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요한계시록 1강
계시
요한계시록 1:1-3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알게 모르게 지식이란 여러모로 쌓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들면 지식도 많이 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극복해 보려고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잡다한 지식들을 더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이 지식 쌓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이 아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많이 아는 자가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많이 알지 못하는 자는 많이 아는 자에게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지식도 하나의 힘입니다. 많은 지식을 축적해 놓으면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격언 중에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힘의 논리에서 지면 지배를 당하고 힘의 논리로 이기는 자는 군림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노하우를 얼마나 축적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는 지식과 정보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지식과 정보의 전쟁터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현대를 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남에게 알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별로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쉽게 알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연예인에 대한 신상정보도 돈으로 거래된다고 하는 것을 며칠전 뉴스를 통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유명 가수들의 휴대폰 번호는 얼마, 주소는 얼마, 생일은 얼마 등으로 거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10만원 이상을 주고 그런 정보를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황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사고 팔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돈이 되지 않는 정보는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1-5).
그리고는 때가 되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으로 보내셔서 언약을 남김없이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었고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나타내시고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 주셔야만 알 수 있고 또한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여기에 계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시가 무엇입니까? 계시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깨우쳐 보이는 것’ 또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누가 계시하며 무엇을 드러내시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히브리서 1:1,2에 보면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즉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주신 것이고 또한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으로 주신 것과 또한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본문에서 ‘속히 될 일’이라고 한 것도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계시로 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남아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십자가로 이루셨고 또한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되어 말씀을 통해 다 드러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실 우리의 관심은 요한이나 혹은 천사에게 더 집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과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인간의 사명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꼭 걸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다 이루신 것을 믿는다는 것이고 또한 그분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제가 설명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일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을 통해서 하실 수도 있고 심지어는 동물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주님의 일하심에 있어서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면 그 사람을 보지말고 일의 원동력이고 근원이 되시는 주님만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도구에 불과하므로 사람을 보지말고 주님의 능력만 보고 증거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이나 천사는 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요한은 그냥 밧모 섬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요한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불현듯 하나님의 계시가 요한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을 흠모하고 요한을 위대한 사도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을 빼앗기는 경우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병고치는 이적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을 환상이나 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방언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고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기한 것과 미래의 일들을 모조리 다 보았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것 또한 그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하신 것에 대해서 보고 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자기의 체험이나 계시를 받은 자기 자신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다 증거하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2절).
요한 사도는 주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증거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데 있어서 모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생명을 누리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고 완벽하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부족한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추가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계시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완벽한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하나님의 계시의 수준에 올려놓고 지키고 따라가려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만이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무엇인가 늘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비결을 찾습니다. 누군가 교회를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교인수를 자랑할 정도로 부흥을 시켰다고 소문이 나면 누구나 그 비결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교회를 부흥시키는 계시가 된 증거입니다.
기도원 가서 40일 금식 기도하여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계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문제가 있어서 고민을 하면 40일 금식 기도할 것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를 통해 문제 해결을 하였으면 새벽 기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계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곧 계시로 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경험을 계시로 삼고자 할 뿐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우리를 올무에 거는 방식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대부분의 교인들은 모르는 듯 합니다.
인간은 한 번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지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그와 비슷한 일을 만나게 될 때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문제를 해결하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자식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요구하였지만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내려 오셔서 그 아이를 고쳐주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 9:28). 한 마디로 전에 우리도 귀신을 쫓아내는 경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통하지 않습니까 하는 물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쉽게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기도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매사에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경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인간이 기도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경험과 종교적 열심으로 어떤 문제를 풀어내려고 하지말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주님께 맡기는 것이 주님을 믿는 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누가 얼마나 쌓느냐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경험, 종교적 열심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에 관심 가져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누가 기도해서 어떤 일을 이루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믿음에 의해 나오는 삶인 것입니다.
3절 말씀도 자주 오해되어 많이 인용되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이 말씀을 가지고 읽고 듣고 지키면 복이 있다든지 아니면 읽는 것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키는 것까지 하는 자가 진정 복된 자라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해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읽는 자와 듣는 자 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를 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가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성경은 우리처럼 이렇게 책으로 되어서 모두가 다 가지고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적 예배 시간에 앞에서 한 사람이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읽었고 회중들은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읽는 자는 단수로 표현하고 있고 듣는 자와 지키는 자를 ‘듣는 자들’ 또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요한 사도는 회중을 이루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낸 이 서신의 글을 한 장로가 크게 읽는 것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온전히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우리는 복 없는 존재입니다. 복 없는 존재란 저주와 멸망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대조되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말씀을 온전히 지키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진정 복 있는 자는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단순한 한 사람의 의로운 죽음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죽는 대속의 죽음이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은 오직 그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그분 안에서 사는 삶이 진정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의 몸된 교회로서 말씀을 읽고 들으며 또한 지키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장악하고 계시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삶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분께 장악 당하고 그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에게 다른 계시란 있을 수가 없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약속이 성취된 이것이 우리 안에 계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늘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며 감사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2001.6.10).
요한계시록 제2강
은혜와 평강
요한계시록 1:4-6
성도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하고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대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공존함으로 병행할 수 있거나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존재하고 있고, 세상은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생활 하는 것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 보험을 들어 천국을 보장해 놓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종교 생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서로 공존하면서 죽음이라는 것으로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중간에서 교회라고 하는 어중간한 상태로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사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삶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단연코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현실적으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세상의 지배를 받고 세상의 원리와 법칙을 좇아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의 법칙과 세상의 원리를 거스리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무조건 반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볼 때에 세상과는 다른 차원으로 살아간다는 면에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곳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을 폐기처분하고 주님의 백성들이 새롭게 다스림을 받는 곳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져서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점점 바뀌어 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을 망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세상을 보는 시각은 망해야 하는 곳으로 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을 망할 것으로 보기 때문에 늘 세상을 떠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인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해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 성도의 현주소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속세를 벗어나서 도인처럼 살아가거나 예배당에서 와서 기도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고 전도하면서 교회 생활에만 열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만 읽으면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세상에서 벗어난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몸이 벗어난 상태로 살 수 있습니까? 죽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난 산다는 것은 세상과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의미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떠난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즐거움을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돈이 있건 없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즐거워하는 삶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직장에서 잘 되는 것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 때문에 오늘도 감사가 터져 나오는 삶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자식들이 건재하고 집을 사 놓았기 때문에 든든한 것이 아니라 환난과 고난 속에 있더라도 그리스도 때문에 늘 든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는 주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순간 이러한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은 성도의 모습이요 또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임을 밝혔습니다. 그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요한 자신이 종으로서 전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본 서신을 받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 5절에 보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본 서신을 수신하는 대상자를 ‘일곱 교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또 살펴보겠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일곱이라는 수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홀로 이루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창조하시는 사역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수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요한 사도가 본 서신을 보내는 대상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만을 뜻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하신 교회 모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요한 사도가 알고 있는 아시아 일곱 교회를 지적해서 말하지만 그 의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에 의해 만들어진 교회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 하나의 교회이지만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요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성교회에도 주님의 몸된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간증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윤리나 도덕적인 교훈집이나 훌륭한 구약의 위인들을 본받도록 하기 위한 전기집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죽은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으로, 계시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몸된 모든 교회요 성도된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란 으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은혜로 베풀어진 평강을 전제로 하는 인사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어른들은 서로 ‘식사하셨습니까?’라는 말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한창 어려운 시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식사는 제대로 하였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그러한 관심사가 인사로 표현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은혜와 평강이라고 문안 인사를 하였습니다. 관심사가 은혜와 평강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또한 성령님에 의해 베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성령에 대하여는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고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과거에 계셨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현재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또한 장차 오실 분입니다. 요한 사도가 여기서 하나님을 장차 오실 분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언약을 주셨던 그 하나님과 다시 오시는 하나님이 서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로 자신을 나타내신 그 하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은혜와 평강으로 이끄시며, 또한 장차 오셔서 은혜와 평강에 거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일곱 영, 곧 주의 성령 역시 자기 백성들을 날마다 은혜와 평강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을 주장하시는 이유는 죄에 대하여 책망하고 또한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묘사하기를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즉 부활의 처음 열매로 표현된 것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 보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골로새서 1:18에도 보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의 대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의 대표라는 말은 충성된 증인이 그 이후로 계속 나올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충성된 증인이 나올 것이라면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으로 어떻게 사셨는가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시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0)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의 유혹대로 그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만국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은 오직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삶이었습니다. 대속물로 자신을 희생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십자가에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셨기에 이 세상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이미 모든 임금들의 머리셨지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마 28:18-20). 그러므로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는 오늘날까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제 요한 사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평강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6절에서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말을 쉽게 자기 자신이라고 대치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맥을 통해 생각해 보면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것은 이미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즉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곧 말씀 안에 있고 말씀대로 사는 주님의 백성을 일컫는 것입니다.
나의 입장과 내 중심으로 성경을 봐서는 안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성경에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십자가의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일을 위해서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 자기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삼으시고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는 이미 출애굽기 19장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나타내신 바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사 43:21). 베드로전서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제사장으로서 세상에 주님의 주님되심을 드러내는 것이 제사장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서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아니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우리 교회를 사랑하셔서 우리 교회를 부흥 성장시켜주실 것이라는 것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래서 교회 성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깁니다. 많은 사람을 모아 더욱 크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크게 선교 사업을 하자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사람이 많아야 된다는 논리는 우리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야 재정이 튼튼하게 되고 그래야 목회자에게 충분한 월급을 주고, 또 친목과 적당한 놀이를 위한 재정이 충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를 위한 교회 만들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이는 주성교회 역시 하나님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성교회라고 하는 이 모임을 부흥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하여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성교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존재할 때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막연히 주성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을 주님을 위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주성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인간의 모임을 날마다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5절에서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성교회를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성교회 나오라고 선전하는 것이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직 그의 피를 증거하고 자랑하는 교회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나의 구원이나 우리의 구원을 중심으로 봐서는 안되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오직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떻게 세상을 끝내심으로 하늘에서 존귀함을 받으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6절)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교회요 주님의 백성이며 또한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의 흔적 때문에 오늘도 그분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주성교회가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성교회는 날마다 포기되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피의 흔적 때문에 그분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존재함을 늘 확인하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세상에 기대어 세상에서 덕볼 것은 덕보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경제 원칙에 의해 살아갈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이끌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는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심판을 드러내며 천국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에 기대를 걸게 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은 장차 오실 분을 바라보며 살게 만듭니다. 은혜와 평강은 우리를 세상에서 날마다 분리시켜 놓기 때문에 세상에 빠지지 않고 주님께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노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모습으로 있습니까?(2001.6.17).
요한계시록 3강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 1:7-8
사람들은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과거를 아는 것을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 의미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하고 애써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연관된 부분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역사는 인간의 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삶의 의미는 흔적 남기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 이름에 자신의 인격과 공로가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잘 지으려고 하고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태어나 이름을 부여받으면서부터 역사의 어떤 한 면을 담당하게 되고 또한 그 역사에 의미를 세워가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든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인간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역사에 맡겨져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생명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사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고 전혀 배워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역사를 배우더라도 그것이 십자가의 주님을 알아 가는 일로 귀착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역사관은 바뀌지를 않습니다. 아니 바꾸려고 하지를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모습입니다. 역사의 종말을 고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나를 위한 주님의 다시 오심만 생각하지 역사의 종말을 고함으로 모든 피조세계 자체가 불타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믿고 있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은 불타 없어질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붙잡고 세상의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목표가 된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아시아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인사말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을 때에 그 의미는 단순히 성도가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살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 은혜가 주어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평강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주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계 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으로 먼저 충성된 증인의 길을 가셨습니다. 먼저 충성된 증인이 되셨다는 것은 후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의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이 주님과 같은 증인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그 증인의 역할은 온전한 증인의 역할을 하신 주님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은 본래 온전한 증인 노릇을 할 수 없었기에 주님께서 오셔서 대신, 대표로 온전한 증인의 역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증인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교회요 또한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됨이나 성도됨의 의미를 이러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앙을 감상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감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현실입니다. 믿음이란 미래에 그리고 하늘의 그 어떤 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이 실상으로 내 앞에 드러나 있는 것이고 또한 보지 못하는 것이 증거로 지금 여기에 공개되어 있는 것입니다. 실상과 증거는 지금 여기에서 은혜와 평강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모든 주님의 몸된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한 것은 결국 세상에서 말하는 은혜와 평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당할 수밖에 없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사도가 6절에서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으로 찬양을 돌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파(Α,α)와 오메가(Ω,ω)라는 말은 본래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의 알파벳 처음과 마지막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 22:13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처음과 나중이며, 또한 시작과 끝이라는 의미입니다(계 1:17, 2:8, 21:6). 이미 4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구약 이사야 선지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참고 사 43:10). 하나님은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만물 이후에도 계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은 시작이요 또한 끝이라는 말로써 그 안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조건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전능하시다고 말씀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신대로 그대로 다 완벽하게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떼를 쓰고 기도함으로 우리의 원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그 언약의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멸망에 이르게 하시는 것은 자신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어내시기 때문에 전능한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약속대로 어떻게 세상을 마무리짓는가를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사도 요한이 역사를 마감하는 사건을 말하면서 구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다니엘이 선포했던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다니엘 7:13,14에 보면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이상은 네 짐승의 환상 중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인자 같으신 이에게로 그 권세가 돌아가는 것, 그 나라가 옮겨져 가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보았던 첫째 환상은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와 같았습니다.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 그것이 그가 처음 보았던 환상입니다. 그것은 바벨론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환상이었습니다. 즉 최초의 대제국이라고 하는 바벨론에 대해서 다니엘은 기술하기를 그 특성이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와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나타나는 제국을 일컬어서 잔인한 곰 같은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먹이를 남에게 빼앗기지 아니하며 생명을 걸고 그냥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먹어 삼키는 곰에 비유하고 있는데 파사(페르샤)라는 제국을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그 다음 나타나는 세 번째 짐승은 날개 달린 표범이었습니다. 이 짐승은 헬라제국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짐승이 철이빨을 가진 짐승인데, 이것은 앞의 짐승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로마제국의 장구한 세월을 생각할 때, 로마제국은 앞에 세워졌던 그 제국들과는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제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지금 오늘의 문명도 로마제국의 계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 다니엘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이 꼭 어느 나라를 찝어서 말하고자 하는 식으로만 한정시켜서 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실제적으로 역사적인 인간 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거기에만 한정시켜서 생각한다면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 제국의 다양한 면모를 말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떤 국가든지 이 모든 면들이 또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간 제국들을 일컬어서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그 본성이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그 정치의 핵심이 야수적인 힘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으로 권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강조하는 것은 정의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정의나 공의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치적인 권력 구조 속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역사의 어떤 권력 구조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정부 어떤 국가는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와 같을 수가 있고, 잔인한 곰 같을 수도 있으며 날개를 가진 표범일 수도 있고 철이빨을 가진 짐승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양상은 달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본성에 있어서는 짐승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세상 역사에 대한 모든 통치권은 반드시 인자 같으신 분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짐승 같은 이들이 가지는 통치권이 아니라 인자 같으신 분, 사람의 아들이신 그분에게로 나라와 권세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악으로 인해서 흘렸던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며 모든 한숨을 멈추게 하실 분이 인자이십니다.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의 역사를 마무리짓고 새로운 나라를 온전히 통치하시는 권세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5절에서 선언하고 있듯이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나라를 온전히 드러내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이 땅의 방문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형편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사관에조차도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말구유에 뉘어야 할 정도로 초라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몇몇의 이방인들이 와서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기신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실한 성도들의 입에서, 목동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0)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것을 알아듣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때에도 천사들의 입을 통해 증거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단순한 현상이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보듯이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출 13:21, 16:10 등).
예수님의 처음 오심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의 다시 오심은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의 주님 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빠뜨리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게 된다고 하면서 특별히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12:10에 보면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그를 찌른 자입니까?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서 창을 들고 죽음을 확인한 군병만을 의미한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한 사람을 지칭해서 그의 치부를 드러내고자 하는 뜻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입맞추지 않은 모든 자들이 주님을 찌른 자들입니다(시 2:12). 왜냐하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주님을 찌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틀어 십자가의 주님께 무관심한 모든 자들이 바로 주님을 찌른 자들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거기서 예외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의 사람들이 합작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은 단순히 그들만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죄악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땅에 속한 자라면 누구도 주님을 찌르고 십자가에 못박은 죄악에서 예외 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주님을 대적하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늘 우리 죄악의 본성이 주님을 향해 대적하고 주님을 찌르며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야수적인 잔혹한 나라는 이제 끝났습니다. 비인간적인 제국은 종말을 이미 고하였습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하늘 나라를 온전히 공표하는 사건만 남겨 놓고 있을 뿐입니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을 주님의 나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드러내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직 이루어져야 할 일이 아닙니다. 다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 이루어진 일이기에 그것은 온전히 선언하고 드러내는 일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종말을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미래의 사건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오심을 믿고 지금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 편승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역사의 종말을 고하신 주님의 편에서 하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편입니까? 나는 오늘 교회 나왔으니까 주님 편에 있다고 쉽게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편에 있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고 있고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세상에 밀쳐냄을 당하고 세상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더라도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주님께만 사랑과 순종을 드리는 자가 주님의 편에 있는 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영광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벌써부터 그 영광에 먼저 도취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재림의 영광은 오늘 십자가의 길을 가고 죽음에 동참된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2001.6.24).
요한계시록 4강
주의 날
요한계시록 1:9-10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글을 대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번역이라는 것도 해석이 가미되기 마련입니다. 책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에도 지은이의 의도를 100% 그대로 다 드러내서 번역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번역을 하면서 어떤 용어를 선택해서 쓰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해석이 가미되어져서 번역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가 아무리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본다고 할지라도 이미 내 안에서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이해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가 성경을 보면서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논리나 사상에 성경의 모든 본문들을 의도적으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논리에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맞추어서 내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사상을 전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설교를 한다면 이미 목사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내 입장에서 성경 해석한 것을 가지고 전한다면 우리는 이미 성도의 자격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죄인의 상태 그대로 두시지 않고 주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복음답게 드러내는 일을 충실히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먼저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신 결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전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주님의 일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자기 자존심이 세워지는 일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서 발견하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은 목사가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목사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목사만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자는 누구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경 해석을 목사의 고유 권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특히 요한계시록 같은 책은 일반 교인들이 함부로 해석할 수 없다고 아예 닫아둡니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어디서 조금씩 주워듣고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가지고 요한계시록 해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잘못된 종말론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 단순히 지식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기 회개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역할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7절)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찌른 자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찔렀으니까 세상은 망해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선포하시고 온전히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다시 오심은 심판하러 오시는 차원에서의 다시 오심입니다. 한 마디로 복수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 성경의 기록 의도가 아닙니다. 세상이 주님을 찔렀기 때문에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이고 또한 성경의 모든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역할 때문에 저는 제 자신에 대한 자존심을 뭉개고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죄인이라는 전제 아래서 주님이 자신의 복음만 온전히 드러내시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내가 자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 사상과 내 논리를 전했다면 성령께서 걸러서 하나님의 말씀만 여러분들 속에 남도록 기도할 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늘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사로잡혀서 성경을 이해하는 경우들이 너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의 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여기서 ‘주의 날’이라는 말 때문에 우리는 너무 쉽게 오늘날의 일요일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주의 날이 일요일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원어적 의미는 오늘날의 일요일이 분명합니다. 신약의 다른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심판의 날을 의미하고 있는 ‘주의 날’과 다르게 표현된 말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 주의 날을 오늘날 일요일인 주일로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주일에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주일을 잘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까? 요한도 주일을 지켰기 때문에 우리도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본문이 말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날에만 의미를 부여합니까? 장소는 의미가 없습니까? 장소는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까? 밧모섬에서 주일에 계시를 받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주일에 밧모섬으로 가야하고 밧모섬에서 드리는 예배라야만이 제대로 주일을 지키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드리는 예배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 주일을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요한 사도가 특별히 주일에 계시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성경에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의 날이 어떤 의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까? 베드로후서 3:10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에도 보면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하였고, 데살로니가후서 2:2에서도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고 하여 주의 날이 주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주의 날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사 13:9)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요엘서 2:1-3에 의하면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표현은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차원에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즉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같이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 이후 다시 오시기까지 우리는 종말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후서 3:8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간적으로 이해해야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컨대 어떤 이들은 이 땅에서 천년이 지나야 하늘에서는 하루로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가지고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하신 것은 6일 동안 하신 것이기 때문에 천년을 하루로 잡아서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으로 해서 6000년이 되면 종말이 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천년왕국은 안식하신 7일째라고 말합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성경을 우리의 시각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3: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는 시간의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묵시 세계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는 해와 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날과 시간의 의미가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면 살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날과 시간의 의미가 없는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죄 문제가 해결된 상태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일주일 중의 하루를 주님의 날이라고 규정하고 그 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직 주님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에 하는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요일이 주의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서도 주의 날을 단순하게 일요일로 보고 요한도 주일을 잘 지켜서 계시를 받았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매일 매일이 주일입니다. 하루를 잘 지켜서 나머지 6일을 편하게 살자든지, 아니면 6일 동안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액땜하듯이 하는 주일성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일요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일요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연합하여 주님의 말씀을 나누는 모임이 있기 때문에 그 모임을 거룩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열심히 모이기에 힘쓰는 삶이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이 주일이기에 늘 주님 앞에서 예배하고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이미 주의 날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의 날은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소멸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의 공로에 의해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날마다 주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그 심판을 드러내는 삶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특별히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성령에 감동하였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하여서 요한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을 때에 세상이 심판 받을 곳으로 보이고 자신 역시 심판 받을 자로 보여진 것, 이것이 바로 주의 날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요한으로 하여금 주의 날에 동참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면 요한이 보았던 것과 같은 주의 날을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가 여러 환상을 받고 이 책에 기록된 것을 전할 때 밧모라고 하는 섬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시대 당시의 밧모섬은 유배지였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로 요한이 여기에 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 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잡혀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한 밧모 섬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거기에 요한을 두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를 밧모 섬에 두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책이지 결코 우리의 구원이나 혹은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조성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 땅에서 죄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기에 의인을 거부한 세상은 심판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선포함으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8-19a). 한 마디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다른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19b).
