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언 강해

새벽 잠언 강해18장

공 상희 2018. 12. 27. 06:17

97,이단의 정의 (18:1-3)

 

이 시간에 이단의 정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말세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경고대로, 교회 역사에는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하여 온갖 이단과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자칭 하나님 재림주들이 대략 40~50여 명 됩니다. 이들 중에는 사망한 자들이 있고, 이들 중에는 아직 살아 있어 하나님이라고 열심히 속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단이란 무엇일까요? 이단에 관한 정확한 규정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좀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그들은 성경진리를 왜곡하고 또 부인하는 사람들이며, 특정인의 그릇된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알려 주는 좀 더 정확한 이단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1.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교리를 배척하는 자입니다.

1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하십니다. 여기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 전체가 지켜 따르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원칙을 배척하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아집을 따라 행동하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관습과 이익보다는 개인의 쾌락과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반 사회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의 목적은 1절 말씀대로, 순전히 자기 이익과 영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세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소욕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자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있었습니다. 벧후2:1-3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하십니다.

 

자신이 가짜인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다음에는 가족과 측근들입니다. 베일에 싸인 교주를 멀리 있는 신도들이나 높이 숭상하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를 믿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같이 사는 하나님이 죄짓고 병들고 죽고 실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정통 신앙 안에서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갈라져 나갑니다. 초대교회 이단들도 그랬습니다. 요일2:18-19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보편적이고 정통적인 교리를 부정하고 이단교리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 주장마저도 일관성이 없이 자꾸만 변하기 때문에, 스스로 가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령 교주가 죽지 않고 육체 영생할 것이라 해놓고 자꾸 나이 먹어 죽으려고 하니까후계자로 그 대를 이으려고, 교리를 그럴듯하게 뜯어 고치고 있습니다.

자꾸 교리를 뜯어 고치니까 교육장으로 있던 사람이 어떻게 재림하신 참 예수라면 이럴 수 있느냐 하면서 뛰쳐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단이란 여러 악한 이유로 인하여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기독교 교리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2. 성경과 다른 자기 의사를 끝까지 주장하는 자입니다.

2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련한 자는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결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단지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일반적으로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게 하고, 자기 약점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훈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로,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주장만 있지, 지혜의 말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완고함 이것이 이단을 규정짓는 또 하나의 요소입니다.

 

이처럼 이단이란 2절처럼 다른 이설을 주장하되, 완고한 마음으로 그것을 주장할 때, 그것을 비로소 이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통교리를 따르지만, 무식해서 이설을 말했다면, 아직 이단이라고까지는 단죄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분석한다면, 이단에 걸리지 않을 사람 없습니다. 이설이라고 허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악의적이지 않고, 단지 알지 못해서 하는 실수라면 이단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8장에 아볼로가 예수도 알고, 요한의 세례도 알지만, 성령의 세례는 잘 몰랐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대단히 해박하고, 웅변적이었지만 ,마치 성령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중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말을 듣고 돌이켰다는 사실에서 고의성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잘못된 자기주장을 끝까지 고집해 나가는 것이 이단입니다.

 

그렇지만 예외는 있습니다. 신론 구원론 등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 주장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념설이냐 상징설이냐 영적인재설이냐 무엇이냐 성찬에 대해서 약간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이단이랄 수는 없습니다. 여러 교단이 교리적인 문제로 갈라졌지만 서로 교류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진리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이란 기독교 핵심진리에 대해서 자기 잘못된 주장을 끝가지 고집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3. 자신을 절대자의 자리에 등극시키는 것입니다.

3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하십니다. 여기 "이르다는 말은 고용되다, 세력을 얻다라는 뜻으로, 악한 자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악한 자가 권력을 잡고, 득세하면, 세상의 의인들은 멸시를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사이비 이단이란 서서는 안 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자리에 서는 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여쭐 때 마24:4-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하셨습니다.

 

24:15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살후2:3-4에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마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으로 미련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랬습니다. 고후11:4처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예수님만큼은 정확히 아시기 바랍니다. 동일한 인간으로서 범죄하고, 자연법칙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 아래서 허덕이는 인간이라면,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리 말고도. 자기를 유일한 존재로 높이는 자라면. 사이비 이단입니다. 23: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하십니다. 세상이나 교회에 선생은 많지만 근본적인 가르침을 내놓는 유일하신 선생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유일한 선생이라고 높이는 자가 있습니다. 이 역시 이단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다가올 이단의 시험을 예상하고 경고했습니다. 20:29-32에 보면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단이 이 땅에 나타날 것을 예고하셨고, 그 예고하신 대로 수많은 이단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종교를 자기 영달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자,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교리를 배척하는 자, 성경보다 자기 의사를 주장하는 자,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이나 구세주의 자리에 등극시키는 자가 이단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 진리의 말씀에 서서 미혹되지 말고, 이단들을 분별하고 이단들의 일을 막을 수 있는 ,참 진리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8,그리스도인의 영성 (18:4-5)

