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를 선포하는 사람(욘 3:3-4)
1. 남의 동네에 가서 소란을 피운 요나
개도 남의 동네에서는 꼬리를 내린다고 하지요. 그건 사실이더군요. 제가 아프리카에서 개를 키운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저희 집에 똥개 한 마리만 있었어요. 거기서는 집을 지키는 목적으로 개를 키우기 때문에 사납고 덩치도 큰 개가 최고입니다. 그래서 사나운 개를 구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마침 미국 선교사 한 사람이 자기 집에 있던 잡종 셰퍼드 한 마리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이놈은 얼마나 덩치가 큰지 보기만 해도 겁에 질릴 정도입니다. 비록 잡종일망정 귀가 반듯하게 선 셰퍼드 종류이기 때문에 영리하고 사나울 것으로 생각해서 이놈을 차에다 싣고 집으로 왔습니다. 걱정은 이놈이 전에 있던 그 똥개를 물어 죽이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이놈을 데리고 집에 왔더니 전에 있던 똥개를 보는 순간 얼마나 시끄럽게 짖어대는지 진짜 물어 죽일 모양이구나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똥개가 무서워서 그렇게 짖어댄 것이었습니다. 똥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새로 온 녀석이 어떤 놈인지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으려고 하는데, 덩치가 두 배나 큰 이 새로 온 녀석은 꼬리를 다리 사이에 넣고 벌벌 떠는 것입니다. 그 꼴이 얼마나 우습고 또 한편으로는 실망도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누구나 낯선 곳에 가서는 기가 꺾이기 마련입니다. 자기 동네에서는 어깨를 펴고 큰소리를 치던 사람도 다른 동네에 가서까지 그럴 수는 없지요. 그나마 그 남의 동네가 크고 사람들이 사나워 보이면 더 몸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거친 사람들과 맞닥뜨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고, 만약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면 얼른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남의 동네에 와서 소란을 피운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술을 먹고 와서 행패를 부린다거나 그 동네 사람들을 욕한다면 아마 몸이 온전하게 남아나지 않겠지요. 우리가 뉴질랜드에 와서 살면서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의 나라, 남의 동네에 와 있기 때문에 좀더 조심해야 하고 조용히 지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아야 하고 불이익을 당해도 어디 가서 일러바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남의 동네에 와서 어지간히 똑똑해 가지고는 큰소리를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누가 그 동네 사람들을 욕하고 저주를 퍼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나가 해야 했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시키신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요나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치려 했던 것도 어쩌면 그렇게 위험한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그야말로 맞아죽기 딱 좋은 일 아닙니까? 누가 감히 남의 나라 남의 동네에 가서 그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고 떠들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스라엘이 큰 나라이고 니느웨가 조그마한 나라였다면 또 모릅니다. 한국에서 미군들이 말썽 일으키는 사건을 종종 보게 되지요? 그래도 그놈들을 우리가 잡아 가두지도 못하고 처벌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마음놓고 말썽을 부리는 것이지요. 지네 나라가 크고 힘이 있으니까, 그리고 한국의 안보라는 허울좋은 구실로 와 있으니까 남의 동네에 와 있으면서도 기가 죽기는커녕 더 기고만장해서 말썽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국 사람이 미국에 가서 그렇게 말썽을 부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정당한 절차를 거치거나 필요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붙잡혀 혼이 나게 될 것입니다. 요나의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니느웨는 당시 최고의 군사력으로 주변을 지배하거나 침략하던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악독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거기에 가서 이스라엘에서 온 사람이 니느웨가 곧 망할 것이라고 외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하지 않습니까?
니느웨가 얼마나 큰 성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본문은 기록하기를 지극히 큰 성읍이라고 했고, 그 성을 지나는 데 3일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성벽의 높이가 100피트였고 그 성벽 위로는 전차 세대가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200피트 높이의 망대가 1500개나 있었다는군요. 당시 주변의 국가들을 장악할 만한 대단한 군사력을 가진 것이 분명하지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행군을 하는데, 하루 10시간을 걸으면 40km를 갑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이 성의 크기는 직경이 100km를 넘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흘을 쉬지 않고 걸어야 그 성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은 무리이고, 여기저기 중요한 곳을 다니면서 그 성에 임한 저주를 선포하는 데 사흘이 걸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고대의 기준에서 볼 때 이 니느웨 성은 지극히 큰 것이었습니다.
그 큰 성읍, 잔인하기로 이름이 났고 주변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고 괴롭혔던 니느웨에 가서 "이 성이 40일 내에 망할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요나의 일이었습니다. 가서 사람들을 축복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주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처럼 철저하게 깨어지고 굴복한 후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내가 살아 있고 내 주장이 남아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발하고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깨어져야 합니다. 내 주장이 깨어지고 내 고집이 꺾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해지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손에 잘 맞는 연장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죽음과 같은 고통과 그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크신 권능을 체험한 요나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이제 무엇이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니느웨로 가서 그 성에 저주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 앞에서 무엇이나 순종할 준비가 되었나요? 그것이 죽음을 무릅쓰는 위험한 일이며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할 수 있습니까? 내 자존심이나 체면이 손상되더라도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자아와 고집이 꺾여졌는지 한번 살펴보십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훈련시키셨던 것처럼 우리를 훈련시켜서 성숙한 믿음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완전한 데 나아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저 자신도 종종 이런 주님이 주시는 도전 앞에서 갈등하고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도전에 올바로 응답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될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
요나가 선포해야 했던 것은 저주였습니다. 옛말에도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린다고 했지요. 우리가 역사상의 인물들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었는가를 보고 충신이었는지 간신이었는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사람 귀에 듣기 좋은 말, 아첨하는 말, 마음에 없는 말,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은 하나님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느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그 뜻을 거슬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하는 말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 1:10)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생활을 해 왔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라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대부분의 모든 선지자들이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특히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늘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른 말 때문에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애굽까지 끌려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고난과 손해를 당하면서도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사람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결국은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장로님께서 저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사람에게 좋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좋은 말을 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실 때 정말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잘 달래느라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사실 그것이 걱정됩니다. 내가 선지자들처럼 사람들의 귀에 거슬릴지라도 바른 말을 해야 할 것이냐, 아니면 그대로 맞부닥치지 않고 지혜롭게 우회해서 비위를 맞추면서 잘 달랠 것이냐, 경우에 따라서 합당한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성도들이 마음상하지 않도록 한답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물론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여러분도 듣기에 좋은 말만 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서로 상치되어 둘 가운데서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마음이 상하고 괴로울지 모릅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또 꼭 없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된다면 여러분이나 저나 꼭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듣기 좋은 말을 기대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사람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죄를 회개하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인자를 위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2-23,26).
저는 여러분이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말을 생각 없이 해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에서 가시 돋친 말이 나오지 않고 늘 부드럽고 상대를 격려하는 말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늘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입술에 주신 말씀이 있으면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이 담대하게 선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섭섭해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마음 문을 닫아버리는 일도 없어야겠지요. 하나님이 부르시고 명령하시면 우리의 희생이 요구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일이라도 순종할 수 있는 믿음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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