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엇이 우선인가? 본문 : 마-6-31-34
아인슈타인은 그의 조국 이스라엘로부터 대통령직을 제의 받았습니다. “국회는 만장일치로 당신을 이스라
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봉사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 제안을 정중하
게 거절했습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을 가르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이스라엘의 벤구리온이 어느 날 갑자기 수상직을 사임했을 때 기자들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그의 대답
은 간단했습니다. “이제 나는 키부츠 땅콩 밭으로 갑니다. 수상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땅콩농사는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임시직’이지만 교사직은 ‘평생
직’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직을 제의 받았습니다. “당신의 탁월한 경영솜씨를
발휘해 체신부장관직을 맡아주시오” 워너메이커는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나는 교회학교 교사라는 일을 무
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장관을 맡아서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정말 큰 일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장관직을 수
락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한번은 기자들
이 워너메이커에게 장관직이 교회학교 교사직 만도 못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동안 해야할 본업입니다. 그러나 장관직은 한 두 해 하다가 말 부업이지요”
웹스터 영어 사전을 보면 "우선 순위"란 "절박함, 중요함, 가치 따위에 근거하여 우선하는 순서"라고 되어 있습
니다. 여러분은 어떤 우선 순위를 두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보면 어떤 우선 순위에 따라 사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우선 순위는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 줍니다. 어떤 일이 참으로 여러분들에게 중요하다
면, 그것이 여러분의 일상 생활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 블렉이라는 소설가는 사람들이 평소에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잘 던졌다고 합니다.
"당신이 만약 지금 백만장자가 된다면 그 돈을 제일 먼저 무엇에 쓰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평소의 생각이 어디에 제일 많이 가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퀴즈를 하나 해 봅시다."
그는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먹만한 돌을 꺼내 항아리 속에 하나씩 쌓기 시작했습니
다. 항아리에 돌이 가득 차자 그가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자 그는 "정말?" 하고 되묻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서 조그마
한 자갈을 한 움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집어넣고 깊숙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항아리를 흔들었습
니다. 주먹만한 돌 사이에 조그마한 자갈이 가득 차자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눈
이 동그래진 학생들은 "글쎄요."라고 대답했고, 그는 "좋습니다." 하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주머니를 꺼
냈습니다.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한 돌과 자갈 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운 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
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은 "아니요."라고 대답했고, 그는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서 물을 한 주전자 꺼내 항
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한 학생이 손을 들더
니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매우 바빠서 스케줄이 가득 찼더라도, 정말 노력하면 새로운 일을 그 사이에 추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시간관리 전문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이 실험에서 말해주고 싶은 것은 '만약 당신이 큰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은 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왜 실패합니까? 그것은 우선 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큰돌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엉
뚱하게 작은 것부터 집어넣기 때문에 결국에는 큰 것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두 가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①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우선 순위는 한마디로 衣食住(의식주)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
까? 무엇을 입을까? 에 온통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고 마시고 하는 문제로 끝나
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문제, 육신적인 문제, 자기 자신만의 문제에 최
우선의 관심을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최대 관심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1977년 말, 한 사내의 우선 순위가 뉴스의 머리 기사를 장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프랑스 군대의 공정
대 출신으로 장 베델 보카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황제 취임식
을 위하여 3천만 달러를 사용하여 그야말로 황홀한 축제를 벌였습니다. 축제 의식 중에 보카사는 1.8m짜리 다
이아몬드 장식의 홀(지휘봉)을 받았고, 7m의 붉은 벨벳 망토를 늘어뜨리고, 2톤의 황금을 입힌-5.4m의 날개
에 높이 4.4m-독수리 모양의 왕좌에 앉았습니다. 보카사의 대관식에 이어 베풀어진 축하연은 수백 킬로그램
의 값비싼 음식과 파리에서 직송한 2만 4천병의 샴페인이 제공되었습니다.
1960년에 독립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인구는 200만에 불과하고 또한 보카사의 왕국은 세계에서 25번째로
가난한 국가로 꼽히는 나라였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은 불과 155달러에 불과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보카사
는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없다"고 말하고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감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우선 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②예수 믿는 사람들의 우선 순위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대부분이 우선 순위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셨습
니까? 우리는 마태복음 6:25-33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33절입니다. "너희
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주님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 그의 나라, 그의 의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최우선 순위는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은 절대로 차선의 자리에 앉는 법이 없습니다. 왕이기 때문에 왕좌에 앉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보좌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여러분의 왕이 누구입니까? 진정 예수 그리스도
가 여러분의 왕입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모셔들이기는 했는데 왕좌를 내어 드리지 않고 자기가 왕노릇
을 합니다. 예수님은 왕좌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합니다.
중국 청나라 시대에 서태후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중국을 지배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
을 위하여 별장을 만들었는데 북경에 가면 그 유명한 이화원이라는 별장입니다. 아들이 어리기 때문에 어머니
가 휘장 뒤에서 통치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주님 뒤에서 여러분이 혹시 섭정을 하고 있지
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왕좌에 앉으실 분이시지 뒤에서 이래라, 저래라 섭정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좌에 계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
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가룟유다와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로마의 학정으로부터 해방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을 기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다녀 보아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했는지
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하늘 나라이지 이 땅의 왕국은 아니었습
니다. 지금우리가 구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부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하나님께
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을 통해서 먼저 의롭게 되도록 특별히 권고하십니다.
