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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부활로 이룬 위대한 결과 고전15:1-11

공 상희 2010. 4. 2. 14:42

십자가와 부활로 이룬 위대한 결과 고전15:1-11

바울이 고전15장에서 부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첫째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하면서도 육체의 부활은 인정하지 않는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과연 부활이 있는가?’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질문에 답변하고 ,12-14장에서 은사를 다루었는데 기독교의 핵심진리는 은사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에 있음을 주지시켜 고린도교인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환상이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해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결과라는 것입니다.(3-4) 결코 환상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존재하며 더구나 상당수가 존재하므로 ,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생존하고 있으므로 , 주님의 부활을 몇 몇 사람의 조작에 의한 결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5-8)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 자신의 회심에 의해서 입증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9-11)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핍박자에서 복음전파자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의 핵심진리를 고린도교인들에게 확고히 심고자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진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마지막 때에 부활하여 영생복락에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궁극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속적인 복을 받아 누리되 그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주의 말씀을 믿고 지키면 구원을 얻는 다는 말입니다. 역으로 주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듣되 마음에 새겨 가져가고 싶어도 가져갈 수 없도록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성도에게서 떠나면 끊임없는 의심과 불신이 생겨나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 원합니다.

십자가 대속과 부활사건을 통한 복음의 위대한 결과는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주는 위대한 결과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3-4)

3-4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의 예언대로 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란 말은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졌던 것으로서 그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 곳곳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창3: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너는 마귀를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사단의 권세를 깨뜨릴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16:10“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라.”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합니다.

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였으며,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구약성경의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하나의 신화적 사건으로 날조하여 사람들로 믿디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무리들에 의해 계속 시도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명백한 역사적 사건임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성경말씀대로 그리스도와 같이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부활을 선물로 얻는 놀라운 상급을 받은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놀라운 결과는

둘째로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5)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제일 먼저 안 것은 여인들입니다.

눅24:1“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3...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 하더라. ...5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 가운데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뵌 것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를 제쳐두고 베드로를 부활의 첫 목격자인 것처럼 증거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에 최고의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때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 곁은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지 못하고 멀찍이나마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좇아갔다가 오히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기가 막힐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눅22:55_62)

이제 베드로의 수제자 아니 제자로서의 자격, 생명, 체면이 완전히 끝났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어떻게 예수님의 수 제자라는 사람이 ‘이도 그 당이라’ 고발하는 계집아이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이 그 베드로를 제일 먼저 찾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이 담고 있는 것은 화해와 용서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화해와 용서라는 놀라운 결과를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단 한 번도 제자들을 과거일로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원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부활자체를 믿지 못할 때는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눅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9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렇게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책망하신 예수님이시지만 막상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사실 가지고 따지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키고 사도의 직분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하시며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였던 바울 자신, 죄인중에 괴수라고 스스로 평가하는 바울에게 주님께서 저주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재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은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 미래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부활은 현재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간의 용서와 화해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 사실에 대한 확증이라는 것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화해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또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 부활시킴으로 그 사실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것이 풍성했습니다. 특히 성령의 은사와 역사가 풍족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 간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요 , 부활은 현재의 화해와 용서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성도간의 용서와 화해보다 크거나 높거나 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다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비록 성령의 은사를 없을지라도 성도간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전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의 신앙, 부활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는 십자가와 부활이지 성령의 은사가 아님을 믿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진 놀라운 결과는

셋째로 자격 미달의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9-10)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일체의 양보없이 강한 톤으로 변호했습니다. (롬1:1,고전1:1,갈1:1등)

고후1:1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그런데 본문에서는 자신에게는 사도의 직분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직분은 이와 같이 실상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격으로 따지자면 사도 중에 사도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인들 자신 있게 사도라고 자처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배반하고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어떻게 제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조차 직분에 자격이 없다면 바울을 비롯한 다른 제자인들 어떠하겠으며, 오늘날 우리는 직분에 대한 자격이 제대로 바로 된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이 맡겨질 때 자격을 이유로 지나치게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직분을 거부하는 것은 겸손이긴 하지만 지나치면 교만이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 자격이 되든 안되든 성도는 순종해야할 뿐입니다. 모세도 기드온도 예레미야도 스스로 생각할 때 자격이 미달하고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부르실 때 순종하고 목숨을 다받쳐 충성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자격이 미달할지라도 무조건 순종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부탁합니다.

교회에서 주신 직분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다 된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에서 선거 기타 임명등을 통해서 직분을 받은 것은 자신들이 완벽하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직분을 받기 전에는 겸손하고 순종하며 충성스런 일군들이 목사 권사 장노의 직분을 받고나면 , 목에 힘이 들어가고 군림하려 하고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불순종하고 도전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심은 충성되이 여겨 잘 감당해주라고 신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우리가 직분에 합당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받기 전과 동일하게 아니 더 겸손하고 더 순종하며 더 충성스럽게 주의 일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놀라운 결과로 주는 겸손과 순종과 충성입니다.

10절에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자신이 온전한 자신이 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즉 과거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부끄럽고 빙충맞고 바보 같았던 자아에 대한 고백입니다.

바울이 예수 밖에 있을 때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가 있었습니다.

학문이 있었습니다. 열심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그였습니다.

그런 그가 한 일은 살인자요 포행자요,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우리도 가끔 지나간 날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못나고 심한 혐오감을 느껴 부르르 떨기조차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온전히 자기되지 못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고 다른 성도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을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신분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비판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결정적인 약점 , 부족한 점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울 된 것은 자신이 온전한 자신이 됨을 말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팔레스틴에서 시작한 복음을 세계의 종교로 우뚝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마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잘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못되는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통치 속에 살기에 사업이 잘되는 것도 가정이 행복한 것도 교회가 부흥되는 것도 사업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도 다 주님 주신 은혜입니다.

은혜가 인도하는 대로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업과 인생의 성공과 실패 거기에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롬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0절 말씀은 그러므로 바울의 말인즉 하나님께서 물 붇듯이 부어주신 은혜를 쏟지 않고 가득 채운대로 보존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고 무한 한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내 안에서 그 은혜가 완전히 소진할 수 있다는 것도 아시는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면 재앙과 심판이 있다는 것도 아시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도록 지키지 못하면 무서운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롬2: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노의 재앙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절제해야 합니다. 자연 자원을 살리기 위해 종이 한 장이라도 아끼며, 음식 찌꺼기를 줄이고 ,세제, 물의 과다한 사용을 억제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고갈시키지 않기 위해서, 은혜가 은혜되게 하기 위해서 철저히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아낌없이 투자해야 합니다.

자연을 살리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 녹지 공간을 확보하고 , 나무를 심고, 하수 처리시설을 만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갈시키지 않기 위해 ,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고, 우리 가운데 은혜로 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자해야 합니다.

물질도 투자하고 , 시간도 투자하고, 재능도 투자해야 합니다.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해야 합니다. 말씀도 듣고 봉사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은혜가 고갈되지 않고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주는 위대한 결과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3-4)

둘째로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5)

셋째로 자격 미달의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9-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가 받은 축복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으셨는지요?

에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은혜 충만한 상태로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우리 모두 구원을 받고 나아가 세상에 빛을 비추는 자가 되고 세상에 소금으로 썩어져 가는 세상을 지키는 역할을 감당하시는 줄 믿습니다.

복음이 미치는 위대한 역사는 죽은 자를 살리고 지옥갈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며 영벌에서 영생으로 변화시켜주는 재창조의 복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2000년이 지난 후 이방인인 우리조차 은혜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능력이 된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