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예수의 사랑을 받던 가정 - 나사로 삼 남매
(요한복음 11:1-5)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성경에 보면 베다니란 마을이 둘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 주던 요단 동편 베다니가 있고(요1:28), 예수님께서 유대지방을 방문하실 때 흔히 머무시던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2-3Km 떨어진 곳에 베다니란 작은 마을이 있는데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을을 자주 찾아가신 것은 비록 가난하게 살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는 나병환자였던 시몬이란 사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사로,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 삼 남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삼 남매의 사는 형편을 알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결혼은 했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11절). 그런데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병에 걸렸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고민을 하다가 예수님께 이 소식을 급히 전했습니다. 마침 예수님은 그리 멀지 않은 곳, 요한이 세례 주던 요단 동편 베다니에 계셨습니다(10:40). 나사로의 집에서 그 곳까지는 불과 30여Km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왠지 예수님은 서둘지 않으셨습니다. 가족들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시면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이틀을 더 지체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었고 장사를 지낸 뒤였습니다. 절망 속에 빠진 마르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희망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신 말씀처럼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나던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유명해졌습니다. 작은 베다니뿐 아니라 예루살렘까지 소문이 퍼졌습니다. 나사로를 구경하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베다니로 몰려들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 곁에 앉아 있기만 해도(12:2) 전도가 되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곁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은 나사로를 보러 모여들었고(12:9) 나사로 옆에 계시던 주님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나사로는 전도 대장이 되었습니다.
전도 방법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시도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면 사람들은 구경하러 모입니다. 요새는 TV의 힘이 커서 탤런트나 가수가 온다 하면 모여듭니다. 축구나 야구선수, 금메달 리스트가 교회에 나와 앉아 있기만 해도 전도가 됩니다. 구경하러 사람은 모여들고 말씀은 하나님의 세우신 사람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세상에 유명한 인기스타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죽었다 살아나면 됩니다. 소문이 나고 유명해 집니다.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이 살아나면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망하던 사업이 예수 믿고 나서 회생하면 전도가 됩니다. 부부가 싸우고 애들이 가출하여 풍비박산된 가정이 살아나면 전도가 됩니다. 이처럼 내 신앙, 내 사업, 내 건강, 내 가정이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아나면 나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전파되는 것입니다.
둘째, 부지런한 마르다
마르다는 잠시도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 삼 남매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마르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작은 마을(그 곳이 베다니였다)에 들어가시게 되었을 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반겨 맞으며 자기 집으로 영접을 한 것입니다(눅10:38). 그리고는 이것저것 분주하게 준비하여 예수님을 정성껏 대접하였습니다. 이것은 마르다의 부지런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 졌을 때도(문둥이 시몬의 집, 마26:6) 마르다는 부지런히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요12:2).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도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맨 먼저 나가 맞이한 사람은 마르다입니다. 그 때도 마리아는 집에 있었습니다(요11:20). 나중에 마르다가 모다 못해 “마리아야,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자 비로소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이처럼 마르다는 부지런한 봉사자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것저것 찾아다니며 일하는 사람이요.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일을 도와 주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마르다를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에는 나사로처럼 죽었다 살아난 체험을 가진 사람, 지남철처럼 사람을 끌어들이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앞장서서 척척 일을 해나가는 부지런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앞장서는 부지런한 봉사자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심방을 할 때 그 곳에 나와 있고 교회당 청소를 하다 보면 그 곳에서도 보이는 사람,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앞장서서 척척 일해주는 일꾼이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처럼 부지런히 일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거리가 잘 보이지 않고 일을 보면 걱정부터 앞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덜렁거리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마르다와는 달리 차분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셔서 마르다는 대접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눅10:39). 시간이 모자라고 손이 모자라 쩔쩔매던 마르다가 예수님 마리아 좀 날 도와주라고 해 주세요하고 투정부릴 만큼 예수님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렇게 가까이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밖에서는 사람들 틈에 끼여 감히 바짝 다가설 수도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가까이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아마 뺏기지 않을걸” 하셨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목사에게 가장 좋은 대접은 좋은 음식이나 의복을 사 주는 것보다 교회에 열심히 나와 앞줄에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를 볼 때 얼마나 힘이 나고 용기가 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주님은 이 마리아가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마리아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날이 임박 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몇 차례 수난 예고를 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그는 장차 돌아가실 주님을 위해 가장 값진 선물을 드립니다. 아껴 모았던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장정 300명의 품삯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이것을 그냥 드리거나 팔아서 돈으로 드리는 것이 좋겠으나 곧 돌아가실 주님을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이 헌신을 기뻐하셨습니다. 나사로 삼 남매는 각자 주어진 은사를 따라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은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32. 예수를 만지려 한 사람 - 도마
(요한복음 20:24-29)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를 말할 때 항상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고 합니다. 둘 다 같은 말입니다.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이고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인데 모두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도마는 누구와 쌍둥이였던 것 같습니다.
