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설교

승리의 확신 외 3편

공 상희 2009. 11. 24. 17:08

1. 승리의 확신

성경 : 고전 10:13

 

 

야구 역사상 베이비 루스는 유명한 홈런왕입니다. 그는 714개의 홈런을 때려서 1976년까지도 세계 최고 기록을 유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이비 루스가 홈런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스트라이크 아웃 당한 기록에 있어서 세계 기록 보유자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타석에서 타자의 불명예라고 할 수 있는 스트라이크 아웃을 자그마치 1330번이나 당한 기록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마 야구 역사상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베이비 루스에게 1330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이라는 과감한 실패가 없었다면 그는 결코 홈런왕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일을 시도할 때에는 실패와 성공이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타석에 들어선 야구선수는 홈런을 기대하지 스트라이크 아웃을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홈런왕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홈런 기록의 두 배가 넘는 스트라이크 아웃에도 기죽지 않고 그 실패를 무시할 줄 아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실패를 두려워합니까?

 

1. 실수한 이스라엘과 우리의 상황

 

이스라엘 백성들도 많은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많은 은혜 가운데서 살았었습니다. 물이 필요하면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식량이 필요하면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시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뢰면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막을 횡단하며 여행을 할 때면 낮에는 폭염으로 고생을 하게되어 구름기둥으로 보호를 받았고 밤에는 혹한에 고생을 하므로 불기둥으로 따뜻한 보호를 받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을 행하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간음을 하였고 주님을 시험하며 나아가 원망을 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이스라엘과 우리의 모습이 매우 흡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보다는 세상을 향하여 살아갑니다. 친구들의 유혹에 빠져 가정과 학업을 등한히 하여 탈선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여 섬기기보다는 타인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여러 가지 비행을 감행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를 벗어납니다.

 

2. 시험을 당한다면

 

1) 시험의 종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어로 test는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거나 평가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을 의미하며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같은 것입니다(약 1:2).

그리고 temptation은 '사단이 믿는 자를 넘어뜨리려고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헌금을 하면서 재산을 처분하기도 하였지만 그 속에 사탄의 유혹이 있어서 절반만 바침으로 결국에는 죽음을 당하였듯이 사람을 패망하게 합니다.

2) 유혹을 당하는 모습

그렇다면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자기의 욕심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3-14).

세상에서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악된 속성상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은 무관심보다는 낫습니다. 호기심이 있어야 새로운 발견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호기심은 무관심보다도 더 나쁜 것이어서 인생을 낭비하게 합니다.

그런데 유혹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 : 욕심이 생김

2단계 : 미혹됨

3단계 : 죄를 범하게 됨

4단계 : 사망에 이름

여기에 사용된 성경 단어는 낚시 용어이다. 유혹의 단계를 낚시꾼이 낚시를 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우리가 당하는 유혹은 어떤 것들 입니까?

성경은 3가지 영역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 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육신의 정욕은 성적인 죄, 무절제, 게으름을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우리가 가질 수 없거나 가져서는 안 될 물건들을 보고 욕심을 내는 일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이지만 내적으로는 죄가 되는 정신적인 또는 시간적인 방종도 포함됩니다(호색영화, 나쁜 독서, 시선의 방치 등)

이생의 자랑은 이 세상에서 위대해져서 부나 권력, 지위 따위로 이 지상에서 자기의 왕국을 세워보려는 욕심입니다.

4)어떻게 그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고(마 6:9-13) 말씀을 읽고 준행하며(시 119:9,11)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일입니다(갈 5:16). 내 양심을 좋은 것들로 채워야합니다. 나쁜 것들이 들어가 있으면 그것에 따라 악한 일을 겁 없이 하게 되므로 양심의 내용물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하나님이 하시는 일

 

절벽 길을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실수하면 절벽 밑으로 떨어질 아주 좁은 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길을 걷기 전에 아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얘야, 이 길은 매우 위험하니 한 눈 팔지 말고 아버지 손을 꼭 잡거라." 아버지와 아들 중에 누가 더 손을 꼭 잡았겠는가? 물론 아버지입니다. 아들은 처음에는 겁이 나서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가지만 얼마쯤 가면 주변의 아름다운 광경에 도취되어 자기가 절벽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곤 아버지의 손도 놓아 버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길이 끝날 때까지 아들만 바라보고 혹시 아들이 실수하여 손을 놓칠까봐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길을 갑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요 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권세를 주셨으니).

