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여호와께 보냄을 받은 사람 - 이사야
(이사야 6:1-13)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 앞에는 상징적인 두 기둥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야긴이라 불렀고 하나는 보아스라 불렀는데 야긴이란 ‘저가 세우리라’는 뜻이고 보아스란 ‘저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두 기둥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상징적이요 교훈적인 의미를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즉 야긴은 ‘여호와께서 세우셨으니 성전이 영원하리라’는 뜻이며 보아스는 ‘여호와께서 능력으로 영원히 지켜주시리라’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왕상7:15-22).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에는 큰 기둥, 야긴과 보아스와 같은 인물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사람이 뽑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뽑아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도인 바울도 먼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갈1:1)고 말했습니다. 또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덮으실 것을 항상 믿었기 때문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입에 말씀의 능력을 채우시고 어두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내심 받는 과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는 동기나 과정은 달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능력을 주셔서 일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첫째,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웃시야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 존경과 신임을 받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강성해지자 마음에 교만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울 왕과 같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 한 것입니다. 깜짝 놀란 제사장 아사랴가 젊은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따라 들어가 왕을 막자 분향하려던 왕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그 때, 웃시야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했고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평소 왕을 존경하던 백성들은 웃시야의 병이 낫기를 기도했으나 결국 웃시야는 다시 왕좌에 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백성들은 대단히 낙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웃시야 왕을 통해 내리시던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은 사악해졌습니다(대하27:2). 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는 로마 제국이 세워지고, 앗수르 제국은 점점 더 강성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왕국에 점점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아합이 통치할 때 엘리야를 보내시듯 하나님은 어두운 밤에 별빛이 빛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어두운 형편을 보면서나를 보내소서하고 기도할 때입니다. 이 때,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 앞에 모셔 서있는 스랍들도 보았습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쉐키나)이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을 보내실 때 만나 주십니다. 그래야 누구의 종인지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외국에 대사를 임명할 때 반드시 만나서 신임장을 수여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국무총리에게 이 일을 맡기는 법이 없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대통령을 대신해 일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학문과 재주를 익혔더라도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미디안 40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호렙산에서 직접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바울(사울)을 만나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그러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깊이 그 분을 만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이사야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맨 처음 한 말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로다. 자신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뵙는 순간 자신의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이 때, 스랍 하나가 화젓가락으로 핀 숯을 가져다가 입에 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솔직히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 깨끗한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지만“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1) 하셨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음식도 더러운 그릇에 담으면 더러워집니다. 아무리 수원지에서 깨끗한 물이 내려와도 수도관이 녹슬었으면 녹물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끗하신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 악이 제거되고 더러움이 제거된 그릇을 사용하십니다.
이사야는 선지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려면 입이 깨끗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입에 숯불을 대었습니다. 재정을 관리할 사람은 돈주머니가 성령의 불에 타야 합니다. 목사는 입이 성령의 불로 태워져야 합니다. 봉사자들은 손과 발이 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어느 부분이 성령의 불에 태워져야 합니까?
셋째, 이사야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숯불로 정결함을 받은 이사야는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때,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이사야가 나갈 세상이 어떤 곳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 백성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입니다.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듣고 못 깨달으면 보고 깨달아야 할 텐데 듣고도 못 깨닫고 보여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어떻게 깨우칠 수 있단 말입니까?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면서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3-5) 하였습니다.
우리가 나가야 할 세상을 보십시오. 기다리지 않는 세상입니다.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냥 둘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냥 두면 황폐하고 말 곳입니다. 그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그루터기가 있을 터이니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의 나갈 길입니다.
22. 여호와께 구별된 사람 - 예레미야
(예레미야 1:4-13)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목격한 선지자입니다. 요시아 왕 13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고 본격적인 예언활동은 그의 아들인 여호야김 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흔히 이사야를 귀족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인지 이사야는 예언활동을 하면서 큰 핍박이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차라리 머리가 전부 물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눈이 눈물 근원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멸망당할 성읍, 살륙 당한 내 백성을 위해 밤낮 울겠다고 했습니다(9:1).
예레미야는 어느 날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지고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백성들에게 경고했지만 누구 하나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왕과 신하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충고하자 때리고 가두었습니다. 동료 선지자는이런 사람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상대해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울면서 끓는 가마를 잡아보려고 했습니다. 더 이상 기울지 않게 막아보려고 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함께 이 기울어지고 있는 가마를 붙잡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고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차라리 백성들에게 항복을 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은 황폐될 것이며 이 나라는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25: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시드기야 왕 11년(B.C. 587년)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왕궁은 불탔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왕의 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눈을 뺐습니다. 보여 주어도 보지 못하는 눈은 있으나마나 입니다. 왕은 사슬로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52:10,11). 성전의 기물들은 탈취 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52:28-30). 예레미야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비극을 막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고 예루살렘이 황폐된 후 남아있던 예레미야는 앉아서 울면서 애가를 지었습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애1:1,2). 우리는 이 비운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부르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셨습니다.
