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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장례문화 (2) 시대마다 부활사상 깊숙히 개입

공 상희 2006. 6. 28. 09:42
성서적 장례문화 (2) 시대마다 부활사상 깊숙히 개입




고대교회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해 제물을 바치고 기도 드리는 행위로 죽은 자에 대한 의무와 경건을 표시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어록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죽은 사람을 위한 보살핌에 관하여’에서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의 유익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거룩한 관례에 따라 제단에 있는 제물과 우리의 기도와 구제의 제물을 통해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해 탄원한 바로 그것이 죽은 자들에게 유익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장례는 단순히 시신을 치우는 일이 아니었다. 교회는 장례를 기독교의 한 계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같은 장례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기독교 이전에 긴 세월 동안 전해져왔던 장례 풍습이 고대교회에까지 별다른 여과없이 받아들여진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묘지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났다. 가난한 사람들은 평지로 된 공동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무관과 벽돌로 된 무덤이었다. 하지만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개인묘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갖 장식으로 무덤을 꾸몄다. 당시에도 무덤은 생전의 신분과 부를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개인묘지에도 최상급 중급 하급 등의 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상급은 장식이 석재로 돼 있었으며 중급은 아르코졸 무덤이라고 해서 반원형의 화살 모양으로 쌓아올렸다. 하급은 측면이 길고 좁은,단순하고 흔한 무덤을 말한다.

이와 함께 신분이 높은 자의 무덤은 교회 안에,낮은 자는 교회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교회는 왕후의 묘를 교회 안에 두고 있다. 이 교회의 원형으로 된 무덤 건축물 안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석관이 12사도의 가상 무덤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순교자의 무덤 등은 일반적으로 신성한 장소로 인식됐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성유물에 대한 숭배사상,또는 성자의 유물숭배로 발전했다.

중세교회로 넘어오면서 장례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로 발전했다. 이는 마침내 로마의식으로 정착돼 위령미사로 자리잡았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암흑기에 접어든 것이다. 위령미사는 △발인하기 전 고인을 축복하고 보내는 교회의식과 △상가에서 교회로 시신 운구 및 시신을 다루는 예식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미사 △교회에서 사죄 △매장 후 3일,7일,30일째 되는 날과 매년 죽은 자에 대한 기념일 선포 등 그야말로 사자에 대한 온갖 경의가 포함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죽은 자에 대한 교회의 견해다. 사자도 산 자와 연장선에서 인식했기 때문이다. 관에 성수를 뿌리고 향을 피운 뒤 죽은 이를 묻으면서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성서 구절을 낭독했다. “인간이여,너는 흙이며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

사자를 ‘인간이여’라고 치징했고 ‘기억하라’는 명령어를 사용한 것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죽은 자를 ‘영원의 문’까지 데리고 가는 의식에 충실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이르러 교회는 죽음 이후에도 기도와 행위로 사자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관념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1517년 면죄부 논쟁에서 루터는 95개 논제 중 제22항 이하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대축일 전야의 철야기도,영혼을 위한 미사 의식 연옥,그리고 죽은 이들을 움직이게 하고 해치우고 순전히 없애버리는 다른 모든 요술과 같은 교황적인 일에 혐오를 가지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바로 이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위령미사와 장례미사가 완전히 제거됐다. 루터의 주장대로 이 시대에 접어들어 비로소 무덤에서 슬프고 괴로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죄의 용서와 안식,영혼의 휴식,생명과 부활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복음적인 장례에는 △부활에 대한 공식적인 기별 △사랑과 친절에 대한 증거 △각자의 죽음에 대한 훈계 △죽음의 준비에 대한 권면 등 4가지 사항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교회사적 입장에서 장례에 대한 신학적 흐름은 이처럼 시대마다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고대·중세·종교개혁시대를 통시적으로 볼 때 장례문화는 당시 죽음에 인식과 부활 사상이 깊숙이 떠받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움말 주신 분 △김영호 연구원(한국표준과학연구원) △김문기교수(평택대 신학과) △박두환교수(나사렛대 신학과) △박종수교수(강남대 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