2)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실 힘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사 41:10-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3)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애 3:22,23-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 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청소년의 시기는 방황의 때입니다. 그렇기에 똑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해찰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인생을 힘 있게 살아갑시다. 아무리 어려워도 용기를 잃지는 말아야 합니다. 건강과 재산과 명성까지 잃어버린다고 해도 용기가 남아 있으면 아직 다시 새싹이 돋게 하는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2.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성경 : 요 19:23-30

 

 

"너 커서 무엇이 될 테냐?"

"의사요."

"왜?"

"너무너무 아픈 데도요 돈이 없이 병원에 못 가는 사람들에게 치료를 해줄 거예요."

그러나 이런 꼬마의 그 순수한 꿈이 성장하면서 그대로 간직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의사 장기려, 청십자 병원 명예원장, 청십자 의료보험 대표이사장, 복음병원 종신명예원장, 부산 백병원 명예원장, 부산 아동병원 이사장, 일신기독병원 이사장, 부산 청십자 사회복지회 이사장, 장애자재활협의회 지부장, 이 모두가 그를 설명해 주는 직함이다. 그리고 1979년도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부문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장 박사에게는 자신이 의대에 들어가기 전에 결심한 것이 있었다. "경성의전의 시험을 치르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죠. '의사가 되게 해주신다면 평생 돈 없는 사람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마음이 안 변하면 성공한 것이라는 각오로 살아왔답니다." 그는 과연 그랬다. 가난한 이를 위해 평생을 흰 가운과 더불어 산 것이다.

그러한 결심은 6.25 동란으로 남하한 그가 부산영동 영선국민학교에 천막을 치고 무료진료활동을 시작하면서 구체화된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복음병원이다. 그러나 병원이 확장되고 병원의 활동이 자신이 처음 세운 뜻과 점점 멀어지게 되자 그는 민간의료보험제도를 구상하게 된다. 그 결실로 맺어진 것이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다.

가난한 시민들에게, 몸이 아파도 병원 한 번 제대로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병원진료의 혜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이야 의료보험제도가 보편화되어 병원 가는 것에 큰 부담을 갖지 않고 있지만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발족한 1968년 당시만 해도 생계유지에 급급한 이들에게 병원진료란 먼 나라의 일이었다.

조합원들의 월 회비를 60원으로 하여 병이 났을 때 의료혜택을 받게끔 하고 건강할 때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청십자 의료보험이 확산되면서 1975년 청십자 의원이 개원되었다.

무료진료소로서 3개의 천막으로 시작한 복음병원이 지금은 부산에서 손꼽히는 종합병원으로 성장했고 그가 한국 최초로 실시한 청십자 의료보험이 이제는 20여 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어깨가 무거우리 만치 많은 직함을 가진 그이다. 그럼에도 자기 소유의 집 한 칸 갖고 있지 않은 그이기도 하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며 웃는 장 박사. 그의 환한 웃음이 욕심 없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연상케 한다. 그에게서 진료를 받은 환자들은 그를 가리켜 꼭 한 마디씩 한다. '어쩌면 저렇게 맑은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장 박사님처럼 생활하면 병이 없겠다', 혹은 '저런 분이 나이를 한 살씩 먹어 가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이라고 말이다.

6.25 동란 때 차남만 데리고 남하하면서 이제까지 남은 가족들과는 이산가족으로 헤어져 혼자 생활을 하지만 그에게는 적적함을 느낄 짬이 전혀 없다. 하루, 일 주일을 꽉 짜여진 일정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오전 6시부터 그의 일과는 시작된다. TV에 방영되는 생활영어를 듣고 나서 일하는 식구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린 다음 식사를 하면서 부산 MBC TV의 '자갈치 아줌마'를 시청한 뒤 8시 20분 집을 나선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청십자 병원 2층에 있는 4평 남짓의 '명예원장 장기려 박사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진료한다. 월, 화, 수, 금요일 오후에는 백병원에서 환자진료와 회진을 한다. 그에게는 일요일도 쉴 틈이 없다.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장 박사가 78세의 고령임에도 꽉 짜여진 일정 속에서 늘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신앙의 힘이라고 한다. 그의 순수함, 오직 한 길을 통해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위해 그들에게 기쁨을 전하는 그의 사랑, 그것은 곧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예수의 공스런 생애를 뒤쫓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떤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사셨는가?

