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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18

공 상희 2008. 5. 22. 16:24
 

기도가 해답이다   요일 5장 13 ~ 15절



오늘날은 만능의 시대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만능이라고 합니다.

돈 있는 사람은 황금이 만능이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과학만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만능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약간의 유익을 주고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결코 만능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만능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기도는 만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기도하는 자가 망한 예가 없습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기도하는 자를 이기지 못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굶주린 사자의 입을 봉하여 그를 살리셨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옥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그들을 묶고 있던 착고가 풀렸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태양을 중천에 붙들어 매어 해가 지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10도 물러가게 했습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음식이라 한다면 기도는 호흡이고, 전도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음식과 운동이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나 제일 필요한 것은

생명의 호흡입니다. .


우리의 삶이 무기력합니까? 신앙에 진보가 없습니까?

생영의 맥박수가 떨어져 있다는 징조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했습니다(요일 5:15).

부르짖어 구하고, 구한 것 받으시는 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Ⅰ. 자녀를 살린 끈질긴 기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지방을 지나가실 때에 한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의 첫 번째 드린 기도에 주님은 잠잠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아뢰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릴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엎드려 절하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엎드려 절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최대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고 내 몫을 주장한 것은 없었습니까?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교회에 충성했는데....”

“내가 교사로, 성가대로, 몇 년을 수고했는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감사 생활을 하고, 십일조 생활을 했는데....”

“주님! 저의 이 작은 소원을 들어 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주님께서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짐짓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부르짖음은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이 여인의 믿음의 극치는 “마는”에 있었습니다.

가장 큰 겸손이요, 가장 절실한 기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제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이 말은 그의 생애와 믿음과 소망을 이 한마디에 걸고 있는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끈질기고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에서 자녀를 구원한 능력은 겸손하고 끈질긴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Ⅱ.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소원의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0장에서 여리고 성의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디매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라고 했습니다.

“디매오”는 소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소경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2대에 걸쳐서 소경이 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바디매오의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간절한 소원을 가진 자에게 임했습니다.


어느 날 이 소경에게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식인가? 얼마나 그 분을 만나기를 소원했는가?

그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용수철처럼 뛰어 일어났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다윗의 자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라고 들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예수라고 들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을 고치시는 예수라고 들었을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고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 만나면 내 눈도 뜰 수 있다는 소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소경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에게로 돌리게 하였습니다.

예수만 만나면 눈을 뜬다”는 그의 믿음은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믿음으로 구한 간절한 기도는 소경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Ⅲ. 나라를 구한 회개의 기도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19장에서 히스기야 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열왕기하 19장 1절에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라고 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은 것은 통회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 뿐 아니라 모든 궁내 대신들도 베옷을 입고 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신을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어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간절한 회개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자를 파송하여 하룻밤에 18만 5천명의 앗수르의 군대를 치심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할 때 에서의 마음이 녹아지고, 모세가 기도할 때 홍해의 물이 갈라지고,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아간의 죄악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사무엘을 얻고,

엘리야가 기도할 때, 3년 6개월간 닫힌 하늘 문이 열리고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여닫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여러분이 가진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














축복의 그림을 그립시다   여호수아 18장 1~ 10절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히11:1).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소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축복받는 비결이 무엇인가? 축복의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의 그림을 그리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가 그린 그림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축복의 기업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약속이 있어서 그냥 얻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 거민과 싸워서 이기고 얻는 전리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르우벤 지파, 갓지파, 므나세, 에브라임,

유다 지파 등은 이미 자기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일곱 지파는 아직도 자기 기업의 땅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여호수아는 “지체하지 말고 축복의 그림을 그려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도,

약속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취하러 가야 합니다.


금년은 우리 교회의 신앙지표가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라”입니다(수18:3). 이 한해 동안 우리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어떤 축복을 받을 것인가?


Ⅰ. 축복의 그림은 신앙의 결단을 통하여 완성되고 실현됩니다.


본문 3절에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도 그것을 내 것으로 취하는 힘씀과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레20:24).

그러나 그 땅은 취하는 자의 것입니다.

왜 일곱 지파는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지체하고 있는가?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싸움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열 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보고했는가?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우리가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민13:30-33).


용기가 없는 사람은 상대방은 크게 보이고 자신은 작게 보입니다.

겁에 질린 눈으로 보니 상대방은 강해 보이고 많아 보이고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하는 사람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머뭇거려도 안 됩니다.

복싱 선수가 상대방 주먹이 바위처럼 커 보이면 그 시합에서 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 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1:21).

그러므로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결단해야 합니다.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결단해야 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세웠다면 그를 위하여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새벽기도하고,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십일조 드리고, 건축 헌금 드리고,

선교헌금 드리면서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법궤를 메고 요단을 건너가라” 하셨는데, 법궤를 메고 요단강가에서 머뭇거리고 서 있다면 영원히 요단강은 갈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내딛을 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비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복의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17:20).


우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마7:7).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갖지 못한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늘문을 여닫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내 것으로 취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Ⅱ. 구체적인 축복의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


본분 4절에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 기업에 상당하게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기업에 상당한대로”-“그 기업의 몫을 따라”,

“그 기업의 형편따라” 구체적으로 그려오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막연하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창1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되 바라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밟아서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고 그것을 확인하고 체험하고

나면 그것을 통해서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께 구할 때 어떻게 구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교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않겠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응답 받았습니다(삼상1:11).

우리는 구체적으로 축복의 그림을 그리고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소원의 꿈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본문 9절에서 10절에 “그 사람들이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성읍들을 따라서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리고 실로 진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오니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해 실로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땅을 분배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일곱 지파 대표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땅을 두루 다니면서 확인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해 여호와께 기도하고 제비를 뽑으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대로 땅을 배분하여 주셨습니다.

잠언 16장 9절 말씀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일곱 부족들은 그들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승리했습니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그 기업에 상당한 그림을 그렸을지라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농부가 씨를 뿌리고 잘 가꾸어도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맞춰 주시고, 알맞게 햇볕을 주시고, 바람을 주시고, 병충을 물리쳐 주셔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충성하는 삶을 통하여 축복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축복의 법을 지킵시다  잠언 3장 1~ 9절


인류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할 때 진정한 성장과

발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출19:5~6).

레위기 26장 3~4절에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지라”고 했습니다.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창대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출20:6).

