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열왕기상 18장 30~40절
개혁주의란 로마 카토릭에 대응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총칭입니다.
죤, 칼빈의 교리를 따른다 해서 칼빈주의 혹은 장로교회라고 부릅니다.
개혁주의(Reformation)는 "다시 만든다, 고쳐 만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하다쉬”는 “개혁한다, 새롭게 한다”는 뜻이며
헬라어 “디오르도시스”는 “곧게 만들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늘나라에 있지 아니하고 이 지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인간의 역사 안에 존립해 오면서 끊임없이 국가적, 사회적 여러 환경들의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혼합주의와 세속주의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항상 여러 가지 잘못된 주의 주장에 대해서 경계하고 끊임없이 개혁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보수 신앙을 내세우는 진영에 대해서는 기계적 복종, 배타주의, 율법주의, 권위주의, 형식주의 등을 경계해야 하고, 진보신앙을 내세우는 진영에 대해서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열정, 세속주의 포용, 유형적 교회에 대한 승인거부, 고립된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보수도, 진보도, 모두 인본주의가 교회에 들어온 산물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어떤 제도나 법적보완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혁은 보다 더 원천적인데 있습니다.
신앙의 개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복귀운동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굽어진 것을 곧게, 비뚤어진 것을 바르게, 혼합된 것을 순수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무엇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인가?
Ⅰ. 제단의 회복입니다.
본문 30절에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라고 하셨습니다.
수축한다는 것은 전혀 새롭게 세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서진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제단이 허물어 졌는가?
열왕기 상 19장 10절에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28장 24절에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단을 쌓고”라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에 빠진 자들은, 하나님의 제단을 헐고, 우상의 제단을 쌓는 일들을 합니다 그날에 갈멜산에 모인 선지자들의 면모를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왕상18:19). 850:1의 영적전쟁입니다.
우상의 선지자가 850인이라면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셨는가?
신명기 7장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종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 풍성한 물질의 축복을 주신
이유는 그들로 우상을 타파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사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여호와의 단을 헐고 우상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 이 짧은 말씀가운데는, 모든 인간의 비극의 근원이 여호와의 단이 무너진 데서부터 시작 된다는 놀라운 진리가 함축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제단은 어떤 곳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명의 근원이, 그들의 존재목적이 그들의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 제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단이 훼파되므로 그들에게 질병이 오고, 실패가 오고,
고통이 오고, 기근이 오고, 전쟁이 왔습니다.
저들의 어그러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가 하나님의 제단을 수축하는 것입니다.
Ⅱ. 성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본문 32, 33절에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제단을 쌓고 도랑을 팟다” - 란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의 제단과 바알의 제단을 구별했다는 뜻입니다.
“구별한다, 성별한다, 거룩하게 한다”란 뜻은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랑을 판 것은 엘리야의 제단과 바알의 제단을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불과 바알의 불을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단과 세속의 단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알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비 진리와 세속이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교회의 거룩과 성결을 보호해야 합니다.
Ⅲ. 제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돌로 단을 쌓았습니다(32절) 도랑을 팟 습니다. 물을 채웠습니다. 나무를 벌려 놓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녁 소제드릴 때를 기다렸습니다(36절).
소제의 때는 어느 때인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때입니다. 제단이 준비되면,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있어야합니다. 제사가 없는 제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단은 제사를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3장 15절에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6장 16절엔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회중은 수송아지를 드렸고(레4:3), 족장은 수염소(레4:22),
평민은 암염소 혹은 암 어린양(레4:27),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 둘, 혹은 집비둘기 둘,(레5:7), 극빈자는 고운가루 에바 1/10을 드렸습니다(레5:11).
모든 것을 준비한 엘리야는 저녁 소제드릴 때에 이르러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날 알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은 지라 -”고 했습니다(38절).
어느 때 하나님의 불의 응답이 떨어졌는가?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기도하고 제사드릴 때 하나님의 불의 응답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바로 기도의 회복이요 제사의 회복인 것입니다.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사람 베드로전서 4장 7~10절
역사는 끝이 있습니다. 처음이 있는 것은 마지막이 있습니다.
성경도 창조로 시작하여 종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지금 역사의 어느 시점에 머물고 있는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성경에 비취어 볼 때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개인적인 종말은 역사의 사간과 관계없이 개개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의식 가운데서 종말은 나와 무관한 사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히9:27).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닥치는 것 보다 확실한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나에게 불시에 닥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로마 박해 속에서 살던 기독교인들은 인사를 나눌 때
“Memento Mori"(메멘토 모리)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서로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예수를 믿자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의 박해와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항상 종말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만물이 마지막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라고 했습니다(벧전4:7). 그렇다면 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본문은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원리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Ⅰ.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7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정신차린다”란 뜻은 냉정을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냉정을 찾는 것은 “두서를 찾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지붕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마24:15).
멸망의 때가 이르면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산으로 도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유황비가 내릴 때는 먼저 소알성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합니다.
두서를 모르면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어떤 압력이 오고,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오면, 냉정히 두서를 가려야 합니다.
