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하고의 삶 하박국 3장 16 ~ 19절
불구하고의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가?
본문 17절에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 라고 했습니다.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꼭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고, 없다고 하였습니다.
불구하고의 삶은 이렇게 환경과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삶입니다.
불구하고의 삶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 종교를 평하기를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사집 같고,
기독교는 잔치집 같다 - 고 했습니다.
실로 “세상은 고해다.” “세상은 사바세계다.”하는 불교는 인생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는 초상집 같이 침울한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즐거워함이라...기뻐하리로다” - 정말 잔치집 같은 기쁨이 충만한 종교인 것입니다.
왜 성도의 삶은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삶이 되는가?
우리의 삶은 궁극적인 승리의 삶이요. 구원의 삶이요 영생의 삶이되기 때문입니다.
Ⅰ.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감사의 삶이어야합니다.
윌리엄 로우라는 사람은 그의 저서 “엄숙한 부르심”이란 책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던가 금식을 많이 했다던가,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 - 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냐? 할 때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감사했느냐? 나쁜 일에 감사했느냐?
좋은 일에 감사라면 그것은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고통 중에 감사했느냐?
어떤 혹독한 시련 중에 어떤 감사를 했느냐?
이 감사야 말로 믿음 있는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기쁨과 감사는 히브리어에는 그 뜻이 같습니다.
기쁨과 감사란 말이 같은 어원을 갖는 것은 기쁨은 내적인 것이요.
감사는 외적인 표시로서 그 본질이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없는 감사는 외식이요. 하나의 처세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북받쳐 오를 때, 거기에서 진정한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이 점점 식어간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무엇이 식어가고 있는가? 사랑이 식어간다고 했습니다.
기쁨이 식어간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잃은 사람은 억울해서 기쁨이 없고, 얻은 사람은 더 얻지 못해서 기쁨이 없고,
없는 사람은 부족해서 기쁨이 없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지키느라고 아둥바둥하다가 기쁨을 즐길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때 우리 마음에 이렇게 기쁨이 없어지는가?
1. 은혜를 잊어버릴 때, 감사와 기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내 힘으로 된 줄로 알 때 감사와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도, 내 힘으로 지었지 - 사업을 해도 내 힘으로 했지 - 자녀를 키워도 내 힘으로 키웠지 - 그러니 무엇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어떻습니까?
실로 이 모든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입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 내가 힘쓰지 아니해서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까?
내 사업이 실패한 것이 내가 게을러서 실패한 것입니까?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실로 돼지만큼도 먹지 못하면서 돼지 길러서 실패하는 양돈농가가 그가 무엇을 잘못해서 망한 것입니까?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건강도, 가정도, 사업도, 자녀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축복해주셔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2. 탐욕을 다스리지 못하면 기쁨과 감사를 잃게 됩니다.
탐욕이 어데서 오는가? 남과 비교하는데서 옵니다.
둘이 마나면, 저 사람보다 내가 나아야합니다.
셋이 만나면 두 사람보다 내가 나아야합니다.
열이 만나면 아홉 사람보다 내가 나아야합니다.
“엄마 나 100점 맞았다” “네 반에 100점 맞은 아이가 몇 명이 있니?”
- “엄마 나 50점 맞았다” “아무게는 몇점 맞았니?” “그에는 30점 맞았다” “잘했다” - 왜 100점을 백점으로 50점을 그냥 50점으로 봐 주면 안 되는가?
꼭 상대평가를 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보니 우리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말 보족함이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의 조건을 생가하지 아니하고, 내게 없는 것을 부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너무나 귀하고 풍성한 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귀한 건강이 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병원의 침상에서 보내는 환자가 아닙니다.
튼튼한 심장, 기능이 좋은 콩팥, 폐활량이 큰 허파, 링겔병을 들고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가정이 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가면 상냥하게 맞아주는 아내의 따뜻한 미소가 있습니다. 쳐다만 보아도 모든 시름, 걱정 잊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자녀가 있습니다.
든든한 직장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왜 하필이면 내게 없는 것에 골똘합니까?
깊이 생각하면 나는 축복 받은 사람이요.
감사의 조건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Ⅱ. 우리의 감사에는 어떤 감사가 있는가?
1. “때문에”감사가 있습니다.
미숙한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감사의 조건이 바뀌면 감사도 사라지는 감사입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감사하면 병들었을 때 감사할 수 없습니다.
배불러서 감사하면 배고플 때 원망하게 됩니다.
가정이 편안하고 사업이 잘돼서 감사하면 어렵고 힘들 때에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조건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2. “불구하고”의 감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감사입니다.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는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라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왕하22:16~17).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배가 썩어오는 고통을
느끼고, 몸이 떨리는 절망적인 상황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때 환난가운데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기도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으며”
- 다시 말하면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 소와 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너무 가난하여 하나님께 드릴 번제물이 없을 지라도-
왜 즐거워하고 기뻐합니까?
18절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19절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구원”이라는 말과 “나의 힘”이라는 말에 감사해야할 이유와 찬송해야할 이유가 모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멸망 받는 극한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매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불구하고의 삶입니다.
사업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병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하고, 찬송하리다. - 이것이 성도의 불구하고의 삶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를 환난에서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4~15).
불구하고의 감사와 찬송은 능히 환경을 바꾸는 능력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옥문을 열어라 사도행전 12장 1 ~ 12절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하여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출교를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특히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모두 순교의 죽임을 당함으로서 그 악한 세대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혹한 박해를 가했는가를 역사가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초두에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를 기뻐했다”고 했습니다(행12:2).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베드로도 죽이려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유월절 절기 때였습니다.
이제 절기가 끝나면 처형하려고 베드로를 군사 네 명씩 네 패에 맡겨서 깊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제 날이 새면 베드로는 목 베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 끼여 팔과 다리가 쇠사슬에 함께 묶인 채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고, 옥중에 광채가 밝게 비취며,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우며 “급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7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졌다”고 했습니다.
10절에는 “성으로 통하는 문에 이르니, 쇠문이 절로 열렸다”고했습니다.
감옥도 쇠사슬도 쇠문도 베드로를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주의 일꾼을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베드로와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옥문을 열어라!” - 이 시간에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사슬과 우리를 가두고 있는 모든 옥문들이 활짝 열리는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Ⅰ. 누구의 감옥인가?
본문 1절은 헤롯의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감옥은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감옥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것은 그 일을 누가 담당했던지 그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 정체를 숨기고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고, 말씀 듣는 것을 방해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교회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어둠의 주관자 인 사탄은 헤롯이라는 세상 권력을 이용하여 성도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귀를 “아바론”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멸망자”란 뜻입니다. 사탄은 반드시 멸망 받는 것입니다.
오늘 날도 이 사탄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때로는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과 사상과 체제로, 때로는 황금만능의 유물론으로,
가정과 혹은 자녀로, 거짓 교훈과 이단으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제자로 가장하고 나타난 사탄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베드로를 질책하셨습니다(마16:23).
지금도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18).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는 깨어서 근신해야 합니다.
Ⅱ. 베드로를 가둔 감옥은 어떤 감옥인가?
본문 6절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메어 자는데 파숫군들이 밖에서 옥문을 지키더니”-라고 했습니다.