그러자 금방 베드로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렸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요 21:20). 여기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란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였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이 말씀의 의미는 그 다음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요 21:23). 다른 제자에게 관심 갖지 말고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일에만 관심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은 요한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하여 밧모섬에 남겨 두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은 자신을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초대 교회 상황은 핍박을 심하게 받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밧모섬에 있지만 핍박받고 있는 여러 성도들과 다른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로 표현하기보다 형제로 표현하면서 예수님의 환난, 나라, 참음에 동참되고 있다고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서로 몸은 떨어져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고난을 당하고 함께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주의 날을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박살나는 날이 주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모든 것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도 그 날에는 다 불에 타서 소멸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목사의 직분,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들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 땅의 것을 모조리 다 소멸하시고 이 땅에 영원한 나라를 가져오시는 것이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더 이상 이 땅의 것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일요일을 단순히 주님의 부활의 날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매일을 주일로 보고 그 매일의 주일을 주님의 날, 즉 주의 심판의 날로 본다면 오늘 세상의 것을 버리는 즐거움이 있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2001.7.1).
요한계시록 5강
촛대 사이의 인자
요한계시록 1:11-16
인터넷 분야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편리함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우리 교회 싸이트에서 대화방을 하는데 이제까지는 서로 대화하다가 어떤 분이 질문을 하면 질문 한 것에 대하여 성경을 펼쳐놓고 같이 말씀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주부터 한 책을 정해서 지속적으로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요나서를 정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서로 묵상한 것을 나누고 제가 설명도하고 그렇게 합니다. 인터넷이라는 것 때문에 멀리 있는 분들과도 대화가 가능하게 되어 같은 시각에 앉아서 말씀을 나눌 정도로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편리함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는 더 이상 예배당에서 모이는 모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모임이라고 하는 곳에 나오지 않아도 성경을 묵상하고 설교를 들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교회 공동체의 모임을 기피하고 급기야는 모임이 폐지되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싸이버 모임이 성경적으로 타당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말씀을 나누게 되는 것은 글(문서)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한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글로써 질문을 하면 글로 답변을 할 때에 얼마만큼 이 글을 통해서 상대방이 이해하게 될까 하는 그런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말이란 서로 감정과 뉘앙스 또한 얼굴 표정을 읽어가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많은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글이란 서로 얼굴을 대하지 않고 쓰여진 글로써만 이해해야 되기 때문에 나름대로 그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에도 이와 같은 식으로 주님의 의도와 목적을 놓치면서 이해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의 표현은 만화같은 그런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때에 문자에 매여서 문자적인 이해를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을 오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말씀은 9절과 10절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밧모섬에서 요한이 주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요즘 말로 표현하는 일요일에 계시를 받은 것으로 오늘날 주일을 특별한 날로 의미를 부여하는 말씀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요한 사도도 주일을 잘 지켰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주일을 잘 지키라는 뜻으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요한이 성령 안에서 주님의 심판에 참여한 자로 계시를 받았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10절에서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보기 위하여 몸을 돌이켰다고 하였습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12절). 일곱 금촛대 사이에 서신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요한 사도가 본 인자 같은 이는 분명히 인자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인자’ 라고 하지를 않고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복음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인자라는 표현은 전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에 하신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로 표현하신 것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자신을 인자로 표현하였던 것에 기인하고 있습니다(단 7:13,14). 구약의 선지자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가 바로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제시되고 있는 인자상은 고난받는 메시야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라고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한 사도가 주님을 보고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자로 오신 그분이 세상에 계실 때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심판의 주님으로 만나는 그분의 모습은 더 이상 고난 가운데 계신 인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초라한 예수님이 아니라 이제는 영광 중에 존귀하신 주님의 모습이기에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영광스럽고 엄위를 지니신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희다 혹은 양털 같다는 표현은 흠 없고 정결함을 나타내는 표현이고,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늘 살피시기 때문에 그 앞에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다는 의미로 하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서 7:9에 보면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라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인자 같은 이가 그에게 나아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요한계시록에서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예수님의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확실한 심판주이심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15절에서는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라고 합니다. 다니엘 10:5 이하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는 말씀을 그대로 연상하게 합니다. 여기서도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영광스러움과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16절)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곱 별은 20절에서 알려주고 있는 대로 일곱 사자들을 의미합니다. 오른 손에 일곱 사자들을 붙잡고 놀라운 말씀의 능력으로 모든 원수들을 대적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모든 표현들을 그림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 사도가 본 주님의 모습이 실제로 이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동원하여 쓸 수 있는 용어들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만화 같은 주인공으로 주님을 상상할 것이 아니라 심판주로서 엄위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의 말씀으로 철저한 심판을 하시는 심판주에 대한 묘사인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심판주께서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불꽃 같은 두 눈으로 모든 감추인 것을 꿰뚫어보십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그분 앞에 만물은 순식간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의 전능하심 앞에 인간의 모든 악함이 일순간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악들이 다 폭로되어 풀무에 빛난 주석 같은 심판주의 발에 철저히 짓밟힐 것입니다. 어두움의 세력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모든 대적들을 소멸하실 것입니다. 장엄한 물소리 같은 그분의 음성이 심판하는 음성으로 발하시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셨던 그 얼굴로 장엄하게 해가 비취는 모습으로 드러나실 것입니다. 거기에 변명할 자가 누가 있으며 거기에 누가 다른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심판의 주님이 촛대 사이에 나타나셔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12절에서 요한 사도가 일곱 금촛대를 보았다고 하였는데 금촛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한계시록을 상고하면서 자주 말씀드리는 것인데 성경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요한계시록은 구약 전체를 배경으로 생각할 때에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촛대, 특히 금촛대라고 하면 구약의 어떤 내용이 생각납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성막 안에 있던 촛대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37:17에 의하면 “그가 또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으니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그것과 한 덩이로 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등대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와는 구분된 성소라고 하는 곳에 분향단과 진설병상과 같이 두게 됩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언약궤 될 수 있는 것은 언약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촛대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20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촛대 사이에 누가 계신다고 하였습니까? 인자 같은 이, 즉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서 계신다고 하였습니다(13절). 예수님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교회란 오직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다스리시되 무엇으로 다스리십니까? 언약의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제외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주님과 상관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자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의인의 범주에 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한 주님의 십자가 용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안에서 돌아볼 때에 심판 받고 주님의 날선 검의 공격을 받아야 할 죄악된 존재임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7절을 강론하면서 살펴보았지만 성도란 자신이 주님을 찌른 자라고 하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심판 안에 동참되어진 자로서 주님을 만났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기 공로 자기 행위를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인 됨을 알기 때문에 나의 공로,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4:2-3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보면 등대가 있고 그 좌우 곁에 감람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성전은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게 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성전은 반드시 인간이 세운 성전을 공격하고 심판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4:6에 보면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의 노력이나 세상적인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은 오직 나의 신, 즉 성령님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은 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인간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주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 됨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인의 범주에 넣어서 생각하는 존재라면 주님의 능력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들의 힘으로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헌신과 피눈물나는 기도를 통해 세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새벽마다 눈물 흘리며 뼈를 깎는 아픔으로 기도하신 장로와 권사의 헌신으로 몇몇 집사들의 봉사로 주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게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공로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그에 따른 영광은 다 가로채고 앉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 대접받고 영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음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건물이나 혹은 조직을 이룬 단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말씀으로 그것을 고쳐주기보다 목회자가 먼저 돈 많은 사람을 붙잡아 얼른 건물을 짓고, 부목사와 전도사들을 두며 제대로 된 조직을 이루어가려고 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복음은 표면상 교회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교회를 부흥시키고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된다고 교인들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조직체라고 하는 교회와 건물로서의 세워진 교회에 교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는 조직체가 아닙니다.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인자 같은 이를 주님으로 모시는 모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모임이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의 죄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오직 주님만이 심판주로서 또한 영광의 왕으로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땅에 교회라고 하는 모임을 통해서 주님은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11절).
주님은 일곱 교회에 이 서신을 보냄으로 인간의 교회가 결코 세워질 수 없고 오직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촛대 사이를 다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약의 말씀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교회는 인자이신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내신 주님 자신의 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 남기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로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성도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주님의 작업에 남겨진 자로 부름 받았다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든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이 필요 없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어야 교회다와진다고 생각하는 모임이라면 그것은 이미 주님의 몸된 교회와는 상관없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주성교회는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또한 바르게 배우고 있으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생각을 버리고 지금 우리가 언약의 말씀에 의한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 하는 점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옵소서! 내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내 아들 대학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사업이 성공하게 해 주시옵소서! 재정이 풍부한 교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간구들이 어떻게 우리의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심판주이시며 영광의 왕이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라면 오직 그 권능과 영광에 사로잡혀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세상의 것을 날마다 버리며 십자가의 은혜를 추구하는 감격에 사로잡히는 교회로 세워져 갈 것입니다(2001.7.8).
요한계시록 6강
두려워 말라
요한계시록 1:17-2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혼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죄인인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상태로써 그분과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성도는 주님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은 교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십자가를 세워놓고 그 앞에 모여보라고 요구하시는 표시가 아닌 것입니다. 완전한 새로운 공동체의 창조입니다. 교회란 세상에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좇아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바라보면서 자기 공로는 무시되어지고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주님께 공로를 돌리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늘 내 공로, 내 노력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조차도 행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고 자기를 나타내는 이유는 한 마디로 아직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자는 자기 행위를 내세울 수 없고, 오직 살아 계신 주님만 증거하고 나타낼 뿐입니다.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주님은 나타나셔서 장차 될 일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는 요한에게 네가 본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요한이 본 예수님은 과거에 갈릴리에서 본 주님과 달랐습니다. 과거에 본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기 위하여 오신 분이셨습니다. 즉 인자로서 고난 받으시는 메시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난 받는 인자가 아니라 영광을 위엄의 자리에서 인자 같은 이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나타나신 완전한 제사장의 모습이었습니다.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이 정결하시고 흠 없으신 모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눈이 불꽃 같아서 그 앞에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발은 풀무에 단련한 주석 같아서 모든 대적들을 능히 밟으실 분으로 보였으며, 그 음성이 위엄에 가득차서 물소리와 같이 들렸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는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시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와서 능히 심판하실 분으로 보였다고 요한 사도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광과 위엄의 심판주이신 주님을 만난 요한은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 사도는 주님을 만나자마자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6:1-5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름 받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의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죄인이 영광의 하나님을 본 것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죄인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주실 때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도 무사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죄를 사해주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 중의 하나가 화로에 핀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는 정결케 하였고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때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자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게 되었습니다(사 6:8).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도 보면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눅 5:4). 그러자 베드로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사람까지 불러서 두 배에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를 경험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베드로가 본 것은 많이 잡힌 물고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베드로는 금새 자신의 죄인됨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주님께서 다시 만나십니다. 그리고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십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옛날처럼 호언장담할 수 있는 그런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찌 할 줄을 모르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요 21:15-17). 베드로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 이제는 주님이 베드로 자신에 대하여 더 잘 아신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죄인이 주님을 안다고 고백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맡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반응은 한결같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후 고백한 것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난 고백은 “주여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사도도 주님을 만났을 때에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생명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고백입니다. 인간은 살았다고 하나 실제로 죽은 자입니다. 죄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신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살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에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본능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권능과 영광은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저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님과 연합된 은혜를 입었을 뿐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던 그 주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죽은 자가 생명이신 주님에 의해 다시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시작하셨고 마무리지으셨기에 그분에 의해 다시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8절)라고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죄인으로 있을 때에 두려운 상태에서 이제 다시 산 자에 의해 두려워 말라는 그 말씀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전능하신 분에 의해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은 요한이 본 것과 장차 될 일들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주이신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죽었다가 산 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날 죽었다가 산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야적 인물은 하나님 자신과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특별히 메시야적 인물의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불순종 때문에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며, 결국엔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에 이릅니다. 이때 선지자들은 그러한 위기에서 건져 줄 인물의 출현을 기대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란 바로 다윗 왕과 같은 지도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윗 왕 때처럼 강성하게 만들 자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자로서의 메시야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서에는 이러한 메시야적 인물을 ‘인자 같은 이’로 묘사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구약에서 수없이 예언하고 있는 언약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메시야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표현들을 그대로 여기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 적용시켜서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메시야가 되셔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완성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메시야에 대한 가장 완벽한 성취이기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다윗과 같은 왕을 기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이스라엘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기대는 신약에서 교회를 통하여 성취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 대상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그분은 열두 지파 대신 열두 사도를 부르심으로 새 이스라엘을 구성하시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극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 3:13-35의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가복음은 열두 사도를 세우심(막 3:13-19)과 소위 바알세불 사건(막 3:20-30)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막 3:31-35)을 연결하여 같은 문맥 속에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사건을 연속적으로 나열한 마가복음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하나님 백성의 대표로서 열두 사도가 세워졌으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증거로서 바알세불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귀신을 쫓아 내셨으며, 그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로 구성되며, 그들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을 바로 교회의 기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엡 2:20-22). 이는 신약의 이스라엘은 바로 교회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고 그분이 구약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모아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통적으로 다윗 왕조의 계보를 따라 오심으로 구약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심으로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완벽하게 성취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3,4에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언약 백성들을 창조하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인간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가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교회의 주인으로서 그의 권능의 손에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몸된 교회를 장악하고 계십니다. 음부의 열쇠도 가지신 분이시기에 사망이나 음부도 결코 주님의 몸된 교회를 넘보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도로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지체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몸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계 1:9)였기에 또한 주님의 권능의 손인 오른손으로 “두려워 말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경험이 없다면 주님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요한이 주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된 그 모습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고난에 동참된 자 요한이 주님 앞에서 이런 모습이었다면 또한 교회 역시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를 경험 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요한과 같이 주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된 자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위로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가장 큰 문제는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이것이 이사야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무조건 다른 사람을 구원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받을 자가 구원받도록 말씀을 드러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사람들을 무조건 구원하고자 하는 목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 심판주이신 주님을 모른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불꽃 같은 눈으로 자신의 교회를 친히 돌보시고 지키시는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목사가 목회를 해야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키우자고 하는 교인들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고 죄인들의 기호에 맞게 교회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라는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될 수는 없습니까? 마태복음 10:28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합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2001.7.15).
요한계시록 제7강
처음 사랑
요한계시록 2:1-7
오늘부터 우리가 몇 주간 연속으로 살펴볼 일곱 교회에 대한 본문은 이해가 많이 엇갈리는 본문입니다. 예컨대, 일곱 교회를 시대적으로 나누어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교회를 일곱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모습은 에베소 교회에서 서머나, 버가모로 해서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이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시대,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 이런 식으로 시대적 상징성의 교회로 나누어서 봅니다. 또 그렇지 않으면 일곱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특징들을 가지고 세상의 교회들을 일곱 가지로 분류하여 에베소형 교회, 혹은 서머나형 교회 하는 식으로 생각해서 어떤 교회든지 이 일곱 가지 유형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마는 이 모든 해석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있는 당사자가 속해 있는 교회를 교회로 인정해 놓고 해석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교회이든지 목회자가 새롭게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개척을 했든지 그것은 이미 교회라고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교회로 생각하고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어떤 부분이 칭찬 받을 만하고 어떤 부분이 책망의 요소가 되는가 하는 관점으로 봅니다.
결국 일곱 교회에 대한 해석의 대부분이 근본적으로는 일곱 교회를 두 가지로 분류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칭찬을 듣는 교회’와 ‘책망을 듣는 교회’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분류 때문에 설교는 항상 우리 교회도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교회가 되지 말고 칭찬 듣는 교회가 되자고 역설합니다. 해석은 다양하더라도 그 결론은 늘 동일하게 우리 교회 잘 되고 칭찬 받는 교회가 되자는 윤리적 교훈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꼽고 있는 것은 책망이 하나도 없고 칭찬만 들었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들면서 우리 교회도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가 되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에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요한 사도 앞에 심판주로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요한 역시 그 주님의 심판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양할 것은 지양하고 장려할 것은 장려해서 더 아름답고 완벽한 교회를 만들라고 훈시하시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책망 받은 것은 수정하고 칭찬 받은 부분은 더욱 발전시켜서 주님이 보시는 진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라고 주님은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의 말씀지(200호)를 읽어 보셨습니까? 제가 지난 주일에 강론을 할 때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씀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신약에서 교회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린 이유는 이제 살펴 볼 요한계시록 2, 3장이 일곱 교회에 대하여 보내는 서신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계 1:4). 물론 이 말이 2, 3장만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낸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전체가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입니다. 또한 여기서 일곱 교회란 것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몸된 모든 교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일곱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자’(使者)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흔히 에베소 교회에 세워진 지도자(목회자)로 보기도 하고 천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천사를 통해서 요한에게 계시의 말씀이 전달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사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 자신을 에베소 교회에 드러내실 때에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는 것은 자신의 교회를 늘 살피고 주장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1:20에서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한 말씀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그분의 권능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언제나 교회의 머리이고 주인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된 교회를 오늘날 목회자들이나 소위 말하는 교회 기득권층에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주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친히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이 말씀들도 결코 칭찬하고 책망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칭찬하고 책망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교회를 맡기고 그것을 점검하고 평가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는 말씀을 가지고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다고 보면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빗나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한가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대하여 평가를 하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곱 교회를 대표적으로 세워 놓고 평가를 하시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내게 하심으로 그들에게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에 합당한가 아닌가 하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자신의 몸에 맞는 것인가 맞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을 친히 드러내 보이시는 그런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말씀하신 것은 지상 교회의 죄성을 고발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상 교회를 두고 책망을 하시고 또 칭찬도 하시고 그래서 교회 아닌 것은 교회 되게 만들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수정 보완해서 제대로 된 교회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맞는가 아닌가 하는 기준을 제시하실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이런 것이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고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 된 것을 드러낸 자가 누구입니까? 교회 지도자들입니까? 아니면 교인들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친히 하신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도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요한계시록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어떻게 자기 몸된 교회를 이끌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악한 자를 용납하시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되게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드러내시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실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4:11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상태로 전환되어진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죽을 육체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이 죽을 육체를 통해서 생명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일하심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육체란 인간의 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죽을 육체, 즉 우리의 죄성을 고발하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시는 차원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더러 이렇게 분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고 폭로하면서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주성교회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성교회의 거짓됨과 죄성을 고발하면서 참된 주님의 몸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모든 모습을 낱낱이 다 살피시고 아시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알고 …아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불꽃같은 눈으로 늘 살피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처음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같은 의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에 의해서 나온 것이 처음 행위입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가 다시 회복되어지지 않는다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촛대를 옮기신다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교회 아닙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란 주님을 사랑하고 주를 위해서 살도록 주신 사랑이요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들에게 사랑이 있다고 해봤자 그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위들입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또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이 없기에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에 대한 폭로요 고발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보여주신 이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 사랑 안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기에 주님의 사랑 안에 불러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십자가가 믿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처음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모습이 어떤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하였길래 처음 사랑을 버렸을까 하는 의문과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자기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애초에 주신 것 그것이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 우리가 행한 자기 사랑을 백날 주님 앞에 꺼내 놓아보았자 그것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주님은 애초에 자신이 친히 주신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처음 행위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처음 행위의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도 동일하십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 나를 향하여 물으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였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주님만 사랑하였는가 하는 것을 묻고 계십니다. 자식을 사랑하였는가 주님만 사랑하였는가 하는 것이 주님이 관심 가지고 내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성교회를 향하여 물으시는 것 역시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키웠는가 혹은 재정을 얼마나 튼튼한 교회로 만들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준 처음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을 묻고 계십니다. 여기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마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답변은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주님께 답변하였던 그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16, 17). 예수님을 부인하고 철저히 저주까지 하였던 베드로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베드로는 더 이상 과거에 호언장담하였던 것처럼 큰소리 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처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입장이 아닙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큰소리쳐서 언제 넘어지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한 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교회라고 개념을 정해놓고 그것이 계속 교회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요 엄청난 실수입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실패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처음 사랑이 없는 교회라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주성교회가 주님의 교회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자들은 주성교회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있으니까 주성교회는 분명히 주님의 교회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주성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주성교회 안에도 주님의 몸된 교회가 존재하고 있고 또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성교회에 주님의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만큼 했으니까 또는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주님의 교회라고 하는 착각도 하지 마십시오. 교회에 대하여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가 생각하는 참신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면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컨대, 제자훈련을 실시한다든지 아니면 구제와 선교를 우선적으로 실시하여 교회 재정의 50% 이상을 밖으로 주는 교회가 된다든지 혹은 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가 된다든지 하면 좋은 교회이고 우리가 이상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교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혼동케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모습으로 교회의 모든 것을 판단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모습, 우리가 생각하고 정해 놓은 열매들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 교회다움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간들의 죄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문제가 많은 교회일지라도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말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허물이 많고 죄성이 드러나는 인간들이 모여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 하는 자들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7절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다는 표현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함으로 먹지 못했던 실과를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히 회복 상태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먹습니까? ‘이기는 자들’이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기는 자가 어떤 자입니까?
