만난 자를 못 본체 하고서 갔는데 그들이 평소에 이방인처럼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분 나쁜 비유를 들었습니까? 그렇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의 된 사람을 제사장이이나 율법사라고 하시지 않고 사마리아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사의 속을 다 뒤집어 놓는 질문입니다. 그때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사마리아인이라 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너무나 정확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실천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웃의 개념은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웃입니다. 최소한 유대인이어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은 이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된다고 하여도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개종을 하여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과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을 결코 사랑할 수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접촉하게 되면 부정하게 되기에 그들을 멀리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자기들에게 적용을 시키는데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정하는가 하면 율법을 지킨 것이 지키지 못한 것보다 많으면 의로 보는 것입니다. 지키면 플러스 못 지키면 마이너스로 정하여 저울질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43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그들의 전통을 붙들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 안에는 그들의 의가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원수는 미워하지만 자기들 끼리끼리는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상태를 진단하시니 그들은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 사랑하는 자들임이 들통 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여야 하는 것에는 전혀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입이 열개라고 할말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죄인 됨을 시인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율법 적용과 해석이 엉터리라고 하면서 배척하는 길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후자입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한다고 여겼는데 그 정도의 사랑은 죄인들도 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하니 우리는 여기서 자유롭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 하고자 하는 관심과 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누가복음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고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듣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많이 듣는 것이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구제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자신에게 제대로 된 사랑이 있는지 점검을 시작해봅시다.

 

 

 

 

원수를 사랑하십니까?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대하십니까?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십니까?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내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십니까?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주십니까? 나에게 구하는 자에게 다 주십니까? 내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다시 돌려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십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주십니까? 10가지 질문에 O X로 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문제 10점이라면 몇 점이 나왔습니까?

 

 

 

 

여러분 몇 점이 나왔습니까? 저는 빵점이 나옵니다. 이래 놓고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부끄러워서 입을 닫을 뿐입니다. 이런 진단을 우리가 왜 받아야 합니까? 이런 진단을 받지 않고서 유대인처럼 나가면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을 통하여 자기들의 죄인 됨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시답잖게 지키면서도 그것을 자기들의 의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진단을 받아서 무엇을 합니까? 사람들이 칭찬하고 격려를 해야지 무슨 일이든 잘할 것인데 이렇게 난도질을 해 놓으면 하고 싶은 것도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것도 죄다! 저것도 죄다! 그렇게 말하면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만큼 이 땅에서 복도 받고 하늘에서도 상이 크다고 해야 열심히 할 맛이 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식의 격려와 칭찬은 죄인들도 하는 것입니다.

 

 

 

 

32-38절입니다. 자기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는 것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하라고 하십니다. 그 자비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것입니다. 이런 진단을 받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알게 됩니다. 그동안 자기가 무언가 좀 해 왔다고 여기는 것들이 다 배설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죽었다고 말한 사건이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말씀은 죄인임을 진단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과 죄를 진단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죄인임이 드러나는 사람을 통하여 원수를 사랑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됩니까? 바울사도를 보면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주님을 향한 목숨 바친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까? 바울을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백하기를 자기가 어떤 다른 사도들 보다 더 수고를 하였지만 자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이렇게 된 것 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두 사람 예를 들어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사야 6장을 보시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이사야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고백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입술이 부정한 자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 숯불에 그 입술을 지져서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다고 하시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6:1절을 보시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웃시야 왕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웃시야 왕이 16세에 왕이 되어 52년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라도 강건하였습니다. 그 정도이면 자신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성전에서 분향하는 것을 자신이 하고자 나섰습니다. 제사장들이 말려도 자신이 기어이 분향하고자 하였을 때에 그 이마에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쫓겨나고 죽을 때 까지 별궁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몇 년을 신실하게 살았습니까? 그 의를 가지고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대 제사장 되신 예수님 아니면 우리는 50년이 아니라 모태로부터 죽을 때 까지 스스로 경건과 거룩을 닦아도 문둥병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 순간에 원수가 와서 뺨을 친다한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산상설교 후에 제일 먼저 치료받는 환자가 문둥병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다 제대로 진단을 받는다면 나의 원수도 나보다 의로운 자로 보일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6:39-45 열매로 알리라 2007. 3. 4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봄이라고 벌써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봄이 되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에 가지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이 가지가 무슨 나무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무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꽃이 피어난 이 가지를 보면 무슨 나무인지 아시겠지요? 사군자 중에 제일먼저 거론되는 매화입니다. 그러나 꽃보다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더 잘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 중에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는데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도 그 열매를 통하여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벌써 짐작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 오늘도 열매를 강조하겠구나! 그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누가복음 13:6-9절을 봅니다. “봉독” 이런 본문을 통하여 무슨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고 책망을 받습니까? 주일 성수 하지 못한 것, 십일조 떼먹은 것, 전도하지 못한 것, 봉사하지 못한 것 등에 대한 책망을 받습니다. 특히 연말에 이런 설교를 통하여 새해에 다시 결단하게 합니다. 그런데 열매가 과연 무엇입니까?

 

 

 

 

먼저 넓게 살펴보고 나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시편 80:8-11절입니다.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9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1)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2)강까지 미쳤거늘”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가나안에 들어와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에 유프라테스 강까지 미쳤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이제 망하게 되었습니다. 왜 망하게 되었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았기에 주께서 면책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담을 허시고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하나님께서 돌보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의 오른 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힘 있게 하신 가지인데 불타고 작벌을 당하는 것은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1-7절입니다.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삼으시고 극상품 포도를 심으신 것입니다. 좋은 열매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다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4절에 보시면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맺힌 것은 들 포도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어떠함을 보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무엇이 부족하였습니까? 그런데 범죄 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간음하고 살인하였을 때 하나님의 책망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무엇이 부족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부족하다면 더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죄의 심각함, 욕망의 끝없음을 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5:8절이 이하에 수많은 목록들이 나옵니다. 몇 가지만 인용합니다. 부동산 투기, 아침부터 저녁까지 독주에 취하면서 연회를 베푸는데 온갖 악기와 포도주를 다 갖추어 즐기면서도 여호와의 행하신 일에 관심 없음, 거짓이 일상적인 삶이 됨,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함, 단 것을 쓰다고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함, 스스로 지혜롭고 명철하다고 함, 뇌물 수수 이런 죄목들이 나열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바라셨는데 포학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만의 모습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착하게 바르게 살면 됩니까? 지금까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니 이제부터라도 좋은 열매 맺으면서 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될 일입니까? 이런 세상을 개혁한다고 될 일입니까? 아닙니다. 구원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다시 시편 80:17-19절입니다. “17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이 말씀을 보시면 구원이란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시편 80편과 이사야 5장의 말씀을 정리 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셔서 약속의 땅에 심으신 것은 좋은 열매를 바라고 심으신 것입니다. 그런 열매를 줄여서 말하면 무엇입니까?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우리가 진단을 해 보니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점검하였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구약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율법을 지킬 수 없었는데 신약의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였기에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 자신이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께서 주의 오른 편에 계신 자에게 힘을 주셔서 구원하소서! 이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7-38절을 봅니다. 지난주에 다 보지 못하였습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야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죄와 용서도 마찬가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과 정죄를 일삼고 삽니다. 그러니 용서도 없이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짓은 비판받기 싫어하고 정죄 당하기 싫어하고 용서 받기를 원하면서 남에게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 후히 주지 않으면서 자신은 후히 받기를 원합니다. 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자신도 헤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러니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주여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 힘을 더하셔서 구원하여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단의 책망을 받고 회개할 때에 자신이 가장 큰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다윗이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단의 책망 앞에서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책망 앞에서 자신의 죄를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용서를 입은 다윗은 그 어떤 죄인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못할 것입니다.

 

 

 

 

39-42절입니다. 이 본문의 평행구절인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에 티를 빼겠다고 나서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그들은 열심히 열매를 맺는다고 노력하였습니다. 율법 공부, 기도, 금식, 전도, 구제 등을 보통 사람들은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마태복음 23:13-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그렇게 열심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천국 문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까? 열심히 전도하여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맺었다고 하는 그 열매들이 자기들의 의와 자기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셔서 맺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로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인간들의 노력과 열성과 능력이 대단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성공신화들이 등장합니다. 사업을 성공한 사람들, 과학적인 성과를 이룬 사람들의 능력들을 보면 감탄할 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감동을 주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로마서 10: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자기 의가 많을수록 더 열심히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복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의가 되시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여도 그 열매는 죄악을 열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드냐고 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입니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며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조차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서 나오는 열매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만 예수님의 공로이고 믿고 나서는 내가 맺어야 하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입니다.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고 합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여 진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이미 깨끗하여 졌으면 예수님은 내가 도저히 못하는 일만 도와주시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두셔야 내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깨끗하여 졌기에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면 버려져서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불에 던져 사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44절입니다. 열매로 압니다. 우리는 원래 가시나무요 찔레입니다. 그러니 무화과나 포도가 맺힐 수가 없는 나무들입니다. 로마서 11장의 표현대로는 우리가 돌 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입니다. 과일나무에 접붙이는 사람이 이 말씀을 읽으면 이것은 농사 망치는 짓입니다. 돌 감람나무에 참 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여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가지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보전하는 것임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서 좋은 열매가 나오는 것은 본성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좋은 열매가 적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은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성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봉사를 하여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열매들에서는 언제나 주께 대한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에게서 이런 열매가 다 나오는가? 우리의 본성을 이기고도 남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런 열매의 특징을 갈라디아 5:19-23절을 봅니다.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이로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이 무슨 내용인지 정리가 되십니까?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깨끗하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은 내가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그것은 잘려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열매란 억지로 쥐어 짜내는 열매입니다. 육체의 열매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인간의 의로 가득하기에 주님께서 드실 수 없는 열매인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때에 창조과학이라는 선택과목을 들었습니다. 주영흠 교수인데 그때 다들 전도사니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심방을 가면 전도사님 오셨다고 겨울에 수박을 내어 놓으면 인사로 조금만 먹고 많이 먹지 말라는 말을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제철 과일이 아니면 온도와 열을 가하여 모양과 맛을 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독소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풋 과일에 독소가 있는 것처럼 억지로 만들어낸 과일들은 그 안에 독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는 것은 육체의 일입니다. 아무리 그럴 듯 하게 포장을 하여도 성령의 열매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아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6:46-49 어디에 무슨 집을 짓습니까? 2007. 3. 11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다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기까지 인생이라는 집을 짓고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 끝나는 날에 무슨 집이 어떻게 남아질것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사십니까?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도 없지요! 그러다가 죽으면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의 묘비에 이렇게 남기라고 유언하였답니다.

내 우물쭈물 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라는 사람의 유언대로 이렇게 묘비에 남겨졌는데 원문보다 번역이 더 멋있습니다. 우리도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하는 그 때가 올 것입니다. 이런 유언을 보면서 사람들마다 또 해석이 분분합니다. 허비하는 인생을 보내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보람된 인생을 보내자고 합니다. 그러니 더 바쁘고 더 피곤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유대인의 지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간의 건축보다 시간의 건축에 마음을 쓰라는 것입니다. 헤셸의 안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문명의 발달은 공간을 건축하여 나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 안식을 주지 못한다면서 거룩한 한 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책이 인기 있는 책이 되었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안식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한 날이 영원과 연결되어 있기에 이 시간에 대한 의미를 잘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이 안식을 주시는 분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아직 그림자인 안식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인 안식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는 오늘날의 교회와 세계를 보게 합니다. 모두가 분주하게 공간을 점령하기 바쁜 시대에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누가복음 6:20절에서 시작한 평지설교가 오늘 본문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46-47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면서 따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48-49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집을 짓는데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위에 놓는 사람과 같습니다. 큰물이 나고 탁류가 그 집에 부딪혀도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 주초가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탁류가 부딪히면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건축 전문가가 아니라도 다 알아 듣습니다.

 

 

 

 

여기서 집을 잘 지어야 하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기초의 문제입니다. 기초를 어디에 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반석이냐 흙이냐의 문제입니다. 그 위에 어떤 집을 세우는가는 나중의 문제입니다. 우선 기초를 점검하고서 나중에 그 위에 집을 어떻게 지을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좋은 기초는 반석인데 이 반석위에 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해야 할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최소한의 단락은 20-45절까지입니다. 더 넓게 확대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입니다. 우선 신명기 28:1절을 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28:15절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모든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면 여기서 모든 규례입니다. 모든 규례를 지키지 못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저주뿐입니다.

