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설교

하나님 마음에드는사람6

공 상희 2008. 3. 1. 12:37
 

26. 예수를 섬기는 종으로 소개한 사람 - 마가

(마가복음 10:42-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베드로 서신 등 비록 단편적이지만 성경 곳곳에서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가 혹은 마가 요한, 요한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이요, 마가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는 로마, 문화는 헬라 문화를, 그리고 종교는 히브리 종교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의 제자요 수종자로서 한평생을 바쳤는데 그가 마가복음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스승인 사도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 마가는 경건한 신앙 가정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우리는 마가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이름이 맨 처음 등장한 곳은 사도행전 12:12입니다.  그것도 마가 때문이 아니라 그의 집 때문입니다.  헤롯 왕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인 뒤 유대인들이 기뻐하자 베드로도 죽이려고 잡아 가두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 속에서 자기 집을 기도 처소로 내놓은 것을 보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는 상당한 신앙이 있던 사람이요 또 넓은 집을 소유한(예루살렘에)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옥에서 풀려난 베드로가 곧장 그 집으로 찾아온 것을 보면 이 집은 이미 기도처로 알려진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행1:13의 ‘저희 유하는 다락’이 아니겠는가 하여 흔히 마가 다락방에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였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마가에게 신앙적 영향을 준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삼촌이 되는 사람으로 구브로 출신입니다. 그도 자신의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자져와 서로 나누어 쓰게 한 믿음의 사람입니다(행4:36,37).  사도들이 그의 이름을 바나바(권위자)라고 붙였을 만큼 경건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마가 요한은 어릴 때는 경건한 신앙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그리고 장성한 후에는 믿음 좋은 삼촌 밑에서 신앙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훌륭한 주님의 일꾼이 된 것은 이 두 사람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람은 그 성장 환경이 인격을 만듭니다.  세상이 이상하게 되어 어릴 때는 못되게 자랐다가 예수 믿고 180도 변화된 사람들이 인기가 있고 자랑스럽게 간증을 합니다만 내가 한평생 신앙의 스승이요 부모로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올바른 신앙 지도를 받고 성장해온 사람이 좋습니다.  인격에 손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 마가는 사도들의 수종자였습니다.


  집에서 신앙 좋은 어머니의 지도를 받던 마가가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한 것은 사도행전 13:5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수종자로 데리고 떠납니다.  수종자라 했으니 여행할 때는 짐을 지고 가고 식사도 챙기고 하는 심부름꾼 즉 조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마가)은 넉넉히 사는 어머니(아버지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과부인 것 같고 동생의 이름도 없다)의 외아들로 고생을 모르던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대단히 호기심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밤빌리아의 버거에 도착했을 때 그만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행13:13).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상심했을까요.  그것은 몇 년 후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제2차 전도여행 길에 오를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가 요한이 다시 따라나선 것입니다.  성격이 강직한 바울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성격이 너그러우며 또 상대가 조카인지라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둘은 이 문제로 옥신각신 심하게 다투다가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지방으로 떠나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다른 지역 즉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마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더 멀어졌을 것입니다.

  그 후, 바울 서신에서 마가가 등장한 것은 20년이 지난 후인 로마 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그 동안 마가 요한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애굽(알렉산드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에서 사역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골4:10-11)고 하였습니다.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 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하였습니다.  이 때 마가는 바울과 함께 로마옥중에 있었고 하나님 나를 위해 함께 역사 하는 자요 바울의 위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의 동역자 마가”(몬1:24)란 말을 썼으며 특히 수년이 지난 후 마머틴 지하 감옥에서 죽기를 기다리던 노인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하였습니다. 전에는 무익했으나 지금은 유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이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마가 요한이 변한 것입니다.  그가 장성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어리고 나이가 어릴 때는 목사님에게 힘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속썩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먹고 신앙이 자란 뒤에는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눈을 감을 때 꼭 보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새 신자 때는 순종하고 충성하던 사람이 신앙이 자라고 집사, 권사, 장로가 되어 목사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분열시킨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가는 정말 하나님과 하나님 사람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뒤늦게 사도들을 통해 신앙이 성숙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 가는 제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마태와는 다른 주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내려오신 하나님의 종’ 이것이 마가가 보여 주려 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이방 집권자들은 권세를 가지고 맘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고 권세를 부리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크고자 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출생이나 어릴 때 이야기가 생각되었습니다.  종은 족보나 어릴 때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이라고(막1:1) 하였습니다. 종은 말을 잘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강조한 산상수훈이 생략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다 이루었다” 했지만 여기는 사역이 끝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섬기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막1:1)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시는 장면을 목격한 백부장도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종으로 오신 예수님, 대접받기보다 대접하시고 섬김 받기보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 그 분의 뒤를 따라갈 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7. 예수의 발자취를 살핀 사람 - 누가