도마에 대한 정보는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만 약간 제공되고 있을 뿐, 공관복음이나 사도행전에는 열두 제자들의 명단에만 나와 있고 그의 행적, 어록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서 왜 그가 제외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도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이틀이 지난 후 유대로 가자고 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걱정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했고(10:31) 또 예수님을 잡으려 할 때 피하신 것이 바로 얼마 전(10:39)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하고 만류했지만 앞장선 사람은 도마였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1:16).
또 한 번,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실 때 제일 근심한 사람도 도마였습니다. 주님이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리라하자 도마는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14:5). 그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것이 도마에 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또 하나 있다면 부활한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신앙이 놀랍게 성숙했다는 점입니다. 도마의 이름은 열두 제자 중 항상 일곱 번째나 여덟 번째입니다. 그런데 부활한 주님을 만난 후인 21:2에서는 베드로 다음에 도마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름 순서는 항상 신앙의 서열임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도마의 믿음이 어떻게 성숙해졌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도마는 함께 있지 아니했습니다.
늘 함께 있던 자리에 세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계셨고 가룟 유다가 없었으며 도마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니(마27:5) 이곳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제는 도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곳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어디 있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예수님께서 잠깐 다녀가신 것이 아니라 한동안 말씀을 나누셨지만 그 때까지 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삼 년 동안 따라다니다가 스승이 이렇게 갑자기 적에게 비참하게 죽고나니 허탈했을지도 모릅니다. 장래에 대한 염려, 앞으로의 처신 이런 것 때문에 산에 올라가 고민하다가 내려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도마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며 주신 평강을 얻을 수 없었고 성령을 받아라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 저녁입니다. 후에 이 날 이 시간은 그리스도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일 저녁 주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은혜, 평강,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도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낮에는 함께 있었는데 저녁에는 함께 있지 아니한 사람 말입니다. 그는 주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은혜의 시간인 주일저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둘째, 도마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말이 믿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두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즉 믿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을 것과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 하셨고 도마도 몇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도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무덤에 달려가 확인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3년 동안 함께 지내던 10명의 동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지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환상을 보았거나 꿈을 꾸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마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 확인을 해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동료 제자들의 말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철저한 사람인 것 같지만 자기 자신밖에 믿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셨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한 후 믿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주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사도들의 전해준 말씀과 기록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눈으로 본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증거(히11:1)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믿음이라”(벧전 1:8,9) 하였습니다.
셋째, 도마는 뒤늦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불신앙의 원인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8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도마를 만나 주셨을 때 자신의 불신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았습니다. 손을 내밀어 만져 보라 하셨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확인하지 않아도 만남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자기가 8일 전에 제자들과 나눈 대화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일러바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주님께서는 그 말을 다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장 나타나지 않으시고 지금 찾아오신 것입니다.
신앙은 만남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믿음이나 신뢰도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님과 나와의 신앙도 만남이 없이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5년, 10년 교회를 다녀도, 집사가 되고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일해도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온전한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도마의 신앙 성장 과정을 보십시오. 모임에 잘 참석치 않던 사람이 참석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 믿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말도 정신나간 사람처럼 들리다가 어느 날 주를 만난 후 온전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참 하나님의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일 낮예배만 겨우 참석할 뿐 밤예배나 수요예배는 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어쩌다 저녁예배나 새벽기도회에 나와도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를 만났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입니다.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온 밤을 새워 기도하십시오. 그 때 살아 계신 주님은 만나 주실 것입니다.
