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예수 그리스도의 택하신 그릇 - 바울
(사도행전 9:10-22)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바울은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태어나 자란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 역시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어릴 때부터 바울에게 대단한 기대를 가진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사울 즉 ‘큰 자’ 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사울은 큰 인물로 성장하였습니다. 태어날 때 이미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니(16:37) 그의 활동 무대는 얼마든지 넓힐 수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어(22:3) 율법을 전수 받은 그는 엄격한 바리새인의 규율에 익숙해 있었고(23:6) 젊은 나이에 이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26:10) 이라는 당시 최고의 명예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출세 가도를 달리던 사울을 주님은 어느 날 갑자기 부르셨습니다. 마치 구레네 시몬에게 갑자기 십자가를 지운 것처럼 사울에게 십자가를 지워 주셨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큰 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지금까지의 명예와 권세를 배설물처럼 버린(빌3:8) 그는 가장 작은 자 즉 ‘바울’ 이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예기치 않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주셨지만 불평치 않고 한 평생 기쁘게 지고 주님의 가신 고난의 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는 생을 마치는 순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4:6-8).
참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권적으로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 그분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 봅시다.
첫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수많은 성도들을 잡아 가두었다는 사울이 다메섹으로 온다는 소문이 들리자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에게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일어나서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사울을 만나 안수해 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두려웠습니다.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다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선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언제나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셔서 사용해 주신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 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2-16)
또한 그는 주님의 택하신 그릇이라는데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갈1:1)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강한 확신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역자라면 바울과 같은 확신과 자부심 그리고 감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그릇이었습니다.
바울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는지 알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바로 알았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한평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부름 받은 후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습니다. 1차, 2차,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의 불모지였던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지방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복음을 들고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는 재판의 기회가 있었을 때 지체하지 않고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 하여(행25:10) 꿈에도 소원하던 로마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석방된 후에도 다시 로마에서 마게도냐 지방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기를 수없이 하였으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형제의 위험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고하고 애쓸 뿐 아니라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11:23-27).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 항상 걱정하는 것은 오직 모든 교회를 위한 걱정뿐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갈 수 없는 곳에는 글로 써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말은 좀 시원치 못했으나 지식은 많았기 때문에(고후11:6) 그의 서신서들은 당시 뿐 아니라 이천 년이 다 된 지금도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 13권의 성경을 썼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히브리서도 바울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대한 서신들은 바울 신학의 뿌리가 되고 있으며 교회의 터전이 되었습니다(엡2:20).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의 택하신 그릇입니다. 예수님의 그릇으로 선택받은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큰 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모양도, 재질도, 용도도 가지가지 입니다. 좋고 비싼 그릇이 있는가 하면 천하게 막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큰 집이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요. 그릇이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집에는 좋고 비싼 그릇보다는 귀히 쓰는 그릇, 용도에 맞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어떤 그릇이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일까요?
깨끗한 그릇이 쓰임 받습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그릇이라 해도 깨끗이 씻어지지 않은 그릇에 음식을 담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2:22)하였습니다.
또한 곁에 있는 그릇이 쓰임 받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다락에 있는 그릇보다는 씽크대에 있는 그릇에 먼저 손이 갑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인 가까이 있어야 쓰임 받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할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즉각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큰 그릇으로 쓰임 받습니다.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어떤 그릇입니까? 큰 그릇, 혹은 금 그릇 되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깨끗한 그릇이 됩시다. 그리고 주님이 일꾼을 찾으실 때 언제든지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할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 주님은 바울을 불러 값지고 소중한 그릇으로 사용하신 거처럼 또한 우리를 불러 귀한 사역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37. 예수를 위해 목을 내놓을 사람 -
브리스길라 부부
(로마서 16:3-5)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은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수많은 애환을 남겼고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울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바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역의 특성상 많은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는 한 지역 교회의 목회자가 아니라 전도자였습니다. 한 지역에 머무르면서 전도하여 교회가 세워지면 그는 그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물질적으로 궁핍하였고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고(고전9:5), 손수 장막을 만들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가 한두 번 후원금을 보냈을 때 잊지 않고 기뻐한 것을 보면(빌4:16-19) 사람들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평생 사역의 동반자였습니다. 이들의 처음 만남은 사도행전 1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본래 이스라엘 본토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추방령에 의해(A.D. 49년) 로마에서 이곳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난 동기는 직업이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료를 구하러 가서 만났는지, 장막을 팔러가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연스럽게 만났고 바울이 죽을 때까지 바울의 후원자요 동역자였습니다.
