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설교

하나님 마음에드는사람

공 상희 2008. 3. 1. 12:32
 

11. 여호와께 기도를 쉬지 않은 사람 - 사무엘

(사무엘상 12:19-25)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야곱은 하나님께서 강제로 기도를 시킨 사람이지만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죽기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을 잉태하기 전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사무엘을 잉태하였으니 사무엘이 태중에 있을 때는 또한 얼마나 기도하였겠습니까?  그러니 사무엘은 기도로 잉태하여 기도로 태중에 있다가 기도로 순산한 아들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기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귀가 열리자 기도의 음성을 듣고 자랐으니 사무엘 역시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젖을 떼자마자 그를 성소가 있는 실로에 데리고 가 하나님의 집에서 자랐으니 그의 성장 과정도 기도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에게서 기도하는 자녀가 나옵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생애를 생각할 때 기도하는 모습을 맨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이만큼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기도 쉬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사람은 정직히 삽니다.


  12장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던 사무엘이 사울을 기름 부어 왕 삼은 뒤에 이 취임식을 하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은 그의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백성들을 향하여 떳떳이 공개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울왕)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 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3절).

이것은 자신 있고 떳떳한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가 정직하게 살았다는 사실은 백성들이 인정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4절).

  기도하는 사람은 ‘아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 따로 생활 따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누구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거나 원수진 것, 맺힌 것이 있으면 아무리 기도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무서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두려워해야 신자지 사람 두려워한다면 어찌 신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 일에는 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 있고  ② 하나님께서 기뻐하지는 않으나 허락하신 일이 있고  ③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어느 질서를 인정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어디까지입니까?

  이제까지는 사무엘이 사사로서 이스라엘 최고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점점 나이 많아 늙게 되자 “이제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하겠다”고 요청합니다.  사무엘은 퍽 서운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8:7) 하고 섭섭해 하시면서도 그들의 요구에 응해 주셨습니다.  이제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권은 사울에게로 넘어가고 자신도 선지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것이 비록 자신도 하나님도 기뻐하는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기에 사무엘은 이 질서를 인정했습니다.

  세상에는 법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가정에는 가정의 질서가 있고 교회에는 교회의 질서가 있습니다.  사회나 국가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은혜 받았다고 해서 집에서 가장인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자식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도 목사, 장로, 집사, 권사가 계급은 아니지만 각자의 역할이 다르고 서로서로의 질서가 있습니다.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질서와 권위에 도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 정권 중에는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았는데 총칼로 빼앗은 정권도 있습니다만 만약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권이 아니라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정권이라면 그 권위와 질서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큰 혼란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특히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셋째,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면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사무엘만 그렇고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하였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눅18:1).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마7:7) 고하였습니다.  새벽에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에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기도기간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는 항상 해야 하는 것이지 특별기도기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에 기도했으니 하루 종일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니까. 몸이 피곤하니까. 사정이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항상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당연하거나 그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든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 죄를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워 놓고 더욱 기도했습니다.  더구나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않고 자꾸만 거스르자 사무엘은 더욱 기도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자기의 잘못인양 기도했습니다.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15:11).  얼마나 기도했으면 하나님께서󰡒�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하시면서 이새에게로 가서 그 중에서 한 왕을 미리 뽑아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사무엘은 기도로 잉태하여 기도하며 자랐습니다.  기도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사울을 통치자로 세운 후에도 기도를 쉬지 않다가 기도하며 죽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기도하듯 정직히 살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으면 그 질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쉬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이것이 곧 성도의 삶입니다.











12.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사람 - 요나단

(사무엘상 20:35-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우정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다윗은 감히 요나단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왕자였으나 다윗은 평민 혹은 신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왕 앞에서 승전보고를 할 때(삼상18:1)입니다.  사울왕의 곁에 앉았던 왕자 요나단은 다윗을 보는 순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연락되었다는 말은 단순한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생명이 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의 사랑과 헌신을 주고받는 공동 운명적인 결합을 말합니다.

