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작아도 큰 것 (잠 17:1-3)
이 시간에 “작아도 큰 것”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수수께끼가 생각나는 제목입니다. 작아도 작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요? 겨자씨인가요? 씨앗은 작지만 자라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니까요? 베들레헴일까요? 마2:6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했으니까요?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관점에서 작아도 작지 않는 것, 작아도 큰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작아도 큰 것은 무엇일까요?
1. 감사하는 것입니다.
♣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하십니다. 행복은 많은 것에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 백 낙찬 선생은 "인생을 돈이나 부귀로서 낙을 삼는다면 좀처럼 낙을 누리지 못한다." 하면서 “만족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1절 말씀에서 감사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고기가 집에 가득하지 않아도,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4:15에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십니다. 감사하면 은혜가 더하여 넘칩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은혜가 우선은 작아도, 감사하면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복은 꼭 많이 받아야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가졌다는 큰 재물, 남이 받았다는 큰 능력, 남이 간증하는 큰 체험, 큰 은사 받지 못했어도, 감사하면 더 큰 은혜를 누립니다.
♣엡1:4-6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옥 불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택하여 주신 것만 생각해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자들이었는지 생각하세요. 빌라델비아 교회를 생각해 보세요. 욕심 버리세요. 욕심이 많아서 감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욕심 버리고 감사하면 은혜가 커집니다. 나 같이 죄악 많고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택함을 받은 것만도 감사해서 늘 감사하면 그 감사로 인해서 우리 믿음이 온전해지고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2. 겸손하는 것입니다.
♣2절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하십니다. 여기 “종”이 나옵니다. 당시 종이란 권리란 없고, 의무만 있는 하찮고 불행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전에 우리나라에 반상제도가 있을 때, 상인의 집에 자손이 출생하면 기뻐하지 않고 울었습니다. 너도 부모를 잘못 만나 대를 이어 종이 되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종은 슬기로웠습니다. 동화에 나오는 이솝과 같은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괴팍하고, 오만하고, 방탕한 구제불능의 주인의 아들을 다스렸을 뿐 아니라, 주인 아들 형제들 축에 자기도 끼어 그 유업을 나누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인과 그 자녀들에게 영웅이나 보배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원리원칙이나 강압으로만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 지혜를 겸손이라고 봅니다.
지혜가 아니고는 2절의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고 보면 지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겸손보다 더 큰 덕목은 없고 겸손보다 더 지혜로운 것은 없습니다. 겸손하면 주인도, 주인의 아들도, 다 다스릴 수 있고, 주인의 재산까지도 얻을 수 있듯이, 우리가 겸손하면 우리의 완악한 마음도 다스려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기업, 온갖 아름다운 은혜와 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낮추어 보세요. 은혜와 복이 넘치지 않다면 더 낮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3. 연단 받는 일입니다.
♣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하십니다. 연단이란 훈련입니다. 훈련은 강제성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자행자지하던 사람을 강제적으로 훈련시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군에서 뭐가 힘듭니까? 반복이 힘듭니다. 선착순해서 달려갔다 왔는데 또 반복 또 반복 심장 멈춥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계속 반복훈련입니다.
원래가 훈련은 반복입니다.
♣하나님의 연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도가니와 풀무는 쇠를 달구거나 녹이는 것입니다. 그 연단이 혹독합니다. 하나님 두렵지 않으면 맘대로 해보세요. 하나님의 연단 만만히 보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우리가 순종해야지 하나님의 연단이 철회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전에는 “연단”이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기도 싫고, 당해도 탈출할 궁리만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관심의 비중에서 보면 연단은 작을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연단은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 속에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을 수 없어요. 교회 나오지 않을 수 없어요. 열심히 찬송과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봉사와 섬김 생활하지 않을 수 없어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님을 붙들고 갈망하지 않을 수 없어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세상에 오실 때 작게 오셨습니다. 작은 나라, 작은 마을, 작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누구 하나 알아 줄 수 없이 작았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4:10) 작지만 작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작지만 작지 않은 감사의 신앙, 겸손의 자세, 연단의 믿음 가지고 큰 믿음과 영광을 이루어내시는 큰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88,신령한 사람 (잠 17:4-6)
이 시간에 “신령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부터 3장에서,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에 속한 사람, 즉 신령한 사람입니다. ♣둘째는 육에 속한 사람, 성령이 없는 불신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긴 하지만,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육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사람입니다.
