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요한계시록 29강
일곱째 인
요한계시록 8:1-2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악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 7:7).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드러낼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원숭이를 두고 사람을 설명할 수 없듯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 땅에 드러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입니다(요 5:23).
요한복음 17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4-19).
여기서 주님께서는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분명히 분리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분명히 다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엄연히 구별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셨듯이 세상을 살도록 요구받고 있고, 또한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냄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세상에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모습이어야 하고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교회와 세상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아니 구별된 전혀 다른 영역인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가 스스로 세상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면 어떤 현상이 생기겠습니까? 지금 한국 교회의 모습은 세상과 구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스스로 세상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을 우리 주위의 교회들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것입니다.
예컨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을 같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성경에서 복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직장에서 빨리 승진하는 것이 복이고 봉급을 많이 받게 된 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기도 응답으로 말미암은 복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많이 가지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 성공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단정짓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심방을 가면 온갖 복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다 끌어들여 그 가정에 복을 빌어줍니다.
간혹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시는 분들이 예배 마칠 때에 축도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와 심각하게 토론을 벌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은 축도를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예배를 마침에 있어서 찜찜한 마음으로 마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한 복을 받았음을 축도로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세상에서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축도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말고 오히려 그러한 마음 때문에 애통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축도를 받아야만 복을 받는 것 같은 마음이 바로 우리의 종교성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그 종교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혹시 세상에서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축도를 원한다면 그 마음이 십자가에 걸리기를 바라는 뜻으로 축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축도를 하고 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을 아는 자는 이 땅에 주님의 교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말씀으로 경고를 드러내도록 성도들을 주님의 몸된 교회로 이 땅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과 같아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다시 일곱째 인이 떼어지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인이 떼어지는 순간 하늘에 장엄한 침묵이 반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무엇보다 요한은 이 고요함에 압도당합니다. 다음으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나팔들을 즉각 불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고요함을 깨뜨리지 않고 다음 사건이 완료되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라고 표현된 구절은 앞의 여섯 인을 뗄 때에 소개되었던 구절의 연속입니다(계 6:1,3,5,7,9,12). 어린양이 인을 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을 떼시는 작업을 막간의 환상 이후 지금 다시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마지막 인을 떼실 때에 요한 사도는 수많은 구원받은 자와 천군 천사들에게서 들었던 찬송과 경배의 소리와는 극적으로 대조되는 하늘의 고요함을 경험합니다. 이 고요함의 상태는 반시 동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약 30분 정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 사도의 입장에서 느껴진 시간입니다. 사실 요한이 마지막 인이 떼어지기를 기다린 시간은 길고 불길한 침묵의 시간이었으나 요한에게 30분처럼 느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30분이 갖는 산술적인 수치를 가지고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요한 사도를 사로잡은 것은 하늘의 고요,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요함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잠깐 동안의 하늘의 고요는 다음에 있을 사건의 극적 효과를 살려줍니다. 고요한 한 순간을 통해 그 다음 등장하는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는 사건을 부각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인이 떼어지자 하늘의 천군 천사가 숨을 죽이고 쏟아 부을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뒤따라 있을 사건들을 기다리며 두려움 속에 숨을 죽이고 침묵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가올 마지막 심판을 두려움 속에 기다리는 고요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인은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계시된 장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침묵은 두려움을 동반할 침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의 배경을 스바냐의 예언에 잘 설명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바냐 1:7에 보면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습 1:14-18)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침묵이 있다고 하여서 하늘에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침묵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인을 치시고 그 백성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요함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극적으로 행해지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요함 그 자체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 2절에서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을 떼는 사건이 마지막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는 앞의 인들과 다소 생소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팔을 받은 일곱 천사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 아니라 앞에서 떼어진 여섯 인의 내용이 더욱 구체화되고 심화되고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곱째 인 안에 일곱 나팔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양께서 일곱째 인을 떼심으로 고요함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시의 세계에서는 이 고요함 가운데서 나팔을 불 천사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고요함으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그들이 일곱 나팔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고요는 평화가 아니라 무서운 심판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팔의 의미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우리는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13에 보면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출애굽기 19:16에 보면 “제 삼 일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팔을 길게 불면 산 앞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큰 나팔 소리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볼 때에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하여 경고의 의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팔을 불어서 경고하였고,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나팔 소리가 나니 모든 백성들이 다 떨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렵게 하는 경고의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모스 3:6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과 연관하여 경고하는 표시로 나팔을 불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볼 때에 본문에서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일곱 천사는 세상을 경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팔을 받아 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는 시내산의 상황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시내산은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가 있는 곳입니다. 더 이상 시내산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중에서 나팔 소리가 나서 막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속된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올라오지 말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만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을 만들게 하셔서 성막 안에서 희생 제사의 피가 뿌려진 후에 이스라엘과 만나셨습니다.
희생 제사의 피가 뿌려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담보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에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죄인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선언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희생하신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오늘날 우리는 죽어야 할 죄인임을 보여주는 경고의 나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 받아야 할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나팔 소리가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구도 십자가에서 경고의 말씀, 나팔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 덕분에 이 땅에서 복을 받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거기에다 혹시 운이 좋아 천국이 있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 우리가 신앙 생활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경고의 나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믿는 것 밖에 없음을 깊이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심판 날에는 온 땅에 침묵이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절대적인 의로움 때문에 전혀 변명할 것이 없이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0에 보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요한복음 15:22에도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만 서면 할 말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십자가에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으며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죄인이 하나님을 죽이고자 십자가에 매달았던 그 현장에서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입니다. 나의 구원을 말할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과 같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성도에게서 나오는 기도는 성령께서 나를 날마다 십자가 앞에 세워주시기를 구하는 일일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경고의 나팔 소리를 듣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입장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일곱째 인은 훗날 되어질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된 다른 여섯 인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일곱째 인이 떼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평화로운 가운데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세상이 요구하는 복에 불과합니다. 아무 일도 없고 조용하니 예수 믿기 좋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7:14에서 말씀하였듯이 성도는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조용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묵시의 세계에서 천사들이 나팔을 받아 준비하는 것을 보는 자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세상에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받는 것은 허상이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세상의 끝이 있고 세상은 주님에 의해 끝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습니까? 성도는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천국에 데려다주는 배나 버스와 같은 운송 수단이 아닙니다. 경고의 나팔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대속의 표시인 것을 믿습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1.12.30).
요한계시록 30강
성도의 기도
요한계시록 8:3-5
보통 우리가 언제 기도하게 됩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대부분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내 힘으로 하다가 안되면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가 없을 때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아닌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행위 중에 가장 연약하고 힘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심쩍어 합니다.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 외에 다른 행동이 취해져야만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기도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답답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상대방과 비교해서 내가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방보다 내가 나아야 하고 남보다 내가 뛰어나야 한다는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게 되고 남을 누르고 이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기도 내용으로 채워지는 대부분은 복수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수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많은 말들로 이어지고 있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남보다 내가 낫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 제목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남보다 내가 나아야 한다는 욕심에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잠언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8, 29). 악인의 입에서는 악만 쏟아낼 뿐입니다. 어찌 악인의 입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의인의 기도입니다. 어떤 기도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기도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모든 인간은 다 악인(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이 땅에 의인은 없습니다. 의인이란 이 땅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외부에서 오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하늘에서 오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은 ‘아멘’을 유도하기 위한 신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우리의 이름으로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무시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요청에 의해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요청과 상관없이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고통 없이 편하게 잘 사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십자가에 죽였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원하셨기에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기도하면서 아무 행동도 하지 말아야 그것이 믿음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면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불안하게 여기는 마음이 정말 믿음 있는 자의 모습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든지 우리에게서는 나오기 마련인데 우리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을 가진 그것이 바로 믿음 없는 소치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만 무엇인가 된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악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철저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남과 비교하고 상대를 누르고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님 앞에 아무 것도 구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존재임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남보다 내가 나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복수의 기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의 이름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서론을 늘어놓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복수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강론에서 우리가 살펴 본 것은 어린양께서 일곱째 인을 떼시는 것을 통해 요한이 보게 된 것은 하늘이 반시 동안 고요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일곱째 인의 떼심을 통해 보여진 것입니다. 우리는 고요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되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이 특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과 관계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둔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생명되신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모습입니다.
고요함 가운데서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는 환상을 요한이 보게 된 것은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고요함을 통해 하늘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일을 요한 사도는 보고 있습니다. 요한이 본 것은 나팔을 준비하는 천사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기도라는 점입니다. 본문 3,4절에서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올라가는 순간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모든 악의 세력들을 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인을 떼심으로 하늘에 고요함이 있게 된 것은 하늘의 모든 것들이 멈추고 하나님께서 지금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올려지기 위하여 하늘이 고요해진 것입니다.
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마치 제사장이 향연을 피우듯이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들고 향을 받아 담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여기 등장한 천사도 금향로를 들고 향을 담아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왜 천사가 향을 담아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바로 드린다고 표현하지 않고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까?
요한이 본 제단과 금향로는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성막의 분향단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구약의 제사 제도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단이란 구약에서 희생 제물을 잡아 제사로 드리는 곳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보좌 앞 금단에 드린다는 것은 희생 제사,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전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린양의 희생 거기에 모든 것이 모아질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향의 연기가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가 암시하듯이 천사가 받은 향은 성도들의 기도와 구별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이 더 많은 향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용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어린양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 앞 금단에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기도가 의미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가 의미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성소에서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요한복음 17장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9,1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이 기도의 향은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질 뿐만 아니라 그 기도는 어린양으로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아름다운 향기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 금단에 드려지는 이유가 그 다음 구절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5절에서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는다고 하였습니다. 왜 단 위의 불을 담아서 땅에 쏟는 것입니까? 그냥 아무 불이나 담아서 쏟으면 안되는 것입니까? 제단 위의 불은 단 위의 제물을 태우는 불입니다. 제물을 태운다는 것은 심판의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단 위의 제물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위에서 제물이 불에 태워져 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에게 떨어져야 할 심판이 아무런 죄가 없는 제물 위에 떨어짐으로서 자신들이 심판에서 죽지 않고 살게 되었음을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단 위의 불을 담아서 땅에 쏟는다는 것은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이 제물이 되어 불에 의한 심판을 받은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근거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접하였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과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신해서 홀로 심판을 다 받으신 것을 인정하고 그분만 믿고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구원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길 뿐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제단에 드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께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도의 기도란 결코 개인적으로 복수를 해 달라고 하는 차원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에 대한 심판을 구하는 기도일 뿐입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살해하였기 때문에 심판 받아야 마땅하다는 당위성으로 하나님께 구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기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서 기도가 나옵니까? 대부분은 자신이 기도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기도는 호흡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호흡을 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숨을 쉬자고 말하고 숨을 쉬는 사람이 있습니까? 호흡이란 살아 있기 때문에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면 기도는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욕심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인이고 또한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 이 땅을 사는 인간들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성도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죄인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하심 앞에 굴복이고 심판의 정당성에 대한 찬송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일하시는 정당성이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성도에게서는 그러한 기도가 날마다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답다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해 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에 대한 것도 후에 하늘 나라에서 이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지금 하늘나라에 사는 마음으로 이러한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는 죄악됨을 고백하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 피의 고귀성을 인정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1.6).
요한계시록 31강
첫째 나팔
요한계시록 8:6-7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처음에는 답답하였습니다. 혹독한 노동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외로움과 추위와 배고픔에 대한 고통을 견디는 것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욕망은 끊임없이 솟구쳤지만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옥 밖의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감옥 밖에서 경험했던 것 때문에 가장 큰 꿈이란 오직 자유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감옥 내부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옥 안에서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어 쓰는 것도 배웠습니다. 거기서 결혼도 하였고 아이도 출산하였습니다. 자녀에게 감옥 밖의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처음에 귀가 솔깃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기에 막연한 동경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아이도 감옥의 내부 생활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후손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었지만 도무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차츰 그 후손들은 조상들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감옥 그것이 전부인 세상으로 압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살아갔습니다. 현재 있는 이 감옥 안에서나마 힘을 길러 다른 사람에게 눌리지 않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며 또한 자녀들도 그렇게 양육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어렴풋이 들었던 것으로 인해 자유를 갈구하는 마음은 본능적으로 있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온갖 것들을 다 신으로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신기한 것이 있다 싶으면 신으로 모시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감옥의 간수를 신으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감옥의 문이나 담장을 신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신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누군가 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하였습니다. 감옥 밖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옥 문을 제거하고 담장을 허물어서 자유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급기야는 감옥 문을 제거하고 담장을 허물겠다고 하는 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신으로 섬기는 일들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거리낌없이 그들은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약간 억척같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 무리하게 짜낸 이야기라고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 우리는 서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기를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의 형편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악한 권세들에 사로잡혀 있고 권세들의 행위에 연합되어 있으며, 권세들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하고 열심히 쾌락을 좇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접근이나 하나님의 긍정적인 행위는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혼란이요, 궁극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하러 오자, 인간들은 해방의 순간이 온 것을 깨닫기는커녕, 자신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한다며 오히려 항의합니다. 속박의 사슬이며 감방의 문 같은 것들을 인간들은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상황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자유를 보장하는 성경의 진리들을 오히려 지독한 인격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희생의 피에 의해 일방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며 주의 성령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주장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억측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고통 당하는 자들을 품에 안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행한 한 성자가 한 말로써 배워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유일한 진리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악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악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본다면 그것은 백날 헷갈리는 신비의 책일 수밖에 없고 수많은 상징들이 나열된 이상한 그림책과 같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대한 말씀도 내가 심판에서 제외된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도 우리는 살아서 주님을 위해 큰 일을 해보자는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도 하늘의 시각으로 세상의 실체를 보게 되면 성도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알게 되고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원하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일곱째 인이 떼어지고 고요함이 흐릅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하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요한 사도는 보게 됩니다. 천사들이 향로에 향을 받아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의 기도와 향이 합하여 하나님께 드려지자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 땅에 쏟으니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6절에 보니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일곱 나팔 가운데 처음 네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일곱 나팔의 심판 경고는 일곱째 인봉을 떼는 환상에 이어 등장합니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마치 일곱 인이 다 떼어지고 난 후 일곱 나팔이 울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일곱 인이 떼어지는 사건, 일곱 나팔이 불려지는 사건, 그리고 뒤에 살펴 볼 일곱 대접이 쏟아 부어지는 사건은 동시 다발적인 사건입니다. 즉 서로 중첩되어 있는 사건들을 다방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인을 떼심으로, 일곱 나팔을 부심으로 그리고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데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반드시 속히 일어날 종말의 상황을 서로 다른 상징을 사용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련의 세 가지 심판 행위의 묘사를 통해서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숨막히는 절정으로 이끌어 갑니다.
일곱 인봉을 다 뗀 후에 일곱 나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일곱 인봉의 경고가 먼저 있고 나중에 일곱 나팔의 심판 경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재난과 경고를 다른 상징을 사용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내신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7절에 보면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의 강론에서도 나팔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였지만 나팔은 경고의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좀더 구체적으로 나팔에 대해서 본문과 연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팔은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하여 불려지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전쟁 때에도 많이 쓰여졌습니다. 위기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소집하기 위해 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을 보면 해방과 기쁨의 날을 알리는 일에도 나팔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팔을 불어 알리는 여호와의 날의 도래는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동일한 여호와의 큰 날이 악인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던 자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의 날입니다. 나팔 소리가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공포 대신 기쁨을 연상하였습니다. 축제의 날에 대속죄일에 그들은 나팔을 불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0:10에 보면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하였고, 레위기 23:24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속죄일로 그 절정을 이루는 칠월 첫 날에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어 속죄의 은혜가 선포됨과 동시에 속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던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알지 못하고 그것과 관계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에 참여된 자는 새로운 날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첫째 나팔을 불자 피 섞인 우박과 불의 세력들로 상징된 심판이 땅에 쏟아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박과 피는 애굽에 내려졌던 두 재앙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애굽 전국에 그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없던 것이라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무릇 밭에 있는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출 9:22-26).
애굽에 우박이 내려진 재앙은 일곱 번째 재앙입니다. 그런데 우박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피가 섞였다는 것은 이러한 심판으로 인하여 죽음이 크게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있는 나무들 위에 우박이 떨어지고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이 겹치자 “밭에 있는 나무나 식물은 고사하고 푸른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출 10:15)고 하였습니다.
우박과 불과 피는 에스겔에서 말씀하고 있는 심판의 요소와도 일치합니다. “내가 또 온역과 피로 그를 국문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떼와 그 함께한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리라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38:22, 23). 출애굽기에 기록된 재앙과 연관해서도 하나님은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출 9: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과 여호와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이미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불을 향로에 담되 단 위에 있는 불을 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단 위의 불을 담아 땅에 쏟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요 거룩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되 그 하나님이 제단에 어린양으로 희생하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삼분의 일이 사윈다고 하였습니다. ‘사윈다’ 는 것은 불에 타서 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심판이 부분적이지 최종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일곱 나팔이 울려 퍼지는 것은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신 것과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심판의 모습이 일곱 대접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계 16:1 이하).
이런 점에서 날들의 마지막에 울리는 나팔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성도에게 있어서 나팔 소리는 흩어진 백성을 고통에서 돌이키시며 구원하시는 일을 알리는 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또 고린도전서 15:52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심판과 회개, 해방과 구원, 새 시대의 선포를 알리는 나팔 소리는 또한 새 왕이 등극함을 선포하는 나팔 소리도 되는 것입니다.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는 같은 나팔 소리일지라도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과 연관하여 다른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마지막 천사장의 나팔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적인 통치자로 세상에 나타나실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만유를 온전히 다스리시는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은 실제적인 삶 속에서 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로 생각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기로 결심합니까? 지금 주님의 나팔 소리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일이 늘 반복되어지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쁨의 나팔 소리로 들리도록 일하십니다.
많은 주석서를 보면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여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를 준다는 관점으로 보고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도 위로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을 읽음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는 차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위로를 주는 책이라고 본다면 신앙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러면 위로를 얻어서 환난에서 우리가 이겨보자는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면서 세상이 이러하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님의 일하심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십자가 희생에 근거해서 자기 백성들을 환난 가운데서 빼내시는 일을 보여주시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일하신 주님 앞에 굴복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영대목사/주성교회/ 2002.1. 13).