 

 

 

 

이제 다시 확인을 합니다. 2주전에 영적진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10문제를 제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있는 말씀으로 시험을 쳤는데 어떤 분이 조건 없이 베푸는 것에 대하여 동그라미는 안 되겠고 삼각형이라고 칠까 하다가 아니다 내가 언제 그런 적이 있는가 하면서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빵점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집을 어디에 어떻게 세워야 하는 것입니까? 우선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다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지어보겠다는 것은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려야 건설하며 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선지자의 계통으로 온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쳤습니다. 인간들이 세운 의라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철저하게 그 뿌리까지 뽑혀져야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실천한 의라는 것은 어떤 인간들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지키려고 하였는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부칙들마저 철저하게 지키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예수님이 배척당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기초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반석이 아니라 흙이었습니다. 반석이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함이 예수 그리스도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은혜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노력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자기 의로움입니다. 그 속에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옳다고 붙드는 것들이 사람들마다 다 있는 것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보다 내가 이것은 낫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흙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문명을 만들고 자기들이 이름을 높이고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온갖 짓을 다 하여도 그것은 다 흙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지금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그들의 신앙의 위대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세상의 영광과 힘에 대하여 무너지는 경험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이 야곱이 무엇을 받았습니까? 무엇을 이루어 내었습니까? 이 세상의 흔적은 지나가는 것임을 알고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살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이 목적인 사람들은 세상의 공간을 정복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문화입니다. 도시 건설을 만들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바벨탑을 왜 쌓았습니까?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 바벨탑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인간세계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흩어짐을 면하고자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바벨탑들이 지금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의 탑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 기초를 바꾸는 것입니다. 통째로 옮기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전부 모래위에 세운 집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다 무너져 내릴 것들을 영원한 것 인양 목숨처럼 붙들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인생의 주초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기초, 주초가 무엇인지 조금 더 살펴봅니다. 에베소서 2: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무슨 터를 닦아 두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터를 닦아 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서 새로운 기초를 세우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0-11절을 봅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다른 터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터가 됩니다. 이 기초 외에 다른 터를 닦는 것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이란 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2-15절입니다.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가 주님 오시는 그 날에 다 드러나게 될 것인데 이 본문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사역자들에게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인 예수 그리스도위에 건축을 하는 자들이 어떻게 집을 세울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그 사람의 공력이 드러나는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고 세계를 날아다니면 간증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평생 개척교회를 면하지 못하고 고생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는 그날에 공력이 나타나는데 세상의 평가와 전혀 다른 심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에 태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과 은과 보석은 남지만 풀과 나무와 짚은 사라집니다. 남는 것과 사라질 것들로 구별됩니다. 남는 것과 사라질 것이 무엇으로 구별 되겠습니까? 기초와 동일한 재료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처럼 그 터 위에 무엇으로 세워져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열매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매란 예수님께 붙어 있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독립적으로 내가 이런 열매를 내어 놓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손으로 집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지음 받고 주의 뜻대로 유지되고 주의 뜻대로 결론지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수고하였다고 충성하였다고 면류관을 예수님이 세워주실 때에 그 면류관을 쓸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고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의 보좌에 돌려드리는 것이 요한 계시록 4장에 10-1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들은 지금도 주님께서 날마다 흔들고 계십니다. 잘못 지어지는 것들을 무너뜨리시고 주님의 은혜로만 세워지도록 흔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흔들어 버리시는가 하면 흔들리지 아니할 위로부터 온 것, 은혜로 온 것만 남기시기 위하여 흔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8-29절입니다. “봉독” 흔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너짐이 지금 일어나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곳에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알기에 장차 올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누가복음 7:1-10 이 만한 믿음 2007. 3. 18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예수님께서 평지 설교를 하시고서는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평지설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셨습니다. 즉 유대인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유대인들을 칭찬하고 격려하기 보다는 뿌리 채 흔들어버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랑은 죄인들의 사랑밖에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의 눈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주초가 모래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가버나움이라는 지역으로 가신 내용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서쪽의 지역으로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신 후 이곳에서 전도하셨습니다.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 한다는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셨는데 오히려 죽이려고 하셔서 가버나움을 가셨습니다.

 

 

 

 

이곳에 갔더니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는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보냈습니다. 백부장이란 백 명의 부하를 둔 로마군대의 장교입니다. 가버나움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장교입니다. 이 사람이 용병부대의 장교이든 로마군대의 장교이든 간에 이스라엘 전 지역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기에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일제시대 때에 일본군 헌병장교쯤 되는 사람입니다. 그때에 일본 순사만 온다고 하여도 우는 아이가 울음을 그쳤다고 할 정도입니다. 몇 주 전에 장로님과 이야기 중에 어렸을 때에 자전거 타고 가다가 지서 앞에서 내려서 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릴 때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것이 다 일재 식민지의 잔재입니다. 관공서만 가도 주눅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사도 아닌 군인의 백부장이라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부탁을 하는지 봅시다.

 

 

 

 

2-3절을 봅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종을 구원하여 달라고 유대의 장로 몇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에 보시면 주님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태도입니다. 얼마든지 당당하게 부를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본 것도 아니고 단지 소문만 들었는데도 이방인인 자신은 예수님께 감히 나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평소에 친분이 있는 유대인 장로들을 보낸 것입니다.

 

 

 

 

4-7절입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간절히 청합니다. 평소에 유대인의 장로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을 위하여 간절히 청하는데 백부장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합니다. 유대 민족을 사랑하여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간청하여 그 집에 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함께 멀지 않은 백부장의 집으로 가는 중에 백부장이 또 벗을 보냈습니다. 아마 이들도 유대인의 장로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이 고백도 백부장의 벗들이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으로 가셔서 고쳐주시도록 간청한 것은 백부장의 의도가 아니라 장로들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백부장의 집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는 자신이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라 또 벗들을 보내면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합니다.

 

 

 

 

8절을 봅니다. 저도 남의 수하에 있고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어서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간다는 것입니다. 로마군대의 용맹은 대단한 것입니다. 돌격 앞으로 하면 죽음을 무릎서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적은 군인으로 많은 적을 물리친 상황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자기 군대를 절벽 앞에서 앞으로 갓! 한 것입니다. 그러자 척척 걸어가서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많은 군대라도 질려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군인의 명령체계입니다. 한마디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 이방인 백부장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만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천지의 주인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만 하시면 자기 종이 고쳐줄 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어떻게 이 사람에게 있었습니까? 예수님도 놀란 이 믿음은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도저히 인간의 조건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이 무슨 말씀이시건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매오가 눈을 떴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윤형주 장로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되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목사의 설교제목을 몇 가지만 소개합니다. “문제들로부터 유익을 얻는 방법”, “성경으로 축복받는 방법”, “대인관계를 바르게 하는 방법”, “돈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법”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것인가? 실패에서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위기에서 어떻게 담대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이 혼란 속에서 나 자신을 건져낼 수 있는가?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고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인 릭 워렌 목사의 설교제목입니다. 수요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조사하고 그것을 채워주겠다고 신문에 광고하여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렇게 성공하였다고 한국에서도 초청하여 대형집회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방법이 교회들마다 받아들여지고 있고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께서 믿음이 좋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집을 장사하는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 감히 나아가지도 못하겠다는 백부장, 저희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도 없다는 그 태도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대하였습니까? 결국에는 싫다고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예수가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백부장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이루어 질 줄을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이 어떻게 감히 자기 집에 들어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소문만 듣고서 이런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이런 믿음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만나 주시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다 흘려주셨습니까? 저는 감히 주님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마치 마지못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주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전에 정진욱 목사님이 헌신예배 설교 때에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온 교회가 여름수련회로 모였는데 사람들마다 자기들은 얼마나 바쁘고 중요한 일을 제쳐두고 수련회에 왔다는 이야기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는 자기 같은 사람이 이런 수련회에 오도록 불러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오셔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까? 아니면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혹시나 있다면 어떻게 하나? 보험 하나 드는 셈 치고 교회는 나가 주겠다. 그런 마음은 아닙니까? 아니면 교회가 무엇을 채워준다고 하기에 오셨습니까? 백부장의 이런 믿음을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사도행전 10장에도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백부장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경건하여 항상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베드로를 청하라는 환상을 보고서 베드로를 청합니다. 베드로도 환상을 세 번이나 보았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하고 있을 때에 이방인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이 왔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고서 고넬료의 집에 갔더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놓고 베드로를 맞아 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라고 하면서 말립니다. 그리고서 서로의 환상을 말한 후에 복음을 전하고 그들도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셨다는 것을 베드로로 하여금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방인 백부장 두 사람이 어떤 믿음인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이방인의 백부장,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에게조차 무릎을 꿇은 이방인 백부장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 앞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1:8-9절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더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 신앙의 내용이 아닙니다. 영혼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예수님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사람보다 더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여 저에게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주여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이런 믿음이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 말씀대로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 앞에 자신을 제대로 아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 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모든 무릎이 다 그 앞에 꿇게 될 것입니다(빌2:1-11). 
 

 

 

누가복음 7:11-17 불쌍히 여기심 2007. 3. 25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서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무엇입니까? 단지 소문만 듣고서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종이 나을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남의 수하에 있고 자기 밑에도 부하가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자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또 믿음이 크다고 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개같이 여기는 이방인 여인 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 딸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기를 원하자 주인의 떡을 가지고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에 옳습니다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나 그 백부장의 종이 고침을 받고 그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님은 성경에 있는 말씀도 제대로 보지 못합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대로 믿고 구하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통용되는 믿음이 좋다, 믿음이 크다는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든 그 시대의 영향을 다 받게 됩니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의 근대사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수탈,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경제적인 기적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성장의 이면에는 수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사람대접 받지 못하며 열악한 환경가운데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수출만 많이 하면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죽어 가도 국가에서 수출의 날에 몇 만 불 수출을 달성하였다고 표창장을 받고 특혜를 받아왔습니다. 군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군대식으로 밀어붙인 것입니다. 하면 된다! 는 것입니다. 심지어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교회는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을 축복이라고 성공이라고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보기보다는 권세에 줄을 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도 그러하였습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세가 그렇게 흘러간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출만 많이 하면 상을 받는 식으로 교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로 어떤 목회자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개척을 하여 수 천명 수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성공하였다는 이야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한국에 다 있다는 이야기, 경제 기적을 이룬 한국이 교회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단 기간에 부흥을 이룬 적이 없다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로마의 권력과 유대교의 종교권력이 결탁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 같은 모습인지 이런 교회가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서 된 일입니다. 그러니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백부장의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이라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하여 회당도 지어준 사람입니다. 유대의 유력한 장로들을 친구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나인 성으로 가십니다. 나인 성은 가버나움에서 하룻길 정도입니다. 이 나인 성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죽은 자를 메고 오는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죽은 자는 과부의 독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과부란 그야말로 비천한 사람입니다. 요즈음처럼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어서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얻어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 과부의 유일한 희망인 아들 그것도 독자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도 듣지 못하였는지, 들어도 예수님께 나아올 형편이 못 되었는지, 그 독자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그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과부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위로 하겠습니까? 제가 어릴 때에 이런 예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독자가 죽어서 스님에게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스님이 마을로 가서 한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사람의 집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가져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안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결국 돌아다니다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죽어서 장사 지내려고 가는데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연히 이곳에 오신 것이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들 피하여 가는 사마리아 우물가를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가셔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세리장인 삭개오가 올라간 그 뽕나무 앞으로 우연히 가신 것이 아니듯이 나인 성에도 이 여인과 그 아들을 구원하시려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 가신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혹시 들었더라도 백부장처럼 회당을 지어준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친구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과부요 하나뿐인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과부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백부장이나 수로보니게 여인 역시 자신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신이 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물론 이조차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좋다는 말을 할 때에 자신이 불쌍하지 않고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여야 하는데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고 있기에 자기의 약함과 못남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하여 가면무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3편을 봅니다. “1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이 간구가 긍휼을 받은 자의 간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더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과부입니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되시니 장례행렬이 멈춥니다. 여기서 관이란 우리나라식의 관이 아닙니다. 시체를 베로 싸매고서 들것에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들것에 손을 대는 것은 시체와 접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서 깨끗함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정함을 자신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이제는 저주의 죽음조차 자신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그 관에 손을 대시고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씀을 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그 자리에서 말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그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은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합니다. 이 죽은 자를 살리심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돌보고 계신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큰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중에 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가 다 죽은 자를 살려냅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살려냅니다. 엘리야의 경우를 열왕기 상 17장에서 보면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가 사렙과 과부 한 사람에게 갔다는 그 과부입니다. 엘리야가 3년 6개월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으리라는 예연을 하고 그릿 시냇가에 가서 까마귀의 공궤를 받다가 시냇물이 마르자 하나님께서 시돈 땅의 사렙다 지역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 과부에게 명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물론 과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과부가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을 때에 엘리야가 가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물을 가지려고 가려고 하는데 떡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자기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통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그 아들의 죽음입니다.

 

 

 

 

이 과부의 절망을 아시겠습니까? 먹고 사는 것의 해결이 문제가 아니라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마 독자일 것입니다. 이때 과부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왜 내 죄가 기억나게 하려고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살립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과부에게 주었을 때에 과부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말씀이 진실할 줄 아노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바로 자기 말씀으로 죽은 청년을 살려 내십니다.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5:19-29절을 봅니다. “봉독” 아들도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아들을 공경하게 합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 아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것입니까? 지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을 살아난 것입니다. 마치 죽은 청년이 살아나듯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죽어있는 자들입니다.

 

 

 

 

죽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게 되었다면 죽은 자의 노력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불쌍히 여김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 긍휼이 심판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긍휼 안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긍휼을 입은 대로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이웃도 긍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7:18-35 무엇을 보려고? 2007. 4. 1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세례요한이 외쳤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지 심중에 의논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과 불이란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이루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타작마당에서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시기에 회개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신데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신 것을 세례요한이 보고서 이 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그 어느 누구도 눈치 보지 않고 담대하게 회개를 외친 사람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안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이 이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제 더욱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그 당시의 통치자인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염려가 없었습니다. 메시아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예수님께서 타작을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된 종교지도자들을 물리치고 완전한 개혁을 하고, 정치권력도 물리치고 완전한 독립을 하는 그런 일들을 예수님께서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이런 소문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의심이 되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묻습니다.

18-21절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자신이 세례를 베풀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한 그분이 바로 오실 분이라는 지시를 받고서도 지금 의문이 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질문을 예수님께 할 때에 마침 그 현장은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를 고치시며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시는 중이었습니다.

