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
1.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 - 노아
(창세기 6:5-1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실 때도 노아의 시대와 같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태평하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도 심판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의 취미가 이런 것들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취미입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취미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합니다. 머리로 계획을 세우는 일마다 한결같이 악한 것들뿐입니다.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악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더 지능적이고 더 추악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첫째,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노아를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노아가 정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 좀 나은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노아 역시 생각하는 것도 계획하는 것도 항상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 정신을 쏟고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노아를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개미 허리재기입니다. 개미들끼리 앉아서너 왜 그리 뚱뚱해졌느냐 허리 살 좀 빼라할지 모르나 사람이 볼 때 그 개미가 그 개미입니다. 그 허리가 그 허리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정하게 살아본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노아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날은 불과 12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20년 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뿐 아니라 육축과 기는 동물과 공중의 새까지 청소하듯 깨끗이 쓸어버리리라 하셨습니다. 이 계획을 하나님은 노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방주를 만들어 예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은혜 입은 사람들은 압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느니라(암3:7) 하셨습니다.
이 시대 가장 큰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기 때문에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알려 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은혜 입은 사람만이 깨닫게 됩니다.
노아는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노아를 위해서 짓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웠습니다.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이 방주에 들어가면 생명을 보존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 죄악과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방주는 곧 교회의 모형입니다. 죄악이 들끓는 세상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장래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구원의 방주인 교회로 들어오게 하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 노아의 사적은 이러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달았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고전6:1)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사람(유1:4)이 있는가 하면 은혜에서 떨어지거나(갈5:4)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다가 형벌을 받는 사람(히10:29)도 있지만 노아는 은혜를 알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의인이었습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로 엄청난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완전한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실 때 허물없이 완전한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당세에 완전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노아 같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착한 아들이요. 아내에게는 좋은 남편이요. 자녀들에게는 존경받는 아버지였습니다. 이런 삶은 곧 믿음의 열매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하셨는데 노아는 하나님과 마음이 맞았습니다. 은혜 받은 노아는 항상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죄악의 수렁을 헤어나오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120년 동안이나 온갖 조롱과 비웃음을 무릅쓰고 방주를 만든 것을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방주의 크기는 150m×25m× 15m로 축구장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약 15,000톤급의 배와 크기가 같다고 했습니다. 최신 도구나 인원 장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셋째,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었으니 포도가 열렸습니다.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열이 나고 더우니 벌거벗었습니다. 의인 노아가 무슨 추태입니까? 존경받는 아버지가 자식들 앞에 무슨 부끄러운 짓입니까? 어인 일로 많은 나무 중에 포도나무를 심었습니까? 많은 농사 중에 포도농사입니까? 은혜 받은 사람의 직업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해야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천만금이 들어온다 해도 아무리 수입이 많다해도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은 생각지도 말고 가까이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거울입니다.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습니다(고전10:11). 그러므로 조심합시다. 의인 노아, 은혜 받은 노아도 술취하고 망신당했다면 우리가 아무리 은혜 받았다고 큰 소리쳐도 넘어질 가능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지금은 노아 시대와 다른 바 없습니다. 세상 죄악에 함께 물들지 말고 은혜 받은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게 삽시다. 방주인 교회를 세웁시다. 그 속에 사람을 불러 모읍시다. 의를 전하고(벧후2:5) 하나님의 비밀을 전파합시다.
2. 여호와께 인정을 받은 사람 - 아브라함
(창세기 22:1-14)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 즉 후손들에게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의 논쟁에서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요8:32),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요8:39) 하는 사실을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쓸 때 유대인들의 이런 생각을 알기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라고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뿐 아니라 아브라함은 믿는 자의 조상(롬4:11) 즉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러워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려 합니다. 또한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나의 벗’(사41:8)이라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야고보가 말한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약2:21-23).
이렇게 유대인들로부터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인정받고, 또한 하나님까지 인정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인정받게 되었을까요?