 

1. 가난한 자를 위해서 더욱 가난해지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에게 지금 남은 것이라고는 옷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옷마저도 주님은 군병들에게 아무 말 없이 내어주신다.

군병들이 나누어 가진 겉옷은 머리에 싼 수건, 신, 허리띠, 두루 감던 천과 수실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 군병들이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하였던지 사형수의 옷을 탐내었다.

실제로 우리는 환자의 몸이나 옷을 만져도 혹시 병이 옮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는데 하물며 사형수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다지 상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난하여서 그 옷을 탐을 내었다.

세상에는 많은 가난한 삶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것은 예수님처럼 더욱 가난해지길 원하는 사람들이 도와야할 대상인 것이다. 인도의 마더 테레사 수녀를 따르는 수년들은 서약을 할 때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더욱 가난해지겠다'는 서약을 한다고 한다.

나아가 세상의 부자들은 그 영혼이 가난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생으로 풍요해진 우리는 그들의 영혼의 가난함을 위해서 구원의 복음도 나누어줘야 한다.

 

2.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는 친한 이들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모친 마리아에게 예언이 있었는데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리라"(눅 2:35)는 예언이었다. 이제 자신의 친아들이 구원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시다가 임종을 맡게 되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의 이후를 부탁하였다. 그러자 요한은 이 때부터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돌보았다.

예수님은 당신이 최후를 맞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향해 생각을 집중하여 억울해하고 분노를 터뜨리기보다 자신의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내어 놓으셨다.

사랑은 남의 일을 돌아보고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환경과 관계없이 항상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도리인 것이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남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3. 기꺼이 영혼까지 내어 놓으신 정신

30절의 "영혼이 돌아가시니라"는 '드렸다'는 능동태 동사로 주님의 자발적인 죽으심을 의미한다. 눅 23:46에서 주님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일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다. "저가 그 영혼을 사망에 쏟으시고"(사 53:12). 주님은 자신의 영혼을 이 세상을 위해서 쏟아 놓으셨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우리가 주님을 좇을 때 어떤 정신으로 해야 할 것인가? 정당히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명을 쏟아 놓듯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놓는 헌신이어야 한다. 주님의 자비를 맛본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물)로 바쳐야 한다. 이것이 영적인 예배다(롬 12:1).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예수님처럼 더욱 가난해지려는 마음으로 주변사람의 필요를 관찰하고 생명까지라도 내어 놓은 사람이다.

 

 

3. 아름다운 소식

성경 : 왕하 7:8-9

 

(1) 아람군대의 강성함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그 대응책

1)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양식을 구하리라

2) 장관-자신의 지혜를 믿으며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없음

3) 문둥병자들-모험을 강행/죽기를 각오함

 

(2) 문둥병자들의 행위

1) 죽기를 각오하고 아람진에 항복하러감

2) 아무도 없자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3) 자각과 행동-'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4)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함-'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5) 사람들이 아람진에 가서 노략을 하여 양식을 구함

6) 장관이 사형됨-

스아-19.5 리터(12.5 l)

세겔-12.5g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을 때 성 중에는 기근이 심하여 나귀 머리 하나에 80세겔 이었고 합분태(콩) 1/4갑에는 5세겔이었습니다. 나귀고기는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지 않는 것이지만 기근이 너무 심하여 그것도 먹었습니다. 이러한 때 네 문둥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소식, 즉 먹을 것과 적군의 도망을 전한 것은 귀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결실을 추구하는 우리 중고등부에서 친구들을 부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여주는 문둥병자들의 행동들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전하여 줄 것입니다.

 

1. 그들은 결심과 실행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이들은 스스로 "불결하다, 불결하다"고 하면서 다니는 버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그들에게 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사마리아 성에서는 더 이상 음식을 구걸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 않고 아람 진으로 가서 생명을 구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많은 성도들에게서 이러한 결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욥은 10자녀를 잃고도 하나님을 구하였고(욥 1:20) 다니엘도 이방에 잡혀가 우상제물을 먹지 않기로 뜻을 정하여 시험을 이겼습니다(단 1:8).

