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설교

하나님의 마음에드는사람

공 상희 2008. 3. 1. 12:30
 

6. 여호와의 종 - 모세

(출애굽기 3:1-5)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호와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세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그의 인격을 간단히 살펴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 모세’를 다시 연구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처음 종으로 부르심을 받던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그의 120년 생애는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40년은 교육기간입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민족애를 배웠습니다. 󰡒�너는 히브리인이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것을 귀가 열리면서부터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젖을 뗀 후에는 바로 왕의 궁중에서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웠습니다(행7:22).  당시 애굽은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서 천문, 지리, 의학, 수학 등이 크게 발달했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모든 학문과 무예를 다 익혔습니다.

  그 다음 40년은 미디안에서 인격교육,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자연이 그의 스승이었고 고독이 교과서였습니다.  그 곳에서 모세는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격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80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 받아 남은 40년간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만 여호와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흔히 목사님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데 잘못된 표현입니다. ‘주의 종’이란 말은 목사님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나타낼 때 쓰는 ‘자기 칭호’입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을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고 부를 수 없습니다.  목사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충성된 종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준비와 교육이 필요합니다. 빙산이 눈에 보이는 부분보다 숨겨진 부분이 더 큰 법입니다. 오랜 시간 철저한 교육과 준비가 없이는 쓰임 받지 못합니다. 특히 눈에 보이는 재능과 기술보다 보이지 않는 신앙인격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얄팍한 재주만 익히면 신앙 인격이 모자라 꼭 말썽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에 먹칠을 하고 다니게 됩니다. 성경 지식이 조금 모자라도 설교나 구역인도를 깔끔하게 하지 못해도 올바른 신앙인격을 갖춘 사람이 참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모세는 자신을 종으로 부르신 분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종은 자신의상전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신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대통령의 비서와 도지사의 비서와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종으로 부르시는 분이 누구신지 분명히 확인하였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3:6) 하셨지만 더 확실히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表號)니라”(3:15).

  영광스럽게도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부른 것입니다.  모세는 비록 종이지만 자부심이 있었고 긍지가 있었습니다.  바로왕 앞에도 담대히 서서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대적하거나 비난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도 자신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갈1:1)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딤후1:12)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르신 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나를 불러 종 삼으신 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나의 유일한 상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황송하게도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모세는 자신을 종으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10). 이것이 모세를 부르신 이유며 모세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습니다. 사명만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능력의 지팡이를 손에 들려 주셨고(4:20), 형 아론을 대동시켰습니다(4:14).

  훌륭한 상관은 부하직원을 출장 보내면서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여비를 넉넉히 줍니다.  유능한 사람을 붙여줍니다.  그곳 지사에 미리 연락하여 도와주게 합니다.  그리고 부족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적과 싸워야 하는 전쟁이거나 경쟁자가 있는 치열한 전쟁 같은 일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파송을 하실 때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10:1).  이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요 상전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모세는 자신을 종으로 부르신 분에게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이것은 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 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올 때 신을 신지 않고 왔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신을 신발이 어디 있었겠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맨발로 온 것은 나를 아들로 맞아들이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 즉 종으로 불러달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본 아버지는 맨 먼저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 하였습니다.

  모세는 신을 벗었습니다. 그리고󰡒�가까이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달려가 목을 껴안고 귀엣말로 소곤거릴 수 있지만 종은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마당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종은 주인을 두려움으로 섬겨야 합니다. 모세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히12:21). 이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필요도 있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할 필요도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벧전2:18) 한 것처럼 종은 주인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 아래 사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롬3:18)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신을 벗은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충성스런 종이 되었습니다(히3:2,5).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대적하는 아론과 미리암을 불러 “그는(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민12:7) 인정하시며 감히 그를 비방하거나 대적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하였고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스러운 종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진정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7. 여호와의 군사 - 여호수아

(여호수아 1:1-9)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선택받고 하나님의 섭리 아래 모든 학문과 인격적, 신앙적 훈련을 철저히 받은 데 반하여 여호수아는 모세 밑에서 후계자로 잘 양육 받아 모세의 뒤를 이은 사람입니다.