감옥과 세상 사이에는 철문이 있고, 그 문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감옥안에서 두 파수대를 지나야 감방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철통같은 감옥의 삼엄한 경비입니다. 그 안에 베드로가 갇힌 것입니다.
오늘 날도 우리가 때로는 옴짝달싹 못할 사슬과 감옥에 얽매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의 사슬일 수 있습니다. 가난과 실패의 감옥일 수 있습니다.
미움과 원한의 감옥일 수 있습니다. 죄악의 감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너무나 무능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 감옥에서 구원하여 주겠는가?
오직 나의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체가 조요하며 -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드라”고 했습니다(행12:7).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고 했습니다(행12:10).
쇠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고, 성문이 열리는 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저주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낭패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시면 축복의 문이 열리고, 하늘 문이 활짝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어느 때 옥문이 열렸는가?
1. 합심하여 기도할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
본문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빌더라”고 했습니다.
본문 12절에 “마가라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마18:19~20).
베드로가 옥에 갇히니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가정 가정에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기도 중의 기도는 합심기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표적은 모두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 졌습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출15:25).
야곱이 기도할 때 에서의 마음이 녹아지고, 브니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창32:9). 이사야가 기도할 때 아하스왕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갔습니다(왕하20:11).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번제물과 번제단을 태우고,
3년 6개월의 가뭄 끝에 장대비를 내려주셨습니다(왕상18:45).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행16:25).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도들이 기도할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이
임했습니다(행2:1).
기도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기도하면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베드로가 갇혔던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저절로 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은 기도하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2. 순종할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
본문 8절에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데 베드로가 나아와서 따라 갈 때”
- 옥문이 열리고 세상으로 통하는 성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은 어느 때 체험할 수 있는가? 믿고 순종할 때입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 그물을 던지니 두 배에 차고 넘치는 고기를 잡았습니다(눅5:11).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 - 그대로 했더니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요2:9).
순종할 때 이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봐라 -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기도해라 - 엎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라 - 모이는 것입니다.
헌신해라 - 드리는 것입니다.
전도해라 - 뛰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적과 기적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 하고, 나아갈 때 쇠사슬 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고, 하늘의 축복의 문이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음성을 들읍시다 누가복음 16장 19 ~ 31절
이 음성은 누구의 음성인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선지자의 음성입니다.
사람은 어떤 소리를 듣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환경과 운명이 달라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하는 뱀의 말을 들음으로 세상에 죄와 사망을 끌어들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을 함께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선지자를 통하여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다가 자신도
망하고 나라도 망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살았으므로, 자신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을 뿐더러 도탄에 빠진 나라를 건진 훌륭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구약 66권은 바로 인간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세상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 방법대로 살면서 홍포입고, 연락하던 부자의 비참한 종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를 향하여, 또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택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세에 교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Ⅰ.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19!20).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초두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으로 끝맺고
또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가 받은 사명은 복음전파사명입니다.
선교의 사명입니다. 전도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셨습니다(눅4:43).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신 목적도 전도를 위하여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를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막3:13).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은 복음전파를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도 전도하고 주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하지 아니하고,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면서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겠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땅위에는 아직도,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떨어져가는 영혼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3:1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이요.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고,
멸망받기 때문에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Ⅱ. “가서 도와주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 말씀에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버두니야(터키 북방의 흑해 연안도시)로 가기로 마음 먹고 있었으나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요”라는 음성을 듣고는 “아! 하나님께서 나를 마게도냐로 가서 그들을 도와주라고 하시는 구나”
- 생각하고 마게도냐로 가기를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유럽이 복음화 되고 유럽이 세계선교의 센타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영의 귀, 믿음의 귀를 열어서 들어 보면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간절한 음성이 있고 가서 도와주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세계인구의 55%가 살고 있는 아세아 대륙에는 겨우 2%만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나머지 98%는 하나님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4천만 인구 중 예수 믿는 사람이 약 천만 명, 25% 정도입니다.
그중에서 통일교 예수, 박태선 예수, 김기동 예수, 이장림 예수, 영생교 예수,
이런저런 예수를 빼고 보면 불과 16%만이 참 예수를 믿고 나머지 84%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믿는 성도 가운데도,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자녀, 믿지 않는 부모,
믿지 않는 형제 - 믿는 성도 가정의 60%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웃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멸망 받는 이웃들을 도와주라고 성령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Ⅲ. 버림받은 영혼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한 부자가 홍포를 입고 매일 매일 연락하면서 살다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 집 대문 앞에 헌데를 개들이 핥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던 나사로라는 거지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고 부자는 음부에 갔습니다
그는 지옥 불의 고통 중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이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눅16:24). 부자는 애원했습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눅16:27).
그는 왜 이렇게 고통 중에 부르짖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내세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몰랐습니다.
지옥과 천당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집에 살면서 즐기며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죽음 한 발 자욱 앞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행한 바에 따라 형벌과 상급이 따르는 심판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멸망 받는 자의 이 고통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통회하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일어나 가라! 누가복음 17장 11 ~ 19절
시편 50편 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요 감사의 종교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감사는 성도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살전5:18).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에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실 때도 “이 적은 것으로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아옵니까? - 하시지 아니하시고 떡과 고기를 가지사
하나님께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축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살아 날 때에도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1:41).
감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문둥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감사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문둥병을 고침 받은 열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예수님께 감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둥이의 입술의 감사를 받으시고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축복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직 한 사람! 영육간에 구원을 받은 문둥이의 축복에 동참하는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Ⅰ. B.C.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B.C.의 삶은 예수 믿기 전의 삶입니다. 구원받기 전의 삶입니다.
고침받기 전의 삶입니다. 축복받기 전의 삶입니다.
본문 12절에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서서” -라고 했습니다.
1. 그들은 모두 문둥이였습니다.
율법은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 곁에 가까이 올 수 없게 했습니다.
"입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하고, 그가 부정한 즉 혼자 살되 진 밖에서 살지니라“ - 고 했습니다(레13:45).
그러므로 문둥병에 걸리면 가족과 이웃과 격리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나,
산에서 살아야합니다.
인간이 받는 형벌 중에 어떤 형벌이 가장 혹독한가? 고독의 형벌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감방이나, 혹은 형무소에 격리 수용합니다.
그곳에 갔다 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교도소에서 배고픈 것 -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폭력과 박해도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까다로운 수감자 규칙도 견딜 수 있고, 중노동도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참을 수 없는 형벌은 무엇인가? 독거조치를 받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죄수들은 이 독방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고, 제일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문둥이 시인 한하운씨도 "나는 인간이 아니외다. 중생도 아니외다.
하늘과 땅 사이에 어쩌다 솟아난 독버섯이외다."라고 나병의 아픔을 노래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의 열 문둥이는 모두 똑같이 이 고독의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둥병자체에서 오는 고통보다 더 아픈 고통이었습니다.
2.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 대하여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에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자기들의 질병을 고쳐 주실 줄을 믿었습니다.
3. 그들은 모두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을 때, 예수님의 응답은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본문 14절에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이는 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지금 그들의 몸에서는 피고름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왜 우리를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제사장들에게 보내십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모습 그대로 발길을 옮긴 사람들입니다.
4. 그들은 똑같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본문 14절에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발길을 돌릴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얼마가지 아니하여 자신들이 고침 받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그들은 처음으로 옆 사람의 참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이 빠지고, 코가 뭉그러지고, 손마디가 빠지고, 입술이 뭉그러진 그 흉한 얼굴들은 그들의 원래의 얼굴들이 아니었습니다.