어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서 노래방에 3번이나 찾아가서 결국 밤 12시가 넘어서 아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으면서 부모의 애절한 정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방면에 뜻을 정합니다. 악인도 악에 대하여 뜻을 정하고 동요하지 않는데 우리도 언제나 선을 향하여 뜻을 정하고 그 선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여러분은 지금 이러한 결단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2. 주님이 하신 일을 발견함

 

그들이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진 가에 이르러 본 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람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하고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큰일도 쉽게 이루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불평을 하고 대적을 합니다.

"1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2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왕하 7:1-2).

왕이 의지하는 장관은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시면 대홍수가 옵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베푸시면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요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요하심은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롬 8:32). 하나님의 부요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뿐 아니라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은사(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3). 이스라엘이 성 안에 갇혀있을 때 성 밖에서 대적을 물리치신 하나님은 더 큰 은혜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 내가 겪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체험들입니다. 아플 때 기도하여 낫고, 지하철을 타면서 기도하여 등교시간에 늦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체험하면 살아가고 있습니까?

 

3.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선을 행함

 

1)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멸시를 받았으나 한 민족으로 자신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굶주려 구걸을 할 때 자기들을 도왔으며 한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인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부요함을 나누는 일이 당연함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어느 초등학교 5년 아이가 자기에게 소중한 가까운 관계를 20가지 정하는데 1) 부모, 2) 이모 딸, 3) 뽀삐, 4) 할머니, 5) 친구 등으로 열거하였습니다. 비록 강아지가 할머니를 앞서긴 했어도 그리고 친구가 5번째에 속해도 그에게 친구는 소중하였습니다.

나의 가까운 친구는 누구입니까?

유안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영원히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우리의 학교친구들은 소중합니다. 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1)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 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복음을 전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복음은 먼저 나에게 구원을 주고 이어사 친구에게도 구원이 능력이 됩니다.

 

2) 증인은 무의식적으로도 그러나 사랑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인천에서 겪었던 일니다.

그때는 토요일마다 주일을 위해 목욕탕에 가곤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공중 목욕탕으로 곧바로 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데, 길에서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평소 우리 집에 자주 오는 분이어서 낯이 익었습니다. 그는 나를 반기면서 말합니다. "저어, 사모님은 늘 뵙고 신세를 집니다마는 목사님은 오래 간만에 만났으니 두둑이 좀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 참, 아무것도 없네요. 어쩌지요?" 했더니, "에이, 그러시지 말고 좀 주세요. 목사님"하면서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않아서 저는 난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그 사람을 좀더 가까이 오라고 한 다음, 방금 씻은 깨끗한 손으로 문둥병자의 손을 덥석 붙들어 잡았습니다. 그리고 불쑥 소리쳤습니다. "정말 없단 말이야!"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아아, 목사님 참말 고맙습니다. 돈을 얻은 것보다 더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몇 번이고 인사를 했습니다. 돈을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름다움, 즉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보고 느끼며 살아갑니까? 특별히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합니까? 그리고 나는 이 아름다움을 친구에게 전하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까?

4. 어! 난 어디 갔지?

성경 : 사 43:1-7

 

 

옛날에 건망증이 아주 심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 분이 길을 가다가 급해서 산에 올라갔다. 갓을 소나무에 매어 놓고 일을 보고나서 일어서는데 갓이 머리에 부딪쳤다. 공짜로 갓을 얻었다고 좋아하던 영감님이 실수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옷을 버린 할아버지는 발끈하며 도대체 누가 이런데다 실례했냐고 화를 내는 것이다. 주막에서 이 영감님을 지켜보던 한 스님이 장난기가 발동해서 좀 충격을 줄 양으로 할아버지가 주무실 동안 머리를 깎고 자기 옷을 바꿔 입히고는 줄행랑을 쳤다. 이 할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 변한 자기 모습을 보고 한다는 말이 "어, 스님은 여기 있는데 난 어디 갔지?"였다고 한다.