무엇이 먼저 할 일이고, 무엇이 나중에 할 일인가?
오늘 날 교회도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가?
어떤 사람은 교회 성장은 교육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재정이 튼튼해야한다. 전도폭발 훈련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다락방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심방을 강화해야 한다.
상담을 잘해야 한다. 친교를 잘하고 봉사를 잘 해야 한다. 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핵심외적인 요소들입니다.
다소 교회성장에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제도도 아니고 장치도 아닙니다. 어떤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오직, 기도입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교회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교육하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기도하고 전도폭발훈련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왜? 기도해야 한다고 했는가?
기도는 환경을 바꿀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1.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 엎드리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창32:9~11).
날이 밝았습니다. 과연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치러 달려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일곱 번이나 땅에 굽혀 절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마추고 피차 울었다고 했습니다(창33:4).
야곱의 기도는 20년 동안이나 복수의 칼을 갈던 에서의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2. 기도는 나라를 구원합니다.
앗수르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성을 에워 쌓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에게 최후의 통첩을 해왔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대를 섬멸시키시고 하나님을 훼방한 산혜립은 그들의 신 니스룩의 묘에서 참배할 때 그의 부하 아드락 말렉과 사례셀이 그를 죽였습니다(왕하19:37).
히스기야의 구국의 기도는 적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경에서 구했습니다.
성경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라”고 했습니다(대하7:14).
성도의 기도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도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Ⅱ.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는 열심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대신 관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대인 관계는 어떤 것인가? “서로 열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신6:4).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사랑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이 사랑의 원형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사랑입니다.
세리를 사랑하시고,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능욕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는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땅에 오셔서 의인들을 위로하시고, 의인의 원통함을 신원하시고, 원수들의 목전에서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고 상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죄 용서하시고, 모든 죄인을 사랑하셔서, 피도 주시고 물도 주시고,
겉옷도 주시고, 속옷도 주신 사랑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크신 사랑을 받고도,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이고 부족입니다.
그러나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 수 없어도 이웃의 허물을
덮어줄 수는 있습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던 야벳과 셈과 같이(창9:23)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사람(Ⅱ) 베드로전서 4장 7~11절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발자취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았느냐의 기록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하여 어떻게 살았느냐?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살았느냐가 세속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살았느냐? 가 성경의 역사입니다. 구속사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시대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 열왕기입니다.
반면에 다윗 왕국을 긍정적 시각에서 평가하는 저자의 주관적, 제사장적 관점에서, 기술한 것을 역대기라고 합니다.
이 둘의 차이는 역사는 바라본 시각과 조명의 각도의 차이에서 기술상의 차이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역사의 맥은 동일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주역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역사를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가 푯대입니다.
그래서 예수강생이전을 B.C, 예수탄생이후의 역사를 A.D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그러했습니다. 하늘의 천군과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했습니다(눅2:14).
그 분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죄인, 세리, 병든자, 귀신들린자, 죽은자들이 예수를 만남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이 그러했습니다.
죄인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은 사람은 유사이레 없었습니다.
그분의 부할이 그러했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부활사건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는 것이 아니라했습니다.”(벧후1:16)
그분의 승천이 그러했습니다.
감람산 꼭대기에서 500여 형제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승천하셨습니다(고전15:6).
이 엄청난 사건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실로서 이루어 졌으므로, 인간의 역사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로 정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분기점이요, 역사의 핵이요, 역사의 중심입니다.
이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리라”고 했습니다(막8:38).
“주께서 호령과 천사자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라”고 했습니다(살전4:16).
예수께서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하리라”고 했습니다(요14:3).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초림을 연출하신 하나님은 재림으로
그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고 신천 신지의 새 역사의 기원을 이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마24:36).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마24:42).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했습니다(마24:44).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이 종말의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두 번째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Ⅰ. 원망 없이 대접해야 합니다.
본문 9절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했습니다.
“대접한다”는 뜻은 “접대한다”는 의미와 “인정해 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대접하고, 자녀를 자녀로 대접해야합니다.
이웃을 이웃으로 대접하고, 손님을 손님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운데는 사람은 잘 대접하는데 하나님을 대접하지 않는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대접하면서, 사람을 대접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대접하는 사람은 사람도 잘 대접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는 말씀은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나, 대접하는 사람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전도자들은 종교적 박해를 받아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면서도, 오직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맞아주고 식물을 공급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데는 상당한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만약 초대교회시대에 이렇게 서로 서로 대접해주는 미덕이 없었다면,
아마도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 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마25:35).
나그네와 손님을 돌아 보는 일은 최후의 심판 때 상급의 조건 중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대접해야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미 황송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나눠 가지고 먼 지방에 가서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접했는가?
좇아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비단옷을 입혔습니다. 신발을 신겼습니다.
살찐 소를 잡고 이웃을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잃었다가 찾은 나의 아들이라”고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황송한 대접, 주님은 바로 이런 대접을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갔을 때,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주신,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의 대접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면,
우리도 남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이웃을 대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전도자를 대접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일에 원망 없이 하는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Ⅱ. 봉사하라 고 했습니다.
