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하나님의 국제감각(욘 1:1-3)

공 상희 2007. 1. 22. 21:16
하나님의 국제감각(욘 1:1-3)  

 

하나님의 국제감각(욘 1:1-3)


우선 이 요나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가장 홀대를 당하는 책입니다. 그들은 이 요나서를 역사적인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전설이나 우화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이나 살아 있다가 다시 나왔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 이외의 역사적 문서에서 니느웨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백 년의 히브리 정경역사가 이 요나서를 역사적 사건의 기록으로 간주해 왔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요나를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요나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이성에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고 성경에서 삭제해야 한다면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삭제해야 할 것이고,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한 권의 도덕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요나서의 시대적 배경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치세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과거 다윗과 솔로몬이 차지했던 때의 영토를 모두 회복해서 북왕국은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영토가 확장되고 나라가 부강하게 되니까 사람들의 관심이 밖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국제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민족집단이 민족주의라는 틀을 깨고 세계주의로 비약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민족주의는 그 민족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세계의 무대로 나왔을 때 그 민족주의가 인정을 받고 의미가 있는 것이죠.


우리 한민족의 경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수한 민족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외국에 대해서 굉장히 배타적인 노선을 취해 왔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중국사람들의 경우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가서 3대째 살게 되면 그 지역을 상권을 장악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세계 유수한 도시들의 한복판은 중국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통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입니다. 그래서 중국사람이 한국에서 3대째 살아봐야 짜장면 집밖에 못한다고 합니다.