요한계시록 32강
둘째 나팔
요한계시록 8:8-9
예수님께서 자신의 재림과 연관하여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34-36). 그리고는 37-39절에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날과 때라는 시간에 매여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도전입니다. 시간을 계산하여 사는 인간들에게 시간은 목표가 될 수 있고 또한 삶의 의미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정된 시간이 없다는 것은 인간들에게 무기력을 제공하게 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날짜를 모른다고 표현된 것은 날짜에 매여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재림의 날과 시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늘 더불어 산다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심판 받아야 하는 세상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삶입니다. 이처럼 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삶을 들어서 예수님은 종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볼 때에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주님은 종말의 현상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심판을 받아 마땅한 상태로 표현하시는 것입니까?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은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일상적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종말이란 주님 자신의 재림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세상을 끝내신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세상이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세상은 파기되고 하나님의 말씀만 남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에 죄악된 세상을 폐기처분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남기는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상이나 오늘날 세상은 항상 동일합니다. 세상은 늘 종말을 의식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종말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늘 그렇게 자신들이 사는 대로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을 생각한다는 것은 두려움이기 때문에 골치 아픈 문제를 일부러 끄집어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먹고살기 바쁜데 먹고사는 다급한 문제에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확장을 위해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종말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파멸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자식을 잘 키우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자신의 양산이요 또한 발전입니다. 대가 끊어져 후손이 없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파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바로 애굽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장자의 죽음으로 마지막 재앙을 내리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생각이나 생활상은 애굽의 확장에 불과합니다. 애굽의 모든 사고 방식과 거기서 나온 생활의 습관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철저히 심판을 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행해졌고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내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의로 규정하셨기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고 애굽적 사고 방식이나 생활상을 죄악이라고 규정하셨기 때문에 심판하신 것입니다. 애굽적인 것만이 죄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적 모습이 바로 심판 받아야 하는 죄악된 대표적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애굽에 내려진 재앙의 요소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에 내려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애굽 백성들과 싸우신 것이 아니라 죄악과 싸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고 최종적인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은 인간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를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8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곧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마귀를 멸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행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죄악된 세상은 파기되어야 마땅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된 새로운 세계가 그 말씀에 의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기존의 세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계를 오게 하신 주님에 의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의 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8,9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붙는 산이 바다에 던져진다고 하니까 화산 폭발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본문을 가지고 화산 폭발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화산 폭발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시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산 폭발로만 한정해서 설명하게 되면 화산 폭발이 아니면 큰불이 바다에 던져지는 현상을 우리는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도 불붙는 큰산이 바다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붙는 큰산과 같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화산 폭발을 이야기하는 내용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가서 1:3,4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나훔서 1:5에도 보면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 오르는도다”라고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 7:4에서도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의 한 단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가랴 9:4의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바다에 심판이 행해진다는 것은 땅의 권세뿐만 아니라 바다에 있는 권세까지도 하나님께서 능히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은 땅만 아니라 바다에까지도 능히 자신의 권세를 행하시는 분이시고 그것을 파기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이 땅에 쏟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바다에 쏟아진다고 하였고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서 바다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영역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보았을 때에 실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또한 파기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파기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피조 세계 어떤 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다 가운데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에게까지 철저하게 가해지는 것입니다. 배들도 삼분의 일이 깨어진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들이 살겠다고 서로 무역하는 것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권세를 부리고 인간들이 손을 뻗치는 장소라면 그곳이 바로 죄악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히 박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파기하실 영역이라면 바다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곳이 비록 하늘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견디어낼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파기하신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성도는 세상의 것을 좇아가고 세상을 것을 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취하고 하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본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나팔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또한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분의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부분적으로 행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정도의 능력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남겨두고 심판을 행하시는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혹시 살아남은 부분에 속했다면 살아남은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불붙는 산 같은 거대한 것이 바다에 빠지는 것은 자연현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의 의지와 나의 노력으로 인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심판 앞에서도 내가 능력이 있어서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산이 바다에 빠지고 바다가 피가 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 땅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46:1-3에 보면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 세상의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만이 피난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0).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난 중에서 죽음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흔들리지 않고 누가 이렇게 사셨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사람들에게서, 이 땅의 어떤 환경에서 피할 요소를 찾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써만 심판을 능히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본문 역시 마지막 심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 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세상의 것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은혜 때문에 산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상관없다는 종말을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 내가 어렵게 마련한 보금자리가 무너지고, 내가 쌓아 놓은 노력의 산물들이 박살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1.20).
요한계시록 33강
셋째 나팔
요한계시록 8:10-11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끔씩 뉴스 보도에서 부부간의 논쟁에서 재산 문제로 인하여 다툼이 생겨나는 것을 접합니다. 특히 이혼을 할 때에 재산을 분할하는 문제에 대하여 법정 싸움이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합니다. 위자료를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느냐 하는 문제가 당사자간에 합의가 되지 않으니 법정 싸움으로까지 비화되는 것입니다. 결혼하여 맞벌이하면서 이룬 자기 소유를 분명하게 찾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노력의 대가가 너무나도 아깝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일부 젊은 남녀들이 결혼보다는 동거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동거해서 살면서도 결혼이라는 것만은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동거하면서 서로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각자 벌어서 자기 쓸 것을 쓰고 공동으로 쓰게 되는 것은 공동부담으로 물건을 구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재산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조그만 공동 재산이 있다면 헤어질 때에 정확하게 분배하여 헤어진다는 계약서를 쓴다고 합니다.
이러한 동거의 형태가 젊은이들 가운데서 늘어가고 있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에 불과합니다. 자기 노력과 공로로 말미암아 자기 것을 쌓아 가는 일에 있어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 이제는 결혼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동거하는 삶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와 이기주의가 만나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보충하고 도움을 주고 얻으면서 자기 편한 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는 날 수 있지만 인간이 끝까지 고수하고자 하는 변하지 않는 죄성은 자기 노력에 대한 대가입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기 것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요 원수같이 여깁니다. 아니 원수보다 더 악한 존재로 적대시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는 존재로 보일 때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 소유의 확장과 발전에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인간입니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가치를 여기에 두고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졌다고 믿지 않고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생겨난 것으로 믿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로 여긴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와 못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간들에게 있어서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흔히 하는 말로 무슨 제도적인 문제가 발생하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사회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사회에 탓을 돌리면서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존재가 사회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까운 이웃, 선후배, 혈통적 관계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가장 괴롭히는 존재입니다.
예컨대, 같은 일이 일어나도 어떤 때는 기분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기분 나쁠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 짜증나는 일을 당했어도 더 크게 즐거운 일이 생기면 그 괴로움과 짜증은 쉽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자기 감각에 좌우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늘 안정되게 관리할 수 있습니까?
잠언 16:32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모든 것을 이긴 자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남을 대하듯이 자신을 대할 수는 없습니다. 남한테는 아무렇게나 하더라도 자기 자신한테는 함부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나라는 존재는 너무도 소중하고 또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주님은 간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살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누구든지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짓는 모든 죄는 자기가 자기를 살리려 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함부로 다룰 수가 없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해서 보면 인간의 생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살리시면 사는 것이고 죽이시면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만물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25-30).
이것이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고 놀라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살리는 데 하등의 노력이나 도움을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시고 먹고 입는 것, 요즘 말로 하자면 의식주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이 땅을 살아감에 있어서 당연히 있어야 하고 필요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축적해야 할 요소로 삼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만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데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로 다가와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10,11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천사에 의해 나팔이 울려 퍼지자 횃불같이 타는 거대한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팔이 울려 퍼진 후 영향을 받았던 바다의 물들과는 달리 신선한 물 근원의 삼분의 일이 쓰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며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의 이름을 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쑥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식으로 따져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쑥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그 별로 인하여 물의 근원이 쓰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묘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구약적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9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광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같이 타서 지나는 자가 없게 되었느뇨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열국 중에 그들을 헤치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렘 9:12-16).
하나님의 심판을 구약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듯이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것을 통해 주어진 심판의 경고는 물을 통해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도 단순히 물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UN이 정한 물 부족 국가 중의 하나라고 해서 이러한 심판이 주어진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이전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드러났고 지금도 주어지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는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지만 또한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서 차단하시게 될 때에 우리에게 어떤 모습이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심판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인간의 죄악상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건짐 받아 수르 광야를 사흘 길이나 행하였지만 마실 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물이 없는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흘길이나 물을 얻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마침 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출 15:23).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는 것으로만 자포자기하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순순히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에 대한 승리의 찬양이 있었지만 그 기쁨과 감격은 며칠 가지 못하였습니다. 애굽에서 430년이라는 종노릇하던 상태에서 건짐 받았다는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임을 하나님께서 보이셨습니다.
출애굽기 15:25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고 하였습니다. 시험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증명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쓴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나무를 지시하시면서 그것을 물에 던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물이 달아져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무슨 약의 효험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달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로 나타내셨습니다(출 15:26).
많은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왜곡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여기서 질병을 치료하신다는 뜻으로 말씀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죄악 가운데서 회복시키는 것을 치료하시는 것으로 표현한 곳은 많이 있습니다(참고 말 4:2, 호 7:1 등).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죄에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질 재앙이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규례를 지켜 순종하면 그들을 치료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명과 규례는 유월절 규례입니다. 즉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양의 피로써만이 쓴물이 단물과 같이 되듯이 이스라엘을 유보된 재앙과 저주 가운데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난주일 강론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의 이 세상은 애굽의 확장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우리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애굽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애굽적 사고방식이 바로 세상적 사고방식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어린양의 피를 무시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애굽에 내려지는 재앙을 통해 벌써 심판 받았어야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회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에 회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참된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의 고귀함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 땅에 벌어지는 모든 것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주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만질 수 없고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치시고 무너뜨리실지라도 우리가 그것으로 인하여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생각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너무 시시해 보이고 인간들 사이에서 흥정의 대상이 되는 참새조차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팔리거나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도라면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나를 살리려고 하지말고 주님께서 살려주시는 은혜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1.27).
요한계시록 34강
넷째 나팔
요한계시록 8:12-13
어떤 목적지를 향해 처음 길을 찾아갈 때의 느낌은 거리가 굉장히 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길을 돌아오면 굉장히 가까운 거리로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경험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에 멀게 느껴지고 다시 돌아오는 길은 경험이 생겼기 때문에 그다지 멀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경험이란 것에 따라서 이렇게 느껴지는 바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나 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경험을 중요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 안에서 인정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일단 경험이 있다면 어떤 이론적인 지식보다도 경험한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대해서도 이렇게 그러합니다. 방언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든 자기가 경험한 것이 우선이고, 신유의 은사를 받거나 경험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경험하였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우깁니다. 그것으로 주님께서 자신을 사랑해서 주신 것으로 굳게 믿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경험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무한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경험은 땅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물질 세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세계가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러기에 땅에 매여 땅의 세계만 생각합니다. 우주선을 타고 짧은 순간의 우주 경험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의 세계인 하늘의 경험이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하늘의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세계가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늘의 세계에 대해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근원적인 답변을 할 수 도 있습니다마는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내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12,13절).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어디까지 확대되어서 선언되고 있습니까? 땅에서 바다로 하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가 미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움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현상은 애굽에 내려진 흑암 재앙을 생각나게 합니다. 애굽에 내려진 재앙은 어두움 그 자체였지만 본문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심판은 해와 달과 별이 제 기능을 잃게 됨으로 말미암아 생긴 어두움입니다. 구약에서 이러한 어두움이 임하는 것을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욜 3:14,15)라고 하였습니다(참고 암 8:9).
부분적이지만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제 기능을 잃고 땅에 어두움이 임하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 현상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두움의 세력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심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땅이 중심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최초에 주신 그 땅으로 계속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이 중심이 아니라 하늘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땅은 심판을 기다리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에 대해서 하늘이 어떤 식으로 관여하게 되느냐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관심사입니다. 즉 성경에서는 땅과 대비된 개념으로 하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악 된 땅에 심판을 내리는 하늘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늘입니다.
창세기 1:8에 보면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궁창을 하늘이라고 칭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을 위 아래로 나누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피조 세계의 최종적인 테두리로서 하늘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하늘 아래에서 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들이 본래 목적대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시고 그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셔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은 어떤 식으로든 땅 위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 지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지원합니까? 그것은 궁창에 자리잡게 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넷째 날에 가서 하나님은 하늘에다 낮을 주관하는 물체와 밤을 주관하는 물체로 채우십니다. 즉 해와 달과 별은 낮과 밤의 변화를 알려주는 일을 하는 물체입니다. 낮은 빛의 세계요 밤은 어두움의 세계입니다(창 1:5). 낮과 밤의 교체를 알려주는 물체가 하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땅의 세계 이전에 먼저 빛과 어두움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고, 동시에 땅은 항상 하늘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어두움은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어두움을 배경으로 하여 빛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어두움의 자리에 빛이 생겨나면서 빛은 어두움을 지배합니다. 심지어 밤이라 할지라도 어두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달과 별이 그 깊은 어두움을 지배하는 형식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다음에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6-18).
하나님께서 광명을 만드셔서 주야를 주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도 빛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그 빛이 하늘에서 땅의 어두움을 주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밤이 온다할지라도 여전히 낮은 그 속에 살아 있고, 밝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낮이나 밤이나 항상 지배권을 확보하고 있고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영원히 보여주는 스크린과 같은 것입니다. 빛의 우위성은 피조 세계에 대한 말씀의 우월성입니다. 그래서 변함 없는 낮과 밤의 교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영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낮과 밤이 교체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또한 어두움을 주관하는 물체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증거를 담는 배경으로써 하늘이 존재합니다. 해와 달과 별은 이 땅의 세계를 내려보고 관장하는 하나님의 얼굴 표정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늘은 땅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습니다. 시편 14:2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으신다는 것을 하늘에서 살피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목적을 수행해야 하고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야 합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어두움 속에 빛을 새겨 넣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발광체를 통해서 말씀의 절대성을 모든 피조물에 적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만약 말씀에 어긋나는 피조 세계가 된다면 곧 불길한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상황을 보면 우리는 좀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 이 땅에 죄악이 관영한 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물을 내려 심판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에서도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창 19:24).
하늘은 하나님 편에 속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7,8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마귀가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늘에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하늘만큼은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을 곳을 얻지 못했기에 마귀는 땅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이 땅은 이미 죄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의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의는 외부에서 주어질 경우에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늘이란 이 땅에 의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에도 하늘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늘의 의가 이 땅에 주어질 수 있습니까? 인간의 타락 이후 이 땅은 죄로 물들었지만 자연 현상을 알리는 하늘의 징조는 여전합니다. 노아가 드린 정결한 제물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내리십니다. 땅이 있는 한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8:22).
창세기 1:14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계절과 일자와 연한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하늘의 징조는 아직도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복해서 돌아오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고 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타락해 버린 땅이지만 날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기한으로 영원히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 언약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땅이 있는 한’입니다. 이 말씀은 언젠가 땅이 없어질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기존의 땅이 없어집니까? 이사야 45:8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왜 하나님께서 궁창에서 의를 땅에 붓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땅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의 의와 대비해서 땅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이 하늘의 의를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드러냄으로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실 명분이 확실히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하늘의 의가 이 땅에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것 속에 이러한 의미가 드러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그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선언이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기뻐하시는 아들이라고 한 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만 의(義)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사야 45:8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를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으로 권세를 휘두르는 마귀의 권세를 온전히 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온전히 장악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하늘의 의를 가지고 죄악 된 땅을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처사입니다.
땅이 하늘의 의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살해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처단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는가 하는 것이 백일하에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마귀의 수하에 있다는 것도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땅이 하늘의 의를 도무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늘이 땅을 삼키고 땅을 폐기처분 해야 하는 명분은 확실해 졌습니다. 더 이상 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0).
오늘날 어떤 하늘의 징조가 보입니까? 하늘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말씀을 상실함으로 이 땅은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이 땅은 어두움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어두움에 매여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매여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땅에 사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늘에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어두움의 땅에 기대를 걸지 말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거하시는 하늘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2.3).
요한계시록 35강
다섯째 나팔(1)
요한계시록 9:1-6
최근에 인기 연예인의 필로폰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연기와 외적으로 풍기는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연예인들이 필로폰과 대마초의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실제 몇 명의 연예인이 구속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마약을 한다는 것이 특정한 어떤 사람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해외 유학생들에게까지 공공연하게 퍼져있고, 그 유학생들에 의해서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통해서 일년 술 소비량의 절반이 연말에 소비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연말에 술 소비가 많다는 것도 잠시라도 환각 상태에 빠져서 잊어보자는 것입니다. 환각 작용을 통해서라도 1년 동안 지내왔던 모든 아픈 기억들이나 좋지 못했던 일들을 다 잊어보려는 노력들입니다. 그래서 연말에는 소위 말하는 망년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이 많습니다. 어려웠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새해에는 새롭게 출발해 보겠다는 취지에서 망년회를 하지만 순간의 환각 상태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잊혀지고 새롭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혼란’입니다.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었다는 것은 무엇이 바른 것이고 무엇이 바르지 못한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없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될 뿐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마음 상태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정신으로는 세상을 살지 못한다는 반증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환각 상태에 맡기는 것입니다. 제정신으로 못살기 때문에 환각 상태에 빠져서 현실을 잠시 잊어보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땅에서 괴로움을 잊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들은 현실을 순간적으로 잊는 것에 불과한 임시방편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현실을 바르게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는 결코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로폰이나 대마초 혹은 알콜을 통해서 순간적인 환각 상태에 빠진다고 해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이 더욱 곤고하고 피곤해질 뿐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1,2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가 바로 혼돈의 상태였습니다. 말씀이 선포되기 전 땅의 상태는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습니다. 이 혼돈의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질서가 잡혔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피조 세계는 죄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람을 다시 흙으로 돌리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무효로 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된 것은 바로 혼돈의 상태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어느 누구도 다 죄의 권세에 매여 있습니다. 혼돈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어떤 세력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빼내주지 않는다면 도무지 구원을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 바로 이 땅의 형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드러나게 될 때에 그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뜻은 다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장악하고 있는 악의 실체를 바르게 아는 진정한 지혜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가져서 이 땅에서 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진정한 지혜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요한 사도는 혼돈의 상태가 된 이 땅의 배후 세력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1절에서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문제이지만 다시 한 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미래에 일어날 일들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 본문도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긴장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실체를 보여줌으로 하늘 나라가 진짜 생명의 세계인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 불 때 하늘에서 별 하나가 땅에 떨어집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하나님을 거스려 땅에 떨어진 영적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별과 8:10에서 말씀하는 별과는 다른 것입니다. 무저갱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밑이 없는 구덩이’라는 말로 음부의 깊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무저갱의 열쇠란 무저갱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단입니다.
2,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세상은 사단이 무저갱을 열어서 나오게 된 황충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황충이란 메뚜기의 일종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재앙 중의 하나는 땅의 모든 푸른 식물을 갉아먹는 메뚜기 재앙이었습니다(출 10:12이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메뚜기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메뚜기로 인한 심판을 멸망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서 메뚜기 재앙은 상당히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모든 푸른 것, 땅의 풀이나 채소, 곡식, 각종 수목까지 말갛게 벗겨 버리듯이 먹어 치웠습니다. 떼를 지어 침입하는 메뚜기들이 해를 가리는 구름처럼 몰려들면 남아 있는 푸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말미암아 들짐승이나 가축들이 풀이 없어 굶어 죽고 사람들까지 식물이 없으므로 죽는 끔찍한 재앙입니다.
그런데 황충이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7절 이하에서 황충들의 모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메뚜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하여 황충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황충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구인지를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도구로서 표현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됨으로 나타난 이러한 현상을 먼 미래의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이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이 이와 같은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황충이 나올 때 연기가 같이 올라오는데 그 연기가 해와 공기를 어둡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즉 세상은 사단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어두움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70명의 제자들이 전도를 하고 돌아와서는 기뻐하면서 예수님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8-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았을 때에 이 땅에서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하는 권세가 어디서부터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권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 철저히 순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가진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아니 성도가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더불어 다시 살게 될 때에 주님의 권세로 원수를 제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세 안에서 말입니다.