믿음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학생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시골에서 1등을 했다고 해도 그가 정말 공부 잘하는지는 서울 학교에서 시험을 치러 보아야 압니다. 그가 시험에 1등을 하면 정말 공부 잘한다고 인정을 받지만 만약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오면 “그러면 그렇지 시골뜨기가 별 수 있겠느냐” 하고 비웃음 당하고 말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에 이긴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고 모든 후손은 그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어떤 믿음을 인정받았습니까?
첫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로 죽을 때까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 번도 ‘아니오’하거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하고 항의한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예’ 했습니다. 쉬운 일 뿐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에도 ‘예’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는 시험을 받은 것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행7:2-3).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 정착하고 말았습니다(창11:31).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었을 때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비 집을 떠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아브라함은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이미 죽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은 형 나홀을 하란에 남겨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출발했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 하였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 하신 약속을 믿지 못하고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가다가 애굽까지 내려갔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더 믿고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였습니다(창 16:15).
이런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은 사건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이 시험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인지는 하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도저히 순종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차라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면 그것이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열이 나고 끙끙 앓게 되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 하고 걱정합니다. 이 아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아이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이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무슨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진 믿음이 아닙니다. 처음에 하란에서 떠날 때부터 아브라함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창12:4).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실패를 통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길러왔기 때문에 시험에 이길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약속을 믿는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까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수 차례나 후손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의 뭇 별과 같이, 바닷가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이 후손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이며(15:4),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주실 것이라(17:16) 하셨습니다. 그 때는 명년 이맘때(17:21)이며 그 아이의 이름은 이삭(17:19)이라 지으라고까지 자세히 알려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한 약속이라 믿지 못했지만 100세의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고 나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아들, 약속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삭을 통해 자손의 복을 주리라 하셨는데 아직 이삭이 결혼하여 손자를 낳기 전에 죽이라 하시니 무슨 뜻일까, 내가 죽여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8,19).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에 올라갈 때 사환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개역) 여기서 누가 돌아오는지 분명히 표현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동사의 주어가 1인칭 복수 즉 ‘우리’로 되어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서 경배하고 우리가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인정받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들을 죽여도 이 아이는 약속 받은 아이니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자식의 생명을 걸고 믿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신앙자세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은 소돔 성을 위하여 간구 하는 그의 기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소돔 성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27), “내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18:30), “내가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31),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18:32) 하고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따지듯 항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큰 소리로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믿음이 좋아 보여도 이런 사람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됩시다. 믿음을 인정받는 신자는 복스러운 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한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6-18).
말씀에 순종하고, 약속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3.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 - 이삭
(창세기 26:26-33)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성령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같이 언급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종종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출3:6,1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히 아브라함과 야곱의 생애는 기억되면서 이삭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의 이삭, 야곱의 아버지로서의 이삭이 생각날 뿐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창세기 26장에는 이삭이 복을 받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 모두 여호와께서 복 주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삭이 무슨 복을 받았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이삭은 재물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그랄 지방에 내려와서도 그 땅에서 농사하여 100배나 얻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대하고 왕성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양과 소도 떼를 이루었습니다. 노복도 심히 많아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할 만큼 부자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어떻게 가르치든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 받았다 하면 우선 재물의 복부터 생각합니다. 돈을 벌었다. 집을 장만했다 하면어이구 그 사람 복 받았네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삭은 무엇보다도 재물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조금 받은 것이 아니라 백 배나 얻었고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할 정도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자손의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친히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가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을 번성케 하리라(26:24). 물론 이런 약속은 아버지인 아브라함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늙어 100세가 되었을 때 아들 하나를 겨우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한꺼번에 아들 쌍둥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인복 즉 사람의 복을 받았습니다. 부모에게 남다른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도 이삭만큼 부모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란 아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실 만큼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대적들에게서도 인정받았습니다. 이삭이 부자가 된 것이 샘이 나서 우물을 막아버리고 떠나가라고 하면서 따라다니며 계속 괴롭혔지만 이삭을 안 그들은 이삭 앞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에게도 원수나 대적이 항상 있게 마련이지만 이삭에게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입니다.