이들이 바울과 함께 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서로 떨어져 생활하고 있었지만 한평생 잊지 않고 서로 기도하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가 지금 한 교회에서 주를 섬기고 있지만 언제 헤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서로 헤어져 있어도 항상 서로를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며 서로 연락하고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면 이것은 참 복된 일입니다. 바울의 생애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항상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첫째, 이들 부부는 말씀에 붙잡히고, 바울에게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만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18:5) 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머문 1년 6개월간 브리스길라 부부도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성경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한 것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 사이에 종교적 다툼 때문에 소란이 일어났고 이 유대인들은 항상 소란을 일으키므로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브리스길라 부부가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 (신앙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니라 직업 때문에 만났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들은 바울에게서 감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 부부가 얼마나 잘 양육 받았나 하는 것은 바울이 이들을 에베소에 남겨 놓고 예루살렘에 다니러 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18:24-28). 이들 부부가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때 아볼로라는 사람이 이 도시에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전3:6)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에베소교회에 왔을 때는 복음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예수는 전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도, 성령의 능력도 몰랐습니다. 이 때, 아볼로에게 참 복음을 가르친 사람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학문으로나 성경의 지식으로는 아볼로를 지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십자가의 도리를 깨닫고 은혜 받은 이들 부부였기에 학자인 아볼로를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지도자, 능력 있는 목자 밑에서 바르게 신앙의 훈련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둘째, 바울의 사역에 최선을 다해 도와준 동역자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 이후 이들 부부의 행적은 바울의 서신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3-5, 고린도전서 16:19, 디모데후서 4:19 등 세 서신에서 이들의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에서는 모두 26명의 신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뵈뵈 다음으로 이들 부부의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에게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듯이 바울에게는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복음 사역의 후원자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바울의 동역자들일 뿐 아니라 바울 사도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까지도 내 놓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바울의 생애 속에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기 때문에 언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 부부는 죽음을 무릅쓰고 바울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이방 모든 교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었고 이로 인해 모든 교회들은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이유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도와 주는 사람이었다면 이들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 자기 집을 주님의 교회로 드린 사람들입니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는 말의 올바른 번역은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도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즉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서를 기록한 장소인 에베소에 있을 때도 그들의 집이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후 1년여 만에 로마서를 썼는데 그 때 이미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로 돌아가 있었으며 그들의 집이 또한 교회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지금처럼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최소한 A.D. 3세기경까지는 교회의 건물이 따로 없이 성도들의 집을 교회 집회 장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 부부는 가는 곳마다 자신들의 생활 터전인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처음엔 대부분 목사님이나 집사님들의 방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새는 교회 개척 판도가 많이 바뀌어서 방에서 시작하는 예가 거의 없고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합니다만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방에서 시작하건 건물을 임대하여 시작하건 교회가 세워지는데 밑받침이 되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라면 자기 집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 사실은 주님을 위해 목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처럼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사역을 위해 헌신적으로 도와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나 마가, 누가와 같이 함께 복음사역에 나선 사람들 뿐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만 잊지 않고 기도하며 필요할 때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의 헌신이 위대한 사도를 만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묵묵히 목회자들의 사역을 위해 알게 모르게 협력하며 도와주는 사람 - 이들이 참으로 목회자들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38.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 디모데