♣4절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사람은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악행 하는 사람은 악에 귀를 기울입니다. 좋은 말이 많아도 악의 말을 기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을 듣는가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막4:24-25에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하십니다. 악하고 사악한 말 잘못 듣다가는 패가망신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듣는 대로 됩니다. 듣고 영향 받은 그것이 곧 자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말의 공급처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딤후3:14에 바울도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 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누구에게 배웠는가도 무시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조심해야 할 이유는 각자 관점 체계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시각은, 유신론을 기초로 모든 이론이 전개되지만, 불교나 공산주의는 무신론을 기초로 이론이 성립되기 때문에 관념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배웠고, 누구의 혹은 무엇의 영향을 받고 있느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독교가 부흥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악의 세력들이 방송과 인터넷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부정적인 면만 보여주고 비판했습니다. 잘하고도 비난만 받았습니다. 잘못된 정보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큰 어른들은 정치 다툼에 여념이 없을 때 악의 세력들은 교회를 초토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전도의 길은 막히고 교회를 부정하는 불신의 육의 사람들만 양산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씨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꾸 자기 씨를 덧뿌리려고 합니다.
마13:24-30절을 보면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갑니다. 이렇게 되면 신령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신령한 사람이란 말씀 충만한 사람입니다.
2. 육의 눈으로 판단하지 않고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하십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가난하면 멸시합니다. 사람 대접 받으려면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큰 죄입니다. 왜 그런 죄를 범할까요? 신령하지 못하니까. 육에 속하여 육의 관점대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자라고 귀하거나 가난하다고 천한 것이 아닙니다. 부자를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난한 자를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약 2:5-7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하십니다.
♣그러므로 5절은 육신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이 신령입니다. 예수님 얼마나 신령하셨습니까? 요8:15에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하셨습니다.
♣신령한 눈으로 보면 우리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의 경륜 가운데 진행되는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만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3. 육신의 감정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5절 하반 절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하십니다.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는 데도 남이 벌 받는 것을 왜 좋습니까? 육신의 감정 때문입니다. 미운 사람이 당하면 즐겁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감정과 영의 감정은 다릅니다. 영의 감정은 밉지 않고, 불쌍합니다. ♣기쁨도 다릅니다. 눅10:21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임종하면 육신으로는 슬퍼도 영적으로는 기쁨입니다. 육신의 감정은 가짜입니다. 믿음 없기에 육신에 속아서 슬프고 허무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즐거움도 다릅니다. 영의 사람은 하나님 섬기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사람은 하나님 섬기는 것은 짐이요, 세상 향락이 즐거움입니다. ♣분노도 다릅니다. 육신의 분노는 미움과 그 이상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죄가 미워 밤새토록 그를 위해 기도할지라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롬8:13에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하십니다. 먼저 노인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전도서에 노년은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 내게 낙이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라. 면류관이란 왕이 쓰는 것으로 지상의 그 무엇보다 영광스런 것입니다.
♣그 손자 손녀들이 재롱을 부리고 팔딱 팔딱 뛰고 달려 다니는 것만도 큰 기쁨입니다. 면류관입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하십니다. 부모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그늘이 큽니다. 큰 재산 물려받지 못했어도 큰 그늘로 계셔 주신 것만 해도 어딥니까? 더구나 사랑해 주시고, 믿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은 날마다 기도해 주시는데 이것은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살아계신 것만 해도 위안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못하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부모가 간섭한다고 대들고, 부모를 때려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온갖 살림에다 궂은 일 다 시키면서, 부모에게 함부로 합니다. 돈도 안 주면서 파출부도 그런 파출부가 없습니다. 한 번 습관이 잘못 들어놓으면 마지막까지 그렇게 합니다. 아비는 자식의 영화인데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6절은 우리에게 감사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잘 경외하는 사람이 신령합니다. 다윗처럼 날마다 찬송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능력 있다고 내가 대접 받고, 영광 받는 것이 신령한 것 아닙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신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육신적으로 살지 않고 누구보다 신령하셨습니다. 육신 따라 살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육신의 말 듣지 않고, 육신의 눈으로 판단하지 말고, 육신의 감정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며 감사하는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0,신령한 삶 (잠 17:7-9)
이 시간에 “신령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람에는 세 종류가 있다. 그것은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했고, 영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 아버지 닮고 예수님 닮은 사람입니다. 누가 더 하나님 더 닮았나?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령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7절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하십니다. 악인이 거짓말을 해도 못마땅한데, 존귀한 사람이 거짓말하면 합당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존귀한 사람일 수 없겠지요. 거짓은 죄일 뿐 아니라. 사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사탄 닮은 것이지 하나님 닮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진리에 서야 신령한 삶입니다.