요한계시록 20:4에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기는 자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더불어 죽은 자입니다.
성도란 세상의 역사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주님의 처음 사랑을 행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자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주님의 십자가 승리 때문에 생명나무의 과실을 날마다 먹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기에 더 이상 세상이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이 두렵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 사랑이 있는 자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사랑 드러내지 않고 주님의 사랑만 드러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2001.7.22).
요한계시록 제8강
죽도록 충성하라
요한계시록 2:8-11
인간은 허상에 붙잡혀 사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끝없이 허상을 좇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가설들, 여러 가지 철학들, 갖가지 자기를 주장하려고 내세우는 사상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따라 필요에 의해 발생된 온갖 문화들 이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8,9).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모든 것이 다 배설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1-4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성도는 이미 땅에 것에 대해서는 죽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타날 때에 그 영광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성경에 있지만 우리는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의 것이 진실인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리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있는 듯이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인간들의 사고 체계 안에서는 밝혀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것으로는 제대로 진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럽혀진 정도나 죄로 말미암는 흠집이 난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죄에 의하여 그리고 죄를 위한 것만 만들어 내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부에서 누군가 실상을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무당을 찾고 점쟁이를 찾는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안다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입니다. 다른 세계를 통해서라도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혼의 세계에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현실적인 삶에 바쁘고 지쳐서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어서 잠시 접어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관심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관심에 의해 발생된 것들이고, 죄인들의 관심에 의해서 찾아지는 것은 역시 죄 아래에 있는 것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실상을 드러내 주셔야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실상을 밝혀주지 않는 한 우리는 실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되 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실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밝히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곱 교회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 예수님이 그 교회를 향하여 칭찬을 하거나 책망을 한다는 입장으로 보지 않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칭찬을 한다든지 책망을 한다든지 하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대해서는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칭찬을 하고 책망을 한다고 표현한 것은 어떤 기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칭찬을 하고 책망을 한다는 것은 어떤 기준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아니 기준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마디로 지상에 있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주님의 몸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것이 주님의 몸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되어가야 하느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라면 주님이 실상을 제대로 드러내시는 날인 주의 날에 요한과 같이 죽은 자가 되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실제적인 모습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한에게 주신 이 계시를 통해서 모든 실상을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악의 실체와 주님의 몸의 본질을 드러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의 때에 살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에 교회의 모습은 말씀에 의해 가짜와 진짜의 모습에 매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주님은 지금도 늘 허상과 실상을 이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또한 자신의 몸의 본질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도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허상이 무엇이며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나타내십니다. 왜 이렇게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본문 9절에서 주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환난과 궁핍을 아신다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신다고 합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것은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인지 안다’는 그런 차원의 앎이 아닙니다. 주님은 친히 교회를 다스리고 늘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분이기에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 분이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풍부함이요 부요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2:15,21). 그러기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환난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길지라도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입니다(히 10:34).
종말의 때에 있는 이 땅의 교회는 바로 이런 식으로 허상과 실상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볼 때에 한국교회가 부패했다 혹은 썩었다고 하는 것으로 논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부패하고 썩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였는데 부패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머리로서 다스리시는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 것입니까? 주님에게서는 결코 권력 누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몸된 교회를 철저히 자신의 말씀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은 조상이 유대인이고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한 자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관점에서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성도의 모임 같았지만 주님은 사단의 모임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철저히 둘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머나 교회 자체를 주님의 교회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 의해 주님의 교회가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교회는 사단의 모임에 의해 고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요한이 심판주를 만났을 때에 그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으시면서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오른손, 즉 능력의 손에 붙잡혀 있기에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환난은 오랫동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 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십 일 동안’ 환난을 당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십 일 동안만 환난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기간이 짧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환난이 무한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짧은 기간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7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잠시 잠깐 후면 주님이 오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니 성도의 고난은 결코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환난이 주어지는 세상 속에서 또한 사단의 회가 성도들을 향하여 핍박을 가할 때에 성도는 어떤 삶으로 살아야 합니까? 이 말은 주님의 몸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 하는 물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교회에 열심히 봉사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 새로운 집사 직분 임명을 하거나 혹은 장로 장립식이나 목사 임직식에 가면 이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느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마음이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정말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저렇게 말할까’ 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을 정도로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죽으라는 것입니다. 환난이 와도 성도는 충성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죽을 힘을 다해 주님을 위해 봉사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입장이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나는 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하면서 말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12에 의하면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죽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서 죽는 것이어야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의 기준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주님과 더불어 죽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은 8절에서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죽었었다. 그러니 죽는 것을 두려워 말고 나와 함께 죽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환난을 제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환난 뒤에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흔히들 이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 죽도록 충성 봉사하면 하늘 나라에서 금으로 된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열심히 충성 봉사 한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진짜 금 면류관 쓰고 그렇지 못한 자는 구원은 받되 개털 모자 같은 것을 쓴다는 그런 만화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11절을 통해서 생명의 면류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11을 말씀을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죽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망이란 마귀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온전히 멸하는 최종적인 파멸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20:6, 14, 21:8). 그러므로 생명의 면류관이란 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더불어 생명을 누리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셨던 말씀대로 하자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입니다(계 2:7). 교회는 지금 이 복을 누리고 있는 존재입니다. 성도로서 이미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자들이 교회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님의 은혜로 받은 자들이 모여서 면류관 자랑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아직 죽지 않았고 면류관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충성으로 말미암아 받았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목숨은 생명이 아닙니다. 허상일 뿐입니다. 이 허상을 버릴 때에 참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어서 얻을 생명이라면 구차히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말고 죽어서 얻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는데 세상에서 가지지 못한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불안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교회란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해되어지는 자들입니다. 처음부터 주성교회를 교회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또한 날마다 죽으라는 선포를 하는 교회의 목회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목회자가 ‘죽으라!’고 선포하는 것이 나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나 또는 반대로 나를 사랑해서 그렇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서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교회입니다.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 나를 기분 나쁘게 하였다고 해서 다른 교회로 간다거나 목사로 원수로 삼는다든지 한다면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성교회 안나오면 교회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성교회에 안나오고 다른 교회로 가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말씀을 읽거나 강론을 들을 때에 내가 기분 나빠지고 속에서 부화가 치밀며 말씀 전하는 자를 원수로 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죄인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될 때에 발생되는 아픔인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의 회는 결코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과 더불어 죽는 것을 부요함으로 여기는 존재입니다. 또한 그것이 이 종말의 때에 이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고난과 죽음 또한 심판의 날에 동참한 자가 선포하는 책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자에게 받아들여지는 주님의 계시입니다(2001.7.29).
요한계시록 제9강
주를 믿는 믿음
요한계시록 2:12-17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음에 대한 대상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신앙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대상이 없다면 그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란 어떤 사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있어서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어떤 사역을 전제로 한 표현인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곧장 하나님은 뱀의 머리를 밟을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언약은 전부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는 단순히 그냥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대속의 희생을 치루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대속의 죽음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삼 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오르시어 하늘 보좌에 앉으심으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약속에 의해 보내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의해 심판하신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냥 예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1:23).
실로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란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2에서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고백하였고, 또 갈라디아서 6:14에서도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에게 있어서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문제이기보다는 ‘누구를 믿는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는 나무 십자가 형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 된 십자가를 믿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느냐 하는 것으로 늘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성으로 우리 안에서 복음을 복음 아닌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죄의 본성이 매순간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이 예배당을 믿는 것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맞지도 않는 신학을 동원하여 합리화시키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십일조를 믿는 것에 집중된 경우도 많은 것을 봅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하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주일 성수를 믿습니다. 교회 조직이 잘 되어야 성장한다고 믿습니다. 심지어는 목사를 믿기도 합니다. 목사가 저주를 하면 저주가 되고 저주를 풀면 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본인은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무시되어도 신앙 생활이 되느냐를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참된 성도라면 그러한 것들이 없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종교의 어떤 모습이나 형태를 갖추어서 이루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생명이신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무엇을 신뢰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믿느냐 하는 것에 따라 믿는 분에 의해 장악되어져서 살아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항상 되물어야 합니다. 이 확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이란 종교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누구를 믿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늘 방법론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 여기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앙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의 성령에 의해 장악되어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게서 무엇이 나올 것인가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주님의 열매가 내게 주어질 뿐입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떻게 믿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느냐 하는 관점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면서 십일조 얼마나 했느냐? 주일 성수 잘하였느냐?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였는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있는 곳이 ‘사단의 위’, 즉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버가모라는 도시는 로마의 행정부가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처음으로 세워진 곳이 이 버가모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단의 보좌를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으로만 한정시켜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로마 황제의 신전을 중심으로 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사단이 ‘이 세상의 임금’(요 14:30)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2:15 이하에서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여러 곳에서 주님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바울 사도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곧 주님의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을 사단의 보좌로만 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어디든 주님을 원수로 삼고자 하는 그곳을 보좌로 삼고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결코 주님의 교회라고 해서 가만두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마 24:24). 여기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란 사람이 주님께만 충성한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만 믿는 믿음으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그 믿음을 따라 죽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도록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라는 한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주를 위해 죽는 모든 자들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내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어떤 부분을 보시고 칭찬하고 어떤 부분을 보시고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책망하시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가모 교회 자체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안디바와 같은 이런 사람을 칭찬하자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바로 이런 모습이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14,15절도 봅시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에 대한 사건은 구약 민수기 22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모압의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발람을 불러 저주를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이 보내온 금은 보화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됩니다.
14절에서 이스라엘이 발람의 교훈을 지켜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었다는 것은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행음하라, 우상 제물을 먹으라고 가르쳤고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말대로 그대로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세상의 좋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언약 백성들을 저주하게 된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게 된 것 자체가 발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본능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는 그것이 바로 발람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니골라당의 교훈에 대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같은 것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의 것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일부 교인들 중에 그러한 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주님의 원수요 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자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모습이 바로 주님의 적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적은 말씀을 무시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과 주님은 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습니다마는 교회는 주님이 이끌고 계십니다. 주님이 항상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주장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언제나 자기 몸된 교회를 우리들에게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맡기고 우리더러 교회를 지키고 잘 키우고 조직을 정비하며 관리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은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교회를 지키고 계십니다.
검을 가졌다는 것은 싸우고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요한계시록 1:16에 보니까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말씀으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지키시되 철저히 말씀으로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사고 방식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말씀으로 철저히 대항하십니다. 말씀으로 자기 몸된 교회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고 하는 것은 친목하고 적당한 놀이를 위한 파트너를 찾는 입장이 아니라 말씀으로 무장하는 차원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나누며 주님의 말씀에 복종되어져서 그 말씀에 따라 움직여지는 모임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모임이 될 때에 세상의 교훈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침범하거나 약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이끌리기보다 세상의 것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사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요 교회에게서는 날마다 회개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며 주님의 원수가 되고 있다는 회개가 있습니까? 주님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회개가 터져 나오고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회개나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나의 죄인 됨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죄를 전혀 짓지 말아야 그것이 주님의 교회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보이기 때문에 회개하게 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약속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자들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만나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리신 양식이었습니다(출 16:4). 성막의 지성소에 항아리로 보관한 광야의 만나는 앞으로 주어질 참된 생명의 양식에 대한 상징이었고 약속이었다는 점에서 감추인 만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참된 떡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양식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만나가 상징했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요 6:31-33).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이런 점에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주님이 감추인 만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흰 돌’이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희다는 것은 정결성을 의미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이 흰 돌이 주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승리를 의미하며 그 승리는 정결성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란 사단의 위에서 주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정결한 상태로 승리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돌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였는데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승리를 하게 하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아 승리하게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13절).
흰 돌을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자기 이름을 알려주신 자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주님의 이름으로 붙잡아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적을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종교적 덕을 얼마나 쌓았는가를 보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전도하였는가? 얼마나 잠을 안자고 열심히 기도하였는가? 십일조, 주일성수를 열심히 하였는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는가?’ 이것 물으십니다. 날마다의 회개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를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2001.8.5).
요한계시록 제10강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요한계시록 2:18-29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주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도란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주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신 일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행하신 일에 따라 세상이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의 가장 핵심적인 일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가 동시에 나타난 자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의롭다는 표시였습니다. 예수님만 진리이고 빛이라는 사실이 공표된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어둠이요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행사가 다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7:7). 이렇게 세상을 평가하시는 분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시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분이 세상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절대적인 가치는 주님이 계신 곳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 성도의 목표이어야 하고 성도에게 있어서 전부인 것으로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세상과 세상적인 것의 가치는 전무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하늘 나라에서 발생시킨 십자가 사건 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 체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늘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고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없는가 하는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준은 항상 자기 기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것이나 없는 것들은 포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킨다’는 말을 합니다. 언제나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에 우리의 눈을 돌리고 관심을 두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모두가 다 자기를 위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자기를 위해 사는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84: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서 시편 기록자는 ‘주의 궁정’과 ‘악인의 장막’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은 주님께 속한 것이고 악인의 장막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말씀은 항상 분명합니다. 하늘 나라에 문지기가 없겠지만 상대적인 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표현하자면 하늘 나라의 문지기라고 할지라도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그 사람이 성도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신약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사람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가치 기준을 접어두고 진정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을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네 번째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보면 주님의 칭찬이 19절 한 절만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여섯 절은 책망입니다. 그리고 26절 이하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할 때에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하였길래 책망을 이토록 많이 받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 말씀하신 것도 주님 자신의 몸 된 교회가 아닌 모습과 주님 몸 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교회 아닌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부분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을 용납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가 자칭 선지자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유혹하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는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에 갑자기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음행을 하도록 말하며 우상 제물을 먹도록 유혹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하는 것처럼 유혹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에 음행을 행하고 우상 제물을 먹도록 하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마귀나 악마적인 수법이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귀를 만나면 금방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악마적인 수법이나 비 진리가 일시에 들통 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5)고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흉측한 모습으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모습으로 유혹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겸손하고 최대한 온화한 얼굴을 하고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세벨도 바로 이러한 선지자로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에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마귀의 유혹을 받았던 것과 버가모 교회가 받았던 유혹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이 같은 말씀을 주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좇아 그들이 음행을 하고 우상 제물을 먹었다고 말씀하시는 반면 여기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하신 말씀은 이세벨이라는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의해 음행을 하고 우상 제물을 먹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전략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상황에 따라 마귀는 성도들이 주님을 거부하도록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눈에 현실적인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점에서 거짓 선지자를 가늠하게 하는 것은 그의 온화한 성품이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열매로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인은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에게 음행과 우상 제물을 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이세벨의 열매였습니다. 음행하고 이방의 제사 제물을 먹게 한 그것이 거짓 선지자의 모습이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음행과 우상 제물을 먹는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 열매로 볼진대 이세벨은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에게서는 회개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21절). 주님은 이세벨이라는 거짓 선지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우리가 회개하라고 특별한 기회를 부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 종말을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회개할 기회마저 없어질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2,23절). 주님께서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을 침상에 던지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침상에 던지신다는 것은 음행하는 모습 그대로 두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까지 사망에 이르겠다고 하십니다.
23절에서 ‘그의 자녀’라는 말은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사상에 동조하여 그와 함께 범죄하게 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세벨과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사망으로 죽인다고 하셨습니다. 즉 반드시 완전한 멸망에 이르도록 조치하시겠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중에 있는 악의 무리들을 언젠가는 반드시 멸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종말의 때라고 느껴지는 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자신의 뜻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모든 교회가 주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최종적으로 마귀를 심판하심으로 모든 교회의 주인이 되시며 또한 모든 성도들을 근본적인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지금도 이렇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주님 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까지 살피고 아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주님을 위해 교회를 성장시키고 수십 억을 들여 예배당을 짓고 교인들을 돌아보며 심방하고 헌신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서 나오는 인간적인 욕심인지 아니면 진정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것인지 주님은 아십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크게 하면 그것이 곧 주님에 의해 크게 쓰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전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는 뜻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7에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들에 의해 속임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적당히 우리의 욕심에 의해 교회 일을 벌여 놓고 주님의 일이라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욕심에 착취당하도록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내버려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아니 이렇게 말합시다. 주님의 몸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19절에 보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18절에서 요한이 주님을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아디라 교회가 무엇을 하였는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업’이라는 말은 사역이라는 말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무슨 사역을 하였는지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가 해야 할 사업은 선교와 구제요 또한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크고 화려하게 지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관을 짓고 기도원을 세우고, 대형 버스를 구입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며 많은 선교사를 세계 곳곳에 보내면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에 훌륭하게 쓰임 받는 교회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을 주님의 사업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업은 오늘 본문에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그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행해지는 것이 바로 예배당을 크게 짓고 기도원을 세우며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큰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사람을 모으는 일에 열중 하셨습니까? 그래서 예배당을 크게 지으려고 하셨습니까?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실적을 올리는 일에 분주하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단지 이 땅에 오셔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보이셨을 뿐입니다. 무엇으로 보이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백성들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디까지 섬기기로 하셨는가 하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기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고 섬김이며 인내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하신 것은 그 교회를 통해 주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잘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교회란 인간적인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보여주는 단체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보여주는 주님의 몸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교회가 구제나 선교를 조금하였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보여주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는 주님과 하나 될 때에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주님의 것이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26절에서도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라고 한 것은 주님과 더불어 죽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성교회 역시 주성교회라고 하는 간판을 걸고 있습니다. 예배당이 있고 예배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모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있고 또 최소한의 조직이 있으며 재정이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이런 것들을 원하시겠습니까? 주님은 결코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것들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깡그리 다 없애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성교회를 향해 사랑을 원하시고 믿음을 원하시며 섬김과 인내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주성교회를 향해 사랑을 원하시고 믿음을 원하시며 섬김과 인내를 원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이러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나타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아무리 진한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하면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행할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나타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드러내는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그 주님의 모습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자신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주성교회를 통하여 주님 자신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안다고 하신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는 우리의 것이 아닌 주님 자신의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것을 다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의 것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내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도무지 사랑 받을 수 없고 저주와 멸망 속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때문에 생명 안에 거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자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늘 이러한 고백을 주님 앞에 드리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것을 내어놓는 삶인 것입니다. 먼 미래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무엇을 내어놓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인위적인 것을 만들지 마십시오. 지금 주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지금 늘 주님 앞에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내어놓는 심정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주님은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셨습니다. 주성교회도 이러한 주님 앞에 예외 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은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셔서 주님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심판의 발로 밟아 부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 앞에 속이거나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 앞에 우리의 욕심을 주님의 일이라고 치장하지 말고 솔직히 고백합시다.
우리가 음행을 하는 것이나 우상 제물을 먹게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할 수 없어서 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직장 생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세상의 제도나 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은 결국 이세벨의 가르침을 좇아 음행을 하고 우상 제물을 먹으며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이 요구하는 것보다 주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거부하며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 주어진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는 성도요 교회는 반드시 세상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가치 있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와 하늘 나라의 주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26-28절).
철장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표현은 시편 2:9에 나오는 말씀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깨뜨리신다는 뜻입니다. ‘새벽별’이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계 22:16).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주신다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노릇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이 왕권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왕권이 세상에 드러날 때에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왕권을 알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거부하면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드러내면서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2001.8.12).