영화 '샤인'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요구 때문에 정신분열증을 얻고 망가진 인생을 살게 된다. 자기를 상실한 것이다. 내가 아는 분 중에 좋은 가정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간암에 걸렸다. 열심히 기도한 끝에 그 형제가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하고 작년 12월초에 세상을 떠났다. 그 누나는 동생이 자기 인생을 살다가 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쌍한 마음에 많이 울었다고 한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누나가 동생의 인생을 돌아보니, 그는 어렸을 땐 엄마가 원하는 인생을 살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원하는 인생만 살았고, 결혼한 뒤에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죽기 일주일 전에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인생을 자기가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건망증 심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대학생들 중에도 자기가 어디 갔는지 의아해 하는, 자기를 상실한 젊은이들이 많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부모의 과잉보호와 선생들의 욕심 때문에 한 번도 자기가 인생의 주도권을 쥐어보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학 시절이야말로 이들이 자기를 찾아야 할 때다. 그런데 대학 생활에도 어려움이 많다. 지난 200년 동안 전 세계의 대학은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장악했다. 대학에서 절대자나 영적인 세계, 초월적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아주 웃기는 일이 되어버렸다. 원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자기를 바로 알고 세계를 바르게 알기 위해 세워진 대학이 오히려 하나님을 죽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공산권에 있는 대학이야 오죽 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세뇌를 했는데도 대학마다 오히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사모함이 간절해지고 있다. 이성과 경험, 실험에 근거한 논리적인 실증주의로 세뇌시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대학생들이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와 초월의 세계에 대한 목마름은 갈수록 더해가는 것이다.

지금은 공산권 대학들과 캠브리지, 옥스퍼드, 하버드, 예일 등 전 세계의 훌륭한 대학에서 적어도 10-20퍼센트 이상의 대학생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영적인 분위기가 20세기말에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영적 각성과 목마름이 터져나가는데 한국에는 7, 80년대에 많은 학생들이 주님께 돌아오다가 90년대에 이렇게 영적으로 메말라 가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여기 모인 젊은이들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는 무엇인가와 관련된 귀중한 진리를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

사람은 자기의 죽음, 출생을 알지 못한다. 죽은 뒤 어떻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직관과 경험, 그리고 이성, 이 세 가지가 사람이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들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로 알 수 있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야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앞에서 제기한 질문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이 질문들인데 이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저 하늘에서 알려주셔야 한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계시'라고 한다.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제한된 이성과 경험으로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면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자기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내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의 인생은 부모의 것도, 선생이나 목사도 사장도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가?

 

첫째는 하나님이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성경은 선포한다. 이 사실은 인간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선포'하여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을 우리가 하나의 정보로만 받아들인다면 이 사실이 우리의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는 암송하는 기계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깊이 묵상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보라, 글을 써보라,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나를 창조하셨다는 이 사실은 너무나도 고귀한 것이다. 우리가 부모를 귀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분들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꾸르베라는 화가는 "The Origin of the World"라는 제목으로 여자의 음부를 그렸다. 아빠의 정자를 엄마가 받아서 아이를 낳는다는 점에서 생물학적으로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끝나면 우리의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엄마 아빠가 필연적으로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함께 사랑을 나누다가 우연히 내가 생긴 것일 뿐이다. 이범선은 <오발탄>이라는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나는 잘못 태어났나 보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내가 우연히 태어난 게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이런 것들은 모두 진화론이 가져다주는 생각들이다. 진화론을 신봉했던 호튼이라는 영국의 휴머니스트는 "3억 년 전, 나의 조상은 물고기였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당신의 조상이 오징어일 수도 있다. '오'씨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오징어에서 진화되어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보면 지존파의 행동도 오징어 칼질 하듯이 한 것 뿐일 수 있다. 현상을 보고 분개하지 말고 그 근원을 생각해보라. 이처럼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인생을 평가하면 별 볼일 없어진다.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권능의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구속했기 때문에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다. 본문에 나타난 '구속'이란 말은 '노예를 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해서 '속'량해 준다는 말이다. 이 노예상태는 다름 아닌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나 선생, 목사, 사장 등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죄와 욕심, 본능, 감정이 나를 끌고 가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노예처럼 억압과 부자유함에 시달리는 것이 인간의 실종이라고 표현한다.