 

이 시간에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불어로 영성(spirituel, 스피리뛰엘)이라는 용어는 본디 16세기 가톨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지만, 오늘날에 와서 이 용어는 내적인 삶, 명상의 삶을 넘어서 영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낱말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하는 낱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4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하십니다. 여기 명철한 사람은 히브리어로 이쉬로서, 문자적 의미로는, 그냥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모든 지혜와 고결함을 갖춘 지혜로운 자를 말씀하면서, 왜 사람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을까요?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위대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그 아름다운 형상을 잃어버린 지 오랩니다. 그래서 사람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려면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1: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 신령한 목표는 예수의 형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했고, 4:15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했습니다.

풍부한 영성을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서 봅니다. 특히 스데반집사는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영성적인 인물임은, 다른 무엇보다 예수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데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세상의 어떤 신령한 자가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사랑의 예수를 닮으시기 바랍니다.

2. 영성은 깊은 내면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4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여기 깊은 물은 심오한 자의 사상과 지혜가 중단되는 일이 없이 계속 흘러나와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준다는 것을 비유로 한 말입니다. 영성적인 삶도 그러합니다. 깊은 데서 은혜가 터져 나옵니다.

4: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이 은혜는 특히 말씀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늘 감사하고 찬송하면 이 깊음의 샘이 터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물에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5:26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8:11에도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그러므로 늘 말씀을 통해서 이 깊음의 생수가 터지기를 바랍니다.

 

3. 영성은 이웃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입니다.

4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지혜의 샘을 솟구쳐 흐르는 시내에 비유한 것은, 끝없이 흘러나오는 지혜로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그 지혜와 지식의 끝은 어디인지 감탄스럽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왕상4:32-34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그런데 솔로몬도 예수님에 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지요. 12:42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골짜기 물이라면 예수님은 큰 강이나 바다와 같습니다.

이처럼 영성이란 흐릅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이 은혜의 강이 여호와의 보좌로부터 흐릅니다.

동쪽으로 나아가며 계속하여 풍부해져 큰 강을 이루는데 강가를 돌아보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고, 이 물이 흘러 죽은 바다가 되살아났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라. 이처럼 영성이란 은혜를 끼쳐야 영성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이상한 신앙 가져 가정을 풍비박산 내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사회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다. 그 열매로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릴지라도, 열매를 잘 봐야 합니다. 열매가 나쁘면 돌아서야 합니다.

 

4. 영성이란 육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5악인을 두둔하는 것과여기 두둔하다란 히브리어로 나사이 용어는 얼굴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는 객관적 사실이나 원칙에 따라 판단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의 외모 재산 가문과 같이 올바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는 외적인 요소에 의해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한국판 노예사건이 왜 생깁니까? 사람들이 가진 자에게 편벽되이 두둔하기 때문입니다. 도서지방이란 좁은 사회여서 그런지 힘 있는 자를 두둔하는 심리가 강합니다. 경찰이 제 역할하거나 이웃이 공정하면 그런 일이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도망해도 이웃이 잡아주고 경찰이 잡아주니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악인을 두둔하지 말라는 것은 육신의 관점으로 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영성적인 삶이란 육신의 관점보다 영적인 관점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앞에 홍해가 가로 높여 있어도 홍해만 바라보고 실망하는 육신의 관점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영적인 관점이어야 신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고후5:7에도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하늘이 무너져도 신령한 관점에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5. 영성이란 눌린 영혼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다시 5절에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고의로 공정치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현대의 법 정신은 열 명을 놓칠지라도 한 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증거 재판을 실시합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증거를 무시하고 무고하게 의인을 억울하게 판결한다면 이는 심히 악한 일입니다.

