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나를 바다에 내던지시오!(욘 1:11-12)

공 상희 2007. 1. 22. 21:18
나를 바다에 내던지시오!(욘 1:11-12)  

 

나를 바다에 내던지시오!(욘 1:11-12)


1. 요나: 재난의 원인 제공자, 구원의 열쇠를 가진 자


난데없는 재난을 만난 뱃사공들은 그 재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아름답게 지은 신전에 계셔서 사람들이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를 즐기는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두꺼운 신학서적 안에 계셔서 학자들의 연구의 대상이 되는 그런 신도 아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하늘 저 멀리 계셔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그런 신도 아니었습니다. 그 뱃사공들이 만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지시하시는 신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 바로 곁에까지 오셔서 때로는 폭풍으로 심판하시는 신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운명이 완전히 그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 뱃사공들은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너무나 강한 분이라서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고, 그분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거나 도망할 수도 없다는 것을 지금 너무나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재난을 벗어날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폭풍은 더 심해지고 파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 재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재난을 면할 방법은 오로지 그 하나님에게서밖에 찾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뱃사공들이 어떻게 그 하나님께 접근해서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이 뱃사람들은 하나님과 안면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창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로 그 배 안에 하나님과 안면이 없는 이 뱃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요나였지요. 오직 그 요나를 통해서만 이 뱃사람들은 이 재난을 면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좀 헷갈리지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가는 바람에 애꿎은 뱃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뱃사람들이 죽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안면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요나입니다. 지금 뱃사람들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 요나라는 사람은 바로 그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뱃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만큼 이 요나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기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아우성인데 그 난리법석 가운데서도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었더라면 이 요나를 도사나 신선으로 알았겠지요.


지금 이 뱃사공들이 요나 때문에 자기들까지 죽게 되었다고 요나를 비난하거나 원망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만약에 그랬다면 요나는 이 뱃사람들에게 진즉 맞아죽었겠지요. 그 반대로 이 뱃사람들은 요나에게 감히 손도 대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그 하나님의 선지자라는데, 만약에 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해친다거나 했다가는 그 무서운 하나님에게 또 무슨 벌을 받게 될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것뿐만 아니지요. 그들이 보기에 요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고 죽어야 한다면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요나가 아니라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을 이미 깨달았잖아요? 요나는 비록 이 재난의 원인제공자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재난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 내가 죽어야 여러분이 삽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요나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요나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 때문에 이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이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요나에게 따지는 게 아닙니다. 요나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지요? 요나에게서 구원의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구원의 방도를 알려줍니다. "당신들이 여기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저 바다에 내던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때문에 여러분이 이 폭풍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자기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라고 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본문에 관한 설교를 몇 편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의 말에 대한 해석들이 다양하더군요. 요나가 "내탓이오" 하면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고, 이 요나의 말 속에는 무서운 함정과 자기 기만이 숨어 있다는 해석도 있더군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요사이 말로 하면 "에라 죽어버리자. 내 한 사람 죽어버리면 되지 뭘 그래!" 그런 식으로 판을 깨는 극단적인 발언이요, 고도의 책임회피성 발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요나에게 그런 욱하는 성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요나서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보면 "차라리 날 죽여 주시오!" 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게 아니지요. 요나는 하나님이 거기까지 쫓아오셔서 심판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참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심판에 자신을 맡깁니다. 완전한 항복이지요. 여기서 요나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항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도망이나 꾀가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하나님을 속이려 했던 자신의 죄가 드러났고, 완전한 항복 이외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폭풍은 요나에게만 해당되는 심판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뱃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재난이 되어 있습니다. 요나의 말을 다시 한번 보세요.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나 때문에 죄없는 여러분까지 죽게 되었습니다. 이 폭풍은 여러분을 죽이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나 때문에 생긴 폭풍입니다. 나를 바다에 빠뜨리기 위해서 온 폭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바다에 빠지기 전에는 이 폭풍이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이 폭풍이 멈출 것이고, 여러분은 목숨을 걸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때문에 애꿎은 뱃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요나에게 빨리 결단을 내리라고 재촉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심판에 순종해서 바다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요나가 결정을 미루는 만큼 뱃사람들의 고통도 커지는 것입니다.


요나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것은 누가 한 말입니까?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한 고위당국자 모임에서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한 말이었습니다. 가야바는 눈에 가시 같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핑계로, 국론을 통일하고 로마가 자꾸 간섭할 수 있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유익하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그러나 가야바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것은 '예수께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한 것'(요 11:52)이었습니다.


여기서 요나 한 사람이 죽어서 그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거리가 멀지요. 요나는 자기 잘못으로 벌을 받는 것이고, 그 뱃사공들은 그 폭풍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전혀 다른 의도로 말했던 가야바의 말이 결국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된 것처럼, 전혀 다른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 요나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 것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많이 있지만, 가장 뚜렷한 것이 바로 이 요나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표적을 보이라는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내가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3. 하나님이 거기까지 쫓아오신 이유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왜 하나님이 거기까지 쫓아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아무리 좋은 수를 쓰고 기발한 작전을 구사해도 하나님이 한 수 위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말을 안듣고 도망가는 이 미운 녀석을 붙잡아서 단단히 혼을 내주기 위해서였습니까? 물론 둘 다 이유가 되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요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사랑하셨기 때문에 벌을 내리셨다는 말입니까? 저는 지금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멜랑꼴리한 사랑 얘기처럼 비논리적이거나,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는 옛날 어른 말씀처럼 요즘 신세대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차원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바다 한가운데까지 쫓아오신 것은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요나를 찾아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요나가 다시스까지 도망가는 데 성공해서 거기서 다른 사업을 했든지 정착을 하고 살았더라면 요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나는 평생동안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한 죄인으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내려가고 있는 요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급히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설령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폭풍을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올바로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훨씬 더 밝아질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인생을 함부로 살아갈 수가 없겠지요.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인간의 불순종과 태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하시려고 계획하신 일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악독으로 가득찬 니느웨에 경고를 하셔서 회개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요나의 거부로 인해서 큰 차질을 빚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니느웨 사람들의 운명이 요나의 손에 달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회개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렇게 바다 한가운데까지 쫓아오셔서 요나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미련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위대하고 크신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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