(누가복음 1:1-4)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에 대해서는 그의 행적은 비교적 알 수 있지만 그의 성장 배경이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직업이 의사(골4:14) 였다는 점뿐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의학적 용어가 약 50여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두 권의 성경, 즉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하여 대단히 세밀하고 총명한 사람이며 아름다움과 교양과 웅변술과 철학적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이런 사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배려였다고 할 것입니다.


  첫째,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와 함께 누가를 ‘나의 동역자’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몬1:24).

  바울이 맨 처음 누가를 만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누가 자신의 글이기 때문에 그 속에 자신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읽어 보면 ‘우리’ 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10).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누가가 동행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가의 일로 인해 바나바와 다투고 헤어진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전도 길에 오릅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더베, 루스도라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에서 디모데를 만나 전도여행에 합류시킵니다. 그리고 몇몇 성을 다니며 돌보고 있었는데 성령이 아시아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부루기아,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지만 성령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이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결심합니다. 이 때부터 누가가 이들 일행과 합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후, 누가는 바울의 곁을 항상 지키고 있습니다.  잠깐 떠난다면 그것은 바울의 부탁을 받고 떠났을 뿐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고후12:7).  이런 전도자에게 의사인 누가는 대단히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재능을 사용할 곳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때부터 누가는 한평생 바울의 주치의로 곁에서 건강을 돌보아 준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도 누가는 거기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도 누가는 거기 있었습니다.

  바울이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는 사정이 많이 악화되었습니다.  첫 번째와 같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죽을 때를 기다리는 마머틴 지하감옥에 있었습니다.  전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습니다(딤후4:16), 그러나 누가만은 끝까지 바울 곁에서 지켰습니다(딤후4:11). 나이는 많아 점점 쇠약해지고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 둘 떨어져 나갈 때 죽음을 앞둔 노 사도를 끝까지 지킨 사람은 오직 누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래 전 에베소에 편지를 보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고 축복하였습니다(엡6:24).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세우신 사람에게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도 귀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서 모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고 충성하였기에 모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등지고 떠나갈 때도 끝까지 지키는 사람, 모든 사람들이 목사를 외면하고 떠나가도 끝까지 곁에서 지켜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영락교회 현관 앞에는 한 장로님의 순교비가 있습니다.  6.25때 모든 성도가 교회를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 갔을 때 끝까지 남아 교회를 지키다 순교한 장로님의 비석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이 말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인지 보여 줍니다.


  둘째,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누가가 붓을 들 당시에는 이미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여러 편의 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같은)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글들은 너무 주관적이었고 단편적이었습니다.  자칫하면 오히려 복음전파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역효과를 줄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옆에서 가까이 지내던 누가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의사가 가지고 있는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구원부터 차근차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누가는 붓을 들어 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서두에 수신자로 나오는 데오빌로 각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합니다.  그러나 모두 학설일 뿐 정설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이 복음서를 읽는 모든 독자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분명히 데오빌로 한 사람을 위해 이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고 듣기는 하였지만 단편적으로 혹은 잘못 들은 사람들에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헬라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헬라문화권 안에 있는 흩어져 있는 기독교인들과 교육받은 이방 지식인들에게 이 글을 읽히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인성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지식인들에게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이상에 맞는 모범적 인물’ 이지 왕이나 종으로 혹은 신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두에 예수님의 출생과 훌륭한 인격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족보도 신적 족보(요셉이 친아버지가 아니니까)보다는 인적 족보(마리아의 족보)를 실었고 위로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2:52)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인자’를 강조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이 말씀은 누가복음의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셋째, 누가는 또한 사도행전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려고 한 사람은 많았지만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려 한 사람은 흔치 않았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그 이후의 일을 기록하여 보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고아처럼 버리지 않고 보혜사 곧 성령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는데 이 약속과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예수의 행전이라면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알 수 있고 베드로에게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확장과 함께 복음은 날개를 달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그리고 당시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1).  2천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도 성령님은 부지런히 일하십니다.  땅 끝 오지에도, 산속 정글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파되고 있습니다.