이처럼 악의 세력에게 눌린 가련한 영혼이 있습니다. 은혜 받지 못한 심령입니다. 의인의 심령일지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눌려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이 눌려 있어요. 마치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와 같이 심령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 눌림 현상은 속죄의 확신이 없을 때 옵니다. 피의 복음을 알아도, 은혜 생활에 게으르거나 약하면 눌리게 됩니다. 혹은 사탄의 시험이 너무 강하거나 영이 크게 눌린 사람 때문에 내 영이 눌리기도 합니다. 그 눌린 원인을 알아 말씀으로 바로 세워주고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고 힘써 기도하여 눌린 영혼을 풀어주고 영의 환경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영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아버지를 닮으셨고 가장 은혜가 넘치시고, 가장 은혜를 많이 끼치시고, 가장 성령을 따라 행하시고, 그리고 가장 악령을 잘 물리치신 영성의 대가이십니다. 우리 모두 사모하는 가운데 스데반처럼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가장 아름다운 영성을 가진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99,대인관계 (18:6-8)

 

이 시간에 대인관계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레너드 스위트는 관계의 영성이란 그의 저서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더 많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른 관계를 위해 사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관계인 우리는 원칙에 충실한 부분은 좀 줄이고 대신 관계에 훨씬 더 충실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삼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바른 관계가 구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처럼 인간 생활에서 대인관계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인관계가 잘될 때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풀려나갑니다. 대인관계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될 때, 대인관계도 잘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대인관계를 하면서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할까요?

 

1. 다툼을 일으키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6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미련한 사람은 내용에 있어서나 방법에 있어서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무지 혹은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말을 용납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은 감정적일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잠15:1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했습니다. 인간관계는 다투면 파괴됩니다. 사람이 다투면 그 상처가 오래갑니다. 지나놓고 보면 회복이 거의 안 됩니다.

 

다투었다가도 먼저 화목의 손을 편다면 그 사람은 진짜 신자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화목의 손을 펼 때 흔쾌히 받아주는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면 그런 사람이 많지 않거나와 화목의 손을 펴도 관계를 회복하려는 상대방도 많지 않습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틀어지면 회복이 안 됩니다. 신앙 수준이 그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렇다는 것을 알고 무엇보다 지혜롭게 대인관계해야 합니다. 진리 문제가 아니라면 다투는 것은 최대한 삼가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2: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했습니다. 다툴만한 소지가 있거든 늘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부당한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이는 미련한 자가 스스로 무지한 말을 서슴없이 행한 결과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매는 왜 때립니까? 분수에 지나쳐 뻔뻔스럽거나 부당한 말이나 일을 할 때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동물들이 뱀에게 대들었습니다. 한 동물이 이렇게 뱀을 향해 비난했습니다. "사자는 사냥물을 넘어뜨리고서 먹는다. 늑대는 사냥물을 찢어발겨서 먹는다. 그런데 뱀아, 너는 사냥물을 몽땅 꿀꺽 삼키니 그건 어째서냐?" 그러자 그 질문에 뱀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중상 모략하는 자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네. 내가 한 입으로 꿀꺽 삼기기는 해도 입으로 상대방을 상하지 않기 때문이지." 중상모략이 그렇게 나쁘다는 교훈입니다.

어느 회사에서 사장이 직원을 무리하게 해고시키니까 해고된 직원이 나가서 회사의 부조리를 고발해서 회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부당한 일은 언제 터져도 터지게 마련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가 보지 않아도 성실하게 행해서 상을 받으면 받았지 매 맞을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3. 악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7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멸망할 말이 무엇일까요? 더러운 말, 희롱의 말입니다. 4: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하였습니다.

 

음담패설의 말이어서는 안 됩니다. 5:5"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좋은 말도 시간과 장소와 대상에 따라 은혜가 되지 않을 때는 하지 않아야 할 일이거든, 악한 말이야 더 그러지 않겠습니까? "다들 그런데요?" 다수가 그런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다수가 그렇게 하다가 광야에서 멸망 당하였습니다.

고전10:5-11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믿음이 파괴 됩니다. 가족이 파괴됩니다. 교회도 사회도 파괴됩니다. 침투하지 못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죄가 형통도 막습니다. 28:13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했습니다. 우리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면 형통의 문이 열립니다.

 