(디모데후서 2:1-4)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위대한 사역의 뒤에는 바울의 사역을 위해 헌식적으로 도와 준 많은 사람들의 공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도움은 바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주님의 그릇으로 바울을 선택하셨기에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신 예수님께서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돕기 위해 아론, 여호수아 등과 같은 좋은 사람들을 붙여 주신 그 하나님은 바울 곁에도 신실한 사람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사람들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사역(사실은 주님의 사역)을 위해 크게 작게 도와 준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또한 주님이 함께 하신다 해도 혼자서는 이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서 상처를 받고 떠났거나 바울에게 원한을 사고 등을 돌린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마가가 바울 곁을 떠나기도 했었고 데마가 연로한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지만 모두 다 자신들의 문제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짧은 기간 목회를 하면서 동역자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집사나 권사, 교사나 성가대원들 모두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 교회가 있을 수 있었고 말없이 뒤에서 기도하고 도와 주는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 동역자들에게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잘 대해주지 못하고 사랑을 베풀어주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다니다가 루스드라에서 만난 청년입니다.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는 믿음이 신실한 기독교인이었고(딤후1:5),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디모데는 헬라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습니다. 이방인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당시 환경 속에서 디모데의 어린 시절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아니하고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아 거짓 없는 믿음, 항상 눈물이 가득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험난한 전도여행, 어렵고 힘든 일도 많이 있지만 디모데를 만난 것은 값진 진주를 만난 것이요. 보화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첫째, 바울에게는 믿음의 참 아들이었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 하였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 부른 곳이 몇 군데 더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딤후1:),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딤전1:2) 등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물론 결혼하지 않았으므로(고전7:8, 9:5)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믿음의 아들이 필요했겠는데 사실 바울이 ‘내 아들’ 이라고 부른 사람은 디모데와 디도 두 사람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고전4:15)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는 많지만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많은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믿음의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 반대로 성도들 중에서 목사님을 향하여 ‘내 믿음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왜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 혹은 참 아들이라 불렀을까요?
디모데는 항상 바울의 곁에 있었습니다. 물론 누가도 곁에 있었습니다만 그는 의사로서 바울의 건강을 염려하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바울의 일을 대신해 주거나 크게 바울을 위해 도움을 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곁에 있어 주었고 조그만 심부름을 해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무슨 큰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노년에 마머틴 감옥에서 편지를 보내 디모데를 부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9)
또한 디모데는 바울의 충성스런 심부름꾼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야할 곳에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바울의 심정으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를 보내면 항상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살전3:1-6), 마게도냐로(행19:22), 고린도로(고전4:17) 보냅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는 오랫동안 사역을 시킵니다(딤전1:3). 이렇게 디모데가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바울을 대신하여 신실하게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믿음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셨고(요6:39,40) 평생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셨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곁에서 한 평생 아버지처럼 모셔 왔기 때문에 바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목회자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줄 수 있는 아들 말입니다. 이것은 한두 해 함께 믿음생활을 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십년 이십년 한 교회에서 목사님을 모시다 보면 누구보다 목사님의 마음을 가장 잘 읽을 수 있고 목사님의 필요를 도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 보시기에도 소중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둘째, 예수님에게는 좋은 군사였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좋은 군사였지만 디모데 역시 좋은 군사였습니다. 좋은 군사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먼저 소속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 하라 하시면서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중’(민1:3)에서 계수하라 하셨습니다. 허다한 잡족이 따라왔지만(출12:38) 그들은 군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나의 대장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대적이 누군지 알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항상 직속상관 관등성명을 외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군사요 우리의 싸움 대상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엡6:12)입니다.
또한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전시나 평시나 군인은 고생하러 가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셋만 모이면 군대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고생한 이야기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님을 거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취미생활이야 힘들면 그만두고 싫으면 하지 않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입니다. 주를 위한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그리고 자기 생활을 포기하고 오직 대장만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군인에게 제일 큰 죄가 항명죄 즉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죄입니다. 포탄이 쏟아지는 곳을 향해 진격하라 해도 들어가야 합니다. 전시에 항명죄는 재판에 회부할 것도 없이 처형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내 계획이 우선이 아니라 대장의 계획이 우선입니다. 오늘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오늘 누구와 약속이 있다 해도 주님의 명령이 내려지면 그것이 우선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군사입니다. 대장이 누군지 바로 알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합시다. 고난을 각오하고 나의 모든 계획은 대장 되시는 주님의 계획 뒤에 미루어 놓읍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군인은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문제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줍니다. 그저 대장을 위해 목숨걸고 싸우면 모든 필요는 채워주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들은 군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오직 주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만 구하면 좋은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마6:25-34).