하나님의 법은 은혜의 법이요. 축복의 법이요.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축복의 법과 명령을 지킬 때 범사에 넘치는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축복의 법에 참예할 수 있고, 어떤 축복을 받을 수 있는가?


Ⅰ. 장수와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본문 1~2절에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며 평강을 더하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율법과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되고 장수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주의 자녀들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건강이요. 장수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7:11).

요한사도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요삼1:2).

세상에서는 튼튼한 육체에서 튼튼한 정신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튼튼한 정신에서 튼튼한 육체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배운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타락하지 않고 방종하지 않습니다.

그 영혼이 강건함으로 그 육신이 강건한 것입니다.

육신이 강건하므로 범사가 형통한 것입니다(요삼1:2).

일찌기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적 설교를 했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께서 네게 인앨르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성케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7:12~15).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번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물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질병을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손이 잘되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현세적이고, 또한 내세적이고, 영적이고, 육적인 복이고,

전 생애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대상은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이나, 나라전체에 미치는

축복이 되,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도와 교훈을 잘 지키는 개인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고,

사회가 잘되고, 나라가 잘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는 기독교인이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학자도, 예술가도, 운동선수도 하나님을 만난 기독교인입니다.

잘사는 나라도 모두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잘사는 나라가 되고, 행복하게 잘사는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을 많이 세우는 것도 중요하고, 공장을 많이 세우는 것도 중요하고,

수출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그 명령을 지키면서 살아갈 때에 이 땅에서 부정부패가

사라지고, 부조리와 범죄도 사라지고, 폭력도 사라지고, 가난도 사라지고,

이 땅에 천국 같은 복지국가가 건설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존귀와 영광을 얻는 복이 있습니다.

본분 3~4절에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메며,

네 마음판에 새개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인자함” 이란? 친절, 자비, 긍휼, 사랑의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인자함과 진실함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도움을 주면서 사는 사람은 은총(사랑), 존귀함(칭찬)을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개인 뿐 아니라 사업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사랑하고,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생각해야 서로 잘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 잘되기 위해서는 협력하는 중소기업이 건실해야합니다.

나무도 잔뿌리가 왕성해야 나무가 왕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변화된 성도의 삶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서 다시는 도적질하지 말고,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엡4:23~24).

믿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18:22).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셨습니다(골3:14).

남의 허물을 덮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인간을 존귀하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입니다.


Ⅲ.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

본문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고후9:10).

농사꾼이 심는 씨앗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도 주의 것이요. 태양도 주의 것이요. 바람도 비도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공간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빌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성경은 물질의 축복을 받는 원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습니다(말3:10).

하나님의 약속은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인간편에서 응답은 예비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축복이요. 은혜요. 사랑이요. 건강입니다.

  심고 거두는 축복의 법칙  갈라디아서 6장 6~ 10절



무는 4개월만 자라면 완전히 자랍니다.

그러나 인삼은 3년 내지 6년이 되어야 약효가 있고, 정말로 귀한 산삼은 50년, 100년 몇 백년 묵어야 귀한 양약이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쓸만한 인재가 하루아침에 탄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학문을 연구하고, 연단 받고, 훈련 받고, 교양과 인격을 쌓고, 경험을 쌓고 지혜와 지식을 연마한 사람이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두 해 예수 믿었다고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성장하는데, 오랜 훈련이 필요하고, 부단히 애씀과 힘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심고 거두는 축복의 법칙입니다.

시편 126편 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했습니다. 축복의 단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며 뿌려야합니다.

뿌리지 않은 씨앗은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고의 땀을 흘리고, 고난의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기도의 씨앗을 뿌리고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축복의 씨앗을 뿌릴 때 축복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의 대학자 주희는 그가 쓴 주자십회(朱子十悔)에 “춘불경종 추후회(春不耕種 秋後悔)”라고 했습니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아니하면 가을 추수할 때 후회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라는 주어진 이 시간에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써서

축복의 씨앗을 뿌릴 때 자손 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을 거둘 것입니다.


Ⅰ. 좋은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는 축복의 법칙입니다.


본문 6~7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효도해야합니다.

또한 우리는 가르쳐주시고 우리를 지도해주신 스승님께 감사해야합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교양과 법도로 양육해주신 교회와 지도자에게 감사해야합니다. 이것이 좋은 것을 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심은 대로 주시는데 심은 만큼 주시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4장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수고의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되도록 수고를 덜하고 되도록 노력도 덜하고 되도록 투자도 덜하면서 되도록 많이 거두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속지 아니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땅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내어 놓을 때, 얼마를 떼어서 자기 몫으로 챙겼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하였습니다(행5:3).

아나니야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과 골수까지도 쪼개어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바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속지 아니하십니다. 심은 대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9장 6절의 말씀에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추수의 법칙은 심은 만큼 거둡니다.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둡니다.

추수의 법칙은 정직합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납니다.

콩 심은 데서 팥이 나지 않고, 팥 심은 데서 콩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 내 자식에게서 효를 거두고, 내가 부모에게 불효하면

내 자식에게서 불효를 거둡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고, 긍휼을 심으면 긍휼을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고, 많이 심고, 많이 거두기를 바라십니다.


Ⅱ. 성령을 위하여 심고 영생을 거두는 것입니다.

본분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심고 거두는 축복의 법칙 두 번째는 성령을 위하여 심고 영생을 거두는 법칙입니다.

“성령을 위해서 심는다.”란 무슨 말인가? 성령을 따라 사는 자란 말입니다.

육체를 따라 산자가 허무와 무익함과 사망을 거둔다면, 성령을 따라 산자

-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산자는 영생을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자연의 법칙이 영적인 원리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마19:29~30).


오늘날 우리가 자기 육체를 위해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가진 정성 다 드려도 그 결과는 축복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고 결국 죽음뿐인데 -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물질 드리고, 시간 드리고, 땀 드리고, 눈물 드리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헌신하고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자에게 행복과 번영과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먼저 하나님께 충성하고,

먼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위하여 심는 자에게 축복의 열매를 주십니다.


Ⅲ. 선행을 심고 축복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심고 거두는 축복의 법칙은 선을 심고 축복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좋은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실패도 오고, 때로는 실망도 하게 되고, 때로는 낙심되는 일들도 많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을 악으로 갚고, 신세를 원수로 갚는 사람도 있고, 은혜를 입고도

감사치 않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잠19:17).

