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전-계시록

[스크랩] (말씀강론) 요한계시록 3

공 상희 2009. 4. 25. 06:36

 

 

 

 

 

 

 

요한계시록 3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요한계시록 57강
금대접 일곱


요한계시록 15:5-8

 

이 세상에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그 날짜를 결정했습니까? 가문을 정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아무 것도 스스로 결정한 것이 없습니다. 태어나 보니까 김씨 가문에, 또는 이씨 가문, 박씨 가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전라도에 태어날 것인지 경상도에 태어날 것인지 서울에 태어날 것인지 우리가 생각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 태어날 것인지 아니면 한국에 태어날 것인지 계획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이 땅에 왔을 뿐입니다.

 

 

 


우리가 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주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8-31)는 말씀은 장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괜히 한 번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일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을 펼치고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마무리 지으시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은 시간적인 순서로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사도가 본 것을 동시에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통해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강론하면서 늘 말씀드리는 것은 묵시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또한 미래에 일어날 일로만 생각하고 해석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세상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중첩하여 그리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우리는 11:19에서 이에 비길 만한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그 때도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나타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린 후에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잠깐 보였습니다. 언약궤를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때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의 증거 장막은 그 속에 증거궤가 있었습니다. 증거궤가 있는 장막이기에 증거 장막이라고 불렸습니다. 출애굽 때에 성막과 함께 만들어진 증거궤에는 언약의 돌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증거도 들어 있습니다. 곧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그것입니다(출 16:32-35, 민 17:8-11). 이는 언약의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그 위에 덮혀 있는 속죄소가 있고 그 위에는 피가 발려지기 때문입니다. 피가 이스라엘의 죄를 덮어서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면하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지성소입니다. 그래서 지성소는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지성소가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증거 장막 안에 있던 지성소를 생각할 때 하늘의 지성소가 열린다는 것은 언약궤가 공개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죄가 드러나고 언약에 의한 저주가 퍼부어지기 때문에 심판이 온 세상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막이 열린다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가 열린다는 것은 무서운 사건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늘 성전이 열리고” 대신 다른 표현으로 “하늘의 증거 장막이 열리며”라고 하였고 거기에 일곱 천사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곱 천사가 등장하여 그 할 일을 하기 위해 하늘의 장막이 지금 열리고 있습니다. 장막이 열린다는 것, 즉 무대가 열리고 감추어져 있던 곳이 열리며 그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은 천사가 주님의 말씀을 좇아 어떤 활동을 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열리고 일곱 천사가 지금 등장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 천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악을 심판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천사, 일곱 대접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일곱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천사가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고 온전히 성취하신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통하여 약속하신 방향으로 역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일곱 천사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6절을 봅시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사람의 옷차림은 그의 신분과 직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가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1:13에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모습과 유사한 천사의 차림새는 그들이 받은 직무가 영광스럽고 거룩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쏟아 붓게 될 진노의 대접으로 말미암는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과 뜻에 일치하는 사역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보복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진노를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거룩하신 진노입니다. 천사들의 차림새가 이 진리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어떠하면 그의 일꾼도 그러합니다. 주님이 거룩하면 그 백성도 거룩해야만 합니다.

 

 

 

 

레위기에서 이러한 의미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4-45). 또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레 20:7-8),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과 비거룩을 철저히 분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과 아닌 자를 분명히 나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접에 담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접이란 잔치 때에는 술잔으로 쓰는 것이기도 하고, 또 제사드릴 때에는 짐승의 피를 가득 모아 뿌릴 때 그 피를 담는 그릇을 대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5:8에 보면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담겼던 대접에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할 때에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세세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세세에 살아 계신 그 하나님 앞에서 범한 세상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항상 범했던 인간들의 죄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인간 역사는 악이 주도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정말 역사의 한 순간, 잠깐을 제외하고 나면 세상은 악한 자들이 지배하는 듯이 보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모세를 통하여 뒤에 다윗을 통하여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통해서도 일어났지만 그것은 긴 역사의 흐름에서 잠깐잠깐 보였던 약간의 흔적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역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혹은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라고 물을 정도의 상태였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이런 내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인류 역사의 큰 흐름은 악이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사람의 악이 날뛰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결코 좌절되지 않았음을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가 여기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세토록 인생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응분의 심판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곱 대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언약의 성취자가 되시고 심판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소원대로 또한 주님께서 심판하고자 하시는 그 뜻대로 기도하는 자가 성도이고 이러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8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열리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던 본문이 성전이 닫히는 것과 비슷한 환상으로 종결되고 있습니다. 성전에 연기가 가득해짐으로써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상황, 마치 성전 문이 닫힌 것과 같은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에 있었던 상황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이사야가 환상을 볼 때에도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면서 온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 가운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온 집이 흔들리는데 문지방까지 흔들리는데 그 사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라고 소리쳤습니다. 가득해진 연기로 인하여 접근할 수 없는 환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내려지는 곳은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날 뿐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대접에 담기는 이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도 주님께서 장차 재림하실 때에 일어날 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대접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16장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내려진 곳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맹렬한 분노와 심판 앞에 견딜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심판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자가 어떤 자입니까? 세상에 그런 자가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 온전히 서실 수 있었습니다. 아니 십자가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홀로 다 받으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대속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덮어줄 것입니다.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언약의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에 대한 심판은 도덕과 윤리나 세상의 법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언약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 휘장에 의해 가려져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 휘장이 찢어져 언약궤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 언약궤가 공개된다면 모두가 다 죽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정결케 된 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을 그분과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함께 심판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 다닌 것으로 심판이 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꼬박꼬박 바친 십일조나 헌금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성수 한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물질을 바치고 몸 바쳐 충성 봉사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물리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이 우리의 죄가 도말 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조차도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선물에 의한 것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받았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주님을 사랑하는 척 나타내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것, 예배하는 것, 찬송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성경을 배우고 알고자 하는 것, 헌금을 드리는 것 등등은 우리 안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의 행위로 나오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그러한 행위를 만들어 냄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우리의 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보고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포기하고 삶의 모든 부분, 시작과 끝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7.28).

 

 

 

 

 

요한계시록 58강
의로우신 심판


요한계시록 16:1-7

 

어떤 사람의 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은 사람에 대한 신뢰성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신뢰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하는 말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에 기인합니다. 오랫동안 지내온 경험에 따라서 상대방을 믿기도 하고 믿지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행동이 얼마나 그의 말을 뒷받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말을 합당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도록 하시는 것은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시고 그 언약대로 일하신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는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말씀하신 언약과 그 언약대로 일하신 것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의 권위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곱 인을 떼시는 것에서나 일곱 나팔을 통해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내용은 출애굽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대접을 쏟은 것에서 드러난 “악하고 독한 헌데”라는 것은 애굽에 내려진 독종의 재앙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둘째 대접을 쏟은 것에서 바다가 피로 변한 것이나 셋째 대접을 쏟은 것에서 강과 물 근원이 피로 변한 것은 애굽에서 있었던 첫 번째 재앙과 같은 것입니다.

 

 

 

 

애굽의 재앙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애굽을 징계하고 이스라엘을 구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된 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되었고, 그리고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굽의 재앙을 단지 이스라엘의 구출로만 이해해 버린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번거로운 방법을 쓰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지 않게 하셨든지 아니면 체제 전복을 일으켜 애굽을 지배하도록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도록 하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놓지 않는다고 해서 무작정 재앙을 내리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이나 또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순순히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지 않도록 하시고,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모두가 똑같습니다. 애굽 사람이라고 해서 더 악하고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덜 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재앙은 이스라엘과 애굽에 구분이 없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스라엘과 애굽이 구분되어서 재앙이 주어집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도 애굽과 같은 존재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중에 구별된 재앙 속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의 징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를 생각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애굽인의 삶의 태도는 전적으로 자신들이 일해서 얻은 소산물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광야에서 애굽적 삶의 태도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인이 의존하는 소산물을 공격하십니다. 그들이 의존하며 신과 같이 여기는 모든 것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존하는 것을 건드리심으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국 재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태도를 배우게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지킬 수가 있다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심판 받아야 할 대상이며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애굽과 같은 삶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대적이요 재앙을 받아야 할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입니다. 열 번째 재앙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드러내신 새로운 생명의 근원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곧 생명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 생명의 근원을 자신의 힘으로 거둬들인 세상의 소산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두는 삶의 태도로 바뀐다면 그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는 이스라엘만을 참된 이스라엘로 인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애굽에 내려진 재앙을 통해서 새롭게 탄생되어진 공동체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보호되고 생명을 얻은 백성들입니다. 결국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애굽에 내려진 재앙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애굽의 재앙을 통해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탄생된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이 세상의 현실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한 공동체가 탄생을 하는데 그들이 곧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탄생된 교회인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지 아는 자들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힘을 의지하고 그 힘으로 거두어들인 소산물을 자기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곧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굽적 삶의 태도를 따라가지 않고 오직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생명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든지 그 일이 합당하다고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옳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5-6절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물을 차지한 천사’란 아마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부분적으로 담당하는 천사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말하기를 의로우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저희가 누구입니까? 저희란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요 또한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수하신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도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제단이 말한다고 의인화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단이 직접 말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제단 곁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기 때문이고(계 6:9-10), 또한 그들이 제단 곁에서 하나님께 기도로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계8:3-4).

 

 

 

 

하나님께서 복수하시되 제단에서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따라 복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보복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기도란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담고 있는 기도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제단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와 동일한 기도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복수하신다는 것은 아들을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따른 보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였는가 아닌가 하는 것에 따른 보복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무시하고 그 말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자입니다. 그러한 자를 향해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린양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동참된 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아무튼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고 이 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았기 때문이라는 이기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원받고 보니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철저히 응징하시고 원수들을 진멸하시는 것이 너무도 합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의로우시며 합당하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믿으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라고 설득하려는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말씀하심으로써 누가 주님의 백성인지 확인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에게서 다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또 목회자는 목회자 나름대로 이런 표현들을 쓰고 있습니다. 복음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성령께서 주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에 그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점검해 보셨습니까?

 

 

 


천국을 만드신 하나님은 또한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아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서 이미 구원과 심판을 갈라놓고 계십니다. 따라서 세상은 어린양의 피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린양의 피를 무시하는 삶의 태도를 일관하는 사람은 이 심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의롭고 정당하다면 왜 우리가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결국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혈육에 이끌리고 있고, 내가 다니는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욕심에 근거하고 있으며, 목회자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자기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안타까움이라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안타까움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받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상태로 인한 안타까움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시든지 의로우며 옳으신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설사 그것이 나에게 불리하고 나를 망하게 하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나의 사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심판하시고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성도입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망해도 나는 성공해야 된다는 논리는 하나님의 언약에는 없습니다. 오직 쏟아진 진노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합당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는 일에 관심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나를 망하게 하신 주님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것만이 진리가 된다고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세상 것을 포기하도록 합시다. 세상 것이 진리인양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전부가 되는 것인양 따라가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면 우리 역시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느헤미야도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느 9:33). 이러한 고백들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에 오늘도 십자가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8.4).

 

 

 

 

 

요한계시록 59강
회개치 아니함


요한계시록 16:8-11

 

자신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쉽게 신을 원망합니다. 아무 종교를 가진 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신이 있다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아마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럴 수 있는가?’라고 항변을 하면서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을 합니다.

 

 

 


그런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되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난을 받으셨지만 ‘왜 이렇게 하시는가?’ 혹은 ‘왜 내가 꼭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항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그것은 온전한 믿음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주님의 고난만이 아니라 순종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온전한 믿음을 보이신 증거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만 보게 되면 불평과 원망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의 순종을 보게 될 것이고, 주님의 순종은 우리의 완악함과 불순종을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완악함과 불순종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을 알게 되고 날마다 보게 되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회개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회개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저주와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상고해 보았고, 그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의로우시며, 참되시며, 합당하시다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성도의 모습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든지 언약의 말씀대로 일하시는 그 일로 인하여 내게 불편한 일이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망하게 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성도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고 나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 자신의 일을 언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인간들의 항변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대접을 쏟으시고 재앙을 이 땅에 내리신 것입니다. 재앙을 이 땅에 내리시는 것은 짐승에게 속한 자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왜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존재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넷째 나팔이 울려 퍼질 때에는 하늘이 부분적으로 어두워졌다고 하였습니다(계 8:12). 여기서는 넷째 대접이 쏟아지자 해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빛의 차단이 아니라 해의 열이 더욱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그 열에 타버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어떻게 일어나는가? 혹은 종말에 이와 같은 현상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이러한 것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엄청난 자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엄청난 자연의 변화가 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이 제 모습을 잃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연의 변화가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현상의 변화를 보고 회개할 자는 없습니다. 자연의 변화가 있을 때에 사람들은 자연을 보호하고 그 자연을 어떻게든 살려서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인간들의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완악하고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0-11절에서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종기로 인하여 자기 혀를 깨물 정도로 아픔을 겪는다고 하였습니다.

 

 

 


짐승의 보좌란 곧 용의 보좌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그 근원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재앙은 애굽에 내렸던 암흑의 재앙을 연상하게 합니다(출 10:21-29). 애굽 전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바로를 태양의 아들로 신격화하여 하늘의 권세를 가진 것으로 나타내는 정치 세력이 극도의 혼돈에 빠지는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섯째 대접을 쏟아 어두워졌다는 것은 실제로 어둠이 오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로 인하여 세상이 극도의 혼돈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파서 혀를 깨문다는 것은 이러한 극도의 혼돈 상태로 인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은 아마도 짐승이 하나님을 향해 적극적인 도전을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미치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 고통 중에서도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을 훼방하고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고통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사람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고 반항하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우리는 일순간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고통을 제거해 보고자 하는 술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고통을 가지고 교회에 나왔더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보니 내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기독교여야 합니다. 그래서 내 고통 가지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에게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 주님의 몸이 된 성도의 입장이어야 합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 재앙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불행입니다. 내가 불행을 당하는 것, 내가 괴로운 것, 내가 힘들어지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것, 이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재앙을 당하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하는가?’ 또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하는 항변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회개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재앙 속에서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세상에 진노의 대접을 쏟으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얼마나 완악한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에 내리신 재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재앙을 통해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밥먹듯이 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며 도전하는 자들이 바로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바로 이 땅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옳다고 인정하고 의로우시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든지 언약대로 일하시기를 기도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날마다 자기 자신의 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 현상을 보고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 현상을 움직이고 쥐고 흔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고 말씀으로 깨달아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날마다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란 단순히 자신의 죄를 깨닫고 다음부터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음부터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아무리 결심하고 각오를 다진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의지가 있다면 죄를 향해 달려가고 죄 가운데서 뒹구는 것밖에 없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그래서 바울 사도는 또 로마서 1:20-23을 통해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기 정욕대로, 욕심대로, 상실한 마음대로 살도록 내어 버려 두셨다고 하였습니다(롬 1:24, 26, 28). 그러니 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연 현상을 보면서 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을 바알세불의 힘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마 12:24). 이스라엘도 갈라진 홍해를 건너 일순간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하였지만 자신들의 몸이 조금만 불편하면 금방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지는 만나를 매일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던 족속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신기한 이적을 아무리 체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적들이 회개하는 역사조차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기한 이적을 체험하면 당장 믿음이 생길 것 같고, 조그만 재앙에도 회개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인간은 그렇게 쉽게 하나님께 굴복할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개조차도 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회개해서 천국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는 회개해서 천국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난센스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에 회개는 나오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십자가에 비추어서 우리 죄악들을 보여주실 때에 저절로 회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를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개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신앙으로 사는 삶입니다. 신앙이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아니 믿음이란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12:3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믿음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이란 믿음에 붙잡혀 사는 삶이고 믿음에 붙잡혀 산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혀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이란 어떤 종교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통해 날마다 십자가가 보여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십자가로 인하여 날마다 회개가 터져 나오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하는 것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기쁨이 날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8.11).

 

 

 

 

 

요한계시록 60강
아마겟돈 전쟁


요한계시록 16:12-16

 

어떤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입니까? 아니 지금의 한국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쩌면 이러한 물음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교회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자기 나름대로 교회관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느냐 하는 관심보다 먼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선교하는 교회, 화목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계급으로 취급하지 않는 교회, 제자 훈련이 잘 된 교회, 기도가 끊이지 않는 교회, 생동감이 넘치는 예배가 있는 교회, 활동적인 교회, 사회 참여가 적극적인 교회 등등으로 교회다운 교회의 기준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이런 것들이 교회 됨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구약에서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언약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언약을 보여주면 교회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구분될 뿐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교회 됨을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임을 보여주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언약이 증거되는 열매가 나타나면 되는 것입니다. 포도가 열리면 그것은 무조건 포도나무입니다. 큰 포도나무인가 혹은 작은 포도나무인가 라는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포도가 아직 맺히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외형적으로 큰 교회인가 작은 교회인가? 혹은 예배당 건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난다면 그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중요한 하나의 기준조차도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교인 수만 많이 모으면 좋은 교회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입니다. 외적으로 큰 교회로 성장시킨 목사는 능력 있는 목회자요 존경받는 목회자가 됩니다. 복음이 참되게 전해지고 있느냐 하는 물음은 헛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현실을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종말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을 말하게 되면 대부분 거국적인 전쟁이나 아니면 우주적인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을 강대국과 강대국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멸망하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와 비기독교와의 싸움으로 종교 전쟁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아마겟돈 전쟁은 미래에 일어날 문화의 전쟁,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 또 테러를 응징하기 위한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겟돈’이라는 영화도 보면 우주에서 지구에 가해지는 재난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서 아마겟돈 전쟁을 말씀하는 것은 우주적이고 전 세계적인 엄청난 재난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마겟돈이 어디인가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마귀가 부리는 고도의 술수입니다. 즉 성경의 용어들을 차용하여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이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지리적인 위치나 전쟁의 날이 언제가 될 것인가에 우리의 관심이 가게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관심을 빼앗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자 강물이 마르고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1:4에서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는 말씀을 보면 유브라데 강은 이스라엘에 약속된 땅의 경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이 마르므로 인해서 동방의 왕들이 올 수 있는 길이 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9:14-15 말씀을 보면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곱 대접을 말씀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이 나팔 재앙이었습니다. 그 나팔 재앙에서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고 하였습니다. 결박한 네 천사란 하나님께 도전한 악한 천사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놓이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기 위하여 마병대 이만만을 모으게 됩니다. 이만만이란 2억을 말하는데 이는 단지 2억이라는 수를 말하는 것이 엄청난 수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유브라데 강은 전쟁을 예비한 악한 천사가 놓임을 받은 강입니다. 그 강이 마르고 동방에서 왕들이 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이스라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브라데 강을 바벨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서쪽에 있는 강이기 때문입니다. 이 강을 경계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구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섯째 대접을 쏟은 결과로 드러난 것은 강이 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강이 마르고 동방의 왕들이 쉽게 올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대접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는 곧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구별이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이 유브라데 강물이 지금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댐 공사로 인하여 언젠가 마르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의 전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요한 사도가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적인 댐 공사로 말미암은 관개와 수로 개설로 유브라데 강이 마르는 날 마지막 종말이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표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 22장까지 혼돈에 싸이고 말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땅에 하나님에 의해서 악한 천사가 벌이고자 하는 전쟁이 허락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을 위해 악한 천사가 엄청난 군사를 모은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동방의 왕 즉 이방인과 약속의 자손 즉 이스라엘과의 싸움입니다. 강을 마르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강이 마름으로 인해서 악한 세력이 이스라엘, 즉 교회를 공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세력과 교회의 전쟁은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것임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아마겟돈이란 따로 어떤 장소가 있어서 거기서 전쟁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13-14절에서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구리 같은 데 더러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들은 모두가 똑 같은 일을 하는 영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귀신의 영이라고 합니다. 이 영들을 개구리 같다고 한 것은 쉴새없이 입을 놀려 개구리 같이 떠들어서 많은 말로 미혹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귀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적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3:13-14에도 보면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기한 이적들을 보여주어서 자기 세력으로 붙잡아 두는 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연계되어 있습니다. 아니 한 통속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신기한 이적들을 보여주면서 짐승을 따르게 하고 용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적을 보여줌으로 용에게만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용의 세력에 매여 용의 정신과 짐승의 사고 방식으로 사는 것이 힘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용을 숭배하고 짐승을 따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자기들이 스스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칭 하나님이요 그리스도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행세를 하고 선지자가 하는 말처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 그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 방식이고 세상의 정신입니다. 세상의 정신은 곧 용의 정신이고 짐승의 사고 방식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단순히 교회 밖에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 밖에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의 왕들이 쉽게 오도록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교회와 이방인과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용과 짐승과 연계되어 있는 자가 바로 거짓 선지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며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자로 드러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자가 성도요 교회의 모습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요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언제 오실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이 언제 오실 것인가 하는 날짜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 주님이 오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본문에서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구약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제사장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대로 화려한 옷을 입습니다. 그 제사장의 모습은 앞으로 오실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요 제사장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또 로마서 13:14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권면 한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성도의 부끄러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려진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덮어졌고 가려졌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용에 의해 신기한 이적을 베풀고 짐승에 의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제공받는 그것이 힘이고 복이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교회도 세상의 힘을 받아 누리는 것이 복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모습이 교회의 모습입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 생각에서 판단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교회를 움직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의 생각으로 교회를 지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생각은 용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교회관은 짐승의 사고 방식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외형적인 교회는 거짓 선지자에 의해 물려받은 비 진리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였다면 이러한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찾는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에 또 못박아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여섯째 대접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진리이고 비 진리인지 혼돈이 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항상 구별해 놓고 계십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와 아닌 것,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를 날마다 십자가로 갈라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혼돈의 시대에 교회의 외적인 모습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증거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 성도, 그러한 교회로 모여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8.25).