39. 예수님의 사람들을 아끼는 사람 - 빌레몬
(빌레몬서 1:17-21)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중을 아노라!”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는 비록 죄수의 몸으로 있었지만 비교적 자유가 있었습니다. 감옥이라기 보다는 셋집에 머물면서(행28:30) 찾아오는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울은 도망쳐 온 노예 오네시모를 만나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옛날 자신이 전도하여 지금은 골로새 교회에 신실한 성도가 된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온 노예임을 알았습니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잘 양육하여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음을 확인한 후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냅니다.
그리고 두기고를 함께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잘 영접하도록 당부한 편지가 빌레몬서이며 그의 교회에 보낸 편지가 골로새서 그리고 또 한 통의 편지 에베소서 이렇게 세 통의 편지를 두 사람 (두기고와 오네시모)의 편에 보냈습니다.
빌레몬은 아내 압비아와 아들 아킵보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1:2). 이 사람들 외에도 자기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던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마가의 집을(행12:12), 빌립보에서는 루디아가 자기의 집을(행16:40), 에베소에서는 아굴라의 집을(고전16:19), 라오디게아에는 룸바의 집을(골4:15) 각각 교회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빌레몬에 대한 정보를 바울이 쓴 빌레몬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짧은 편지이지만 자세히 읽어 보면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이 어떤 신앙의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빌레몬은 성도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1:5)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나에게 잘해 주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성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해주느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집을 교회로 사용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빌레몬에게 감사하다고 하면서 존경하고 아끼는 삶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와서는 이것저것 만지며 어지럽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안고 와서 휴지나 쓰레기를 잔뜩 늘어놓고는 치우지도 않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짜증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1:7)고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평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빌레몬에게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래서 자기 집에서 수선을 피우면 야단을 치고, 좀 어지럽히면 짜증을 내고 했다면 어떻게 부담이 가서 그 교회에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사랑으로 감싸주고 사랑으로 맞아주기 때문에 그의 집은 훌륭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빌레몬은 성도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노예였습니다. 차라리 잘 나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지도 아니하고 금전적인 피해까지 입힐 사람입니다(1:18), 그런데 이런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무익했으나 지금은 유익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종이라기보다는 형제입니다. 당시 도망친 노예가 잡혀 오면 무서운 형벌을 내렸습니다. 주인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주위 사람들의 압력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도망쳤다 잡혀 온 노예를 그냥 맞아들이고 게다가 형제처럼 따뜻이 맞아 주면 다른 노예들에게도 본이 된다하여 이웃 사람들이 항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냅니다. 빌레몬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 한다고 했습니다. 아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하였습니다. 오네시모를 따뜻이 영접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은 성도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마18:22) 하셨습니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용서는 받아들이는 게 용서입니다.
다윗 왕은 아들 압살롬이 형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치자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외가가 있는 그술로 도망쳐 3년 동안 숨어 있었지만 다윗은 찾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삼하13:38). 요압의 청에 못이겨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지만 역시 2년이 지나도록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삼하14:28). 결국 압살롬은 4년만에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역을 꾀합니다. 아들을 용서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탕자의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이 영접해 줍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눅15:22). 그리고 살찐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아들을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이렇게 용서했습니다. 그것도 한 가지 오직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빌레몬은 성도를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는 모이면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애찬을 나누고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물론 서로 음식을 가져 왔지만 빌레몬의 희생적 봉사와 섬김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을 영접하고 대접하며 섬길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빌레몬이 어떻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할 수 있었습니까? 변화된 오네시모를 보았습니까? 소문을 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스승 바울의 편지를 받아 보고 영접한 것입니다. 이처럼 빌레몬은 주님의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그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도를 섬기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까?