선행은 하나님께 구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면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히브리서 13장 16절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선행을 심어 하나님은 기쁘시게 해드리고, 축복의 상급을 받으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0’을 더합시다  마가복음 4장 24~ 25절


사람이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물질입니다.

그러나 물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6:18).

이 반석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반석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지는 것처럼 우리의 사업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명예도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만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마7:25).

본문의 말씀에도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헤아림이란 것이 무엇인가? 믿음의 분량입니다. 믿음의 그릇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분량 따라 믿음의 크기에 따라서 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축복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큰 믿음을 준비하고, 큰 은혜를 체험하는 길은 무엇인가?

Ⅰ. 기도하는 시간에 ‘0’을 더합시다.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7:9).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돼지에게는 진주보다 썩은 감자 한 덩이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면 더러운 발로 밟아 버릴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마7:7~11).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1장 5절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하였습니다(행5:3).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관은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들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끈질기게 구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없신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도 그 말은 들어 주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1절 말씀에도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라고 했습니다. 한나가 한두 번 기도한 것 아닙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 기도하고 응답으로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기도는 강청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끈질기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40주야를 금식기도하며 받은 것이 십계명입니다. 문제 해결 받기를 원하시는 분은 기도해야합니다.

성경은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시50:15)

능력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렘33:3).

기도는 하늘문을 여닫는 열쇠입니다. 크고 비밀한 성령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 공급 받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고, 달음박질해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새 힘과 새 능력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받는다고 했습니다(사40:31).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시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행12:5, 16:25).

병 낫기를 원하시는 분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약5:15).

성경은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신다는 약속으로 꽉차있습니다.

본문은 너희의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도할 것인가? 여러분의 기도 시간에 ‘0’을 더하십시오.

3분 기도하시는 분은 ‘0’을 더하여 30분을 기도하십시오.

5분 기도하시는 분은 50분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양 만큼, 기도의 시간만큼, 여러분의 능력도 믿음도 커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봉사와 충성의 시간에 ‘0’을 더하십시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청지기란 가정 관리자, 살림을 맡은 종이란 뜻입니다.

청지기에게는 자기의 소유는 없습니다.

다만 주인의 것을 맡아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고전4:2).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업체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은사도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계2:10).

그냥 충성하라는 것이 아니고, 죽도록 충성해야합니다.

충성하는 흉내만 내어서는 안 됩니다. 쉬엄쉬엄 충성해도 안 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충성은 죽도록 -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목사직에 생명을 걸고, 장로는 장로직에 생명을 걸고,

교사는 교사직에, 집사는 집사직에, 구역장은 구역장직에, 회장은 회장직에 생명을 거는 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충성은 지금 내가 헌신하는 시간에 ‘0’을 더하는 것입니다. 10분 충성하던 성도는 100분을 충성하십시오.

하루를 충성하던 성도는 열흘을 충성하십시오.

한 시간 전도하던 분은 10시간 전도하시고, 한 사람 전도한 분은 열 사람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Ⅲ. 여러분의 헌금에 ‘0’을 더하십시요.

고린도후서 9장 6~7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라는 말이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30배와 60배와 100배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막4:8).

추수의 법칙은 땅의 법칙이요 또한 하늘의 법칙입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둡니다.

좋은 것을 심은 자는 좋은 것을 거두고 나쁜 것을 심은 자는 나쁜 것을 거둡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잠19:17).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면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물질,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물질은 허비가 아니고 투자입니다. 하늘나라에 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되 박을 심던 성도는 ‘0’을 더하여 한 말을 심으십시오.

한 말을 심던 성도는 ‘0’을 더하여 한 가마니를 심으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네 믿음만큼, 네가 심은 양만큼, 거기에 30배, 60배, 100배를

더하여 갚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풍성히 심고 풍성히 거두시는 축복스러운 농사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의 시대적 사명   마태복음 28장 16~ 20절


본문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물러 계시다가 감람산 꼭대기에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할 성도들에게 주신 막중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예수님의 유훈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명령은 “가라!”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1절엔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2장 9절엔 “사거리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와 뭇 백성에게로 가야합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죄에서 사망에서 구원받아야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명령은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성도의 명부에 올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자”란 가르쳐서 천국백성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명령은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란 말은 “씻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으라는 말입니다. “잠긴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뿌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뿌림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의 의미를 함께 묶으면 “인”을 친다는 뜻입니다.

“인친다”는 뜻은 소유의 확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소유로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네 번째 명령은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가르친다는 말은 “자라게 하라” “성장 시킨다” 곧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명의 말씀을 주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은 전도의 사명과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시대적 사명은 바로 예수님께서 명하신 이 지상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Ⅰ. 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지상명령인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이렇게 귀한 사람의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행4:12).

유사이래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이 이 영생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으나

유교도 불교도 회교도 이 영생의 문제에 확실한 해답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요14:6).

예수만이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만이 그 영생의 진리입니다.

예수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사는 길이 예수 믿는 길 밖에 없으니 예수를 전해야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영생 얻는 길이 예수 믿는 길 밖에 없으니 예수 믿는 길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롬10:13).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롬10:17).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곧 생명을 구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해야합니다.


Ⅱ. 왜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리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곡간에 드리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관념의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실존하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실존하는 지옥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영생합니다. 구원 받은 영혼도 멸망 받는 영혼도 영생합니다.

육신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도 영혼은 천국의 영혼도, 지옥의 영혼도 영생합니다.


그런데 지옥은 어떤 곳이라고 하였습니까?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막9:48)

계시록 21장 8절엔 “두려워하는 자 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흉악한자들과 살인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기 때문에 “천국이 좋은들 이 세상만큼 좋으랴”고 합니다. “지옥이 어려운들 이 세상만큼 어려우랴”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막9:4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라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 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막9:43~47).

무슨 말씀입니까? 손이 잘리든지, 다리가 잘리든지, 눈이 뽑히든지, 어떤 희생,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지옥에는 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우리 앞에 있으니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Ⅲ. 교회에 주신 사명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는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빌3:14).

히브리서 11장 26절엔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상급은 행위 따라 받습니다.

상급은 구하여 받는 것이 아니고 공로 따라 받는 것입니다.

일등한 사람은 일등의상을, 이등한 사람은 이등의 상을 받습니다.

그러면 사명에 충실한 종에게 주실 상급은 무엇인가?