 

 

 

 

 

요한계시록 61강
되었다


요한계시록 16:17-21

 

오늘날 한국 교회는 힘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온통 교회 성장에만 집중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 말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부흥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실제적으로는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고 교인 수를 많이 모아서 힘을 과시하자는 것입니다. 복음을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그저 교인 수를 많이 모으는 것이 교회 됨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수가 많으면 아무래도 그 중에서 구원받는 자들이 많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교인 수를 많이 모으고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인 수가 많다는 것은 헌금의 액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헌금의 액수가 많다는 것이 곧 세상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힘을 길러 세상에 대하여 굴복 당하지 않고 세상을 이겨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힘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 보겠다는 주장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하고 모이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여야 하는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무시한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성교회는 이런 유혹에서 벗어났다고 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복음을 날마다 나눈다고 하여도 타성에 젖어서 복음에 사로잡혀 살기보다 늘 그렇고 그런 복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최종적인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17-18절 말씀을 보면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대접을 쏟음으로써 이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의 총체를 보게 됩니다. 죄악된 인류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되었다!”라는 선언이 있게 됩니다. “되었다!”는 말은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는 뜻입니다.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루어야 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부족했던 것이 이제 일곱째 대접을 쏟으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것에 대하여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째 대접까지 심판이 행해짐으로써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시는 차원에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어디로부터 나오고 있는가를 통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서 선포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요 다스림의 상징인 성전의 보좌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제도를 허락하시고 그 안에 언약궤를 두셨습니다. 보좌는 바로 그 언약궤 위에 시은좌라고 하는 것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보좌로부터 “되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시면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절대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온전히 이루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선언은 사단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멸망되어 피조물이 깨끗하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어떤 것도 더 이상 도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 19:30).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선언을 이제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심판을 행하시면서 “되었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심판이 일곱째 대접으로 최종적임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는 바울 사도의 준엄한 선포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에게서 나오고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가 주님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의 힘을 나의 힘으로 삼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다시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우리가 욕심을 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늘 욕심이 생기고 이 땅의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더구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주장하신다는 뜻은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의 영이 늘 우리를 사로잡기를 원하시고 또한 우리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시고 주장하시며 주님의 뜻대로 움직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요 성도는 바로 이러한 보좌에서 나오는 선언을 이 땅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의 것을 취하고 세상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되었다!”라고 선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되었다!”라는 선포를 하는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 땅의 것을 위해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란 이 땅이 이미 망한 것을 전제로 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요 교회입니다.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말미암아 18절에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을 동반한 큰 지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지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번개와 뇌성을 동반한 큰 지진이 일어나야 하고 또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큰 지진이라야 일곱째 대접의 재앙이 내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자연 현상을 보고 성경에 대입시켜서 하나님의 심판이요 재앙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엄청난 자연 현상의 변화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고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자연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표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 현상 자체만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자연 현상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이든 사회적인 일이든 국가적인 일이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현상이 얼마나 이 땅에서 심각한 것인지 20절에서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2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우박의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는 약 34㎏정도 되는 무게입니다. 이만한 우박이 떨어진다면 이 땅에 남아날 것이 있겠습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만한 우박 덩어리가 떨어져야 일곱째 대접의 재앙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박살 내고 파멸시키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도는 이 땅의 것을 이렇게 파멸시키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괜한 진노가 아니고 무자비한 진노가 아닙니다. 바로 아들 때문에 드러내는 진노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에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인간들의 바로 그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죄를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증거로 삼아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언제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언약이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이 땅의 어떤 것도 남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시는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큰 지진의 영향으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게 됩니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19-20절). 여기 큰 성은 요한계시록 11:1에서 언급된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큰 성”과 같은 성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벨론은 타락한 인간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땅의 모든 세력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성은 지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의 권력의 총체로써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고 도전하는 힘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 땅의 모든 힘을 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했던 계획을 무산시키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벨탑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벨탑을 통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죄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벨탑의 계획이 무산되고 언어가 달라져서 사람들이 흩어진 이후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개인으로든 나라로든 연합하여 힘을 길러 하나님께 도전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힘으로 하나님을 이겨보겠다는 것이 죄인들의 끊임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철저히 응징하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지 않은 것은 세상의 힘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파괴하는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그 힘으로 로마라는 나라를 제압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게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맞아 죽으심으로 이 땅에서 힘으로 삼는 그것이 하늘의 힘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힘은 세상에서 맞아 죽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힘으로 삼는 그것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 힘으로 세상에서 떳떳하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빌려 상대방을 제압하면서 산다는 사고 방식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용의 정신이고 짐승의 사고 방식이며 거짓 선지자의 유혹입니다. 우리는 교회 다니고 있다는 것으로 이런 유혹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1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다섯째 대접의 재앙에서와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고 분을 내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악입니다.

 

 

 

 

내가 주님을 거부했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힘으로 삼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러한 죄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 되었습니다. 왜요? 세상의 흔들리는 것을 붙잡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없어질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오직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 오직 그분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 하늘의 은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6-29).

 

 

 

 

항상 그렇듯이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들의 피난처시며 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땅과 산이 흔들리고 변한다고 할지라도 또 바다가 요동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6:1-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주어지는 나라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파멸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일에 대하여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을 믿는다면 믿는 자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9.1).

 

 

 

 

 

요한계시록 62강
짐승을 탄 여자


요한계시록 17:1-5

 

히브리서 11:3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선언이 있기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믿음으로 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어디서 난 것입니까? 성경은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님을 ‘믿음의 주’라고 하였습니다(히 12:2).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입히신 것입니다. 누구나 성경을 펼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가 성경을 펼칠 때에 창세기 1:1 선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자는 또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제 요한계시록 17장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까지 살펴볼 수 있는 은혜가 하늘로부터 주어졌기에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펼치고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시각으로 요한계시록 말씀을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물론 성경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7장은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지금껏 해 오던 이야기를 신속히 끝맺으려고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요한 사도는 적그리스도에 의한 큰 환난의 때에 말할 수 없는 핍박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마지막 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 종말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종말의 특징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과 심판 중에서도 사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항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대접이 쏟아질 때까지의 이 땅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손아래 빠져 들어가기까지 하나님의 경고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개의치 않고 내버려두라고 소리치는 무리들입니다.

 

 

 


일곱째 대접은 바벨론의 멸망을 간략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바벨론의 파멸은 이미 14:8에서 예고된 바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이제 남은 것은 이미 선언된 바벨론의 종말과 연관하여 그 배후 세력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가는 보여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20장 이후에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하늘의 영광을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단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요한 사도에게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환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큰 음녀란 무엇이며, 그가 받을 심판은 어떤 것입니까?

 

 

 


큰 음녀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음녀란 5절에서 ‘큰 바벨론’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1:12-13 말씀을 보면 “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기를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수꾼을 세우며 복병을 베풀어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거민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경영하시고 행하심이로다 많은 물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은 자여 네 탐람의 한정, 네 결국이 이르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타락한 세상의 문명을 주도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큰 음녀가 물 위에 앉았다고 하는 것은 큰 성 바벨론이 많은 백성과 열국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바벨론은 세상 나라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음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이라는 음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2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2절). 사람들의 지도자인 땅의 임금들이 큰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였다면 땅에 거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지도를 따르고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계 14:8). 세상의 임금들, 즉 권세 잡은 왕들이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합니다. 즉 음녀와 함께 하고 음녀를 좋아하고 그와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갑니다. 이제 요한 사도는 거기서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음녀를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갔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가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사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 사단에 대한 정체를 폭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는 것은 여자가 어디에 속하여 있고 그가 누구와 결탁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음녀는 짐승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자동차나 말을 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짐승과 음행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음녀가 짐승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곧 용이라는 마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음녀는 마귀의 사주를 받아 짐승과 결탁하여 세상을 음행에 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몸에는 참란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고 합니다. 또 4절에 보면 “그 여자는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고 금잔을 들고 있습니다. 당시에 자줏빛과 붉은빛 옷이란 흔한 옷이 아닙니다. 자주 물감을 들이는 데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무나 이런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왕족이나 부자들만 입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주홍빛, 붉은빛 옷을 입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음녀는 그렇게 화려한 옷을 걸치고 왕족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여자는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보석으로 치장하고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것을 나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화려하게 치장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근거를 본문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화려한 사치와 허영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화려하게 사치하고 꾸미는 것을 통해 이 음녀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4절 끝에 보면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증함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을 가리기 위하여 치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위선과 가식으로 치장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가리고 철저히 숨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음행하게 하고 음행에 취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녀가 하는 일입니다. 짐승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행하는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이 음녀가 세상을 음행하게 만들고 포도주에 취하게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윤리와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4절에서 그녀가 탄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또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참람된 이름이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을 말합니다.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라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영광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고 배척하며 모독하는 것이 짐승입니다. 그런데 그 짐승을 음녀가 타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음녀가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주도하여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요한 사도에게 보여준 환상은 세상의 실체입니다. 즉 세상은 지금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고 음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는 모습이라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권력이나 힘, 세상의 실체를 음녀로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린 양의 신부와 대조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세상을 주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십자가를 거부하고자 하는 세력을 음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의 모습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본 큰 음녀의 차림새는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4-5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는 흰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계 7:9).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성도가 입은 흰옷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3-14).

 

 

 


음녀의 차림새는 금과 보석, 진주로 꾸미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신부의 모습은 장식품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그와 반대되는 것들로 성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 2:9-10).

 

 

 

 

또 베드로 사도도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기록은 성도가 아무 치장도 하지 말아야 하고, 치장하며 사치하는 그것이 죄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의 것으로 외적인 치장과 사치하는 것으로 자신을 가리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이 땅의 것으로 치장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의를 덧입은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땅의 것으로 치장하는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느냐 용인 마귀를 따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는 그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된 삶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이지 세상의 유행과 사치 향락을 좇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음행의 더러운 것들을 가득 담고서도 밖으로는 온갖 화려한 것들로 장식하는 그 아름다움으로 성도를 유혹하고 음행에 취하게 만드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모습들은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사단의 질서와 원칙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방법과 사고방식에서 이 세상은 결코 하나님이 세우신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이미 사단에 의해서 타락된 나라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힘의 그 궁극적인 실체가 바로 용이요 짐승이며 사단입니다. 그 사단의 힘이 붉은 짐승을 탄 여자로 나타나 오늘날 성도를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짐승과 밀착하여 교회를 핍박하는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한 여자가 짐승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가보니 그들이 같이 뒹굴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자기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재물로 말미암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학교를 많이 다녀서 공부하여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붉은 짐승과 여자가 밀착하여 놀아나고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성령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한 것이 사단이 행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령께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에서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것을 말씀으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 역시 음녀가 놀아나는 광야와 같은 현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도전하던 세력들이 최후 발악하는 심정으로 성도들을 향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해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모습입니다. 이 땅의 외적인 모습은 평화를 추구하는 것 같고 사랑을 외치는 것 같습니다. 희망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단이 주는 메시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땅의 실제적인 모습은 붉은빛 짐승을 탄 음녀가 이 땅의 모든 자들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어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5절).

 

 

 


하나님의 단호한 말씀은 1절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좇는 것이 혹 음녀가 받을 심판의 모습은 아닌지 자신을 살피고 교회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음녀가 제공하는 것에 취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우리 삶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철저히 말씀으로 조명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빨아 정결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녀가 하는 사치, 장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9.8).

 

 

 

 

 

요한계시록 63강
짐승의 비밀


요한계시록 17:6-8

 

비밀을 안다는 것은 사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안다는 것은 본질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외형적이고 표면적인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말씀합니다.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음녀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짐승과 용의 본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본질을 알지 못합니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본질을 말씀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헛점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음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음녀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모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각종 보석으로 치장하였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추구할 만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동경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이끌이어 요한이 본 환상은 광야에서 음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여자와 광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음녀가 즐기고 있는 곳은 광야였습니다. 요한 사도가 광야에 가 보니 그곳에서 음녀는 짐승과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죄인들이 보는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된 것에만 이끌려 그것을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그의 영을 통해 말씀으로 세상의 실체와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기 때문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죽어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여자는 많은 물 위에 앉아 땅의 임금들과 더불어 음행하였고, 또 땅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만들었던 음녀였습니다.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잔과 보석과 진주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몄으며 그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광야에 나가보니 붉은빛 짐승과 뒹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음녀가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유혹하여 음행하며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음녀의 이러한 행위의 궁극적인 적은 누구입니까? 음녀가 행한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목표로 삼았던 자가 누구입니까? 그 궁극적인 적이 누군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음녀의 적은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을 구분해서 말하는 것은 성도와 예수의 증인이 각기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란 곧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성도라는 이름만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증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음녀가 열국들로 더불어 음행하고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도록 한 것은 세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었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하여금 증임 됨을 포기하고 짐승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거부하고 도전하도록 하는 것이 음녀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음녀의 계획은 그녀가 원하는 목적대로 이루진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녀가 성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는 것은 음녀가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뜻입니다. 음녀가 요구하고 계획한 대로 예수의 증인들이 음녀의 유혹에 말려들지 않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할지라도 결코 음녀의 유혹에 동조하며 하나님께 도전하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셨던 것과 같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증인들이요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 음녀에 의해 성도이며 예수님의 증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요한 사도는 기이히여겼습니다.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대단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이 음녀의 자태가 사람의 피로 젖어 있는 것이었고 또한 너무나 오만 방자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치 영원히 죽지도 망하지도 않을 듯한 모습으로 온 세상 위에 군림하여서 허세를 부리며 거기에다가 성도들의 피로 취하여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전후 문맥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음녀가 성도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놀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4절에서 짐승이 붉은빛이라든지 음녀의 옷이 자줏빛과 붉은빛이라는 것도 성도를 죽이고 흘린 피의 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자줏빛과 붉은빛으로 치장하였고, 온갖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금잔을 들고 있어서 귀족이요 왕족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죽인 피의 흔적들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음녀 바벨론은 성도들의 피로 옷 입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좋다는 것으로 치장을 하였지만 음행의 더러운 것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가증한 것들의 어미인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 사실을 보게 되었을 때에 성도와 세상과 관계가 보여주는 현실성에 놀라고 또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다 죽고 음녀는 그 위에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승리자인 듯이 오만 방자하게 앉아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이 음녀에게 세상에서 보화라고 하는 것을 다 빼앗기고 탈취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숨까지도 탈취당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와 세상과의 관계가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세상에서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7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천사가 요한 사도에게 여자와 짐승의 비밀에 대하여 알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알려주신 것에 한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의 계시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세상의 본질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8절에 보면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음녀가 짐승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짐승의 본질적인 면들을 말씀하여 그 비밀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그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장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하여 이미 언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와 보좌와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세상을 권세와 영광과 힘으로 미혹을 하는 존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는 능력과 권세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인간의 재주와 능력을 철저히 이용하는 것이 국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힘과 권력, 권세를 우상으로 삼는 대표적인 모습은 국가라고 하는 것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즉 세상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권세, 그에 따른 모든 혜택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세상을 인정합니다. 세상의 풍요로움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떠벌립니다. 풍요롭고 화려하고 힘있는 세상에 대해서 찬양하고 노래합니다. 세상의 힘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배후에는 용, 즉 사단이 버티고 있습니다.

 

 

 

 

결국 바다에서 올라왔든 땅에서 올라왔든 그것의 출처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무저갱에서 올라온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3장에서 이 짐승이 사단인 용으로부터 권세와 능력을 받은 자라고 이미 밝힌 것입니다. 음녀, 짐승, 거짓 선지자, 사단 이 모두는 다른 존재로 다르게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라 한 군데서 나온 한 통속이라는 것입니다. 그 출처가 바로 무저갱이라고 밝혀줌으로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도전하는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단과 모든 하수인들, 짐승이든 거짓 선지자든, 음녀든 동일한 출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저갱, 거기가 그들의 출발점입니다. 사단의 불변하는 성격 가운데 하나는 그가 항상 무저갱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악의 출처는 저 끝없는 심연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선은 위로부터 나온다고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특징이 어떠합니까? 본문에 보면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짐승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짐승이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다면 지금 현실에 짐승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활동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짐승이 활동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세와 힘으로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지금 이 세상이 짐승의 실체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현재 짐승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짐승과 사단은 종말의 이 때에 세상이 자신에 대하여 전혀 의식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짐승의 특징이라면 주님은 어떠합니까? 요한계시록 1:4-5a에 보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에 빗대서 지금 여기 짐승의 특징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시다면 하나님 그분 역시 동일하신 분입니다.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계 4:8). 또 요한계시록 1:8에서도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되는 짐승, 사단은 필요에 따라 자신을 잠깐 숨기기도 하고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사단에 의해 삶의 모든 부분이 끌려가지만 사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이 이 땅의 일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짐승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러한 사단과 짐승의 수하에 철저히 놀아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힘과 권세, 물질의 풍요함을 누리는 것이 축복이고 은혜라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의 외침에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 건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늘을 찌를 듯이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높은 십자가 밑의 가난한 자는 외면하면서 인간의 집도 화려하게 꾸미면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민망해서 어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목회자는 목청을 돋우어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벨탑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그러한 화려하고 좋은 예배당에서 예배하기 위하여 빚을 내서라고 헌금하는 마음이 아니라 세상에서 예배할 땅 한 평 없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망해도 세상의 힘을 추구하지 않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여길 것입니다. 세상에서 전혀 가진 것 없어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장악되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주님과 더불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짐승은 언젠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에 처해질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정체를 온전히 드러낼 날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짐승은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을 부러워하고 경배한다면 그것은 짐승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짐승과 함께 멸망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짐승을 좇고 음녀를 부러워하며 그의 음행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모든 본질을 아는 자입니다. 이 비밀을 알기 때문에 결코 짐승을 숭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요한 사도에게 짐승을 기이하게 여기는 자는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라고 일러줍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녹명되지 못한 자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적인 앎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식적인 앎은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비밀을 아는 것은 하늘에서 주어진 계시에 의해 은혜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비밀을 아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비밀을 아는 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짐승의 비밀을 아는 자는 짐승의 요구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음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총에 굴복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는 말씀을 따라 다시 오실 주님만 바라보며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9.15).