  이 때,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이들은 세 번에 걸쳐 서로 언약을 맺고 우정을 굳게 맹세합니다.  18:3의 언약은 ‘친구언약’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이 언약을 친구언약 이라기보다는 군신언약(君臣言約) 즉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언약하는 성격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언약은 20:42에 나오는 평화언약입니다.  다윗과 요나단, 두 사이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맹세한 것입니다.  둘뿐 아니라 두 자손 사이에도 영원하기를 맹세하였는데 두 사이의 영원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 번째 언약은 23:18에 나오는 왕권언약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인 자신이 왕이 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확신하면서 자신은 다윗 왕국에서 다윗의 신하가 되어 충성하겠다는 것을 언약하는 것입니다.

  이 세 언약은 모두 요나단이 맹세하고 다윗은 그 맹세에 동조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왕권이 요나단에게서 다윗에게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나단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친구를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요?  친구를 위해서 생명도 버릴 수 있는 사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친구임을 알아야 합니다(요15:13,14).


  첫째,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왕자가 무명의 신하를 생명 같이 사랑한 것입니다.  생명 같이 사랑했다는 말은 나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친구를 위해 생명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요15:13)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런 사랑을 누가 하겠습니까?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까지 버리셨으니 우리도 이웃에게 이런 생명을 나누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니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줍니다.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다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해도 즐겁기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바칩니다.  물질을 바치고 헌신하고 봉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돈을 목숨같이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십일조를 드리고 건축 헌금을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말을 좋게 합니다.  요나단은 한 번도 다윗을 섭섭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도 다윗을 위해 말해 주고 다윗의 편이 되어 줍니다(19:4,5).  이처럼 언제든지 사라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좋은 말만 전해 줍니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헐뜯고 비방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모인 공동체입니다.  남의 말을 좋게 합시다.  특히 제직이나 앞장선 분들은 서로 덕이 되고 유익한 말만 해야 합니다.


  둘째, 요나단은 다윗과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였습니다.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이 굳어진 것을 확인한 요나단은 다윗의 생명을 위해 떠나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 울면서 작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굳게 맹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이 우정이 영원할 뿐 아니라 자손에게 이르도록 영원하자고 맹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도 이런 우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쁨으로 만났으니 이 만남 신앙 안에서의 우정이 영원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이사를 가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로 헤어질 수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이렇게 함께 있는 동안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도와 주어야 하겠습니다.   또 서로 육신이 헤어지게 된다 해도 서로 등돌리고 원수가 되어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은 영원해야 하겠습니다.  어려울 때 함께 기도하고 즐거울 때 함께 기뻐하던 성도들이 조그만 일로 서로 등돌리고 원수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우정은 영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천국에 가서 만난다 해도 반가울 것이 아닙니까?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전사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울면서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후에 왕이 된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상기하고 수소문하여 요나단의 혈육을 찾아냅니다.  두 발이 다 절뚝발이가 된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낸 다윗은 친구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왕궁으로 데려와 왕의 상에서 함께 먹도록 합니다.  죽음이 갈라 놓았지만 그들의 우정, 그들의 언약은 변치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셋째, 요나단은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다윗은 점점 용기를 잃고 있었습니다.  국내건 국외건 갈 곳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다윗을 도와 주는 사람은 사울왕이 죽입니다.  이웃 나라 블레셋으로 망명을 시도해 보았지만 옛날 골리앗과의 싸움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때, 요나단은 다윗이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도와 줍니다(23:16). 󰡒�두려워 말라. 너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네가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라󰡓�라고 격려합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진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목사나, 집사나 항상 성령 충만하고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용기를 잃고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주위 사람들의 격려는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친구들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서로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줍시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변함없는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3. 여호와를 왕으로 모신 사람 - 다윗