둘째, 의로움은 우리가 아는 義(의)를 행하고 의로운 태도를 취하는 마음의 정결함입니다. 이는 예수님께
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힘만으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구세주, 주님으로 믿고 애써 섬길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
일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여 성도들에게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빌 1:11)라고 말했을
때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적인 것이 아
니라 영적인 상태를 최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그의 나라,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생각을 바
꾸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가장 기초입니다. 옛날에는 육신적인 것을 생각했는데 이제는 영적인 것부
터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의 순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먼저였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우선권이 절대로 정립되지 않
습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기회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바다에 가보면 소라의 빈 껍질을 집으로 삼고 사는 소라게가 있습니다. 이 놈들은 항상 좋은 집이 있으면 차지
하려고 싸웁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 좋은 집이 생기면 언제라도 옛 집을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사람은 소라게처럼 자주 집을 바꾸는 버릇이 있습니
다. 언제나 형편에 맞는 집을 골라 삽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이 입어야 할 옷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합니다. 그러려
면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소라게처럼 껍데기를 자주 갈아 입어야할 형편이라면 아직 마음이 변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중심이 아니라 자신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우선 순위를 가지고 살려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매일의 삶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앤드류 보나 라고 하는 성경학자는 세 가지 원칙을 가지
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 먼저 말씀 드리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
얼마나 아름다운 생활 원칙입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앤드로 보
나의 삶의 원칙을 여러분도 지켜보세요. 분명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며, 내가 무엇을 하
고 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인격의 됨됨이입니다. 그리고 나의 인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
에게 속한 사람인가 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속했다고 하는 개인주의자와 나는 나의 가정과 국가에 속한 사
람이라는 지상주의자와 나는 하나님께 소유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주의자가 있습니다. 개인주의자,
지상주의자, 그리고 하나님 주의자 중에서 누가 더 진리를 깨닫고 사는 사람입니까?
오늘도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며 사는 사람은 반드시 크게 성공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소속된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속했다
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만약에 하나님께 속했다고 이 시간 크게 외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
까? 우리가 하나님, 그의 나라, 그의 의에 우선 순위를 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로부터 시작됩니까? 교회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에 충성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선 순위를 바르게 하는 일에 착수할 근 방침 두 가지가 있습니다.
1)기회 있을 때마다 당신의 우선 순위를 분류하라.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것에 순위를 부여하고 중요한 것부터 시행하는 것입니
다.
2)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우선 순위를 배우기 위해서 기도를 통하여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시기 바
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일하시는 방법을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으로 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들에
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마음씨 착한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자기의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등대지기의 책임이 무
엇입니까? 등대에 계속 불을 켜 두고 밤낮으로 기름을 넣는 것이 그의 책임입니다. 등대는 배들이 위험한 해협
을 지나갈 때 그 배들을 안내해 줍니다. 그런데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등대지기에게 와서 그들의 등불을 켜기
위해 기름을 조금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너무 착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안 돼요' 라고 말하지 못했
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름 을 조금씩 조금씩 주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기름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자 등대 불
이 꺼졌습니다. 등대의 불이 꺼지면서 커다란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배가 암초에 부딪쳤다. 그의 착한 성품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거절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선 순위에 있어서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들
을 먼저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큰 것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 학생들과 모든 성도들도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부
여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 참된 사랑의 실천자
본문 : 벧전-4-7-8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 ·구약성경의 핵심은 곧 '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기독교의 핵심인 참된 사랑, 곧 '아가페'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낭비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 중
에서 탕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난 둘째아들이라
고 생각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둘째아들보다는 맏아들을 정말 탕자로 보는 이들
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둘째아들은 지혜가 부족해서 아버지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 방탕한 자식이 되었
지만 맏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집안에 있으면서도 사랑이 부족해서 불효한 자식이 되었다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둘째아들을 육신적인 의미에서 탕자라 한다면, 맏아들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탕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맏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장차 어느 날 아버지가 늙어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자기에게 막대한 재산
을 남겨 줄 지주로서 타산적인 견지에서 아버지를 섬겨온 것입니다. 둘째아들은 육신적으로
아버지를 떠나 먼 거리에 가있었으나 맏아들은 육신적으로 한 집에 같이 살면서도 정신적으
로는 먼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탕자의 비유 중에서 실제로는 두 사람
의 탕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존 녹스 박사는 이 비유 가운데서 또 하나의 방탕한 인물을 발견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비유 중에서 '방탕하다'
는 개념은 좀더 광범한 범위에 적용해야 하는 단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탕자의 비
유 중에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으나 아버지는 그의 사랑을 탕진했다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는 자기에게 불순종하고 집을 나간 무가치 한 아들을 위해서 자기
의 재산을 나누어주고 날마다 대문에 나가 그가 돌아오기를 열심으로 기다렸고, 그가 재산
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순간 달려가서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그를 위하여 새 신발과 가락지를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으니 세상에
이런 방탕한 아버지가 또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지혜에 밝은 현대인들은 누구든지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맏아들이 문전에서 아
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불평하는 행동을 동정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일한 노동자와 해질 무렵에 들어와서 잠깐 일한 노동자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방탕한
고용주 이야기, 자기에게 아무런 의무도 없는 강도 만난 낯선 행인에게 필요 이상의 보호와
친절을 베풀어준 사마리아 사람의 방탕함, 길거리의 수많은 병자, 가난한 사람, 소경들을 불
러다가 귀한 연회석의 자리를 채우는 방탕한 잔칫집 주인,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방탕한 사죄‥‥‥ 등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낭비하는 사랑에 대한 초 상식적
인 이야기들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은 이와 같이 낭비하는 사랑과 한없이
소비하는 사랑입니다.