사단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고 하였는데 누구한테 받았겠습니까? 사단에게 열쇠를 줄 수 있는 권세자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단에게 권세를 허락하시고 땅을 어둡게 하며 고통스럽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악의 세력이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땅의 풀이나 푸른 것,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이마에 인을 맞지 않은 자만 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7:2-3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을 치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성도들에게는 아무 고난도 없고, 어려움을 전혀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도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 땅에 시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악의 세력에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악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은 비록 성도라고 할지라도 마귀가 결코 예외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말세를 고통하는 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고 선한 것을 싫어하며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예수님 때에나 오늘날에나 동일합니다.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죄악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말세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 5:10-11).
사람에 대한 황충의 공격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공격이 전갈의 고통스럽고 독이 있는 쏨과 같은 이 세력들로 사람들을 괴롭게 하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것도 다섯 달 동안만 괴롭게 한다고 하였는데 다섯 달 동안 괴롭게 한다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섯 달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 동안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원수의 힘이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모든 것을 끝내시고 궁극적인 종말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피하고 싶을 정도로 혹독한 고통은 사람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은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IMF 때에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IMF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욱 감당하기 힘든 경제난이 와서 살기 힘들어 죽으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5-1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철저히 낮추셔서 말씀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도를 악의 세력이 횡행하는 이 땅에 두시는 것입니다. 혼돈의 세계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의 말씀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마약이나 술 혹은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을 없애는 것을 통해서라도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은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2.10).
요한계시록 36강
다섯째 나팔(2)
요한계시록 9:7-12
신명기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아주 작고 연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7:1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이 포진해 있는 가나안 땅으로 언약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그들을 쫓아내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더 의롭다든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어서 가나안 땅을 은혜로 얻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9장에서도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 5)고 말씀하셨습니다.
외형적으로 도무지 가치 있는 모습이라고 보이지 않는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업신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네들보다 숫자도 적고 무기도 변변치 못하며 유랑하는 과정에서 피곤이 누적된 민족이니 싸움을 하나마나 이길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얕잡아 보고 쉽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들을 도구로 삼아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을 무시하고 교만을 떠는 자들을 모조리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마음을 낮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만나를 먹이신 것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신 8:3).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서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이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일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은 애굽의 확장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오늘날도 이 세상을 애굽과 같이 보시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듯이 성도들을 향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 백성들을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날마다 빼내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 사도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실체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7-10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메뚜기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한 자세한 묘사들을 일일이 다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 사도가 본 환상이 구약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에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말씀하는 부분을 참고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용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메뚜기 떼의 침공을 받아 땅이 황폐해진다는 요엘서 예언의 처음 부분을 생각나게 합니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의 연고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욜 4:1-12).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실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언급되고 있는 황충을 단순히 메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이미 지난 주일의 강론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황충들의 모양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고 또 그 배후 세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황충이라는 메뚜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악의 실체를 표현한 말입니다.
요한 사도는 악의 세력을 황충으로 표현함으로 두려운 군사적인 힘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황충들의 모양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전쟁을 예비한 말들 같다고 하였습니다. 전쟁을 예비한 말들 같다는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는 살육과 파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에는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인을 떼실 때에 흰 말을 타신 분이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영광스런 승리를 위장하여 이 땅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고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다는 것은 인간들과 어울리는 지혜와 모략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정신으로 충만하다는 의미로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사자의 이 같고 철흉갑 같은 것이 있으며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다는 것은 파괴하고 살해하기에 사자같이 잔인하며 전쟁을 위하여 무장하여 이 땅을 괴롭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 황충들의 실제 배후 세력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11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충들의 배후 세력은 무저갱의 천사입니다. 즉 사단을 임금으로 모시고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의 히브리 이름과 헬라 이름이 ‘아바돈’과 ‘아볼루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각각 ‘파멸’과 ‘파괴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는 사단에 대하여 “이 세상의 임금”(요 12:31, 16:11 등), “이 세상의 신”(고후 4:4) 그리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 2:2)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멸망될 것이 확실하지만 잠시 그를 따르는 반역하는 자들 때문에 이렇게 불려지고 있을 뿐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망과 파멸도 들어왔고 그 권력을 가지고 사단은 스스로 임금인체 하였습니다. 이런 제한 된 권력을 가지고 사단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헤롯을 통해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광야에 있을 때에도 여러 가지로 시험하였습니다. 특히 세상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만 순종하기로 하셨습니다. 사단이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셨기에 그에게 복종할 수 없었고 그에게 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무한한 권세를 지니신 분이기에 비록 십자가에 순종을 요구하셨더라도 오히려 그 십자가에 순종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절하기를 요구하는 사단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십자가에 철저히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일곱 인을 떼시는 것과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부는 것을 통해 심판의 강도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이 땅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배후 세력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악으로 다스리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지금 용납하시는 이유는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골라내시기 위하여 이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마 25:31-46 참고). 하나님께서는 골라내시는 기준을 십자가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8:13에서 말씀하였던 세 화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은 다섯째 나팔이 울려 퍼짐과 아울러 발생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질 때 나타날 화 둘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9:13-11:14, 11:15-12:12). 그래서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12절). 첫째 화가 지나감으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화가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의 형편입니다. 이 땅에서 주어지는 화는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에 가지는 희망은 이 어려움이 지나고 나면 행복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고통을 참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 이 땅의 형편입니다.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어려움, 고통, 실패는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세상에 전갈과 황충은 주님 오실 때까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고통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한번 고통을 잘 견디고 어려움을 극복하였다고 해서 남은 인생 전체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금 편안하고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 때문에 앞으로 자신에게 고통과 어려움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최면에 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주어지는 황충과 전갈에 의한 괴로움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죽으려고 하여도 전혀 죽을 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할 정도로 혹독한 고통이 되어 생활을 아주 피폐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 관한 문제는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시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시시해 보이고 쉽게 인간들 사이에서 흥정의 대상이 되는 참새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팔리거나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희생의 피를 가장 고귀한 것으로 아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낮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애굽에서 아무 것도 없이 나왔고 그야말로 아무 재주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린양으로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희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를 늘 고백하는 마음으로 낮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흘리신 피를 믿는 마음으로 주의 은혜를 늘 고수하면서 마음이 낮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우두머리가 되고 남을 다스리고 싶어합니다. 상대방을 내가 주관하며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집사나 권사, 장로가 되고 목사의 일을 하는 것도 서로 섬기는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직분이라는 합법적인 제도를 통해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생각에 걸려든 우리의 죄악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현실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과 싸우려고 하지말고 오히려 그 배후 세력과 싸우시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주님을 믿는 마음, 그것이 바로 낮은 마음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과 어려움이 고통과 어려움으로 크게 보이지 않고 오직 십자가 은혜만 자랑거리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낮은 마음을 가진 성도입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2.17).
요한계시록 37강
여섯째 나팔
요한계시록 9:13-21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실 때에 열 번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아홉 가지의 재앙을 내리시고 마지막으로 장자가 죽는 재앙을 내리신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앙을 내리실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피의 흔적이 있는 집은 재앙이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빼내시는 것입니까? 왜 처음에 바로를 강퍅한 상태로 그대로 내버려두셨다가 나중에서야 항복하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마지막 재앙인 장자 재앙을 내리셨다면 바로가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쉽게 보내주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왜 이렇게 일하시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우리는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일하시는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의로운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철저히 우상에 매여 있다는 실체를 보여주고 이스라엘도 그 가운데 애굽 백성들과 별반 차이 없는 존재임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애굽과 함께 망해야 하는 죄인인데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보내주기를 구하자 바로는 더욱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더 악화시킨 것처럼 보입니다. 학대가 더욱 심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 상황을 출애굽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 5:19-21).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자신들에게 고통과 학대를 주지 않는 하나님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죄악상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약간의 고통과 어려움이 있지만 구원되는 것보다 그냥 애굽에 눌러 사는 것이 이스라엘이 원하는 바였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의 은덕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는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애굽과 이스라엘에 내려진 재앙을 통해 밝혀진 것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이 진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것이었고 가나안이라는 낙원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가 원하는 바도 이 땅에 눌러 사는 것이지 십자가로 말미암아 베푸시는 구원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는 구원보다 현재 이 땅에서 편하게 잘 사는 것을 더욱 좋아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애굽에서 건짐 받는 것으로 말미암아 오는 고통을 싫어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듯이 죄악된 세상에서 건짐 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과 원리대로 사는 것 때문에 오는 고통을 싫어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우리의 죄악된 심성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를 죄로 보지 않고 말씀으로 합리화시켜주는 이런 현상이 바로 종말의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편안할 때에는 우리가 믿음이 있는 줄 알게 되고 또한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에 재앙과 심판을 허락하심으로 죄가 무엇이며 동시에 주님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종말의 현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13-15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분이 누구라고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명령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 뿔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레위기 4:7에 보면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제단 뿔은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출 30:10 참고). 여기서 음성이 나왔다는 것은 희생 제물의 피를 근거로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희생 제물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9에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그 희생에 근거하여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러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수가 차고 때가 차서 하나님의 심판이 감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천사가 유브라데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유브라데에 결박되어 있는 것입니까? 유브라데 강은 에덴 동산에 있던 강의 네 지류 가운데 하나입니다(창 2:14). 계속해서 유브라데 강은 약속의 땅의 동쪽 경계로 등장합니다(출 23:31 등). 또한 유브라데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바벨론 문명은 이스라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아간 나라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유브라데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원수의 상징으로 등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벧전 5:13)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로마에서 편지를 쓰면서 로마라고 하지 않고 바벨론이라고 쓰고 있는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한 바벨론과 신약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로마의 유사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준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다 결박당한 악한 영들을 자유롭게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서 에덴 동산에 언급된 유브라데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창조에서 에덴을 점령했던 악의 정체가 여기서 비로소 온전히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악의 영들에 의해 죽는 자들은 삼분의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분적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년 월 일 시”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그리고 금단 네 뿔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에 비로소 결박에서 풀려나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삼분의 일을 죽일 뿐 아니라 그 시간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정된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그 목적을 이루십니다. 막연한 어느 때가 아니라 정한 순간에 그 뜻을 시행하십니다.
악한 영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 응답으로 두 번째 화를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내리십니다. 드디어 억제되어 오던 악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죄는 더욱 노골화되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다스리고 있는 배후 세력이 악한 영들에 의한 것이라고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16,17절에서 그 악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마병대의 수가 이만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만만이란 문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2억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 본문을 가지고 실제로 2억의 군대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군대가 2억이 된다는 외신 보도를 인용하여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문자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병대의 수를 문자적으로 본다면 본문에서 말과 그 탄 자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들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요한이 “내가 그 수를 들었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직접 헤아린 수가 아니라 들은 수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계산을 능가하는 수입니다. 따라서 이만만이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는 수라는 의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주 무섭고 강한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재앙은 첫째 화의 괴롭히는 것에서(계 9:6,10) 여기 둘째 화에서는 죽음으로 강화되고 있습니다(18절). 사단은 이러한 강한 권세를 가지고 이 땅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고 어두움으로 편만하게 된 것입니다. 아니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이 땅은 계속 악의 세력에 장악되어 있어서 늘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허용 하에 악의 세력은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악에 악을 더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악으로 똘똘 뭉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마귀의 수하에서 종노릇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왕이요 최고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우상을 또 따른 자아로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목표와 비전을 걸고 이루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 합니다. 우리는 불상에 절하지 않고 제사상에 절하지 않으며 제사 음식을 멀리하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서 자신은 제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욕심을 우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골 3:5, 엡 5:5).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욕심은 거룩한 욕심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도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부정하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욕심에 불과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삶의 욕심에서 벗어난 자가 아니라 날마다 회개하는 자입니다.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 때문에 주님을 가리고 있음에 대해 회개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회개란 십자가의 주님을 제대로 만났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이제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는데 또 다른 분이 나 자신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분만 바라보게 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라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 목숨부지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천국과는 무관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회개는 천국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그냥 대충 얼버무려서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섯째 나팔 재앙을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또한 주의 영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을 회개시키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과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은혜를 베푸신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회개가 날마다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2.24).
요한계시록 38강
책
요한계시록 10:1-11
베드로후서 3:9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하는 당위성도 이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만 보고 전도하는 일에 열을 올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아니 주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후서 3:9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제로 그렇게 일하신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베드로후서 3:9 그 다음 1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성도에게는 주님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늘 깨어있기 때문에 주님이 언제 오셔도 상관없다는 자세로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아닌 자들에게는 주님의 오심이 불현듯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적같이 오시는 것으로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목적이 인간 구원이라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만 오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차원에서만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의 중심은 주님이 아니라 항상 ‘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해도 늘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베푼 자를 중심으로 이해한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이해한 은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이라는 것도 이기적인 수준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가 계속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신 목적이 인간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을 이루심으로 만물을 회복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최종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신 일의 과정 중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이요 또한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각에서 성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구원에 집착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갖가지 재앙과 심판을 통해서 이 땅에 고난과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애초에 에녹처럼 산 채로 하늘 나라로 불러 올리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저주와 심판의 상태로 계속 유지시키면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자신의 말씀을 이루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고 그 하나님의 뜻에 모든 자들을 굴복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7장에서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막간이 있었던 것처럼 11:5에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에 막간의 계시가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힘센 천사가 등장하고 그 천사가 하늘을 향해서 손을 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가 말씀을 전할 사명을 받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일곱 우레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여기 등장하는 “힘센 다른 천사”는 8:3에 나왔던 금 향로를 가진 천사와는 다른 천사입니다. 또 일곱 나팔을 부는 천사들과도 다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천사들이 등장하는데 각기 다 맡겨진 일이 다릅니다. 그 이름이 힘센 천사라고 불리는 것에 어울릴 만큼 이 천사에 대한 묘사가 장엄합니다. 너무 장엄하게 본문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한 번도 천사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여 묘사한 곳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5-6절에 보면 천사가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맹세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천사의 모습은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얼굴은 해 같고 발은 불기둥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작은 책을 들고 있으며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장엄한 위용을 자세히 밝혀줌으로 그가 전하게 될 메시지가 얼마나 웅대한 것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심사숙고하게 만듭니다. 한쪽 발은 바다를 밟고 다른 발은 땅을 밟고 선 천사,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소리를 발합니다.
4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 우레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이 그 일곱 우레가 발한 소리를 적으려고 하였지만 기록하지 못하도록 제지당합니다. 요한 사도는 그 내용을 들었지만 기록해서 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알아야 할 필요성이 굳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외에 많은 것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고 드러내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궁금하게 여기면서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알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알려주신 만큼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계시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5절 이하에서 그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맹세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5-7절).
일곱 우레가 발하는 것 같은 소리로 맹세하는 내용은 “지체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지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비밀이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모든 말씀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맹세하지만 창조하신 분을 가리켜 맹세하고 있습니다. 창조하신 분을 가리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맹세는 헛되지만 언약의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고 세상을 끝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대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그대로 이루시되 지체하지 않고 세상을 끝내시게 되는 이러한 상황에 다시 주어지는 계시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8절).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렸습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진 책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천사에게 가서 작은 책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9-10절).
에스겔 2:9-3:3 말씀을 보면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었다는 것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포해야 했던 것입니다. 외적으로 평화로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되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자기 자신에게 불리하고 에스겔이 살아 남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포하여야 되었던 것입니다(겔 3:7-11). 에스겔은 두루마리 책을 먹음으로 애곡과 애가와 재앙을 몸소 담당하였습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좇아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에스겔이 먹은 그 말씀이 에스겔을 고난으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삶이 그러하였다면 오늘날 성도 역시 그러한 삶에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입에는 꿀 같이 달지만 배에는 쓰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기쁘게 받은 말씀이 사람들에 의해 혹독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에는 단 것으로 느껴지지만 그 말씀의 반응은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할 대상이 이스라엘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게 되듯이 오늘날 성도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 땅의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지자들을 다루셨던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도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우리에게 고난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고난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고난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또한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여서 말씀대로 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아직까지 요한 사도에게 사명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이루기까지 요한을 살려 두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의 삶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내가 말씀을 이루기까지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이루고 세우기까지 내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주님께서 살려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이 연속되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두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고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섯째 나팔 재앙을 통해 회개를 말씀하신 것도 이런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의 회개를 통해 주님의 주님 되심, 말씀의 활동력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진리로 믿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생식으로 암을 이긴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생식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무조건 생식을 권합니다. 주식을 잘 관리하여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주식을 관리한 그 방법이 진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책으로 출판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무엇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성도는 말씀을 어떻게 잘 다루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내가 말씀에 어떻게 이끌렸는가 혹은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사로잡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 그 자체를 드러낼 뿐입니다. 아니 말씀 그 자체가 드러날 뿐입니다. 회개를 통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뿐입니다.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활동하여 결국 드러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활동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니까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말씀은 살아 움직이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성도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3.3).
요한계시록 39강
성전 척량
요한계시록 11:1-2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이래로 쫓겨나서 죽음 아래, 죄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 가운데 빠지게 만든 마귀의 세력을 꺾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와 사랑에 근거한 약속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선택하셨습니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선택에 기여할만한 결정적인 공로가 있거나 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시기 위하여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언약을 이루는 과정 중에서 필요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산모의 역할을 이스라엘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로써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지상 나라인 이스라엘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였고 언약이 성취되는 때까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언약은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지상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구약의 열 두 지파에 상응하는 열 두 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는 유대인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백성으로 삼고 있습니다. 혈통에 의한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들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렇게 보지 않고 아직도 중동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를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언약의 나라로 보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이 땅의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계속적으로 보존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대대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나면 종말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시대적으로 나누어서 보고 그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달리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 본문의 대부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들을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내용을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양심으로 구원받는 시대가 있는가 하면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시대가 있었고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는 시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성경 해석이 문제가 되는 대표적인 본문이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성전이 지금의 예루살렘에 다시 서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의 관심은 성경에 있다기보다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훨씬 더 관심이 많고 중동 지역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말씀을 대하는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성경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는 일에 순종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언뜻 보면 10장의 말씀과 연관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본문의 문맥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천사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책을 받아먹었던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가 주어졌습니다. 지팡이 같은 갈대가 주어졌다는 것은 척량하는 도구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척량이란 말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어떤 물건을 자로 재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요한에게 어떤 것의 크기를 재도록 요구하셨다는 뜻입니다.
우선 우리는 요한 사도에게 척량을 말씀하신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겔 40:1-5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 오 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 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하더라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장이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자로 육척이라 그 담을 척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고도 한 장대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이방인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되고 백성들이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 살고 있을 때에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보인 환상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성읍 형상 같은 것을 척량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성전을 척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성전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척량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인간이 지은 것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 있지만 이스라엘에 의해서 회복되고 이스라엘에 의해서 성전이 다시 지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다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요한계시록 본문에서도 요한이 성전을 척량하도록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요한 사도로 하여금 확인하도록 하기 위하여 요한에게 도구를 주시면서 척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척량하라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전과 제단을 척량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척량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도 척량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이해를 위하여 고린도전서 3:16을 봅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6:16에도 보면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후서 외에 에베소서에도 바울 사도는 동일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여기서 바울은 성도들을 성전이라는 건물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전에 있는 제단은 희생 제사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든 성도들을 성전이라고 본다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란 모두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동일한 의미를 반복해서 표현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성전을 척량하도록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워진 새로운 성전, 즉 주님의 교회를 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으로 하여금 약속대로 주님의 피에 의해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갈대로 척량해야 할 부분과 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2절).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오도록 허용되어 있는 뜰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경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에 의한 짓밟힘을 그대로 두신다는 뜻입니다.