“봉사한다”는 말은 “섬긴다”는 말입니다.
본문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스니다. 본문에는 봉사의 삼대 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받은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
성도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섬기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20:28).
십자가는 섬김의 극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시기를 원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은사를 총동원하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겨야합니다.
2. 청지기 정신으로 섬겨야합니다.
청지기는 자기 것이 없습니다. 공도, 과도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맡은 모든 은사는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3.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봉사여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31).
인간의 삶의 패턴이 목적으로서의 예수, 수단으로서의 삶입니다.
오직 주께 영광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는 기도해야합니다.
서로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원망 없이 대접해야합니다. 힘써 봉사해야합니다.
잠시 잠깐 빠른 시간이 흐르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때가 속히 옵니다.
오늘! 이 마지막 시간을 선용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고난을 더하신 뜻 이사야 38장 16~20절
히스기야는 BC728~BC698년까지 29년 동안 유다를 다스린 왕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이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고 했습니다(대하1:21).
또 열왕기하18장 5~7절엔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히스기아를 성군 다윗 왕 이래 가장 훌륭한 왕으로 꼽고 형통한 삶을 산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9년 동안 남 유다를 다스리는 동안
두 가지 큰 고난에 직면하였습니다.
하나는 앗수르의 침공이었고, 하나는 그 자신의 건강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37장에서 그의 간절한 구국의 기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룹사이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으로 주만 여호와 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저녁에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명을 치심으로 아침에 본즉 시체뿐이었다”고했습니다(사37:36).
그는 국가의 위기를 기도로서 극복 한 사람이었고, 그의 기도는 구국기도의 본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왕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그에게
보내 사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사28:1).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사38:3).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수한을 15년을 더해 주시고,
그 증표로 아하스왕의 일영표 에 나갔던 해 그림자를 10도나 뒤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그에게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받는 고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Ⅰ. 고난을 통하여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본문 16절에 “주여 사람의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 있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 속에서 세상의 모든 권력략과 명예와 부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왕일지라도,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왕궁에는 편작과 화타와 같은 명의와 명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왕궁에는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전담부서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죽을병이 들었을 때에 그것들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생명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왕의 “나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이 신앙은 창조신앙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는 신앙입니다.
여호와 창조신앙! 여호와 의존신앙! 여호와 절대주권 신앙이야 말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이요 성도의 가장 고귀한 신앙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도 히스기야가 만난 것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경제문제, 사업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 건강문제 등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
이리궁리 해보고 저리궁리 해보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그것이 인본주의이고,
그것이 불신앙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외적이 침입해 오고, 죽을병이 들었을 때, 세상적인 방법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고 했습니다(사38:20).
무화과가 종기에 약이 된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믿고 순종할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실로암 샘에 가서 눈을 씻은 소경도(요9:7),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은 문둥이 나아만 장군도, 고침을 받았습니다(왕하5:14).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해결의 답을 주십니다.
나라의 운명도, 개인의 생명도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입니다
Ⅱ. 치료의 은총이 주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6절 하반절에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여호와 라파”라고 했습니다(출15:26).
예레미야 30장 17절에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하셨습니다.
현대의학의 발달은 경이적입니다.
피한방울로 수집종의 질병을 체크하고 레이져로 담석을 파괴시키고,
내시경으로 위와 대장을 들여다보고, 내시경을 코에 넣고 뇌의 암 뿌리를 뽑아냅니다
창자를 바꾸고, 심장을 바꾸고, 간을 바꾸고, 신장을 바꿉니다.
이제는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난치병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눈부신 의학의 발달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은 죽고, 유명병원의 영안실은 여전히 만원입니다.
약도, 의술도, 과학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치료는 해도 치유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육신만 고치시겠습니까?
상처받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하나님이 고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게 하십니다.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게 하십니다.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Ⅲ. 구원의 은총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본문 17절에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위에 던지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2만 3천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고전10:8~10).
음행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한 사람이 2만 3천 번 죽을죄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죄가 얼마나 큰가?
한 사람이 감당한 다면 60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한 장정 60만 명이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날 이 엄청난 죄가 죄 인줄도 모르고, 죄악을 먹고 마시며
살아온 무지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얼마나 철저하신가?
시편 68편 19절엔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짐은 죄 짐이요 수고의 짐입니다.
시편 103편 12절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세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3장 25절엔 “나는 너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17절엔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등 뒤”는 주님이 보시지 않는 곳입니다. 주님이 기억하지 않는 곳입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앞에 한 환난가운데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시편은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 진데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시10:3~4).
히스기야는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깨달았습니다.
하늘문 교회 마태복음 7장 13 - 14절
본문은 13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14절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7).