2. 아가페 사랑이란 강제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작품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한 젊은 왕자가 자기의 미래의 왕후가 될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려는 욕망으로
말을 타고 여기 저기를 헤매었으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한 번은 큰 도
시의 변두리 지역인 빈민가를 지나다가 한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고 그 왕자는 빈민지대에
큰 애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왕자는 그 여성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강제로 결혼하는 것보다 그 여성
의 사랑을 얻어서 결혼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자는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왕자의 옷을 벗어 던지고 그 여성 이 살고 있는 이웃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
기에서 이 왕자 는 생활하기 위하여 목수 일을 자기 직업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하여 그가 밤낮으로 일하는 동안 이웃과 친하는 데 힘쓰고 그들의 고민과 흥미와 관심거리
를 같이 이야기하고 그들과 아주 친숙해졌습니다.
이렇게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그가 사랑하고 있는 여성에게까지도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여성을 사랑하고 있는 것만
큼 그 여성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을 말해 주고 있음을
즉시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 속
에 들어오셔서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원하시면 우리들로 하
여금 억지로 사랑하고 복종하도록 명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강
제로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원래 강제가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충성과 봉사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이란 강제하지 않는 사랑, 그렇지만 강제하는 것 이상으로
뜨겁고 열렬한 사랑에 상대방이 따라 올 수밖에 없는 사랑입니다.
3. 아가페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8 : 1∼11에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사이에 두고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이 함께 서 있습니다. 쌍방이 모두 이 여인을 죄인으로 본 점은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죄를
처리하는 과정은 쌍방이 다릅니다. 즉 예수님은 그 음탕한 여자를 당장 돌을 들고 분노에
찬 눈으로 마주 선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굽혀 땅에 글을 쓰고 그것도 지워 버린 후 그 여인
에게 사죄를 선언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것은 곧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아가페 사랑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 : 7∼11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
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사랑만이 죄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죄를 극복하는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으로 우리의 현실은 사랑의 홍수시대입니다. 입 가진 자마다 누구나 사랑을 부르짖습니
다. 수 년전 여름 홍수가 났을 때 침수지역에서 물 때문에 수많은 재산과 인명피해를 입고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침수지역에 가 보니 물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도 또 하나의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물이 그렇게도 많은데 정말 생명을 위한 음료수가 귀하듯
오늘날 사랑의 홍수시대이지만 진정한 아가페 사랑은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땅 위에 사랑없이 쓸쓸하기 한없다. 어디가나 사랑없이 탄식소리뿐이라. 모든 사람 번민
함은 사랑없는 연고니, 간절하게 손을 펴고 사랑 호소하도다. 먼저 믿은 사람들 주의 넓은
사랑을 보여 주지 않으면 원망 소리 듣겠네." 라는 찬송처럼 참사랑을 갈망하는 호소의 소
리를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의 빚을 지라고 했
습니다. 우리 믿는 학생들은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입
으로만 사랑을 외칠 것이 아니라 묵묵하게 자신을 소금처럼 녹이고 한 알의 밀알처럼 산산
히 부서져 가루가 되어 완전히 자신 전체를 바쳐 소비하는 삶을 살 때 사랑의 사도의 역할
과 사명을 다할 것으로 믿습니다.
제목 : 우주적 비젼(Cosmic Vision)
본문 : 사-11-01-9
비젼이란 뜻은 "본다"라는 뜻입니다. 보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어떤 사물을 보고, 사건을 보는 것을 우리는 비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젼이라 함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보면서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나,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어질 영향력이나 이익을 보는 것을 비젼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한 그루의 사과묘목을 심으면서 그것을 단순히 사과묘목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삼 년 후에 벅찬 가슴으로 수백 개의 사과가 달려있는 사과나무를 보는 것을 비젼이라고 말합니다. 말썽피우고 농뗑이 치는 자식을 보면서 아이구 저것 커서 뭐 되겠노? 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말썽꾸러기 아드을 통해 보는 것을 비젼이라고 합니다. 교회도 잘 안나오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사용하여 큰 일을 하고 있을 학생의 모습을 선생님이 보는 것을 비젼이라고 합니다.
나도 지금은 그렇게 뛰어나지 못하고 좋은 소리 못 듣는 학생이지만 미래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덕을 끼치면서 살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지금 보는 것을 비젼이라고 합니다.
학생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이사야가 가진 비젼인데, 누가 한번 크게읽어 보겠
습니까? 온전한 평화의 나라, 이상적인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일어났습니까?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로 인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므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그 구원은 점점 확장이 되어 세상 종말에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시면 완전한 나라, 이상적인 나라, 이리가 어린양과 뛰놀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어 그야말로 낙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주전(B.C) 600년경에 한 말씀인데 그는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전에 이 말씀을 하였고 이것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는 적어도 수천년 이후에 있을 것을 보았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가지는 비젼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Cosmic Vision(우주적 비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곧 기독교적인 비젼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실 때 세상은 헬라어로 Cosmos입니다. 이 말은 우주를 가르키는 것인데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Universal'로 공간적인 개념의 우주이고 또 하나는 'Eternal'로 시간적인 개념으로 영원한 시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은 Cosmic Salvation(우주적 구원)입니다. 즉 우주 만물의 구원입니다. 사람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하나님을 광대(廣大)하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우주적 비젼을 가져야 하는데, 첫째는 Universal Vision 즉 우주 공간적인 비젼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비젼을 넓게 가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될까? 우리집이 잘 될까? 라는 것에서 뛰어넘어 어떻게 하면 온 인류가 잘 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잘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현재 주어진 일을 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목욕을 하면서 내가 깨끗하여 이성 친구가 와 깔끔해! 사귀고 싶어!라는 말을 들을 것을 생각하면서 마구 물과 비누 삼푸를 쓸것이 아니라, 내가 오염시킨 물이 강을 오염시키고 수질을 악화시켜 물고기가 죽을 수 있겠지 하면서 맑은 물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면서 물과 비누 삼푸를 아끼는 것이 바로 우주적 비젼이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비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기도는 그저 내가 잘 되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에서 뛰어넘어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기도가 되어져야 하고, 더 넓게는 하나님! 안드로메타도 잘 보존되게 해주시고, 카시오페아도 잘 있게 해 주시고 은하수도 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Eternal Vision 즉 영원한 시간적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길게 보고 멀리 봅니다. 지금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교사들은 이런 비젼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그러니 말썽꾼도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고 그저 전화해서고 교회 나오라고 애원까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 훗날 멋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젼이 없으면 선생님 때리 치워 버릴 것입니다. 뭐가 답답해서 하겠습니까? 교회 나오는 학생들은 복 받은 자들이지요. 이런 사실을 학생들이 알기나 하는지!