이렇게 이삭이 재물의 복을 받고, 자손의 복을 받고, 사람의 복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지만 복과 상급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 요한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이런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었을까요?
첫째,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부자였기 때문에 독자로 태어난 이삭은 날 때부터 이미 큰 부자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니라”(출20:6)고 하셨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지켜 나갈 때 우리의 자녀들이 복을 받게 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악을 행하고 가증한 우상을 섬겼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왕상11:11) 하시면서도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리라하셨습니다. 멸망할 나라가 솔로몬의 시대에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시대에 나라를 빼앗아 가시지만 그것도 다 빼앗지 아니하시고 조금 남겨두시는 것도 오직 다윗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복 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놓았다 해도 아들이 복 받을 그릇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그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도 거역하거나 도망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 한 짐을 이삭의 등에 지운 것을 보면 그는 젊고 힘이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때 이삭의 나이가 25세였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삭이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임을 상기시키면서 33세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죽었으니 나이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23장 1절에서 사라가 127세에 죽었으니 이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입니다. 그러므로 22장 때 나이가 20-30세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아버지가 완력으로 아들을 잡아 드릴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죽이겠다고 하는데도 무릎꿇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 바쳐 순종하고 아버지가 하신다고 하면 생명까지 드릴 수 있는 순종의 삶이 이 큰 복을 받게 된 원동력입니다.
셋째,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부자가 된 것을 시기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횡포를 보십시오. 힘들여 판 우물을 빼앗아 흙으로 메워버립니다. 아브라함 때에 길리고 연습한 군사가 318명이나 되었다면 지금은 더 많을 것입니다. 한 번 싸워볼 수도 있겠지만 이삭은 순순히 양보하고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서 다시 우물을 팝니다. 이스라엘의 지형상 우물을 파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도 빼앗아 가면 다른 곳에 또 팔지언정 함께 싸우지 않았습니다. 비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그의 온유한 성품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 그들은 사과하고 화해를 합니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즐기리로다”(시37:11)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라”(마5:5) 하셨습니다. 온유한 성품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값진 그릇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해야”(딤후2:24) 한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됩시다. 온유한 성품을 기릅시다. 그래서 물려받은 하나님의 복을 더욱 복되게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시다.
4. 여호와께서 기도를 시킨 사람 - 야곱
(창세기 32:24-32)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도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삶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부자가 된 이삭의 둘째 아들로서 행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잔꾀를 부리다가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야 했고 부모의 유산은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20년간 외삼촌의 집에서 온갖 고생을 하여 그나마 재산도 좀 모으고 살만하여 고향을 찾아 왔으나 형 에서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 20년간 애써 모은 재산(가축)을 다 보내놓고 홀로 남았을 때 얍복강에서 무릎을 꿇었는데 이 날이 그의 일생 중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일생은 크게 두 시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도 없이 살았던 창세기 32장 이전의 생활과 기도로 살았던 그 이후의 생활입니다.
또한 이 두 시대는 각 각 두 부분으로 다시 나뉘어 집니다. 기도 없이 살던 시대를 고향에서의 생활과 외삼촌의 집에서 살아온 생활로 나눌 수 있고, 기도로 살았던 시대 역시 고향에서의 생활과 애굽 고센에서 살아온 생활로 나뉘어집니다.
참으로 야곱은 자신의 고백대로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47:9).
첫째, 기도 없이 살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경건한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그가 기도를 하지 않았겠느냐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루 세 번의 식사기도는 했을 테니까요. 그리고 창세기 28장에 나온 대로 벧엘에서도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기도의 삶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비록 벧엘에서 안타까운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두려움에 단을 쌓고 기도하였지만 잠시 뿐이었습니다. 기도 내용은 잊고 말았으며 하나님과 서원한 것도 까마득히 잊고 말았습니다.