♣사람들이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에게 사업성공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업에 속임수를 쓰면 반드시 망합니다. 피와 땀을 흘려 일하는 사업가만이 결실을 거둡니다.” 사업에도 거짓이 통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은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거나,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보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허상이요, 거짓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야 하는데 홍해가 넘실거립니다. 홍해가 진리입니까? 여호와께서 길을 내시리라는 말씀이 진리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이 진리입니까? 밟고 나아가라는 말씀이 진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거짓에 속아 낙심하지 말고 말씀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세상이 온갖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정보의 홍수 속에 살지만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우리 육신의 눈에 속지 말고 신령한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눈은 성경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의 관점에서 볼 때 열립니다.
2. 기도로 성결하는 것입니다.
♣8절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뇌물을 장려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뇌물의 위험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처럼 뇌물은 받는 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판단력을 둔화시켜 뇌물 준 자에게 무작정 호의를 베풀게 하는 특성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꼭 돈만 뇌물이 됩니까? 뇌물은 모든 세상 유혹의 상징입니다.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세상의 유혹은, 뇌물과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끌어갑니다. 그런데 뇌물의 힘이 얼마나 큰지, 뇌물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 없을 정도입니다.
♣이 뇌물 앞에 재판관도, 정치인도, 대통령도 넘어갑니다. 적게 주니까 안 넘어가지요. 많이 줘 봐요. 넘어 갑니다. 북한에서 탈북 할 때도 가장 쉬운 방법이 돈을 쓰는 것이랍니다. 중국에서도 어려운 일 당할 때 돈 주니까 즉시 해결되더랍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의 말이 맞아요. 뇌물이 그렇게 신속합니다.
♣세상의 유혹이 뇌물과 같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깨달아야 할 교훈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다(히13:9) 했습니다. 은혜로만이 이길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시37:24에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하십니다. 아! 이건 아닌데 생각이 들거든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하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데 기복주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엎드리면 하나님께서 다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갈6:1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성결함이 신령함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로서 성결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랑하는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하십니다. 사랑이 뭔지를 잘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줌에서 출발합니다. 반면에 허물을 거듭 거듭 말하는 것은 미움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덮어 주느냐의 차이입니다. 율법은 덮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덮어줍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차이입니다. 만일 사랑이 사라지고, 율법이 들어오면, 행복했던 삶도 무너지고 맙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사랑이 식어지면, 뜨지 않아야 할 율법의 눈만 뜨여, 서로 하나님이 되어 서로 비판하고 재판하고 심판까지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잘못된 것은 분별하여 경계하고 이론으로 막아내고 책망할 수는 있지만, 미워하거나 심판하면 스스로 하나님 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19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대신 그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 그 배후의 악의 영을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하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신령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일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십니다.
♣사랑하지 아니하고 난 능력이 있으니 신령한 것이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6:2-3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해야 신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1:16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장 신령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시간도 주님을 가까이하는 자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신령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신령한 체 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 늘 성경 보며 거짓을 버리고 진리에 서고, 처리해야 할 내 마음의 문제를 안고 엎드려 기도하고, 누구든지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신령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1,형통한 삶 (잠 17:10-12)
이 시간에도 “형통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형통이 무엇일까요? 형통의 일반적인 의미는 형통의 히브리어에서 봅니다. 형통 (찰레아흐)의 원어적 의미는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진정한 형통의 뜻은 다릅니다.
♣성경은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기록했을 때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종살이하고, 또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상황이 칠흑 같이 어두울 때입니다. 그럼에도 형통한 자라 했던 것은 그의 삶에 하나님이 그와 온전히 함께 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 보기에는 어렵지만 요셉을 통해 이루어질 높으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 처음은 어려울 수 있지만, 결말은 요셉과 같이 누구보다 더 아름답고 큽니다.
형통한 자가 되려면 어떤 믿음이어야 하나요?
1.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야 합니다.
♣10절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하십니다. 사람들 중에는 말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은 물론 매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10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총명한 자는 한 마디 말에도 깊이 듣지만,, 미련한 자는 매 백 대를 때려야 조금 깨닫습니다.
♣태형이란 매질하는 형벌입니다. 시시하게 때리는 벌이 아닙니다. 율법에서 죄수에게 태형을 가할 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때렸습니다. 40대를 맞으면 죽을까 봐서 하나를 감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 대란 두 번 죽고도 남을 무서운 벌입니다. 이걸 맞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죽어도 할 사람입니다.
