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인생을 위하여(욘 3:1-2)
1. 앗, 실수... 그러나 용서는 실수를 치료한다
옛말에 한번 실수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고 했습니다. 작전을 짜고 전쟁을 지휘하는 병법가가 실수를 한다는 것은 곧 패전을 의미하지요. 그렇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것처럼 아무리 노련하고 전법에 익숙한 병법가라 할지라도 한번쯤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실수는 용납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실수가 전혀 용납되지 않고 조그마한 실수라도 용서될 수 없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마음놓고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인간입니다. 내가 실수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실수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철저해서 거의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들 옆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형제가 잘못하고 와서 용서를 구하면 몇 번 정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한 일곱 번쯤 용서해 주면 될까요?" 이 세상에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줄 아량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일곱 번씩이나 와서 용서해 달라고 할 그런 철면피도 없겠지요. 제갈공명이 남만을 정복하러 갔다가 그곳 왕 맹획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갈공명은 맹획을 살려 보내지요. 이놈을 살려주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뻔한데도 말입니다. 정말로 맹획은 부하들을 모아 다시 공명을 공격하다가 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한번만 더 살려주시면 다시는 반역하지 않겠습니다' 단단히 맹세를 하고 다시 풀려났는데, 또 부하들을 규합해서 전쟁을 벌입니다. 이렇게 생포해서 놓아주기를 무려 일곱 번이나 했더니, 맹획이 정말로 공명의 인격과 능력에 굴복해서 충실한 신하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칠종칠금이라 해서 아주 유명한 일화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처럼 일곱 번이나 용서를 해 준다는 것은 사실 칠종칠금에 비할 만큼 큰 아량과 인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한번 용서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어떻게 한번 용서를 했다고 합시다. 똑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고 와서 용서를 해 달라고 하면, 글쎄 여러분은 용서가 잘 되겠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일곱 번이나 용서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고 추켜주실 줄 알았는데, 칭찬은커녕 일흔 번씩 일곱 번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예수님 말씀에 의지해서 490번이나 잘못을 저지르고 뻔뻔스럽게 '나를 용서해다오' 할 수는 없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를 하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지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거든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말해서 용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용서받기를 포기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나는 다른 사람 용서를 못하면서 내 잘못 용서받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임한 말씀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것은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용서와 회복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번 실수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대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합당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인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의 실수는 그저 이해하고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갈 그런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일부러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려다가 힘이 부족해서 못했거나 판단착오로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를 용서하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서 실패했다가 다시 회복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겠지요. 그는 정말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다윗을 만나시고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다. 내 뜻을 이루도록 해야겠다"(행 13: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 다윗이 얼마나 큰 실패를 했습니까? 자기의 심복, 자기를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부하의 아내와 간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드러날까 봐서 그 부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심각한 죄악이었습니다. 사울왕을 폐하신 것처럼 이 다윗을 당장 왕위에서 쫓아내도 부족할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처절하리만치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부서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영광을 거두어가시지 않았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그런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베드로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단단히 맹세하기를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맹세를 한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요. 베드로 역시 철저하게 실패해버렸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떻게 맡길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들 같으면 '베드로는 안되겠어.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야겠어.' 하면서 포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베드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더욱 신뢰하시고 그를 통해서 교회의 기초를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오순전 성령강림의 역사를 허락하셨고, 수천명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능력의 말씀을 그 입술에 두셨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한 사람이 용서될 때 이처럼 위대한 일이 일어납니다.
또 한 사람 재미있는 친구를 들라면 마가라는 젊은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붙잡히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신 그 다락방을 빌려준 사람입니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복음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할 때 그 팀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을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선교사역한다고 다니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잘못하면 붙잡혀 죽을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그만 못하겠다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동역자가 절실한 그 선교팀에서 그렇게 이탈자가 생기니까 얼마나 타격이 크겠어요? 그래서 이 마가는 공동팀장이었던 바울에게 완전히 찍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마가가 잘못했다며 돌아와 다시 선교팀에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받아주겠어요? 안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또 한사람의 공동팀장인 바나바는 받아주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칼같은 사람이었고, 바나바는 좀더 아량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더욱이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였어요. 그러니 바나바는 마가를 용서해서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던 것이지요. 그래가지고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통일이 안되었는데, 나중에는 얼마나 심하게 싸웠는지 그만 팀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 마가라는 사람 때문에 그 위대한 두 사도의 선교팀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실패했던 마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주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셔서 더 큰 사역자로 삼으셨습니다. 결국 마가는 기독교를 위한 가장 위대한 공헌자들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의 저자가 된 것이지요. 그 실수하고 실패한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위대하게 다시 들어쓰셨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바울도 마가의 가치를 인정하고 마가가 자신의 사역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딤후 4:11).
3. 다시 부르시는 이유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그렇게 실패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킨 요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금 그에게 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에게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다시 그를 사역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했습니까? 항상 승리하는 생활만 했습니까? 한번도 실수하지 않았습니까? 실패해서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린 적은 없습니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늘 실패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그래서 곤고하고 기쁨을 상실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광스러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생활하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여기 여러분을 위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실패하고 잘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두 번째뿐이겠습니까? 두 번째에서 실패했다면 세 번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세 번째도 실패했다면 네 번째 다섯 번째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첫 번째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자꾸 실패하는 우리 인생에게 이처럼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주는 한이 있더라도 진짜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했던 그 옛날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어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을 올바로 섬기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의 자녀들이 더 이상 실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올바로 살아가며 그 맡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실패를 언제까지나 용납하시고 허락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되고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한번 변화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