성경은 “영원히 빛나는 존재가 되게하신다”고 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단12:3)

하늘에서 가장 귀한 전도의 상급, 선교의 상급을 받아서 영원토록 빛나는 존귀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옥합을 깨뜨리자 !  마가복음 14장 3~ 9절


깨어진 것들이 사람과 하나님 앞에 유용한 것이 됩니다.

밀이 깨어져야 가루가 되고, 밀가루가 빵이 됩니다.

깨어지지 않은 통밀은 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기도온의 깨어진 항아리가 미디안과 아말렉의 대군을 진멸시켰습니다(삿7:9).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깨어진 배 조각을 붙들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찢겨진 못자국과 창 자국이 인류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으셨습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흩어진 유대인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뿌림에 의하여 택자 구원완성의 하나님의 구령의 역사가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는 제물은 모두 죽은 것 이었습니다. 목이 잘리고, 각이 떠지고, 내장이 쏟아져서 철저히 죽은 제물만 번제단에 불살라졌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떤 증거 유물이 필요하다면 아마도 마리아가 깨뜨린 옥합의 조각들이 가장 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온천하게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리아의 깨어진 옥합 조각들이야 말로 사랑의 증표요. 헌신의 증표요.

침묵으로 말하는 위대한 설교가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창에 찔리고, 피를 쏟으시고,

물을 쏟으시고, 겉옷을 주시고, 속옷을 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던,

그 한없는 사랑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아니겠는가?

이시간 나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몸된 교회에 부어지는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이 놀라운 헌신! 주님을 향한 고상한 헌신이 결단되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Ⅰ. 깨어진 옥합은 보은의 헌신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 말씀에는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다니에 사는 시몬은 전에 문둥이였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입니다.

나사로 - 그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 나던 사람이 “나사로야 일어나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걸어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10절에 “대 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기로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음이더라”고 했습니다.


마르다! 나사로의 누이로서 주님을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곳에 모였고, 주님은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마리아의 옥합이 주님을 위하여 아름답게 깨어진 것입니다.


당시 이 향수의 값이 300데나리온 이상이었다면, 장정 일년치 노임과 맞먹는 값입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일천만원에 해당하는 귀한 물건입니다.

아마도 이 향수는 마리아의 결혼 지참금 이었을 수 있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만한 값이 나가는 물건은 가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귀한 옥합을 예수님을 위하여 깨뜨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받으시되 가장 귀한 것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항상 첫 이삭, 첫 단, 시간을 드려도 첫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려도 미숙한 어린아이의 헌신이나, 늙고 병든 쓸모없는 노인의 헌신을 드리는 것보다 가능성과 소망이 넘치는 젊음의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헌신은 찔끔, 찔끔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은혜가 귀한 것처럼 보은의 헌신도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Ⅱ.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본문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일”이란 “선한행위” “고상한 행위”를 말합니다.

마리아의 옥합이 깨뜨려져 주님 머리위에 부을 때 누가 제일 놀랐는가?

가롯유다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롯유다가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줄 수도 있었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가장 아깝게 생각한 사람이 가롯유다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서 이 가롯유다를 내어 쫓아야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값비싼 것을 드린다 해서 허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는데 가롯유다는 “허비 했다.”고 책망했습니다.

허비가 무엇인가?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는 것입니다.

위장이 구멍 나도록 마시고, 병원에 수백만 원, 수천만 원 치료비 내는 것이 허비입니다.

구원받고, 은혜 받고, 축복받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헌금은 허비가 아니라

거룩한 소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마6:20). 하늘에 쌓는 것이 무엇인가?

물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물질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유가 없는 사람은 고난을 쌓는 것입니다.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찬141장)

하늘에 쌓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소비입니다. 고상한 지출입니다.

이 땅의 것을 하늘나라로 가져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Ⅲ.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힘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힘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두렙돈의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많이 넣었다. 귀한 것을 드렸다고, 칭찬하신

예수님께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했다.”고

칭찬하신 것은 마리아가 드린 옥합은 그의 모든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라”고 하시고(고후 8:3).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고후9:7).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헌신할 수 있는 마지막기회를 선용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헌신을 받으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십자가에 달리시어 공생애를 끝맺은 것입니다.

내가 받은 놀라운 구원! 이 놀라운 축복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은 나의 옥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여러분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되기를 에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디모데 후서 3장 15~ 17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신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과 선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귀한 선물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마치 복잡한 전자 기계의 설명서와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그 용도와 정확한 사용법을 알지 못하면 그 기계는

그 소유자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계가 가는 곳에는 항상 그 기계의 설명서가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따라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그가 이 땅에 오셨으며, 그가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성경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의 한 축사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위대하게 살다 간 한 선지자요 성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이시며,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관한 설명서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어디에나 성경이 같이 가야합니다.

그러므로 그 성경은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성경을 읽는 자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성경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구원의 사역이라면,

성경을 주신 것도 구원의 사역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그 역할에 대하여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기 원합니다.


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습니다.

본문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로 쓰여졌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기획하고 구성하여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그가 택한

선지자에게 불어넣어 주셔서 그 선지자가 쓴 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사람의 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다른 선지자의 입을 빌려 말씀하시고, 그들의 손을 사용하여 글을 쓰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하나의 주제가 있고, 모든 성경은 공통된 신학과 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성경을 존귀히 여기고 그 권위를 인정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Ⅱ.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합니다.

본문 15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절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지혜가 있게 하며,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게 하고, 불완전하고 무기력한 인간을

완전하게 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능력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중생의 역사가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과 선교의 주역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성령 체험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죄인들이 거듭나는 중생의 역사를 말씀의 역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떡을 얻으려던 무리들이 떡을 얻지 못하고 다 떠나버리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려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예수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말씀의 역할과 능력을 이미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눅 5:5).

그래서 말씀이 생명을 거듭나게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역사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는 능력이요,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며,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천지 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오로지 엎드리며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신적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개되거나 사사로이 번역되거나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말씀 한마디마다, 모든 말씀 한 구절마다 정확하게 번역되고,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경비평학자들은 성경의 권위와 능력을 무시하고, 자의로 번역하며,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오도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는 도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바로 번역된 바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Ⅲ. 성경은 바르게 번역되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진리이기에 성경의 바른 번역은 이시대가

요구하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성경공회에서는 성경을 바로 번역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안에는 새로운 성경이 출판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성경공회가 추구하는 성경은 바른 번역입니다.

바른 번역이라 함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합니다.