 

 

 

 

22절입니다. 세례요한에게 대답하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가 와서 구원을 베푸실 모습을 예언한 내용들입니다. 이사야 35:5,6절과 이사야 61:1절을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그리고서 추가적으로 한 말씀 더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보고서 실족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실족하게 됩니까? 사람들이 평소에 기대한 메시아상이 다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의 기록된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역시나 자기 중심적인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렇게 실족할 만한 일들은 구약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시편 73:1-14절입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을 보면서 실족할 뻔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런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습니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니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언제 실족할만한 때를 만납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열심히 했는데도 예수님이 전혀 도움을 주시지 않을 때에 과연 예수님이 살아계시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왜 그런 의문이 드는가 하면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교회의 목사들이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대구 성서아카데미의 정용섭 목사님이 이번의 설교비평을 한기총 대표인 박종순 목사의 설교로 하였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들로 설교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고서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 예수님 믿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들 이야기를 예화로 말 하면서 예수님이 인생 성공의 마스터키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경의 예수님을 보면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에 실패한 길이요, 망한 길이요, 저주의 길로 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모습입니다. 구약에서조차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핍박과 고난을 받고 악인은 형통하여서 이것 때문에 실족할 뻔 했다고 증거 하고 있는데 신약에서 이미 밝히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의 성공을 이야기하기에 그들이 지금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24-25절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고 나서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고 물으십니다.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사람은 왕궁에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려고 교회당에 왔습니까?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좋은 옷 입고 화려하게 차려입고 사치하는 것을 위하여 오셨습니까? 세상의 성공을 빌어주고 내 소원 성취하는 곳이라고 오셨습니까? 그러면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교회란 자기의 소원과 뜻이 날마다 뭉개지고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평소에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여도 자기 집착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26-2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선지자들보다 더 큰 선지자라고 합니다. 27절의 말씀은 말라기 3:1절의 말씀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메시아 앞에 길을 준비할 선지자가 온다고 한 그 선지가가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표 하는 것이기에 그 예언의 결국을 세례요한이 목격하였기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례요한이 누구를 증거 하였습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세례요한보다 큰 자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세례요한은 노아보다 모세보다 다윗보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 보다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다니엘보다 더 크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세례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져서 예수님을 지목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크다는 말은 개인의 권능과 역할과 일의 양의 따른 것이 아니라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보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서로 비교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는 차원에서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말씀은 28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과 성령의 임하심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직접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들보다 크다는 의미가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크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보든지 신약의 사도들을 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기 위하여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것입니까? 그것도 부족하다고 자꾸만 더 모으자고 하는데 과연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는 곳입니까? 세상의 영광과 자랑거리를 보여주는 곳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이 심판 받는 곳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전하여야 하는 곳입니까? 나의 뜻은 무너지고 주님의 뜻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저 나는 피조물로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증거 하는데 여러분은 아멘으로 화답이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실 때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를 29-30절입니다.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일반 백성들과 세리들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무시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며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배척한 것입니다.

 

 

 

 

31-32절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노는 것입니다. 하나는 결혼 놀이이고 하나는 장례놀이입니다. 결혼놀이는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아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과 함께 놀기 위하여 놀이를 바꾸는 것입니다.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는데 춤추는 일이 재미없다면 장례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곡을 할 테니 울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울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있지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것을 아주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는 무슨 도를 다 터득한 것처럼 도도하게 구는 사람들 있습니다. 함께 어울리지 않고서 콧방귀나 뀌는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이 비유를 가지고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떡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로 모여서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아야 합니다. 누가가 왜 누가복음을 기록한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 사도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고 무엇을 하셨는지를 믿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 눈앞에 무엇이 보입니까? 율법적인 행함으로 갈라디아 성도를 꾀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만사형통한다고 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을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세상이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여 지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무나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5절에서 지혜의 자녀들만이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7:36-50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2007. 4. 8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겨울에 죽은 것처럼 보이던 각종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연한 새잎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연이란 순환한다고 보았습니다. 봄은 죽은 자연이 살아난다고 보았기에 봄의 축제를 열었습니다. 겨울이 긴 나라일수록 봄을 더 기다려왔기에 그 축제의 열기도 더하였습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죽어도 다시 순환한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고 겨울 지나 봄이 오듯이 다시 살아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세워진 것도 사후세계를 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면 가장 공들여 작업하는 것이 피라미드입니다. 진나라의 시황제의 무덤은 천상과 지상을 무덤 속에 다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는 아직 다 발굴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소멸되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본능입니다. 다만 죽어서의 영원함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도 가치 있게 요즈음 말로 존재감 있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믿고 종교를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 갈 때도 나의 존재가 부각되는 삶을 살기 원하고 죽어서도 좋은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은 교회로 옵니다. 교회에 오니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부활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래서 부활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활절을 지키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욕망하는 것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영광의 세계를 이 세상에서 맛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7-11절입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유대인들도 부활을 믿었습니다. 죽고 난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자기 오빠 나사로가 죽은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처럼 바울도 그렇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며 생명인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많은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바울이 제대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유익하게 여겼던 것을 이제는 모두 다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활이든 영생이든 죄 사함이든 성경의 모든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소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그 부활도 무엇 때문에 일어난 부활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는 부활이란 거저 세상의 축제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 부활하신 주님의 보내신 성령이 임한 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바라는 것은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을 알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본받을 것이 따로 있지 죽으심을 본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왜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죽으심 안에서만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절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탄절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절기로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자가 부활에 참예한 자라는 것입니다.

 

 

 

 

부활절이라고 해서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중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바리새인은 자기의 마음 넓음을 보이고 싶었든지 아니면 자신이 예수님이 제대로 된 선지자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랬는지 자기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그 동네의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서 서서 눈물로 발을 적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 뒤로 갔다고 합니다. 정면으로 오지도 못하고 발 곁에 서자 말자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적셨는데 계속하여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곧 그 발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눈물로 발을 적시고 그 발을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발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영광이라고 합니다(고전11:15). 물론 이것은 권세아래 있다는 표가 됩니다만 여자의 영광이라는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발을 적시고 그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은 후에 향유를 그 발에 붓고 그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합니까?

 

 

 

 

39절입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합니다.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이라면 어떤 죄인이었을까요? 죄를 짓되 마음속으로 지었거나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동네사람들이 모를건데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이라면 아마 창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만지면 예수님이 부정하게 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여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니 선지자도 못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시몬아 내가 너에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답변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합니다. 어떤 두 사람이 빚을 졌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둘 다 갚은 것이 없어서 둘 다 탕감 하여 주었다면 둘 중에 누가 더 탕감하여 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질문입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 죄 많은 여인과 바리새인과 비교를 합니다.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로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손님이 오면 발 씻을 물을 주고 종을 시켜서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인데 그런 예의조차도 행하지 아니한 바리새인입니다. 너는 입 맞추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발에 입을 맞추기를 쉬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너는 감람유도 내 머리에 붇지 아니하였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발에 부었다고 합니다. 입을 맞추거나 향유를 머리에 붓는 것은 손님에 대한 예의이며 친근함과 존경을 다 표하는 것입니다.

 

 

 

 

47절을 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죄를 사함 받았습니까? 죄를 사함 받았기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미 사함을 받았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은 자신이 사함을 받을 일이 없다고 여긴 사람이지만 이 여인은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용서 받았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죄는 감추고 있을 때에 두려운 것이지 공개되고 용서되었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죄를 용서하신 주님 앞에 서니 지금까지의 조롱과 멸시가 무섭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은 남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죽음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용서하신 주님 사랑 앞에서 모든 수치와 두려움이 다 날아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임을 맛 본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를 미리 맛 본 것이라면 너무 지나친 비약이겠습니까? 다시는 정죄함이 없는 세계를 지금 예수님 앞에서 눈물겹도록 생생하게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48절을 봅니다. 이에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미 죄를 사함 받았기에 기쁨과 감사와 사랑의 눈물로 발을 닦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발에 부어 발에 입을 맞춘 것입니다. 그 죄 사함을 공개적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함께 앉은 자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49절입니다. 그들이 속으로 말합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인줄 알아보지도 못하는 자로 알았는데 이제는 죄도 용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니 더욱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중풍병자에게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해결되어야 사망이 해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를 사하신다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떡을 주시면서 자신의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주시면서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를 살리는 참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만 죄 사함이 있고 영생이 있고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속죄를 입은 자는 자신의 죄를 알면 알수록 더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주님의 죽으심의 사랑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오늘 학습문답을 하고 입교를 하는 여러분들이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이 질문에 함께 아멘하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대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인 줄 알며,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서 구원 얻을 것밖에 소망이 없는 자 일줄 아느뇨? 그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죄인의 구주 되시는 줄을 믿으며 복음에 말한 바와 같이 구원하실 이는 다만 예수뿐이신 줄 알고 그만 믿으며, 그에게만 의지하느뇨? 

 

 

누가복음 8:1-3 예수님이 반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2007. 4. 15

 

1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사십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이는데 황금보석 꾸민 집에 죽음도 고통도 없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의 열매가 달마다 맺히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 됨을 생각하고, 병든 자는 병이 없는 세계를 생각하고, 차별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면 차별을 받지 않는 나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범죄이후에 언어가 혼잡하게 되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똑 같은 말을 듣는데도 해석은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각 사람에게 선이해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선이해란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 이익이 되도록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산’이라고 말하면 각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 산에 대한 이해나 해석이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산’ 그러면 여전도회원은 5월 첫 주에 산행을 생각할 것입니다. 광산업자는 어느 산에 무슨 지하자원이 있는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부동산 업자는 그 산이 투자 가치가 있는 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서도 각자가 자기의 이해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만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이 다 그렇게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식은 복음 즉 복된 소리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된 소식인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신 예수님이 받으신 대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습니까? 배척을 받았습니까? 배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자들은 죄인들과 창기들과 세리 같은 그 시대에 왕따 당하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구실 한다고 여기는 자들 경제적 여유도 있고, 상식과 교양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고 심지어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까?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기들이 들어가는 나라로 여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보다 더한 에세네파 사람들은 바리새인도 이미 세상에 타협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 사막의 동굴 같은 곳에서 은둔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들만의 나라로 여긴 것입니다. 열심당원들은 무력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반포는 그야말로 한심한 수준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조차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영토와 백성과 주권이 있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아니할 강력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특히 그중에 남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 힘으로 통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주변에 모여드는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여인들이 아이들을 안고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았던 것은 자기들이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데 도움도 되지 않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몰려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시고서는 천국은 이런 어린아이 같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주는 대로 받은 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부모가 주는 것을 싫다고 내팽개치는 아이는 벌써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지 제자들처럼 자기들의 세를 결집하여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는데 두 그룹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자들로 구성된 열두제자들이고 한 편은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여자들을 함께 이끌고 계신 것입니까? 남자 제자들이 추구하는 모습과 여자들이 추구하는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예수님께서 뽑아서 데리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12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고 자기들도 체험을 하면서 따라 갑니다만 여전히 세를 결집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서로 높으냐면서 서로 시기 경쟁하면서 예수님께 줄 서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유력한 대선 주자들에게 줄서기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측근이 되어서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것 다투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동상이몽이 따로 없습니다.

 

 

 

 

반면에 여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서 자원하여 따라 다니는 자들입니다. 지난주에 본 내용은 죄 많은 한 여인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마 창녀일 것입니다. 그런 여인이 사람들의 눈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공개적인 식사자리, 그것도 남자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나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아니한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 용서를 맛본 여인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여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3절 말씀에 보면, 다른 여자들도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섬겼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맛 본 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섬긴 것입니다. 그 중에 이름이 나오는 여자가 세 사람입니다.

한 여자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인 마리아라는 여자입니다. 귀신이 하나도 아닌 일곱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형편이 얼마나 비참한지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들려 병도 있었던 여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녀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으니 창녀보다 더한 지경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 다녔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 가버린 고난의 현장, 그 십자가의 처형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벽 미명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장 먼저 간 여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남자들처럼 한 자리 하려고 쫓아다녔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그 사랑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여인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입니다. 이 여인도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여인인데 그 남편이 제법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지위에 있어도 그 당시의 여인들의 지위는 남편의 소유물 정도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단 한번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수산나입니다. 이 여인은 어떤 내용이 없습니다만 예수님을 섬긴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이름을 모르는 여러 여자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자기들의 소유로 섬겼습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섬겼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인가 하실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여자에 대한 태도는 조선시대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안방마님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여인으로 산다는 것은 남자들에게 복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오죽 하면 남자들이 기도할 때에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할 정도였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주변에서 여자들이 따라 다니며 섬겼다는 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랍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랍비가 여인들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요한복음 4:27절입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제자들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이상히 여길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실 때에 그들을 공궤한 자들이 여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것입니다. 예수님 따르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란 제자들이 상상하는 힘과 무력의 나라가 아니라 멸시받고 천대받았던 여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그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자들입니다.

 

 

 

 

여자만 이야기 하였는데 남자 이야기도 하겠습니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였던 사람이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율법에 흠이 없을 정도이고 유대교에 충실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바로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를 용서하시고 사도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1:12-17절입니다. “봉독”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인 자신이 긍휼을 입은 까닭은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면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을 구원하신 것은 자기에게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셔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반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세상의 나라들은 오늘도 능력 있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약한 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죄인과 무능한 자들은 퇴출되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 하나님의 나라에 누구를 초대하고 있습니까? 세리와 창기 죄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엄청난 용서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계산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향유옥합이 얼마인데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면 될 텐데 그러한 계산이 나오지 않는 세상입니다. 예수님만 눈에 보이고 다른 것은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맛 본 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섬기며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은혜를 맛보았습니까? 잠시 잠간이라도 맛을 본 사람만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반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용서의 나라이기에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를 죽였는데 그는 오히려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이 흔적을 지니고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를 미워하여 배척하고 죽였는데 그는 오히려 나를 살려내신 그 황당함, 놀라움, 죄송함, 감사함을 더욱 많이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8:4-15 하나님 나라의 비밀 2007. 4. 22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바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지만 평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다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척받았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4-8절의 말씀은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평범함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게는 조금 의아한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씨를 뿌리는데 아무렇게 길이나 바위나 가시덤불 같은 곳에 뿌리는가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씨앗을 뿌릴 때는 밭을 일구고 골을 지어서 조심스럽게 뿌립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씨앗을 먼저 뿌려놓고서 밭을 갈아엎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평소에 밭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지나다님으로 길이 되고 가시들도 자라는 곳이 있지만 그런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씨를 뿌리기 때문에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사람들에게 밟히기도 하고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바위위에 떨어져서 발아는 하는데 습기가 없어서 말라버리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져서 가지가 함께 자라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은 들으라고 외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기에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것입니다. 아주 불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친절하게 설명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듣도록 해야지 어떻게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9-10절을 봅니다.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비유의 뜻을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다 어렵지만 이런 말씀은 정말 어려운 부분입니다.