요한계시록 제11강
흰옷을 입는 자
요한계시록 3:1-6
‘교회가 살아 있다’ 혹은 ‘죽었다’는 말을 간혹 들을 수 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의 3:1에 나오는 용어를 빌려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쓰는 이유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교회가 살아 있다고 할 때의 그 의미는, 교회에 많은 프로그램이 있고 교인들이 목회자의 명령에 따라 활동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마디로 늘 기도회나 전도 행사 등이 있고 거기에 많은 교인들의 봉사가 눈에 띄게 있으며, 재정이 풍부하게 돌아가는 교회를 두고 살아 있는 교회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교회 프로그램이나 행사는 많아도 교인들의 호응이 별로 없으며 무엇인가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열심히 없고 활동적이지 못한 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살았다든지 혹은 죽었다는 표현을 쓸 때에 그 기준을 어디에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흔히 교회가 살아 있다든지 혹은 죽었다든지 하는 기준을 부흥하고 성장하며 발전하는가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부흥, 성장,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도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년 20년이 지나도 교인 수가 늘어나는 성장이 없다면 죽은 교회라고 치부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런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시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보시고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데 교회에 대하여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사데 교회가 대외적으로는 좋은 교회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외적으로는 교회다운 교회라고 평가를 얻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것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죽은 교회로 보시는 것입니다. 죽은 교회로 보신다는 것은 애초부터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살았는데 지금은 죽었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몸 된 교회였다가 나중에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되게 하였다가 나중에 버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양만 갖추고 있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하게 외형만 가지고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데 교회의 행위가 어떤지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평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외모로 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골 3:25). 그러면 주님이 왜 이렇게 평가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행위의 온전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행위의 온전함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48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 18:13). 또 레위기 11:45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표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거룩과 온전함에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여 선악과를 먹음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과는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온전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하나가 되는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여인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밟고 죄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창 3:15). 예수님은 바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모든 의를 이루심으로 뱀의 머리를 밟으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이 땅에는 온전함이 없고 하늘의 온전함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로 말미암아 주어진 온전함이 아니면 안된다는 선포였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온전하심 속에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하심 속에 합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5:10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우리가 우리의 의나 행위로 온전하게 되는 것 아닙니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기에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온전하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온전함이 없는 증거가 믿음의 주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온전함이 있다는 것은 믿음의 주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네 행위의 온전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믿음의 주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데 교회는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교회였습니다. 열심이 있고 활동적인 교회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 교회다운 교회로 추구하고 있는 모든 모습들이 사데 교회에 다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평판은 살아 있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것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주일 성수를 하는 교인들이 많고, 봉사를 많이 하며 십일조 하는 교인들이 많고 구제를 많이 하는 교인들이 많아서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좋은 교회, 살아 있는 교회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보시는 것은 주님의 온전함이 내재되어 있는 교회인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열심이 있고 활동이 왕성한 교회라면 우리는 별 문제가 없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는 회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방면에 잘 하고 있는 교회인데 회개할 문제가 왜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다음 3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게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사데 교회가 생각하여야 되는 것은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은 믿음이 처음에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네가 잘나서 믿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주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인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자신에게 근거가 없었는데 주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 주어진 것을 안다면 당연히 회개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가 나오지 않는다면 주님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상관없이 산 자에게 주님의 재림은 도적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적이란 불시에 이르게 됩니다. 십자가 은혜와 상관없는 자들에게 주님의 오심은 이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있어도 상관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회개가 있고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 은혜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함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6-19).
하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실 것인데 그분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금 있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인데 그 중에서 주님을 보게 되는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주님을 다시 보지 못하지만 너희는 본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 받은 자는 주님의 살아 있음을 보게 되고 또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세상은 다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보지만 성령 받은 자는 살아 계신 주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죽은 자이지만 성도는 성령에 의해 산 자로 주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살리셔서 주님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계속하여 주님의 십자가 사역의 완성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성령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은사를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인기를 끌게 하시는 영이 아닙니다. 죽었던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의를 완전히 성취하신 살아 계신 주님을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일곱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주님의 백성들을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완전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20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일곱 별이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자신을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자기 백성들을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으로 그리고 일곱 사자로 하여금 주님께서 친히 자기 교회를 세우고 또한 다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에 의해 친히 세워졌고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늘 다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특히 목회자에게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세우거나 다스리도록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아니 주님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세우도록 맡기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이미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개척교회를 한다고 하면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을 택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생각하고 존경한다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실력으로 개척교회가 잘 될까 또는 저렇게 해서 먹고 살기나 제대로 할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교회를 인간이 세우고 또한 인간이 교회를 키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를 키우기 위해 온갖 프로그램들을 다 동원합니다.
누군가 몇 년만에 수 백, 수 천명 모이는 교회로 만들었다고 하면 그 노하우를 배우려고 목사들이 벌떼같이 모여듭니다.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도 그렇게 부흥시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기 교회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하고 주님이 자신에게 그 교회를 맡기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교회를 맡고 있고 어떤 사람을 목회자로 내세우는 것은 자기 욕심이요 자기 취미 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친히 세우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도 넘보지 못하는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말씀으로 다스려 나가십니다. 그러기에 여기 사데 교회에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절).
주님은 자신의 백성을 친히 남겨두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일하신 결과요 주님의 열매입니다. 사데 교회의 목회자가 제자 훈련을 잘 해서 남은 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을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과 함께 다닌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합당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께 합당한 자가 어떤 자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행위의 온전함이 있는 자입니다. 행위의 온전함이 있는 자가 주님께 합당한 자요 흰옷을 입은 자입니다.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죄 용서함이란 자기 힘으로 회개하였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었다고 자랑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의 온전함이란 자신의 행위를 모두 악한 것으로 보고 오직 온전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자신이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주님께 합당한 자의 삶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 죽여주옵소서!’ 하는 고백이 있는 자여야 합니다. 도무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니 살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자신이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살려주는 만큼 살아가게 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요 흰옷을 입은 자의 모습이며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느니 죽었다느니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주님이 계시느냐 하는 문제이지 결코 우리의 모임이 활동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머리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 현상이지 죽은 자가 활동하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살아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주님께서 주성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도 ‘너는 죽었다! 그러나 내가 남은 자 몇 사람을 두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흰옷을 입게 된 것을 믿기 때문에 오늘도 말씀에 굴복되어 날마다 회개하게 되는 것이 주성교회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2001.8.26).
요한계시록 제12강
적은 능력
요한계시록 3:7-13
구약 말라기서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말 1:4,5). 하나님께서는 에돔 족속이 이루는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에돔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무너뜨릴지라도 다시 쌓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돔의 것을 무너뜨리시겠다고 하시는 이유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에돔에 대하여 이토록 처절하게 대적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말라기 1:1-3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밝히십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내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말 1:1-3).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은 과거 야곱을 사랑하였고 야곱에게 언약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에돔과 동일한 범죄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주신 언약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고, 에돔은 언약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대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인간 세계를 둘로 갈라놓고 보십니다. 아벨과 가인,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에돔) 등으로 언약 계열과 비언약 계열로 나누어서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까닭은 비언약 계열과 대조하여 언약 계열이 어떻게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을 제대로 볼 때에 더욱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통해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비언약 계열인 악의 무리에 의해 어떻게 세상에서 제거되는가를 드러내고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것을 가지고 성경은 교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참고 옵 1:3).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그것이 곧 교만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교만을 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린다고 할지라도 에돔과 같이 계속 쌓으리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이미 확정되어 있고 그 교회는 완성형으로 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모임을 만들고 교회라고 간판을 걸었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주님의 교회가 되고 또한 그 교회는 영원한 교회이기 때문에 망할 수가 없다는 논리는 성경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지금도 빌라델비아 교회가 존재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달리 칭찬만 받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된 일곱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성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교회에 관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목사가 죄인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성교회가 여러분을 영생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8절). 적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적은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연약한 모습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규모가 작은 교회였을 것입니다. 아마 생존에 위협을 받는 그러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데 교회와는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를 두고 주님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선언하십니다. 9절에 보면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회요 거짓말 하는 자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있었지만 그들은 적은 능력에 의해 말씀 앞에 굴복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사단의 회를 주님의 말씀 앞에 굴복되게 하셨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너를 괴롭게 하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 엎드리어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 하리라” (사 60:14)는 예언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여기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고 계십니까?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는 이사야 22:22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곧 주님이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언약의 실체로써 진정한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열쇠란 진리와 권위의 상징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엡 1:22),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마 28:18).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절대적이라는 것은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는 말씀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고,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것 같지만 사망까지도 그분의 권세에 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실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며(계 1:8), 구주와 심판자로서 궁극적인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요 5:22, 25-29).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의 열쇠를 가진 주님 안에서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면 두려운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세상 것에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돈이며 자녀요 세상에서 펼쳐나가야 할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주성교회를 바라보고 있다면 참으로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세워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주성교회에 관심가지지 말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 가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입니다. 비록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윗의 열쇠를 가진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통해 십자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말씀 그대로 남기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교회의 일꾼들을 통해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으로 일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의해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10절). 본문에서 ‘인내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해서 말씀을 지켰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인내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장악하여 인내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1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기 백성들을, 교회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성도들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주님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친히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분이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상대방을 누르는 것으로 이기는 목표를 가진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죽는 것을 통해 이미 이긴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분 안에서 살기 때문에 그분의 승리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성전의 기둥입니다.
건물의 기둥이란 힘과 든든함, 또는 영원함을 가리키며 없어서는 안될 존재를 표현하는 적합한 용어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전의 기둥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 힘과 존귀함을 영원히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볼 때에 힘이 없는 모습, 적은 능력을 가진 모습, 곧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늘 나라의 힘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를 잘 하는 사람이나 예배당 건축에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을 교회의 기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둥은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 자입니다. 십자가에 주님과 더불어 죽는 자가 이기는 자이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기둥입니다.
주성교회는 어쩌면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생존의 위협을 받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편안함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성교회가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까지 밀어붙일 때에 십자가의 주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그럴 때에도 목사 혼자 당해야 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는지요? 우리에게 주님과 더불어 죽고자 하는 이러한 십자가 정신이 없다면 우리는 안일함 속에서 복음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라는 이 말이 우리에게 이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상황과 여건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며 또한 상대방에게 내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좋은 교회’라는 등식을 만들어 놓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또한 주성교회를 보면서 체계도 제대로 잡혀져 있는 않는 교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교회다운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주님이 허물고 무너뜨리고자 하시는 교회를 우리는 다시 세우고 또 세우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망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주님을 대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큰 능력을 원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으면서도 교회가 크게 성장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어떻게 주장하시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께 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적은 능력의 교회로써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성도,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2001.9.2).
요한계시록 제13강
미지근하여
요한계시록 3:14-22
목표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개인에게는 삶의 목표가 있고, 회사는 회사대로 기업의 이윤을 추구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교육기관도 가르치는 것을 통해 어떤 수준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름대로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목표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는 꿈과 도전 정신을 가지라고 권유합니다. 꿈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끈질기게 노력하면 원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게 됩니다.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정도 목표가 이루어졌다 싶으면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또한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권투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챔피언 타이틀을 쟁취하기보다는 챔피언 자리를 계속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1등 하기는 쉬워도 1등을 계속 지켜나간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목표를 이루고 그것을 계속 지켜 나가는 것이 왜 어려운 일입니까? 목표를 이루고 1등을 성취한다는 것은 피눈물을 흘리며 뼈를 깎는 고통이 동반되는 것인데 그것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다 편안함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해 아래 인간은 누구나 다 수고하며 땀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죄 때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이란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는 죄로 말미암는 욕심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 자체가 죄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욕심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는 이런 말씀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듯 합니다. 어떤 형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면 우상 숭배와 연관시켜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어도 세상에서 하는 일은 죄로 여길지 몰라도 교회에 들어와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거룩한 주님의 일로 생각하지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아예 자신의 욕심은 숨기고 교회와 연관된 모든 활동들을 주님의 뜻으로 변환시켜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당 건축은 무조건 성전 건축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목사를 섬기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고, 교회 생활 중에 하는 그 어떤 일도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6:29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쉽게 받아 들여서 교회 봉사를 믿음으로 하면 그것이 곧 주님의 일이라고 단정지어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에 의해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까?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하신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사실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무조건 가만히 있어야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행하고 안하고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그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관심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하여 관심이 빼앗긴 증거입니다. 복음이 선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죄악이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사람이든지 가만히 있는 사람은 없고 목표를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빠지는 함정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복음을 아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날마다 죽기 때문에 목표도 없고 비전도 없는 상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자기 만족에 스스로 안주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가진 목표나 비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목표나 비전을 따라 무엇이든 행하게 될 때에 그것이 주님 앞에 왜 죄가 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당한 곳에 우리는 안주하면서 편안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무시하게 되는 죄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본문 15,16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신앙에 열심이 없다는 뜻으로 잘 사용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더라도 소리를 높여서 열심히 기도하며 교회 봉사를 부지런히 하는 사람을 두고 ‘신앙이 뜨겁다’고 얘기합니다. 그런 모습이 없으면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열심이 부족하고 화끈한 봉사가 없기 때문에 주님은 지금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믿음에 열심이 없기 때문에 뜨겁게 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아서 미지근하다는 것은 구분하기 애매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습이 모호하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교회를 토하여 내친다고, 즉 거부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이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절).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요 스스로의 만족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함과 눈먼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12:8에 보면 에브라임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에브라임의 교만이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 안에도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다고 여기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곤고한 상태였고 가련하며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인간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누구나 다 스스로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에게 살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고 가련한 존재이며 소경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그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0,41). 유대인들이 그러하였고 오늘 우리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교회는 주님을 위해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지어서 곳곳에서 하나님께 바치고 있고 수 많은 성도들이 모이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성 교회도 이러한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이만하면 괜찮은 교회 아닌가?’라는 자만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할 일은 없고 주님이 알아서 다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편한 게 좋다는 식으로 타성에 젖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대충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지 하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이 복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또 하나의 우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가련하고 곤고하며 눈먼 자로 보셨기 때문에 오늘도 주의 영으로 늘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린 피만이 영원한 죽음에서, 가련한 곳에서, 눈먼 곳에서 건져내시는 유일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는 것만이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거하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가지고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안에서 문고리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거부한다고 해서 못 들어오시고, 우리가 모신다고 해서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십자가 은혜는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이고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신다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생명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0절은 예수님을 믿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교단체나 많은 교회들에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전도용으로 이용하지만 그것은 말씀의 본질을 왜곡한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주님을 영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이런 말씀을 가지고 결단을 촉구하는 전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전도로 상대방이 믿게 되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주님의 영이 그 사람을 말씀으로 굴복시키셔야 된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한 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함께 거하지 않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쫓겨나 있는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들의 부요함에 만족하면서 주님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라고 해서 다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였기에 십자가의 은혜를 인정할 리가 없었습니다. 십자가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교회 같지만 실상은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미지근한 상태는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외부적으로는 분명히 주님의 교회 같지만 전혀 주님이 거하시지 않는 상태가 바로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결국 19절에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내고 믿음의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책망하고 징계해서라도 열심을 내게 만들고 회개하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는 왜 열심이 없는가 혹은 왜 사랑이 없는가 하고 한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 사랑이 없고 열심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이 먼저 주님의 열심과 사랑을 보여주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성도요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우리에게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고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도란 죄인인 내게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18절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하면 구원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이미 영광스러움에 들어 있는 자는 바로 이러한 존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면 주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가련하고 곤고하며 소경 되었고 벌거벗은 것 같이 수치스러운 존재에게 예수님 쪽에서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이런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몸 된 교회에게 주님께서 친히 베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부요하다고 느낄 때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 의해 자신이 가련한 존재이고 눈먼 존재임을 알게 될 때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하늘 나라의 생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이렇게 나타내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14절). 아멘이시라는 말은 주님만이 절대적인 진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 아버지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창조의 근본이 되시는 분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과 대속의 죽음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가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묻고 계시고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도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대부분의 교회들은 개척하기만 하면 예배실을 얻기 위하여 전세금을 보조받아야 되고 지원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주성 교회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교단에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또한 아무 것도 지원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물질에서 초월되어서 시작된 정말로 참신한 주님의 교회라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자신에게는 이러한 교만이 날마다 터져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지원을 곳곳에 받아 가면서 시작하는 개척 교회를 무조건 무시하는 자만심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어야 세워지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제 자신이 주성 교회를 시작한 경험과 기준을 가지고 성경 말씀과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판단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교회들이 물질로 시작되었든 아니든 개척 교회가 생기면 무조건 주님의 교회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속에 또는 우리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모습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주님과 더불어 보좌에 앉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20절에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자라야만이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는 영광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매주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함을 선포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 말씀을 우리는 매주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성 교회에 복음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만 모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적당한 교회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교회를 더욱 키워가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을 알면 알수록 더욱 자신이 곤고하며 가련하고 눈먼 존재임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모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성 교회를 통해 어떤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이기에 주님과 더불어 살며 먹고 마시는 기쁨이 있는가 우리 자신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영광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2001.9.9).
요한계시록 제14강
이리로 올라 오라
요한계시록 4:1-3
우리가 보는 것은 늘 제한적입니다. 제한 된 시각에서 보고 제한 된 시각 안에서만 생각합니다. 나의 주위에 일어난 일을 겨우 해석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고 보지 않은 것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땅의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의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에도 땅의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신 계시는 땅의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하늘의 내용을 땅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땅의 시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하늘의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하늘의 시각으로 보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이 땅에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한 마디로 성령에 의해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에 하늘의 것을 찾고 하늘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의 화두는 단연 미국이 당한 테러 사건이었습니다. 헐리우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한 역사상 최대의 테러가 미국에서 있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면모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국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을 대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떤 입장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이 대두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인들의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큰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만 본다는 것은 잘못 된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큰 사건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거부하는 그 자체로 늘 세상 속에서 심판은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은 재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를 따르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따르지 않는 모습이 재앙이나 또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질 때에 그것을 가지고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으로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일을 어떻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가 하는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실체를 드러낸 사건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 드러내고 보여주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일 후에’라는 말씀은 일이 일어나는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내는 내용을 기록한 후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때에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표현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첫 부분을 살펴보면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요한계시록은 시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이해한다면 제대로 해석이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한 묵시적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인을 떼는 것, 나팔 재앙이 있는 것, 대접을 쏟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첫째, 둘째, 셋째로 차례대로 일어난 일들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온전히 보여주기 위하여 죄악된 세상을 심판 할 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일이 시행됨을 여러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의 의미는 장면의 전환입니다. 요한 사도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 다른 장면으로 전환하여 계시를 전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것은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것에서 벗어나 하늘의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시도하자 땅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누린다는 것과는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빛 되신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늘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더 이상 하늘은 땅을 용납하지 않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을 여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지 않으면 인간에게 구원이란 생각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과 나다나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에 예수님은 그를 보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7). 나다나엘이 대답하기를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요 1:49).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시면서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8:10-22의 말씀을 배경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야곱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형 에서와의 다툼에서 두려워하며 밧단아람으로 도망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사닥다리를 보여주시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설치하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찾아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오시더라도 굳이 사닥다리가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러면 이 사닥다리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고 요한복음에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잇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하늘의 문을 여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 속에 간사함이 없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함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나다나엘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저주와 진노의 자리가 된 이 땅에 십자가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늘의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서 9:24에 보면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그리고 히브리서 10:19,20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5,6에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하늘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서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하늘의 열린 문으로 올라가서 본 것은 보좌에 앉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보좌란 무엇이며 보좌에 앉으신 분이 누구입니까? 이러한 표현을 가지고도 우리는 왕이 앉는 것과 같은 그런 자리가 있고 거기에 누가 앉아 계신다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그러므로 여기서 보좌란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주님의 다스리는 권세를 표현한 말이 보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고 그 생명을 누리는 상태를 바로 하늘 나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1에서도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을 3절에서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표현들을 가지고 우리는 주님의 외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보좌란 말씀의 권세로 다스리시는 주님의 주권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을 요한 사도가 어떻게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제한된 언어로서는 요한이 본 모든 하늘의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계시란 또한 인간의 언어에 담아서 전달되어지고 있기에 요한 사도는 가장 근사하게 세상의 것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보좌의 주님을 벽옥과 홍보석으로 그리고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려 녹보석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심판하실 주님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에 무지개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기에 이 새 언약에 기준해서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무지개란 최종적인 심판을 표시하는 상징이 되고 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심판을 행하실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이리로 올라 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사도가 ‘이리로 올라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의 열린 문으로 올라갔을 때에 가장 먼저 시선이 모아진 곳은 주님의 보좌였습니다. 아니 요한의 시선이 보좌로 모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주님의 보좌에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중심이 찬란하게 빛이 비치는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보좌를 본 것도 성령에 감동되어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이적을 일으키고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뜻은 요한 사도 자신이 성령 안에 있음을 느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산다는 것은 곧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령 안에 거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란 바로 요한 사도와 같은 입장에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에 살게 된 존재이고, 또한 성령 안에서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늘에 산다고 해서 궁창이라고 하는 하늘 어느 구석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바로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 산다고 하지만 정작 하늘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몸이 하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미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을 풀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될 일들을 미리 알아서 대비하고자 하는 차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결코 우리의 그런 호기심을 풀어주지 않는 책입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심판의 자리에서 빠져 나온 자가 심판의 자리를 보는 관점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하늘의 시각에서 심판의 자리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열려진 하늘 문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이 땅의 일들을 보면서 왜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시각이요 주님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에서 사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하늘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 있다기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부를 제공해 줄 것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관심 있다기보다 오히려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빼앗기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놓지 못하는 것은 세상과 세상의 것이 아직도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제정신이라면 어찌 뇌물을 받고, 속이며 불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세상에 미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영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고 또한 그 죄악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날마다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늘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요한 사도가 보았던 것과 같은 하늘의 영광을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계시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결코 세상이 좋아 보이거나 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비추어 죄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시는 주님의 일하심 앞에 우리는 굴복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이야기하면서도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늘의 의의 신분을 가졌다 하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과 하늘의 영광을 동시에 설명하는 주님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하늘의 영광과 우리의 죄악됨을 동시에 보여주는 십자가만 우리 마음에 남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2001.9.16).
