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서철원 교수
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요한 사도이다. 주후 2, 3세기의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등은 본서를 요한 사도의 저작으로 인용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일찍부터 본서가 요한 사도의 저작으로 인정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오랫 동안 논란되었으나, 주후 2, 3세기의 순교자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은 본서를 요한 사도의 저작으로 인용하였고, 특히 수리아의 가장 위대한 교부 에브라임 시루스는 계시록을 반복해서 정경으로 그리고 요한 사도의 저작으로 인용하였다.
요한계시록의 저작 시기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로마의 네로 황제 때인 주후 68년 혹은 69년경으로 보지만, 1) 다른 이들은 도미시안 황제 때인 주후 95년 혹은 96년경으로 본다. 2) 유세비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이레니우스 등에 의하면, 요한 사도는 도미시안 황제의 통치 제15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었고(주후 95년) 도미시안 통치 말기에(주후 96년) 그 섬에서 이 계시를 보았고 도미시안이 죽은 후 네르바 황제(주후 96-98년)의 통치 초기에 에베소로 돌아와 트라얀 황제(주후 98-117년) 때까지 에베소에 머물렀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적 주제는 종말 예언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 사건들, 특히 앞으로 있을 대환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부활 및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이다. 이것은 순종하는 성도들에게는 믿음과 인내로 대환난을 잘 견디고 마귀와 세상의 악에 지거나 타협치 말고 주의 재림을 맞이하게 하려고 주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지만, 거역하는 악인들에게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2~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4장: 하늘 보좌의 광경, 5장: 어린양, 6장: 첫째 인~여섯째 인, 7장: 흰옷 입은 무리들, 8장: 일곱째 인, 첫째 나팔~넷째 나팔, 9장: 다섯째 나팔~여섯째 나팔, 10장: 작은 책, 11장: 두 증인, 일곱째 나팔, 12장: 사탄이 내어쫓김, 13장: 두 짐승, 14장: 구속받은 성도들(14만 4천명), 15장: 승리자의 노래, 16장: 일곱 대접, 17장: 큰 음녀, 18장: 바벨론의 멸망, 19장: 하늘의 찬송, 백마 탄 자의 심판(그리스도의 재림), 20장: 천년왕국과 대심판, 21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22장: 재림의 확실한 약속 등이다.
계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의 주된 내용은 종말 예언이다. 요한계시록 1장은 이 책의 내용과, 요한 사도의 기원과 송영, 그리고 요한이 계시를 받은 경위 등을 기록한다.
1-3절, 계시의 성격
본문은 본서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원천, 주체, 내용, 목적, 천적 전달자, 인간적 전달자, 방법, 계시와 성도의 관계, 계시의 복됨 등을 증거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이다. 요한계시록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계시란,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첫째로, 계시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여 주셨다. 히브리서 1:1, 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사실상, 진리는 하나님께서만 계시하실 수 있다. 구원의 진리도, 종말 사건들의 진리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는 말씀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자주 구별되신다. 여기에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가 있다. 성경은 삼위(三位)의 구별을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혹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한다. 신성(神性)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신다. 그 두 분의 인격적 관계는 신비에 속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구별되신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이신(딤전 2:5)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신다. 예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한 인격이시며 하나님과 인간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는 역시 신비에 속한다.
이렇게 삼위의 구별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고 그들의 관계성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까닭은 성경이 그의 신성에 대해 충만히 증거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요일 5:20) 혹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딛 2:13)으로 불리우셨다. 그는 갈릴리 바다 속에 있는 한 물고기의 입 속의 은전 한 세겔을 보셨다(마 17:29). 또 그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5병 2어, 죽은 자들을 살리심 등). 또 그는 하나님과 나란히 영광과 찬송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셨다(계 5:13).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구별되면서도 신적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심을 증거한다. 즉 성경은 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다.
둘째로, 계시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계시의 내용을 하나님께 받아 알려주셨다. 사도 바울이 받은 구원의 복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며(갈 1:12), 요한 사도가 받은 종말 예언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계 1:1).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신적 권위성을 다시 한 번 더 증거 한다.
셋째로, 계시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다. 이것은 미래의 일들, 특히 종말 사건들이다. 그것들 속에는 대환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 등이 포함된다. ‘반드시’라는 말은 계시된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종말 예언의 내용은 진실하고 확실하다. 또 ‘속히’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 계시의 내용들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다. 이 말씀을 주신 지 2000년이 지났다. 교회는 이 말씀대로 때가 가까움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 수 없으므로 항상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한다. 사람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일이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의 일을 속히 이루실 것이다.
넷째로, 계시의 목적은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다. ‘그 종들’은 주의 사도들과 모든 제자들을 가리킨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유다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종이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우리를 위한 책이다.
다섯째로, 계시의 천적 전달자는 천사이며, 여섯째로, 계시의 인적 전달자는 그의 종 요한이다. 요한계시록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일곱째로, 계시의 방법은 상징으로 나타내심이다. ‘지시하신’이라는 원어(세마이노)는 ‘상징으로 나타내다’는 뜻이다. 이것은 본서의 내용이 증거하는 바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 사건들에 대한 상징적 예언의 책이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본절은 계속하여 계시의 기술자와 그 내용과 그것의 충분함을 증거한다. 첫째로, 계시의 기술자는 요한 자신이다. 요한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책으로 기록하였다. 둘째로,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진리이며, 요한 사도가 본 바이었다. 본서에는 ‘본다’는 동사(에이돈)가 57회나 사용되었고, 그 중에 ‘또 내가 보니’라는 표현(카이 에이돈)이 32회나 나온다. 요한 사도는 많은 상징적 내용들을 환상 중에 보았다. 셋째로, ‘다 증거하였다’는 말씀은 요한이 기록한 본서가 하나님의 계시를 원만하고 충분하게 기록하였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우리를 온전케 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게 한다(딤후 3:16, 17). 그러므로 이 책에 무엇을 가감해서는 안된다(계 22:18, 19).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본절은 계시와 성도의 관계, 계시의 복됨, 그리고 계시된 내용의 긴급성을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 옛날에는 한 사람이 읽고 나머지 사람들은 들었다. 그래서 읽는 자(단수명사)와 듣는 자들(복수명사)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감사하게도 모든 성도들이 마음껏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성경책을 많이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 지킨다는 말은 말씀을 보수(保守)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보수하고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 특히 계시록을 통한 복은 환난을 대비함과 인내와 위로의 복이고(13:10; 14:12) 또한 성도가 환난과 죄악을 이겨 마침내 천국과 영생을 누리는 복이다(22:5, 17). 계시의 책인 성경은 그것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참으로 복되다.
셋째로, 계시된 내용은 긴급한 일들이다. “[마지막] 때가 가깝다.” 성도에게는 항상 종말 의식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지구의 종말이 가깝다. 본서와 성경 다른 곳들에 예언된 세상 종말의 징조들, 예를 들어 거짓 목사들의 나타남, 교회들의 배교(背敎), 전쟁, 기근, 전염병, 지진, 핍박, 세계 복음화 등이 이미 많이 나타나 있다. 자연계에도 이상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자원의 고갈, 환경의 오염, 생태계의 파괴, 오존층의 파괴, 지구 온난화 현상 등이 그러하다.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들은 이 계시의 책에 주목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이므로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덮어두어서는 안될 중요한 책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이것은 신적 권위로 인쳐진 말씀이다. 둘째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종말 예언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이 책은 미래의 역사에 대한 지도책과 같다. 이 책은 미래를 향해 가는 모든 성도의 지침서이다. 셋째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이 책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장차 올 대환난을 대비할 믿음과 인내와 위로를 얻을 것이며, 마귀와 세상과 죄악을 이기고 마침내 천국과 영생에 들어가는 복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의 말씀을 받고 열심히 읽고 듣고 지키자.
4-8절, 문안과 송영
4-8절에는 요한 사도의 문안 인사와 송영이 기록되어 있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요한 사도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였다. 종말 예언의 계시인 본서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에 아시아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어키 지역을 가리킨다. 요한은 먼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영원 자존(永遠自存)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 보좌 앞에 일곱 영들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 신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 충만한 위엄과 능력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 5:6,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시편 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그가 충성된 증인, 그의 부활,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심을 언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충성된 증인이셨다. 증인이라는 헬라어(말투스)는 순교자라는 뜻도 가진다. 참 증인은 죽기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증거하신 충성된 증인이셨다. 또한 그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땅의 왕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는 모든 교회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온 세계의 왕들과 정치가들의 우두머리이시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요한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은혜와 평강은 성도에게 참으로 요긴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더 잘 믿을 수 있고 또 죄 안짓고 바르게 살 수 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서 누리는 마음의 평안과 환경적 안전이다. 평강 속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
본절 중간부터는 예수께 대한 송영이 나온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다수의 전통사본들은 ‘해방하시고’ 대신에 ‘씻으시고’라고 되어 있다. 뜻은 비슷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소식의 내용이다. 이것이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의 내용이다.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이다. 범죄한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죽는다. 영원히 멸망한다. 지옥에 던지운다. 그러므로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죄씻음의 구원, 이것이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이다.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구원받은자의 특권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었다. 하나님과 성도들 간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우리도 요한과 함께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자.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것은 계시록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승천시 구름이 그를 가리웠듯이 그의 재림시에도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다. 구름은 그의 영광의 신비를 부분적으로 가리울 것이다. 그의 재림은 각인의 눈이 볼 수 있는 사건일 것이다. 그리고 심판주의 나타나심 앞에 어떤 이들은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후회와 공포의 부르짖음을 할 것이다. ‘그러하리라, 아멘’이라는 마지막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어구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것을 소망하지 않는다. 이 땅의 것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불탈 것이다. 그것들은 다 불 심판을 위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의 기대는 전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가 다시 오시면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본절은 다시 하나님의 영원 자존성을 증거한다. ‘주 하나님’이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신약적 표현이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성경에서 ‘주’라고 번역되어 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시다. 시작은 창조요 끝은 심판이다. 그는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의 사건을 기록한 창세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예언한 계시록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곧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다 제한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는 제한성이 없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여기에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질적 차이성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인생과 역사의 모든 해답이 있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많은 진리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 그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소망하자. 그는 충성된 증인이시고 그는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이 되셨다. 그는 장차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의 것을 소망하지 말고 그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자.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특권을 감사한 마음으로 누리자. 우리는 주의 사랑 가운데 죄씻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제사장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씻음을 받은 자답게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의 제사장답게 담대하게,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9-11절, 계시를 받은 경위
9-11절은 요한 사도가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 그 계시 받은 경위를 말한다.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자신을 성도들의 형제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노사도의 겸손한 인품을 나타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은 직분자들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존경해야 한다. 요한은 자신을 또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성도들에게는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환난, 고통, 오해, 멸시, 핍박이 있다. 우리는 다 그 환난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의 나라와 참음에도 동참하는 자들이다. 환난이 있지만, 그의 나라도 있다. 참으면 영광도 있다(딤후 2:12). 십자가의 낮아지심 뒤에는 부활과 승천의 높아지심도 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이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라는 말씀은 2절에 언급한 대로 요한이 받은 계시의 내용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의 역사 기록에 보면, 요한 사도는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였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밧모섬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는 장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위해 그를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게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항상 모든 일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 사도는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다. 그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날도 주일이었고(요 20:19, 26),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도 주일이었다(행 2:1; 레 23:15, 16). 신약의 주일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토요 안식일 대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로 구별하여 주신 날이다.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요한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가 본 내용을 책에 기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더 잘 보관하고 전파하고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에 더 굳게 서고 더 큰 위로를 얻게 하기 위함이셨다. 여기에 성경의 필요성과 목적이 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에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12-16절,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엄위하신 모습
12-16절은 요한이 본 일곱 금촛대와 촛대 사이에 서신 영광스럽고 엄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다.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요한 사도가 본 첫번째 내용은 일곱 금촛대이었다. 그것은 일곱 교회를 가리켰다. 이 책의 주된 관심은 교회이다. 성경은 교회를 위해 주신 책이다. 하나님의 뜻은 참된 교회의 설립과 성장과 완성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참된 교회의 건립을 위해 협력할 것이다.
[13-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요한 사도가 본 두 번째 내용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이었다. 그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 분명하다. 그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영광과 엄위함을 나타낸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것은 그의 죄 없는 순결성을 나타낸다. 그의 눈이 불꽃 같은 것은 그의 깊고 철저한 통찰력을 나타낸다. 그의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것은 그의 심판의 강한 힘을 나타낸다. 그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은 것은 그의 권위 있는 말씀들을 나타낸다.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는 것은 그가 교회의 목사를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사용하심을 나타낸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쪼개는 그의 예리한 말씀을 나타낸다. 그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것은 그의 크신 영광을 나타낸다. 부활, 승천하시고 장차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엄위하시고 영화로우시다. 그 영광의 주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종말의 사건들을 홀로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17-20절, 주께서 하신 말씀
17-20절은 영광의 주께서 요한에게 친히 하신 말씀을 기록한다.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앞에 엎드러졌다. 사람들 중에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 살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바로 처음과 나중, 곧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장하시는 참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한 기본적 진리이다.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이제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열쇠는 주권(主權)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심판의 주인이시다.
[19, 20]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네 본 것’은 일곱 금촛대와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음성이며, ‘이제 있는 일’은 사도 시대의 교회들의 일들을 가리키고 ‘장차 될 일’은 교회 역사상 되어질 일들과 주님 재림 직전의 일들과 인류의 최종 상태에 대한 것들이다.
일곱 교회와 일곱 별의 ‘일곱’은 땅 위에 있는 교회들 전체를 대표한 듯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하였는데, 이 사자는 교회의 목사를 가리킨다. ‘일곱 별의 비밀’이라고 한 것은 역사상 어떤 교회의 목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므로 ‘비밀’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여하튼, 교회의 목사들은 주의 오른손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너무 염려하거나 너무 낙심해서는 안된다. 주께서는 일곱 교회들 사이에 다니시며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 손에 붙들고 보호하시고 자유로이 사용하신다.
결론적으로, 9절부터 20절까지에서 우리는 두어 가지 진리와 교훈을 깨닫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깨닫자. 우리는 그의 성결과 위엄, 그의 불꽃 같은 눈길, 권위 있는 말씀들을 깨닫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성격도 깨닫자. 첫째, 우리는 교회의 존귀함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교회를 금촛대로 보여주신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금처럼 귀한 존재임을 뜻한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입는 옷의 흉패와 견대에 있는 12보석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이 심히 존귀함을 나타낸다. 주께서는 바로 이런 귀한 교회들 사이에 거니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다.
둘째,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촛대는 어두운 곳에 빛을 발하는 것이 사명이듯이,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이 빛은 전도와 선행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셋째,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도구임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별들이다. 그가 그들을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사용하실 것이다. 혹은 그가 그들 중 어떤 이들을 버리실 수도 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도구이다. 여기에 교회의 영광도 있지만 교회의 책임과 의무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계2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1)
요한계시록 2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것은 첫 사랑의 회복, 죽도록 할 충성, 순결성 등을 강조한다.
1-7절,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모든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 즉 감독자,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에게 보내졌다. 목사는 교회를 인도하는 자이다. 마치 목자가 양무리를 인도하듯이,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인 교회를 인도한다. 장로들은 이 일에 목사와 함께한다. 그러므로 목사가 바로 서면 교회는 바로 설 것이고, 목사가 잘못되면 교회에는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 예수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는 세우실 능력도, 폐하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자신의 원하시는 바를 다 이루신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 한다. 우리는 고요히 그를 의지해야 한다.
[2, 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전지하신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선한 행위들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그의 믿음의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때때로 성도들은 목사의 중심을 모를지라도 주께서는 아신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목사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였고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은 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하는 힘든 일이요 낙심하기 쉬운 일이지만, 그는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잘 참고 피곤하지 않았다. ‘게으르지 않다’는 원어는 ‘피곤하지 않다’는 뜻이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현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책망하신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었다. 그가 처음 사명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주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의 복음 진리를 전하고 지키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참고 성실하였으나,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그 사랑과 그 열심과 그 성실함을 버렸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지금 주를 진실히 사랑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의 일을 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물론 근본적인 회개는 사람의 일생에 한번만 있다.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던 사람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그것이다. 그것은 단회적 성격의 회개이다. 이것은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이다. 아직도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눅 13:3, 5). 그러나 이미 이런 회개를 한 자도 어떤 구체적 죄 가운데 빠졌을 때 그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이러한 각개적 회개는 반복적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는 죄인 속에 반드시 회개와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구원하는 은혜인 것이다.
주께서는 그에게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네게 임하여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를 옮기는 것은 교회를 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교회, 그러나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그 교회를 폐하신 것과 같다.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다.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선한 점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었다. 니골라당은 14, 15절에 있는 대로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왜곡하고 남용하였던 것 같다. 주의 참된 종들은 이단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주 예수님의 말씀은 곧 성령의 말씀이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즉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사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탄과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된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자, 곧 죄에 지고 사탄과 세상에 지는 자는 영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요한일서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영생을 얻고 이기는 자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편에서 성실히 노력하는 것을 통해 된다. 진실히 믿는 자는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래 참으면서 선행과 수고를 힘쓰자. 사람들은 우리의 중심을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세고 계신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피곤해지지 말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위해 수고하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처음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신앙 생활에는 과거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신앙 생활에는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 뒤로 물러나 있으면 책망을 피할 수 없다.
셋째로, 우리는 범죄한 일이 있으면 즉시 깨닫고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우리를 버리실지도 모른다.
8-11절,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는 그 목사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된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온 세상과 인간을 주관하신다. 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인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그는 죽음을 주관하신다. 비록 우리가 그를 위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영광의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수 있고 참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세상과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참된 성도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신다.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의 환난과 궁핍을 아셨다. 주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환난과 궁핍을 경험할 것이다.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히브리서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비록 서머나 교회의 목사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고 평가하셨다. 인생의 참된 부요는 물질적인 데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다. 물질적인 가치는 일시적이지만, 영적인 가치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유일한 위로로 삼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며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눅 12:21). 또 물질적으로 가난한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부요한 경우가 많다.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받았다. 구약교회는 매우 타락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또 주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그러나 실상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사탄의 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어떻게 참된 교회에 속하겠는가? 그들은 분명히 사탄의 회에 속한 자들이다.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아야 했다. 고난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신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서머나 교회에는 장차 10일 동안의 환난이 있을 것이며 마귀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었다. 그 교회의 목사가 견고히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시험과 환난이 있을 것이었다. 10일 동안의 환난은 서머나 교회에게 닥칠 문자적으로 10일 간의 박해이든지 혹은 상징적으로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은 영속적이지 않고 지나가는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인내와 충성을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 충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참된 충성은 죽음을 통해 증명될 것이다. 아니, 참 충성은 죽기 전까지는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순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확실한 표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곧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위한 순교와 충성만이 의미가 있다.
주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종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생명의 면류관은 면류관의 종류라기보다 생명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생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죽기까지 참된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는 자는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 충성치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다.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에게는 영생의 영광이 약속되지 않는다.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책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자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께서는 또한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이기는 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는 지옥 형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해 충성치 않고 순종치 않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구원은 반드시 믿음과 인내와 충성과 순종의 삶을 수반한다.
결론적으로, 8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구하지 말고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구하자.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일시적 가치를 가질 뿐이지만, 영적 부요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 영생은 백년 동안의 세상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가지고도 바꿀 수 없는 보화이시다. 성도의 참 믿음은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환난과 순교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자. 충성은 참 믿음의 증거이다. 그것은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다가 죽으면 우리는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세상은 단지 우리의 육신적 목숨만을 위협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은 자들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자.
12-17절,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묘사되었다.‘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든지 혹은 심판의 칼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과 같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수께서 자신을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을 갖고 계신 자로 묘사하신 것은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영적 전쟁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개인의 신앙 생활과 교회의 진리 운동은 영적 전쟁과 같다. 마귀와 불신앙과 비진리를 대항하여 싸울 이 전쟁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주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우리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는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었다. 버가모는 우상숭배의 총본부와 같았다. 거기에는 제우스 신의 신전과 아테네 여신의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의 신전 외에, 특히 뱀 모양의 의술의 신 에스큘라피우스 신의 신전이 있었고, 또한 로마 황제 아구스도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황제 숭배는 초대 교회 시대에 보편적인 한 풍조이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회를 혼란시켰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에 굳게 선 자이었다. 전통사본에는 “내가 네 행위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니”라고 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행위가 어떠한 지 다 아신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고 주의 충성된 증인 혹은 순교자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자는 순교자 못지 않게 충성된 믿음의 사람이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러한 사람이었고 주께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칭찬하셨다.