 

 

 

 

 

요한계시록 64강
어린양의 승리


요한계시록 17:9-14

 

지난 주일에 우리는 짐승의 비밀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생각했었습니다. 그 짐승의 비밀은 한 마디로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결국에는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짐승에 대하여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과 결탁되어 있는 음녀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짐승의 결국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늘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사람들, 즉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짐승의 수하에 놀아나고 있었고 사단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말에 드러난 짐승을 보고 놀라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 주일에 우리가 상고했던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비밀이 그러하다면 지금 짐승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짐승의 비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그 짐승의 활동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 9-11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천사가 요한 사도에게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13:18에서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인간은 자기 지혜로 알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일곱 머리를 로마의 일곱 왕과 짜 맞추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일곱 언덕의 도시, 그것이 바로 로마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실제로 일곱 구릉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일곱 언덕의 도시하면 당시의 사람들에게 로마를 가리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곱 언덕의 도시 로마야말로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는 표현에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왕들 중에서 누구를 다섯 명으로 제한 할 것인가에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당시의 일곱 산 위에 세워진 나라가 로마라고 하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굳이 성경이 하나님의 지혜로 안다고 표현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성경은 당시의 사람들에만 성경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어떤 한 시대에 국한 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엄청난 오해인 것입니다.

 

 

 

 

또 어떤 자들은 일곱 산 위에 있는 로마의 일곱 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역사상 나타났던 고대 제국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이 다섯 개의 망한 제국들을 말하고, 지금 있는 것은 로마이고 장차 마지막 제국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본문이 말씀하는 바는 어떤 한 국가를 지칭하여 짐승의 세력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가 이것을 기록한 의도는 다섯에 끼워 맞추고, 하나에 끼워 맞추고, 또 하나에 끼워 맞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로마의 왕들이든지 아니면 그것이 역사상 일어났던 어떤 제국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 사도의 관심사는 인간 역사를 통틀어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세력에 대해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사도가 기록할 당시의 사람들에게나 오늘날 우리에게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짐승의 일곱 머리가 의미하는 바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일곱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과 왕을 동일한 의미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산이란 어떤 의미로 말씀하는 것입니까? 예레미야 51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렘 51:25).

 

 

 


그래서 에스겔 35:3절에 보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로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에돔이 거하는 지역을 대표적인 산 세일산으로 표현하면서 산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일산을 향해 대적하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4:6-7에서도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산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받을 존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이 멸망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6절에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 즉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대적자는 이 땅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는 것을 거부하고 나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내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큰 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힘과 능력이 있기에 스스로 크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결국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산과 왕을 동일한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왕 역시 힘과 권세가 있는 존재이고, 자신의 힘과 권세를 믿고 살아가는 대표적인 존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곱 머리는 여호와의 신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믿고 자랑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던 것처럼 ‘7’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수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이라고 표현한 것은 짐승이 스스로 신으로 드러낸다는 차원으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적을 베풀면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나타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모독하는 차원에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충만한 악의 세력 이것이 일곱 산과 일곱 왕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세력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상태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1:3에서부터 “때가 가까움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르지 않은 다른 하나가 있다고 함으로 성도에게 잠깐 동안 계속 될 핍박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핍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전에 보다 더 심각한 핍박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고, 전혀 다른 핍박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는 핍박과 여러 가지 환난이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인데 일곱 중에 속한 자이며 멸망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덟째 왕은 일곱 중에 속한 자입니다. 즉 일곱 왕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등장한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장차 등장하여 멸망으로 들어갈 여덟째 왕은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살면서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데 대해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속성을 가진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평화롭게 된다든지 이 사회가 윤리 도덕적으로 진화되어 나아진다는 것은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하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13:1에서 일곱 머리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참람된 이름이란 자기 이름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모독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언약을 이루신다고 하신 선포에 대해서 도전하고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도 될 수 있다고 우기는 세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곱 머리, 일곱 왕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을 거부하고 훼방하고자 하는 세력입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되어짐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믿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세상의 힘이 분명합니다.

 

 

 

 

12절에서 다시 왕이 등장합니다.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열 뿔이란 열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이 열 뿔을 유럽 공동체의 열 나라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은 열 개의 나라가 넘으니까 언젠가 탈퇴할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10’이란 수는 꽉 채워진 것을 나타내는 상징 수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 뿔이란 열 개의 나라를 꼽아서 헤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열 왕이 나라를 얻지 못하였지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짐승에게 권세를 받아 지배하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왕적 권세는 짐승과 한 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13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권세와 능력이 짐승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영예를 짐승에게 돌리게 됩니다. 이는 성도가 모든 영광과 찬송을 어린양께만 돌리는 것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1 이하를 보면 열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면류관이란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긴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힘있는 자들입니다. 힘이 곧 승리의 조건이기 때문에 열 면류관을 가진 열 왕이란 힘있는 자들이고 힘과 권세로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이 세상 나라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힘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힘으로 경제적인 부유함을 이룬다는 점에서 열 뿔입니다.

 

 

 

결국 짐승의 활동이란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해 주시는 은총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인간의 힘과 권세를 의지하고 자랑하는 세력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력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이며, 짐승과 함께 멸망에 처해질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인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입니다. 이러므로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이나 인간적인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음녀와 거짓 선지자, 짐승, 사단과 궁극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연결 고리를 아는 자입니다. 이 근본적인 뿌리, 비밀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에 빠질 수 없고, 세상의 요구에 응할 수 없으며,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14절에서는 궁극적인 승리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어린양과 싸우는 ‘저희들’이란 바로 짐승의 세력에 속한 자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힘과 권세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자들이며, 그들이 바로 어린양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최종 목적은 어린양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효과를 무시하자는 것입니다.

 

 

 


13:4에 보면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누가 이 짐승을 대적하여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까? 오직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로 이미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짐승의 모든 계획들을 철저히 무산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라는 말은 여러 주님 가운데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많은 왕들 중에 예수님이 대왕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 외에 주님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 왕으로,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짐승에게 능력과 권세를 받은 자들이 짐승에게 모든 영예를 돌린 것과는 달리 성도는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어린양이 어디를 가든지 그를 따라가는 자들이기 때문에(계 14:4) 어린양의 승리에 부름을 받아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아무 공로도 없고 잘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 십자가의 은총에 참여되었기에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을 영원토록 찬송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장차 있을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동화의 나라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의 현실, 즉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요한 사도에게 환상으로 보여준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음녀, 거짓 선지자, 짐승, 사단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숨기고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단의 활동을 무산시키신 분이 어린양 예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회요 성도된 자로서 우리는 지금 어린양의 희생을 따르면서 그 피만 증거하고자 합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9.22).

 

 

 

 

 

요한계시록 65강
말씀이 응하기까지


요한계시록 17:15-18

 

사람에 대한 가치 기준이 문명이나 문화를 얼마나 누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요 법칙입니다. 문명에 대한 국어사전적 의미는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사회 조직적인 발전”을 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문화란 “사회 구성원에 의해서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 내지 생활 양식의 총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문명이란 인간을 문명인 야만인으로 구분하여 놓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하고, 그에 반해 여러 가지 기술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에서 발전된 것을 누리면서 세련된 삶을 살아가는 자를 문명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정신적인 가치 기준을 높여준다고 생각되는 여러 가지를 고안하여 도입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문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고 누리는 언어, 풍습, 도덕, 종교, 학문, 예술 및 각종 제도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는 이런 문명이나 문화를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문명이나 문화의 산물들을 집에 많이 쌓아 놓으면 그 사람은 상당히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컨대, 100평이 되는 아파트에 김치 냉장고, 홈 시어터, 식기 세척기 등등의 새로운 전자 제품을 구비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상당히 수준 있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집에 고가의 명화들을 걸어놓고 그랜드 피아노를 갖추고 수영장과 골프 연습장 시설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문화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런 문명이나 문화의 산물들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문화나 문명의 산물들을 많이 구비하는 것을 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나 개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모자라도록 산다는 것에 대해서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산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욕심이 가만 놔두질 않습니다.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사고 방식과 정신으로 살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그런 논리에 부추김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편한 문명과 고차원적인 문화를 누리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다 거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문명이나 문화를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누리는 것을 자제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가 되고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이나 문화는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만큼 최소한으로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사단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통해 어떻게 활동하며 하나님을 거부하고자 하는 자기 울타리에 어떻게 가두어 두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7:1에 보면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7절 이하에서는 여자와 그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요한 사도는 여자보다 짐승에 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이어 17장을 마감하면서 요한은 그 관심을 여자, 즉 음녀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여자에 대하여 특징적인 것과 여자의 최후 멸망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여자를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방식으로 감행되고 있는가를 공개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5절에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백성, 무리, 열국, 방언이란 같은 의미를 반복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구석구석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행하는 세상의 광범위함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가 총체적임을 4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물 위에 앉아 있는 음녀가 세상에 얼마만큼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음녀의 영향은 모든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에 철저히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의 무리들이 바로 이 음녀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또 어떤 자도 이 땅에 사는 자라면 이 음녀의 영향에서 벗어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9-1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이것이 성경의 선언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음녀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음녀에 대하여 성경은 처음에 물 위에 앉은 여자로 표현하였습니다(1절). 또 3절에서는 붉은빛 짐승과 함께 뒹굴고 있는 여자로 묘사하였습니다. 9절에서는 일곱 머리 위에 앉은 여자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묘사는 일관성 없는 혼란스러운 기록이 아닙니다. 여자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함으로 음녀가 실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제 여기서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음녀는 ‘큰 성, 큰 나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혀줍니다. 큰 성인 이 음녀는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바벨론입니다. 소돔이요 또한 애굽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자는 역사상 있어왔던 모든 성, 즉 나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나라나 역사적인 한 도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에 나타나는 바벨론, 소돔, 애굽과 같은 정신을 가진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을 통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음녀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악한 조직의 모체요 사고방식이며 정신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최초의 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떠나 놋 땅에 거하면서 아들을 낳았을 때에 하였던 것이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가족이 생겨나자 그 가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 성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 그대로 에녹이라고 하였습니다(창 4:16-17). 그리고는 가인의 후예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야발은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동철로 날카운 기계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4:20-22). 성을 쌓고 문명을 발전시켜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애초에 문명이나 문화란 이런 차원에서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즉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지키고 보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문명이나 문화가 동일하게 이런 점에서 늘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고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문명이나 문화가 발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문명을 제공함으로 세상을 자신의 지배 아래 거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문명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문명을 누리기 위해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문명이나 문화를 발전시키며 누리는 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힘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문명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원시적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문화적으로도 낙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적인 면에서나 기술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로 뒤떨어진 것은 힘의 열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힘을 길러 무시당하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 국가는 문명을 발전시켜야 할 당위성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의 수준을 높여야 할 시대적 요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명은 날마다 도시화하고 갈수록 조직화될 것입니다. 고도의 조직화된 도시 큰 성 바벨론은 모든 인간의 관심을 모을 것입니다. 옛 바벨론과 로마가 그랬듯이 큰 도시나 나라는 항상 세계적인 존재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모든 가증한 것과 음행의 더러운 것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 5절에서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큰 권세를 가진 자로 등장합니다. 온갖 사회와 방탕이 그녀의 이름 아래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을 왜 이렇게 음녀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더구나 그녀를 왜 큰 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에 대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음녀와 대조해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말씀한다면 큰 성 바벨론과 대조해서 하나님의 성을 설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임금들을 다스리는 도시로서 음녀는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온갖 유혹과 방탕의 대명사인 음녀는 언제나 순결한 여인 그리스도의 신부와 대조를 이루듯이 말입니다.

 

 

 


16절을 보면 끔찍한 장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 여자가 17장 초두에서 등장할 때에는 물 위에 앉은 여자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음녀는 큰 성 바벨론입니다. 음녀는 짐승과 함께 놀던 자였습니다. 음녀는 짐승의 일곱 머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열국의 부를 축적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열왕의 도성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녀는 열왕의 지지를 받아 어린양을 한 가지로 대적하였던 자였습니다. 성도의 피를 요구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16절에서 버림받은 여인으로 음녀의 최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음녀와 함께 뒹굴던 짐승이 돌연 여자를 거부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음녀는 짐승의 힘과 세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짐승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힘을 의지하는 자가 힘에 의해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순종을 몰랐고 아들이 십자가를 지기 원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몰랐기에 베드로는 검을 들고 예수님을 잡고자 한 자들 앞에서 설쳐댔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하셨습니다. 힘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다른 힘에 의해 제압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힘을 의지하는 자는 힘에 의해 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로 이런 관계로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서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고작해야 자기 유익과 자기 과시를 위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내게 필요한 것이 얻어지면 서로의 관계는 소원해지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서로 인간 관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것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통해 복음을 전해주고 습득하는 관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는 백화점과 같이 자기 물건을 사고 팔면 그 다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문명이나 문화적인 차이로 서로 판단하고 가치 기준을 정하는 그런 사람들의 단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피의 관계로 맺어진 것을 늘 생각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고 나의 유익만 챙겨지면 서로 아무 상관하지 않는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모임이어야 됩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이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짐승이 음녀를 왜 미워하고 거부하면서 망하게 하는지 그 이유가 본문에 정확하게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17절).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심판이 감행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의미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린양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여기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음녀가 일순간 힘과 권력을 마음대로 쓰는 것 같고, 성도들의 피에 취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음녀의 활동이 가능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심판하실 때까지 허락된 것일 뿐입니다.

 

 

 


요한 사도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것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 언약을 성취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성취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니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자!’라는 생각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짐승의 마음, 음녀의 사고 방식을 가진 자입니다. 성도는 음녀, 짐승, 용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간의 문명이나 문화가 다 주님에 의해 박살나고 멸망될 것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는 세상의 문명이나 문화를 누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방법으로 삼고 세상을 초월하여 하늘의 사고 방식으로 사는 존재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9.29).

 

 

 

 

 

요한계시록 66강
바벨론의 멸망


요한계시록18:1-3

 

요한계시록 강론을 시작한 이후 몇 번 서점에 들러 요한계시록에 관련된 책 중에서 볼만한 책이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살폈었습니다. 지난주간에도 서점에 들렀을 때에 새로 출판된 책이 있는가 하여 보았습니다. 눈에 띄는 제목이 있어서 서점에서 잠깐 읽어보았습니다. 책제목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21세기 계시록 : 계시록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제목은 거창하였으나 내용은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그 책의 머리말에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환경 오염과 자연 생태계의 파괴, 기아 문제, 전쟁과 학살, 이상기온, 자원의 고갈 특히 에너지의 고갈, 핵 문제, 각종 전쟁과 지진, 기상재해, 식량난, 쓰레기와 공업화로 인한 오염물질의 범람으로 무너지는 생태계 등을 보면서도 애써 모른 체 하며 살아가다 어느 날 갑자기 해산의 고통을 당해 사람도 죽고 미래의 소망인 아기도 죽이지 말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깨달아 대비하고 있다가 그 날이 오면 슬기롭게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어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그 책의 저자는 기독교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을 통해 힘을 주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성도들이 고통을 잘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려고 하기보다 세상의 실체를 드러내고 주님의 일을 알려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도가 당하는 고통을 단순히 환경 오염이나 생태계의 파괴, 전쟁 등으로 국한시키고 있다는 것이 많은 요한계시록 해설서들의 문제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환난, 여러 가지 고통들을 오늘날 일어나는 것으로만 한정시킨다면 그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결코 고난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을 때에 요한 사도와 그 당시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생태계 파괴나 환경 오염, 핵 문제 등으로 인한 위협이 오늘날만큼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으로 해석해야만 이해되는 책이라면 그것은 현대인들에게는 성경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성경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잘 인내하도록 하기 위하여 요한계시록을 적절한 현대적 해석을 하여 성도들에게 제시하면 슬기롭게 모든 환난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으로 저자는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이 책의 저자만 아니라 적어도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책의 저자는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벨론을 전부 미국으로 대입시켜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본문 해석에 치중하고 있다기보다 바벨론이 왜 심판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미국의 사회적인 문제를 일일이 거론하고 그에 따른 심각한 문제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마약으로 인한 심각한 사회적 문제, 청소년 총기 사건 문제, 실업자 문제, 사치와 향락에 대한 사회적 이슈 등등을 잡지나 일간지에 실렸던 도표들을 일일이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바벨론이 어떤 특정한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국가를 심판의 대상으로 삼고 그 나라를 대항하여 싸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미국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 하나님이라면 어느 나라를 기준으로 해서 일하시는 분입니까?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또 다른 나라에서는 각기 다 자기 나라의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상고하면서 이런 점들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말씀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강론에서 살펴본 17:18에서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15절에서 음녀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하였고 16절에서는 그 음녀가 짐승에 의해서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성취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17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와서 다시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다시 음녀의 정체를 밝히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18장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음녀 곧 큰 성 바벨론에게 내려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17:18은 17장과 18장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17:1에서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선언한 말씀대로 음녀가 받을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18장의 내용입니다. 이제 18장에서 심판의 대상, 즉 큰 성 바벨론에 대한 내용을 마무리 짓고 19장 이후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는 큰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권세와 그가 땅까지 환하게 하는 영광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그가 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가 비추는 영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권세와 영광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 어떤 내용입니까?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이런 영광스러운 권세를 가지고 천사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확증을 하고 있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14:8에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본문에서도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계 17:16)고 하여 음녀, 곧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렇게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반복하여 선언하고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이 묵시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인 순서를 가지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는 시간을 초월하고 장소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구약에서 선포하고 있는 말씀들을 조금 살펴봅시다. “무너졌도다!”라는 선언은 이사야 21:9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그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또 2절 하반부의 말씀은 이사야 13:19 -22에서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그 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 곳에 그 양 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서 뛸 것이요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연상시켜줍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막의 들짐승이 시랑과 함께 거기 거하겠고 타조도 그 중에 깃들일 것이요 영영히 거민이 없으며 대대에 거할 자가 없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무너지게 한 것같이 거기 거하는 사람이 없게 하며 그 중에 우거하는 아무 인자가 없게 하리라”(렘 50:39-40). 또 예레미야 51:37에서도 “바벨론이 황폐한 무더기가 되어서 시랑의 거처와 놀람과 치솟거리가 되고 거민이 없으리라”는 동일한 선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약의 말씀들이 전부 니느웨, 즉 바벨론에 대한 멸망을 선언한 말씀들입니다. 특히 스바냐 2:13-15 말씀을 보면 “여호와가 북방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로 황무케 하여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각양 짐승이 그 가운데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철저한 멸망을 아주 적나라하게 그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적나라하게 선언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원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대적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단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의미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단순히 바벨론이라는 특정 국가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원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철저히 바벨론을 대적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어떤 특정 국가를 미워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성취를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중심으로 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특정 국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멸망시키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구약에서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것은 바벨론이라는 국가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약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표현되는 바벨론이란 우리가 이해하는 국가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국가의 개념은 특정한 땅이라는 영역과 주권을 가진 국민이 존재하는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국가란 체제와 이념을 질서로 해서 구축되는 조직체입니다. 그리고 국가라는 조직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의 질서인 체제와 이념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국가란 힘을 모아 하나의 힘으로 개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자아를 실현시켜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인간의 의를 드러내보자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었던 동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국가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죄인이라는 개인의 확장된 모습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국가라고 하는 단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한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집단 안에서 상대방과 비교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개인이 확장된 모습이 국가라면 그 체제나 이념 자체가 바로 하나님 앞에 죄악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17:2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많은 나라들에 영향을 미치고 많은 왕들로 하여금 음행에 동참하게 만든 것이 바벨론이 행한 일입니다. 죄악을 주도하는 정신이요 사고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이란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누구시며, 하나님의 언약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쓰신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참고 롬 9: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하시며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한 국가를 향한 적개심을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거부하는 모든 사고방식이나 정신을 응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근원이 짐승에게 있고 용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고 방식이나 정신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는가를 확연히 드러낸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죽여야만 인간이 사는 나라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세계,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죄악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현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죄악을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의 기준은 항상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7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적 표현으로 하면 시편 2:11-12의 말씀과 같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것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하였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저주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이런 점에서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을 추구하고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것은 바벨론의 정신입니다. 성도는 이미 망한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10.6).