왜 어려운가 하면, 우리가 흔히 전도를 할 때는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듣게 말하고자 합니다. 말로 해서 안 되면 행동으로도 합니다. 친절하게 대하기, 선물하기, 이벤트 마련하여 초청하기를 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행사를 하면서도 합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전도하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전도를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 전혀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소개되는 전도방법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어느 방법도 예수님의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너희와 저희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할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가 있음을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구원할 자는 귀를 열어서 알아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할 자는 아예 알아듣지 못하도록 만드시는 것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라면 공평한 룰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해석이 분분하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차별대우일 것입니다. 부모가 죽도록 일하면서 명문대학에 보냈지만 그러나 미국의 주류사회에 가입하기란 얼마나 큰 장벽이 있겠습니까? 법적으로는 다 공평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적인 장벽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예수님처럼 약한 자를 위하여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늘 이 말씀을 그 청년이 들었다면 예수님을 향하여 살의를 느낄 것입니다. 왜 차별대우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쉽게 말씀하셔서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지 않으시고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게 하셔야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미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셔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10절 말씀에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의 성취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사야 6장 9-10절입니다.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자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둥병자는 입술을 가리고 자기를 부정하다고 해야 하는데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니 자신이 부정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천사가 제단 숯불을 가져다가 그 입술을 지지면서 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하늘에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음성을 듣고서 이사야 선지자 제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시면 무엇을 위하여 보내셔야 합니까?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가야 할 텐데 오히려 회개하고 돌아오지 못하도록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염려가 되기에 막아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막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것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마다 전도를 그렇게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전도 간증집회를 하고 세미나를 하고 어떻게 하면 전도를 많이 해서 교회의 수를 채우고 천국을 채울까 하는 이야기들은 그 안에 뭔가 수상한 것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눈을 막고 귀를 가리게 하는 이런 말씀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성경말씀에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딤전2:4). 그러나 이 말씀도 그 뜻이 다르게 쓰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라고 보아도 전도에 대하여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12절 에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뜻에 대하여 아멘이 나오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비밀이란 알려줄 사람에게만 알려주고 몰라야 할 사람에게는 완전히 모르도록 차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사람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찾아내시겠지만 천국에 들어와서는 안 될 사람은 단 한명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자신 있게 증거 하지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을 힘쓰면 뭐하느냐? 그냥 놀자! 내가 택함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 살아도 구원받을 것이고, 내가 택함을 받지 못하였다면 아무리 노력하여도 구원받지 못할 것인데 죽도록 헌금하고 교회봉사해도 천국 못갈 것 뭐하려고 하느냐!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자! 이런 식으로 나올까 봐서 그렇게 전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염려가 있기에 이 씨 뿌리는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밭의 반응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이 비유의 해석을 밭의 반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밭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분이시고 그 씨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해석에서 나오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이 이 비유를 밭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좋은 밭이 되라는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밭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예수님의 비유 해석을 들어봅시다. 12-15절입니다.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을 말씀을 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바위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을 못하는 자라고 합니다. 좋은 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해석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는데도 마귀가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4:3-4절은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이 가려진 것은 망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섬긴다는 자들이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자들입니다.

 

 

 

 

바위위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먹을 것을 주셨을 때에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가 영생의 양식임을 말씀하시자 다시는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다. 지금 한국에 이런 조짐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이미 챙길 것 챙겼으면 떠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얻는다는 것 챙겼으니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서 온전한 결실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천국 비유를 알아듣게 해석을 받은 제자들은 열매를 맺었습니까? 세상의 염려를 하지 않고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일락에 빠지지 않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서 끝까지 그 말씀을 지켜서 결실을 맺었습니까?

 

 

 

 

예수님께 직접 이 비유의 말씀과 해석을 들은 제자들 중 단 한명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는 현장에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보고 있다가 사람들이 너도 그들과 한패라고 하니 세 번이나 부인하는데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천국비유를 가지고 사람들이 좋은 밭이 되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면 제자라도 한 사람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천국의 비유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자고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몰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있는 자는 천국이 있고 예수님이 없는 자는 천국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천국을 이루어내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였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백배로 열매 맺은 것입니다. 백배란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는 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것입니다. 골로새서 1:13절에서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예수님의 공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가 누가 있습니까? 일상의 안락함과 쾌락을 피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순종하셨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 이루심이 백배의 열매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그 다 이루심의 공로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계속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겠습니다만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말씀과 다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깝다는 것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로 해결을 합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맺으신 열매로 자기 백성을 다 찾아 나서기 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로 증거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들은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들어가게 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자들입니다. 더 이상 자기의 행위나 공로로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자기의 나라는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나라만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께서 거저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에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 천국을 맛본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8:16-18 어떻게 보고 듣는가? 2007. 4 29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사람의 감각이 흔히들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시각과 청각이지요!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면 이 사람의 처지가 어떨지는 당사자가 되어보지 못하고서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도 답답하지 않는 경우는 태어날 때부터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면 답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시각과 청각이 없는 것으로 태어난다고 봅니다. 이것을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데 비유로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듣게 하시고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아듣는 사람도 자신의 능력으로 알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지난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의 성취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언제까지 이렇게 되는지를 묻습니다.

 

 

 

 

이사야 6:11-13절입니다.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 땅이 황폐하게 되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도 그 마저 베임을 당하게 되어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 유다가 망해야 하는 것입니까? 거룩한 씨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살게 된 것은 그들의 능력으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씨로 인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살기에 나라가 망함을 통하여 그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받아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듯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가운데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실체가 바로 거룩한 씨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이 감겨지고 귀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거룩한 씨가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1장부터 보아온 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한 것입니다. 거룩한 영으로 잉태하여 거룩한 씨가 이 땅에 오셨기에 이제는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되어있다는 것을 확인시키시면서 자기 백성을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16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는 것은 어두움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면 그릇으로 덮어두지 않습니다. 옛날에 불을 끌 때에 그릇으로 덮어서 끄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을 켜면 그릇을 벗기고 불을 밝혀 등경위에다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들어가는 자들이 그 빛을 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누구나가 다 알아듣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천국의 복음을 담아두셨기에 사람들이 그 진의를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못 알아듣는 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영적인 소경이며 귀머거리라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내용이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셨습니다. 그냥 지나치신 것이 아니라 응시하였다는 봅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보고 있기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자기 죄로 인한 것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유대인들은 죄로 인하여 장애가 왔다고 보았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죄가 커서 저렇게 태어났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서 그 사람을 소경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때가 아직 낮이니 우리가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있을 동안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 흙을 이겨서 그 사람의 눈에 바르고서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대로 하였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눈 뜨게 되었는가? 예수라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 눈을 뜬 날이 안식일이기에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눈을 뜨게 하였는가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소경으로 있다가 눈 뜬 자에게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선지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믿지를 못하고서 부모를 소환합니다. 부모들에게 묻자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분명한데 지금 눈 뜬 것을 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대답을 하는가 하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다시 소경을 불러서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 즉 예수가 죄인인줄 안다고 합니다. 그때 소경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내가 모르지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전에는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도 이렇게 말하였는데 왜 또 다시 묻는 것입니까? 당신들도 그들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그러자 벌컥 화를 내면서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말씀하셨지만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날 때부터 소경 된 자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 즉 예수가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어디서 온 줄을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한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는데 창세 이후로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오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열 받겠습니까? 그래서 소경 되었다가 보게 된 그 자를 향하여 내가 온전히 죄 가운데 태어나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며 쫒아내어 버린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납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합니다. 그가 누구신지 제가 믿고자 한다고 합니다. 네가 그를 보았다고 하자 주여 제가 믿나이다. 하면서 절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9:39-41절을 봅니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복음 9장을 길게 말씀드렸지만 이 말씀이 결론입니다. 보는 자는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게 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성경을 잘 알고 성경대로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바리새인들, 자기들은 소경이 아니며 눈 뜬 자들이기에 빛의 자녀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죄인취급하고, 장애인들 특히 날 때부터 장애인이 된 자들을 온전히 죄 가운데 태어났다고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전부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소경이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왜 본다는 자들이 알아보지 못하였습니까?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숨겨지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천국의 비유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라고 합니다. 씨앗 중에도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로 비유합니다. 누룩이 가루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어떻게 드러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빛을 좋아하였는지 어두움을 좋아하였는지 복음이 증거 되면 다 드러나게 됩니다. 복음이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다 폐기처분합니다. 인간의 선함과 착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만으로 의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오실 때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등불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과 등불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세의 교회당에 그려진 그림들이나 수많은 그림들, 거룩한 그림이라고 성화라고 하는 그림들을 보면 예수님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거의 대부분 예수님을 특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모습이 후광이 비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중세에는 대부분의 민중들이 글을 몰랐기에 그림으로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림들을 보면 예수님은 아기 때에도 후광이 비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후광이 비치는 분이라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였을까요?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으셔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 세상의 등불이며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세상의 영광을 보는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캄캄한 어두움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헛된 영광으로 보이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늘의 영광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이 빛이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생명이 없기에 이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지만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빛을 증거 하는 사람이 왔으니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빛이 아닙니다. 빛을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새롭게 살아난 자들입니다. 물론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18절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정죄로 바꾸어도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께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빛으로 오는 자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1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듣는지 삼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나의 뜻이 뭉개지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고백하십니까?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죽는 것임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날마다 부르짖는 아우성이 날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다른 가정보다 다른 교회보다 더 낫게 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영광을 보고서 부르짖는 것입니까? 소경이기에 그렇습니다. 귀머거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무엇을 듣는지를 삼가라고 합니다. 생명의 빛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은 더 받겠지만 없는 자는 그 있다고 여기는 것조차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다고 여기는 것조차 빼앗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복음을 듣고서 더 받아 풍성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자신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다고 여긴 그들의 의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조차 다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보고자 합니까? 무엇을 듣고자 합니까? 주님께서 무엇을 듣는지 삼가라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자 하는지 삼가라고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잘못 듣는 것입니다. 허무에 굴복할 것들을 성경을 통하여 준다고 약속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세계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평소에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합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를 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디모데후서 4:1-4절 말씀을 봅니다.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버리고 귀가 가려져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들을 좇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들으려고 합니까? 우리를 좋게 하는 이야기라면 그것이 죽는 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를 죽이는 말씀이라면 그것이 사는 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받기로 작정되어 있는 사람은 받아서 더 풍성하게 되지만 받기로 작정되지 않은 사람은 평소에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여기고 무언가 한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들까지 다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어제 토요일 부산의 장 목사님과 권사님이 오셔서 오랫동안 교제를 하고 갔습니다. 왜 오셨느냐면 복음 안에서 교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교제를 하였습니다. 복음이 얼마나 좋은지 70이 된 연세에도 이렇게 쫓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더 풍성함을 맛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엇을 듣는지 삼가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있는 자는 받아서 더 풍성한 복음의 세계를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8:19-25 새로운 가족 2007. 5. 6

 

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5월은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주제로 한 설교들을 많이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가정이 많이 무너지고 있기에 가정의 회복을 말하는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자기 가정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 이런 말들이 무엇을 뜻합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혈연중심으로 뭉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정의 행복을 위한 예수라면 더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가정생활세미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의 가정생활 세미나를 들어보았지만 들어본 사람들 중에는 오늘 본문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부목사 때에 한국에서 알아주는 가정 사역을 하는 목사가 여전도회 헌신예배에 강사로 와서는 가정 세미나를 하는 것입니다. 주제는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격려하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찾기는 하였는데 히브리서 10:24절이었습니다. “서로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며” 딱 한절 읽어놓고서는 부부가 어떻게 서로 격려함으로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인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문은 무슨 말씀입니까?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어떤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합니다. 그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권함과 격려는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나갈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종말론적인 소망 안에서 부부끼리 격려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로와 격려가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늘을 소망하는데 한 사람을 땅의 것을 소망한다면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싸움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을 5월 달에 전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겠습니까?

 

 

 

 

지난주에 보았던 누가복음 8:18절을 다시 봅니다. 무엇을 들을 것인지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여기는 것 까지 빼앗기리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은 가족이기에 그 말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가족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들이 있다고 여기는 것 까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듣는지 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19-21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예수님께 왔으나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어서 가까이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친과 동생들이 얼마나 섭섭하였겠습니까? 섭섭한 정도가 아니라 미쳤다고 여긴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21-35에서 보면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장자라면, 요셉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찍 죽은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장으로 결혼도 하고 그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데 가족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귀신도 쫓아내고 기적도 행한다고 하니 친척들이 미쳤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사단이 어떻게 사단을 쫓아낼 수가 있겠느냐고 합니다. 나라나 집이나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강한 자를 결박함으로 그 집의 세간을 늑탈하여 내듯이 지금 예수님은 강한 자 사단을 결박하였기에 귀신 들린 자를 고쳐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으로 나타나는 일인데 그것을 훼방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몰라보는 그들이 바로 사단의 권세아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친속들과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찾아 집으로 데려가려고 온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혈연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기존의 혈연중심의 가족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가족체계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인 것은 나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원하셔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족에 편입하고 싶어서 오셨습니까? 내가 지금 소속하여 있다는 나의 가정, 직장, 나라들은 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래 버텨 보았자 몇 년을 버티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내 가족을 챙긴다고 하여도 얼마나 챙기겠습니까?