성전 밖 마당이라고 하나 궁극적으로 그것도 성전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을 짓밟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전제된 상태에서 허용된 것입니다. 얼마 동안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까?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표현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마지막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만 해당됩니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를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마흔 두 달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13:5에서 언급하고 있는 짐승을 경배하는 기간과 동일한 기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여인이 하나님에 의해 보호받는 ‘일천 이백 육십 일’과 같은 기간입니다(3절, 12:6). 뿐만 아니라 12:14에서 말씀하고 있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표현과도 같은 기간입니다(때는 상징적으로 일 년에 해당되는 기간입니다-단 7:25 참고).
아무튼 한정된 기간 동안 의를 마음대로 짓밟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악을 이렇게 허용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가짜 교회, 가짜 교인들을 왜 이 땅에 두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허용하시고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떤 권세에 매여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악의 권세에 꼼짝없이 매여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의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대비해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손으로 남기십니다. 그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요한에게 성전을 척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의해 자신의 능력으로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의 세력에게 성전의 마당을 짓밟도록 하셔서 가짜 교회를 두심으로 십자가의 피만 믿는 진짜 교회가 어떤 모습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고 하셨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죽더라도 마지막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잠깐 유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결국 멸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때는 바로 이렇게 마흔 두 달 동안 악의 세력이 거룩한 성을 짓밟는 때입니다. 아니 세상은 계속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때에 악의 세력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노골적으로 교회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 22)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고행과 고난을 반드시 겪어야만 하나님 나라가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을 지나야 하나님 나라에 골인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세상에 의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고 환난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사도가 앞의 10장에서 작은 책을 먹게 되었을 때에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쓰게 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식적으로 성경을 배우고 복음을 내 속에 축적하고자 하는 일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교회와 달리 우리 교회는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으로 인해 입에 단 말씀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께서는 성도들을 그러한 자리에 가만히 두시지 않습니다. 환난 가운데로 몰아내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도록 악의 세력에 노출시켜서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며 성도인지 밝히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일들로 염려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끝까지 남기십니다. 언약대로 철저히 유지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미혹하는 소리를 따라 동분서주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 안에 주신 진리의 영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일치하게 이렇게 받아들이도록 해서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십자가의 피만 믿게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까? 그 사람이 척량되는 주님의 성전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3.10).
요한계시록 40강
두 증인
요한계시록 11:3-6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의 이런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라멕의 이 노래는 자기가 비록 가인의 후손이지만 가인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고 앞으로 살아나갈 것에 대하여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라멕은 자신의 힘과 살인을 자랑삼아 노래하고 있습니다. 더 포악하고 아내를 둘씩이나 거느렸다는 점에서 힘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죄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죄의 모습은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거부하고 원수 노릇을 하는 모습으로 인간들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이러한 가인이나 라멕의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죄를 여러 가지 문화에 감추면서 밖으로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으로 의로운 것처럼 자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죄를 문화라는 것으로 위장해서 더욱 교묘하게 감추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 문화 속에 우리의 죄를 집어넣고 감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신앙 생활을 한다고 교회 문을 들락거리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그것이 계속 그렇게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현대 교회가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을 빙자하여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폭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비추어 우리의 죄성을 낱낱이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죄를 부추기고 이 땅에서 부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복음을 변질시켜 놓았습니다. 복음을 왜곡 되이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이나 부흥이 목표가 되어 있다는 것은 정복욕의 산물입니다. 교회는 커져야 하고 수가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임은 수가 많아야 하고 발전해야 하는 목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커져야 하고 발전해야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항상 말씀에 의해 제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가 하는 것이 초점이어야 합니다. 정복욕은 가인과 라멕의 주특기요 곧 우리들의 주특기입니다. 그러한 주특기를 가지고 그대로 교회에 나와서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집사는 집사대로 서로를 지배하고 다스리고자 합니다.
자신은 이런 욕심에서 예외라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자신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기질이 아니라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건이나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것으로 인해 정복욕이 발휘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들추어내면서 모든 인간의 죄를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8-10).
예수님 당시에 랍비들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지도자요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 좋아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죄악이요 또한 모든 사람들의 죄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은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도자나 선생이 된다는 것과 증인은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지도자나 선생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증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두 증인이 누구입니까?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4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가 두 증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두 증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두 증인을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역사적인 인물로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두 단체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두 가지 원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역사적인 인물로 보는 이들은 에녹과 엘리야 또는 모세와 엘리야가 말세에 나타날 두 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두 단체라고 보는 이들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라고 말합니다. 두 가지 원리로 주장하는 자들은 율법과 선지서, 혹은 율법과 복음, 또는 구약과 신약이라고 갖다 붙입니다. 언뜻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두 증인이라고 해서 두 가지를 갖다 붙이는 것은 상징과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혼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두 증인이라고 해서 어떤 상징적인 것을 두 가지를 찾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두 증인이란 문맥상으로 볼 때에 요한이 척량하게 된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던 그 당시의 교회나 오늘날까지 세상에 의해 핍박을 받는 교회로 늘 변함 없이 존재해 온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러면 왜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스가랴 4: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이스라엘에서는 불을 밝게 하기 위하여 감람나무의 기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은 촛대의 등불이 계속 빛을 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스가랴에게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슥 4:14)고 답변하였습니다. 직접적으로는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에 왕의 역할을 하는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를 지칭합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왕과 제사장의 자리에서 새 성전을 짓는 역할을 진두 지휘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왕과 제사장으로 기름을 부어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자요 성전으로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전을 짓는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 즉 성령으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스가랴 선지서의 이런 배경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증인의 역할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님만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주님만 증거하는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되 그것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주의 성령으로 친히 증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 참된 교회의 모습을 요한 사도는 오직 오실 메시야만 증거하는 역할을 감당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표현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는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증인인 교회가 무엇을 입고 있습니까?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서 무슨 일을 하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작업복을 입었다면 일을 하는 자입니다. 상복을 입었다면 누군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요나서 3:7에 보면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니느웨 성 사람들이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슬퍼하고 애통하게 여기는 마음을 표현한 옷입니다.
따라서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늘 회개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을 낮추어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오직 주님만 증거하고자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자신도 죄인이라는 마음 때문에 늘 회개하는 마음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심판에서 제외되었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도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고 심판 받은 존재로 여기면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예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얼마 동안 말씀을 선포합니까?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선포한다고 말씀합니다. 일천 이백 육십 일이란 2절에서 이방인들이 성전 마당을 짓밟는 ‘마흔 두 달’과 같은 기간입니다. 왜 일천 이백 육십 일로 말하고 있습니까? 마흔 두 달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의 기간을 말할 때에 쓰는 표현법입니다. 일천 이백 육십 일이라고 풀어서 표현한 것은 증인이 매일매일 증거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더럽힐지라도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왜 교회를 두 증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둘’은 증인의 수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9:15에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증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두 사람의 증인이 성립된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증거로써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심판에 대한 정당성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피를 증거하는 교회의 증거로 심판의 정당성은 이미 확보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4절에서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촛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이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증인인 교회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기에 언제나 주님 앞에서 주님을 향한 자세로 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본 자로, 경험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어떤 환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자가 증인입니다.
증인의 역할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내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만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인의 역할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주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본문에서 증인의 권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5절). 입에서 불이 나와서 원수를 소멸한다는 것은 실제로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불로 심판한다는 것은 구약적인 표현이고 또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행위를 불이 사람을 죽이고 태우는 것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하나님께서 불로써 심판하실 것입니다.
6절에서는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6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한 것은 엘리야 선지자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물이 변하여 피가 된다는 것은 애굽에 내려진 재앙을 말합니다. 이런 일은 엘리야나 모세의 권세로 되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되어진 일입니다. 엘리야나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교인입니까 아니면 증인입니까? 주성교회라는 것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권세에 매여 있는 증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증인은 단순한 외침으로 자신의 사명이 끝났다고 여기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매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느냐에 관심 가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증인으로서 주님을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 가질 뿐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대통령 후보가 누가 되느냐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요즘 정치 상황을 보면 모두가 다 대통령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대권을 한 번 잡아 보겠다고 누구와는 연합을 하고 누구는 제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제각기 편가르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면 수용하지만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치 상황을 보면서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역시 규모만 작을 뿐이지 서로서로 어우러져 살고 있는 우리네 상황에서도 상대를 누르며 앞서고 남을 다스리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항상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도자요 선생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지도자나 선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도자나 선생이 된다는 것은 남을 이끌고 다스리는 권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권한을 권세로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며 목표로 살아가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증인의 권세는 복음을 복음으로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키는 일에 관심가지는 자들이 아니라 복음을 드러내고 십자가의 주님만 자랑하는 일에만 관심 가진 자들입니다. 지금은 거룩한 성을 짓밟는 일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때입니다. 나는 고난을 받는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3.17).
요한계시록 41강
증인의 죽음
요한계시록 11:7-13
교인들이 하는 말 중에서 ‘예수 믿는 것이 복이다’라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도 인정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성도가 복을 말할 때에는 우리 기준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누린다고 해서 복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기준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을 복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가정이 행복하고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고 건강하게 부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누린다면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종말의 때에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말씀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증인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복음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두 증인, 즉 주님 자신의 몸된 교회로 하여금 자기 복음을 드러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두 증인의 권세가 바로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면만 생각하면 예수 믿는 것이 참으로 쉽게 보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더구나 주님께서 심판하시되 두 증인, 즉 교회의 증거에 근거해서 심판하신다고 하니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부당하게 대우받았던 것,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던 것, 무시당했던 것, 가난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울분이 있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통쾌함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심판이 드디어 우리들의 복수를 이루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다 심판하신다면 거기서 우리가 예수 믿는 보람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제목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평소에 나의 원수들에게 복수를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우리의 원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나 자신을 중심으로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원수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원수를 갚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을 통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보고 주님 자신의 원수를 갚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 땅에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증인들을 세워서 복음, 심판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여 나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싫어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거부하는 그 마음이 현실적으로 주님과 연합되어 있고 주님을 증거하는 자들을 향해 핍박을 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세상이 주님에 대하여 저항하는 죄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세상이 증인을 향해 핍박을 가하는 그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이고 또한 주님께서 거기에 따른 어떤 조치를 취하시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7-8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증인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드러내는 증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증인은 죽을 자리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인들의 증거가 마쳐진 후에 증인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은 땅 끝까지 반드시 증거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복음을 이 땅에 주신 목적이 하나님 편에서 다 달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음 증거는 결코 어중간하게 중도에서 포기되는 법이 없습니다. 미완성 작품으로 증인들의 사역이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세상 끝까지, 주님께서 원하신 곳까지 증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중간에서 포기할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어떤 방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는 온전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복음을 복음답게 드러내는 상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의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짐승이란 다니엘서를 배경으로 표현된 말입니다. 다니엘은 네 짐승이 세상에 일어나는 꿈을 꿉니다. 다니엘이 꾼 꿈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꿈을 통해서 계시하신 장차 되어질 일은, 세상에 네 왕이 일어나는데 그 중에 힘센 한 왕이 일어나서 성도들을 핍박하고 파괴하고 짓밟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왔다고 하는 것을 볼 때에 이는 악의 근본인 사단을 의미합니다. 사단이 세상 나라들을 이용하여 악으로 제압하고 자기에게 굴복시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시)으로 이름하면 소돔이라고 하고, 나라로 말하자면 애굽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은 증인들의 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굴복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가 하는 그 현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였기에 하나님을 십자가에 죽였는가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다 드러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곳으로 표현함으로 증인들이 세상에서 주님과 동일한 모습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증인이란 주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가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곧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 당하신 대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는 편하게 신앙 생활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 당할 수밖에 없고 세상에 의해 밀쳐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주님과 더불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증인의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에서 무슨 일을 얼마나 하고 있느냐? 주일 성수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가? 교회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는가? 몇 사람을 전도하여 교회에 데리고 나왔는가?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씩 하는가? 성경을 하루에 몇 장씩 꼬박꼬박 읽고 있는가? Q.T를 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일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증인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말씀드린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 확인하려고 하지말고 지금 주님과 더불어 고난 받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나는 무시당해도 오직 주님만 자랑되어지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여야 됩니다.
9-10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8절에서 증인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십자가를 거부한 그 현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증인의 삶인 것입니다. 증인의 삶은 세상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악인의 축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증인의 시체를 무덤에 장사하지 않고 사흘 반 동안 구경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증인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라고 전시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것과 같은 상태로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 이적을 보이면 믿겠다고 십자가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였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서도 조롱을 당하였던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증인들이 세상에 의해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증인들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였고 또한 십자가를 따르는 증인들의 삶이 실패라고 단정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살림을 받았습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유대교를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승리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이 증인들을 죽이고 사흘 반 동안 구경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조롱이라고 보여집니다. 단순히 죽은 시체를 가지고 이렇게 조롱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증인들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는 뜻에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마치 라멕이 살해를 하고 그것을 자랑삼아 말하듯이 말입니다(창 4:23-24).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나타내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적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모든 사고 방식들이 바로 이런 모습에 해당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주님께서는 이 땅의 죄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성도에게서 주님의 이적이 나타납니까? 성도가 기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일어나고 병자가 나음을 받으며 독을 마셔도 해를 당하는 않는 그런 이적이 나타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로 성도의 모습은 세상에서 너무 나약한 모습입니다. 세상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는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합니다. 짐승이 증인을 이기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기간이 고작 사흘 반에 불과합니다. 증인이 증거하는 기간인 일천 이백 육십 일과는 대조적인 기간입니다. 비록 거룩한 성을 짓밟는 기간이 마흔 두 달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들이 교회를 향해 조롱할 수 있고 성도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용된 기간은 짧다는 뜻입니다.
10절에서는 두 증인을 “두 선지자”로 말씀하였습니다. 즉 사람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말씀을 대언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하였기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백성이요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백성이요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의 사람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나라나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바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인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며 십자가를 싫어하는 자들을 통칭해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사고 방식 자체는 늘 하늘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이 아무리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에 불과합니다. 증인들이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결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듯이 성도 역시 죽임 당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을 11-12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사흘 반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들어와서 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들어왔다는 표현은 창세기 2:7에서 천지 창조 때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말씀이 생각나게 됩니다. 천지 창조 때의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에 의해 재창조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대속의 죽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고후 4:1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단지 마지막 날에 일어날 현상으로만 한정시켜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종말의 때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보면 그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4,16).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주님과 더불어 새롭게 되는 일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은 지진이 난 것처럼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 이 일로 주님은 하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3절). 그러므로 증인은 목숨을 버리는 일에도 결코 인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요 그것을 복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어떤 법정에서 증인을 섰다는 것 때문에 그 증인이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증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을 받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을 복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증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3.24).
요한계시록 42강
일곱째 나팔
요한계시록 11:14-19
지난주간의 뉴스를 보니까 야당도 대선 후보 경선 릴레이를 시작한다고 보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본격적으로 대통령 후보 내세우기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5월의 지방 선거를 앞두고 정치 일정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올해는 지방 단체장과 대통령 선거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지 않는 자는 없을 듯 합니다. 이렇게 우리네 삶의 형편이 세상의 나라와 무관하지 않고 이 나라의 정치 일정에 우리의 관심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서 과연 성도인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교인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기독교는 정치와 전혀 다른 영역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에 세상 나라와 상관없다는 식으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전혀 다른 곳에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고서 오늘 본문을 상고해 나가기로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재앙이 계속 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 화들은 각각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나팔 소리와 이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따라오는 재앙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곧 울려 퍼질 일곱 나팔 소리 가운데 마지막 것이 임하였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의 강론에서 살펴보았던 12-13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에 의해 시작된 주의 나라가 임하게 되니 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다고 하였습니다. 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이 때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이란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13절은 12절 말씀의 결과로 생겨난 현상입니다. 하늘 나라가 시작되자 이 땅의 나라가 흔들리고 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지진이란 자연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세계의 등장으로 이 땅의 모든 것이 흔들리고 박살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하늘의 세계를 드러내시게 되면 온 세상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죽은 사람 ‘칠천’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칠일 동안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이 홀로 창조하신 사역을 드러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둘째 화가 지나고 셋째 화를 통해 주님의 나라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일곱째 나팔을 통해 심판의 길이 활짝 열렸다는 것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의 영원한 다스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나오는 큰 음성은 주의 날 곧 마지막 날의 마지막인 종말이 다가와 마침내 만물의 참 왕이시요 주님이신 분이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의 온전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지금 교만하여 스스로 세상의 왕인 것을 주장하는 사단의 왕 됨이 철저하게 헛되며 무가치하다는 것을 보일 때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이 일시에 순간적으로 그 절정에 도달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위협에 처한 적이 없었지만 세상은 거짓 신과 거짓 왕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 나라가 전복되고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세상 나라들’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의 여러 나라들을 각기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하나의 나라로 보고 하늘 나라와 대조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본질상 주님을 거부하고 원수노릇을 하는 하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어떤 한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주님의 나라가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혹자는 대한민국이 주님의 나라가 된다고 주장하는 무식한 자들도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대한민국도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다 전복시키고 그 위에 주님의 나라가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 주님의 나라는 주님의 피에 의해 세워진 나라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의 나라가 아닌 주님의 나라입니다.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1:13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도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세워진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 언약을 주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에 아직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시간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에 하늘 나라는 이미 다 완성된 것입니다. 더 이루어져야 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재림 사건만 남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15절 말씀을 요한 사도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고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오래 전에 이미 주님의 나라를 내다보고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4). 마리아에게 임하였던 계시도 바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누가는 다니엘이 예언했던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뿐만 아니라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하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인간의 공로나 우리의 노력이 결코 개입되지 않은 나라이기에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오직 주님께만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16절에서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여기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만 경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구속함을 입은 모든 성도들이 경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십사 장로는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8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는 “장차 올 자”라는 표현이 빠져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일곱째 나팔을 통해서 하나님의 왕권적인 통치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차원에서 감사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함께 하시고 다스리고 계신 주님께 이 경배와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 역시 이런 점에서 장차 오실 분께 감사나 경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의 곁에 계신 주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로 이루신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주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피의 은혜를 입은 자는 후에 드릴 찬양, 감사를 준비하는 자가 아닙니다. 지금 주님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늘 그분께 드리는 찬양과 경배, 감사가 있는 자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 경배, 찬양, 감사가 없다면 자신이 성도인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의 감사가 연례 행사로 하는 감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년에 감사절 두 번 정해서 몇 푼의 돈을 봉투에 넣어서 감사헌금 한다고 해서 성도의 의무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는 감사절의 부당성이나 감사절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든지 아니면 감사헌금 봉투를 드리는 것이 무조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기나 혹은 어떤 행사를 만들어 놓으면 항상 우리에게는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고 그것을 추구하며 그 의무만 이행하면 성도로서 행할 바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의 죄성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겉치레의 감사를 약간의 물질로 표현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생각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죄악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을 드리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악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경배한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오직 주님의 희생 때문에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금 비록 이 땅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믿음으로, 또한 그 나라에 사는 심정으로 이러한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존재입니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18절). 주님의 나라는 반드시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죄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세상 나라를 통해 우리의 죄를 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며 무론대소하고 자기 백성들에게 상, 즉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하늘의 일이 감추어진 것이 없이 모두 다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그리고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자연적인 현상으로서의 번개, 지진, 우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개, 음성, 뇌성, 지진, 우박이 있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언약궤와 함께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언약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구약에 보면 지성소의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교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제는 제물의 피, 즉 속죄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구원이 어린양의 피에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며 흘리는 그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이 열리고 언약궤가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세상 나라를 보시는 것도 십자가를 기준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다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세상 나라에 기대를 걸고 이 국가에 의존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올 때면 더욱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열리는 기도회가 많을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수단이 될 뿐입니다. 또한 교인들 역시 기도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교회가 힘을 과시해 보자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7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될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세상 나라가 주의 나라가 되는 것과 심판과 심판 속의 구원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나팔은 일시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앞에서 보여주었던 사건들이 새로운 차원,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전하게 드러난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12장 이후에 전개되는 모든 사건들은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큰 권능으로 왕 노릇하시는 것을 지극히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모습이 바로 하늘 나라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하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로 모였다는 것은 이런 하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모여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시간이 남아서 교회로 모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시간을 내서 여기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드러내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지금 이 순간에 드러내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신 부름에 순종하기로 합시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세상 나라에 관심과 기대를 가지지 말고 오직 주님의 나라에 관심과 기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3.31).