[14, 15]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책망도 하셨다. 우리에게 칭찬거리가 있으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칭찬도 하실 것이지만, 우리에게 책망거리가 있으면 그가 우리에게 책망도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책망은 그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발람의 교훈은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미혹하는 한 방책을 일러준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게 하고 그 신들에게 제사한 제물을 함께 먹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노하셨다(민 25:1-3). 그것은 발람의 간교한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민 31:16). 이와 비슷한 교훈이 버가모 교회 안에 들어온 니골라 당의 교훈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자들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우상숭배는 천주교회의 마리아 숭배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 숭배와, 종교다원주의의 이방 종교 관용이다. 우상숭배의 용납은 하나님께 책망 받을 큰 잘못이다. 오늘날 교회는 또한 음행을 경계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심히 음란한 사회이다. 현대 문화는 심히 음란하다. 오늘날 교회에는 심지어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까지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목사는 바른 교훈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인들을 그 교훈대로 살도록 지도하고 관리해야 한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교회 안에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자들을 용납하는 것은 교회의 목사가 회개할 죄이었다. 만일 목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께서 그 교회에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교회가 권징을 회피하면 주께서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교인들 중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직접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주께서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신다는 말씀을 보면 주의 입의 칼은 심판의 칼인 것처럼 보인다. 주님의 직접적 개입은 목사에게 큰 수치가 될 것이다. 그의 목회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목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상급은 크게 감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전에 그는 교인들을 바르게 관리하고 필요할 때 적절히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만나는 하늘 나라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시편 78:24, 25,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장차 주님과 누릴 사랑의 식탁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또 흰 돌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옛 시대에 흰 돌은 운동 경기에서 이길 때에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시에나, 큰 잔치에 입장할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과연 장차 우리가 받을 흰 돌은 그런 의미들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그 흰 돌은 세상에서의 영적 싸움에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無罪) 혹은 의롭다 하심의 판결을 받을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며, 영광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기록될 것인데, 그것은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새 이름은 천국에서 사용될 우리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새 이름은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릴 복된 신분과 영광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분명한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처럼 사탄의 위가 있는 곳,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장차 임할 대환난 시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포용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교리적인 혹은 윤리적인 악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악을 정죄하면서 악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며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8-29절,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의 날카로움을 나타내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한 것은 그의 심판의 엄위함을 나타낸다.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이런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주께서 그 목사의 문제점을 통찰하시고 그가 포용한 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도 보시며 우리의 행위도 판단하실 것이다.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주께서는 먼저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셨다. 그 목사는 주께 칭찬들을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고 주를 사랑하였고 믿었고 섬겼고 인내하였다. 이것들은 다 좋은 점들이었다. 우리도 주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주를 참으로 사랑하고 믿고 섬기는 자 되기를 원하며 또 환난 중에 오래 참는 자 되기를 원한다. 더욱이,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나중의 행위가 처음의 것들보다 많았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꾸준히 주를 믿고 섬겼으며 점점 더 열심히 주를 믿고 섬겼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러나 진실히 주를 믿고 섬기는 자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의 문제점은 버가모 교회 목사의 문제점과 같이 잘못된 자를 포용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다수의 사본들에는 여자라는 말이 ‘네 아내’라고 되어 있다.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의 아내는 자칭 선지자로 자처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치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의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이 죄악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 성경을 믿는 많은 주의 종들도 포용주의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많은 목사들이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들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거나 심지어 동성애 같은 악을 포용하고 있다. 주께서는 동일하게 그들에 대해서도 책망하실 것이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들은 그 기회에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과 부도덕을 회개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을 것이다. 교회 속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은 죄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22, 23]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 사모에게 징벌을 선언하셨다. 첫번째 징계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킬 것이다. 두 번째 징계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징계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이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게 될 것이다. 죄는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신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이다.
[24, 25]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셨다. 오늘날에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안에 사탄의 은밀한 활동들이 많은 줄 안다. 현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 속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끝까지 속죄 신앙과 의와 선과 진실을 보존하고 실천하기를 원한다.
[26-29]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의 권세이다. 요한계시록 12:5에는 예수님 자신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이 권세를 주께서는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또 주께서 약속하신 새벽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다(계 22:16).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끝까지 가짐으로써 처음 믿었을 때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라고 풍성해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뒤로 물러나는 자가 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는 신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악한 자의 악을 용납하는 자가 되지 말자. 작은 악의 포용은 우리를 부패시키고 우리 교회를 부패시키고 나아가 만국 교회를 부패시킨다. 그러므로 악을 용납하지 말고 단호히 배격하자.
셋째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요동하지 말고 성경에 밝히 계시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키자.
계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2)
요한계시록 3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것은 신앙과 행위의 온전함, 바른 신앙의 보수, 확신 등을 강조한다.
1-6절,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본절은 성령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됨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고 계신 자이시다. 성령을 일곱 영으로 말한 것은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낸다. 주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 곧 그 영과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통찰력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시다.
주께서는 사데 교회의 목사의 행위를 아셨고 그의 행위에 근거하여 그를 판단하셨다. 주께서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혹은 불완전한 말만 듣고 그를 판단하지 않으셨고 그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셨다. 사람의 행위가 중요하다. 사람의 행위는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사람의 말은 자기의 마음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고 심지어 위선적일 수도 있으나,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과 인격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람의 마음도 판단하시지만, 특히 행위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신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다.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그와 그의 교회가 사람들의 보기에 매우 활동적이었고 또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는 뜻이다. 활동적이라는 것이 한 단체가 건전하다는 표는 아니다. 공산주의자들도 매우 열심이 있고 이방 종교인들이나 이단 종파자들도 그러하다. 열심이 진리의 표시는 아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 어떤 성질의 열심이냐가 중요하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이었다. 죽었다는 말은 영적 의미이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건강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고 간주되었다. 그의 활동은 참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위들은 위선적이었다. 참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헛되다. 그의 믿음은 생명 있는 믿음이 아니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서에는 말했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이 말씀을 보면, 사데 교회의 목사는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그에게 남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복음 신앙의 뿌리요 연약한 생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처지에 있었다. 그 남은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 했다.
그가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위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위의 온전함은 경건과 거룩, 의, 선, 진실을 가리키고, 행위의 결함은 도덕적 흠과 점과 부족 곧 죄를 가리킨다.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는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다.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성도가 받고 들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이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하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405장).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회개케 하셨고 예수 믿게 하셨는지 기억하고 회개해야 한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은 오늘과 내일 신앙 생활에 힘이 된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그 목사가 일깨지 않으면 주께서 도적같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며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보통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목사의 영적 상태에 따라가지만, 이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예외이었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었으나, 그 교회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닐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합당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흰옷은 순결을 의미한다.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흰옷이며 의롭다 하심을 얻는 참 믿음 곧 속죄 신앙이 흰옷이다. 또 이 의 안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고 선행에 힘쓰는 것이 성도들의 흰옷이다. 그러나 흰옷을 입은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죄악의 낙을 누렸다. 노아 시대에도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다 멸망을 당했다.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다.
[5, 6]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는 흰옷 입은 목사, 흰옷 입은 직분자들, 흰옷 입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흰옷 입은 무리의 수에 들어야 한다. 성도가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또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흰옷이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흰옷을 더럽히는 자요 영적으로 죽어 가는 자이다.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흰옷 입은 자와 흰옷을 더럽히는 자, 둘 중의 하나이다.
흰옷 입은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다. 주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지우지 아니하고 그것들을 하나님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다. ‘이름을 흐린다’는 말은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주님만 바라고 죄를 대항하고 의를 행하는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여 주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나 반대로 흰옷을 더럽히는 자들 곧 범죄하는 자들의 구원은 보장될 수 없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헛된 소망이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주의 뜻을 따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1절부터 6절까지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떠들석한 외적 모양이나 평판만 가지지 말고 참 믿음과 선한 행위의 실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둘째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파악하고 굳게 보수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기본을 보수하고 그것에 합당한 행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흰옷 입은 자가 되는 것이요 흰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들은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이다.
7-13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주 예수께서는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시다. 히브리서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또 그는 진실하시다. 그에게는 작은 거짓도 없으시다. 이와 같이 거룩과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주님의 속성이다. 주께 대한 이러한 묘사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의 인격이 그러하였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진실한 주의 종이었다.
주께서는 또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시고 문을 여시는 분이시다. 열쇠는 주권(主權)을 가리키고 그 문은 천국문을 가리킨다. 천국문을 열 권세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죄인들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셨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닫을 수 없는 문이었다. 열린 문은 천국의 확실한 보장을 가리킨다. 천국 문을 열고 닫을 권세는 오직 주 예수께 있다. 주께서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주께서 닫으시면 열 자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공로를 믿고 주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는 자들을 위해 주께서는 천국 문을 여신다. 주께서는 저들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요한복음 10:27, 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신 이유는, 그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8절 중간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열린 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 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하고 실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치 않았다. 그리고 그 댓가는 열린 문, 곧 천국의 확실한 보장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힘 없음을 핑게치 말자. 우리는 작은 능력, 보잘 것 없는 힘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두렵고 떨릴지라도, 힘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거나 부인하지 말자. 신앙의 순결성과 절개를 지키자. 그것은 깨끗한 신앙 생활을 말한다. 그것은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세속의 죄악된 풍조에 물들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작은 힘으로도 주를 진실하게 믿고 따르자.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주께서는 유대인들의 모임을 사탄의 모임이라고 부르신다. 구약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부패되고 타락하여 사탄의 모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였고 그의 교회를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16,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유대인들 중 몇 사람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 앞에 굴복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신실한 목사에게 내리시는 보상이었다. 주께서는 자신이 그 목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 일로 증거하실 것이다. 주의 성도들과 종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아계심과 그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심을 종종 현실 속에서 이렇게 나타내신다.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또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한가지 더 복된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그를 지키어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험의 때는 대환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그 목사가 대환난을 겪지 않고 하늘로 올리우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대환난을 통과할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29,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요한계시록 7:14, “. . .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는 시험과 환난의 때를 면하는 은혜가 예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애굽의 10가지 재앙 중에 그 재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고센땅과 같은 은혜일 것이다.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께서는 단지 한가지를 그 목사에게 요구하셨다. 그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보수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이 장차 우리가 받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장차 받을 면류관을 빼앗길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에게 예비된 천국의 영광을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주께로부터 받은 말씀 안에 굳게 서고 유일한 복음인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12, 13]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참된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들과 같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집이다. 에베소서 2:21, 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주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세 가지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울 것을 암시한다. 둘째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다. 그것은 그들이 새 예루살렘 성의 백성, 곧 천국 백성으로 불리울 것을 암시한다. 셋째는 주의 새 이름이다. 그것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불리울 것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우리는 한가지 분명한 교훈을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미 가진 복음 신앙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가진 능력이 크든지 적든지, 우리는 주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들도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잘 파악하고 끝까지 지키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보수 신앙이나 옛신앙은 바로 그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간직하자.
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아멘은 진실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진실하시다. 또한 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셨고 그의 모든 말씀과 진리에 대하여 참되게 증거하셨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다.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에게 이렇게 자신을 표현하신 것은 그에게 확신과 충성을 요구하시는 뜻이 있어 보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주께 충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도 확신과 충성을 요구하신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표현하셨다. 고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본 혹은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주의 근본이 되신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말씀=예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철학과 사상들의 질문들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15, 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차거나 덥다는 것은 주님과 주의 복음과 주의 일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님과 주의 복음을 거절하거나 대항하지는 않았으나 주님과 주의 복음과 주의 일을 위해 열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것 같다. 주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태도보다는 오히려 분명한 태도를 원하신다. 믿으려거든 확실히 믿고 믿지 않으려거든 확실히 믿지 말라, 너는 믿는 것인가, 믿지 않는 것인가 확실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에 있는 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오히려 참된 믿음에 더욱 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믿는 자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태도를 미워하시고 그런 태도를 가진 자들을 물리쳐 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미지근한 태도는 일종의 위선이다. 주께서는 거짓과 위선을 가장 미워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확신과 진지함을 원하신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즉 교인 수나 재정에 있어서, 부요했던 것 같다. 그 교회 목사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고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외적으로는 부요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빈곤하였다. 그는 자신의 곤고함과 가련함과 가난함과 눈멂과 벌거벗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의 목사의 경우와 정반대이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빈곤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부요하였다(계 2:9).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부요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빈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부요를 크게 여기시지 않고 우리의 내적인 부요를 크게 여기신다(눅 12:21).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곧 확신을 가리킬 것이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안약은 영적 세계, 하나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성령의 지혜와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이 모든 처방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살 수 있다. 주님에게서 산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낸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들을 사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보화를 몽땅 다 주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나를 부인하고 그에게 그것들을 요청할 때 그는 값없이 은혜로 그것들을 내게 주신다.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책망과 권면, 회개의 촉구는 다 주의 사랑에서 나온다. 주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오래 참고 또 책망하시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버려두시거나 아니면 벌써 쳐서 데려가셨을 것이다.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매를 때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충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종에게 열심을 품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5, 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문밖으로 쫓아낸 이 불쌍한 종은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하였다. 교회의 목사인 그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했다. 주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 삼지 못하시고 그를 떠나 계시다.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이었다. 회개한 자는 주님과 즐거운 식탁 교제, 즉 교제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21, 2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께서는 우리가 이기는 생활을 할 때 심판날에 주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림을 뜻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22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목사의 문제는 미지근한 데 있었다. 그에게는 확신이 없었음에 틀림 없다. 그는 주님을 불신앙하거나 의심하고 있었다. 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세상적 가치관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이러한 미지근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과 그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주의 의 안에서 의만을 행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잘못을 행했을 때 우리의 잘못을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그때 주께서는 우리와 참된 교제의 식탁을 나누실 것이다.
계4장 하늘 보좌의 광경
1-11절, 하늘 보좌의 광경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것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교회의 휴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에 천상의 광경을 보게 된 경위를 말하는 것뿐이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이라는 표현은 이미 1:19에서 언급된 바이었다. 거기에 보면,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 본 것’이란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시며 일곱 별을 오른손에 잡고 계신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며, ‘이제 있는 일’이란 일곱 교회의 사자의 영적 상태이며, ‘장차 될 일’이란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종말 사건들이다. 이제 이 장차 될 일, 즉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먼저 천상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2, 3]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사도 요한은 하늘에 올리워서 첫째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다음 장 1절(5:1)에 그의 오른손에 책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케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그의 본체는 아무도 볼 수 없으나 때때로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모습은 네 가지 단어로 묘사되었다. 벽옥과 홍보석과 무지개와 녹보석이 그것이다. 벽옥은 하나님의 성결의 영광을 나타내고, 홍보석은 그의 공의와 심판의 영광을 나타내며, 무지개는 그의 약속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며, 녹보석은 그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심을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사도 요한은 둘째로 보좌에 둘려 있는 24보좌들을 보았다. 거기에 24장로들이 앉아 있었다. 24장로들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 같다. 24라는 숫자는 구약교회의 12지파들과 신약교회의 12사도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 21:12, 14에 보면,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 위에는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있고, 성곽의 열두 기초석 위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있었다. 24장로들이 입은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성결을 가리키고, 그들이 쓴 금면류관은 교회가 천상에서 누릴 존귀와 영광을 상징한다고 본다. 우리의 소망과 영광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를 바라보며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산다. 이 땅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불태워질 것이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유할 것이다.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보이며 이러한 위엄과 능력은 특히 그의 심판하심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영, 불같은 성령을 가리킨다. 그는 전지하신 영이시요, 소멸하시는 불이시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영이시다.
[6, 7]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사도 요한은 셋째로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을 보았다. 보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네 생물이 있었다.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는 구약시대에 성막의 물두멍이나 성전의 바다를 기억나게 한다. 그것들은 다 제사장의 수족을 씻는 일을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천상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말미암아 흠과 점 없게 된 성결을 나타낼 것이다. 보좌 가운데와 주위의 네 생물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그룹이라는 천사와 같다. 24장로가 교회를 대표하듯이, 이 네 생물은 천사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들의 앞뒤에 눈이 가득한 것은 그들의 통찰력과 지식의 충만함을 상징할 것이다.
그 네 생물의 모습은 매우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다. 사자는 불굴의 용맹스러움을, 송아지는 온순함과 충성을, 사람은 지혜와 총명을, 독수리는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다. 그들은 악령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용맹스럽고, 온순하여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순종하고 충성하며, 또 지혜롭고 민첩하며 쇠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다.
[8, 9]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네 생물이 여섯 날개가 있는 것은 마치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스랍이라는 천사의 모습과 같다. 거기에 보면, 그 여섯 날개는 얼굴과 발을 가리우는데 넷이 사용되고, 나는 데 둘이 사용되었다. 여하튼 네 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찬양하기를 힘쓴다. 천사들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천사들의 존재는 실재이다. 천사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다.
천사들의 주요 임무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찬양대의 임무이다. 자기의 육신의 기분이나 흥이나 감정을 좋게 하려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아니고, 참으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허무한 가사를 지절거리는 노래들을 미워하시나, 진리에 합한 노래들을 귀하게 보신다. 물론, 찬양은 가사 뿐만 아니라, 곡과 리듬과 박자도 하나님이 세우신 법과 질서에 맞게 아름다워야 한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불협화음의 빈번한 사용과 광란적인 무질서가 특징을 이루는 현대음악, 특히 록 형식의 음악은 기독교인들이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오늘날 교회들 속에 밀려들어 온 현대기독교음악(CCM)은 분별력을 가지고 취사선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10, 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24장로들이 그들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져 드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고백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믿음과 선행에 대해 상주시지만, 성도는 사실상 그런 상을 받을 만한 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천사들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24장로들 곧 성도들의 회인 교회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한 근본적 이유는 그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천지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고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직 그 분만 모든 피조물들에게서--천사들과 사람들과 기타 모든 만물에게서--영원히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현실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자. 그것은 하나님의 성결의 영광이요 그의 공의과 심판의 영광이요 그의 언약에 신실하심과 그의 선하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오직 하나님만 섬기자.
둘째로,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의의 흰옷과 금면류관을 쓰는 자가 되자. 이것이 천국에 있는 승리한 성도들이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모습이요,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산 노아의 모습이다.
셋째로, 우리는 네 생물의 덕을 배우자. 그들의 사자 같은 용맹을, 송아지 같은 온유와 충성과 순종, 사람 같은 지혜와 총명을, 독수리같이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배우자.
계5장 어린양
1-5절,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든 책을 보았다. 그 책은 장차 될 일들, 즉 종말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쓴 책일 것이다. 이것은 곧 인류의 미래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6장부터 계시되는 내용이며 요한계시록의 중심 부분이기도 하다. 안팎에 썼다는 말은 그 내용의 세밀하고 충만함을 보인다. 일곱 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 인봉이 하나씩 떼어질 것이고 인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종말 계획이 하나씩 계시될 것이다.
[2-4]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하나님의 이 은밀한 종말 계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하늘 위에 천사들이나 의인의 영들 중에도, 땅 위에 살아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죽은 자들 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크게 울었다. 그는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하여 울었을 것이다.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장로 중 한 사람은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가르쳐 주었다. 유대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창세기 49:9에 “유다는 사자새끼로다”는 예언과 이사야 11:1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날 것이라”는 예언에 근거한다. 이기셨다는 표현은 그가 마귀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을 이기셨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을 이기셨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이제 그는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셨다.