  모세의 시종으로 혹은 모세의 비서와 같이 모세를 도와 일하였기 때문에 모세의 뒤를 이어받았을 때 아무런 무리가 없이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가나안까지 40년 지도기간에는 모세의 지도에 불만을 품고 원망하거나 조직적으로 대적한 예가 없지 않았으나 여호수아가 인도한 기간에는 한 번도 이런 불상사가 없이 모든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대로 순종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시종으로 한번도 대적하거나 거스른 일이 없이 순종하였기에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런 은혜를 내리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무엇보다도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그 땅 거민들과 싸워 정복하며,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지도한 사람이라면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나가 싸운 하나님의 군사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쉽게 땅을 점령하고 승전가를 부를 수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살펴보는 것이 유익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첫째,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 충성했습니다.


  여기 모세의 시종이란 하인이나 종졸이라는 의미보다는 공식적, 종교적 임무의 대행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새 말로는 보좌관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호수아는 항상 모세를 위하여 있었고 모세의 뒤에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17장에서 아말렉과 전투할 때의 일입니다.  모세는 언덕에 올라가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을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이겼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이 전쟁은 이처럼 모세와 여호수아의 합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가 싸우는 사람이 없이 모세가 기도한다고 이길 수 없으며 기도하는 이 없이 여호수아가 나가 싸운다고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몇 번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사울을 천거한 뒤 일선에 나가 싸우고 지도하는 일은 사울에게 맡기고 자신은 기도하며 가르치는 일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삼상12:23).  사울이 유능한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 것은 기도하는 사무엘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때문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일선에서 재정 출납이나 구제의 봉사까지 맡아하던 사도들이 이 직무를 맡을 자 7명을 선출하게 하여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3,4) 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 졌습니다.  교회에도 손들어 기도하는 목사를 대신하여 일선에 나가 앞장서 싸울 수 있는 여호수아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을 잘 보여 주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는 자기의 위치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올라갈 때 여호수아를 데리고 올라가 산 중턱 경계선 부근에 여호수아를 남겨둡니다(출24:13, 32:17 참조).  아마도 백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함일 것입니다.  모세가 한 달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모세가 죽었다 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때도 여호수아는 산으로 뛰어 올라가지도 못하고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가지도 못한 채 기약이 없는 모세가 내려올 때까지 위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론과(대제사장) 만나는 장소인 성막과는 별도로 모세와 만나는 장소인 회막을 진 밖에 세워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 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가 없는 동안은 여호수아가 이 회막을 지키고 있었습니다(출33:11)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신” 하나님(유1:6)은 끝까지 자기의 위치를 지킨 여호수아에게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섬기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 하셨습니다.


  둘째,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순수하게 믿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순수하게 믿은 것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경험을 한 용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이 잘 훈련된 군사였거나 무기가 최신예 병기로 무장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말렉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한 것은󰡒�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손을 들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생명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정탐꾼의 일원이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보았던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들을 여호수아는 왜 못 보았겠습니까? 그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고 대장부 거인들을 본 순간 자신들이 마치 메뚜기처럼 느껴졌던 것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순수하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셨으면 그 땅은 우리 땅입니다.  아무리 거인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민14:9).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가감하지 않고 순수하게 믿는 믿음은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임명되자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모맥 거두는 시기라서 요단 강물이 흘러 넘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강물 속으로 들어갑니다(3:15,16).  난공불락의 철옹성벽인 여리고성을 하루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날 일곱 바퀴를 돌면 무너지리라 하셨을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침묵을 명령하고 묵묵히 행진을 합니다.  닷새 엿새를 돌아도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제 칠일에는 새벽 일찍부터 돌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어 보입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순진하리 만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훌륭한 군사가 된 비결입니다.