문둥병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 저주의 가면을 벗고 보니 아름다운 원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의 우리들의 얼굴이 그러했습니다. 죄로 인하
여 일그러지고, 죄로 인하여 찢겨지고, 헐어지고, 뭉글어진 원상을 알 수 없었던
문둥이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B.C.의 인생이었습니다.
Ⅱ. A.D.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A.D.의 삶은 예수 믿은 후의 삶입니다. 구원 받은 후의 삶입니다.
축복 받은 후의 삶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삶은 열 사람 모두 똑같았습니다.
삶의 목적과 목표와 방향이 같았습니다. 병들었을 땐 고침 받기를 원했습니다.
가난할 땐 부자 되기를 바랐습니다.
외로울 땐 위로 받기를 원했고, 실패할 때엔 성공하기를 바랬습니다.
사람대우 못 받을 때엔 사람대우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달라집니다.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됐느냐?
성공한 후에 어떻게 됐느냐? 소원성취한 후에 어떻게 됐느냐?
응답받은 후에 어떻게 됐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실로 징그러운 배추벌레가 배추흰나비가 되었고, 굼벵이가 매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병 고침의 축복을 받고, 회복의 감격을 안고 오매불망 기다리는 부모 품으로 아내와 자식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에 “그 중에 하나가 -” 사마리아 문둥이 하나가 돌아가던 길에서 돌아서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소수! 열중에 하나! 열 사람이 응답받고 한 사람이 감사했습니다.
열 사람이 축복받고 한 사람이 감사했습니다.
열 사람이 은혜 받고 한 사람이 감사했습니다.
열 사람이 예수 믿고 한 사람이 감사했습니다.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니 이 사람이야 말로 위대하지 않는가?
Ⅲ. 정말로 귀한 인생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건강도 귀하고, 물질도 귀하고, 자녀도 귀합니다 명예도 귀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귀한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사는데 물질이 귀합니다. 몸을 위해서는 건강이 귀합니다.
건강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가? 생명이 귀합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는가? 있습니다. 구원이 귀합니다.
많은 물질을 받고, 건강도 받고, 생명을 받았어도 구원 받지 못하면 지옥 갑니다. 돈부자, 건강부자도 지옥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문둥이의 사례를 받으시고 정말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이 축복은 아홉 문둥이는 받지 못한 축복입니다.
그들은 병 고침을 받고, 건강하게 살다가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은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일어나 가라!” 이 예수의 말씀은 구원완성의 선포입니다.
이 시간 이 축복을 안고 돌아가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영육간에 구원을 받고, 복된 삶을 사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역전 야고보서 1장 1 ~ 11절
미국 죠지아주의 어느 마을에는 딱정벌레 기념탑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 원래 이 마을은 목화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 딱정벌레 떼들이 몰려와서 목화밭을 완전히 황폐화시켰습니다. 한해 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망가진 목화밭에 땅콩을 심기로 했습니다.
땅콩이 잘되었습니다.
수확기에 수확하고 보니 목화농사를 지을 때 보다 힘도 덜 들고, 수입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음해부터는 땅콩농사로 전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자기들이 잘살게 된 것이 딱정벌레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딱정벌레를 만들어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세상에서 화라고 불리는 것까지도 자유롭게 사용하시고
오묘하게 역사하셔서 당신들의 자녀들에게 결국 복이 되도록 만드십니다.
본문 1장 1절의 말씀에 “하나님과 주 예수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열두지파란 물론 이스라엘백성 곧 유대민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좀더 확대해석하면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된 모든 기독신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발신인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음을 감안한다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출신 기독신자들 중에서 ,
스데반집사의 순교이후, 박해를 피하여 이방지역으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자주접촉 할 수 없었고, 로마의 박해는 그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환난과 시련으로 다가 왔습니다.
야고보사도는 그와 같은 어려운 형편에 처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부어주고자 이 격려의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닥친 어떠한 불행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축복으로 바꾸는 인생대역전의 지혜를 얻기를 소원합니다.
누가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가?
Ⅰ. 환난과 시험을 성장의 기회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본문 2~4절의 말씀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삶의 문제에 부딪히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순탄한 삶이라 해도 문제꺼리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당하는 근심과 염려 갈등, 고난은 성도들에게도 예외 없이
닥쳐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원치 않는 시험들이 닥쳐올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성도와 불신자의 삶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들을 당하면,
그것은 재수 없는 일, 불행한 일이라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이 오거든 피하라고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이 물러가도록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험을 기쁘게 맞이하고, 그 시험과 정면 대처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5장 3~4절의 말씀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순탄할 때는 하나님의 손길을 철저히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환난과 고통과 시험이 올 때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찌 해 볼 수가 없는 어려운 환경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절망을 넘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희망 속에서 인내하는 성숙함을 보여야합니다.
인내할 줄 아는 인격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겪게 되는 숱한
고통 속에서도 삶의 본질적 의미와 목표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시련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되는 필요악입니다.
시련이 없는 삶은 온실에서 자라 나이테가 없는 나무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된 불완전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Ⅱ. 부족함을 깨닫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5절 말씀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영적으로 바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흩어진 열두지파의 성도들은 이전에 겪지 못했던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황제상 앞에 경배하도록 강요당하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먹어야하는 시험과 신자가 우상의 제상에서 물려나온 음식을 대하여야하는 시험, 같은 혈통의 유대인이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쫓아다니며 핍박하는데서 오는 시험 등 여러 가지 시험이 닥쳐올 때 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할 것인가 판단이 서질 안았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임으로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부족한 것 가운데 특히 부, 권력, 명예, 쾌락 등을 집중적으로 추구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말로 인간이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성경은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으며, 그 지혜 속에 장수와 부귀가 있고, 평강이 있으며,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잠3:16~18).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선의 선물입니다.
지혜는 지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선용하는 주체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고를 언제나 개방해 놓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지혜를 누가 받는가?
본문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이라고 했습니다.
지혜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히 구하는 자가 받습니다.
부족을 깨닫는 것은 겸손한자가 갖는 미덕으로서 항상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데서 영구적인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약1:5)
Ⅲ. 영적축복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가 인생을 역전시킵니다.
본몬 9절 말씀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라고 했습니다.
낮은 형제란 세상에서 가난한 자, 비천한 자를 말합니다.
사회적으로 비천한 사람이 어떻게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가?
이 “자기의 높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높은 지위와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누리게 된 영적 부요함을 말합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 부자가 된 사람이 어떻게 낮아질 수 있고, 설사 낮아졌다고 해도 어떻게 그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세상부자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 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운 죄인임을 고백하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때, 그 부자는 영적 낮음을 세상 앞에 자랑하며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자의 겸손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의 형제요. 하나님의 딸들입니다.
왕 중 왕의 왕자들이요, 공주들이 되었으니 마땅히 이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작은 자 이지만 영적축복을 자랑으로 여기는 믿음의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역전시킬 능력과 믿음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 시편 23장 1 ~ 6절
이 시는 시중의 시요. 시 가운데 황금 시로 불리는 다윗의 찬양 시입니다.