하나님의 자녀된 구미등대교회 학생 여러분 멀리 보십시오. 지금 안 된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잘못한다고 꾸중들었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뛰쳐나가지 마세요. 80먹은 노인이라도 얼마든지 나에게는 기회가 있어 하면 된다는 비젼을 가지면 그 사람은 노인이 아니라, 젊은 자이고, 젊은 청소년이라도 나는 별 볼일 없어 그럭저럭 살지 하면서 비젼을 갖지 못하면 그는 이미 노인입니다. 괴테는 80세에 파우스트를 썼고, 톨스토이는 82세에 성경을 정확히 알고자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빅톨위고는 60세에 레미제라불을 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57세가 되어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쓰기 시작했고,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습니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누구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45세에 대통령이 된 미국의 클린톤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죽었고, 초등학교시절부터 신문배달, 접시닦이를 하면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도왔고, 어머니는 여러번 결혼하여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엇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주적인 비젼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크게 사용하실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 비젼은 여러분이 신앙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질수 있습니다.
제목 : 성공의 원리
본문 : 수-1-1-11
한 신문기자가 구세군 집회현장을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어른과 소년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2층으
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급히 층계를 오르다 그만 계단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는 피가 흐르는 무
릎을 만지며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 뒤따라오던 어른이 울고있는 소년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얘야, 어
서 할렐루야'라고 말하렴 소년은 눈물을 닦으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외치며 계단
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그때 비로소 구세군의 정신은 패배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습니
다. 시련이 닥칠 때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고난은 용기 있는 사람에게는 일시적
통증에 불과합니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역경을 매력적인 산으로 여깁니다.
바로 그 사람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밟은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여호수아입니다. 모세가 죽고 청년이었던
여호수아도 이제 나이 80이 되었습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수 1: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
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모세가 죽었다는 것은 여호수아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지도자로 모시고 살아온 여호수아
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지도자는 죽고 이제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중차대한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에
게는 하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어서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위대
하고 아무리 재능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의존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죽으면 땅에 묻
히지만 그분의 일은 사람이 바뀌더라도 장애를 받지 않고 계속됩니다. 모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는 그의 직분을 맡도록 여호수아를 준비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일군을 쓰실 때 갑자기 쓰시지 않습니다. 한 지
도자가 세워지기까지 많은 세월을 준비시키시고 천천히 부각시키십니다. 사전에 준비 없이 세상에 갑자기 알
려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중책을 맡기 전 어디에선가 하나님 밑에서 오랫동안 견습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성공을 거두도록 하는 불변의 원리들을 살펴봅시다.
1.부르심의 원리
여호수아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이 부르심에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여하신다는 확신
이 늘 수반됩니다. 이 사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그를 녹초가 되게 하는 책임 일부를 다른 사람들
에게 위임하라고 촉구하는 과정에서 설득력 있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출 18:23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
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하여 모세의 종을 삼으시고 회막을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뿐입니
까? 아말렉과 전투를 할 때는 군대장관으로 앞장서서 싸우는 영광을 차지하였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 함께 하였으며 긍정적인 보고와 아울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 여호수아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기 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신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
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그에 대한 부르심은 가나안 땅을 소유하리라 재차 약속하신 것에 의하여 보강되었습니다.
수 1: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
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수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선물을 하실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천지의 주
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44:3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죽은 후에 그의 후계
자로 여호수아를 부르시고 그에게 가나안을 점령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자가 됩니까? 부르심의 원리를 확실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위해서
일할 사람들을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만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군이
됩니다.