이런 기도는 온전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도없이 살았던 고향에서의 70여 년은 인간적인 방법을 살았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 인간적인 생각,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여 살았지만 70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못했고 도망치듯이 집을 나설 때는 어머니가 싸준 보따리 한 개가 전부였습니다. 팥죽 한 그릇과 떡까지 주고 장자의 명분을 샀지만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와 짜고 연극을 해가면서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받았지만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직위나 직분이 복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면 훨씬 더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축복기도나 안수기도가 신비한 영험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은 복받을 그릇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는데 안수기도를 세게(?) 해 준다고 해서 복이 임하겠습니까? 축복을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응답의 여하는 본인 자신에게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또한 기도 없이 살았던 밧단 아람에서의 20년은 성실히 노력하고 고생한 시대입니다. 고향에서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외삼촌에게 말했듯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31:40) 20년을 보냈습니다. 성실히 외삼촌의 양과 염소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속이거나 눈가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외삼촌의 가축을 잡아 요리해 먹은 일이 없었습니다. 짐승에게 물려 찢긴 것은 자기가 보충했고 밤에든 낮에든 도적을 맞은 것은 다 물어주었습니다. 20년 동안 품삯을 무려 10번이나 변역했지만 야곱은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가축의 떼를 얻을 수 있었고 네 명의 아내와 11명의 아들(후에 12명)을 거느릴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습니다. 32:24을 보십시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혼자였습니다. 빈손이었습니다. 형 에서가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겁이 나서 재산도 다 앞서 보내고 심지어 처자들까지도 얍복강을 건네주고 자기 혼자 강 이편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도 없이 살아온 결과는 언제나 빈손입니다. 인간적인 꾀를 쓰면서 70년을 살았지만 결과는 보따리 하나요. 정직하고 근면 성실히 20년을 살아봤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혼자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이런 경험을 겪지 않습니까? 많이 얻은 것 같았는데 빈손밖에 없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신호입니다. 손에 잡힌 것 같았는데 어느 날 혼자임을 깨달았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기도하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없이 혼자 남은 야곱은 얍복강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너무 허무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씨름하듯이 밤새 기도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기도했다는 말이 창세기에는 없으나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이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야곱이 얍복강에서 드린 기도는 습관적이거나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32:26) 하는 필사적인 기도였습니다.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이 때만큼 간절히 울며 간구해 본 것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벧엘에 이르렀을 때 해가 졌는데(28:11) 기도를 마치고 브니엘을 지날 때는 해가 돋았습니다(32:31).
모든 것을 다 거두어 가신 뒤에 후회하며 애타게 기도하는 사람 있고,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다 거두어 가셨지만 야곱은 떠나기 전에 간구 하여 응답 받으므로 재산도, 가족도 모두 찾을 수 있었고 형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다 거두어 가시고 빼앗아 가신 뒤에 도로 찾고 회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직 남아 있을 때 기도하십시오. 건강이 남아 있을 때 기도하십시오. 재물이 남아 있을 때 기도하십시오. 야곱은 비로소 기도의 능력을 알았고 기도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그 후 야곱의 삶은 인간적인 지혜나 세상적인 노력만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무릎꿇어 기도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복해 주었습니다. 요셉을 찾아 애굽에 내려갔을 때 먼저 바로를 찾아가 축복해 주었습니다(47:7,10).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해 주었습니다(48:9). 그리고 마지막에는 열두 아들들을 불러 축복을 한 뒤에 눈을 감았습니다(49:28).
기도를 하지 않고 일만 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재능 있고 열심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열심을 내다가고 곧잘 시험에 듭니다. 잘되면 교만하고 안 되면 낙심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일의 결과가 좋게 나타날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기도하고 주님의 주시는 힘으로 일하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5. 여호와께서 형통케 하신 사람 - 요셉
(창세기 39:1-6)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께 하심을 보았더라.