6-10, 어린양의 모습과 24장로들의 찬송
[6, 7]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어린양을 본 것은 요한이 본 환상의 상징적 성격을 보인다. 요한이 본 어린양은 이전에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양이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시다. 그는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한 속죄를 완성하셨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다. 어린양에게 있는 일곱 뿔은 그의 충만한 능력을 보이고 일곱 눈은 그의 충만한 통찰력과 지식을 보인다. 그 일곱 눈은 또한 천지에 충만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어린양은 종말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기록한 책을 취하였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며, 어린양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인류 역사의 미래, 곧 종말 사건들, 심판과 최종 영광까지를 계시하실 자격자가 되셨다.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린양에 의해 하나씩 계시될 것이다(계 6:1).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어린양이 책을 취하실 때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였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경배를 받으실 자이시다. 24장로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 대접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부터 악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시편 150편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 퉁소, 제금 등의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께 사용되는 악기들은 경건하고 아름답게 연주되어야 한다. 또 성도의 기도들을 향에다 비교하였다. 성도의 찬양, 감사, 혹은 죄의 고백, 그리고 거룩한 소원의 간구는 향과 같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믿음의 기도들을 기뻐하신다.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노래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어린양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그 인봉된 책을 취하시고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으로서 그와 비교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멧도 그와 비교될 수 없다.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셔서 그의 피로 세계 각국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救贖)하셨다. 참된 찬송은 속죄의 찬송이다. 우리의 찬송이 그러해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의 이런 저런 속성이나 사역을 찬양하는데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하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존귀하고 가장 은혜로운 속죄 사역을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자기 피로 우리 같은 죄인을 구속(救贖)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송해야 한다.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전통 사본에는 ‘나라’라는 말이 “왕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속죄 사역으로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을 삼으셨다.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들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다. 성도들은 장차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할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에서 영원히 왕노릇할 자들이다(계 20:6; 22:5).
11-14절, 천사들과 만물들의 찬송
[11, 12]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사도 요한은 또한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 소리를 들었다. 그 천사들의 수는 천천 만만으로 표현되리만치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어린양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돌렸다. 어린양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부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존귀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 특히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가 죽임을 당하신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죄의 책임과 형벌을 대신 감당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에게 죄씻음의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인해, 즉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인해, 하늘의 천사들도 어린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다. 그 찬송은 합당한 찬송이다.
[13, 14]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천지에 있는 모든 만물들, 피조물들 즉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사람들이나 기타 모든 만물들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리는 영광스러운 만물의 합창이었다. 여기에 또 한번 더 성자(聖子) 예수께서 성부(聖父)와 동등한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다는 우리의 삼위일체 교리가 증거된다. 만물들의 찬송에 대하여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아멘과 경배로 화답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 장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역사의 미래가 계시되었음을 알자. 역사의 주체는 인간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역사는 정치가들이 만들어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는 실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신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다. 하나님의 이 구원 경륜 속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한 백성의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해 증거해주실 유일한 주님이 되셨다.
둘째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피로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구주 예수님은 우리와 모든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의 경배와 찬송을 받으실 주님이시다. 우리는 본 장의 찬송의 가사들과 같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을 항상 주께 올리자.
계6장 일곱 인
요한계시록 6장부터는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실 때 요한이 본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일곱 인의 내용은 4:1에 언급한 대로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이다. 6장부터 19장까지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의 해석에 관하여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초대 교회 시대 즉 로마 제국 시대에 다 이루어진 예언으로 본다. 이것을 과거적 견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의 예언에 보면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의 징조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들이 과거에 다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둘째로,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사도 요한 때로부터 세상 종말까지의 교회 역사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교회사적 견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서에 예언된 내용을 교회사상의 사건들에 구체적으로 일치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
셋째로,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전 기독교 역사에 악의 세력과 교회 간의 싸움의 대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을 상징적 혹은 영적 견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서의 내용은 어떤 미래의 구체적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시간적 진전을 보이는 것 같고 단순히 어떤 원리만 보이는 것 같지 않다.
넷째로,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이것을 종말적 견해라고 한다. 이것이 가장 타당하게 생각되지만, 교회사적 사건들이나 일반적 징조들을 나타내는 점들도 있다고 본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6장부터 19장까지의 내용이 교회 역사에서 원리적으로 어느 정도 나타났으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더욱 구체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 2절, 첫째 인
[1, 2]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지난 장에서 본 대로, 어린양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을 취하셨다. 이제 그 인을 하나씩 떼실 때 미래의 사건들이 예언된다. 첫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흰말과 그 탄 자를 보았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인자 같은 이의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다(1:14). 신실한 성도들은 흰 돌을 받았고(2:17) 흰옷을 입었다(3:4). 또 재림의 주님은 흰말을 타고 오실 것이며(19:11) 그를 따르는 하늘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흰말을 타고 그를 따를 것이다(19:14). 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 보좌도 흰 보좌일 것이다(20:11). 흰색은 성결과 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절의 흰말과 그 탄 자는 문맥상 그리스도의 거룩한 심판의 사역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가 면류관을 받고 이기고 또 이기려 한 것은 그의 사역이 승리적임을 말한다.
3, 4절, 둘째 인
[3, 4]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붉은 말과 그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함이 분명하다. 그가 ‘큰 칼’을 받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큰 살육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전쟁 무기의 발달로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량 살상 무기를 예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세의 한 징조는 전쟁들이다. 주의 재림 전에 큰 전쟁들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요한계시록에는 본절 외에도 유브라데강 부근에서 2억의 군사가 동원될 전쟁과, 유브라데강이 말라 동방의 왕들이 들어옴으로 세계적 연합군이 형성되어 아마겟돈(므깃도 언덕)에서 일어날 마지막 세계적 대전이 예언되어 있다(9:13-16; 16:12-16).
역사상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전쟁들 중에서도 20세기에 치룬 두 차례의 세계적 전쟁은 처참한 ‘대전’(大戰)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죽은 군인들만 거의 1000만명에 이르렀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만 약 1700만명이었다고 한다. 민간인들의 수는 몇 배 갑절이 될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후 세계는 서방세계와 공산진영으로 서로 대립되었고 아직도 그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세계 공산화의 꿈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또한,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종교적 갈등이 남아 있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핵무기와 화학-생물학무기들을 동원한 인류 역사가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현대인은 고도로 불안한 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5, 6절, 셋째 인
[5, 6]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검은 말과 그 탄 자는 기근을 상징하는 듯하다. 손에 저울을 가진 것은 식량의 배급을 상징하며 그것은 식량이 부족할 것을 뜻한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요, 한 되는 보통 사람의 1일분 식량이다. 하루 품삯으로 한 되의 밀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식량값이 매우 비싼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수요 공급의 원리대로 식량의 큰 부족을 나타낸다. 보리는 밀보다 싼 곡물로서 품질이 낮은 식량이다.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서민들의 기본적인 식용품, 의약품, 음료수가 허용됨을 보이는 것 같다.
주의 재림 전에는 기근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처처에 기근들과.” 기근은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근래에 세계적으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월드북 백과사전 3) 에 의하면,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허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동부 인도 벵갈에 대 기근이 있었다. 2차 대전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소위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1998년 세계농업기구는 발표하기를, 전 세계에 8억 2,800만명이 기아 상태에 있으며 해마다 1,800만명이 굶주림과 이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4)
7, 8절, 넷째 인
[7, 8]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청황색 말과 그 탄 자는 본문의 설명대로 사망을 상징한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음부는 무덤을 가리킨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4분의 1은 전쟁과 기근과 사망 혹은 무서운 질병과 땅의 짐승들로 인해 죽을 것이다. ‘사망’이라는 말(다나토스)은 ‘사망’이라는 일반적인 뜻 외에 ‘치명적 질병’이라는 뜻도 있다.
주의 재림 전에 많은 질병들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기근들과 온역들(전통 본문)과.” 역사상 많은 질병들이 있었지만,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병원들은 각종 환자들로 붐빈다. 고혈압과 당뇨와 암은 오늘날 무서운 질병들이다. 특별히 동성애적 음란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이는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의 확산은 매우 위협적이다. 에이즈는 아직 예방약이나 치료약이 없다. 에이즈는 현 시대의 흑사병이라고 불리우는데, 1981년 처음 보고된 이후 2001년까지 약 20년 동안 에이즈로 인한 전 세계의 사망자 총수는 약 2100만명에 이른다. 또 2001년 6월 현재, 전 세계에 에이즈 감염자수는 약 360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5)
결론적으로,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는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시대의 여러 일들을 계시한다고 본다. 그것은 시대 순서라기보다 동시적이라고 생각된다. 주의 재림 직전에 전쟁과 기근과 사망 혹은 질병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자신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로서 제시하신 내용들과 일치한다. 물론 이러한 징조들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어느 정도 나타났으나, 교회 시대 말기, 즉 주의 재림 직전에 절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의 재림 직전에 전쟁과 기근과 질병들과 사망의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환난에 대비하는 믿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순교의 상황을 주시고 그것을 요구하실 때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9-11절, 다섯째 인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탄원하는 모습을 보았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고 죽으면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 몸은 땅에 장사되지만,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간다(전 12: 7).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즉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반했더라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사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몸만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마 10:28).
이와 같이 신앙의 핍박과 순교는 종말 징조의 내용이며 대환난 시대의 한 특징이다. 마태복음 24:9, 10,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요한계시록 13:7, 15,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순교자들의 영혼들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공의의 심판을 탄원하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보응하신다는 도덕 질서를 위하여, 그리고 기독교가 참된 진리임을 변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며 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탄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셨다. ‘흰 두루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성결과 의를 상징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순교하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고 말씀하셨다. 죽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에게는 비록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간청하는 기도가 있었지만 또한 참된 안식이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는 말은 인간 시간표의 수천년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시에 불과함을 보인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다섯째 인의 중요한 진리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순교자들의 죽음이 더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 역사상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순교자들이 있어 왔지만 마지막 심판 때 전까지 순교의 죽음은 계속될 것이다.
12-17절, 여섯째 인
[12-14]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큰 지진과 천체의 큰 변동을 보았다. 해는 총담같이 검어졌다. 총담은 털실로 짠 거무스름한 부대자루를 가리킨다. 달은 피같이 되었다.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큰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졌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갔고 각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다. 이러한 묘사는 극심한 천재지변을 나타낸다. 큰 지진들과 천재지변들은 종말의 한 징조라는 사실이 계시된 것이다.
천재지변들은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셨다(마 24:29). 또 요한계시록 8:12에도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는 예언이 있다.
특히 큰 지진들은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지진들이 세상 종말과 자신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일 것을 말씀하셨다(마 24:7). 또 요한계시록 11:13은 두 증인의 승천 후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명이라고 증거하였고 요한계시록 16:17-20은 일곱째 대접을 쏟을 때 큰 지진이 있어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또 큰 우박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큰 지진의 힘은 약 1억 8천만 톤의 티엔티(TNT) 폭탄과 같으며,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용되었던 원자폭탄의 약 만 배의 위력이라고 한다.
월드북 사전 에 의하면, 역사상 대지진들이 일어난 장소와 그 사망자 수는 다음과 같다: 주후 526년 시리아 안디옥(오늘날 터어키) 25만명, 1268년 소아시아 실레시아 6만명, 1290년 중국 북동부 10만명, 1556년 중국 중앙부 솨안키(산시성) 83만명, 1667년 코카시아(구 소련 남서부) 8만명, 1693년 이태리 카타니아 6만명, 1730년 일본 혹가이도 13만 7천명, 1737년 인도 칼커타 30만명,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 6만, 1783년 남부 이태리 5만.
20세기에 들어와 대지진들은 더욱 빈번해졌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 되며, 그 중에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은 14개나 된다.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큰 지진들이 일어난 장소와 그 사망자 수를 열거해보면, 1908년 이태리 멧시나 7만 5천명, 1920년 중국 중앙부 간서 20만명, 1923년 일본 도오꾜-요코하마 약 14만 3천명, 1932년 중국 중앙부 7만명, 1935년 인도 쿠에타(오늘날의 파키스탄) 6만명, 1970년 페루 침보테 약 6만 8천명, 1976년 중국 북동부 헤베이 24만명 등이다.
또 최근의 대지진들이 일어난 장소와 그 사망자 수는, 1988년 아르메니아 2만 5천명 이상, 1990년 이란 서북부 카스피해 인접지역 약 2만 5천 내지 4만명, 1993년 인도 약 7천6백명, 1995년 일본 고오베 약 6천4백명, 러시아 사할린도 네프트골스크 2천명 이상, 1998년 아르메니아 2만 5천명, 아프가니스탄 3천5백명, 아프가니스탄 5천명, 1999년 터키 1만 5천명, 대만 2천명 이상 등이다.
[15-17]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은 평상시에는 담대하고 때때로 교만하기까지 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대환난의 날에 두려워 떨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곳을 찾기에 급급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찌기 예언하기를, 하나님의 심판 날에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고 하였다(사 2:19).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은 전통사본에는 ‘그의 진노의 큰 날’이라고 되어 있다. 대환난의 날들은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이다. 이 때에 담대히 설 자가 누구인가? 불경건한 자들 중에는 아무도 없다.
결론적으로,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예언하기보다 일반적인 종말 징조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것들은 전쟁, 기근, 질병과 죽음, 핍박과 순교, 큰 지진 등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고 세상 종말이 가까울수록 이런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징조들을 볼수록 우리는 성경의 예언의 말씀들을 기억하고 고난을 각오하면서 믿음과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의 작정하신 일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신실하게만 살아야 할 것이다.
계7장 흰옷 입은 무리
1-8절, 인맞은 자의 수 14만 4천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말씀은 앞장과의 관계에서 볼 때 시간 순서대로가 아니고 환난 시대에 대한 계시 중간에 삽입된 위로의 말씀이다. 네 천사, 땅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의 바람 등은 온 세상을 가리키는 일상적 표현이다. 바람은 환난의 바람을 가리킨다. 네 천사가 땅 사방의 바람을 잡고 있다는 것은 성도가 감당할 만한 것 이상의 환난을 하나님께서 통제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24:21, 22,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 3]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의 한 천사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치기까지 환난을 중지시켰다. 인을 친다는 것은 확인과 확증의 표시이다. 중요한 문서들에는 그 문서를 쓴 자의 도장을 찍는다. 그것은 확인의 도장이다. 하나님의 인은 인맞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확인하는 것이다. 즉 구원의 보장이다. 이것은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소유로 인치셨으므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8:35, 38, 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4-8]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14만 4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1만 2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갓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1만 2천이라.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단 지파가 빠졌다. 그 대신 레위 지파가 들어 있다. 또한 에브라임 지파 대신 요셉 지파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이스라엘 지파 중 인맞은 자 14만 4천은 문자적으로 14만 4천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고, 상징적으로 구속받은 모든 성도의 완전 충만한 수를 가리킨다고 본다. 12는 3과 4를 곱한 수로서 완전한 수요 1000은 충만한 수이다. 그러므로 12x12x 1000은 완전 충만한 수를 상징할 만하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의 수인 14만 4천을 세상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의 상징으로 볼 만한 근거는, ① 본문이 일반적인 이스라엘 12지파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며, ② 요한계시록 9:4의 황충 재앙에서 그 재앙이 이마에 인맞지 아니한 자들에게만 임하는데, 거기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 ③ 요한계시록 14:3에 보면, 14만 4천은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구속받은 성도들을 이스라엘 지파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9-17절, 흰옷 입은 큰 무리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흰옷 입은 큰 무리는 전절에서 말한 14만 4천과 동일한 무리라고 본다. 4절은 그 무리가 대환난 전에 인침을 받는 것을 보이고, 본절은 대환난 후에 평안을 누리는 것을 보인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말은 교회의 세계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온 세계에 하나이며 그 구성원들은 온 세계에 속한다.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다는 말은 구원받은수가 충만함을 말하며, 이것이 14만 4천의 상징적 의미라고 본다. 흰옷은 역시 성결과 의를 가리키며, 종려가지는 승리와 기쁨을 상징할 것이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대환난을 무사히 통과하여 승리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여기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힘찬 찬송이 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결국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결국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회개할 수도 믿음을 가질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시고 깨달음을 주셔야만 그가 회개하고 주를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하고 믿어야 구원을 받지만, 회개와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셔야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롬 9:15, 16, 18). 사람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의 길을 지시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능력의 오른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11, 12]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서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천사들은 성도들의 찬송에 화답하였다. 그들은 구원이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일임을 노래한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나 같은 죄인을 그의 기이한 방식으로 불러주셨고 그의 능력으로 나의 죽었던 영혼을 살리셨고 나의 믿음을 지키고 거룩의 열매를 맺도록 나를 보존해 주셨다.
[13, 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난을 통과하여 나오는 흰옷 입은 성도들에 대한 환상은 대환난을 직면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환난을 통과할 성도의 무기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다. 요한일서 5:4, 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성도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나 믿지 못하는 자는 환난에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종교적 형식은 소유했으나 참 종교의 실질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알곡이 아니고 쭉정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속죄 신앙을 가진 자마다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
[15-17]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대환난을 통과한 승리한 성도들은 천상에서 완전한 평강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을 먹이시고 마시우시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심으로써 더 이상 주림이나 목마름이나 더위로 인한 해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장의 중요한 진리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대환난을 통과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인치심이 있기 때문에 잘 감당하고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환난을 통과해야 할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어린양의 피에 우리의 옷을 빨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확신해야 한다. 그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할 것이다.
계8장 일곱 나팔 (1)
1-6절, 일곱 나팔과 금향로의 환상
[1, 2]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半時)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侍衛)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6장에 기록된 일곱 인 중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의 환상은 전쟁, 기근, 죽음, 순교, 큰 지진 등 대환난 시대에 대한 묘사이었다. 거기에는 땅 4분의 1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었다(6:8). 이제 일곱째 인의 환상인 일곱 나팔 재앙은 좀더 구체적이고 좀더 강화된 재앙이다. 이 재앙을 나팔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경고의 뜻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개의 경고요, 믿는 자들에게는 기도와 믿음과 순종과 전도로 더욱 환난을 준비하라는 경고일 것이다. 그러나 16장에 일곱째 나팔로 계시될 일곱 대접은 하나님의 경고의 시간이 지나고 무서운 진노의 심판이 선포된다고 생각된다. 본문의 ‘반시 동안쯤의 고요함’은 다가올 환난과 재앙이 심히 크고 두려울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과 기도로 준비해야 할 것이며 불신자는 이제라도 회개해야 할 것이다.
[3-6]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金)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香煙)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이 환상은 성도들의 기도들이 하나님께 올려지며 또 그 기도들의 결과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힘 있게 시행됨을 나타낸다. 성도들은 무엇을 기도하는가? 성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다 시행되기를 기도할 것이다. 기도는 성도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며 사탄과 악령들의 일들이 파하여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게 한다. 우리는 고난의 세상 속에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한다.
7절, 첫째 나팔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3분의 1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3분의 1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일곱 나팔의 재앙은 문자적으로 성취될 수 있으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것들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려면 정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나팔의 재앙은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는 것이다. 그 불로 인해 땅의 3분의 1과 나무들의 3분의 1과 모든 풀들이 태워질 것이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 대 화재 사건이 될 것이다. 땅은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므로 땅과 나무들의 3분의 1과 모든 풀들이 불태워진다는 것은 실로 사람들의 생활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땅과 나무들의 3분의 1만 타고 3분의 2가 남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요 성도들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8절, 둘째 나팔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3분의 1이 죽고 배들의 3분의 1이 깨어지더라.
둘째 나팔의 재앙은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되고 바다의 생물들의 3분의 1이 죽고 배들의 3분의 1이 파괴될 것이다. 이것도 문자 그대로 성취될 수 있다. 바다도 사람들의 주요한 생활 터전이며 배들은 특히 어부들과 상인들의 주요 생활 수단이므로 그 재앙으로 인한 타격도 매우 클 것이다.
9, 10절, 셋째 나팔
[9,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3분의 1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3분의 1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셋째 나팔의 재앙은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강들과 물샘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늘의 별들도 하나님이 떨어지게 하시면 떨어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큰 별은 강들과 물샘들의 3분의 1을 쑥과 같이 쓰게 만들 것이며 그 쓴 물을 마시는 자들은 죽게 될 것이다. 물은 사람이 사는 데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람의 몸은 70퍼센트가 수분이라고 한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런데 물들의 3분의 1이 오염되어 마실 물이 적어졌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겠는가?