복중에 짓기 전에 알고 계셨으며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구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1:4)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선택을 입었으면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노아의 경우에서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의롭고 정직했기 때문입니까? 완전하게 살고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전에 먼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사람의 삶을 산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아직 짓기 전에, 낳기 전에 구별하여 세웠으니 그 사람의 됨됨이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오히려 말할 줄을 모르는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대언할 자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다’ 하는 사람은 쓰시지 않습니다.
모세가 궁중에서 40년 동안 모든 학문과 재주를 익혀 ‘이제 이만하면 동족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겠다’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도와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그후 다시 40년이 지난 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 할 때 그를 불러 백성을 구원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 보겠다고 나서면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다. 내가 도무지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 하나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도구로 쓰임 받으면 됩니다. 또한 내가 할 수 있다고 나서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잡아 주시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도 이미 아시고 우리의 약함도 아십니다.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짓기 전부터 알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구별하셨습니다.
흔히 선지자 혹은 예언자를 ‘앞일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 인 줄 압니다. 그러나 선지자 혹은 예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술에 손을 대시며(이사야에게는 숯불을 대셨는데)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선지자(예언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외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도 듣지도 않고 오히려 조롱하며 비웃기만 하자 예레미야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20: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열방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열방의 흥망성쇠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대행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일을 합니다. 마치 헌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서 옛집을 헐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헌 집을 고쳐 쓰시는 분이 아니라 부수고 새로 지으십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고쳐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옛사람을 완전히 넘어뜨리시고 완전히 부순 뒤에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보여 주셔서 선지자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두 가지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고 끓는 가마를 보았습니다. 살구나무는 ‘솨케드’ 라고 하여 ‘지킨다’는 말(쇼케드)과 어원이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 말씀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특히 끓는 가마가 남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여 주셔서 유다 백성들에게 무서운 재앙이 임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끓은 가마가 기울어지지 못하게 막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믿고 따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혼자의 힘으로 울며 막아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백성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38:17-21). 그것이 그나마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우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여 세우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가정과 사회,교회와 국가의 흥망성쇠가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신앙의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민족을 통하여 이루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23. 여호와를 위해 뜻을 정한 사람 - 다니엘
(다니엘 6:1-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의인이라고 인정받았던 다니엘(렘14:14)은 여호야김 3년(B.C. 605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한 제1차 침략 때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왕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앗수르 왕처럼 포로들을 잔인하게 대하거나 정복지를 강압으로 다스리지 아니하고 유화정책을 썼습니다. 어느 민족이든지 젊고 유능한 인물은 발굴하여 교육을 시켜 등용하였던 것도 그의 이런 정책에 의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의미에서 행운(?)을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남의 나라에 끌려온 포로였지만 특별히 선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선발 기준은 퍽 까다로웠습니다. 왕족이나 귀족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외모에 흠이 없고 아름다워야 했습니다. 또한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여 학문에 익숙하며 왕궁에 모셔도 손색이 없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러니 뽑힌 사람들은 소위 인텔리 계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왕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했을 뿐 아니라 왕이 먹고 마시는 진미를 먹게 했습니다. 3년을 교육시킨 뒤에 그들의 장래는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이것은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잘 대우해 주고 아껴 주는 느브갓네살을 거역하는 행위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왕께 대한 신의 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1:8).
왕이 특별히 제공하는 진미를 먹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요 또한 왕께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왕이 하사하신 음식을 거절한다는 것은 왕에 대한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책임진 환관장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호의를 거절하기로 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는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제공하는 음식물 중 어떤 것들은 그들의 신에게 제물로 드려진 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은 그 제사의식에 동참하여 그 신과 교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제사장과 백성들이 제물을 나누어 먹기도 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낸 후 가족이 둘러앉아 제물을 나누어 먹고, 무당이 굿을 한 후에는 떡을 나누어 먹기도 합니다(고전10:18).
또한 동족들의 아픔을 생각하면 자신들만이 호의호식할 수 없었습니다. 동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이 일을 위해 다니엘은 목숨을 걸고라도 음식을 먹지 않기로 굳게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아직 먹고 마시는 문제에 뜻을 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술이나 담배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껴가면서도 결심하지 못하니 걱정입니다.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 하였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6:10).