♣말씀이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잠9:8에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하십니다. 말씀이 통하지 않으면 매로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징계만 받고 산다면 그 삶이 어찌 형통하겠습니까? 더 이상 징계 받는 길을 그치고, 사랑 받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을 언급할 때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라고 했습니다. 보통 말로 섣불리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통은 말씀을 삼가 듣는데서 출발합니다. 시편 1편 잘 아시지요? 1-3에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하십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실 때 들으십시다. 말씀으로 하실 때가 좋은 때입니다. 성경으로, 설교로, 권면으로, 기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가장 좋은 때입니다.
2. 자아를 하나님 앞에 순복시켜야 합니다.
♣11절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하십니다. 왕정시대에 가장 큰 죄는 반역죄입니다.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역적모의하는 죄입니다. 그러면 3족을 멸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중국에서 대역죄는 9족을 멸하였고, 조선에서는 3족을 멸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무서운 죄입니다.
♣이런 반역이 우리 마음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의 완악한 마음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자아라고 하는데, 이 자아가 지금까지 얼마나 하나님께 반역해왔으며, 또 앞으로도 얼마나 반역할 것인지, 누구나 예측할 수 없다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거역해 왔고 거역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더 강한 자를 붙여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사기꾼 야곱을 위해 더 고단수 사기꾼 외삼촌 라반을 붙이셨습니다. 그것은 그 완악한 인간의 수법 버리고, 두 손 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더 강한 자를 붙이신 것입니다.
♣고전1:25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하십니다. 강하실 정도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분을 누가 이깁니까? 내가져야지 하나님은 이길 수 없습니다. 자식 이긴 부모는 없다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지셔도 ,우리를 바로 훈련시키심에 있어서만은 ,절대로 지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12:4에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형통을 막는 원흉입니다. 그래서 잠2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하십니다.
♣시128:1-2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형통하기 위해 날마다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내가 깨지는 것입니다. 순종을 못하겠으면 복종이라도 하셔서 나를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3. 우리의 생각을 잘 지켜야 합니다.
♣12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하십니다. 악을 모의하는 미련한 자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새끼 빼앗긴 암콤에 풍자하여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암곰이 두 곳에서 나옵니다. 본문과 왕하 2장입니다. 왕하 2장을 보면 선지자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도중,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리는 어린이들을 수풀에서 암콤 두 마리가 나와서 아이들 42명을 죽였습니다. 아이들이 사방으로 도망쳐 목표가 수십 개로 분산 되었을 텐데, 곰이 얼마나 빠른지 42명이나 당하고 말았습니다. 곰이 뒤뚱거리는 것 같아도 아주 민첩하고 나무에까지도 올라가니 피할 수 없습니다.
♣새끼를 빼앗긴 암콤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무서운 힘에다 모성애까지 합세해서 그리고 매우 흥분되어 모든 움직이는 대상을 적으로 보기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곰을 만나더라도 새끼 빼앗긴 곰은 만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악하고 미련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보다 더 위험합니다. 범죄자가 되면 도망 다니기 바쁩니다. 자신의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잠1:10-19에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스올 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하십니다. 남을 해하는 것이 곧 나를 해하는 자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위험한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남이 나를 꾀지 않더라도 내 생각이 나를 꾑니다. 마음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를 교훈 삼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잠언을 늘 읽어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머리 잘못 쓰면 그 결과는 누구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저주를 지게 하심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온전히 복되고 형통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완악한 자아를 깨드리고, 악하고 미련한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순종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육 간의 완전한 평안과 형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2,형통의 적 (잠 17:13-15)
이 시간에 “형통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형통은 누가 주실까요? 창39:3의 요셉에 대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118:25) 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렇지만 형통을 막는 적이 있습니다. 사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하십니다. 그러므로 형통하려면, 형통을 막는 적인 죄악을 제거함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적을 회개해야 할까요?
1. 배은망덕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13절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사람을 억울하게 하면 하나님께서도 노하십니다. 그런데 억울한 것보다 몇 갑절 더 억울한 것이 있습니다. 배은망덕입니다. 선으로 대접했는데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이것은 몇 갑절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눅23:28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은 결과로 그 자손들이 로마에 멸망당하고 2000년이나 나라 잃은 방랑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마26:24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것이 선을 악으로 갚은 결과입니다.
♣이 흉악한 배은망덕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요? ♣예수님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성령님을 슬프게 한 죄는 죄가 아닙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 수준은 아닐지라도 그 가슴에 못을 얼마나 박았습니까? 함께 하신 성령을 인정하지 않고 슬프게 한 죄는 박해 수준입니다.