 

 

 

 

 

요한계시록 67강
기억하신지라


요한계시록 18:4-8

 

교인들이 가지는 불안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내가 이렇게 교회 생활을 해서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예배당을 출입하면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도하며 부지런히 성경 읽고 또 열심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신앙 생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같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갚으신다고 하니까 우리는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지 않는 자신을 생각하면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나마 열심히 봉사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자기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떳떳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가는 것이고 그 은혜로 인하여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은 이론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신앙적 행위나 열매를 보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자신의 교회 생활을 돌아보면서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행위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 진리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로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당에 열심히 가지 않아도 괜찮고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으며 성경 읽지 않고 전도하지 않아도 좋은 신앙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기도하게 되고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하게 되며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장악하고 계신 성령께서 우리에게서 그러한 열매들이 나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5절에서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성 바벨론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하늘에 사무칠 정도로 극에 달한 바벨론의 죄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는 것은 인간의 죄가 이 땅에서 극도에 달하여 하늘에까지 이르러 심판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무겁다거나 양이 많아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죄에 대하여 기억하셨기 때문에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하여 우리는 무거운 죄 혹은 가벼운 죄로 나누어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그 죄의 양이 많다든지 혹은 적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법에 의해 다스리고자 하는 죄를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혹은 많은 것과 적은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를 그렇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에 대한 관념은 무거운 것, 가벼운 것 혹은 많은 것, 적은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고 죄악에 대하여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무거운 것, 가벼운 것이나 많고 적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죄까지도 항상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환상을 18장에서 기록하기를 큰 권세를 가진 한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계 18:1). 그래서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세를 가지고 천사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선언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여지가 없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은 더 이상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로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헛되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실로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황폐한 상태가 되었고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이렇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나라를 지칭해서 멸망시키신다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앞의 강론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분이고, 그 언약에 반대되는 모든 세력들을 철저히 응징하고 심판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는 이런 점에서 규정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가 무엇입니까? 7절에서 이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사치하는 것이 불의가 되는 것입니까? 불의란 하나님의 의와 대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사치한다는 것을 현실에 맞추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분을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된 인간의 관계에서 나타난 의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영화롭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불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사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큰 성 바벨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 바벨론이 곧 음녀요 음녀는 짐승과 결탁되어 있고 짐승은 용, 즉 사단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죄 아래 있다는 증거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인 것입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하는 자의 마음을 7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이사야 47:8에 보면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에 대하여 선포한 말씀입니다.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이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는 이유는 동일합니다. 즉 죄는 변하지 않고 오늘도 여전히 불의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습니다.

 

 

 


큰 성 바벨론, 즉 세상의 불의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십니까?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갑절’이란 말은 두 배로 갚아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게 심판을 행하실 때 합당하게 행하실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 “갑절로 갚아 주고”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죄악만큼 진노의 포도주를 부으실 것입니다. 바벨론의 모든 죄악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그 죄악들에 상응하도록 심판하실 것임을 ‘갑절’이라는 말을 통해 강조하신 것입니다.

 

 

 

 

큰 성 바벨론, 즉 세상의 죄는 ‘자기 영화’와 ‘사치’입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세상의 모든 것들로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 데 사용합니다. 앞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벨론은 음행이란 방법을 통하여 만국이 자신을 따라 살도록 미혹하여 자신의 영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치를 통하여 부를 쌓아두는 것을 최고의 삶으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은 자신의 부를 숭배하도록 미혹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 바벨론의 자기 숭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런 바벨론의 교만과 사치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애통’으로 갚으실 것을 강조합니다. 스스로 여왕임을 자처하며, 자신의 풍요로운 물질을 의지하여 절대로 애통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는 바벨론이 순식간에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절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우리는 바벨론에게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하루 동안”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벨론이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세워진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벨론의 사고 방식과 정신은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단과 짐승, 음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죄의 역사를 그대로 지배해 오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세상에 죄의 힘을 과시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이 심판하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한 순간에 다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도전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선포한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하게 선포하였습니다.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사 47:9). 또 이사야 47:10-11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는 바벨론이 한 순간에 멸망될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요한 사도가 본 환상도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과거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던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바벨론과 같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러한 내용을 요한계시록 18장 전체에서 면면히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라고 하였고, 17절에도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절에도 보면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라고 바벨론의 멸망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그 심판은 모든 영역에 대하여 철저하게 임하게 됩니다.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고 말씀한 부분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자도 여기에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하실 분이 아니라 심판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강하신 자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강한 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심판이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는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강한 자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명령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그대로 지킬 수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이렇게 죄에 참여하지 않고 재앙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신명기 4:34-35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입니다. 바벨론과 같은 애굽에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강한 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동일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죄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시는 강한 손이었고 편 팔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십자가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힘은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다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보다 더 강한 자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강한 분에 의해 모든 것이 다 멸망될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주님께 굴복된 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교인 수를 많이 모았고 큰 예배당을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강한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한 순간에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당이라고 해서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주어진 직분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것은 한 순간에 다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무너지고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모든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니 하나님 그분은 강한 분이시기에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이라는 세상에서 빼내시는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10.13).

 

 

 

 

 

요한계시록 68강
애통하는 자들


요한계시록 18:9-20

 

구원이란 결코 우리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고작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에 있지 않고 하늘의 사람으로 바꾼다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하늘의 사람으로 바꾼다는 것은 이 땅의 것에서 날마다 건져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날마다 세상에서 분리되고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은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는 선언과 함께 파멸의 정황과 파멸의 원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벨론의 심판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주님께서 세상이라는 바벨론을 어떻게 심판하시며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건져내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명기 17:14-20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합니다. 가나안 땅에 가게 되면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지만 백성들의 요구가 있게 될 그 때에 이런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말(馬)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이고 또한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치하지 말며 율법의 말씀을 곁에 두고 늘 말씀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왕으로 세우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택한 자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지만 백성들이 원한다고 해서 왕을 세우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17:4-6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나라를 세우고, 그의 후손에서 왕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앞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이 세우는 왕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진정한 왕을 보여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울도 다윗도 그 이후의 모든 왕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의미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오늘 본문 9절에서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라는 말씀은 이런 점에서 바벨론을 심판함으로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애통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자도 이 땅을 다스릴 자격이 없으며 세상의 것으로 애통하는 한계를 가진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벨론의 왕, 세상의 모든 왕들이 애통해 하는 것입니까? 땅의 왕들이 바벨론의 왕과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벨론의 권세 아래에서 사치하고 음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융성이란 바로 자신이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음행과 사치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보면 땅의 상고들도 마찬가지 상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19절에 보면 배를 부리며 무역을 하는 자들도 동일한 모습입니다. 바벨론을 통해 먹고살며 생을 부지할 뿐만 아니라 많은 부를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그 근거가 사라져 버리니 애통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살아감에 있어서 의지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과 바벨론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인 것을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심판을 통해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통해 살아가고 있고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는 근거가 되며 세상을 의지한다면 그것이 바로 바벨론의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의 것이 없어짐으로 그것이 근심이 되고 절망으로 다가온다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의 것을 끊어버리시는 것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늘의 것을 의지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의 세력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심을 강조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관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단의 세력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이용하신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우주의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세력들이 스스로 분쟁하는 점을 통해서 사단의 나라가 모순의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단의 나라는 분열과 다툼의 나라이면서도 동시에 모순의 나라임을 오늘의 본문이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짐승과 함께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을 멸망시켰던 땅의 왕들이 바벨론의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는 장면은 사단의 나라가 바로 모순이 가득한 나라임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세력들 간에 분쟁과 다툼이 생긴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점을 요한계시록 17:16 이하에서 보았습니다. 17:16 이하에서 땅의 왕들은 짐승과 함께 큰 성 바벨론인 음녀를 멸망시킵니다. 음녀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는 장면을 땅의 왕들은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은 땅의 임금들과 장사하는 자들이 자신들이 불태웠던 음녀인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애통해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땅의 왕들과 장사하는 자들은 바벨론이 불살라져 재와 연기만 남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합니다. 이들은 바벨론과 연합하여 사치를 즐겼으며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에 바벨론의 교만과 사치의 파괴가 곧 자신들의 파괴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실상 자신들의 운명을 쥐고 있는 음녀인 바벨론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했다는 사실을 땅의 왕들은 목격하고는 가슴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임금들은 음녀인 바벨론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파괴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 땅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이며 왕이시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바벨론으로 인하여 울고 애통해 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는 말씀대로 바벨론의 멸망이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이란 하나님을 의미하기보다는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거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란 지금 하늘에 사는 존재이며 바벨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6:17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고린도후서 7:1에도 보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건져내어 날마다 깨끗하게 만드시는 것이 주님의 구원입니다.

 

 

 

 

상거래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을 의지하며 사는 존재는 바로 666이라는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애통해 하는 것을 통해 성도가 하늘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이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하늘의 즐거움 속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중요합니까?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천국을 향해 있다면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잊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늘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약속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부유함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세상에 빠지지 않고, 또한 세상에서 가난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주님을 원망하지 아니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바벨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날마다 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니 주의 영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끊어버리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역시 하나님 약속에 의해 망하고 사라져야 할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지하거나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세상의 것을 끊어버리시는 주님과 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세상 일에 대하여 안되면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현상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절망으로 느껴지게 됩니까? 그래서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되어집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라도 다시 십자가에 관심이 돌려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삶이 집중된다면 하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세상의 일로 인하여 울고 웃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한 순간에 불과한 것으로 인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 우리 인생의 전부를 거는 자들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하늘나라로 인하여 애통해 하는 자입니다. 그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애통해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애통해 하고, 즐거워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1.5).

 

 

 

 

 

요한계시록 69강
결코 다시


요한계시록 18:21-24

 

사람은 누구나 편한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힘든 일은 사양합니다.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자기 몸이 편한 것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몸이 편하지 않으면 편한 직장을 찾아 옮기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노후를 위해서도 필요한 만큼 저축으로 준비해 놓아야 안심이 됩니다. 이것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사고 방식으로만 산다면 물질의 노예가 된다는 것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3:16-18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지만 사람들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셨다는 뜻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자와 심판 받는 자가 갈라져서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다 똑같은 인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갈라놓고 보십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입니다. 아니 주님과 한 몸으로서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운명과 같은 삶이고 이 땅에서는 고난과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도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성도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구약 예레미야 51:62-64에서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 거하지 못하게 하고 영영히 황폐케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에는 본문의 내용과는 달리 바벨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책을 하수에 던지는 것은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취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은 이러한 구약의 말씀들이 성취되어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현실의 말씀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이제까지 설명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듣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보면 알 수 있도록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바다에 떨어진 맷돌은 흰 거품을 내면서 신속히 가라앉고 맙니다. 일시간에 심판을 맞이한 바벨론의 멸망을 극화한 장면입니다. 힘센 천사의 행동이 실감나게 바벨론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큰 맷돌처럼 세상의 눈에는 대단하게 보이는 바벨론을 바다에 던져 넣는 천사의 행동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결코 다시’라는 말을 여섯 번이나 사용하여 완벽하고 철저한 멸망을 말씀합니다.

 

 

 


22-2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거문고 타는 자, 풍류하는 자, 퉁소 부는 자, 나팔 부는 자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음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음악이란 삶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여유롭고 풍부할 때 나오는 것이 음악이지 괴로운데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음악이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공업 활동들이 일체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금은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사치가 다시는 없다는 뜻입니다.

 

 

 


맷돌 소리, 등불 빛 신랑과 신부의 소리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의미합니다. 땅에서의 행복을 담고 있는 느낌을 주는 말들입니다. 빛의 사라짐은 멸망한 도시의 적막을 강조합니다. 맷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먹고사는 것을 위한 행위들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상공업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활동들이 다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벨론이 바다에 던져짐과 함께 사라지고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누리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사라지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을 하나님께서 모조리 다 없애고 거부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23절에서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 성의 상고들이 그들을 큰 자로, 왕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의 장사꾼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치하고 향락을 누리고 스스로 왕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부에 대한 태도, 부를 이용하여 스스로 죄를 즐기며 살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삶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그것 자체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이런 선포를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렘 25:10-11). 에스겔 선지자의 선포에도 동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네 노래 소리로 그치게 하며 네 수금 소리로 다시 들리지 않게 하고 너로 말간 반석이 되게 한즉 네가 그물 말리는 곳이 되고 다시는 건축되지 못하리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26:13-14).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선포는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유다 백성들이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또 에스겔 선지자의 메시지는 두로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유다가 받는 심판에 대한 말씀을, 두로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그대로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말씀으로 요한계시록에서 선포되고 있다는 것은 유다나 두로나 바벨론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유다와 두로를 심판하신 그 기준이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께는 유다냐 두로냐 바벨론이냐 하는 구분은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유다라 할지라도 형식적인 종교 행위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다면 이방인과 같이 취급될 수밖에 없고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전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에 실패한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준비한 언약의 성공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친히 당하셨다는 것은 언약을 이루시는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홀로 십자가에서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이렇게 18장의 말씀을 맺고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물질이 우상이 된 자들에게 있어서 상대의 목숨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의 사고방식이요 용 곧 마귀의 정신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삶으로 사는 것 그것은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과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피를 흘리게 한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해 심판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 이후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흘린 대속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피를 흘린 자 중에서 오직 한 분의 피만이 용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아니 비교할 수도 없는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속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생활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없어진 것과 같이 여기며 사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세상은 이미 무너졌고 없어진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을 믿고 세상을 의지하는 모습이 아니라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이 우리를 먹여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가 심판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유일한 것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난 성도에게 바벨론이라는 세상은 다시 볼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성도의 즐거움과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다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대속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그 피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것으로 웃고 울고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삶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물론 성도가 자기 몸 편한 것, 가족이 편안한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며 감사하게 되는 삶인 것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1.12).

 

 

 

 

 

요한계시록 70강
하늘의 찬송


요한계시록 19:1-5

 

교인들이 많이 쓰는 용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아마 그 중에서 ‘할렐루야’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 중에서 몇 번씩이나 할렐루야라는 말을 합니다.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 믿습니까? 할렐루야!’ 이런 식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화를 하면 처음부터 ‘할렐루야!’라는 말로 인사를 합니다. 이렇게 교인들에게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쓰이는 용어가 ‘할렐루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많이 쓰는 만큼 그 뜻을 알고 그 의미에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할렐루야!’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입니다(시 113:1 등).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들여서 찬송 몇 곡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으로 구성한 성가대가 많은 연습을 하였다고 해서 제대로 된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가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자들의 찬양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의 찬양, 어떤 근거를 가진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본문 1절에서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들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주로 구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에 쓰였던 이런 표현들을 요한계시록에서 쓰고 있다는 것은 구약에서 선언된 ‘할렐루야’의 진정한 의미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찬양은 온전히 성취된 것을 보여주는 찬양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선언한 것만 아니라 ‘할렐루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완성을 경험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찬양하라고 요구하거나 아무 내용 없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찬양의 내용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찬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허다한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무엇 때문에 찬양을 하고 있습니까?

 

 

 

 

하늘에서 들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에 대한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모르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난 후에 하나님을 찬양 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1-3).

 

 

 

 

이 찬송은 단순히 홍해를 무사히 건넜다는 것에 대한 찬송이 아닙니다. 애굽의 군사라는 원수들을 물리치신 것에 대한 감사만도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무사히 건넌 것으로 노래하거나 원수들에 대해 복수한 것에 대해 노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유행가와 같은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송을 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에 대한 찬송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17-18절에 보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고 찬송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이라는 목표가 있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목표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처소요 성소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홍해를 건넌 후에도 무수히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지만 홍해를 건넌 이 순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찬송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타내신 것은 앞으로 이 땅에 보내실 메시야를 통해 이루실 구원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구약에서 이렇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뜻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죄에서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이제 과거 이스라엘이 홍해 바닷가에서 불렀던 그 찬양을 교회가 부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경험한 자가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할렐루야라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경험하고 아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할렐루야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에 참여된 성도들만이 할 수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의 찬송은 우리가 이 땅에서 예배에 잠깐 또 가끔씩 부르는 복음성가를 통해서 찬양한다고 하는데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해 찬양하는 찬양의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2절).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는 참되고 의로우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한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며 또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참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땅을 더럽게 한 음녀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종들의 피에 대한 복수를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피에 대한 복수는 누구에 대한 복수입니까? 요한계시록 5:12에 보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세상이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죽였지만 결국 그것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우리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에 대한 복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신 것은 자신이 친히 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그 언약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세상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행위만이 의로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하늘의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라고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찬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요한계시록 5:9-10에서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어린양의 구속하심에 대해 찬양하였으며, 또 이십사 장로는 11:17-18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심판하심에 대해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참됨과 의로움을 집중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저주와 싸움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지만 하늘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이제 바벨론을 심판하심으로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한 분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분 하나님께만 찬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까지 유혹하려 들었던 세상 영광의 실체가 한낱 잿더미로 화하는 순간에 하늘 찬양은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 바로 3절입니다.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이 불길과 연기를 우리는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16에 보면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8에서도 그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이러한 표현들은 구약을 배경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34:8-10에서 에돔의 심판을 예언할 때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바벨론에 대한 완벽한 심판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빌려서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하려 했던 마귀의 실체가 온전히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눅 4:6-7)고 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유혹했던 그 마귀의 유혹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던져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미 무너지고 멸망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물거품이 된 세상의 권세, 세상의 영광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기대를 걸고 바벨론을 통해 살려고 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며 비판의 노래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잿더미가 되는 세상에 목표를 둘 수 없고 기대를 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사라진 세상의 영광에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더럽힌 음녀와 상관없이 살았고 십자가만 바라보며 살았기에 하늘의 찬양에 맞추어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아멘! 할렐루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5절). 누구든 가리지 않고 구속받은 성도라면 하늘의 찬양에 응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단순히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말씀에 순종할 것을 촉구하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경험한 자라면 당연히 하늘의 찬양에 응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라는 외침은 세상의 멸망에 대한 오늘 우리의 외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찬송에 이렇게 응답할 수 있는 자들이 성도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1.19).

 

 

 

 

 

요한계시록 71강
성도들의 옳은 행실


요한계시록 19:6-10

 

성도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란 다른 의미를 두고서도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찬양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자기를 믿고 자기를 내세우는 존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찬양이란 단순히 찬송가 몇 곡을 노래로 박자, 음정 맞추어서 잘 부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존재로 바뀌어진 삶을 두고 찬양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에게 요구되어지는 찬양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보면 그러하지만 특히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늘의 찬양을 보면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입으로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박자와 음정에 잘 맞추어서 찬송하는 만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모습에 걸맞는 성도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근거는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의 능력과 영광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찬송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에 더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근거를 하나님의 전능성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이’로 부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고 강한 분이라는 의미에서도 말할 수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철저히 성취하신다는 뜻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번 강론에서 요한계시록에서 할렐루야는 구약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선언하고 있는 말씀의 성취라는 차원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능하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에게 찬양의 소리를 발하는 있는 이 허다한 무리는 천사와 인간을 막론한 하나님의 종들의 모든 무리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무리들(계 19:1)과 구원받은 인간(계 7:9)에 대하여 ‘허다한 무리’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소리는 많은 물소리와 힘있는 뇌성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그 나라의 쇠함 없는 완전함에 이르게 한다는 승리와 기쁨을 주제로 하는 찬양의 노래가 장대한 할렐루야 합창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기쁨으로 표명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7-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기쁨으로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영원한 나라의 시작이 어린양의 혼인과 더불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렐루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린양의 신부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신 그때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시작됩니다. 신부인 교회가 신랑이신 어린양과 온전한 의미의 부부관계로 살아갈 날이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혼인 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부가 입은 깨끗한 세마포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마포에 관심을 두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마포를 너무 쉽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단순하고 쉽게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나타내는 종교적 행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마포를 옳은 행실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 단순히 옷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옳은 행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흔히 성도의 행실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도가 행하는 행위를 두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 주일을 잘 지키는 것, 전도하는 것 등등을 두고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양의 신부로서 세마포를 입는다는 것은 천국 백성이라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그 세마포가 성도의 옳은 행실이고, 옳은 행실을 성경 보는 것, 기도하는 것, 전도하는 것 등등의 우리의 종교적 행위로 이해를 한다면 결국 성경을 읽은 것, 기도한 것, 전도한 것, 주일 성수를 잘 한 것, 교회 봉사를 한 것 이런 것들이 천국 백성의 증거물이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천국 백성의 증거물이 될 수 있습니까? 결단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증거물은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우리의 의지와 열심으로 인해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된 증거물은 성령에 의해서 열매로 맺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10절이 말씀하는 바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대언의 영이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증거하는 영이란 성령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성도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고, 결국 성령님에 의해서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로서 성경 읽는 것, 기도하는 것 등의 행위들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이 택함 받은 자로서의 결과라면, 성경 읽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 등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살아가는 성도에게서 나타날 당연한 열매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의 행함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근본적인 근거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말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옳은 행실은 무엇입니까? 7절에 보면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 아내란 어린양의 신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택함 받은 성도가 어린양과의 혼인잔치가 있기까지 자신을 예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예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합당한 자로 자신을 단장하고 준비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신부의 삶이고 옳은 행실입니다. 신부란 어떤 자입니까? 신부란 신랑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린양과의 혼인 잔치를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때를 기다리고 소망하고 있습니까?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그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잔치 자체에 관심을 가진 모습이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되는 것으로 인해 소망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성도의 옳은 행실이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부로서의 자신을 단장하고 예비하는 것입니다.

