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범인을 찾아라(욘 1:4-10)

공 상희 2007. 1. 22. 21:18
범인을 찾아라(욘 1:4-10)  

 

범인을 찾아라(욘 1:4-10)


1. 고수와 하수


여러분,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 보신 적이 있으시죠?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대국을 하면 모르겠지만, 고수와 하수가 대국을 하면 어떻습니까? 하수가 아무리 머리를 쓰고 꾀를 짜내도 고수가 다 내려다봅니다. 수가 뻔히 보이는 것이죠.


요나와 하나님이 대국을 합니다. 요나는 꾀를 써서 하나님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007 작전보다 더 긴박하고 치밀하게 일을 성사시켰습니다. 요나가 지금 바다 한가운데 떠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며칠만 지나면 요나는 바다 저쪽 땅 끝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슨 수로 요나를 찾을 수가 있겠어요? 요나를 놓쳐버린 하나님은 발만 동동 구르고 계시겠지요. 하나님과 장기를 두던 요나가 "장군!"을 큰 소리로 부른 격입니다. 그러나 이 게임은 이창호와 바둑학원에 다니는 꼬마의 게임도 안됩니다. 꼬마가 아무리 좋은 수를 쓴다 한들 이창호가 그 수에 넘어가겠어요?


마침내 하나님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설마 바다까지 쫓아오시겠나 했던 하나님은 요나가 욥바로 가서 배표를 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을 다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오게 되자 하나님이 행동을 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바다에 내리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마치 창을 던지듯 바람을 던지셨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애꿎은 사공들입니다. 이 사공들은 당시 항해술이 뛰어나 바다를 제패했던 페니키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식민지인 다시스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싣고 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항해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귀하고 값진 것을 많이 싣고 그들의 꿈과 행복을 향해 항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난데없는 폭풍을 만나게 되었으니요.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배가 깨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영화 타이타닉 보셨지요? 배가 깨지고 가라앉게 되니까 사람들이 어떻던가요? 그 공포와 다급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 페니키아 사람들의 배는 지금 거대한 폭풍과 파도 속에서 거의 깨지게 될 만큼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꿈과 행복을 찾아 나선 항해가 한순간에 죽음과 공포의 항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 다급하고 두려운 순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들의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과 싣고 가던 물건들을 바다에 내던져서 배를 가볍게 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행동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보세요. 죽게 생겼으니까 신을 찾고 기도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위기가 오고 고난이 닥칠 때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기가 심각할수록 우리의 기도도 간절해지게 되지요. 그래서 위기는 우리의 좋은 기도학교이기도 합니다. 위기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에 닥쳐서가 아니라 평소에도 기도할 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훨씬 더 좋겠지요.


이 뱃사공들은 또 한편 싣고 가던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값지고 귀중한 것이라 해도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꿈을 실현시켜 주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던 보물들이 지금은 오히려 목숨을 더 위태롭게 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나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지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우리는 지금 생명의 존엄성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 아닙니까? 교회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2. 진짜와 가짜


배는 온통 공포와 소란으로 아비규환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그 배의 선장이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소란 가운데서도 한 사람이 배 밑층에서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배를 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배가 조금만 흔들려도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닥에 누워 있어도 배가 흔들리는 대로 굴러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나운 폭풍 가운데서 요나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안심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서 요나는 고민과 스트레스로 며칠 밤을 꼬박 세웠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고 긴장도 풀려서 그동안 못잔 잠을 실컷 자고 있었겠지요.