만인의 입에 회자되는 이 짧은 시는 이 세상을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다윗의 이 시는 슬픔에 잠긴 자를 위로해 주며 곤비한 영혼에 안식을 줍니다.
이 시는 감옥에 갇힌 자를 위로하고 믿음이 연약한 자의 의심을 사라지게 합니다. 병든 자에게는 새힘을, 뼈아픈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과부와 고아에게는 우로를 줍니다.
옥에 갇힌 자들은 이 시를 읽고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는 이 시를 들으며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노예된 자들은 이 시를 읊으며 주인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이 시는 세상의 종말이 이르기까지 마지막 성도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꿈과 소망의 날개를 접지 않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 우리는 비슷한 뜻을 가진 “빈곤”과 “결핍”을 구분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데 지팡이가 없다. - 이것은 결핍입니다.
있으면 좋은데, 없는 것은 결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걸어가야 할 사람에게 다리가 없다. - 이것은 빈곤입니다.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빈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도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이 결핍될 수 있지만, 성도에게는 꼭 있어야할 것이 없는 빈곤에는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게 좋은 코트가 없다. 보석 반지가 없다. - 내게 하려한 장식품이 없어도,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게 있는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락하여 항상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이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함이라”고 했습니다(약4: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모든 것을 남고 넘치게 공급하시겠다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사치스럽지 않지만 풍족하고, 부유하지 않지만 만족함이 있고, 나에게 꼭 필요한
만큼 채워주시어 보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이시간 만나시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Ⅰ.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원인입니다. 그 결과는 “내가 부족함이 없다.”입니다. 영존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목자가 되신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인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네가 어떤 사람이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네가 무엇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가?
“너와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왜 그런가? 인간의 소유나, 능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람나라의 세도가,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이였습니다.
그의 하늘을 찌르는 권세도 문둥병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현인이요.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에게도 번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했습니다(저냐:18).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솔로몬에게도 근심걱정이 있었습니다.
근심걱정이 가난한 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 저것 많으면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이 생각합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이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줄 압니다.
가난한 사람은 돈만 있으면 부러울 것이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병든 사람은 건강만 있으면 살 것 같이 생각합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지식만 있으면 더 바랄 것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갖고 보면 어떻습니까? 가져보니 부러울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까?
돈 많다고 건강한 것 아니고, 세도가의 자식이라고 잘나고 똑똑한 것 아니고,
교수의 아들이라고 공부 잘하는 것 아닙니다.
인생은 채우고 채워도 부족하고, 넘치고 넘쳐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부족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은 창조자이십니다. 모든 것의 근원자 이십니다.
지혜, 물질, 사랑, 평화, 기쁨, 부요, 우리가 보족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의 문제, 영혼의 문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마28:18).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고,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십니다(시107:5).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Ⅱ.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실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과 성도의 사이를 양과 목자사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양과 목자는 가장 친근한 관계입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는 선한목자라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했습니다(요10:14~15).
목자는 양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양의 컨디션과 건강상태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배가 고픈지, 몸이 아픈지, 목이 마른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의 필요를 채워 주고 양들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사랑해야합니다.
양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다윗은 목자였습니다.
다윗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곰이나 사자에게 양을 빼앗기면, 달려들어 수염을 움켜쥐고, 주먹으로 때리고, 입을 벌려서 맹수의 이빨에서 양을 구했다. 고 하였습니다(삼상17:34).
다윗은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물맷돌을 연습하고, 체력과 완력을 키웠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의 양을 지키고, 골리앗에게서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그러한 목자가 나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목자를 만난 양은 행복한 것입니다.
Ⅲ.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짐승입니다.
양에게는 매 같은 발톱도 없고, 사자의 이 같은 이빨도 없습니다.
코끼리 같은 큰 몸집도 없고, 황소 같은 뿔도 없습니다.
작은 고슴도치에게는 날카로운 가시를 주시고, 느린 거북이에게는 단단한 등껍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양에게는 어떤 공격 무기도, 어떤 방어 무기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것은 사자도 아니고, 곰도 아닙니다. 양입니다.
이렇게 양이 번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자가 있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과 목자는 생명관계입니다.
목자 없는 양을 상상할 수 없고, 양 없는 목자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떼어 놓고 인간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48).
떡이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가 곧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요8:12).
빛이 없는 생명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6).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했습니다(요15:1).
포도나무를 떠난 포도가지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 능력 없는 양들이 목자를 의지하면 사는 것처럼, 죄로 인하여 완전무능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살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하셨습니다(시23:4).
고난, 질병, 실패, 어떠한 환난이 닥쳐와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나의 목자 되시는 주께서 나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은 없다 마가복음 9장 14 ~ 29절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와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큰 믿음이 아니고, 아주 작은 믿음 일지라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른 만큼 강한 힘으로 철봉에 매달릴 수는 없어도, 어린아이도 엄마의 옷자락을 쥘 수 있습니다.
어른 만큼 무거운 것을 들 수는 없지만, 어린아이도 방울 대를 들고 흔들 수 있습니다.
장대 밑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산 사람도 있고,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고 산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눅17:6).
바울은 루스드라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서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걸었다.”고 했습니다(행14:9).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던 예수님께서는 딸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셔서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애원하는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니
“그시부터 그 딸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마16:28).
예수님의 말씀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입니다(마8:13).
성경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일5:4).
불가능은 없다!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Ⅰ. 불가능의 세상이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누구인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어디서 왔는가? 변화산에서 왔습니다(막9:2~13).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산위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모세가 있고,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산위는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세상에는 아무것도 능히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1. 그곳에는 병든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나 고침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귀신이 들려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거품을 흘리며 몹쓸 상태였으나 백방으로 노력해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2. 그곳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3. 그곳에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도 사랑하는 아들의 질병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4. 그곳에 귀신이 있었습니다.
벙어리 귀신이라고 했습니다(막9:22). 귀신은 마귀 곧 사탄의 사자들입니다.
귀신은 인간에게서 맑은 정신과 건강을 빼앗아 갑니다.
사랑과 화평과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 갑니다.
근심, 걱정, 낙심, 공포, 불안, 초조, 증오 등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이 사탄마귀가 어린 아이와 그 가족을 괴롭혔습니다.
5. 그곳에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아랑곳 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
볼거리에만 과심이 있는 철저한 방관자 들입니다.
6. 그곳에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무능을 예수님의 공격의 빌미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이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고,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깎아 내리는 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산 아래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모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들이요. 불가능의 세상입니다.
Ⅱ. 가능의 세계가 있습니다.
1. 예수 안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예수! 그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고 했습니다(마1:21).
예수 이름 안에서 죄 문제, 구원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구원은 전 생애적인 구원입니다.
과거의 죄, 오늘의 죄, 장래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사43:25).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사43:25).
시편 103편 12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영혼 구원뿐 아니라 육신적인 구원입니다.
영원한 미래의 구원뿐 아니라 현세적인 구원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두 배에 차고 넘치는 물고기를 잡았습니다(눅5:8).
밤 사경에 괴롭게 노젓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잔잔케 되었습니다(요11:17).
벳세다 광야의 굶주린 5천명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고 아홉 광주리나 남았습니다(마14:21).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 귀신이 소리 지르며 나갔습니다.
누가 귀신에게 명령할 수 있는가? 오직 예수입니다.
누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가?