  셋째, 여호수아는 율법 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는 두려웠습니다.  앞길이 걱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강조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율법 책을 항상 가까이했고 거역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승승장구했으며 가나안 땅을 완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이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의 생애 끝에 장로들과 두령을 모으고󰡒�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23:6)하고 당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사였습니다. 백전백승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수아가 훈련된 정규군을 통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의 시종으로 섬기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순수하게 믿고 나가며 하나님과 동행함을 확신하고 나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군대로 패배를 모르고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8. 여호와의 정탐꾼을 선대한 사람 - 라합

(여호수아 2:8-14)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마태복음 1장에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면 특이한 기록 세 가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전통적인 관례를 깬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관례를 깨고 여인들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둘째는, 이방인들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라합과 룻이 그렇습니다.  셋째는, 도덕적으로 불륜의 사람이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낳았고 라합은 기생이며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왕과 불륜의 관계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 중에서도 라합은 이 세 가지에 모두 해당됩니다.  이방 가나안 여인으로서 기생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성경은 이 여인을 믿음의 사람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고(히11:31).  야고보는 믿음의 열매인 행실을 가르치면서 이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약2:25).  그의 믿음은 정탐꾼을 선대하였고 그 결과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정탐꾼을 선대하여 구원받은 과정을 살펴봅시다.


  첫째, 라합은 하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눈은 보기 싫으면 감을 수 있고, 말은 하기 싫으면 입다물면 됩니다.  그러나 소리는 안 들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막을 수야 있지만 신체 구조가 스스로 듣기를 거부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24시간 수없이 많은 소리가 귀로 들려오고 같은 시간에도 여러 종류의 소리가 고막을 울리지만 청각신경을 이 소리들을 모두 두뇌에 전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듣기를 거부할 수 없는 대신 청각신경이 스스로 판단하여 두뇌에 전달하지 않는 소리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던 시계 소리가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유난히 크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의자에 앉아 있지만 순간순간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즉 청각신경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는 소리만 정확히 두뇌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에 들려오는 소리, 사람의 관심을 가지고 듣는 소리가 모두 유익한 소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비방하고 중상 모략하는 소리 같이 해로운 소리,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연예인들의 동정이나 스캔들(scandal)처럼 아무 유익도 없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가 있습니다.  반면에 꼭 들어야 할 소리, 유익한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유익한 소리를 들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뉴스라고도 하고 정보라고도 합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려고 뉴스에 귀를 기울입니다.  정보를 얻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그 수많은 소식, 수많은 정보 중에 가장 유익한 정보가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살 길이 있다는 정보입니다.  환자에게 특효약이 있다는 정보입니다. 부도직전의 사람에게 자금줄이 있다는 정보입니다.  죄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있다는 정보입니다.  그래서󰡒�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하였습니다.

  여리고에 있는 사람들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이쪽으로 대거 이주하고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그들의 신인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 물을 마르게 하셨고 그 하나님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즉 시혼과 옥을 죽이고 그들을 전멸시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 소식이 두려운 소식이었으나 기생인 라합에게는 값진 정보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둘째, 라합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에 대한 소식은 혼자 들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었다’는 말을 보면 여리고성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헛소문일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저 무관심하게 듣고 넘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은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소문을 들은 성내의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기절할 뻔했으나 라합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참 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멸망시킬 자를 멸망시키며 구원하실 자를 능히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셋째, 라합은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마침 자기 집에 찾아온 정탐꾼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잡으려고 여리고 왕이 군대를 보내자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겨 주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라합의 행동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또한 야고보는󰡒�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5)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험이었습니다. 적 정탐꾼을 선대했으니 용서받지 못할 일입니다.  더구나 여리고 왕이 직접 기별하여 정탐꾼을 끌어내라고 했을 때 숨겨 주고 거짓말을 했으니 국가에 반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의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비록 그 하나님을 만나 뵙지는 못했고 소문만 들었을 뿐이지만 홍해를 가르시고 아모리 왕들을 죽이신 능력의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모험이었습니다.

  또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람을 선대하는 것입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내가 너희를 선대 하였은 즉 너희도 내 아버지 집을 선대 하라”고 부탁했는데 정탐꾼들은 기꺼이 승낙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훗날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그 두 정탐꾼을 라합의 집으로 보내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게 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선대하였으므로 그들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마10:41)고 하셨습니다.