4. 불신의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여기 그물은 사냥꾼이 설치한 덫을 말합니다. 말 잘못하면 짐승이 덫에 걸려 잡히듯 어리석은 말이 올무가 되어 사망으로 끌려간다는 말입니다. 최근 범죄자를 잡는 그물덫이 발명되었는데 아주 효과적인 도구랍니다. 그물을 쏘면 그물이 퍼져서 덮치는데 움직일수록 더 얽힙니다. 하지만 이미 수천 년전에 잠언에서 말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불신의 말이 그렇습니다. 농담으로라도 불신의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 예수 안 믿어” “나 교회 안 다녀이런 말은 농담으로도 하지 마세요. 사탄이 제일 좋아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농담으로 말했지만, 그 말은 씨가 되어 싹을 내기 시작하고, 사탄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송사하여 하나님, 저기 내 자식이 있습니다. 저건 내 자식입니다. 저래도 내 자식이 아닙니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요. 죽는다는 사람 결국 죽습니다. 그래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은 그 앞날이 행복하고, 슬픔의 노래를 부르던 가수의 나중 운명은 꼭 그가 부르던 노래의 가사처럼 대개가 그렇게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 귀신이나 무당으로 나오는 탤런트들이 나중에 진짜 무당이 되거나 불행한 교통사고로 죽은 예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심어놓은 말은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거둘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이 성경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18: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18:20에는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그래서 부정적이거나 불신의 말을 하지 말고 항상 믿음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5. 말보다 마음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8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왜 남의 험담이 특별한 음식처럼 잘 받아들여질까요? 그만큼 자기 마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들어야 만족하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들어야 만족이 옵니다. 내가 악하기 때문에 남의 험담이 그렇게 나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로 화제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경계 대상 되어 스스로 왕따 당한다는 사실 알아야 합니다. 남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의 마음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12:34-35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진정 의로우시기에 말에도 일에도 조금도 흠이 없으셨습니다. 2:24-25"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말에 문제가 있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더욱 변화를 받아 다투는 말, 부당한 말, 악한 말, 불신의 말, 남의 말을 하지 않고 항상 믿음의 말로 은혜를 끼쳐 아름다운 대인관계를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00,안전한 삶 (18:9-11)

 

이 시간에 안전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받겠습니다.

누구나 안전하길 원하는데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착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조종사의 비행착각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비행착각을 전문용어로 공간정위상실이라고 하는데 공간정위상실이란 비행 시 수평선에 대한 시각적 참조물이 없을 때 허공에서 비행착각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비행기가 급가속 급감속 급선회 기타 급변하는 상황에서 우리 인체는 평형감지기관의 오류로 인해 비행착각을 일으키는데 이때는 감각을 무시하고 오로지 계기가 알려주는 대로 비행해야 추락을 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이 살아가면서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많은데 이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착각입니다. 오늘 잠언에서 그것을 말씀해 줍니다.

 

안전의 최대 위협 요소인 착각은 어떤 것일까요?

 

1. 가만히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착각입니다.

9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하십니다. 여기 게으른 자는 일상적으로 나태하거나 무관심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패가하는 자는 방탕한 일로 재산을 모두 탕진하는 자를 말합니다. 잠언 기자는 이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어떤 일을 저지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과 방탕한 일로 재산을 모두 탕진하는 것은 그 결과가 같다. 시간상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과는 같습니다.

 

그래서 잠6:9-11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더 심각합니다. 신앙생활에 게으르면 사탄이 시험을 몰고 쳐들어오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건 시험이다 소리치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심각합니다. 가만히 있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게으름과 방탕의 방정식은 같다는 것이 잠언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게으른 것은 바로 악입니다. 무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안전만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말입니다. 게으름과 방탕은 형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보이지 않으니 믿을 수 없다는 착각입니다.

10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적에게 쫓길 때 망대로 피했습니다. 망대가 약하면 잡히지만 견고하면 안전했습니다. 지상의 망대는 불안전하지만 하나님의 망대는 안전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만큼 더 완전한 피난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해 보세요. 어떤 방법으로든 책임져 주십니다.

이 때 우리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는 수식어가 많이 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면서 웬 수식어가 그렇게 많으냐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단순하게 부를 수 있지만 어려울 때는 내 믿음을 위해서라도 부르시기 바랍니다.

 

18:2-3을 보면 다윗이 극도로 어려울 때 어떻게 기도합니까? 수식어가 많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이 기도만 봐도 얼마나 어려웠는지 느끼시겠죠? 의인에게 여호와의 이름은 복음이요, 견고한 망대입니다.

 

그런데 10절의 말씀은 반대로 의인 아닌 사람들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일어날 때 부모가 보이지 않으면 울 듯, 우리가 무슨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하여 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보여도 항상 우리 곁에 계시고 그의 말씀은 언제나 불변의 약속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의지하지 못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온갖 약속과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3. 안전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착각은 헛된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11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하십니다. 의인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부자는 자기가 쌓아놓은 현세적인 물질에 의지한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을 높은 성벽 같이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성벽이 튼튼하면 안전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바벨론성 경우 100m가 되는 높은 성벽에 그 둘레는 깊은 강이 흐르니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도성입니다. 너무나 자긍한 나머지 잔치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망했습니다. 메데사람 다리오가 상류에서 강물을 막고 또 배반자가 있어 성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여기느니라는 원문에 베마스키토인데 상상이나 발상 그림 등을 뜻하는 마스키트에서 파생된 단어로 비현실적인 상상을 가리킵니다. 즉 비현실적인 착각에 빠져 물질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성벽처럼 믿는 부자의 생각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있다가도 없을 돈 때문에 하나님 망각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23:4-5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돈은 언젠가 날아갈 날이 옵니다. 사람들이 불편이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보다 더 위험하고 가련한 것은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3: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라가 평안하고 부강하니까 영적으로는 크게 병들었습니다.