누가 어그러진 삶을 회복시킬 수 있는가? 예수!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 안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2. 믿음 안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본문 22절에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소서” - 아비는 애원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은 “믿는 자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믿는 자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받는 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요15:15).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입니다(마8:13).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17:20).
겨자씨 믿음!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 그러나 생명을 배태한 작은 믿음은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있는 믿음 안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3. 기도하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본문 29절에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유”가 무엇인가? 귀신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병자가 고침 받는 것입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인생이 축복의 인생이 되는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이 성공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야 말로 하나님을 일하시게 하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의 기도는 예루살렘 옥문을 열고 베드로를 구출했습니다(행12:10). 엘리야의 기도는 여호와의 제단에 불이 떨어지는 응답을 받고,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문을 열고 장대비를 내리게 했습니다(왕상18:45).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 받고 삽지가 구속을 성취했습니다(요19:30).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온갖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내 키를 한자라도 크게 할 수 없고, 머리터럭 하나라도 희게 하고, 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안된다고 합니다. 포기하라고 합니다.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가능은 없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 믿음 안에! 기도하는 자에게는 불가능은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배나 많은 복 신명기 1장 5 ~ 11절
출애굽 운동의 기수요. 광야교회의 아버지요. 하나님의 충성된 종 모세는 지금 여리고성이 건너다보이는 모압 평지에 섰습니다.
본문은 “호렙산에서 세일을 지나 가데스바네아까지 열하룻길이었더라”고 했습니다(신1:2).
통상 열하 룻 만이면 갈수 있는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39년 10개월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의 삶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말해주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복되고 형통한 지름길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40년의 고난으로 점철된 출애굽의 여정을 마감하고,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땅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모세는 애굽 궁정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연단 받고,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과 함께한 40년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가나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 라고 간구했습니다(신3:25).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그만해도 좋으니 이 일로 내게 다시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신3:27).
이제 모세는 저 멀리 바라보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필생의 축복을 선포했습니다.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신1:11).
현재보다 천배나 많은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Ⅰ. 누구에게 내리신 축복인가?
광야를 통과한 새 세대 이스라엘백성에게 내린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수신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니고, 광야를 통과한 새 세대의 이스라엘백성들입니다.
본문 3절의 “제 40년 십일월 그달 초일”은 B.C. 1407년 11월 1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2장 1절에서 “이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달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B.C. 1446년 아빕월 15일은 종교력으로 1월 15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빕월 14일은 유월절날 이고, 아빕월 15일은 출애굽의 날입니다.
히브리역사는 유월절을 깃점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밤에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싸인을 받았습니다.
애굽천지에 죽음의 재앙이 임하는 날, 이스라엘백성들은 양의 피가 발리워진 방안에 숨어서 죽음의 재앙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신을 신고, 허리띠를 동이고 지팡이를 들고, 서서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서 급히 먹었습니다.
그들이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양의 피는 구원의 표징이요.
그들이 구워 먹은 어린양의 고기는 출애굽의 싸인 이었습니다(출1213).
저들은 애굽에 거한지 430년 만에 20세 이상의 장정이 60만, 노인과 부녀자와
아이들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애굽을 나왔습니다.
저들은 저주의 땅! 재앙의 땅!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문밖이 곧 가나안이 아니었습니다. 길이 없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마라의 쓴물을 하나님께서 단물로 바꿔주셨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과 밤에는 사막의 추위가 엄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메뚜기 떼처럼 중다한 이스라엘백성들은 주변국가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에돔도, 모압도, 그들에게 길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광야를 유리방황했습니다. 바란 광야에 다다른 그들이 정탐꾼을 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보고는, 그들은 장대한 아낙자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읍은 견고하고, 백성은 중다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보고, 우리를 보니, 우리는 메뚜기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밤새도록 울부짖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불순종의 백성에게 대노하셨습니다.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민14:33).
제 40년 11월 초일일은 가나안의 소망을 가지고 출애굽한 출애굽 1세대들이 모두 광야에서 소멸되는 시기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애굽을 나왔어도,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모두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면 천배나 많은 이 축복은 누가 받았는가?
광야를 통과한 출애굽 2세대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남은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산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라고 하셨습니다(사10:22).
예수님께서도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22).
계시록 14장 1절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흰옷을 입은 승리자가 14만 4천명”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에서 승리하고, 세상에서 승리한 14만 4천명의 반열에 선, 출애굽 새 세대들에게 현재보다 천배나 많은 복을 축복하셨습니다.
Ⅱ. 누가 받은 축복인가?
가나안 행군을 계속하는 자가 받은 축복입니다.
본문 7절에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행군은 한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머뭇거리고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쉼 없는 전진을 계속해야합니다.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근지 곳곳으로 가고! 평지로 가고! 남방으로 가고!
해변으로 가고! 가나안 족속의 땅으로 가고! 레바론으로 가고!
유브라데강까지 가고! 가고! 가고! 가고! 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온 유대로 가고! 사마리아로 가고! 땅 끝까지 가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복음을 들고 가고! 가고! 또 가는, 가나안 행군의 용사들에게 하나님께서 현재보다 천배나 더 많은 복을 주십니다.
Ⅲ. 천배나 더 많은 복의 내용은 무엇인가?
1. 번성의 복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번성케 하셨으므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창대케 하리라”(창12:3).
번성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70명의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간지 430년 만에 수백만의 민족으로 번성했습니다. 이러한 번성의 복은 바로 오늘날 신약교회가 받은 축복입니다.
2. 물질적 축복입니다.
본문 8절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사,
그들과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하신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얻으라”고 했습니다.
약속의 땅은 어떤 땅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에서 벤
포도송이는 두 사람이 메고 올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민13:24).
3. 천배나 더한 복은 신령의 복입니다.
왜 그들은 출애굽을 해야 하는가?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출3:18).
출애굽의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입니다. 출애굽의 내용이 하나님경배입니다.
가나안땅의 회복은 제단의 회복입니다. 신앙의 회복입니다.
신앙의 회복이 축복의 회복입니다.
이제 저들은 모든 절기의 모든 제사, 모든 제물, 모든 찬양, 모든 감사,
모든 서원이 현재보다 천배나 풍성히 들여질 것입니다.
현재보다 천배나 더한 자비의 복이, 사업의 복이, 물질의 복이, 건강의 복이,
지혜의 복이, 번성과 창대의 복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천배나 더 부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출애굽기 3장 1 ~ 10절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몰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가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의 위대한 출애굽역사는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찾아오시고 부르심을 통하여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가십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떨기나무가 불타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출3:5).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고 하셨습니다(출3:7~8). 본문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시어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1445년 후 베들레헴 말구유에 강림하시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요5:25).
그리고 죽은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눅7:10).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마9:18).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 장사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요11:17).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40일 만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고 오순절 날 성령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오늘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부르십니다(계3:20).
이 시간 우리는 이 음성을 듣고, 우리의 신발을 벗어 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죄악과 사망의 장망성을 떠나는 영적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새로운 신앙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중생의 역사를 체험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가?
Ⅰ. 겸손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바로의 왕자였습니다.
천하를 다스리던 애굽안에서 모세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젊었습니다. 혈기왕성한 40대의 대장부였습니다.
세상에서 그가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그가 한 일은 한 사람의 애굽인을 때려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동기가 어떠하였든지 그것은 혈기요, 만용입니다.