요한복음 10장 9절에는 “내가 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의 문, 단 하나뿐인 유일한 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문”과 “길”은 같은 내용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새롭고 산 길“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8절에는 ”이는 저로 말미암아...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그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시요,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과 문은 오직 예수 자신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열어 놓으신 산 길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9절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서는 그 누구도, 그 무슨 공로로도 하나님의 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시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그 문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요한 계시록 14장 1절에는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쓴...” 인 맞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늘문 교회!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교회입니다.
Ⅰ. 하늘문, 그 문은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그 문은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 문과 길은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협착하다”는 말은 “괴롭다”, “좌절 시킨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을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넓고, 편안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길은 예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 길을 가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을 통과하는 십사만 사천의 인 맞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의 감격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을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한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막10:29~30).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구원의 세계에 들어온 이후부터 사실상 새로운
인생의 수고를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목적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자신이나 세상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후에는 목적으로서의 예수, 수단으로써의 선교적 삶!
복음적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를 위한 삶이기 때문에 예수의 생각을 하며, 예수의 걷는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길은 세상의 넓은 길이 아닌, 예수의 좁은 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에는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넓은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협착한 길을 가기를 거부하고, 넓은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7:14).
하늘문! 이 문은 세상의 고난을 통과한 십사만 사천 명의 인 맞은 자들만이 들어가는 문이요 길입니다.
Ⅱ. 이 문은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가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막13:24).
“힘쓰다”라는 말은 “애쓰다”, “모든 노력을 다하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행주의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력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의 어떤 공로나 업적이 거듭남의 요건이나, 믿음과 회개의 빙거가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아무 자격 없이 은혜로 받은 구원에 감격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과 넓은 길을 거부하고, 주를 따라 가는데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마11:12).
“침노한다”는 말은 “침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힘차게”, “활기차게”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16:31) 그 문은 지금도 열려 있는 문입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범 우주적 초청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갈3:28), 인종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려있는 그 문은 어느 땐가에는 닫힐 때가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처럼, 신랑이 온 후에는 그 문이 닫힐 것입니다(마25:10).
그 날이 언제일까?
오늘일지, 내일일지, 그 날과 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도적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이 문이 좁고 협착해도 그 길에 고난이 있고 어떤 아픔이 있더라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롬8:18) 힘쓰고 애써서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하늘 문! 그 문은 천국으로 가는 문입니다.
하늘문 교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천성에 가는 길이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기고 승리하자 누가복음 4장 1 - 13절
유혹과 시험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발생한 인간최초의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파괴하려는
뱀의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하와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아담에게만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 찾아왔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그리스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단의 이러한 시험에서 첫째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신 분은 오직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본문은 이 시험을 이기신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왜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말씀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상황이 극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환경가운데서 어떤 유혹이오고 그것을 극복했다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배가 부른 사람에게 음식의 유혹이 왔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40일을 굶주린 상황은 극한상황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인 먹는 것에 대한 욕구는 극복하기에 어려운 유혹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갖는 빵에 대한 욕구, 권세에 대한 욕구, 부귀영화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인 욕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기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어떠한 고비를 넘어야하는가?
Ⅰ. “먹고 사는 것이 먼저”라는 시험을 이겨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에 있어서 가장절실하고 원초적인 욕구는 이 떡에 대한 욕구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툼과 범죄와 전쟁이 먹는 것 - 즉 경제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 집 아이들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자주 싸웁니다.
싸움의 발단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밥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얼마 안 되는 찬밥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자 해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먹고보자! 먹어야 산다”
- 이 문제가 가정의 문제가 되고, 이 문제가 이웃과의 문제가 되고,
이 문제가 이웃나라와의 문제가 될 때, 이 문제는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분쟁과 범죄가 먹는 것 - 배를 채우는 경제문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도둑질하고, 이 문제 때문에. 사기치고, 이 문제 때문에 배반하고, 배신하고, 이 문제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고 때로는 사람을 죽이고 살인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요즈음 모 은행의 기업 광고에 "성공이란 무엇이냐?
응 우리 딸에게 맛있는 것 자주 자주 사주는 것이지-”라고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먹는 것에 귀착될 만큼 인생이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눅4:4) 40일을 먹지 못한 극한 상황 가운데서 주께서 가지신 능력으로 떡 한 덩이를 만들어 잡수셨다 해서 누구도 주님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떡은 인간에게 너무나 절실한 생존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눅4:4). 마태복음 4장 4절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먹어야 산다”는 사고방식 가운데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의 죄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이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은 광야에 내린 만나와 연관된
말씀입니다.
광야에 내린 만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는 “너희가 사는 길은 너희에게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너희가 산다”는 의미를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내려주신 계시의 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떨어진 만나를 보았을 뿐,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육신은 만나를 먹고, 피둥피둥 살쪘지만 그들의
영혼은 비실비실 말라가다가 모두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요삼1:2).
아무리 육신이 건강해도, 영혼이 잘못되면 육신의 건강의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가 고프고, 오늘 우리가 가난하고 힘들어도 한 덩이 떡으로 허기를 달래는 것보다 한 마디의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혼이 강건하여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지는 것이 승리하는 인생이 되는 길입니다.