1. 바른 성경관을 전제한 번역입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전제하지 않는 성경 번역은 새로운 성경을 저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2.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을 가진 번역입니다.

여기서 바른 신학, 바른 신앙이란 전통적인 보수 개혁신학을 의미합니다.

바른 번역 진들은 우리 한글 개역성경의 신학과 신앙 전통을 대물림하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3. 바른 번역 원칙과 이론에 입각한 번역입니다.

의미 일치론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배격하는 이론입니다. 힘든 일이지만 형식과 의미가 일치하는 번역이어야 바른 번역입니다.

한국성경공회가 번역하여 출판하고자하는 “바른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성경,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의 성경,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의 성경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   신명기 28장 1 ~ 6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보다 더 큰 사랑과 더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귀한 선물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은 마치 복잡한 전자기기의 사용설명서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그 사용법을 모르면 무용한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이 없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의 증언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한 시대를 위대하게 살다간 탁월한 위인이나, 성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예수님에 관한 설명서이고, 축복으로 인도하는 안내서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축복은 영혼이 구원 받아 천국에서 영생하는 영적인 축복이고,

또한 땅에서 축복받아 육신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그 이름이 세계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신다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 주일을 지키면서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면서 축복의 문을 여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Ⅰ. 성경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베드로가 천국 열쇠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가졌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시인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베드로는 결코 천국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국열쇠를 교황이 가지는 전유물도 아닙니다.

어느 누구라도 - 죄가 많건, 죄가 적던 -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시인하면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이 바로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16:31). 요한복음 3장 16절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처음들은 사람도, 이 성경의 말씀을 확실히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천국 문을 여는 열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입니다. 천국 문은 바로 이 믿음의 열쇠로 여는 것입니다.


Ⅱ. 성경은 물질의 창고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축복의 하늘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축복만이 아니라 건강의 축복, 지혜의 축복, 평안의 축복, 믿음의 축복과 더불어 물질을 통하여 들어오는 여러 가지 사탄의 시험을 막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이 축복의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록 22장 18~19절 말씀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일점일획도 변개하심이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하늘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나, 주시지 않으시나 시험하여 보라고하셨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하늘의 축복의 창고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Ⅲ. 성경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인생사 모든 문제는 기도로서 해결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 한나가 기도하고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는 기도로서 3년 6개월 동안 닫힌 하늘문을 열고 장대 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받은 히스기야는 기도로서 18만 5천 명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기도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기도할 때 착고가 풀렸습니다. 기도할 때 5병 2어의 역사가 나타나고, 기도할 때 소경의 눈이 떠졌습니다.


일찍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열차와 같고, 기도는 기차의 레일과 같은 것입니다.

기차가 달리려면 레일이 있어야합니다.

작은 문제가 있거든 기도하십시오.

큰 문제가 있거든 많이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문제도, 기도로 해결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먼저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 해결을 받는 만능의 열쇠입니다.



나의 감사가 되시는 하나님!  시편 107장 1 ~ 9절



본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가 7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을 회고하면서 찬송한 찬송시입니다.

그래서 주경학자 퍼론 같은 사람은 “시편 107편은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과 은총을 노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래가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성도들의 노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실로 성도의 감사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감사해야할 감사의 조건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Ⅰ. 구속하신 은혜를 감사해야합니다.


본문 2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구원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430년, 바벨론 70년, 블레셋, 아람, 미디안, 암몬, 모압, 앗수르 등 수많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받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위경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았다.”란 말씀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구원,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침상에 누워서 주님 앞에 나온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9“2).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는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하셨습니다(요5:14).

죄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어그러지게 하고 우리의 건강을 빼앗습니다.


이사야 59장의 말씀에도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좌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가로막고 응답의 문을 가로 막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곳곳에 도사린 많은 대적들을 만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전갈을 만나고, 사나운 짐승을 만나고, 기갈을 만나고, 기근을 만나고, 아말렉 같은 대적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는 무수한 대적들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대적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유능합니까?

어느 것 하나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이렇게 건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 공로인가?

이것이 내 노력이나 내 능력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한 것입니다(고전15:10).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Ⅱ. 회복의 은혜를 감사해야합니다.


본문 3절 말씀에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 모으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각처에 흩어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불러

모이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도성 안에 머무는 자가 있는가 하면, 멀리 오지에 정배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매 그들이 어느 곳에 있던지, 다 불러 모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나라가 회복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스룹바벨에 의하여, 에스라에 의하여, 느헤미야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귀환이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 운동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동서남북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곳으로부터 불러내어 한 곳에 모이게 한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지역으로 보면 영남지방, 호남지방, 도시사람, 농촌사람, 장사하는 사람, 농사짓던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세상에서 추앙 받는 사람, 지탄받는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고 따돌림 받는 사람도 다 불러내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이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통하여 구속역사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5).

그렇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인 나 같은 사람 - 죄악으로 인하여 찢기고, 망가지고, 열 번 죽고 백번 죽어도 마땅한 나 같은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여 주시고, 당신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회복하여 주신 주님!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과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바 없으신 그 크신 사랑과 한없는 자비하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Ⅲ.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본문 6절 말씀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마7:7).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의인의 기도도 들으시고, 죄인의 기도도 들으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도 들으시고, 세리의 기도도 들으십니다.

성경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했습니다(약5:17).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명하사 그를 바닷가에 토해 내도록 하셨습니다(욘2:10).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시6:9).


오늘날 믿는 성도들이 받은 가장 큰 특권이 무엇입니까?

기도할 수 있는 것이 특권중의 특권입니다.

성도가 받은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 응답 받는 축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도하면서 체험하는 가장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의 기도도 들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길   시편 107장 1 ~ 9절



BC. 1075년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진치고, 블레셋은 아벡에 진을 치고 전투를 벌렸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군사 3만 4천명이 죽고,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습니다.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사기가 충천하여 법궤를 아스다롯에 있는 다곤 산당에

두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곤 신상이 땅에 엎드러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 다곤의 손목이 잘리고, 머리가 잘리고,

몸뚱이만 뒹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아스돗 사람을 치시니, 아스돗에 독종이 번졌습니다.

이번엔 법궤를 가드로 옮겼습니다.

법궤가 가드에 도착하니 또 독종이 번졌습니다.

이번에는 법궤를 에그론으로 옮겼습니다.