또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창씨개명 강요와 우리말 사용금지 등 민족 자체의 말살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또 강대국에 의한 국토의 분할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는 것보다 우리 것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생존할 수 있다는 아주 소극적인 자기 방어의 논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제하에서 가장 큰 매국적인 행위는 일본으로 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일본사람이 된다는 의미였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전혀 다른 시대상황에서도 살아남아 우리 자신을 얽어매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에서 강제로 사임해야 했는데 그 이유가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학장은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나 봐요. 그거야 우리 신학교니까 우리 나라 사람이 학장이 되어야지 미국이나 일본사람이 학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겠지요. 그런데 교수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들입니다. 미국에 오래 계시다가 오신 교수님이 학장이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분이 그 동안 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학교가 시끄러워지고 결국은 이분이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정직하지 않게 처세한 것은 잘못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국제적인 감각이 뒤떨어진 규칙이 잘못되었고 우리 나라의 제도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우리 스스로 우수하다고 외쳐봐야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허공으로 사라지는 공허한 외침밖에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뉴질랜드 신문에서 김종필 총리에 대해 기사를 쓰면서 김정일 사진을 실었다면서요? 남들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알려야죠.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나와도 영어 한마디 못하는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제가 싱가폴에 한번 가보고 놀란 것은 초등학생도 영어를 하고 시장에서 김밥 파는 아줌마도 다 영어를 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도 영어를 많이 쓰도록 건의해야겠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대통령이 어느 국제대회에 다녀오더니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이중국적이라는 말에서도 부정적인 의미가 없어지겠지요?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국제적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많이 나가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많이 나가야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또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해외여행을 가든 유학을 가든 이민을 가든 많이 나가야 돼요. 그래서 이 뉴질랜드에 오신 여러분은 정말 애국자들이요, 우리 나라를 위해서 큰 공헌을 하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어느 이민컨설팅 회사의 광고에 "이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처음에는 웃고 말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웃을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지요? 아브라함도 내보내시고, 야곱도 먼 곳으로 보내셨어요. 요셉도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밖으로 내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뉴질랜드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여기 와서 요셉처럼 이 나라의 총리가 되거나 에스더처럼 왕비가 되는 일까지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 우리 대통령이 오셔서 교민들에게 "여러분의 자녀들을 훌륭한 뉴질랜드의 시민들로 성장시켜 달라"고 하셨지요? 그것이 우리를 낳아준 조국과 우리를 받아준 이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국제적인 감각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셨습니다. 그것은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니느웨는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가에 세워진 고대의 도시국가였습니다. 나중에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지요.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니느웨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나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국제적이고 우주적인 주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제적인 구원과 사랑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은 참 신이 아니고 자기들이 섬기는 여호와만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과 만국을 다스리시는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다른 민족에게까지 구원과 자비를 베푸실 줄은 몰랐습니다. 요나의 국제적인 감각과 하나님의 국제적인 감각이 그만큼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시려고 하는 까닭은 니느웨의 죄악상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이었고,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니느웨의 죄악이 어떤 것인지 언급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유역 농경사회의 중심지로서 풍년을 기원하는 우상종교가 번성했었고, 또 전쟁에서 상대방에게 잔인하기로 유명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죄악상이 극도에 달한 니느웨를 보시고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은 그 니느웨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해 주신 탕자의 비유입니다. 집안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고 아예 가문과 인연을 끊은 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이 아들을 아버지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크게 기뻐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죄악이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한다면 그 큰 죄악을 모두 용서하시고 기뻐하실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고 죄악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시면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면 크게 기뻐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아주 잘했을 때보다 우리가 잘못했다가 그것을 회개할 때 더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일부러 잘못한 다음 회개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우리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만약 우리가 잘못을 했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세월이 흐른다고 잊혀지거나 하나님이 깜빡 잊어버리고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못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 니느웨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가서 회개하라고 외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뭔가 실수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 곳으로 도망을 가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국세청 차장을 지낸 사람이 미국에 도망가 있는 바람에 세풍 수사가 제대로 안됐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은 한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미국으로 도망가면 잡히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요나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더러 동쪽 내륙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니느웨는 800km 이상 떨어진 먼 곳입니다. 하나님이 국제적이 되셔서 그렇게 먼 곳까지 커버하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요나로서는 하나님이 따라올 수 없는 더 먼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이 동쪽으로 가라고 하시니 요나는 서쪽으로 갑니다. 동쪽은 내륙이지만 서쪽은 바다거든요. 요나가 가려고 했던 다시스는 지금의 지브롤터 근방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스페인 끝, 지중해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지중해의 이쪽 끝에 살고 있던 요나는 세상의 끝까지 도망을 가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요나는 성경공부를 많이 안한 것 같아요. 시편 139편 7-10절에 보면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거든요.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바다 끝까지 도망가면 하나님도 포기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담이 되겠습니다만,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잘 알아야 실수도 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한 친구의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어요. 그래서 종종 놀러가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친구 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하면서 성경말씀에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가다가 소가 뛰니까 수레를 몰던 사람이 법궤가 흔들리는 것을 막으려고 붙잡았더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죽이셨대요. 그런데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요. 이 친구 어머니가 이단 교회에 다니면서 누가 지어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겼죠. 그런 이야기가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고, 찾아서 보여주면 어머니 말씀이 다 맞는 것으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 어머니가 어디에 나오는지 모르겠대요. 그래서 제가 당당하게 이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제가 성경을 읽다가 그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다시 돌아온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다가 그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더란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얼마나 부끄럽고 하나님께 죄송했던지요. 제가 성경을 조금만 더 알았어도 그런 실수는 안 했을 것 아닙니까? 요나도 성경공부를 제대로 했더라면 바다 끝까지는 하나님이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성경을 많이 읽읍시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께 니느웨 가는 기차표를 사러 간다고 말씀드리고 나와서 몰래 항구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다시스 가는 배가 막 떠날 참이에요. 이렇게 재수가 좋을 수가 있습니까? 다시스 가는 배가 한 달에 한 번 있었는지 보름에 한 번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주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요나는 얼른 표를 사서 배에 올라탔습니다.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함정인 줄 요나는 몰랐단 말이지요. 우리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닌데 일이 너무 잘 풀린단 말이죠. 그럴 때 '조금만 더하고 돌아오지, 하나님이 좀 봐 주시나 봐,'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럴 때는 요나를 생각하세요. 진짜 혼을 나기 위해서는 바다로 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요나를 혼내시려고 바다로 데려가시는 것이지, 일이 잘 풀려서 요나가 탈출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짜 혼나기 전에 우리는 돌아와야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국제적인 것보다 더 국제적이시고, 우리가 지혜로운 것보다 더 지혜로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