♣그래서 히12:25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하십니다. 악으로 선을 갚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죄 때문에 악이 집에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은 물론 하나님께도 잘하시기 바랍니다.
2. 대적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14절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하십니다. 댐에서 물이 샐 때 처음에는 몇 방울 떨어지지만, 나중에 댐이 터지면, 그 위력은 가공할 만큼 위력적입니다. 댐은 작은 쥐구멍만 나도 터집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더 커지는 것이 다툼입니다. 잠26:21에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하십니다. 다툼이 불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불이 큰 불이 되는 것처럼, 모든 다툼이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작은 다툼이 큰 싸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툴 일 같으면 시작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잠19:13에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하십니다. 잠17:1에도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21:9에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하십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이야기입니다. 갈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성령을 얼마나 거스르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순종했습니까? 우리는 세상 나라 출신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도록 태어나거나 훈련 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매사에 성령을 거스르며 삽니다. 알고보면 이것이 대적 죄입니다. 이제부터는 성령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3. 양심불량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15절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하십니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 중대한 범죄가 나타납니다. 어떤 경우라도 올바른 판단을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면, 그것은 경악할 사건입니다. 하나님도 놀라시고 사람도 놀라 떠납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5:12에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그러므로 사3:10-11에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우리는 의인에게 복이 있다고 말하십시다.
♣하지만 15절은 그 정도 위대한 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최소한 양심은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심이란 인격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양심마저 버린다면 그것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최소한의 양심적인 것이 논의나 논쟁의 중심 즉 이슈[issue]가 된다면 그 사회는 소망 없는 사회입니다. 선을 선이라 말하고 악을 악이라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지극히 양심적일 뿐입니다. 그런데 상식을 넘어 거짓말을 한다면 양심을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식 없는 일이 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 양심을 지켜야 하는데 양심을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양심 버리고 죄 지을 때가 많습니다.
딤전1:19에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하십니다. 양심 버리면 믿음도 파선이요, 하나님과 관계도, 인간관계도 모두 파선입니다. 양심을 범할 때 우리의 영혼은 암담해지고 우리의 삶은 막히기 시작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로 멸망할 우리 인생들을 위해 그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극악한 죄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극악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여 성령의 은혜로 회개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악으로 선을 갚거나,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고 다투거나, 신앙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없이 하나님께 사랑 받고 사람에게도 칭송 듣고 영육 간에 형통한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3,보혜사 성령 (잠 17:16-18)
이 시간에 “보혜사 성령”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보혜사란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말은 “파라” ‘곁에서’라는 말과, “클레오” ‘부르다.’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바로 곁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한자로 보혜사(保惠師)는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자를 써서 ‘은혜로 지키고 보호하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대의 보혜사는 다름 아닌 성령님이십니다. 이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 오해해서는 안 될 사항이 있습니다.
1.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16절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함은 어찜인고”하십니다. 본 절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수업료를 내고 교사에게 배움으로 지혜를 구하려 하나, 본성이 무지하여 지혜를 받을 능력이 없다는 해석과, 미련한 자는 무지하여 세상적인 열정과 방법으로 지혜를 얻고자 하나, 결코 얻을 수 없다는 해석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든지 이 자체로도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이 교훈을 성령에 비유해보면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사람의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사람이 있지요.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된 것도 없느니라”(17-21절) 한 사건이 있습니다.
성령을 사서 마술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성경에 기록한 것은 사람들이 성령이용죄를 너무 많이 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성령께 사용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을 부리고 이용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일지라도 이렇게 해서는 능력도 나타날 수 없거니와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신성모독죄가 됩니다. 모르고 서툴러서 용서해 주신 것이지, 고의로 그런다면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행2:38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말씀을 요약하면 “예수 믿으면” 그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성령이 계십니다.
2. 성령은 친밀하신 영이십니다.
♣17절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하십니다. 여기서 친구와 형제를 동일 대상을 지칭하는 말로 보느냐 아니면 따로 보느냐? 에 대한 이견이 있습니다. 동일 대상으로 보면 “참된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위급할 때 형제와 같이 도움을 준다.”는 의미가 되고, ♣따로 본다면 “친구는 인격적 교제를 위한 존재이다. 반면 형제는 혈연적 관계에 있는 자로 위급할 때 도움을 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좋은 의미를 주는 교훈입니다. 또 그래야 좋은 친구고 좋은 형제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는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은혜입니다. 친구와 같이 대화하시고, 또 형제와 같이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는 친밀해지기 찾아오셨지 부담주시려고 오신 것 아닙니다. 책망하신다는 말씀도 있어요. 요16:8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나 그건 성령이 임하시면 가슴을 치며 죄를 회개하고, 세상의 의를 버리고 복음의 의에 서며 그리고 악한 영을 몰아내주시는 은혜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지 은혜롭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세상의 그 어떤 기름보다 더 온유하시고 부드러우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령을 거룩하게만 생각하고 친구와 같이 친밀하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경험이 있어 예수님은 친구처럼 여기지만 성령을 친구처럼 여기지 못합니다. 그 결과 성령과 동거 동행 동역하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곁은 물론 속에까지도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사소한 것이라도, 늘 기도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생활 속의 대회가 기도입니다.