(사무엘하 7:1-17)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왕이란 말 속에는 대단히 강한 어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여러 나라에서 왕은 신성시 되었습니다.  신의 아들 혹은 신의 대행자로 불렸습니다. 동양에서도 옛날 중국의 왕을 천자라 했고 일본은 천황이라 부른 것도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강한 대국일수록 이런 자부심은 더욱 강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니 왕에 대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울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왕의 모습은 사무엘이 가르쳐 주는 왕이거나 주변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내가 왕이니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한 사울은 주변 국가들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그들의 왕은 자신들을 신이라 부르게 하고 최고의 신과도 직통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나라에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니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왕의 수하에 있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통하지 않고 신에게 직접 제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자기 위에서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니 기분 나쁜 것입니다. 이웃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데 왜 이 노인만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사무엘을 대적하고 무시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릅니다.  자기가 비록 왕이지만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내가 왕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왕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다 해도 자신이 주인이 되면 안 됩니다.  장로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들여 건물을 지었다 해도 주인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내 사업의 경영주는 하나님이시고 우리 집의 가장은 하나님입니다.  대통령도 자신의 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왕으로 모신 사람’은 대단히 귀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부족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행13:22)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했기 때문에 좀 부족이 보여도 좀 허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후에 여러 왕들을 평가할 때 다윗의 이런 자세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길로 행했다’ ‘다윗의 길로 행치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여호와를 왕으로 모신 것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째, 다윗은 언약궤를 옮겨 왔습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실로에 모셨던 언약궤가 밖으로 나간 것은 엘리 제사장 때의 일입니다.  블레셋과 전투에서 이겨 보려고 메고 나왔는데 그만 빼앗겼습니다.  그 후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언약궤는 기럇 여아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50년이 넘게 있도록 누구 하나 모셔올 생각을 않았습니다. 사울이 40년간 왕으로 있었지만 이런 생각은 꿈에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남북을 통일하고 블레셋을 쳐부수어 나라를 평정하자 맨 먼저 기럇 여아림으로 사람을 보내 언약궤를 싣고 오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웃사가 죽는 일이 벌어져 실패했지만 성경을 연구한 뒤 다시 시도하여 다윗성으로 메어 옵니다.  다윗은 얼마나 좋은지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이 때 그가 지은 시가 시편 24편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돌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언약궤의 입성은 곧 하나님의 입성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저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우리 가정에, 우리 사업장에, 우리 나라 안에 주님이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명으로 알아 철저히 순종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어명에는 아니요가 없습니다. 순종뿐입니다.


  둘째, 다윗은 성전건축을 소원했습니다.


  다윗은 백향목 궁에 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건축한 것이 아닙니다.  두로왕 히람이 왕의 축하 선물로 지어준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송구스러웠습니다.  자신은 백향목 궁에서 살고 있는데 창문 너머 보이는 하나님의 집은 천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신데 어떻게 천막에 모신단 말인가’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의 자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주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좋은 주택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집은 셋방살이를 하고 있구나’ 하고 이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이것 때문에 걱정하고, 이것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평생에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은 󰡒�내가 네 집을 세우리라󰡓�하셨습니다.  다윗의 왕위가 끊어지지 아니하도록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그 나라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마음을 먹은 것만 가지고도 하나님은 기뻐하셨고 다윗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재산이 없어 하나님의 집을 짓지 못한다 해도 이것을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 기도하고 있을 때 그 마음의 진실함을 아시는 주님은 그 마음에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결국 다윗은 자기의 뜻을 아들 솔로몬이 이루게 될 것을 알자 기쁜 나머지 돈이 생기는 대로 모았습니다.  그가 성전건축을 위해 힘써 모든 것은 오빌의 금이 삼천 달란트, 양질의 은(천은)이 칠천 달란트나 되었습니다(대상29:4).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면 하나님의 집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성도의 삶입니다.


  셋째, 다윗은 선지자의 책망을 겸손히 받았습니다.