 

 

 

 

신부 된 성도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한다면 성도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랑의 사랑을 모르면서 신랑을 기뻐하는 신부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신부의 옳은 행실이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신부로 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리신 희생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그 사랑에 사로잡혀서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가 입는 이 세마포를 7:14에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선언하였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행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함을 얻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이 행하는 행실입니다. 이 의로운 행실은 신부의 거룩함의 증거이며, 동시에 신부가 어린양의 혼인을 위해 자신을 잘 준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바울 사도가 선언한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그러기 때문에 9절에서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구경꾼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로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우리의 행실, 우리의 죄악과 관계없이 하늘의 잔치에 초청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우리는 죄를 지어도 괜찮고 우리의 행실이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행실이 우리에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피에 의해 깨끗함을 입어 신부로 초청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실이 어떤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실로는 도무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게 될 뿐만 아니라 오직 그분께만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자신이 경배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이유로서 자기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는 요한의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모습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배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신부가 신랑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랑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신부된 도리입니다. 이 땅에서의 결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통해 더욱 주님을 생각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부이며 성도의 옳은 행실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오직 그분만 자랑하며 그분께만 찬양을 드리는 것임을 다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1.26).

 

 

 

 

 

요한계시록 72강
하늘의 군대


요한계시록 19:11-16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자주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지만 신앙고백이라기보다 그저 외우는 것에 급급하지 않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고백을 단순히 먼 미래에 있을 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은 언제나 심판주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으십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으신다는 것은 세상이 구분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기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란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 목숨이 유지되기 때문에 산 자로 생각합니까? 목숨이 끊어져 장례를 치르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죽은 자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구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 모든 인간은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 죽은 존재인데 서로에게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의 차이만 조금씩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죄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이 땅에 생명이라고는 없는 상태였기에 하늘에서 생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만이 산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본다는 표현은 요한 사도가 하늘의 환상을 볼 때마다 자주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표현을 쓴 다음 하늘의 현상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열려 보게 되는 하늘의 환상은 이 땅의 실체와 하늘의 상태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4:1에서는 하늘에 있는 열린 문 사이로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15:5에서는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리면서 성전 안에 있는 언약궤를 보게 됩니다. 무서운 심판을 앞두고 언약하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다시 한 번 보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늘 그 자체가 열려서 영광 중에 임하는 백마 탄 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백마 탄 자가 누구입니까? 여기서 백마 탄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어서 언급되는 이름들과 그 모습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현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의 색깔이 흰색인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이 색깔은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대적하고 핍박했던 용과 바다의 짐승 또한 땅에서 나온 짐승, 그리고 그들의 추종 세력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며 승리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백마를 탄 주님의 이름을 “충신과 진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충신과 진실”이란 말은 요한계시록 3:14에서 언급된 “아멘이시요”의 해석입니다. 구약에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이 ‘아멘’이란 칭호가 적용되었습니다. “진리의 하나님”(사 65:15)이신 여호와께서 언약하신 그 모든 것들을 신실하고 진실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한 의미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께서 충성되고 신실하게 그리고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고 하였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즉 율법의 의미를 아는 자라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해 인간은 철저히 실패하였다는 것을 선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스스로 율법을 잘 지켜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말씀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율법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일에 예수님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진리의 말씀이시고 율법의 온전한 성취자로 오신 주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지키려고 하는 죄인들의 아집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자기 손으로 성취하겠다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죄인들 세계에 예수님이 말씀으로 오셨다는 것은 이 땅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고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십자가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사야 63:1-6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도 추수를 할 때는 포도를 포도주 틀에 넣어서 짓밟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조심해도 입고 있던 옷이 포도주로 붉게 물들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표현된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모습은 바로 진노의 포도주를 틀을 밟아서 그 옷이 온통 피로 물들은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을 받아야 될 죄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단함으로 심판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의미는 죄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였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 주님께서 피 뿌린 옷을 입은 심판주로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12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눈이 불꽃같다는 묘사는 누구도 그분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숨은 의도까지 다 파악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눈에 다 드러나지 않는 것까지도 주님은 파악하고 보시며 제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면류관이란 이제 마지막 심판을 행사하려고 하는 주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의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은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다”는 말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실로 그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입니다. 세상에 속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13절). 말씀의 온전한 성취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15절에서 심판주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겠고.”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예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시면 그분이 하실 일을 이렇게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환상은 지금 이런 예언 가운데 뿌리를 박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다윗의 메시야 예언에도 바탕을 두고 있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시편 2:8-9에 의하면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초두에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특히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검으로 만국을 친다고 하였으니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외가 아니고 한국교회가 제외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대적하는 자라면 철저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한 철장으로 다스리신다고 하였습니다. 왕의 지팡이인 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모든 것들이 다 철장에 의해 부숴질 것입니다. 진노의 쇠몽둥이로 질그릇 같이 부수실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6절).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4절).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늘에 있는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2:41에 보면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하늘의 군대는 죄에서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그 군대가 입고 있는 옷을 “깨끗한 세마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본문에서도 본 바와 같이 성도의 옳은 행실이 바로 이 세마포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마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홀로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를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가 따르는 자는 오직 백마 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같은 흰말을 타고 있지만 입고 있는 옷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군대가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이 의롭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늘의 군대에 편입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심판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늘의 군대가 어떤 진영을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백마를 타신 그분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심판을 진두 지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그분만을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어떤 전쟁이며 누구를 심판하는 심판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들을 온전히 섬멸하시는 전쟁이요 심판입니다.

 

 

 


복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심판에서 제외되었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흰말을 타신 주님만 바라보며 따르고 있는지를 늘 말씀 가운데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하늘 군대의 한 일원으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목숨이 부지된다고 살아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속한 군대가 바로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군대에 속한 자임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2.9).

 

 

 

 

 

요한계시록 73강
하나님의 큰 잔치


요한계시록 19:17-21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박한 꿈입니다. 어쩌면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일 것입니다. 경제적인 여건을 좋게 하는 것도 기쁨과 즐거움을 유지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가정의 불화 원인이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생기는 것을 보면 경제적 여건을 좋게 하는 것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는데 크게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이 모든 것들은 땅에서 있는 잠깐의 즐거움이요 순간적인 기쁨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 사도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4:11-13에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풍부와 궁핍의 문제가 삶의 문제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땅의 것이 즐거움과 기쁨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은 하늘의 즐거움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요한 사도가 하늘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을 통해 성도가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본문에서 우리는 백마 타신 분이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계시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도요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의 군대에 속한 자들입니다.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주님께서 싸우시며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현장을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 사도에게 두 개의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7절에서 “또 내가 보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19절에서 “또 내가 보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7-18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해에 서서 새들을 향해 고기 잔치가 벌어졌으니 먹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천사가 해에 서 있다는 표현을 ‘태양의 온도가 높은데 천사가 과연 거기에 설 수 있느냐?’ 하는 식으로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천사가 해에 서서 외친다는 표현은 눈에 쉽게 띄는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외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공중을 나는 모든 새들이 보고들을 수 있는 위치에서 지금 큰 소리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잔치에 와서 시체를 실컷 뜯어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시체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왕들, 장군들, 장사하는 자들, 말들, 그리고 모든 자유인이나 종이나 작은 자나 큰 자들의 살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이 심판이 얼마나 보편적인 심판이 되는 것인지 또한 이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며 처절한 심판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보여주신 환상이 어찌 보면 끔찍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엽기적인 환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말씀하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9:17-20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서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 너희가 용사의 고기를 먹으며 세상 왕들의 피를 마시기를 바산의 살진 짐승 곧 숫양이나 어린양이나 염소나 수송아지를 먹듯 할지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잔치의 기름을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그 피를 취토록 마시되 내 상에서 말과 기병과 용사와 모든 군사를 배불리 먹을지니라 하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구약의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공중의 새나 빈들의 짐승에게 밥이 되어 먹히는 것은 죽은 자의 가장 큰 수치이자 불행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장례식으로 지내져서 제대로 땅에 묻히지 못한 죽음은 최악의 수치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표현을 빌려서 하나님의 심판이 죄인들에게 얼마나 처참하게 행해지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확대해서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4-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비단 현재적인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재림과 연관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1에서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미래에 일어날 일만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미래에 일어날 주님의 최종적인 심판도 동시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심판은 현재적이며 동시에 주님의 재림 때에 행해질 마지막 심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대적들이 최후의 멸망과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새들의 잔치라는 이 환상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환상이기에 문자적으로 이런 최후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실제 상황은 이보다 더 극적이고 비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이 완전히 패배하여 멸망당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온전히 승리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시고 피 뿌린 옷을 입고 하늘 군대를 이끌어 심판하시고 싸우는 이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큰 잔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들이 시체들을 먹게 되는 이 현장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큰 잔치”로 표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심판이 대적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되는 애곡의 날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 즉 교회요 성도들에게는 잔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한 사도가 본 두 번째 환상을 봅시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19-21절).

 

 

 

 

이 두 번째 환상에서 마지막 싸움의 결과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 자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별로 없습니다. 실제적인 싸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패가 어떻게 나누어지는지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한편에 모여 있고 다른 한편에는 “말 탄 자와 그의 군대”가 있어 서로 싸움을 시작하였다가 바로 싸움이 끝난 것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체포되어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진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싸움을 하는데 양쪽에서 어떻게 치열하게 싸움을 했는지 전혀 서술될 자리가 없습니다. 싸움을 시작했는데 그대로 싸움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로또 복권을 가지고 엄청난 대박을 꿈꾸고 있는데 단 몇 분만에 결과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한 순간에 전쟁이 마무리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싸움, 이 전쟁이 이미 백마 타신 분의 승리를 기정 사실화 해 놓고 설명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19절 이하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19-21에서 사단이나 용 혹은 옛 뱀이라는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19장에 나오고 있는 심판의 장면은 용의 멸망보다는 용을 따랐던 자들의 멸망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의 멸망은 20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20장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혔던 용이 그 무저갱에서 나온 다음 주님의 재림에 의해서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게 된 자들이 역사 속에서 용을 대신하여 마흔 두 달 동안 성도를 괴롭혔던 자들임을 20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용이라는 사단과 짐승, 거짓 선지자들이 연관되어 있고 한 통속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황불 못에 던져진다는 것은 구약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신 것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즉 완전히 멸망되어 하나님의 창조에서 깨끗하게 됨을 표현한 말입니다.

 

 

 

 

짐승과 연관되어 있는 거짓 선지자와 한 통속인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고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 땅의 모든 존재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시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주님의 심판에서 예외로 대접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꽃같은 주님의 눈을 속이거나 피할 수 있는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완전한 승리를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8-12).

 

 

 

 

바울 사도는 주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불법한 자를 그 입의 기운으로 죽이신다고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7-4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벌이신 하늘의 큰 잔치에 참여된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군대로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이겨놓은 전쟁에 군대로 부름 받은 자들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하늘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되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세상의 것으로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빌라도의 고민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마 27:22).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님을 나의 삶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만을 위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2.16).

 

 

 

 

 

요한계시록 74강
일천 년 동안


요한계시록 20:1-3

 

지난 한 주간에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한 사건은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입니다. 화요일 이후 일주일 내내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기사로 떠들썩하였습니다. 사회를 비관한 한 정신이상자의 소행으로 드러났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런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여러 가지 시각으로 사람들은 분석하고 해석합니다. 사회의 안전 불감증 혹은 지하철의 구조적 모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회의 냉대 등 여러 가지 원인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가장 밑바닥에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우리는 성경적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성장과 발전을 원합니다.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거대한 도시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거대 도시 안에 많은 것들을 거대한 것으로만 채워 넣기를 바랬습니다. 대형 아파트 단지, 대형 쇼핑 몰, 외적으로 대리석을 붙인 거대한 건물들과 구조물들 이런 모든 것들이 성장과 발전의 증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전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 때문에 사소한 것들은 묵인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폭리를 취하고 부실 공사를 행하며 뇌물이 오고 가는 것들을 차단한다는 생각을 할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한 정신 이상자가 단순히 같이 죽자는 마음으로 행한 방화 사건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발동한 죄성이 성장과 발전의 신화를 이루어 내려고 한 부작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하여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성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 내려고 하는 우리의 죄성이 우리 안에 여전히 발동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도 이제까지 성장과 발전의 신화를 만들어 내고자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형 할인마트와 같은 교회를 만들어 놓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함께 하신 결과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증표라고 내세웠습니다. 요즘도 기독교 서점에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교회 성장과 발전, 부흥을 위한 책들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죽고자 하는 자를 주님의 성령께서 만들어 내시는 곳입니다. 오직 십자가를 따르는 마음으로 세상을 거부하게 만드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하늘의 보좌에 엎드려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만 경배하고 그분께만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물질을 숭배하고 축적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짐승의 사고 방식이요 용의 정신입니다. 결국 발전과 부흥의 신화 창조의 밑바닥에는 마귀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대하여 주님께서 싸우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19장 17-21절의 강론을 통해 주님의 너무도 분명한 승리에 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19장에서 주님께서 백마를 타시고 심판하시며 싸우시는 대상이 짐승과 거짓 선지자,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근본적인 실체를 분명히 밝히시고 그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을 주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여기 20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단이 최후의 멸망을 어떻게 당하게 되는지를 두 측면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가 현재 어떤 형편에 있는지를 나타내고, 7절 이하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멸망당하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으로 인하여 요한계시록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른바 천년왕국설에 대한 문제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라는 것입니다.

 

 

 

 

전천년설이란 오늘 본문과 같은 구절들을 근거로 들면서 잠깐 놓인다고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 후에 문자적으로 천년왕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천년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재림이 있기까지의 기간에 대하여 상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후천년설은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거의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데 점차 천국이 되어 나중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믿느냐를 가지고 보수적이냐 아니냐 혹은 나와 같은 신앙이냐 아니냐 하는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학설을 가지고 같은 신앙이냐 아니냐 혹은 보수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학설이 맞고 어느 것이 틀렸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학설을 따르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우리편이고 어떤 사람이 우리편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이런 신학적인 논쟁을 가지고 구분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들을 깨닫고 그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씀하는 일천 년 동안이라고 한 천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 므두셀라입니다. 창세기 5:25-27에 의하면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므두셀라 외에도 900세를 넘게 산 사람이 있지만 1000세를 넘기지는 못하였습니다. 인간이 천년의 기간을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쩌면 천년을 산다는 것이 희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고 싶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천년 이상의 수명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천년이라는 인간 수명의 한계를 넘어선 그것이 곧 영생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인간은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족보를 보여주면서 특이하게 “죽었더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즉 죽음의 족보인 것입니다. 그 죽음의 족보에서 천년의 수명을 뛰어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생명이신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 편에서 허락하셔야 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서 ‘천년’이란 시간적 의미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천년을 시간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시간이란 인간이 자연의 변화에 따라 의식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의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의 상태를 천년으로 이해하고 본문을 본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타락한 인간이 거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천년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본문을 봅시다.

 

 

 


1절에서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한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그가 어떤 모습의 천사인지 자세하게 서술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손에 있는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이 그가 하게 될 일을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용을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 천사가 용을 체포함으로써 사단의 무력함을 여기서 폭로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미래에 있을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현재의 사건입니다. 천사가 행한 특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단의 결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을 결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행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사단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어쫓는다고 비난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막 3:27). 먼저 강한 집주인을 결박해야만 그 집의 세간을 약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한 자 사단보다 더 강한 분으로 오셔서 사단을 결박하였기 때문에 귀신을 내어쫓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이적은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시기 위함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을 결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일천 년 동안 결박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재림때까지 사단은 결박당하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성도를 미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2:31-32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는 것은 무저갱에 던진다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땅에서 들린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사단의 미혹에 빠질 수 없습니다. 사단이 성도들을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까? 현재 사단이 결박당한 것을 인정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악이 횡행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아직도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주간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이 혼란과 부패 속에 빠져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정말로 다스리시는 이가 하나님이신지 아니면 무저갱에서 나온 사단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서 대구 지하철 같은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사단과 짐승,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세상 나라들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으로 사단이 결박당했다고 하더라도 사단의 영향력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영향력은 짐승과 나라들을 도구로 하여 이 땅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정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단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택한 자까지도 미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2:12에도 보면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사단의 활동이 묶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단은 결박되어서 무저갱에 던져졌고 무저갱의 문은 잠겼고 인봉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주어진 영역에서 기승을 부리는 것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그것보다 주님의 승리하신 사실에 대한 것을 더 크게 보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는 당당히 사단을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여전히 활동하지만 하지만 못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성교회는 없앨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는 없애지 못합니다. 사단이 성도들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길 수는 없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이미 생명을 누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는 사단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악이 늘 승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느낌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느낌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느낌에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느낌은 감정입니다. 감정은 우리를 얼마든지 우리를 왜곡된 사고방식으로 나아가게끔 만들 수 있습니다. 감정에 의존해서 산다는 것은 믿음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우리 안에 믿음으로 자리잡고 계신 주님께서는 늘 말씀으로 책망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무시하고 감정을 좇아가지 마십시오. 약간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회개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정에 이끌려 기도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가난한 자를 위해 물질을 내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감정과 느낌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 방식이 주님의 십자가에 합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는 순간적인 느낌이나 감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의 지배를 받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만물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그분만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천년의 상태를 사는 이유는 바로 그분을 증거하고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복음을 위해, 십자가의 주님을 위해 살려주신 은혜만큼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2.23).