다니엘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다니엘을 고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의인입니다. 얼마나 정직하고 충성된지 아무 틈이나 아무런 허물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보십시오. 한 달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입니다. 신에게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입니다. 그러니 아이가 “엄마 밥 주세요” 하고 구해도 사자 굴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사자 굴에 넣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을 잡아넣겠다는 법입니다. 법은 포괄적으로 제정하고 집행은 선별적으로 시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집에 돌아가서전에 행하던 대로기도했습니다. 한달 동안이니 잠깐 쉴 수도 있습니다. 기도 시간을 변경할 수도 있고 골방에 가서 문을 닫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전에 하던 그대로 기도했습니다.
사실 다니엘을 죽이기 위해 이런 법을 만들었으니 인간적인 방법으로 피한다고 해서 무사히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문제로 트집잡기 어려우면 다니엘이여보 아침 가져오세요해도 잡아갈 수 있고 아랫사람에게서류 가져와라해도 잡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하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했습니다. 이 환경에 무엇이 감사할까요? 지키실 것 믿고 감사했고 사자 굴에 들어가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줄 믿고 감사했고 그의 마음이 요동치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기도는 언제 해야 합니까? 기도는 항상 하는 것이지(살전5:17, 눅18:1) 꼭 시간을 정하고 해야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지만 시간을 정해서 하는 기도도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제9시(오후3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행3:1). 이처럼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시간을 내어 정기적인 기도를 합니다. 기도시간을 따로 정해 놓지 않은 사람은 평소에도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셋째, 백성을 위해 금식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9:3).
어느 날, 다니엘은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70년(렘25:12)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는 것입니다. 이 때 다니엘은 금식하고 기도하기를 작정합니다. 다니엘의 나이가 90세 가까이 되었을 테니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간구하기 위해서 금식하기로 한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케 하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2:13)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일을 하시면서도 누가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일을 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70년이 되었으니 예루살렘이 회복되겠으나 이것은 누구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응답의 명령이 내린 것(9:23)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뜻을 정합시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기로 뜻을 정합시다.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기로 뜻을 정합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24.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 - 베드로
(마태복음 19:23-30)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계명들은 이미 다 지켜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실 때 근심을 하며 떠났습니다.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보신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부자는 아예 천국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하셨으니 부자가 자기의 재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물론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베드로만은 아닙니다.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사람 베드로의 삶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바요나 시몬(마16:17)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요한의 아들 시몬(요21:15) 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 안드레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하셨습니다(요1:42).
게바란 아람어로 바위란 뜻이고 이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베드로입니다. 여기 ‘장차’ 라 하셨는데 그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정식으로 베드로란 이름을 주셨습니다(마16:18).
베드로의 고향이 갈릴리였던 만큼 예수님과의 생애도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갈리리 바다는 그가 맨 처음 부름 받은 곳이고, 주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여 확신 주신 곳이며 부활 후 다시 나타나셔서 그에게 사명을 주신 곳이기도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눅 5:1-11).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맨 처음 만남은 안드레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고 소개를 하자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다시 형에게 달려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면서 베드로를 데리고 왔습니다(요1:35-42). 그러나 이 만남이 그들의 인생관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에도 역시 갈릴리의 어부로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베드로 일행은 그 옆에서 그물 씻기에 바빴습니다. 옆에서 말씀 전하시는 분에게 귀를 기울이기에는 너무 바쁘고 피곤했습니다. 이것이 대다수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조금 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그 곳에 앉아 말씀을 전하시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베드로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실때 감히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과 방법으로 헛수고했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고기는 엄청나게 잡혔습니다. 요한의 배까지 잠길 만큼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자신의 방법 대로 살려고 한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삶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믿음이란 나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주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베드로와 같이 살면서도 그 온전하지 못한 믿음이 부끄러운 것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 앞에 무릎을 꿇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마14:22-33).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시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갑자기 돌풍을 만났습니다. 갈릴리에서 한 평생 살아온 사람들인지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점점 겁이 났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이 걱정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급히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너무나 반가운 베드로는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위로 걷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오라”는 말씀에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가던 베드로는 그만 무서웠습니다. 바람과 파도가 삼킬 것만 같았습니다.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나직이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무서움이나 두려움은 불 신앙에서 생깁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사실 그들은 생사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예수님의 뜻에 달려 있는데 무서워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풍랑이 일어나면 어떻고 물에 빠지면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능력을 행하고 전도도 하며 제자의 삶을 살았지만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고백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우리가 정말로 믿음이 있는지, 확신이 있는지는 죽을 고비를 넘겨봐야 압니다. 지금 아무리 큰소리 쳐도 죽을병이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 그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살고 죽는 문제가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바울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셋째,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요21:15-19).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1-35). 이 말은 결코 베드로의 허풍이 아닙니다. 갈릴리 바다의 체험 이후 그는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믿음만 믿고 기도하지 아니한 베드로는 그만 예수님 말씀처럼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이처럼 약하고 비겁한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한없이 울고 울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찾아 뵙고 진심을 전하고 싶었지만 용기도, 기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십여 일이 지났을 때, 베드로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 하셨고 부활 후에도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이 요한 이었고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겁도 없이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요21:7). 너무 반가웠습니다. 예수님 발을 잡고 실컷 울고 싶었습니다. 진심은 그렇지 않다고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대해 한 마디 묻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거듭 물으셨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베드로는 대답했고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 후,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던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순교의 자리에 갈 때까지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갈 길입니다.