요한계시록 43강
여자와 큰 붉은 용
요한계시록 12:1-6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의 광채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하는 존재는 “이 세상 신”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장악하고 있는 신입니다. 어떤 종교를 세우고 그 종교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상 신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의 신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상 신이고 이 세상 신은 어떤 신이든지 그 뿌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차원적인 종교에 입문하여 신앙심이 깊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종교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 됩니다. 이 세상의 신은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할 때에 그 의미는 모든 인간이 다 마귀의 수하에서 주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든 거기서 마음대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내가 나를 주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주관하는 영적인 존재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도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신앙 생활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 생활을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에 신앙 생활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주님의 몸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각 개인은 주님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따로 떨어져 있는 소품들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써 주님께 붙어있는 존재입니다. 머리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지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주님의 몸으로써 교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이런 면으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으로 내가 예수님을 믿고 또한 개인적으로 신앙 생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의 한 몸이라는 의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마귀와의 싸움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마귀를 어떻게 이겨볼까를 궁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주님의 한 몸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1절에 보면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 여자가 누구입니까? 해를 옷으로 입고 달을 밟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으며 머리에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 여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극히 권세 있고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해를 옷 입고 달을 다스린다는 것은 온 우주에 빛을 비추는 해보다 달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모습입니다. 해를 옷으로 입었다는 것은 여자가 지닌 찬란한 아름다움을, 여자의 발 아래에 달이 있다는 것은 그 여자의 권세를, 그 여자가 열 두 별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는 것은 그 여자가 왕과 같은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열둘이라는 숫자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즉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계 7:4 참고).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15에서 뱀에게 주신 저주의 말씀이 바로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도 원수가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승리가 있기까지는 계속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 관계를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타협하거나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원수의 관계가 지속되어 결국에는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의 역사는 이렇게 전개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이 이어지는 것이 인간 역사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이러한 문맥 속에 있습니다. 가인에 의해 아벨이 죽임을 당한 후에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벨이 죽은 후에 대신 셋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창 4:25-26).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에 저지하지 않으시고 그냥 두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악의 세력이 얼마나 왕성하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로 만들고자 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베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셋을 허락하신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셋의 후손인 노아를 세우셨습니다. 온 세상에 악이 횡행하고 세상이 완전히 악에 의해 점령당한 것처럼 보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통해 물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이 노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약속의 후손을 주셨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나 그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향하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선택되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시게 하는 역할을 위해 부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여자가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자란 하나님의 약속을 처음 받았던 하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낳게 된 마리아를 지칭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약속의 자손, 여자의 후손으로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여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약속이 지향하는 바대로 살아가야 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여자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장차 예수님을 통해 이 땅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이요 그것을 신약에서 교회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님의 몸된 교회가 본문에서 말씀하는 여자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2절에 보니까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낳는 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5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1:21-22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패역하고 방황하는 여자 이스라엘을 통해 새 일을 이루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여기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마태복음에서는 이 예언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성취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1-23). 그렇다면 여자가 낳은 이 아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에 대한 큰 표적이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지는 순간 또 다른 표적의 환상이 펼쳐집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3-4절). 그것은 큰 붉은 용이었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불타는 붉은 용’이란 의미입니다. 즉 살의로 가득찬 포악성을 표현한 말입니다. 또한 뿔이 열 개나 있다는 것은 힘과 권세를 지닌 존재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가 일곱 머리에 일곱 면류관을 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일곱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수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곱 머리에 일곱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왕권으로 다스림의 권세를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귀입니다. 9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9:11 참고).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임금으로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놀라운 힘과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용이 자기의 꼬리를 끌어다가 땅에 던진 별들은 하나님을 반역한 그의 추종 세력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삼분의 일은 상당한 분량이지만 많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신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서는 능히 제압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용이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여자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용이 여자가 해산하기를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용이 여자가 낳는 아이를 삼키고자 하는 이유는, 여자가 낳은 아이는 창세기 3:15에서 약속된 대로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원히 승리한 자로 존재하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인 아들을 삼키고자 기다린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인 헤롯의 야만적인 살육 행위는 참된 왕으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키려는 사단의 도모였습니다(마 2:16 이하). 이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향해 도전했고 또한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후에도 사단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생애동안 예수님을 향해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시키려고 갖은 노력들을 다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단의 최고 권세는 죽음이라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다시 살리셔서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이렇게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삼키고자 했던 용의 계획은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좌절되고 맙니다. 사단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사단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6절 말씀입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아이를 낳은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지내게 됩니다. 왜 광야로 도망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사단의 괴롭힘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광야에서 계속 괴롭힘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광야로 여자를 이끄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듯이 말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셔서 마귀의 시험을 받게 하시듯이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를 여인으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주님의 몸된 교회는 큰 붉은 용에 의해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천 이백 육십 일이라는 기간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마흔 두 달과 같은 기간으로 한정된 짧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일천 이백 육십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이 기간 동안 마귀에게 노출되어 있지만 교회의 본래적 임무대로 복음을 드러내는 때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낳는 아이를 삼키려고 하는 마귀의 세력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한 도전 세력으로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한 마귀의 도전 세력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으로써의 싸움입니다. 개인적인 것을 전혀 배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것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몸으로써의 관계 안에서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싸움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통하여 사단의 모든 세력들로부터 자신의 몸된 교회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세로 광야에 있는 주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주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세워나가실 것입니다. 주성교회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나가시는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까? 주님의 싸움이기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처럼 우리의 나태함을 합리화하지는 맙시다. 주님의 싸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몸으로써 그 일하심에 순종되고 있는가를 날마다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4.7).
요한계시록 44강
하늘의 전쟁
요한계시록 12:7-12
우리가 신앙 생활 한다는 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전쟁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입니다. 직장에서 주어질 명예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자기 영역을 얼마나 많이 넓히느냐에 대한 전쟁이 아닙니다.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싸움입니다. 구원에 대한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누가 합니까?
주님께서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6-29).
예수님이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적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적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사람이 귀신을 제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세력을 모으고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현혹하기 위하여 귀신의 힘을 빌려서 전시용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은 이미 악의 세력, 즉 사단을 결박하였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이적은 강한 자를 결박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적을 통해 이미 사단을 결박한 권세를 가지고 계셨음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지고 책상에서 연구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성경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 영적인 전쟁이라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친히 싸우시고 이미 승리하신 싸움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무조건 단정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 모습 속에서 비쳐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신앙 생활 하는 것을 영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 싸움을 기도하느냐 안하느냐? 아니면 전도를 하느냐 못하느냐? 또는 주일 성수를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외형적인 의식에 대한 싸움으로 국한시켜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기도하면 마귀가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송하는 것을 마귀가 가장 싫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고 있고 찬송하며 전도하고 있으며, 또 예배하고 있으면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식을 이루어냄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의식을 행함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였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12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하여 고린도 교회가 성찬 의식을 가볍게 생각하고 주님의 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모습에 대하여 지적하면서 주님의 교회다운 모습을 드러낼 것을 말씀하는 문맥입니다(고전 10-11장). 즉 종교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늘 자신의 죄인됨을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영적인 싸움을 주님께서 친히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배후가 어떤 세력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성도가 당하는 핍박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7-8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 사도가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한 환상을 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말씀에서 용이 여자가 낳는 아이를 삼키려고 하였다가 실패한 본문과 연결해서 볼 때에 오늘 본문에서는 마치 분노한 용이 하늘에까지 추격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7절부터 일어나는 사건이 1-6절의 사건에 뒤이어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속단입니다. 7-16절에 나오는 사건들은 앞에서 보여준 사건을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때에 시간의 개념을 집어넣어서 생각하면 도무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12장의 말씀도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1-6절의 말씀에 대한 배경을 7-12절 말씀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상황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한 편이 되고 용과 그의 사자들이 다른 편이 되어서 싸웁니다. ‘미가엘’이라는 천사에 대해서 구약 성경에서는 다니엘서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의 수호 천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단 12:1 참고). 신약 성경에는 유다서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서 1:9에 보면 미가엘을 천사장으로 표현하고 있고 모세의 시체를 두고 마귀와 다투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용과 그의 사자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군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편에서 사단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 사도가 여기서 왜 하늘에서 벌어진 전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요한을 통해 하늘의 전쟁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까? 악의 세력들과 싸우는 전쟁은 단지 이 땅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늘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것은 곧 땅의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의 싸움의 근원이 하늘에서 벌어진 것이며 그 하늘에서 벌어진 일로 인하여 악이 단지 이 세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은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여 땅으로 내어쫓기게 됩니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9절). 용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기어 땅을 장악하고 다스리고자 합니다. 용의 정체를 성경은 옛 뱀, 곧 마귀라고 하기도 하고 사단이라고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뱀’이란 표현은 어떤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에서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였던 뱀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한 이유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신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독립된 나라를 세우고 거기서 신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하늘에서 패배한 전쟁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인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벌어진 전쟁은 용이 하나님과 그의 권세에 대반역을 도모하여 벌어진 전쟁입니다. 본문에 묘사되어 있는 전쟁은 어떤 특정한 전쟁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중요한 점은 그 용과 그의 천사들이 땅으로 내어쫓기는 것으로써 그 절정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그들의 악한 영향이 이전에는 땅에서 발휘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의 악한 영향은 에덴 동산 이후 계속해서 발휘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글자 그대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곧 성육신 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용이 이 땅을 더럽히기 위하여 행한 일들은 옛 뱀으로 그의 정체가 밝혀진 바, 그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한 것과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자로 알려진 바 온 천하를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그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들 가운데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용과 그의 졸개들은 이제 대패하여 쫓겨남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길의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이 그들의 결말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 41). 또 요한계시록 20:10에도 보면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오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미가엘이라는 천사장이 용을 대적하여 잘 싸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10절에서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세가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도들의 찬양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1절).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용을 이겼다고 합니다. 사단의 모든 권세를 박살내고 그를 패배하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때문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미가엘이 이겼기 때문에 주님의 백성들에게 승리가 온 것이 아닙니다. 미가엘이 잘 싸웠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전히 승리하셨기 때문에 미가엘이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 때문에 마귀는 날마다 패배하며 하나님께 도전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환상을 통해 모든 승부가 끝났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의 싸움이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그의 사역을 통해서 결정적인 승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하늘의 싸움이 이미 끝났고 땅으로 쫓겨나 있는 사단의 궁극적인 추방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 범죄하여 하나님께 도전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뱀을 저주하시며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마귀와 한 편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마지막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낳는 아이를 삼키려고 하였던 용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구속함을 입은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피에 의해 구속함을 입게 되었다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본문에서 ‘여러 형제’라는 표현은 성도의 일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 즉 주님의 몸된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이미 주님의 몸이 되었기에 주님께서 이루신 일에 대해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상급을 위해서 주일에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주님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확인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봉사를 통해 서로 주님의 몸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자기를 희생하고 섬기는 것을 통해 주님께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입니다. 여기에 다른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의해,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주의 영에 사로잡혀서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도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유는 이것 단 한가지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공로로 마귀의 권세를 물리쳤다고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노력으로 생명을 취하였다고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지식과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잘 사용하였기에 구원을 이루었다고 떠벌리는 자가 아닙니다. 여기 여러 형제들이 찬양하는 것과 같이 오직 어린 양의 피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이라고 찬양하는 자들이 성도요 교회이며 이것이 곧 천국의 모습입니다.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기꺼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영적인 세계를 믿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하고 있고 전도한다고 해서 영적인 싸움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영적인 싸움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싸움입니다. 복음은 날마다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단은 귀신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날마다 도전하도록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사단의 현실적인 활동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고 이런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마음 푹 놓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4.14).
요한계시록 45강
용의 핍박
요한계시록 12:13-17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주관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고난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아니 고난이라는 것이 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에덴 동산에는 고난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누리고 즐기며 다스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됨으로 스스로 죄 아래 거하게 되었습니다. 선악과 자체가 죄의 효험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할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종으로서 죄 아래 거하게 되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인간의 형편입니다. 죽음이 오게 된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증거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으로 죽음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고난과 어려움, 결핍, 질병, 가난이라는 여러 가지 증상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또 영적으로는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난이라는 죄의 증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이 성도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0 말씀을 보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은 우리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고난을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선을 행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선이란 무엇입니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착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에 불과합니다. 도덕적인 면에서 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과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곧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거하게 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죄만 행하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선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이란 오직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안에서만 선을 선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만 선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여지는 하나님의 일이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선을 생각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기 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것이 곧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애매히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급기야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주님 안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당연히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도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고난의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본문 13절에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여자가 낳은 아들을 없애는데 실패한 용은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여자를 멸하기 위해 아들을 낳은 여자를 핍박하게 됩니다. 앞의 본문을 살펴 볼 때에 본문의 여자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자가 용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교회가 용의 공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며 그 언약 백성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언약의 성취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얻을 자리를 잃고 떨어진 용의 최후 발악이 여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러나고 있는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용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합니다. 결국 용의 공격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왕권을 확립하고 온전히 드러내시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하는 언약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0-12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또 요한복음에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 15:18-20). 세상은 우리를 미워해서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여 거부하기 때문에 성도를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핍박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15절에 보면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시험과 환난, 핍박을 넘치는 홍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편 18:4에 보면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또 시편 69:1-2에도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라고 시편 기록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로 성도들을 향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그러한 모든 공격들이 제대로 시행될 리가 없습니다. 아니 시행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교회를 넘어뜨리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14절). 여자에게 독수리의 두 날개가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구약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9:4에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광야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들려주는 모세의 회고에도 보면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12).
독수리의 두 날개가 여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표현한 말입니다. 바로를 통해 언약의 백성들을 삼키려는 용의 추격에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용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광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본문에서 다시 “자기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위해 예비하신 곳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찾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예비하신 곳입니다.
여자, 즉 교회의 처소는 광야입니다. 성도들이 거하는 곳은 광야입니다. 그곳은 스스로 찾아서 간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이르게 된 곳입니다. 이런 점에서 광야란 전혀 의지할 것이라고는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먹고살기 위하여 무엇을 파종하고 추수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런 현장에 여자를 두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광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뜻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8:2-6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것이 광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자신의 교회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하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땅에는 소망이 없고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은혜에 의해서만 소망이 있음을 보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주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도들을 광야에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용이 아무리 여자의 남은 자손,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을 괴롭히고 핍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정된 기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던 때부터 다시 오시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곧 종말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용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4:2-3에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지금이 종말의 때이기 때문에 현재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후에 교회를 핍박할 어떤 세력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세상에 있습니다. 흉측한 모습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마귀의 인상을 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인 것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주 거룩하고 완벽한 종교의식을 갖춘 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완벽한 모습,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아주 고차원적인 듯한 모습으로,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종교적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가 어떤 교회를 보면서 주님의 몸된 진짜 교회인가 가짜 교회인가 구분하여야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의 교회의 모습과 일치하는가를 늘 점검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펼쳐 놓고 우리 교회가 주님의 몸된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늘 확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3:1-5에 이런 말씀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볼 수 있었던 말씀의 능력, 복음의 복음 됨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요한일서 5:4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란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믿음으로 또한 우리가 세상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5-6 말씀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요한계시록 7:14에서도 성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7절에서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말씀합니다. 용은 오늘도 성도들을 결투의 장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귀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해 늘 도전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용의 핍박 가운데서 승리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환난에서 승리한 것이 이 세상에 드러난 교회의 본 모습입니다. 주성교회는 주님에 대한 증거를 가진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4.21).
요한계시록 46강
바다에서 나온 짐승
요한계시록 13:1-10
죄인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생각할 때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삶에 관한 모든 것들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아니 자기 자신 외에는 다 적으로 간주합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일이나 물건이든지 자아의 발전과 융성을 위한 일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걸림돌이나 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제거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의 한 평생 삶입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매스컴을 통해 여러 사건들을 접하고 거기에 대해 동정도 하고 또 얼마의 자선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직접적인 자신의 일로 여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그 일 너머에 어떤 배경이 있는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을 수시로 던지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답변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다면 그렇다면 오늘날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일상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곧잘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또 고난이나 어려움들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기 위해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여깁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 뒤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우리가 빠지는 함정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적’이라는 함정입니다. 교인들이 범하는 실수나 함정이 인간 사고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이 등장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일로 단정지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24:5에서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는데 이적이라는 것을 사용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것 외에 그 배경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너머에 본질적인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일어나는 일은 그 일의 배후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 땅의 일만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일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의 배후에서 일어난 일에 더 관심을 가진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일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의 배후가 어떠냐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의 자세는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남자아이를 삼키지 못한 원한을 여자의 남은 자손이요 예수의 증거를 가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자들을 향해 퍼붓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도 바다에서 짐승이 출현하는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다는 세상의 열국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강한 나라가 나타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서에 출현한 짐승은 네 짐승인데, 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곰 같고, 셋째 짐승은 표범 같고, 넷째 짐승은 강하고 무서운데 열 뿔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이 짐승은 세상 권력자들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짐승은 다니엘의 네 짐승을 모두 합쳐 놓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즉 아주 강하고 힘있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세상의 권력이나 권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의 힘을 지닌 어떤 부류로 한정지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짐승을 국가라는 것에 한정시켜서 좁은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국가의 어떤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세상의 국가 권력과 아무 관계없이 살면 우리는 바르게 사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정치적인 어떤 직책을 가지지 않은 것이 세상의 힘을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 산다는 것은 누구나 다 짐승의 힘을 숭배하고 살고 있습니다. 예외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람하다는 말은 모독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모독합니까? 6절에 보니까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훼방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뿔에 면류관이 있다고 하였으니 왕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기 때문에 용에게서 권세를 받아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기만하고 미혹하여 왕 됨을 드러내며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바로 짐승의 본래 모습입니다.