12절, 넷째 나팔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3분의 1과 달 3분의 1과 별들의 3분의 1이 침을 받아 그 3분의 1이 어두워지니 낮 3분의 1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넷째 나팔의 재앙은 해와 달과 별들의 3분의 1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도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이 어둡게 하시면 어두워질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그것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해의 빛과 열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그 빛이 어두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계신다. 빛의 양이 줄고 어두움이 늘어남으로써 지구 전체의 온도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재앙이다.
위의 네 가지 재앙들은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동시적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것들은 자연세계의 재난들이다. 이것들을 문자적 의미가 아니고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정당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재앙들은 복음서에 증거된 예수님의 종말 예언과 일치한다. 마태복음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후에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이 올 것이다.
13절, 한 독수리의 외침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위의 네 가지의 나팔 재앙들은 다 두려운 재앙들이다. 그러나 남은 세 개의 나팔 재앙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를 통해 그 재앙들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 화, 화가 될 것을 선포하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8장에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기도에 힘써야 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연과 같이 올리운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성도들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된다. 대 환난의 성취도, 악인들에 대한 공의로운 보응도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악한 환경 속에서도 항상 깨어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장차 일어날 천재지변을 두려워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예언하신 바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기록된 내용들은 문자 그대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장차 우리 앞에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하여도 우리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이것이 환난시대를 위한 준비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교훈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에게는 영생이 있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영광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하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거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계9장 일곱 나팔 (2)
1-12절, 다섯째 나팔
다섯째 나팔의 재앙은 황충 재앙이다. 그것도 앞의 재앙들과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본절에 언급된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을 많은 주석가들은 사탄 혹은 타락한 천사로 보고 어떤 이들은 정반대로 거룩한 천사로 본다. 그러나 이 별을 말 그대로 하늘의 별로 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넷째 나팔까지도 문자적으로 해석했듯이, 다섯째 나팔도 가능한 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고 한 것은 별이 땅에 떨어져 큰 구멍을 낸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하늘에서 큰 별이 하나 떨어지면 지구에 큰 충격이 생기고 땅 깊은 곳으로부터 구멍이 뚫어질 것이다. 무저갱은 때때로 지옥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단순히 땅속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권한과 허락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천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소행성이란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태양 둘레를 공전하는 수십만개의 작은 별들을 가리키며 지구에 근접하는 것들로 지구 전체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240개 가량이라고 한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2002 NT7이라는 소행성은 직경이 2km로 추정되며 초속 약 28km(시속 약 100,800km)로 달리고 있는데 2019년 2월 1일에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의 충돌 충격은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 2천만개의 위력이라고 하며(미우주항공국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 의하면, 그것은 TNT 100만메가톤의 폭발 충격일 것이라고 함) 그때 엄청난 먼지 구름이 대기권을 덮으므로 태양이 가리워 1년 이상 겨울이 지속될 것이며 충돌 지점의 국가들이 초토화 되는 것은 물론 대규모 해일이 일어나고 오존층이 파괴되므로 2년간 자외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생물체들에 돌연변이와 암과 백내장 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6)
[2, 3]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그 별로 인하여 뚫어진 땅속에서는 큰 풀무의 연기 같은 것이 올라왔고 그 연기로 인하여 해와 공기가 어두워졌다. 그것은 대단한 대기 오염의 사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연기 가운데로부터 황충들 혹은 메뚜기들이 올라왔다. 이 황충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이들은 그것들을 이슬람교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어떤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것들을 사탄의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황충들은 문자 그대로 땅속에서 올라온 특별한 생물체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들 중 하나를 위해 준비된 악한 생물체들일 것이다.
[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땅의 풀과 나무는 문자 그대로 풀과 나무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앞장에서도 수목과 풀, 바다, 고기, 배, 강과 샘, 해와 달과 별들 등을 다 문자적 의미의 수목과 풀, 바다와 고기와 배, 강과 샘, 해와 달과 별들로 보았다. 황충 재앙은 자연 세계에 내리는 재앙이 아니고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자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이다.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들’은 재앙에서 면제됨을 보인다. 하나님의 재앙은 때때로 차별적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들을 애굽에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했던 고센 땅에는 그것들을 내리지 않으셨던 것과 같다. 시편 91:1-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 . .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白晝)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5, 6]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황충 재앙은 다섯달 동안 고통을 주는 재앙이다(5, 10절). 황충들은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전갈은 쏘는 독을 가진 생물체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에게 다섯달 동안 이러한 전갈의 쏘는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것이다.
[7-10]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戰場)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본절은 황충들의 모양을 묘사한다. 이 황충은 보통 메뚜기와 달랐다. 전쟁을 위해 예비된 말들 같다는 것은 기동성을 보이고,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쓴 것은 그들의 활동이 승리적임을 보이며,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은 그것들의 지혜를 보이고, 사자 같은 이는 그것들의 잔인함을 나타내고, 병거와 많은 말들의 소리 같은 그들의 날개들의 소리는 두려움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들은 악인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준비된 생물체이다.
[11, 12]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無底坑)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사탄은 땅속에서 올라오는 저 황충들의 왕이다. 아바돈, 아볼루온은 ‘파괴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탄에게 해당되는 명칭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일들, 즉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약 이스라엘 나라와 신약교회에 이르기까지 파괴하는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나라와 교회를 세우신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재앙이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에게 무저갱의 열쇠를 줌으로 이루어졌다. 그 열쇠를 주실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주기도 하시고 주지 않기도 하신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재앙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충 재앙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자들에게만 고통을 주는 재앙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 즉 심령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는 그 재앙이 아무런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또 그 재앙은 단지 다섯달 동안만 계속되는 재앙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재앙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편에 서서 참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13-21절, 여섯째 나팔
여섯째 나팔 재앙은 유브라데 강 주위에서 일어날 큰 전쟁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된다.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금단은 향단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한다. 향단의 뿔은 기도의 능력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기도에 능력으로 응답하신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작정하신 종말 사건들은 하나씩 이루어질 것이다.
[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유브라데강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를 통과하여 페르사만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 주위에는 중동 산유국들이 있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들을 놓아주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권한으로 억제하고 계시던 것을 풀어주라는 뜻이다. 그것은 분명히 중동 지역이 세계적인 전쟁의 격전지가 될 것을 암시한다. 과연 중동은 전 세계의 석유의 주 공급원이라는 점과 그곳에는 현재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계속되고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세계적인 전쟁의 화약고가 될 만하다.
[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연,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3분의 1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유브라데강 주위에서 일어날 전쟁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 여섯째 나팔을 불 때가 되면 그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의 정확한 연도와 월일과 시각을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만세 전에 다 아실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뜻대로 작정하셨다. 전쟁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 말세에 중동에서 일어날 거대한 세계적 전쟁도 그러하다.
그런데 그 전쟁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쟁으로 온 세계 인구의 3분의 1은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제3차 세계대전을 암시한다. 20세기에 일어난 제1, 2차 세계대전도 참혹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은 약 천만명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은 약 1700만명이었고 민간인까지 합하면 약 5천만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절에 예언된 이 전쟁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죽게 할 가장 참혹한 전쟁이다. 현재의 지구의 인구를 60억으로 본다면, 요한계시록 6장에 예언된 넷째 인으로 4분의 1이 죽으면 45억이 남고 그 중에서 3분의 1이 죽으면 약 15억이 죽는 셈이 된다. 그러면 세계 인구는 현재의 2분의 1로 줄어들 것이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죽일 전쟁이 가능한 것은 인류는 무서운 원자폭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차 세계대전은 화생방 전쟁, 즉 화학가스 전쟁, 생물학적 병균 살포 전쟁, 방사능 핵전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무서운 전쟁이다. 구 소련의 의학연구소장 리콜라이 볼로킨은 핵 군비축소에 관한 과학자 회의 연설에서 “핵전쟁이 나면 3분의 1의 인구가 죽고 나머지는 핵암으로 쓰러질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7) 그의 말은 성경의 예언과 일치한다.
[16] 마병대의 수는 2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본절은, 예언된 세계대전에 2억의 군인들이 동원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는 말씀은 그 수가 실제적으로 가능한 수임을 암시한다. 핵을 보유한 미국과 영국 등과 아직 공산주의적 신념을 버리지 않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슬람교 신앙으로 단합될 아랍 국가들의 총인구를 생각한다면, 중동에서 발발할 제3차 세계대전에 참여할 군인들의 이 거대한 수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특히 중국은 세계 전체 인구의 약 5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2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17-19]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본절은 제3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군인들이 사용하는 현대적 무기들을 묘사하는 것 같다. 군인들은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으로 무장하였고 그들이 조종하는 탱크나 비행기나 기타 무기들은 그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을 것이다. 그것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죽을 것이다. 그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다는 것은 현대 무기들이 전후에 화력이 장착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20, 21]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銅)과 목(木), 석(石)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여섯째 나팔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자들은 회개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재앙보다 더 슬픈 사실이다. 이 사실은 부수적으로 대 환난시대의 환난들과 재앙들의 목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택자들의 교정과 회개를 위함이 아니다. 택자들은 이미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았다. 환난과 재앙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분노뿐이다. 그래서 6:16, 17에서는 이것을 ‘어린양의 진노,’ ‘그의 진노의 큰 날’이라고 불렀다. 8:13에서는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나팔을 두고 화, 화, 화라고 표현하였다.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화를 내리시는가?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무슨 죄 때문인가? 로마서 1장에 언급된 대로 불경건, 음란, 불의의 죄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불경건의 죄 가운데는 기독교계 안에서 성경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신앙 생활과 교회 봉사를 하려고 하는 많은 주의 종들의 행위들이 포함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세계적인 큰 전쟁의 불행을 통과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사람은 재앙이 온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회개할 기회가 올지는 미지수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행 11:18).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할 마음이 들 때 회개해야 한다. 그때가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은혜를 주시는 때이다. 우리는 회개를 내일로 미루지 말고 회개해야 할 때에 즉시 회개해야 한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가올 세계적 전쟁을 두려워말자. 그것은 지구의 인구 3분의 1을 죽일 무서운 핵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뜻은 세계적 전쟁을 포함한 마지막 대 환난까지 포함되어 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섬기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영광스런 천국만을 사모하자. 세상은 장차 불 타버릴 장망성(將亡城)이다. 단지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혹시 연약하여 죄를 지었을지라도 즉시 회개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회개치 않고 완고한 마음을 가지면 영영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계10장 작은 책을 먹음
요한계시록 10장은 환상 중에 사도 요한이 천사가 들고 있는 책을 받아 먹은 일을 증거한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시간이 급한 종말 사건들에 대해 계속 예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4절, 작은 책을 든 천사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 기둥 같으며.
5장에서도 ‘힘 있는 천사’가 나타났는데, 본절의 ‘힘센 천사’도 원문에는 같은 말이다. 그 천사는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왔고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있고 얼굴은 해 같고 발은 불기둥 같았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창 9:13). 본절의 천사는 매우 위엄 있고 영광스러워서 많은 주석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해석하지만, 신약성경이나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로 표현한 곳이 없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천사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6절에 하나님께 맹세하여 말하는 것도 천사에 더 적합하다.
[2, 3]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천사가 들고 있는 그 책은 닫혀진 책이 아니고 펴있는 책이었다. 사도 요한을 통해 증거되는 종말 예언은 공개된 내용, 계시된 내용, 알려진 내용이다. 그 천사가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선 것은 종말 예언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나타낸다. 과연 그 천사는 그 책을 들고 바다와 땅을 밟고 서서 사자같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때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였다. 종말 예언의 말씀은 말세에 큰 소리로 외쳐야 할 경고의 말씀이다.
[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일곱 우뢰의 소리를 기록하려고 했으나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그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하였다. 일곱 우뢰 소리들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미래의 사건들의 계시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기록된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요한계시록 22:18, 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5-7절, 천사의 맹세
[5-6]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시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시다. 그 분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그 분만이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신다. 종말의 사건들과 심판은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세상의 창조자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다. 우리가 바라고 의지할 분은 그 분밖에 아무도 없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은 ‘시간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그 천사가 맹세하면서 말한 내용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시다(골 2: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成肉身), 그의 대속(代贖)의 죽으심, 그의 육체적 부활, 승천, 재림이 다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때가 되어 다 이루어졌고, 이제 그의 재림 하나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세계의 역사는 끝없이 윤회(輪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다. 역사는 일직선의 과정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그의 모든 계획이 성취될 것이다.
8-11절, 책을 취하여 먹으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하늘에서 나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천사의 손에 펴 놓인 그 책을 가지라는 말은 그 책을 취하라는 말이다. 그 책은 종말 예언의 책인데, 요한계시록 전부를 가리키든지 아니면 11장부터의 내용을 가리킬 것이다. 본 장에서 그 책 8) 을 때때로 ‘작은 책’ 9) 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이들의 해석대로 ‘가치 없는 내용의 무시된 책’이라는 뜻보다는 단순히 성경 전체에 비해 작은 분량의 책이라는 뜻일 것이다.
[9, 10]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책을 취하여 먹는다는 것은 종말 예언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뜻할 것이다. 성경은 영의 양식, 생명의 양식, 인격의 양식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원만히 이해하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성도는 성경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이것은 성도에게 거룩한 의무요 복된 특권이다. 입에 단 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의 즐거움을 말할 것이다(시 19:10). 그러나 배에 쓴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내용을 음미할 때 오는 마음의 고통과 이 말씀을 지키며 전하려 할 때 예측되는 고난을 나타낼 것이다.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요한은 이제까지 예언했지만, 다시 온 세계의 나라들과 백성들을 위해 예언해야 한다. 요한이 먹은 종말 예언의 말씀들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종말 예언은 공개된 내용, 계시된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로, 대 종말이 곧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이 더 이상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종말 예언은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것은 바로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다.
계11장 두 증인
1-2절, 성전을 척량함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지팡이 같은 갈대는 길이를 재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은 구약적 표현이다. 구약의 성전은 일차적으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또한 그의 몸된 교회인 참된 성도들도 가리켰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 . . 알지 못하느뇨?”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받은 참된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척량한다’는 말은 소유물의 확인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 그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보존하신다.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성전 밖 마당은 형식적 교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은 성전 뜰만 밟는 자들, 중생(重生)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거나 교양적으로 다니거나 가족이나 친척의 비위를 맞추려고 다니거나 인간적 교제나 세상적 유익을 위해 다니는 자들이다. 그들은 본질상 이방 사람들이다. 이런 형식적 교인들은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밖에 있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성을 가리켰는지도 모르나, 아마 이름만의 기독교 세계를 가리킨 듯하다. 그 속에는 천주교인들, 자유주의자들, 이단종파 신봉자들이 다 들어 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 연합 운동의 세계이다. 이름만의 기독교 세계는 이방인에게 마흔 두달, 즉 3년 반 동안 짓밟힐 것이다. 이 3년 반은 대환난 기간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3년 반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너무 길지 않은 어떤 기간을 상징할 것이다.
3-14절, 두 증인
[3, 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내가’는 문맥적으로는 천사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이시다. 천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 두 증인이 나타나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간, 즉 3년 반 동안 말씀을 전할 것이다. 둘이라는 수는 확실한 증거를 위한 수이다. 예수께서는 70인 전도자들을 둘씩 둘씩 내보내셨다(눅 10:1). 굵은 베옷은 회개하고 금식할 때의 복장이다. 그들은 기독교계의 죄악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회개하며 기도할 것이다.
1260일간, 즉 3년 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혹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짓밟고 있는 신약 교회 시대를 가리킬지도 모른다.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셨다(눅 21:24). 그러나 가능한 문자적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여섯째 천사의 나팔로 계시된 유브라데강에서 시작되는 전쟁, 즉 3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방인들이 형식적 기독교 세계를 핍박하는 기간이다. 그 기간에 두 증인이 나타날 것이다.
두 증인은 이 땅의 주, 곧 하나님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구약 스가랴 4장의 환상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에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켰다. 본절의 두 증인은 3년 반 환난 기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두 인물을 가리킨다. 그들이 감람나무라고 불리운 것은 성령의 끊임 없는 공급을 받기 때문이고 촛대라고 불리운 것은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바르고 온전한 뜻을 전하기 때문이다.
[5, 6]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그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 같은 능력의 종들일 것이다. 모세가 물로 피가 되게 하는 기적을 행하였듯이, 엘리야가 3년 동안 기근이 들게 하고 또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였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칠 것이다. 또 그들을 해하려는 자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구약시대의 모세와 엘리야같이, 그들은 그 사역기간 동안 여러 능력의 일들을 행할 것이다.
[7, 8]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러나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곧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그 두 증인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무저갱’은 깊은 어두움의 세계를 가리킨다. 짐승으로 표현된 적그리스도는 짐승과 같이 사납고 난폭하며 이성과 도덕이 없는 인물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예언된 ‘불법의 사람’으로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전제적, 독재적 정치인을 가리킨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초대교회로부터 역사하여왔다. 역사상 로마제국과 로마 천주교회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활동했다. 그들은 많은 참된 성도들을 핍박하였고 또 죽였다. 그러나 마지막 날들에 적그리스도라는 인물이 나타날 것이며 그가 나타나면 그 두 증인과 싸워 이길 것이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두 증인의 시체가 놓여질 큰 성은 적그리스도의 본거지일 것이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라고 묘사되었다. 소돔은 음란과 부도덕의 도시요, 애굽은 우상숭배와 압제의 나라이었다. 또 그 도시는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즉 예루살렘이라고 말한다. 그 도시는 이처럼 소돔과 애굽과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그 도시는 뒤에 나올 음녀와 바벨론으로 묘사된 큰 도시와 동일한 도시라고 보인다. 그것은 참된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타락한 종교적 교권주의자들의 도시를 가리킬 것이다. 역사상 로마가 바로 그런 도시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날 그 도시가 어디인지 알게 될 것이다.
[9, 10]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온 세상 사람들은 그 두 증인의 시체를 3일 반 동안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며 선물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증인의 설교는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내용들이었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1, 12] 3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도 잠시 동안뿐이다. 3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영 혹은 기운이 들어감으로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날 것이고 구경하는 자들은 크게 두려워할 것이다. 더구나 부활한 그 증인들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같이, 예수님같이, 또 두 명의 사람들이 승천할 것이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주님의 재림 시에는 모든 성도들이 재림의 주를 영접하기 위해 하늘로 올리울 것이다.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두 증인의 승천이 있을 때 그 큰 성에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파괴되고 7천명이 죽게 될 것이며, 그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바로나 느부갓네살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행위가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출 9:27; 10:16, 17; 단 2:46, 47).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세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첫째 화는 황충 재앙이고, 둘째 화는 유브라데강의 큰 전쟁과 그 후에 있을 두 증인의 사역과 큰 지진이다. 이제 마지막 화만 남았다. 그것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계시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해본다. 첫째로, 우리는 성전 뜰만 밟는 형식적 교인이 되지 말고,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참된 성도들이 되자. 그들은 속죄 신앙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교훈을 겸손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자. 디모데후서 4:3, 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셋째로, 우리는 진실한 증인들처럼 순교를 각오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증거하자.
15-19절, 일곱째 나팔과 하늘의 찬송
본문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과 그 후의 일들 중 하늘의 큰 음성과 24장로들의 감사의 찬송, 그리고 하늘 성전이 열린 광경 등을 증거한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하니.
일곱 천사들의 나팔로 말미암은 종말 예언들이 하나씩 계시되는 가운데, 이제 마지막 천사의 나팔로 말미암은 종말 예언이 계시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외치는 소리이다. 그것은 승리의 외침이었다. 그 내용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 하나님과 그의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 나라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 주’는 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역사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예언했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셨다. 신약 시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시대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다 구원받아 주께로 돌아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수가 찰 때,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목표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고 완성되는 것이 바로 천국이다. 종말 사건들은 이 목표를 이룰 것이다.
[16, 17]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24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시도다.
사도 요한은 24장로들이 하늘의 큰 소리에 화답하여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의 찬송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24장로들은 신구약 시대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 같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12지파들과 신약 시대의 12사도들을 대표하는 것일 것이다. 24장로들은 하나님을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장차 오실 자’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재림의 때가 다 되지는 않았지만, 재림의 시간을 미리 앞당겨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히 드러났음을 노래한 것이다.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17절과 18절에 나타난다. 원문에는 ‘전능하신 이여’라는 말씀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감사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큰 권능을 가지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활동하던 사탄과 악령들의 일들이 끝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하심은 우리의 감사와 찬송의 이유요 내용이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로소이다 하더라.