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막13:11에도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하셨습니다.
♣꿈에라도 힌트 주시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큰 도움이 됩니다. 도우시기 위한 힌트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는 멀리 있어 나를 돕지 못해도 보혜사 성령께서는 가까이 계셔서 도우시는 친밀하신 사랑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늘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3. 성령은 우리의 영원한 보증이십니다.
♣18절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성급하고 무분별한 보증 행위에 대한 경고입니다. 보증의 위험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지혜 없는 자는 함부로 보증합니다.
♣이것을 성령에 비유해 보십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보증하신다면 그것은 영원하신 은혜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보다 못해요. 짐승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인간이 훨씬 못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2-6) 책망했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다고 생각합니다. 은혜가 있다가 없다가 그러나 성령의 은혜가 소멸될 수는 있어도 성령께서는 떠나지 않습니다. 성도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떠나는 줄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 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증하시고 인을 쳐주시고 영원히 책임져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나무의 그루터기와 같이 베임 당하면 순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살아날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요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 하셨고, 고후1:22에는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했습니다. 세상 보증은 한 번 보증이지만 성령의 보증은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해도 끝까지 보장해주시는 영원한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성령을 주십니다.
♣그를 높이고 사랑하면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곁과 속에 계시는 친밀하신 영이요, 또 세상 끝 날까지 보증하시며 함께 하실 영원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을 인정하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도우심 받아 성령님과 동거 동행 동역하시는 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4,십자가 은혜 (잠 17:19-21)
이 시간에 “십자가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당시 로마의 형틀입니다. 이처럼 십자가가 형틀에 불과하고 당시로서는 심히 부끄러운 형벌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인생의 죄악을 지시고 구원하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대속의 대명사요, 성도에게는 이보다 더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없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1. 우리를 죄와 관계가 없게 하신 은혜입니다.
♣19절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하십니다. 여기 다투는 자가 나오는데, 다툼이란 사사건건 자기와 연관시키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이와 반대로 세상과 우리, 죄와 우리의 연관성을 끊어놓는 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갈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하십니다. 이제는 나와 세상, 세상과 내가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과 볼일이 없어야 합니다. 죽은 자가 세상과 관계가 없듯이 예수 안에서 세상과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하십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를 죄와 세상과 관계가 없게 하신 은혜입니다.
2. 우리를 겸손하게 하신 은혜입니다.
♣다시 19절 하 반절에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하십니다. 문을 높인다 란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해 집의 대문을 크게 세운다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은 상대도 않는 교만한 고고한 행보를 가리킵니다. 우리도, 교회도, 사회도, 문턱이 낮아져야지 높아지면 고립 당합니다. 그것은 곧 자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문턱을 없애셨습니다. 천국은 죄인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이제는 죄인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천국 문턱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 이름이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10:9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하십니다.
♣천국은 예수 믿는 겸손한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춰야 예수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는 의로워서 예수 없이 들어갈 수 있다고 뽐내고 교만하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완악한 교만을 다 십자가 아래 매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3. 거짓을 십자가에 못 박아 진리의 사람이 되게 하신 은혜입니다.
♣20절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하십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며 강해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을 일삼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주장이 더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읽지도 않을 뿐더러 읽는다 해도 자기 식으로 믿을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복을 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이 진리라고 떠들지만, 신령한 세계가 어찌 보이는 가시적인 것에 국한 되겠습니까? 완고한 주장만 하다가 멸망에 떨어질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진리를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이 십자가 은혜입니다. 십자가로 천국의 문이 열리고 우리 심령의 문까지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히10:19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하십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4. 우리를 복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신 은혜입니다.
♣20절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하십니다. 말을 함부로 하면 불필요한 화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재앙 저주 화 누가 담당하셨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마음의 굽은 죄를 다 못 박으시고, 대신 저주를 지셨습니다.
♣갈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저주가 없어요. 그러므로 저주를 물리치세요.