요한계시록 제15강
보좌
요한계시록 4:4-8
한때 한국 기독교계에 천국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1980년대 중반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 동안은 교회들마다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조금 과장하여 표현하자면 천국 갔다 왔다는 사람을 불러다 간증집회를 하지 않는 교회들이 없을 정도였고, 천국에 대한 간증집을 보지 않은 교인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천국에 대한 간증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펄시 콜레라는 사람이 지은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번역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천국 열풍에 휩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급기야는 펄시 콜레라는 사람이 한국에 와서 집회를 한답시고 생쇼를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국 갔다 왔다는 간증을 하는 아류작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와 인기를 끌었습니다. 나중에 펄시 콜레라는 사람의 사기극이 밝혀지면서 어느 정도는 잠잠해지게 되었습니다.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서점에서 내용을 대충 보았습니다. 책을 본 느낌은 ‘이건 사기다’라고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교회에 부교역자로 부임을 하였을 때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현재 떠돌아다니는 모든 천국 간증이 비성경적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혹시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일지라도 그것은 가짜라고 설교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사적으로 목사님과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 목사님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교인들로 하여금 읽도록 한 것은 신앙에 도전을 받으라는 측면에서이지 결코 그 책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내용을 다 믿으라는 측면에서 소개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그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을 읽도록 권유해서 많은 교인들이 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그 책을 교인들이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 교회 목사님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임을 자처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성경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시류에 흘러가고 교인들에게 신앙의 도전을 준다는 명목으로 말씀을 제쳐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에 와서 한국 교회는 교회가 어떤 신학을 지향하느냐 하는 것은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는 문제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적이며 개혁적인 것을 지향하는 교회나 오순절 신학을 지향하는 교회나 혹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회이든 상관없이 교회만 크게 키우면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라고 하는 사고 방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속담을 공공연히 떠벌리면서 교회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신학이 서로 다르고 교리가 달라서 교단이 갈라지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제는 무색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교인들의 수를 많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개척 교회를 열어서 수개월 혹은 수년만에 문을 닫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목회자만이 대접받고 인간 취급받는 세상이 지금의 한국 기독교계입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목회자가 큰소리치는 사회가 바로 한국 기독교계입니다. 이런 말이 심하게 들립니까? 아니면 그 중에서 그래도 성경적으로 바르게 목회를 하려고 애쓰는 분들이 있다고 항변하고 싶은 것입니까?
저는 모든 목회자들을 매도하면서 다 같은 부류라고 성토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그 한국 교회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성교회는 결코 그러한 모습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좋은 교회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다른 사람을 비평하거나 한국 교회가 무조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한 단면을 이야기하였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주소이기에 요한계시록을 펼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는 측면에서 우리의 눈을 찌르는 심정으로 이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상고한 말씀은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거기서 ‘이리로 올라 오라!’ 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하늘에서 본 것은 다름이 아닌 보좌였습니다.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좌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요한 사도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열린 문으로 들어간 하나님 나라는 오직 보좌에게만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보좌에 둘러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에 주님이 앉아 계시고 그 주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보좌에 앉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도 만화 같은 분위기로 상상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 이런 표현들 때문에 사이비 종파들의 교주들을 보면 면류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쓰고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해서 어린이 놀이방 같은 분위기로 꾸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계시록을 기록할 때에 이러한 표현들을 쓰고 있는 것은 만화 같은 분위기를 상상하도록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상황을 이 땅의 언어로 표현하다보니 그렇게 표현된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이십 사 장로란 한 마디로 구속받은 성도들을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24라는 숫자는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에서 구약의 열두 지파를 잇는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모든 성도들, 즉 온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으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1:26 참고). 이십 사 보좌에 앉은 이들이 흰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주님의 백성들이 정결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보좌에 앉아 금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질 때에 동반되었던 “우뢰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었던” 경우을 연상케 합니다(출 19:16). 이것은 보좌에서 나오는 말씀의 위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보좌에서 위엄과 권위의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주님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일곱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영이란 성령님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성령이 일곱이라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영이시라는 뜻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6절 이하에서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1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환상을 기억나게 합니다. 네 생물은 생명체 전체의 질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세계를 요한 사도가 본 대로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보좌를 중심으로 하여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이사야 6:1-3에 보면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생물들이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여 밤낮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래 지으시고 다스리고 계신 생물들은 질서 있게 주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본연의 임무를 늘 충실히 하며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는 일이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는 찬양이었습니다.
요한이 보았던 것은 과거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던 것을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가 본 하늘의 광경입니다. 하늘의 열린 문이 있고 거기로 올라가서 본 것은 보좌가 중심이 되어 있는 나라였습니다. 보좌를 중심으로 이십 사 장로들과 네 생물들이 있고 그 모든 것을 성령에 의해 다스리고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것은 요한 혼자만 갑자기 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창세기 이후에 기록하고 있는 모든 말씀에 다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성막(성전)을 통해 구약에서 그림 언어로 보여주셨던 그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신 모습은 전혀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도 계속 약속의 말씀 안에 주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실로 주님은 심판주로서의 모습,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위상은 새롭게 비쳐진 모습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으로 계속 다스려오신 주님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 나라의 중심이 되셔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다스려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9:28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늘이란 새로운 다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그 하늘의 보좌에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주님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것은 바로 우리가 본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이 보고 말씀으로 기록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로 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계시 안에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요한과 같이 하늘의 모습을 본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주님의 나라, 하늘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의 영광스러움을 좇아 살기보다는 세상의 일에 빠져서 하늘의 감격과 감사와 찬양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주님의 다스림을 날마다 거부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것보다 세상의 것이 더 크고 더 현실감 있게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끝내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홀로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에 의해 거부당하고 세상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성도는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에 기대어 사는 자가 아니라 비록 죄악된 몸으로 이 땅에 살지만 정신은 오직 하늘의 보좌, 곧 어린 양의 보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무엇을 보고 사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에게는 하늘을 본 자다운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엉터리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성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종교성은 늘 외적이고 경험적인 것을 의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험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여서 요한계시록 말씀보다 천국 갔다 왔다는 간증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이미 요한 사도가 주님의 계시로 하늘 나라와 또 그 나라에 비추어 세상의 죄악된 실체에 대하여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데 다른 것으로 우리의 신앙이 도전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외에 천국 갔다 왔다는 모든 간증들은 무당의 지껄임에 불과합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의한 지배를 받는 자가 하늘을 본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2001.9.23).
요한계시록 제16강
면류관을 보좌 앞에
요한계시록 4:9-11
에베소서 5:15,16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이 말씀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로 주어지고 있습니까? 이 말씀에 대한 설교들이나 성경공부 해설집 같은 것을 보면 대부분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시간이라는 말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는데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하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객관적인 시간이란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주관적인 시간이간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24시간으로 주어져 있지만 주관적인 시간은 자신이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시간입니다. 여기서는 ‘카이로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인 시간, 즉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시간에 대한 청지기로서 시간을 잘 활용하여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러한 설교나 해설이 무조건 잘못 되었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껴서 잘 활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간을 헬라어로 말하면서 객관적인 시간이 어떻고 주관적인 시간이 어떻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실제 우리 삶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맥을 통해서 보면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진정한 지혜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것의 다른 표현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을 가지고 시간을 잘 활용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를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주님의 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 지혜로 말미암아 세월을 아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지혜는 주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간을 잘 활용하는 청지기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물음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결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자가 세월을 아끼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뜻을 좇아 사는 자가 세월을 아끼는 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성경 도처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도의 실제적 삶의 근거는 하늘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그러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이 땅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존재가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시간이란 자연의 변화를 따라 계산하는 것이기에 이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늘에 사는 존재가 된 성도는 주님 오실 때까지 늘 주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주님의 뜻을 좇아 사는 일에만 관심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지혜 있는 자의 삶입니다.
지난 주일의 강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요한 사도가 하늘을 본 것은 단순히 요한 사도 혼자 본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성도인 우리와 함께 본 것과 동일한 차원입니다. 그것이 계시로써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요한 사도가 본 하늘을 동일하게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비록 이 땅에 살지만 마음은 이미 하늘에 사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안에서 요한이 본 하늘을 그대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께만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들이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 하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와 감사란 강요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네 생물들이 하는 일이란 밤낮 쉬지 않고 보좌에 앉으신 분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에 매여서 그 것만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늘 나라임을 보여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네 생물들의 본성이 늘 경배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활동은 경배의 표현이며 그들의 입에는 늘 찬양이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라고 요한 사도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모습이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십사 장로들은 경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진다는 사실입니다. 보좌 앞에 왜 면류관을 던지는 것입니까?
면류관이란 흔히 말하듯이 우리가 봉사한 것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상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하늘 나라에서 상급에 대한 차등이 있다고 주장해 왔었습니다. 또한 우리들도 이제까지 그렇게 믿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 봉사를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함으로 많은 상급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봉사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큰 면류관이 주어지고 적게 봉사한 사람에게는 작은 면류관 혹은 개털 모자를 쓰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봉사를 한 대가로 상급이 주어지고 그 상급 역시 차등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들에게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도록 하는 목회적 염려에서 종교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이론입니다.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계 2:10), 금 면류관(계 4:4) 등은 구원의 영광스러움에 대한 다른 표현들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면류관이란 믿음의 경주를 신실하게 마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에 의하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진다고 하였습니다. 왜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는 것입니까?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면서 하는 이십사 장로들의 말을 봅시다. 그 다음 11절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것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드리는 찬양입니다. 그렇다면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래 지으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모든 영광이 주님께 돌려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에서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승리의 모든 영광이 궁극적으로 주님께로서 온 것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도무지 그 면류관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행동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의도 나올 수 없음을 아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입장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 4:7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결국 면류관이라는 것도 내가 무엇을 하였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에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의미로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영광이 주님께로만 돌려지는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가 죄의 권세 아래 묶여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자기 백성들을 다시 생명의 자리로 끌어당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가지고 계셨던 목표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워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힘을 길러 사람들을 자기 앞에 무릎꿇게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나약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십자가라는 사형 형틀을 지고 죽는 것이 주님의 목표였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는 것 그것만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길이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아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의 보좌를 요한계시록 22:1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요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를 어린 양의 보좌라고 표현합니까? 어린 양이라는 말에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 들어 있다는 표현입니다. 즉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 앞에 면류관을 던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결국 11절에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천지 창조의 처음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처음 상태와 같은 모습으로 회복된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주님의 공로 때문이기에 비록 이 땅에서 순교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자기 공로요 자기 믿음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과 감사와 존귀를 드리는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간혹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혹은 질병으로 인해 고통 당할 때에 제 마음 속에 불쑥불쑥 솟아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늘 나라에는 이런 고통이 없겠지 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는 이런 어려움이나 고생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스스로 자신에 대한 최면을 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야만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견딜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통해 깨닫는 것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고통과 어려움을 면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하늘 나라를 소망하고, 지금 내가 당하는 어려움이 제거된 나라이기를 바라는 것이 죄인들이 기대하는 하늘 나라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 나라는 지옥입니다. 죄인들이 기대하는 하늘 나라는 늘 자기 중심에서 편하기를 원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늘 나라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원하는 나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개념을 날마다 깨부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도 만물이 주님에 의해 지어졌고 또한 그 만물이 주님의 뜻대로 유지된다고 이십 사 장로들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의해 되어진 일로 인하여 감사하며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되어진 일에 이십 사 장로들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의 십자가 피의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이라면 동일하게 이렇게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지 못한 것이 없고 또한 모든 것이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이 성도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하늘의 일을 세상에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이 땅에 하늘의 일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모임은 주님의 몸된 교회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공동체도 하늘의 일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 혹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다 받은 존재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급을 기대하면서 봉사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8:32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이미 주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하늘의 면류관도 받은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미 다 받았다면 또한 하늘 나라에 가서 면류관을 보좌에 던지려고 하지말고 지금 십자가의 주님을 향해 던집시다.
하늘 나라에 상급이나 상은 따로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주는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생명 안에 부름 받은 것이 상이요 상급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늘 나라의 상급을 받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이 생명, 우리가 생명 안에 있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는 주님이 모든 일을 다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증거해야 할 우리의 본분조차도 망각하면서 주님 앞에 떳떳해지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를 진짜 본 자는, 하늘의 은혜를 진짜 받은 자는 그 속에서 하늘의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보았다면 그 보좌로부터 나오는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 수밖에 없고 오직 보좌 앞에 면류관을 던지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후에 천국에 가면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지금 하늘 나라에 사는 자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간을 아끼고 잘 활용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주님의 은혜 때문에 오늘도 그 영광과 존귀와 찬양과 감사를 오직 주님께 돌려드리려고 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 사도를 통해 이렇게 하늘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후에 하늘 나라에 가서 할 일이라면 굳이 이렇게 알려주시지 않아도 하늘 나라에서 그렇게 자동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할 일로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러한 모습이 자신에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라는 뜻입니다. 지금 그러한 모습이 있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은 먼저 일곱 교회에 말씀하시고 교회 아닌 부분과 참된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잘 한 것 없습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나 한 몸 지탱하고 치장하기 위해서 살아 온 것밖에 없는 존재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이러한 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말씀으로 하늘의 모습을 보고 그 하늘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만도 은혜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살아짐에 대하여 주님의 일하심과 희생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그것은 끝없는 종교 생활의 반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의를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졌다는 사실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받은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까? 하늘의 것을 다 받은 부요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늘의 부요함이 있다면 당연히 이 땅의 것이 하찮게 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 하늘의 생명을 드러내고 싶어서 환장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2001.9.30).
요한계시록 제17강
합당한 자
요한계시록 5:1-5
미국은 역사상 전무한 테러를 당하여 복수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언제 무차별 공격을 가하게 될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고 뉴스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자기가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되면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것보다 몇 배의 손해를 상대에게도 입히고 싶은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내가 상대에 대하여 얼마나 힘이 있느냐 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 힘이란 돈이고 경제권입니다. 미국이 아마 힘이 없었다면 복수를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권의 나라들에게도 엄청난 경제적 특혜를 약속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일에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나라는 정권 자체를 전복시켜서라도 미국을 대항한 그 대가를 맛보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단 나라와 나라 관계에서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를 해서라도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것이 죄인들의 심보입니다. 신앙도 이러한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미국이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복수를 다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내가 당하는 억울한 일을 풀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우리의 복수를 풀어주는 차원에서 구원을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고 그 심판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점에서 우리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가를 종말에 심판이라는 수단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책입니다.
요한 사도가 열린 하늘 문을 통해 올라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을 보았을 때에 주목하였던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보좌였습니다. 그 보좌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 세계를 능히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그 보좌를 향해 네 생물들이 밤낮 쉬지 않고 찬양을 드리고 있고 이십사 장로들 역시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십사 장로들은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던지며 모든 영광을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보게 된 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책은 두루마리였는데 안팎으로 글이 가득 쓰여져 있음을 요한은 감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하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봉한 것이 일곱이라는 말은 그 책을 하나님께서 봉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봉하여졌기 때문에 누구도 그 책을 열어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9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사 29:11,12).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누구도 그것을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식한 자는 묵시가 봉하여졌기 때문에 읽지 못한다고 하고, 무식한 자는 무식하다고 스스로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묵시를 이렇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29:13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고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인간 세계에서 유식한 것과 무식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에는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것을 통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증거를 하나님 편에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책이 봉하여져 있다는 것은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거나 열어 볼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과 3절에서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라고 표현하였다고 해서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의 세계로 삼등분을 해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땅 아래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 세계를 통칭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책을 열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리는 우리의 종교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게 된 것도 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불교를 택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택하지 않고 기독교를 택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신중하게 선택하였다고 말합니다. 가까운 교회에 무턱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요모조모 따져보고 교회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어떤가? 또는 교회가 사회에 어떤 유익을 끼치고 있는가? 혹은 신실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삼아 교회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종교를 택하는 기준에 불과합니다. 나의 취향에 따라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취미 생활에 불과합니다. 불경도 읽고, 코란도 읽고, 성경도 읽어보았을 때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타당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택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의 죄악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어떤 진리를 구하며 찾고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도 나와도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상태에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향해 교회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지적받고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나의 선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임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부화가 치미는 일이 된다면 주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아무 것이나 무엇이든 수용하는 블랙홀이 아니라 걸림돌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걸림돌을 모든 사람들 앞에 놓아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일차적으로는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놓은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온다고 수용하여 교인수를 자랑하는 것이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그 책을 펼 자를 처음부터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능히 펼 자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어떤 자를 구원할 것인가 하는 차원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심판의 차원에서 세상이 왜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차원으로 기록 된 것입니다.
교인수가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것은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교인수가 책을 펼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 재정의 50% 아니 100% 다 구제를 위해 내어놓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책을 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박사를 모신 교회가 하나님의 책 인봉을 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책의 인봉을 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먼저 선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찌른 자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책에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도 읽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힘있는 천사의 외침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도 그 책을 열 수 없기 때문에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크게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4절). 요한이 울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열 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반드시 열려서 공개되어야 하기 때문에 열 자가 없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책 내용이 어떤 것이길래 누구도 그 책을 함부로 열 수 없다는 것입니까?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에스겔이 본 환상에 의하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겔 2:9,10). 에스겔이 본 책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따른 계획이 기록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책과 에스겔이 본 책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이 크게 울었다고 하는 것은 책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책의 인봉이 떼어지고 공개되지 않는다면 성도들이 당할 큰 환난에서 무사히 통과하게 될 보장이 없는 것임을 요한은 직감하였습니다. 인봉이 떼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성도들의 눈물이 씻겨질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도 없으며 최후 승리에 대한 보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크게 울었습니다.
이에 이십사 장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말을 건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5절). 이십사 장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하면서 가르쳐 주는 분이 누구입니까?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친히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홀로 원수를 제압하고 지금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그 책의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다고 요한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미 유다 지파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유다 지파에 대하여 겸손하고 고난 당하는 메시야로서가 아니라 권능자, 전능자의 통치를 이미 예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9,10). 유다 지파를 일컬어 통치하는 지팡이의 상징인 홀이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는 선언은 곧 유다 지파의 사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뿌리’라고 표현한 것은 이사야 11:1과 10절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메시야는 혈통적으로 다윗을 후손으로 오시는 왕이심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혈통을 통해 오시지만 거기서 전혀 새로운 한 싹으로 등장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혈통은 망하지만 전혀 새로운 차원의 나라를 다스리게 될 분이 바로 메시야라고 선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장로가 요한에게 말하기를 울지 말라고 하면서 그분이 이겼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이미 묶였고, 죄가 이미 씻음 받아 더 이상 정죄가 될 수 없고, 죽음을 이미 정복하셨다는 선언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승리하신 분이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요한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행위가 어떠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이었습니다. 그 피 앞에, 십자가 앞에 누가 자기 공로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우리의 자랑거리를 말할 수 있습니까? 요한이 아무도 책의 인봉을 뗄 자가 없는 것을 본 것과 같이 아무도 주님 앞에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생명과 심판은 오직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만 가려질 뿐입니다. 그것이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인봉을 뗄 때에 벌어질 일입니다.
지금 세상은 이미 주님에 의해 인봉이 떼어진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 되고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 다 드러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피를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 피를 믿는 자가 책의 일곱 인을 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분으로 믿고 섬기고 있습니까? 내가 편한 대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구겨진 자존심을 펴줄 주님으로, 나의 억울함을 풀어줄 주님으로 주님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의 마음은 아닌지요?
세상에서 우리가 울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나의 억울함 때문에 주님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하였을 때에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자존심을 세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눈에서 흘린 눈물을 씻겨주실 뿐입니다. 성도답게 사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할 때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셨고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5-17).
나를 위한 주님으로 믿지 말고 인을 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기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우리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셨던 그분이시기에 어떤 일을 하시더라도 합당하신 분으로 인정하며 그분께만 존귀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며 사는 성도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는 모습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터져 나오는 성도요 주성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2001.10.7).
요한계시록 18강
죽임 당한 어린양
요한계시록 5:6-7
우리는 신앙 생활하는 것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에 한정시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하면 신앙 생활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 소개를 할 때에도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Q.T도 하고 전도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면 성숙한 신자로 자타가 인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 생활의 기본적인 행위를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거나 혹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교회 생활로 대치시켜 놓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면 교회 다니지 않더라도 예수 믿으면 되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결코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 기도, 전도, 헌금, 찬송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또한 받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전도, 기도, 헌금, 찬송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교회에 들어오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는데 이제 교회에 다니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예쁘게 보셔서 기도하는 것, 찬송하는 것, 예배, 헌금, 전도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통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에 한정시켜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의식중에 건물이라는 생각으로 굳어지게 되면서 신앙 생활이 곧 교회, 예배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생활이라고 확정짓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나와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더욱 거룩하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을 잘 갖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으시고 더욱 기쁘게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배당과 예배당이 아닌 것, 기도하는 것과 기도하지 않는 것,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다른 이름을 부르는 것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하여서 교회에서 특징 지워 놓은 의식과 연관되는 것이면 뭐든지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받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의 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생명이시고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것을 받으시고 죄인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 사안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후에 죄인들이 죽지 않고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을 통해 그것을 철저히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에서 수용되지 않는 것이라면 철저히 거부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언약을 통해 언약 안에서만 일하신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집중하여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집중하도록 율법과 함께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절기와 제도, 의식 등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성전, 제사 의식, 제사장 제도, 유월절을 비롯한 많은 절기들은 하나님의 언약에만 관심가지도록 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수단이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결코 목적이 될 수 없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결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희생 제사를 통해 언약의 실체가 오시면 이렇게 자신들의 죄 때문에 희생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을 보면서 자기를 위한 속죄제가 없는 완전한 제사장이 오셔야 한다는 것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면서 메시야로 말미암는 안식을 기대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 언약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신약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전한 희생 제사가 되었습니다. 단번에 드린 의의 제사였기에 더 이상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없는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온전히 밝혀지고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더 이상 여러 가지 제도나 의식 혹은 절기로 언약을 기대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적 사고방식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기 전의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의식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한 율법을 좇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3-17).