본절도 계속 감사의 이유를 말한다. 24장로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내용에 대해 좀더 말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에 보면, 이방인들이 분노했을 때 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다.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도 주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고 공정한 심판이다. 그 심판의 결과는 상과 멸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며, 세상을 멸망시키는 자들에게는 멸망을 주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24장로들의 감사의 이유이었다.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사도 요한은 또한 하늘의 성전이 열리는 광경을 보았다. 하나님의 성전은 천국 자체를 상징한 듯하다. 요한계시록 21:22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에는 성전이 없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브리서 9:23, 24에는 하늘 성소에 대해 말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성전 혹은 성소는 천국 자체, 특히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가리킨다고 본다.
요한은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았고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을 보았다. 그가 성전 안에 있는 언약궤를 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의 심판은 구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공의의 심판이다.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심판의 엄위성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세상 나라는 마침내 주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통치는 그 나라에서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자들은 가장 복되다. 둘째로, 모든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다. 죽은 자들까지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고 공정한 심판이다. 셋째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한 종들과 성도들에게는 칭찬과 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삶을 주실 것이다. 넷째로, 세상에서 악을 행하고 교회를 혼란시키고 세상을 멸망시킨 자들에게는 멸망의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수치와 고통을 당할 것이다.
계12장 사탄이 내어쫓김
본 장은 큰 붉은 용이 하늘에서 내어쫓김과 땅에 있는 성도들과 싸우려는 광경을 증거한다.
1-6절, 용이 여자의 낳은 아들을 삼키고자 함
[1, 2]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요한은 하늘에서 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해를 입은 한 여자의 광경이었다. 이 여자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가 해를 입은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의의 영광을 소유함을 나타내며, 그의 발 아래 달이 있음은 교회가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함을 나타내며, 그의 머리에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쓴 것은 아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나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들을 나타낸다. 아이를 배어 해산하려 한 것은 구약교회가 메시아를 갈망한 것을 나타낸다.
[3, 4]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3분의 1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요한은 하늘에서 또 다른 하나의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큰 붉은 용의 광경이었다. 그 용은 사탄을 가리킨다. 그가 크고 붉은 것은 그의 세력이 크고 그 잔인함이 심함을 나타낸다. 그의 일곱 머리는 그의 지혜가 매우 큼을 보이며, 그의 열 뿔은 그의 힘이 매우 큼을 암시한다. 사탄은 하늘의 별 3분의 1, 즉 하늘의 천사들의 3분의 1을 속여 타락시켰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들 혹은 악령들이다. 그 용은 그 여자가 낳을 아이를 삼키려 하였다. 그것은 사탄이 헤롯왕을 통해,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일을 가리킨다(마 2장). 사탄은 그리스도의 출생 때부터 그를 죽이려 하였다.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자는 한 아들을 낳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그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는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리워 갔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는 원어는 직역하면 ‘그 아이가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리워 갔더라’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킨다.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신약 교회는 1260일 동안 사탄의 핍박을 피하도록 광야에 하나님의 예비하신 피난처를 가지고 있었다. 1260일은 신약 시대를 가리키든지, 혹은 대환난 기간 중의 일부분을 가리킬 것이다.
7-12절, 용이 하늘에서 내어쫓김
[7, 8]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하늘에서 천사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은 용과 그의 사자들과 전쟁을 치루었다. 이 전쟁에서 용과 그의 사자들은 이기지 못하여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 이 전쟁은 언제 일어났는가 혹은 일어날 것인가? 아마 이 전쟁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완성 직후이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요한복음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하늘에서 내어쫓겼다.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큰 용은 옛날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했던 그 옛 뱀, 곧 마귀 혹은 사탄이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이다. 사탄과 그의 미혹을 받은 다른 천사들은 다 땅으로 내어쫓겼다. 그들은 지금 성도들을 속이고 시험에 떨어지게 하고 위협하고 핍박하는 자들이다. 베드로전서 5:8,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요한은 하늘의 큰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영혼들의 음성이 분명하다. 원문에는 ‘이루었으니’라는 말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음성의 내용은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밤낮 성도들을 참소하던 사탄이 쫓겨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탄의 추방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증되었다.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또 그 음성은 진실한 성도들이 승리하였음을 말했다. ‘여러 형제가’라는 원어는 단순히 ‘그들은’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앞절의 ‘우리 형제들을’이라는 말을 받는다. 그들은 죽기까지 주님을 따랐고 믿었고 사랑하였다. 로마서 14:7, 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들의 승리의 비결, 승리의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는 어린양의 피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의 증거하는 말씀 때문이다. ‘인하여’라는 원어 10) 는 ‘때문에’라는 뜻이다.
어린양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의 피는 효험이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고 하셨다. 또한 복음의 말씀도 성도의 승리의 힘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0:32에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였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성도들은 즐거워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밤낮 성도들을 헐뜯고 비난하던 사탄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이 땅에 내려왔고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성도들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사는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13-17절, 큰 용이 여자를 핍박함
[13-16]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사탄은 교회 즉 성도들을 핍박한다. 그러나 세상의 성도들에게 사탄의 핍박을 피할 길도 있다. 큰 독수리의 두 날개는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의 날개이다. 믿음과 순종의 날개를 가진 성도들은 피할 곳을 가지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심지어 땅도 성도들을 도와 사탄의 악한 활동을 막는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신약교회 시대이든지, 아니면 마지막 대환난 기간의 일부인 1260일을 가리킨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표현은 환난의 시작과 강화와 절단을 묘사했는지도 모른다.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사탄은 진실한 성도들과 싸우려고 준비하였다.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은 이미 죽은 자들과 순교자들을 제외하고 지상에 살아 있는 진실한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롭게 사는 자들이다. ‘모래 위에 섰더라’는 본문은 전통사본에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 ‘내가 바다 모래 위에 서서 보니’라고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이 존재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대적하며 세상을 속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알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장차 세상에 성도들과 사탄과의 큰 싸움이 있을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진실한 성도들을 핍박하고 그들과 싸우려고 준비하였다. 우리도 사탄의 도전에 대응하여 깨어 싸울 차비를 해야 한다. 에베소서 6:10, 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셋째로,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앞서간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리고 자기의 증거하는 말 때문에 사탄을 이기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들이며(11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이다(17절). 우리에게도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과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계13장 두 짐승
1-10절, 첫째 짐승
[1, 2]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이 첫째 짐승은 적그리스도라고 이해된다. 그것은 어떤 국가인 것 같다. 구약 다니엘 7장에서는 세계적 제국들을 짐승들로 표현하였다. 사도 바울은 주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였다(살후 2:3). 이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세계 열국들 중에서 나타날 것을 말한다.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17장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그 나라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 나라는 세상적으로 많은 지혜와 능력을 가질 것이다. 그 짐승의 머리들에 참람된 이름들이 있는 것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심히 불경건하고 신성모독적일 것을 나타낸다. 초대 시대에 로마 황제들은 신적 명칭들을 자신들에게 돌렸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나라의 지도자들도 신성모독적일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또한 표범같이 날쌔고 곰같이 덮치고 사자같이 찢어삼키는 힘과 파괴력이 있다. 그것은 강력하고 무서운 세력이다. 그것은 그 나라의 배후에 사탄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 나라에 준다.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사탄의 도구인 것이다.
[3, 4]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한 지도자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회복되므로 온 땅이 이상히 여겨 그 나라를 따르고 사탄이 그 나라에 권세를 주므로 온 세상의 사람들은 사탄에게 경배하며 그 나라에 경배하며 그를 높이고 추앙할 것이다. 온 세상의 분위기가 이렇게 불경건하고 반기독교적이게 될 것이다. 사탄 숭배는 보편화 될 것이다. 이미 요즘 세속적 록음악들은 이런 사탄 숭배를 이미 선보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음악과 춤에 매혹되고 있다. 불쌍한 일이다. 기독 청년들은 시대의 풍조를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5-7]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을 향해서와 하늘에 거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참람된 말들을 많이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주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말했다(살후 2:3, 4). 예수님께서도 세상 끝날에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5).
또 그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42개월 즉 3년 반 동안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 즉 온 세계를 다스릴 권세를 받을 것이며 또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될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큰 핍박을 당하게 되고 감금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3년 반은 많은 성도들이 순교하는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외적으로는 그러할지라도, 참된 성도들은 결코 그 악의 세력에게 지지 않는다. 성도들은 죽음으로써 믿음을 지키며 승리할 것이다.
[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창세 이후로’라는 말은 원문에서 ‘죽임을 당한’이라는 말에 연결되게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어린양의 제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 속죄 신앙만이 승리적 신앙이다. 우리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 성도가 자신의 죄악성과 세상의 악과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의 피밖에 없다. 이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참으로 믿는 자는 승리한다. 그러나 속죄의 어린양을 모시지 못한 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구원은 종교의 어떤 외적인 형식에 있지 않다. 사람의 구원은 속죄의 어린양을 마음으로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속죄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은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게 굴복할 것이다.
[9, 10]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악한 자들의 악에 대해 공의로 징벌하신다. 성도들을 사로잡는 적그리스도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사로잡힐 것이며 성도들을 칼로 죽이는 그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의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과 순교를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와 믿음이다.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르며 고난 중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
11-18절, 둘째 짐승
[11, 12]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이 둘째 짐승은 16:13; 19:20; 20:10에서 ‘거짓 선지자’로 불리웠다. 첫째 짐승이 적그리스도적 국가라면, 이 둘째 짐승은 배교적 교회이다. 그가 땅에서 올라오는 것은 그의 근원을 보인다. 참 선지자는 하늘로부터 사명과 영감과 말씀과 능력을 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자이지만, 거짓 선지자는 땅에 속하고 헛되고 죄악된 것만을 구하는 인간에 불과하다(빌 3:19). 그에게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는 것은 그가 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사탄의 말과 같다. 그가 전하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에 반대된다. 이 배교적 교회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권세를 가지고 행하고 세상 사람들을 그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충성하고 복종하게 한다.
[13-15]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도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말세에 나타날 거짓 종교는 큰 기적들을 행하는 은사주의적 종교이다. 주께서는 이미 예언하시기를,“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하셨고(마 24:24), 바울 사도도 예언하기를,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하였다(살후 2:9, 10). 그 거짓 선지자는 우상숭배자요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죽이는 무서운 핍박자가 될 것이다. 타락한 교회는 우상숭배적 교훈과 행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16-18]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
그 거짓 종교 지도자 혹은 그 배교적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른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그 표 없이는 매매를 못하게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장차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벌써 컴퓨터로 이런 류의 통행증이 세계의 특수 부문들에서는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에 말한 그 짐승의 숫자 666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숫자를 위한 글자가 따로 없고 글자의 기본 알파벳으로 수를 표기한다. 예를 들어, 초대 시대에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는 히브리어로 666이 된다. 11) 종교 개혁자들 루터와 칼빈, 존 낙스 등과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등은 그 짐승을 로마 천주교회와 교황으로 보았다. 다른 많은 이들은 그 짐승을 세상 종말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나라로 본다. 그 나라의 이름을 숫자로 환산하면 666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배운다. 첫째로, 장차 성도들에게 사탄의 극심한 핍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거짓된 종교 지도자나 배교적 교회를 통해 올 것이다.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자는 물건을 사지 못하게 함으로써 참된 성도들을 핍박할 것이다.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 즉 속죄 신앙이 없는 자들은 그 짐승에게 굴복할 것이지만, 참된 성도들은 순교의 죽음으로써 승리할 것이다.
둘째로, 참된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들은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어떤 혹독한 시험과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악과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참된 성도들은 마침내 이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연약 때문에 불완전하게 되거나 부분적이게 되는 구원이 아니고 승리적이며 완전하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 위해 피흘려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시작하신 착한 일을 주의 재림 때까지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구주이시다.
여러분은 속죄의 신앙을 준비했는가? 여러분은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를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만일 그렇지 못한 분이 있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으라. 그에게 나아와 그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구원을 받으라.
계14장 구속받은 성도들
요한계시록 14장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임할 일들의 계속으로 큰 용과 두 짐승들의 핍박 속에서도(12, 13장) 구속받은 성도들이 승리할 것을 증거한다.
1-5절, 구속받은 성도들
[1-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14만 4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요한은 어린양이 시온산에 선 것을 보았다. 그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시온산은 천국이다. 히브리서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또 요한은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 14만 4천은 7장에서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맞은 자들이다. 그들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 즉 교회를 가리킨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소속과 소유권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다.
요한은 또 하늘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았으며 거문고 타는 자들의 거문고 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히 14만 4천명이 부르는 찬양의 소리이었다. 참된 성도, 참된 교회는 지상과 천상에서 찬송을 부를 것이다.
요한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 노래는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만 4천인 밖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는 새 노래이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좋아하며 불렀던 노래들, 민요든지 유행가든지, 그것들은 다 옛 노래들이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심지어 죄악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노래를 좋아하지 않으며 또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새 노래를 부른다. 새 노래는 구원의 노래이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참된 속죄 신앙을 가진 자들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며 감사하고 또 증거하는 노래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새 노래를 배우고 부르고 사랑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시편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4, 5]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본문은 구속받은 성도들의 특징들을 묘사한다. 첫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순결한 자들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들은 여자들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했으니 이는 그들이 처녀임이라.” 여자들은 세상을 가리킨다. 참된 성도들은 구원받은 후 또다시 죄악되고 멸망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 술 마시고 방탕하였을지라도, 이제 그들은 다시 그런 세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을 사랑했다면, 그들은 자신의 몸을 더럽힌 여자와 같았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다(고후 11:2, 3). 또 그는 고린도교인들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한 것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권면하였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모든 잘못된 사상과 교리, 모든 잘못된 행위와 풍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며 섬기며 경배하며 오직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뜻만 믿고 그를 따르며 섬겨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순종하는 자들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더라.” 우리는 사람을 따라가는 자들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 있으며 심지어 목사도 때때로 그러하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며, 성경에 기록된 그의 말씀과 명령, 즉 목사의 성경적 교훈에 순종하고, 비성경적 교훈은 분별하고 배척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바른 태도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의 명령이 보이는 대로, 그가 어디로 가시든지 그를 따라가는 것이 순종의 삶이다. 주를 따라가는 것은 항상 즐겁고 평안한 길만이 아니다. 주를 따라가는 길에도 수고와 슬픔이 있고 심지어 고난과 핍박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를 즐거이, 자원함으로 따라간다.
셋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첫열매들이다. 본문을 다시 직역하면, “이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첫열매들이 되었더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피조 세계에 관계되며 그 목표는 온 세상의 회복이므로,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첫열매들과 같다. 성도들의 구원이 충만하게 성취되면, 온 세상 만물이 회복되며 새로워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네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본문을 다시 직역하면,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으니, 이는 그들이 흠이 없음이니라.” 흠이 없는 인격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된다. 거짓말하는 것은 작은 죄악이 아니다. 거짓은 사탄의 죄악이며 그 종들의 특징이고, 진실은 하나님과 그 종들의 특징이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참 성도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계속 거짓말하는 자는 참 성도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하늘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의 성도들의 모습을 증거한다. 그들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순결성을 지킨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한 자들이며 흠 없이, 진실되게 산 자들이었다. 오늘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저 십사만 사천 명의 성도들의 모습을 본받자.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고 예수님께 순종하며 흠 없이, 진실되게 살면서 항상 새 노래, 즉 구원의 노래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6-12절, 세 천사들의 외침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요한은 온 세계에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공중에 날아가는 한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 천사들을 사용하신다(계 8:13; 10:1; 11:15).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신속히 수행함을 상징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그것은 어느 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복음이다. 그 효력은 영원하다. 그것은 사람에게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주는 복음이다. 그것은 특히 마지막 심판 전에 온 세계에 증거되어야 할 복음이다.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그 천사는 큰 음성으로 그 복음의 내용을 외쳤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천지와 바다와 샘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에게 경배하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매우 근본적인 진리들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9:10). 거기에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도 있다. 또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한다. 또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죄인에게 필요한 근본적 진리이다.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요한은 다른 한 천사 곧 두 번째 천사의 외침을 들었다. 그 외침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내용이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두 번이나 반복한 것은 그 무너짐의 확실함을 나타낸다. 큰 성 바벨론은 마지막 날에 확실히 무너질 것이다. 이 바벨론은 16:19에서는 일곱째 대접 재앙에서 큰 지진으로 인해 세 갈래로 무너질 큰 성이라고 말했고, 17:5, 18에서는 땅의 임금들과 음행하는 큰 음녀요 그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말했고, 19:3, 10에서는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해 부요함을 얻었던 크고 견고한 성이라고 말했다.
이 큰 성 바벨론에 대해서는 성경 주석가들의 해석이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이 바벨론이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고 본다. 12) 어떤 이들은 이 바벨론이 세상을 가리킨다고 본다. 13) 다른 많은 이들은 이 바벨론이 로마 천주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14)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이 바벨론이 미래의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15) 이 마지막 두 견해가 적절해 보인다. 이 바벨론은 짐승을 탄 음녀(17:3)로서 세속화된 배교한 교회를 가리키며 그것은 로마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큰 성 바벨론은 모든 나라를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먹였다. 여기의 ‘음행’은 육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둘 다 가질 것이다. 배교적 교회는 음행의 풍조를 퍼뜨리는 일에 앞장 설 것이다. 또 그 교회는 이단들을 포용하고 이방 종교들을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의 교회가 될 것이고, 또 세상적 부귀와 향락을 조장하는 세속화된 교회가 될 것이다.
옛날 로마 천주교회는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하였었다. 그것은 큰 성 바벨론과 같았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황청이야말로 성경에 예언된 그 바벨론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온 세계의 배교적 교회들의 연합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또다시 로마 천주교회와 연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전세계적인 배교적 교회의 중심에 또다시 로마의 교황이 서게 되리라고 본다. 또다시 로마시가 전세계의 종교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배교적 교회는 망하고 말 것이다.
[9-11]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요한은 또 다른 천사 곧 세 번째 천사의 외침을 들었다. 그것은,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적 교회 안에서 신앙의 변절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참 성도는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 그는 비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비진리와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참 신앙을 버린 자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잔을 받을 것이며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이다. 거기에서 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미래의 사실이 이러할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오직 인내가 필요하다. 성도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義)이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지만, 의로운 행위로 그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원의 증거이다. 사람이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행위로 열매 맺지 않는 구원이란 없다. 다시 말해, 구원받은 자들은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죄 가운데 사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자는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며 죄를 떠날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참된 신앙은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다. 그것이 보수 신앙이다. 보수 신앙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의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말세에 선포된 영원한 복음을 받아들였는가?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구별하는 잣대가 된다.
둘째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적 교회가 결국 망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 즉 성경적 교훈의 터 위에 세워지고 성경적 교훈 안에서 양육되는 교회를 건립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연합되는 배교적 교회를 분별하고 그것과 타협치 말아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인내로써 바른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바른 신앙이란 성경적인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리킨다. 그 신앙을 지키는 것이 보수 신앙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거룩과 의, 사랑과 진실을 끝까지 실천해야 한다. 참 성도는 인내로써 신앙과 의의 삶을 지켜야 한다.
13절,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됨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은 하늘의 한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음성이었다. ‘자금 이후로’(이제부터)라는 말은 ‘복음 신앙을 가진 이후부터’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복음 신앙은 곧 구원이 되므로 복음을 믿고 죽는 자는 확실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 복되다는 뜻이다. 또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대환난 시대에 순교자들이 많을 것을 암시한다(계 6:11).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님과의 영적 연합 속에서’ 죽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주님 밖에서, 복음 신앙 없이 죽는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모든 죄인에게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눅 16:19-31).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것은 큰 행복이다. 본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그가 그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고와 고생이 많다(시 90:10; 마 11:28). 그러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에게는 참된 안식이 있다. 히브리서 4:3, 10-11,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안식은 바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안식의 세계이다.