법궤가 에그론에 도착하니 또 독종이 번졌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 머문 지 7개월 동안 다섯 곳을 전전하였으나 법궤가

가는 곳 마다 독종이 번지는 것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복술자와 제사장들을 불러 모으고 의논을 했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괴질이 번지니 이것이 어쩐 연고이냐?”

“이것이 필경 법궤를 인하여 내리는 하나님의 징계”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법궤를 돌려보낼 것인가?

“블레셋 다섯 고을을 상징하는 금독종 다섯을 만들고, 금쥐 다섯을 만들어서 궤에다 담고 새 수례를 만들어 실어 보내되 멍에 메지 않은 새끼 딸린 암소 둘을 택해서 수례를 끌고 가게해서 수례가 벳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요. 만약 소가 돌아오면 이 재앙은 우연히 생긴 재난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수레를 만들고 명에를 처음 매는 젖 나는 소 둘을 골라서 법궤와 번제물의 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여 출발시켰습니다.

본문 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향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 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고 했습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길! 그 길은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시던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길! 오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영분 밖의 좁은 길을 가는 성도들의 길입니다.

그 길은, 오늘 사명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가는 나와 여러분이 가야할 길입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이 사명의 법궤를 지고 벧세메스로 가는 사명의 길을 떠나시길

바랍니다.

Ⅰ. 진리 파수의 짐을 지고 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질된 신앙관이 법궤가 수난당한 원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운 첫날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 4천명이 죽었습니다.

진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군사들이 진중 회의를 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왜 우리를 패하게 하셨는가? 오늘의 패전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들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삼상4:3)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열 가지 이적을 통하여 애굽의 바로 왕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에서는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팔을 부축해 하루 종일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이스라엘 군사들이 아말렉을 무찔러 승리했습니다.

가나안의 일곱 부족 31왕을 쳐서 패하게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와서 전쟁마당에 내어 놓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 진에 들어 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니 땅이 울렸다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오.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왕을 친 신들이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들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고 했습니다(삼상4:9).

그리하여 블레셋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했습니다.

그 결과 이 전투에서 3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고, 블레셋은 대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투에서 참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법궤를 대하는 그들의 신앙관이 변질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법궤만 있으면 만사형통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만을 보고, 법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마당으로 들고 나온 법궤는 빼앗기고, 아벡전투에서 참패를 하였습니다.

오늘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질된 신앙의 짐을 지고

벧세메스로 가는 것입니다.

Ⅱ. 사명의 멍에를 메고 가는 길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길은 사명의 멍에를 메고 가는 길입니다.

사명은 누구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택함 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소들 가운데서 새끼 딸린 두 소를 택하여 법궤를 끌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세상일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음을 당하는 많은 어린아이들 중에서 특별히 택함을 받은 것같이

- 베드로가 수많은 어부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같이 - 세상에는 수많은 수례가 있고, 수많은 멍에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가는 멍에를 멘 소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는 오직 하나님의 법궤만을 메고 벧세메스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 소에게는 젖먹이 어린 새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초적인 본능을 버려야합니다.

이 소에게는 생전처음 끌어 보는 멍에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고통도 참아야합니다.

이 소에게는 생전처음 끌어 보는 수레의 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감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멍에를 메고, 법궤를 끌고 앞으로 가라!입니다.

사명의 길은 세상 줄 끊고, 오직 사명의 멍에를 메고 가는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Ⅲ. 벧세메스로 가는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본문 14절에 “수례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례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험한 길, 높은 고개, 고달프고 피곤하고 목마르고, 굽이굽이 눈물로 얼룩진 길이었지만, 쉬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서 벧세메스의 목적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24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승리자의 길은 대로를 끝까지 걸어가는 길입니다. 수례가 도착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밭의 큰 돌은 누구입니까?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기에 다다른 소는 어떻게 되었는가?

수례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 소가 받는 최고의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물 된 소 ! 하나님께 드려지는 인생 !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 아닌가?


나는 누구인가?   마태복음 27장 35 ~ 44절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장에 서 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간, 손과 발목엔 고난의 못 자국,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삽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절규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 밑에 수많은 군상들이 모여 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짖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예수를 모욕하는 군중들이 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희롱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억하시면 이제 구원 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조롱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 그 얼굴! 얼굴! 들 ......

그 현장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 예수처형 현장의 구경꾼인가?

아니면 그 범죄의 공범자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그 십자가 밑에서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분명한 진리는 예수 십자가 앞에서는 죄인만이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부류의 인간은 자칭 의인인데 사실은 죄인인 인간이 있고,

한 부류는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데 사실은 의인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죄인인가? 의인인가?

오늘 골고다 십자가 밑의 수많은 군상들 가운데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 나는 어떤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닮은 사람들을 만나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Ⅰ. 나를 닮은 대 제사장 안나스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고백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 살해의 주범이 아니고 종범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죽인 주범은 누구인가? 대 제사장 안나스입니다.

그는 종교를 등에 업고 자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종교정치가였습니다.

무지 몽매한 백성들을 선동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사주한 사람이 대 제사장 안나스였습니다.

은 30냥을 주고 가롯 유다를 매수한 사람이 대 제사장 안나스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은 타락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바로, 신앙에 가장 열열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안나스는 당대에 가장 성공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추앙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만약 그만한 지도력과 카리스마적인 능력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높은 대 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안나스는 그토록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는가?

벳세다 광야에서 5병 2어의 기적을 맛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요6:15).

그렇다면 머지않아서 그 갈릴리의 청년 예수가 내 자리에 올라올 것 아닌가?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의 경제 이권을 침해당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의 전매권은 대 제사장이 가지고 있었고, 제물에 사용되는 양과 소를 자신의 양과 소로 바꾸어야 제사를 드릴 수 있고, 심지어는 세상 화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성전 화폐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돈 바꾸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막대한 이권이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안나스는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하고, 신앙의 이름을 내 걸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안나스를 담대히 정죄하지 못하는가?

나는 입으로는 희생봉사, 사랑을 외치면서 손톱만큼의 손해나, 희생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닌가?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나요. 나요. 하면서 살고 있는 나는 아닌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안나스 같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Ⅱ. 나를 닮은 헤롯을 만날 수 있습니다.


헤롯 가문은 4대에 걸쳐서 예수를 핍박한 예수 핍박의 대명사입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의 헤롯 안티바스는 귀가 조금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일러라”고 했습니다(막6:20).