2.私有(사유)의 원리
가나안 땅은 법적으로 그들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경계를 긋고 발로 밟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내가 모세
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1:3)라고 말씀하신 대로 차
지하였을 때 비로소 실재로 그들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원리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됩니다. 주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는 말로 소경에게 확신
을 주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 원리를 선언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약속의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수 있는 영적 축복들을 살피는 도중에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
하였습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
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이것은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성취된 사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
다. 모든 신령한 복이 가장 연약한 우리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내세울만한 공적
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私有(사유)하는 만큼의, 우
리가 믿고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만큼의 축복들만을 경험하며 누립니다.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어떤 선교사님이 그 어려운 중국어를 읽히려고 몹시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절망
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커다란 중국어 문법책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곳을 다 제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중국어 문법책을
밟고 섰습니다. 중국어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그의 상징적인 믿음의 행위는 아무 효과가 없지 않았습니다. 더욱 부지런히 공부하고 적용함으로 그는 능숙하
게 중국어를 구사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는 그 언어학교의 교장까지 되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자식들이 미국에 가고 혼자 사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불쌍할 정도로 어렵
게 사시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 한번은 주위 사람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미국에 가있는 아들들한
테서 연락이 오지 않습니까? 응 한 달에 한번씩 편지가 오지. 그런데 할머니 용돈도 안 보내줍니까? 글쎄 내 아
들이 매달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를 한 장씩 보내오지. 그러면서 할머니가 그 동안 아들한테서 왔다는
그림종이를 꺼내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00달라 지폐였습니다. 할머니는 많은 달러를 가지고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쓰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할머니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사용하지 못한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그것을 밟는 곳이 그들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3.형통케 되는 원리
이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
기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부여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수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 주시는 책임에 상응한 권위를 부여하여 주십니다. 주의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이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실한다면 주의 종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안정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의 굴하지 않는 용기와 침착한 신뢰의 비결은 이 약속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니"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내가 너를 해고시키지 않겠
다"로 번역합니다. 요즘 정리해고를 당하는 근로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주인이 해고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해고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찰스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 강한 믿음은 약속을 보며 하나님만을 본다. 불가능을 비웃으며 외치기를,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라
고 한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여호수아는 네 차례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난공불락
의 성과 월등하게 우수한 무기를 갖춘 그들과 전쟁을 치르는 군대 지휘자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장군이 펜실베니아주 포지 계곡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혹독한 추위와 굶
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악성 전염병까지 나돌아 비참하게 쓰러져 갔습니다. 군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워싱턴은 군인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여름철 군인'과 `햇볕애국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추위와 굶주림의 밤을 이겨내는 강한 자만이 진정한
군인이요 애국자다"
워싱턴의 연설에 도전 받은 군인들은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그리고 포지전투에 나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야할 책임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전
세가 불리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그렇게 촉구하신 것입니다.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
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
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1: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
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형통의 원리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는 원리입니다.
세계적인 천재들 중에는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사람이 많습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구제불능의 바보라
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사람입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중학시절 수학성적은 낙제점이었습니다. 농구천
재 마이클 조던은 고등학교 때 후보선수로 전전하다가 결국 팀에서 쫓겨났던 시절이 있습니다.
알렉스 헤일리는 뿌리의 원고 보따리를 들고 4년 동안이나 출판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주위의 냉소적인
태도에 충격을 받아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디즈니랜드를 설립한 월트 디즈니는 무려 다섯 번이나 파
산한 정리해고자 출신입니다. 최근 베스트 셀러로 떠오른 잭 캔필드의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는 무려 33개의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았습니다. 팝의 여왕인 다이애나 로스는 9집 앨범을 낼 때까지 단 하나의 히트곡도 없
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용기를 재료로 만들어집니다. 이러
한 용기와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붙들고 순종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중고등부 학생 여러분!
우리 앞에는 여리고와 같은 난공불락의 성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무서운 무기로 중무장한 가나안 족속들이 우
리를 시시 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진정 성공자가 되시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공의 원리를 붙드십시오. 부르심의 원리, 사유의 원리, 형
통의 원리를 붙들고 승리하며 여호수아처럼 가나안을 차지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제목 : 아이들이 잘되기 위해서
본문 : 신-06-04-9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자기들 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잘 되기를 바랍니다. 최고로 잘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은 평범하게 되였으면 좋겠어요 하는 부모도 사실 자기 아이들이 평범 이상으로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라는 아이들이 모두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잘 되기를 바라서 그렇게 아이들을 위해 애를 썼는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허무와 실망과 회의로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식을 잘 못 키웠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 실수 때문에 달하는 고생은 잠간이지만 자식 때문에 당하는 고생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이 됩니다.
자식을 잘 키우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이 잘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시겠지만 하나님을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1)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창 33:5]
2) 자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 127:3-5]
3) 자식은 그 부모의 면류관입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잠 17:6]
자식이 선물이나 기업이나 면류관이나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지 선물을 더 사랑하면 안됩니다.
자식을 사랑하거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원 종수라는 감리교 권사가 있습니다.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에서 암 전문의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 분의 간증 태잎을 들으십시오. 그 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순전히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그 어머니의 믿음과 기도와 헌신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인정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명심한다는 말을 마음에 세긴 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세기 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고 명심한다는 것 그 말을 기억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말을 흘러 듣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사랑하시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십시오.
3.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십시오.
열심히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스승이라고 해도 부모만은 못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교사라고 해도 부모가 자식을 진실히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훈계하는 것만은 못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생활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조기 교육이 좋습니다.
자식들은 결국 그 부모를 닮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서 믿음의 자식이 나오고.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순종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사가 그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왕상 15:11]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중에 행한 지라"[왕상 15:26] 느밧의 아들 여러보암의 아들 나답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고 그 인생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자식을 잘 기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칭찬을 들을 일이고 하나님에게 상을 얻는 일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최고의 행복을 얻는 일입니다.