둘째는 그가 세상에서 행한 선행들에 대해 보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 본문은 “. . .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며 저희의 행한 일들이 따르리라 하시더라”이다. 우리의 선행이란 천국 들어갈 만한 가치도 없는 보잘 것 없는 것이며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귀히 보시고 상 주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5:8-10,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4-16절, 곡식 추수
[14-16]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利)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요한은 흰 구름 위에서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날카로운 낫을 들고 땅의 곡식을 거두는 인자(人子) 같은 이를 보았다. 요한이 본 그 사람은 구름 타고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가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곡식을 베는 것은 성도들의 구원의 때 곧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가 된 것을 상징한다. 주의 심판의 때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때이다. 가을에 곡식이 다 익으면 추수하여 창고에 들이듯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천국으로 들이신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의 이유이다.
17-20절, 포도송이 추수
[17-20]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利)한 낫를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利)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利)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1천 6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땅의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그들을 포도송이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땅에서 피를 흘리게 될 것을 상징한다. 그것은 큰 전쟁으로 인한 많은 사람들이 피흘림을 암시한다. 피가 말굴레 즉 말의 목까지 닿은 것은 온 세상이 피의 강수가 될 것을 암시한다. 인류의 마지막 전쟁은 많은 피를 흘리는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1600스다디온은 약 300km로서 유대 나라 팔레스틴 땅의 남북의 길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1600이라는 숫자가 땅의 수(4) x 충만의 수(10)의 제곱, 즉 충만한 넓이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무섭고 처참하다.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심히 두려운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복됨을 깨닫자. 복음 신앙을 가지고 죽는 것은 복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참된 안식이 있고 그 선행에 대한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시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며 의와 선을 행하자.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큰 화가 있다. 불경건과 우상숭배는 죄이다. 음란과 미움과 탐욕은 죄이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다. 그것은 많은 피 흘림의 심판일 것이다. 그 피는 온 땅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계15장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
15장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들의 모습과,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에 대해 증거한다.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요한은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한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일곱 천사들이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일곱 재앙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리실 마지막 재앙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이 일곱 재앙으로 마치게 될 것이다. 이 일곱 재앙은 다음 장(16장)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대접 재앙이다. 그것은 앞의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들보다 더욱 심해진 재앙이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요한은 무서운 마지막 대접 재앙에 대해 증거하다가 잠시 멈추고 또 하나의 광경을 증거하였다. 그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을 보았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대환난의 시대를 통과하고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분명히 마지막 재앙에 대한 예언으로 인해 성도들이 두려움을 가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이 있는 광경이다. 지금 영적 싸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미래의 승리를 앞당겨 봄으로써 위로를 받고 더욱 담대함을 얻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그 노래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고 불리웠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불렀던 노래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이한 능력으로 도우셔서 그들을 위협하던 악한 세력을 완전히 파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한 노래이었다. 물론 신약교회가 부를 노래는 모세의 노래가 아니고 어린양의 노래이다. 그러나 그 둘의 내용은 똑같다. 신약교회가 받은 구원은 홍해로부터의 구원, 애굽왕 바로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고 대환난의 세상으로부터의 구원,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거짓 선지자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하다.
그 노래의 첫번째 내용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크고 놀랍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크고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적그리스도와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666)로부터 이기게 하셨다. 노래의 두 번째 내용은 만국의 왕이신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진실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국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의롭고 진실하신 왕이시다. 그는 의롭고 진실하게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신다. 그는 의롭고 진실한 성도들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며 불의하며 악하고 거짓된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신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그 노래의 세 번째 내용은 하나님께서만 거룩하시고 그의 의로우신 행위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만국의 모든 사람이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고 주께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마땅히 가지는 경외심이며 특히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심판을 경험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악한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있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한다.
[5-8]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요한은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하는 광경을 본 후에 이어서 앞에 보았던 그 천사들을 보았다. 하늘에 증거 장막이 열리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들이 그 성전으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그들이 수종드는 심판이 얼마나 성결하고 영광스러운 사역인가를 나타낸다. 그들은 또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을 받았다. 금띠와 금대접도 그들이 수종드는 심판의 위엄성과 영광을 나타낸다. 하늘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하여 연기가 가득하였고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가 없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길이 없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만이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본장은 성도들이 대환난을 이기고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마침내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과 거룩한 심판은 두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승리자들의 노래하는 광경은 대환난을 통과할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 성도들은 반드시 사탄과 세상과 악을 이길 것이다.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성도편에서 하나님만 섬기며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일서 5:4, 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또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참된 믿음과 의와 거룩은 성도가 승리하는 방편이다. 이와 같이 살아서 우리도 마침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되자.
계16장 일곱 대접
요한계시록 16장은 일곱 대접의 재앙을 증거한다. 15:1에 증거한 대로 이 일곱 재앙은 마지막 재앙이며, 15:1, 7; 16:1의 말씀대로 이 재앙은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다. 요한계시록 8, 9장의 일곱 나팔 재앙과 같이, 땅, 바다, 강, 하늘, 유브라데강이 언급된다. 그러나 일곱 나팔 재앙과 달리, 그 삼분의 일이 아니고 그 전체가 재앙을 당한다.
1, 2절, 첫째 대접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요한은 또 성전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었는데, 그것은 그 일곱 천사에게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말하는 음성이었다. 성전에서 나는 그 큰 음성은 분명히 성전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수행자들이다. 그 일곱 천사는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가지고 있었고 그 대접들을 땅에 쏟을 것이었다. 여기의 땅은 온 세상 곧 지구 전체를 가리킨다.
[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첫째 천사가 그 대접을 땅에 쏟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헌데와 종기가 났다. 본절의 땅은 사람들이 사는 땅을 말한다. 지구에는 여섯 개의 큰 대륙이 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주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첫째 대접이 땅에 쏟아지자 악하고 독한 헌데가 사람들에게 났다.
그런데 그 악하고 독한 헌데와 종기는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났다. 이 말씀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 즉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이 재앙에서 면제됨을 암시한다. 그 재앙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악인들을 구별하신다. 말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이든지 아니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인데, 그 헌데와 종기의 재앙은 후자에게만 해당된다.
3절, 둘째 대접
[3]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자,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되어 모든 바다 생물들이 죽었다. 지구에는 다섯 개의 큰 바다가 있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빙양, 북빙양이 그것이다. 둘째 대접으로 인해 그 바다들은 마치 심각한 적조현상처럼 붉게 되었고 모든 바다 생물들은 죽었다. 바다는 많은 물고기들을 사람의 음식물로 공급하는 공급원인데, 바다에 내린 재앙은 또한 거기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인간에게 큰 고통을 주는 재앙이다.
4-7절, 셋째 대접
[4]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셋째 천사는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았다. 그러자 강과 물 근원 곧 샘들은 피가 되었다. 물은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사람의 몸은 70퍼센트가 수분이라고 한다. 사람은 물을 마셔야 산다. 강과 물 근원은 사람들의 식수원이다. 그런데 이 물이 피가 되니 사람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5, 6]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물을 차지한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을 말했다. 하나님은 공의로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적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많이 흘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인의 피를 흘린 대가로 피를 마시게 하신다. 그것은 합당한 일이다.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요한은 제단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는 소리이었다. 이것은 6:9, 10에 기록된 순교자들의 영혼들의 소리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흘림 당함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대접 재앙으로 그들의 호소에 응답하셨다. 그럴 때 순교자들의 영혼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참되심과 의로우심을 증거할 것이다.
8, 9절, 넷째 대접
[8, 9]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넷째 천사는 그 대접을 해에 쏟았다. 그러자 해가 권세를 받아 큰 열기로 사람들을 태웠다. 태양의 중심 온도는 약 섭씨 1600만도로 추정되며 태양 표면의 온도는 약 섭씨 4200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만일 태양 주위의 가스층이 대폭발을 한다면, 태양의 표면 온도는 약 섭씨 200만도로 올라간다고 한다. 16) 그러지 않아도, 오늘날 지구는 이상 기온의 더위를 경험하고 있다. 그것을 지구 온난화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태양의 표면 온도가 급격히 높아진다면, 지구의 생명체들은 태양의 열기로 태움을 입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재앙을 받으면서도 악인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사실, 회개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에만 할 수 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회개할 만한 때에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말고 항상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10, 11절, 다섯째 대접
[10]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다섯째 천사는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았는데, 그러자 짐승의 나라 즉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곧 어두워졌고 사람들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었다. 나라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혼란하고 쇠퇴하며 몰락하게 됨을 뜻한다. 사람들의 고통은 독한 헌데와 태양열로 인한 화상 등 때문일 것이다. 죄는 일시적 쾌락을 주지만, 그 결과는 재앙과 고통이다.
[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짐승 곧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사는 자들은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고 자기 행위들을 회개치 않았다. 본절의 ‘종기’는 2절의 ‘헌데’와 같은 단어(헬코스)이다. 넷째 대접의 경우와 같이, 이 사람들도 회개치 않았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 16:5, 6,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사람의 판단은 편벽되기 쉬우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들에게 내려진다. 첫째 대접은 땅에 쏟아졌는데, 그것은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는 재앙이었다.
셋째로, 죄의 회개는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실 때이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회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몸이 조금 아플 때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없나 자신을 살펴야 하고 결코 하나님 앞에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된다.
12-16절, 여섯째 대접
[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여섯째 천사는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았는데, 그러자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다. 9:13 이하의 여섯째 나팔 재앙에서와 같이, 유프라테스 강은 세계사에서 마지막 세계 대전의 격전지로 예언되어 있다. 강물이 마른 것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것일 것이다.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 등의 군대를 가리킨 듯하다. 여하튼 유프라테스 강이 마름으로 동서양의 연합군 즉 온 세계의 연합군의 집결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적그리스도 나라의 활동은 악령들의 활동이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시끄럽게 떠들어댈 것이나 실상은 거짓되고 더러운 영들임을 암시한다. 그 영들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왔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말들은 악한 영들의 활동이다.
이 귀신의 영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정치가들을 선동하여 연합군을 형성하게 한다. ‘이적을 행하여’라는 말은 이 악령들의 활동은 은사주의를 동반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구하는 은사운동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수많은 곳들에서 ‘여호와의 날,’ ‘주의 날’로 묘사된 그 날, 곧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그 날의 전쟁은 본서의 19장에 증거된 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의 전쟁을 가리키는 것 같다. 19:11, 14, 19,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 .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 . .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주께서는 도적같이 오실 것이다. ‘도적같이’라는 말은 주의 재림이 뜻밖에 혹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을 보인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정상적 신앙생활은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참된 경건과 의로운 삶! 바른 믿음은 바른 삶으로 나타난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죄를 떠나고 의롭게 살게 되어 있다.
주께서는,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신다. 성도의 옷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의 옷이다.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로마서 3: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3: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 믿음의 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가 성도의 옷이다. 우리는 참된 믿음으로 이 의를 지켜야 한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우리 말 성경에 작은 글씨로 ‘세 영이’라는 말은 원문에는 ‘그가’라고 되어 있다. 여기의 ‘그’는 하나님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왕들을 모으신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장하신다.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다수 사본에는 ‘므깃도’라고 되어 있다. 그 곳은 팔레스틴 북부, 갈릴리 호수 서편으로서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 곳은 예전에 유다왕 요시야가 애굽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며 그 일은 유다 왕국의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이 예언은,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이스라엘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보인다. 여섯 째 대접은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준비를 예언한다. 그 전쟁 자체는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의 큰 음녀 곧 바벨론의 멸망과 관계되고 특히 19장에 백마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와 관계된다고 본다.
17-21절, 일곱째 대접
[17, 18]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일곱째 천사는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았다. 그 때 성전에서부터 ‘되었다’라는 큰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다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 일곱째 대접 재앙으로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일곱째 대접의 재앙은 번개와 뇌성과 음성들을 동반한 큰 지진과 우박의 재앙이다. 그 지진은 역사상 가장 큰 지진이 될 것이다.
[19, 20]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큰 성 바벨론, 즉 적그리스도 나라의 수도는 그 지진으로 인하여 세 갈래로 갈라지고 그 외의 지구의 모든 성들도 그 지진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세상의 악들을 안 보시는 듯할지라도 다 보시고 아시고 마지막 날에 다 보복하시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 앞에 피할 수 있는 죄인은 아무도 없다. 이 마지막 큰 지진으로 인하여 섬들과 산들도 부숴지고 가라앉고 사라질 것이다.
[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또 큰 우박이 내릴 터인데, 그 우박의 무게는 한 달란트, 약 30kg이나 될 것이다. 이런 무게의 큰 우박이 떨어지니 그 재난이 얼마나 극심할 것인가? 그렇지만, 사람들은 역시 회개치 않고 하나님을 훼방하기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날 배교와 은사운동을 조심해야 한다. 본문의 거짓 선지자는 배교적 교회를, 이적을 행하는 것은 은사운동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9- 11,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바른 신앙, 복음 신앙, 속죄 신앙, 옛신앙, 성경적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바른 신앙을 지키고 성경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힘쓰는 것이 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회개할 만한 때에 열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에는 회개하려고 해도 회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때가 오기 전에 힘써 회개하자. 히브리서 12:15-17,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계17장 큰 음녀
요한계시록 17장은 큰 음녀에 대한 예언이다. 그것은 그 큰 음녀가 어떻게 열국을 음란으로 부패시킬 것인지, 또 그가 마침내 어떻게 멸망을 당할 것인지 증거한다.
1-6절, 큰 음녀에 대한 환상
[1, 2]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큰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은 자로 증거되었다. ‘많은 물’은 15절에 증거하기를,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고 하였다. 즉 여기에 상징적으로 표현된 그 큰 음녀는 온 세상 나라들과 백성들 위에 역사하는 자이다. 그의 영향력은 세계적이다. 그는 세계적인 인물 혹은 단체이다. 특히 그는 땅의 정치 지도자들과 결탁되어 있다. 그의 음행은 영적인, 육적인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 같다. 그는 사상적으로 참된 종교와 세속주의를 혼합시키고 도덕적으로도 음란을 조장하는 자인 것 같다. 본문은 세상의 정치 지도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 사상적, 도덕적 음행에 빠질 것이라고 보인다.
본장의 큰 음녀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그 큰 음녀를 악인들의 세상으로 보는 견해이다. 17) 그러나 그 음녀는 땅에 거하는 자들을 그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한 자이며(2절), 일곱 산 위에 앉은 자요(9절),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요(18절),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서 나와야 할 자들임을 생각할 때(18:4), 그는 단순히 악인들의 세상과 동일시 되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는 그 큰 음녀를 로마 천주교회로 보는 견해이다. 18) 그 근거는, 첫째로, 그가 정치 권력과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다. 3절,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천주교회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세력 집단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둘째로, 천주교회는 기독교의 배교와 이방종교화(마리아 숭배)의 결정체이다. 천주교회는 온 세계를 영적 간음의 포도주로 취하게 하는 자이다(2, 5절). 셋째로, 천주교회는 참된 성도들의 피를 많이 흘렸다. 6절, “내가 보니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순교자들]의 피에 취한지라.” 넷째로, 로마는 일곱 산 위에 위치하고 있다. 9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그 산들의 이름은 팔라티누스, 퀴리날리스, 아벤티누스, 셀리우스, 베미날리스, 에스퀼리누스, 카피툴리누스 등이다. 19) 그래서 옛부터 사람들은 로마를 ‘일곱 언덕의 로마’ 20) 혹은 ‘일곱 언덕’ 21) 이라고 불렀다.
셋째는 그 큰 음녀를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22) 그러나 이 견해는 배교한 교회가 왜 일곱 산 위에 위치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장차 로마 천주교회가 모든 개신교회들을 흡수하여 그 배교한 교회로 진전될 것이라고 내다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둘째와 셋째의 견해는 하나가 될 것이다.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천사는 요한을 광야로 데리고 갔다. 광야는 참 교회가 사탄의 핍박을 피하여 숨은 곳이었다(계 12:6, 14). 거기에서 요한은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탄 것을 보았다. 여자가 탄 그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킨다. 여자가 그 짐승을 탄 것은 배교한 교회가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정치적 세력과 결탁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짐승의 색깔이 붉은 것은 그것의 호화롭고 사치스런 세상적 영광을 나타낸다. 그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거스리는 적그리스도적임을 나타낸다.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여자가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은 것이나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진 것은 다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나타낸다. 타락한 교회는 세상적으로는 부요하고 사치와 영광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 금잔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다. 그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배교적 교회이다. 그에게는 영육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만 가득하다.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그의 이마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비밀’이라는 이름은 그의 정체가 드러나 있지 않고 감취어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분별력이 아니고서는 그 정체를 분별할 수 없다. ‘큰 바벨론’이라는 명칭은 역시 로마를 암시한다. 바벨론이 옛날 바벨론 제국의 수도이었듯이, 로마는 사도 요한의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이었다. 그것은 큰 바벨론이라고 불리울 만하였다.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이름은 영적으로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 사상들의 어미이며 또한 육적으로 모든 음란의 원천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더욱이, 사도 요한은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 혹은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여 있음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겼다. 로마 천주교회는 역사상 무수히 많은 진실한 성도들을 죽였다. 마지막 때에도, 그 배교적 교회는 많은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피를 흘릴 것이다. 참 성도를 핍박하는 행위는 그 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고 거짓 교회임을 드러낸다. 그 배교적 교회는 참 성도들을 핍박할 것이다.
7-14절, 큰 음녀가 탄 짐승에 대한 설명
[7, 8]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우리는 본 예언이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상 적그리스도적 성격을 나타낸 나라들은 종종 있었다. 옛날 바벨론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는 강력한 나라이었다. 또 헬라 시대에 수리아의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적그리스도적 인물이었다(단 8:9 참조). 사도 요한 당시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주후 81-96년)도 초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무서운 핍박자이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시점에는 적그리스도적 세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올 나라로 묘사된다. 그 나라는 재생 로마라고 불리운다. 장차 로마제국 같은 강력한 전제국가가 나타나 참 교회를 핍박할 것이다.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본절은 그 짐승의 일곱 머리가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로마를 가리키는 것 같다. 예로부터 로마는 ‘일복 언덕’ 혹은 ‘일곱 언덕의 로마’라고 불리웠다(1, 2절 해석 참조). 만일 그것이 로마라면, 이 예언은 배교적 교회가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교회일 것이며 또 적그리스도의 나라도 그곳을 중심으로 삼고 활동할 것이라는 예언이 된다. 그렇다면 옛날 신성로마제국 시대처럼 로마는 또 한번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가 될 것이다.
[10-12]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많은 이들은 일곱 왕들은 일곱 나라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일곱 나라들 중 이미 망한 다섯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등 다섯 나라이며, 하나는 로마제국을 말하며, 아직 이르지 않은 다른 하나는 미지수이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이 짐승은 여덟째 나라이며 그것은 그 일곱 중에 속한 자라고 하였다. 많은 이들은 이 나라를 재생 로마라고 부르며 오늘날 유럽 연합(EU)이 이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주목한다. 23) 또 열 뿔은 거기에 속한 열 나라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13, 14]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적그리스도의 나라들은 재림의 주님과 싸울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재림하셔서 싸우실 싸움이다.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과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때 어린양은 그들을 이기실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입고 진실한 자들은 이길 것이다.