지난주에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고인을 먼저 보내는 가족들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그 호흡을 하나님께서 거두어가시면 더 붙들고 싶어도 붙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유언으로 예수 믿을 것을 가족에게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참 인상 깊었던 한 마디는 마지막 하관을 마치고 나서 인사하고 돌아오는데 미망인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기쁨이 있을 줄을 몰랐습니다” 그 기쁨의 뜻을 다 알지 못하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그렇지요! 슬픔이 아니라 소망이기에, 하늘나라 새 가족이 되었기에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족, 하나님의 식구가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따라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을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자 내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에 그 부자 관원이 재산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킨 저런 사람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길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1절에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3장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모친이며 형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 신구약 성경 66권 절수로는 30993절이나 되는 말씀을 무슨 수로 다 지켜 행하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는데 이 성경 전체를 한 마디로 줄여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한 줄로 줄여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에게 일체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8-40절입니다.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찢어주셨습니다. 자신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썩는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영생하는 양식인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주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만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렇게 행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 능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22-25절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 배를 저어 호수 건너편으로 가는데 갑자기 돌풍이 몰아쳐서 배에 물이 가득하며 죽게 되었습니다. 온간 노력을 다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예수님께서 잠을 깨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결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 내용을 시편 106편 9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홍해 바다를 꾸짖으신 분이 갈릴리 호수의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이 자기 가족을 만드시는 일에 실패란 없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부자가 되든지 가난 하든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의 소원과도 상관없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가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맛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8:26-39 하나님의 일 2007. 5. 13

 

26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쌔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는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매 곧 잔잔하게 되게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홍해바다를 하나님께서 꾸짖으심으로 자기 언약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지금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배에 탔던 제자들이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결을 명하니 순종 하는고 한 것입니다. 아직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런 의구심을 가진 채로 갈릴리 호수를 건너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갔습니다. 이곳은 이방인의 지역으로 봅니다. 육지에 내리니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사람의 형편이 어떠한가 하면 오래 동안 옷을 입지 않고 집에도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합니다. 29절의 괄호부분을 보시면 귀신이 이 사람을 가끔 붙잡으면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둔 것도 끊어버리고 광야로 달려 나갑니다.

 

 

 

 

마가복음의 평행구절을 보면 좀 더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이 사람이 자기 몸을 돌로 치는 자학행위까지 합니다. 이렇게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신들린 자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귀신들린 자에게 물었습니까? 귀신에게 물었습니까? 지금 귀신 들린 사람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귀신에게 물은 것으로 봅니다. 그 이름을 물으심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군대라고 합니다. 많은 귀신이 들렸기에 군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이 군대귀신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말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깊은 구덩이인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단과 그 졸개들이 갇혀있는 곳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귀신들이 자기들의 운명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요한 일서 3:8절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귀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들의 멸망의 때가 된 것임을 알고 벌벌 떠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귀신이 간청하기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마시고 돼지 떼들에게 들어가게 명하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하는 것입니다. 그 수가 마가복음에 보면 약 2천 마리가 됩니다. 굉장한 돼지 떼가 죽은 것입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려고 왔습니다.

귀신이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는지를 보게 된 사람들과 그 근방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자 하시니 그 귀신 나간 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일일이 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한 것입니다.

 

 

 

 

이 결론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이 나간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제목을 무엇으로 정할까 한 주간을 생각해 보다가 막상 설교원고를 준비하는 순간에 이 본문이 보여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곧 누구의 일입니까? 예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면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합니다. 그것도 많이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도 복을 받자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면 인간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최종적인 증거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6:2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올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오는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보고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무리들을 보시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이란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았기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하면서 질문하였을 때에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믿음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할 일이 없군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우리는 속수무책입니다. 왜 그런지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이 귀신들린 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한 방법이란 쇠사슬로 묶어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자기들의 삶에 피해를 주는 요소들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쇠사슬도 그 세력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문열의 소설 ‘아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인데 희미한 옛 사람의 그림자라고 부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이 될 것 같아서 좀 길게 인용을 합니다. “이제는 부르는 쪽도 불리는 쪽도 꺼려하는 환유들이 있다. 앉은뱅이 절름발이 곰배팔이 귀머거리 벙어리 청맹과니 용천뱅이 곱사등이 언청이 외팔이 땅딸이 난쟁이 키다리같이 신체적인 흠결이나 질병의 후유증으로 그 사람 전체를 이름하는 말들이 그러하고, 미치광이 떼쟁이 비렁뱅이 바람둥이 덜렁뱅이 허풍선이 억보 떼쟁이 악바리 맹추 숙맥이 오입쟁이같이 정신적인 장애 혹은 불균형을 들어 비유의 대상을 갈음하는 말들이 그러하다.” 방금 인용한 이런 사람들을 요즈음 만나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사람들이 마을에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들과 우리가 별난 존재라고 여기지 않고 더더구나 그들이 격리되거나 소제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들은 사라지지 시작하였습니다. 정신병원과 각종 수용소 재활원 보호소 같은 시설에 그들을 가두었습니다. 생산능력이 없거나 사회 미관과 편의만 해치는 자들을 먼저 골라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을 몇 년 전에 보았는데 최근에는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서구에서 광기를 둘러싸고 실제로 이루어진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광기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보면 추방, 감금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광기의 규정을 보면 엉터리 같은 규정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광기의 역사를 인간의 이성과 권력이 결탁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이성이 이루어 놓은 일이 인간을 감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보편적이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인간들이 행한 일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경제적인 능력이 없거나 공동의 삶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격리시키고 추방시켜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마을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면 마을전체가 들고 일어납니다. 반대서명 받기 위하여 열심히 쫒아 다니는 사람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날 한국의 사교육 열풍을 보면서 다들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 미친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여 안달이 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저 자신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카드를 만들어 써 왔는데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잘 하겠다고 하고서는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6:26절을 기록하였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숙제보다 책 읽은 것을 좋아하고 학습지 보다 영화보기를 더 좋아하기에 자기 할 것을 하고 해라고 하니 이런 말씀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제가 평소에 늘 하는 말을 하기에 그런가 하였더니 ‘레나 마리아’라는 책을 보고서 적었다는 것입니다. 양 팔이 없이 태어난 장애인으로 복음성가 가수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릴 때 외롭고 힘들어 하면 그의 어머니가 이 말씀을 읽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어떻게 숨기려하고 버리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일이 있으면 숨깁니다. 교회 나와서도 서로 서로 가면을 쓰고서 가면무도회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해!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해! 주류에 들지 않으면 안 돼!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이렇게 자기 자신과 자녀들에게 수많은 쇠사슬로 묶어두고 있습니다. 그 쇠사슬로 묶어두지만 그것이 해결책이 안 됩니다. 폭발하게 되면 그 쇠사슬을 다 끊어버리는 폭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승희가 남의 자식이 아니라 우리의 자식이며 우리의 모습입니다. 한화그룹 회장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럴 능력과 힘이 없어서 그렇게 못할 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힘이 없고 못생기고 공부 못하고 가난하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람을 격리시키는 세상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책에서도 돈 벌어올 때는 귀하게 여기던 가족들이 몸이 아프면서 점점 곤충으로 변하자 결국 감금시키고 돌보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를 찾아 오셨습니까? 동네사람들이 사는 일에 방해된다고 쇠사슬로 묶고 격리시켜버린 그 사람을 찾아가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미쳤다고 쇠사슬로 묶어 격리시킨 사람들, 자신들은 미치지 않았다고 귀신에 사로잡히지 않았다고 정상이라고 여긴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내었습니다. 제발 떠나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렵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돼지 떼가 물에 빠져 죽었으니 경제적인 손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두려움은 빛이 어두움에 비쳤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진리가 임하니 두려운 것입니다. 자신이 평소에 정상적이라고 여기면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정생활 반듯하게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에베소서 2:1-3절을 봅니다.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본질상 진노의 자녀, 즉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말하는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장애인이나 사회적인 소수자들이 아닙니다. 아주 정상적으로 이 세상 풍속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다 해당되지 않습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데 우리는 다 이 세대를 본받고 살지 않습니까? 세상 풍속을 좇아 살면서도 자기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면서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지도 모르고 정상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참으로 귀신들린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왔습니다.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큰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세상의 풍속을 좇아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내리막길을 달려가던 우리를 건져내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이시고 함께 살리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 주셨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선물이기에 우리 자신을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크신 일이 바로 예수님의 일입니다. 귀신들린 자가 증거 한 내용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 한 것입니다. 전에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를 예수님이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하여 세상의 풍속을 좇아 달려가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자신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닌데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서 미쳤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그 미친 사람의 대열의 합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며 그들보다 더 열심히 달려갑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그길로 달려가는 거라사의 광인의 행렬입니다. 그런 곳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 그래서 소망으로 약속된 그 세계를 믿는다면 귀신들린 거라사의 광인이 고침 받은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하나님의 일 곧 예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이 증거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8:40-56 이야기 속의 이야기 2007. 5. 20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 두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43 이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51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보면서 우리는 자라왔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단순한 이야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태어나지 않고 저 아프리카 밀림 속에 태어났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 환경에 맞게 자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디에서 태어났든지 간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기나긴 겨울밤에 방에서 새끼를 꼬면서 선친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졸음을 이기고 새끼를 꼬는 능률을 올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옛날이야기, 야사, 일제징용 이야기, 그리고 초등학교 때는 대학생들이 농활을 와서 기증한 위인전기들을 읽은 재미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한 마디로 줄이라면 고진감래와 권선징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 역시 고진감래 권선징악의 이야기들을 들었던 것입니다.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등의 이야기를 세상의 이야기와 같은 주제로 들린 것입니다. 물론 제가 잘못 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오늘날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잘 못 들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결국 성경의 이야기나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별 다를 바 없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성경의 이야기 속에는 무엇을 담고자 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이야기라고 하면 어떤 분은 성경을 어떻게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말들과 이야기들은 세상을 사는 지식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을 사는 지식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세상을 사는 일에는 정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수요일부터 요한 1서를 보고 있습니다. 2:15-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입니까? 싫어서 귀를 막고 싶은 이야기 입니까?

 

 

 

 

그래서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을 대적하면서 다가온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대적하는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에 이 말씀은 나를 고양시키고 능력을 주어서 나를 높이고 성공하게 만드는 말씀으로 보시면 그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한없이 높아져서 신이 되고자 하는 나를 무너뜨리고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이야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누가복음 8:40-4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서 돌아오셨습니까? 거라사인의 지역에서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약 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물에 빠져 죽게 되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하였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까이 가시니 귀신들린 자가 온전하여 짐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귀신이 들렸든지 말았든지 재산상의 손해가 나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더 근원적인 두려움은 빛이 어두움에 비치는 것을 싫어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거라사 지역에서 다시 갈릴리 호수를 건너 돌아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환영을 합니다. 이들이 다 기다렸습니다. 왜 기다렸을까요? 진리를 보고서 기뻐하면서 기다렸습니까?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병을 고쳐주고 기적을 행하는 그런 예수님을 원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아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다 도망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야기는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 속에 회당장 야이로가 있었습니다. 회당장이라면 유대인 성인 10명이면 지을 수 있는 유대인들의 모임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설교도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율법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이런 곳의 회당장이기에 오늘날로 말하자면 당회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출교하기로 하였는데 어떻게 이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 집에 와달라고 간구할 수가 있습니까?

 

 

 

 

42절에 보니 회당장에게 12살 먹은 외딸이 병들어 죽어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행동이 평소에 명분을 찾더라도 정말 위급하여 보면 그 사람의 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상도 시골 아이가 서울에 가서 살면서 서울말을 배웠습니다. 명절에 돌아오는데 서울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친구가 너희 어머니 병들어서 다 죽게 되었다고 하자 갑자기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율법이 어떻고 이단이 어떻고 하다가 자기 외동딸이 죽어가게 되자 예수님께 엎드려 간청한 것입니다.

 

 

 

 

43-48절입니다. 여기가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들어있는 곳입니다.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기 위하여 회당장의 집으로 가고 계시는데 갑자기 등장한 이야기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이 여러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지만 그 가산만 다 허비하고 고침을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손에 대니 그 순간에 병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혈루증이란 계속 하혈이 나오는 질병이기에 고침받았다는 것을 본인이 바로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무리를 돌아보시면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아무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사람들이 옹위하여 미는데 누가 그랬는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답변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자신에게 손을 댄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내가 안다고 하시면서 손 댄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더 이상 스스로 숨길수가 없음을 알고 떨며 나아와 자기의 일을 다 고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그 옷 가에 손이라도 대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마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자기에게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이렇게 찾으시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오 우리의 체질과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는 분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 여인이 온전히 구원받았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시키고자 하신 것으로 봅니다. 유대사회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혈루증이 있는 여인은 부정하기에 더욱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숨기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드러내신 것입니다.

