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은 구약의 중심 무대였던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집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없었던 장례 관습이었다. 이런 관습은 고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화장이 교회에 대항하는 무기로까지 여겨졌다. 그 사례로 177년 이른바
프랑스에서 저질러졌던 ‘리옹 사건’을 들 수 있다. 순교자의 시신을 화장해 그 재를 론강에 뿌린 것으로 기독교인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조롱하기
위해 저질러진 사건이다. 카를 대제는 784년 화장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해 당시 화장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암흑의 전성기로 불렸던 중세 후기까지 교회사적 입장에서 화장 흔적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이런 뿌리 깊은
관습은 17세기부터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서서히 도전을 받기 시작한다. 1797년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화장이 법률로 제정돼
합법화가 시도됐다. 여기에 힘입어 1848년 프랑스에서 화장에 대한 정책이 수립됐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는 유물론자인 폭트(Vogt)와
몰레쇼트(Moleschott)가 화장운동에 앞장섰다.
이런 풍조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1874년 영국에서는 화장협회가
설립됐고 지멘스(Simens)는 근대적인 화덕을 건조한 후 1876년 고타지역에 최초의 화장터를 개설했다. 이는 화장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출발점이 됐다.
1905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추세에 힘입어 ‘화장을 위한 무신론자 협회’를 결성했고 1920년
프롤레타리아 무신론자들은 교회가 화장에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화장에 대한 사회적 기류는 교회도 거부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25년 독일의 구
프로이센 연합교회가 화장에 대해 구속(금기)에서 자유로 입장을 바꾸고 말았다. 멈출줄 모르는 화장 확산에 교회는 더 이상 ‘화장의 묵시적
금기’라는 마지노선을 지킬 힘을 잃고 말았다.
1955년 독일 루터교연맹은 ‘생활규범’이란 성도의 교리총칙을 통해 드디어 화장에
대한 견해를 전 세계 교회에 선포했다. “교회는 매장과 마찬가지로 화장도 공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화장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나 무신론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옹호됐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육체에 영혼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육신의 부활을 꿈꾸지
않는다. 따라서 숨이 끊어진 시신은 불에 태워 물질계로 되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꿈꿨기
때문에 시신 훼손은 부활에 나름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매장에 집착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교연맹이
화장을 수용한 것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때 비로소 뒤따랐기 때문인 것으로 신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남병곤
편집위원
'◐신 학&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1) 생명유지 핵심유전자 처음부터 존재 (0) | 2006.06.28 |
---|---|
성서적 장례문화 (4) ‘죽음에 관한 설교’장례문화에 영향 (0) | 2006.06.28 |
성서적 장례문화 (3) 火葬도 흙으로 돌아가는 것 (0) | 2006.06.28 |
성서적 장례문화 (2) 시대마다 부활사상 깊숙히 개입 (0) | 2006.06.28 |
성서적 장례문화 (1) 장례방법은 부활과 무관… 매장 강요안해 (0) | 2006.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