15-18절, 큰 음녀의 받을 심판
[15-18]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그 큰 음녀는 마침내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의해 망하고 만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벗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적 음행으로 간주하시고 징책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몽둥이로 사용하여 타락한 교회를 치실 것이다. 배교한 교회는 세상보다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큰 음녀의 죽음과 멸망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되어지는 일이다. 적그리스도의 나라 지도자들이 그 큰 음녀를 미워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본장에 예언된 음녀는 배교한 교회로서 로마 천주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로마 천주교회(RCC)는 장차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연합하여 세계의 모든 형식상의 기독교회들을 포괄하는 세계적 교회를 형성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 앞에 불신실한 형식적 교회들의 연합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더불어 로마 천주교회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음행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영적 음행이나 육적 음행에 다 해당한다. 영적 음행은 이단, 우상숭배, 배교, 자유주의, 세속주의, 물질만능주의를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사상과 인격이 더러워지는 것을 가리킨다. 육적 음행은 하나님 앞에서 불합당한 이성관계 혹은 동성관계로 우리의 몸이 더러워지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 시대는 매우 음란한 시대이다. 예술을 빙자한 영화, 연극 등과 온갖 대중매체들이 음란하고 또한 음란을 조장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러한 음란물들 혹은 외설물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순결을 지켜야 한다. 결혼한 이들은 부부의 관계를 깨끗하고 아름답게 유지해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과 청소년들은 특히 자신들을 깨끗하게 지키되 보는 것과 남녀 교제를 조심해야 하며 절제력이 부족한 자들은 적당한 때에 결혼하는 것이 좋다. 여하튼, 우리는 영적 음행이나 육적 음행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4절,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적 교회의 핍박과 미혹 속에서 승리하려면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실한 속죄 신앙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깨어 있으며 성경의 모든 교훈에 복종하며 행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4:3-5,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18장 바벨론의 멸망
요한계시록 18장은 큰 음녀인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예언한다. 그 여자는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배교적인 로마 천주교회는 장차 개신교회들을 흡수하여 세계적 교회로 나타날 것이며 로마는 다시 한번 세계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1-3절, 바벨론의 정체와 그 멸망
[1-3]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사도 요한은 큰 권세와 영광을 가진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힘센 음성으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외치는 것을 들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확실히 멸망할 것이다.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전인 그 교회는 실상 각종 더럽고 가증한 영들의 집합소가 될 것이다. 배교한 교회는 모든 형식적 교회들을 통합하고 또 모든 세계 종교들을 통합할 것이다.
또 그 교회는 땅의 왕들과 상인들로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하였다. ‘그 사치의 세력’이라는 원어는 ‘그 음탕함의 세력’이라는 뜻이다. 그 음행은 영적인, 육적인 의미를 다 가진다고 본다. 그 교회는 거짓 종교로 만국을 타락시킬 것이다. 본장 23절,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또 그 교회는 바른 진리와 도덕성으로 세상을 인도하기는커녕 도리어 음란을 조장하는데 앞장설 것이다.
4-8절, 바벨론 멸망의 이유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는 음성을 주셨다. 세상 종말의 배교의 시대에라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그 배교의 죄와 그 영적인, 육적인 음행에 참여하지 말고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와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 배교한 교회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그 배교한 교회와 정신적으로 분리할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분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분리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친다(요이 7-11; 살후 3:6, 14).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바벨론의 멸망의 이유는 그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 그 뜻이 분명하다. 옛날 노아 시대에는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였더니(창 6:5, 11, 13)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다. 그러나 말세의 배교한 교회의 죄는 하늘에 사무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고로 그에게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6-8]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행위대로 갑절이나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며 사치한 만큼 그에게 고난과 애통으로 갚으시며 그 교회가 자신을 여황으로 높이고 결코 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한 만큼 하루 동안에 사망과 애통과 흉년의 재앙들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갑작스럽게, 하루 동안에 임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불로 그를 사르실 것이다. 불로 심판하실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시다.
9-20절, 바벨론 멸망의 모습
[9, 10]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그 교회와 영적 음행을 하고 그로 인해 부요와 사치를 누릴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것이 불타며 망하는 광경을 보고 울며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서서 부르짖기를, 크고 견고한 그 성에 일시간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화가 있다, 화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성의 멸망은 일시간에 돌연히,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10, 17, 19절).
[11-14]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놋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 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세상의 상인들도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들이 없을 것이므로 그 성의 멸망을 애통할 것이다. 그들이 취급했던 주요 물품들은, 첫째로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 등의 귀금속들이요, 둘째로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 등의 의복 재료들이요, 셋째로 각종 향목과 상아 기명과 값진 나무 등의 고급 가구나 그릇 재료들이요, 넷째로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 등의 향품류요, 다섯째로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 등의 식료품이요, 여섯째로 소와 양과 말 등의 가축들이요, 일곱째로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었다. 사람들이 한때 즐겼던 모든 좋은 것들이 다 멸망을 당하여 없어질 것이다.
[15-19]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배교한 교회로 인하여 부를 누렸던 상인들과 선장들과 선인들은 그 성의 멸망을 인해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할 것이다. 그들은 그 큰 성의 불붙는 모습을 보면서 그 성의 이전의 부귀와 영광이 이처럼 일시간에 망하는 것을 인해 무서워하며 울며 애통할 것이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대조적으로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억울함을 갚으시는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으며 또 사도들과 성도들을 많이 죽였다. 타락한 교회와 교직자들은 참된 종들과 성도들을 많이 핍박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억울함과 억울한 피흘림을 갚으실 것이다.
21-24절, 바벨론 멸망의 영원함
[21-24]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 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배교한 교회의 멸망은 영원하다. 다시는 그것이 누리던 세상적 즐거움들이 없어질 것이다. 다시는 거기서 음악소리도, 세공업자도, 맷돌소리도, 등불도, 신랑과 신부의 음성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교회의 거짓된 종교로 인하여 만국이 미혹을 받았었다. 또 많은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보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 교회의 끝날이 왔고 다시는 그 교회의 세상적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한계시록 18장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는 마침내 갑작스럽게, 확실하게,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그가 누렸던 세상적 부귀와 영광과 쾌락도 끝날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서운 불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된 우리는 거기서 나와야 한다. 그 죄와 멸망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단순히 정신적으로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비록 지상에서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끝까지 순결한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은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세계 교회로부터 분리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볼 때 하늘의 성도들과 더불어 기뻐해야 할 것이다.
계19장 백마 탄 자의 심판
요한계시록 19장은 하늘의 찬송 광경과 백마 탄 자의 심판에 대해 증거한다.
1-10절, 하늘의 찬송
[1-3]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한 환상과 그의 멸망에 대한 음성을 자세히 들은 후, 사도 요한은 하늘에 많은 무리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무리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세상에 이미 역사하였고 또 말세에 절정적으로 나타날 사탄과 적그리스도 나라와 배교한 교회의 세력은 참으로 크다. 그들은 힘을 합쳐 666인을 맞지 않은 성도들을 심히 핍박할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돈과 육신의 쾌락과 음란의 유혹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또한 고난과 핍박과 순교까지 견뎌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모든 고난에서 건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울 것이다. 그 음녀는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를 그 음녀에게 갚으실 것이다. 그 심판의 연기는 세세토록 올라갈 것이다. ‘그 연기’라는 원어는 ‘그 여자의 연기’라는 말로서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가리킨다.
[4, 5]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또한 24장로들과 네 생물의 화답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그 많은 무리의 찬송 소리를 듣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하고 화답하였다. 그 때 하나님의 보좌에서 한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음성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노인이든지 어린아이이든지 간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의 구원을 찬송해야 한다. 하늘의 천사들과 화답하여 찬송해야 하는 것이다.
[6-9]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사도 요한은 또 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많은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 웅장한 소리이었다. 그것은 하늘의 천사들과 성도들의 힘찬 찬송의 소리일 것이다. 그들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찬송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라고 말했다. 또 그들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준비되었다고 말한다. 또 그 아내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기뻐하고 찬송하였다. 또 한 천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섭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인데, 그것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표현되었다. 혼인은 완전한 연합을 가리킨다. 신부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부활한 성도들이 천국에서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된 삶을 누릴 것을 가리킨다. 사람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과 순종과 사랑은 완전한 연합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천국에서 가능하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물론,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나 성도들은 아직 연약하여 때때로 슬퍼하며 피곤해 하고 낙심하며 방황하고 또 실수하며 범죄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이 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표현하였다(고후 11:2). 성도들은 지금 혼인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다.
신부가 입게 될 옷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옷이다. 8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이다. ‘옳은 행실’이라고 번역된 원어(디카이오마타)는 ‘의’라는 단어이다. 성도들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되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라고 증거했다(빌 3:9). 인간의 행위의 의는 불완전하다. 이사야는 인간의 의가 더러운 옷 즉 누더기 옷과 같다고 말했다(사 64:6). 오직 예수께서 주신 의만이 완전하고 영광스럽다. 성도의 의로운 행실은 그 의에 비하면 보잘 것 없으며 또 영광스럽지도 못하다.
성도들이 누릴 천국의 영광을 혼인 잔치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기쁘고 즐겁고 참된 만족을 주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천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했다. 천국에서 누릴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의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그 만족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만족보다 가히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 이 천국의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에 참여하는 자들은 참으로 복되다.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너무 감격하였던 것 같다. 그는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였다. 그 천사는 자기도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는 말씀은 자기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한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하나님의 영에 의한 대언(代言) 사역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사용하여 일하시는 하나님께만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두어가지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음성을 듣는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이라면, 우리가 참으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고 큰 음녀, 즉 배교한 교회로부터 분리된 삶을 사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과 화답하여 힘차게 하나님을 찬송하자.
둘째로,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 즉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사모하자. 거기에는 더 이상 죄가 없고 슬픔이 없고 질병과 고통이 없고 피곤과 낙심과 방황이 없다. 거기에는 완전하고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이 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사모하자. 또 그 혼인 잔치에 참여할 신부처럼 속죄 신앙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지키고 또 거기에 합한 의의 삶을 힘쓰자.
11-16절, 백마 탄 자의 오심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백마와 탄 자는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신경,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것은 재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말은 전쟁 수행의 기동력과 힘을 나타내고 흰색은 성결함을 나타낸다. 심판하러 오시는 주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의 심판은 신속하고 힘이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시다. ‘충신’이라는 원어(피스토스)는 ‘충성된 자’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충성되이 완수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은 택한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영생에 이르도록 구원하는 일이었다(요 6:39, 40). 그는 그 일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셨다. ‘진실’이라는 원어(알레디노스)는 ‘참된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이시고 참되신 구주이시다.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그는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는 자로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심판은 공의로울 것이다. 그는 의롭고 공평하게 모든 일을 판단하실 것이다. 그는 사람의 낯을 보지 않고 공의의 법을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그가 싸울 대상은 악한 자들 곧 적그리스도로 표현된 전제주의적 국가와 거짓선지자로 표현된 배교한 교회이다. 그는 그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그의 눈은 불꽃 같았다. 이것은 그의 꿰뚫는 지식과 통찰력을 가리킨다. 또 그의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상징한다. 그는 많은 승리의 전력(前歷)이 있다. 그에게는 승리만 있다.
또 그 다음에 전통 사본들의 다수 사본에 보면, “그에게는 여러 이름들이 있고 또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한 이름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에게는 여러 이름들이 있다. 본문에도, 충신, 진실,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등의 이름이 나온다. 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한 이름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그의 신성의 이름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을 다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에게 신비의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으셨다. 그것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는 고난을 받으셨음을 나타내거나, 혹은 원수들을 심판할 때 그들의 피가 그의 옷에 묻은 것을 가리킬 것이다(사 63:1-3). 또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였다. 그것은 이 백마 탄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이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를 따르는 하늘 군대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재림의 주님은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그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탄 것은 그들의 성결함과 기동력과 힘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심판을 도울 천사들은 다 거룩하고 능력이 있는 자들이다.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날센 검이 나오는 것은 그의 말씀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의 말씀은 심판의 능력을 가진 말씀이다. 그는 그 두려운 말씀으로 만국을 치실 것이다. 또 그는 친히 철장으로 저희를 다스릴 것이다. 철장 통치는 무적(無敵)의 통치를 가리킨다. 그를 대항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을 것이다. 그가 밟을 포도들은 원수들을 가리킨다. 그는 포도주 틀을 밟듯이 그 원수들을 진멸하실 것이다.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그의 옷과 다리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는 분명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그는 모든 왕들을 다스리시는 크신 왕이시요 모든 주인들을 다스리시는 참 주인이시다.
17-21절, 심판의 큰 잔치
[17, 18]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또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의 모든 새들에게 외치는 것을 보았다. 천사가 해에 선 것은 온 세계의 새들이 볼 수 있도록 외치기 위해서이다. 외친 내용은 하나님의 큰 잔치에 관한 것이다. 그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대조된다. 그것은 심판의 잔치이다. 그것은 새들이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그 전쟁에 참여한 모든 자들의 고기를 먹는 잔치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언된 대 전쟁에 참여한 자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19-21]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연합군은 재림의 주님과 더불어 싸우려 하다가 망하고 만다. 이 전쟁은 요한계시록 16장에 예언된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킨 것 같다. 17, 18장의 큰 음녀 곧 바벨론의 멸망은 이 전쟁의 결과로 멸망함을 가리키는 것 같다. 거짓 선지자는 짐승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자요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이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잡혀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운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한 교회가 멸망하고 맨 먼저 지옥에 던지울 것을 가리킨다. 산채로 던지운다는 말은 그들이 직접 악인의 부활체를 입은 후 최종적 지옥에 던지울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경험치 않고 변화된 몸으로 천국에 올라간 것과 비교된다. 이렇게 재림의 주님은 적그리스도 나라와 배교한 교회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또 그 전쟁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들도 다 죽어 새들의 밥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본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거룩하고 권세 있는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그를 따라 내려와 그의 심판을 도울 것이다. 둘째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결국 망할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한 교회는 일시적으로 번영하고 사치할 것이지만, 마침내 망하여 산채로 지옥에 들어가는 벌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세상의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배교한 교회의 종말이 이러할 것이므로, 우리는 믿음과 인내로써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죄악된 일들을 버리고 오직 거룩과 의로 우리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우리는 죄 지으면 망하는 줄 알고 믿음으로 살고 거룩하고 의롭게 살자.
계20장 천년왕국과 대 심판
요한계시록 20장은 천년왕국과 마지막 대심판에 관한 내용이다. 천년왕국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고 해석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천년왕국은 실제로 땅 위에 이루어질 왕국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인가, 후인가? 천년왕국 직전에 일어날 의인들의 부활과 마지막 대심판 때의 악인들의 부활은 과연 천년간의 간격을 가진 사건일 것인가? 또한 천년왕국의 목적과 성격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에 따라, 즉 요한계시록 20장의 본문에 대한 해석의 견해에 따라 그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견해들이 있다. 첫째로, 무(無)천년설이라는 견해는 천년왕국을 신약교회시대로 본다. 둘째로, 후(後)천년설이라는 견해는 천년왕국 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견해로서 천년왕국을 교회시대 후기에 있을 복음의 황금시대로 본다. 셋째로, 전(前)천년설이라는 견해는 천년왕국 전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견해, 즉 주께서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신다는 견해이다. 전천년설 가운데도 구약의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세우고 짐승 제사들을 다시 드린다고 보는 견해(세대주의적 전천년설)가 있고 천년왕국을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신약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왕국으로 보는 견해(역사적 전천년설)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혹은 네 가지의 견해들 중에 어느 것이 바른 견해인가하는 것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의 성경적 근거는 복음서와 서신서들이다. 복음서와 서신서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에 종말이 오고 모든 죽은 자들이 함께 부활하고 함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디에도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이 없고 또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오랜 기간의 간격을 두고 있다는 암시도 없다. 그러나 전천년설의 근거는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 20:1-10은 전천년설의 가장 강한 근거이며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의 가장 큰 난제 구절이다.
1-3절, 마귀의 일시적 감금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사도 요한은 한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무저갱(無底坑, 아뷔쏘스)은 ‘밑바닥이 없는 구덩이’라는 뜻으로 사탄과 악령들의 근거지 혹은 감금 장소로 생각된다. 예수께서 거라사[혹은 가다라]인의 땅에서 만난 ‘군대’ 귀신들은 예수께 자기들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눅 8:30, 31).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말했고(벧후 2:4), 유다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했는데(유 6), 그곳이 무저갱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한계시록 9:1-11에 보면,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힐 것이며(다섯째 나팔 재앙) 그것들의 왕은 ‘파괴자’(아바돈 혹은 아볼루온)라고 불리우는 무저갱의 사자이다. 요한계시록 11:7에 보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은 1260일 동안 예언하던 두 증인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7:8에 보면, 큰 음녀가 타고 있던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이다.
[2, 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그 천사는 하나님이 주신 큰 권세를 가지고 용을 잡았다. ‘용’이라는 원어(드라콘)는 큰 뱀을 가리킨다. 그는 옛 뱀, 곧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 하였던 그 뱀이다. 그는 또한 마귀요 사탄이다. ‘마귀’라는 원어(디아볼로스)는 훼방자, 중상자, 참소자, 반역자, 배신자 등의 뜻이다. ‘사단’이라는 원어(사타나스)는 대적자, 원수라는 뜻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인류를 타락시킨 자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훼방하고 중상한 자요 대적자요 하나님과 인류의 원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귀를 잡아 결박하여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게 하시고 그 위에 인봉하여 그 감금을 확실케 하셨다. 마귀는 이제 천년 동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만국을 미혹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던 마귀의 활동은 천년 동안 잠잠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감금은 일시적이다. 사탄은 마치 징역 천년의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것과 같다. 천년이 차면 사탄은 반드시 잠간 놓일 것이다.
무천년설은 마귀의 결박과 감금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력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감금되었기 때문에 그는 복음의 힘 있는 전파를 방해하지 못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사탄의 잠시 놓임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력이 잠시라도 무효화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인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일시적 감금을 신약시대 전체로 보는 것은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이상의 어떤 뜻, 곧 문자 그대로 사탄이 결박되고 감금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 백마 타고 오셔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폐하신 후에 사탄을 천년 동안 감금시키실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본문에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4-6절, 첫째 부활과 천년왕국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사도 요한은 또 몇 가지를 보았다. 우선, 보좌들을 보았다. 보좌는 보통 재판하는 권세를 상징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보좌들에 앉아 있었다. 거기 앉은 자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문에는 단순히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 위에 앉아 있었다’ 24) 고 되어 있다. 아마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할 모든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 보좌에 앉은 자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 ‘심판하는 권세’라는 원어(크리마)는 ‘심판’으로 보통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문맥적으로 ‘심판하는 권세’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또 요한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목 베임을 받은 25) 자들의 영혼들을 26) 보았다. 그것은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그들도 심판 권세를 받고 보좌들에 앉은 자들 중에 포함될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은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았다.’ 여기의 ‘그들’은 27) 누구를 가리키는가? 만일 그들이 바로 앞의 순교자들만을 가리킨다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할 자들은 순교자들뿐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그들은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심판 권세를 가지고 보좌에 앉아 있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즉 그들은 모든 진실한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짐승 곧 적그리스도의 활동은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거쳐 교회 역사상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복종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들도 교회 역사상 항상 있어 왔다.
그 다음 구절도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하였다.’ 여기의 그들은 앞에 언급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다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다음 절에 언급된 ‘첫째 부활’이다.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만일 앞에 언급된 자들이 순교자들만을 묘사한 것이라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나머지 예수 믿는 자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 언급된 자들이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의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신자가 아닌 자들 곧 불신자들과 악인들을 가리킬 것이다. 즉 이 구절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구별한 것이라고 본다. 고린도전서 15:23, 24,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첫째 부활’은 성도들의 영혼의 중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성도들의 육체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부활’이라는 원어(아나스타시스)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12, 13, 21, 42절). 그러나 그 말은 성경에서 중생을 위해서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은 복되다. 그들은 몸의 구속(救贖)을 받은 자들이므로 완전히 거룩함을 얻은 자들이다. 둘째 사망 곧 지옥의 형벌이 그들을 다스릴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계 5:10)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그 천년은 사탄이 결박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온 세상에서 불의와 불법이 제거되고 풍성한 평화가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하자. 사탄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잡아 무저갱 속에 감금하기를 원하실 때, 그는 감금되고 말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순종함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는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목 베임을 받을 각오까지 해야 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2:11-13,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7-10절, 사탄의 놓임, 미혹, 형벌
[7, 8]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천년의 감금 기간이 다하면 사탄은 그 무저갱의 감옥에서 놓여날 것이다. 사탄이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는 천년 동안의 긴 감금 기간 동안 회개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를 간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즉시 거대한 일을 도모한다. 그것은 역사상 전무한 일이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백성을 미혹하는 일이다.
지구상의 모든 백성은 ‘곡과 마곡’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것은 구약성경 에스겔 38장과 39장에서 인용한 표현임이 분명하다. 거기에서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의 대적자로 나타났다.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은 곡과 마곡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천년왕국 중에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다.