 

 

 

 

47절을 봅니다.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여인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믿음입니까? 분명히 여인이 믿었기에 여인의 믿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믿음이 나오는 것은 은혜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여인에게 주어진 믿음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결코 사람이 자랑할 수가 없고 그 믿음을 주신 분을 증거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49-56절을 봅니다. 이 여인을 고쳐주시는 동안에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은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딸이 죽었으니 이제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일부러 지체하여 죽게 하신 것처럼 지금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중에 그 한 여인이 옷에 손을 대고서 고침을 받았다고 하여도 그대로 두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먼저 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여인은 만성병이고 회당장의 딸은 무남독녀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회당장의 딸을 고치면 영향력 있는 사람의 병을 고쳤기에 예수님의 후원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마치 하얀 거탑의 의사가 의학협회 회장 부인 고친다고 자기 환자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처럼 해야지 출세할 것인데 말입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마 이 생각은 회당장의 생각과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교회도 교인은 목사를 닮는다고 하는데 회당장의 사람들도 회당장을 닮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급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기는 하였지만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쳐주시는 동안 속이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딸이 죽었다고 하니 그 집안의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드디어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아이의 방에 들어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울고 통곡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고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잔다고 하니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아프다가 죽은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먹는다는 것은 평소에 잠을 한숨 잘 자고 일어나서 배고파 먹을 것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의 능력입니다.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신 능력입니다. 귀신을 명하여 나오게 하신 그 능력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능력을 회당장이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제 회당장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놀라는 그 부모를 향하여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아니 이미 죽은 아이였고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살리셨는데 소문이 다 난 것인데 어떻게 그 부모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메시아 은닉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가 고침을 받고 나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증거 하였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 증을 앓은 여인은 숨으려고 하여도 예수님께서 기어이 드러내셔서 예수님의 일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왜 회당장의 부모에게는 예수님의 일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너는 예수님의 일을 알릴 자격도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귀신 들린 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가산을 다 낭비한 보잘 것 없는 자들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회당장은 더 놀라운 기적, 죽은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서도 입을 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라는 사람들이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이라고 봅니다. 공중에 새를 보라, 들에 백합화를 보라고 하는 말씀을 전하면서도 정작 저는 저의 안정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당회장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은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당회장이 되면 조직교회가 되고 위임식도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좀 더 조직적이고 모양새가 있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다가 좋은 예배당 건물이 있으면 부럽습니다. 우리보다 교세가 약한 교회들도 저렇게 자기 건물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이냐 하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설교 속에 예수님이 전적으로 일하셨다는 귀신 잡힌 자의 고백이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고백이 담긴 것이 아니라 회당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부디 바라기는 저의 이야기와 여러분의 이야기 속에 예수 그리스도만 담기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9:1-9 이 사람이 누군가? 2007. 5. 27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7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그들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런 권세가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에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모든 병을 고치는 능력만 주어진다면 세상에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내용을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일로 말하는 곳이 참 많습니다. 부흥회나 기도원집회를 선전할 때에 와서 지금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라고 합니다. 병원에서 포기한 각종 병을 고침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광고를 보고서 불치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병 고침을 받고자 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런 말을 믿고서 그런 곳에 가는 것입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신학생들이나 수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능력과 권세를 달라고 40일 금식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떻게 병이 고침을 받았다거나 귀신을 제어하게 되면 어떻게 선전합니까? 보라! 능력의 종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권세를 받았다고 해서 그런 권세를 자기들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러 가면서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쳐준다는 광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과 권세가 주님에게 있는 것이지 자기들에게 있지 않기에 자기들이 늘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어떻게 기도하다가 병자가 나았다면 그것을 두고두고 우려먹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고침을 받지 못한 자가 훨씬 많아도 그런 이야기는 다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면 이런 능력과 권세가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능력과 권세만 있다면 몇 달 안에 창원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일 것이고 몇 년 안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일 것입니다. 제가 처음 전도사 할 때에 담임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욕심이 참 많은 분이었습니다. 교회당도 크게 짓고 싶고 사람들도 많이 모으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만 한번 일으키면 되는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지난 주 사경회에서 들었습니까?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고 하나님의 뜻인 성경이 중간에 있으니 나의 뜻을 성경에 투사시켜 내가 좋아하는 구절들을 챙겨 와서는 그것을 성경에서 가지고 왔으니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든 교인이든 간에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고정시키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과 권세를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누가복음 10장에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갔더니 귀신이 제어되고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보고서 제자들이 놀라서 예수님께 보고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에서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이 무엇을 전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곧 그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을 믿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그 아들을 믿어야 가는 나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님의 방침입니다. 어떤 개그 프로그램에 회장님의 방침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회사의 회장 방침이라면 그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는 것을 비웃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그야말로 코미디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자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기에?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열두 해 혈루 증을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았습니다. 그 여인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분이 과연 누구시기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니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세워졌지만 딸이 죽었다가 살아난 회당장은 오히려 입을 닫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으로 증거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목사님 그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고 귀신이 제어되면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봅시다.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다 죽었습니다. 진짜 질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데 죽음을 이기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리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하여도 근원적인 고침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더 산다고 과연 좋은 것입니까?

 

 

 

 

구약의 히스기야를 보시기 바랍니다. 히스기야는 25세에 유다의 왕이 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합니다. 온갖 우상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음란하게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놋 뱀까지 부수어 버렸습니다. 대단한 개혁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여 전후에 그런 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앗수르 왕이 18만 5천의 군대로 쳐들어왔지만 기도하고 나니 그 다음날 그들은 다 송장이 되어 있었고 왕만 겨우 도망쳐가서 그 나라에서 죽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청천병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졌습니다. 이제 네 인생을 정리하라고 합니다. 그때 나이가 34세입니다. 아니 악한 왕도 아니고 그렇게 여호와를 의지하는 훌륭한 왕인데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가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흔히 아까운 사람이 빨리 죽으면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필요해서 빨리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멘하고 가면 될 텐데 히스기야가 면벽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한 것을 기억하여 달라고 눈물로 통곡합니다. 그러자 15년의 생명이 연장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15년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죽을병에서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사절단이 오자 기분이 좋아져가지고는 궁중의 보물들을 다 보여준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와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모든 보물들과 왕의 열조가 쌓아놓은 것들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요 왕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 중에서도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만이 아닙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13세에 왕이 되는데 히스기야 왕이 병이 낫고 나서 2년 만에 얻은 아들이 왕이 되어 온갖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이 엄청난 개혁을 하였지만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일을 인하여 유다를 물리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죽다가 살아난다고 인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적이란 병 고침을 받는 것보다 귀신이 쫓겨나는 것 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병 고침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죽어도 사는 영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제 귀신이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이 오늘도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지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은 죽는 것을 환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도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란 거지보다 못한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지도 자기 동냥 그릇이 있습니다. 자기 옷이 있습니다. 세상을 부정하고 사는 탁발승도 자기들이 먹을 바리와 장삼가사는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러 가는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의 생존에 최소한의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님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렇게 보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위로부터 공급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공급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 의하여 공급이 됩니다만 그러나 이런 제자들을 보고서 누가 환영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접하는 집에서 머물고 영접하지 아니하는 성에서는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은 사람들에 믿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 되고 있으니 곳곳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헤롯이 이 소식을 듣고 당황해 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옛 선지자가 나타났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헤롯이 가로되 세례 요한은 내가 목 베어 죽였는데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고? 하나님의 나라 전파의 중심에 누가 들어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 속에 무슨 이야기가 담겨야 합니까? 예수님의 이야기가 담겨야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힘과 권세로 죽입니다.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순교하고 핍박을 받아 흩어졌는데 흩어진 곳에서 다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힘없이 죽어간 그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도 증거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의 나라는 경제력이 받쳐주어야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고서 믿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은 지금도 주님이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고 계시는 증거가 됩니다. 고후 6:1-10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봉독”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누가복음 9:10-17 빈들에서 2007. 6. 3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한 경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항복하고 병도 고쳐지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이것이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동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처음부터 자세하게 살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핀 결과 나사렛 예수가 행한 모든 일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까지가 누가복음이고 그 이후에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 한 내용이 사도행전입니다.

 

 

 

 

신학자들의 최대의 숙제가 무엇인가 하면 평범한 한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던 한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온갖 논증과 추측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서를 보면서 무엇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까?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수많은 박사들도 믿지를 못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 나타난 수많은 기적들의 초점이 어디로 가야하는가 하면,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자체도 그러합니다. 군중들이 놀랍니다. 그 당시의 통치자 헤롯이 놀랍니다. 함께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역시 놀랍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바람과 풍랑을 꾸짖으매 잠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고 부처고 간에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까?

 

 

 

 

10절을 봅니다.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일을 예수님께 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들을 데리시고 따로 뱃새다라는 곳으로 가십니다. 왜 따로 가셨을까요? 그리고 뱃새다라는 지역으로 가셨지만 마을로 가신 것도 아니고 빈들로 가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놀라운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개척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자꾸만 무리들과 분리를 시킵니다. 제자들을 빈들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빈들에조차 사람들이 알고 따라왔습니다. 사람들이 따라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기적을 행하니 그들을 따라온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기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려고 온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기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기적들이 수 백 년 동안 나타나지도 않았고 선지자도 없었는데 이제 드디어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면서 따라 나선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어디서 임하였습니까?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왜 빈들입니까? 이스라엘을 새롭게 출발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출애굽 하였을 때에 광야를 거쳐서 약속에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빈들이란 아무것도 없는 광야입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 위하여 왔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소경이 보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대답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고 하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한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선지자를 보려고 갔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옳다고 하시면서 선지자 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소개한 광야의 외치는 소리요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이 빈들에서 시작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빈들에서 사역이 시작이 됩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려 빈들에 가십니다. 빈들,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십니다.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는데 마귀가 와서 유혹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빈들이니 먹을 것이 없습니다. 널려있는 것이 돌이니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마귀를 물리치십니다. 이후의 유혹들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종교적인 기적과 세상의 영광을 준다는 유혹입니다. 다 물리 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능력과 권세를 받아서 기적을 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들떴겠습니까? 그렇게나 오랫동안 기다린 메시아가 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이들을 따라 나왔는데 예수님은 이 모두를 빈들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따라온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영접하셨습니다. 빈들에서 다른 곳으로 피하여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가장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무엇을 전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빈들에서 이야기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도시의 화려함입니다. 수련회 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해남에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농촌에서 해남으로 나오지만 해남의 인구는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남에서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광주로 간다는 것입니다. 광주에서 능력이 되는 사람은 또 서울로 간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는 외국도 가겠지요!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예수님께서 빈들에 세우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 세우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시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해는 저물어가고 저녁때는 다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는 빈들입니다. 제자들이 걱정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가진 음식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마을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걱정이 되어서 예수님께 건의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보내서 두루 마을과 촌으로 보내어 먹을 것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 많은 사람들을 무슨 수로 먹인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조금 전까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로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친 경험이 있는 자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직도 파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계속 빈들로 밀어붙이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에서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부활의 사건이 다 기록되었는데 그 외에 사복음에서 다 기록된 기적은 오병이어의 기적뿐입니다.

 

 

 

 

다른 복음에서에서 보면 빌립이 재빨리 계산을 해봅니다. 이백 데나리온이 있어도 부족하겠다는 것입니다. 성인 하루 품삯이 일 데나리온이니 이백일을 일해야 되는 돈입니다. 성인 남자만 오 천 명이나 됩니다. 그러면 아이들과 여자들을 포함하면 만 명도 넘을 군중입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하니 이보다 더 아득한 빈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에 있어서 빈들을 경험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광야를 경험하는 것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서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지금 빈들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그 사람에게는 지금 사방이 황량한 빈 들판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총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무런 불편이 없고 오히려 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퇴근해서 저녁에 불 꺼진 집에 들어가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 집이 지금 빈들입니다. 각자가 경험하는 빈들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채우시렵니까?

 

 

 

 

여기서 제자들의 답변이 나옵니다. 우리가 구한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뿐입니다. 이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더 절망스러운 빈들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어린이의 도시락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원어로 따져서 물고기가 상품가치가 없어서 버려지는 그런 것으로 마련된 어린 아이아이의 도시락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 뻥튀기 하듯이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돈이 없어도 믿음으로 성전을 건축하자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도가 나서 다른 곳에 넘어간 교회당 건물이 창원에도 몇 개가 됩니다.

 

 

 

 

이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바친 것에 대하여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어린 아이의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아이가 왜 도시락을 내어놓았을까요? 제자들이 누가 먹을 것이 없느냐고 찾아 다녔겠지요! 그러니 어린애라서 멋모르고 내어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은 있으면서도 없는 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어린아이가 도시락 내어놓는 것을 보고 어른들이 양심의 가책이 되어 자기 먹을 것을 내어놓았기에 먹고 남았다고 합니다. 상상은 자유입니다만 이 기적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문제도 기도하면 해결하여 주십니다. 간절히 기도해서 우리나라 부자나라 되고 우리교회 부자교회 되어서 좋은 일을 많이 하자는 기도를 하는 것이 오병이어의 내용입니까? 그런 기도는 있는 것을 더 있게 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을 더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아닙니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신령한 것들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늘에 모든 신령한 보화들이 다 담겨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 기적의 의미와 뜻을 증거한 요한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합니다. 왜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이후에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까? 구약에서도 양식이 늘어나는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집에서 흉년이 지나기 까지 통의 가루와 기름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보리떡 20개로 백 명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모든 기적들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제 그 어떤 선지자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15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그렇게 임금 삼으려는 자들을 피하여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기적의 바탕에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빈들이란 어디까지 가야하는 것입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부르짖음에도 아무런 도움도 없는 처절하게 버림받은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군중을 따돌리시기 위하여 제자들은 저물 때에 배타고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 다음날 사람들이 호수를 돌아서 찾아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가 나를 따라 온 것을 먹고 배불러서 따라 온 것이지 표적을 보고서 따라 온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여주실 표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표적을 요구하였을 때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표적은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그 나머지의 표적은 십자가로 가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차원입니다.

 

 

 

 

그 무리들을 보시고 너희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합니다. 그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하여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경제 문제를 해결하여 주고, 종교적인 기적을 베풀어주고, 세상의 영광을 주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려서 자기 백성에서 영생을 주시는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빈들도 못되는 곳입니다. 골고다 해골의 언덕입니다. 고개를 도리질 치고 침 뱉고 돌아설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빈들의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동안 믿고 의지하였던 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주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의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애굽은 갈대지팡이라서 의지하는 자들의 어깨를 찌르게 됩니다. 그를 의지하다가 갈대가 부러져서 허리를 상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서 광야로 내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세상의 자리에서 불러내셔서 빈들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짜 우리게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나 열심히 사십니까? 결국에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둘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성령을 위하여 심을 육체가 없기에 오늘도 주님은 자기 백성을 빈들로 몰아세우시는 것입니다. 성도를 나그네라고 합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날마다 빈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빈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9:18-27 나를 누구라 하느냐? 2007. 6. 10

 

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어디에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말만 들으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분이 도대체 누구신가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따라 다녔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종 그들과 따로 떨어져 지내셨습니다.