4절에 보면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강하고 힘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짐승을 경배하는 이것이 바로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는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이 왜 짐승을 경배합니까? 그것은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세가 바로 능력이고 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용으로부터 권세 받은 짐승을 경배한다는 것은, 결국 세상이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힘을 원하고 능력을 원합니다. 능력이 있고 힘있는 존재로 산다는 것, 즉 강자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의 배후 세력이 누구입니까? 마귀요 곧 사단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배후에 사단이 있음을 전제하고 신앙을 생각한다면 신앙 생활하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한가하게 예배당이나 출입하고, 시간이 나면 성경 읽고, 돈에 여유가 있으면 헌금하고, 필요한 일이 생기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취미 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가 선용이요, 기독교라는 문화를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굳이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종교 생활입니다. 이러한 종교 생활, 취미 생활에 대해서 마귀는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수하에 있는 상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용이 짐승을 통해서 미혹하는 대상은 여자의 남은 자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진 자입니다. 여자가 낳는 남자아이를 삼키려고 했던 계획을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 남자아이,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향해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용은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짐승에게 주어서 자기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 하나님께 드려지는 경배를 철저히 차단하고 가로채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 3,4절에 보면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용은 짐승에게 자기 권세와 능력을 주어서 짐승을 섬기고 결국에는 용을 섬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적이라는 것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짐승은 머리 하나가 상해서 죽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시 소생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짐승에게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찬양합니다.
여기서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였다가 상처가 나은 것이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표현되어진 것은 분명히 창세기 3:15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사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의 머리에 상처가 나서 나았다는 것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았다는 것은 신비한 힘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는 어떤 힘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적을 동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굴복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용이 의도적인 모방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모방하여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다시 나은 것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내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과 용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듣고는 미쳤다고 조롱하기도 하고 거짓말이라고 몰아부쳤던 세상이 짐승이 드러내고 있는 속임수 같은 이적 앞에서는 환호하고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적이 베풀어졌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일로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적에 빠져서 그것만 추구한다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입니다. 실로 진실된 성도라면 어떤 이적이 베풀어진다고 할지라도 최고의 이적은 십자가이기에 십자가에 굴복된 자로 살아가는 심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적보다도 더 큰 이적은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굴복된 자는 세상의 어떤 이적이 베풀어진다고 해도 그것에 미혹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적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적을 통해서 일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이적이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계시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기를 원하는 측면에서 이적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의 질병을 고쳐서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의해 이적이 베풀어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악된 우리의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은 죄악된 우리의 욕심에 편승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세상을 이기고자 합니다. 7절에 보면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10절에서도 보면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요 믿음이 여기에 있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기지 못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주님의 승리 안에 부름 받게 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예배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마귀와 싸워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보다 내가 더 능력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짐승의 사고방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 생활을 가지고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질 수밖에 없고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운명입니다. 싸워 이기는 것이 성도의 믿음과 인내라고 말씀하지 않고 죽이는 자에 의해 죽임 당하는 것을 가지고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인내는 어디에 있습니다. 내가 끝까지 기도하고 찬송하여 버텨서 세상을 이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출애굽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난 후에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였던 찬송을 들어봅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이렇게 보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찬송했던 것과 세상이 짐승과 용을 찬송하는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께 돌렸던 그 찬양을 흉내내어 세상은 짐승을 경배하며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졌던 구원의 찬송을 짐승을 향해 그리고 용을 향해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한다고 다 같은 주님을 섬긴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찬송을 부르면 마귀가 무서워서 떠나갈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의지로 짐승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책에 기록되었기에 비록 죽임을 당할지라도 주님의 힘으로 승리를 거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시 74:12-13). 이러한 고백은 스스로 세상을 이긴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믿음으로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나에게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김영대목사/주성교회/ 2002.4.28).
요한계시록 47강
땅에서 나온 짐승
요한계시록 13:11-15
한 때 저는 공포 영화에 미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공포 영화라고 해서 나온 것은 다 섭렵을 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남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 때문에 차츰 공포 영화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공포 영화의 내용이 대부분은 귀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공포 영화를 많이 보면서 느낀 것은 귀신이나 마귀에 대한 극적인 한 면을 부각시켜 놓고 그것을 통해 영화의 재미를 위해 줄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니 이는 마귀의 대단한 위장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이 세상은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이고 마귀가 왕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차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모든 것은 다 죄악된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것이 다 죄악된 것이라는 의미는 모든 것이 다 마귀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마귀는 영화를 통해 특이한 귀신, 어떤 것에 한정된 마귀가 따로 있는 것처럼 사람들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귀가 자신을 감추는 위장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귀를 드라큐라와 같은 존재 또는 구미호와 같은 존재로만 규정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만 본다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전쟁은 용이 내어 쫓김으로 결판났습니다. 그 결과 분노한 용은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합니다.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던 계획조차 실패로 돌아가자 그 여자의 남은 자손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다고 하였습니다(12:17). 땅으로 내어쫓긴 사단의 최후 결전을 돕기 위해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이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생긴 모습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일곱 머리, 열 뿔을 가진 괴물처럼 생기지 않고, 두 뿔을 가진 새끼 양과 같습니다. 흔히들 무엇이든지 새끼는 다 귀엽게 보인다고 합니다. 동물들의 새끼를 귀엽게 보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 새끼 양이라고 하니 순진하게 보입니다.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아주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의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속아서는 안됩니다. 겉모습은 달라도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은 한 통속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았지만 신비한 힘으로 상처가 나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을 흉내내고 있다고 하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것을 흉내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새끼 양이라고 한 것은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모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임 당한 어린양과 비슷한 구원의 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실체입니다. 그는 거짓된 구원의 메시지를 가진 거짓 구원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로 행세하는 거짓 선지자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거짓 선지자 자체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자신을 구세주로 드러내는 모든 자들이나 그 행위가 바로 용의 수하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이 본 환상은 바다에서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본 환상이었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또 다른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종류가 같은 또 하나의 짐승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다에서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다른 짐승이 올라온다는 것은 이 세상이 모두 용의 지배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짐승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는 짓을 보면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한 통속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긴 것과는 달리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용처럼 말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생긴 것은 어린 양 같지만 그의 말이 그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용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용의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용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용을 증거하고 용을 경배하도록 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는 마귀의 사고 방식을 유포하며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용이 짐승을 통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항상 같은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의 모습이 항상 일곱 머리, 열 뿔을 가진 존재, 즉 세상에서 힘과 권세를 지닌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요한이 본 두 번째 짐승은 표범이나 곰, 사자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뿔을 가진 어린양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용처럼 말하는 데서 그 본색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를 경계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가 용에게 속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짐승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1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모든 권세 앞에 굴복하고 경배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권력과 권세, 힘을 찬양하고 힘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땅에서 나온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증거하는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 대한 증거, 용에 대한 증거들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짐승이 바로 땅에서 나온 짐승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얼마동안 한다고 하였습니까? 마흔 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나온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용을 증거하는 기간이 마흔 두 달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행하는 두 증인과 대비되고 있습니다(11:3). 두 증인은 하나님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자 할 때에 방해하는 존재가 등장하였는데 그가 바로 땅에서 나온 짐승입니다.
땅에서 나온 짐승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주님에 대한 증거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용을 증거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의 증거를 단순히 방해하거나 성도가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땅에서 나온 짐승은 어린양의 모습으로 거짓을 증거한다는 사실입니다. 막무가내로 마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말하며, 복음, 성경을 가지고 증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용을 증거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해서 주님의 증인이요 성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참된 십자가의 정신으로 복음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용의 정신으로 복음을 이야기하는가를 분명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짐승이 어떤 것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까?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13-14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이적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 구약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인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된 사건(왕상 18:38)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불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는 짐승의 능력이 실제로 이렇게 나타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마귀도 얼마든지 그러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의 하수인인 짐승을 통해 어떤 이적을 베푸는가 혹은 얼마나 놀라운 이적을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귀가 이적을 행하는 이유는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게 하여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고 굴복시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궁극적으로 우상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이런 대목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바울 사도 역시 이런 점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0에 보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13장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의 무리와 그 배후 실체를 낱낱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용, 즉 마귀와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는 철저히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고리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나온 짐승은 그 자신들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임무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용을 섬기고 경배하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첫 번째 짐승이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라면 둘째 짐승은 증인들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흉내내는 거짓 선지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비유된 두 증인의 신실한 사역을 흉내내어 두 뿔을 가진 새끼 양 같은 자기 선지자를 등장시킵니다. 두 뿔을 가진 어린 양으로 변장을 하였지만 그가 입을 열면 정체가 폭로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짐승의 하는 말은 겉모습과 전혀 다른 용의 생각, 용의 본질, 용의 성격을 다 드러내 줍니다. 양과 같이 꾸미고 나타나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바울 사도도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사단이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난다면 그 일꾼들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본질적으로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그래서 요한계시록 19:20에서는 이 짐승을 “거짓 선지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진 자는 진리를 선포하고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을 증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증거합니다. 자기 삶의 영역을 넓히고 자아를 발전시키는 일을 위해 예수를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일을 위해 예수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신앙적 행위들도 따지고 보면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기도에 매여 살고, 전도, 십일조, 주일성수 이런 것들에 매여서 그것을 빠짐없이 행하면 신앙 생활을 제대로 잘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고차원적인 술수입니다. 무작정 기도하고 예배하며 종교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귀의 계략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지향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목표도 예수 그리스도요 삶의 방법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에 매여 있고 복음에 사로잡혀 있기에 오직 진리를 추구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며 주님의 말씀을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결국 땅에서 나온 짐승이 미혹하는 대상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마귀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까지도 미혹하려고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된 자들이 마귀의 손에 넘어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14절에서도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땅에 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도는 땅에 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늘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언약의 피 때문에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자들이 성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결코 세상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땅에 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으로써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마귀에게 내놓지 않기 위하여 잠시 죽음에 내어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위해 목숨 걸 수 있습니까? 복이 이 땅에서 재산의 풍요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목숨을 내놓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죽음에 던져진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삶의 전부이기에 이 땅의 것을 다 버릴 수 있습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5.5).
요한계시록 48강
육백육십육
요한계시록 13:16-18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것이 죽음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른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순간의 죽음이 닥쳐온다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순간적인 죽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되 인간들의 연대감을 해체시키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들과 같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소위 말하는 ‘왕따’입니다. 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을 죽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이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세상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살려고 하는 본능으로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모든 행위는 자신이 살아남고자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동체 혹은 연대감이 무너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방호벽을 쌓는 것입니다. 혈연으로, 학연으로, 지연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두터운 연대감을 가질 때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것들을 이용하여 교회라는 단체를 든든히 세워나가고자 합니다. 조직을 강화함으로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공동체가 타격을 입지 않도록 조치를 미리미리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직이 문제가 아니고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연대감을 가지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런 것들을 무너뜨리고 조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우리의 죄를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왕노릇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성경 해석자들이 본문에 기록된 666을 가지고 기발한 해석들을 시도해 왔습니다. 그래서 666에 대한 해석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름의 철자를 풀어서 666으로 맞추어 시대적인 어떤 인물이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에 와서는 666을 컴퓨터 수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요한 사도가 환상을 보고 본 서신을 기록했던 당시에나 오늘날에나 동일한 성경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볼 때에 그 시대에나 혹은 오늘날에나 단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성경 해석들은 모조리 다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어쫓긴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더불어 싸우는 환상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싸우는 용의 싸움은 대리전이라는 방식임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용을 대신해서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특히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증인의 성격을 띠는 자들입니다. 어린 양으로 다가와서 성도들로 하여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섬기도록 미혹합니다. 미혹하기 위하여 행한 이적과 만든 우상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짐승의 우상에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게 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면서 성도들을 그냥 둔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16-17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나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누구를 흉내낸다고 하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고 마치 어린 양처럼 자신을 드러낸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다시 한번 짐승을 통해 하나님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3을 보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용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흉내내서 자기도 인을 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의 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인을 치는 것이 외형적이며 가견적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도 외형적이거나 가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이들은 역사의 한 특정 기간에 받게 될 외형적이고 가견적인 표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와서 부각된 것이 666의 표를 컴퓨터 바코드로 보는 것입니다. 컴퓨터 처리를 위하여 현재 모든 상품들에 붙여지고 있는 바코드가 레이저 문신으로 사람에게 붙여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마나 손에 새겨질 바코드 문신이 짐승의 표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용카드나 컴퓨터까지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특히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다고 하는 대형 컴퓨터를 짐승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짐승의 표를 외형적이고 가견적인 표시로 보는 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이마에 칠 인은 외형적이고 가견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짐승의 수를 헤아려 보라고 하였지 그 의미를 풀어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에 대응하는 짐승의 표를 외형적이고 가견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짐승은 어떤 특정한 기간에만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이 활동하는 기간은 마흔 두 달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흔 두 달이라는 기간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컴퓨터가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고 또 이마와 손에 바코드를 새겨서 상용화된다고 하여도 아직은 이런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마흔 두 달 동안 짐승이 활동한다는 것은 성경 본문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짐승의 활동이 마흔 두 달이라고 하였는데 컴퓨터의 등장과 쓰임은 현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컴퓨터를 짐승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을 침으로 자기 백성임을 보증한다는 뜻과 같이 용이 짐승을 통해 자기 수하에 있는 백성임을 표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짐승을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짐승에게 속하여 짐승을 섬기고 짐승이 만든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짐승을 섬기고, 또 용이요 마귀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즉 마귀가 왕노릇하고 있는 상태를 짐승의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18절). 여기에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의 수를 육백육십육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6일 동안 지으셨습니다. 7일째는 6일 동안 지으신 것을 보시며 안식하셨습니다. 창조하시느라고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시고 즐기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이렇게 하나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7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교회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 창조의 7일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6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부정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드러내는 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 6을 세 개 합쳐놓았습니다. 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짐승의 표라고 하고 또한 사람의 수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 짐승의 수는 곧 사람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육백육십육이란 용의 정신이나 짐승의 사고 방식에 의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표가 이마나 오른손에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마는 사람의 정신이나 사고방식, 가치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오른손은 행위나 삶의 모든 행동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는 정신으로 사는 모든 삶의 형태가 바로 마귀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이나 그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입니다.
짐승의 표가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빈궁한 자, 자유자나 종들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짐승의 표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하였고(17절), 18절에서도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이 십사만사천이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육백육십육입니다. 이 수는 당연히 실제적인 수가 아닙니다. 상징적인 수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아니면 마귀요 짐승의 종이라는 표를 받는 것입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성화가 아직 조금 덜 되었다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아직 육의 사람이라는 식의 표현은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둘로 구분될 뿐입니다.
육백육십육을 컴퓨터 바코드로 말하는 자들은 환난 때에 666 표를 받으면 안된다고 교인들에게 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니 다른 말로 하자면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넣어주는 나라이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고 이미 선언하였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린 양을 알고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지혜 있는 자들이고 총명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이미 짐승의 표를 받은 자입니다. 소속이 다 밝혀져 있습니다. 사는 것을 보면 누가 주인인지 누구를 위해 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주어진 표시를 감출 수 없는 것처럼 누구에게 속하여 살아가는지 그 본질을 숨길 수 없습니다. 다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는 서로 같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그 마음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며 살아갑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를 받은 자는 그 생각과 생활이 십자가를 거스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합니다. 이런 적대적인 사고방식이나 행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을 맞고 십자가를 따르는 자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17절에서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라는 말씀은 그 당시 성도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용의 정신, 짐승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이렇게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한 통속이 되지 않으면 이익 분배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당연히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수단을 총동원해서라도 더욱 연대감을 형성하자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삶의 방식, 세상이 원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원리와 맞지 않으면 당연히 왕따를 시키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의 죽음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과도 어울릴 수 없고, 세상의 어떤 일에도 충족될 수 없는 존재가 하나님의 인을 맞고 십자가를 따르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애써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듣지만 날마다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세상에 동화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세상과 적당히 연합하면서 세상에 묻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결코 세상에 동화될 수 없고 세상에 묻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은 이것을 날마다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복음으로 인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따돌림당하고 급기야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말씀 안에서 늘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임을 날마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이질감을 느끼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이마의 바코드와 문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겨진 언약의 말씀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의 영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3-36).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당장 죽을 것 같고 소외당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정신이 우리를 인 맞은 자의 삶으로 이끌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주님과 더불어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5.19).
요한계시록 49강
새 노래를 부를 자
요한계시록 14:1-5
최근에 정치적인 야욕을 가진 한 인물에 의해 대통령 아들의 비리까지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야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 폭로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녹음하여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연루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만 이 일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조심하며 말을 자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욕심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의 비밀로 여기고 있는 것들이 발각되고 들통이 나면 부끄러워합니다. 그것이 사회적인 비리와 연관되었을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권에 일어난 상황을 보면 별로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검찰에 출두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아주 떳떳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검찰에서 밝혀질 일도 들어갈 때에는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가면서 오해를 받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조금의 죄책감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 교인들도 이런 모습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보기도 전에 자신의 소원(?)만 가지고 교회에 나오고 또한 하나님께 구합니다. 도리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구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기에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를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믿음 없는 모습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야망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신앙이라는 것으로 포장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셔야 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도의 신앙이란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소원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나를 왜 부르셨는가 하는 입장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펼치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교회에 모이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을 설교자는 이야기해 주어야 하고 또한 모든 교인들은 그것을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을 먼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나를 혹은 우리를 왜 부르셨는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13장에서 말씀한 짐승의 표와 대조해서 성도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장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그를 증거하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의해서 성도들이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을 요한 사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14장 앞부분에서는 어린양과 144000명이 시온산에 선 것을 봅니다. 앞에서 성도들이 고난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여기 1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입장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제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받은 거짓 어린양과 구별되는 참되고 순전한 어린양을 봅니다. 그 어린양은 이전에 죽임을 당하였다가 다시 살아나 강한 자로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주셔서 모든 범법한 자들을 정죄의 자리에 서게 한 시내산과는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화목의 산인 시온산에 서 계십니다. 선지자들이 선포한 메시지에 의하면 시온이란 의와 평화의 메시야 왕국과 동의어로 쓰여지는 용어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 2:6에 기록된 “내가 내 왕을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노라”는 내용입니다. 미가 4:7에 기록된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는 내용이나 이사야 59:20에 기록된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라는 말씀들이 다 이런 의미들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히브리서 기록자가 시온산을 언급한 이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의 나라인 하나님의 총회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시온은 본래 긴 출애굽 과정의 종국에 이스라엘이 결정적인 승리를 얻은 장소입니다. 가장 공격하기 어려운 요새였는데 다윗의 군대가 그것을 빼앗은 것입니다(삼하 5:7-10, 대상 11:4-9). 이후부터 시온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승리한 나라로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도성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시 2:6, 50:2, 51:18 등). 그러므로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다는 것은 그분만이 언약 성취자로서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한 144000명이 어린양과 함께 섰다는 것은 144000명이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144000명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졌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는 짐승과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반면 144000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졌으므로 오직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희생에 동참되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144000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수입니다. 666이라는 짐승의 수, 사람의 수와 대조해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얻은 자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얻은 자가 144000인데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구체적으로 4-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는 자”이고 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이며,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보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양이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하나님의 희생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인도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현장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은 세상이 거부하고 세상이 싫어하는 주님께로 방향을 잡고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다고 한 말씀은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고 세상과 혼합된 모습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주님을 향해 존재하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144000, 즉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정절을 그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또한 이러한 자가 바로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란 ‘하나님의 장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 하나님의 장자에 대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배경을 조금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 4:22-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장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장자라고 표현하신 것은 애굽의 장자를 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은 장자 재앙입니다. 사람을 막론하고 짐승까지 처음 난 것은 모두 죽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애굽 사람이기 때문에 장자를 죽인다는 것은 아닙니다. 장자 재앙에는 이스라엘과 애굽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즉 죄인 된 자는 몽땅 장자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살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산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죄를 대속하였기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처음 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시며 희생하실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제사 제도라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이 계속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장자 재앙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고 애굽에서 건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힘도 아니고 모세가 능력이 있어서 나오게 된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에 의해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열매, 하나님의 장자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떻게 구분됩니까? 그것은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대속하심으로 살았음을 아는 것, 이것이 장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하고 어린양에게 속했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대속함을 입었기 때문에 산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를 의지하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거짓말이 있을 수 없고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에 의해서만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서로 욕심을 부리는 소리를 듣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소리를 듣는 자입니다. 하늘에서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2절)고 말씀합니다. 하늘의 소리는 보좌를 중심으로 해서 울려 퍼지는 음악입니다. 곧 새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 맞추어 네 생물, 이십 사 장로뿐만 아니라 십사만 사천이 노래를 합니다.