제목 : 오직 예수로만
본문 : 요-14-06-
요한복음14:6 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잘 꼬집어 준 거 같아 소개해 봅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일등은 하고 싶은 일, 이등은 해야 하는 일, 삼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줍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거리에서도 삼등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내 자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는 일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워 할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 생각 들 때는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언제나 일등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일등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만나고
작은 고비 때마다 손을 꼭 붙잡는 내게
일등으로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일등이신 하나님을 나도 일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요즈음 젊은 청소년들의 신앙을 흐려 놓게 하는 요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지식과 과학의 발전으로 기독교를 반박하는 사상들이 많이 생겼으며, 뉴에이지 운동(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기 위한 깨달음의 단계를 통해 더 나은 존재, 초월적 존재, 나아가서는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 기 훈련, 전생체험, 동양의 신비주의 체험등으로 현혹하고, 다원주의(어느 종교이든지 하나만 열심히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상)등이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의 정신을 흐려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는 청소년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예수 믿는 학생들이 위축될까 염려가 됩니다. 남들이 연예인들을 쫓아 다니며, 사인도 받고 그들의 라이브 공연도 참석하면서 학교에 와서 자랑을 할 때, 우리 기독학생들이 왕따 당하는 느낌이 들어 신앙생활에 위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해 봅니다. 쓸데없는 염려입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축복 받은 자이고, 똑똑한 자이고, 지혜로운 자이며, 비젼이 있는 자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분명한 진리를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사도행전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성경 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이 진리를 여러분이 받아드리고 믿었습니다. 이보다 더 똑똑하고 비젼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빅톨 위고는 영국은 두 개의 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익스피어의 저서이고 하나는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대로 통치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6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찬란한 대영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독일에서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해서 성경을 서민들의 손에 나누어 준 후부터 독일국민들이 깨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기라성 같은 역사의 인물들도 종교 개혁 이후, 성경이 서민들의 손에 들어간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이라도 성경의 교양이 몸에 배면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무르익습니다. 지식만 백과 사전처럼 집어넣은 대학을 나온 사람과는 다릅니다. 성경만으로 기본 교양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보면 사람이 변합니다. 이것은 통계적인 진리입니다. 성경으로 마음을 닦고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다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발전하여도 과학이 발전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학생의 신분으로 믿지 않은 친구들과 똑같이 경쟁해서는 안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저들의 방식대로, 기독학생들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서 저들보다 앞서야 합니다.
독수리는 독수리의 훈련방법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본디 강한 날개를 부여받고 태어나지만, 처음부터 고공을 치솟아 오르며, 그 예리한 부리를 사용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절벽 바위 턱에 독수리의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그의 부리로 어린 새끼들을 낭떠러지로 밀어뜨립니다. 어설픈 날개 짓과 비명소리에 뒤엉켜 떨어져 가던 새끼들은 어느 사인지 포근한 어미의 날개 위에 자신들이 얹혀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미 독수리는 그들을 안전한 곳에 밀어 올린 후 또다시 떨어뜨립니다. 훈련이 되풀이되면 새끼 독수리들은 드디어 '한 마리의 독수리'가 되어 갑니다. 그렇게 되도록 정해 있는 독수리의 본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마 비둘기가 그런 방식으로 훈련을 시킨다면 비둘기 새끼들은 뼈도 못 추릴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이 일등이고, 말씀이 일등이고, 교회가 일등이고, 주의 종들의 가르침이 일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믿지 않는 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시기 바랍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오늘 주보의 그림과 글을 보십시오.
"물에 젖은 모래는 날려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한 세상 유혹의 강풍이 불어와도 진리의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은 결코 흩날리지 않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16:8)
오직 예수 님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예수 믿는 믿음 안에 길이 있고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 그를 번제로 드리라
본문 : 창-22-1-14
오늘은 색다른 면에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하나님께 헌신시켜야 자녀들이 형통하게
된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난 아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친다는 것은 "바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죽여 각을 떠 태워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요새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살인죄 그것도 존속 살인죄로 감옥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요구는 아브라함에게 너무 부담스러
웠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정말 아브라함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오해입니다.
첫째, 이 시련은 축복의 시련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전에도 여러 번 하나님에게 번제를 드린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활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
에게 번제를 드리기 위한 생애다 라고도 말할 정도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들 하나 있는 것, 그
아들도 하나님께서 25년 전에 약속을 하시고 25년이나 기다려 낳은 자식인데 그 아들을 바치라 하시는 것입니
까? 그리고 이삭을 죽일 경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네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시
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모순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요, 아브
라함의 유일한 소망이 걸린 아들입니다.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는 이 이상의 시련과 고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일이 났
습니다.
외과 의사들은 자기 식구들의 수술을 못한다고 합니다. 손이 떨리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
게 아들을 죽여 각을 떠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 보신탕을 해 먹고 그 아버지는 아이들이 철들 때까지 못 쓸 아버지, 잔인한 아버
지 누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식을 죽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경
우에 사람들은 "하나님 제가 대신 죽으면 안될까요?"라고 묻게 될 것입니다. 시련 중에도 시련이요, 어려움 중
에도 큰 어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아 네가 제사장이 되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네가 제사장이다. 네 손에 제물을
잡고 이삭의 가슴을 푹 찔러 그 살과 뼈가 다 타서 없어 질 때까지 지켜 서서 보고 있어야 한다" 순식간에 되
는 일이 아닙니다. 사흘씩이나 모리아 산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야하고 그 아이가 제가되기까지 지켜보고 서 있
어야 하고 더욱이 한번이라도 "억울하다, 너무 하신다"는 불충한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무자비한 요구를 아브라함에게 하셨을까요?
이미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답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삭은 죽지 않았고, 그 후손은 바다
의 모래와 같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요구가 무엇일까요?