 

 

 

 

18-1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라고 합니다. 이 따로 속에는 제자들도 포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능력을 행하기에 어떤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봅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시고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면서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알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그 내용이 다르기에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공개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제자들이 증거 하면 당장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온갖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으니 요한복음에서는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피하여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리스도라고 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중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생전 처음으로 듣는 분들도 몇 분은 계십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히브리말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아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고백한 하나님의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따로 세운 자들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서 구별을 합니다. 기름을 부어 구별된 자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이스라엘의 왕조가 끊어집니다. 70년 동안 포로생활하고 돌아오지만 왕조가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나타나기를 대망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편 2편 같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세상이 이렇게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분이 비웃으시면서, 분노하시면서 행하시는 일이 나의 왕을 거룩한 시온에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는 철장권세로 그들을 질그릇 같이 부수어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편이나 이사야 선지서나 다니엘서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예언들을 통하여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들의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 무르익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시대상황이 어떠합니까? 로마가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방의 세력들을 물리치고 다윗과 같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와서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는 언어로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기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즉 기름 부은 받은 자의 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은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윗 왕과 같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보잘것 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그 시골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사람들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좀 더 상세하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시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알게 된 것이 왜 복이 있는가하면 이것은 혈육으로는 즉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알 수가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신 성령께서 그렇게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이 믿음,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다면 이것은 참으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25절을 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가 너무 짜증스럽습니다. 온통 대선이야기만 가득합니다. 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죄인들의 인생인데 무엇을 그렇게 기대할 것이 있다고 연일 그런 이야기들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당선이 되고서 그 날 밤에 죽어버리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이 자기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다 가로챘다고 예수님께서 그 재산을 나누어 주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이 내가 너희의 그런 재산 나누어 주는 재판장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대답하신 말씀이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풍년이 들어서 많은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창고가 부족하여 더 늘려서 짓고는 이제 평안히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합니다. 그때 네 영혼을 오늘밤 도로 찾으리니 그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믿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셨다면 온 세상의 왕들을 다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 세우셔서 적을 물리치고 다윗시대와 같이 강한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지서를 보면 다윗시대보다 더 많은 열방에서 금은보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22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니 비로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깜짝 놀랍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시면 베드로가 말립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방금 복 있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곧 바로 사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막아 나선 것이 베드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 받는 것은 이해가 된다고 하여도 죽어버리면 실패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사람의 일 곧 사단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 어떤 메시아를 원하고 있습니까? 십자가 지는 메시아, 죽는 메시아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 집안 잘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 교회 잘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나라 잘 되게 하여 달라고 천지신명께 비는 것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바꾸었지 그 내용이 하나도 바뀌어 지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책망들은 그런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23-26절을 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며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입니다. 이방인들이 로마에 반역하거나 흉악한 범죄자에 대하여 십자가에 처형하게 하는데 때로는 수 백 명, 수 천 명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런 차이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볼 때에 장례행렬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음의 세상인 것입니다. 황진이라는 영화를 보면 황진이의 생모가 주인의 딸을 낳고서 쫓겨납니다. 기생으로 떠돌다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데 다른 장례행렬과 다르게 기생들이 고운 옷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며 꽃을 뿌리며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죽음이 해방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온통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한 곳임을 알기에 이런 세상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여러분이 좋아하십니까? 기뻐하면서 십자가를 지십니까? 교회에서 조그마한 불이익만 와도 왜 내가 그런 손해를 보아야 하는데 하면서 역정 내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앞서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뒤를 따라 간다고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조차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돌아선 십자가의 길입니다. 만약 나의 능력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신한 베드로를 찾아오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베드로가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고 팔을 벌려서 다른 사람이 묶어서 끌고 가는 방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이 모양으로 끌고 가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자기가 부인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십자가로 밀어붙여 영생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28-36 별세(別世) 2007. 6. 17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하여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분주하게 살고 있지만 이 삶의 방향과 목표가 우리를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로 질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있는 것을 더 있게 하기 위한 삶입니다. 소유를 늘리고자 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진다고 하여도 그 소유의 넉넉함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 허무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전도서 7:1-4절입니다. “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잔치집입니까? 초상집입니까? 이 질문은 너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 앞에서 질문해야 참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질문에 베드로가 잘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리스도, 마태의 표현으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고백 후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다는 것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거나 부러워하는 길이 아니라 고개를 도리질 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인데 이것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이 표현을 지난주에 요즈음 표현으로 말해서 쪽팔리게 따라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은혜 받았다는 분도 계시니 아마 쪽 팔리는 삶이 있는 모양입니다. 좀 고상한 표현을 봅니다. 구상 시인의 “그 분이 홀로서 가듯” 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만 옮깁니다.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復活)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이 길을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 길을 왜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지난 주 보았던 26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은 정말 피하고 싶은 분입니다. 삼년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 다 배신하고 돌아설 정도로 부끄러운 분이었습니다. 처음에야 좋았지요! 기적을 행하고 능력이 있어 보이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어깨도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린 영웅적 기색도 없이 군인들에게 잡혀서 수치와 조롱과 매 맞음과 벌거 벗기움과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주님을 따라 나설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부끄러울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영광스러워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 예수 믿고서 이렇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그렇게 다들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세상이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8-20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면 예수님을 무엇 하려고 믿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답변은 누가복음 9:26절에서 예수님이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이지만 그러나 영광중에 올 것임을 맛보기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여기 서 있는 자들, 즉 제자들 중에서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순간적이나마 보게 되는 일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28-31절을 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시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내용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별세를 이야기한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출애굽이 24장에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시내산에 왔을 때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습니다. 그때 40일 동안 하나님의 영광중에 거하다가 내려옵니다. 그런데 그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난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후광만 볼 수 있었는데도 그 얼굴에 광채가 난 것입니다. 자신은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입니다. 열왕기 상 19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 앞을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지만 그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시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시고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아합 왕의 가문을 쓸어버리시기를 원하였지만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을 직접 뵐 수는 없었습니다. 그 영광만 보았던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임을 지금 변화산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세나 엘리야가 다 별세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별세는 출애굽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세의 개인적인 별세라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애굽에서 이끌어 낸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의 별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세의 시체를 가지고 미가엘과 마귀가 다투었다고 합니다(유1:9). 그러니 지상에서 모세의 무덤조차 찾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감추어 버림으로 별세를 보였습니다. 남아 있었다면 모세가 만든 놋 뱀을 우상으로 섬겼듯이 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예 산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지상에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별세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부분적으로 본 자들이지만 지금 예수님에게 나타난 것은 그 영광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을 봅니다. 기도하실 때에 그 용모가 변화하신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직접 그 얼굴을 볼 수도 없는 영광의 빛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단지 표현한 것이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이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세를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별세,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그 단어를 출애굽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늘 출 세상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32절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별세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곤하여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이 산에 오르셨고 기도 중에 변화하셨는데 제자들은 함께 기도하다가 곤하여 졸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제일 새롭게 와 닿은 부분의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별세를 말씀하시고 영광이 나타났는데 제자들은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아카데미라는 인터넷 강좌에서 고미숙씨의 ‘영화 괴물로 본 한국의 근대사’라는 강의를 보았습니다. 괴물에 희생당한 자들의 합동분향소에서 자기 딸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큰 대자로 누워서 코를 골고 자는 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딸이 죽어서 슬프고 괴롭지만 잠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배가 고픈 것을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고 별세를 말씀하셔도 잠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졸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잡히시는 밤에까지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졸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깨워가면서 기도하라고 하여도 그래도 또 졸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동원된 제자들의 역할은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늘 깨어있어서 한 몫 하였다면 아마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소리 칠 것이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졸다가 광채 때문에 눈이 뜨였는지 비몽사몽간에 보니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셨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이니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함께 있을까요? 지금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너무 좋아서 그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와 세상이 간 곳이 없이 예수님의 영광과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났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그 영광이란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때 구름이 저희를 덮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이는 나의 아들 곧 나의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도 졸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졸고 있던 제자들을 별세에 합류시키셨듯이 예수님께서 오늘도 자기 백성을 별세시키실 것입니다. 모세를 출애굽 시키시듯이, 엘리야를 산채로 하늘로 끌어올리시듯이,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별세시키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9:37-47 이 말을 귀에 담아두라 2007. 6. 24

 

37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쌔 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45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지난 주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갑자기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별세를 의논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곤하여 졸고 있었습니다. 곤하여 졸다가 놀라운 빛이 비춰지니 잠이 깨어서 무슨 말을 합니까?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지을까요? 베드로가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34절을 봅니다. 이 말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니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였습니다. 여기서 구름이라고 하니 우리가 흔히 보는 하늘의 구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구름으로 가려져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이 감당할 수가 없기에 구름으로 감추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35-36절입니다. 이는 나의 아들 나의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난 것입니다. 그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진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별세를 의논하셨고 이제 예수님을 증거 하였으니 사라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신명기 18:15절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스데반 집사가 사도행전 7장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귀를 막고 이를 갈면서 돌을 던져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피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어느 한 말씀이라도 우리의 본능상 좋아할만한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이 산 위와 산 아래의 이야기입니다. 산위에는 예수님만 보이고 예수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아래는 어떻습니까? 37-41절입니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이합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며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외아들인데 귀신이 저를 사로잡으면 졸지에 부르짖고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니 고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41절을 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합니다.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산 아래는 이 모양입니다. 이 모습은 역시 모세 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있을 때에, 그 영광중에 있을 때에, 산 아래는 어떠하였습니까?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패역한 세대가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오늘 성도가 이 두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산 아래 일어나는 그 일을 보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였습니까? 누가복음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고쳐주지 못하였는가 할 때에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고 기도가 없는 세상이 패역한 세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가 어떤 내용인가 하면 땅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못 고친 이유가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은 추측할 뿐인데 제자들이 전에는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안 계신 상태입니다. 물론 산위에 계셨지만 산 아래와 단절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 경험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고 하여도 옮길 것이며 못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이 세상이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는 것은, 믿음이 어느 정도로 없는 것입니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 경상여전도회 연합회가 우리 교회당에서 모였을 때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을 하였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들어 옮길 수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집사님 권사님 여전도회 회장님 임원들이 모였으니 겨자씨만한 믿음은 있겠지요! 그러니 이제 기도해서 여기 꽃 한 송이라도 뽑혀서 물 컵에 담기도록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겨자씨만큼 되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영광은 세상의 영광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니 나에게 이런 표적이 나타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 자기 자랑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하지만 그 속에는 무엇이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까? 자기 욕망을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천만원 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믿음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십의 2조를 하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도둑놈 심보입니까? 한 달에 8백만원을 챙기겠다는 속셈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보실 때에 이 세상은 정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인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여도 그 안에 자기 영광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믿음만이 참 믿음입니다. 온전히 십자가를 지신 믿음입니다. 42-43절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시자 귀신이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니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부모에게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랍니다. 저희가 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신기하게 여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44절입니다. 너희가 이 말을 귀에 담아두라고 합니다. 귀에 담아두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도, 귀신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과 귀신 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기억하지 말라고 하여도 기억할만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에 담아두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름 속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말씀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 놀랍고 두려운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러나 귀에 담아 두어야 할 말씀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계속하여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대답에 예수님은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다시 죽으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또 어렴풋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알고 있어도 감히 묻기도 두려워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귀에 담아두어야 할 말씀은 어떤 내용입니까? 우리가 매주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만 과연 무엇이 여러분의 귀에 담겨집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담겨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귀에 담겨지지 아니하고 나를 영화롭게 하고 멋있게 하는 이야기들이 담겨진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제자들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46절을 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를 결심하시고서 가시는 중입니다. 그 가시는 길이 사람들에게 넘겨져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무엇을 다투고 있는 것입니까? 누가 서로 높으냐는 것입니다. 변화산에 올라갈 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니 그 세 명과 다른 9명이 다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세 명 안에서도 누가 높으냐는 다툼이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귀에 담아두라는 말씀은 이미 귓전에 흘려버린 것입니다. 47-48절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변론이 일어날까요? 베드로는 나름대로 자기가 제일 높은 자라고 여길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대로, 가룟 유다는 자신이 돈 주머니를 맡았으니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자기가 높은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올라가시는 중이신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하여 올라가는 동상이몽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을 영웅적인 그리스도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세웁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어린 아이란 그야말로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너희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라고 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은 누가 서로 높으냐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마다 예수님이 나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셨다. 나는 식사 때마다 예수님 바로 옆에 앉는다. 마치 대선 주자들에게 줄 대기 위하여 자기의 이력과 프로젝트를 들이미는 사람들처럼 지금 예수님께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부각되는 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 처럼 하늘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정 반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귀 담아 듣는 사람입니다.

 

 

 

 

그 들어야 할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들어야 합니까? 그 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보실 때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거저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누가 서로 높으냐며 다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높아지려고 하고 하늘나라에서도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말씀을 귀에 담아두게 됩니다.

 

 

 

 

누가복음 9:49-62 예수님의 결심 2007. 7. 1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1)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다가 옛날에 본 단편영화 ‘소풍’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내와 아이 하나를 둔 젊은 가장이 사업에 실패하여 빚더미에 앉게 되자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동반자살하려고 차를 타고 가는 이야기입니다. 별 말이 필요 없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 중에 아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엄마가 소풍간다고 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아이와 아내가 먼저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자 남편은 배기가스를 차 안으로 들어오도록 호스를 연결하고 테이프로 차의 빈틈을 막고서 자기도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듭니다.

그 다음날 어떤 노인에 의하여 발견되는데 아직 아이는 살아있어서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차가 가는 동안 밖의 풍경은 아름다운데 얼마나 서러운 소풍인지 지금도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슬픈 영화였습니다. 왜 갑자기 이 영화가 생각이 났는가 하면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소풍가는 아이마냥 마음이 부풀어서 따라 가는 것입니다.

 

 

 

 

5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9:21~22절을 봅니다.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후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너무나 달랐다는 것입니다.