28. 예수를 잉태한 사람 - 마리아

(누가복음 1:26-38)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만도 최소한 여섯 번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마1:16),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19:25), 막달라 마리아(마27:26), 마르다의 자매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요11:1),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행12:12-17).   그리고 로마에 살던 한 성도 마리아(롬16:6)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구약 성경에 나오는 미리암(모세의 누나)도 같은 이름입니다.  미리암의 헬라식 이름이 마리아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이름이 마리아이지만 그 뜻은 오히려 ‘슬픔, 괴로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므온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마리아는 큰 슬픔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들어가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기를 축복하였지만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2:34,35) 하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아무런 죄도 잘못도 없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절규하는 마리아를 예수님은 바라보시다가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시므온의 예언대로 칼로 마음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 나타난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입니다.  이에 의하면 마리아의 아버지는 헬리(눅3:23)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세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친족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멀리 유다 산중까지(나사렛에서 150km) 찾아가 석 달을 머무른 것을 보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평소에도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신앙을 살펴봅시다.


  첫째, 마리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만나자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하였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하신다면 마리아가 은혜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신세를 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사역에 선택된 것이 은혜입니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마리아가 없어 하나님께서 이 일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수많은 여인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허락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여인가운데 내가 선택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에 동역자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퍽 아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셨으니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은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일에 쓰임 받고 싶어도 그녀가 순결한 처녀가 아니었다면 헌신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까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기 때문에 쓰임 받을 수 있었으니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재능이 있는 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시간과 건강한 몸이 있는 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일에 쓸 수 있는 재물이 있는 것이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결혼하고 나면 쓰임 받지 못하듯 우리의 건강도, 시간도, 재물도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쓰임 받고 싶어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은혜 받은 것입니다.


  둘째,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마리아의 대답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상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님께 여쭈어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정혼한 처녀로서 꿈도 많고 계획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내 계획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이 우선입니다. 자신의 일을 먼저하고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돈도 내가 필요한 곳에 우선 사용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 뜻이 있고, 내 계획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 뜻을 포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내 계획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청혼한 처녀로서 마리아가 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빌려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빌려 주기 곤란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남편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부모는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처녀의 몸에 아이를 잉태시킬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그 이후의 발생할지 모르는 모든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순종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셋째, 마리아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억지로 순종한 것 아닙니다.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1:46,47)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순종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일을 바라보고 기뻐 찬양 했습니다.

  먼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이루어질 일을 생각했습니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1:48).  한낱 시골여자, 비천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장차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며 모든 사람이 복 받은 여인이라 부러워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지금 당할 수모나 부끄러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일로 인해 온 인류에게 미칠 위대한 일을 생각했습니다.  태어날 아기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입니다.  그가 교만한자는 흩으시고 권세 있다고 뽐내는 사람은 내리치실 것이며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실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셨다고 과거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감사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감사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만약’의 감사입니다.  가장 치사한 감사입니다.  만약 부자 되게 해 주시면 이렇게 일하겠습니다 하는 것인데 대부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의 감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간 베풀어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그러므로’ ‘…때문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정말 신앙인의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이루어 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계신 것만 가지고도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어 주실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과 감사에는 이런 믿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29.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 - 시몬