인생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22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데 자기도 의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했기 때문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가 가장 근신해야 할 때입니다. 이 때 우리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폭풍의 전야와 같은 때입니다. 지나치게 평안하면 의심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돈도 권력도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 그것은 영원 속에서 생각하면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토록 지켜 주실 분은 하나님 말고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40일 금식하신 후에 사탄이 온갖 환상을 불어넣으며 유혹했지만 착각하지 않으고 승리하셨습니다. 진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안전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만이 안전이 아닙니다. 돈이나 인생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래서 가장 안전한 여러분의 일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1,존귀한 사람 (18:12-14)

 

이 시간에 존귀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비천한 사람이 아니라 존귀한 사람이 되어야겠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대상4:9-10을 보면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시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이 존귀한 사람이 기도했더니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도한 것마다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귀한 사람이 될까요?

 

1. 겸손하면 존귀히 됩니다.

12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선봉[先鋒]이란 맨 앞장을 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만 따라가면 100% 실패합니다. 그래서 제일 무서운 것이 교만입니다.

 

반면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 앞잡이란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매니저(manager)라고 하죠. 관리인 감독 경영자라는 뜻입니다. 배우보다 보이지 않는 이 매니저들의 활동이 더 중요합니다. 훌륭한 매니저를 만나야 탄탄한 앞길이 열립니다. 실력 갖추고 야무진 매니저를 만나면 안 되자니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가장 야무진 매니저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하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앞에 와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세례요한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대단한 칭찬을 합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한 자”, “천사가 그 이름을 지어 준 사람”, “예수님의 친족”, “일생 기도로 산 경건한 사람”, "대제사장 사가랴의 아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사명감에 견딜 수 없어 일생 빈들에 있었던 사람",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

자기 제자들까지도 예수께 바쳤던 사심 없는 자”, "누구보다 검소하고 절제된 사람", "나타날 때 나타나고 퇴장할 때 퇴장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순교의 목 베임을 받을 때까지도 굽히지 않았던 충성과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앞날을 예비할 사람을 시시한 사람 세우겠습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훌륭한 매니저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가장 위대한 점은 능력도 아니요, 무엇도 아니요, 겸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를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겸손하지 않았다면 성령도 떠나시고 예수 영광 자기가 받고 하나님의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겸손은 세례요한 같은 우리의 든든한 매니저입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겸손하셨습니까? 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그래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가장 높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겸손을 우리의 매니저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사랑하면 존귀히 됩니다.

13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이 말씀은 어떤 사건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신중한 사고 없이 내리는 결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자신에게도 좋지 않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내용입니다. 언어에 있어서 성급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연이란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사연[事緣]이란 복잡하게 얽힌 일의 앞뒤 사정이나 그 내용을 가리킵니다. 충분히 들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내용을 사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온갖 희로애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단하면 상대방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사항입니다.

그래서 약1: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그런데 그 때 내가 함부로 속단하면 욕을 당합니다. 그래서는 결코 존경 받을 수 없습니다. 존귀히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13절은 그렇게 하지 말라. 반대로 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13절과 반대로 충분히 이해해 주고 사려 깊이 들어주면 존귀한 자가 됩니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의 말을 들어주고 그 마음을 이해해 준다는 것 보통 일은 아닙니다. 좀 정리해서 요점을 이야기 하면서 혹 묻는 것을 알려 주는 식으로 말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상황을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말하고 있으면 답답합니다. 그래도 참고 들어주면 그 결과는 매우 좋습니다.

 

12: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사랑은 듣는데서 시작합니다. 이해하고 들어주어야 합니다. 즐거워하면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면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이것이 상담의 기본인데 하지만 기술로 끝난다면 그 상담은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골3: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했습니다.