25.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한 사람 - 마태
(마태복음 28:16-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마태처럼 그의 생애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의 책인 마태복음은 잘 알려 있지만 그의 인물인 마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에도 그저 그가 부르심을 받게 된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뒤 열두 사도의 명단에 이름이 있음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마태를 알패오의 아들 레위(2:14)라고 소개합니다. 이 레위라는 이름은 그가 레위 지파 출신이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레위 지파는 가장 성스러운 지파입니다. 제사장의 반열입니다. 그런데 그의 직업은 세리였으니 레위 지파의 명예를 손상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미워했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항상 동격으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마태도 마찬가지입니다(마9:11, 11:19). 이런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변합니다. 남은 삶을 오직 그 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첫째, 마태는 예수님의 한 마디에 따른 사람입니다(9:9).
베드로와는 형편이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한번 만났던 경험을 가졌습니다. 물고기가 두 배에 가득히 잡히는 것을 체험하고야 비로소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따랐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생각 속에는 이런 물질적 욕망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순종했더니 이렇게 부자가 되었으니 이 분을 따라가면 얼마나 복을 받겠는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하고 노골적으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런 기적을 체험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이렇게 해 주겠다하고 장래를 약속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한 마디 “나를 좇으라” 하셨을 때 마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밤새 고생했는데 빈 그물만 던진 것도 아닙니다. 다른 날과 똑같이 세관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어김없이 세금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어떤 삶이 더 귀한 삶입니까?
사람들 중에는 모든 것 다 실패하고야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에 실패하여 병이 들고, 가정이 풍비박산 나고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픔이 있기 전에 가장 평온하고 잘될 때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더욱 귀한 것입니다. 대학 시험에 떨어지고, 재수, 3수를 해도 되지 않으니까 그제야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줄 깨닫고 신학대학을 지망하여 목사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학대학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둘째, 마태는 친구들과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한 사람입니다(9:10).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났을 때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9)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태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주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모임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잔치에 옛날 동료들인 많은 세리와 죄인들(어떤 종류인지 알 수 없으나)이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옛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면서 또한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이런 생활을 해 오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한 번 뵙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삶의 의미가 바뀌었으니 이 놀라운 변화가 이들에게도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집을 심방 가보면 함께 있던 친구들을 모두 내쫓듯이 돌려보내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얘, 목사님 오셨어, 빨리 돌아가” 하고 재촉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오히려 그들을 목사님과 만나도록 자리를 만들어서 전도할 기회를 삼아야 하는데 모처럼 기회가 생겼는데도 쫓아 내보내니 말입니다.
마태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변화되었듯이 그들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하던 바울(사울)이 예수님을 한번 만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기독교를 반대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인 목사님을 뵙는 순간 선입관이 사라지고 복음을 영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마태를 이야기하면서 그가 쓴 마태복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도로 혹은 전도자로 부름 받은 마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의 권능을 받아 위대한 전도자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이 먹어가면서 예수님의 산 증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생애도 얼마 남지 않음을 느꼈을 때 성령의 깊은 감동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후시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보고 느낀 예수님의 모습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지시였습니다. 더구나 아직까지도 동족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보고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약속하신 메시아는 이미 왔음에도 그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며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태는 자신이 옛날에 착취하여 괴롭혔던 유대인들을 위한 마지막 봉사로서 마태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구약성경의 인용이 두드러지게 많은 것(93회)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가 쓴 복음서의 핵심은유대인들이 수백 년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 즉 왕이 오셨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의 왕족 족보를 맨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먼 외국에서 축하 사절단이 값진 선물을 가지고 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2:2) 하고 질문한 사실을 부각시켰습니다. 산상수훈은 왕의 헌장이요. 감람산에서 가르치신 말씀(24,25장)은 왕의 경고입니다. 그는 복음서를 끝내면서 예수님은 단순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 즉 만왕의 왕임을 분명히 하면서 펜을 놓습니다.
또한 교회의 탄생을 예고한 사실(16:17-18)도 마태만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은 마태, 마가, 누가 모두 기록했으나 마태는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예언하신 것과 그 교회에게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고 밝혔습니다. 그것은 이미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암시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반석이신 자신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엡1:23)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교회뿐입니다.
이처럼 마태는 처음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오직 그 분을 위해 살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 분을 소개하였으며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소개하기 위해 한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사도의 모습입니다. 마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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