 

 

 

 

 

요한계시록 75강
왕 노릇


요한계시록 20:4-6

 

요한계시록을 연속하여 살펴보면서 더욱 분명하고 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구원이 요한계시록의 중심이나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이나 핵심도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초점이 나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좌가 있고 그 보좌를 중심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드러난 최종적인 하늘의 모습입니다. 결국 창세기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점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요 5:39)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바르게 살려고 하고, 또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공부하려고 하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분이 지신 십자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알아서 구원을 얻기 위해 내 것으로 만든다든지 아니면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공부하면 구원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8에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멸하신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성경을 펼치고 보니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확인하게 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고귀한 것인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고 공부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그 말씀을 좇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께만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1:3-14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6절)고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신 것도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절)고 하였으며 또 성령께서 인(印)치신 이유도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14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관심을 가지고 본다면 우리는 끝없이 구원 얻는 방법을 찾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는 방법을 찾기 때문에 구원을 나의 억울함을 푸는 쪽으로 해소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나를 무시하고 내게 부당하게 대했던 자들에 대한 복수심이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심으로 오늘 본문을 대한다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왕 노릇 한다고 하는 말씀도 세상적 관점에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왕 노릇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세상적 관점에서 왕 노릇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 노릇’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왕 노릇 한다는 말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왕 노릇 한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모든 성도들이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와 더불어 왕 노릇하면 누가 백성이 되어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까? 모두가 다 왕이라면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세상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왕을 권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이란 힘이요 권력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땅에서 하늘의 능력을 받은 자가 하늘에 가서도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세상에서 힘으로 여기고 있는 물질, 권력, 명예, 병 고치는 은사, 아들을 낳는 능력 등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구하게 되고 교회는 그들의 구미에 맞게 복을 빌어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왕 노릇 하는 것을 단지 천국에 가서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으로 이해하며 비록 세상에서는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을지라도 천국에서 교회에 봉사한 대가로 면류관을 받아쓰고서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위안을 삼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힘들게 봉사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요 자신을 무시한 자들에 대해서 보란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복수 심보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왕 되신 분과 함께 그분의 권한과 능력을 누리는 것을 왕 노릇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에서 본래 왕이십니다. 왕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때의 신분과 환경이 어떠하였습니까? 목수의 아들로 가난하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적 관점에서 겉모습만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래 왕이시고 또한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세상의 생명을 다스리는 권한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에 매일 수 없는 분입니다. 하늘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생명이라고 여기는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왕 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어떤 자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것은 목 베임이고 왕따이며, 세상의 법칙과 원리에 의해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 노릇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왕 노릇이라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하고 하기 싫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의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심판하는 권세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고 이것이 곧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서머나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 봅시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0-11).

 

 

 


성도가 세상에서 10일 동안 환난을 받지만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왕 노릇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환난이 심하나 그것은 10일간의 한정된 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천년이 문자적인 기간이 아니듯이 10일이란 것도 문자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주 짧은 상태에 거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누구나 그 어린양처럼 핍박과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어린양을 따라 살았던 자들은 그 고난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런 왕 노릇 하는 것은 죽은 이후에도 변함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왕 노릇 하는 것이 어떤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부활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5-6절).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사망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심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첫째 사망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 되신 하나님을 떠난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 곧 첫째 사망인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7). 이것이 바로 첫째 사망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말씀에서 떠나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간이 살았다고 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에 처한 자들이 영원한 사망으로 처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사망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는 것은 생명 되신 하나님과 함께 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것은 곧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과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이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고 생명 되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첫째 부활은 실제 육체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할 수 없는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바뀌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바뀌어진 것은 우리들의 믿음이나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마귀를 멸하신 결과이며 성령께서 은혜를 베풀어 함께 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란 주님과 더불어 사는 이 복을 누리게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16-18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이 땅에서 보이는 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본질은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의 것만 영원합니다. 하늘의 것만이 우리의 전부이고 소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복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을 늘 확인하고 그것을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성도란 곧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성도란 이미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계 1:6) 다음 우리로 하여금 나라와 제사장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모든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 특권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입니다. 어린양처럼 고난을 당하는 삶을 통해서 어린양을 따르는 교회는 이 세상을 통치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주님께서 사단을 패배시켰음을 말씀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사단을 이기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이셨지만 사단을 이기신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피를 흘리시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피를 뿌리기까지 한 어린양의 고난이 사단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처럼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 역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고난을 통해 왕이신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왕이심을 선포하며 그 왕의 명령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교회가 왕 노릇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왕 노릇 하는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에 의해 다시 조명해 보는 기회가 항상 있기를 기도합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3.9).

 

 

 

 

 

요한계시록 76강
천 년이 차매


요한계시록 20:7-10

 

어릴 적에 교회를 다니면서 가졌던 의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사단보다 강하시다면 애초부터 사단을 꼼짝 못하도록 만드시든가 아니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셔야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땅히 의문을 해소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시절에 전도사님과 자유롭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친구가 제가 하고 싶었던 이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학생부를 지도하시던 전도사님께서 최후에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신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최후 심판 때에 지옥불에 던져 넣어서 멸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답변을 듣고는 더욱 큰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심판 때까지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시고 용납하셔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려면 지금 하시지 왜 나중에 하시는가에 대한 답변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단의 활동을 그대로 두심으로 사람들이 계속 죄를 짓도록 허용하셔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하여 마땅히 해결할 수가 없었고 또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후 한참 뒤에 신학을 하고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후에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풀렸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은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 년이 차매’ 사단이 무저갱으로부터 나와서 땅의 사방의 백성들을 미혹하여 그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공격하려다가 주님의 심판을 받게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8절에 보면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에 대하여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1:7)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계 17:8)고 말씀하신 것에서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11:7에서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이 1,260일 동안 주님의 말씀을 전한 두 증인을 죽인 장면을 봅니다. 그러나 두 증인은 부활하여 승천하는 것과 큰 지진으로 사단의 나라가 멸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17:8에서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의 결론이 바로 멸망이라는 점도 강조합니다.

 

 

 


앞에서는 짐승이 어떻게 무저갱에 갇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무저갱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올라오게 되었는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20장 초두에서 사단이 갇히게 된 상황과 이유를 보여주고 있고 이제 본문에서는 그가 어떻게 무저갱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의 멸망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땅의 사방 백성들을 설명하면서 “곡과 마곡”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곡과 마곡이란 에스겔서를 배경으로 언급되는 표현입니다. 에스겔 시대의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장 북쪽 끝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곡과 마곡이라고 생각하였던 모양입니다. 에스겔서에는 “마곡 땅에 있는 곡”(겔 38:2)이라고 지칭함으로 곡을 마곡 땅에 사는 백성의 우두머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곡 왕을 가장 무서운 세력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에스겔 38장과 39장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공격은 무엇에 관한 예언입니까?

 

 

 


에스겔서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백성이 곡과 마곡에게 핍박받은 것을 계시록에서는 교회에 대한 악한 세상의 최후 공격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단과 그를 따르는 악한 세계 전체가 교회를 핍박하는 때를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곡과 마곡에 의한 핍박의 극치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본문에서 말씀하는 유사점이 무엇입니까?

 

 

 

 

에스겔서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공격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겪어야 했던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 시대에도 죄악으로 인해 여러 번 이웃 열방에 던지신 바 되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겪은 핍박이 가장 극심했던 한 시대를 말하면서 곡과 마곡의 핍박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약 시대에 교회를 핍박하고 공격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세력의 최종적인 공격의 상징으로 곡과 마곡을 동원한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수가 매우 많았던 것이 곡과 마곡의 군대의 특징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 존재할 교회에 대한 핍박과 압박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핍박은 매우 가혹하였지만 아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시대 마지막에 있을 최후의 환난을 상징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에스겔 당시에 곡과 마곡으로 상징된 수리아의 군대가 패배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리아의 군대는 완벽하게 순식간에 궤멸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곡과 마곡의 극심하고도 전면적인 공격은 악한 세상이 교회를 대적하는 최후의 발악을 나타내는 좋은 상징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싸움에 땅의 사방 백성이 연루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바다 모래”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끝날에 마귀의 악영향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천 년의 상태에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던 사단이 이제 놓임을 받아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사단의 모든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시점에서 자신이 갇힌 무저갱이란 감옥으로부터 잠깐 놓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20:3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단이 감옥인 무저갱에 천사에 의해서 갇히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렇게 천사에 의해 갇혔던 사단은 본문 속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제 그 천사에 의해 놓임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단이 결박당할 때뿐만 아니라 놓임에 있어서도 사단은 주님에 의해 부림을 받는 천사의 손아귀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천사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다든지 천사의 권세가 대단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의 사건을 통해 사단의 모든 권세를 제압하셨기 때문입니다. 실로 사단보다 강력하시고 위대하신 주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사단의 모든 권세를 제압하시고 결박하신 주님은 더 이상 사단을 상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 부림을 받는 천사에 의해서 사단은 허락을 받을 뿐이라는 사실로 주님은 이제 모든 영들의 주관자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특히 오늘 본문 같은 내용으로 교인들에게 대환난에 대하여 겁을 주는 가르침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겁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마지막으로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대환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는 것은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두려움과 걱정거리를 안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사단을 어떻게 최종적으로 처리하시는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욱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고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9-10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사단의 활동은 잠시 허락되어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어찌할 수 없어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잠시 허락하신 것은 사단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울 때 그곳에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사단의 활동으로 인해서 무엇이 짐승이며 무엇이 거짓 선지자인지 남김없이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잠시 놓여난 사단은 그 활동으로 인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사단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신 세상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신 이유는 에스겔 38:23에서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밝히고 있는 것과 내용상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 되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단이 공격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엇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의 진”이라고 하는 말 역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당시에 이스라엘을 진이라고 하였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출애굽 할 때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처소였습니다(출 15:13,17). 그러므로 ‘진과 성’이란 어떤 특징한 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의 참된 시민(히 12:22)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바벨론이라 불리우는 큰 성읍과 철저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곡과 마곡의 군대가 꾀하는 것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없애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천 년이 찬다는 것은 어떤 기간이 지나면 마귀가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마귀를 결박해 놓은 상태이기에 잠시 놓여서 지금 성도들을 향해 하늘 보좌를 향해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전하면 할수록 그것은 사단의 본질을 드러낼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거룩하신 분노의 불로 말미암아 사단과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도들을 미혹하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며 그의 군대들을 소멸시키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김영대목사/주성교회/ 2003.3.16).

 

 

 

 

 

요한계시록 77강
생명책


요한계시록 20:11-15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과연 나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과연 구원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 혹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만약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신앙 생활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더욱 노력해서 생명책에 기록되도록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일이라면 교회에 무엇인가 자꾸 투자한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이유로 인하여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을 잘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모임에 빠지지 않으며 구제와 선교를 위해서도 헌금하면서 열심히 헌신하는 이유가 오로지 구원을 위한 투자요 하늘 나라에 상급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하는 모든 것은 종교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나 신앙적 행위로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의 행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나 주일성수, 봉사, 구제, 전도, 십일조 이런 종교 행위들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면서도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자기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 모순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라면 과연 어떤 의미로 말씀하는 것입니까?

 

 

 

 

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요한 사도는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게 됩니다. ‘크다’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분의 권능, 영광, 거룩 그리고 위엄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희다’는 것은 깨끗함과 정결을 연상시켜줍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죄성을 철저히 심판하시는 주님의 심판이 결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의로운 심판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행하시는 심판은 깨끗하며 의롭다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은 거룩하고 순결하시며 그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의롭습니다. 보좌에서 행해지는 심판은 불공평하거나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참되고 공평하며 누구나 그 심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에 던져지는 자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도 누구나 다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의 심판이 합당하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심판에 누구도 반박할 수 있는 자 없습니다.

 

 

 

 

그러면 보좌에 앉으신 이 재판장이 누구십니까? 어떤 이는 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라고 해도 맞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도 맞습니다. 이런 것으로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좌에 앉으신 자를 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보좌에 앉은 분을 한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마음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1-24).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심판을 직접 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51:6에 보면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후서 3:10에 의하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인류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새롭게 하신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이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죄악의 결과로 나타난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심의 결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선한 것들을 남기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주’이시며 동시에 ‘회복자’이십니다. 결국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는 말씀은 심판을 행하시는 분과 심판을 받는 자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보좌에 앉으신 분께만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곧 최후 심판의 현장입니다.

 

 

 

 

13절에 보면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보좌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 섭니다. 이미 죽은 자들까지도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라는 말씀은 어떤 형태로 어디서 죽었든 그것이 심판대 앞에 서는 일에 방해 요소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다와 음부도 심판 받을 자들을 심판대 앞에 토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이렇게 모든 자가 빠짐없이 서게 되고 엄위와 영광, 거룩에 의해서 깨끗하고 공의롭게 행해질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이 행해지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심판을 하시되 무엇에 근거해서 심판을 행사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생각하면 인간의 행위가 심판에 대한 기준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여 세상에 살 동안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결국 천국에 가는 것과 지옥에 가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통째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형식에 불과하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선하고 착한 행위를 많이 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보면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책 외에 생명책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책 외에 다른 책, 즉 행위를 기록한 책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책 외에 행위를 기록한 책이 하나 더 있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아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 대해서는 행위를 따라 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15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불못에 던지우는 자, 즉 심판에 의해서 멸망에 들어갈 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는 것은 분명 우리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록되어지고 기록되어지지 않는 사안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기록되어지는 것이 생명책입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결국 심판의 기준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에 좌우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위가 기록된 책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의 행위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행위가 기록된 책이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자기 행위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이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항상 죄를 짓게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가만히 두어도 항상 죄를 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행위가 악하고 그 악한 행위로 인하여 자연히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차원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억지로 죄를 짓도록 조장해서 지옥에 던져 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높이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그 행위까지도 자신을 스스로 영원한 형벌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불꽃같은 주님의 눈을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보좌 앞에 진짜 책이 두 권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생명책이고 하나는 인간의 행위를 낱낱이 기록한 책이 있다는 식으로 만화 같은 상상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한 사도가 환상으로 본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하게 하늘 보좌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판단하지만 주님은 인간의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꿰뚫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했던 일들을 잊어버릴 수도 있고 우리가 했던 말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억조차도 왜곡된 것이며 불완전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들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29-33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신 말씀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그분이십니다. 보좌에서 심판하시는 그분이십니다.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그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무조건 두려워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그분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래도 죄요 저래도 죄니 그냥 죄인으로 죄를 지으면서 살자고 막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교회 건물에 관심을 가지고 엉뚱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부활의 과정이나 심판의 상황을 알아내어 어떻게 하면 잘 대비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는 말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으니 함께 대비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도 그 심판의 현장에 있는 마음으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심정으로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생명책에 나의 이름이 기록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관심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늘에 생명책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십자가로 늘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김영대목사/주성교회/ 2003.3.23).

 

 

 

 

 

요한계시록 78강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21:1-4

 

우리 사회에는 고통 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통 당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고통과 어려움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세상의 삶입니다. 전쟁이나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지금까지 눈물을 많이 흘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 사고만 해도 그렇습니다. 피해를 당한 자의 입장에서 만족한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다만 이런 문제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현실적으로 당면해 있지 않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합니다. 우리 자신의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 운동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회 운동을 통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들이 없이 모두가 편하고 잘 살게 하자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실제적인 일들에 뛰어들어서 자기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이러한 사회 운동이 피해를 입은 자의 입장에 서서 피해를 주고 있는 자를 대항하여 해소해 보자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성경적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고 피해를 당하는 자의 입장에 서서 누가 피해를 주고 누가 피해를 입고 있는가를 분별하여 피해를 주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해를 주는 자를 가려서 그에게 불이익을 당하게 함으로 사회가 편안하고 모두가 잘 살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피해를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사회 운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나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나라, 새로운 공동체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변화시키고 깨끗하게 하여 바르게 잘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대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때 기존의 세상은 없애 버리고 대신 새로운 세상, 즉 천국을 주신다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단순히 장차 올 천국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런 의미로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라는 말이 덧붙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새 땅에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만 아니라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장차 올 천국은 바다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에서는 두 바다가 나타나는데 처음 바다는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리 바다가 나오는데 유리 바다는 처음 바다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천국에 실제적인 바다가 있다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은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가? 우리가 어떻게 상상해야 되는가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7:20에 보면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구약 성경에서는 바다가 죄악과 연관되어 비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사단의 보좌를 이어받아 42달 동안 성도들을 괴롭히는 짐승이 나오는 곳이며(계 13:1),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계 20:13)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다는 악을 상징하는 단어요 그것은 곧 세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바다를 죄악으로 말미암는 사망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 말씀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어떤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적인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2절을 살펴봄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절에서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실제 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인해 논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끝없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이스라엘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도성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 성 안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의미를 자기 백성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다윗을 통해 전쟁하셨고 또한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점령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예루살렘 성은 온 이스라엘의 핵심이요 대표인 셈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동일시되었고 성의 존재는 이스라엘로 인식되었습니다. 때문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말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다윗의 왕궁이 있었고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윗 왕이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구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에서도 예루살렘 성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그 성에 성전이 있고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에 보면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성이란 분명 새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즉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같은 건물로서의 성전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 함께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새 예루살렘이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이며 주님의 신부된 모습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벨론 성과 대조해서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죄악된 세상, 그 세상에서 마귀와 짐승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과 대조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 예루살렘 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이 어디로부터 내려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새 예루살렘,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신부를 준비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은 죄인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거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다시 보좌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3절).
요한 사도가 들은 보좌에서 나는 큰 음성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언약의 핵심이 되는 내용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완전하고 기쁜 화목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임재와 거주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6:11-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에 맺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또 에스겔 선지자도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6-27)고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언약의 말씀들을 다시 선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대로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밧모 섬에 있는 요한 사도가 듣는 말씀 속에서도 저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리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즉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열국 또는 모든 백성들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 12:1-3). 이러한 약속들은 이미 우리가 아는 바대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복을 얻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갈 3:8, 16, 26-29).

 

 

 


결국 어떤 한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약속하신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임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벌어지는 제사 제도를 통해 언약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예루살렘인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루살렘 성과 다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존의 세상과 같이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었다면 새 예루살렘 성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죄와 상관없는 상태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말씀으로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하늘로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하늘의 존재로 바뀌어진 것을 믿는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기존의 것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버리고 새로운 나라로 교체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여전히 죄악이 튀어나오는 것은 교체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부정하게 하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고 하는데 처음 것이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처음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처음 세상의 상태를 눈물이 있고, 사망이 있고, 애통이 있고,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있는 세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 것이 지나간 새로운 세상에는 눈물이 없고 사망과 애통함과 곡하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65:17-18 말씀을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신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백성들이 그 권세에 복종하며 사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고 한 표현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이전 것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상에서 통용되던 법칙이나 세상의 원리를 좇아 사는 것을 더 이상 소망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피의 은혜를 입은 것을 알고 믿게 되었다면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성도는 곧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으로 바뀐 자는 더 이상 세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 존재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소망하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일에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눈물이고 애통이며 곡하는 것이고 아픈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되는 자들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해 흘린 눈물이 있어야 주님께서 씻기실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눈물 흘린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그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겠습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3.30).

 

 

 

 

 

요한계시록 79강
이루었도다


요한계시록 21:5-8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에 대한 책임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말에 대한 책임이 동반된다는 것은 말한 것에 따른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번 내 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말을 해 놓고도 그 말에 따른 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 율법의 본질을 밝히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3-37).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 보좌, 성전 등으로 맹세한다는 것 자체가 악으로 좇아 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맹세 자체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맹세한대로 다 지킬 수 없다는 문제를 거론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1에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온전한 사람이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에 실수가 있고 말한 것을 완전하게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도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 명백합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그 입에서 뱉어내는 것은 실수와 거짓 투성이 뿐입니다. 말하는 것이 다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선생으로 나서는 자는 말을 많이 하는 만큼 행동이 뒤따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 죄인의 모습이며 이러한 죄인의 모습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온전한 선생이 될 수 있습니까? 온전한 선생이요 지도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죄악상을 드러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니라”(마 23:8-10).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온전한 선생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에 실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선포하신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의 의미는 말과 행동을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씀이란 ‘말과 행동’이 같이 포함된 의미입니다. 선포하시는 것과 그 선포한대로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어떻게 온전히 성취하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구약 전체에 흐르는 언약의 중요한 요소를 여기서 다시 한 번 만납니다. 구약에서 모든 언약의 후렴과도 같은 표현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하나님께서 이끄신 모든 역사의 목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가운데 나타내신 근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사역을 펼치신 궁극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맺은 언약의 목표이며 모세와 다윗을 통해서 확증하셨던 언약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의 장막은 역사 속에 그 백성과 함께 하였습니다. 광야 생활을 할 때에 그 백성들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요한 사도는 복음서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장막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텐트를 우리 가운데 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장막을 쳤던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임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실현시키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일시적인 동거가 아닙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천국에 가는 것을 상급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많이 봉사해서 많은 상급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상급을 받으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은 땅에서 억울하게 설움을 당했던 것들을 하늘에서 마음껏 풀어보자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만큼은 설움 당하지 말자는 다수를 향한 복수 심리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우리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함께 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시며 도와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에 자신의 뜻에 맞게 살도록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4에 기록된 바울 사도의 고백을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목숨이 계속 유지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와 더불어, 그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고백도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만으로 인하여 만족할 수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었도다”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5,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선언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언약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에 이제 그리스도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거룩합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14:14). 그리스도와 관련되지 않은 것들이 속된 것이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의 성취에 대한 절대적인 보증으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난삼아 하는 말이 아니기에 기록하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 약속의 중요성은 약속하는 이의 신실성과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혹은 얼마나 큰 약속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이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약속을 하신 분이 친히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과는 다른 내일에 대한 약속을 보장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좋은 날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때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눈을 밝히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는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10)고 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지금 그분이 본문에서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끝까지 다 내다보시고 미리 그렇게 약속하셨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약속을 주셨으며 또한 손수 그 약속대로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알파’는 반드시 하나님의 ‘오메가’를 향합니다. 알파와 오메가란 헬라어 알파벳 처음과 끝 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약속하신 분이 시작하셨고 또한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 역사를 종결지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는 반드시 끝을 보고 맙니다. 우리 인생은 계획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기도 합니다. 또 말한 것을 제대로 다 실행에 옮기지도 못할 때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무엇을 어떻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역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셨던 그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선언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 1-2).