다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 기도, 헌금, 전도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확인하도록 하기 위하여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하는 나의 행위, 기도하는 나의 행위, 헌금하는 나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곳은 교회(건물)도 예배 의식도 아니고 나 자신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하늘은 보좌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요한은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고 이십사 장로들이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하여져 있었기에 아무도 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울었습니다.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장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그분이 인을 떼시리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요한이 자세히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서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어린양을 동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두말할 필요 없이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어린양으로 나타내고 있습니까?
지난 강론에서 살펴보았던 5:5에서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라고 하면서 그가 승리하였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란 왕으로써 다스리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시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유다 지파의 사자를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로 오신 그분이 어떻게 승리하셨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이란 칭호는 출애굽기 12장에서 유월절 어린양과 관련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 피를 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출 12:13)고 하였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신비로운 미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제물로 드린 순전하고 흠 없는 양을 상징하며 그것은 제사 제도에서 사용되는 희생양에 근거한 칭호입니다.
이러한 칭호가 지니는 의의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을 알려주는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의미가 이사야 53장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사 53:6,7). 그러므로 희생양은 장차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언의 말씀에 근거하여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7에서 바울 사도도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또한 베드로 사도도 죄인들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로 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결국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로 승리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 어린양에게 일곱 뿔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3:17에 보면 “그는 첫 수송아지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뿔은 힘, 능력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구원의 뿔로 많이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또 일곱 눈이 있는데 그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언급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일곱 눈을 생각나게 합니다(슥 4:10).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고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시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좇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늘 자기 백성들을 보살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의 언약에 온전히 순종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7절에서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책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서 책을 취한다는 것은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이 철저히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있는데 이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 즉 성령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어린양으로 희생하셔서 속죄 제물이 되셨기에 하나님의 언약은 완성되었습니다. 언약을 완성하였기에 십자가의 주님이 승리자이십니다. 그분이 늘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십사 장로가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찬양을 드리게 된 것은 어린양으로 희생하신 주님의 구속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새삼스럽게 어린양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보좌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 많은 성도들이 고난과 죽음이라는 위협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는 그런 상황이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종교적 사회에서 따돌림당하고 파문을 당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읽혀졌겠습니까? 죽임 당한 어린양이 보좌를 자리하고 계시며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하늘 영광에 도취되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죽임 당하는 그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는 종교적인 의식을 매 주일 또 수요일에 정기적으로 행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배를 어떻게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요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어린양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리신 피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단순히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은 생명을 은혜로 얻은 것이요 생명 안에 살게 된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서의 죽음과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목숨을 위해 산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아는 자가 된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위해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생명을 위해서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어떻게 하고 기도를 어떻게 하며 찬양을 어떤 곡으로 드릴 것인가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아니 그런 것들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신 어린양을 따라 죽을 때에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나올 것들입니다. 그런 것에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관심가지고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집중해야 되는 곳은 하늘 보좌입니다. 그 보좌에는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의 희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이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셨기에 그분만이 심판하시며 그분만이 성도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마무리지으시기에 합당한 것은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할 수 있는 자는 주님과 더불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목숨 부지하면서 하늘의 보좌를 욕심내는 것은 언약과는 상관없고 죽임 당한 어린양의 보좌와는 맞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2001.10.14).
요한계시록 제19강
기도와 새 노래
요한계시록 5:8-14
열왕기하 20:1,2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앞뒤 문맥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쉽게 우리에게 적용을 시킵니다. 히스기야가 죽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니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을 향하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 대한 설교를 보면 대부분 ‘낯을 벽으로 향하고’라는 제목으로 우리도 하나님께 얼굴을 벽을 향하게 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자고 호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을 향하여 기도하였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까? 또는 히스기야가 간절하게 기도하였기 때문에 15년이나 생명을 더 연장받은 것입니까? 성경은 결코 그러한 의미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왜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강론을 시작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기도에 대한 오해가 이 본문을 가지고 곡해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히스기야가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았다면 15년이란 삶은 더 살 수 없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이런 본문을 보면 무조건 기도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기도에만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이 예사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심이 히스기야의 기도에만 집중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우리들로 하여금 그렇게 오해하도록 기록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말씀을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함께 죽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이 살려고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나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것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에게 있어서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아 살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도 죽을 자가 기도함으로 더 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철야기도를 하고 급기야는 목숨을 담보로 40일 금식기도도 기꺼이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이런 일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소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야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하는 심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기 때문에 나의 소원, 나의 야망 이런 것은 애초부터 주님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요소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다면 비록 교회에 다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15년 생명을 연장받았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15년 더 살게 하심으로 므낫세를 출생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왕의 자리를 이어가게 하셨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죽이려고 하셨다가 히스기야가 기도하니까 15년을 더 살게 하시는 것으로 일을 꾸미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께서 정한 것에 따라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히스기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심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므낫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되고 철저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따라 일하신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면 히스기야가 중심이 아니라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더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시는데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렇게 반문하는 이유는 아직도 관심을 우리의 행위에 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기도, 예배, 찬양, 전도, 봉사 등에 의미를 두고 그것이 하나님께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나 전도, 찬양, 예배, 헌금, 봉사 등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말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나오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손에, 우리의 삶에 열매들로 그렇게 주신 것에 불과한 것이고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더욱 기도하게 되고 더욱 찬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모든 피조물이 어린양 앞에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엎드린 장면입니다. 여기서 이십사 장로들이 금대접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위하여 사용되는 악기인 거문고와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제각기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 향이 성도들의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막이나 이후의 성전에서 있는 제사 의식에 의하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성소에 있는 금으로 장식한 향단에서 향이 피어 올랐고, 이것은 “여호와 앞에 영원한 향”이 되었습니다(출 30:1-8). 이런 식으로 하나님 백성들의 기도가 열납되는 향 같다고 상징화되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게 하소서”라는 시편 기록자의 간구는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바라는 진정한 성도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시 14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있어서 분향하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10에도 보면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제사장에 의해 분향하고 향이 피워지는 그 시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기도하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기도를 듣지 않는 분입니다. 아니 죄인들이 드리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은 일체 받지 않습니다. 잠언 15:28,29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죄인의 입에서는 악을 쏟아 내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의인이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의를 만들어 내거나 의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조건은 아무 것도 없고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부에서 의가 주입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늘의 의를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담이 에덴에서 범죄한 이후부터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성전이라는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벌어지는 희생 제사와 거기서 향을 피우는 때에 기도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의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 제사에 참여되고 향이 피워져서 올리워지는 것을 따라 기도가 행해진다는 점을 통해 오직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받으시고 희생 제사 안에서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도를 받으신다는 것은 성전의 실체가 되는 인물이 오시면 죄인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점에서 성전으로 오신 분입니다. 아니 성전보다 더 큰 이로 오신 것입니다(마 12:6).
그것을 여기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신 분이 어린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신 분이시기에 능히 그 책을 취하시고 인을 개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늘에서 기대하고 기다렸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고 모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책의 인을 다 개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의 이십사 장로들은 어린양으로 희생하신 그분이 그 책의 말씀대로 시행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9절 이하에서 새 노래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9,10절).
여기서 새 노래로 노래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쉽게 찬양이라고 생각하고 앞에서 장로들이 드린 기도와 구분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할 때에는 결코 그렇게 구분지어야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늘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드린 기도가 바로 새 노래입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 새 노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기존에 어떤 노래가 있기 때문에 새 노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기존에 있는 그것은 이 땅의 노래입니다. 이 땅의 노래와는 대조되는 것으로써의 새 노래입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노래이기 때문에 새 노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찬송을 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 2).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17절에도 보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란 홍해를 건넌 것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 다른 세계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처소로 삼으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거하게 되는 나라로 이해하고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란 언약의 온전한 성취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에 희생하셨던 어린양이신 그분만이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여 그 책을 개봉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의 찬양, 즉 새 노래가 어린양에게만 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우리의 예배, 기도, 헌금, 찬양, 전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다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에서도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도 보면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의 새 노래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어린양에게 드리는 노래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드리는 새 노래입니다.
가사가 은혜롭게 잘 만들어진 찬송을 음정과 박자를 잘 맞추어서 부르는 것이 참된 찬송이 아닙니다. 그것이 새 노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 이 땅의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유행가를 부르지 않고 찬송가를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새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르는 노래라야만이 새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분께만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찬송을 드리는 것이 바로 새 노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 어떤 찬송을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성도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로 다 드러난 주님의 그 구속의 은혜를 몸소 경험한 자로서 주님을 위해 사는 그것이 바로 기도요 새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서는 실로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그 희생에 감사를 돌려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 노래는 여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성가를 부를 것인가? 아니면 찬송가만 부를 것인가? 혹은 예배 시간의 찬송 시간에 어떤 악기는 되는가? 혹은 되지 않는가 하는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는 찬송을 잘 불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십자가 피에 모든 공로를 다 돌리고 인정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분 안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10절). 단순히 예수님이 재림하신 다음에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을 믿는 자로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지금 이 땅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우리는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왕으로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차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것은 주님이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 백성들을 섬겼듯이 섬기는 왕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오셔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급기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여전히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권세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의 왕의 모습은 주님과 같은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과 주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모습인 것입니다.
어린양은 세상이 흠모할 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나약한 모습입니다. 너무나 초라하고 연약하고 서글픈 모습입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 짓밟힐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하고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강해지기를 소원하고 힘으로써 타인의 자아까지 자신의 자아 앞에 굴복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린양이란 결코 환영받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어린양이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개봉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모든 인봉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은 당연히 어린양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의해 짓밟히고 세상에 의해 무시당하는 연약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생이란 영광을 얻고 흠모할 만한 성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새 노래로 어린양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2001.10.21).
요한계시록 제20강
첫째 인
요한계시록 6:1-2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의 차이는 교회에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순히 교회 다니고 다니지 않는 것이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입니까?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예수를 찾고 예수를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느냐 아니냐 하는 우리의 외면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신앙의 전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믿음에 의해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삶을 따라가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교회 다니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사느냐 땅을 바라보고 사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되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날마다 자기 육신에 의한 욕심들을 죽이고 그 육신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자신의 생애에 대한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영역에 벗어난 것일지라도 모두 주님의 은혜아래 존재하게 되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한 마디로 역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 주님이기에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성도의 생애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역사의 주인은 어린양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에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 표현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니 요한계시록 전체가 승리하신 예수님으로 나타내면서 그분이 왕권적인 권위를 가지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계신다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으로 표현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린양이란 표현은 흔적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로 왕권적인 다스림을 하고 계시는 분이 어린양의 흔적을 가지고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어린양이란 하나님의 희생을 담고 있다는 흔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는 죽음을 죽으신 흔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흔적을 가지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는 누구도 자기 힘으로 생명을 누리게 되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오히려 어린양으로 보좌에 앉으신 그분께만 찬양을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요한 사도는 4장에서 ‘이리로 올라 오라!’는 하늘의 음성을 좇아 하늘의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장면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하늘로 올라가 환상을 보는 요한의 위치는 그대로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늘에서 보좌를 보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5장에서 요한 사도는 다시금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취하시는 어린양을 봅니다. 그 순간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기도와 새 노래가 드려집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모두 어린양을 노래합니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이라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합니다. 하늘의 천사들뿐만 아니라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이 보좌에 앉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와 일찍 죽임을 당한 구속주 어린양께 영광과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찬송을 드립니다. 5장은 이렇게 보좌에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4장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은 찬양이 드려졌다면 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과 5장에서 보좌에 찬양이 드려지는 하늘 장면에서 6장은 지상에 어떻게 심판이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의 전환이 있습니다. 드디어 능히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례로 인을 떼십니다. 인이 떼어질 때마다 각기 심판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인을 하나하나 떼는 것은 여러 종류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첫째 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나머지 인을 떼서 하나하나 펼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감으로 더 세밀하게 세상의 실상과 하늘의 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책의 내용이 처음부터 공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루마리에 봉해져 있는 일곱 인이 차례로 다 떼어져야만 그 다음 내용이 공개될 차례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두루마리 책을 펼치기 위해서 봉인된 인을 뗄 뿐입니다. 일곱 인이 차례로 떼어지고 일곱 경고의 나팔이 모두 울려 퍼진 후에야 일곱 진노의 잔이 남김 없이 이 땅에 쏟아질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최후의 심판과 궁극적 구원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1,2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이 인을 떼었을 때 말이 등장합니다. 첫째 인을 떼었을 때 흰 말이 등장하는데 흰 말에 탄 자는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은 자이고 이기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흰 말을 타고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적그리스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대다수의 주석들을 보니까 그리스도의 원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럴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을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려고 하더라는 이러한 묘사는 다 하나의 사실을 전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 하는 외침과 함께 첫째 인이 떼어질 때에 한 승리자가 등장합니다. 이미 승리하였지만 계속 승리할 자가 등장합니다. ‘오라!’는 말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와 싸우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 ‘오라!’는 소리가 외쳐지면 사자들이 풀려 나와 공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막이 시작될 때에 그것을 알리는 선언이 ‘오라!’는 말입니다.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이제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탄 흰 말과 그가 쓴 면류관으로 보아서 승리자임이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부연 설명이 그가 그 누구도 이분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에 그분만이 승리자라는 사실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미 이기셨고 이기실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음 인을 떼는 장면에서도 말이 나오지만 말이 나왔다고 어떤 말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의 색깔이 항상 그 탄 자가 어떠한 일을 할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흰 말을 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흰색은 요한계시록에서 항상 하늘의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을 나타냅니다. 항상 그리스도와 또한 그리스도와 관련된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양털 같고 눈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이 기록된 돌이 흰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입는 옷이 흰 세마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들에게 각각 흰 두루마기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흰 말을 타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셨던 그분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21에서도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5에서도 “유대 지파의 사자가 이기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5장에서 이기신 그분이 바로 6장에서 이기고 또 이기실 분입니다. 17:14에서도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활을 가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 45:3-5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여기서 시편 기록자는 메시야를 말을 타고 활을 당겨서 원수의 염통을 뚫는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을 타고 활을 가진 분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에서는 골고다에서 있었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을 모독하던 한 반란자가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아 처참하게 죽어간 현장 같아 보입니다. 메시야 사역의 처절한 실패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희생하신 그 십자가는 영원한 승리입니다. 지금도 그 승리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날 십자가의 승리 이후 사탄의 권세는 온전히 결박을 당하여 있습니다. 흰 말을 탄 자는 이미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4:14에서도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머리의 면류관 역시 승리자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겨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한 번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계속적인 은혜 아래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 안에서 그것을 기뻐하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 안에 있다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자신이 직접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기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 자신이 친히 승리한 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기쁨과 만족감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오고 예수를 찾는 것도 이런 자기 승리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날마다 세상에서 상대방을 누르고 내가 이기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내 아이만큼은 대학에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만은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벌인 사업만큼은 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이긴 자로 살고 싶어하는 자기 욕심에 이끌려 드리는 기도일 뿐입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자식으로 경쟁하고 집으로 경쟁하고 돈으로 경쟁하고 외모로 경쟁하면서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누르고 이긴 자가 된다고 해도 결국 주님에 의해 망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은 주님이고 주님께서 역사를 마무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승리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승리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 자체가 은혜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죄이며 첫째 인을 떼심으로써 나타난 세상의 실체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째 인을 떼심으로서 드러난 세상의 실체는 이기신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이 땅에 남을 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최후의 순간에 진정한 이긴 자로서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라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이 원하는 승리에 대해서 초월한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한 자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기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실패해도 괜찮고 약자가 되도 괜찮다고 하는 심정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고 있습니까?
골로새서 3:1 이하에 의하면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내 생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는 하늘의 보좌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자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비밀입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감취어진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큼은 온전히 드러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의 영에 의해 보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시각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영광스럽게 이미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5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땅의 지체를 죽이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첫째 인을 떼심으로 극명하게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도 여전히 탐심이 튀어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깊은 바닥 에 있는 탐심까지 하나님은 순간적으로 철저히 드러내십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분명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픔입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 당하는데 아픔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실상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본성에 의한 탐심으로 인하여 성도는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니 성도에게는 낙심하거나 좌절할 권리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로 우리를 그 승리 안으로 부르셨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또한 마무리지으실 분이시기에 오늘도 우리는 역사에 의미를 두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인을 떼시는 것을 통해 주님은 이미 승리하셨고 계속해서 승리하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라고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2001.10.28).
요한계시록 제21강
둘째 인
요한계시록 6:3-4
교회 다니는 사람 치고 이상적인 교회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현실적인 교회의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 모든 문제들이 제거된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목회자에게 있어서 그것이 더 절실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에 대한 부단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신앙적 행위가 교회 개혁이라는 것에 집중되어 버립니다.
성경 공부를 해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기보다는 교회를 어떤 방면으로 개혁하고 어떻게 바른 교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도 교회 개혁에 대한 꿈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신학교를 시작하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기존의 목회자들이 보라는 듯이 썩은 목회자가 되지는 않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것 때문에 더욱 성경을 많이 보아야 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욱 많은 공부를 함으로 철저히 학적인 뒷받침으로 목회를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설교는 어떻게 해야 성도들을 감화시킬 수 있을까? 막연한 성경 공부보다는 교인들에게 체계적인 성경 공부를 시켜야 되지 않을까? 예배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예배 순서를 짜야 할까? 헌금은 어떤 방식으로 하게 하는 것이 좋을까? 예배당을 건축하면 어떤 형태로 해야 될까? 외부적으로 기존의 예배당 형태를 갖추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기능성 위주로 건축을 해야 할까? 해외 선교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해야 될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들을 하였습니다.
사랑이 넘치고 섬김이 있으며 풍성한 나눔이 있다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였고 그러한 교회를 이루리라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던 것입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로 화목한 교회를 이루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제대로 갖추고 그것을 잘 유지하고 있으면 그것이 주님의 교회가 되는 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면 알수록 말씀에 의해 깨달아지면 깨달아질 수록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욕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되었습니다. 아니 교회를 사랑하는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천국 같은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뿐만 아니라 천국 같은 교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몰려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고자 하는 노림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훌륭한 목사로 명예를 떨치고 편안하게 이 땅을 살아보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본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대로 내버려두지를 않으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환상과 착각들을 모조리 말씀으로 깨버리셨습니다. 철저히 낮은 자리로 몰고 가셨습니다. 이제는 큰 교회를 이루어 목회하고자 하는 꿈도 환상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집중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라는 사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러한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기에 과거에 저의 모자라고 부끄러우며 미련한 생각에서 나온 일들을 잠시 주절거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3,4절).
우리는 지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인을 떼시는 장면을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인을 떼실 때에도 둘째 생물이 ‘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붉은 말이 등장을 하게 되고 그 말을 탄 자가 화평을 제하여 서로 죽이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흰 말을 탄 자가 나타나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할 때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붉은 말을 탄 자는 어느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느 특정한 시대에 속한 자로 볼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붉은 말을 탄 자가 누구냐 하는 것보다도 그가 큰 칼을 받아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과 큰 칼이란 단순히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싸운다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살육을 행하고 권세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였다고 이미 말씀하였습니다. 지금 요한 사도가 밧모섬에서 하늘의 환상을 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으로 일방적으로 도살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 때문에 재산을 다 빼앗기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로 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항상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활동을 그친 시대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눅 21:12-13). 성도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핍박의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핍박이 극심해지지만 오히려 그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증거의 기회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이 말씀은 결코 가족간의 불화를 정당화시키는 구절이 아닙니다. 고부간의 갈등을 정당화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피치 못할 불화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는 것 자체가 세상과 세상의 사고방식에 철저히 거스르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불화가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더불어 마귀와 함께 하는 화평이 아닙니다. 악과 더불어 타협하면서 이루는 화평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세상에 분쟁과 불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천사들이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고 불화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땅에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거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진정한 평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 말미암아 평화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주어지는 평화는 결코 인간들끼리 화목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화합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을 가지고 화평이라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화평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가 화평을 이룬다는 것은 자기 유익과 결부되어 있을 때만 화평한 척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화평이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부터 생각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는 말씀 속에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되 어떻게 이루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은 인간이 누구에게 사로잡혀 있는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14 말씀은 창세기 3:15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언약의 성취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를 향한 핍박은 개인적으로나 혹은 국가적으로 언제나 항상 있어 왔고 또한 그것은 언제나 인간들끼리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행해졌습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는 진리는 하나이고 그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서로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복음을 거스르고 주님의 몸에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큰 칼을 받았다고 하지만 “허락을 받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한 하에서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권한에 의해 한정된 상태로 핍박을 가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한 결코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고 성도들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 21:16-19). 지금껏 역사 속에서 수 없이 되풀이된 상황임에 틀림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또 반복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도 더욱 분명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9-12). 로마서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요한계시록은 결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러한 의도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고 쓰여진 책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이김을 미리 맛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세상에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핍박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교회가 와해되는 그러한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일로 말미암아 주님의 교회가 더욱더 말씀으로 든든하게 되어 궁극적인 승리가 주님께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둘째 인을 떼심으로 세상에 어떻게 심판을 드러내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행위가 결코 선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드러내시는 심판인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붉은 말을 탄 자가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인간이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고 급기야는 죽이게까지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조장하신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는 작업을 오늘날도 여전히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날 세상에서 성도가 살아감에 있어서 복음에 관한 것만 내세우지 않으면 얼마든지 상대방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세상이 요구하고 세상이 원하는 사고 방식대로 산다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역류될 일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하는 대로 한다면 결코 부딪힐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멸망이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적나라한 모습인 것입니다.