♣벧전2:24-25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입니다.
♣주님이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저주까지 받으셨는데 우리가 저주 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말씀에 서서 복의 자화상을 갖고 저주를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23장을 보면 발락이 발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고 집요하고 추구하지만 매 번 축복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한 어느 누구도 성도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5.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신 은혜입니다.
♣21-22절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하십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후손의 번영은 특별히 큰 복임과 동시에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졌으며 반면 미련한 후손을 둔 자는 큰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고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는 악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을 두고 기도하실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요12:27-28에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그 자체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분 아니라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엡2:10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십니다. 이것이 모두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없고, 들리는 것 없어도, 이 은혜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가장 복된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5,성령의 은혜 (잠 17:22-25)
이 시간에 “성령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고, 황금보다 더 값지고,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가 바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1.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강건하게 하십니다.
♣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하십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과 같다. 여기서 “양약”(게하)이란 ‘치료’ 혹은 ‘구제’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육체적 질병 뿐 아니라, 정신적 장애까지도 건전한 상태로 치료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과학에서 밝혀낸 사실입니다. 사람의 뇌에서 여러 가지 뇌파가 나오는데 깨어있을 때는 해로운 베타(β)파가 나와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듣고 봐도 점점 스트레스와 피곤함 뿐입니다. 그런데 자는 동안에 알파(α)파가 나오면서 기적의 호르몬이라는 엔돌핀 호르몬이 나오는데 이 호르몬은 피곤을 풀어주고 건강하게 하는 기적의 호르몬입니다.
♣그런데 깨어 있을 때에도 알파(α)파가나올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거나 기뻐할 때입니다. 최근 의학이 발견한 호르몬 중에 다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은 엔돌핀의 4,000배라는 사실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다이돌핀은 진리를 깨달았거나 영적인 감동을 받을 때라고 합니다. 현대 과학이 이걸 발견했다고 들떠있지만, 성경은 이미 수천 년 전에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선하시고, 영원하심을 생각하며, 늘 기뻐하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하늘의 은혜로 우리의 영육 간을 치료하시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삼1:2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축복했고, 엡3:16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사48:18-19에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하십니다. 성령의 평강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23절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하십니다. 여기 “품에서”란 뇌물이 재판장에게 은밀히 전달되는 광경을 묘사한 말입니다. 또한 뇌물을 사모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뇌물은 재판장의 마음을 움직여 바로 판단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회 곳곳에 부패가 창궐해 있는데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에서마저 돈 쓰지 않았다고 괘씸하게 여겨 수석합격자를 취소시키는 등 성적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보았습니다. 어디 가서도 돈이 있어야 대접 받지, 돈 없으면 관심 밖입니다.
♣잠19:4에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했고, 딤전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하십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돈이 필요 없는 날이 오기 전에는, 범죄는 계속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물질을 탐하는 심리가 깊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 의인의 재판의 원리가 어떤 것인가? 같은 원리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의인은 마음의 중심에서 의를 목말라 갈망하기 때문에 뇌물과 상관없이 재판을 옳게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는, 우리 중심에서부터 우리를 의롭게 하고 바로 살게 합니다. 이기는 생명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욕심도 이기고, 죄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환경도 이기고 사망의 두려움도 이깁니다.
♣고전2:16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마음을 주장하시는 한 범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 충만 받으면 성자가 됩니다. 하지만 얼마나 이 충만함을 지속하느냐? 복음을 얼마나 알며, 얼마나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끝까지 겸손한가?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가는 다릅니다. 어린이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성자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3.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현명하게 하십니다.
♣24절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하십니다. 명철한 자와 미련한 자 차이는 관심 두거나 바라보는 것이 다릅니다. 명철한 자는 끊임없이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지혜를 추구함으로서 그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지만, 미련한 자는 그 삶을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속적인 것에 둠으로써 결국 삶의 실패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현명하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썩어질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마음 두게 하십니다. 세상 바라보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신령한 눈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주셔서 바로 행하게 하십니다.