이 때 그가 들은 음성은 사탄의 음성이었습니다.
“저 불의한 사람을 때려 눕혀라!” - 물론 한 사람쯤 때려눕힐 수 있습니다.
혹은 열 명쯤, 백 명쯤 때려눕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불의한 무리들을 완력으로 모두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왕자라는 힘 있는 자가 휘두른 오만한 행위였습니다.
결국 그는 한 사람을 처치하고는 왕궁을 뛰쳐나와야 하는 처참한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 사람이 세상을 의지하고 교만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왕자라는 자랑도 없습니다. 왕궁이라는 호화로운 환경도 없습니다.
이제 나이 80이 되었으니 기력도 없습니다. 혈기도 없습니다.
양치는 40년 세월에서 그를 감싸고 있던 외식의 껍질을 벗었습니다.
교만의 껍질도 벗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를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하셨습니다(민12:3).
광야의 훈련은 그의 신앙을 완성하고 인격을 도야하는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40년의 훈련이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야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고 하셨습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행실을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룻4:8).
신을 벗는 것은 절대 복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노예는 주인 앞에서 신을 신지 않으므로 존경과 복종을 나타내었습니다.
모세는 신을 벗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동의 신을 벗었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헤매던 신을 벗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목동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실패의 자리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그리고 이 풍진 세상을 누비던 신을 벗으시길 바랍니다.
Ⅱ. 하나님가까이 있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본문 4절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고 했습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는 시내산 가시나무 떨기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않는가?”(출3:3).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 - 무슨 뜻인가?
떨기나무같이 보잘것없는,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됐다는 말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이 광경을 보려고 돌이켜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은, 하나님의 행하신 구원의 싸이클에 모세의 영적인 포커스가 맞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가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시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있는 자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성전에서 잠을 자다가 사무엘아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삼상3:4).
주님을 만나러 새벽에 주님의 무덤을 찾은 마리아는 “마리아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요20:16).
하나님가까이 가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십자가 가까이 가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장소에 가까이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은 무엇인가?
구원입니다. 축복입니다.
본문 8절에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지방에 이르려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사는 땅은 어떤 땅인가? 애굽 땅입니다.
그곳엔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학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압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울부짖음이 있는 땅이고 근심과 아픔이 있는 땅입니다.
그들이 받을 땅은 어떤 땅인가? 넓고 광활한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엔 소망이 있고, 기쁨과 희락이 있습니다.
계시록21장은 “눈물이 없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이 없고,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계21:4).
예례미야 29장 11~13절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례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은 애굽인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내심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이 시간에 우리는 신을 벗읍시다.
목동의 신을 벗고, 구원자의 신을 신은 모세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던
불순종의 신을 벗읍시다.
세상을 섬기고, 물질을 섬기던 세속의 신을 벗읍시다.
이 시간에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축복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5장 25 ~ 34절
오늘 우리는 믿음이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는데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성도에게 믿음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강한 손 뿐만 아니라 연약한 손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위대한 믿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역을 체험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신앙을 고백한 한편 강도! 그의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믿음의 열매는 얼마나 풍성했습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였습니다(눅23:13).
오늘 우리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을 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막5:34).
믿음대로 되어지는 축복을 안고 승리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누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가?
Ⅰ. 소망이 없는 여인이 손을 대었습니다.
본문 25절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던 차에” - 라고 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은 아마도 말기의 암 환자가 아니었겠는가?
가진 것도 다 탕진하고, 병세는 더욱 중하여갔습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고대의 유대 나라는 여권부재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해서 살다가 살기 싫으면 “이 여자는 나와 이혼한 여자다.”
- 이혼증서 하나를 써주면 끝나는 것입니다.
유대의 인구 계산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한 백성이 60만이다. - 이 말은 20세 이상 전쟁에 나가 싸울수 있는 장정이 60만이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계수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12년 동안이나 혈류증을 앓고 있는 여인을 누가 지켜주고 보호하여 주었겠는가?
이 여인은 인간사는 세상에서 도태되고, 퇴출당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게 재산만 있으면 - 내게 의원만 있으면 - 내게 약이 있으면 -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 그래서 그것들을 의지해 보았는데, 그것들은 이 여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실로 질병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맛보는 지옥의 고통인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 마지막 남은 소망이 있다면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아 보는 것이 최후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려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어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뒤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 예수만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예수! 예수만이 그의 생명이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남편을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여 상처 받고, 낙심 중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믿음대로 되리라!” 믿음대로 되어지는 축복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Ⅱ. 구원의 확신을 가진 여인이 만졌습니다.
본문 28절에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가? 질병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무엇인가? “내가 그 옷에 손만 대어도 나으리라”하는 확신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고 했습니다(히11:1).
요한사도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을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했습니다(요일5:15).
믿음으로 구한 것을 받은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약1:6).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자녀도 아니고, 남편도 아닙니다. 오직 질병에서 구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구원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16:31).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행4: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3:16).
마태복음 1장 21절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구원입니다. 예수만이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이 여인은 이 놀라운 구원 진리를 깨달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서 곧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어렵게, 어렵게 예수님 앞에까지 와서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예수님의 팔을 잡지 못했습니까?
이 여인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옷자락만 잡아도 만족합니다.”
- “나는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구원 받는 줄 믿습니다.”
-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왔습니까?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수겠네”(찬205장).
그렇다면 이 시간 여기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네 믿음대로 되리라” - 응답 받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Ⅲ. 담대한 믿음을 가진 여인이 만졌습니다.
본문 27절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7).
믿음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발생은 들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믿음은 소망을 갖게 합니다.
“내가 그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으리라”
- 이 확신은 행동을 결단하게 했습니다.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 여인은 특단의 결단을 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의 팔을 잡고, 주님의 몸을 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누가 받았는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 여인이 받았습니다.
왜? “죽으면 죽으리다.”
생명을 걸고 주님을 만진 사람이 이 여인 뿐이었습니다.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구원을 얻으리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 여인 하나뿐이었습니다.
주님과의 무의미한 접촉에 무슨 능력이 임하겠는가
“주님의 옷자락만 잡아도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의 확신 우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믿음대로 되리라!” 믿음대로 소원을 이루시는 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성도의 필수 과목 역대상 29장 10 ~ 22절
오늘날 성도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깊은 영성과 탁월한 전문성입니다.
현대 산업의 구조는 모든 영역이 세분화되고 전문화 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의 국부의 상징이 높은 공장굴뚝과 시커먼 연기였습니다.
오늘날엔 굴뚝 없는 산업이 나라의 부를 판가름하고 있습니다.
I.T 산업이 그렇고 생명공학산업이 그렇습니다.
지금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는 조류독감백신은 스위스 로슈사가
독점생산, 독점 공급되고 있습니다.
호주 같은 나라에서는 전 국민의 예방접종을 결정했다 하니, 그 경제효과는 천문학적 숫자가 될 것입니다.
최근에 발명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는 에이즈, 당뇨, 치매, 간질환 등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것이 실용화되어 새로운 치료제가 개발된다면 그 경제적 가치는 수백조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은 골프선수 미셀 위는 800억원에 전속계약을 맺고 일년에 400억 이상의 수입이 예상된다고 하니 현대는 바야흐로 전문화 시대에 돌입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분야에 일인자가 되지 못하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각 방면에서 깊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일류의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살이만 그런가?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엉터리 전문가가 되는 것처럼, 공부하지 않는 신앙인은 엉터리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깊은 영성을 갖춘 탁월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류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공부해야하는가?