  사울왕이 아말렉 전쟁으로 인해 사무엘의 책망을 받았을 때와 다윗이 밧세바 사건으로 나단의 책망을 받았을 때를 비교해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윗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남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남편은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습니다.  남편을 죽게 하고 밧세바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아들이자 속사정을 모르는 백성들은 왕을 존경했을 것입니다.  이런 왕이라면 왕을 위해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11:27)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엄히 책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되면 세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①시치미 떼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 잡아뗍니다.  ②사울왕처럼 변명하고 핑계를 댑니다.  ③죄를 인정하고 겸손히 무릎꿇어 회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책망을 달게 받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겸손히 받았습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울면서 쓴 고백의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선지자의 책망을 겸손히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한 평생 살아온 다윗의 종말은 성경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상29:28)

14. 여호와의 능력을 보인 사람 - 엘리야

(열왕기상 18:30-40)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사회가 어두울수록 가장 위대한 사람을 보내시어 그 사회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대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성격이 소심하고 겁이 많았지만 그의 처 이세벨은 대담하면서도 독기가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왕을 조종하여 나라를 이리저리 쥐고 흔들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얼마나 어지러웠겠습니까?  이렇게 어둡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이 엘리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보인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신 일이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두 인물을 만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되는 사람이요 엘리야도 선지자들 중 대표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6) 하셨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한 선지자였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비오지 않기를 기도해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했을 때 하늘이 비를 주었습니다(약5:17-18).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엘리야는 선지자를 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합왕과 백성들의 범죄로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그쳐 먹고 마실 것이 없게 되었을 때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살던 엘리야는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르밧으로 가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물 좀 달라던 선지자는 이왕이면 떡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더구나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는 여인에게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먼저 내게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는 선지자도 어려운 부탁이요. 여인도 순종하기 쉽지 않은 부탁입니다.  그러나 떡을 주기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었음에도 이 여인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합니다.  마지막으로 떡을 한번 먹고 죽으나 지금부터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는 참으로 놀라운 순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생명과 같은 떡을 받아든 엘리야는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잘 섬겼을 때 물질의 복, 마르지 않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아들이 죽었지만 다시 살려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을 잘 대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마10:40,41)



  둘째, 엘리야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는 이세벨의 영향을 받아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득세하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야 혼자뿐이었지만 바알 선지자는 450명, 아세라 선지자는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약 850:1의 싸움을 벌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왕도 왕비도 바알의 편이었습니다.  둘러선 구경꾼들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권력도 바알 쪽이 쥐고 있습니다.  숫자도 바알 쪽이 더욱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혼자뿐인 엘리야는 이 생명을 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무너진 돌 단을 수축하고 도랑을 판 뒤 나무를 벌여 놓았습니다.  그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 올려 놓은 뒤 물을 네 통씩 세 번 12통을 길어다 부었습니다.  삼 년이 넘도록 가뭄이 심했는데 이 산꼭대기까지 어떻게 길어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 내용을 보면 자신이 싸움에 이겨야 하겠다는 것보다 주님의 여호와이신 것을 왕과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백성들이 깨닫고 돌아오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흠뻑 젖은 나무와 제물을 살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둘러선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방 제사장들 850명을 죽이고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려면 깨끗하고 순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더러운 그릇에 담겨지면 더러운 음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지에서 맑고 깨끗한 물을 흘려 보내도 수도관이 낡고 녹슬었다면 녹물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욕심이나 사심이 없이 하나님의 순수한 능력을 올바로 나타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이런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셋째, 엘리야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왕궁의 가까이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나 몸져 누워버린 것입니다.  팔라고 해도 팔지 않고 바꾸자고 해도 바꾸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왕이 고민하는 것을 본 이세벨은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는 왕과 왕비에게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멸할 것이요”(왕상21:21). 이세벨에게도 하나님의 경고는 엄중히 내려졌습니다. 개들이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얼마 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예언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말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직분, 내게 주신 은혜, 내게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하나님의 살아 계신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엘리야 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복을 받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에 항거하고 온유하게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너를 보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겠다󰡓�하고, 하나님께서는󰡒�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15.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사람 - 히스기야