 

그러므로 13절은 지혜로워라를 넘어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사랑하라. 그것이 존귀함을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설교자도 사랑할 때 설교자를 넘어 믿음의 아버지로 인정을 받습니다. 교사도 사랑할 때 지식전달자를 넘어 스승으로 높임 받습니다. 하숙집아주머니도 사랑으로 밥해 주면 밥장수가 아니라 잊지 못할 어머니가 됩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고 하지 않습니까? 낳은 자식이 아니어도 사랑하면 기른 부모 못지않습니다.

 

그러나 이건 일반적인 말이고 사랑을 주었어도 배반을 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때 그 사랑을 하나님이 보십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하여, 사회와 나라를 위하여, 혹은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필요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한다는 심정으로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아버지께서 높여주셨습니다.

3. 믿음의 사람이 되면 존귀히 됩니다.

14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사람의 육체보다 강건한 영혼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육체가 병들어도 영혼이 강건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내 심령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고 큰 산이라도 옮길 수 있습니다.

 

말씀에 서세요. 말씀이 우리를 가장 신령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는다면 기도하고 한숨이 나올 리 없지요.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예수 이름 가진 우리 굉장한 사람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여리고성 사람들처럼 우리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도 믿음의 기도로 세상을 고치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도로 역사가 바뀌고 인생이 바뀐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이 존귀합니다. 믿음에는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눈이 열려야 신령합니다. 엘리야 엘리사 얼마 존귀합니까? 신앙은 물론 나라의 방패였습니다. 바울이 왜 존귀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알되 바울처럼 안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령한 눈이 있었습니다.

 

가장 신령한 눈은 말씀에 입각하여 만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입각하여 그렇게 하세요.” 그러면 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혹은 말씀과 달라서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존귀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예수님은 온 우주에 가장 존귀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 역시 심히 미천하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 안에서 그렇게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 존귀의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아들여 가장 겸손하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믿음 있는 존귀한 사람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02,성령의 은혜 1 (18:15-17)

 

이 시간에 성령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알아, 영원한 하나님 백성 될 뿐 아니라. 가장 슬기롭고 행복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성령 안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움직인 수많은 사람들도 대부분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혹 믿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위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느브갓네살에게 권세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그가 불신자라 해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성령의 은혜란 어떤 것일까요?

 

1.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15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명철한 사람이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가 지식을 구하는 것은, 두뇌가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두뇌가 부족해도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왜 지식을 얻을까요? 항상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한 번 가르쳐 주면 잊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겨 두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혜롭지 못하면 생명과 관계된 것을 알려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립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도 사모하는 심령에 주십니다. 다윗 얼마나 갈망의 사람입니까? 42:1-2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63:1에도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했습니다.

갈망하지 않는 사람에게 은혜를 줘도 다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도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주는 것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가치를 모르면 귀하고 좋은 것도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7: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하셨습니다. 성령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16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여기 선물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주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받는 이의 마음이 동할 수 있는 아주 정성이 깃든 선물을 가리킵니다. 이 선물은 상대와 더욱 친밀하게 하며 그로인해 그 상대의 도움을 받아 그의 앞길이 형통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선물이 그렇습니다. 여기 정성이 깃든 선물과 같이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주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구주 예수 앞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형통의 은혜 가운데로도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요16: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하셨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5: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죄짓지 않게 주장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아야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합니다. 성령을 갈망하면 모든 것을 다 구한 것이 됩니다. 큰 믿음, 성령을 구하세요. 의롭게 사는 것, 성령을 구하세요. 부흥, 역시 성령을 구하세요. 능력, 역시 성령을 구하세요. 행복, 역시 성령을 구하세요. 이처럼 성령은 귀한 선물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 앞과 온전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영으로 임하십니다.

17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재판소에서 송사를 할 때 먼저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거짓을 그럴듯하게 말해도 후에 나타난 사람이 진실을 말하면 그 말이 거짓임이 밝혀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양편 말을 다 들어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건 먼저 말한 사람이 무조건 틀리고 후에 말하는 사람이 맞다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말한 사람이 옳을 수도 있고, 나중에 말한 사람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처음 사람이 거짓을 말했을 때를 가정한 말씀입니다. 그의 말이 호소력이 있고 그럴듯해도 후의 참된 증인이 나타나면 그 말이 여지없이 거짓임이 밝혀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다 거짓입니다. 그런데 거짓인 줄 알지 못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자기가 믿는 율법에 확신이 있었으면, 예수 믿는 자를 박해했을까요?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만나 성령 받고 보니, 자기가 박해한 예수는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이셨습니다.