흔히 사람들은 요셉을 꿈꾸는 사람, 혹은 꿈쟁이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비웃으며 한 말이지만(37:19) 정말 요셉은 평생 꿈을 붙잡고 살았으며 꿈 때문에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꿈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꿈이 없이 살고 있으며 헛된 꿈에 빠져 사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꿈을 확신하며 그 꿈의 성취를 맛본 사람이 요셉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나 요셉은 반대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요셉이 이처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사셨고,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난 뒤 주변의 모든 환경은 꿈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으니 부모 형제가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이 실현되려면 부모 형제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하는데 먼 외국으로 팔려갑니다. 게다가 종으로 팔려가고, 노예에서 죄수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꿈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내려간다 해도 역사를 뒤집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십수 년 전, 치안본부 안에 교회가 처음 세워지면서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하시고 여전도회에서 떡과 음식을 장만하여 가서 찬양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여전도회원들은 찬양을 연습하면서 젊고 예쁜 사람이 앞줄에 서고 나이 많고 노래도 못하는 사람은 뒤로 서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치안본부 교회는 의자가 없이 맨바닥이었습니다. 예배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성가대 찬양이 있겠습니다” 하더니 “성가대원 일어서” 그리고 “뒤로 돌아” 하더군요. 강단 쪽을 향해 서서 찬양할 줄 알았는데 뒤로 돌아 회중석을 향해 서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젊고 노래 잘하는 분은 뒤로 서고 나이 많고 노래도 못하는 분들이 맨 앞에 서서 찬양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꿈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뒤로 돌아” 하시면 역사는 희비가 서로 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십시오. 자신의 꿈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뒤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가니 여호와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요셉이 오해를 받아 옥에 집어넣으니 하나님은 옥에 있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전옥은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고, 요셉에게 맡긴 것은 무엇이든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감옥이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흉악한 죄수들이 하나 둘, 그의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가 옥에서 풀려나 애굽 나라의 총리가 되니 이번에는 애굽 온 땅이 복을 받았습니다. 7년의 계속되는 흉년에도 넉넉히 먹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애굽 왕은 외국에 식량을 팔아 돈을 벌고 애굽 온 땅의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의 바로 왕은 본토인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힉소스 왕조였습니다. 본토인을 축출하고 왕좌에 앉았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을 때 요셉이 도와주므로 전 국토를 소유하고 백성들의 신임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형통케 하십니다. 여러분의 사업이 불경기를 모르는 것은 사업의 수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요셉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형통하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실까요? 아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기를 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주인 보디발이 잘해 주는데 어찌 배신할 수 있느냐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옆에 계시고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신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에게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도움을 받으면 노예에서 해방될 수도 있고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총리가 되어 식량을 관장할 때도 그렇습니다. 왕은 요셉을 절대 신임하여 인장 반지(요즘 인감도장 같은)를 아예 요셉의 손에 끼워 주었습니다. 식량을 사고 파는 모든 문제를 전혀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얼마에 사 두었다가 얼마씩 파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14년 동안 식량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마음만 먹으면 엄청난 돈을 빌 수 있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정말 시루떡을 나누어 주다 보면 떡고물이 몇 그릇은 남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일을 수행하면서 심심찮게 재산을 모으는 공직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소위 떡고물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모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거나 득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따진다면 형들에게 식량을 팔고 돈을 받지 않은 죄(?)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15:3)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정직하게 삽니다.
둘째,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므로 언젠가 꿈이 이루어 질 것을 믿었기에 인간적인 지혜나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었지만 누구에게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왕에게 말씀드리겠다고 했지만 2년 동안이나 까마득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때를 기다렸습니다. 잊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만약 그 때 신하가 잊지 않고 왕에게 말씀을 드렸다면 옥에서는 나오겠으나 노예의 신분은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니 옥에서 나올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37:7).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셋째, 감사할 수 있습니다.
훗날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만났을 때 그는 원수들 잘 만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45:5) 했습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 하였습니다. 모든 선한 결과를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고 언제나 함께 하심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형통케 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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