33. 예수의 말씀을 실천한 사람 - 바나바
(사도행전 4:32-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사도들이 바나바 즉 위로자, 권위자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이를 보면 바나바의 성품이나 사역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구브로섬(지금의 키프러스)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레위 지파 사람 이였습니다. 구브로는 마카비 시대부터 유대인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했는데 아마 이 때 바나바의 가족들도 이 곳으로 이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구브로는 원래 농토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본래 레위 지파 사람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으나 외국에 나가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유대 사회에서도 A.D. 1세기경 이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바나바는 마가 요한의 외삼촌(골4:10)으로 알려져 있고 마가 요한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성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행11:24)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가르침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여 본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바나바는 재산을 드려 봉사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특징적 모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앙에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에 힘쓰며,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공동생활이었습니다. 네것 내것 없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습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행2:44-47, 4:31-32).
이런 일에 앞장 선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구브로 그 먼 곳에 있는 땅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한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왔으나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하시는 말씀에 근심하여 돌아간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을 도와 준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행에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던 사람도 자기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지 못했으니 이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의 흉내를 내려다 멸망을 자초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바나바의 그 행동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나 봅니다. 이들 부부도 자신들의 소유를 팔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만 사단은 그 마음속에 아까운 마음을 넣었습니다. 땅값 얼마를 감추었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사람은 누구나 재물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여 사람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둘째, 바나바는 바울의 사역에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교회를 쓸어 버리려고 성도들을 끌어다 옥에 넘기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됩니다. 3년이 지난 후 이제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예루살렘에 나타났으나 누구 한 사람 사울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모두 두려워하고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울은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울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난처하게 되었을 때 사울을 잡아 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어떻게 주를 보았고, 변화 받았으며, 다메섹에서 예수를 증거한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요새 말로 신원 보증을 해 준 셈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제자들과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아 고향 다소로 피신했습니다.
사울이 고향에 내려와 기도하며 지내고 있을 때 사역자로 불러 준 사람이 또한 바나바였습니다. 그 때,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교역자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가는 도중에 다소에 들려 수소문 끝에 사울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함께 안디옥으로 옵니다. 그리고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사울이 전도자가 되도록 도와준 사람이 또한 바나바입니다. 바울은 그의 성격상 목회자보다는 전도자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생애 속에서 한 교회에 가장 오래 목회한 곳이 에베소 교회에서의 3년입니다.
그는 전도자였습니다. 수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고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전도여행을 시작합니다. 물론 이 둘을 선교사로 따로 세우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바나바는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여 사울을 전도 여행의 동반자로 선택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여행의 인솔자가 후배인 바울(사울)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13:2에서는 분명히 바나바와 사울로 시작되는데 13:13에서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고 13:43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라고 순서가 바뀝니다. 이제까지 사울의 사역을 위해 잡아 주고 이끌어 주던 바나바는 바울이 안정된 전도사역을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그 위치를 바울에게 양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있기까지는 착한 성품의 소유자 바나바의 헌신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셋째,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유익한 일꾼으로 만들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그래도 비교적 부유한 환경 속에서 큰 고생을 해 보지 않았던 그는 외삼촌을 따라 전도여행에 나서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슬그머니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 때, 바울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결코 마가 요한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수년 후에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 때 철부지 마가 요한은 또 따라 나섭니다. 성격이 대쪽같은 바울이 이와 같은 마가를 용납할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끝까지 마가 요한을 데리고 떠나자고 합니다. 결국 마가 때문에 10년 지기인 바울과 심하게 다투기까지 하지만 바나바는 바울보다 마가를 선택합니다.