  정탐꾼을 돌려보내고 라합이 취한 행동을 보면 그녀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정탐꾼들은 라합과 약속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땅에 들어올 때 자신들을 달라 내려준 창에 붉은 줄을 매고 온 가족은 그 집에 다 모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정탐꾼을 보내고 나서 붉은 줄을 창에 맸습니다. 정탐꾼들이 자기네 진영으로 돌아가서 군사를 이끌고 다시 오기까지는 일주일 이상 걸리겠지만 라합은 그 날부터 붉은 줄을 매어 단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대담한 믿음이 자신과 부모 형제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사람들인 정탐꾼을 선대한 믿음은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소중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생명 있는 믿음이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신뢰하는 신앙에서 나온 모험적 행동이었습니다.






9.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사람 - 갈렙

(여호수아 14:6-15)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라는 말이 이 곳에 세 번이나 나오지만 구약성경에 흔히 쓰이는 표현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도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혈기를 부리므로 온전히 좇지 못했습니다.

  비록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했지만(민12:3)  이 한 번의 혈기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총회를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감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민20:12).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말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만 주어진 표현입니다(민14:24, 32:12, 신1:36).

  그리고 이 곳 본문에서는 갈렙 스스로가(8절), 모세가(9절), 그리고 여호수아서의 기자가(14절) 갈렙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갈렙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좇을 수 있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온전히 좇았습니다.


  애굽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2년 만에 팔레스타인의 남방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뽑아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두루 살피고 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임무가 맡겨졌습니다. 그 땅 거민이 얼마나 강한지, 성읍이 진영인지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땅이 비옥하여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지 살펴보고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40일 만에 돌아온 정탐꾼들은 절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심히 견고할 뿐 아니라 거인 족속인 아낙 자손을 보고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맨 먼저 백성들에게 용기를 준 사람이 갈렙이었습니다.

  그는 곧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우리를 보면 얼마나 우습겠느냐고 비관적인 말을 했습니다.

  차이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갈렙은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싸워볼 생각을 했기 때문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자신들을 수 백년 동안 괴롭혔던 애굽을 홍해에 수장시킨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을 가지고 사나운 아말렉과 싸워 승리케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두려워 떨고 있는 회중들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8,9).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어떤 불가능도 가능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온전히 좇았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이는 모두 갈렙이 한 말입니다.  정탐꾼으로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백성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으려고 애썼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 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4).

갈렙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장수케 하시겠다는 것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가슴에 간직하고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동료인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소위 출세를 했지만 갈렙에게는 아무런 지위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서운해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그늘에서 묵묵히 그를 도와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일임을 담당했습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된 뒤에 갈렙이 무언의 협조를 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호수아가 소신껏 백성들을 지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에 여호수아에게 있어서 갈렙은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나 국가나 여호수아는 한 사람이면 됩니다.  지도자로 나서는 사람이 많아지면 시끄러워지고 단결된 힘을 보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뒤에서 묵묵히 따라와 주고 말없이 도와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 힘있게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기 원합니다.  그늘에 묻히기보다는 나서기를 좋아합니다.  더구나 같이 일해 온 동료 중 한 사람에게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주었다면 괜히 마음이 편치 않고 서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 성취되는데는 45년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조급해 하지 아니하고 모세와 여호수아의 뒤에서 그들을 도우며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온전히 좇았습니다.


  젊을 때는 모험을 하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던 사람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편해지고 싶고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도무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모두 점령하고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게 되었을 때, 45년 동안 묵묵히 따라오며 힘이 되어 주었던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회상시키며 기업을 요구하였습니다.

  갈렙은 이미 정복한 지역 중 좋은 땅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고마워하고 또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을 가졌을 여호수아는 갈렙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잘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헤브론 산지를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갈렙의 온전한 삶의 자세입니다.

  헤브론 산지는 아직 미점령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대로 두면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산지를 점령치 못하고 그냥 지날지 모릅니다.  실제로 이 때 점령하지 못한 여부스 민족은 수 백년이 지난 후 다윗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삼하5:6,7). 그러므로 이미 정복된 땅을 그냥 얻기보다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을 한 평이라도 더 빼앗아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그 곳에 옛날 45년 전 정탐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아낙 자손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길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옛날 자신이 친히 정탐했던 지역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의 그 믿음 대로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그는 옷니엘을 통해 헤브론 산지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갈렙은 늙어서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 갈렙과 같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10. 여호와의 백성이 된 여인 - 룻