 

그래서 딤전1: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그러면서 15절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거짓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착한 것 같아도 성령이 임하시면 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얼마나 악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가슴을 치고 회개합니다. 왜 목소리들이 큽니까? 은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바른 소리, 옳은 소리 많이 하는데, 내 기도 하지 않는 죄 때문에 내가 비판했던 그들이 그런 상황은 아니었는지 자기가 자기를 비판하는 꼴이란 말입니다. 성령 받지 못할수록 자신의 소리가 더 강합니다. 하지만 은혜 받고 보면 내가 가장 죽을 죄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16:7-8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성령이 오셔야 내가 옳은지 그른지 잘하고 있는지 그릇 행하는지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갈망하십시다. 성령 없는 삶은 죽음이요 거짓이요 어둠입니다.

성령에 대한 무관심은 하나님을 무관심함이요, 성령을 배척함은 예수를 배척함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갈망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진실로 회개하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여 진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믿음의 사람 다 되시기 바랍니,

 

 

 

 

 

 

 

 

 

 

 

 

 

 

 

 

 

 

103,성령의 은혜 2 (18:18-21)

 

이 시간에 성령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겠습니다.

말씀 드리기 전에 성령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령님은 동일하신 분이시지만 구약에서는 주로 사역, 어떤 일을 하신다든가, 그 일을 위해 사람을 택해 능력을 주시고 함께 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성령님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은사적 사역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생명으로, 인격으로, 그리고 선지자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성도들 심령 속에까지 다가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위로 자가 되시고, 스승이 되시고, 능력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은사는 물론, 생명과 인격으로 더 깊이 다가오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성도들은, 하나님과 더 온전히 함께 살아가는, 성령의 내주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1. 다툼이 사라집니다.

18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제비뽑기로 정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일방적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나, 강력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 서로간의 논쟁을 종식시킬 때 제비뽑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제비뽑기의 결과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다음, 영토를 나눌 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 참으로 제비뽑기란 좋은 것입니다. 그 결과에 누구든 이견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비를 뽑지 않았더라면, 동족 간의 분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비뽑기는 신약적인 것은 아닙니다.

신약에도 잠시 제비뽑기가 활용된 적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이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사도를 보선할 때입니다.

먼저 일정한 기준에 의해서 사람들이 복수를 추천한 후, 기도한 다음, 제비로서 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인데 왜 제비를 뽑았을까요? 시대는 신약이어도 성령 강림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 사도행전 6장에 집사를 뽑을 때는, 제비뽑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정한 기준에 맞는 일군을 온 회중이 뽑아서 그들에게 안수하고 일을 맡겼습니다. 회중이 영적으로 성숙하여 인간의 이해에 다르지 않고 올바로 판단하여 뽑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제비뽑기가 필요 없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인간의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고 성숙한 마음으로 의사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보이기에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진짜 할 만한 사람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5: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율법 아래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시대인데도 아직도 죄가 있고 허물이 있고 왜 그렇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신약적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다툼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2. 원수를 용서하게 됩니다.

19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여기 노엽게 한 형제란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상처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상처를 받으면 형제일지라도 마음을 닫기 때문에 그와 다시 화목하기란 견고한 성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산성의 문빗장 얼마나 강합니까? 빗장 질러놓으면 열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상처란 두려운 것입니다. 상처 주기는 쉬워도 상처를 아물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12:15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여기 쓴 뿌리가 넓은 의미로는 죄요, 좁게는 마음의 상처를 가리킵니다.

군대에서도 상관에서 괴로움을 당한 사람이 꼭 부하를 괴롭힙니다. 전혀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상처를 받은 사람이 상처를 주는 일이 더 많습니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져 서로 잡아주고 끔찍한 일들이 발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어 준 상처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쓴 뿌리의 상처를 타고 사탄이 침투합니다. 귀신이 들린 사람 이 상처부터 치유하지 않으면 귀신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옵니다. 이때는 달리 치유할 길이 없습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말씀과 성령으로 치료합니다. 이 모든 고난이 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셔서 너를 낮추시고 구원하시고 마침내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고 이해시키면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머리는 이해하는데 감정은 잘 따라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어떤 마음의 빗장도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 받고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했던 것입니다.

 

3. 은혜를 끼치게 됩니다.

20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온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이는 자신의 입으로 한 말로 인하여 발생되는 모든 결과에 따라 판단과 보상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말을 하는 자는 스스로 욕을 받고 좋은 말을 하는 자는 남의 칭찬과 존경을 받고 스스로 존귀해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은혜를 끼칩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7:28-29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같은 말씀이라도 주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그 말씀 속에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듣는 자로 영적인 만족이 있었습니다.