(누가복음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원해서 스스로 하는 일이 있고,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때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 보니 시몬 이라는 사람이 열 명이나 나옵니다.  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본명이 시몬입니다(마4:18), 예수님의 형제 중에 시몬이 있고(마13:55), 베다니에 살고 있던 문둥이 시몬(마26:6), 가룟 유다의 부친도 시몬입니다(요6:71), 마술사 시몬(행8:9,24)이 있는가 하면 베드로가 머물렀던 욥바의 피장도 시몬(행10:6)입니다.  열심당 시몬(눅6:15), 바리새인 시몬(눅7:40) 그리고 여기 구레네 사람 시몬(눅23:26)이 있는데 구약 성경에도 유다 지파에 시몬(대상4:20)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 구레네 사람 시몬은 성경에 같은 사건으로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인데 마태복음 27:32, 마가복음 15:21, 그리고 누가복음 23:26에 각각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짧은 한 구절밖에 기록이 없지만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시몬의 십자가는 억지로 진 십자가였습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동북부, 지금의 리비아에 있는 항구도시 트리폴리를 말합니다.  구레네와 알렉산드리아 등에는 흩어진 유대인들(디아스포라)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이 왜 예루살렘에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왔다는 말을 보면 무역하러온 장사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행을 왔는지(유월절이니) 일자리를 구하러 왔는지 아무튼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보기 드문 광경을 보았습니다.  죄수의 처형행렬입니다.  많은 구경꾼 틈에 그도 끼어 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쳐 쓰러지자 군인들이 시몬을 잡아들여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것입니다. 대개 십자가는 두 개의 막대기로 되어 있는데 스테이페스(stipes)라 불려지는 세로막대는 골고다 언덕에 세워 두고 파이테부름(patibulum)이라 불리는 가로막대기는 죄인이 지고 갔습니다. 이것은 범죄자는 이렇게 된다는 경종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 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치고 쓰러진 예수님께서 도저히 지고 갈 수 없게 되자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메워 준 것입니다. 건장해 보이는 청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참 재수 없다. 왜 하필 이런걸 내가 메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인을 저주하고 욕할 때마다 ‘내가 아니다. 죄인은 저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인이 무서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도 선택의 여지없이 십자가를 억지로 질 때가 있습니다.  고난의 십자가, 질병의 십자가, 핍박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워 주신 십자가는 좋아서 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메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멍에를 만들어 목에 얹고 다니자 이를 못마땅히 여긴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어 버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하나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렘28:13).  하나님께서 지워 준 십자가가 무겁다고 벗어 버리면 더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워 주실 것입니다.

  둘째, 시몬의 십자가는 예기치 않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시몬이 무슨 일로 예루살렘에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실 것을 알고 대신 지고 가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을 보고 준비하여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상하는 시련은 거의 없습니다.  건강이 염려되어 정기적으로 검진 받는 사람은 거의 큰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치 않고 있을 때 갑자기 쓰러지고 불치의 병이라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도둑이 들어올까 봐 안전장치를 해 놓고 있을 때는 아무런 일이 없다가도 방심하고 있을 때 도둑이 들어오고 집에 화재가 나고 합니다.

  시몬에게 이 십자가는 예기치 않는 십자가였으나 또한 피할 수 없는 십자가였습니다.  예기치는 않았으나 미리 예견된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잔을 피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는 예기치 않은 뜻밖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미리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셋째, 시몬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였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가족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만약 이 사람이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고 만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의 아버지라고 구태여 이름을 밝힐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 보다도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뒤 창피하고 기분 나쁘다고 총총히 사라졌다면 그의 이름과 가족 상황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마가의 이 기록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시몬과 그의 아들들을 모두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해 주는 성경 한 절이 있습니다.  로마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끝부분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16:13).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루포가 마가복음 15:21의 루포 즉 시몬의 아들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즉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시몬과 아내 그리고 아들들까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창피하고 기분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사람이 얼마나 몹쓸 죄를 진 사람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멀리서나마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모습을 보고, 또한 주의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이 분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하시던 모습을 지켜 보았던 사형 집행관인 백부장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이었도다”(막15:39)하고 고백하였으니까요.

