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에 내려와 앉은 왕(욘 3:4-10)
1. 하루만에 무너진 니느웨
옛날 중국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 조나라는 강대국 진나라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괴롭히는 바람에 마음놓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조나라 왕이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귀한 보물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나라 왕이 진나라 15개 성과 그 보물을 바꾸자고 청해 왔습니다. 이것은 그 보물을 빼앗으려는 수작에 불과한 것이었지요. 싫다고 거절했다가는 화를 초래할 것이고, 바꾸러 갔다가는 성을 얻지 못하고 보물만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조나라에 인상여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장수도 아니고 풍채도 보잘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혼자서 적국에 들어가 그 지략과 용기로 진나라 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냈습니다. 그 후로 인상여가 살아 있는 동안 진나라가 함부로 조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요나가 혈혈단신으로 적국에 들어가 그 나라를 말 한 마디로 완전히 정복해 버렸습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이 니느웨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의 나라들을 굴복시켰고, 또 그 사람들은 잔인하기로 이름이 났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홀몸으로 들어가 겁도 없이 니느웨가 40일 안에 망할 것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다녔습니다. 거대한 공룡에게 맨손으로 도전하는 꼴입니다. 붙잡혀서 간첩으로 몰리거나 국가모독죄로 극형에 처해질지도 모릅니다. 아예 그렇게 되기도 전에 성난 군중에게 뒷골목으로 끌려가 몰매를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포악하고 사나운 사람들이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만사를 제쳐두고 상복을 입고 통곡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의 말 한마디에 온 백성이 거꾸러졌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지요. 왕까지도 그 보좌에서 내려와 재 위에 앉았습니다. 왕복을 벗고 상복을 입었어요. 언제 왕이 상복을 입고 재에 앉겠습니까? 부모가 죽었을 때 아니면 나라가 망했을 때겠지요. 삼국지의 마지막에 가면 좀 띨띨했던 유비의 아들 유선이 제갈공명도 죽고 내로라 하던 장수들도 다 죽은 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위나라에 항복하는데, 머리를 풀고 스스로 결박하고 죄인을 호송하는 가마에 올라타고 적장에게 갑니다. 내 나라는 망했고 나는 더 이상 왕이 아니오 하는 의미지요.
지금 니느웨 왕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라가 망해서 왕으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위엄과 권세가 다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좌에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왕복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요나는 '40일 후에 니느웨가 말할 것이다'라고 외쳤는데, 왕은 '벌써 망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지요. 나라가 망했으니 왕을 비롯해서 모든 백성이 상복을 입고 슬퍼하며 통곡을 하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나라의 모든 짐승까지 상복을 입고 먹을 것을 일절 입에 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합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빼앗았을 때는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시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라가 망한 마당에 어찌 먹을 것 마실 것을 입에 대겠습니까?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슬퍼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 재를 상복을 입고 뒤집어쓴 그곳이 바로 그들의 구원이 시작되는 곳이었습니다. 완전히 항복하고 교만과 죄악이 망해버린 그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2. 누가 회개하는가?
요나가 니느웨에 임박한 재앙을 선포하고 니느웨가 그것에 반응하는 이 사건에서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는 일은 천하에 악독하고 잔인하던 니느웨 사람들이 갑자기 그렇게 돌변해서 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니느웨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비유될 만한 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성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 멸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소돔이나 고모라는 마치 도토리들이 키재기하는 모양으로 서로 싸우던 여러 도시왕국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그돌라오멜이라는 왕을 섬기다가 반란을 일으켜 전쟁을 했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 두 왕국은 전쟁이나 대외관계에서 매우 잔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했지 않습니까? 또 그들 가운데 도덕적, 종교적 죄악이 만연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는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비마저 해당될 수 없을 만큼 부패하고 악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관용하지 못하시고 그들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죄악이 관영해서 멸망당하게 된 것은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만큼 죄악이 사무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도 흔적없이 사라지는 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공통점은 책망을 들었을 때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노아의 기사에서는 그 사람들이 노아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마 24:38-39)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는 그 사람들이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했다"(벧전 3:20)고 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14,000톤급의 거대한 배입니다. 그 옛날에 그만한 배를 만든다는 것은 아마 평생동안의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많은 세월동안 그들 앞에 다가오는 심판의 경고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소돔 성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악을 행하지 말라는 롯의 말에 "이놈이 이민와서 사는 주제에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하면서 그의 충고에 대해 분노할 뿐이었고, 롯의 사위들도 심판이 임박했으니 빨리 피신하라는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심판 직전에 그나마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악하고 잔인하기로 말하자면 이 니느웨 사람들도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노아 당대의 사람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직전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니느웨 사람들은 더 발달한 전쟁기술로 다 잔인하게 악을 행했을지 모릅니다. 훨씬 더 큰 세력을 이루었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한 힘으로 교만해질 데까지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고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봇대에서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다 어려운 일 아닙니까?
평양 성에서 김익두라는 망나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술을 마시고 사람을 패고 물건을 빼앗고 그 심술과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익두가 나타나면 펼쳐 놓은 장판을 거두어서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그러던 천하의 악당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김대두' 하면 그 앞에 붙는 수식어가 '살인마'입니다. 그 살인마 김대두가 죽기 전에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한 이야기는 얼마나 가슴뭉클합니까?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예수 못믿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마음이 강퍅하고 마음이 돌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될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니느웨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꾸라져서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절대로 예수 못믿을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 하늘나라 훈장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꽉 막힌 사람도 있고, 말로 해서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소돔 사람이 될지 니느웨 사람이될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기회마저 발로 차버리고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는데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든 끝까지 거부하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지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여러 가지 서비스를 하면서 회원을 모집하는 사이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이트들의 존폐 여부는 얼마나 많은 회원을 확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무료 서비스이기 때문에 광고수익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광고수익은 회원의 수에 비례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회원을 모집하는 수단이 여럿 동원되는데, 그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 추천제도입니다. 한 회원이 되면 다른 사람을 가입시키면 점수를 주는 거예요. 새로 회원가입을 할 때 꼭 물어보는 것이 누가 추천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추천 수가 많아지면 점수가 많아져서 경품을 받는다든지 돈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장삿술이지만, 저는 이 장삿술이 하나님의 방법에서 배워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면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상급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순교자의 상급이 있을 것이고 전도자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흔히 순교자의 면류관이 가장 영광된 것이라고 생각들 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지 모릅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한 것이기 때문에 더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여튼, 전도자의 상급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파하실 때 말이 통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보시고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41) 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요나를 칭찬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나는 요나의 전도를 듣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고 외칠 것이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너희는 누구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면 일제히 일어나 요나를 가리키겠지요?
하나님께서 천국문에서 기다리시다가 구원받은 성도가 도착할 때마다 그를 영접하시며 물어보십니다. "너는 누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 "네, 저는 옆집 살던 김집사님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김집사에게 훈장을 하나 주십니다. 생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한 영혼을 구원한 것에 훈장 하나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하늘나라에서 몇 개의 훈장을 받을 것 같습니까?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말이 통하든지 안통하든지 누구에게나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