Ⅱ.“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이 상수다”하는 시험을 이겨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에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탄이 들고 나온 시험은 “타협”입니다.
“나와 적당히 절충하자”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여 애를 쓰는가? 쉬운 길이 있다.
나에게 딱 한 번 절을 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너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당키 어려운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청렴한 공직자에게 가난이라는 어려움이 옵니다.
아이들 등록마감기일이 됐는데 등록금이 없습니다.
병든 아내의 입원비가 없습니다.
전셋집 살고 있는데 전세금 올려줄 돈이 없습니다.
이 기회를 사탄이 놓칠리 없습니다.
“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 딱 한번 눈 감고, 맘 돌려 먹으라”고 합니다. 사탄이 예수 믿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되 쉽게 믿으라”고 합니다.
“주일날 아침에 가고, 저녁에 가고, 수요일날 가고, 금요철야가고, 구역예배가고, 새벽예배가지 말고, 주일날 한번 가면 얼마나 편하냐?”고 합니다.
경제문제 어려운데 “눈 딱 감고 사업이 안정될 때까지 주일날 일하라”고 합니다. 오늘 전도하지 말고, 오늘 봉사하지 말고, 내일 전도하라고 합니다.
“눈 딱 감고 경제문제 안정될 때까지 십일조를 보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발목 잡히면, 무릎 잡히고, 무릎 잡히면, 목을 잡히는 법입니다.
적은 것 타협하고 양보하면 종래는 내 신앙의 생명을 내어 놓게 됩니다.
세상 앞에 머리 숙인 자는 하나님 앞에 죽은 자입니다.
Ⅲ. 자기 과시욕의 유혹을 이겨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리라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인용한 이 말씀은 시편 91편 11~1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의로운 자들을 그 의로운 길에서 보호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교묘히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뛰어내리시어,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종교적 영웅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자기 과시의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기적의 방법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러 전혀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것을 이것저것 구하고는 “믿습니다!
주실 줄로 믿습니다.”고 철야하고 금식하고 부르짖곤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농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만용입니다.
이 욕망을 극복할 때 이기고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맏물을 담은 광주리 신명기 26장 1 ~ 11절
우리는 오늘 축복스러운 2005년의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은 무교절이 지나고 7주가 지난날에 지킨다 해서 샤브�, 칠칠절이라고 부릅니다.
또 유월절이 지나고 50일 되는 날에 지킨다 해서 오순절, 밀의 첫 열매를 드린다 해서 초실절, 혹은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어 신약의 교회가 탄생했으니, 이 날은 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집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하셨습니다(시127:1).
이 한해도 세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가정, 자녀, 생업과 일터,
우리들의 건강, 섬기는 교회 위에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인하여
이 시간 감사의 제단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라고 하셨습니다(신26:1).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신26:16).
오늘 맏물을 광주리에 담아서 드리는 맥추절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 드려지는 맏물의 광주리는 우리들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는 감사의 광주리가 되어야하겠습니다.
Ⅰ. 맏물을 드리는 것은 구원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6~9절에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고 했습니다.
맥추절에 드리는 맏물이 담긴 광주리는 지난 날 죄의 종이 되었던 비천했던 과거를 깊이 생각하고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나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맏물 ! 그것은 가장 귀한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거둔, 첫 이삭, 첫 단은 가장 좋은 것을 상징하고, 가장 귀한 것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애굽의 종 되었던 시절의 고통과 압제와 신고를 기억하면서 그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심으로 감사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지난날의 비참했던 나의 삶을 돌아보고 오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돌아 볼 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귀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종이 되었던 우리들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행하는 것이, 계획과 도모가 모두 악하여 본질상 진노를 받을 멸망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공로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핏 공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과 신고와 압제”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했습니다(신26:7).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신26:9).
우리는 구원받기전의 비천했던 지난날과 예수 믿기 전의 B.C의 삶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풍요로운 오늘의 삶과 내일의 삶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로 우리가 통과하는 이 2005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 가장 풍성하고 가장 살기 좋고, 가장 안락하고 편안한 세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더 좋은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Ⅱ. 우리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럿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럿다” “이미 도착한것”입니다. 앞으로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 가 아닙니다. 앞으로 이를 줄을 믿습니다. - 도 아닙니다. 이미 이르렀습니다.
이미 이르럿기 때문에 맏물 소산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드린 맏물 광주리는, 그들이 구원 받기 위하여, 축복 받기 위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맏물 광주리는, 오늘 내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맏물 광주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십자가의 보혈로, 죄에서 구원 받고,
가난에서 구원 받은 성도가 오늘 나를 있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은혜
고마워서 드리는 감사의 광주리입니다.
세상에 쓸모없고, 세상에서는 알아주지도 안던 나를 “나는 너를 안다! 이름으로도 알고, 환경으로도 안다.”
-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감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사43:1~3).
Ⅲ. 맥추절 맏물 광주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맏물 광주리의 맏물은 어느 곳의 제물인가?
지금 광주리에 담겨 있는 제물은 어느 곳의 소산물인가? 애굽의 소산인가?
