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말 3:7-12)

공 상희 2009. 9. 18. 17:02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말 3:7-12)


이 시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자기 영적인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큰 보배입니다. 이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고 삶의 문제까지도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육신적인 것은 물론 영적인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심히 하나님 앞과 먼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십일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질의 문제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복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문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서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문서답은 계속됩니다. 7절에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이렇게 대답합니다. 참으로 답답할 일입니다. 물질의 문제가 여러분의 믿음을 막고 있다면 이 시간 해결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십일조가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일까요?


1.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눅18:24-25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습니다. 물질 사랑이 믿음생활에 얼마나 해가 되는지 잘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바리새인들 그러기에 참 신앙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는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있을 것을 드리라 하시지 없는 것을 드리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만이 십일조와 첫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와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릴 첫열매를 챙기는 그 정성 하나님 제일주의가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물질을 관리할 청지기로서 합당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물질을 맡겨주었더니 자기 주머니로만 간다면 하나님께서 도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가 있기에 십일조의 의미가 큽니다.


물질이 우리 신앙을 막으려고 합니다. 물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물질 드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네 힘을 따라 네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물질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을 넘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십일조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십일조가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일까요?


2. 하나님의 집에 물질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종들이 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랬습니다. 나의 집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에 양식이 있어야 할 이유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지파 제사장이 먹을 양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위지파는 기업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의 십일조로 기업을 얻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육신의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므로 제단의 불이 꺼질듯 말듯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생활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역의 원리도 구약과 동일합니다. 십일조가 넉넉하여 교회에 목회자가 있음은 물론 자꾸 강단교류를 통해 여러 방향에서 쓰시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서게 될 때 교회는 더욱 활발해지고 성도들은 더욱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잘될수록 여러분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기 위해 세상 명칭으로 인건비를 충분히 준비해야 합니다.


신약의 일군들도 교회에서 나는 것을 먹으라 했습니다. 고전9:13-14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신구약이 동일하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이와 같이란 신약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그 앞 절에 더 자세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9:9-11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십일조의 원리는 평균의 원리입니다. 십일조를 통하여 일반 백성도 제사장도 대제사장도 평균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제사장이 가졌다 해서 오늘날 십일조도 다 목회자가 가진다?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틀린 말입니다. 이것은 십일조의 평균의 개념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도 십일조를 부정하는 설교를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시대는 십일조에 얽매인 시대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따라 하는 시대라고 말해 보세요. 헌금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십분의 이 십분의 삼은 고사하고 십분의 일도 제대로 헌금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소한 십일조는 하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집에 풍족함이 없습니까? 십일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선교국가가 된 것은 십일조의 전통 때문입니다. 십일조의 성경 근거적 유무를 논하기 전에 정말 잘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 외에도 타인과의 평균을 위해서 사랑 안에서 노력해야 합니다. 십일조로 하나님의 집에 물질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일군들이 더욱 활발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봅시다. 그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며 은혜 받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만 잘하면 교회의 물질문제는 걱정이 없고 세계복음화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단은 십일조를 교회에서 없애려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십일조가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일까요?


3.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이기 때문입니다.


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였습니다. 규례란 율법이란 말입니다. 율법에서 성문화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십분의 일이라 해서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드렸고 야곱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을 본문에 도적이라 했습니다.


율법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이란 최소한의 규정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율법 그 이상 충성해야 옳지만 최소한 율법 만큼은 되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도 최소한의 규정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지만 최소한 살인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최소한의 규정만큼도 지키지 못한다면 이것은 살인자요 간음자요 이방인이요 도적인 것입니다. 최소한의 십일조도 하지 못하면서 초대교회처럼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신약시대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그 이상도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기 소유권을 부정하고 나누어줄 수 있겠습니까?


십일조를 규례로 볼 때 십일조를 범하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도적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 원리는 거짓이 없습니다. 율법에 안식일을 범하면 죽으리라. 범해 보면 정말 죽어요. 육은 말짱할지 모르지만 심령이 죽어요. 그러므로 염려 걱정 등으로 마음의 안식을 범치 마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도적으로 보신다면 도적입니다.

 

본문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셨습니다. 멀리보고 길게 보세요. 지상에서만 아니라 천상까지 길게 보세요. 여러 핑계와 논리로 핑계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도적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 십일조가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길일까요?


4.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복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11-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뭐든지 하나님이 하시면 쉽습니다. 질병도 사람은 많은 도구로 고통을 주면서 치료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신유의 역사도 그렇고 방법을 내셔도 간단합니다. 장사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면 쉽습니다. 인생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면 안전하고 평탄합니다.


농사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면 쉽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하려니 허리가 휘고 가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떠나 살려고 하니 힘들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하려고 하니 황충이 먹어 토지소산을 멸하고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고 땅은 박토가 되어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여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복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십일조와 그 정신을 말씀하면서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십분의 일보다 더 풍성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은 최소한의 것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만큼은 지켜져야 합니다. 십일조의 의미는 다양합니니다. 그 속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교회 사랑, 내 영혼 사랑, 세계 선교, 육체의 평안과 물질의 온갖 복이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계명입니다. 우리 모두 온전한 십일조를 통해 우리 마음이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사랑 받고 복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