4절에서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4000명은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거짓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입에서도 당연히 새 노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입은 144000명 밖에는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 노래는 보좌를 중심으로 해서 울려 퍼지는 노래요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대속의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여자로 인하여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는 자들이며,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 새 노래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를 배우고 부르는 자는 오직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성가대만 특별히 부르는 찬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듬과 곡조에 잘 맞추어서 부르는 노래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새 노래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음정을 잘 맞추어서 찬송을 불러야만 된다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어린양의 피에 의해 구속함을 입었는가를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찬송을 얼마나 잘 부르느냐는 것이 아니라 새 노래를 부를 자격이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사만 사천명은 새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존재가 바로 십사만 사천명이고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지 말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주님의 피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노래를 부르라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선택, 부르심을 인정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새 노래를 부르며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절을 지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양이 인도하는 그곳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버림을 당하는 현장이라고 할지라도 어린양이 인도하시는 곳이기에 기꺼이 순종하며 묵묵히 따라가겠다는 결심이 있습니까? 그곳이 비록 죽음의 현장일지라도 말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5.26).
요한계시록 50강
영원한 복음
요한계시록 14:6-7
마태복음에 3:1에 보면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침없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곳에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7-12).
세례 요한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 나라가 온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오심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성취하는 것으로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종말을 말할 때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과 다시 오실 때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할 때의 상황이 긴박하고 회개해야 할 때라면 오늘날도 역시 동일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오신 것으로 회개해야 하는 종말로 인식하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더더욱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 세 천사가 연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등장하는 천사마다 종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처음 천사는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호소합니다. 그 다음 천사는 큰 성읍 바벨론의 최후 파멸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천사는 최후 심판의 양면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두 구절입니다. 그 두 구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6-7절).
요한 사도가 본 첫 번째 천사는 공중을 날아가고 있습니다. 천사가 공중에 있다는 것은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이 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7절에서는 “큰 음성”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는 것은 땅에 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 듣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가 날아가며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대단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긴박한 메시지임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보며 듣게 되는 이 긴박한 천사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본문에서 “영원한 복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밝혀주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또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이 그 모든 것들을 파멸시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만드신 분만이 파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친히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그것들을 파기하고 끝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차제에 우상을 섬기고 다른 것에 경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잘못 이해하여 환상과 현실을 착각하여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세가 임박하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서 인류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놀라운 은혜를 특별하게 베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장차 특정한 시공간에 천사가 나타나서 전 인류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소리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복음으로 이미 다 보이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이상 초현실적인 일이나 이적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믿도록 부르시는 일은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의 고통 중에 거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부자 나사로는 하늘에 고하기를 자기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서 이렇게 자기가 고통받고 있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아무리 살아서 다시 돌아가 그 부자의 형제에게 전한다고 할지라도 그 형제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한 것으로 표현된 성경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29-31).
더 이상의 어떤 여지는 없습니다.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는 것은 모세와 선지자가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기록하여 남겨놓은 성경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증거한다고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록된 성경 말씀이 66권으로 주어져 있는데 이 말씀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천사가 가서 전하며 이적으로 하나님의 증거들을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것에 얼마나 많이 현혹되는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보면 천국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의 간증을 한다는 현수막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세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라고 수없이 들이대고 있지만 모두가 다 성경 말씀과는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참된 뜻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아니 오히려 마귀가 자기를 따르도록 만드는 일에 미혹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설사 성경 말씀과 일치가 되는 이적이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기록된 말씀만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믿는 자라면 어떤 이적이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첫 번째 환상은 이 땅에 주어진 영원한 복음이 중대하고 긴급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요한 사도에게 기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복음의 메시지는 곧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복음이란 특별한 메시지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교회가 믿고 그것 때문에 조롱과 갖은 핍박을 당한 그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곧 언약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예나 지금이나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는 소식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이 갈릴리와 유대땅에 선포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기록된 말씀을 중대하고 긴급한 메시지로,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이런 점에서 교회는 심판하실 주님께서 가까이 서 계신 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주인이 멀리 타국에 갔다고 생각하고 허랑방탕하여 주인이 돌아 왔을 때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이 주인이 주신 것 그대로 한 달란트 내어놓은 자와 마찬가지로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우리가 주인이 주신 달란트 대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멀리 타국에 갔다 하더라도 주인이 가까이 함께 있는 것처럼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런 의식과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이런 의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살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오시는 것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앞에서 144000명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자로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먼저 어린양과 함께 144000명이 시온산에 섰고 또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먼저 기록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됩니까? 그것은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얻은 무리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밝혀줌으로써 천사에 의한 심판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결코 흔들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직 진리를 좇는 자로서 정절을 지키며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존재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경배하는 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무엇보다도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는 소식이며 그 임박한 심판이라는 소식 앞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로 더불어 정절을 지키는 삶입니까?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대로 따라가는 삶입니까?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로 살아가는 삶입니까?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삶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성수를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하는가도 아닙니다. 십일조를 얼마나 철저히 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거짓이 없고 흠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 부름을 받았기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모습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건대 복음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부른 부르심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으로 말미암아 은혜 아래 옮겨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 하나님의 심판을 다 받으셨기에 우리가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증거할 수 없고 나를 드러내기 위한 자랑을 할 수 없는 것이 성도의 입장입니다.
천사가 영원한 복음을 가졌는데 그 복음은 땅에 거하는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복음입니다. 여러 나라 족속 방언과 백성이라는 것은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할 대상이 넓게는 온 세상이고 좁게는 한 개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서 온 세상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라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복음에는 구원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백성이 아닌 자들, 즉 신앙으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온 세상에, 땅 위에 거하는 모든 자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종말이 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복음은 결코 이 세상이 영원한 곳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목표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도들도 먹어야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입어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거처할 집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적금을 넣고 아파트 분양에 참여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가 추구하는 유일한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을 빠져나가는 과정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가올 심판을 의식할 때에 비로소 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복음은 다가올 심판에 대한 소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오늘 지금 이 순간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말씀이 지금 우리를 세상과 갈라놓는다고 할지라도 억울해 하거나 섭섭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영원한 복음에 비추어 일순간 있는 세상의 것들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주어졌다면 그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활의 사소한 것까지라도 재점검하는 회개가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영원한 복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6.2).
요한계시록 51강
무너졌도다
요한계시록 14:8
이번 월드컵 경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즐기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축구에 미친 듯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축구 하나로 세계가 이렇게 열광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세계가 다 열광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나라들에 한정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세계의 강대국들이 여기에 다 포함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는 말들이 축구란 총 없는 전쟁이라고 합니다. 평화의 전쟁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실로 이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를 가지고 스포츠에 많은 것들을 투자하였던 것입니다. 나라들끼리 평화를 외치면서 핵무기 감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런 것들로 힘의 우위를 가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때에 그 결과는 엄청난 것으로 파급 효과를 드러냅니다.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힘있는 나라의 문화는 약소 국가들에게 있어서 추종하고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문화의 보급이란 곧 경제 발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월드컵은 단순히 축구 하나만으로 경기를 한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스포츠에 많은 투자를 하고 그것으로 많은 경제적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죄의 모습이 그대로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가라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단 한 절입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한 구절이라고 간단하게 보이지만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바벨론에 대한 멸망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이 환상을 보고 있는 그 때에도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벨론이라는 이름은 노아 홍수 이후에 인류가 바벨탑을 쌓았던 때에 나온 이름입니다.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죄목의 대표로 통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로 바벨론은 하나님 없는 권력을 상징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로마를 바벨론과 같은 나라로 여겼습니다. 베드로전서를 읽어보면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 5:13). “함께 택하심을 입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하였을 때에 그 교회는 로마에 있는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 속에서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벨론이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미 표현되어진 바와 같이 바벨론은 소돔과 같고 애굽과 같습니다. 11:8에 보면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소돔과 애굽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바벨론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돔, 애굽, 바벨론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을 못박은 예루살렘까지도 세상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홍수 뒤에 탑을 쌓아서 흩어짐을 면하고 인간들의 이름을 내고자 했던 인간 중심의 모든 도모를 꾀하던 곳입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졌지만 그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소돔이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하나님 없는 타락한 문명을 건설하였습니다. 성적 타락으로 대표된 소돔 문명은 하늘로부터 내린 유황과 불로 파멸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애굽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애굽은 바벨탑을 쌓던 바로 그 정신의 재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셨습니다. 애굽만이 심판 받아야 할 대상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바로 그러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굽을 세상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보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애굽을 심판하심으로 애굽과 같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바벨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바벨론을 애굽과 같은 존재로 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구약에서 출애굽이라는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사야 48:20-21을 보면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선파하여 들리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로 솟아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을 제2의 출애굽으로 선포한 것은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정신이나 바벨론의 정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딸 갈대아(바벨론)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하리라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사 47:5-7).
바벨론은 당시 주변국들에 비해서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바벨론을 일컬어서 “큰 성 바벨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을 ‘큰 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부유할 뿐만 아니라 힘있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에 등장하는 바벨론은 자기들의 힘을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힘이 영원한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고 있는 대로 바벨론은 강대국이라는 이유로 인하여 종말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벨론은 자신의 힘을 믿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힘이 강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삶을 사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이방인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은 세계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언약에 충실했기 때문에 이런 특권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이방인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중심으로 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벨론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언약에서 벗어난 것이 저주이기 때문에 이방인인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 속에 있음을 확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주님께서 요한에게 바벨론 멸망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이라는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심판 받을 수밖에 없기에 이미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자신이 친히 주신 언약에 있습니다. 그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시고 하나님의 본래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언약하신 대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십니다. 세상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합당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에 의해 십자가에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진리였습니다. 그분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은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자냐 아니면 아들을 믿고 섬기는 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앞세워서 하나님을 찾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의 문제만 큰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든 말든 내게 어려움이 주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이 고통을 당하든 말든 그것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나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연관시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문제, 우리들의 문제가 곧 하나님의 문제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들의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문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있어서 나의 문제란 늘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고 그것을 위해 항상 근심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농담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세상 모든 나라들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음행을 하도록 했고 그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이 세상에 제공한 것은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필요하지 않는 존재이기에 무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정신은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왕이요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바로 국가라는 것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월드컵이라는 장을 마련해 놓고 축구로 대결하지만 그것은 국가와 국가간의 힘의 대결입니다. 힘의 우위에 누가 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물질을 투자합니다. 많은 노력들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상대보다 강한 힘을 내세워서 상대방을 자신에게 굴복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 죄인들의 모습이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 받아야 할 짐승의 사고방식이며 용의 정신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모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이 큰 성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또한 그 힘을 자랑하듯이 오늘날 교회도 큰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또 힘있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거리고 삼습니다. 일단 교회가 개척교회로 시작되었다고 하면 무조건 교회가 성장해야 하고 몇 년 안에 몇 백명 이상 모이는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욕심입니다. 그것을 위해 어떤 교회가 급성장한 교회라고 소문이 나면 그 교회의 노하우를 배워서 너도나도 교회를 키우겠다고 벌떼와 같이 몰려듭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지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말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본이 안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무시합니다. 복음과는 상관없는 것을 행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에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기도에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헌금을 하는 일에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예배에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여기에 특별한 방법이 있고 그것을 잘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짐승의 사고 방식이고 용의 정신입니다. 힘이 있고 부유한 나라가 되면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벨론 나라의 생각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교회가 성장하고 힘이 있고 물질이 풍부해서 많은 선교를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라고 여기고 심판에서 제외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수, 부유함, 강한 힘, 물질의 풍부함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 즉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사로잡혀 있는 교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4:6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 길이고 예수님만 진리이며 예수님만 생명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방법입니다. 그분이 곧 목표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교인 수를 많게 하는 그런 진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다른 것을 추가시키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교회 성장이 생명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기에 그분이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월드컵 성공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월드컵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형편이 나아지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업이 성공하도록 주님께 아뢰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잘 살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시는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바벨론의 운명 그것이 곧 세상의 운명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7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믿는 자가 성도요 교회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것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으로 여기고 그분만 좇는 것을 행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모이는 것입니다. 이 시간도 이 확인이 되어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6.9).
요한계시록 52강
예수 믿음
요한계시록 14:9-12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쉽게 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 읽으며 봉사하는 일의 반복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즉 종교적인 문화에 젖어 살고 자녀들도 그런 문화 속에서 양육하면 기독교 가정이고 예수 믿는 가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편안하게 교회 다닐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종교적 문화 안에 있으면 자신은 성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있거나 성경공부를 하고 있으면 그것 자체를 신앙생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 읽고 공부하며, 찬송하며,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도하며 예배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예배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받으시고 우리가 찬송하며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것을 일체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롬 3:23). 죄인의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죄인은 그저 악을 쏟아낼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의지로 신앙생활 한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죄인이 하늘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땅의 세계로 오셔서 죄인들을 대속하고 모든 피조물을 회복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대속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찬송을 하며 예배를 드리며 전도를 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하게 만드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을 좇아가는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오래 참을 수 있는 능력과 물질로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신앙을 이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여서 주님께 드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종말론적 상태에 있는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본문 9-10절을 봅시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셋째 천사가 첫 번째 두 번째 천사의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선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세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진노의 포도주를 먹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의 잔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잔에는 아무 것도 섞은 것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진노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은 묽지 않은 포도주이기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완벽하고 강력한 진노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두 번째 천사의 표현을 빌리면 바벨론이 행하게 하는 음행에 동참하고 바벨론이 주는 잔을 받아 마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손이나 이마에 문신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삶의 정신이, 우리의 삶의 태도가 이미 짐승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 판가름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는 잔을 이미 받아서 마시고 있는지 아닌지 이미 결정된 것이지 앞으로 어느 날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성도답게 사는지 짐승을 추종하는 자답게 사는지 이미 결판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과 음행을 잘 받아 마시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주는 잔을 마시면 하나님이 주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5:15-16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역시 동일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시 75:8).
반면에 이사야는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 주 여호와, 그 백성을 신원하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곤고케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사 51:22-23). 성경은 자주 하나님의 심판을 진노의 잔을 받아 마시는 행위로, 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진노의 잔을 거두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있는 진노의 포도주와 대조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잔에 있는 자비의 포도주로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 116:12-13). 이는 은혜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우리가 이 은혜를 입고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5).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신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구원의 잔을 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입니까?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고통받는 곳입니다. 타오르는 유황불로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보여주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소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들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 본문에서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라”는 표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받은 상황과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현장에서 연기가 솟구치는 것을 아브라함이 보았습니다(창 19:28). 그 멸망에 대해서 유다는 신약의 기록에서 “영원한 불의 심판”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유 7절).
성경이 이렇게 장황하게 구약을 배경으로 바벨론의 멸망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역사적으로 미워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바벨론이라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통해 세상의 모습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벨론에 대하여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3:19-20 말씀을 보면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그 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 곳에 그 양 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에돔의 국가에 대해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사 34:9-10).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신 말씀들은 당대에 바벨론과 에돔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바벨론과 같은 세상이 반드시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이 고난과 죽임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라는 직책에 매여서 심판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기에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반드시 시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언약의 말씀대로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사람이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신 것이기에 온전한 안식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통해 안식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취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의 짐을 지고 있는 모든 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율법을 짐을 지고 괴로워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 때문에 쉼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쉼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이 선언은 먼 미래에 있는 영원한 안식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지금 예수님 안에서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는 쉼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만 있게 되는 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안식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짐승의 사고방식, 용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쉼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쉼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기 때문입니다. 7일째 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곤해서 쉬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을 즐거워하며 영광을 누리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곧 쉰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십자가로 회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즐거워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
결국 본문에서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받기 싫은 것을 짐승이 강제적으로 표를 주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짐승의 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마에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 원한 것입니다. 스스로 짐승과 우상에게 나와서 표를 받은 것입니다.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존재인데 세상에서 강한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다.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큰 성 바벨론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기다린 구세주는 힘있는 자였습니다. 큰 성 바벨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어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아들로 왔다고 스스로 자처한 사람의 조건은 힘있는 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배척을 받은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도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이런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전도하며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나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짐승과 같은 존재로 우리 자신을 우상으로 세우고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이 비록 찬송이고 기도이며 예배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그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인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절). 성도란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좇아가는 존재입니다.
요한계시록 13:10에서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의지로 짐승의 요구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짐승을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가 아닙니다. 말씀을 좇도록 주어진 인내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좇아가도록 부름 받아 세상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러한 믿음 안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6.16).
요한계시록 53강
주 안에서 죽는 복
요한계시록 14:13
전철 안에서나 역 주변에서 전도를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전도합니다. 그들의 열심을 문제 삼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예수를 통해 질병을 고치고 이 땅에서 물질의 축복을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항상 마지막이 ‘가까운 교회에 나가셔서 이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식의 말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까운 교회로 나가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교회 다니면 물질의 축복을 받으며 질병도 고치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그것이 곧 영생이고 천국인 것처럼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나가는 것을 통해 말씀을 배울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땅에서의 축복을 누림’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영생,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교회의 전도 방식은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도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지금 우리가 흔히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의 복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10)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렇게 살면 복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한 자들에게서 이런 복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 애통하는 상태, 온유한 상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 긍휼히 여기는 상태, 마음이 청결한 상태, 화평케 하는 상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상태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말씀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이런 복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렇게 살고 또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신약에서 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 뿐이지 구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구약에서는 복을 물질의 축복 또는 이 땅에서 잘 살게 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보면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행사가 형통하다’는 표현은 세상에서 잘 살게 되는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행위가 제대로 잘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어떤 것인가를 잘 이해하였기에 시편 기록자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 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시편 16:2에도 보면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3:8에서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라고 노래하였고, 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라고 노래하면서 구원이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며, 죄를 사함 받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알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결코 어긋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구약에서 말씀하는 바를 실제적인 삶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복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 사도에게 또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죽는 것이 복이 될 수 있습니까? 아마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면서 어려운 가운데 도무지 살 희망이 보이지 않아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빨리 죽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복이 될 수 없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주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그 말씀은 “하늘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누가 삶을 보장해 주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구도 인간의 삶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삶을 책임질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며 하나님께서 복을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라면 하늘의 이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유혹하는 달콤한 속삭임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야 합니다.