목회자, 설교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성도와 성도 아닌 자를 날마다 드러내는 역할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철저히 말씀만 선포함으로 말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전함으로 주님의 심판을 드러내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언제나 둘로 갈라지는 현상이 생기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선포되어진 복음이 복음 안에 있는 자와 복음 밖에 있는 자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옆사람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나와 만난 사람이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의지할 것처럼 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하는 것은 가장 선하게 그리고 가장 거룩하게 성도에게 다가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마귀로 보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늘 의심하는 눈초리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음을 항상 인식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있고 사람을 의지하였다가 언젠가 본질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어린양으로 죽임 당하신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분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주장하고 다스리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같은 운명으로 우리를 끌고 가십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이루어 가려고 하는 화평을 제거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선하고 착하게 무엇인가 드러내려고 하는 모든 우리의 행위들을 철저히 고발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에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복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평소에 복음을 좋아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었음이 언제 드러납니까?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실패하게 할 때에 다 드러납니다. 주님이 우리를 흔들고 넘어지게 함으로 내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예수, 나에게 고난과 핍박을 주지 않는 예수를 원하고 그런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음이 일시에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내가 참신한 교회를 만들려고 하고 교회의 부조리를 뿌리뽑아서 교회를 개혁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나의 욕심이요 내가 원하는 교회상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을 주님은 계속해서 십자가를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죄성을 폭로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만 사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죄악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아픔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심이 주님의 말씀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아픔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아픔은 주님의 십자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2001.11.4).
요한계시록 제22강
셋째 인
요한계시록 6:5-6
성경의 중심은 ‘나’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도 나를 위해서 어떻게 일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하나님 자기 중심으로 일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도의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 73:2,3). 이 시편을 기록한 아삽의 눈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인들이 잘 살고 부의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 73:13,1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오히려 헛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실족할뻔 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 중에 가지고 있는 의문 중의 하나도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수없이 말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니까 금방 돌아서서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냐고 따집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 되느냐고 억울해 합니다. 돈 많은 자들,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 나보다 부자들도 많이 있는데 왜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내게 어려움이 주어지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그 신앙은 십자가의 주님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서 부자로 만들어주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 명확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돈과 관계 된 것도 아닙니다. 자식이 성공하는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십자가의 주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버려진다고 해도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늘 세상의 실체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5절) ‘오라!’고 하는 셋째 생물의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검은 말이 그 명령에 따라 등장하고, 그 탄 자의 손에는 저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요한 사도는 다시 한번 음성을 듣습니다. 네 생물 사이로 나는 듯한 음성입니다.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6절).
말을 탄 자가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약적 배경을 통해서 보면 말이란 전쟁에 사용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이 등장한다면 싸움이 예상되는데 그런 예상과는 달리 말을 탄 자가 저울을 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배경 속에서 그 손에 들린 저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언약임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입니다. 복과 저주가 한 언약에 의해 갈라집니다. 언약의 말씀이 주어지게 되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에 참여된 것이고,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저주에 처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언약의 말씀을 주심으로 어디에 속하였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복에 참여되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지라”(레 26:3,4)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레 26:14-24).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징계하시며 저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미치게 되는 재앙의 한 면모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26:26에 나오는 언약에 따른 저주의 말씀을 봅시다.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양식을 저울에 달아 먹는 상황을 허락하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한 면모입니다.
‘몸이 성하고 일할 수 있다면 설마 먹고사는 문제가 걱정이 될까?’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하여 수고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모든 수고는 다 헛된 것입니다.
집집마다 다 화덕이 있지만 각각 다 자기 집의 화덕에서 빵을 구울 재료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열 명의 여자들이 모여서 한 화덕에서 빵을 굽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저울에 달아서 나누어 먹게 됩니다. 하나님이 돌보지 않는 심판의 상태가 어떤 상태가 되는지 그 상황을 적나라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도 살펴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가 떡과 물이 결핍하여 피차에 민답하여 하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겔 4:16,17).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의 상황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걱정과 염려 가운데서 떡을 달아 먹고 물을 되어 먹는 그런 상황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고난의 때를 보여주기 위하여 에스겔은 390일 동안 모로 누워 하루에 20세겔씩 달아 때를 따라 먹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에스겔 선지자가 음식을 저울에 달아 먹으면서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바로 이러한 구약적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말씀을 전제로 이해한다면 검은 말을 탄 자가 손에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이 어떤 뜻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음식을 저울에 달아 먹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두시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네 생물 사이에서 나는 듯한 음성을 들어 봅시다. “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얼마나 되는 액수입니까? 마태복음 20:1-2에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 데나리온은 일용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렇다면 하루 노동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이 밀 한 되나 혹은 보리 석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되’라는 것은 우리 성경을 번역 할 때에 쓰여진 용량입니다. 밀 한 되는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장정 노동자가 하루 먹는 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루 품 삯을 가지고 밀을 사면 혼자 하루 먹을 수 있는 양은 되지만 좀더 싼 보리를 사면 세 되나 되니까 식구 세 사람이 하루 먹을 양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스라엘 땅에서 생산되는 3대 작물은 곡식(밀)과 포도주와 감람유입니다. 곡식은 귀한데 감람유와 포도주는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저울을 손에 든 검은 말을 탄 자가 밀과 보리는 타격을 입혔으나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부분도 우리가 구약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구약에서는 자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명기 7:12-13 말씀을 보면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신명기 11:13,14과 신명기 28:47-51 등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포도주와 기름은 모든 것이 풍족할 때에 누리는 물품으로 언급됩니다. 역대상 32:27-28에서도 히스기야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위한 창고를 지었다고 표현하여서 부와 영광을 누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다가 회복 될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호 2:21,22)고 하였고, 또 요엘서 2:18,19에서는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와 기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풍부함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포도주는 특정 계층, 돈 있는 자들의 기호 식품이며 감람유는 그들의 화장품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물론 포도주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음료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얼마나 많이 저장해 놓고 먹느냐 하는 것은 특정한 계층에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밀과 보리 값은 엄청 뛰어서 서민들의 삶에 극심한 타격을 주는 데 비하여 생활의 풍요와 안락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기름은 풍족하여 부자들은 그것을 마음껏 누리는 시대입니다. 식구들이 살아가기 위한 식량조차 구하지 못해 급급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충분한 양식과 생활의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대를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 즉 곡식을 해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포도주와 감람유는 아직 해치지 않은 상태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드러나고 있는 한 모습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나 부한 사람들은 전혀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상태,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저주의 상태에 있는 한 면모인 것입니다.
여기 셋째 인을 뗄 때에 나타나는 현상에서도 “해치 말라!”는 말씀이 주어진 것을 볼 때에 모두가 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세계 경제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현상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경제 전문가들이 속히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모두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왜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을 힘들게 하십니까?
물가가 오른다고 해서 다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물가가 오를 때에 사실 힘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돈 많은 자들은 물가가 아무리 오른다고 해도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더 힘들고 어렵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오히려 부자들을 더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이 하나님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이 부자들의 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성도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가가 오르고 먹을 것이 귀해지면서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자들은 편하게 잘 살게 허락하심으로 세상 전체가 무엇으로 사는가를 확인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물질을 의지하고 물질에 모든 삶의 기대를 걸고 사는 것과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 그런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가 기대하고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분명히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든 부자든 인간은 물질에 기대를 걸고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먼 미래의 것으로만 여기지 마십시오. 오늘날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셋째 인을 떼심으로 세상의 현실이 어떠한가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현재도 부자는 여전히 온갖 풍부함을 누리면서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가가 오름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는 계속 고통을 당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정부는 마치 특권층과 부유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현실 속에서 부자는 세상이 살기 어렵든 어렵지 않든 자기 재산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가의 변동이 아무리 심해도 전혀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세상을 비관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역시 돈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세상의 경제적인 문제를 어렵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다 철저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있고, 또한 자기 경제력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누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성도가 믿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식물 한 그릇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믿는 자들을 두고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이 확인을 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 바쳐서 이 땅에서나 하늘 나라에서나 큰 복을 누리기 위한 투자가 아니라 우리는 물질로 한 그릇 식물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님을 늘 고백하고 확인하기 위해 헌금을 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는 모이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모습, 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었고 오늘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결코 환경에 지배를 받거나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이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2001.11.11).
요한계시록 제23강
넷째 인
요한계시록 6:7-8
아이들이 커가면서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자녀들을 향해 야단치면서 잔소리가 심해지는 부분은 주로 어떤 부분에 대해서입니까? 대부분은 부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자신이 잘 안되는 부분을 자녀들이 제대로 잘 하지 못할 때입니다. 자신이 잘 하지 못하고 자신의 못난 부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뜻에서 더욱 잔소리를 하게 되고 큰 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못난 부분,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뛰어나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회 생활 하면서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으면 자녀들을 향해 다른 것은 몰라도 영어 공부만큼은 열심히 하라고 늘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또 자신은 컴퓨터를 못하니까 자녀들에게만큼은 컴퓨터를 일찍부터 구입해 주고 열심히 하도록 다그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못한 것에 대해서 자기 자녀를 통해 이루어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욕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한(恨)을 풀어내는 도구로 자녀를 바라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소박한 꿈이요 바램이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자녀에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밀히 따져보고 마음의 밑바닥까지 다 꺼내놓고 본다면 그 욕심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이 땅에 남기고자 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모로서 살아 있는 동안은 자녀를 자기 한을 풀어내는 희생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하지 못한 존재가 영원하려고 갖가지 노력들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욕심은 영원하고자 하는 노력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질적인 우리들의 죄악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 에덴에서 범한 최초의 범죄였습니다. 선악과가 있다는 것 자체는 늘 누군가의 지배 하에 있고, 먹지 말라고 하신 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이 말씀이 장난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그냥 하신 협박이나 엄포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 의한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어떤 인간도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아담 이후로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결국은 죽음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죽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대적인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 욕심,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상태에 대해 선언하시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보는 관점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로 보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암이든지 어떤 질병으로 인하여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자들의 처음 반응이 어떤 것입니까? 처음에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무조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시한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죽음이 임박하면 그 말을 인정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그대로 죽음으로 순순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은 죽음에 대해 순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서히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 들였다기보다는 삶에 대한 체념을 하고 포기를 했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변화시킬 수 없는 사망이라는 것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해야 맞는 말일까요?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죽음에 대해서 체념을 하든지 아니면 발악을 하든지 결국에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날 동안은 늘 최선을 다하여 자기 삶에 대한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어떻게 거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보면서 말씀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에게는 자녀들이 자기 꿈을 이루는 대용물이 아니라 함께 십자가의 죽음으로 달려가는 동반자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망이라는 말 탄 자가 나타납니다.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7,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넷째 인이 떼어지고 있습니다. 네 번째 말이 달려나옵니다. 그 말은 청황색 말입니다. 청황색이란 주검의 색을 말합니다. 여기 넷째 인을 뗄 때에 나오는 말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사망 뒤에는 음부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청황색 말을 탄 자가 사망이라는 것은 사망이 세상에서 권세를 가지고 행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는 사망입니다. 에베소서 2:1-2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을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은 상태라는 것은 어떤 권세자에 의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죽음 앞에 어쩔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망이 세상에서 단순히 죽음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 증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 말과 그 탄 자의 등장과 함께 동원되는 죽음의 도구들을 열거합니다. “검과 흉년과 짐승으로써”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 성경의 말씀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 26:21-26을 봅시다.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또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의 말씀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렘 14:10-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말씀에 보면 더욱 분명하게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기근과 악한 짐승을 너희에게 보내어 외롭게 하고 너희 가운데 온역과 살육으로 행하게 하고 또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5:17).
개인적이라기 보다는 집단적으로 먹이를 찾는 짐승처럼 죽음과 음부가 설치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기근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기근이 있는 곳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보면 먹고 마셨기 때문에 전염병이 나돌았고, 전염병이 나돌아 버려진 땅에는 숫자가 늘어난 짐승들의 횡포가 심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의 한 양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 15)고 하여 사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죄에 있다고 말씀하고, 최종적으로 심판 받아야 할 원수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이 사망이라는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망의 권세에 순응하는 것같이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분은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한 인간으로 오셔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롬 5:17).
그러므로 인을 떼실 수 있는 분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이 네 번째 인을 떼심으로 이 땅의 권세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이 어떤 모양으로 그 권세를 가지고 휘두를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망과 음부가 마음대로 설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전능자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아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움직일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전능자입니다. 당시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살았습니다. 전쟁의 칼이 사람들을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열병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음부도 다만 전능자의 수종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행동 반경은 정해져 있습니다. 엄청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땅 사분의 일에만 미치는 재앙일 뿐입니다. 사분의 일이라는 숫자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 부분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을 보시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며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답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너희가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4-8).
이런 현상이 있다고 해서 종말이요 이제 세상의 끝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러한 일이 이 땅에 늘 있으니 그것으로 놀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런 현상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일을 보았다고 해서 섣불리 판단하여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것처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일어난 현상을 가지고 성경에 대입시켜서 종말인 것처럼 심각하게 마지막을 준비하여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말을 특별히 따로 준비하여야 하는 입장은 성도의 입장이 아닙니다. 성도는 ‘아!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이렇게 일하시는구나!’하는 입장에서 주님을 일하심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저주와 심판 속에서 세상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보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일하시는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망이나 흉년, 땅의 짐승으로써 해를 입는 것을 통해 인간이 범죄하여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철저히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오직 십자가에서 홀로 의를 이루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만 믿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의 보좌에만 관심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이 저주의 세상에 두시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인을 떼심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모습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본문이 말씀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하도록 맡기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이 복음을 드러내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세상을 끝내시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언젠가 복음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나를 통해 복음을 드러내신다면 우리는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도 아닙니다. 또 다른 자아를 명예롭게 남기기 위해서 자녀를 다그치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오직 자녀에게도 복음에 의해 장악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저주의 세상에 하나님이 사망을 주셨다는 사실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이요 주님의 은혜와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말씀으로 산다고 해서 죄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은 다만 덮어주는 은혜를 입었기에 죄 없는 자로 여김을 받을 뿐입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의 죄는 동일합니다. 교통 사고로 죽고, 테러로 인해 죽는 자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에 누구든 사망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생명, 사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의의 권세 그것을 십자가로 드러내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오직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부자로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름을 남기며 사느냐 이름을 남기지 않으며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얼마나 훌륭하게 키우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자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의 형태를 가지고 그 사람의 평소 삶이 옳았는가 옳지 않았는가를 판단하고자 합니다. 비참하게 죽었으면 그 사람이 필시 하나님 앞에 무슨 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죽었다면 하나님 앞에 아주 선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형태를 가지고 말하자면 예수님만큼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의 형태를 가지고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십자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넷째 인을 떼신 이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조금도 살 수 없고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2001.11.18).
요한계시록 24강
다섯째 인
요한계시록 6:9-11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5, 36). 이런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라고만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그 무엇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 말씀이 성도의 현재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하셔서 아무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로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고 있느냐 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주님 편에서 늘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면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주님의 뜻과는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종일 주를 위하여 도살을 당할 양같이 죽음을 눈앞에 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된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이 진정으로 복있는 자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주님과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렇게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르짖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섯째 인을 떼심으로 요한 사도가 환상 중에 본 것은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부르짖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제사 제도를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레위기 4:7에 보면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희생 제물의 피는 뿌리기도 하였지만 제단 밑에 쏟아 부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구약적 배경을 담고 표현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제단이란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서 하늘 나라에 실제로 제단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제물로 드렸으며 그 피는 바닥에 쏟아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신약에서 성도의 죽음을 말할 때에 희생 제사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을 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죽음에 직면하여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딤후 4:6)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본문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나는 피를 부어서 희생 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도의 삶과 종말을 피를 부어 드리는 희생 제물로 비유합니다.
또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비슷한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 17). 신약에서도 구약적 표현으로 이렇게 죽임을 당한 성도들을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땅에 뿌려지지만 신앙 가운데 그 희생은 하늘에 드려진 것이며 그들의 영혼은 하늘 제단에 바쳐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로 인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거란, 방언을 한다든지 혹은 그 외 다른 무슨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을 가지고 말합니다.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입었다든지 아니면 기도로 말미암는 기적의 체험을 증거로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증거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말씀의 증거라면 예수님의 이적을 보거나 경험하였다는 것만으로 주님께서 칭찬하셔야 되고 그들은 떠나지 않았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을지라도 이적을 보고 따라다닌 자들은 결국에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이적을 베푸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산으로 도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다시 제자들과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실로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간파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하여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이적과 말씀은 결국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표적이란 이정표요 화살표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모든 표적들은 증거가 아니라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싸인(sign)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약속하셨던 말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 증거는 오직 십자가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말씀 다른 증거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1:2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9에서도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고 하는 섬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가 있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결코 환영을 받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모든 성도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7에 보면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더라”고 말씀합니다. 악의 세력이 없애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증거를 가진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4:27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걸핏하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누군가 책임을 지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십자가를 미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자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가지고 자신은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당시에는 십자가 사형이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말씀을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간 사람 중에서 방면된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반드시 죽음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 입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도의 현실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은 자신을 이미 이렇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9).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된 자로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그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은 요한 사도와 같은 입장으로 환난과 죽음에 동참되어지는 자여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지금 특정인들을 염두에 두고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 당시에 성도들이 핍박을 많이 당하고 간혹 죽임을 당한 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죽임을 당하는 것이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지금 환상 속에서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그 이후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본질을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무리들로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10절). 큰 소리로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수를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개인적인 복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권자라는 의미입니다. 종들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에 굴복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거룩하고 참되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이신 하나님이시기에 거룩하지 못한 것, 참되지 않는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언약대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자기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죽임을 당한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말씀 때문에 손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어야 했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야 했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십리를 동행해 주는 마음으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마 5:39-41). 그러면서도 원수가 목마르면 마시게 하고 주리면 먹을 것을 주면서(롬 12:20)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도리어 기도하여야 되었던 것이 성도의 삶이었던 것입니다(마 5:44).
성도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는 이러한 말씀이 믿어졌기 때문만 아니라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을 세상에서 이렇게 죽임을 당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달라고 하는 제단 아래에서의 호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고 십자가에 대하여 반발하는 모든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보복해 달라고 하는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즉 예수 그리스도를 찌르고 공격한 자에 대한 보복이요 심판입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11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임 당한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흰 두루마기’라고 하였습니다. 흰 두루마기란 겉옷을 말하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순결과 의의 상징입니다(3:4,5). 혹시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무슨 큰 상급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큰 상급이란 흰 두루마기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나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보상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 먼저 죽임을 당한 성도들은 잠시 쉼을 얻습니다. 그 이유는 동일하게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수가 차기까지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산술적인 숫자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 놓은 수가 있는데 그 숫자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채워지면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죽임을 당하는 자들이 나올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발생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나 누구든지 주님을 위해서 죽으려고 한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임을 당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가 전도해서 사람을 불러모은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판하시고 그 수가 채워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죽임 당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통해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부르짖게 하여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고 복수하는 형식으로 일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시편 6편에 보면 다윗의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 6:3,4).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세상의 실체가 어떤가를 똑바로 보고 또한 심판하실 분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주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악 가운데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그 죄악 속에서 우리가 건짐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어린양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은혜라는 것을 주님은 드러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듣고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 자신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나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믿어졌다면 십자가의 은혜만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혹은 먼저 죽임 당한 영혼들이 하늘 나라에서 이렇게 부르짖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부르짖음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마음으로 종말을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의 차원이 아니라 주님을 대적하고 십자가를 무시하며 말씀을 짓밟는 무리들을 심판하여 주시기를 부르짖는 심정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 입장에서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나의 개인적인 원수들에게 복수하여 주시기를 주님께 부르짖는 마음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사적인 욕심을 채워주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2001.11.25).
요한계시록 25강
여섯째 인
요한계시록 6:12-17
얼마 전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를 막 지났을 때쯤 처음으로 내장산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많은 산의 단풍을 구경 한 것도 아니지만 실로 내장산 단풍은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오고가는 길에서 부딪힐 정도로 복잡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장산 단풍을 통해 자연이 안겨다 주는 선물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 그래서 성도는 주님에 의해 폐기처분될 이 땅을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보다 아름답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미래에 주님께서 세상을 끝내고 심판하실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에 우리는 생활 속에서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활 속에서 충실히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과연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성경을 많이 읽지 못한 날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하지 않은 날이 있거나 아니면 잠시라도 기도를 하지 않은 날이 있더라도 그 날에 주님이 오신다면 주님의 심판을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 생활이 약간이라도 해이해졌다고 생각되면 주님의 재림이 미뤄졌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입니다. 결국 늘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 그 깊숙한 곳에는 언제나 우리의 행위로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거리낌이 없는 부분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악입니다.