생질이라는 혈육 때문일까요?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마가 요한은 아직 성숙치 못한 철부지 신자였으나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섭섭해도 넘어질 사람이 아니었으나 만약 마가를 잡아주지 않으면 실족하고 말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후에 마가는 바울에게도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 함께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마가이며 바울의 노년에도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은 마가 였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이런 마가의 뒤에는 헌신적인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해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용서하라(마18:22) 하셨습니다. 바나바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철부지 마가 요한, 천방지축 마가 요한을 유익한 일꾼으로 양육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처럼 착한 사람이 됩시다. 바나바처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가 됩시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34. 예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 - 스데반
(사도행전 7:54-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점점 부흥되어 수천 명이 되고 매일 새 식구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열두 명의 사도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재정을 관리하고 구제, 봉사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집사를 세울 때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을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①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적인 생각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 받는 사람을 제일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②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혜란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의미합니다. 집사로서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재능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③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의 일꾼을 세울 때는 공동의회에서 투표를 하고 성도들의 2/3 이상의 지지를 얻는 사람이 장로나 집사, 권사로 세움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사람이 선출되었는데 그 중 맨 먼저 뽑힌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의 순서는 신앙의 서열입니다. 교회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재산 많은 사람이 우선이 아닙니다. 신앙 좋은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특히 일곱 번째 사람인 니골라는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이었습니다. 즉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을 막기 위해 인간적인 배려를 한 듯합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은 이 니골라가 계시록 2장에 나오는 니골라당과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스데반은 일곱 집사들 중 수석집사였습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큰 기사와 표적을 사람들에게 행하였습니다(6:8). 또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을 아무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의회 의원들은 율법과 성경에 능통한 사람들이지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집사는 천사와 같이 얼굴이 밝고 환해야 합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해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하였습니다(6:15). 스데반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산헤드린 공회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지만 그들 앞에서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얼굴이 사나우면 안 됩니다.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인격이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짜증스럽고 근심 가득한 얼굴을 가지고야 주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천사의 얼굴이란 은혜받은 얼굴을 말합니다. 은혜 받으면 얼굴이 변합니다.
특히 자기를 욕하고 비방하고 대적하는 자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보여야 합니다. 사람은 마치 구정물통과 같다고 합니다. 모든 찌끼가 가라앉은 구정물통은 맑은 물처럼 보이지만 막대기로 속을 한 번 뒤집어 놓으면 콩나물 대가리, 밥풀, 무 조각 등 가라앉은 것이 모두 떠오르고 맙니다. 사람의 인격도 그 속을 뒤집어 보아야 압니다. 평안하고 은혜 받았을 때야 모두 천사의 얼굴입니다. 속상할 때 보아야 그 속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속을 뒤집어 놓았을 때 무엇이 떠올랐습니까? 천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온유하고 부드럽고 맑은 그 모습은 누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딤후2:24,25)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을 욕하고 비방하고 대적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온유해야 합니다. 속이 상한다고 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큰소리치고 삿대질을 하고 심지어 교회에서 멱살을 잡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야고보 선생은 말하기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1:20) 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화내거나 싸워서 잘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는 것(고전13:5) 입니다. 스데반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무릎 꿇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을 가집시다. 인격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얼굴이 하루아침에 변하지야 않겠지만 천사의 마음, 천사의 얼굴을 갖도록 노력합시다.
둘째, 스데반은 성경에 정통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설교(7:2-53)를 읽어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집사로서 이렇게 성경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까? 스데반이 설교 준비를 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 있기나 했습니까? 아니면 설교 전문가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집사입니다. 집사인 그가 자기를 죽이려고 잡아온 사람들 앞에서 즉석 설교를 하고 있는데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분명하고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고(6:11)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6:13)고 고소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형식적인 성전 제사가 아니고 형식적인 율법주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바른 예배 속에 참 신앙이 있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그의 설교는 논리 정연한 것이었습니다. 대적하는 사람들도 감히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식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 글 모르던 시대에는 덮어놓고 믿었지만 이제는 거의 고등교육을 다 받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분변하지 못하면 망신당하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정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스데반은 순교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이 찔렸습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들추어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마음이 찔릴 때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회개하는 사람(행2:37)도 있지만 이 사람들처럼 이를 갈며 분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쳤습니다. 그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시기 때문(시116:15)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 같은 죽음이 있습니다.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상 29:28). 이것은 값진 죽음입니다. 그리고 순교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교 당한 영혼을 받으십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시110:1, 골3:1, 히1:3)이 벌떡 일어나셔서 스데반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교 당한 영혼들은 하늘 제단 아래 있었습니다. 제단아래는 제물의 피를 뿌리는 곳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희생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교의 자세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셨습니다(마10:38.39, 16:24.25). 스데반처럼 삽시다.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삽시다. 천사의 마음을 가지고 죽기까지 충성하다가 생명 바쳐 희생의 제물이 됩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35. 예수의 뜻을 가장 잘 안 사람 - 빌립
(사도행전 8:1-8)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뽑은 일곱 명의 집사들 가운데 두 번째 사람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생애는 교회 재정을 관리하고 봉사와 구제를 하는 집사라기보다는 복음을 위해 헌신한 전도자였습니다(21:8). 예루살렘 교회에서 집사로 일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핍박이 나서 흩어진 이후 다시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또한 딸들이 네 명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처녀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집사들에게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딤전3:12)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목사님은 다 큰 아들이 주일에 교회도 나오지 않고 있어 근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녀들이 불량자가 되어 속을 썩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목사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한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전도자이면서 딸들 넷씩이나 모두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을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그 뜻을 위해 일생 몸바쳐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 모습을 사도행전 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갔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신호로 예루살렘 교회는 큰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피를 본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려고 집집마다 수색하여 신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잡아다 옥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죽기를 각오한 사도들 외에는 유대로, 사마리아로 각기 다 흩어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20:28)요 그리스도의 몸(엡1:23)입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뿌리요 모체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이 예루살렘 교회를 출발점으로 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관심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교회에 큰 핍박이 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이제 막 돋아나는 교회의 싹을 꺾으려는 사울 일당을 그냥 두셔서 교회가 흩어지게 만드셨을까요?