 

 

 

 

30-31절을 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 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44절을 봅니다. 지난주에 귀에 담아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귀에 담아두어야 할 내용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 죽음의 이야기는 묻기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대신 죽으시는 길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의 한 주간의 삶 속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귀에 담겨 있었습니까? 마음에 담겨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묻기조차 두려웠는데 우리인들 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길은 피하고 싶고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한번 잘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능이지 않습니까? 누가 교회를 오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야 됩니다. 정말 나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낮아지고 가난한 심령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오늘도 예배를 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고 그 댓가로 또 한 주간 형통하여 사업도 잘 되고 만사형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오늘도 수많은 교회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완벽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예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니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모릅니다. 자신들이 어떤 길로 가게 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소풍간다는 말에 들떠서 따라 나선 아이처럼 지금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46-48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귀 담아 두라는 말씀은 귓전에 흘려버리고 누가 서로 크냐며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서로 크냐고 다투는데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세우십니다. 왜 어린 아이를 내세운 것입니까? 제자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들의 힘과 능력이 발휘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천국은 제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 방식으로 전하여 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때나 오늘이나 세상이 원하는 것은 힘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 어린아이는 무슨 의미로 세우신 것입니까? 어린 아이의 특징은 순수나 착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함에 있습니다. 아이가 아이답다는 것은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받아들일 때 아이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가는 어른스러운 사람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의 공로와 예수님의 결심으로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49-50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자기들을 따르라고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행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누가 함부로 부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독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매특허 등록하여 지적 재산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탁상공론을 하여 누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가 하는데 관심이 있는데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미리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너희를 돕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동상이몽입니다.

 

 

 

 

51-55절입니다.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을 하시고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면 빨리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해서 개 취급을 합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을 좋아하지 않기에 빙 둘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동네를 찾아 가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사마리아 마을로 먼저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의 일행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보냈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인들은 거부하였습니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무어라고 합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저희를 멸하라고 할까요? 야고보와 요한이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요? 얼마 전에 변화산에서 누구를 보았습니까?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증거 하려고 왔기에 지금 자신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면 어떤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모세와 엘리야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본 것입니다. 열왕기하 1장에 보시면, 아하시야 왕이 엘리야를 부르기 위하여 보낸 오십 부장과 군인 오십 명이 두 번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사르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영접하지 아니한 동네를 불로 멸하여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누구의 모습입니까?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 금하여 버리고, 우리를 제대로 영접하지 아니하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살라버리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내가 전능한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놀리는 자들, 깔보는 자들, 내가 별 볼 일없는 사람이라고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본 떼를 보여주고 싶은 적이 없습니까?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꾸짖으십니다. 다른 오래된 사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 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 하시고” 이렇게 된 사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누가 크냐는 이야기,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를 금하였다는 이야기,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멸하여 버리려고 하는 이야기, 이런 모습이 사실 우리 안에도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죽으실 결심을 하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죽기로 결심하고 올라가는데 또 어떤 몇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던지 저는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자원하여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엇을 기대하면서 따라 나섰을까요?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따라나선 것으로 봅니다. 왜 그렇게 볼 수 있는가 하면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아시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라나선 속내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저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목사 하는 속내가 무엇입니까? 목사님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만 믿고 살자고 하지만 그렇게 전하는 것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다 주니까 그렇게 말도 하고 살지 교회가 생활비도 드리지 못하는데도 그렇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굉장히 화가 난 말이었는데 지금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정말 머리 둘 곳도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나 예수님의 결심으로 되는 일이지 우리가 결심하고 따라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위하여 결심하고 가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내 부친을 장사지내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 부친의 장사가 당장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곧 장례치를 것이니 장례 치르고 따르겠다고 한 것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답변은 단호합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았다고 하는 자를 예수님은 죽은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비교 경쟁이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시체경연대회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하고 따라 가겠다고 하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열왕기 상 19:19-21절을 봅니다.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 둘째 겨기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가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 들었더라'  엘리야를 엘리사가 따라 나선 장면입니다. 밭을 갈다가 따라가는데 가족과 작별이 허락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선지자들이 증거한 예수님이 오신 종말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과의 이별보다 더 급하고 우선적인 문제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까? 혹시나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결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결심으로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결심하고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 결심을 이루어내고 계시기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1-16 추수 할 때 2007. 7. 8

 

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3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6 만일 1)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결심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그곳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하시는데도 그곳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죽으실 것을 아시고 그 죽음의 길로 결심하고 걸어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하나님과 아들사이의 언약이 완성 되는 것입니다. 그 언약 완성의 결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19장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필요한 부분만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성령세례로부터 골고다에서 일어난 희생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길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 길이 끝이 아니라 부활로부터 재림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길, 영 가운데서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들과 우주의 넓고 깊은 모든 곳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길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보는 말씀은 어디로 올라가는 길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재림하시기 까지 이르는 그리스도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영 가운데서 모든 민족과 우주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론은 종말론의 시작이며 종말론은 기독교적으로 이해할 때에 그리스도론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도록 초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야 믿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보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세상을 보십니까? 예수님이 오신 그 때를 추수 때로 보십니다. 이미 세례요한이 증거 하였습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기에 타작마당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던진다고 하였습니다. 10:1-2절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 앞에서 제자들을 둘씩 먼저 보냅니다. 12명의 제자만이 아니라 70명의 제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에 앞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일종의 전령입니다. 그들을 보내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지만 추수할 일군이 적으니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시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그때부터 이미 추수 때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34-3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추수하는 일은 즐거운 것입니다. 농사를 다른 사람이 지어 놓아도 그 농사지은 것을 함께 거두어들이면 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 즐거움에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추수를 하려고 보내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본문 3-4절을 봅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고 합니다. 양이 이리떼에게로 가면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양 같은 제자들에게 아무런 무기를 주지 않습니다. 전대나 주머니나 여유 신발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의 책상 옆에 선교사님들의 사진이 다섯 장이 있습니다. 저의 집의 냉장고에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이런 저런 관계로 알게 된 선교사님들인데 왜 사진을 찍어서 자신들을 알리는 것입니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후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런 후원도 없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7절을 보시면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받아들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여 주면 그곳에서 유하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은 자들이 주는 것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효과 있게 증거 되도록 좀 든든한 후원을 해 주시면 안 됩니까? 어떻게 양이 이리 가운데 들어가는 그런 모습으로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복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만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그런 모습으로 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예를 보면 가는 곳마다 죽을 고생을 합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집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을 보면서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조롱거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떤 조롱을 당하신 것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구원하느냐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조롱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약한 자들이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고난과 능욕을 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기적들도 나타났지만 늘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체적으로 죽을 고생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연약하여 시험에 들 만한 요소가 그 몸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약한 사람이 전하는 말을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위하여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하고 목숨이라도 내어 놓으려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70여명의 제자들이 아무 것도 없이 거지처럼 전도자로 나섭니다. 어느 마을과 동네로 가서 어떤 집에 먼저 평안을 비는 것입니다. 그냥 평안하시기 바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일어나는 평안 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 평화가 일어나는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이사야 52:7절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의 소식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절입니다. 그 집이나 동네에서 나오면서 그 발의 먼지도 털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심판의 소식입니다. 복음이란 심판이 있기에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보고서 배척한 것은 곧 누구를 배척한 것이 됩니까? 16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저버리는 자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모두가 받아들일만한 권세의 능력으로 오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만 받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능력으로 전한다면 세상에서 약한 사람은 받을 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도 고난 받는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방금 이사야 52:7절을 보았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 52:12-53:12절을 봅니다. “봉독” 그 유명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기에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갖 멸시와 질고를 당하였기에 사람들에게서도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버림받음이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신 죽으심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역시 같은 모습입니다. 이리 같이 서로 잡아먹고자 하는 세상에서 양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모습이 싫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세상에서 보암직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힘과 권세와 능력보다 더한 힘과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그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쪽에서 사울 왕이 나가면 저쪽에는 골리앗이 나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동원할 수 있는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볼 때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도로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사람들이 환영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배척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우습게 여기고 배척하면 어떻게 됩니까? 12-15절입니다. 죄악으로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와 살라져 버린 소돔이 심판 날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배척한 동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추수 때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에 회개할 표를 주신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이 다 갈릴리 지역의 마을들입니다. 이 마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도 보았습니다. 벳세다 같은 경우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만약에 두로와 시돈에서 그렇게 하였다면 이 두 지역은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이방인의 나라 그 악한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회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듣고서도 회개는 고사하고 더욱 교만하여진다면 어떻게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끝이 옵니다. 거의 다 증거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추수 때에 예수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또한 추수 하는 일에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추수 때라고, 지금이 종말이라고 믿는 사람은 또한 그렇게 살고 그렇게 증거 할 것입니다. 추수 하는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참된 기쁨, 하늘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누가복음 10:17-24 참으로 기뻐할 일 2007. 7. 15

 

17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참으로 기뻤던 일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그 기쁨이 얼마나 지속이 되었습니까? 어떤 분이 직장이 서울로 발령이 되는 바람에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은 창원에 있고 남편은 대구에 교사로 있는데 서울로 가게 되면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산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휴직을 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부산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창원에서 출퇴근 하면 되니 기뻐서 전화가 왔습니다. 며칠 지나서 물어보니 그 기쁨은 한 시간 정도였답니다. 또다시 여러 가지 근심걱정이 밀려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기쁜 일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쁜 일이 참으로 기쁜 일입니까? 영원한 기쁨입니까? 이 땅이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영원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 나를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자기가 기뻐할 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2:1-10절을 봅니다. “봉독” 솔로몬이 지혜와 부와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다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즐겁고 기뻐하게 되는지 온갖 일을 다 해 보았으나 그 결국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으로 헛되지 아니하고 참으로 기뻐할 일은 무엇입니까? 12:13-14절입니다.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것이 인생의 근본입니다. 인생의 근본을 모르고서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평생을 살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심판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기에 근원적인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기쁨이 없다든가 낙이 없다는 분이 계시면 지금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사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다면 결단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생 앞에 참된 기쁨과 영원한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으로 참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 17-18절을 봅니다. 7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 앞서서 동네마다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명령만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항복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기뻐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라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뻐하면서 돌아오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였더니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도 전도하여 열매가 나타나면 그 얼마나 기쁩니까? 그런데 그런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 보다 더 근원적인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책이 생명책입니다. 모세가 말하였고 시편에서 말하고 바울사도와 사도요한도 말한 생명책인 것입니다. 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에 나온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쓰임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4:3절에서 이렇게 증언 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복음의 동역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받고서 그 복음에 참여되고 복음에 동역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 괴롭다느니 재미가 없다느니 불평과 원망이 나온다면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기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장악을 하고 있기에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이 세상의 신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4).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이 기쁨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동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단이 항복하여야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단을 이기실 수 있는 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결코 그들의 능력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이미 보았습니다. 18-19절입니다. “봉독”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니 사단도 항복하게 된 것은 이미 예수님의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완전히 이기신 것은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어떻게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신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고 계시는 중이십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죽으실 것을 결심하신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져 패주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하만이 모르드개와 그 민족을 죽이려고 하다가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는 일에 자신이 도구로 쓰이고 부터 하만은 죽는 길로 가게 되고 죽을 줄 알았던 모르드개는 승리의 길로 가는 것처럼 이미 사단의 권세는 예수님께 굴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1:20-22절입니다.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4)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5)재물을 나누느니라”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의 왕 바알세붑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를 결박하여야 그 강한자의 손에 있는 것을 빼앗아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며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가 되고 있는 현장입니다. 사단이 왜 벌써 굴복하기 시작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도 아직 자신이 완전히 굴복하게 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세상의 세력을 다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단이 승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0:18절을 제목으로 한 책이 나왔습니다.「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르네 지라르 라는 이 사람은 신학자가 아니라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데 수많은 신화와 민담과 역사를 통하여 폭력과 희생양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될 때에 어떤 희생양을 정하여 희생시킴으로 사회의 안전을 도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한결같이 그 희생양은 죄인으로 몰려서 처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기록이 승자의 기록이기에 희생양의 무죄를 변호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희생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무죄를 증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간접적인 신학이라고 하면서도 희생양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로의 개종은 언제나 그리스도 자신이 던지고 있는 ‘너는 왜 날 박해하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을 이용하는 희생양의 모방과정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십자가의 공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부활을 통해서,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모든 기독교 신도들은 성스러운 폭력 안에 감추고 있는 모든 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희생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항상 인간의 희생양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희생당하신 이야기가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앞에서 우리는 항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죄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범죄 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방욕망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소속한 집단의 안전을 위하여 한 사람을 희생시키자고 하는 일에 얼마나 빠르게 동조를 하는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찬송하든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어떻게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처리하는지를 잠시 봅니다.

 

 

 

 

요한복음 11:47-53절입니다. “봉독” 즉 한명 희생시켜 우리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한 말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런 체제하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유대인이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이런 모습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흘린 죄를 이 세대가 담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요한의 해석이 다음 구절입니다. “51-53절 봉독”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속을 자신의 죽으심으로 이루실 줄을 대제사장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배후의 사단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가서 죽여 버리면 승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누가복음 10:2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심을 보시고,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항복하는 것을 들으시고, 이것은 이미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예수님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생명책에 기록이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실 때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십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기뻐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런 일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합니다.

 

 

 

 

슬기 있고 지혜 있는 자들이 예수님 당시에 누구였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결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빌라도와 함께 유대를 다스리는 관리들이 지혜롭고 힘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동의 관심사가 현재 그들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희생양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그들이 영광의 주를 알았다면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6-16절입니다. “봉독” 이 세상의 그 어떤 관원의 지혜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배후인 사단도 알지 못하였기에 지금까지 의례히 해 온 것처럼 희생양을 만들면 안정이 될 줄 알고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죽음이 죽음의 세력을 이겨버리신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비밀을 지금도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22-24절입니다. “봉독”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 사단의 권세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기신다는 것을 보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이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보게 되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계시를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이 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이런 자들이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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