Ⅰ. 제 1과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선택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우리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라고 했습니다.
“우리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란 무슨 뜻인가?
선택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본래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삭이 아들을 낳았는데 쌍둥이였습니다. 형은 에서요. 아우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이 쌍둥이 형제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말라기 1장 2절과 로마서 9장 13절엔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조상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택함 받은 야곱의
자손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선택은 누가 했는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요15:16).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가운데서 이 민족을 택하시고, 억조창생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 하나, 하나를 택하시어 세우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택하여 주셨으니, 우리에 대한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모든 자를 크게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대상29:12).
인생의 생사화복이 모두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붙잡아야할 진리는 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롬14:8).
Ⅱ. 제 2과 우리의 마음에 대하여 공부해야합니다.
1. 항상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가 자기 서재에 포도주 반병을 올려놓았습니다.
한 친구가 들어오더니 “야! 포도주가 반병이나 있네”-라고 즐거워 하드랍니다.
잠시 후 다른 한 친구가 들어오더니 “어! 포도주가 반병 밖에 없잖아?”라고 언짢아 하드랍니다.
같은 포도주 반병을 보고 한 친구는 “있네!”라고 하고, 한 친구는 “없네!”라고 하드랍니다.
인간의 마음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쓰임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무엇인가? “있는 것을” 보는 마음입니다.
불행은 무엇인가?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잠4:23).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잠16:32).
항상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2. 정직한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합니다.
본문 17절에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라고 하였습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샬”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짓말에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의 “정직”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정성된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합니다.
본문 19절에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 라고 했습니다.
“정성”이란 어떤 마음인가? “갈라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내가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119:113).
정성된 마음은 한 마음으로 깊이 몰두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마6:24).
하나님만 사랑하는 마음, 예배에 몰두하는 마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한 마음은 정성된 마음입니다.
Ⅲ. 제 3과 믿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을 송축하라 하매
회중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 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송축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서 높이는 것이 아니고, 찬송을 불러서
하나님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송축은 오늘날 찬송에 해당합니다.
왜 우리에 찬송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가?
찬송할 때, 마음의 문이 열리고, 찬송할 때 기적의 문이 열립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죄수의 손과 발의 착고가 풀리고, 바울을 지키던 간수의 마음이 열려서 바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맞은 상처를 치료해 주고, 그 가정이 예수를 믿는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사울이 악귀 들려 고통 받을 때 다윗이 수금을 타고 찬양을 하니 악귀가 떠나갔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뱀을 잡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고 했습니다(막16:17).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약5:15).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은 죄 사함을 받는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믿음 공부를 열심히 할 때 능력 있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군사의 덕목 역대상 12장 32 ~ 37절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 거하던 다윗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전폭적인 지지와 추대를 받아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이미 예정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일찍이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중 8번째 말째인 다윗을 택하여 왕으로 기름부음을 부었습니다(삼상16:2).
하나님의 계획은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역사의 현장에서 성취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시대적 배경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들이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입니다.
무려 340,822명의 용사들이 메시야 왕국을 예표 하는 다윗왕국을 건설하는데
동참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을 찾아온 잇사갈지파, 스불론지파, 단자손 등의 면모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은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Ⅰ.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은 사람은 시세를 파악할 줄 알아야합니다.
본문 32절에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200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며” - 라고 했습니다.
시세란 무엇인가? 시간의 복수로서 ”지정된 때“를 말합니다.
잇사갈 지파의 지도자는 200명이라고 했습니다.
34만 명의 군사 중에서 200명의 군사는 적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그 소수의 잇사갈 지도자들은 신령한 통찰력을 가진 뛰어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그 시대, 시대상황을 바로 파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사울 왕을 지지할 것인가? 다윗을 지지할 것인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그 종족 전체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중차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대세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참 지혜자는 현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과거 사울 왕시대의 풍요롭고 화려함 가운데 불의와 모순과 죄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윗에게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다윗의 내면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했습니다(행13:22).
왜 다윗은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는가?
그것은 다윗이 자기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눈물로 침상을 띄우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잇사갈 지파의 용사들은 이스라엘과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또,
역사의 흐름을 간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요한 사도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요일2:18).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벧전5:8~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말세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을 미혹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24).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했습니다(마24:7~8).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고 했습니다(마24:5).
그래서 바울은 “이 시대를 악하다”하고(엡5:16), “자다가 깰 때”라고 했습니다(롬13:11).
성경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4:7~8).
예수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 여러분! 지금은 사망의 잠에서 깰 때입니다.
예수를 만나야 할 때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성경은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고후6:2).
Ⅱ.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은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않됩니다.
본문 32절에 “항오를 정제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전쟁에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이라고 했습니다.
스불론 지파의 5만의 용사들은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다윗! 오직 하나님 나라의 건설! 을 삶의 지상목표로 삼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눅9:62).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사람은 쟁기를 잡았느냐?
못잡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쟁기를 잡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필요치 않습니다.
온 마음과 뜻을 한데 묶어 오직 한 목표를 향하여 전력 질주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빌3:13~14).
세상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세상 줄 끊고 십자가 붙드십시다.
오직 한 마음!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전력 질주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십시다.
Ⅲ. 그리스도의 군사는 실전에 능한 군사여야 합니다.
본문 35절에 “단 자손 중에서 싸움 잘 하는 자가 2만 8천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는 수가 많아도, 병기가 좋아도, 시대를 잘 판단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한다 해도 실전에서 싸움에 능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군사의 실전이란 무엇인가? 영혼 구원입니다. 전도입니다. 선교입니다.
교회의 첫째 사명은 영혼구원입니다.
이 영혼구원을 위해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해서 교육도, 조직도, 직분도, 봉사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정말로 중요한 것, 구령사업, 전도사업, 선교사업에 힘쓰지 않고
운동회 잘하고, 바자회잘 하고, 구제활동은 잘하는데 정작 구령 사업에는 능력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19:19).
그리스도의 군사는 내 이웃의 영혼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구원의 열정이 요구됩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고 몸 바치고, 물질 바치고, 내음과 정성을
바쳐 헌신해야 합니다.
구제는 교회가 하지 않아도 사회의 자선단체나 국가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구원은 어떤 단체도, 국가도 할 수 없습니다.
영혼구원은 교회만이 갖는 고유의 기능입니다.
실전에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열방에 드높이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새 역사의 창조자 사도행전 27장 9 ~ 26절
위대한 복음의 사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기독교 세계복음화의 대 사명을 받고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기위해서 배에 올랐습니다.
승객은 276명, 바울만이 포승줄에 묶여있는 죄수요. 로마 백부장이 그의 호송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 25절에서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다.”고 했는데
이번 바울의 로마행이 그 세 번째 파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중해 한 가운데서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난 바울이 탄 배는 지금 열나흘 동안이나 떡 한 조각,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악천후 속을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상황을 “구원의 여망이 없어 졌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행27:20).
절망이 닥칠 때, 구원의 여망이 없을 때 -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바울이 일어섰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하였습니다(행27:22~25).
역사의 주관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자가 선주인가? 선장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가이사인가? 백부장인가? 아닙니다. 바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와 여러분입니다.