  바울은 말하기를 루포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사람(‘선택’이라는 뜻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봉사와 충성이 뛰어난 자’)라고 했고 그의 어머니 즉 시몬의 아내는 ‘내 어머니’ 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신앙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그러니 시몬이 지고 간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라고 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어도 자신과 가족들이 이렇게 복을 받았다면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간다 사람은 무슨 은혜를 받고 무슨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우리에게 맡겨 주신 십자가가 아무리 예기치 못한 십자가라 해도 불평하지 맙시다.  주님은 십자가 지고 가셨으니 우리는 편히 뒤따라 가리라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 각자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30. 예수의 길을 예비한 사람 - 세례 요한

(요한복음 1:19-28)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물론 어느 사람이건 목적이나 계획이 없이 이 땅에 보냄 받은 사람은 없지만(엡1:4,5) 예레미야를 복중에 짓기 전에,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셨던 것처럼(렘1:5)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 속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이 잉태되기 전, 천사 가브리엘은 성소에서 분향하던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 아내가 아들을 낳아 줄 것과 이름을 요한(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란 뜻)이라 지으라는 말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실인처럼(민6:1-21) 구별된 사람이며 태아로 있을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보냄 받은 선자자로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말4:5,6)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이며, 장차 오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중요한 책임이 있는 사람인 것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천사의 예언대로 아기는 잉태되었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후 사가랴의 집을 찾았을 때 태속에 있는 아기가 이를 알아보고 뛰놀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선지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보내심 받은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원인이 어디 있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장안에는 이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사람들은 줄을 지어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나갔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 조사를 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네가 누구냐?” 이 말은 보냄 받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따지듯 물은 질문입니다. 󰡒�네가 메시아냐?   우리가 수백 년동안 애타게 기다려온 메시아가 너냐?󰡓� 요한은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히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자신을 추앙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고 대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되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냥 두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엘리야냐?󰡓�󰡒�아니다.󰡓�󰡒�그럼 선지자냐?󰡓�󰡒�아니다.󰡓�이런 대답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달려온 수많은 군중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엘리야가 아닐까 하고 그에게 세례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낙심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예수님은 말씀이지만 자신은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말을 전달해 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귀를 울려 말을 전달했다면 사라져야 합니다.  계속 고막을 울리고 있다면 사람은 그만 미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위치였습니다.

  위치를 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가 자기 위치를 잊고 하나님처럼 군림하려고 하거나 장로가 위치를 잊고 목사의 직무까지 간섭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집사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구역장은 구역장의 위치를 알고 잘 지켜야 칭찬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맡겨진 사명은 장차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오시면 사람들에게 이 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요한은 먼저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교만한 생각을 씻어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다시 이스라엘 지경으로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요단강 밖으로 건너오지도 아니하면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당연히 세례를 받을 수 있지 않느냐󰡓�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마3:7-9) 하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셨고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은 영접할 줄 몰랐습니다.

  간혹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본분이 무엇인지를 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생이 학생의 사명을 잊습니다.  성도가 성도의 사명을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또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돌아오는 안내위원이나 헌금위원을 잊고 지나갑니다. 주일 저녁예배의 기도시간을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눅16:10).

  셋째, 자신의 기쁨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방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기 시작하자(사실은 제자들이 준 것이다) 세례 요한에게 오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계신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불평을 했습니다.  군중들의 관심이 자기 스승에게서 예수님에게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제자들의 투정 어린 말에는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무엇이 기쁨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보다 예수님께로 찾아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하였습니다.  친구의 결혼을 위해 좋은 여인을 중매해 주고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하며 혹시 사이가 나빠지면 찾아가 타이르기도 하다가 결혼이 성사되었을 때의 기쁨입니다.  친구의 결혼식을 위해 결혼식장을 마련해 주고 이것저것 분주히 도와 주다가 결혼식이 진행되는 날 하객들 틈에 섞여 흐뭇하고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런 기쁨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였습니다.  내가 잘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흥하고 번성하는 기쁨보다는 주님이 흥하고 주님께 많은 사람이 따라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이처럼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기를 높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성도는 목사님 잘 되기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요, 하나님 마음에 드는 목사는 자신이 희생을 해서라도 성도들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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