4.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사람의 말이 그 사람의 생사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2:36-3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로버트 란츠는 말하기를 "우리가 날마다 뱉은 말들이 책으로 출판되지 않을지라도 말세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한 말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심장병을 가졌는데 항상 하는 말이 나는 50을 못 넘길 것 같다.” 이런 말을 1,000번도 더 했는데 그 분이 돌아가시고 호적을 보니 어머니는 만 4936415시간을 사셨더랍니다. 9시간만 더 사셨으면 50이었습니다.

 

특히 성령 받은 사람의 입술은 조심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리자 엘리사가 화가 나서 저주하니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 42명을 찢었더라했습니다. 엘리사의 실수였는지 성경을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성령 받은 사람의 말이 이렇듯 위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부어주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성령 없는 신앙은 검불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혜는 다툼을 사라지게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은혜를 끼칩니다. 그리고 말하는 대로 성취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여서 더욱 성령으로 충만한 복 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04,성령의 은혜 3 (18:22-24)

 

이 시간에도 성령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미국의 부흥사 C.G. 괴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는 일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이요 중요한 일이다.” 참으로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사 무디도 만일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특권 이하로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는 우리 영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모른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힘겨울 뿐 아니라 신앙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게 됩니다. 성령에 무관심하면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지난 날 성령의 은혜에 갈망했던 그 시절처럼 성령에 대해서 더욱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성령의 은혜 앞에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일까요?

 

1. 성령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2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여기서 아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의 아내가 아니라, 특별히 정숙하고 현명한 아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70인역 성경에서는 정숙한 아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여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은혜도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구해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성도의 최고의 복이요, 성령께서는 성도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면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십니다. 조건 아닌 조건이 있다면 우리가 성령을 믿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재감 있게 해드려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함께 계심을 믿고 만사를 도우실 것을 믿어드리고 늘 함께 하시기에 합당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님을 인정하기만 해도 자기를 나타내시며 온갖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지도해 주십니다. 3: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참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16: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성령이 임하시면 임하신 만큼 진리를 체험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천국이 믿어지고, 마음에 천국이 밀려오고, 현명한 생각들이 늘 나를 주관하십니다. 남편이 아내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성도는 성령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3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이 말씀은 가난한 자가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현실과, 부자의 교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세상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교훈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이렇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토록 간절히 사모하건만 엄하기만 하실 뿐 은혜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성령님은 뜨거운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채우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1:7에 그 은혜가 풍성하다 하였습니다. 1: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23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함이니라고도 했습니다. 모두 성령의 은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해 때문입니다.

 

먼저는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오해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에게는 이미 임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것처럼 얼마나 간절해야 들어주실지, 얼마나 기도해야 들어주실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미 오셔서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감사하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욱 위로부터 충만하게 입혀주실 것입니다.

다음은 자기 원하는대로 나타나 달라는 억지 때문에 누리지 못합니다.

고전12: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하셨습니다. 그의 뜻대로 나눠 주십니다. 그런데 내가 선호하는 대로 나타나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을 나타내 주시든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달란트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 좋지만 꼭 그래야만 성령 충만 주시는 건 아닙니다.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고, 그 내용과 함께 우리의 마음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미에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말씀하셨습니다. 응답 없다 말하지 말고 먼저 회개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복음에 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용서의 피의 복음을 모르고 정죄 받아 항상 심령이 답답하다면 성령의 충만함이 어떻게 임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복음으로 마련된 심령에만이 성령께서 기쁘시게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을 믿고 늘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24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많은 친구 가운데는 좋은 친구도 있지만 나쁜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친구로 사귀면 그 중에서 나를 이용하여 해를 끼칠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그 좋은 친구는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십니다. 15:13-15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성령님도 우리와 친밀하신 분이십니다. 14:16-17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그는 진리의 영이라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얼마나 친밀하시면 우리 속에 와 계실까요? 그러므로 믿고 늘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위리의 좋은 친구이십니다. 우리도 성령님의 좋은 친구가 되어야 겠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친밀하심을 믿고 늘 인격적으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이 대화의 제목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과 대화를 끊으면 안 되듯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지면 안 됩니다. 일방적인 대화는 대화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인정받고 크게 쓰임 받아 보려고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으려고 근신하고 절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열심히 했답니다. 그래서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에게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과 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인 내 열심만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소리에도 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아버지께서 예수를 높이시매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서 믿는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셨고 또 충만하게 오시고 계시며 또 우리를 영광의 형체로 변화시키시기 위하여 온전히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고, 믿고 회개하시고, 믿고 늘 대화하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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