이 시련의 핵심은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적인 모든 애정을 사정없이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
구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욕심이 많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라시는 요구가 많습
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기 전에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받쳐 죽으시고 우
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부모님은 자식에게 바라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당연하며 자식이 부모님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
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불효를 한다 하고, 하나님은 불효한 지식은 돌로 처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물려주는 것만이 물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눈물을 주시고, 인격을 주시
고, 하나님이 부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습니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하실 수 있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요구에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자식까지도 기
쁘게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기들의 부모, 남편, 형제, 자매, 농토, 재산보다 더 주님을 사
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 자기 감정, 자기 연민, 자기 실력, 재산, 건강, 아내, 남편, 자식, 집, 사업, 직장,
오락, 취미, 시간 등등, 오늘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모두 제 살 날을 생각하여 적당하게 사랑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둘째,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하나님의 요구를 순종했습니까?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우리의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에게 질문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항의하지 않고, 하
나님에게 따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전혀 의심이 없는 믿음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엄청난 자기 모순이 있는 요구를 아브라함에게 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자식을 하나님께 헌신시키고 드린다는 의미를 바로 이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자식은 우리가 키울 테니 필요에 따라 적절한 도우심만 주시면 됩니다 라는 헌신은 헌신이 아니며 하나님
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런 믿음을 어떻게 말할까요. 全天候 믿음이라고 할까요. 總體的 믿음으로 말할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어떤 것이던 올바르다 라고 믿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을 다시 바치라고 해도 하나님은 올바르신 하나님이시고, 약속에 위배되는 요구를 하시
더라도 하나님은 올바르시다 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똑똑해서 분석을 잘하고 따지기를 잘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2) 무조건 하나님에게 순종합니다.
이 순종심도 믿음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두 말 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성적 판단, 경험에서 온 말들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주셨고, 그 아들을 통해 세상에 자손들을 별처럼 많이 주신 다고 하셨는데,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해
도 순종입니다. 부활할 것을 믿는데 순종 못할 이유가 한가지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불 신앙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순종과 믿음을 한 단
어로 쓰시기도 하셨습니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
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대한 우리들의 대답은 오로지 "예"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유하여 말
씀하시기를 어떤 고을에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은 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예라고 대답은 했
으나 놀려 가 버리고 작은아들은 아니오 라고 대답은 했지만 일을 하려 갔으니 어떤 아들이 순종하는 자들인
가 라고 물으셨습니다. 두 아들이 다 나쁘지만 예하고 안하는 자식 보다 아니오 했지만 순종한 자식이 더 났다
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하고 순종하면 더 말할 필요 없이 좋은 자식일 것입
니다.
즉 순종은 예 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예를 실천에 옮길 때 인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항의를 하지 않습니다. 탄원의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구원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번만 더 봐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드리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명령을 거두
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 약속과 다른 약속이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아내나 이삭 장본인과도 의논하
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데 머뭇 거리 지도 않습니다. 아침 일찍 그는 제물로 지정된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다른 곳으로 도망 갈 생각을 추호도 없습니다. 이삭이 반항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 그리고 순종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재산, 그보다 더 귀한 가정, 그
보다 더 귀한 아내, 자식, 그리고 자기 자신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3) 그는 기쁘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적인 고뇌를 극복한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처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간 아
브라함을 생각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오히려 고민하면서 자식을 드린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자식을 제물로 드린 사람입
니다. 우리가 히 11:17-19이나 롬 9:7-8에서도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과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
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큰 기쁨을 가졌고 더 큰 소망을 가졌습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들 가
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 한지라 비유컨대 도로 받을 것이라"
이런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받혔습니다. 이삭을 한줌의 제가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삭의 제 속에서 똑같은 이삭을 만들어 아브라함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아니 이런 말도 됩니다. 이삭을 바
치고 집에를 왔더니 하나님께 바친 이삭이 역시 집에 있어 "아버지 이제 오십니까?"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
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보다 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시
어 제자들을 만나시고 은혜를 주신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때 슬퍼하고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럼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즉
4). 부활의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믿음을 가집니까? 물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
게 소중한 것을 요구하시고 믿음으로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테스트하신 후에 순종할 때 다시 그것을 더 좋은
것으로 돌려주신 다는 사실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희망이요, 소망이다. 이것이 없으면 나는 죽는다 어떤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재산의 일부가 아니고 내 재산의 모든 것이다. 이것은 내 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고 내게 하나 밖
에 없는 자식이다. 이 자식이 없으면 자식은 없다 라는 그것을 요구하실 때 아브라함처럼 기쁨으로 바칠 수 있
는가 라고 묻는 것입니다.
둘째, 이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식을 하나님께 드립니까?
죽여 제물이 되도록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자기 자식이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제물 됨을 인정한 행
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지식을 내 자식이기 전에 하나님의 제물 됨을 인정하여 드릴 수 있어야 그 자식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간단히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배를 잘 드리도록 받혀져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 제물 됨으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거
룩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은 각 사람 주실 가장 적절한 은혜를 예비하시고 찾아오십니
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께서는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
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공부 때문에 예배에 빠지고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어떻
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겠습니까? 즉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는 자식들이 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2. 자식들을 위한 물질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레위기 27장을 보면 1개월 이상 60세 이상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정해진 헌금(세겔)을 드리도록 말씀하
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성전을 맡아 관리하며 섬기는 것은 이스라엘의 장자
들 대신하는 바쳐진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려거든 아브라함처럼 할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께서 세겔을 바치라 하셨으니 자식들에게
적절하고 우리들의 경제 사정에 부끄럽지 아니한 예물을 자식들의 이름으로 드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자식들이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열심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도록 해야 합니
다. 성가대도 하고, 주교 반사도 하고, 전도도하고----등등 모든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기도 생활, 말씀 듣고 보는 생활 등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리 일이면 무슨 일이
던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모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진 자식이 되도록 자식을 헌신시키되 신명기의 (신11:19-21) "그것을 너희의 자
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
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질 것입
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헌신시키는 믿음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예라고 대답하고 순종하면 여러분들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살아 있는 것이지만 만일 다른 대답을 하면 불순종
하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 천국에 갈 수는 있겠으나 예수님의 부활이 주시는 축복은 받을 수 없습
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물른 이삭을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 믿음을 아시고자 하여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이삭을 죽이
시겠습니까?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만점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예수님은 이런 경우를 "목숨을 버리므로 목숨을 다시 찾았다"라고 하셨습니다.