그는 설교를 듣고 맹숭맹숭한 사람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는 은혜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 성도가 되는 일보직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보직전의 신자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잘나오고, 말에나 행동에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고, 충성하고 봉사도 열심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속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가 한계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자요. 밖에 나가면 불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이중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적인 성도는 아닌가?


Ⅲ. 나를 닮은 빌라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준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실해 보니 이 사람에게 죽을 죄가 없도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를 심자가에 못 박으시오 자기가 왕이라고 하는 자는 살려둘 수 없소 우리의 왕은 오직 로마 가이사 뿐이요.”-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요19“15)

그는 유대인의 종교문제가 정치문제화 하는 현실 앞에서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하여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라 하시는데,

나는 얼마나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우유부단한 사람인가?


Ⅳ. 나를 꼭 닮은 베드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8절에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 제사장의 집에 와서” - 나는 어떻게 예수를 좇고 있는가?

베드로 처럼 멀찍이서 예수를 좇는 사람은 아닌가?

예수님을 좇는 간격이 한자냐? 한치냐?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한치의 사이에도 일개군단을 주둔 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도. 용기도 충성심도.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마26:2~3). 그러나 그의 교만은 얼마나 힘없이 그를 무너지게 했는가?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꽂은 로마 병정도, 예수님을 팔아 먹은 가롯유다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재촉하던 뭇 군중들도, 너무나 나를 닮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땅의 죄인들은 향하여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십니다(사1:18).

바울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엡1:7).

이 시간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덧입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덧입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   누가복음 24장 13 ~ 15절



지루하던 밤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갈릴리여인들은 눈앞에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온데 간데 없고, 무덤은 텅 비어 있는데 휘황한 광채 속에 나타난 천사가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아니하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눅24:5~6).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올라온 길을 돌이켜 허둥지둥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여인들은 낙심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다시 사셨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였습니다.

그래도 믿음이 있노라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 무덤을 향하여 뛰어갔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에서 개켜진 세마포와 수건을 확인했으나,

그들 역시 미심쩍어 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2절에 “베드로가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고 했습니다. “이상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두 번째 반응은 그날 오후에 벌어졌습니다.

“여기 앉아 있다가 붙잡혀 예수일당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느니 고향으로 가자!” - 슬그머니 제자들 무리 중에서 빠져나와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에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에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그 길에서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인생역전의 대 드라마를 펼치시는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Ⅰ. 인생은 어쩌면 영원한 도망자일 수 있습니다.


엠마오(Emmaus)의 원뜻은 “따뜻한 곳, 온천수”란 뜻입니다.

이 말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600M의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 닥치는 산악지대입니다.

엠마오는 바닷가 따뜻하고 평화로운 촌락입니다.

대적들의 칼날이 춤을 추는 살벌한 예루살렘과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따뜻한

엠마오는 그 이름이 무척 대조적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고난의 모든 역경보다 따뜻한 피안의 세계를 더 갈망하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사물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수난을 역사적 시각으로 보느냐? 신앙적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와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인과법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하나님께서 직접역사에 개입하심으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성취되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세상 사람들이 낙심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의 상실이나 소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평면적 시각으로는 주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가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골고다 십자가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인간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 만이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이 목적자체라기 보다 부활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위대한 다윗 왕국의 회복이라는 메시야의 꿈은 사라지고,

피에 굶주린 야수와 같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동토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저들은 저 따뜻한 온천장, 엠마오로 도피하고 있었습니다.


Ⅱ. 예수님은 추적자이십니다.


인생은 도망자! 예수님은 도망자를 좇아가는 추적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대략 12㎞입니다. 우리 계산법으로는 30리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시치미 뚝 떼시고 제자들과 30리 길을 동행해 주셨습니다.

지금 막 무덤에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멘 먼저 비천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 주시드니, 이번에는 낙심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실의에 찬 도망자에게 영광의 날 반나절을 할애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측량할 바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나, 영광스러운 부활의 현장에서나,

언제나 그 마음을 온통 죄인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길! 수백리 수천리 길을 ... 피곤하고 지쳐서 넘어지고 쓰

러질 때 마다 끝까지 동행해주시는 그분의 숨결을 느끼고 계십니까?

주님은 어디까지든지, 언제든지 세상 끝까지 나와 동행해 주시는 평생의 동반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가까이 계신 주님! 내 곁에 계신 주님! 영원한 추적자이신 주님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오직 내 힘! 내 능력! 내 지혜 - 거기 엠마오만이 살길인줄 알고, 오늘도 정신없이 그 길로 내려가는 도망자의 눈에 부활의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저희의 눈이 가리워 졌기”때문입니다(눅42:16).


현실적인 온천장 엠마오에 눈이 먼 자들에게 십자가와 천국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8:35~39).

엠마오로 낙향하는 30리 길을 끝까지 동행하시고서라도 끝내 그들을 체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동행하시다가 때가 되면 우리를 체포해 가시고야

말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끈질긴 추적자 이십니다.


Ⅲ. 부활의 주님은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으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주님께서는 떡을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때 닫혔던 그들의 눈이 열리고,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본문 32절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말씀으로 뜨거워진 도망자들은 따뜻한

엠마오에 그대로 머물 수 없었습니다.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친다”던 예레미야의 심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렘20:9).

그들은 30릴 길! 600M의 고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달려 올라갔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의 발걸음을 돌려놓으셨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으셨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부활이란 위대한 역사를 체험한 후 세상이 변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리고, 하늘문이 열렸습니다. 부활의 종국인 천당이 보였습니다.

그 밤에 단숨에 예루살렘에 되돌아간 그들은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성공의 비결  누가복음 5장 1 ~ 11절



사회학자 지글러 박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최선을 다하는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했습니다.

셋째, 믿음이 있고 충성스런 사람이 성공한다고 했습니다.

넷째,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했습니다.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기자 질문에 “나의 성공비결은 X+Y+Z 라고 대답했습니다.

X는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고, Y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요.

Z는 침묵을 지키고 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성공적인 사업의 비결은 기술이 필요 없다. 오직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성공하는 비결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Ⅰ. 말씀에 순종할 때 축복과 성공이 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한 베드로가 고기 한 마리잡지 못하고, 빈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그물을 내렸더니 두 배에 차고

넘치는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이 많은 고기를 잡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순종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침입니다.

그물을 내릴 때가 아니고 그물을 거둘 때입니다.

물고기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밤에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기는 깊은 곳에서는 살지 않습니다.