더구나 바울은 이 옥중생활에서 곧 풀려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풀려나면 다시 골로새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전도 여행을 떠날 것인데 자신이 골로새에서 머물 장소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결코 쉬운 부탁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부탁이 아닙니다. 빌레몬이 성도들을 잘 섬기며 주님의 사역자들을 잘 섬기는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빌레몬 같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예수의 사람이라면 그저 사랑하고 영접하며 심기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의 사람을 자기 가족보다 아끼고 돌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요 은혜가 충만한 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우리 교회에도 빌레몬과 같은 사람으로 넘치게 하옵소서.
40. 예수의 사랑을 전한 사람 - 요한
(요한일서 4:7-2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은 세배대와 그 아내 살로메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본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에 의해 부름 받아 제자가 된 후 세례 요한이나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사도 요한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요한을 가리켜 예수님의 제일 사랑 받던 제자라고 합니다만 이렇게 불리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이름 자체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 널리 쓰인 듯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요한이 쓴 복음서에 이렇게 썼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글에 자신을 표현할 때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13:23, 19:26, 20:2, 21:7, 21:20 등). 그리고 항상 예수님 곁에 앉으려 했고 마지막 만찬 때는 예수님 품에 아예 기대고 있었습니다(13:23).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누구를 더 사랑하시고 누구를 덜 사랑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더구나 당신이 불러 세우신 제자들을 편애하실 리가 없습니다. 다만 제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주님의 가장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누가 크냐하고 언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목회자 뿐 아니라 구역장이나 교사는 이런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열심 있는 사람은 그 열심 때문에 사랑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렇기에 더욱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모두에게 똑같이 사랑을 베풀 듯이 말입니다.
다만 사랑하는 방법도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칭찬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맡아 기르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하고 ‘우리 선생님은 나만 제일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어야 합니다. 칭찬할 때뿐 아니라 꾸지람을 해도 ‘우리 선생님은 나를 제일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야 효과가 있고 기쁨으로 책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방법이 이러했습니다.
첫째, 사도 요한은 그물을 깁다 부름 받았습니다.
처음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의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다가 부름 받았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다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 4:18-22).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이들의 사역을 보면 베드로나 안드레는 전도자로서 사역을 감상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수백 명, 수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마치 바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가득가득 고기가 잡히듯 많은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설교에 마음이 찔려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앉아서 그물을 깁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나가도록 뚫어진 구멍을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이 두 종류의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열심히 전도하여 사람을 끌어들이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끌어들인 사람들을 잘 가르쳐서 새나가지 않게 하는 사람의 역할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전도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못합니다. 그물에 구멍이 났으니까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항상 같이 다니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전도를 잘하지만 성격이 과격해서 상처도 잘 입힙니다. 그러면 차분하고 사랑이 많은 요한이 감싸주고 양육을 한 것입니다.
둘째, 사도 요한은 초대 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에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 셋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곧 주의 형제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입니다(갈2:9).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 부활 후 제자가 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된 사람(행15:13)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자리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요한의 형제로 일찍 순교했다),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막5:37)나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마17:1)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막5:37)도 이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야고보는 순교의 첫열매를 맺을 사람이요(행12:2), 베드로는 전도자요, 요한은 양육자로서 이들을 초대 교회의 기둥같이 쓰일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도 기둥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주님은 모두 사랑하시지만 그의 사역은 은사와 직분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직분상의 기둥은 목사와 장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숨은 기둥도 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묵묵히 기도하는 성도는 교회의 숨은 기둥입니다. 성도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잡아주는 권사가 있다면 이 사람도 숨은 기둥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신 재능 따라 교회의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사도 요한은 다섯 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바울 다음으로 많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모두 사도 요한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경들을 쓰면서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불신자를 위해 썼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요20:31)하였습니다.
요한일·이·삼서는 믿는 성도들을 위해 썼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요일5:13) 하였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해 썼습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1:19) 하신 말씀을 하라 기록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계신 것을 분명히 보았고(계1:13-16), 교회들의 지금 형편을 알게 되었습니다(계2,3장). 그리고 장자 교회가 승리할 것이며 주님이 오실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넷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즉 독생자를 희생하신 만큼 사랑하셨습니다(요 3:16).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그것도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까지 한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책들이 아니면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요한일서 4:7-21 안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무려 19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나 깨닫지 못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십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미지근하고 구역질 나는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사실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모두 이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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