하늘에서 말씀하시기를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최초로 지음 받은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모든 인간들이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죽음이란 생명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인간들에게 몸의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두려움이 있고 죽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좋아하는 자는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가 아니라면 죽음을 복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예수 믿다가 죽으면 천국 가니까 복이라고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대해서조차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 다니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천국 가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단지 교회 다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 간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예수 믿고 죽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 안에서 살아 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온 삶이 있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 사도가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을 성령님이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답변하고 있습니까?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는 것이 성령님의 답변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 대하여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말씀한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살았을 때에 수고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수고하지도 않았다면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말은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수고하는 삶이었기에 삶을 마치고 죽는 것을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수고한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쉽게 생각해서 교회를 위한 봉사나 헌신, 목사를 잘 섬기는 일을 행한 것을 가지고 말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지고 성경이 수고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본문의 문맥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인내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성도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은 용의 부림을 받는 짐승에 의해 짐승의 표가 주어집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짐승의 사고방식과 용의 정신을 거부하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강한 권력과 권세를 가지고 등장한 짐승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경배하고 섬깁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짐승의 힘을 거부하고 세상의 원리와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원칙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짐승의 표를 거부한 삶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사는 삶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장차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짐승의 사고방식과 용의 정신으로 살지 않고 십자가의 정신과 하늘 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삶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힘을 믿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전적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인내이고 이것이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예수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본문에서 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고 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일에 힘쓰는 수고란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좇아 십자가를 드러내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고를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지난주에 우리가 앞의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도의 인내는 우리가 오래 참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안에 주어져서 말씀을 지키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수고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께서 이 일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고를 성령께서 저희 ‘수고’로 말씀하시고 ‘저희의 행한 일’로 인정해 주실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성도가 어떤 관계로 있어야 하는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더불어 연합하여 편하게 살자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도가 자연보호운동도 하고 세상을 변화시켜서 이 땅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미 이 땅을 심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노아와 같은 심정으로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세상에 심판을 증거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도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함을 증거하고 십자가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하여 살려 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 존재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삶이라면 그것은 주님 안에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삶이 아니라면 주님 안에서 죽는 죽음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는 상관이 없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복은 주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1:20-21에서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비록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이 배척받고 무시당하며 고난을 받으며 죽임을 당할지라도 예수 믿음을 놓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수고이고 그 수고를 한 자에게는 죽음을 통해 쉼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복은 바로 안식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쉼을 얻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는 쉼을 허락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죽음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회피하려고 합니다. 죽음은 세상과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단절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본능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고 희망적이지 못하고 발전적이지 못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끝을 언급하면서 삶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느냐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끝을 생각하고 산다는 것은 비관하는 자세가 아니라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무엇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복인가를 알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주어진 죽음의 복이 우리 인생을 온전히 주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6.23).
요한계시록 54강
곡식 추수
요한계시록 14:14-16
마태복음 13장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이 비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풀이를 하셨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7-43).
여기서 예수님은 세상 끝을 추수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하기 전까지는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갈라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함께 자라게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밭에는 여전히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은 예수님에 의해 이 세상에 심어지고, 악한 자의 아들들은 마귀에 의해 출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른 운명에 처해질 것입니다. 종들은 이 일로 인해 더 이상 근심하지 않습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혼합상태는 이제 주인의 명령에 의하여 지속됩니다. 이렇게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자이신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은 추수 때까지 좋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즉 천국의 아들들을 불러모으시는 사역을 행하신다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천국의 아들들을 모으시는 방식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온전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두 부류로 갈라지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십자가가 믿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혼합되어 있다는 상태를 알라는 것입니다. 누가 알곡이며 누가 가라지인가를 판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추수에서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미래에 추수가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추수가 계속하여 마지막 추수로 이어진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요한 사도가 본 환상은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손에 날을 예리하고 날카롭게 세운 낫을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구름은 성경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 구름으로 나타내셨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구름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출 34:5). 또 다니엘 7:13-14에 의하면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할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있었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모세와 엘리야가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빛난 구름으로 저희를 덮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난 구름으로 예수님을 덮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오늘 본문에서 흰 구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볼 수 있고 그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앉았다고 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머리에 금 면류관을 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왕으로서 날카롭고 예리한 낫을 가지고 익은 곡식을 거두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심판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날이 선 낫을 들고 있다면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15절). 어쩌면 우리는 이 말을 건방지게 어떻게 천사가 예수님을 향해 명령할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천사가 예수님께 명령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성경 번역에서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십시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천사가 선포하는 것을 통해 이제 거두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라는 강력한 선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실 심판을 그대로 행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추수를 누가 하라고 하였는가 하는 것은 초점이 주님께서 추수하시는 왕으로서 일하신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천사의 외침은 열국의 심판을 선언한 요엘 선지자의 선포를 기억나게 합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 3:13). 선지자들의 외침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대로 시행하실 것을 선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하실 것을 선포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선포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라고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천사가 주님께 낫을 휘둘러 거두라고 선포하게 된 것은 단순히 이제 땅의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 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성전으로부터 나와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양의 희생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는 것은 주님의 심판은 십자가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제거한 십자가라는 현장에서 하늘의 심판이 감행되는 것입니다.
천사의 외침에 응답하여 추수의 주인이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이 거두어졌습니다. 땅의 곡식이 거두어졌다는 것은 둘로 나누어져서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주님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성도이며 누가 십자가를 반대하는 자인가를 구분해 내는 이 일에 부름 받은 종이 아닙니다. 둘로 구분해 내시는 것은 주님께서 추수하는 자로 심판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에 보면 70인을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추수할 일꾼으로 70명을 세워서 보냈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가지고 구원받을 영혼이 많은데 실제로 선교사로 또 복음을 전하는 자로 헌신하는 자들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니다. 이 말씀은 전도할 사람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70명을 이스라엘로 세워서 세상 속에 던져 넣으시는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 복음을 주시고 그들을 세상 속에 던져 넣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으로 세상을 구분해 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가서 전도하고 일꾼으로서 사역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복음을 드러내는 존재로 던져졌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누가 나를 세상에 던지셨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에서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라는 말씀은 우리의 주인이 따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나서야만 되고 또 내가 나서서 설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친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시며 친히 뿌리셨던 씨, 즉 천국의 아들들을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원수의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친히 이루어 내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일꾼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일꾼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일하십니다. 십자가로 뿌리신 사역이 성령님으로 하여금 결실을 맺도록 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님의 일에 우리의 욕심을 가지고 개입하여 우리가 결실을 맺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친히 일꾼이 되어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우리의 욕심으로 설쳐대는 한 주님의 일은 주님이 원하신 대로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자신의 일을 결코 헛되어 결말을 맺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분이 금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친히 예리한 낫을 휘두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실 때에 선포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떠올려야 합니다. 천지 창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그대로 되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그대로 실행되지 않는 일은 하나님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낫을 휘두르셨기에 그 행하신 대로 곡식이 거두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는 철저히 자기 십자가의 원칙과 기준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치관으로 이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 똑똑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 억누르는 자와 눌림을 받는 자 등이 섞여 살아간다는 식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생각에 의한 구분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으로 나누고, 목사와 평신도로 구분하고, 십일조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로 분리해서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어만 기독교 용어들을 차용하였을 뿐이지 이러한 사고방식은 여전히 세상적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기준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기준은 항상 자기 십자가입니다. 어린양으로 희생하신 변함없는 기준으로 세상을 갈라놓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기 백성과 아닌 자를 구분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 미래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이러한 심판이 주님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오늘 내 기준으로 살다가 내일 주님 오시면 주님 기준에 맞추어서 살아야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히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우리 힘으로 구분해 내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땅에 휘두르신 예리한 낫에 의해 곡식이 거두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심판을 항상 공개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6.30).
요한계시록 55강
포도 수확
요한계시록 14:17-20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고백 속에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분이 다시 심판하러 오신다고 하는 신앙 고백을 우리가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냥 신앙 고백을 그렇게 처음부터 외웠으니까 습관적으로 외워서 고백한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가 하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자기 자신에게 냉정하게 물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아니 어떤 분을 믿는가? 많은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함께 동질감을 가지고자 합니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 기독교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이 다른 것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행사를 믿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교회 자체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기독교라는 문화를 즐기면서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말입니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용어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나 자신이 우상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고 기독교에 심취해 있고 성경적인 습관이 있다고 해서 같은 신앙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며,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라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일방적으로 베풀어진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음을 알고 믿는 자가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모여서 계속적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이야기하게 되는 자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하고 선택받지 못한 자들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모임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복음을 드러냄으로 이 땅의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에 의해 땅의 사람과 하늘의 사람을 갈라놓는 주님의 심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자가 종말을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심판의 두려움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심판을 늘 느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신앙 고백을 하면서 이 말씀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은 바로 이러한 것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7-18절 말씀을 보면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예리한 낫을 가진 자에게 외치기를 땅의 포도가 익었으니 그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합니다. 그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로 심판을 주관하고 있는 천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제단으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단은 죽임을 당한 자들이 어린양의 희생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리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 6:9-10). 또 8:3-4에는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것은 죽임을 당하여 제단 아래에서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 응답으로 심판이 감행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받은 성도, 그들이 바로 의인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기도가 능력 있는 것처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의인이 되었기에 감히 그 이름으로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감행되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19-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낫을 휘둘러 역시 단칼에 모든 포도를 다 수확하여 포도주 틀에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도포주 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더운 지역에서는 음료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서는 포도를 즙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잘 발달하였습니다. 포도주를 만들 때에는 포도즙 틀에다 포도를 넣고 맨발로 밟아서 만듭니다. 그렇게 하면 포도즙이 흘러나와 밑의 즙틀에 고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포도주를 넣는 틀이 성 밖에서 밟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 대신에 그 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피라고 하였습니다. 그 틀이 하나님의 진노의 틀이라고 말했듯이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심판을 당해서 죽임을 당한 인생들의 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피가 흘러나와 말굴레까지 닿았다고 합니다. 말굴레란 말의 고삐를 의미하는데 아마 높이가 사람 한 길 정도 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또 그 넓이는 1600스다디온이라고 하였습니다. 1600스다디온이란 약 300㎞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말하자면 포도송이가 밟혀서 피의 호수가 되어 사람 한길 정도 되는 높이와 300㎞의 땅에 흥건해졌다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포도송이를 밟는 일이라면 그냥 아무데서나 밟아도 되는 것을 왜 성 밖에서 밟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 밖에서 밟힌다고 하는 것,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한 맺힌 소리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 안이란 거룩한 곳이고 성 밖은 거룩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래서 죄 지은 자를 죽일 때에도 성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또 죄를 상징하는 문둥병자를 성 밖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거룩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을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게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0-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 밖에서 고난과 죽임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모든 자들이 성 밖에서 예수님과 같이 고난과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성문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멸시와 모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당하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성도 역시 동일한 운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 밖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주님이 이제 십자가에 근거해서 심판하시게 되었습니다. 성 밖에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마지막 심판이 내려지면 하나님의 원수들이 성 밖에서 짓밟힐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해 온 자들이 받을 심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가져다 준 하나님의 의를 무시한 자들이 받을 심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받으신 심판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무시한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의 자리, 거기가 바로 성 밖입니다.
그 심판은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양의 피가 호수를 이루는 상태가 될 정도로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게 드러날 것입니다. 아무도 이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심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어쩌면 하나님까지도 우습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의 모임인 교회는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적당히 들어가거나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벗어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고 세밀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감히 기도할 수 있고, 말씀을 나눌 수 있으며, 살아가는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십자가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일 때문입니다. 홀로 이루신 대속의 죽음으로 인하여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자들이 성도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다 받으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4-16절은 곡식 추수에 대한 내용이고 17-20절은 포도 수확에 대한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곡식 거두는 것을 천국 알곡을 거두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뒤에 나오는 포도 수확은 진노의 포도주 틀에 밟히는 악인의 심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첫 장면은 그 나라를 위한 의인들의 추수이고 둘째 장면은 심판을 위한 회개치 않는 자들을 위한 추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미로 잘라서 이야기할 수 있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구원이면서 동시에 심판입니다. 구원과 심판을 나누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14-16절 말씀과 17-20절 말씀을 나누어서 다른 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같은 것을 두 번씩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들을 우리가 나누어서 한 면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같은 이야기를 두 번씩 나누어서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에 의한 심판이 임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먼 미래에 있다든지 혹은 가까이 임하였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적이면서 동시에 지금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곡식 추수를 통해서 그리고 포도 수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연거푸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바로가 비슷한 것 같은 꿈을 두 번씩이나 꾸었을 때에 요셉이 말하기를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창 41:32)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바로가 꾼 꿈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반드시 이루고 속히 행하실 것이었기 때문에 두 번씩이나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곡식 추수에 대한 말씀이나 포도 수확에 대한 말씀은 같은 구원과 심판에 대한 말씀이고, 두 번을 강조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행하실 일이고 속히 이루실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구원과 심판의 말씀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같은 계시의 내용이 표현을 달리하여 계속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행하실 일이라는 뜻이고 속히 이루실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준비를 완료하셨습니다. 아니 이미 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또 어김없이 시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필코 마지막 추수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 그것의 확실함을 두 번씩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란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는 은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 속에 있는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점차로 죄를 더 짓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심판이 당연히 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아는 성도가 이 사실을 공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죄를 짓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두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드러내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하는 것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십자가에 내리신 심판 때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7.7).
요한계시록 56강
어린양의 노래
요한계시록 15:1-4
어떤 종교든지 그 종교의 초월성을 내세우고 존립 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든지 그는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하늘의 뜻을 전하고 그것을 성취한다는 차원으로 정당화하여 사람들의 종교성을 확실히 붙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초월성으로 메워보자는 것입니다. 한계를 극복한 그 초월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비한 종교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결국 땅에서 나로부터 의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확고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철학이 걸어온 길이기도 합니다. 철학의 중심 주제는 언제나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본주의를 지향하다가 스스로의 모순과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에 도입하게 된 것이 신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본주의를 정당화하고 더욱 공고히 하여 인간 중심의 사고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술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철학에서 신을 도입하였지만 결국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인간을 위한 신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사고 방식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성령을 들먹거리지만 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인간을 위해서 봉사하는 신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월드컵에서 한국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요, 자기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며,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고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계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문제에 부딪혀 문제가 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시가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교과서 역할을 하는 정도로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중심입니다. 인간이 중심입니다. 내가 전도해야 되고 내가 상대방을 굴복시켜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내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인간 중심의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이 중심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처음 구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기록하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로 성경의 기록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용해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게서 의가 퍼져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라면 성경에서는 왜 하늘로부터 의가 와야 되고, 올 수밖에 없었으며, 하늘에서 의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오게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게서 의가 퍼져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의를 받지 못한다면 내게는 결코 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의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땅에 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기에 바쁩니다. 자기 의를 정당화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하여 하늘의 계시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의가 없기 때문에 하늘의 의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하늘의 의를 받아들이는 자가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하늘의 의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까? 성도들이 무엇을 노래하는가를 통해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조 속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크게 세 가지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먼저 일곱 인을 떼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계시됩니다. 다음에 일곱 나팔을 부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알려집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대접을 쏟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됩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곱 인의 상징으로 계시되고, 일곱 나팔의 상징으로 경고되고, 일곱 대접의 상징으로 시행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곱 인이 차례로 떼어지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에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습니다. 마치 일곱 나팔은 일곱 번째 인의 확장인 것처럼 기록됩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은 역시 일곱 번째 나팔의 확장인 것처럼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섯째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에 첫 번째 화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여섯째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두 번째 화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화가 속히 도래할 것을 말하고 난 다음에 일곱 번째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지막 세 번째 재앙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하나님의 진노가 최종적으로 임하고 드러나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4절의 말씀을 큰 환난으로부터 승리한 무리들과 그들이 부르는 노래로 구성됩니다. 5-8절은 하늘 성전으로 장면으로 마지막 재앙을 준비하는 일곱 천사의 환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곱 번째 나팔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일곱 대접의 심판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는 결코 시간적인 순서로 이러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일곱 인과 나팔, 대접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을 역사적인 시간의 순서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 종말론적 사건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다방면으로 또한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15장의 본문도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 번째 환상(5-8절)이 시간적으로 보면 첫째 환상을 훨씬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1-4절의 말씀은 모든 하나님의 진노가 종결된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먼저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일찌기 하늘에 나타난 큰 두 가지 표적을 묘사하였습니다. 그것은 해산의 진통을 하는 여자와 그 여자가 낳은 남자아이를 멸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큰 붉은 용이었습니다(계 12:1이하). 이제 요한은 크고 놀라운 표적, 즉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담은 일곱 금 대접에서 땅에 부은 일곱 천사가 가진 일곱 재앙으로 묘사된 하늘에 있는 또 다른 표적을 보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진 후에 나타난 세 번째 마지막 화와 극에 달한 사건들(계 11:14이하)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이며, 이것은 마지막 날의 최후 심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 재앙들은 죄의 파국적인 결과들, 다시 말해서 죄의 심판에 속하는 여러 결과들과 죄를 범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에서 멀리 떠난 것들의 절정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존재와 권세를 가리키는 일곱이란 숫자는 상징적으로 심판에서이건 구원에서이건 하나님의 사역의 완전성과 그의 목적의 불가피성을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재앙을 쏟아 부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는 마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고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죄와 그 결과들이 없고 진노가 없는 새 창조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는 것입니다.
결국 1절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죄가 다 드러난 이상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로 그 정체가 드러난 역사적인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또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에 대한 가치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내리는 세상에 대한 가치 판단은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까? 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요한 사도는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일곱 천사에 대한 기록은 구원의 은혜를 입은 많은 무리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을 잠시 미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서 있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은 4:6에서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수정같이 맑은 유리 바다’와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구약의 한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으나 뒤에는 애굽의 군사들이 계속 추격해 오고 있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할 때에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군사들이 건너올 때에 하나님께서 갈랐던 홍해를 다시 합치자 애굽의 군사들이 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게 됩니다(출 15장).
불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란 하나님의 심판이 함께 섞인 바다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리 바다에는 불과 물이 함께 있습니다. 불이 심판을 의미한다면 물은 죽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유리 바다 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죽음과 심판을 건너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애굽의 지배에서 놓임을 완전하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홍해 가운데에서는 애굽의 군사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 가운데에 같이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든 애굽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있었던 열 번째 재앙에서 드러난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건짐 받을 수 있었고 또한 홍해에서 자신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리 바닷가에 서서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모세의 노래란 애굽에서 구출되고 홍해를 건너서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을 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노래한 것입니다. 어린양의 노래 역시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서 노래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아는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고,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건짐 받은 경험이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즉 불 섞인 유리 바다 속에 있고, 성도는 그 바다를 건너서 바닷가에서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 역시 먼 미래에만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 역시 어린양의 노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리 바닷가에서 어린양의 노래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늘 나라에서 있지만 지금 이러한 모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주님은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심판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심판을 볼 때에 나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던 자였다는 것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그 심판 속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오직 하늘에서 주어진 의 때문에 어린양의 노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때문에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주어진 의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오직 자신을 살려주신 분을 위해서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분께만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늘 나라에서는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없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교회란 이 땅에 이러한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임입니다. 주성교회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의 의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성도는 한 마디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자들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고 지는 자 같으나 하늘에서 주어진 의로 말미암아 주의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죄를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게 된 자기 자신을 보지 말고 이기게 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노래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만 증거 되어지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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