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요나 2(욘 1:17)

공 상희 2007. 1. 22. 21:20
요나 2(욘 1:17)  

 

요나 2(욘 1:17)


1. 요나 속편


여러분, 영화 좋아하세요? 어떤 영화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영화의 속편이 나옵니다. 아이들 말로 제 2탄이지요. 어떤 경우는 3편, 4편까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시리즈로 기획된 영화가 아니라면 첫 번째 나온 영화는 그 자체로 완전한 구성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속편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죠. 연속극은 그렇지 않습니다. 연속극을 한번 보면 그 다음 편을 꼭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속편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편의 흥행을 등에 업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영화 '수퍼맨'을 예로 들어봅시다. 1편에서 크립톤이라는 행성의 행정관이 나쁜 악당들을 유리조각처럼 생긴 특수한 감옥에 가두어 우주 공간으로 날려보냅니다. 이것은 수퍼맨 이야기에서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얼마 후 크립톤은 멸망하게 되었고, 이 행정관이 자기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지구로 보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아기는 지구에서 수퍼맨이 되어 눈부신 활동을 하게 됩니다. 악당들과 싸우기도 하고, 사람들을 재난에서 구하고, 예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나지요. 그렇게 끝나고 말았어도 되는데, 이 영화가 히트를 치는 바람에 제 2편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2편은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는가 하면, 핵실험을 우주공간에서 하는 바람에 1편에서 우주공간으로 날려보냈던 악당들의 감옥이 깨져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악당들과 수퍼맨의 대결이 주 내용이 됩니다. 만약 2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우주공간으로 추방된 그 악당들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서 1장은 완벽한 한편의 영화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따돌리기 위해서 007을 능가하는 작전 끝에 아무도 몰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편안하게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하나님의 공격에 요나뿐만 아니라 그 배에 탄 사람들까지 모두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간의 갈등, 위기, 그리고 절정에 이르러 요나를 바다에 내던지는 뱃사람들,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폭풍이 멈추는 극적인 반전, 그리고 뱃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립니다. 진한 감동과 잊혀지지 않는 교훈을 남기고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것만 해도 한편의 멋진 시나리오가 됩니다. 그런데 1장 17절을 읽어보면 마치 영화 속편이 시작되는 분위기입니다. 한편,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 속편이 없다면 요나는 독자들의 상상 속에서 익사하거나 상어밥이 되고 말았겠지요. 그러나 이 속편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영화의 본 줄거리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편은 하나의 서막에 불과했고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는 지금부터라는 것이지요.


2. 의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뱃사람들이 요나를 들어 성난 바다로 던졌을 때 요나는 누가 보든지 이제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요나는 꼼짝없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무슨 희망이 더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요나가 바다 속에 빠지자 기다리고 있던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요나를 덥썩 물어 삼켜버렸습니다. 엎친 데 덥친 격입니다. 외견상으로 보면 영락없이 상어밥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을 새로운 시작으로 만들고 계셨습니다. 그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일이었습니다. 요나가 상어밥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요나를 심판하려 하셨을 때 이 세상의 아무 것도 요나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뱃사람들이 요나를 살리기 위해서 아무리 애를 써서 노를 저었지만,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지요. 비록 하나님이 요나의 죄에 대하여 요나를 심판하셨지만, 또 한편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결코 의인을 멸망시키는 심판이 아닙니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 악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도 죄악이 관영한 이 땅 위의 생물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던 불심판도 그들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심판하셨지만, 그것은 다윗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침대가 눈물에 둥둥 떠다닐 정도로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심판을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 막혔던 담을 허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 셈입니다. 악인들에게는 심판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는 비가 되겠지만, 의인들에게는 땅을 더 굳게 해 주는 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대기시켜 놓으셨다가 물에 빠지는 요나를 삼키게 하셔서 요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던 페니키아 사람들의 배를 떠나서 견고하고 안전한 하나님의 잠수함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요나서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동안이나 죽지 않고 살 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또 고래나 상어가 아무리 커도 식도가 좁기 때문에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아르헨티나 근방의 바다에 사는 스펌 웨일이라는 고래는 식도가 아주 넓어서 사람도 삼킬 수가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고래에게 삼키웠다가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도 보고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이 스펌 웨일이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지요. 우선 요나를 삼킨 것은 물고기였고,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다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이 물고기라는 말을 물에 사는 동물로 해석해서 고래도 포함시켜야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확인되고 우리의 이성에 용납되어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베푸신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믿을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일본의 유명한 우찌무라 간조라는 신학자에게 어떤 학생이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성경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수용이 안 되는 기적을 제거하고 나머지 부분만 믿으면 기독교는 성립이 안되나요? 예컨대 산상수훈 같은 것만 강조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젊은이, 성경에서 기적을 다 제거하면 꼭 두 가지가 남네. 바로 성경책 앞표지 한 장과 뒷표지 한 장이 남게 되지."


요나를 삼킨 것이 스펌 웨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던 물고기 하나를 하나님께서 특수제작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준비하셨다고 했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행위를 우리의 능력과 이성의 범주 안에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그래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인 이 성경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3. 보상받은 고통


그렇게 해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게 되었는데, 비록 그것이 요나가 물에 빠져 죽는데서 건져준 잠수함이긴 했지만, 안락하고 편안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캄캄했겠지요. 사흘 동안이나 캄캄한 속에 있었다는 것은 어지간한 고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째날에 만드신 것이 빛이었어요. 빛이 없는 곳은 어둠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빛과 어둠이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라고 노래했습니다. 반면에 잠언 4:19절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빛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고, 사람들이 악을 행함으로 어두움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했다고 말합니다.


빛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하나님께 계속해서 저항하는 바로의 애굽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재앙 가운데 하나가 사흘 동안의 흑암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도 해가 그 빛을 잃고 세 시간 동안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어둠은 두려움, 죄악, 심판, 죽음 등을 상징합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죽음같은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말씀하셨지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지낸 사흘은 요나의 생애에서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가장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명을 새롭게 하고 다시 헌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더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환난과 고통이 이처럼 우리를 더 성숙하고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뜻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했던 욥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