①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에게 믿음을 테스트 받지 않습니다.
② 하나님은 그 동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모든 축복을 실현시키기 시작하십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모든 믿는 자의 신앙의 조상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설교한 이 설교문을 여러분들에게 모두 나눠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설교
문 가운데 이삭이라는 이름 대신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것을 적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여러분의 이름을 적
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과 감정을 솔직히 하나님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모두 만점을 맞기를 바랍니다.
제목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사람
본문 : 행-13-16-23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폐위 하시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을 말씀 하신 내용이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주목이 되는 대목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 라는 대목이다.
즉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가 되어서 왕으로 세움을 입게 되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다윗보다 사울이 더 훌륭합니다.
삼상9장을 보면 그는 외모가 상당히 준수했고, 그는 용기도 있고 힘도 센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에비해 다윗은 체격도 왜소했고, 뛰어난 면도 없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뛰어나 보이던 사울을 외면 하시고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자 라고 하시며 왕으로 삼으신것이다.
여러분!
인간적으로 아무리 훌륭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이 아니면 교회의 일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로 하겠다.
1. 첫째로 다윗은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던 점을 들수가 있다.
삼상16장에 보면 유명한 선지자인 사무엘이 자기 집에 왔을 때 왠만하면 호기심 에서라도 집에 와봐야 했을텐데, 그는 자기의 책임인 양을 치기 위해서 들에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집에 가지 않았읍니다. 이것은 다윗이 얼마나 자기일에 성실한 사람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신 하는 사람들은 먼저 맡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는것인다.
사실 마귀는 게으른 사람을 불러 악한 일을 시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자기 일에 부지런한 사람을 불러 하나님의 일을 시킵니다.
바로 다윗이 그런 사람 이었던 것이다.
또한 모세와 베드로 같은 사람이 자기가 맡은일에 충실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쓰인 사람들 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화려한 궁전의 생활을 하였으나 충동적인 애국심 때문에 살인을 한후에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서의 생활을 하였읍니다.
과거의 화려한 생활에 마음을 두면서 세월만 흐르기를 바라는 그런 생활이 아니라 양을 치는 목자의 일에 충실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충실한 모세를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가시의 불을 통하여 소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어부로서 최선을 다하였읍니다.
고기가 잡히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최선을 다해서 고기를 잡으려 하는 성실성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때에 주님이 오셔서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15세게 중엽 영국과 프랑스가 100년 전쟁을 하고 있을 때였읍니다. 이때 자기의 일에 성실한 한 소녀가 있었읍니다. 농부의 딸로 부모를 돕고 있는 잔다크란 소녀였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13살이었읍니다. 프랑스가 내란의 위기에 놓여 있었을 때였는데 하나님은 그를 세우셔서 남자나 장군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게 하셨던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크롬웰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순히 청교도 출신의 농부였읍니다. 본래 미국으로 이민을 갈려고 하였으나 "너희 나라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마침내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제 정권을 수립하고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스페인을 무찌르고 영국을 세계 제일의 나라로 만든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크고 훌륭한 일을 해낸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맡은 일에 성실한 사람들 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학생들은 기독 학생으로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함으로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시는 사람들이 되길 축원한다.
2. 다윗처럼 신앙의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히 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했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수가 없읍니다.
삼상 17장을 보면 다윗은 육군 사관학교는 커녕 전쟁 경험이란 전혀 없는 한갖 목동에 불과하였읍니다. 사실 전쟁에서 승리를 할려면 무기가 좋아야 하고전쟁 경험이 많아야 합니다. 게다가 옛날의 전쟁에서는 힘이 세어야 하는데 다윗은 그렇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다윗의 상대가 되는 골리앗은 역사상 가장 힘이센 사람이요
더구나 블레셋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갑옷도 입지 않고 경험이나 힘도 없었읍니다. 싸움은 뻔하였읍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동 때 사용하였던 물매돌 5개와 신앙을 가지고 나아갔읍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간다고 했읍니다. 다윗은 손에 칼도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그의 손에 붙이셨다고 믿었읍니다. 그에게는 임마누엘의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그는 당시 최고의 명장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 11:38절에 신앙의 위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한 것은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수 있는 힘이 된다는 뜻인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마음에 합하다고 하였읍니까? 그것은 인격이 좋아서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훌륭해서도 아니고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외모가 수려하고 똑똑해도 믿음이없으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될수 없다.
부디 우리 학생들은 믿음이 좋아사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다윗처럼 훌륭한 사람들이 되길 축원한다
3. 다윗처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삼하9장을 보면 다윗이 무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비보셋은 다윗을 그처럼 죽일려고 했던 사울의 손자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풀었읍니다.
삼하 9:7절에 보니까 "무서워말라. 내가 반드시 네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생활원칙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베풀기 보다는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으로서 행하여야 할 옳은 길, 즉 받는것과 상관없이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생활속에서 사랑을 베풀줄 모르는 사람은 교회에서도 좋은 일군이 될 수가 없다고 본다.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그 기초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베풀줄 아는 사람이 다윗처럼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의 좋은 일군이 될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 학생들 모두가,
사랑을 베풀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한테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고 또 주님의 좋은 일군들이 되길 축원한다.
결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에 대하여 배웠다.
.맡은일에 충실한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믿음이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사랑을 베풀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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