또한 성도는 미래와 현재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이어야 되는지 생각하고 우선되는 것을 선택하면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이 우선이 아니라 미래에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삶이 되면 성도의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에는 끊임없이 우리가 미래에 소망을 두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현재가 아닌 미래를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재림을 믿는 신앙의 모습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심판을 두려워하여 미래를 내가 선택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나의 신앙적 노력으로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신앙에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가 중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도의 삶은 주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하루 하루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하루 하루가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줄 알고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12-14절). 하늘과 땅에 일어나는 파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땅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집니다. 하늘의 해가 검어지고 달이 붉어지며 별들이 떨어집니다. 하늘 자체도 마치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총담이란 흑염소의 털로 짠 천을 말합니다. 그러니 검다는 것에 대한 극적인 표현입니다. 해는 은혜의 날이 끝나자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그들의 불신앙과 같은 어두움 속에 전부 버려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암울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달이 피같이 붉어진다는 것은 첫째 인을 떼심을 통해 보여주셨듯이 엄청난 살육의 공포가 엄습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별들이 무화과나무의 선 과실이 익지 않은 상태에서 바람이 불면 쉽게 떨어지듯이 떨어지며,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듯 말리며,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진다는 것은 그동안 움직여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던 모든 것도 제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러한 말씀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구약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묘사가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최후의 종말에 대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누누이 선포하였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3:9-11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에스겔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불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워 별로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우며 달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겔 32:7). 요한이 환상을 보고 표현한 것과 같은 표현으로 선포한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봅시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0-32).
종말에 관한 선지자들의 선포가 표현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지막 심판이란 온 우주의 최후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막 13:24,25).
누가 역시 끝 날에 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눅 21:25-28).
이러한 심판의 날에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1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15-17절). 요한 사도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환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사태가 나면 피하는 것이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산과 바위를 향해 호소합니다. 산과 바위 틈에서 산과 바위에게 말합니다. 우리 위에 떨어져서 나를 덮치라고 부르짖습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 빛이 너무도 두렵기 때문입니다. 산과 바위가 무너지는 것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 바로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보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진노가 자연 재난보다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산에 매몰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처음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는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8-10). 이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어떠하였는가를 말씀하셨던 그대로 요한이 환상 중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 다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었던 그대로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도 그분의 심판을 피하거나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는 죄인으로서 그 본질적인 모습이 백일하에 다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임금이나 왕족이나 장군이나 강한 자나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게 합니다. 죄 지은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의 날을 두려워합니다. 죄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지어 바쳐서 하나님 앞에 떳떳해지려고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부흥시켜 하나님 앞에 떳떳해지려고 합니다. 매일 성경을 빠짐없이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려고 합니다.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돈을 기부하여 예배당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은 수를 모은 교회로 부흥시킨 것이 목회자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철저히 한 것이나, 성경을 얼마나 읽었으며 기도와 전도를 얼마나 많이 하였는가 하는 것은 어린양의 진노를 피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를 가지고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롬 2:11, 골 3:25 등).
그래서 본문에서는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에스라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스 9:15). 말라기 선지자도 동일하게 선포합니다.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 3:2).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 없고 어린양의 진노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 구약이든 신약이든 동일하게 선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떳떳히 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의 희생을 품은 어린양으로서 책의 인봉을 떼실 뿐만 아니라 심판하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의 피보다 우리의 행위를 소중히 여기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성도가 구속함을 입은 것은 헌금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셨기에 은혜를 베푸셨기에 그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얻고 진노에서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드리는 찬양을 다시 봅시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7장에서 흰옷 입은 무리들도 같은 내용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오직 어린양의 피만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부자든지 권력자든지 특별한 사랑을 요구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자 역시 가난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할 특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어린양의 피가 생명이 되고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을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현재의 하늘과 땅이 그분의 말씀에 의해 불타서 없어질 것을 믿는 자입니다. 이 진리를 믿지 않는다면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지금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는 심판에서 제외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과의 관계가 어떤가 하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나와 관계에서 나의 어떤 행위나 공로가 결코 개입되지 않는 차원에서 죄인에게 일방적으로 덮혀진 은혜임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어떤 함정입니까?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 함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당위성을 내세우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실패란 있을 수 없고 세상에서도 잘 살아야 된다는 요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신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죄인이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 담긴 이 사랑을 알고 느낀다면 오늘도 우리는 미래를 대비하려는 차원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려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산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소위 열처녀 비유나 달란트 비유는 미래를 대비하라는 뜻으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랑이 아직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섯 처녀들은 이미 와 있는 상태로 생각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 역시 주인이 멀리 타국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멀리 있다고 여기지 않고 늘 주인과 함께 거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대비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어진 말씀대로 주님과 더불어 사는 은혜를 누리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2001.12.2).
요한계시록 제26강
십사만 사천
요한계시록 7:1-8
오래 전에 어니스트앵글리가 지은 “휴거”라는 책이 교인들에게 엄청나게 많이 읽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인지 고등학교 시절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저도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 당시 “휴거”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종말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 그 책을 많이 읽게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해석한 설교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분명한 것은 심판을 면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 책을 그토록 많이 읽게 한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책의 저자가 요한계시록을 어떤 입장에서 보고 썼는지 별 생각 없이 읽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책의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 읽고 난 느낌은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는 것 밖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가지게 되는 생각은 심판을 면하고 대 환난이 있기 전에 휴거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에 엄청나게 열심을 내고 늘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후 차츰 책에서 받았던 도전들은 사라져갔습니다. 인간들에게 망각이라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더욱 불행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심각한 것이었지만 지금 복음을 알고 또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가는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어리석었던 생활이었습니다. ‘휴거’라는 말은 들림을 받는다는 말인데 그 책에서 말하는 환난을 피하는 그런 휴거는 성경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는 성도의 입장에서 무엇이 위로가 됩니까? 일찍 들림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위로가 됩니까? 흔히 신앙 생활하면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큰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주어진 어려움과 환난을 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자기 백성을 미리 도피시키는 위로를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피하게 할 시험이라면 하나님이 허락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할 길이란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 피할 길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만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험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환난, 즉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도피할 수 있도록 주시는 진노와 심판이라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섯째 인을 떼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범위가 얼마나 큰 것이며 그 심판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요한 사도는 이 7장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 후에’라는 말은 장면의 전환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섯째 인이 떼어진 다음에 곧 이어서 일곱째 인이 떼어질 것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요한 사도는 7장에서 일곱째 인을 떼는 대신 막간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인이 떼어진 다음 펼쳐진 진노의 큰 날에 대한 환상을 기억합니까? 큰 지진으로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지고 해와 달과 별의 징조뿐만 아니라 하늘 전체가 종이 축이 말리듯이 떠나가는 우주적 격변을 환상 중에 보았습니다. 온 인류가 땅의 임금들로부터 시작해서 종과 자주자까지 공포 속에서 당황하는 환상을 우리는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물음으로 땅의 최종적인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였습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 7장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7:1-8의 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인 맞은 자들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보호된다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17절의 후반부에서는 대 환난을 경험한 무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를 말씀함으로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물음에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 있다는 것은 동서남북 사방에 위치하여 땅 전체를 주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2절에 보면 이 네 천사를 일컬어 말하기를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해롭게 하는 권세를 받은 천사가 바람을 붙잡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유보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늘 생각하게 되고 또한 성경적 시각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기에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여섯째 인을 떼심을 통해 보았듯이 세상의 끝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는 자입니다. 세상은 비록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천사가 땅에서 일어날 심판의 바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영원히 이대로 발전하면서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 땅의 멸망이 반드시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네 천사가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하지 못하도록 바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2,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치는 작업 때문에 심판이 유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2:8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에덴을 동쪽에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에덴동산 동편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지만 그 길을 하나님께서 막아 놓았습니다.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성막은 하늘의 모습을 옮겨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입구가 어느 쪽에 있다고 하였습니까? 동쪽에 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문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겔 43:2).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해 돋는 데서부터 올라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해 돋는 편, 즉 동쪽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생명과 연관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해 돋는 곳에서 천사가 올라와 인을 친다는 것은 새로운 낙원을 이루는 작업을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을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4절).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구약을 잠깐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에스겔 9:1-6 말씀을 봅니다.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에스겔의 환상에서 이마에 표를 한 사람은 살육을 면한 것처럼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종들의 이마에만 인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긴박한 환난을 앞두고 인치는 일이 있을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땅의 사방의 바람을 억제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로 하여금 네 모퉁이에서 땅의 바람을 붙잡게 하셔서 심판을 유보하시는 이유는 자기 백성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이 작업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임할 심판의 날, 큰 진노의 날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인을 친다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친다는 것은 그것이 곧 생명을 보증하는 표시가 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22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보증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소유로 보증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 맞은 자의 수는 십사만 사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44,000이란 수는 어디에서 연유합니까? 5절 이하에 보면 유다 지파를 비롯해서 각 지파별로 12,000입니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입니다. 물론 이 수는 실제적인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이며, 또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단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사만 사천명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자가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한다고 해서 수가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2지파에 다 동일하게 12,000명이라는 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구원받는 자들의 이름이 누구누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된 자들이 구원받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이마에 도장을 찍어서 어떤 새로운 지역에 1440,000명만 모을 것이고 또 그 시간적 여유가 지금 주어져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자들이 이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그대로 이루어질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시다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구원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1,22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환난의 날에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환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사는 자를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모두 이 마지막 환난에 동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위해서 환난의 날을 짧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택한 자들이 이미 구출되었다면 왜 환난의 날들을 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택한 자들도 환난 중에 함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환난의 날들을 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환난 속에서 멸절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무서운 때를 만나지만 그 환난을 무사히 견디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도에게 고난이 있고 환난이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지금 바람이 네 천사에 의해 붙잡혀 있다는 상태임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장하고 계시는 성령에 의해서 깨달아 알고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 어린양의 피에 의해 씻음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천사를 보내어 ‘주일에 예배당 나오는 자들에게 인을 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자들에게 인을 치겠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십일조 빠지지 않고 잘하면 인을 치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많은 교인 수를 모은 목회자에게만 인을 치겠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린양을 주로 섬기는 하나님의 종으로 인을 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씻음 받은 자들이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를 하지 않으면 십사만 사천 안에 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예배하며 전도하는 행위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회개하면 십사만 사천 안에 들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행위가 하나님의 보증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보증은 우리를 말씀을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침을 받은 성도는 기도하게 되어 있고, 예배와 전도를 기쁨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가운데서도 감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환난을 피하려고 하는 입장에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에 환난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9-40 말씀을 다시 기억합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 그것을 믿습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1.12.9).
요한계시록 제27강
흰옷 입은 자들
요한계시록 7:9-12
전도 혹은 선교가 무엇입니까? 대체적으로 전도와 선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전도는 우리나라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는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고 선교는 해외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전도와 선교를 그렇게 구분한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신학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구분하는 경향이 최근 들어서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복음 전하는 일로만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 국내 전도와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구분해서 달리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선교를 한다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이 교회의 사명인양 선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대한 생각은 풍성할지 모르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현실입니다. 예컨대, 전도와 선교를 교회나 성도의 사명으로 말하면서 전도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많이 하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면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교회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것은 마태복음 24:14 말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성경은 인용하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끝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은 선교나 전도가 아닙니다. 교회의 사명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이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 뭐가 다르냐고 생각하고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말이 달라서 다른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가 그것을 분리해 놓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프로그램들은 많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와 선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벤트가 있고 머리 수가 많이 모여지면 성공적인 전도 행사로 생각합니다. 외형적인 실적 위주의 전도가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전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 결정적인 것은 주님이 전도하시며 주님이 복음 전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설쳐야 주님의 일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전도 방법이 효과가 있는가 하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하면 그 방법을 선호하고 또 그 방법만으로 전도하려는 현상이 그것입니다. 선교사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으로 선교사를 우리가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 적응하려면 문화 적응 훈련을 받아야 하고 언어 훈련이 있어야 하며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계획이 완벽해야만 선교사를 파송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교를 무조건 해외로 나가고 보자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세상의 끝이 오지 않는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야 전도나 선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믿는 태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모르고 죽어 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본질적인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를 전해서는 안됩니다. 전도란 주님의 방법입니다. 고린도전서 1:20에 보면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라고 전도의 특별한 방법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지혜, 그것을 주님께서 미련하게 만드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굴복시킨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도 우리의 노력과 준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일하심에 의해 된다는 것을 믿는 자가 성도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구원받는 자들이 십사만 사천 명으로 정해져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7장의 전반부에서 십사만 사천 명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란 각 지파 마다 일만 이천명씩, 열 두 지파에서 인 맞은 자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라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이란 한 마디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어떤 신앙적 공로로 끼어들 수 있는 수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수입니다. 우리의 방법으로 구원에 추가할 수 있는 인원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어떤 자도 인간에 의해 추가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을 보여주는 수가 바로 십사만 사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고 그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인간의 힘에 의해 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7장 후반부의 환상은 큰 환난의 날이 지나간 후 생명을 누리고 있는 하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일 후에’라고 한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장면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환상의 장면이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장면이 바뀌어진 상황은 각 나라의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와 어린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실제로 하늘나라가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종말의 날짜를 정해 놓고 그 시간이 되면 흰옷을 입고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릅니다. 성경의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흰옷을 입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실제로 하늘나라에서 흰옷을 입고 보좌와 어린양 앞에 서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종려가지를 들고 있다는 것은 승리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바는 성도가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주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기쁨과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요 이런 모습이라는 뜻을 인간의 언어로 상징화해서 나타낸 표현입니다.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본 사람들은 그 수가 너무나도 엄청나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지파마다 각각 일만 이천 명씩 헤아려서 십사만 사천 명에게 인을 치셨습니다. 구원하실 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호하시며 인을 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 명씩 십사만 사천 명을 인치셨지만 요한이 본 입장에서는 전혀 셀 수 없는 엄청난 무리였습니다.
결국 십사만 사천 명이란 본문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십사만 사천 명만을 의미하는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명이라는 하였는데 여기서는 셀 수 없는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성취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4,5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32:12에도 보면 야곱이 형 에서의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어떻게 신실하게 성취되었는가를 요한은 환상을 통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도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능히 셀 수 없는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 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5:9에서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11:9에도 보면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두 증인의 시체를 두고 기술한 장면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느 한 민족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느 한 백성, 한 족속만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민족의 백성들로부터 구성된 사람인 것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이스라엘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갈 3:6-9, 28-29). 그러기에 흰옷을 입은 성도는 전도와 선교로 계속 승리해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의 기쁨에 젖어 있는 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십사만 사천 명과 결코 다른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깨끗함을 입은 자들에게서 나오는 외침은 어떤 것입니까? 10절에 보면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외치고 있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또한 1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11,12절).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던 모든 천사들조차도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뿐만 아니라 하늘의 보좌를 중심으로 해서 서 있던 천사들까지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찬송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6:9-11 말씀을 다시 봅시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어린양에 대한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 당한 자들에게 흰 두루마기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이 누구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까? 흰 두루마기를 주신 분에 의해서입니다. 즉 주님에 의해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심으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에 죄에서 깨끗함을 얻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아 깨끗하게 된 것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이지 우리의 공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와 어린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한 마음으로 자기들의 구원을 하나님과 어린양께 돌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의나 공로를 전혀 주장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주도권은 전적으로 은혜의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고 말씀한 바와 같고, 또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롬 5:10).
단순히 주님께 예배 시간을 통해 찬송가 몇 장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 영광, 지혜, 감사, 존귀, 능력, 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의 힘으로, 나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위한 감사, 나의 능력이나 힘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나 자신이 죽고 오직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란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 자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더불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며 그것만을 위해 사는 삶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찬송을 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힘을 축적하기를 원하며 우리 자신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하나님께 영원토록 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인정하는 삶이란 내가 죽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어린양에 대한 증거로 인하여 죽임 당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도 혹은 선교라는 말로 제도화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갈 것이라고 하는 우리의 생각이 과연 주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나의 욕심에서 나온 환상인지 말씀에 의한 점검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늘, 항상 이 점검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요구와 하나님의 방법과는 상관없이 늘 우리 안에서 제도화하고 방법화해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솟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한 마디로 하늘의 모습을 옮겨놓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죽고 주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지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희생을 늘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분께만 찬송을 돌려드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사는 그 삶이 세상에 드러나고 공개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서 드러내자 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셔서 십자가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복종된 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 2001.12. 16).
요한계시록 28강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요한계시록 7:13-17
사람은 누구든지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존재 의식을 강하게 느끼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은 왜 나오는 것입니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적어도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자기 안에서 신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살아 있음을 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기분 나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도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해서 하나도 유익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대화 내용의 제일 처음은 항상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처음부터 상대방에게 인간의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복음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로 전도하면 별 거부감 없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하는 것이 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내용을 성경적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되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없는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을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온 하나님을 인간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는가가 극적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이 자기 힘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넣어주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요 생명의 나라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 편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을 다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만드신 하나님은 또한 지옥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지옥에 던져 넣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나 또는 인간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19에 보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 줄 자에게 정확하게 은혜를 주고 은혜를 받지 말아야 할 자에게는 은혜를 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긍휼을 입어야 할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긍휼을 입지 말아야 할 자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여기에 인간들은 누구도 의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사람으로 이 땅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를 짚고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만 말한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긍휼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간과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진다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반발심이요 우리의 죄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만 말해서 누구든지 교회에 오라는 식으로 교회의 문을 열어 놓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채우고 교회를 부흥시키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기호에 맞춘 복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게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복음으로 이야기를 해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사고에 야합한 창녀와 같은 짓이요 주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 자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믿음이 주어져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믿게 하실 때에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환경을 믿을 수 있도록 갖추어야 하고 또한 상대방이 거부감을 가지지 않도록 해서 믿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복음을 왜곡되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원리,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아는 자들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할 일은 바로 이렇게 은혜 받을 자가 은혜 받고 긍휼을 입어야 할 자가 긍휼을 입도록 말씀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교회가 누구를 구원시킨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말씀을 말씀답게 드러냄으로 주님의 일하심만 드러내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을 향해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고난이요 또한 환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와 교회에 주어지는 환난입니다. 성도요 교회는 이런 환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13,14절은 요한과 장로 사이의 대화입니다. 이십 사 장로 중의 하나가 묻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그러니까 요한 사도가 답변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그러자 장로는 이들이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일러주면서 어떻게 환난에서 이겼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큰 환난’이란 흔히 말하듯이 특정한 기간동안 있을 특별한 환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 왔던 고난과 환난의 총체적인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특정한 환난에서 나왔다는 의미가 아닌 계속적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오래 전에도 이러한 자들이 있어왔고 또한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에 대한 증거로 말미암아 환난을 당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환난에서 성도들은 무너지고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고 있습니다. 환난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환난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에 있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로가 요한 사도에게 답변해 주는 것은 10절의 찬송 내용을 확인해 주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어린양의 피, 그 희생 때문에 그들이 지금 승리자로서 천국에 서 있습니다. 붉은 피에 씻어 그 옷을 희게 하였다는 것은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이상한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본문을 이해하면 우리는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옷을 씻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려고 할 때에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옷을 빨고 성결케 하여 강림하실 여호와를 맞을 준비를 시키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피에 옷을 빠는 개념은 일찍이 창세기에 등장합니다.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 49:11).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은 깨끗하지 못한 삶을 더러운 옷을 입은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스가랴의 환상 속에서도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슥 3:3-5).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표현은 죄를 위한 희생을 나타냅니다. 피는 죽음을 나타내므로 어린양의 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피는 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그 전에는 의롭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그들은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다 씻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씻음이 필요하다고 해서 모두가 다 씻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서 흘리는 땀과 피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요일 1:7).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흰옷으로 씻음 받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5,1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의미하듯이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존전에 있는 것은 그들이 어린양의 피에 의해 씻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생명 안에서 성도들은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밤낮’이란 말은 하늘나라에 밤낮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계 22:5 참조).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성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에 보면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레위기에서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1,12)는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선포하였던 말씀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6,27).
이제 요한 사도는 환난에서 나온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16,17절).
이 말씀은 이사야 25:8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주어진 말씀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마지막 때에 어린양이 환난에서 나온 자들의 목자가 되셔서 자기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자의 눈물을 씻어주실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 있어야 그 눈에서 씻어줄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속 썩어서 흘린 눈물, 직장에서 당하는 설움 때문에 흘리는 눈물, 다른 사람들에게서 무시당해서 흘린 눈물,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서 흘린 눈물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나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개척하는 고생을 한다고 고난과 환난을 당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다니는데 가족 중에 누가 반대하기 때문에 환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교사로 고생하는 것을 가지고 환난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교회 생활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주어진 이 땅의 고생일 뿐입니다. 이 땅의 고생들은 돈이 있으면 해결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은 돈 때문에 흘린 눈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고생은 돈이 있으면 해결되는 눈물입니다. 자식이 성공하면 해결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환난은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환난이 아니었고, 사람들에게서 무시당했기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환난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고 선교사로 일하는 고생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환난은 환경에 의한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 땅에 제대로 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하나님의 모습을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생명이 주어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환난은 이런 것 때문에 당한 환난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가 당하는 환난은 철저히 십자가를 지시며 환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흰옷을 입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에서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에서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환난을 통해서 생성되어진다는 뜻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추출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요 15:18-21)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어린양의 피로 씻음 받은 흰옷을 입은 자입니다.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나를 깨끗하게 하신 어린양의 피만 자랑하고 높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의 모습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며 환난 가운데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싫어하고 세상 사람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로 씻음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알게 된 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이 깨달아져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전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의 피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나는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성도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계속해서 세상의 악함과 나의 죄인 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다니게 되었다고 해서 내 속에서 나오는 예전의 악함이 추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복음을 알면 알수록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까지 표현하였던 것입니다(딤전 1:15).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늘의 생명을 누리게 된 이 은혜가 오직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교회가 아니라 언제나 어린양의 피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하늘 나라의 삶을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예배당 혹은 기독교에 관심 있다고 스스로 성도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린양의 피에 씻음 받았다는 것은 기독교나 교회에 관심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주님에 대한 관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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