구원의 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죄수 바울은 역사의 한 가운데 우뚝 섰습니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죄수일 수만은 없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창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위대한 새 역사창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Ⅰ. 담대한 신앙인이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됩니다.
본문 25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힘은 어데서 오는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성경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일5:4).
사람이 살아가가는 인생행로에는 항상 난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살이를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탄 배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276명이나 타고 있습니다.
뱃길에 익숙한 선장과 사공이 있습니다.
사업에 수완이 있는 선주와 화주가 있습니다.
용감하기로 이름 높은 로마의 군인이 타고 있습니다.
문학과 의학의 대가 누가가 타고 있습니다.
죄지은 범죄자가 타고 있는가 하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재판 길에 오른 종교가
바울이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 조각배에다 자신을 의탁하고 가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 배에 유라굴로 폭풍이 몰아닥친 것입니다.
15절에는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라고 했습니다. 폭풍에 휩싸여 방향을 잃어버린 배입니다.
17절에는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라고 했습니다(마24:5).
난파당한 배입니다. 연장을 버렸습니다.
이튿날에는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버렸다고 했습니다(행27:19).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모든 사람들은 허기와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깨어진 배 틈사이로는 바닷물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물이 새는 배는 아무리 커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소망의 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보다 더 절망적이고, 더 비극적인 상황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그 분이 곧, 나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절대능력! 절대주권! 이 하나님을 믿는 절대 신앙이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Ⅱ. 소속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됩니다.
본문 23절에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성도는 죄악의 도성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따로 세우신 구별된 무리,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날 죄와 허물로 인하여 영원히 죽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엡2:1).
죄 아래 팔려 죄의 종노릇하고 사탄의 종노릇 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롬8:2).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종도 아니요. 사탄의 종도 아닙니다. 자유인입니다.
이제는 소속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지위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의의 후사, 그리스도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소속의식이 확실한 자가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분다고, 바위가 흔들리겠는가? 풍랑이 인다고, 산성이 무너지겠는가?
“그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은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Ⅲ. 사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본문 24절에 “바울아 두려워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탄 배가 부서져서 밧줄로 붙들어 매고, 물이 들어와 배 안에 잠기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덮쳐도 결코 가라앉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때문입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행23:11).
망망대해, 폭풍우 속에서 배는 물속에 가라앉아도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명자는 물속에 가라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어떠한 이유로도 결코 중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행로에 질병이라는 유라굴로 폭풍이 불어 닥쳤습니까? 여러분의 인생행로에 실패라는 유로굴로 폭풍이 불어 닥쳤습니까?
그래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사명감만 있다면 그 사명 때문에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명감에 투철한 성도가 새 역사를 창조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열납하시는 제물 창세기 4장 1 ~ 12절
예로부터 인간들은 신 앞에 나아갈 때 무엇을 들고 갈 것인가? 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신은 인간의 예배의 대상인데 그 분은 무엇을 즐겨하실까?
이 신 앞에 드려지는 제물에는 그 종교의 신관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종교의 신은 성질이 괴팍스러워서 사람의 피를 좋아 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속신앙 가운데 해마다 숫처녀를 신에게 바쳤다는 설화가 있고,
심청이를 용왕신의 제물로 드려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했다는 설화들이 모두 이런 신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고대의 근동지역에서는 몰록이라는 신을 믿었는데 이 제사는 잘 생긴 어린아이를 불속에 던지는 인육제사를 드렸고, 고린도의 아데미 신전에서는 신전에서 여사제와 음란행위를 하는 예식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종교에서는 복잡하고도 장엄한 신전에서 엄숙한 의식을 집행하므로 자기들의 신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고대의 원시종교 일수록 그러한 의식을 통한 신도의 자기봉헌이 당연시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것들이 전통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이 최초로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서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 하신 사건을 중심으로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헌신과 봉헌의 자세에 대하여 생각하길 바랍니다.
Ⅰ. 하나님께서는 정성의 제물을 열납하십니다.
본문 3절에 “세월이 진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아벨과 가인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열납 하시지 않으셨는가?
어떤 주석가는 여호와는 목축의 신이시기 때문에 농경문화의 퇴폐적인 생활을 마땅치 않게 여기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아벨과 가인이 드린 제사는 속죄 제사였다.
창세기 3장에서 죄를 범한 인간이 창세기 4장에서 속죄 제사를 드렸는데,
속죄제사는 피 곧, 생명을 드리는 것이므로 곡식을 드린 가인의 제물은 속죄제물로서 합당치 않고, 양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은 합당했다. 풀이 했습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히9:22).
그러나 농경을 하는 가인은 곡식으로 드릴 수밖에 없었고,
목축을 하는 아벨은 양으로 드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피 흘림이 없는 제물의 합법성과 가치성을 인정했습니다.
레위기 2장 1절에 자원제인 소제를 드리는 자는 피 없는 곡식으로서 고운가루에 기름, 유향, 소금을 섞어서 구워서 드리고, 부쳐서 드리고, 삶아서도 드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의무제인 속죄제를 드림에 있어서도, 그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고운가루 에바 1/10을 제사장 앞에 가지고 가면, 그것을
화제물에 뿌려서 속죄 제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제물의 종류에 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열납 하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더니“라고 했습니다.
둘이 똑같이 드렸는데 무엇이 다른가?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첫 새끼란 무엇인가? 가장 귀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3장 19절에 “너희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27장 26절에도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의 것이니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밀의 첫 수확을 거두는 날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초실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은 어떤 것인가?
첫 열매, 첫 새끼입니다. 가장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곡식이냐? 양이냐? 가 아니고 누가 어떤 제물을
어떤 마음으로 드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시고” - 라고 했습니다.
드리는 아벨을 받으시고, 그 손에 들려 있는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마음과 정성을 제물에 담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물을 열납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 말씀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믿음이란 현재는 가지지 못했지만 그 소망하는 것을 이미 받은 것으로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했으니 복을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말3:10).
지금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크게 하시고 귀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성공한 줄로 믿는 것입니다(대상 29:12).
그런 점에서 믿음의 주소는 현재이기 보다는 미래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미래의 소망을 오늘에 누리고 사는 초시간적이요. 초경험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은 무엇을 믿었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물은 열납됩니다(사41:10).
Ⅲ.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제물을 열납하십니다.
신명기 23장 18절에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양이나 곡식자체가 의로운 것이 있고, 불의한 것이 있겠는가?
이 말씀은 드리는 자의 윤리적 도덕적 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거룩하십니다. 성결하십니다. 의로우십니다.
그러므로 의롭지 않은 자의 불의한 재물은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5:23).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차고, 시기로 가득차고, 거짓으로 가득차고, 탐욕과 허영과
이기주의로 가득한 인간이 아무리 값 비싼 제물을 많이 드린다 해도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다”는 말씀은 성결하신 하나님이 - 거룩하신 하나님이 - 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벨의 그러한 품성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개 같은 자의 소득이 무엇인가? 불의한 재물입니다.
남을 억울하게 해서 번 돈입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해서 번 돈입니다.
사기치고, 도적질해서 번 돈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않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나의 노력과 땀과 정성이 담겨 있는 제물을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되 “저희가 힘대로 할 뿐이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고후8:3).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께서 열납 하시는 정성의 제물을 드리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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