 

 

 

 

17:1-2에 보면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세상은 음녀가 주는 잔에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음녀의 잔에 취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목마름을 경험하며 지낼 수밖에 없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수 샘물을 누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음녀의 잔에 취하지 않은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미 일곱교회를 통해 주신 말씀 속에 밝히신 대목입니다. 이기는 자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 의해 핍박받고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세상으로 말미암아 실패하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이 이기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실패한 인생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들이 바로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합니까? 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겁을 먹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힘에 겁을 먹고 짐승과 음녀를 좇아 살아가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어서 이기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긴 이김을 얻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승리를 은혜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거룩한 새 예루살렘으로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의미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성도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무능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은 무능하고 무익한 종이요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었도다”라는 선언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성취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을 믿고 말씀에 굴복 당한 자가 이기는 자들이고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며 성도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4.6).

 

 

 

 

 

요한계시록 80강
어린양의 신부


요한계시록 21:9-11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언제 오시느냐 하는 문제로 생각하고 날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막연하게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식으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상태는 아닌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면서 또한 그분을 기다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삶이 어떤 삶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삶으로 바르게 살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교회는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을 마치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그것이 주님이 오실 때에 부끄러움 없이 맞이할 수 있는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르게살기 위한 여러 가지 이벤트들을 교회가 도입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에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순결 서약서를 쓰고 행사를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을 다시 맞이할 때에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것은 오직 순결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육체적으로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러한 이벤트를 벌여야 하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 행사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것이 교회가 하는 주된 일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때에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순결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육체적인 순결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으로 훨씬 더 폭넓고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혼전 순결에 대하여 서약을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를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요한계시록 17:1에 보면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천사는 17:1에서 요한에게 말하고 큰 음녀의 심판을 그에게 보여준 천사와 동일한 천사인 것 같습니다. 17:1에서는 천사가 심판을 받을 큰 음녀를 소개했었던 반면 오늘 본문에서의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소개하여 큰 음녀와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멸망 받는 음녀의 도성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이 크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심판과 구원은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는 한 가지로 베풀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는 심판이 함께 베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공의로운 심판은 영광스런 구원의 또 다른 한 면입니다. 어린양의 아내가 나타나기 전에 음녀의 심판을 먼저 보여주어야 했던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바벨론에 살면서 동시에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삶을 누리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산다는 것은 바벨론 성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향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계 18:4)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위한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천사가 두 가지 상반된 환상들을 소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환상을 요한 사도에게 보여준 이 일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통해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은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구원을 선포한다는 의미가 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한 선포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베풀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사람을 구원시키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을 예배당 건물 안에 모아 놓고 많이 모아야 그 중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많을 것 아니냐고 하나님 앞에서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고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모았다고 교회가 하나님의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모아야 그 중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어리석은 죄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천사는 요한 사도에게 어린양의 신부에 대한 환상을 보여줍니다. 10절에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본 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즉 이 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아내입니다.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는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일곱 대접의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보여준 것은 사단의 아내와 같은 큰 음녀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교회였습니다. 음녀는 땅에 속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는 대상인 반면에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는 하늘에서 내려오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귀하고 정결한 존재로 천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여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부로서 표현하는 방법은 구약 성경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사 54:5-6).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정한 신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1-32).

 

 

 


오히려 그 이스라엘 중에서 참 이스라엘로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합류되는 자만이 주님의 교회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남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 사도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표현할 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결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의 손에 의해 생성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에 의해 모임이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자들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로 모인 모임입니다(요 3:3).

 

 

 


그러면 요한 사도가 바라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1절에 보니까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이미 새 땅에서 살고 있는 어린양의 신부인 새 성은 자신 안에서 살아 계시는 남편이신 주님 때문에 심판 받은 ‘더러운 음녀’와는 극한 대조를 이루는 ‘맑음’이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 사도는 ‘빛이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다’고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요한 사도는 그가 보고 있는 것을 기록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계 1:19, 21:5) 인간의 언어로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석으로 표현한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극치입니다. 인간의 언어나 글로 어떻게 더 이상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보석이 어떤 종류이며 그 보석이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인 새 예루살렘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보석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빛을 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 안에 이런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빛이 되어주시겠다는 구약의 약속이 바로 주님의 오심, 십자가로 말미암아 또한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어린양의 신부에게 영원토록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하나님의 장막이란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안에 사시기 때문에 이 성이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맑음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약 성경은 곳곳에 교회를 주님의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5:25-27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배우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혼자 살기 외로워서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통해 주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또한 교회는 주님께 어떻게 복종하게 되는가를 배우고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 성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5-7).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만 아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만 드러내는 것을 아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현재 삶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성경에서 신랑과 신부의 비유는 신부의 사랑이나 신부 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신 주님께서 신부를 선택하시고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점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 안에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거룩한 존재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께서 구약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거룩성이 완성되어 나타남을 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하심처럼 자신의 백성들 역시 거룩함을 유지하길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에게 거룩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섬기는 특별한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거룩함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사장 직분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신약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전서 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 역시 이런 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미 왕적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장들에게 주어졌던 동일한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이런 거룩함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제 본문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즉 주님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완전한 거룩함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 더러워질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정결한 것들만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이 거룩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세상의 것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4.13).

 

 

 

 

 

요한계시록 81강
거룩한 성 예루살렘


요한계시록 21:12-21

 

천국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만 다를 뿐이지 극락을 원하는 것도 결국 천국을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천국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천국은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는 곳이요 아름다움의 극치가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약 ‘천국이 있다면 어떤 환경일까?’ 이것이 천국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천국을 장소적인 의미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본문을 통해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기독교계에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 부교역자 시절에 어느 교회에 있을 때에도 그 교회에서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목사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천국에 대한 간증을 들어보니 천국을 전부 물질적으로만 묘사하였습니다. 고층 아파트가 있고 수많은 물자들이 풍부하게 널려 있어서 누구든지 쓰고자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사용하여도 모자람이 없는 곳으로 표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보수적인 교단에 있다고 자부하는 목회자들이 이런 일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교인들에게 지옥에 대한 경계심과 천국에 대한 도전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열심히 잘 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을 위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한마디로 하자면 교인 수를 불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에 대하여 성경에서 이미 다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심각한 병입니다. 천국 갔다 왔다고 하는 거짓된 간증을 도입하여 사람들에게 신앙적 도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말씀에 대한 도전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천국은 결코 물질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며 더불어 누리는 상태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도 결코 천국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어떤 장소나 도시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요 아내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죄악된 세상을 보여주는 바벨론 성과 대조해서 표현되어진 것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여 음녀가 주는 잔에 취하여 짐승과 놀아나는 바벨론 성과 대조하여 말씀합니다.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라고 표현하여 더러운 음녀와 대조하여 정결하고 순결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설명의 연장입니다. 과거 선지자들을 성령에 의해 환상 가운데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보여주었듯이 여기서는 요한 사도에게 성령에 의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은 천국이 어떤 모습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의 가치와 영광스러움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는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의 성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부인 교회를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이제 주님께서 영원토록 거하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조그마한 다윗 성에 주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있음으로 인하여 그 성이 하나님의 평강이란 의미인 예루살렘으로 불려졌던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 영원히 성전으로 계시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불려짐을 받습니다.

 

 

 


본문 12절 이하에 보면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12-14절)고 하였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그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가 등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열두 지파를 세우신 것은 결국 교회를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신부인 예루살렘은 실제의 도시나 성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기초석이 열두 사도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볼 때 열두 사도가 증거했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고, 복음 위에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바로 구약에서 말씀한 이스라엘의 실체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교회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크고 높은 성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크고 높은 성벽을 구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적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안의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크고 높은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교회가 더 이상 침략을 당할 위험이 없는 주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교회가 세상의 것에 의해 유린당하고, 세상의 문화나 악습들에 의해 노출되어 있어서 너무나 쉽게 교회가 공격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모임인 주성교회는 공격당하고 또 세상의 것에 의해 무너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공격당할 수 없고 무너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주님의 보호하심 아래 든든히 서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무너질 수 없는 그런 난공불락의 성처럼 이 성이 묘사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문에 있는 열두 천사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문들을 지키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죄악된 자들이 더 이상 주님의 교회에 들어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천사들을 완전한 수의 문을 가진 거룩한 성을 파수하는 자들로 기록한 것은 이 성이 영원토록 멸망당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의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파수꾼으로 있음에도 멸망하고 말았지만 하늘의 천사들이 새로운 예루살렘의 파수꾼이 되어 있기에 더 이상 멸망이 없음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15절 이하에 보면 성전을 척량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금갈대”란 금으로 된 척량자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1:1에서도 지팡이 같은 갈대로 성전과 제단과 거기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와 달리 여기서 하는 척량은 보존이나 심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엄청난 위용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척량된 성이 어떤 모양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16절에서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은 길이와 폭과 높이가 다같이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지상의 성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 약 2,400㎞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현재의 도량형으로 환산하여 그 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확한 크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기보다 중요한 것은 척량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척량을 하되 누가 합니까?

 

 

 


17절에 보면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척량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건축되어진 성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에스겔서 40장에 나오는 성전 척량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사람이 성을 척량하는 것이었는데 그 사람이 곧 천사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사람이 아니라 천사에 의해 척량 된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 성이요 어린양의 신부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보존되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동화되거나 세상에 합류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길이와 폭과 높이가 똑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아내란 인간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며 그 선택에 대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어린양의 신부로 세움을 입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어린양의 신부가 되었다는 것은 신부 자체의 영광스러움이나 신부 자체의 고귀함 때문이 아니라 신랑이 선택하였고 신랑이 신부로 부르셨기 때문에 영광스럽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이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은 신랑으로 인한 영광스러움과 고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18-21절).

 

 

 


분명 이는 천국이 이런 상태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천국이 이렇게 보석으로 꾸며져 있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기록된 보석을 일일이 다 알아야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여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보석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그 특징과 아름다움을 설명한다면 훨씬 더 실감나게 느껴질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적인 환상에 잠시 빠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영광스러움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고 주님의 고귀함에 젖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각종 보석을 천연색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은 보석의 종류를 설명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보석의 환상에 빠지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움과 고귀함을 담고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가 영광스럽고 고귀하신 신랑에 걸맞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만들어 내신 것이기에 신랑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 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6에 보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영광스럽게 만드십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십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을 우리가 보기에는 초라하고 죄를 짓고 또 지으며 회개를 반복하지만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영광스럽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확정지으셨습니다. 우리의 경험상 아직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완전한 교회요 완벽한 신부로 단장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세우시는 주님입니다. 십자가를 지셨던 그분이 자기 백성들을 성도답게, 어린양의 신부답게 만들어 내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고귀함 그 자체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 영광스러움에 굴복되어진 자가 바로 신부요 아내입니다. 미래의 영광스러움만 생각하고 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영광에 굴복된 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성교회는 나약하고 초라하며 우리가 매력을 느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주성교회에는 인간의 냄새가 나며 사람들에 의해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영광스러움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의 영광을 그대로 다 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표현하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은 성화를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몸답게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임인지 다시 점검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4.20).

 

 

 

 

 

요한계시록 82강
보이지 않는 성전


요한계시록 21:22-27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확실하게 한 마디로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쉽게 답을 한다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흔히 의식주(衣食住)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식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식주만 해결되면 되는 것입니까? 입을 옷이 있고, 먹을 식량이 있으며, 거처할 곳이 있으면 다른 걱정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까?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목숨을 유지함에 있어서 꼭 먹는 것, 입는 것, 거처할 공간만 있다고 해서 다른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것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헷갈릴 때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적당하게 있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만족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입은 것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입으려고 합니다. 내가 먹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고급스럽지 못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더 고급스럽고 좋은 것을 먹기 위한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상대방에 비해서 초라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더 좋은 거처를 마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욕심입니다. 가진 것,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방에 비교해서 더 나은 수준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식주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문화 수준,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환경, 다른 사람보다 더 고급스러운 삶을 유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우리는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돈이고 그 돈을 가지기 위하여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이것이 먹는 문제로 시험하는 마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먹는 문제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을 찾고 종교를 가짐으로써 훨씬 고차원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먹는 문제는 먹는 문제대로 해결하고 그것을 더욱 고차원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종교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면 우리의 목숨은 생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떡을 먹는 문제로만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란 여러 종교 중에서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 사도는 이제 예루살렘 성 안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성 안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 성 안을 보면서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전의 의미는 성막에서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막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셔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주시면서 성막을 짓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제사장에 의해 희생 제사가 이어지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렇게 만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동이 용이하도록 지어진 것이 성막이었다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다음에는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도 이런 의미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의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2: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다른 어떤 말보다 이 말씀이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을 격분시켰습니다. 46년에 걸쳐서 지은 성전을 사흘만에 세울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새로운 성전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 성전은 부활하실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성전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성전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며 그림자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참된 성전은 이제 사람의 손으로 건축한 것이 아닙니다. 돌로 지은 것도 아니며 콘크리트 구조로 지은 건물도 아닙니다. 이태리에서 수입한 좋은 대리석이나 아름다운 유리를 붙였다고 해서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보석으로 치장하였다고 할지라도 성전이 아닙니다. 희생 제사가 이어진다고 해서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전의 의미뿐만 아니라 모든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어 완전히 다 드러났고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약속의 성취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에서 성전을 아름답게 꾸몄기 때문에 오늘날도 예배하는 건물을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을 거둬들이기 위한 수법일 뿐입니다. 큰 건물을 지어놓고 자기 명예를 자랑하는 과시욕에 빠진 결과일 뿐입니다. 이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높고 화려한 건물을 지어놓고 스스로 좋은 교회를 만들고 좋은 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천국을 쟁취하고자 하는 최면에 걸려든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나 건물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성전은 구속받은 백성이요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로 구성됩니다. 구속받은 백성들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성전이 되는 동시에 그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모든 성도들이 주님과 더불어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은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서 건물로써의 성전을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하나된 상태 그것이 바로 참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23절에 보면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이와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의 영광이 그 성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빛이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빛이 그 성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천국에 해와 달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천국에 해와 달이 있느냐 없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와 달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에는 전깃불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 빛이 있는 낮에는 전깃불이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감에 있어서 해와 달의 비췸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즉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의 비췸이 삶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삶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계 21:11)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고 순결하며 정결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비췸을 주었던 가장 중요한 물체로 해와 달이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전기가 많이 발달되어 대낮같이 밝게 만들 수도 있지만 해와 달의 비췸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해와 달의 비췸이 없다면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류뿐만 아니라 생물들 역시 해와 달의 비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요 교회는 주님의 영광만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식주 문제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성교회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임에 의식주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잠깐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란 지금 이 자리에서 오직 주님의 영광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어린양의 생명이 삶의 원리가 되고 방법이 되며 전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삶을 제한하는 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어둠으로도 제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4절에서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하였고, 또 26절에 보면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은 개방되어 있는 성이고 열려 있는 성이지만 어떤 원수의 공격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모든 원수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문이 열려 있으며 만국이 다시 들어온다고 하니까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아직도 만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강했던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한 나라가 온 천하를 평정하게 되면 그 성문이 활짝 열려 있고 열방이 조공을 가지고 그 성으로 들어갔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바로 예루살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상에서 이해되어지고 표현되어지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보면 우리는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사 60:11, 19-20).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성취되어 구속받은 자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다시 돌려드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영광, 어린양의 피를 드러냄으로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27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문이 열려 있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속된 것이나 가증한 것, 거짓말하는 자들은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속되고 가증하며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마귀와 짐승 그에 속한 자들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어떠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기준입니다. 그분과 하나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성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의 원리와 법칙을 적당히 수용하여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영광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것임을 고백하며 서로 확인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이 물음에 나는 무엇이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4.27).

 

 

 

 

 

요한계시록 83강
생명수와 생명나무


요한계시록 22:1-5

 

기독교는 많은 종교 중에서 하나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강론하면서 수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이유는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보고 세상에서 절망하거나 힘들 때에 어떤 종교를 믿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에 선택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생명이란 전부이고 생명 그 자체로서 더 이상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생명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 있는 것 자체가 죽은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목숨은 생명이 아니라 이미 죽은 목숨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악과는 먹은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늘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졌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6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방법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 그 자체입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장악하여 생명화 하였을 때에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란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에 의해 장악되어 지배를 받는 상태가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갈 것을 기대하는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그것 자체가 생명이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천국의 외형적인 것이나 또 천국에 가면 무엇이 있고, 무엇이 주어지느냐 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거하는 상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는 상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어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처음에는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다운 성의 영광을 멀리서 보여주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찬란히 빛나는 성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그 성의 내면의 영광스런 특징들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중심부를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장면을 멀리서 보여주었습니다. 그 다음 높은 산 위에서 찬란한 성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성 안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심장부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인도자를 따라 그 성의 중심부를 흐르고 있는 생명수의 강가로 안내를 받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1-2절). 이것이 오늘 본문의 초두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을 보여준 천사가 이제 요한 사도에게 생명수의 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배경으로 등장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의 극치요 절정입니다. 동시에 본문의 장면은 신구약 모든 계시의 완성이요 약속의 성취에 대한 모든 결과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에덴동산에도 보면 네 강의 기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 2:10-14).