(역대하 31:20-21)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는 아하스였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께 악을 행하다가 나라를 큰 곤궁 속에 몰아넣은 왕입니다.  바알의 우상을 만들고, 자녀를 불살라 제사를 드리는가 하면 수많은 산당을 만들어 분향하고 제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다 못해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아람, 이스라엘, 에돔 등 주변국가의 침략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왕 베가는 침략하여 하루에 용사 12만 명을 죽이기도 했고 백성 20만 명을 사마리아로 잡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앗수르왕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하고 하나님께는 더욱 범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아하스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백성들은 아하스를 이스라엘 열왕의 묘실에 들이기를 꺼려하여 아하스는 그냥 예루살렘성에 장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보기에 악한 아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히스기야는󰡒�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29:2).

  30:20,21에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하고 있듯이 아하스의 통치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하나님에게나 백성들에게나 인정받고 지지를 받은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의와 진실함으로 행한 사람이었기에 백성들도 왕을 신뢰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첫째, 히스기야는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신앙을 회복시켰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 맨 처음 착수한 일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회복시킨 일입니다.  이미 선왕이 16년 동안 우상숭배에 전념하느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위 원년 정월에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성전에 들어가 보니 16년 동안 누구도 돌본 사람이 없어 성소가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성전을 대청소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낭실 문을 닫고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서 등을 돌리셨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린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성전이 얼마나 더럽혀졌는지 대청소하는데는 16일이나 걸렸습니다.

  이렇게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니 마음이 기뻤습니다.  히스기야는 레위 사람 중 악기를 잡게 하고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제물을 가져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음을 인하여 히스기야가 백성으로 더불어 기뻐하였더라”(29:36)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유월절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정월 14일에는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2월에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전국에 편지를 보내 유월절을 지키자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조롱하며 비웃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30:10) 수많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2월 14일에 유월절 양을 잡음으로 유월절 제사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성결케 한 뒤에 유월절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일부 많은 사람들은 이제까지 우상숭배의 풍속에 젖어 그만 자신들을 정결케 하는 의식을 하지 않고 그냥 유월절 양을 먹은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깜짝 놀라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유월절은 축제 속에서 한 주간 동안 진행되었고 백성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다시 한 주간을 더 지키자고 하였습니다.  비록 제 날짜에 지키지는 못했고 이방 풍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의 실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고 백성들은 즐거워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희락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희락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30:26)고 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일어나 백성을 축복하였습니다.  은혜 있는 절기였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제사장 직무를 회복시킨 것입니다.  그 동안 제사장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본래의 직업인 성전봉사와 제사직무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소집하여 24반차로 나누어 본래 그들의 직무인 성전봉사와 제사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이들의 응식으로 첫 열매와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3월부터 쌓기 시작한 것이 7월에야 마쳤습니다.

  이런 신앙 회복운동은 백성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제안하면 백성들은 기쁘게 따라주었습니다.  특히 십일조와 같은 막대한 재물을 서슴없이 선뜻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히스기야의 정직한 마음을 백성들이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재물이 어느 곳에 어떻게 쓰일지 알고 있었고 또한 왕을 신뢰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기꺼이 헌신하고 협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은혜 받게 하려고 하는 히스기야의 진실한 마음이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기쁨 가운데 생활하고 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가 유다 왕국까지 점령하려고 손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은금을 주어 사정을 하며 돌려 보냈지만 수시로 쳐들어와 괴롭혔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았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앗수르왕의 조소와 항복요구에 입다물도록 명령하고 왕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 전에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하셨습니다. 󰡒�네가 앗수르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하셨습니다.

  그날 밤, 여호와의 사자는 앗수르 진영에 찾아가 185,000명을 송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앗수르왕은 얼굴이 뜨뜻하여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지만 그는 신하들에 의해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정직한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히스기야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32:25).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순간 히스기야는 자신의 교만을 뉘우쳤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20:3) 하고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즉시 이사야에게 임했습니다.  이 병에 죽지 않을 것이고 십오 년을 더 살게 하겠다는 응답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백성들을 위기에서 건졌고 자신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정직하고 진실한 삶이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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