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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를 따라가자 (벧전 2:18-21)

공 상희 2019. 10. 27. 06:41

자취를 따라가자 (벧전 2:18-21)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시간에 “자취를 따라가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간다면 온전히 승리하고 은혜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천국이 아니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마땅치 않는 온갖 부당한 일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지금도 인도에는 카스트라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 1계급은 바라문이라 해서 사제계급이고, 제 2계급은 왕족, 무사계급, 제 3계급은 농민, 상인 등의 일반 서민들이고, 제 4계급 피정복민으로 이루어진 노예계급입니다. 그런데 카스트 계급에도 들지 못한 계급이 있는데 하리잔이라는 계층입니다. 이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이라 해서 그들과는 접촉조차 해서는 안 되는 천민입니다. 이들은 침조차 땅에 뱉어서는 안 되기에 항아리를 목에 걸고 다녀야 하고, 자기 발자국조차 내서는 안 되기에 빗자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으로 달리트라고도 부릅니다. 다 힌두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또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살던 시대입니다.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자유인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거나 오랑캐들을 노예로 사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습니다. 노예를 보호하는 법도 없었고, 도주하다 잡힌 노예는 낙인이 찍히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으며, 노예의 처분과 그 생명은 완전히 주인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노예에게 가하는 벌은 노역, 채찍질, 낙인, 관절이나 뼈 부수기, 십자가형 등 매우 무자비했고, 경기장에서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지거나, 기름에 젖은 망토가 씌여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슬픔뿐인 그 사회에서 어떻게 은혜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 부당함을 복으로 만들라고 교훈합니다.


어떻게 부당함을 복으로 만들까요?


1. 내가 죽고 순복하는 훈련으로 삼는 것입니다.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노예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지만 당시 교회에서는 노예들도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했고 직분까지 주었습니다. 주인보다 교회에서 더 인정받는 일군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에게 “내가 기독교로 개종했으니까 이제 하나님 말씀은 들어도 주인 말은 안 듣겠다!”하지 말고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권고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도의 모습은 원래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섬김의 삶이셨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일이라면 발상의 전환을 해서 그것을 신앙훈련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부당한 현실은 우리에게 내가 죽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훈련장으로서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불평하고 불만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주인에게 벌을 받을 것이고 신앙도 다 내버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현실을 육으로만 보면 슬프지만 영으로 보면 은혜입니다.


그래서 19-20절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여기 “아름답다”는 낱말이 2번 나오는데 그 뜻은 ‘은혜라.’는 뜻입니다.


애매히 부당하게 고난당해도 나를 위한 훈련으로 생각할 때 은혜가 됩니다. 우리에게서 아무 소리 나오지 않도록 죽어지고 더 죽어집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당한 현실을 신앙훈련을 위한 큰 은혜로 여기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더 죽어지고 순종하고 충성하십시다. 고난의 학교처럼 좋은 훈련소는 없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아주 귀한 교훈입니다. 주님이 그러셨습니다. 22절대로 주님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셨지만 주님은 원수들에게 억울하고 애매하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걸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을 위해 해드린 것 없는데 예수님을 생각하며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육신에서는 싫어 하지만 우리 영혼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날엔가는 반드시 높여주실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했으나 또 다시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더 귀한 하나님의 섭리려니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불만 불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트레스로 병들어 죽었든지 아니면 큰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편 105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시105:17-22) 이처럼 반드시 높여주실 날이 옵니다.


3. 사명자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24-25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무고한 고난 같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사명의 고난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고난 가운데 두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7:17-19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쓸 사람은 풀무 가운데서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쓸 나라와 민족도 그렇게 하십니다. 풀무는 쇠를 녹이는 용광로입니다. 흰옷 입은 거룩한 성도가 그냥 나옵니까? 계7:13-14에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성도도 그런데 하나님의 종을 연단시키는데 그냥 됩니까? 불속에서도 시키고 물속에서도 시키십니다. 조종사 하나 양성하는데 20억이 드는데 F16 정도 몰려면 수 십 억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종사 한 사람이 전진에 떨어지면 그 조종사를 구하려고 특수부대가 이동합니다. 쉽게 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쓰실 만한 종들 한 사람 만드는데 하나님의 수고가 보통이 아닙니다. 모세 한 사람 쓰시려고 애굽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80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림 받는 하나님의 종 하나 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편 16편에 나오는 다윗도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지은 기도시인데,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 대군을 풀어 샅샅이 뒤졌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다윗이 나타나면 곧바로 신고하여 언제 잡혀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가운데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절대 믿음, 절대 물음. 절대 기도, 절대 찬송, 절대 사랑, 절대 지혜,,,


사명을 회피하면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고히 잡혀서 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는데 처음에는 너무나 억울해서 나간 다음에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만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 성경 읽고 감동 받아 기도하다가 성령 받아 하나님의 쓰시는 종이 되기도 합니다.


요나도 사명을 회피하려다가 물고기 뱃속에 던져져서 사흘 동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사명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리면 빨리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요, 가장 큰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어찌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데 어찌 뱀을 주겠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십시다. 그러므로 부당한 가운데 슬픔 가운데 있다면 슬퍼하지 마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시고, 더 훌륭한 신자 만드시려고, 더 큰 일군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합당하든지 부당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앞서 가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며 온전한 신앙훈련해서 더욱 아름답고 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