이 말씀이 주어진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바벨론은 멸망하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풀어주는데, 하나님은 구스와 스바를, 이집트와 이디오피아를 몸값으로 페르시아에게 지불하고 해방시켜주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하나님은 속죄양의 피를 흘리는 제사법을 통해 인간을 구속하신 원리를 보여주셨다. 레위기 17장 11절은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우주와 인간의 창조자이시라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 외에 우리가 죄의 생활,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내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짐승의 피를 통해 구원받는 길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지나간 세대와 다가올 세대의 죄를 어떻게 뿌리까지 해결하고 참다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예수님의 보내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 만민들의 추악한 죄악, 가시 같은 아픔과 상처들을 다 예수님이 지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렸던 어린 양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게 해서 죄를 다 담당하게 하신 것이다. 내가 과거에 지은 죄, 현재의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 아니 과거에 이 땅에 살다간 모든 백성들의 죄와 앞으로 올 세대의 죄까지 다 담당하신 십자가의 보혈의 피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는 구속자다, 피로 너를 값 주고 샀다,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다. 제각기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하는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철학과 좋은 가르침일 수는 있지만 인간에게 진정한 구원의 길이 될 수 없다고 하는가?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분이 정한 길이 있지 않겠는가? 그분이 정하신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길이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될 수 없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고베에 지진이 났을 때의 일이다. 일본에 유학중인 남편을 만나러 갔던 아내가 지진으로 무너진 집 기둥에 함께 깔렸다. 이들은 신혼 3개월째였다. 다섯 시간 정도 같이 버티다가 아내가 약해지자 남편은 피를 내어 입에 흘려보내기도 하고 인공호흡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여인은 '고맙다'는 말을 남가고 먼저 갔다. 혼자 살아남은 남편이 오죽 아내를 살리고 싶었겠는가. 인간의 한계가 여기 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남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시도인가를 알 수 있다. 구원은 내 안에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와야 한다. 물속에 빠진 자기 얼마만큼 자기 힘으로 나올 수 있으며 불속에 갇힌 자가 얼마만큼 헤쳐 나올 수 있는가.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밧줄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축복은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 믿으면 예수의 피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진리가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믿느냐고 되묻는다. '믿어지지 않는다'란 수동태의 이 표현은 맞는 말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수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내가 믿는' 선택과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선택해야 할 책임도 있다.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라는 것을 믿는 진정한 자기 발견에 이르게 될 때 놀리운 축복을 받게 된다. 한 마디로 수지맞는 것이다. 요즘은 전도할 때도 손해냐 이익이냐를 구분해서 전해야 한다. 옛날엔 진리냐 아니냐를 논증해야 했는데, 지금은 상업주의 시대라서 상업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셨을 때 '유익'이란 단어는 경영학 단어이다. 예수 믿는 것이 수지맞아야 한다.

여기 처음 오신 분들은 친구 때문에 억지로 왔을 수도 있고, 체면 때문에 왔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을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믿음의 선물을 주시려고 이 곳에 초대하신 것이다. 이곳에 온 여러분의 책임은 무엇인가? 진화론에 근거하여서 내 인생도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살든지,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사는 것이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고 성실하고 칭찬 받지만 내면을 보면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샤워를 아무리 해도 탕 속에 아예 잠겨버린다 해도 내 인생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고, 내 속에 있는 죄와 욕심과 탐심과 감정이 나를 다스리고 있구나 하는 고백을 가지고 있는가? 권능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를 의지하면서 사는 것, 나를 사랑하시되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내 생명을 구원하실 만큼 사랑하신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 수지 계산서를 만들어 보라.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 살면 수지맞는 것 세 가지를 오늘 본문에서만 살펴보자.

 

첫째, 근원적인 평안을 얻게 된다.

 

2절을 보자. 우리가 누릴 평안은 우리를 이 세상에 만들어 보내신 하나님의 책임을 질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유혹의 강물, 위험, 사고의 강물이 있지만 거기 빠지지 않고, 고난과 역경과 실패의 불꽃이 우리 인생에 부딪힌다 해도 거기에 사그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살려면 피곤해서 살 수 없다. 대학 들어가자마자 취직을 걱정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가. 깨끗이 놓으라. 하나님 앞에 놓아두라. 여행도 할 만큼 하면서 즐기면서 대학생활을 보내라. 공부도 즐기고, 노는 것도 즐기고, 연애도 즐기라. 'enjoy'라는 단어는 결코 나쁜 단어가 아니다. 'joy'를 만들어낸다는 뜻의 아주 성경적이고 적극적인 단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enjoy him forever)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살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이기고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 자원은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기면 아무리 물결이 흉흉하고 불꽃이 사르려고 해도 담대하고 여유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된다.