지금 광주리에 담겨 있는 제물은 광야의 소산인가?
지금 광주리에 담겨 있는 제물은 가나안의 소산인가?
애굽 땅의 소산이라면 죄악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죄 되고 악한 행위를 통해서 거둬드린 열매라면 하나님께
바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나의 광주리에 담겨 있는 제물이 광야의 소산이라면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됩니다.
사업이 망하고, 직장이 떨어지고, 살길이 막막한 가운데서 고난의 열매를 담았다면 거두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드리는 맏물이 가나안의 소산물을 담은 광주리라면, 풍성하게 기쁨으로 축복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가 맏물 광주리에 믿음을 담고, 기쁨을 담고, 감사를 담고 정당한 노동의 땀을 담아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 가나안의 맏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출애굽한 백성의 광주리를 풍성하게 하시고, 그 땅을, 그 땅의 주권을,
그 백성에게 주셨기 때문에 자원하여 기쁨으로 풍성하게 드리는 것이 가나안의
맏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005년 한 해를 축복하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주님의 의의
세마포로 덮어 주셨습니다.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셨으므로 이 시간 감사의 맏물 광주리를 주께 드리는 축복의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 주신 축복 - 그리고 그 주실 은혜와 주실 축복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아모서 5장 1 ~ 15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심판이 임박한 절대절명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음성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암5:2~3).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명이 싸우러 나가면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면 열명만 남는가? 처녀 딸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인하여 엎드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일으켜 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하늘의 별같이 많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은 자가 얼마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신28:62).
불신앙의 삶을 살고 불순종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범 죄한 자들이 받을 보응은 죽음과 멸망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자비와 긍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물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 가운데서도 롯과 그의 딸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상의 나라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가운데서도 천에 백, 백에 열, 열에 하나를 남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남은 자 구원! 택자 구원완성! 소수의 택함 받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성취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은 어떤 길인가?
Ⅰ. 심판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는 길입니다.
본문 4~6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과 길갈은 어떤 곳인가? 금송아지 우상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가?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적으로 타락해서 우상의 숭배지로 바뀐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의 근거와 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하나님의 의해 보존되고,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는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살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고,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6).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존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자체가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벧엘에, 길갈에 우상 신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고 그것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5절에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6절의 말씀에는 “벧엘에서 그 불을 끌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죽은 신들이요, 능력 없는 신들이요, 허무한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일어도 안전한 포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노도 광풍이 일고 제자들의 탄 배가 풍랑을 만나서 요동칠 때
- 제자들의 경험과 지식과 노력으로 잠재울 수 없었고, 오직 예수께서 그들의
탄 배에 오르실 때 배 안이 잔잔해 진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행4:12).
하나님의 심판 날에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이 축복의 말씀을 굳게 잡고 생명 줄을 붙드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Ⅱ.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도다 - 그러므로 이럴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 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향하여 가파른 내리막길을 치달을 때 뚜렷이
나타나는 증상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문은 당시 사회에서 사법 - 행정 여론의 중심지였습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이처럼 세상의 중심부에서 선포되고 시행되어져야합니다.
선지자의 메시지가 주일날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고, 교회당 안에서 멤 돌다
사라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듣는 자의 마음에 각인되고, 그 마음이 가정으로,
직장으로, 학교로, 사회로 - 삶의 현장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고,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도덕교본이나 교양강좌나, 혹은 삶의 참고 자료로 생각하는 시대를 “악한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회가 되면, 그 사회는 약한 자를 짓밟고, 무시하고, 착취하고, 속이고,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적 부조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심령과 골수까지도 쪼개어 아신다 하셨으니 우리는 주의 목전에서 경견과 염치로 단장해야 합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죄인이 살 수 있는 구원의 음성입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실패를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인생의 어둠의 행로를 비추는 등대와 같은 것입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성문에서 혼란과 광포가 만연할 때 일수록,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반포하시는 구원의 음성에 더욱더 귀 기울이는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Ⅲ. 죄인의 사는 길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구하는 길입니다.
본문 14절에 “너희는 살기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살 것이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아모스는 이 지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삶 - 나만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의 원리가 선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을 구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
의를 행하는 삶이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며 빛 가운데 거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엡4:1, 요일1:7, 엡5:2).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러한 자들과 임마누엘로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생명을 받은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서 4장 4 ~ 13절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9:27).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합니다. 법정 용어에 “소환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판사나 검사가 조사해야할 사람에게 출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소환에 불응하면, 판사는 “체포영장”이라는 것을 발부합니다.
일단 어떤 사람에게 이 체포영장이 발부되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 사람의 신체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부르시는 소환장이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체포영장과 같은 말씀입니다.
계시록 20장 12절엔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고 있는 유한한 인생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정에 서야하고
선악간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Ⅰ. 왜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야하는가?
1. 장차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0절에서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 하리라”고 했습니다(롬14:12).
우리는 이 엄청나고 두려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도, -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했던 사람도,
하나님 만나기를 거부했던 사람도, 하나님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백보좌 앞에서 세상에서 행했던 언행심사에 대하여 그분 앞에 낱낱이 고백해야합니다.