 

 

 


물이란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고 죽는 문제의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은 물을 중심으로 존재합니다. 물이 없는 곳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창세기 본문에서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는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본문에서는 길 가운데로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데 강 좌우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두 가지 과실을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표현되어진 것을 보면 생명수 강으로 인해서 큰 풍성함을 누리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강에 대한 표현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생명수 강과 차이가 있다면 에덴에서 발원한 강들은 온 지면을 풍요롭게 하는 대지의 젖줄이었고 새 예루살렘에서의 강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생명수의 강으로 지칭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개의 강줄기가 온 땅을 적시는 젖줄의 구실을 했다면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만국을 소생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이 본 이 환상은 우리에게 생명수로 인하여 풍성함을 얻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수의 강은 창세기 2장 뿐 아니라 에스겔 47장 환상을 생각나게 합니다. 에스겔 47:1에 의하면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물을 생명수라고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도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겔 47:7-8)고 하였고, 또 47:12에서는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것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고 요한 사도는 수정 같은 생명수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장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인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는 보좌야말로 지성소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원천이라고 표현하여 하나님과 어린양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이라는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생명수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는 새 예루살렘의 생명의 근원은 바로 생명수 강에 있고 그 원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에 흐르는 생명수 때문에 어린양의 신부가 된 예루살렘은 다달이 과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린양의 신부에게 있어서 참 생명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수 강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오늘 본문의 환상을 통해 요한은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39에서 덧붙이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신 후에 부어 주실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님의 오심으로 성도의 삶은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강 좌우 편에는 생명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생명나무가 보여주는 것처럼 생명에 관한 열매를 맺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된 것만 존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망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계 20:14, 21:4).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죄인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2절)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완전한 평화요 풍성함을 누리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3절 이하에 보면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첫 몇 장에 있는 창조와 인간의 타락에 대한 기록을 염두에 둔 궁극적인 면을 여기서 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성에는 “다시 저주가 없으며”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는 그러한 저주가 ‘다시’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자초한 저주에 대하여 창세기 3:15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모습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14:11에서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라고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로 이루신 일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확연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인하여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종들은 이제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만 섬기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실과가 어떤 것인가를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는 생명수에 의해 맺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에 의해 맺히는 생명나무란 이제 더 이상 저주와는 상관없이 오직 생명되신 하나님과 어린양만 섬기는 모습으로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4절)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33:21-23에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가 본 것도 하나님의 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 하나님의 등만 봤다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무지나 의심, 불확실한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을 누리는 상태를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다”는 것은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새겨진 주님의 소유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소유로 주님의 생명에 의해 생명에 대한 것만 열매로 맺힐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5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21:23에서 했던 말씀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오직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에 대한 것만 열매로 주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모든 과정도 주님에 의해 관장되어질 뿐입니다. 생명나무가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은 햇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비추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희생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은혜를 누리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힌다는 것은 오직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을 목표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품고 그 생명의 지배를 받으며 오직 그분만 섬기며 그분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천국이며, 이 천국에 사는 자가 또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5.4).

 

 

 

 

 

요한계시록 84강
속히 될 일


요한계시록 22:6-9

 

느낌이란 한 순간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야외예배 때에 있었던 게임 중에서 웃고 즐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두고두고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당시의 즐거움과 재미는 많이 반감되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영화를 본 후의 공포감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약간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나 영화를 본 직후에 느끼는 공포감이 그대로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상태 그 마음 그대로 우리의 신앙이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믿게 된 그 마음 그대로, 복음을 알게 된 그 마음 그대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까? 복음에 대한 처음의 감격, 감동, 느낌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까? 오래 믿으면 믿었다고 하는 만큼 우리는 타성에 젖어 신앙 생활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지속시키시는 성령께서 문제가 있다거나 그 활동력이나 영향력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날마다 깨어 있도록 주장하시며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죄 가운데서 더욱 죄를 좇아가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나는 복음 안에 늘 말씀을 접하고 있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 신앙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교묘한 술수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많이 타성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늘로 가신 이후 20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저 그런 약속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언젠가 오시긴 하겠지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지금 우리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즐기고 살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 사도는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가 먼저 보게 된 것은 일곱 촛대였습니다. 촛대 사이에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와 털이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 눈이 불꽃같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그 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었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나타냅니다.

 

 

 


요한이 본 이 환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붙잡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한 말씀은 이렇게 되라, 저렇게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몸된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가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회가 교회 되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고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21장에서 본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은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모든 악을 물리치시고 자신의 몸된 교회를 교회 되게 세우셨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교역자가 하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심판하시며 자기 백성들을 지켜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하여 기록한 요한 사도는 하늘의 열린 문을 보았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성령에 감동하여 하늘 보좌를 보았고 하늘 찬양을 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인봉한 책을 보았습니다.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곱 인으로 봉하여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요한 사도는 천지간에 그 인을 떼시기에 합당한 분은 오직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을 차례로 떼셨습니다. 일곱 나팔이 차례로 울려 퍼졌습니다. 그때마다 땅 위에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거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 사도는 일곱 진노의 대접이 쏟아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대접이 쏟아질 때에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 환상을 좀더 상세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큰 성 바벨론이 깊은 물에 맷돌같이 던져졌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사람들을 미혹하던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마귀가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이러한 환상 뒤에 요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벨론 성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찬란한 영광과 새로운 질서를 보여줌으로써 요한 사도가 본 환상은 절정에 도달합니다. 주 하나님의 영광의 빛 속에서 구속받은 백성들이 영원히 왕노릇 하게 되는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끝으로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모든 계시는 다 드러납니다.

 

 

 

 

요한 사도가 요한계시록에 기록하고 있는 이런 순서는 결코 시간적인 순서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한꺼번에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다만 요한 사도가 본 것을 순서적으로 기록하였을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대해야 합니다. 본문 6절 이하부터는 요한 사도가 받은 계시를 끝맺는 말입니다. 소위 맺음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속히 될 일”을 요한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천사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서 “속히 될 일”이라는 것을 시간적인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간이란 자연의 변화에 따라 우리가 측정하는 수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간적인 의식이란 역사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요 개념이지 하나님의 의식과 개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루나 천년이나 하나님께는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속히 될 일이란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들을 이루지 못하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엄청난 영광,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찬란함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할 뿐만 아니라 참된 것입니다.

 

 

 

 

참되고 신실한 말씀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속히 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속히 될 일이란 주님께서 속히 오시는 것이라고 7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7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속히’가 언제를 말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오시느냐가 아니라 오셨을 때 어떤 자가 과연 어린양의 신부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오시든 내일 오시든 아니면 수 천년 뒤에 오신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은 생명에 거할 자와 심판에 거할 자로 구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오시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떤 자가 생명에 거하게 되고 또 어떤 자가 심판에 처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자’란 ‘’냐 ‘’냐 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누가 참여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원리와 원칙에 의해 부름 받은 존재가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에 거하게 되는 자가 복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는 곧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 구절을 쉽게 받아들여서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6절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6절에서 주를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말씀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말씀들이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 선포되어졌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주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도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영감을 주셨던 분입니다.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했던 선지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사로잡혀 살았기 때문에 메시야적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앞서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던 분의 영은 구약의 선지자들 속에서도 역사하셨던 분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영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다음에는 구약에서 역사하셨던 그 영은 그리스도의 영과 일치된 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구약의 관점에서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께서 보이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는 말씀을 통해 주님의 눈과 일치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일곱 영이란 말 대신 구약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선지자의 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영’으로 구약 속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비밀들을 보이시며 일해 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천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종들에게 비밀을 밝히시는 목적은 그 비밀을 알게 된 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닫혀진 말씀의 비밀을 다 밝히심으로 그 말씀에 의해 살아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복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해 취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 편에서 주신 것이기에 이는 하늘의 복이요 신령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요한에게 하늘의 비밀, 말씀의 비밀을 다 밝혀서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호기심 해소를 위해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의 말씀이 자기 백성들 안에서 역사하도록 그래서 성도 각자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비밀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이끌려 사는 자가 복 있는 자요 또한 그가 바로 성도입니다.

 

 

 

 

결국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이란 이제까지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준 것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요한계시록의 중심은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분명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8-9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 사도는 천사가 보여준 하늘의 비밀에 압도당하여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거절하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여야 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오직 주님께만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분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들과 별반 차이 없는 모습으로 오셨지만 십자가를 지신 그분은 이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왕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복 있는 자요 참되고 신실한 말씀에 굴복된 성도입니다.

 

 

 


결국 “속히 될 일”이란 단순히 주님께서 속히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다리는 자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속히 될 일”이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지금 주님의 왕권에 굴복하고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내일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지금 그분께만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속히 될 일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5.18).

 

 

 

 

 

요한계시록85강
성에 들어갈 권세


요한계시록 22:10-15

 

구원’이란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위험이나 곤란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하여 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기독교에서 쓰일 때에는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 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우리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인간은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인류 모두를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만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시각으로 둘을 갈라놓고 생각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는 관점은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등의 구분이지만 하나님은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않은 자로 구분하실 뿐입니다. 선택된 자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며 선택되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자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늘의 권세에 의해 갈라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권세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아무나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권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권세를 세상과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 8:26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 간수하라는 말은 알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니엘 선지자에게 주셨던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요한 사도에게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니엘 선지자에게 주셨던 계시는 “여러날 후의 일”에 관한 것이고 요한 사도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은 그 성취의 때가 종말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예언의 말씀은 열려 있습니다. 종말이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점에서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이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습니다. 예언의 말씀이 열려있고 공개된 상태, 다 드러난 상태 이것이 바로 종말의 현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말씀이 다 드러났습니다. 더 이상 다른 계시가 필요 없고 다른 계시를 좇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록된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만 따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성경 말씀을 아무나 펼칠 수 있고 아무나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다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이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하고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되었다는 사실을 복으로 인정합니까?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읽는 모든 이들에게 인봉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완악하여 이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경건한 방법들을 고집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이 역시 다니엘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에 그 근거를 둔 말씀입니다.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9-10). 무서운 선언입니다. “그대로 불의하게 두라, 그대로 더럽게 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불의를 자행하는 것을 말리지 말라 그 불의를 계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더러운 자는 그 더러운 짓을 하도록 그대로 버려 두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그대로 불의를 행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불의에 처한 자들은 의를 행하고 거룩을 행하도록 권유하고 설득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불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불의를 행하다가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반면 성도는 어떻습니까?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3-4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본문을 잘 보면 성도가 주체가 아닙니다. 수동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이런 표현들을 보면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말씀하는 것이 우리가 행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일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였는가 아니면 마귀의 일을 하였는가 하는 구분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은 우리가 행한 일을 따져서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구분해서 상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 자들에게 주님께서 누리는 영생을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갚아주실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반대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잘난 것이 무엇이 있어서 주님으로 받을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아야 할 당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주신다면 그것이 바로 생명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이것 외에 우리가 바랄 것은 더 없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자기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믿음으로 살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게 되고 영원토록 그리스도로 더불어 기뻐하는 복된 삶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것임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믿음이 주어지고 그들만이 믿음으로 살게 되고 상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한 대로”라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선택되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멸망으로 마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 잘하고 봉사를 열심히 했다는 것이 주님 앞에 자랑하고 내어 놓을만한 것이 됩니까? 주일 성수하였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기도 많이 하고, 십일조 하였다는 것이 과연 십자가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 되겠습니까? 전도를 많이 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전부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의해서 된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 못되기에 우리가 한 것을 우리가 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자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자는 성도입니다.

 

 

 


13절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또 주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셨던 것과 동일한 표현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요한계시록 1:8을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칭호인 ‘알파와 오메가’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만 속한 심판의 권한을 행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다시 한 번 강조하시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파와 오메가’란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친히 반드시 마친다는 뜻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친히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 지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취하시는 주님 자신의 전능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심판주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곧 이사야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사 40:10). 본문을 잘 보면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상급을 주시고 보응을 하신다고 표현하지 않고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심판주이심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그 예언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천국에서 무엇인가 한 없이 받을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받아서 쌓아놓으려는 이 땅의 심보로 천국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것을 받아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천국을 누리고자 하는 심리로 천국을 원하지 마십시오. 그저 주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는 자체만으로 하나님 나라는 아름다운 것이고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14절 말씀이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죄사함의 표현입니다(계 7:13-14). 성도에게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창세기에서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없는 상태와는 대조적으로 생명나무에 나아가고 생명수 강이 흐르는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는 어떻습니까? 15절에서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거짓된 교훈을 하고 우상을 섬기고 무당이나 점치는 술객의 일을 하고 거짓말을 하면 지옥간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행위들을 하지 않으면 천국 간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3:2에 보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거짓된 가르침을 행하는 자들을 두고 ‘’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두고 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지금 이 단어를 유대인과 대조되는 이방인들을 두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열방과 족속 가운데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무리들과 대조하여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성밖에 있는 자들은 그대로 더러움을 행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성 밖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문자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상태와 대조해서 성 밖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요한이 의도한 것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생생히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성 안에 있는 자들과 성 밖에 있는 자들을 대조함으로 어느 쪽에 속했는가를 확인하라는 차원입니다.

 

 

 

 

거짓을 사랑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자들의 최후는 죽음입니다. 불못에 던지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차원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성밖에 있는 자들이고 성밖에 있기 때문에 그대로 더러움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새 예루살렘에 속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참여된 자로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은 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이 복을 알기 때문에 성도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그대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권 의식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 권세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권세이기에 이 권세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6.8).

 

 

 

 

 

요한계시록86강
말씀의 증거


요한계시록 22:16-19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철학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생활 철학이라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 소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것들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기준이나 원리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어떤 소신과 원리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에게 있어서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선포하는 기준, 말씀이 이끄는 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씀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말씀의 삶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을 마무리짓는 시점에서 이제까지 요한 사도에게 환상으로 보여주고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주님 자신의 말씀에 대한 확실함과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이 선언을 볼 때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맨 앞 부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주님께서는 자신이 선포한 말씀들을 다시 한 번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세상의 실상에 대하여 그리고 하늘의 비밀에 대하여 요한 사도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것이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다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이 모든 사실들이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다윗의 뿌리요 자손” 그리고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란 말은 어떤 뜻입니까?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5:5에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요 또한 뿌리입니다. 즉 예수님은 다윗 이후에 오셨지만 다윗 앞에도 계셨던 분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28). 민수기 24:17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별이 야곱에게서 나온다는 이 말씀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습니까? 새벽 별이란 어둠을 걷어내고 아침이 오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상징인 로마의 지배 아래서 광명한 새벽별로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당대의 성도들에게 오직 주님만을 기다리고 바라보아야 할 분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지금 어둠의 세상을 끝내고 영원한 날이 밝아오도록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유일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역사의 유일한 주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우리 구주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터 올랐습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의와 평강의 여명이 밝아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이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 22: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새벽별이 되시는 주님만이 세상을 끝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과 신부가 ‘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라!’고 선언합니다. ‘오라!’는 선언을 들은 자들도 또 ‘오라!’고 외칩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와서 마음껏 생명수를 마시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오라’는 초청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이사야 55:1-2을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포도주와 젖을 사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동일합니다. 따라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3-5)고 이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라!’는 초청이 있다고 해서 과연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자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오라고 하였다고 해서 누구든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에서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십자가의 피에 의해 죄사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값없이 생명수를 마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입은 자가 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신부가 ‘오라!’는 선언에 순종하게 되는 자는 자신의 악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오라는 초청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생명수를 받았으니까 그 대가를 내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대가로 지불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선포하게 되는 것이 신부의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신부와 함께 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7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부는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성령께서는 교회에게 어린양에 대해 증언할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실 뿐만 아니라 죄와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요 16:8-11). 따라서 성령과 교회는 연합하여 오직 어린양에 대해 선포하며 증거하게 된다는 점에서 교회의 사역은 바로 성령의 사역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 말을 가지고 우리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성령님의 일이라고 합리화시켜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주님의 신부다운 모습이 있을 때만 그 사역 모두가 성령의 사역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지상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 땅에 하늘의 비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유일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오직 말씀만 선포하고 드러내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주님의 말씀대로만 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누구든 이 말씀 외에 더하면 말씀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하신다고 했고 제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말씀 그대로 믿어진 자들이 생명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면서 생명을 쟁취하려고 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죄의 본성으로 행패를 부려서 주님에게서 빼앗아서라도 우리가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안식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은 죄의 본성으로 참예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예언의 말씀에 참예하게 되는 자가 누리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에 참예하게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 은혜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말씀을 ‘지켜야지!’라고 결심한다고 해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말씀을 믿는 자는 성령님에 의해 믿어진 자입니다. 성령께서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함으로 말씀을 믿게 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대로 사는 삶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 굴복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성도들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내 생각, 나의 기준, 나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이끌려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좋고 돈도 좋다는 식의 신앙은 예수님에 대해 오해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예수도 믿어야하지만 돈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더하는 것입니다. 흔히 목회자들도 말씀만 가지고 목회가 제대로 안된다는 이야기들을 곧잘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저의는 다른 것들도 적당히 포함시켜서 성경적인 것처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제하여 버리고 우리의 경험을 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예언의 말씀에 잠겨서 말씀만 세상에 드러내며 존재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시다. 주성교회나 내가 이런 기준에 합당한지 점검할 수 있는 시간에 되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6.15).

 

 

 

 

 

요한계시록87강
아멘 주 예수여


요한계시록 22:20-21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2001년 6월 10일에 요한계시록 강론을 시작하여 이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우리가 잠깐 다른 본문도 살펴보았던 적도 있었습니다마는 2년여에 걸쳐서 요한계시록 말씀을 나눔에 있어서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신비한 책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신비라면 신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유독 요한계시록만 신비하고 비밀에 싸인 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살펴보면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의 중심이 우리가 아니고 또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주님께서는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은 종말의 상태에 놓여 있고 하늘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보좌를 중심으로 모든 일들이 일어나며, 오직 보좌에 계신 분께만 영광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 하늘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도란 이러한 현실을 분명히 깨닫고 믿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지막 본문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시각을 분명히 해야 되리라고 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 “마라나타”라고 인사하였다고 합니다. 마라나타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성경의 기록 언어인 그리스어 표현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꼭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이런 마음과 믿음으로 사는 자가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마지막 본문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점검과 확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0절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말씀은 요한의 환상도 아니고 요한이 지어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환상이었습니다. 성경 말씀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개인의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또한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 역시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고 주님 자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고 ‘’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18-19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와 동일한 말씀은 성경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신명기 4:2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성경을 손으로 일일이 옮겨 쓰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더하거나 제하여 버리는 일 없이 전해져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단순히 그러한 의미만 가지고 주어진 말씀은 아닙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공적으로 성경은 읽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주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예언의 말씀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제할 수 없다는 것은 말씀하신 주님만 믿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느냐 하는 물음을 가지고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에 더하거나 제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이 말씀이 믿어진 자가 신부요 교회이며 성도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기 때문에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이루어질 일입니다. 22:6의 말씀을 강론하면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해서 이것을 시간적으로 ‘빨리’라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처음 지음을 받은 이 세상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고후 5:17). 따라서 첫 창조 세계의 시간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묵시의 세계입니다. 묵시란 영원의 세계이기 때문에 묵시를 아는 자는 영원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창조의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속히 될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취된 일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되어질 일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다시 오시는 사건도 포함된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오시고 세상을 끝내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끝낸 상태로 보고 사는 존재입니다. 앞 당겨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이 이 땅에 내려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늘 아멘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선언하시는 주님 앞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아멘’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멘이란 진실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진실로 오시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말씀대로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믿는 마음으로 드리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까? 그 날에 우리가 직접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 또한 주님과 같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또 빌립보서 3:20-21에서도 이렇게 바울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유다서 1:24-25에도 보면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영광의 존전에 기쁨으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성도의 삶의 형편이 어렵고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며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그 날에 주님께서 성도의 모든 어려움들을 해소시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새벽별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어두움을 정복하고 밝고 영광스런 상태로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신랑이 나타나는 그 때를 사모하는 신부의 반응은 열광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은 환난과 핍박으로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고백 중의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이 중요한 고백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고난과 핍박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시기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까? 속히 오셔서 심판을 행해 달라는 요구보다 오히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내게 억울함이 있고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내 중심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나의 환경과 여건에 맞추어 주님이 오셔야 합니까? 내가 어렵고 환관과 핍박을 당하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야 합니까? 아니면 나의 환난과 어려움과는 상관없이 주님께서 그 말씀대로 성취하셔야 할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시 오셔야 되는 문제입니까? 그렇게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기준에 맞추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 강론을 시작하면서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은 우리 중심으로, 나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고난을 풀어주고 우리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종식시키고 하늘의 보좌가 이 땅의 중심이 되고 오직 십자가에 희생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경배와 찬양을 받으셔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의 계시라고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1:1에서, 또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인 22:16에서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말씀을 무시하지 않는 자입니다. 성경공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 자체가 신앙 생활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과 말씀에 나 자신을 맞추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신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 합당하지 않고 현실과 맞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며 사는 자가 종말을 사는 성도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에서 그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주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가능한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란 십자가의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님 그분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피 흘리신 사건, 그 십자가의 은혜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고 주님 앞에 떳떳이 서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가 믿어진 자는 다시 오실 주님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이 은혜에 의해 우리 삶이 통제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삶의 형편과 상관없이 주님께 지금 이 고백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6.22).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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