이 폭풍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공들은 지금 죽음의 길목에서 저렇게 아우성인데, 정작 이 폭풍의 원인 제공자인 요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태평스럽게 잠이나 자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정작 잘못해서 회개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모든 것을 획일적인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때때로 우리의 잘못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에 얼마나 민감하고 둔감한가에 따라서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지겠지요. 자기 눈에 들어있는 통나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잘 찾아내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주변에서도 항상 혹시 내가 잘못한 일은 없는지,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은 아닌지 늘 살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세상 물정에 캄캄한 요나에게 선장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행동지침을 알려줍니다. 요나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다른 사공들처럼 자기의 신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장으로서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신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큰 소득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시 이 엉뚱한 친구의 신이 우리를 구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하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신과 자신의 철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가치가 용납되어야 하고 모든 종교가 똑같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는 인간이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허구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갈등을 면하기 위해 미봉책으로 받아들인 상호 인정과 존중이 진리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누구의 신이 진짜 하나님인지 대결을 벌일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신이 진짜라고 우긴다고 해서 그 신이 진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와 바알이 모두 진짜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가짜일 수밖에요. 요나가 탄 배에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그 모든 신들이 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그 폭풍에서 그들을 구원할 분은 그 폭풍을 보내시고 콘트롤하시는 요나의 하나님뿐입니다. 그 폭풍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사실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누가 진짜 신이든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위기가 닥쳐왔을 때,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는 진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가짜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가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인생이 이렇게 살다가 그저 죽어 없어지는 것이라면 진짜 신을 섬기든 가짜 신을 섬기든, 아예 신을 거부하며 살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진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선포하고 외쳐야 할 메시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배의 사공들처럼 가짜 신들을 헛되이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누가 진짜 범인인가?


그 다음 단계에서 사공들이 생각해 낸 것은 누구 때문에 이 재앙이 왔는지 범인을 색출해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특별검사를 임명할 수도 없고 탐정을 고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특별검사나 탐정보다 더 효과적이고 신속한 범인색출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비뽑기였지요. 그래서 누구든 한 명은 뽑히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중에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도로 치라." 예수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슬슬 도망가버렸지 않습니까? 누구든 이제 제비에 뽑히기만 하면 변명도 필요없고 변호사도 필요없이 범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비에 뽑힐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누가 제비에 뽑힐까?' 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가 뽑히면 어떡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죄를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 그때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그때 그런 일을 안 했더라면, 혹시 그 일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전통의 교회에서 중요한 한 가지 구호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꼭 그런 제비뽑기를 앞에 두고 자신의 죄를 돌이켜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드러내놓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늘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가 걸렸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세요. 혹시 내가 걸리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을 졸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자신을 차별화합니다. '역시 나는 아니었어. 내가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바로 당신이었잖아! 당신 때문에 죄없는 우리까지 다 죽을 뻔했어.'


이제 요나를 가운데 앉혀놓고 취조를 합니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사람들은 요나가 살인을 했거나 아니면 도둑질을 하고 도망치는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도둑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적모의를 하다가 들통나서 도망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그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치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솔직히 자기들은 모두 큰 잘못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살인한 사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도둑질을 했거나 남의 아내를 빼앗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제비에 걸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걸리는 것을 보고, 제비에 걸린 사람은 자기들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비에 걸린 사람은 자기들 생각에 아무런 죄도 지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어떤 신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도망을 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겨우 그것 때문에 이 바다 한복판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큰 벌을 내리는 신이라면, 자기들은 이미 살았다 할 것이 없는 목숨들입니다. 자기들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죄들을 많이 지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신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은 바다의 신도 있고, 나무의 신, 태양의 신, 별의 신... 이런 정도인데, 이 신은 그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다스리는 신이라고 하니 자기들의 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높은 신인 것이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 난 이 뱃사공들은 "어쩌자고 그런 일을 했습니까?"라고 하면서 그저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감히 나서서 요나를 비난하지 못했습니다.


고수와 하수의 게임은 어차피 그 결과가 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수의 눈에는 자기가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요나가 꼭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일격에 그만 초죽음이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줄 착각하고 배 밑칸에 내려가 태평스럽게 잠을 자던 요나는 선장이 다급히 깨우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거기까지 쫓아오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의 하나님을 소개했던 것이죠.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도면밀해도 하나님을 따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