이것은 1:8의 말씀을 이루려는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점점 부흥되었습니다. 수천 명, 만 명 이상의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은혜가 충만했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이들을 흩어 내보내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100년 만에 일천만 성도로 성장했지만 그 과정 속에는 하나님의 이런 강제로 흩으시는 일이 있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교회들은 뭉치는 교회였지 나누어지고 흩어지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수천 명, 만 명이 모여도 흩어질 줄 몰랐습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분쟁이 생기고 분열이 되었습니다. 천 명 교회가 둘로 갈라지면 몇 년이 안 되어 두 교회가 각각 천 명의 교회로 성장되었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되기 전에 교회가 어는 정도 성장하면 한 지역(혹은 교구)을 떼어 분가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교역자를 파송하고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야 이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데 교회가 이런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니 싸우고 갈라지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 채찍을 들어 흩으시는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사마리아로 내려갔습니다. 그리스도를 백성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성령님이 도우셔서 갖가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얻게 되었고, 그 성에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을 알고 실천한 빌립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핍박이 온다면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이 온다면 그 속에 담겨 있는 주님의 뜻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입니다.
둘째, 빌립은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사마리아 교회가 점점 부흥되고 재미있을 때 주님의 사자가 빌립에게 나타났습니다. 일어나 사마리아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로 내려가라 하셨습니다. 순종하여 내려가 보니 그곳은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였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전도를 하고 마을이 있어야 교회를 세울 텐데 광야였습니다.
그 때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책임진 권세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털털거리는 병거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은 빌립이 가까이 가서 “읽는 글이 무슨 내용인지 깨달아 지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내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병거 위로 올라가 내시가 읽고 있던 이사야 53장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인 내시는 세례를 자청하여 받고 기쁨으로 본국에 돌아갔습니다.
성령께서 광야로 보내신 데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사랑하시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수가 성에 사는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찾아가신 주님이 한 명 내시를 전도하기 위해 빌립을 이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한 나라를 전도한 것입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내시는 에티오피아 최초의 전도자가 되었고 많은 사람을 전도했으며 여왕까지 믿게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지역의 유일한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 결코 우연의 일은 아닙니다. 그는 에티오피아 국가의 신앙적 초석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저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면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 뜻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빌립이 “나를 왜 이 광야로 보내시는지 알려주십시오하고 한 일 주일 작정기도를 한 뒤에 내려갔다면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빌립은 주님의 뜻을 안 뒤에는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셋째, 빌립은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를 전도한 후 빌립은 아소도 지방의 여러 마을에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주님은 그를 가이사랴에 머물게 하셨고 후에 바울이 찾아갔을 때까지(21:8) 20여 년간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복음을 들고 어디든 나서던 빌립을 주님은 이제 한 지역에 머물게 하셔서 한 교회를 섬기면서 집사로 전도자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어디든 순종하고 나갔던 빌립에게 내리신 주님의 은총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가이사랴에는 로마 총독부가 위치해 있는 곳이어서 복음 전파가 쉽지는 않았겠으나 이곳은 교통과 행정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헤아려 압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살라는 이것이니라”(요6:39)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뜻을 알아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중히 여기고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주님은 또한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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