사탄은 그들을 미혹하여 마지막 전쟁에 참여케 한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아마 이렇게 선전할 것이다. “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은 특권 계급처럼 너무 오랫 동안 우리를 통치해왔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통치에 싫증을 느낀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고 우리 스스로의 민주적 통치를 원한다. 자, 우리가 단합하여 저들을 쳐부수고 영구적인 자유와 기쁨을 누리자.”
그러나 사탄의 이 선전은 순전한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그들의 행복을 위하기는커녕 자신과 인류의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다.
[9, 10]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저들은 온 땅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둘렀다. ‘성도들의 진’은 부활한 성도들이 거주한 곳을 가리키고 ‘사랑하시는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킨 것 같다. 재림하신 주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시는 것 같고 또 부활한 성도들도 한 곳에 모여 사는 것 같다. 성도들은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온 세계를 통치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놓여난 후 세상을 미혹하자 그 미혹을 받은 사람들은 대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저들은 성도들의 통치권을 부정하며 선전 포고를 할 것이다. 이런 세계적인 반란을 막아낼 방법이 있을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마지막 형벌의 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희를 소멸하실 것이다. 28)
그런 후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미혹한 마귀를 잡아 불과 유황 못에 던져넣을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을 것이고 그들은 다 거기서 세세토록 밤낮 고통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키고 거짓 선지자는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그것들이 지옥불에 던지운다는 표현은 그것들이 어떤 인물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짐승은 적그리스도 나라의 지도자이며 거짓 선지자는 배교한 교회의 지도자일지도 모른다. 이제 사탄이 그들과 함께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했던 원수 마귀의 최후이다.
11-15절, 마지막 심판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사도 요한은 또 마지막 심판 보좌를 보았다. 그것은 크고 흰 보좌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땅 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할 대 심판대이다. 그 심판 보좌가 흰 보좌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거룩하고 의로울 것을 나타낸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는 성경에 마지막 심판주로 증거되어 있다.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사도행전 10: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땅과 하늘은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고 심판받을 모든 자들이 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죽은 자들은 어른이나 아이를 막론하고 다 그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부활하여 서게 됨을 가리킬 것이다. 의인들은 천년왕국 전에 부활하였으므로 이때는 악인들이 부활할 것이다. 사람은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차 다 부활하여 심판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가장 공평한 처분이다. 그는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창조하신 대신에 마지막 날에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성경에 말씀하셨다. 이것은 바르고 정당한 처분이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 처분 앞에 불평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자들로서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사도 요한은 심판대 앞에서 여러 권의 책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다 펴져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책들’은 사람들의 행위들을 기록한 책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들을 보시고 그 행위들에 따라 공의롭게 심판을 하신다. ‘죽은 자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이 행위록들과 구별되는 다른 한 책은 생명책이라고 불리웠다. 그것은 모든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들을 기록한 책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0:20).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은 이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안다.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들은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자들이다. 비록 그들이 바다 가운데 빠져 죽었을지라도 그들은 거기에서부터 부활할 것이다. 모든 무덤들이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다. 온 세상에서 죽은 자들의 원소는 다시 결합되어 부활할 것이다. 사람에게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이심이 밝히 증거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은 다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 보좌 앞에 서서 각각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받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결코 핑계하거나 불평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의롭고 공정할 것이다.
[14, 15]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육신의 죽음과 무덤 그리고 악인들이 부활 전까지 머물며 고통 당하던 음부 곧 지옥도 최종적 지옥인 불못에 던지우는 것으로 표현된다. 불못은 부활 후에 악인들이 들어갈 형벌의 장소이다. 그것이 둘째 사망이다. 이것이 참으로 두려운 사망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 곧 첫째 사망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사람의 일들 중에 장례식이 가장 슬픔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렵고 슬픈 일은 둘째 사망의 일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을지라도 이 둘째 사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의 행과 불행이 나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누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결론적으로, 7절부터 15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사탄이 아무리 무섭고 강한 원수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탄의 결말을 바로 알고 그를 당당히 대적하자. 베드로전서 5:8, 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야고보서 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둘째로, 우리의 이름은 반드시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 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게 가지자. 그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생기며 견고해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는 그것과 비교해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게 살았다 할지라도 장차 지옥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결코 행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유여하게 살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확실히 행복자이다. 그런 자가 되고 그런 자로 당당히 살자.
셋째로, 우리는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들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바른 행위에 힘쓸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하였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8-10).
계21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성
1-8절, 천국과 지옥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소망이다. 현재의 하늘과 현재의 땅은 사라지고 새 세계가 올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다 예언하는 바이다.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현재의 하늘과 땅은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 속에도 갖가지의 추하고 불행한 요소들이 있다. 저 아름답고 푸른 하늘은 때때로 폭우와 폭설을 내린다. 오곡백과(五穀百果)를 내는 땅은 때때로 화산과 지진으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준다. 또 땅에는 늑대, 이리, 뱀 같은 무서운 짐승들이 있고 각종 병균들이 득실거린다. 바다는 낭만적이지만 않고 때로는 미친듯한 파도로 배들과 사람들을 삼킨다. 이것들은 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 받은 저주의 결과들이다(창 3:17).
그러나 현재의 하늘과 땅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취듯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듯이, 옛 하늘과 옛 땅은 지나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다. 죄악된 세계가 지나가고 의로 충만한 새 세계가 오며, 저주 받은 이 땅이 지나가고 저주가 거두어지고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세계가 올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우리의 확실한 소망이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운다. 그 도시는 ‘거룩한 성’이다. 그것은 죄악되고 불결한 현재의 세상 도시들과 전혀 다르다. 현재의 세상 도시들은 얼마나 타락되어 있는가!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죄악과 불결이 없는 거룩한 성이다.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새 예루살렘은 또한 아름다운 도시이다. 그 아름다움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묘사되었다. 11절에는,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했다. 또 18, 19절과 21절에 보면,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고] . . . .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했다.
죄는 추함을 만들지만, 의는 아름다움을 만든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시다. 경건한 아브라함의 처 사라는 아름다웠다. 의로운 욥의 딸들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믿음과 순종심이 많았던 에스더는 아름다웠다. 미는 조화에서 온다고 하는데, 미와 조화는 하나님의 성질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도시일 것이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계셔서.
새 세계 곧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주관자이시며 관리자이시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기쁨과 평강이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하나님은 만복의 원천이시다.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모든 불행이 제거된 세계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눈물이 제거되고 사망이 없고 애통이 없고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29) 얼마나 이 세상과 다를 것인지! 이 세상에는 병자들이 많다.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갖가지로 고통 당하는 자들이 많다. 이혼으로 파탄한 가정들도 많고 소년 소녀 가장들도 많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많다. 장례식들이 끊임이 없고 공동묘지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새 세계에서는 이런 불행한 요소들이 다 제거될 것이다.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이렇게 만물을 회복시킬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그가 말씀하신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인간의 범죄로 부패하였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죄악되고 저주받은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신다. 그는 옛 하늘과 옛 땅을 지나가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오게 하신다. 그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 그는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는 말씀은 만물의 회복이 하나님의 중요한 진리임을 강조한다. 만물의 회복은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마지막 목표이다. 사도행전 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두리라.”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만물의 회복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그는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세상의 일들은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구원 사역을 시작하시고 6천년 동안 진행해오셨고 또 그의 정하신 때까지 계속 그러하실 것이고 마침내 완성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만을 의지해야 한다.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란, 죄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세상과 마귀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자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길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할 것이다. 세상은 악하고 마귀의 시험은 강하고 우리는 약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기고 자신의 죄성을 이기고 마귀를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인간 계산으로 살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살자. 그것은 이기는 길이며 영광스런 새 세계에 들어가는 복된 길이다.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새 세계에는 악한 자들이 없을 것이다. 모든 죄인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세상의 핍박과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마술사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모든 악인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그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죄와 의는 반대되는 것이므로, 또 죄 가운데 머무는 자는 결국 지옥에 갈 수밖에 없으므로, 또 주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죄는 지옥 백성의 특징이요 천국 백성의 특징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죄를 버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정리해본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인 만물의 회복의 때를 사모하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이루어질 때를 사모하자.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나라를 사모하자.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눈물도 고통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망을 오직 천국에 두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우리의 죄악성을 이기고 세상과 마귀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들은 다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결코 죄 가운데 사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자. 미움과 살인, 음욕과 간음, 우상숭배, 모든 거짓을 다 버리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직 거룩과 의와 선함과 진실함 가운데 거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자들이 되도록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9-27절, 새 예루살렘성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는 구원얻은 성도들 곧 교회를 가리킨다. 그들은 부활의 영광을 입은 상태 즉 영화의 상태에 있다. 주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재림하실 그 자신을 신랑에, 그리고 성도들을 열 처녀에 비유하셨다(마 25:1).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교인들을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처녀에 비유하였다(고후 11:2). 또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비교하면서 한 몸 됨과 일치와 연합을 강조하였다(엡 5:32).
[10, 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 중에 새 예루살렘성의 환상을 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이었다. 새 예루살렘성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그 성이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성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지혜와 능력으로 만드신 성임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1:10,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새 예루살렘성은 무엇을 가리켰는가? 그것은 단순히 영화된 교회를 상징하는가? 30)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그 성의 묘사가 구체적이다. 그것은 실제로 어떤 도시로 생각된다. 31)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일 것이다.
그 성은 한마디로 거룩한 성이라고 표현된다. 인간의 영화의 상태나 천국은 한마디로 죄가 없는 곳이며 죄가 없는 상태이다.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 성의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았다. 그것은 그 성이 심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움을 나타낸다.
[12, 13]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는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고 각 문에는 열두 천사가 있다. 그 천사들은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이다. 그 성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성이다. 또 열두 문 위에는 각각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다. 열두 지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전체의 수를 상징한다(계 7:4-8).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성의 열두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들이 그리로 들어옴을 나타낸다. 동서남북에 세 개씩의 문이 있는 것도 온 세계로부터 택한 백성들이 그리로 들어옴을 상징한다. 온 세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택한 백성들은 그리고 그들만 구원받을 것이다.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새 예루살렘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그는 사도들을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교회는 사도들이 전파하고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와 속죄의 복음 위에 세워졌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다(고전 1:23). 그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그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며 그들은 장차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15-17]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그 성의 크기가 언급된다. 그 성을 척량하는 금 갈대는 세상의 잣대가 아니고 영적인 잣대, 그러나 확실한 잣대를 가리키는 것 같다. 금 갈대로 재어진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고 넓이와 길이가 같은 정방형이며 높이도 같다. 그 길이는 12000스다디온이다. 그것은 12 x 1000스다디온이다. 12는 완전을 나타내는 수이며 1000은 충만을 나타내는 수이다. 스다디온은 약 184미터이며 12000스다디온은 약 2210킬로미터이다. 우리나라 이북의 함경북도 북쪽 끝에서 경상남도 부산의 남쪽 끝까지 직선거리가 약 1000킬로미터이니까, 새 예루살렘성은 문자적으로 그 길이의 두 배 가량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가진 도시이다. 그러나 12000스다디온은 완전하고 충만한 크기의 도시를 상징할지도 모른다. 또 그 성곽의 높이는 144규빗이다. 144규빗은 12 x 12규빗이다. 그것은 약 65미터 정도이지만 아마 완전한 높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18-21]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이며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이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 이것은 다 그 성이 아름답고 깨끗하고 귀하고 영광스러움을 나타낸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장차 누릴 영광을 나타낸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부활체의 영광이며 영원한 천국의 영광이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했다(롬 8:18).
특히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졌다. 그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입은 판결 흉배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열두 개의 보석과도 같다(출 28:17-21). 성곽의 기초석 위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는데(14절),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된 사도들이 각각 받은 은혜가 달랐지만, 다 귀한 하나님의 보배들이었음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보석과 같이 귀히 여기신다(마 13:44-46).
[22-27]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성 안에는 없는 것들이 있었다. 첫째로, 성전이 없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구약 성전은 그림자와 모형이었고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주 예수께서 친히 계시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치 않다. 둘째로, 해와 달의 비침이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광은 해와 달의 비침보다 더 클 것이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올 것이다. 셋째로, 밤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성을 항상 대낮같이 밝게 만들 것이며 따라서 성문들을 닫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넷째로, 죄인들이 없을 것이다. 모든 더러운 것들과 가증한 일이나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거기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회개치 않은 자들은 아무도 그곳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씻음받고 중생한 자들만 그곳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속죄 신앙은 그 성에 들어가는 출입증이다.
결론적으로, 9절부터 27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우리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지키자. 사도들의 교훈은 성곽의 기초이다. 갈라디아서 1:8, 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디모데후서 1:13, 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둘째로,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배로 여기신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셋째로,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악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만 믿고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며 살자. 모든 죄를 다 버리고 멀리하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시 1:1). 성경의 모든 교훈을 믿고 가감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바른 길이며 복된 길, 평강의 길, 영생의 길이다.
계22장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라
1-6절, 새 예루살렘성의 복됨
[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전장에서 새 예루살렘성의 영광에 대해 증거한 사도 요한은 이제 그 성의 복됨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성도들이 그 성에서 영생을 누릴 것을 증거한다. 새 예루살렘성에는 생명수의 강이 있다. 그것은 수정같이 맑은 강이다. 그것은 더러운 쓰레기와 오폐수로 더럽혀지지 않은 강이다. 거기에는 사람에게 장염을 일으키는 대장균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생명수의 강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 강물이 생명의 힘을 주는 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강물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표현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근원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義)와 생명과 성령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강물이다.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또 새 예루살렘성에는 많은 생명나무들이 있을 것이다. 그 나무들은 길 가운데, 강 좌우에 있을 것이다. 그 나무들에 열두 가지 실과들이 달마다 맺힐 것이다. 그것들은 천국 백성에게 다양하고 풍성하게 생명력을 북돋울 것이다. 또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에 생명력과 활기를 주는데 사용될 것이다. 천국에는 생명의 쇠약함이나 쇠잔함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병도 병원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항상 건강과 원기가 넘칠 것이다. 새 예루살렘성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릴 것이다.
[3-5]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둘째로, 요한은 성도들이 그 성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릴 것을 증거한다. 새 예루살렘성에는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그를 섬기며 그에게 예배드리고 그의 얼굴을 보고 그와 교제할 것이다. 또 그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소속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비취시므로 어두움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그곳에서 왕 같은 신분과 특권을 가지고 생활할 것이다.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이 말’ 곧 새 예루살렘성에 관한 말씀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증거되었다. 또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은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신’ 것이라고 증거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실하고 참된 말씀이며 요한계시록도 그 한 부분이다. 또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반드시 속히 되어질 사건들을 예언한 것이다.
7-10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됨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면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초두에서도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7인, 7나팔, 7대접으로 묘사된 대환난이 올 것이다. 천재지변들이 있고 세계적 큰 전쟁들이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 즉 세계를 지배하는 무서운 전제주의적(專制主義的) 국가와, 거짓 선지자 즉 전세계적인 배교한 교회가 나타날 것이다. 극심한 환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림하심으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패할 것이다. 큰 음녀와 바벨론은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들은 인내하면서 순결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메시지의 요지이다. 우리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그런 자들이 복이 있다.
[8, 9]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 한 잘못을 범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다. 사도라도 실수할 수 있다. 천사는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은 그와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라고 말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했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우리 모두는 다 형제, 자매이며 성경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자들일 뿐이다.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재림의 때, 심판의 때, 천국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덮어두어야 할 책은 아니다. 그것은 목사들이 성심으로 설교하고 강론하고 전파해야 할 내용이다.
11-15절, 행한 대로 받음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두 번 권면했으면 충분할 것이다. 세 번 혹은 네 번 반복해서 권면하고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이제 각자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그 은혜를 좇아 자신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 불의를 하는 자나 더러운 자는 더 이상 권면을 받을 기회가 없다.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도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각자 하나님이 주신 은혜대로 하나님께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힘쓰고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일 것이다. 그 은혜 안에 거하고 그 은혜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께서는 다시 재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행위 보응에 대하여 약속하셨다. 의를 행하는 자는 천국에, 악을 행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신자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의와 거룩을 행하다가 영생에 들어간다.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처음과 시작은 창조를 가리키고 나중과 끝은 종말과 심판을 가리킬 것이다. 처음과 끝을 주장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또 처음과 끝이 되신 주님은 인간과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며 정리자가 되신다.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다수사본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대신에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명들의 내용은 의와 사랑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제로 의를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정확히 알고 배우고 깨닫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자들이 복되다. 또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원하며 또 기도하기를 원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한다. 또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다른 이를 미워하거나 비방하지 않는다. 그는 남을 존경하고 남의 부족과 실수를 용서하고 남에 대해 너그러움과 이해심과 관용심을 가진다. 이런 자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갈 것이며 문들을 통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참으로 예수 믿는 자이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그러나 의와 사랑이 없는 자들, 죄 가운데 사는 자들, 예컨대, 개들 즉 부도덕하고 남을 물어뜯는 자들, 술객들 즉 악한 신비술을 쓰는 자들, 행음자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은 성 밖에 있을 것이다. 성 밖에 있다는 말은 결국 지옥에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인류의 최종적 상태는 천국과 지옥 둘뿐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부터 15절까지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강조한다. 첫째로, 본문은 새 예루살렘성의 복됨을 증거한다. 그 성에서 우리는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를 통해 풍성한 영생의 생명을 누릴 것이다. 또 그 성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 또 왕 같은 신분과 특권을 누릴 것이다. 그 복된 성과 거기에서의 삶을 사모하자!
둘째로, 우리는 이 책의 에언의 말씀을 지키자. 장차 극심한 대환난과 핍박이 닥칠 것이지만, 우리는 불신앙과 악과 타협하지 말고 순수한 믿음을 지키면서 끝까지 참아야 한다. 환난 시대에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경건과 의와 사랑과 진실 등이다. 우리는 항상 성경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고, 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또 진실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표이며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힘써 행한다.
16-21절,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은 예수께서 교회들을 위하여 그의 천사를 사도 요한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우리에게 증거하고 기록하게 한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참 저자는 사도 요한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라고 증거하셨다.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그는 만물의 근원이시고 32) 인간의 근원이시며 또 다윗의 근원이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윗의 자손’이시다. 이것은 그의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그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 다윗의 후손으로 탄생하셨고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는 또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는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 아침이 올 때 뜨는 별처럼 죄악된 인류 역사를 끝마치고 천국의 새 시대를 여는 별로 오셨다.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는 교회와 그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오라’는 말은, 많은 주석가들이 이해하는 대로,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소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본문, ‘오소서.’ 또한 주의 재림의 약속이나 그에 대한 응답의 말을 듣는 자도 ‘오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자들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7:37, 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18, 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가감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책에서부터 강조되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모세오경에 역사서들과 시가서들과 선지서들이 첨가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주신 내용에 무엇을 첨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한 말씀들이었다. 이제 구약성경에 신약의 복음서들과 역사서와 서신서들이 첨가되었고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으로 첨가되었다. 그런 후 요한계시록의 이 마지막 부분에 가감치 말라는 또 한번의 강조와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언급된 경고는 매우 엄숙하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더하면 하나님의 재앙이 그에게 더하여질 것이며, 누구든지 무엇을 빼면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경고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증거한다. 또 이것은 이 책이 종말 예언에 있어서 충족한 계시의 책임을 증거한다. 이 책에 더 이상 무엇을 첨가할 내용이 없다. 요한계시록은 종말 예언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요 표준과 법칙이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와 아니 성경 전체에 적용될 만한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경 맨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성경 전체의 권위와 충족성에 대한 결론적 확증이 되었다.
[20, 21]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주의 말씀에 응답하여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했다. 전통사본에는 ‘아멘 주 예수여 진실로 오시옵소서’라고 되어 있다. ‘진실로’라는 말(나이)은 ‘정말, 참으로, 진실로’라는 뜻으로 재림의 확실함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나이). 아멘.”
주께서는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주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나타낸다. 베드로후서 3:8-1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아멘, 주 예수여 진실로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은 모든 신약 성도들의 큰 소망이다. 주께서 다시 오셔야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자. 모든 신자들은 그를 향해 ‘오소서’라고 외쳐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주의 재림에 모든 가치를 두어야 한다. 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주께 나아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비롯하여 모든 신구약 성경을 가감하지 말자.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으로 만족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믿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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