(룻기 1:15-18)




  󰡒�어머니의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께서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이라는 여인은 예수님의 족보(마1:1-17)에 나타나는 세 가지 특이한 현상 중 두 가지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방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도 특히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모압 족속은 롯의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하여 얻은 아들이 조상이 되어 이루어진 민족입니다(창19:36,37). 이 패륜 민족을 하나님은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여행할 때 모압 사람은 발람을 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토록 하려 했던 민족(민22-24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암몬과 함께 모압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신23:3-6)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압 여인인 룻을 용납하셨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에는 결단과 결심이 필요하고 이 결단과 결심을 통해 그 신앙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 룻은 버렸습니다.


  신앙에는 선택 즉 결단과 결심이 필요합니다.  나오미도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를 굳게 결심함을 보고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1:18).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종종 신앙인에게 결단과 결심을 요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하셨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것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도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했으며(눅5:11) 세리였던 레위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눅5:28).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려고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따르라 하시자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하여 떠났습니다(마19:22).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버릴 것을 버리고 끊을 것은 끊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믿음 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서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옛날 술친구 끊지 못하고, 신앙에 도움이 안 되는 직업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유익하지 않은 취미생활이나 모임을 쉽게 끊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과감히 버렸습니다. 고향과 고국을 버려야 했습니다.  고향의 부모나 친척, 친구를 떠나야 했습니다.  모압과 베들레헴은 거리도 거리려니와 서로 상종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 따라가면 이 모든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재혼의 소망도 버렸습니다.  시어머니 따라가야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재산이 있습니까.  자녀가 있습니까.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친정으로 돌아가면 홀가분하게 재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자부 오르바는 재혼의 소망이 없다고 하자 하는 수 없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것까지 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버릴 것이 있고 떠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버릴 때마다 신앙은 성숙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면 무엇을 버리지 못했나 생각해 보고 아무리 아깝고 아무리 섭섭해도 과감히 버리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룻은 선택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를 버리는 것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룻이 조국인 모압을 버린 대신 새로운 나라를 얻었습니다.  풍습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모든 것이 생소한 민족, 그러나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라였습니다.  친정 부모를 떠난 대신 어머니를 얻었습니다.

  물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어머니입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어머니였습니다.  특히 모압의 신을 버린 대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께서 되시리니.󰡓� 이 말은 룻의 신앙고백입니다.

  어찌 보면 어머니의 하나님은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신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은 당신을 그토록 따르는 어머니에게 아무런 복도 주지 못하는 신이라고 생각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소중히 섬기는 신이기에 그 하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룻이 버린 것들은 대단히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이며 그녀가 선택한 것은 아무 소망이 없는 것들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만약 친정 어머니가 이것을 알았다면 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복 받은 선택이었습니다.  10년 2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좌우하는 값진 선택이었습니다.

  믿음은 처음 선택이 중요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처음에 신앙을 선택할 때 장로교가 뭔지 감리교가 뭔지 알았습니까?  여호와의 증인이 뭔지 문선명 집단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런 사교집단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고 한편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의 길에 첫발을 딛지 않고 참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는 우리 교회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 룻은 섬겼습니다.


  룻은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잘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나라를 나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로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요즘에야 여인들도 벌이가 쉽습니다. 그 나라나 우리 나라나 옛날에는 여자 벌이가 뭐 있었습니까? 요새는 집에서 부업을 해도 두 식구는 먹고 살 수 있고 공장에 나가 뒷일을 봐 주거나 파출부로 나가 일해도 쓰고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일거리도 없거니와 일을 해도 먹고살기 어려웠습니다.

  룻은 이삭을 주워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하루 종일 주운들 두 식구 먹을 식량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고 보아스의 도움으로 이삭을 넉넉히 주울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효성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그녀의 효성은 마음에 소문이 났고 결국 보아스와 혼인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잘 나와 있지 않지만 그녀는 하나님도 그렇게 섬겼을 것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시어머니 나오미도 룻을 보아스와 맺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결국 룻은 그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그의 아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참 잘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것이 잘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믿음생활 하기로 한 것이 잘한 것입니다.  선택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잘 섬기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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