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과 함과 야벳의 교훈 (창 6:10)
이 시간에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노아의 사역을 뒷받침해준 참으로 귀한 협력자들이 바로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성경 기록순대로 셈이 맏이고 다음이 함과 야벳 이렇게 보는 견해도 있고, 함이 막내고 야벳이 둘째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셈은 ‘이름, 명성’이란 의미입니다. 함은 ‘뜨거운’이란 뜻입니다. 야벳은 ‘넓혀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셈은 구세주 메시아의 줄기가 되고 정신문명을 이룬 동양 황인종의 조상이 되었고, 함은 피부가 까맣게 그을린 아프리카 흑인, 야벳은 물질문명을 이룬 유럽의 백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한 일을 따라 축복과 저주를 받았는데 셈은 영적인 축복을 받고 야벳은 물질의 축복을,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협력입니다. 노아 방주는 노아와 세 아들 가정이 협력해서 만들었습니다. 감동적인 것은 그들은 결혼하여 방주를 완성하기까지 수십 년이었건만 자식도 낳지 않고 방주 짓는 일에 힘썼습니다. 함께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할수록 감동적입니다. 노아는 직접 사명 당사지니 그렇다 치고 내조자 노아의 아내도 훌륭하고 노아의 아들들도 얼마나 훌륭합니까? 아버지의 사명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아들들보다 세 자부들이 더 아름답습니다. 모두가 비웃는 그 집에 시집와 신앙과 사명으로 뭉쳐 방주를 지었으니 말입니다. 영적 생활에도 이런 협력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 편 부인하거나 치우치지 않고 협력해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음식도 삼합이 있다고 합니다. 진리도 삼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이 충성을 다해 협력했듯 우리가 충심을 다할 삼합이 있습니다.
우리가 충성해야 할 삼합은 무엇일까요?
1. 교리적 삼합입니다.
고후13:13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 성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성부의 사랑, 성령의 교통 이 세 가지는 삼합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편만 강조하거나 어느 한 편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자와 성령을 무시한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부 하나님은 믿었지만 성자 예수님을 배척했고 성령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메시아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왜곡된 메시아관으로는 성자 예수를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극소수 깨어 있는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은 물론 항상 성령에 충만해 있었고 성자 예수를 만났습니다.
오늘날 성령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부정 및 무관심은 죽은 신앙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사랑과 구속의 은총을 적용시켜 주시기 때문에 성령의 교통이 없으면 그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다 해도 복음을 잘 모른다면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믿음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라는 교리적 삼합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방주를 잘 짓게 됩니다.
2. 마음의 삼합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삼합이 되어야 합니다. 삼상12:20에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했습니다. 마음의 삼 요소는 지정의입니다. 지(知)는 지식으로 아는 요소입니다. 정(情)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의 요소입니다. 의(意)는 계획과 결심과 실천을 말합니다. 이 知情意 세 가지가 잘 삼합되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약1:22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행함의 의지는 없고 지식만 늘어가는 죽은 신앙입니다. 지식밖에 없는 신앙 이것은 비정상적인 신앙입니다. 지식만 열린 신앙은 교만하고 판단력만 늘어 시험에 빠져듭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지정의가 잘 나타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마음인데 이것은 신앙의 지정의 모두가 결여된 것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열려 있지 않으니 희망이 없습니다. 뭐 한 가지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없는 완악한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돌밭 마음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지는 자입니다. 이 마음은 지와 정은 있지만 의지가 약한 마음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인내를 더 묵상해야 합니다. 가시떨기 밭 같은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정과 의지가 매우 취약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좋은 옥토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인내로서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었는데 지정의가 모두 하나님 앞에 드려진 마음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바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한 믿음이라야 신앙의 방주는 잘 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보물의 삼합입니다.
어떤 보물일까요? 고전13:13을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의 보물입니다. 이 신망애(信望愛)의 삼합은 항상 있어야 할 것으로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안 됩니다.
신앙의 초보일 때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먼저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믿음의 기초가 튼튼해야 구원을 얻고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세상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행복도 없고 현세적입니다. 세상에만 쌓으려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세상 소망만 기도합니다. 구제와 봉사와 전도와 선교의 주의 일에 관심 없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바른 신앙이 확립되지 않습니다. 죽으면 천국 가겠지 그 정도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날마다 소망의 은사를 간구하세요. 참으로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마지막은 사랑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제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면 믿음도 따라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부활의 예수를 믿지 못해 시체에 부을 향유를 가지고 왔지만 사랑했기에 부활하신 예수를 맨 먼저 만나고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정 사랑하면 믿게 됩니다. 진정 자녀를 사랑하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도 따라서 예수를 믿고, 남편도 아내도 사랑하기에 예수를 믿고, 장인 장모도 예수를 믿고,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도 예수를 믿게 됩니다. 내 사위가 믿는 예수 나도 믿겠다. 불신 장인 장모가 그 날부터 교회에 나옵니다. 내 시부모가 믿는 예수 나도 믿겠다고 자부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소망도 생깁니다. 사랑의 하나님 계신 곳에 나도 가도 싶습니다. 영광 염산에 가면 순교성지가 있습니다. 625사변 때 공산당들이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어놓고 죽였습니다. 공산당이 염산교회 장로님 한 분을 체포해 갔습니다. 그 장로님은 얼굴이 천사 같이 빛나는 믿음의 장로였습니다. 그러자 부인 권사님이 난 장로님 없이는 못 산다면서 같이 가서 함께 끝까지 믿음 지키다가 순교했습니다. 권사님의 그 믿음 어디서 나왔을까요? 사랑이 순교의 신앙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영적 수준이 껑충 뜁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정상에 서게 됩니다. 전도도 잘 됩니다. 항상 있을 것이라 했으니 외치는 믿음 전도도, 간증의 소망전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전도가 제일입니다. 사랑전도하면 쉽고도 놀랍습니다. 전도 많이 한 전도한 전도 왕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음식전도가 가장 쉽고 좋답니다. 목구멍이 열려야 마음도 열린다고 합니다. 극진히 대접하면 마음을 연다고 합니다. 먹은 사람은 나쁜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삶을 천국으로 만들어 놓는 위대한 삼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몸과 영혼과 생명까지 다 바쳐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주님은 결코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거나 부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크고 삼면 장방이 같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룰 아름답고 원만한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노아의 세 아들처럼 온전히 삼위일체 신앙과 마음을 다하고, 항상 있을 믿음 소망 사랑의 영원한 복으로 온전히 삼합하여 온전한 은혜 속에서 크게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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