 

두 번째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4절을 보자. 하나님은 값을 주고 사신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라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린 진정한 자기 가치를 얻게 된다. 요즘은 사람값보다 개 값이 더 높을 때가 있다. 아프리카나 중국의 사람값은 이건희 회장이 가진 수천만 원짜리 강아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는 여인들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옛날에 인도의 한 종족은 남편이 죽으면 산 과부를 같이 화장시키기도 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을 온 우주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 이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반포만 해도 수천억에 달하는데 그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으면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된다. 예수를 믿고 나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나 성품에 대한 불만, 친구와 비교하면서 생긴 마음의 고통들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이다.(창 1:31).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로 값 주고 사셨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보배롭고 값진 존재인지를 한 번만 깨달으면 그렇게 달라진다.

부산에 사범대 다니던 한 자매가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아 좀 안 생긴 축에 드는 자매다. 그런데 그 자매가 창세기를 공부하더니 와서 '정말이냐, 하나님이 나를 만들고 심히 기뻐하신 것이 사실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후에 이 자매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정말 예뻐지는 것이다. 몇십 년 후에 교수가 된 자매를 만났는데 얼마나 세련되고 멋진지 몰랐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발견한 사람들은 자기를 자기 모습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자기 기질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남들은 나를 상대적으로 평가해서 홀시할 수 있고 이것 저것 점수 매길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만들고 보배롭게 여기셨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적으로 평가하시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게 된다.

 

7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하신다. 이것은 처음에는 약간 기분 나쁠 수 있다. 왜 인생의 목적이 자기실현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인가. 하나님이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그게 진리였다. 지금 손목에 차고 있는 이 시계는 만든 회사의 영광과 유익을 위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값을 주고 사서 내 필요를 위해 사용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피로 값 주고 사셨다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은 창조주가 처음에 무슨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냐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전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인생의 혼돈과 방황이 비로소 질서를 잡게 된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직장을 다니든지, 찬송을 인도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한다. 그러지 않고 다들 자기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경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곤해 하고 고단해 한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내면화하고 삶 속에서 구체화하는 데는 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 하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속으로 자신의 영광을 원하는지 모른다. 이런 것을 가리켜 영어로 'hidden agenda가 있다'라고 표현한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속에서는 '동시에 나의 영광도'라고 덧붙이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면 실낙원을 쓴 존 밀턴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그 묘비에는 존 밀턴은 실낙원의 저자이며 흉상은 윌리엄 밴손이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존 밀턴에 대해서는 한줄이, 그 흉상을 만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다섯줄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도 이럴 때가 많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영광을 구할 때가 많은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자요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구속주요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통해 진정한 자기 발견을 하는 자만이 인생의 참 목적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자아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기 발견, 진정한 자기 평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일은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 지난주에 대구에 갈 일이 있었다. 같이 투숙하기로 한 사무국장 형제가 아들을 잃어버렸다며 서울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밤에 가서 아들을 찾고는 다시 새벽같이 강의 때문에 내려 왔었다. 잃어버린 자식은 아버지가 찾아야 된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방황하는 인생을, 고통당하고 이리떼에게 쫒길 수밖에 없는 인생을,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 심정으로 찾아오셨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 하고 방황할 때 거기에는 탕자가 겪은 고통밖에 없다. 돌아와야 한다. 그럴 때 아버지는 '잃었던 자식을 다시 찾았도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잃었던 자식을 다시 찾았도다'하며 맞아주신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주시는 것밖에 없다. 노예선장이었던 존 뉴튼은 '놀라운 은혜'라는 시를 쓰면서 '한 때는 내가 잃어버린바 되었지만 지금은 발견되었다(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라고 고백한다. 자기가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버지께서 자식을 찾아와 주셔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저녁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여러분을 만나주신다. 이 시간 다같이 이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 나의 구세주, 나의 아버지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 인생을 출발하는 놀라운 감격을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자이시고 내 영혼의 아버지이신 것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피로 나를 구속해주신 것을 고백하고 내 인생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고 삶의 목적을 발견했노라고 고백하자.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