그때에 우리들의 삶이 부끄러운 것이나, 영광스러운 일들이 선악간에 숨김없이
낱낱이 다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두려운 날이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2. 그때에 우리는 영원히 계속되는 운명을 지정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요5:29).
우리는 그날, 영원히 철회하거나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홍포 입은 부자처럼, 꺼지지 않는 유황불 못 가운데서 혀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당하면서 영생하던지, 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심판의 불 못에 떨어진 자들에게는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한 번 닫힌 하늘문을 아무도 그것을 열수가 없으므로, 살아있는 오늘 그날을 예비해야합니다.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고후6:2). 오늘 이 구원을 예비하라는 말씀입니다.
3. 인생은 너무 짧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90:10).
야고보 사도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약4:14).
욥은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이 없고”(욥7:6).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북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라고 한탄했습니다(욥9:25).
인생은 덧없고 허무한 것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데는 예고도 없고, 순서도 없습니다.
인생은 질병과 자연재해, 교통사고, 재난에 대하여 너무나도 무능하고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인생의 내일을 어찌 알 수 있으랴 -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야합니다.
4.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축복과 상급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행한 것에 따라 보응하시고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한 자에게 상급을, 잘못한 자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바울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딤후4:6~8).
주를 위해 헐벗고, 배고프고, 춥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잠 못 자고, 죽음의 문턱을 남나들던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것이겠는가?
그 축복이 약속되어 있으니 그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야합니다.
Ⅱ. 누가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야하는가?
1.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째 계명은 무엇인가?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했습니다(출20:3).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떠했는가?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를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 내어 광포하도다”라고 했습니다(암4:4).
그들이 열심을 다해서 경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벧엘과 길갈의 금송아지 우상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또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가능한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가 열심히 예배하고 하나님께 헌신해도 하나님 앞에 다른 무엇을 앞세우고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벧엘의 제사요.
길갈의 제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 냉담한 자들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너희가 네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이 다섯차례나
선포되고 있습니다(6, 8, 9, 10, 11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실 때, 음성으로, 환상이나, 환경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에게 기근을 주셨습니다(6절).
가뭄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8절). 재난을 주셨습니다(9절).
질병을 내리셨습니다(10절). 전쟁을 일으키셨습니다(11절).
그러나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먹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싸인의 의미와 뜻을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그들이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3. 구원의 소망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매우엄격하고 준엄하시지만 가혹하거나 무자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에도 자비와 사랑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이스라엘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다”고 하셨습니다.
타도록 버려둘 나무 조각이 아니고,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입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말씀은 아직도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임이라”고 했습니다(마1:21).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라고 했습니다(요14:6).
예수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롬10:13).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직도 죄인에게 소망이요 길입니다.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사도행전 4장 5 ~ 12절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나타내신 가장 큰 계시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계시의 절정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대속의 죽으심과
사흘만의 부활, 그리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승천과 하늘보좌에 앉으심입니다.
그는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으로 다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 날에 다시 재림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의 역사가운데서 교회를 탄생시키는 놀라운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 예수 사건은 인류역사의 신기원이 되어, 인류의 역사를 B.C와 AD로 나누는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 받은 사도들의 복음운동과 함께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구걸하는 인생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 받고, 일어서서 걸으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역사현장에서 이러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사도들은 투옥되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아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행4:10~12).
베드로의 이 짤막한 기독교 변증은 움직일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 오늘날 우리는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만을 고집해야하는가?
왜? 우리는 기독교만이 참 종교요 절대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Ⅰ.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본문 14절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존재론이란 우주와 인간과 역사가 시작된 기원, 그리그 그 진행과정, 그리고 궁극적 최후를 말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 분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 자, 여호와라고 말씀했습니다(출3:14).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출20:3).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계명은 모든 다신교적 우상 숭배와 범신론적 철학 사상을 단호히 배격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신으로 인정하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계명이, 모든 율법에 우선하여 첫 번째 계명으로 제시된 이유는 옳은 신관에 근거한 참 신앙만이
가장 고귀하며 또한 모든 행위의 궁극적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태어 낳습니다.
이것을 선천적 신지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이러한 본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인간이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속에는 흙이라는 요소와 영혼이라는 오소가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없는 육체는 동물과 같고, 몸이 없는 영혼은 유령과 같은 것이 됩니다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땅의 것을 필요로 하고, 땅의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땅의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하늘의 것으로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혼이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영혼은 하나님은 바로 알고 바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인가? 저것이 하나님인가? 하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만연한 종교 혼합주의, 종교 일치 운동,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고 믿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단호하게 “나 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고 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신이요, 오직 하나님만이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Ⅱ. 구원론적으로 오직 예수! 유일하신 구원자이십니다.
본문 14절에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이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고 했습니다.
원래 종교의 발생은 인생의 궁극적 구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정확하고 확실한 인생의 구원 문제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 종교가 아닙니다.