♣바른 길을 지시하실 때도 있습니다. 사30:20-21에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말만 하고, 끝내는 기도가 아니라. 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아들 이건희를 불러 “오늘 내가 너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마.” 하더니 붓글씨로 "경청(傾聽)"이란 두 글자의 휘호를 써 주었습니다. 직원들의 이야기도 듣고 소비자의 이야기도 들으라. 늘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 성공한 경영인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야 하거늘, 하나님의 음성은 두말할 것 있겠습니까? 늘 성령의 음성을 갈망하는 자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4.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25절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비의 근심과 고통이 되는 아들이 어떤 아들인지 봅니다. 미련한 아들입니다. 여기 미련하다는 것은 죄를 가까이 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삭의 마음에 근심을 준 에서와 같이 신앙과 달리 사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잠7:22-23에“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에서 부모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아들이 어떤 아들인지 역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보면 됩니다. 지혜로운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지혜란 죄를 멀리 피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롬12:2에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령으로 변화 받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셔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세상에 어떤 은혜가 있어도 성령의 은혜의 모형일 뿐입니다. 성령으로 항상 충만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우리를 영육 간에 강건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현명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셔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6,말씀의 은혜 (잠17:26-28)
이 시간에 “말씀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겠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할까요?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절) 하면서 말씀의 위대성을 강조합니다.
♣그만큼 말씀은 창조 뿐 아니라 우리의 근본입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구원하시고, 말씀으로 온전케 하시고, 장차 말씀으로 심판하시고, 말씀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받는 자세입니다. 말씀을 받는 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귀한 말씀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본문은 본문대로 해석하고 이 본문에 빗대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1. 마음의 문을 열고 모든 말씀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6절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재판장이 잘못되어 뇌물을 받게 되면, 이처럼 의인을 벌하고, 귀인을 때리는 반대의 판결을 내린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심리도 비뚤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근거도 없이 진리에 대해 반발하고, 의인을 증오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을 비판하며, 기존질서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 정도 되면 사탄에게 깊이 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의인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선인은 혼자 착하면 되지만, 의인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악과 싸우며 도전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대언하고 옳은 소리한다는 이유로 선지자들은 대대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 귀인은 어떤 사람인가? 사회적 지위와 관련 없이 인격적으로 출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법이 없이도 훌륭하게 살 사람입니다. 율법의 핵심인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선지자와는 달리 거의 박해를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이 더 악해지면 이들까지 핍박을 받습니다. 사랑의 제사장까지 죽였던 이세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말씀은 다양합니다. 전12:11에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라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하십니다. 은사가 다를 뿐이지 근본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적인 말씀이든지, 잘 해석하는 온유한 말씀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히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2. 말씀에 서기 위해 냉철한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27절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하십니다. 말을 아끼라는 것은 오해와 불신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쓸데없는 말을 삼가라는 것이고, 성품이 냉철해야 한다는 것은 조용하고 침착하며 성급하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실수하기 쉬운데 이런 자세라면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자세도 그렇습니다. 아멘도 좋지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신뢰성에 대해서는 무조건 아멘이지만 그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냉철해야 합니다. 깨닫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중 앞에서나 지식을 위해서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한 마디의 예언이 더 요긴합니다.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가우시기 바랍니다.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예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히4:12-13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십니다.
베뢰아 교인들처럼 해야 합니다. 행17:11-12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 이처럼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더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딴으로는 기발한 생각 같아도 성경 전체에 위배된다면 버려야 합니다. 진리에 관해서만큼은 속단하지 말고 이해하려는 냉철한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3.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경외와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하십니다. 이 구절은 보다 신중한 언어생활을 권고하는 교훈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미련할수록 더 떠들지만 미련한 자의 떠듦은 자기의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반면 미련할지라도 침묵하면 지혜로운 자의 취급을 받게 됩니다.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의 핵심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면 지식이 많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존경 받습니다. 성경 앞에서도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말씀이 들려오고 겸손해야 말씀이 마음에 다가오고 그 말씀이 삶을 변화시킵니다. 또 말씀 앞에서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11:25-27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어린이 같아야 하나님께서 계시하십니다. 어린이는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영으로 우리에게 와 계신 하나님도 겸손하지 않고는 그를 경험할 수 없고 그 은혜를 받을 수 없음과도 같습니다.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겸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경은 겸손한 독자를 요구한다. 나를 가르치소서 나를 가르치소서 하면서 보는 사람을 원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삶까지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1-22)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고 또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천국 비유에 같은 씨를 뿌리지만 밭에 따라서 결과가 달랐듯 말씀 앞에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되 더욱 배우고 겸손하여 온전히 진리의 확신에 이르고 더욱 말씀 앞에 경외하고 순복하여 삶까지도 변화시켜 주시는 그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잠언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벽 잠언 강해19장 (0) | 2019.01.03 |
---|---|
새벽 잠언 강해18장 (0) | 2018.12.27 |
새벽 잠언 강해16장 (0) | 2018.11.16 |
새벽 잠언 강해15장 (0) | 2018.11.11 |
잠언 새벽 강해14장 (0) | 2018.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