육지에 가까운 곳에 그물을 던져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목수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30년 동안이나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어부가 목수의 말을 들고 그물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고,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면 어부가 고기를 많이 잡았다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도 좁은 의미에서의 성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부가 고기를 많이 잡았다고 성공이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어부는 고기를 많이 잡을 수도 있고, 잡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베드로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성공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인가? 출세를 하는 것인가?

자녀가 잘 되는 것인가? 베드로처럼 어부가 고기를 많이 잡는 것인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진정한 성공은 11절 “저희가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입니다. 진정 베드로의 성공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배를 버리고, 그물을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예수를 좇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배를 가지고, 그물을 가지고, 잡은 고기를 가지고 처자를 거느리고 세상을 좇아갔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한한 것들, 잠깐 있다가 없어 질 것들 -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들, 허무하기가, 아침안개 같은 세상 것들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

하나님아들 예수와 천국을 얻었으므로 우리는 그를 성공한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천국을 얻고 영생을 얻은 것 보다 더 큰 성공이 있겠는가?


Ⅱ. 최선을 다한 후에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성공적인 삶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저는 개업 예배도 드렸고, 첫 열매도 하나님께 드렸으며, 십일조를 도둑질한 적도, 주일을 범한 적도 없는데, 왜 나는 사업이 안됩니까?”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아홉 명이 차례로 망한 회사를 열 번째 인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는 매일 기도하고 나서 일을 시작하고, 십일조도 빠뜨리지 않고 드립니다.

주일날에는 공장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왜 사업이 안됩니까?”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응답이 왔습니다.

“네가 기업의 사장이 되지 말고, 예수를 사장으로 모셔라”고 했습니다.

이때 카네기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주의 뜻대로 사업을 하지 않고, 내 뜻대로 사업을 했구나”

- 그 후에 카네기는 십일조가 아니라 전체 수입의 십의 51조를 했습니다.

- 그리고 십의 49조를 가지고 회사를 경영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7년 ! 부실한 회사는 세계 굴지의 대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사업이 성공한 후에는 십의 9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십의 1조를 가지고 회사를

경영했습니다.

그는 그때에야 비로서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사업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51% 지분을 가지셔야 합니다.

51% 지분을 가져야 기업을 하나님 뜻대로 경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0의 지분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회사를 하나님 뜻대로 경영하실 수 있겠는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대 주주가 되시고,

나의 작은 지분도 그분께 맡겨야합니다.

성경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라”고 하였습니다(잠16:3).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라”고 하셨습니다(시55:22)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겨라”고 했습니다(시37:5).

“네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라”고 했습니다(벧전 4:19).

이렇게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이다”(롬14:8) 라고 한다면 어떻게 실패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Ⅲ. 성공의 길은 한 번 더 분발해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씀에 순종하고 3년 6개월 동안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고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왕상17장).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근 후에 문둥병을 고쳤습니다(왕하5장).

갈멜산의 엘리야는 일곱 번까지 사환을 보낸 후에야 바다 저편에서 손바닥 만한

구름이 떠오르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나는 매일 매일 성전에서 기도한 후에 응답으로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기브온 산당의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열가지 이적을 나타내고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순종한 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응답 받는 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베드로도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더 분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애썼지만 한 번 더 수고합시다.

지금까지 순종했지만 한 번 더 순종합시다.

지금까지 기도했지만 한 번 더 기도합시다.

지금까지 수고했지만 한 번 더 열심을 내어 분발합시다.

그리하면 반드시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 것입니다.

승리하는 교회   이사야 56장 1 ~ 8절



승리하는 교회! 승리하는 성도! 누가 세상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보통 성공이하고 하면 서너 가지 차원에서 평가하게 됩니다.

첫째, 목적에서의 성공이 있습니다. 좋은 목적, 영원한 가치를 설정해 놓고,

초지일관 후회함이 없이 평생 그 길을 간다면 그것은 분명, 성공입니다.

둘째, 과정에서 성공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건, 그것에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은 성공입니다.

셋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적 성공이 있습니다.

성전미문 앞에 앉아 있는 앉은벵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니” 앉은벵이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행3:6).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은사적인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은사를 받고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

오늘 본문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조차도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구원하여 주시리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승리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들인가?


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백성과 교회입니다.


본문 1절 말씀에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할 이유는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레12:45).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좇아 공평과 의를 행할 때 하나님

께서는 이스라엘과 약속하신 복을 그들에게 내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 2절 말씀에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모든 삶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다는 신앙고백의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안식일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사야 58장 13~14절에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땅에서 잘되고, 성고하고 복 받는 길이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교회가 복 받고 승리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Ⅱ. 기도하는 교회가 승리합니다.


본문 7절에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 곳에 그들의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그 곳에서 드려지는 번제와 희생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도하는 장소를 정해주시고,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기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그들의 삶이고, 기도가 교회의 생명입니다.


평생 성전 중심의 삶을 살고, 평생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산 사람이

아브라함이고 다윗입니다.

그들도 인생인지라 약점이 있고,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힘쓰고 애쓴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시편 84편 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복 받는 사람의 표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전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손으로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했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금도, 은도, 나무도, 돌도 모두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예배드리기를 기뻐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마음이고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의 삶을 보장해 주십니다.

한나의 기도도, 히스기야의 기도도, 엘리야의 기도도 제단에서 기도할 때 응답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기도하는 나라와 민족은 흥하고, 성전과 기도를 소흘히 했던 나라들은 망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 중심의 삶, 말씀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 기독교 국가들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Ⅲ. 승리하는 교회는 기도의 응답이 임하는 교회입니다.


창세기 7장의 노아의 홍수 심판과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은 그들의 불신앙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에 열 명의 의인이 없어서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 가운데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타는 유황불 속에서 구원 받은 가정이 있었습니다. 롯의 가정입니다.

그러면 롯이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롯의 가정을 위한 아브라함의 도고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심판하러 가는,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간청했습니다.

“그 성에 열 명의 의인이 있을지라도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겠나이까?”- (창18:32). 하나님의 사자는 “그 성에 열명의 의인이 있으면 심판을 면하여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아브라함의 기도는 누구를 위한 기도였는가?

조카 롯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창세기 29장 19절에 “하나님이 들의 백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그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고 롯의 가족을 불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성도의 특권이 무엇인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 받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신다면,

우리가 실패할 수 있겠는가? 늘 승리하는 복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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