유교는 구원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도덕철학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색종교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구원 종교요, 기독교만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다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3:10~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 구원을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롬10:9~10).
그리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롬10:11~1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 그 이름만이 오직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Ⅲ. 계시론적으로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4절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얻을 이름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을 이름 “예수”는 성경 계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수 천 년 전에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구약 창세기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창3:15).
동정녀 탄생이 주전 700년 전에 이사야서에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사7:14).
탄생의 장소가 예언되어 있습니다(미5:2).
헤롯의 유아 살해 사건이 예언되어 있습니다(렘31:15).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하실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호11:1).
나사렛에서 사실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마2:23).
성경은 인간의 구원 계획을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신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계시문서, 언약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오시고, 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세상의 마지막 때에 다시 재림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 백 가지의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은 역사의 현장에서, 일점일획의 가감이 없이 모두 성취되고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의 재림만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 어떤 경전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명확히 계시된 적이 있는가?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오직 성경만이 참 진리요, 참 생명이요, 참 종교요,
참 길이 되는 것입니다.
능히 이기고 또 이기자! 예레미야 12장 5 ~ 6절
세상이 어두울수록 작은 불씨는 큰 빛을 발합니다.
요시야 왕 13년, BC 627년에 선지자로 부름 받아 BC 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함락될 때까지 42년 동안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장 암울했던 시대에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한 BC 605년 경은 유대 열 왕 중 가장 악한 여호와김 치세 때로서 위로는 왕과 방백들, 아래로는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의 죄악이 극에
달하고, 세상은 분냄과 거짓과 압제와 음란과 탐욕으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타락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를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렘11:14)
백성들의 죄악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듣지
않으시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은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렘11:22).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칼에 북고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은 자가 없으리니-
”그러므로 회개하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를 배척했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도 그를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고통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본문 12장 1절에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라고 항변했습니다.
의인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순입니다.
나라가 멸망지화를 당하여 그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데, 어찌하여 그 당사자들인 악인의 삶은 형통하냐?입니다.
본문은 이중고, 삼중고에 삶의 힘을 잃고 낙심한 예레미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또한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의인들을 위한 격려의 메시지 이기도 합니다.
누가 세상을 능히 이기고, 또 이기는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Ⅰ. 참고 견디는 자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므로 왕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고, 백성들로부터 핍박과 배척을 받아서 시위대 뜰에 갇히기도 하고,
깊은 우물 속에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명은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는 고난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라”고 했습니다(렘4:19).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선지자의 삶은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귀에는 전쟁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전쟁의 경보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눈에는 끊는 가마가 보이는 것입니다.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렘1:14)
그 눈에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차라리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그런데 전쟁터를 달려가는 말발굽소리가 들리고, 군사들의 돌격소리가 들리고,
죽어가는 자들의 아비규환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뛰쳐나가서 “회개하라! 죄에서 돌이키라! 너희가 정녕 망하리라!” 외치면
붙잡혀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깊은 우물 속에 갇히어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언하지 말아야 겠다.”
- 그러면 마음이 혼란하고 심령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렘20:9).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사람과 경주하는데 지치고 피곤하면 사람보다 더 빠른 말과의 경주에서 어떻게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핍박을 견디지 못하면 - 장차 나라와 권세 잡은 자와 애굽이나 바벨론 같은 이방의 핍박을 어떻게 견디겠느냐? 고 하십니다.
또한 세상문제로 낙심하고 지처 있다면 장차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모든 고통과 환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Ⅱ. 환경을 극복할 수 있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네가 좋은 환경에서만 살수 있다면 역풍이 몰아치고, 환난이 닥쳐 올 때는 어찌하겠느냐? 네가 평안할 때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어려움이나 시험이 닥칠 때
어떻게 하겠느냐?
네가 사업이 잘되고,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이 잘 자라줄 때만 신앙을 지킨다면 사업이 망하여 부도가 나고, 육신이 병들고, 가정이 풍지박살 날 때는 어찌하겠느냐? - 고 하십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쨍하고” 볕들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때로는 북풍한파가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그
런데도 우리는 항상,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서도 복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은 어떤 면에서는 온실의 화초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농사짓지 않아도 만나를 먹을 수 있었고, 짐승을 기르지 않아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샘을 파지 않아도 생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단을 건너 길갈에 다다라서 그 땅의 고식을 먹었을 때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우유와 같은 식물을 먹은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딱딱하고 조악한 식물을 먹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력하여 환경을 극복할 때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정함이 없습니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 같고 아침 안개 같은 것입니다.
실로 사막에 나타난 신기루같이 실상이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본문은 네 형제도 믿지 말고, 네 아비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와 부모를 불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와 형제가 최선을 다하고 싶어도 그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하는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변치 않는 것이 무엇인가? 진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오직 진리만이 변치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요14:6).
말씀이 곧 진리요. 진리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능히 이기고 또 이기는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일5:4).
세상을 이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성도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무기는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손에 붙들린 성도만이 능히 세상을 이기고 또 이기는 영원한 승리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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